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3. 열림

 

그래도 종달새는 열림을 보지도 못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강의에서 관건은 열림[열린]이라는 개념을 존재와 세계의 이름들 중 하나로, 아니 오히려 무엇보다 우선(kat’exochēn) 존재와 세계의 이름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10년 후에, 양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에서 이 개념으로 돌아가며, 이것의 개괄적인 계보를 추적한다[그것에 관해 대략적인 계보를 그려냈다]. 열림이라는 개념이 두이노 비가(Duino Elegy)8가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명백하다. 그러나 열림이 존재의 이름(“모든 존재가 그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열림은 존재 자체이다”, Heidegger, 1993, 224)로서 채택됐을 때, 릴케의 이 용어는 하이데거가 모든 방식으로 강조하려고 애쓰고 있는 본질적인 전도[역전, reversal]를 겪는다. 실제로 8번째 비가에서 동물[피조물](die Kreatur)그 모든 눈으로열림을 보는데, 이것은 뒤 돌아서 있고그의 주위에 덫처럼놓여 있는 인간의 눈과 뚜렷하게 대조된다[인간의 눈은 그것과는 반대로 반대 방향을 향해” “덫으로서이 열림을 에워싼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앞에 세계를 갖고 있고[세계와 마주보고] 언제나 그저 마주보고(gegenüber)’ 있을 뿐이고 결코 바깥의 순수한 공간에 들어서지 않는 반면, 동물[피조물]은 열림 속에서, ‘부정이 전혀 없는 곳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다.

하이데거가 다시 물음에 부치는 것은, 바로 인간과 생명체[피조물, 동물]의 위계적 관계의 이 전도[역전]이다. 우선 하이데거는 이렇게 쓴다. 철학이 진리(알레테이아)로서, 즉 존재의 탈은폐성-은폐성으로서 사고했던 것의 이름으로서 열림을 생각[고찰]한다면, 여기서 전도[역전]는 진정한 전도[역전]가 아니다[여기서는 릴케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릴케가 불러들인evoked[호출하는] 열림과 하이데거의 사유가 사유에 돌려보내려 하는 열림은 아무런 공통점도 없기 때문이다. “릴케가 말하려 한 열림은 비은폐된 것the unconcealed이라는 의미에서의 열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릴케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진리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지 못하며, 무엇 하나 예측하지도 않는다Rilke knows and suspects nothing of ale¯theia, no more than Nietzsche does”(ibid., 231). 니체와 릴케의 둘 다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존재의 망각인데, 이 망각은 “19세기의 생물학주의와 정신분석의 기반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의 궁극적 결과는 동물의 터무니없는 의인화이며, 이것에 상응하는 인간의 동물화”(ibid., 226)이다. 인간만이, 실제로 본래적 사유의 본질적 시선만이 존재자들의 비은폐성을 지칭하는 열림을 볼 수 있다[비은폐된 존재를 가리키는 열린을 볼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아니 오히려 진정한 사유의 본질적인 시선뿐이다]. 거꾸로 동물은 이 열림을 결코 본 적이 없다.

 

바로 그 때문에 동물은 그런 것으로서 닫힌 세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며, 감춰져 있는 것[베일에 감싸인 것]과 관계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은 비은폐unconcealedness와 은폐concealedness가 충돌하는 본질적인 영역으로부터 배제된다[추방된다]. 이런 배제의 기호는 동물이나 식물이 세계를 갖고있지 않다는 것이다[그 어떤 동물도 식물도 말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 이런 배제의 흔적을 인식할 수 있다](ibid., 237).

Therefore neither can an animal move about in the closed as such, no more than it can comport itself toward the concealed. The animal is excluded from the essential domain of the conflict between unconcealedness and concealedness. The sign of such an exclusion is that no animal or plant “has the word.”4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는 동물의 환경과 인간의 세계 사이의 차이라는 문제를 지극히 농밀한 글로 분명하게 불러들이는데, 이것이 1929-30년 강의의 중심에 있었다.

 

실제로 동물은 먹이를 찾는 환경이나 사냥을 하는 세력권, 나아가 같은 종족의 무리와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는 돌과 그 돌이 굴러다니는 지면과의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식물과 동물 같은 생물의 경계 자체 속에서, 우리는 운동능력이라는 특징적인 활동을 발견한다. 이 운동능력에 준하여 생물은 자극된다. 달리 말하면 생물은 흥분성으로 가득 찬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도록 자극되는 것이며, 그 흥분을 토대로 생물은 운동의 영역 속으로 뭔가 다른 것을 삽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이나 동물의 어떤 운동 능력도, 어떤 흥분성도, 결코 생물을 자유로운 존재답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생물이 자극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대로, 자극된 것이 자극하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 때만큼, 생물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물이 자극 이전에 존재하고 자극 없이도 존재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식물과 동물은 스스로에게 외적인 뭔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외부도 내부도 결코 보지않는다. , 존재의 자유로 자신이 비은폐되고[들통나고] 있는 것을 결코 보지 않다.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돌은 종달새처럼 희희낙락하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거나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종달새는 열린을 보는 것이 아니다.

For the animal is in relation to his circle of food, prey, and other animals of its own kind, and it is so in a way essentially different from the way the stone is related to the earth upon which it lies. In the circle of the living things characterized as plant or animal we find the peculiar stirring of a motility by which the living being is “stimulated,” i.e., excited to an emerging into a circle of excitability on the basis of which it includes other things in the circle of its stirring. But no motility or excitability of plants and animals can ever bring the living thing into the free in such a way that what is stimulated could ever let the thing which excites “be” what it is even merely as exciting, not to mention what it is before the excitation and without it. Plant and animal depend on something outside of themselves without ever “seeing” either the outside or the inside, i.e., without ever seeing their being unconcealed in the free of being. It would never be possible for a stone, any more than for an airplane, to elevate itselftoward the sun in jubilation and to stir like the lark, and yet not even the lark sees the open.5

 

종달새(우리네 시의 전통에서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발로의 상징이며, 이것은 베르나르 데 반타도른의 종다리(lauzeta)를 상기해도 좋다)는 열림을 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종달새는 태양을 향해 천진난만하게[모든 것이 내려놓인 채, with the greatest abandon] 돌진하는 바로 그 순간에서조차도 열림에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종달새는 태양을 존재로서 탈은폐할 수 없으며[열림을 실재로서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으며], 태양의 비은폐성에 그 어떤 식으로도 (마치 억제 해제하는 것에 대한 윅스퀼의 진드기처럼) 관여할 수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릴케의 시에서는 생명 존재[생물](식물이나 동물)의 신비와 역사적인 것의 신비 사이의 본질적인 경계선”(ibid., 239)이 체험되거나 주제화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시적 언어는 역사를 창설할 수 있는 결정[결단]에 미치지 못하며[의 직전에 머물며], “동물의 무제한적이고 무근거적인 의인화라는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이것은 동물을 인간 위에 두며[인간 이상의 것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초인’(ibid.)으로 만든다.

그래서 만약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 이것들의 분리인 동시에 근접성 을 정의하는 것이 문제라면, 아마 그 순간은 1929-30년의 강의에서 다뤄졌듯이, 동물적 환경의 역설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명확히 하려고 시도할 때 올 것이다. 동물은 열려 있는 동시에 열려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열려 있는 것도 아니며 열려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 어떤 비폭로성nondisconcealment에서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폭로성nondisconcealment에서의 열림은 한편으로는 그 억제 해제 속에서 동물을 방심하게 만들고 엄청날 정도로 격렬하게 탈구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을 이렇게도 붙잡고 홀딱 빠지게 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의 존재자로서 폭로하는disconceal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의 하이데거는 신비적인 인식knowledge 아니 오히려 신비적인 비인식nonknowledge 의 역설을 모종의 방식으로 상기시키는 두 개의 대극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방심은 그 어떤 인간인식보다 훨씬 강렬하고 매혹적인spellbinding 열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억제 해제하는 바로 그것을 폭로할 수 없는disconcealing 한에서, 방심은 총체적 불투명성 속에 닫혀 있다. 동물의 방심과 세계의 열림은 흡사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처럼 서로 관련되며, 양자의 관계는 신비가의 어두운 밤과 합리적 인식의 명료함[광휘]이 동시에 대립하면서도 은밀한 공범관계로 묶여 있는 것만큼이나 양의적 관계이다. 하이데거가 이른바 신비적 통일(unio mystica)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상징 중 하나인 나방에 의해 동물의 방심을 설명할 필요를 느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관계에 대한 어떤 무언의 아이러니한 암시에 의한 것이리라. 나방은 불꽃에 매혹당해 몸을 태움에도 불구하고 완고하게도 마지막까지 그것을 모르는 채로 있다. 나방이라는 상징이 여기서 부적절하다고 비친다면, 동물학자에 따르면, 나방이 일차적으로 맹목적이게 되는 것은 바로 억제 해제하는 것의 비-열림이며, 억제 해제하는 것에 의해 스스로 방심된 채로 있다는 것이다[단적으로 말해서 맹목이 되는 바로 그 대상이, 바로 열리지 않는 억제 해제하는 것의 고리이기 때문이며, 억제 해제하는 것에 마비된 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신비적인 인식[지식]이 본질적으로 불가지nonknowledge의 경험이며, 불가지로서의 은폐concealment의 경험인 반면, 동물은 열려-있지-않은 것을 향해 처신할 수 없으며[열리지 않는 것에 열릴 수 없으며], 바로 탈은폐와 은폐disconcealment and concealment가 충돌하는 본질적인 영역으로부터 배제된 채로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1929-30] 강의에서는 동물의 세계의 빈곤은 때때로 비할 데 없는 풍요로 전도되며reversed, 동물은 세계를 결여하고 있다는 테제는 동물적 세계에 대한 인간적 세계의 까닭모를undue 투영projection으로서 다시금 의문에 부쳐진다.

 

문제가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것은, 우리의 탐구에서는, 이런 동물의 궁핍과 동물 고유의 에워쌈encirclement을 해석하기 위해, 마치 동물에 관련된 사항을 하나의 존재자인 양 문제를 상정하는 동시에, 그 관련을 동물에 현저한 어떤 존재론적 관련으로서 상정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이 규정대로는 되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동물의] 생명의 본질적인 파괴적 고찰이라는 형식에서만 다가설 수 있다는 테제로 귀착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인간 존재에 비해 [동물의] 생명에는 가치가 없다, 혹은 낮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물의] 생명이란 인간 세계에서는 아마도 전혀 인식되지 않는 열린 존재로 가득 찬 영역인 것이다(Heidegger 1983, 371-72).

The difficulty of the problem lies in the fact that in our questioning we must always interpret the poverty in world and the peculiar encirclement of the animal in such a way that we end up talking as if that to which the animal relates . . . were a being, and as if the relation were an ontological relation that is manifest to the animal. The fact that this is not the case compels us to the thesis that the essence of life is accessible only through a destructive observation, which does not mean that life is something inferior or that it is at a lower level in comparison with human Dasein. On the contrary, life is a domain which possesses a wealth of being-open, of which the human world may know nothing at all.8

 

이처럼 [동물에게는 세계가 가난하다는] 테제가 아무런 유보도 없이 기각되어야 하고 동물적 환경과 인간적 세계가 어떤 근본적 이질성으로 분기되는 것처럼 보일 때, 하이데거는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819절의 유명한 구절을 참조함으로써 또 다시 이 테제를 제안한다. 바울은 여기서 속죄를 향한 피조물의 절실한 기대를 불러들이고 있다. 이리하여 동물의 세계의 빈곤은 이제 동물성 자체의 내적인 문제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셈이어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열린 채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계의 본질에 관한 본래적이고 명확히 형이상학적인 이해에 따르면, [동물이] 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세계를 이루지 못한 채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동물의 존재양태 자체 속에 하나의 궁핍된 존재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이런 종류의 사항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결코 형이상학에 대한 반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 시인만이 이따금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 자체가, 형이상학에 있어서 마이동풍뿐으로 흘려들을 수 없는 하나의 논거이다. 결국 바울(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819)이 피조물의 간절한 소망(apokaradokia tēs ktiseōs), 즉 피조물과 피조계의 열망에 관해 적은 말, 혹은 또한 에즈라서4712절에서도 얘기되듯이, 피조물이 뒤쫓는 길은 이 아이온에 있어서 좁고, 슬프고, 고난으로 가득 찬 것이 됐다는 말에 관해 얼마간이나마 이해하는 데, 특별히 기독교 신앙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또한 동물에 있어서의 세계의 궁핍을 동물성 자체의 내부에 있는 문제로서 전개하는 데에는, 비관주의조차도 필요 없다. 동물은 억제 해제하는 것에 대해 열려 있는 동시에, 방심 속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방출된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이란 정말로 분명히, 존재자로서도 비존재자로서도 들통날 수 없는 것이지만, 억제 해제하는 것으로서, 동물의 본질 속에, 하나의 본질적인 disruption(wesenhafte Erschütterung)을 도입하는 것이다(ibid., 395-96).

We must, then, leave open the possibility that the authentic and explicitly metaphysical understanding of the essence of world compels us to understand the animal’s not-having of world as a doing-without after all, and to find a being-poor in the manner of being of the animal as such. The fact that biology recognizes nothing of the sort is no counter- argument against metaphysics. That perhaps only poets occasionally speak of this is an argument that metaphysics cannot be allowed to cast to the winds. In the end the Christian faith is not necessary in order to understand something of the word which Paul (Romans :) writes concerning the apokaradokia te¯s ktiseo¯s, the yearning expectation of creatures and creation, the paths of which, as the Fourth Book of Ezra : says, have become narrow, doleful, and tiresome in this aeon. But nor is any pessimism required in order to develop the animal’s poverty in world as a problem internal to animality itself. For with the animal’s being open for that which disinhibits, the animal in its captivation is essentially held out in something other than itself, something that indeed cannot be manifest to the animal either as a being or as a non-being, but which, insofar as it disinhibits . . . brings an essential disruption [wesenhafte Erschütterung] into the essence of the animal.9

 

메시아적 속죄라는 바울 서신의 전망에서 간절한 대망(apokaradokia)’이 피조물을 갑작스레 인간에게 더욱 가깝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탈은폐성nondisconcealment에서 노출된 그 존재에 있어서 동물이 경험하는 본질적인 disruption 또한 그 과정이 인간과 동물, 열림과 비-열림 사이를 표시했던[인간과 동물, 열림과 비-열림 사이에 새겨진 거리를] 대폭 줄인다. 다시 말해 동물의 본질로서의 방심이야말로 이른바 인간 본질이 그런 전망에 비춰서 밝게 비춰질 수 있는 절호의 배경이었던 것 전망인 마냥[인간 본질을 부각시키는 절호의 배경]”(ibid., 408)[이 된다는 하나의 전망 아래서] 세계의 빈곤 동물은 모종의 방식으로 여기서 자신의 열려-있지-않음을[어떤 의미에서는 동물은 거기서, 자기 자신의 열리지 않는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인데 은 동물적 환경과 열림 사이에 하나의 돌파구passage를 보증하는 전략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는 강의 1부에서 그를 사로잡았던 권태에 관한 논의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동물의 방심과 그리고 그가 깊은 권태(tiefe Langeweile)’라고 불렀던 근본적 기분(Stimmung)’을 서로 예기치도 못하게 공명시킬 수 있다.

 

이 근본적 정신상태 및 거기에 포함된 것 전부가, 동물성의 본질로서 방심에 관해 우리가 말해 왔던 것과 비교해서 어떻게 윤곽지어지고 구별되어야 하는가는, 어차피 드러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 윤곽짓기가 훨씬 결정적인 것으로 되는 것은 바로 동물성의 본질인 방심이, 얼핏 보기에 우리가 깊은 권태의 특징적인 요소로서 논하고, 현존재가 전체에 있어서의 존재자의 내부에 속박되어 있다(gebannt sein)고 명명된 것과 극도의 근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양자의 본질적 구성이 지닌 이런 유사가 허울일 뿐이며, 양자 사이에는 그 어떤 매개에 의해서도 넘어설 수 없는 심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언젠가 확실해질 것이다. 두 개의 테제의 전적인 대립은 세계의 본질과 나란히, 생각지도 못하게 명백해지게 될 것이다(ibid., 409).

It will be seen how this fundamental attunement,11 and everything bound up with it, is to be set off over against what we claimed as the essence of animality, over against captivation. This contrast will become all the more decisive for us insofar as captivation, as precisely the essence of animality, apparently finds itself in the closest proximity to what we identified as a characteristic element of profound boredom and described as the enchantment-enchainment [Gebanntheit] of Dasein within beings in their totality. Certainly it will be seen that this closest proximity of both essential constitutions is merely deceptive, and that an abyss lies between them which cannot be bridged by any mediation whatsoever. Yet in that case the total divergence of these two theses will suddenly become very clear to us, and thereby the essence of world.12

 

여기서 방심은 현존재(Dasein)가 그러하듯이 동물이 세계에 열려 있지 않은 일종의 근본적 기분으로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은 전신fiber을 샅샅이 disrupt하는 노출 속에서 무아지경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인간적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이 탈은폐disconcealment 없는 노출(esposizione senza svelamento)과의 설령 겉만 번드르르한 것이라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근사성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와 인간 세계가 미리 전제되어 있고 그런 후에 뺄셈 , “파괴적 고찰에 의한 뺄셈 에 입각해 동물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아마 정반대일 것이고, 그게 사실일 것이다. , 인간적 세계의 열림은 (이것이 또한 일차적으로 탈은폐와 은폐disconcealment and concealment 사이의 본질적인 충돌에의 열림인 한에서) 동물적 세계의 열려-있지-않음에 대해 작용하는 조작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에 있어서의[세계로의] 인간의 열림과 억제 해제하는 것을 향한 동물의 열림이 잠깐 동안이나마 만나는 듯한 이런 조작의 장소가 바로 권태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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