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6. 동물화

인간이라는 동물에는 자신의 동류를 가축으로 하는 자도 있다
[인간은 동물로, 그 중 몇몇은 자신의 고유한 종류들을 키워낸다]
.

피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하이데거는 정치공동체은폐성과 비은폐성, 인간의 동물성(animalitas)’인간성(humanitas)’ 사이의 갈등이 군림하는 천개(天蓋, polos) 라는 장소가 여전히 실천 가능한 장소였다고 선의의 믿음을 갖고 믿은 아마도 최후의 철학자였다. ‘폴리스라는 위험한 장소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인간이, 하나의 인민[민족]이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적 숙명destiny을 발견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 의심과 모순[어긋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지점까지는, 하이데거는 인간학 기계가 인간과 동물, 열림과 열리지-않음 사이의 갈등을 매번 결단하고 재합성[재편]함으로써 하나의 인민[민족]에게 있어서 역사와 운명destiny을 여전히 산출할 수 있다고 믿은 최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는 자신의 오류를 깨달은 것 같으며, 존재의 역사적 사명mission[기투]에 응답한 결단이 어디에서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 것 같다. 이미 1934-35년의 횔덜린에 관한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역사성의 근본적인 감정적 어조를 환기시키려고 시도하는데, 여기서 그는 이렇게 쓴다. “한 인민[민족]의 역사적 실존의 거대한 두절[흔들려 움직임]disruption[탈은폐되지 않은 어떤 것에 동물이 노출되는 것을 기술하는 똑같은 용어인 Erschütterung]의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사원들, 이미지들, 의복들은 한 인민[민족]의 역사적 소명을 새로운 과제[사명]로 강제할[충동질할] 수 있기 위해서 이런 소명을 더 이상 취할 수 없다”(Heidegger 1980, 99).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이후(post-history)는 종결된 형이상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이데거가 이런 말을 한 것에서부터] 거의 70년의 거리가 있는 오늘날, 인간이 취할[맡을] 수 있는, 혹은 심지어 인간에게 그저 할당될 수 있을 뿐인 역사적 과제[사명]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완벽하게 불성실한 자들이 아닌 한에서는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유럽의 국민국가가 더 이상 역사적 과제[사명]를 취할[맡을] 수 없고, 인민들 자신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언젠가는 사라지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1차 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이미 명백했다. 만일 우리가 20세기의 전체주의를 19세기의 국민국가의 최후의 거대한 과제[사명]의 지속으로만, 즉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로만 인식할 뿐이라면, 우리는 20세기의 거대한 전체주의적 실험들의 본성을 완벽하게 오해한 것이다. [20세기의 전체주의적 경험들에서] 관건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훨씬 더 과격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민이라는 현사실적인factical 실존 자체, 즉 최종 분석에서는 인민의 벌거벗은 생명을 과제[사명]로 취하는[떠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은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코제브적인 관념과는 정말로 다른 얼굴[양상]을 구성한다. , 이제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텔로스[목적, 결말]에 도달하며, 또 다시 동물이 된 인류humanity에게는 오이코노미아를 무조건적으로 펼치는 것에 입각해서, 혹은 생물학적 생명 자체를 최고의 정치적 (혹은 오히려 비정치적impolitical) 과제로 취하는 것에 입각해서 인간 사회들을 탈정치화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런 아포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들과 인민들의 주변과 이들 가운데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그 어떤 본질이나 정체성도 갖고 있지 못한 이른바 이들의 비본질성과 비활동성(inoperosità)에 넘겨져버린 인간들과 인민들이 도처에서 더듬어가면서, 철저한 위조gross falsifications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상속inheritance과 과제[사명], 과제[사명]로서의 상속을 더듬어가면서 추구하는 광경을 말이다. 심지어 경제의 승리라는 이름으로 (국내외의 경찰이라는 단순한 기능으로 환원된) 모든 역사적 과제[사명]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포기하는 것마저도 오늘날은 종종 너무 강조[과장]된다. 여기서는 자연적 생명 자체와 그 행복이 마치 인류의 마지막 역사적 과제[사명]인 것처럼 실제로 과제[사명]’에 대해 여기서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보이는 듯하다.

전통적인 역사의 잠재성들(potentia) , 종교, 철학 은 헤겔-코제브의 관점에서도 하이데거의 관점에서도 모두 인민들의 역사적-정치적인 운명destiny을 각성시킨[깨어있게 한] 것이었으나, 얼마 전부터 문화적 스펙터클과 사적 체험으로 변형됐으며, 모든 역사적 효력을 잃어버렸다. 이런 침식과 접했을 때, 얼마간의 진지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듯한 유일한 과제[사명]는 생물학적 생명, 즉 인간의 동물성 자체를 짊어진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는 가정이다. 게놈, 전지구적 경제, 인도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역사-이후의 인류가 자신들의 생리학을 그 최후의, 비정치적인 위탁mandate으로서 취하는[떠맡는] 듯이 보이는 이 과정의 세 가지 통일된 얼굴[국면들]이다.

자기 자신의 동물성에 대한 총체적 관리를 자신에게 위탁하는 인류가, 인간학 기계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매번 결단(분담)de-ciding으로써 산출한 인류(humanitas)’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인간적인지 여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또한 더 이상 인간이라거나 동물이라고 인정될 수 없는 한 생명의 행복이 충족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지 여부도 분명하지 않다. 확실히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인류는 동물의 비탈은폐된 것[탈은폐되어 있지 않은 것]에 스스로를 연 채로 유지하는 형식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영역[분야]에서 열리지-않은-것을 열고 확보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 더불어 인류는 자신의 열림에 스스로를 닫어두고, 자신의 인간성(humanitas)’을 망각하며, 존재를 자신의 특정한 억제 해제하는 것으로 만든다[변모시킨다]. 동물의 총체적 인간화는 인간의 총체적 동물화와 일치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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