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ㅋ

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2. 세계의 가난함

 

동물의 행태는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지각하는[터득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The behavior of the animal is never an apprehending of something as something.

마르틴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1929-30년 겨울학기 강의에 형이상학의 근본개념 : 세계, 유한성, 고독(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Welt-Endlichkeit-Einsamkeit)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75, 강의록 텍스트를 출판을 위해 발송하고 나서(1983년에서야 하이데거 전집29-30권에 수록되어 출판됐다), 하이데거는 그 권두에(in limine) 오이겐 핑크(Eugen Fink)에 대한 헌사를 새겨넣었다. 핑크가 이 강의록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출판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거듭 피력했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저자인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보면, 확실히 이 헌사는 하이데거 자신이 이 강의들에 부여했을 것임에 틀림없는 그리고 여전히 부여했던 중요성을 신중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론의 수준에서 보면, 이런 연대기적 특권[집필시기가 앞 선 것을 먼저 출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이 강의가 다른 모든 강의들 , 하이데거 전집의 출판 계획에 따르면 그의 강의를 총망라한 45보다 이상적으로도 선행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명백하지 않다[이에 대한 대답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강의는 적어도 언뜻 보면 그 제목과 일치하지 않으며, 또한 심지어 특별하다고 하더라도 1철학과 같은 분과학문의 근본 개념들에 대한 도입부처럼 결코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강의는 맨 먼저 근본적인 감정적 어조emotional tonality로서의 깊은 권태에 관한 대략 2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석에 할애됐으며, 이후에는 곧바로 동물이 그 환경과 맺는 관계,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더 방대한 탐구가 이어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poverty in world(Weltarmut)’세계를 형성하는world-forming(weltbildend)’ 인간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현존재의 근본적 구조 세계-안에-있음 를 동물과 관련해서 위치시키려고 애쓰며,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생명 존재[생물]the living being에서 산출되는 그런 열림의 기원과 의미에 관해 탐구하려고 애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하이데거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고 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정의를 줄기차게 거부했다. ‘이성적 동물이란 언어(혹은 이성)를 갖고 있는 생명 존재[생물]the living being라는 것이며, 그러면 마치 그저 살아 있을 뿐인 존재simply living being에 뭔가가 추가됨[덤으로 보태짐]으로써 인간 존재가 규정될 수 있다고 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0절과 12절에서, 현존재에 고유한 것인 세계-안에-있음이라는 구조가 어떻게 생명에 관한 모든 (철학적이고 과학적이기도 한) 개념규정conception 속에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이런 식으로 생명에 관한 개념규정은 사실상 세계-안에-있음에서 시작해서 박탈적[결여적] 해석을 경유해서항상 획득된다는 것이다[실제로 생명 개념이 결여적 해석을 경유함으로써세계-안에-있음이라는 구조로부터 끊임없이 획득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생명은 특수한 존재양태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생명은 현존재 속에서만 접근할 수 있다. 생명의 존재론은 박탈적[결여적] 해석을 경유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 생명의 존재론은 그저-살아-있을-뿐임[Nur-noch-leben]과도 같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만 하는가를 규정한다. 생명은 단순한 눈-앞의-존재도 아니고, 현존재도 아니다. 현존재는 (존재론적으로 미한정적인indefinite) [생명으로서 최초로 정립되기 때문에] 생명에 다른 어떤 것을 덤으로 보탠다(plus)[생명에 새롭게 무엇인가를 첨가한다]는 식으로는 결코 존재론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Heidegger 1972, 87).

Life is a particular kind of being; but essentially it is accessible only in Dasein. The ontology of life is achieved only by way of a privative interpretation; it determines what must be the case if there can be anything like mere-aliveness [Nur-noch-leben]. Life is not a mere being-present-at-hand, nor is it Dasein. In turn, Dasein is never to be defined ontologically by regarding it as (ontologically indefinite) life plus something else.1

 

1929-30년의 강의가 주제적으로 의문에 부치는 것은 동물과 인간 사이의 전제와 지시reference, 박탈privation과 추가supplement[대체보충]라는 이 형이상학적 게임이다. “그저 살아 있을 뿐인 존재simply living being와 현존재 사이의 관계를 좀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려는 시도 속에서 생물학과의 비교comparison[대결] ―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과 몇 줄로 청산되고 말았다 이 이제 다시 취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쟁점이 결정적이며, 이 강의가 다른 강의들보다 먼저 출판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분명해진다[요청을 수긍할 수 았다]. 왜냐하면 강의의 냉철한 산문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열려지는 심연 그리고 동시에 특별한 근접성proximity[유사성] 에 있어서 동물성(animalitas)’은 순전히 친숙해지지 않게 되고[모든 친숙함을 아주 잃어버리고] 사고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인간성(humanitas)’도 또한 파악하기 힘들고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남아-있을--없음not-being-able-to-remain과 -장소를-떠날--없음not-being-able-to-leave-its-place의 사이between에서처럼 중지되어 있는 듯하다.

하이데거의 해명exposition을 이끌고 있는 안내자guiding thread는 삼중의 테제, “돌에는 세계가 없다[weltlos]”, “동물은 세계가 가난하다[weltarm]”, “인간은 세계를 형성한다[weltbildend]”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무생물the nonliving being)그것을 에워싼 것에 접근할 모든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는 한에서 재빨리 한 쪽으로 치워버릴 수 있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두 번째 테제와 더불어 자신의 탐구를 시작하며, 곧바로 세계의 가난함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뜻인가라는 문제에 매달리게 된다. 여기서 철학적 분석은 전적으로 당대의 생물학과 동물학 연구, 특히 한스 드리에쉬, 칼 폰 바에르, 요하네스 뮐러, 그리고 무엇보다도 뮐러의 제자인 야콥 폰 윅스퀼의 연구들로 향해 나아간다. 사실, 윅스퀼의 연구는 “철학이 오늘날 지배적인 생물학에서 채택할 수 있는 가장 결실이 풍부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서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의에 나오는 개념들과 용어법에 윅스퀼의 연구가 준 영향력은 하이데거 자신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동물에 있어서 세계의 가난함을 정의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한 단어들이 윅스퀼이 환세계(Umwelt)’내적-세계(Innenwelt)’라는 용어들로 뜻하려 한 바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적고 있다(Heidegger 1983, 383). 하이데거는 윅스퀼이 의미의 담지자(Bedeut-ungsträger, Merkmalträger)”라고 정의한 것에 ‘das Enthemmende’, 억제 해제하는 것disinhibitor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동물학자가 Umwelt’, 환경이라고 부른 것에 ‘das Enthemmungsring’, 억제 해제하는 것의 고리disinhibiting ring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하이데거의 ‘Fähigsein zu’, ~--있음[가능존재], 즉 단순한 기계적 수단으로부터 하나의 기관을 구별하는 것은 윅스퀼의 작용기관(Wirkorgan)’과 부합된다. 윅스퀼에 따르면, 동물은 자신의 지각적 세계를 정의하는 몇 안 되는 요소들에 닫혀[봉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억제 해제하는 것들의 원()circle 속에 닫혀[봉쇄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윅스퀼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에게서 동물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때, 그 가능-존재[~--있음]촉발하고[변용시키고]따라서 이것에서 출발하는 것과 만날 수 있을 뿐이다[‘진작시키고따라서 동물을 몰아가는것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동물을 둘러싼 고리를 선천적으로 꿰뚫을 수 없다when [the animal] comes into relation with something else, [it] can only come upon that which ‘affects’ and thus starts its being-capable. Everything else is a priori unable to penetrate the ring around the animal”(Ibid., 369).

하지만 동물이 자신의 억제 해제하는 것의 고리disinhibiting ring와 맺는 관계를 해석하고 이 관계의 존재양태를 탐구하려 들 때, 하이데거는 세계의 가난함에 대한 이해와 인간 세계의 이해를 똑같은 속도로[동시에 병행적으로]at an equal pace 진척시킨다는 전략을 가다듬기 위해 윅스퀼에게서 벗어난다[자신의 모델에서 일탈한다].

동물이 억제 해제하는 것과 맺는 관계를 정의하는 동물에 고유한 존재양태는 방심captivation(Benommenheit)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어원론적 문채figure(文彩)를 반복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용어들 사이의 관계를 가동시킨다[사이에 있는 친근성을 이용한다]. , “방심한(benommen)”(넋을 빼앗긴captivated, 망연자실해진stunned, 그러나 또한 빼앗긴[박탈된]taken away, 꽉 막힌[폐색된, 봉쇄된, 불구의]blocked), “마음을 빼앗긴(eingenommen)”(흠뻑 빠진taken in, 탐닉한[~에 빠져 있는]absorbed), “태도(Benehmen)”(행태behavior)라는 용어는 모두 (인도-유럽어족에서 분배하다distribute[분할하다], 배당하다allot, 할당하다를 뜻하는 *nem을 어근으로 하는) “취하다(nehmen)”라는 동사에서 파생됐다. 본질적으로 방심되어 있고 자기 자신의 억제 해제하는 것에 전적으로 푹 빠져 있는absorbed 한에서, 동물은 억제 해제하는 것과 관계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행위act(handeln)하거나 행동할comport itself(sich verhalten) 수 없으며, 그저 처신할behave(sich benehmen) 수 있을 뿐이다.

 

존재 방식[양태]으로서의 태도[처신]는 동물이 자기에게 흠뻑 빠짐[사로잡힘]absorption(Eingenommenheit)에 의해서만 일반적으로 가능할 뿐이다. 동물에 특유한 이 스스로와-나란히-있음being-alongside-itself[자기-아래서의-존재]을 우리는 방심이라는 단어에 의해 정의하자. 스스로와-나란히-있음being-alongside-itself[자기-아래서의-존재]은 인격으로서 행동하는 인간의 자기성(Selbstheit)과는 무관하다. 동물이 자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모든 행동거지가 가능해진다. 동물만이 방심이라는 그 본질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처신할 수 있다. 방심이라는 조건 덕분에, 동물은 그 본질에 입각해, 환경 안에서 처신할 수 있지만, 결코 세계 안에서 처신할 수는 없다(in einer Umgebung sich benimmt, aber nie in einer Welt)(Ibid., 347-48).

Behavior as a manner of being is in general only possible on the basis of an animal’s absorption [Eingenommenheit] in itself. We shall define the animal’s specific being-alongside-itself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the selfhood [Selbstheit] of man comporting him- or herself as a personthis absorption in itself of the animal, in which behavior of any and every kind is possible, as captivation. The animal can only behave insofar as it is captivated in its essence. . . . Captivation is the condition of possibility for the fact that, in accordance with its essence, the animal behaves within an environment but never within a world [in einer Umgebung sich benimmt, aber nie in einer Welt].4

 

방심이 스스로를 세계에 결코 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예로, 하이데거는 실험실에서 꿀을 가득 채운 잔 앞에 한 마리의 꿀벌을 놔두는 (이미 윅스퀼이 서술한) 실험을 언급한다. 꿀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후 꿀벌의 배를 째면, 꿀벌은 자신의 열려 있는 배에서 꿀이 새는 것을 보면서도 행복하게도 계속 꿀을 빨아들일 것이다.

 

이 실험사례는 꿀이 아주 많이 있다는 것을 꿀벌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음을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꿀벌은 그것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이것이 더 꼼꼼하게 지적될 것이라고 기대됐지만[더 명백한 것인데] 자신의 배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다. 꿀벌은 꿈에도 모른 척 하는 게 아니라, 아니 오히려 아직 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본능적인 행동[Treiben]을 계속하는 것이다. 오히려 단순히 꿀벌은 먹이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다[hingenommen]. 이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본능적인 -’[treibhaftes Hinzu]이 현전해 있는 한에서이다. 본능[충동]에 사로잡힌 이런 존재자this being taken in such a drivenness가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는 탓에, 눈앞에-있는-존재[사물적 존재][Vorhandensein]를 알아챌 가능성도 동시에 배제된다. 바로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 탓에, 동물은 먹이와 대치할[sich gegenüberzustellen] 수 없는 것이다(Ibid. 352-53).

This shows convincingly that the bee by no means recognizes the presence of too much honey. It recognizes neither this nor eventhough this would be expected to touch it more closelythe absence of its abdomen. There is no question of it recognizing any of this; it continues its instinctual activity [Treiben] regardless, precisely because it does not recognize that plenty of honey is still present. Rather, the bee is simply taken [hingenommen] by the food. This being taken is only possible where there is an instinctive “toward...” [treibhaftes Hinzu]. Yet this being taken in such a drivenness also excludes the possibility of any recognition of any being-present-at-hand [Vorhandensein]. It is precisely being taken by its food that prevents the animal from taking up a position over and against [sich gegenüberzustellen] this food.5

 

바로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는 방심에 고유한 열림의 성격에 관해 물으며, 그리하여 동시에 인간과 그의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음영상negative image과도 같은 어떤 것을 깎아내기carve out 시작한다. 꿀벌은 무엇에 대해 열려 있는가? 억제 해제하는 것과의 관계에 들어설 때, 동물은 무엇과 만나는가[무엇을 인식하고 있는가]?

취하다(nehmen)”라는 동사의 복합형태[구성요소]compound forms로 계속해서 말장난을 하면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 “무엇인가를 무엇인가로서 지각할 가능성 자체가 동물로부터는 박탈되어withheld[보류되어] 있기[genommen] 때문에, “그리고 단지 지금 여기에서만이 아니라, 전혀 주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박탈되어 있기very possibility of apprehending something as something is withheld [genommen] from the animal, and it is withheld from it not merely here and now, but withheld in the sense that it is ‘not given at all”(ibid., 360)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지각하기apprehending(vernehmen)가 아니라 그저 본능적 행태(benehmen)만을 갖고 있다고 말이다. 동물이 방심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동물에게서는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다If the animal is captivated, it is because this possibility has been radically taken away from it.

 

따라서 동물의 방심[Benommenheit]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지각하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박탈[Genommenheit]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박탈되어 있기 때문에 ~에 열중하고 있다[Hingenommenheit]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무엇보다 우선 방심이라는 동물의 존재양태를 따라 동물이 다른 것과 관계하는 경우에는, 자기를 관련시킬 가능성 자체가 동물로부터 박탈되어 있다. , 이미 말했듯이, 사물적인 것으로서의, 존재자로서의, 일반적으로 이러저러한 것으로서의, 이것이나 다른 것에 자기를 관계시킬 가능성 자체가, 제외되어=사로잡혀[benommen] 있는 것이다. 바로 동물이 자기를 관계시키고 있는 것을 무엇인가로서 지각할 가능성이 동물로부터 박탈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은 다른 것에 이렇게까지 무조건 정신을 놓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Ibid., 360).

captivation [Benommenheit] of the animal therefore signifies: essential withholding [Genommenheit] of every apprehending of something as something. And consequently: insofar as withholding is a being-taken [Hingenommenheit] by... , the captivation of the animal characterizes the specific manner of being in which the animal relates itself to something else even while the possibility is withheld from itor is taken away [benommen] from the animal, as we might also sayof comporting and relating itself to something else as such and such at all, as something present at hand, as a being. And it is precisely because this possibilityapprehending as something that to which it relatesis withheld from it that the animal can be so utterly taken by something else.7

 

이처럼 존재를 음화(陰畵)로서negatively 존재의 박탈withholding을 통해 동물의 환경에 도입한 후, 강의에서 가장 밀도 높은 몇몇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동물이 방심 속에서 지시하는 것에 특유한 존재론적 자세(status)를 좀 더 정확하게 정의하려고 한다.

 

방심에 있어서 존재자는 동물의 행태에 드러내어져[폭로되어] 있지[offenbar] 않으며, 탈닫혀disclosed 있는 것도 아니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동물의 행태로부터 닫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 방심은 이런 가능성의 바깥에 서 있다. 우리는 존재자가 동물로부터 닫혀져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경미하다고 하더라도, 열림의 몇몇 가능성이 있었을 경우로만 한정된다. 그러나 동물의 방심은 존재자가 동물에 탈은폐되어[열려져] 있거나 아니면 동물로부터 닫혀져 있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가능성의 바깥에 동물을 본질적으로 위치시킨다. 방심이 동물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물이 그 자체로서는 존재자의 폭로revelation(rivelabilità, Offenbarkeit)를 위한 잠재성 내부에 서 있지 않다는 뜻이다. 동물의 이른바 환경도, 동물 자체도, 존재자로서 폭로[노출]되어revealed 있는 것이 아니다(Ibid., 361).

Beings are not revealed [offenbar] to the behavior of the animal in its captivation, they are not disclosed and for that very reason are not closed off from it either. Captivation stands outside this possibility. We cannot say: beings are closed off from the animal. This could be the case only if there were some possibility of openness at all, however slight that might be. But the captivation of the animal places the animal essentially outside of the possibility that beings could be either disclosed to it or closed off from it. To say that captivation is the essence of animality means: The animal as such does not stand within a potentiality for revelation {rivelabilità, Offenbarkeit} of beings. Neither its so-called environment nor the animal itself are revealed as beings.8

 

여기서 어려움은 다음의 사실에서 생겨난다. 동물이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양태는 탈은폐되어[열려]disclosed 있는 것도 닫혀 있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과 관계한다는 것은, 진정한 관계로서, 혹은 관계맺음으로서 고유하게[본래적으로]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은 그 방심과 그 모든 능력에 의해, 여러 가지 충동에 쉴 새 없이 내몰리기 때문에, 동물 자체가 아닌 존재자와도, 동물 자체인 존재자와도, 서로 관계맺을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그렇게 내몰리는 탓에, 동물은, 자기 자신과 환경 사이에서 이른바 중지되어 있는 것이며, 이중 어떤 것도 존재자로서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자의 폭로성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폭로성의 박탈로서, 동시에, “~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물은 ~와 관계하고 있는 것이며, 방심과 행동은 ~에 대한 열림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엇에 대해 개시되어 있는가? 마음을 빼앗긴 것에 특유한 개시성 속에서 본능적 방심으로, 얼마간의 방법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어떻게 특징지어져야 하는가? (Ibid.).

Since the animal is ceaselessly driven in its manifold instinctual activities on the basis of its captivation and of the totality of its capacities, the animal fundamentally lacks the possibility of entering into relation either with the being that it itself is or with beings other than itself. Because of this being ceaselessly driven the animal finds itself suspended, as it were, between itself and its environment, even though neither the one nor the other is experienced as a being. Yet this not-having any potentiality for revelation of beings, this potentiality for revelation as withheld from the animal, is at the same time a being taken by... We must say that the animal is in relation with..., that captivation and behavior display an openness for... For what? How are we to describe what is somehow encountered in the specific openness of being taken in the drivenness of instinctual captivation?9

 

억제 해제하는 것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한 한걸음 더 나아간[새로운] 정의는 동물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세계의 가난함이라는 테제의 핵심부에 이른다. 서로 관계 맺을 수 없다는 것은 순전히 부정적이지는 않다. 실제로 서로 관계 맺을 수 없다는 것은 모종의 방식으로 열림의 한 형식,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제 해제하는 것을 존재자로서 탈은폐하지는 않는 열림이다[폭로 없는 열림인 것이며, 존재자로서 억제 해제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행동거지가 존재자들과의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행동거지가 무와의 관계라는 뜻일까? 아니다! 하지만 행동거지가 무와의 관계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것과의 관계여야 한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은 확실하게 존재해야 하며,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행동거지가 ~와의 관계인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서로 관계 없는 것으로서의 행동거지가 관련되는 것은 동물에 있어서는, 모종의 방식으로 열려 있다[offen]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존재자로서 탈은폐되어 있다[offenbar]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히 아니다(Ibid., 368).

If behavior is not a relation to beings, does this mean that it is a relation to the nothing? No! Yet if it is not a relation to the nothing, then it must be a relation to something, which surely must itself be and actually is. Certainlybut the question is precisely whether behavior is not a relation to... wherein that to which the behavior, as a not-having-to-do-with, relates is open [offen] in a certain way for the animal. But this certainly does not mean disconcealed [offenbar] as a being.10

 

이 지점에서 동물적 환경의 존재론적 지위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 그것은 열려 있으나(offen, aperto), 탈은폐(offenbar, svelato)(문자 그대로는 apribile[열릴 수 있다])되어 있지 않다고 말이다. 동물에게 존재자들은 열려 있으나 접근할[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존재자들은 접근할 수 없음과 불투명성 속에서, 즉 모종의 방식으로 비관계성 속에서 열려 있다. 탈은폐 없는 열림(apertura senza svelamento)은 인간을 특징짓는 세계의 형성으로부터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을 구별한다[인간을 특징짓는 것이 세계의 형성이라고 한다면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 탈은폐 없는 열림(apertura senza svelamento)이다]. 동물은 단순히 세계가 없는[세계를 결여하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방심 속에 열려 있는 한 돌이 세계가 없는[세계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과 달리 세계가 없이 지내고[세계를 뺄셈하고] 세계를 결여하는(entbehren) 것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 그 존재에 있어서 동물은 가난함과 결여[부족]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The animal is not simply without world, for insofar as it is open in captivation, it mustunlike the stone, which is worldlessdo without world, lack it (entbehren); it can, that is, be defined in its being by a poverty and a lack.

 

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억제 해제하는 것의 고리 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물은 인간의 편에는 없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물은 세계를 갖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를 갖지 않는다고 해서, 동물이, 돌 쪽으로 본질적 이유에 의해 밀려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본능적으로 망연하게 방심할 수 있다는 것, 즉 억제 해제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비록 서로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더라도, ~에 대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 돌은 이 가능성조차 갖고 있지 않다. 실제로, 서로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 것은, 열린 존재를 전제한다. 동물은 그 본질 속에, 이 열린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 방심에 열린 존재란, 동물의 본질적인 소유이다. 이 소유 덕분에 동물은 없이 지내거나(entbehren), 가난하거나 할 수 있으며, 가난에 의해 그 존재 속에 규정되는 것도 가능하다. 과연 분명히, 이 소유는, 세계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억제 해제하는 것의 고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억제 해제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유는 억제 해제하는 것에 대해 열려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열려 있다는 것으로부터는, 바로 억제 해제하는 것이 존재자로서 탈은폐한다는 가능성이 박탈되어 있다. 그 때문에 열림을 갖는다는 것은, 갖지 않는다는 것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은,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탈은폐 가능성이기 때문에. (Ibid., 391-92).

It is precisely because the animal in its captivation has a relation to everything encountered within its disinhibiting ring, precisely for this that it does not stand alongside man, precisely for this that it has no world. Yet this not-having of world does not force the animal alongside the stoneand does not do so for a fundamental reason. For the instinctive being-capable of taken captivation, i.e. of being taken by whatever disinhibits it, is a being open for... , even if it has the character of not-having-to-do-with... The stone on the other hand does not even have this possibility. For not-having-to-do-with... presupposes a being open. . . . The animal possesses this being-open in its essence. Being open in captivation is an essential possession of the animal. On the basis of this possession it can do without [entbehren], be poor, be determined in its being by poverty. This having is certainly not a having of world, but rather being taken by the disinhibiting ringit is a having of the disinhibitor. But because this having is a being-open for the disinhibitorand yet the very possibility of having the disinhibitor revealed as a being is withheld from this being-open-forbecause of this, the possession of being open is a not-having, and indeed a not having of world, if the potentiality for revelation of beings as such does indeed belong to world.11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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