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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언급할 때, 특히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기술 문화를 언급할 때, 거의 대개 유식자들은 '발터 벤야민'을 언급한다. 얼마전에 구입한 책들 사이에 보너스로 알라딘에서 보내 준 <계간 비평>의 21호(2008년 겨울)에 수록된 진중권의 글 역시 그러하다. 그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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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mass의 존재에 제일 먼저 주목한 사람은 아마 발터 베냐민일 것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사진과 영화가 대중을 역사상 최초로 예술적 수용의 주체, 예술적 연출의 주체, 예술적 창조의 주체로 만들어주었다고 지적한다. 사진과 영화가 가진 이 능력은 물론 그것들이 복제매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복제는 원본보다 열등하다'는 일반적 상식을 뒤엎고, 베냐민은 원본을 능가하는 복제 기술의 잠재성을 긍정한다. 원본이 유일물이라면, 복제는 대량생산mass production을 가능하게 해 준다. 원본이 '지금, 여기'의 현존성에 묶여 있다면, 복제기술은 '언제, 어디서라도' 원작의 모상을 갖다 놓을 수 있다. 때문에 원작이 본질적으로 소수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면, 복제는 대다수 대중의 공유물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복제의 기술과 더불어 예술은 비로소 매스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이 될 수 있었다.
"독자와 필자의 구별이 신분적인 것에서 기능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베냐민의 말은 대중매체가 가진 민주주의적 가능성의 긍정이라 할 수 있다. 일간신문의 독자투고란을 보고 내린 베냐민의 이 성급한(?) 진단은 오늘날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현실이 되었다. 독자는 필자가 되고, 기자가 되고, 이미지의 작가가 되고, 마이크로 영화의 감독이 되더니, 이제는 아예 방송사가 되었다. 예를 들어 등단하지 않은 소녀가 가장 대중적인 작가로 부상한다. 평범한 시민이 인터넷매체의 기자로 활약한다. 예술적 훈련을 받지 않은 대중이 디카와 포토샵으로 패러디나 몽타주를 제작하고, 디지털캠코더와 소프트웨어로 소형영화(UCC)를 찍는다. 촛불집회 때에는 아예 노트북을 들고 거리를 나와 현장중계를 하는 1인방송사를 차렸다.
베냐민은 '자신을 연출하는 소비에트의 민중'에 관해 이야기한다. 선택된 사람들만 무대에 올라가는 연극과 달리, 영화에선느 누구나 길거리를 다니다가 카메라에 찍힐 수가 있다. 특히 소련의 혁명영화에서는 종종 노동하는 대중이 현장에서 곧바로 예술적 영웅으로 부각된다. "오늘날의 인간은 누구나 촬영되고 싶은 욕구를 제시할 수 있다"는 베냐민의 말은 아마도 당시에 대중화된 사진술(스냅사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진과 영화는 대중의 지각방식을 변화시켰다. 현대의 대중은 사물에서 아우라를 벗겨내고 싶은 욕망, 말하자면 복제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디지털기술과 더불어 그 욕망은 극한에 도달한 듯하다. 오늘날 대중은 아예 카메라를 늘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베냐민이 말한 '자기를 연출하는 소비에트의 민중'은 핸드폰 카메라로 셀카를 찍는 소비사회의 대중 속에서 그 자본주의적 대응물을 발견한다."(128-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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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었다. 벤야민이라는 표기 대신 베냐민이라는 진작부터 그렇게 표기되었어야 할 '베냐민'이라는 표기를 사용한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류의 설명 방식이 진중권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의 논법은 아우라와 복제의 구분, 대중의 문화적, 예술적 존재로서의 부각, 지각양식의 변화 등등의 순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런 이해 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나는 예전부터 아니, 왜 아우라가 상실되었다고 했는데, 그런 아우라가 상실되고 복제에 불과한 것에 대중들이 열광한단 말야? 대중들이 바보라는 거야? 이 따위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정말 대중들은 아우라가 없어진 것, 소수엘리트들처럼 아우라가 아니라 복제기술에 열광하는 그런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이것은 "대중의 존재에 제일 먼저 주목한 사람"이라는 말과 정반대의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닐까?(벤야민이 대중의 존재에 제일 먼저 주목했다는 말은 일종의 '개그'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아우라가 있는 원본 대신에 아우라가 상실된 복제물에 열광하는 대중, 이것은 대중에 대해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바와는 정반대로, 대중을 어리석다고 보는 전제를 그대로 긍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고민해야 하는 것은, 벤야민이 대중을, 또는 아우라와 복제의 관계를 정말로 이렇게 이해했을까? 하는 질문 아닐까?

그러던 차에 최근 일본의 주목받는 신예 문화평론가인 히로키 아즈마의 글 하나를 읽게 되었다. <存在論的、広告的、キャラクター的>(존재론적, 광고적, 캐릭터적>이라는 글인데, 원문을 보려면 링크를 클릭하면 될 것이다. http://www.hirokiazuma.com/texts/character.html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내용의 일부를 저자와 아무런 협의없이 바꾸었다. 내용의 일부라고는 하나 저자가 제시한 예를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일 뿐, 저작권 침해 의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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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살고 시대는 복제기술의 시대이다. 무엇이든 복제할 수 있다. 벤야민이 1936년에 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일본어로는 <복제기술 시대에서의 예술작품>)이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는데, 거기에서 벤야민이 다룬 것은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문제였다. 하나 밖에 없는 원본(오리지날)에는 아우라가 있다. 가령, 유화 그림에는 아우리가 있다. 반면, 복제된 것에는 아우라가 없다. 그림을 인쇄하면 아우라기 없어진다는 얘기이다. 아우라가 없어지면 모든 것은 시뮬라크르로서 소비된다. 그것이 복제기술의 시대라는 것이다. 벤야민이 아직 '시뮬라크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주장한 것은 대개 이런 얘기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캐릭터(아바타)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러한 벤야민의 지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캐릭터 세우기'가 '복제기술 시대의 아우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인간에게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인간은 복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러스트의 캐릭터는 얼마든지 복제 가능하기 떄문에 이것에는 아우라가 없다. 그런데 '캐릭터를 세우게' 되면, 사람들은 그 복제로부터 아우라를 느끼게 되어 버린다.
가령 게임 소프트웨어의 캐릭터 등에는 사실 아우라가 있을리 없다. 판매되는 어떤 CD이든 똑같은 캐릭터가 들어 있으며,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고 여기저기에 동일한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라고 해 봤자 그것은 위조품이 불과하다. 이른바 '캐릭터 키우기 게임'의 경우 물론 각각의 캐릭터는 주인이 가르친 말에 따라 다소는 다른 얘기를 하게 되지만, 그 게임의 대화나 그림일기의 변주variation 역시 프로그램의 계산 범위 내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실상 이미 미리 결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는 굳이 그 게임 캐릭터에 이름을 붙이고 감정이입을 하고, 거기에 독특한 아우라가 머물게 하는 것이다. 복제 가능한 것을 복제 불가능하게 하는 것, 복제를 복제인 채로 두면서도 원본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캐릭터 문화의 핵심에 있는 욕망이다.
복제기술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세계는 원본으로 가득차 있었다. 원본에는 아우라가 있기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복제 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시뮬라크라 투성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인식이 단번에 퍼진 것이 일본에서는 1980년대이다. 모든 것이 이미 위조품이기 떄문에 더 이상 진짜를 찾지 않아도 좋다고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반대로 1990년대에는 그런 아이러니컬한 태도로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여러 사회 모순을 통해 밝혀졌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캐릭터 키우기 게임"의 캐릭터가 복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그에게 아우라를 갖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절실한 필요가 캐릭터 문화의 기초에 있다. 게임 캐릭터 자신에게는 아우라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일러스트, 또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무리 제작자가 자필로 일러스트를 그렸더라도 그것이 복제 가능한 것인 이상, 아우라가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단순한 일러스트가 아니라 '캐릭터'가 된다는 것은, 그 생산자가 부여하지 않은 아우라를 소비자인 우리가 그(?)에게 강제로 부여한다는 것이다. 즉, 저기든 여기든 몇 십만개의 캐릭터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캐릭터는 다르다"고 굳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감정이입은 이미 '어디서든 함께'에 한정되지 않고, 일상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크기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에 아우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굳이 거기에서 아우라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나 현실 도피가 아니다. 이 "굳이"가 없으면 복제뿐인 이 황량한 사막에서는 우리가 결코 살아갈 수 없다.
벤야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가 '복제기술'이라고 명명한 것은 사실 영화나 축음기, 즉 이미지의 복제기술이다. 상징(말)이라는 것은 훨씬 전부터 복제될 수 있었다. 인쇄기가 그렇다. 그렇지만 구텐베르크의 출현으로 인해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왜, 어찌하여 이미지의 복제가 문제로 되었을까? 그것은 사실 아우라의 유무를 둘러싸고, 전에는 상징과 이미지 사이에 엄격한 경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세계는 원리적으로 복제 가능하다. 가령 '나무'라는 말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거기에는 아우라가 없다. 반면, 이미지의 세계, 지각 가능한 것의 세계는 복제불가능하며 아우라가 있다. '나무'라는 말에는 아우라가 없으나 지금 눈앞에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는 아우라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계가 19세기까지는 명확하게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영화나 축음기가 발명되고, 그 후 복제기술이 더욱 발전했으며, 이미지는 점점 더 복제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아우라가 있는 것과 아우라가 없는 것의 경계가 무너져 버렸다. '시뮬라크르의 전면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미, 이후에는 원본이 없고 모든 것이 교환가능한 사막과도 같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것이 아우라가 없는 등가의 사물이 되었을 때야말로, 사람들은 거기에서 자기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이미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깨져버렸기 때문에, 눈앞의 시뮬라크 속에서 억지로 '원본과도 같은 것'을 찾아내어 자기 나름의 감정을 붙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가령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눈앞에, 손으로 닿을 수 있는 육체(현실), 텔레비전 속의 탤런트(먼 현실), 컴퓨터 화면 안의 게임 캐릭터(허구)가 있는데, 이 세 가지에 어떤 "상이한" 감정이입을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뚜렷했던 시대에는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캐릭터가 첫번째에 오고, 육체는 맨 마지막으로 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이미 현실이든 허구든 모두 같은 평면에 놓고 다른 기준으로 다루는 다른 세계관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캐릭터 키우기/세우기'라는 말은 감정이입의 순위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 그래서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캐릭터 세우기'가 되어 있지 않으면 컴퓨터의 프로그램보다 감정이입의 정도가 뒤떨어지게 된다. 즉, 캐릭터란 시뮬라크르만 가득찬 세계에 감정이입의 지점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훅'인 것이다. <중략>
따라서 캐릭터란, 말하자면 '아우라가 있는 복제'이다. 가령 어떤 캐릭터를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그 캐릭터만은 아우라가 있는 원본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얘기이다. 분명 몇 주 지나지 않아 그 캐릭터는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후에도 "저 녀석은 이제 어떻게 될까? 어딘가에 있을 거야"라는 상실감은 남아 있다. 상실감이 있다는 것은 교환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캐릭터는 복제인데 '이 캐릭터'는 교환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캐릭터 세우기란 교환가능한 대상을 교환 불가능하게 하는 감정의 작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자신이 기르는 개는 다른 개와 다르게 보이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메커니즘이다. 개는 살아 있고 '캐릭터'는 살이 있지 않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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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었으면 나머지 생략된 부분, 특히 인간과 복제에 관해서도 나름의 논리적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굳이 번역하지 않는다. (사실은 귀찮다.)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면, 벤야민의 아우라/원본과 복제의 관계를 가지고 문화현상에 대해 설명을 하려면 띄엄띄엄, 논리적 비약을 왕창 하면서 나아갈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아우라가 상실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의 '아우라 만들기'를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드러내야만 벤야민이 <대중의 존재에 제일 먼저 주목한 사람>이라는 말이,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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