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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웹진 수유너머 N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첫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일본인은 어떻게 슈미트를 읽어왔는가? 


일본에서의 슈미트 수용도 조금 언급해두죠. 일본에서는 독일만큼 슈미트에 대한 경계심은 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령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96)도 유명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1946)에서 슈미트의 논의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나치에 대한 관여 문제와는 분리된 형태로, 슈미트의 정치철학, 독특한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작업의 선수를 친 것은 히토츠바시대학교에서 가르쳤던 정치사상사가이자 홉스 연구자이기도 한 다나카 히로시 씨(田中浩, 1926-)입니다. 다나카 씨와 독일어학의 하라다 타케오 씨(原田武雄, 1926-2011)가 콤비를 이뤄 『독재』(1921), 『정치신학』(1922), 『대통령의 독재』(1929), 『합법성과 정당성』(1932), 『정치적인 것의 개념』 등 중요한 저작을 번역하고, 미라이샤(未来社)에서 간행했습니다. 다나카 씨는 슈미트 연구를 정리한 『칼 슈미트 : 마성의 정치학(カール・シュミット──魔性の政治学)』(1992)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다나카 씨는 『합법성과 정당성』의 「역자 후기」에서 70년대 초에도 슈미트 붐이 있었다고 하며, 그 배경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원래 1970년대 들어 약 7-8년 사이의 단기간이긴 했지만, 슈미트가 일본에서 유행한 것은 당시 일본 전국에서 불어 닥친 대학 민주화 투쟁에서 비롯된 ‘전후 민주주의’의 재물음이 문제로서 제기된 것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적을 놓치지 마라’, ‘적을 섬멸하라’라는 충격적인 ‘적-친구론’, 일상성을 단호히 부정하고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또 의회제 민주주의에 숨어 있는 모순의 날카롭게 각출하는 것 등등을 포함한 슈미트 이론은 경제적으로는 고도 성장기에 이르고 정치적으로는 안정적인 다수에 의해 드디어 보수화, 군사화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던 당시 일본의 정치, 사회 상황을 비판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데 매우 유효하고 적합한 이론으로서 일부에 의해 다수 사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슈미트의 이론도 본질적으로는 모두 전체주의의 입장에서 온 민주주의의 공격과 파괴에 직결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당면한 이론 구축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원용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 거기서 우리가 슈미트에게서 배운 것은 어디까지나 반면교사로서의 그것이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슈미트에게서 배운 것은 실로 많다. 



즉, 당시의 신좌파처럼 권력과 투쟁하기 위해서라며 ‘의회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성급하게 부르짖고, ‘친구/적’ 이분법을 강조하면, 자신들이 그 적보다 위험해져 버립니다. 그것을 명심하기 위해 슈미트를 반면교사로 삼아 배워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죠. 일반적으로 좌파·자유주의 계열 학자는 우파의 위험한 학자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다나카 씨는 위험한 사상가이기 때문에 제대로 연구한다는 자세를 계속 취했던 겁니다. 또 연구를 계속하면, 점점 골똘히 생각하는 게 강해지며, 위험한 사상가도, 건전하고 상식적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 있습니다만, 다나카 씨는 슈미트의 사상의 내용에 대해 반드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를 계속 취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번과 다음 회에 읽는 『정치적 낭만주의』(1919)는 정치사상가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하생인 하시가와 분소 씨(橋川文三, 1922-83)가 번역해서 미라이샤(未来社)에서 나왔습니다. 이것과는 별개로, 한나 아렌트(1906-75)의 『전체주의의 기원』(1951) 등도 번역한 오쿠보 카즈오 씨(大久保和郎, 1923-75)가 이 책의 제2판(1925)을 번역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미스즈쇼보(みすず書房)에서 간행됐습니다. 하시가와는 초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처음은 그다지 눈에 띠는 차이가 없으나 마지막은 제법 다릅니다. 이번 회는 입수하기 쉬운 미라이샤의 것을 텍스트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시가와가 번역한 『정치적 낭만주의』(1982)의 끝에 수록된 「본서의 독자에게」라는 대목에서, 본서를 번역하게 된 경위에 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번역은 적어도 하시가와 자신의 저서인 『일본 낭만파 비판 서설(日本浪漫派批判序説)』(未来社, 1960)의 간행 이전에 교정을 끝냈지만, 하시가와의 관심이 변화한 것 등도 있어서, 줄곧 책상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하시가와의 번역이 일본 낭만파 연구와 연동되어 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일본 낭만파 비판 서설』(1960, 65)은 일본 낭만파의 중심인물로 문예비평가인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 1910-81)이나 ‘근대의 초극’론[논쟁]에 참가한 카메이 카츠이치로(亀井勝一郎, 1907-66)와 히데오 코바야시(小林秀雄, 1902-83) 등, 전전(戦前)의 복고적 경향의 문학가에 관한 평론을 모은 책입니다. 야스다(保田)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야스다는 독일의 초기 낭만파의 이론가 프리드리히 슐레겔(Karl Wilhelm 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의 ‘아이러니Ironie’의 이론을 수용하고, 그것을 일본의 고전 해석에 응용하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슐레겔의 ‘아이러니론’에 관해서는 저의 석사논문을 책으로 낸 『근대의 갈등(モデルネの葛藤)』(御茶の水書房)에서 자세히 논했기에, 관심이 있으시면 읽어보십시오.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에서도 슐레겔의 ‘아이러니’에 관해 ― 부정적으로입니다만 ― 논해지고 있습니다. 슐레겔에게 슈미트와 야스다가 관심을 갖고, 이 두 사람에게 하시가와가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아이러니’란 간단히 말하면,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하거나 헌신·관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메타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토대에 있기에, 좀체 하나의 가치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헌신할 수 없습니다. 즉, ‘가치의 중지상태’를 산출하는 시선으로, 자기를 깬 눈으로 바라봅니다. ‘전체를 빈틈없이 모조리 보는 것[ベタ]’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초기의 슐레겔에게는 보수적·민족주의적인 요소가 그다지 없습니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에 열광하는 혁명적 심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1808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그 전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1773-1859)의 비서 비스무리한 일을 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점차 ‘민족Volk’적 가치, 공동체의 전통에 헌신하게 됐습니다. 아이러니한 ‘중지’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으로서의 민족, 전통, 교회로 ≪회귀≫했던 셈입니다. 슐레겔뿐 아니라 독일 낭만파의 논객 중 상당수가 그런 조국적인 것으로 전회했습니다. 그들은 아이러니를 견디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아이러니 때문에 굳이 무엇인가에 헌신하는 듯힌 포즈를 취하게 되었는지 ― 오츠 마사키 씨(大津真幸, 1958-)의 말을 빌리면, ‘아이러니한 몰입을 하는’ ― 평자마다 논의가 갈립니다만, 아무튼 낭만파가 점차 민족주의 운동에 합류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일본의 낭만주의자 야스다 요주로도 아이러니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를 중지상태에 놓으면서 민족적인 것으로 ≪회귀≫하며, 전쟁을 긍정하게 됐습니다. 하시가와 씨는 거기에 주목한 것입니다.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



이렇게 70년대에 다나카 씨, 하시가와 씨, 오쿠보 씨 등에 의해 슈미트의 저작이 번역되고 슈미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생겨났습니다. 법철학자인 나가오 류이치(長尾龍一, 1938-)도 70년대부터 슈미트 연구에 종사했으며, 몇 권의 번역서를 냈습니다. 나가오 씨는 슈미트의 라이벌에 해당되는 법실증주의의 한스 켈젠(Hans Kelsen, 1881-1973)의 연구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80년대는 슈미트 연구의 침체기였지만, 90년에, 도쿄대의 법사학(法史学)의 와니 아키라 씨(和仁陽, 1963-)가 주로 가톨릭교회와의 관계에서 초기 슈미트를 논한 『교회·공법학·국가 : 초기 칼 슈미트의 공법학(教会・公法学・国家──初期カール・シュミットの公法学)』(1990)이라는 연구서를 낸 무렵부터 슈미트 연구가 다시 활발해지고, 몇 권의 연구서가 나오게 됩니다. 90년대 중반 이후는 포스트모던 계열의 슈미트 재평가의 영향이 일본에도 전해지고 그런 움직임이 가속화됐습니다. 최근 들어 난잔대학교(南山大学)의 오오다케 코우치 씨(大竹弘二, 1974-)가 슈미트의 ‘국제법’ 사상 ―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국제법’이 아닙니다만 ― 에 초점을 맞춘 『정전과 내전 : 칼 슈미트의 국제질서사상(正戦と内戦──カール・シュミットの国際秩序思想)』(2009)을 냈습니다. 초기 슈미트는 국가주권과 국내법질서에 관해 논했습니다만, 나치 내부에서 고립됐던 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국제법으로 관심을 옮깁니다. 전후에는 『대지의 노모스』(1950)나 『파르티잔의 이론』(1963) 등,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국제적인 법질서를 논하는 저작을 냈습니다. 오오다케 씨는 그런 슈미트의 국제저인 법질서론, 특히 ‘정전(正戦)’론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로 슈미트 사상의 전체상, 변천과정을 묘사하려 했습니다. 



칼 슈미트, 그의 사상의 변천 


슈미트 사상의 변천에 관해 단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을 조금만 소개하겠습니다. 이 강의의 3회와 4회째에 『정치신학』을 읽는데요, 이 책의 제2판(1933)의 「서문」에 “법학적 사고의 세 유형”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법학적 사고는 크게 나눠서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유형,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유형,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유형, 이렇게 셋으로 나뉜다는 얘기입니다. ‘규범주의적’ 유형이란 미리 설정된 ‘규범’을 기점으로 사고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규범’은 선험적(a priori)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그 의미를 묻지 않으며, 여러 ‘규범’들의 논리적 조합에 의해 법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려 듭니다. 아마 가장 ≪보통≫의 법학적 사고입니다. ‘결정주의적’ 유형이란 그런 규범이 부재 혹은 중지되어 있는 상태에서의 정치적 결단을 기점으로 생각합니다. ‘제도주의적’ 유형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와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여러 제도들을 중시합니다. 도쿄대의 헌법학자인 이시카와 켄지 씨(石川健治, 1963-)는 제도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슈미트의 법학을 재고하는 『자유와 특권의 거리 : 칼 슈미트 ‘제도체보장’론 재고(自由と特権の距離──カール・シュミット「制度体保障」論・再考)』(1999, 2007)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법학적 사고의 세 종류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 미리 설정된 ‘규범’을 기점으로서 사고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 규범이 부재, 혹은 중지되어 있는 상태에서의 정치적 결단을 기점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나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제도들을 중시

    ↳ 중기 슈미트의 중요한 개념인 ‘구체적 질서 konkrete Ordnung’ 개념


슈미트는, 규범주의적 법적 사고, 특히 법실증주의에 반발하면서 점차 ‘결단주의’로 경도됐다. … 그것이 일반적인 이미지입니다만, 『정치신학』 제2판의 「머리말」에서 슈미트 자신은 ‘규범주의’적 사고와 ‘제도주의’적 사고도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기 슈미트는 법실증주의와의 대결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결정주의적인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그때까지 부각되지 않았던 제도주의적 사고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도주의적 사고는 중기 슈미트의 중요한 개념인 ‘구체적 질서konkrete Ordnung’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고 간주됩니다. 


‘구체적 질서’란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 살아가는 대지, 공간 속에 이미 존재하는 구체적인 질서를 가리킵니다. 법규범이 형식적·추상적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인 관념적 질서와는 다릅니다. 그 ‘구체적 질서’에 적합하게 여러 제도들이 형성되고 있기에 ‘법’은 ‘구체적 질서’를 전제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듯이, 합의에 기반하여 규범을 영(零, zero)에서 창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슈미트가 ‘구체적 질서’에 관해 말하게 된 시점은 나치의 정권 장악 가능성이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기에, 나치에 대한 영합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민족에게 ‘구체적 질서’가 있다고 해두는 게 민족의 생존공간(Lebensraum)의 확보를 주장하는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다만 슈미트 옹호 ― 아무래도 진정으로 옹호하기가 어려운 대목이지만 ― 의 입장에서 보면, 슈미트는 원래 완전한 무(無) 속에서의 ‘결단’에 관해 말했던 것이 아니라 ‘결단’을 통해 ≪발견≫되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전제로 논의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슈미트 연구자들 중에는 그렇게 보고, 슈미트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귀착되어야 할 ‘질서’의 형태는 당초 애매했으나, 슈미트가 사색을 거듭하는 가운데 점점 선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결단’을 할 뿐이지만, 완전히 무(無) 속에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통해 발견되어야 할 본래의 질서가 있다는 발상은, 하이데거의 ‘각오성[결단성] Entschlossenheit’과 비슷합니다. 하이데거의 ‘각오성[결단성]’은 완전한 무 속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로서의 자기의 운명을 규정하고 있는 ‘존재’ 자체와의 본래적 관계, 자기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재발견한다는 발상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졸저 『현대독일사상 강의(現代ドイツ思想講義)』(作品社)에서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슈미트의 사상과 일반적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독일 민족주의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사고의 계보가 있는데, 19세기의 독일 민족주의의 핵심에 있던 것은 ‘국민국가Nationalstaat’로서의 통일을 달성하고 프랑스나 영국 등의 서구 국가들과 대항하려고 한, ‘국민Nation’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동일성]을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프로이센 등 독일연방들의 연합군이 나폴레옹(1769-1821)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패배한 후,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08)이라는 강연을 하고, 독일어 교육을 철저히 해서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슈미트는 기본적으로 이런 ‘국민의식’ 형성의 필요성 같은 논의를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간주하는 유기체적 국가관의 계보도 있는데, 슈미트는 그런 비유적인 논의를 하지 않습니다.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기도 한 진화론적 인종주의도 슈미트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반유대주의적 논의를 하고 있지만, 이를 진화론이나 인종주의와 결부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치의 주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일단 그의 결단주의와 구체적 질서 사고가 통상적인 독일 민족주의와도 진화론적 인종주의와도 이질적이라는 것만은 확인해 둬야 합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를 읽다 ― ‘정치적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실제로 『정치적 낭만주의Politische Romantik』를 읽어보죠.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제목이 달려 있으니까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의인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헐뜯고 있습니다. 헐뜯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아무런 결실도 남기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 배경에는 그가 긍정적(positive*)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상, 가톨릭 보수주의의 질서 사상이 ― 슈미트의 눈에서 볼 때 ― ‘정치적 낭만주의’와 혼동되곤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뒤죽박죽이 되지 않도록 ‘정치적 낭만주의’를 명확히 정의하고 구별하는 것이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좁은 의미의 ‘낭만파’는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 동안 활약한 극소수의 문학가, 철학자에 한정되지만, ‘낭만주의적romantisch’이라는 형용사는 신비주의라든가 비합리주의, 옛날의 좋은 시대에 대한 동경 같은 다소 막연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편향 사상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각종 보수 사상과 낭만주의를 종종 혼동합니다. 참고로 〈romantisch〉는 일본어의 ‘로맨틱’에 상당하는 의미를 수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이보다는 일상어로서는 이런 의미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표현은 낭만주의의 일부가 어떤 시기부터 정치적 경향, 특히 복고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게 됐다는 전제에서, 그 일부의 낭만주의자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초기 낭만파의 가장 대표적인 논객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빈의회(1814)에서 주도권(initiative*)을 쥐고, 이후 유럽의 복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맡은 메테르니히를 섬겼습니다. 낭만파 문학가 중에는 슐레겔 말고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나, 복고주의적인 정치에 관여한 사람, 민족주의적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개별적 이미지가 합성되어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이미지가 형성됐기에, 정치적 낭만주의 ≒ 가톨릭 보수주의로 이해되는 것이 적지 않았던 셈입니다. 


슈미트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막연하기에, 가톨릭 보수주의와의 차이를 분명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서장」에서 ‘정치적 낭만주의’를 엄밀하게 정의하고, 이 명칭에 걸맞은 사람들의 범위를 점점 좁혀가는 것이 시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 사람의 이름이 줄줄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 중 상당수는 독일사·독일문학사에서 꼭 나오는 중요 인물들입니다. 예를 들어 첫머리에 이름이 나온 프리드리히 겐츠(Friedrich Gentz, 1764-1832)는 작가인 동시에 국가이론가로, 슐레겔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로 거점을 옮기고 메테르니히의 고문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낭만주의’의 주요 멤버로 간주됩니다만, 슈미트는 그를 “18세기의 고전주의적 정신을 뿌리내린 인간”이며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다고 보고 있죠. 고전적인 미의 형식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와 고전의 형식성을 넘어선 비합리주의적인 미를 지향하는 낭만주의는 서로 정반대 극에 있다고 간주됩니다. 


그리고 겐츠와 나란히 논의되는 경우가 많은 정치적 저널리스트인 요셉 괴레스(Johann Joseph Görres, 1776-1848)도 민주주의적 지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죠. 그는 당초 프랑스혁명에 열광했으나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에 반발하면서 점차 독일 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경도되며, 자유주의적 신문 『라이니쉐 메르쿠르der Rheinische Merkur』를 창간하고 반-나폴레옹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다만 독일 통일에 관해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대-독일주의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발매 금지 처분을 받습니다. 괴레스의 이상은 통일독일에서 기독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역사법학파의 시조로, 근대민법이나 국제사법(国際私法)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간주되는 프리드리히 칼 폰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 1779-1861)의 이름도 거론됩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낭만파의 핵심 멤버였던 작가 클레멘스 브렌타노(Clemens Brentano, 1778-1842)와 친구로, 그의 여동생과 결혼합니다. 그림형제(야곱(1785-1863), 빌헬름(1786-1859))는 원래 법학자로, 사비니의 제자입니다. 그런 그도 자신의 역사주의적 국가관 및 법학을 낭만주의의 그것과는 구별했다고 하며,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제외되어 있네요. 


이어서 스위스의 국가학자로, 모든 국가는 가족에서 발전했다고 하는 보수주의적 국가이론을 전개한 할러(Karl Ludwig von Haller, 1768-1854)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만, 슈미트는 그가 낡은 연역적 자연법이론에 의거하고 있다며 역시 제외합니다. 슈미트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낭만주의’에 기초하여 ≪보수주의적≫ 정치활동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인물을 제외했던 셈입니다. 즉, 가만 보면 슈미트가 평가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와 혼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빼고, 정말로 헷갈리기 쉬운 ‘정치적 낭만주의’만을 비판적으로 논평한다는 태세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외해 나가면서, 결국 단 한 명의 전형적인 정치적 낭만주의자를 남깁니다. 



그래서 본론으로서 아담 뮐러가 지금까지 의심할 여지없는 정치적 낭만주의자의 전형으로 남는다. 

[* 그러므로 아담 뮐러는 정치적 낭만주의자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전범으로 남아 있다(p.32).]




아담 뮐러




아담 뮐러(Adam Müller, 1779-1829)야말로 이 책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는 중심인물입니다. 뮐러는 철학자이자 국가이론가로, 1805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813년부터 오스트리아에서 일을 하게 되며, 메테르니히를 섬깁니다. 메테르니히에게 봉사하면서 국가론과 화폐론 등의 저작을 쓰고, (슈미트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뮐러는 독일의 경제사상사에서는 일단 중요인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경제사상사의 하라다 테츠시 씨(原田哲史, 1958-)가 뮐러의 사회사상 전반을 정리한 『아담 뮐러 연구(アダム・ミュラー研究)』(ミネルヴァ書房, 2002)라는 책을 냈습니다. 


뮐러뿐이라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인지, 슈미트는 또 다른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도 정치적으로 활동적이며, 특수한 의미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자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그도 마찬가지로 고찰해야 한다. 

[* 프리드리히 슐레겔도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도 또한 고찰돼야 한다(p.32).]



뮐러는 슐레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슐레겔을 통해 낭만파가 되며, 슐레겔 식의 비평이론을 자신의 철학의 기초로 삼고 있기에, 이것은 타당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레겔의 이론을 참조하는 것은 뮐러의 이론적 배경에 관해 파고들어 생각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이 두 사람은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가 활동한 것, 메테르니히의 복고적 정치에 관여한 것 등 공통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장대한 체계적·사상사적 관련성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의 구조를 검토하기 전에, 특히 아담 뮐러가 정치적으로 활동한 외부적 상황을 살펴봐야만 한다. 왜냐하면 임의의 이론구성이 아니라 정치적인 생명의 발현이 결정적인 특질이 문제라고 한다면, 정치적인 낭만주의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했는가라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점에서 보더라도, 버크, 드 메스트르 및 보날 같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아담 뮐러 및 슐레겔과 동일한 정치적 심성의 범주에 속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 하지만 지적-역사적이고 체계적인 관계의 토대 위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의 구조를 확인하기 전에, 한 명의 정치적 낭만주의자의 실천을 하나의 예에 입각해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자의적인 [이론] 구성이 아니라 삶의 정치적 표현의 결정적인 특이성에 관심을 갖는다면,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이 구체적 상황 속에서 행동한 방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이미 이 점에서 보더라도, 버크, 드 메스트르, 보날 같은 사람들을 아담 뮐러와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동일한 정치적 지성의 범주 속에 자리매김 하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진 설명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pp.32-33).]



‘외부적 상황Die äußere Situation’이란, 문맥에서 알 수 있듯이, 뮐러의 사상의 배경에 있는 그의 정치활동과 나폴레옹 시대부터 복고체제기에 걸친 정치정세를 가리킵니다. 이후 제1장 제목이 ‘외부적 상황’인 것은 그런 연유 때문입니다. 




보날                      드 메스트르                       버크



여기서 버크(1729-97), 드 메스트르(1753-1821), 보날(1754-1840)의 이름이 나옵니다만, 그들이 슈미트에게 중요한 사상가이고, 뮐러나 슐레겔 같은 ‘정치적 낭만주의자’와 함께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버크는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철학자·정치가로, 프랑스혁명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전통적인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근대에 있어서 정치적 보수주의의 원조가 된 인물입니다. 버크의 『프랑스혁명 성찰』(1790)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 방금 나온 겐츠입니다. 드 메스트르는 프랑스, 정확히 말하면 당시는 독립국이었던 사부아(Savoie)의 철학자·법률가로, 반혁명의 저술활동을 하고, 버크와 나란히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된 인물입니다. 보날 또한 프랑스의 반혁명 사상가로, 가톨릭교회의 무오류성을 믿고, 신권정치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버크는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결부된 영국의 독특한 국가체제를 옹호했고, 드 메스트르와 보날은 가톨릭적인 정치체제를 옹호했습니다. 슈미트는 이후의 저작에서도 가톨릭 보수주의자인 드 메스트르와 보날을 자주 인용합니다. 슈미트가 전통적인 교회조직과 결부된 정치조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교회와의 결부가 표면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보수주의≫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제1장에서는 방금 얘기했듯이, 아담 뮐러를 중심으로, 뮐러가 오스트리아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구해줬던 겐츠, 철학적으로 영향을 줬던 슐레겔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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