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1강 질의 응답 부분













질의응답 73




Q : ‘구체적 질서’란 어떤 이미지인가요? 


A : ‘구체적 질서’라는 것치고는 그다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전체 인류라든가 전체 세계에 똑같이 통용되는, 보편적 질서가 아니라, 그 민족이라든가 지역에 고유한 ‘질서’로, 법적인 제도들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학이나 정치학에서 종종 ‘질서’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이것은 매우 추상적인 의미밖에는 갖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거기에 대항해 ‘구체성’을 강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켈젠(1881-1973)이라면, 수학에서 최초로 공리가 설정·규정되고, 이로부터의 연역에서, 체계가 전개되는 것과 똑같이, 처음에 설정된 ‘근본규범 Grundnorm’으로부터 법질서가 논리적·단계적으로 도출된다는 식으로 상정합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켈젠은 근본규범의 내용은 묻지 않는 셈인데, 슈미트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정치적 공동체를 만드는 ‘구체적 질서’에 맞지 않는 것은, ‘근본규범’이 될 수 없으며, 수학처럼 추상적 논리만으로 법이 체계화되고 안정화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슈미트 연구자로부터 ‘구체적 질서’론은 경관법(景観法)의 문제와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이나 강 등의 자연 경관에 어울린 시가지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과 적합하지 않고 오히려 파괴하는 건물을 거기에 만드는 것은, 설령 민법상의 권리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허용되는가를 생각할 때, ‘구체적 질서’론이 살아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Q : 켈젠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지만, 모두가 사회계약적으로 합의해서 영(0)에서 결정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군요. 


A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합의에 의해, 어떤 질서에서도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대전제입니다. 


 아까 얘기한 낭만파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을 다시 뒤집은 것이, 슈미트 자신의 ‘질서’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낭만파는 ‘민족’과 ‘역사’를 버추얼화하고, 자신들의 시작(詩作)의 도구로서 자의적으로 이용합니다. 그에 반해 그 자신은 버크, 드 메스트르, 보날에 의거해, ‘실재하는 민족’, ‘실재의 역사’에 입각해 사고하려고 합니다. 그런 발상이 ‘구체적 질서’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는 일반적으로 ‘결단주의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단주의’라고 말하면, 영(0)에서 어떤 것에서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결단’한다는 듯이 다뤄지기에, 켈젠의 ‘근본규범’론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정말로 무(無) 속에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질서’를 지향하는 결단인 것 같습니다. 



Q : 그런 흐름에서 듣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구체적 질서론과 결단주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상반되는 듯합니다. 구체적 질서론은 주체가 선택한다는 이미지가 아니죠. 


A : 슈미트 속에서도 ‘결단’과 ‘질서’의 관계는 꽤 변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만, 아마도 구체적 질서는 ‘있다’지만, 확실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있었다’지만, 무너져버렸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것을 재발견하고, “이것이 질서다!”라고 ‘결단’하고 ‘질서’를 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이데거와 같은 느낌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존재 자체로부터의 요청에 의해, 본래적 존재방식으로 [나아가려고] “각오하게 만드는 entschlossen” 상태에 있지만, 보통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기투 entwerfen’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입니다. 슈미트에게도 그와 같은, 스스로가 본래 속해 있는 ‘질서’를, ≪주체≫적으로 선택한다는 발상이 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상이한 수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고 있기에, 신비적인 분위기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슈미트가 좌파계열의 ‘결단주의’의 화신이라고 말해야 할 조르주 소렐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소렐은 기성의 부패한 질서를 파괴하는, ‘신화’에 이끌려진 ‘폭력’을 찬양한 것인데요, 슈미트는 신학적 차원으로까지 파고든 ‘결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렐처럼 좌파의 혁명론도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 메스트르, 보날은 가톨릭적 질서를 지키는 방향으로 ‘결단’한 반면, 그것을 일단 파괴하고 새로운 신화적 질서를 지키는 방향으로 ‘결단’하고자 했습니다.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적이지만 ‘앗, 들켜버렸네’라는 것입니다. 



Q : ‘구체적 질서’도 낭만주의의 세계관처럼 있지도 않은 이상이라는 건가요? 


A :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슈미트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죠. 그는 가톨릭적 질서에 상당하는 것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으며, 스스로가 의거하는 ‘질서’를, 적어도 가톨릭 → 독일민족 → 유럽공법공동체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정말로는, 구체적 질서 따위는 더 이상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억지를 부리는 사유의 경로를 밟았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텍스트가 재미있는 것은, 슈미트의 낭만주의에 대한 거센 비판을 보면, 같은 비판이 버크, 드 메스트르, 그리고 슈미트 자신에게도 되돌아오지 않느냐라는 의문이 솟구치는 대목입니다. 슈미트는 열심히, 보수주의자들의 ‘민족’이나 ‘역사’에는 실재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가톨릭 신자도, 낭만주의자도 아닌, 제3자적인 입장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말도 수상쩍다고 생각되죠. 자신들도 한 패거리 아닌가라는 불안이 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헐뜯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슈미트의 ‘결단’에도, 더 이상 의거해야 할 것이 정말로는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Q : 하이데거와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이데거도 대상이, 신에서 민족 같은 것으로 옮겨간 것 아니냐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질서란, 하이데거의 ‘민족’과 가깝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지역적 한정성 같은 것인가요?


A : 30년대 중반 이후의 하이데거는 민족의 존재의 기반으로서의 ‘조국 Vaterland’에 매달리게 됩니다. 수립된 ‘조국’에 의해, 구체적으로는, 시인에 의해 발견된 본래의 ‘언어’에 의해, 사람들의 존재와의 관계맺음 방식이 규정되게 됩니다. 그의 발상은 확실히 ‘구체적 질서’에 가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철학자이기에, 그가 의거한 기반으로서의 ‘조국’을, 횔덜린(1770-1834)의 이 또한 추상적인 시에 기대어 꽤 추상적으로밖에는 얘기하지 않았고, 현실의 독일과는 다른 것이라는 변명이 되지만, 법학자인 슈미트는 현실에 존재하는 법제도에 입각해 논의를 전개하기에, 그 나름의 구체성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앞서 말씀드렸듯이, 슈미트의 ‘질서’의 기본단위는 시기에 따라 변동합니다. 



Q : 슈미트는 바이마르 시기에, 구체적인 법과 정치적으로 관련된 작업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일은 지역적으로 문화의 변주(variation)가 크죠. 특히 북부와 남부에서. 이것을 묶은 총결산의 시기가 바이마르 시기라고 한다면, 슈미트도 너무 고생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구체적 질서’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A : 독일은 통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독일제국이 되어서도 복잡한 연방제를 채택했죠. 가톨릭은 전체 인구의 1/3 정도로, 2/3은 개신교 계열입니다. 가톨릭의 대부분은 남부에 살고 있습니다만, 슈미트 자신은 독일 북서쪽의 베스트팔렌 주의 외진 가톨릭 지역[플레텐베르크] 출신입니다. 가톨릭 계열의 정치신학자를 전체 독일적인 질서의 기반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산출할 것이라고 기대를 받았으나, 처음부터 혼란의 연속으로, 불안정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로, 의회 내의 군소정당 난립과, 극좌 및 극우에 의한 공화국 전복의 시도, 중앙정부와 주정부의 대립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힌덴부르크(Paul Ludwig von Beneckendorf und von Hindenburg, 1847-1934) 아래에서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1879-1969)이 총리를 지내던 1932년 7월, 중앙정부와 사민당 계열의 프로이센 주정부가 대립하고, 중앙정부가 군사력을 배경으로 삼아 프로이센 정부를 해체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슈미트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라도 한 듯이, 일찍부터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대통령’의 (한정적인 의미에서의) ‘독재’를 기대하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헌법상 그런 역할이 부여됐던 ‘대통령’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에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치도 지지했습니다. 전후에는 유럽 전체에 있어서의 ‘대지의 노모스(법)’을 상정하고, 그것을 지키려 했습니다. 


 슈미트의 입장에서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에 버금가는, 종교와 결탁된 법·정치적 질서가 있으면 수월했겠지만, 그것이 없었기에,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1강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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