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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에 있어서 ‘철학’과 ‘정치’ ― 마이클 J.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들>을 읽다

by 상겔스 201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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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롤즈의 전환에 대한 응답
이른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출발점으로 간주되곤 하는 마이클 샌델의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의 독자가 그의 두 번째 저작인 <민주주의의 불만 : 미국에서 공공철학의 연구>(1996)를 읽게 되면, 무엇보다도 우선 글쓰기 스케일에 큰 변화가 있다는 점 때문에 크게 놀랄 것이다.<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는 철학적인 개념 분석을 중심으로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을 시도한 책이다. 고찰 대상은 존 롤즈의 <정의론>(1971)이라는 단 한 권의 책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더욱이 논의의 대부분은 롤즈의 ‘자기’(self) 개념―샌델이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라고 비판했던 것―의 타당성과 한계를 묻고 있다. 이에 비해<민주주의의 불만들>의 경우, 철학적인 분석은 뒤로 물러나고 롤즈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역시 별로 없다. 오히려 미국의 대법원 판례나 연방정부의 경제정책 등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의 법적․정치적․도덕적 문제를 중요한 고찰대상으로 삼으며, 이것들의 변천과 해석을 둘러싸고 건국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는 장대한 (두 가지) 역사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변화를 초래한 것이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에서 샌델의 주요 비판대상이었던 롤즈의 이론적 전환이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롤즈는 1980년대에 자기론(자아론)에 대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수용하고, <정의론>의 ‘칸트주의적 자유주의’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로 논리적 전환을 감행했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정통성의 기반을 자기(자아)의 존엄이나 개인의 선택 능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철학적인 자기(자아)에 관한 논의를 회피하고, 오히려 서구 입헌민주주의 전통의 ‘정치’ 문화 자체에서 그 정통성의 근거를 찾는 것이었다. 샌델의 이 책은 이러한 롤즈의 방향전환에 대한 극히 대담한 반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샌델은 롤즈의 ‘이론으로서의 자유주의’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문화 전통에서의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으로서의 자유주의’의 정당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롤즈의 시도가 최종적으로 실패했음을 증명하고자 하며, 현실의 법적․정치적 제도와 실천을 뒷받침하는 ‘공공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여주고, 나아가 그 대안까지도 제시하려는 것이다.


2. 두 개의 공공철학, 두 개의 역사
그렇다면 이제 <민주주의의 불만들>에서 샌델이 제시하는 두 개의 공공철학과 두 개의 역사적 이야기의 이론적 틀을 간결하게 정리해 보자. 샌델에 따르면, 미국 역사에서 자유주의는 결코 유일한 공공철학이 아니었다. 그가 자유주의의 경쟁자로 제시하는 것은 공화주의(republicanism)이다. 공공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는 (1) 자유의 이념을 목적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자기/자아의 선택의 자유로 이해하고, (2) 옳음(正)을 항상 선(善)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파악하며(선에 대한 정의 우선성, priority of rights over goods), (3) 정부는 항상 다양한 선(善)에 대해 중립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공화주의는 (1) 자유를 자기통치(self-government)로 이해하고, (2) 공동체에서 공유될 수 있는 공동선(common goods)을 중시하며, (3) 시민의 덕(徳)을 육성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간주한다.
샌델은 미국의 역사를 이러한 두 개의 공공철학의 투쟁, 그리고 어느 한쪽(자유주의)의 승리와 다른 쪽(공화주의)의 쇠퇴의 역사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중심부분에서는 두 개의 역사적 이야기가 언급된다. 제1부인 "절차적 공화국의 헌법"(The Constitution of the Procedural Republic)에서는 미국 헌법을 둘러싼 논의와 판례의 변화 ― 헌법에 대한 공화주의적 해석으로부터 자유주의적 해석으로의 변화 ― 가 분석된다. 건국 당시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신앙이나 언론의 자유, 프라이버시의 권리 등은 시민의 자기통치를 위해 필요한 도덕성을 유지하고 육성하는 관점에서 제한되거나 옹호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방재판소는 이러한 자유나 권리를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절차적인’(procedural) 차원에서 해석하고, 정부는 선에 대해 중립적일 것을 요구했으며, 그리하여 도덕적 판단을 회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예를 들어 1973년 연방재판소 Roe vs. Wade 판결).
제2부 "시민권의 정치경제"(The Political Economy of Citizenship)에서는 실제의 정치․경제적 논의나 연방정부의 정책에서의 변화가 다뤄진다. 혁명 당시부터 혁신주의의 시대, 나아가 뉴딜 초기만 하더라도 정치적․경제적 정책에서는 여전히 시민의 덕을 육성하는 것이 목표였다(예를 들어 제퍼슨의 농본주의․임금노동을 둘러싼 논의). 또한 민주적 자치의 장애물이 된 권력 집중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가 정치경제학의 중심적 논점이었으며, 건국 초기부터 19세기 중반에는 연방정부로의 권력집중 대신에 주(州)로의 분권이, 혁신주의의 시대에는 대기업(big business)에 의한 자본 집중에 맞서는 반(反)트러스트법으로 대표되듯이 권력과 자본의 분산이 목표였다. 그러나 뉴딜 후기에 도덕적 문제를 괄호에 넣고, 그 대신 정부의 재정지출에 의해 정치․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케인지안 혁명’이 출현함으로써 덕의 육성과 권력의 분산을 목표로 한 공화주의적 공공철학과 정책은 폐기되고, 정치경제학의 초점은 ‘시민권의 유지와 육성’에서 ‘성장과 분배적 정의’로 이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양자의 역사적 이야기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승리가 거의 결정적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의 한계가 노정된 것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불만’의 시작이기도 했다. 자유를 개인의 선택의 자유로만 이해하고, 공동체의 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적 전통이 패배함으로써 초래된 시민의 자기통치의 상실과 공동체의 쇠퇴에 대한 ‘민주주의의 불만’에 답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70년대 이래, 미국의 내적․외적인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고조된 ‘민주주의의 불만’에 편승해, 공화주의적 수사학에 호소하여 도덕적․정치적 공간을 지배했던 것은 조지 왈라스(George Wallace),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제리 팔웰(Jerry Falwell) 등으로 대표되는 강고한 보수주의였다. 이러한 근래의 자유주의의 혼미와 보수주의의 대두에 대해 샌델은 공공철학으로서의 공화주의를 보다 다원적인 형태로 소생시킬 필요성을 역설한다.


3. ‘롤즈 비판’을 넘어서는 시도
이 글의 분량상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활용하는 그의 실증적 분석을 낱낱이 검증할 수 없다는 아쉬움은 뒤로 하고, 이 책에 대해 평가와 비판을 해 보자.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에서는 철학적 논의(예를 들어 자기/자아와 선, 또는 자기/자아와 공동체의 관계성에 관한 고찰)와 정치적 논의(예를 들어 시민의 덕의 육성이나 문화의 보호에 있어서의 정부의 역할에 관한 문제)라는, 두 가지 차원의 논점이 혼재되어 있음이 자주 지적되었다(Taylor, 1995, pp.181-203). 이에 대해 롤즈는 자유주의의 정당성의 기반을 ‘철학’에서 ‘정치’로 전환시킴으로써 대응하고자 했다. 즉, 자기/자아나 공동체의 문제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피하고, 정치적 전통에 의거한 ‘상호중첩된 합의(overlapping consensus)’로 논의의 초점을 이행시킨 것이다. 그러나 샌델이 비판하듯이, 실제로는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상호중첩된 합의’와 사회의 기본구조에 있어서의 ‘안전성’이라는 이름하에 종교적 관용, 낙태의 권리, 또는 재화의 분배와 차등원리의 문제 등 극히 정치적인 논의까지도 피해 버렸다.
이에 반하여 샌델은 철학적 논의와 정치적 논의, 이론적 고찰과 실증적 분석을 연관시킴으로써 ‘철학에서 정치로’라는 롤즈가 본래 목표로 삼았던 논쟁 영역의 전환을 충실하게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자아나 자유의 문제에 관한 철학적 개념분석과 가족법의 판례나 노동정책에 관한 역사실증적 분석, 또는 칸트, 아렌트, 롤즈 등의 이론에 대한 해석과 제퍼슨, 잭슨, 로버트 케네디 등의 정책에 대한 해석을 맞물려 논의하는 샌델의 자세는 과거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틀을 넘어선 새로운 논쟁 영역을 개척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롤즈가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한 미국의 정치문화에서의 다양한 갈등을 분절화함으로써, 그 전통에 정당성의 근거를 둔 롤즈 등의 자유주의에 대한 중대한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저작이 발간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에 관한 고찰은 칸트 해석이나 프라이버시의 권리의 범위 등 ‘철학’적 논의뿐만 아니라 현실의 판례나 정책을 대상으로 하여 시민의 덕이나 가족의 역할 등과 같은 ‘정치’적이고 실질적인 논의를 행하는 것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4. 공화주의는 현대의 공공철학이 될 수 있는가?
이처럼 샌델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시도에 대해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관점이 교착하는 새로운 논쟁의 차원을 개척했다는 것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화주의를 공공철학으로서 부흥시킨다는 그의 정치적․실천적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첫 번째 원인은, 마이클 린드가 지적하듯이(Lind, 1996), 70년대 이래, 어쩌면 공화주의를 대신하여 새로운 공공철학으로서 출현한 보수주의와의 차이가 충분치 않다는 점에 있다. ‘철학에서 정치로’라는 논쟁의 전환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형이상학적 논의를 전개했던 아카데믹한 영역으로부터,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전개했던 현실정치Real Politik의 세계에 발을 담궜다는 것도 의미한다. 주지하듯이 미국의 보수주의는 자유지상주의와 도덕주의를 동시에 주장하는 특이한 보수주의인데, 공민권 운동에서 공화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고, 재화의 분배와 복지를 옹호한다는 점 등에서 그의 ‘비-보수주의적인’ 공화주의의 독창성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미국에서는 샌델의 공화주의, 또는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대립을 극복하는 제3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상으로서도 인식되고 있다(Etzioni, 1996).
그러나 샌델의 이 책에서는 현대적인 정치적 문제이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정치적 논의에서 가장 중대한 초점이 되고 있는 젠더와 에스니시티의 문제에 관해 공화주의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은 거의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치명적 결함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샌델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하는 존재(storytelling beings)’일 수도 있지만, 과거의 공화주의가 그랬듯이, 공공철학은 늘 당대의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에 응답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샌델이 킹 목사의 사상을 공화주의적인 것으로 인용하고 있듯이, 젠더나 에스니시티를 둘러싼 담론이나 운동에 일종의 ‘적극적 자유’의 요소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 가치를 “권리-이야기rights-talk”로 환원시켰던 자유주의자의 전략은 그 도덕적․정치적 가능성을 왜소화해 왔다는 그의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공화주의가 자유주의보다 더 젠더나 에스니시티의 문제에 관해 민감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샌델 자신도 인정하듯이, 역사적으로 공화주의는 인종․성별․계급에 의한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도 기능해 왔으며, 샌델이 쇠퇴의 역사로서 그린 공화주의의 패배와 자유주의의 승리의 역사는 여성이나 소수자에게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해방의 역사이기도 했다. 오히려 공화주의에는 샌델이 제시하는 위의 세 가지 특질에 덧붙여 (4) 퍼블릭-프라이버시(공과 사)의 편협한 구별, (5) 정치문화의 동질성의 전제라는 특질이 있으며, 이러한 특질에 의해 역사적으로 배제와 억압을 정당화한 이념으로서 기능해 왔던 것이 아닐까?
샌델은 배타적․강제적인 루소적 공화주의와 구별된 다원적인 토크빌적 공화주의를 현대적인 공화주의로 제시하고,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월마트Wal-Mart와 같은 거대쇼핑몰의 진출에 반대하는 sprawlbusters 운동 등, 현대에서 공화주의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운동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도 공화주의의 특질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분절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공민권 운동의 성과인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를 공동선이라며 옹호하는 것이 가능할까? 싱글맘 가정에서 시민의 덕은 육성될 수 있을까? 보수주의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명쾌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편, 자유주의자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이를 변호하는데 주력할 것이며, 공동선이나 시민의 덕과 같은 개념을 폐기할 것이다. 샌델이 말하는 토크빌적 공화주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보수주의자와도 자유주의자와도 다른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공화주의가 현대에서 자유주의와도 보수주의와도 다른 공공철학으로서 부흥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현대적 문제에 대한 독자적이고 구체적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그 때에야 부흥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공화주의의 특질, 특히 위에서 서술한 (4), (5)의 특질에 관한 ‘정치․철학’적 고찰이 다시 필요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공동체주의를 한편으로 단순히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철학적 이론으로서만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방식의 보수적인 정치사상으로 찬양 또는 비판하는 경향이 아직 강한 한국의 많은 논자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철학적 분석을 통해 구체적인 정치적 대안을 모색하는 그의 대담한 시도는 실천적 정치이론의 참된 가능성이라는 것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Michael J. Sandel (1996), Democracy’ Discontent: America in Search of a Public Philosophy, Cambridge: Belknap Press.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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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zioni, Amitai (1996), The New Golden Rule: Community and Morality in a Democratic Society, New York: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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