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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읽기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발췌

by 상겔스 2011.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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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 발췌


1. “오늘날 ‘68년’이라고 하면, 전세계 어디서든 공통된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한 동일시를 할 수 있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 내용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구좌익 운동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으로 괴멸당했습니다. 60년대 중반부터 공민권운동(흑인해방)과 베트남반전운동을 계기로 하여 좌익운동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구좌익과 관계가 없는 신좌익이었습니다.”(p. 12)

2. “그런데 일본의 ‘68년’에는 이런 다의성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동시성이랄까, 서양과 공통된 문제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60년의 안보투쟁은 1955년부터 시작된 고도경제성장의 한복판에서 생긴 것입니다. 64년에는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농업인구의 비율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일본은 절반은 농업국가였습니다. 60년 이후 대학 진학률이 급격하게 올라갔습니다. 대학생이 엘리트였던 시대가 없어졌습니다. 포스트-산업사회로 이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68년’은 이런 변화의 결과로 생겼던 겁니다.”(pp.16-17)

3. “문학에는 재능과 동시에 노동이 필요했다. 재능과 동시에, 꾸준히 할 필요가 있다.”(p.24)

4. “프랑스의 ‘현대사상’은 어떤 의미에서 68년 5월 혁명의 좌절 때문에 문학에서 활로를 찾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문학적인 것이었습니다.”(p.25)

5. “또한 그때까지는 계급투쟁이 중시되었고, 젠더와 소수자 등의 문제는 이차적, 부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68년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부정되었습니다. 또한 국가와 같은 거시 정치나 권력이 중시되었는데, 미시 권력 또는 미시 정치학이라는 영역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것은 68년 이후의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전환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거시 차원, 국가나 네이션이라는 차원을 간단하게 정리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은 푸코죠. 푸코는 알튀세르라기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그람시의 ‘헤게모니’라는 개념으로부터 배웠다고 생각합니다만, 국가를 폭력장치일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보려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인 맑스주의자들과는 다르며, 국가가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성립한 권력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교육적 장치 속에서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권력은 오히려 동의에 기반한 힘(헤게모니)로서 있다고. 그래서 그는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닌 듯한 권력, 보이지 않는 미시 권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른바 거시 정치를 대신하여 미시 정치학을 강조했던 셈입니다.

이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투쟁의 역점이 계급투쟁에서 페미니즘, 게이, 그 밖의 소수자 문제로 이행했을 때, 이런 견해가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국가에 관한 견해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람시도 그렇습니다만,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맞서 존재한다는 점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국가가 성립했던 것은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계속적으로 지배함으로써입니다. 공동체가 확대하여 국가로 전화하거나 그 내부에서 계급투쟁이 생겨 국가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pp.30-32)

 
6. “즉, 한 국가가 어떤 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것은 바깥에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p.33)


7. “예를 들어 「의미라는 병」이라는 에세이(1972년)는 맥베스론인데, 연합적군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60년대 초부터 생각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안보투쟁 후에, ‘맑스주의는 끝났다’는 합창이 있었습니다. 70년대 이후에도 역사에 목적은 없다, 의미는 없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80년대에는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풍미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에는 그것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의미라는 병」은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종교적 원리주의가 있겠죠. 향후에도 ‘의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p.49)

8. “이념을 필요로 한 시대는 전혀 끝나지 않았습니다.”(p.70)

9. “이 시기의 ‘현대사상 붐’은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프랑스 철학의 붐입니다. 왜 그것이 유행했는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현대사상은 일종의 정치적 좌절의 표현이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관념에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는가. 1968년 파리의 5월 혁명에서 화장실에 쓰여진 낙서에, ‘상상력이 권력을 잡는다’라는 슬로건이 유명해졌는데, 오히려 상상력이 권력을 잡았던 것은 5월 혁명이 패한 뒤입니다.

어떤 상상력인가? 문학이 아닙니다. 문학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철학이 문학에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데리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중략) … 이미 전쟁 전의 하이데거가 그랬습니다. 그는 시를 철학보다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랬던 것은 나치에 참가하고 그것에 실망했던 후였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나치 정치가 아니라 문학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처럼 정치적 좌절·불가능성 때문에 문학으로 향하는 것은 그다지 보기 드문 것은 아닙니다. 그 경우 말의 힘에 빈다는 것이 됩니다. … (중략) …

그러나 이것은 독일관념론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18세기 말에, 영국에는 발달한 자본주의가 있으며, 프랑스에는 정치적 부르주아 혁명이 있었지만, 독일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생겼던 것은 관념적 혁명입니다. 이것은 어중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독일 관념론은 그 이후 철학적 혁명의 모델로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칸트, 피히테, 헤겔, 맑스 등과 같은 철학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좌절과 무력감 때문에 관념론적 혁명으로 향하는 예는 다름 아닌 일본에도 있습니다. 교토학파가 그렇습니다. … (중략) …

사실 프랑스에서는 전후에, 독일의 하이데거를 도입함과 더불어 독일 관념론을 도입했습니다. 독일은 전쟁에 졌지만 철학적으로는 전후 프랑스를 점령했던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의 언어와 스타일이 기존의 프랑스적인 철학·문학(발레리로 대표되는)을 대신했습니다. 일본에 들어왔던 프랑스의 ‘현대사상’은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의외로 일본의 과거의 담론과 친화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사상이 유행할 때에는, 현실의 정치적 좌절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보이더라도, 그 근본에는 무력감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소 냉전 구조 속에서는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이 없다. 때문에 그것을 사변적인 상상력에서 찾게 된다. 그 때문에 철학이든 무엇이든, 그것은 문학적인 것이 됩니다. 일본에서도 70년대 이후, 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가 우위에 섰던 것은 그 때문이죠.”(pp. 58-60)


10. “그래서 91년에 소련이 현실에서 붕괴하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은 오히려 소련의 존재에 의존했다는 점입니다. 소련의 붕괴로 구좌익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은 신좌익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때까지 신좌익은 소련이나 구좌익을 비판하면 되었다. 서양 형이상학의 탈구축이라든가, 관념적 논의를 하면 되었다. 즉, 신좌익은 소련 또는 구좌익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것이 붕괴할 것 같지 않았기에 편했다. 그것을 비판하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 붕괴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80년대에 풍미했던 ‘현대사상’이 급격하게 리얼리티를 잃었던 것도 그 때문이죠. 예를 들어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의 탈구축, 또는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언뜻 보면 서양의 역사적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웅대한 물음처럼 보입니다만, 이것이 리얼리티를 가졌던 것은 현실에서,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라는 이항대립, 즉 냉전구조를 반영했기 때문입니다.”(pp. 65-66)

11.  “저는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윤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는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지향하는가)?”(p. 71)

12.  “대학의 민영화라는 것은 실제로는 국영화입니다. 그때까지의 대학은 국립이면서도 실제로는 문부성에서 독립했습니다. 즉, 중간세력이었습니다. 민영화에 의해 이러한 자치가 박탈당했습니다. 사립대학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국가의 재정적 원조의 증대와 더불어, 국가에 의한 통제가 강화되었던 것입니다.”(p. 82)

13.  “근대의 주권국가라는 개념은 실제로는 소수의 대국(大国)에만 들어맞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는 다른 국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국가는 존속하기 위해서라면 연합이나 종속을 마다하지 않습니다.”(p. 129)


14.  “공동체로부터 일단 분리된/벗어난 개인이 아니라면 타자와 연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고립의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생각이 점점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던 것은 1990년대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당시까지 있었던 다양한 공동체, 중간단체와 같은 것이 일제히 해체되거나 송두리째 뿌리뽑혔기 때문입니다. … (중략) …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개인이라는 것은 일정한 집단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사태에 도달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떤 집단인가가 중요합니다.”(pp. 145-146)


15. 역사의 120년 주기설 도표.

‘근대세계체제의 역사적 단계’ 또는 ‘세계자본주의의 단계들’

1750~

1810

1810~

1870

1870~

1930

1930~

1990

1990~

세계자본주의

후기중상주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국가

영국

미국

경향

제국주의적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적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적

자본

상인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

국가독점자본

다국적자본

세계상품

섬유산업

경공업

중공업

내구소비재

정보

국가

절대주의왕권

국민국가

제국주의

복지국가

지역주의

1789

프랑스혁명

↓↑

1795

칸트 영구평화를 위해

1848

1917

러시아혁명

↓↑

1920

국제연맹

1968


16.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개별사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만, 그것과 같은 것을, 몽테스키외에게서 빌려 중간세력이라고 불렀습니다. … (중략) … 그는 서양에서 ‘학문의 자유’라는 전통을 만들었던 것은 진보파가 아니라 오래된 세력, 중간세력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국가가 교육의 권리를 장악하는 것에 교회가 저항했기 때문에, 학문의 자유가 성립했다. … (중략) …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근대화 속도의 비밀은 봉건적=신분적 중간세력의 저항이 천박하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중간세력이 약한 곳에서는 개인도 약합니다. 1990년대에 일본 속의 중간세력, 중간단체가 소멸했습니다. 국노(国労), 창가학회, 부락해방동맹 …. 교수회 자치를 가졌던 대학도 그렇습니다. 이런 중간세력은 어떻게 으깨진 것인가? 미디어의 캠페인에서 일제히 비난받았던 것입니다. 봉건적이고 불합리하며 비효율적이다, 이것으로는 해외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pp. 148-149)


17. “일본에서 중간세력이 거의 소멸했던 것은 2000년입니다. 그래서 고이즈미 정권이 나온 것입니다. 더 이상 적은 없다. 그는 중간세력의 잔당을 ‘수구세력’이라고 부르며 일소했던 것입니다. 몽테스키외가 중간세력이 없는 세계는 전제국가가 된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전제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그 한 가지 예가 일본에는 시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 (중략) … 주권자인 국민은 어디에 있는가? 대의제에서 국민은 이른바 ‘지지율’이라는 형태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통계학적으로 처리되는 ‘유령’적 존재이다. … (중략) … 대의제가 귀족정이라는 것은 오늘날,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정치가의 유력자는 2세, 3세, 또는 4세입니다. 그들은 각 지방의 영주와 같은 것입니다. … (중략) … 현재의 일본은 국가관료와 자본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제국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죠. … (중략) … 민주주의는 의회에서가 아니라 의회 밖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시위와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pp. 150~152)

 
18. “어소시에이션의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인터넷은 그것을 조장하는 것처럼 기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 같은 곳에서는, 인터넷은 ‘원자화하는 개인’의 유형을 증대시킬 뿐입니다. … (중략) … 일단, 시위가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어소시에이션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옛날, 시위가 있었던 것은 결국 노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이죠. … (중략) … 그래서 어소시에이션을 창출하는 것, 그것이 특히 일본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단독자)는 그 속에서 단련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창출되면 좋습니다. 많은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죠. 부족이 강하고 종파가 강하다. 에스닉 조직도 강하다. 거꾸로 일본에서는 좀 더 ‘사회’를 강하게 할 필요가 있죠.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pp. 15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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