근 몇 년 동안 생/삶-정치bio-politique에 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잘 알겠지만 이것은 미셸 푸코가 제시한 개념이다. 그리고 근래에는 바이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의해 생기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류의 해석은, 푸코를 활용하여 논하기에는 그다지 정합적이지 않다. 장-뤽 낭시를 따라 말하자면, “생에 의해 포괄적으로 결정되고 그 통제에 전념하는 정치질서”가 이 말의 본래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너무 막연하다. 따라서 푸코를 다양한 선분들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 푸코와 들뢰즈, 푸코와 네그리, 푸코와 아감벤, 푸코와 낭시, 푸코와 아렌트 등등. 앞의 세 쌍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해 간략하게 서술할 것이기 때문에 푸코와 낭시, 특히 아렌트를 매개로 한 이 둘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아렌트는 근대란 인간적 생과 동물적 생명이 뒤섞여 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즉, 종교의 쇠퇴에 의해 피안/초월적 세계를 상실한 인간은 가능한 한 좋은 조건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의 생을 향유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게 되었다. 그러한 인간이 바로 “노동하는 동물”이다. 이때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는 동물종의 자기 관리/통제로서의 법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논의에 관해 낭시는 “과연 생이라는 말을 과거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이미 자연적인 생은 소멸했으며, 생명은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관리/통제되게 되었다. 낭시는 그것을 에코테크니ecotechnie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한다. 일체의 생명이 에코테크니 속에서 발생하며, 인간은 이제 자신의 생의 주권을 쥐지 못하게 되었다. 주권은 에코테크니 그 자체 속에 포함되며, 생과 권력은 목적성을 갖지 않은 채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 생-정치학이란 이러한, 인간이 노동하는 동물로 되고 나아가 그 생이 기술적으로 관리되는 체제 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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