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8. 사이

세계의 모든 수수께끼는 성sex이라는 자그마한 비밀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 같다.”

미셸 푸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연과 역사의 관계에 관해 벤야민의 여러 텍스트들은 전적으로 상이한 이미지[마치 이미지를 쏙 빼닮은 듯한 것]를 제공한다. 이 이미지에서 인간학적 기계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out of play 듯 보인다. 최초의 텍스트는 구출된 밤에 관해 192312월에 [플로렌스 크리스티안] (Rang)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서 닫혀 있음closedness(Verschlossenheit)의 세계와 밤의 세계로 간주되는 자연은 계시(Offenbarung)의 영역으로서의 역사에 대립된다. 그러나 벤야민은 자연이라는 닫힌 영역에 놀랍게도 관념뿐 아니라 예술작품도 속하게 한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어떠한 낮도 기다리지 않는 자연의 모델이라고정의된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어떠한 심판의 날도 기다리지 않는 자연의 모델이다. 역사의 극장도 아니고 인간의 거처도 아닌 자연의 모델로서 정의됩니다. 즉 구출된 밤(die gerettete Nacht)인 겁니다.”(Benjamin, 1996, 393).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apokaradokín tēs ktíseōs)에 관한 바울의 텍스트가 자연과 구원, 피조물과 구원된 인류 사이에 수립한 연결은 여기서 산산이 부서진다[완벽하게 분절된다]. “자연의 밤에만 반짝이는별들처럼 이념들은 피조물의 생명을 계시하기[드러내기, 계시를 부여하기] 위해서도, 이 생명을 인간의 언어활동에 열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을 그 닫혀 있음과 침묵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서 피조물의 생명을 그러모은다[집약한다]. 자연과 구원redemption의 분리는 고대 그노시스파의 모티프이다. 그리고 이는 야콥 테우베스가 벤야민을 그노시스파의 마르키온과 나란히 놓게 만들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서 [자연과 구원의] 분리는 마르키온의 분리와는 대척점에 있는 벤야민의 특유의 전략을 따른다. 대다수의 그노시스파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키온에게서는 자연을 사악한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이라며 과소평가하고 비난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 여기서[벤야민에게서]는 오히려 자연을 지복(beatitudo)’의 원형으로 설정하는 가치전환transvaluation으로 이어진다. 구출된 밤saved night[구원된 밤]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보내진 자연의 이름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또 다른 단편들에 따르면, 이것의 성격[이런 자연을 해방하는 열쇠]은 무상함[덧없음]transience이며 이것의 리듬은 지복이다. 여기서 쟁점인 구원은 상실되었기에 또 다시 찾아져야만 하는 어떤 것, 망각되었기에 기억[회상]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과 관련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구출된[구원된] 밤은 상실된 것과 망각된 것 그 자체와 관련된다. , 구원될 수 없는 어떤 것과 관련된다. 구원된[구출된] 밤은 구원될 수 없는 어떤 것과의 관계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그가 어느 단계까지는또한 자연인 한에서 두 개의 분명히 구별된 긴장관계, 두 개의 상이한 구원redemptions에 의해 횡단된 장field으로서 등장한다.

 

불멸성을 도입하는 영혼의 회복(restitutio in integrum)’에는 몰락의 영원성[영원의 몰락]에 이르게 하는 현세적인 복원restitution[매춘부가] 대응한다. 그리고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인 총체성에 있어서도, 그 총체성으로 사그라지는,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으로 영원히 사그라지는 이 현세적 실존의 리듬이 행복이다[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영원히 그 전체를 향해 옮겨 걸어가는 이 속세의 리듬, 메시아적인 자연의 리듬이야말로 행복이다].”(Benjamin, 1980a, 172).

 

이 유별난singular 그노시스에 있어서 인간은 피조물의 생명과 영혼, 창조와 구원[속죄]redemption, 자연과 역사가 계속해서 식별되고 분리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원salvation을 향해 계속해서 음모를 꾸미는 체sieve이다.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의 끝에 수록된 플라네타리움을 향해(Zum Planetarium)라는 제목이 달린 텍스트에서 벤야민은 근대인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고대인이 우주와 맺는 관계와 비교하면서 개괄하려고 한다. 고대인은 무아지경의 상태ecstatic trance에서 [우주와 관련된] 자신의 장소를 갖고 있었다. [반면] 근대인에게 [자연과의] 이런 관계의 고유한 장소는 테크놀로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널리 인식되는 것처럼, 인간의 자연 지배로서 인식된 테크놀로지가 확실히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이 가르치듯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모든 테크놀로지의 의미이다. 하지만 성인에 의한 아이들의 지배가 교육의 의미라고 천명하면서 회초리를 휘두르는 교사를 누가 신뢰할까?

제국주의자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모든 기술의 의미이라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성인에 의한 아이들의 지배가 교육의 의미이라고 공언하여 회초리를 휘두르는 교사를 누가 신뢰할까? 교육이란 어쩌면 무엇보다 세대 간의 관계에 필요불가결한 질서이며, 따라서 만일 지배가 좋다면, 아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동시에 기술이라는 것도 역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류의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확실히 종으로서의 인간은 몇 만년도 전에 발전의 종극에 도달했지만, 종으로서의 인류는 그 발단에 서 있을 뿐이다.”(Benjamin, 1980b, 68)

 

자연과 인류 사이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도, 자연이 인간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또한 두 항의 변증법적 종합을 대표하게 될 제3항으로 이 두 항들이 능가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마치 둘이 제3항으로 그럴싸하게 지양됨으로써, 변증법적인 종합이 형성될 것이라는 얘기도 아니다]. 오히려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라는 벤야민의 모델에 따르면,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두 항의 사이’, 간격interval,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두 항 사이의 놀이play일 뿐이며, 일치되지 않은 채로 놓인 이것들의 즉각적인 성좌일 뿐이다. [여기서] 인간학 기계는 비인간적인 것의 중지와 포획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산출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을 더 이상 분절하지 않는다[인간학 기계는 더 이상 자연과 인간을 분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의 중지와 포획을 통해 인간을 산출한다]. 인간학 기계는 이른바 멈춰서 있다. , ‘정지상태에 있는것이다. 그리고 두 항들의 상호적 중지에 있어서, 아마 우리가 아무런 이름도 갖지 못하고 있고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떤 것이 자연과 인류 사이에 또아리를 틀고 있으며, 지배된 관계 속에서, 구원된[구출된] 밤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고[자리잡고] 있다.

벤야민은 이 책의 불과 몇 쪽 앞에 있는 가장 밀도 높은 아포리즘 중 하나에서, 이런 생명의 어슴푸레한uncertain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이 생명은 자신의 신비를 잃는 것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자연과 맺는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한다[관계로부터 해방된다]. 하지만 인간을 생명에 묶는 이 비밀스런 끈푸는 것이 아니라 끊어버리는 것은 완전히 자연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오히려 도처에서 자연을 벗어나고[능가하고] 있는 요소, 즉 성적 충족이다. 감각적[성적] 쾌락의 극한적 대전환에서, 이른바 비자연[자연일 수 없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 신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생명이라는 역설적 이미지 속에서, 벤야민은 새로운 비-인간성[인간일 수 없는 것]의 상형문자와도 같은 것을 적어둔다.

 

성이 충족됨으로써 남성은 자신의 신비로부터 해방된다. 다만 이 신비는 성욕에 있는 게 아니며, 성욕의 충족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충족에서야 비로소 이 신비는 풀리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게 된다. 그것은 남성을 생명에 연결시키는 끈에 비유할 수 있다. 여성이 이 끈을 끊어버리면, 남성은 죽음에 대해 자유롭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신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에 의해 남성은 새롭게 태어나고 바뀌게 된다. 그리고 연인이 남성을,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 떼어놓듯이, 여성은 남성을, 문자 그대로 어머니 대지로부터 떼어낸다. 이 여성이야말로 자연의 신비로부터 직조된 탯줄을 끊을 수 있는 산파인 것이다(Ibid., 62).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