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웹진 수유너머 N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첫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일본인은 어떻게 슈미트를 읽어왔는가? 


일본에서의 슈미트 수용도 조금 언급해두죠. 일본에서는 독일만큼 슈미트에 대한 경계심은 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령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96)도 유명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1946)에서 슈미트의 논의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나치에 대한 관여 문제와는 분리된 형태로, 슈미트의 정치철학, 독특한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작업의 선수를 친 것은 히토츠바시대학교에서 가르쳤던 정치사상사가이자 홉스 연구자이기도 한 다나카 히로시 씨(田中浩, 1926-)입니다. 다나카 씨와 독일어학의 하라다 타케오 씨(原田武雄, 1926-2011)가 콤비를 이뤄 『독재』(1921), 『정치신학』(1922), 『대통령의 독재』(1929), 『합법성과 정당성』(1932), 『정치적인 것의 개념』 등 중요한 저작을 번역하고, 미라이샤(未来社)에서 간행했습니다. 다나카 씨는 슈미트 연구를 정리한 『칼 슈미트 : 마성의 정치학(カール・シュミット──魔性の政治学)』(1992)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다나카 씨는 『합법성과 정당성』의 「역자 후기」에서 70년대 초에도 슈미트 붐이 있었다고 하며, 그 배경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원래 1970년대 들어 약 7-8년 사이의 단기간이긴 했지만, 슈미트가 일본에서 유행한 것은 당시 일본 전국에서 불어 닥친 대학 민주화 투쟁에서 비롯된 ‘전후 민주주의’의 재물음이 문제로서 제기된 것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적을 놓치지 마라’, ‘적을 섬멸하라’라는 충격적인 ‘적-친구론’, 일상성을 단호히 부정하고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또 의회제 민주주의에 숨어 있는 모순의 날카롭게 각출하는 것 등등을 포함한 슈미트 이론은 경제적으로는 고도 성장기에 이르고 정치적으로는 안정적인 다수에 의해 드디어 보수화, 군사화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던 당시 일본의 정치, 사회 상황을 비판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데 매우 유효하고 적합한 이론으로서 일부에 의해 다수 사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슈미트의 이론도 본질적으로는 모두 전체주의의 입장에서 온 민주주의의 공격과 파괴에 직결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당면한 이론 구축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원용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 거기서 우리가 슈미트에게서 배운 것은 어디까지나 반면교사로서의 그것이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슈미트에게서 배운 것은 실로 많다. 



즉, 당시의 신좌파처럼 권력과 투쟁하기 위해서라며 ‘의회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성급하게 부르짖고, ‘친구/적’ 이분법을 강조하면, 자신들이 그 적보다 위험해져 버립니다. 그것을 명심하기 위해 슈미트를 반면교사로 삼아 배워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죠. 일반적으로 좌파·자유주의 계열 학자는 우파의 위험한 학자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다나카 씨는 위험한 사상가이기 때문에 제대로 연구한다는 자세를 계속 취했던 겁니다. 또 연구를 계속하면, 점점 골똘히 생각하는 게 강해지며, 위험한 사상가도, 건전하고 상식적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 있습니다만, 다나카 씨는 슈미트의 사상의 내용에 대해 반드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를 계속 취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번과 다음 회에 읽는 『정치적 낭만주의』(1919)는 정치사상가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하생인 하시가와 분소 씨(橋川文三, 1922-83)가 번역해서 미라이샤(未来社)에서 나왔습니다. 이것과는 별개로, 한나 아렌트(1906-75)의 『전체주의의 기원』(1951) 등도 번역한 오쿠보 카즈오 씨(大久保和郎, 1923-75)가 이 책의 제2판(1925)을 번역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미스즈쇼보(みすず書房)에서 간행됐습니다. 하시가와는 초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처음은 그다지 눈에 띠는 차이가 없으나 마지막은 제법 다릅니다. 이번 회는 입수하기 쉬운 미라이샤의 것을 텍스트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시가와가 번역한 『정치적 낭만주의』(1982)의 끝에 수록된 「본서의 독자에게」라는 대목에서, 본서를 번역하게 된 경위에 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번역은 적어도 하시가와 자신의 저서인 『일본 낭만파 비판 서설(日本浪漫派批判序説)』(未来社, 1960)의 간행 이전에 교정을 끝냈지만, 하시가와의 관심이 변화한 것 등도 있어서, 줄곧 책상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하시가와의 번역이 일본 낭만파 연구와 연동되어 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일본 낭만파 비판 서설』(1960, 65)은 일본 낭만파의 중심인물로 문예비평가인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 1910-81)이나 ‘근대의 초극’론[논쟁]에 참가한 카메이 카츠이치로(亀井勝一郎, 1907-66)와 히데오 코바야시(小林秀雄, 1902-83) 등, 전전(戦前)의 복고적 경향의 문학가에 관한 평론을 모은 책입니다. 야스다(保田)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야스다는 독일의 초기 낭만파의 이론가 프리드리히 슐레겔(Karl Wilhelm 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의 ‘아이러니Ironie’의 이론을 수용하고, 그것을 일본의 고전 해석에 응용하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슐레겔의 ‘아이러니론’에 관해서는 저의 석사논문을 책으로 낸 『근대의 갈등(モデルネの葛藤)』(御茶の水書房)에서 자세히 논했기에, 관심이 있으시면 읽어보십시오.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에서도 슐레겔의 ‘아이러니’에 관해 ― 부정적으로입니다만 ― 논해지고 있습니다. 슐레겔에게 슈미트와 야스다가 관심을 갖고, 이 두 사람에게 하시가와가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아이러니’란 간단히 말하면,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하거나 헌신·관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메타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토대에 있기에, 좀체 하나의 가치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헌신할 수 없습니다. 즉, ‘가치의 중지상태’를 산출하는 시선으로, 자기를 깬 눈으로 바라봅니다. ‘전체를 빈틈없이 모조리 보는 것[ベタ]’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초기의 슐레겔에게는 보수적·민족주의적인 요소가 그다지 없습니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에 열광하는 혁명적 심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1808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그 전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1773-1859)의 비서 비스무리한 일을 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점차 ‘민족Volk’적 가치, 공동체의 전통에 헌신하게 됐습니다. 아이러니한 ‘중지’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으로서의 민족, 전통, 교회로 ≪회귀≫했던 셈입니다. 슐레겔뿐 아니라 독일 낭만파의 논객 중 상당수가 그런 조국적인 것으로 전회했습니다. 그들은 아이러니를 견디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아이러니 때문에 굳이 무엇인가에 헌신하는 듯힌 포즈를 취하게 되었는지 ― 오츠 마사키 씨(大津真幸, 1958-)의 말을 빌리면, ‘아이러니한 몰입을 하는’ ― 평자마다 논의가 갈립니다만, 아무튼 낭만파가 점차 민족주의 운동에 합류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일본의 낭만주의자 야스다 요주로도 아이러니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를 중지상태에 놓으면서 민족적인 것으로 ≪회귀≫하며, 전쟁을 긍정하게 됐습니다. 하시가와 씨는 거기에 주목한 것입니다.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



이렇게 70년대에 다나카 씨, 하시가와 씨, 오쿠보 씨 등에 의해 슈미트의 저작이 번역되고 슈미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생겨났습니다. 법철학자인 나가오 류이치(長尾龍一, 1938-)도 70년대부터 슈미트 연구에 종사했으며, 몇 권의 번역서를 냈습니다. 나가오 씨는 슈미트의 라이벌에 해당되는 법실증주의의 한스 켈젠(Hans Kelsen, 1881-1973)의 연구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80년대는 슈미트 연구의 침체기였지만, 90년에, 도쿄대의 법사학(法史学)의 와니 아키라 씨(和仁陽, 1963-)가 주로 가톨릭교회와의 관계에서 초기 슈미트를 논한 『교회·공법학·국가 : 초기 칼 슈미트의 공법학(教会・公法学・国家──初期カール・シュミットの公法学)』(1990)이라는 연구서를 낸 무렵부터 슈미트 연구가 다시 활발해지고, 몇 권의 연구서가 나오게 됩니다. 90년대 중반 이후는 포스트모던 계열의 슈미트 재평가의 영향이 일본에도 전해지고 그런 움직임이 가속화됐습니다. 최근 들어 난잔대학교(南山大学)의 오오다케 코우치 씨(大竹弘二, 1974-)가 슈미트의 ‘국제법’ 사상 ―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국제법’이 아닙니다만 ― 에 초점을 맞춘 『정전과 내전 : 칼 슈미트의 국제질서사상(正戦と内戦──カール・シュミットの国際秩序思想)』(2009)을 냈습니다. 초기 슈미트는 국가주권과 국내법질서에 관해 논했습니다만, 나치 내부에서 고립됐던 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국제법으로 관심을 옮깁니다. 전후에는 『대지의 노모스』(1950)나 『파르티잔의 이론』(1963) 등,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국제적인 법질서를 논하는 저작을 냈습니다. 오오다케 씨는 그런 슈미트의 국제저인 법질서론, 특히 ‘정전(正戦)’론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로 슈미트 사상의 전체상, 변천과정을 묘사하려 했습니다. 



칼 슈미트, 그의 사상의 변천 


슈미트 사상의 변천에 관해 단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을 조금만 소개하겠습니다. 이 강의의 3회와 4회째에 『정치신학』을 읽는데요, 이 책의 제2판(1933)의 「서문」에 “법학적 사고의 세 유형”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법학적 사고는 크게 나눠서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유형,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유형,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유형, 이렇게 셋으로 나뉜다는 얘기입니다. ‘규범주의적’ 유형이란 미리 설정된 ‘규범’을 기점으로 사고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규범’은 선험적(a priori)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그 의미를 묻지 않으며, 여러 ‘규범’들의 논리적 조합에 의해 법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려 듭니다. 아마 가장 ≪보통≫의 법학적 사고입니다. ‘결정주의적’ 유형이란 그런 규범이 부재 혹은 중지되어 있는 상태에서의 정치적 결단을 기점으로 생각합니다. ‘제도주의적’ 유형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와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여러 제도들을 중시합니다. 도쿄대의 헌법학자인 이시카와 켄지 씨(石川健治, 1963-)는 제도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슈미트의 법학을 재고하는 『자유와 특권의 거리 : 칼 슈미트 ‘제도체보장’론 재고(自由と特権の距離──カール・シュミット「制度体保障」論・再考)』(1999, 2007)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법학적 사고의 세 종류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 미리 설정된 ‘규범’을 기점으로서 사고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 규범이 부재, 혹은 중지되어 있는 상태에서의 정치적 결단을 기점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나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제도들을 중시

    ↳ 중기 슈미트의 중요한 개념인 ‘구체적 질서 konkrete Ordnung’ 개념


슈미트는, 규범주의적 법적 사고, 특히 법실증주의에 반발하면서 점차 ‘결단주의’로 경도됐다. … 그것이 일반적인 이미지입니다만, 『정치신학』 제2판의 「머리말」에서 슈미트 자신은 ‘규범주의’적 사고와 ‘제도주의’적 사고도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기 슈미트는 법실증주의와의 대결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결정주의적인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그때까지 부각되지 않았던 제도주의적 사고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도주의적 사고는 중기 슈미트의 중요한 개념인 ‘구체적 질서konkrete Ordnung’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고 간주됩니다. 


‘구체적 질서’란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 살아가는 대지, 공간 속에 이미 존재하는 구체적인 질서를 가리킵니다. 법규범이 형식적·추상적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인 관념적 질서와는 다릅니다. 그 ‘구체적 질서’에 적합하게 여러 제도들이 형성되고 있기에 ‘법’은 ‘구체적 질서’를 전제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듯이, 합의에 기반하여 규범을 영(零, zero)에서 창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슈미트가 ‘구체적 질서’에 관해 말하게 된 시점은 나치의 정권 장악 가능성이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기에, 나치에 대한 영합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민족에게 ‘구체적 질서’가 있다고 해두는 게 민족의 생존공간(Lebensraum)의 확보를 주장하는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다만 슈미트 옹호 ― 아무래도 진정으로 옹호하기가 어려운 대목이지만 ― 의 입장에서 보면, 슈미트는 원래 완전한 무(無) 속에서의 ‘결단’에 관해 말했던 것이 아니라 ‘결단’을 통해 ≪발견≫되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전제로 논의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슈미트 연구자들 중에는 그렇게 보고, 슈미트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귀착되어야 할 ‘질서’의 형태는 당초 애매했으나, 슈미트가 사색을 거듭하는 가운데 점점 선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결단’을 할 뿐이지만, 완전히 무(無) 속에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통해 발견되어야 할 본래의 질서가 있다는 발상은, 하이데거의 ‘각오성[결단성] Entschlossenheit’과 비슷합니다. 하이데거의 ‘각오성[결단성]’은 완전한 무 속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로서의 자기의 운명을 규정하고 있는 ‘존재’ 자체와의 본래적 관계, 자기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재발견한다는 발상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졸저 『현대독일사상 강의(現代ドイツ思想講義)』(作品社)에서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슈미트의 사상과 일반적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독일 민족주의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사고의 계보가 있는데, 19세기의 독일 민족주의의 핵심에 있던 것은 ‘국민국가Nationalstaat’로서의 통일을 달성하고 프랑스나 영국 등의 서구 국가들과 대항하려고 한, ‘국민Nation’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동일성]을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프로이센 등 독일연방들의 연합군이 나폴레옹(1769-1821)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패배한 후,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08)이라는 강연을 하고, 독일어 교육을 철저히 해서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슈미트는 기본적으로 이런 ‘국민의식’ 형성의 필요성 같은 논의를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간주하는 유기체적 국가관의 계보도 있는데, 슈미트는 그런 비유적인 논의를 하지 않습니다.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기도 한 진화론적 인종주의도 슈미트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반유대주의적 논의를 하고 있지만, 이를 진화론이나 인종주의와 결부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치의 주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일단 그의 결단주의와 구체적 질서 사고가 통상적인 독일 민족주의와도 진화론적 인종주의와도 이질적이라는 것만은 확인해 둬야 합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를 읽다 ― ‘정치적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실제로 『정치적 낭만주의Politische Romantik』를 읽어보죠.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제목이 달려 있으니까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의인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헐뜯고 있습니다. 헐뜯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아무런 결실도 남기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 배경에는 그가 긍정적(positive*)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상, 가톨릭 보수주의의 질서 사상이 ― 슈미트의 눈에서 볼 때 ― ‘정치적 낭만주의’와 혼동되곤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뒤죽박죽이 되지 않도록 ‘정치적 낭만주의’를 명확히 정의하고 구별하는 것이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좁은 의미의 ‘낭만파’는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 동안 활약한 극소수의 문학가, 철학자에 한정되지만, ‘낭만주의적romantisch’이라는 형용사는 신비주의라든가 비합리주의, 옛날의 좋은 시대에 대한 동경 같은 다소 막연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편향 사상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각종 보수 사상과 낭만주의를 종종 혼동합니다. 참고로 〈romantisch〉는 일본어의 ‘로맨틱’에 상당하는 의미를 수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이보다는 일상어로서는 이런 의미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표현은 낭만주의의 일부가 어떤 시기부터 정치적 경향, 특히 복고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게 됐다는 전제에서, 그 일부의 낭만주의자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초기 낭만파의 가장 대표적인 논객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빈의회(1814)에서 주도권(initiative*)을 쥐고, 이후 유럽의 복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맡은 메테르니히를 섬겼습니다. 낭만파 문학가 중에는 슐레겔 말고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나, 복고주의적인 정치에 관여한 사람, 민족주의적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개별적 이미지가 합성되어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이미지가 형성됐기에, 정치적 낭만주의 ≒ 가톨릭 보수주의로 이해되는 것이 적지 않았던 셈입니다. 


슈미트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막연하기에, 가톨릭 보수주의와의 차이를 분명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서장」에서 ‘정치적 낭만주의’를 엄밀하게 정의하고, 이 명칭에 걸맞은 사람들의 범위를 점점 좁혀가는 것이 시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 사람의 이름이 줄줄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 중 상당수는 독일사·독일문학사에서 꼭 나오는 중요 인물들입니다. 예를 들어 첫머리에 이름이 나온 프리드리히 겐츠(Friedrich Gentz, 1764-1832)는 작가인 동시에 국가이론가로, 슐레겔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로 거점을 옮기고 메테르니히의 고문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낭만주의’의 주요 멤버로 간주됩니다만, 슈미트는 그를 “18세기의 고전주의적 정신을 뿌리내린 인간”이며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다고 보고 있죠. 고전적인 미의 형식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와 고전의 형식성을 넘어선 비합리주의적인 미를 지향하는 낭만주의는 서로 정반대 극에 있다고 간주됩니다. 


그리고 겐츠와 나란히 논의되는 경우가 많은 정치적 저널리스트인 요셉 괴레스(Johann Joseph Görres, 1776-1848)도 민주주의적 지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죠. 그는 당초 프랑스혁명에 열광했으나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에 반발하면서 점차 독일 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경도되며, 자유주의적 신문 『라이니쉐 메르쿠르der Rheinische Merkur』를 창간하고 반-나폴레옹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다만 독일 통일에 관해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대-독일주의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발매 금지 처분을 받습니다. 괴레스의 이상은 통일독일에서 기독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역사법학파의 시조로, 근대민법이나 국제사법(国際私法)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간주되는 프리드리히 칼 폰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 1779-1861)의 이름도 거론됩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낭만파의 핵심 멤버였던 작가 클레멘스 브렌타노(Clemens Brentano, 1778-1842)와 친구로, 그의 여동생과 결혼합니다. 그림형제(야곱(1785-1863), 빌헬름(1786-1859))는 원래 법학자로, 사비니의 제자입니다. 그런 그도 자신의 역사주의적 국가관 및 법학을 낭만주의의 그것과는 구별했다고 하며,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제외되어 있네요. 


이어서 스위스의 국가학자로, 모든 국가는 가족에서 발전했다고 하는 보수주의적 국가이론을 전개한 할러(Karl Ludwig von Haller, 1768-1854)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만, 슈미트는 그가 낡은 연역적 자연법이론에 의거하고 있다며 역시 제외합니다. 슈미트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낭만주의’에 기초하여 ≪보수주의적≫ 정치활동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인물을 제외했던 셈입니다. 즉, 가만 보면 슈미트가 평가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와 혼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빼고, 정말로 헷갈리기 쉬운 ‘정치적 낭만주의’만을 비판적으로 논평한다는 태세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외해 나가면서, 결국 단 한 명의 전형적인 정치적 낭만주의자를 남깁니다. 



그래서 본론으로서 아담 뮐러가 지금까지 의심할 여지없는 정치적 낭만주의자의 전형으로 남는다. 

[* 그러므로 아담 뮐러는 정치적 낭만주의자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전범으로 남아 있다(p.32).]




아담 뮐러




아담 뮐러(Adam Müller, 1779-1829)야말로 이 책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는 중심인물입니다. 뮐러는 철학자이자 국가이론가로, 1805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813년부터 오스트리아에서 일을 하게 되며, 메테르니히를 섬깁니다. 메테르니히에게 봉사하면서 국가론과 화폐론 등의 저작을 쓰고, (슈미트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뮐러는 독일의 경제사상사에서는 일단 중요인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경제사상사의 하라다 테츠시 씨(原田哲史, 1958-)가 뮐러의 사회사상 전반을 정리한 『아담 뮐러 연구(アダム・ミュラー研究)』(ミネルヴァ書房, 2002)라는 책을 냈습니다. 


뮐러뿐이라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인지, 슈미트는 또 다른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도 정치적으로 활동적이며, 특수한 의미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자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그도 마찬가지로 고찰해야 한다. 

[* 프리드리히 슐레겔도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도 또한 고찰돼야 한다(p.32).]



뮐러는 슐레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슐레겔을 통해 낭만파가 되며, 슐레겔 식의 비평이론을 자신의 철학의 기초로 삼고 있기에, 이것은 타당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레겔의 이론을 참조하는 것은 뮐러의 이론적 배경에 관해 파고들어 생각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이 두 사람은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가 활동한 것, 메테르니히의 복고적 정치에 관여한 것 등 공통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장대한 체계적·사상사적 관련성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의 구조를 검토하기 전에, 특히 아담 뮐러가 정치적으로 활동한 외부적 상황을 살펴봐야만 한다. 왜냐하면 임의의 이론구성이 아니라 정치적인 생명의 발현이 결정적인 특질이 문제라고 한다면, 정치적인 낭만주의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했는가라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점에서 보더라도, 버크, 드 메스트르 및 보날 같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아담 뮐러 및 슐레겔과 동일한 정치적 심성의 범주에 속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 하지만 지적-역사적이고 체계적인 관계의 토대 위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의 구조를 확인하기 전에, 한 명의 정치적 낭만주의자의 실천을 하나의 예에 입각해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자의적인 [이론] 구성이 아니라 삶의 정치적 표현의 결정적인 특이성에 관심을 갖는다면,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이 구체적 상황 속에서 행동한 방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이미 이 점에서 보더라도, 버크, 드 메스트르, 보날 같은 사람들을 아담 뮐러와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동일한 정치적 지성의 범주 속에 자리매김 하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진 설명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pp.32-33).]



‘외부적 상황Die äußere Situation’이란, 문맥에서 알 수 있듯이, 뮐러의 사상의 배경에 있는 그의 정치활동과 나폴레옹 시대부터 복고체제기에 걸친 정치정세를 가리킵니다. 이후 제1장 제목이 ‘외부적 상황’인 것은 그런 연유 때문입니다. 




보날                      드 메스트르                       버크



여기서 버크(1729-97), 드 메스트르(1753-1821), 보날(1754-1840)의 이름이 나옵니다만, 그들이 슈미트에게 중요한 사상가이고, 뮐러나 슐레겔 같은 ‘정치적 낭만주의자’와 함께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버크는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철학자·정치가로, 프랑스혁명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전통적인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근대에 있어서 정치적 보수주의의 원조가 된 인물입니다. 버크의 『프랑스혁명 성찰』(1790)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 방금 나온 겐츠입니다. 드 메스트르는 프랑스, 정확히 말하면 당시는 독립국이었던 사부아(Savoie)의 철학자·법률가로, 반혁명의 저술활동을 하고, 버크와 나란히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된 인물입니다. 보날 또한 프랑스의 반혁명 사상가로, 가톨릭교회의 무오류성을 믿고, 신권정치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버크는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결부된 영국의 독특한 국가체제를 옹호했고, 드 메스트르와 보날은 가톨릭적인 정치체제를 옹호했습니다. 슈미트는 이후의 저작에서도 가톨릭 보수주의자인 드 메스트르와 보날을 자주 인용합니다. 슈미트가 전통적인 교회조직과 결부된 정치조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교회와의 결부가 표면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보수주의≫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제1장에서는 방금 얘기했듯이, 아담 뮐러를 중심으로, 뮐러가 오스트리아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구해줬던 겐츠, 철학적으로 영향을 줬던 슐레겔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계속>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공개성의 근원 (9) : 대표와 민주주의

大竹弘二

atプラス 19호(2014년 2월)


공개성의 근원 (9) - 대표와 민주주의20151103.pdf



1. 대표의 양의성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치지배자가 궁정에서의 의례, 혹은 법을 뛰어넘는 ‘자비’에 의해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는 정치적 공론장1)은 시민혁명의 시대와 더불어 소멸한다. 하버마스의 유명한 정식에 따르면, 지배자가 자신의 위신을 화려하게 상연하는 ‘대표적 공공성’은, 이념[원론]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토의에 기초한 ‘시민적 공공성’으로 이행한 것이다. 이제 공공성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지배자의 ‘광채[빛]’가 현시되는 극장적인 정치공간의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다양한 법권리나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 합리적 의사소통의 공간이 된다. 정치의 공개성은 이제 권력의 가시적인 현전의 그것이 아니라, 담론적 토의를 통한 권력의 끊임없는 검증 가능성이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시민적 공공성의 중심을 이루는 정치제도는 토의를 그 본질로 하는 의회제이다.2) 그렇지만 의회주의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폭넓은 이해관심이 정치에 반영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는 비판이 자주 이뤄졌다. 의회는 때때로 ‘국민의 의지’와 합치하지 않는, 혹은 그에 반한다고 생각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의회를 특수한 부르주아적 제도라고 비판하는 과거의 사회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게 됐다. 의회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로서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일까? 대의제[대표제]로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대변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보다 직접민주주의적인 제도로 개량하는 것이 본래 바람직한 것인가? 의회주의에 대한 이런 불만은 ‘대의제(representative)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애매한 성격과 관련된다. 즉, ‘대표(representation)’라는 개념의 양의성이 의회의 역할에 관한 이해의 엇갈림·간극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의회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말해지고 있는가?

도대체 일본어로 ‘대표’라고 번역되는 ‘representation’이란 무엇인가?3) 그것은 원래, 국민의 의지든 특정한 사회계층이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해를 대리하거나 대변하는 것을 반드시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의 ‘대표제=대의적’ 민주주의에 관해 말해지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대중민주주의의 진전 속에서이다. 하지만 절대왕정기의 ‘대표적 공공성’이라고 말해지는 경우의 ‘대의’란,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대표(representative)’라는 말은 중세가 되어 그 전문 분야적인 용법이 확정되는데,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충실하게 ‘모사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현전화함’으로써 처음으로 그것에 실재성을 부여한다는 것도 뜻한다. 이 말은 중세의 신학적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필두로 하는 ‘신비체’로서의 교회라는 사상과 결합되어, 비가시적인 것의 인격적 가시화·구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런 대표 원리는 근세의 절대주의 국가에서도 전용되어 그 지배의 정당화4)의 기초가 된다. 이 ‘대표적인’ 정치적 공론장에서는 영광 있는[영광스런] 지배자가 사람들 앞에 현전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그 때문에 이런 의미의 ‘대표적’이라는 말에는 자주 ‘구현적’, ‘시위적’, ‘과시적’ 등등의 번역어도 배정된다). 즉, 대표에 있어서는 정치체이든 종교적 신비체이든, 하나의 질서가 상징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며, 바로 이것에 의해 비로소 그 질서가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신학에서 유래하는 이와 같은 대표 원리는 지배를 ‘위로부터’ 정당화한다는 성격을 강하게 띤다. 대표로서의 지배자는 결코 특정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해를, 하물며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질서는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대표자에 의해 ‘위로부터’ 구성된다. 따라서 이 정치신학적인 대표 개념은 권위주의적인 함의를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대립 개념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혁명 이후의 대의제[대표] 민주주의 아래서, 대표 이념은 민주주의와 결합된다. 그리고 19세기가 되면, 대표는 정치 질서의 가시적인 현시라기보다는 차츰 국민의 의견이나 이해의 대리 또는 대변이라는 의미를 강화하게 된다. 의회는 국민 또는 유권자의 이해의 대변자가 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질서를 상징적으로 ‘현전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민의 의지를 충실하게 ‘모사’하는 것이다. 즉, 국민이 발흥하고 있는 ‘사회적인 것’으로의 종속을 피할 수 없는 가운데, 여러 가지 경제적·사회적인 이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것이 대표라는 의원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표’의 본뜻에서 보면 하나의 추락으로도 보인다. 가령 칼 슈미트는 이 과정에 관해 “의회는 점점 더 정치 통일의 대표가 아니게 된다”5)고 표현한다. 의회에서의 토론 혹은 이해의 절충에는 어떤 영광도 기대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특히 19세기 이후의 독일에서는 ‘대표’와 ‘대리’를 구별하려고 하는 국법학[헌법학]적 담론이 누적되고, 단순한 (이익의) 대리에는 그치지 않는 대표의 의의가 강조된다.6)

이처럼 대표 이념과 민주주의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은 없으며, 오히려 근대민주주의의 발생기에서 이 둘은 대립하는 원리로서 나타났다. 이런 대립이 가장 명확하게 발견되는 것은 루소이다. 그의 민주주의론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정치의 극장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 다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과전서』에서 제네바에 극장건설을 제언한 달랑베르에 대해 루소는 유명한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1758)에서 반박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모든 시각적인 표상으로부터 순화된 순수민주주의이다. 루소에 따르면, 극장은 공화국에 해롭다. 고대 아테네의 예가 보여주듯이, 정치가 극장과 비슷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몰락한다. 왜냐하면 극장은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와 관객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시민들은 단순한 관중으로서, 정치가라는 배우를 보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에 의해 정치라는 무대는 공중으로부터 분리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슨 일이든, 그것을 연극에서 연기하면([mettre] en représentation au théatre), 그것을 우리에게 접근시키지 않고,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7) 루소가 보기에, 스토아적인 주인공의 항심(恒心)에 대한 ‘놀라움’에 의해서든, 비극의 주인공의 고난에 대한 ‘동정’에 의해서든, 연극이 관객에게 능동적인 작용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념을 환기시키는 것이든, 정치가 극장을 모델로 하여 이해되는 한, 시민이 단순한 수동적인 관중이 되어버린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주의란 상연되고 있는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하는 배우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 사이에서는 어떤 공동성도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모였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는 모두 혼자이고 외톨이가 됩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가 공화국에서 뭔가 ‘구경거리(spectacle)’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면, 그것은 민중 자신이 참여자로서 함께 행위하는 다양한 집회로서이다.9) 거기서는 이른바 관객 자신이 무대에 오르고 그 등장인물이 된다. 따라서 공화국의 축제는 반극장적인 극장이다. 그것은 대표(=표상)를 결여한 의사소통의 장에 다름없다.

정치에 관한 ‘안티 스펙터클’적인 이해는 아테네의 “극장지배(테아트로크라티아)”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이후 자주 보이게 된다(『법률』 3권 15). 그것은 종종 이성이 아니라 눈으로 판단하는 대중을 멸시하는 반민주주의적인 사상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렇지만 루소에게 민주주의는 오히려 극장 지배와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에게 극장에 맞선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같은 말이다. 인민주권이 완전히 달성되는 것은 극장적인 공간에서가 아니라 공중 앞에서 스스로를 극장적으로 제시하는 모든 대표자가 소멸함으로써이다. 주권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10)고 하는 『사회계약론』(1782)의 유명한 구절은 이런 스펙터클 비판의 관점에서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 이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 주권은 본질상 일반의지 속에 존재한다. 더욱이 일반의지는 결코 대표되는 것이 아니다.11)


대표가 있는 곳에서는 주권의 절대성이 훼손되며 주권자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게 된다. 루소는 인민주권을 그 순수성에 있어서 실현하기 위해 연기자와 관중 사이의 그 어떤 거리도 말소하려고 한다.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이 주권의 최고의 발현인 것이다. 정치는 인민‘의 앞에서의’ 실천이 아니라 인민‘에 의한’ 실천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크 주권의 기초인 대표 원리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은 바로 루소 안에서 가장 현저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어떤 국가형태든, 대표와 민주주의(‘동일성’)라는 양극을 이루는 두 개의 원리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대의제(대표) 민주주의란 본래의 ‘대표’ 개념에 관한 오해 위에서 성립되며, 이것들의 타협형태이다. 그의 이런 반의회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와는 별개로, 단순한 대리가 아닌 ‘대표’라는 뜻에 비추어 볼 때, 현대의 민주주의론의 상당수가 이것과는 대립하는 반-이미지적인 성격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하버마스처럼 담론적 토의에 의해 민주주의를 정초하려고 하는 심의민주주의적인 시도는 말할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믿지 않더라도, 적어도 정치적인 것의 극장화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보는 시각은 많은 논자들에게 공통적이다. 주지하듯이 기 드보르는 루소를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스펙터클 사회를 비판한다. “과거 직접 생겨났던 것은 모두, 표상(représentation) 속에서 멀어졌다.”12) 대표(표상)가 자립화되는 곳에서 인민은 그 스펙터클의 단순한 수신자, 혹은 소비자가 되어 정치로부터 소외된다. 권력으로부터 극장적인 성격을 빼앗고, 그 이미지성을 극복하는 것은 민주주의 이론의 계속적인 이상인 것 같다.


2. 죽음의 극장 : 영광의 신체와 그 종언?

역사적으로 보면, 프랑스혁명은 당장은 루소가 원했던 “대표적 공공성”의 극장장치의 해체를 수행한 듯이 보인다. 그것은 ‘죽음’의 상연이라는 바로크적 실천이 혁명과 더불어 의미를 상실했다는 사정 속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절대왕정 시기에는 죽음의 연극적 제시는 ‘대표적 공공성’의 한 가지 범형을 이루었다. 그것은 왕의 주권을 과시하기 위한 특히 주목해야 할 수단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미 거듭거듭 다뤄졌듯이, 왕을 순교자로 묘사하는 바로크 시기의 문헌들 속에서 간파할 수 있다. 『에이콘 바실리케(왕의 상)』(1649)의 찰스1세, 또는 그리피우스의 바로크 극장의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왕은 죽는 것을 통해서야 스스로가 주권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들에게 닥쳐온 비참은, 그들을 영광으로 높이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다. 군주에게 필요하다고 간주된 스토아적인 항심의 덕은, 바로 죽음의 경험을 참아내는 가운데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증명되고, 그것이 순교자인 왕에게 주권자로서의 존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의 너무도 유명한 분석이 보여주듯이, ‘죽음’을 통해 주권권력을 현현시키는 절대왕정기의 실천은, 범인에게 가해진 신체형의 ‘화려함=빛남(éclat)’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처형에서 수형자는 고문이 뒤섞인 여러 가지 잔인한 수단에 의해 사지가 불에 태워지거나 잘리곤 했다. 군중은 공개적인 장에서 행해지는 이런 스펙터클을 구경하러 모이고, 시간을 들여 잔혹하고 심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신체를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고통을 주면서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런 처형법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죄인에게 가한다는 단순한 동해보복(탈리오)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같은 죄를 저지를 자를 위협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가혹한 형벌이 가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체를 훼손하는 일련의 과정을 일종의 스펙터클로서 연출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권력에 영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용되는 폭력의 극단적임 자체가 사법의 영광의 일부분을 만드는 것이다. 즉, 죄인이 고문을 당하고 비명을 지르는 큰소리를 낸다는 것은, 사법이 부끄러워 해야 할 측면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법의 의례 자체인 것이다.13)


범죄에 의해 훼손된 것은 단순한 법 형식이 아니라 군주의 인격 자체이다. 그러므로 형벌은 단순히 죄에 걸맞은 벌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위신을 ‘광채[빛남]’ 속에서 회복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형이 공개적인 장에서 민중에게 목격될 필요가 있는 것은 그것이 군주의 영광을 현현시키는 대표적인 공공성의 의례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라신느의 비극이 인간 정념의 혼돈 속에서 출현[등장]하는 주권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형은 바로 수감자의 신체가 찢겨지는 광경을 통해 주권을 현전시킨다.


일단 상처 입은 주권을 부흥시키기 위해, 그것을 하나의 의식이라고 말하자. 신체형은 주권을 그 완전한 빛남[광채] 속에서 현시하면서 그것을 부활시킨다.14)


이런 영광의 의례인 한에서, 신체형은 그 자체로, 군주에 의해 내려진 ‘자비’와 같은 기능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체형의 집행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군주는 집행의 한복판에 자비에 의해 개입하고, 이를 중단시킴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그 으뜸가는 ‘광채[빛남]’ 속에 노출시킬 수도 있다.15)

신체형은 군주에게 영광을 부여하는 한편, 수형자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보여줄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의례의 두려움 때문에 “수형자에게 부과됐던 치욕은 동정 내지 영광으로 역전될 여지가 항상 있었다.”16) 즉, 수형자는 그 비참한 죽음에 따라서, 일종의 성인 혹은 순교자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형의 공포를 앞두고, 혹은 가혹한 형의 한복판에서 만인의 눈앞에 나타난다. 스토아적 항심의 덕은 군주에서 죄인으로 그 장을 역전시키고, 바로 수형자가 비극의 순교자 왕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때, 그 자가 저지른 범죄도 (군주에게 허용되는 것과 동일한) 영광을 수반하는 범죄자로서 사람들에게 찬양받게 되며, 민중 사이에서 범죄자의 영웅화가 행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군주의 비극적인 희생이든, 죄인에 대한 신체형이든, 죽음을 상연함으로써 주권을 찬양하는 앙시앙 레짐의 비극적 실천은 혁명과 더불어 소멸한다. 혁명은 대표적 공공성으로부터 궁정이라는 의례와 축제의 장을 빼앗을 뿐 아니라, 영광스런 처형을 제시하기 위한 무대 장치도 빼앗는다. 이때 결정적인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길로틴 처형의 보급에 다름 아니다.17)

혁명의 한복판인 1792년, 길로틴을 통한 참수는 정식 처형법으로 채택된다. 그것에 의해 집행에 시간을 필요로 하고 수형자에게 많은 고통을 줬던 절대왕정기의 다양한 처형법은 이 신속하고 고통 없는 ‘인도적인’ 처형법으로 통일된다. 동시에 이제 처형의 기계화가 이루어진다. 이 기술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유례없는 대량처형이다. 길로틴이라는 처형기계 없이는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이른바 자코뱅 독재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길로틴 형벌에 의해 초래됐던 것은 ‘처형의 민주화’18)이다. 이 형이 도입됨으로써 전에는 일반적이었던 것인 신분의 차이에 따른 처형법의 차별화도 이뤄지지 않게 된다. 또한 길로틴에 의한 참수라는 단순명쾌한 방법은 신체와 형벌 사이의 접촉을 한없이 순간적인 것으로 한다. 과거의 신체형과는 달리, 길로틴 형은 인간의 신체성과는 무관한 사건이다. 그것은 형의 집행인이 어느 정도 숙달된 기량을 갖추었는가, 혹은 수형자가 어느 정도 강인한 신체 혹은 정신력을 갖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죽음을 보장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수형자는 신체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귀책 능력이 있는 법적 주체로서 처벌받게 된다. 개별 인간의 물질적 신체성을 사상(捨象)하고, 그것을 보편 평등한 추상적 주체로 하는 근대 계몽의 이상은 길로틴과 더불어 그 실현으로 향하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길로틴 처형은 형벌을 신체적 스펙터클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같은 것에는 같은 것을>의 원칙에 따라 죄인에게 귀책을 행하는 근대적 처벌로 나아가는 첫발을 나타낸다. 이것에 의해 생기는 것이 처벌의 탈극장화에 다름 아니다. 처형은 민중에게 더 이상 각별한 흥미를 끄는 사건이 아니게 된다. 잘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기에 민중은 공개적으로 행해진 길로틴 처형에 몰려들고, 자주 그것에 환희를 느끼고 갈채를 퍼부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길로틴 처형은 과거의 신체형에 비해 볼거리로서의 성격이 현저하게 옅어지고, 민중은 그것에 열광한다기보다는 공개 처형 자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주게 됐다는 것이 실상인 듯하다.19) 순식간이자 대량으로 행해진 혁명기의 길로틴 처형은, 이전의 처형에 있었던 연극적·종교적 분위기를 잃게 됐다. 거기서는 이제 어떤 비극성도 느껴지지 않게 되며, 수형자에게서는 그 성스러움을 빼앗게 되는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이제 처형을 통해 영웅적으로 죽을 수는 없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기에는 처형을 대신해 종종 자살이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죽음의 수단으로서 선택된 것이리라.20) 실제로 이 시기에는 정쟁에서 패배하거나 수감되기도 한 정치가의 상당수가 처형되기 전에 스스로 죽는 것을 택했다. 이 ‘영웅적 자살’의 유형에도 고대 스토아파의 윤리가 강하게 영향을 줬음을 간파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프랑스 혁명의 정치가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영웅에 빗대고 이들의 행동거지를 모방했는데, 그들은 그 비참한 죽음에서조차 인간적 자유의 궁극적 징표로서의 자살이라는 로마 시대의 스토아적인 이상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기에는 구체제 하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것, 즉 자살을 연극적으로 제시하는 시도가 행해지게 된다(자크 루이 다비드의 회화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죽음의 상연이라는 대표적 공공성의 무대 장치를 자기 것으로 하려 했다.

마찬가지로, 혁명기에서 절대왕정의 판타시즘의 흔적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공포정치 종료 후인 1795년 무렵에 일어났던 길로틴의 비인간성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다.21) 즉, 길로틴 형에 처해진 목이 처형 후에도 의식이 남아 있는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의학논쟁이다. 독일의 과학·해부학자 사무엘 토마스 폰 젠메링(Samuel Thomas von Soemmerring)의 연구에 의해 지지된 견해[所説]에 따르면, 몸통에서 분리된 목은 한동안 의식을 유지하며 고통을 계속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길로틴 형은 결코 인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신체형에 못지않게 잔혹한 형벌임을 뜻한다. 의식의 중추를 머리에서 찾는 이 생리학적 관점에서의 길로틴 반대론은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체(정치적 신체)라는 ‘왕당파적인’ 국가표상에서 그 대응물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려나간 후에도 계속 살아 있는 머리라는 이런 악몽은, 의학·생리학자인 피에르 카바니스에 의해 반박된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신체 전체의 유기적 기능이 공동 작용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의 통일적 순환이 끊어진 시점에서 의식은 소멸된다. 머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체라는 이 ‘공화파적인’ 생리학적 견해와 더불어, 국가를 인간 신체에 의해 구현화하는 절대왕정기의 상징적 이미지는 종언을 맞게 될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유명한 반박서에서 계몽과 이성의 ‘기계론적 철학’을 따르면 “우리의 제도가 어떤 인격 속에서 체현”되지 않게 된다고 한탄한다.22) 이른바 공화국이란 신체를 잃은 정치체(정치적 신체)라는 셈인 것이다.

길로틴 형은 “대표적 공공성”에서 보여진 가시성의 정치의 종언을 범례적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구체제 하의 처형에 있어서 죽음이 띠던 아우라를 상실케 했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게 되며, 그 죽음은 그저 무명의 죽음이 된다. 이제 수형자가 처벌 속에서 자신의 오욕을 영광으로 전화시킬 수 없다. 이리하여 19세기 이후, 개별 범죄는 단순한 익명의 사건, 무수한 데이터의 한 사례가 되며, 범죄자는 갱생 또는 관리를 행하는 통치 실천의 대상으로 변용된다. 군주에 의한 것이든, 범죄자에 의한 것이든, 더 이상 법 침해 행위가 ‘광채[빛남]’ 아래에서 찬양될 수 없게 된 것이다.


3. 의회주의의 미학 : 공화국의 정치적 신체

그러나 근대의 정치적 공론장은 정말로 극장모델로부터 손을 떼려고 했을까? 근대 민주주의는 미적 표상에 의한 정당화를 거부하고 정치적 스펙터클에서 부정적인 가치만 찾아냈을까? 사실상 정치 질서를 가시적으로 현현시킨다는 의미에서의 ‘대표’ 관념은 시민 혁명 이후의 민주주의 안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시각적인 ‘대표적 공공성’에서 담론적인 ‘시민적 공공성’으로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이해는 너무도 도식적이다. 상징적 대표에 기초한 전근대의 정치공간에도 이미 담론적 의사소통이 존재했듯이, 시민적 토의를 이상으로 삼은 근대의 정치공간에서도 대표적 현전의 계기는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토론을 그 주요 기능으로 삼는다고 간주되는 의회에 관해서도 들어맞는다. 즉, 근대의 의회제를 구성하는 요소들 안에서는 주권자의 영광의 현시라는 낡은 정치적 기능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단순히 유권자의 이해나 국민의 의견의 ‘대리’에 머물지 않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측면이 겉으로 드러날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가 “왕의 그림자 속에서”(필립 마노우) 검토해야 할 것은 대표로서의 의회가 지닌 미학적 성격이나 다름없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1년 9월 3일 국민의회에서 제정된 이른바 <1791년 헌법>은 루이16세기의 처형과 자코뱅독재에 앞서 프랑스사상 최초의 헌법이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데, 그 3편 2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모든 권력이 그것에서 유래하는 국민은, 파견대표(위임, délégation)에 의해서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랑스 헌법은 대표제적(représentative)이다. 대표자는 입법부와 국왕이다.23)


이 헌법은 행정부의 대표적 성격을 부정하는 한편, 입법부와 국왕이라는 이원대표제를 채택했다. 이들은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표’의 역할을 국민의 의견과 이해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이전의 바로크적인 대표 관념을 계승한 것이며, 그 기능은 국왕과 의회 사이에서 분유되고 있다. 즉, 정치 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국민’은 이들 대표자를 통해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다.

국민의 대표에 대한 이런 규정은 시에예스에서 그 이론적 기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개개인의 이해의 단순한 집합 이상의 것인 ‘인민의 의지’는 대표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대표만이 통일된 인민이다. 국민의 통합은 바로 대표일 뿐인 통일된 인민의 의지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대표를 넘어서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대표가 유일한 조직체이다. 분산된 인민은 조직체가 아니며, 그것은 하나의 의지를 갖지도 않으며, 하나의 생각을 갖는 것도 아니며, 뭔가 하나의 것이 결코 아니다.24)


 여기서 보이는 시에예스와 루소의 단절은 분명하다. 인민의 의지는 대표로서만 존재하는 한, 대표 없는 직접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시에예스에게 의회제는 ‘간접’ 민주주의 따위가 아니라 이상적인 민주주의 형태나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인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 보면 의회제는 직접민주주의의 단순한 대체물로 볼 수 없다. 즉, 그것은 근대 국가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된 제도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의회주의의 질적 우위를 강조하는 담론은 역사적으로 거듭 나타났다. 예를 들어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은 『영국 헌정론』(1876)에서 의회의 ‘교육적 기능’을 주장하고, 선량(選良)으로서의 의원은 국민 여론을 이끄는 역할을 갖는다고 말했다.25) 만약 대표에 의해 비로소 국민의 의지가 구성된다면, 국민과 대표자를 연결하고 대표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거’는, 그것이 어떤 제도를 취하든, 대표를 대표답게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본질적인 것은 아니고, 우연적으로 채택된 절차라고 간주되기까지도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의원이 (국민 전체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판단에만 따르는) ‘자유위임’에 근거하여 행동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선거구민의 의지와 이해에 종속되는) ‘명령위임’에 근거하는가 같은 친숙한 헌법학적 문제에는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은 근대 의회주의가 여전히 ‘대표적 공공성’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의례적·미학적인 계기를 통해 정당성을 산출해 왔다는 점이다.

근대의 의회는 담론적이라기보다는 종종 상징적인 의사소통의 장이 됐다.26) 즉, 그것은 의례적인 수사나 이미지를 매체로 하여 대표(=표상)을 제시한다는 성격도 갖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궁정의 전례가 주권의 절대성을 대표했다고 한다면, 의회에서 대표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인민이다. 그것은 단순한 국가의 통일이 아니라 국민의 통일을 대표한다. 즉, 거기서는 평등한 국민으로 이루어진 정치질서라는 것이 사람들의 눈앞에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국민 전체가 법권리상 혹은 경제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국민이 실제로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국민은 평등하다는 의제를 가시화시키는 것이 문제이며, 사실로서 국민이 대등하게 민주적 토의에 참가한다기보다는 그렇다고 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한 가지 예로, 근대의 의회건축에서 채택된 회의장의 공간배치를 들 수 있다.27) 그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지했음을 알 수 있다. 왜 (영국이라는 예외를 빼고) 많은 나라의 의회 본회의장은 반원형의 의식과 그것에 대면하는 연단 사이의 조합이라는 배치를 취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민혁명기에 유행한 신고전주의적 건축의 고대로의 회귀를 나타낼 뿐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반원형의 극장을 모방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 때 나온 의회건축 계획에서는, 국민 전체의 통일성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한 양식으로서, 의석을 완전히 원형으로 배치하는 것이 상당수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장된 이후 1798년부터 의사당이 된 파리의 부르봉궁전에서 볼 수 있듯이, 최종적으로는 그런 원형 플랜을 억누르고, 연단을 정면에서 보는 반원형의 의식이라는 배치가 보급된다. 이것은 단순한 기능적인 편리성 때문에 채택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원형의 의석에 앉는 것은 국민 각층으로 구성된 의원들이다. 거기서는 사회의 다양성이 가능한 한 충실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근대국가란 차이화를 수반하는 통일이다. 따라서 차이성과 동시에 인민의 통일성도 표현되어야 한다. 연설자가 선 연단이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즉, 연단은 왕의 죽음에 의해 공백이 된 국가의 중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제 각각의 연설자들은 (자신의 의석이 아니라) 그 연단에서 국민의 이름으로 연설한다. 그리고 의석의 의원들은 관중으로서, 무대 위의 연설자를 목격한다. 따라서 반원형의 의석과 연단의 조합은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지닌 국민국가를 상징하는 것에 다름없다. 그때마다 연설자에 의해 채워진 공허한 연단은 국가의 (부재의) 머리이며, 사회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의원들이 앉는 좌석은 그 몸통이다. 그런 한에서 의회는 이른바 공화국의 새로운 상징적 신체이다.

이런 왕의 정치적 신체의 유산은 근대 의회주의의 또 다른 요소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국민의회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주도 하에서 선언된 의원의 인신의 불가침 원칙이 그렇다.28) 이른바 불체포특권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듯이, 과거의 절대 군주가 행하는 의원의 자의적인 체포를 방지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국민의 대표체(coprs représentatif)”에 대해서는 어떤 권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의 표현이며, 이런 한에서 대표로서의 국왕의 신체가 갖고 있던 불가침성의 흔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슈미트는 이 특권을 “의회가 가진 대표로서의 성격의 한 가지 귀결”29)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대외적인 대표로서의 외교관의 신체의 불가침성과도 닮은 것이며, 과거 왕의 신성성을 이어받은 것에 다름없다.

그렇다면 푸코처럼 왕정 하의 국왕의 신체와 똑같은 기능을 맡는 “공화국의 신체라는 것은 없다”,30) 혹은 르포르처럼 “민주주의 사회는 유기체적 전체성의 표상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로서, 신체 없는 사회로서 창설된다”31)고 진단하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의회제는 종종 절대왕권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 대표로서의 역할도 담지했다. 즉, 열린 장에서 투명한 논의를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는 어떤 정치질서도 이룩할 수 없는 무정형의 인민을 주권자로서 현전시킨다는 기능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사회적 이해의) 대리자로는 맡을 수 없는, 영광으로서의 대표 기능에 다름없다. 여기서 의회는 직접민주주의의 부득이 한 대용물에 머물지 않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은 결코 루소가 몽상했던 대표 없는 순수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여전히 자신에 관한 상징적 이미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의회주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토의의 공개성이라는 전제를 무조건 수긍할 수는 없다. 근대의 의회는 종종, 토의를 통한 합리적 결정에 의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국민의 대표라는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집행권에 대립해왔다. 독일 통일 후의 제정기에서 독일 제국의회는 그 한 가지 예를 이루고 있다.32) 프랑스의 1791년 헌법에서 볼 수 있는 이원대표의 문제가 계속 남아 있던 19세기 독일에서 제국의회는 집행권을 가진 또 다른 대표인 황제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신문·미디어와의 협력 아래서 스스로를 국민 대표로서 상징화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을 시도하게 됐다. 즉, 여기서 공개성이란 이미지 전략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로서의 정당성은 ‘담론적’이 아니라 ‘미적’ 공개성을 통해 조달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국가에 대한 경제·사회적 세력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의원이 단순한 이익대리가 됨에 따라, 대표로서의 의회의 역할은 변질된다. 그리고 의회의 결정이 점점 더 비밀스런 이해 절충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가운데, ‘미적’이든 ‘담론적’이든, 대표로서의 의회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될 터이다. 슈미트가 개탄하는 바에 따르면, 당대의 의회는 “보이지 않는 권력 보유자의 사무소 내지 위원회로 들어가는 하나의 커다란 옆문(Antichambre)”33)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적 이익집단에 의한 토론의 이념의 이런 타락은 원래 근대 의회주의가 토론 절차 자체의 공개성을 반드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는 간주하지 않았던 것의 내재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모든 결정과정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인민에게 열린 형태로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가라는 문제보다도, 얼마나 결정을 상징적·의례적으로 정당화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 종종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의 공개성은 결코 계몽의 이념이 상정하듯이, 이성적인 비판의 심급이 될 수 있는 정치의 근본원칙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원칙이 아니라 단순한 수단, 즉 대중조작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정당화의 도구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과정을 정치원릭 비밀에서 공개로 이행하는 것이락 파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비밀의 실천뿐 아니라 공개성조차도 통치의 에코노미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과정으로 간주할 수 없을까?34) 즉, 통치는 더 이상 기밀과 음모를 조종함으로써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보를 공개하다는 것이 종종 효율적인 정치 운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근대의 통치는 그것을 수단으로 이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공개성의 유용성인 것이다. 여기서 공개성은 비밀과 마찬가지로, 통치를 위한 전술적 장치나 다름없다. 근대정치에서 공개성의 원칙이 점점 중요하다고 간주되기에 이른 것은, 사실상 이런 통치 메커니즘의 재편성의 징후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끝)



1) [옮긴이] 공공권(公共圈)은 공론장으로 옮긴다.


2) [옮긴이] 일본의 경우 의회제와 의회주의, 민주제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같이 쓴다. 이때 둘의 차이는 제도적 측면을 더 강조하느냐 이념이나 원리를 더 강조하느냐에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둘 다를 의미하기 위해 데모크라시라고 음차하기도 한다.


3) 대표 개념에 관해서 참조한 것은 Hasso Hofmann, Repräsentation, Berlin 1974: Adalberr Podlech, «Repräsentation», in : Otto Brunner et al. (Hg.) Geschichtliche Grndbegriffe, Bd5, Stutgart 1984, S.509-547. ; 칼 슈미트, 『憲法論』, 阿部間総裁/村上義弘 訳, みすず書房, 1974년, 제16장 및 24장, 나아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真理と方法I』, 轡田収ほか 訳, 法政大学出版局, 1986년, 205, 282頁.


4) [옮긴이] 정통화, 정통성은 각각 정당화, 정당성으로 옮긴다.


5)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364頁.


6) Vgl. Hofmann, Repräsentation, a.a.O., S.15-37.


7) 루소, 『연극에 관해 :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演劇について ダランベールへの手紙)』, 今野一雄 訳, 岩波文庫, 1979, 56頁.


8) Ibid., 42頁.


9) Ibid., 224頁.


10) 루소, 『사회계약론(社会契約論)』, 桑原武夫/前川貞次郎 訳, 岩波文庫, 1954, 42頁(인용은 원문을 참조하여 수정).


11) Ibid., 133頁.


12)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スペクタクルの社会)』, 木下誠 訳, ちくま学芸文庫, 2003, 14頁.


13) 미셸 풐코, 『감시와 처벌[監獄の誕生]』, 田村倣 訳, 新潮社, 1977, 39頁.


14) Ibid., 52頁. (번역 수정).


15) Ibid., 56頁.


16) Ibid., 14頁.


17) 길로틴의 도입이 공개처형에 초래한 변화에 관해서는 ドリンダ・ウートラム, 『フランス革命と身体』, 高木勇夫 訳, 平凡社, 1993, 7장 참조. Dorinda Outram, The Body and the French Revolution. Sex, Class and Political Culture, Yale University Press, 1989.


18) Ibid., 184頁.


19) Ibid., 193頁.


20) Ibid., 6장 참조.


21) 이 논쟁에 관해서는 Philip Manow, Im Schatn des Königs, Frankfurt a.M. 2008, S.97ff ; ウートラム, 『フランス革命と身体』, 앞의 책, 187-190頁[Dorinda Outram, The Body and the French Revolution. Sex, Class and Political Culture, Yale University Press, 1989] 및 ダニエル・アラス, 『ギロチンと恐怖の幻想』, 野口雄司 訳, 福武書店, 1989, 66-89頁[Daniel Arasse, La Guillotine et l’Imaginaire de la terreur, Paris : Flammarion, 1987.] 참조.


22)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의 성찰(フランス革命の省察)』, 半漆孝麿 訳, みすず書房, 1978, 99頁.


23) Zit, nach : Podlech, »Repräsentation«, a.a.O., S.526. 이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 개념의 의미에 관해 논하는 것은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246-247頁. ; 이 밖에도 Hofmann, Repräsentation, Gallimard 1998, p.27-63.


24) Cité par Rossanvallon, Le people introuvable, ibid. p.38.


25) 월터 배젓, 「영국헌정론(イギリス憲政論)」, 『世界の名著60 バジョット, ラスキ, マッキーヴァー』, 辻淸明責任編集, 中央公論新社, 1970, 172, 201-204頁.


26) 근대의 의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미학적 표상 전략에 관해서는 최근 급속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Vgl.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Andreas Schulz / Andreas Wirsching (Hg.), Parlamentarische Kulturen in Europa. Das Parlament als Kommunikationsraum, Berlin 2012; Jörg Feuchter / Johannes Helmarth (Hg.), Parlamentarische Kulturen vom Mittelater bis in die Moderne, Reden-Räume-Bilder, Berlin 2013.


27)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S.16-56. ; Philip Manow, »Kuppel, Rostra, Sitzordnung-das architektorische Bilderprogramm moderner Parlamente«, in : Feuchter / Helmrath, Parlamentarische Kulturen vom Mittelalter bis in die Moderne, a.a.O., S.115-129.


28)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S.64-75.


29)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336頁.


30) 미셸 푸코, 「권력과 신체(権力と身体)」, 中澤信一 訳, 『미셸 푸코 사고집성5(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V)』, 筑摩書房, 2000, 373頁.


31) 클로드 르포르, 「민주주의라는 문제(民主主義という問題)」, 本郷均 訳, 『現代思想』 23권 12호, 1995, 49頁.


32) 제정기의 독일 제국의회에 의한 자기 상징화의 실천들에 관해서는 Andreas Biefang, Die andere Seite der Macht : Reichstag und Offentlichkeit im »System Bismark«, 1971-1890, Düsseldorf 2009.


33) 칼 슈미트, 『현대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現代議会主義の精神史的地位)』, 稲葉素之 訳, みすず書房, 2000, 11頁(번역 수정).


34) Cf. Michel Senellart, Les arts de gouvener, Seuil, 1995, pp.279-284.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공개성의 근원 (5) : 위장과 은폐의 바로크

글쓴이 : 大竹弘二

출처 : AT플러스 15 : 2013년 2월, 96-114쪽.


공개성의 근원 (5) - 위장과 은폐의 바로크20151102.pdf


1. 현인과 대중

근대정치의 출발점에는 종교전쟁이라는 일종의 예외상태가 있었다. 이런 아노미상태를 통치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 자주 통상적인 법이나 도덕을 훌쩍 뛰어넘는 국가이성이다. 규범에 어긋나는 이런 비상수단은 근대초기에는 특히 정치 지배자에 의한 ‘위장’의 문제로서 제기됐다. ‘위장(simulatio)’과 ‘은폐(dissimulatio)’는 바로크시기에 특히 선호된 정치적 주제 중 하나이다. 그것은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지배자가 지녀야 하는 ‘사려(prudence)’1)로 생각됐던 것이다. 정치학자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 1547∼1606)는 저서 『정치학』에서 여우로서의 군주의 소질을 언급하면서 ‘정치적 사려’에는 일정한 속임수가 포함된다고 말한다.


비록 물이 약간 섞였다고 해도 포도주는 포도주이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몇 방울의 기만이 섞였다 해도, 사려는 여전히 사려이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은 좋은 목적을 위한 소극적인 기만이다.2)

(4권 13장)


립시우스는 이 속임수를 동반하는 사려, 즉 ‘불순한 사려(prudentia mixta)’의 사용을 분명히 인정한다. 립시우스를 비롯한 타키투스주의자들에게 위장 기술은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되는 정치수단이며, 나아가 통치를 행하는 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할 정치수단이나 다름없다. 이상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 120?)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이다.3)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미덕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 중에서 본심을 감추는 성향을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다”4)(4권 71절).

정치지배자는 거짓말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중을 향하는 공적인 이야기와 정치의 심오함을 통달한 약간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의례[密儀]의 이야기로 분열된다. ‘정치적 사려’란 소수자를 수신자로 한 비교적(秘教的)인 지식이나 다름없다. 근대초기의 이런 사상에서 간파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이후의 ‘현인’이라는 이상이다. 특히 근대 초기에는 립시우스로 대표되는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 아래서 이런 현인론에 근거한 처세담5)이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근대 초기의 이런 ‘현인’은 단순히 관조적 생활에 몰두하는 비정치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스토아적 현인은 여기서 마키아벨리즘 또는 타키투스주의와 결부돼 있다. 즉, 그는 아르카나(arcana)6)나 국가이성이라는 비밀의 정치적 지식을 조작하는 정치 엘리트이다. 이리하여 근대초기의 정치이론에서는 오로지 소수의 지배자를 위해 쓴 ‘군주감(Fürstenspiegel, Miroirs des princes)’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제왕학 문헌이 일대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대중용과 현인용이라는 이중적 이야기하기의 사상의 고대적 원천은 타케투스만이 아니다. 그것은 주지하듯이, 지배자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종중 유익하다고 역설한 플라톤의 『국가』에서 이미 발견되는 것이며(389B-C), 이것은 일반적으로 ‘고귀한 거짓말’(414B)로서 인구에 회자된다. 플라톤 이후의 이런 비교(秘敎)주의를 정치철학의 전통의 핵심으로 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이다. 그는 현대에서는 망각된 ‘행간에 쓰기’라는 기법을 계몽주의 이전의 근대철학자 속에서 발견하려 한다.7) 그에 따르면, 근세의 철학적 저작에는, 아마도 18세기의 레싱에 이르기까지, 공교(公敎)와 비교(秘敎)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독특한 저술 기법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계몽주의의 지평에 이르는 현대의 우리는 은폐하면서 진리를 개시한다는 기법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말하듯이 16/17세기에서는 책의 비교성이 큰 문제계를 이루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비밀의 지식을 포함한 저작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될 필요가 없으며, 잘못된 자의 손에 넘어가면 그 내용이 파괴되고 만다. 그 때문에 예를 들어 당시의 스페인에서는 타키투스의 저작이 널리 출판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아주 일부 사람을 위한 초고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고, 또 알노르트 크라프마의 아르카나론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 노데가 집필한 『쿠데타에 관한 정치적 성찰』(1639년)은 소수의 정지지배자에게 보낸 저작으로, 초판을 겨우 12부만 인쇄했다. 이런 문맥 속에서 대중과 거리를 취하는 스토아적 현인이 이 시대의 모범이 됐던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당시의 ‘군주론’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이성론과 결합됨으로써 엘리트주의적 비밀정치, 즉 일종의 ‘철인정치’를 정당화하게 된다.

다른 한편, 계몽주의 철학이 추구한 것은 이렇게 스스로를 비교의 영역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18세기에 등장하는 역사철학의 도움을 빌려 수행된다. 계몽의 시대에도 확실히 비밀의 영역은 존재한다. 즉, 시간적인 미래라는 영역이다. 자신의 의도를 은닉하는 지배자와 대중 사이에 존재한 ‘관찰의 비대칭’은 이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시간적인 비대칭’으로 전이된다.8) 근대에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은 미래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진행에 의해 밝혀지게 될 비밀이다. 역사철학적인 진보신앙은 모든 비밀의 폭로를 필연적이게 한다. 비밀이나 거짓말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일정한 시간적 유예 후에 결국에는 반드시 진리가 겉으로 드러난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해명했듯이, 근대 역사철학은 계몽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즉, 아르카나는 ‘역사철학의 비밀(arcana)’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 혁명의 승리와 아르카나의 폐절은 미리 예정된 것이다.9)

반면 철학의 비교성이라는 반근대주의적 입장에 천착하는 스트라우스에게는 철학적 진리와 정치 사이의 가교에 대한 회의가 있다. 그때 그의 관심은 엘리트에 의한 ‘철인정치’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자가 겪는 박해의 문제에 있었다. 철학자가 이중의 저술 기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리를 공개적으로 개시함으로써 다름 아닌 정치적 박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비교적 이야기 속에서 철학자는 자신의 내면적 자유를 보존한다. 박해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 철학적 저작은 비교성을 띤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박해와 저술 기법의 이런 관련은 대중이 철학자를 탄핵한다고 관해 말했던 플라톤에서 시작되며(『국가』 494A), 마이모니데스 등 중세 유대-이슬람 철학을 거쳐 홉스나 스피노자 같은 근세 유럽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트라우스에게 이런 사상의 자유의 확보는 현대의 대중사회 상황에서도 여전히 철지난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관조적 삶의 우위라는 고대 그리스적인 이상으로 은퇴하게 된다.

스트라우스 자신의 이런 입장에 동의하느냐 여부는 차치하고, 박해와 비교주의에 일정한 관계가 있음은 확실하다. 왜 비밀과 은폐의 몸짓이 특히 근대 초기의 정치적·철학적 담론 속에서 이렇게도 많이 발견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저작에 대중용과 현인용의 이중언어가 발견된다는 것은 이미 누차 지적되었는데, 이루미야후 요벨은 스트라우스의 테제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오로지 특수한 유대인적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즉, 종교적 박해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은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베리아의 개종 유대인인 ‘마라노’의 경험이다.10) 그렇지만 이 시대 철학에서의 비교주의는 결코 스피노자나 유대인에게 특유한 것이 아니며, 마라노성으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근대초기의 정치철학에서 위장의 문제는 더 일반적으로 종교전쟁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 아래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종교분열의 시대, 스피노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배자의 압제에 의한 것이든, 대중의 광신에 의한 것이든, 박해의 위험을 앞두고 자신의 신앙과 내면성을 위장하도록 강제당했다. 거기서는 내면과 외면의 분리는 극한까지 확대된다. 위장과 은폐는, 이것이 군주의 국가이성적 술책 때문이든, 피박해자의 내면적 자유의 보호 때문이든, 이 내전의 시대에 특유한 몸짓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신의 참된 의도를 은닉함으로써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크적인 ‘현인’의 처세술이나 다름없다.


2. 내전 시대의 군주감(君主鑑) : 덕에서 사려로

그러나 사실상 위장과 은폐는 근대 초기의 정치적 담론에서는 오로지 지배자를 위한 ‘군주감’이라는 장르 속에서 다뤄진 주제였다. 이런 비밀 정치의 권유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은 군주와 시민 사이의 가교 불가능한 간극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제시된 것이 16세기 전반까지 겨우 존재했던 공화주의적 정신의 소멸이다. 그때까지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번창하던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는 전란 속에서 진전되고 있던 군주로의 집권화 앞에서 쇠퇴한다. 이와 더불어 공화주의적 시민은 정치의 장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이른바 수동적인 단순한 신민으로 탈정치화된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강하게 간직하고 있던 공화주의에 대한 신뢰는 메디치가의 중신(重臣)이 됐던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에게서는 극히 희박해진다. 1527년부터 30년에 걸쳐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의 전제(専制) 지배에 대한 최후의 공화주의적 저항이 행해졌을 때, 귀차르디니는 동시기에 집필한 잠언집 『리코르디』에서 시민의 정치관여에 관해 비관적인 전망을 말했다. “정청(政庁, 팔라초palazzo)와 광장(広場, plazza) 사이에는 매우 짙은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거나 혹은 두꺼운 벽으로 차단되어 있기에, 인간의 눈을 갖고서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11)

이런 변화와 더불어,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시민의 공화주의적 자유가 정치사상의 관심사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군주의 통치술이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된다. 바로크 시기에는 인문주의적 공화주의가 군주의 변명론으로 대체된 것이다. 여기서 다뤄지는 것은 더 이상 공화정 아래서의 시민이 갖춰야 할 덕이 아니라, 군주에게 필요하다고 간주된 덕이다. 현인이어야 할 군주에게 바쳐진 심오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일련의 ‘군주감’은 공화주의의 종언의 표식에 다름 아니다.

확실히 군주감은 이미 세네카 등 고대 로마의 스토아주의자에 의해 선호되고, 중세에서도 계속 존재했던 전통적인 장르이다. 거기서 문제가 됐던 것은 유덕한 군주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의무론이며, 폭군이 되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이것은 고대 스토아파의 군주감이든, 중세의 그리스도적인 군주감이든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폭군과 유덕한 군주, 혹은 전제(専制)와 진정한 왕제(王制)를 구별하는 문제설정은 근대 초기에 종교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서서히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평온과 질서의 회복이 사람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가운데, 이런 규범적 구별을 도입하는 것은 자주 저항권이나 폭군방법을 정당화하고 내전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기피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초기에 등장한 군주감은 전통적인 군주감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한다. 즉, 그것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주의 처세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단순히 유덕하다는 것은 더 이상 군주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음모나 반란의 가능성에 항상 노출된 군주가 그 위험을 피하려면 덕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자주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전통적 군주감이 상정했듯이, 군주는 도덕적 혹은 신학적으로 완벽한 이상적 인격을 갖출 필요가 없다. 만인이 모범으로 삼는 존재일 필요도 없다. 적대성 속에서 살아가는 군주는 위장과 비밀에 의해 사람들을 속이면서 통치를 수행해야 한다. 이 시대의 군주감에서 역설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교활한 사려인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전통적인 군주감의 스타일을 따른 저작이면서도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12) 그가 말하는 역량(virtu)은 그 이전의 군주감이 문제 삼았던 덕(virtus)이 아니다. 그는 영원불변한 군주의 인격 이상에 관해 말하는 덕론(徳論)과는 무관하다. 『군주론』에서는 군주의 바람직한 이상상을 역설하는 군주감이 “꿈에서나 나올 법한 군주에 대한 이야기”라며 버림을 받는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모습을 보려고도 알려고도 않은 채,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으로 논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13) (15절).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무시간적인 도덕 규범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군주의 역량(virtu)은 급진적으로 시간화된 세계 속에서, 시기에 따라 그때마다 자신의 외관을 바꿔가는 능력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주가 어떤 내면성과 인간본성이 아니라, 그 외양이나 평판에 다름없다는 점이다.

『군주론』에서 거듭 강조되는 것은 군주에게 명성이나 평판이 어떻게 결정적으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군주는 실제로 어떠한가보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 의한 위장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군주는 앞서 말한 좋은 기질은 무엇부터 무엇까지 현실에서 갖추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갖추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니 대담하게 이렇게 말해두자. 이렇게 훌륭한 기질을 갖추고 있고, 애지중지 지키는 것은 해롭다. 갖추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유익하다고 말이다.14) (18절)


이것은 단순한 ‘마키아벨리주의’적인 권모술수를 역설하는 게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군주의 힘이란 그가 대중 앞에 현전하는 이미지 속에 있다는 것이다. 힘을 지닌 자란 힘을 갖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군주는 자신의 외양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군주론』에서는 어떻게 민중의 존경을 얻어내야 하는가, 혹은 미움을 받고 경멸당하는 것을 피해야 하는가를 말한다(19절). 외적(外敵)에 대해서든, 국내의 음모·반란에 대해서든, 군주는 자신의 명성과 평판을 가장 유효한 무기로 쓸 수 있다.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름 아닌 위장의 달인이다.

이리하여 16세기 후반 이후의 타키투스주의적인 군주감에서도 위장은 중요 주제가 된다.15) 립시우스의 『정치학』도 군주감의 겉모양[体裁]16)을 취한 저작이지만, 거기서는 ‘덕’과 더불어 정치생활의 두 가지 기둥을 이루는 원리로서, 기만을 포함한 ‘사려’가 말해진다. 올란드[네덜란드] 독립 전쟁 속에서 몇 번이나 개종을 반복하면서 자주 ‘카멜레온’이라고 야유를 받은 립시우스 자신도 종교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위장하는 법을 몸에 익혔다고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가이성·아르카나論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시피오네 암미라토(Scipione Ammirato)의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에 관한 논설(Discorsi sopra Cornelio Tacito ; Discourses upon Cornelius Tacitus)』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장사를 하는 상인과 마찬가지로 비밀 장부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권장하며, 지배자의 위장이나 기만을 옹호한다.17) 아르놀트 클라프마르(Arnold Clapmar)의 『공무의 아르카나에 관해(De arcanis rerum publicarum)』에서도 6권(libri sex)의 전편에 걸쳐 아르카나 실천의 일부로서의 ‘위장’(simulacra)이 논의된다.18) 또한 타키투스주의는 1600년 전후에 엘리자베스 왕조의 잉글랜드에도 전파되고, 특히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에섹스 백작 주변의 동아리에서 관심을 끌었는데,19) 그 중 한 명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도 『수상록』(1597/1625)의 제6편을 ‘위장과 은폐’에 관해 고찰을 할애한다. 그는 “지식은 힘”이라고 논한 자연과학적 연구자에 어울리게 위장의 술책을 비판하고 있으나, 일정한 유보 아래서 역시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가운데, 내전 상황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위장의 기술의 사용을 거부한 미셸 드 몽테뉴 같은 도덕주의자는 예외였다고 하겠다. 위그노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썼던 『에세이』(1580/88)에서는 이렇게 단언한다.


왜냐하면 요사이 크게 대접받고 있는 분장이나 위장 같은 새로운 덕에 관해서는, 나는 이것을 철저하게 미워한다. 또 모든 덕 중에서 나는 이것에 마음의 비겁하고 야비함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20) (2권 17장)


그러나 다른 한편, 몽테뉴의 친구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샤론의 『지혜에 관해』(1601)도 내전 시대의 처세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저작이지만, 그 속에서는 불신이나 불성실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에서는 “개인에게 악덕인 듯한 은폐는 군주에게는 극히 필요 불가결하다”고 말한다21)(3권 2장 7).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위장은 살아남기 위해 불가결한 처세술로 의식됐던 것이다.


3. 문명, 의례, 위선

외양을 가장 중시하는 듯한 삶의 방식은 군주뿐 아니라 상류계급의 궁정인 전반이 익혀야 할 이른바 ‘예의범절[격식]’로서 서서히 정착된다. 따라서 유명한 발타자르 카스틸리오네(Balthazar Castiglione)의 『궁정인(Il Libro del Cortegiano ; The Book of the Courtier)』(1528)이나 조반니 델라 카사(Giovanni della Casa)의 『예의범절(격식, Galateo)』(1558) 같은 궁정 예법을 위한 입문서도 이 시대에 특징적인 저작 장르이다. 궁정인으로서 바람직한 행동거지에 관해 상세하게 해설한 이 저작들에서 설파되는 것은 인격적 도야 등이 아니라 복장, 대화법, 식사 방식 등 사교상의 일정한 양식이다. 거기에는 의례나 예법[격식] 같은 것에 대한 매우 형식주의적인 집착이 있다. 궁정인에게는 상품(上品)으로 보이는 외양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궁정생활은 이른바 ‘가면’의 삶이다. 거기서는 외견상의 행태야말로 유덕함을 증명한다. 궁정인들은 타자 앞에서 연극적으로 자기를 제시함으로써 살아간다. 이런 외견과 현전성이 우위에 선 가운데 절대 왕정기의 ‘대표적 공공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예절 입문서는 근대 초기 민중문화로부터 상층계급의 철수를 보여준다. 이미 역사가 피터 버크(Peter Burke)가 밝힌 대로, 일찍이 중세에서는 상층문화와 하층문화의 구별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귀족이나 지배자도 민중의 축제(카니발)에 참여했고, 길거리의 예능인이나 광대도 왕 앞에서 연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층계급은 대중으로부터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왕후·귀족은 품위 있는 예법과 세련된 행동을 익힘으로써 야만적이고 몽매한 민중문화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하려 한 것이다.22)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더 넓은 관점에서 상층계급의 예법의 이런 유행을 ‘문명화 과정’의 결정적인 첫걸음으로 간주하고 있다.23) 그는 이 시대의 ‘예의(civilité)’ 개념 속에서 ‘문명(civilisation)’ 개념의 근원을 찾아내려 한다. 예의범절 같은 외면적 형식을 통해 정념의 발로를 억누르고 자신의 행동양식을 통제하는 ‘궁정적 합리성’이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일종의 자기 감시 메커니즘이며, 이로부터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근대적 개인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 슈미트도 이 시대의 ‘정치’, ‘내치(polizei)’와 더불어 ‘예의(Politesse)’ 개념의 출현을, 그가 생각한 문명화, 즉 유럽 공법 아래서의 전쟁의 제한과 관련짓는다.

겉보기의 효과에 집착한 바로크 시기의 현인론으로 특히 유명한 것이 스페인의 예수회 계열의 사상가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an)의 『신탁 지침 및 사려의 기술(Oráculo manual y arte de prudencia)』(1647)이다.24) (19세기에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번역에 의해 알려지게 되기 이전에) 이미 동시대의 프랑스에서 『궁정인』이라는 제목으로 보급된 이 저작에서는25) 궁정인에게 전형적인 삶의 방식, 즉 행위의 형식을 갖추는 것에 통한 처세술이 설파되고 있다.


어떻게 잘 해낼 것인지가 모든 사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남에게 주는 인상이 좋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교묘하게 파악한다. 우아한 행동거지는 생활을 화려하게 한다. 품위 있는 행동을 마음에 새긴다면, 어떤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26) (14번)


마키아벨리를 격렬하게 탄핵한 가톨릭 예수회의 회원이지만, 그의 이 저작에서는 틀림없이 마키아벨리즘 또는 타키투스주의의 흔적이 발견된다. 즉, 현명한 삶의 방식이란 위장에 의한 삶인 것이다.


사물은 실제 내용보다 겉보기가 버젓이 통용되는 것이다. … 요점은 겉보기에 좋은 것이 내용의 완벽함을 보여주는 최상의 표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27) (130번)


이 시대의 처세담에서 오로지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라는 행위의 형식이다. 이처럼 가시적인 외면의 형식에 기초한 궁정세계의 정치적 공공공간은 자신의 본질을 결코 밝히지 않는 바로크적인 침묵과 은폐의 몸짓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도덕론자들(moralist)의 저작에는 이처럼 외견상의 행동거지나 격식에 의해 지배된 궁정 세계에 대한 신랄한 눈길을 간파할 수 있다. 라 로슈푸코(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의 『잠언집』(1665) 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세간에서 말해지는 미덕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이해관계’를 폭로하고, 미덕의 허위성을 보여주려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미덕은 대부분의 경우 위장된 악덕에 불과하다.”28) 그렇지만 그는 이른바 도덕가가 아니며, 이러한 세태에 대한 윤리적 비판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덕의 사용은 종종 처세에 유용한 사려로 간주된다.


악덕은 약을 조제하는 데 독이 사용되듯이, 미덕의 조제에 사용될 수 있다. 사려가 이를 혼합하고 완화하여, 인생의 고난에 잘 듣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29) (182번)


그는 그저 미덕과 악덕이 뒤섞인 ‘위선’으로서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비판적 관찰자에 머물고 있다.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이다”(218번).30)

라 브뤼에르(Jean de La Bruyère, 1645~1696)도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풍속을 풍자한 저작 『캐릭터들(Les Charactères)』(1688)에서 이렇게 위선으로 가득 찬 세태를 묘사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거짓말쟁이이다. 진리는 단순하고 자연스럽지만, 인간은 외관과 장식을 욕망한다”(제16장 22).31) 이것은 특히 궁정생활에서 현저하게 간파할 수 있다. 궁정인이야말로 본심을 속이고 처신할 수 있는 위장의 달인이다. “궁정풍을 잘 아는 사람은 몸짓도 안색도 얼굴도 자유자재로 한다. 좀처럼 속마음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흉한 것도 못 본 척하며 적에 대해서도 미소를 지으며 불쾌감도 꾹 누르고, 정념도 가장하며, 심정은 거짓부렁이고, 자신의 본심과는 거꾸로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이들의 위대한 세련도 필경 허위라는 부덕일 뿐이다”(제8장 2).32)

라 로슈푸코나 라 브뤼에르가 이런 책들을 집필했던 17세기 후반은, 위그노 전쟁이 종결된 것은 물론이고 프롱드의 난(1648-53년)33)도 이미 진압되고, 절대왕정이 그 기초를 확고히 다진 루이14세의 시대이다. 그러나 위장에 의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과거의 내전 시대의 불신과 의심의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궁중의 내부로 전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프랑스의 도덕론자들의 저작이 보여주는 것은 절대왕정기의 궁정생활이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야만 하는 내전 속에서의 삶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는 통찰이나 다름없다. 이런 한에서 이들은 저 타키투스주의적인 내전이론가들의 틀림없는 후예인 것이다.


4. 대중에 대한 공포

위장을 하는 정치지배자들의 삶과 대중의 삶 사이의 거리를 넓힌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종교전쟁의 격화(escalate)이다. 종교개혁에 따른 대립과 혼란의 확대는 지배자와 지식인들에게 정동적인 존재로서의 대중에 대한 경멸 혹은 공포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의례나 격식[예법]을 통해 스토아주의적으로 정념을 억누르려 하는 현인에 대해, 비이성적인 대중은 격정의 발로를 억누를 수 없으며 광신으로 흐르게 된다. 대중용으로는 다른 말투를 사용하는 지배자의 이중언어도 이로부터 요청된다. 지배자에게 현인이기를 요구하는 이 시대의 담론이 보여주는 것은 이런 대중 멸시 혹은 대중공포의 의식이다.

대중에 대한 경멸적 감정은 얼핏 보면, 아직 종교전쟁이라는 문제와 무관했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존재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인상과는 반대로, 그는 여전히 민중이라는 존재에 높은 정치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확실히 민중은 지배자를 그 외양만으로 평가하는 것이며, 때문에 군주는 오명이나 악평을 당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수법34)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군주의 지배의 안정성은 바로 민중에게서 나오는 평판에 의존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키아벨리에게서 정치지배는 뭔가의 초월적·신학적 근거에 의해 ‘위로부터’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념과 상상력에 의해 ‘아래로부터’ 한정되는 것이다. 반면, 귀차르디니의 『리코르디』에서는 곳곳에서 민중에 대한 가차 없는 모욕적 발언을 찾아볼 수 있다. “인민을 말한다는 것은 미쳐 날뛰는 짐승을 말한다는 것과 같다. 이 놈들은 셀 수 없는 실수와 바보 같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35) “인민에 관해 말하는 자는 바로 광인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견해가 없고 오류투성이의 도깨비인 것이다”36) 운운.

이런 대중 멸시는 신스토아주의자들의 사려론에서 특히 현저하다. 정념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의 억견은 현인(혹은 현인이어야 할 군주)에게 장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립시우스는 『정치학』에서 민중의 특징을 ‘쉽게 바뀐다’, ‘정념에 사로잡힌다’, ‘판단력을 결여한다’, ‘국가를 무시한다’ 등등으로 일일이 열거하며(4권 5장),37) 그들을 정치적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스토아적 현인론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샤론의 『사려에 관해서』에서도 “지혜에 있어서 두 가지 악 혹은 두 가지 명백한 장애물”인 “민중의 억견이나 악덕” 및 “정념”이 지적되며,38) 이것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2권 1장). 이런 “대중에 대한 공포”는 스피노자에게서도 여전히 보인다. 그의 『신학정치론』(1670)은 ‘철학적 독자’만을 겨냥한 것이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권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포, 희망, 증오, 분노 등의 정동에 휩쓸리고 편견이나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민중은 자유로운 철학을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39)

정념적 존재로서의 대중에 대한 이런 인식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정동을 이용한 정치 전략도 산출하게 된다. 즉, 종교를 통한 대중의 정념의 통제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종교의 이런 정치 이용을 권장한다.


공화국이나 왕국의 주권자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의 토대를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 이렇게 해두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각각의 국가에 종교적 분위기를 침투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 국내의 질서가 갖춰지고, 그 통일도 강고해진다. 설령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종교적인 분위기를 무르익게 할 것 같은 것이라면, 뭐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40) (1권 12장)


귀차르디니도 더 경멸적인 말투를 사용해 대중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종교라든가 혹은 신의 이름과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바보들의 두뇌에서 터무니없이 커다란 힘을 휘두르기 때문이다.”41)

근대정치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중세에서 종교의 정치적 우위를 부정한 것이다. 정치는 이제 종교로부터 자립함으로써 종교를 자신의 도구로 삼을 가능성도 입수하게 된다. 자율적 시스템으로서의 근대 정치 아래서 종교는 자주 정치에 의해 이용된다. 즉, 타키투스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는 대중용 수사학으로 환원되며, 미신이 깊이 박혀 있는 대중의 지배수단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암미라토는 타키투스론에 대한 보론에서 종교적 외경심을 품게 만듦으로써 시민은 쉽게 지배자에게 따른다고 주장한다.42) 클라프마르도 『공무의 아르카나에 관해』에서 “종교에 의해 민중을 사로잡을 것”을 주장하고, 이를 가장 효과적인 아르카나 기술이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하는 “교묘하게 고안된 정략(ton politeion sophismata)”(1297a, 1308a) 등을 언급하면서, 고대 이후 종교에 의한 위장은 대중 지배를 위한 유효한 수단이었다고 강조되고 있다(2권 9장).43)

그렇지만 국가이성·아르카나 논자들도 종교를 노골적으로 단순한 권력수단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종교가 이처럼 정치에 종속되는 것은 단순히 비도덕적인 권력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공 안녕과 질서 유지라는 공공복리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전쟁 상황에서 종교 분열을 극복하고 평화를 확립하는 길을 바로 종교에 대한 정치의 우위 속에 발견하려 했다. 예를 들어 립시우스는 현명한 생각을 갖춘 군주라면 국민에게 종교적 통일성을 강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종교는 통일의 창설자이며, 혼재하는 종교로부터는 항상 혼란이 생긴다”(4권 2장).44) 립시우스는 국가의 종교로부터 일탈하는 자는 엄하게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종교적 불관용 때문에 자주 비판을 받지만, 그의 이런 입장은 국가의 안정에는 종교의 통일이 불가결하다는 신념에서 나온다.45) 『에세』에서 신앙의 이름 아래 정치 반란을 일으켰던 위그노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과거의 종교를 준수해야 한다고 역설한 몽테뉴의 종교적 보수주의도 내전의 억지라는 마찬가지의 관심에서 유래한다. 이런 사상 안에서 신앙에 대해 주권자가 결정함으로써 공공 안녕과 질서가 확보될 수 있는 홉스적인 국가의 싹을, 혹은 베스트팔렌 체제와 더불어 확립된 “영토를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지배한다(cuius egion, eius religio)”라는 원칙의 단서를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종교가 대중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지적하는 것은 타키투스주의의 사려론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평가절차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종교에 의한 위장의 효용을 역설한 것은 단순히 대중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에서 표현되는 대중의 정념과 상상력은 하나의 커다란 정치적 힘이며, 그것은 군주에게는 정치권력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주지하듯이 이런 대중의 상상력을 통한 권력구성은 스피노자에게서도 간파할 수 있다. 설령 ‘상상력’에 의해 지배당한 대중이 종교에 얽매여 있다고 해도, 이런 상상력을 출발점으로 역사적 종교를 안쪽에서부터 변혁함으로써 이성적 인식(‘완전한 인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신학정치론』의 기획의 관건은 이것이다. 이것은 종교라는 상상력의 담론을 (『윤리학』에서의) 현인에 의한 과학적 방법(‘기하학적 방법’)으로 가교하려는 시도이다. 대중의 상상력이나 정념은 이성적 국가를 향한 권력구성이 행해지는 내재성의 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대중 및 그 종교적 상상력에 대한 스피노자의 불균형적 평가 속에는 근대 초기의 위장이라는 문제계가 품고 있는 양의성이 나타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대중용 말투는 뭔가 감춰진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외피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 자체를 무시하기 힘든 현실로서의 힘을 인정해야 하는가? 위장은 어디까지나 거짓에 머무는가, 아니면 그 픽션성 자체에 일정한 리얼리티가 있는 것일까? 가령 그라시안의 『신탁의 지침 및 사려술』에서 보이는 것은 이런 동요나 다름없다. 그는 악덕이 지배하는 시대의 부득이한 처세술로서 가면의 삶을 권유하면서도, 경건한 예수회 회원으로서 신 앞에서의 성실성을 포기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내면적 덕을 갖춘 ‘성인’이기를 추구했다(300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자 앞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태나 행동이 내면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지금 남에게 보이고 있다고, 혹은 머지않아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각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의 인지상정이다. … 설령 혼자 있을 때라도 마치 세상 전체의 눈에 드러나 있다고 생각해서 행동한다.46) (297番)


여기서는 외견상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실제로 ‘되라’고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위장이나 은폐의 권유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은, 그것이 ‘있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 로슈푸코도 위장이 더는 위장이 아니게 된 인간의 이런 존재방식에 관해 오히려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너무도 타인의 눈에 자신을 위장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을 위장하는 데 이르렀다.47) (119)


이런 이른바 자기기만은 타자 앞에서의 자기 현시에 의해 살고 있는 궁정인들에게 특히 전형적이다. 극장적인 자기 제시에 근거한 이 시대의 ‘대표적 공공성’은 위장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되는 자기기만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5. 비밀과 공개의 중간지대

자신의 감춰진 본질과 그것을 감추는 외관이 더 이상 구별될 수 없게 되는 인간의 존재방식.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1963)에서는 프랑스혁명에 선행한 귀족사회의 이런 상황이 마치 20세기 전체주의의 원형(prototype)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혁명 이전의 궁정사회에서 ‘위선(hypocrisy)’이 지배했음을 간파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혁명기의 공포정치는 바로 이런 ‘위선에 대한 투쟁’의 결과로 생겼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테러와 더불어, 엘리아스가 말한 ‘문명화’뿐만 아니라,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화’의 급진적인 심원이 입을 연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음모와 배신이 항상적이게 된 그 이전의 궁정사회의 ‘반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8)

여기서 말해지는 ‘위선’은 단순한 거짓말이나 허위가 아니다. 위선자는 거짓된 외관에 의해 진실한 자신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외관으로서 무장하고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위선자)는 자신이 속일 작정인 상대만큼이나 자신의 허위의 희생자이다. … 위선자의 죄는 자신에 대해 허위의 증언을 하는 데 있다. … 위선자만이 정말로 뼛속부터 썩어 있는 것이다.49)


즉, 위선자는 겉보기[외관]로서의 연기가 자신의 존재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위선의 배후에는 폭로해야 할 그 무엇인가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선의 어원인 그리스어의 ‘히포크리테스’는 원래 배우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것은 연극 때 착용하는 가면으로서의 ‘페르소나’와는 다르다. 즉, 그것을 떼어내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위선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배우 자체이기 때문에, 설령 위선자의 가면을 벗겨내더라도 그 가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50)

아렌트는 정치 공간을 자주 극장모델로 말했다. 즉, 정치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은 가면(페르소나)을 쓴 사람들이 공공의 무대에서 행하는 역할 연기이며, 이런 공개된 곳의 배후에 있는 것은 당장은 정치와 무관하다. 그러므로 정치에서는 ‘존재’와 ‘출현(appearance)’은 동일하며, 둘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 이전의 궁정인들의 행태가 이런 연극적인 정치적 공론장과 아무리 비슷한 듯 보이더라도, 아렌트는 결코 이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궁정사회는 오히려 아렌트적인 ‘출현의 정치’의 퇴폐적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치적 연기자들의 가면(페르소나)의 배후에 있는 숨겨진 사적인 자기가 있을 여지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선자는 자신이 연기에 의해 자연적인 자기를 아주 성실하게 표출하고 있다고 믿어버림으로써 공적인 공연과 사적인 비밀의 구별을 헐어 버리는 것이다.

아렌트가 보는 바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바로 이런 궁정사회의 위선과 거울상을 이루는 것이다. 자코뱅이 목표로 한 것은 위선자의 가면을 벗겨냄으로써 순진무구한 ‘자연인’, 즉 궁정사회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본래의 유덕한 인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한, “위선자에 대한 추궁[追及, 뒤쫓음]은 제한이 없다.”51)즉, 이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추구하는 무한한 폭로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리하여 인간 본래의 원초적인 덕을 밝게 드러내려는 불가능한 시도는 ‘덕의 전제(專制)’로서의 혁명의 테러로 귀착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공의 무대에서 상연하기 위한 가면(페르소나)이라는 정치적인 조건도 파괴하게 된다.


그들은 위선자에 대한 제한 없는 추궁과 사회의 가면을 벗겨내는 열정에 의해, 의식하지는 않았으나 페르소나(persona)의 가면을 찢어버렸던 것이다.52)


위선의 폭로 속에서 노출되는 것은 결국 정치공간을 파괴하는 빈민들의 ‘분노’일 뿐이다.

아렌트는 궁정사회의 위선과 자코뱅의 공포정치 사이의 거울상적 관계 안에서 ‘근대’의 심연을 간파하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의 전체주의에서 그 극점에 이른다. 『혁명론』에서 위선이 단순한 거짓말이나 허위와는 구별될 때, 그것은 더 시사적인 다른 논문 「진리와 정치」(1967)에서 ‘전통적인 거짓말’과 ‘현대의 거짓말’의 구별,53) 혹은 1971년에 공표된 베트남 전쟁에 관한 국방부 비밀 보고서를 다룬 논문 「정치에서의 거짓말」(1971)에서 단순한 ‘기만’과 ‘자기기만’의 구별에 대응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54) ‘현대의 거짓말’이나 ‘자기기만’에서는 사실과 허위의 구별 자체가 폐기된다. 아렌트에게서 이것은 전체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서방의 대중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리얼리티 상실 상황이나 다름없다. 여기에서는 방위를 정하기 위한 판단 기준이 완전히 상실됨으로써 공공의 눈앞에 있고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있을 것이 그 자체로 오히려 현실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궁정사회의 위선이 공론장의 이런 퇴폐의 원래의 근원에 있다. 그래서 아렌트가 묘사하는 혁명기 이전의 위선의 사회는 비밀관방정치[비밀내무정치]이든 궁정의 예절범절이든, 무엇인가 진실을 은폐한 허위가 지배하는 세계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이제 거짓과 진실의 경계선이 말소되었으며 비밀과 출현이 구별 불가능할 정도로 뒤얽혀 있다. 과거의 궁정사회는 이미 아렌트가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현대사회와 마찬가지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현대에서 공개와 비밀의 이런 교차에 대해 권력의 ‘눈에 보이는 얼굴’(‘법ius’)과 ‘감춰진 얼굴’(‘아르카나’)이라는 클라프마르의 구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생명정치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 두 개의 얼굴의 일치하는 지점이며, 아르카나 임페리이가 그것으로서 밝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르카나는 이른바 그 자신의 노출에 있어서 비가시인 채로 있으며, 눈앞에서 공개될수록 감춰진 것이 된다.55)


단순히 공개성으로부터 은퇴[후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런 비밀은 ‘신비’도 ‘아르카나’도 아니며 ‘secretum’으로서의 비밀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56) 그것은 ‘신비’처럼 결코 불가지적인 신적 비밀이 아님은 물론이고, ‘아르카나’처럼 어떤 숨겨진 구체적인 지식[앎]인 것도 아니다. ‘secretum’은 현실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비밀이 아니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눈앞에 폭로되어 있으나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의식되어 있는 비밀이다. 그것은 이른바 과잉으로 현전하는 정보나 이미지의 비현실성에 의해 일찍이 그 효과로서 산출되는 비밀이다. 그것은 항상적으로 현전하면서도 숨어 있는 비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비밀은 또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그 배후에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감춰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숨은 그림(Rätsel)’이라 부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정보나 이미지가 의미를 완전히 빼앗긴 잡동사니·잔해가 되며, 나중에는 그저 (언젠가 ‘독해’되기를 기다리는) ‘문자’(Schrift, écriture)로서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생기는 비밀이다. ‘문자’란 곧 정보나 이미지가 단순히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투명한 매체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일종의 물질적 실재로서, 달리 말하면 “목적 없는 순수한 수단성” 자체로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언론에 고유한 이런 물질성은 투명한 의사소통을 오히려 방해한다.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듯한 ‘물건’이 되며, 더 이상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게 된 이미지나 정보는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비밀스런 것으로서 현전하는 스펙터클의 폐허를 이미 벤야민은 바로크 비극의 알레고리적 광경 속에서 찾아냈다. 그의 시도는 바로크적인 가시성과 이미지의 세계를 ‘문자’를 통한 안티-스펙터클의 실천으로 반전시키는 데 있었다.

이제 이미지와 가시성의 부재가 아니라 그 과잉에 의해, 의사소통의 부족이 아니라 그 과다에 의해 사회공간의 불투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사람들은 도처에서 비밀을 인식한다. 그 때문에 종종, 낡은 아르카나가 정치적 판타지로서의 ‘음모론’이라는 형태로 회귀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무슨 숨은 의도나 권력이 실제로 배후에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며, 비밀은 오히려 복잡하게 기능 분화된 사회공간에 유통되는 정보의 혼탁과 다수성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는 완전한 공개성이 평범한 것으로서 편재하는 비밀과 병존한다. 이때, 공개성은 단지 투명한 의사소통의 공간으로 찬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전면화된 감시 사회의 위험을 낳는 것으로 경계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비밀도 단순히 국가이성적인 관방[내무=내치]정치로서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며, 프라이버시의 피난처로서 불가침한 채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출현하고 있는 것은 권력이 단지 공개적인 장에서 통제되는 것도, 비밀리에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이 두 가지 측면(법과 집행, 이름의 영광과 무명성, 인간의 활동과 동물적 생명 …)이 얽혀서 하나의 권력의 에코노미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다. 아렌트에게 비밀과 출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이런 공간은 정치적인 것의 파괴의 징후일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적인 것의 출발점은 바로 이 중간지대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1) [옮긴이] 필자는 prudence를 일관되게 叡智(예지)로 표현하지만, 이는 ‘뛰어난 지혜’를 뜻하는 말로 원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prudence는 사려와 신중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모두 ‘사려’로 일관되게 옮긴다.


2) Justus Lipsius, Politicorum: sive civilis doctrinae libri sex, Lugduni 1594 (reprinted: Kissinger Publishing 2009), p.230. 인용은 원문에서 필자가 직접 번역.


3) [옮긴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기원전 42년 11월 16일 ~ 37년 3월 16일)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아구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B%B0%EB%B2%A0%EB%A6%AC%EC%9A%B0%EC%8A%A4


4) 타키투스, 『연대기(年代記(上)』, 国原吉之助 訳, 岩波書店, 1981, 311頁. [타키투스, 『타키투스의 연대기』, 박광순 옮김, 종합출판범우, 2005.]


5) [옮긴이] 본문에서 ‘처세훈(処世訓)’으로 표기됐으나 이하 ‘처세담’으로 일관되게 옮긴다.


6) [옮긴이] ‘아르카나’는 라틴어로 아르카눔(arcanum)의 복수형이며, ‘책상서랍’이라는 의미에서 서랍에 숨겨진 ‘감춰진 것’을 가리키게 됐으며, 더 나아가 ‘비밀’, ‘신비’ 등의 의미가 됐다.


7) Leo Strauss, “Persecution and the Art of Writing,” in Persecution and the Art Writing,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p.22-37. [「迫害と著述の技法」, 石崎嘉彦訳, 『現代思想』, 제24권 14호, 1996, 185-197頁.]


8) Niklas Luhmann/Peter Fuchs, »Geheimnis, Zeit und Ewigkeit«, in: des., Reden und Schweigen, Frankfurt a.M. 1989, S.136f.


9) Reinhart Koselleck, Kritik und Krise. Eine Studie zur Pathogenese der bürgerlichen Welt, Suhrkamp, Frankfurt a. M, 1973 ; Critique and Crisis: Enlightenment and the Pathogenesis of Modern Society, Cambridge, Mass.: MIT Press, 1988. [라인하르트 코젤렉, 『비판과 위기(批判と危機)』, 村上隆夫 訳, 未来社, 1989, 149-150頁.]


10) Yirmiyahu Yovel, Spinoza and Other Heretics I : The Marrano of Reas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 Spinoza and Other Heretics II : The Adventures of Imman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이르미야후 요벨, 『스피노자 : 이단의 계보(スピノザ異端の系譜)』, 小岸昭ほか 訳, 人文書院, 1998, 51-52頁, 179-210頁.]


11)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 『피렌체의 명문귀족의 처세술 : 리코르디(フィレンツェ名門貴族の処世術 リコルディ)』, 永井三明 訳, 講談社学術文庫, 1998, 129頁. [프란체스코 귀치아르디니, 『귀치아르디니의 처세의 법칙』, 김희진 옮김, 원앤원북스, 2014.]


12) 『군주론』과 그 이전의 군주감 사이의 절단에 관해서는 Michel Senellart, Les arts de gouverner, Seuil, 1995, pp.211-230.


13)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君主論)』, 池田康 訳, 『마키아벨리 전집 1(マキャヴェッリ全集 I)』, 筑波書房, 1998, 51頁.


14) 같은 책, 59頁.


15) 근대초기의 정치사상에서의 위장의 문제에 관해서는 August Beck, »Die Kunst der Verstellung im Zeitalter des Barock«, in : Festschrift der wissenschaftlichen Gesellschaft der Goethe-Universität, Wiesbaden 1981, S.85-103 ; Herfried Münkler, Im Namen des Staates, Frankfurt a. M. 1987, S.306-313.


16) [옮긴이] 体裁는 외관, 겉모양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일정한 양식이나 형식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대체로 후자의 의미로 보인다.


17) Senellart, Les arts de gouverner, pp.54-55.


18) [옮긴이] Arnoldus Clapmarius라고도 불린다. Arnold Clapmar(1574–1604)가 본명이다. 위의 책 제목은 일본어로 『国事のアルカナにについて』로 옮겨지고 있다.


19) Cf. Richard Tuck, Philosophy and Government 1572-165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p.104-119.


20) 몽테뉴, 『수상록(随想録(エセー)下』, 松浪信三郊 訳, 河出書房新社, 2005, 202頁.


21) Pierre Charron, De la Sagesse, Fayard, 1986, p.557.


22) 피터 버크, 『유럽의 민중문화(ヨーロッパの民衆文化)』. 中村緊二郎・谷参 訳, 人文書院, 1988, 41-48頁, 350-363頁. [Peter Burke, Popular Culture in Early Modern Europe, 1978(Ashgate; 3rd Revised edition edition, 2009)]


23)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의 과정(文明化の過程(上)(下)』, 波田節夫ほか 訳, 法政大学出版局, 1977/78.


24) [옮긴이] 이 책의 영역본은 몇 개가 있다. The Art of Worldly Wisdom, by Joseph Jacobs, 1892 ; The Oracle, a Manual of the Art of Discretion, by L.B. Walton ; Practical Wisdom for Perilous Times, in selections by J. Leonard Kaye ; The Science of Success and the Art of Prudence.


25) 엘리아스, 『문명화의 과정 (하)』, 372頁.


26) 발타자르 그라시안, 『처세의 지혜(処世の智恵)』, 東谷穎人 訳, 白水社, 2011, 18頁.


27) 같은 책, 102頁.


28) 라 로슈푸코, 『라 로슈푸코 잠언집(フ・ロシュフーコー箴言集』 二宮フサ 訳, 岩波文庫, 1989, 11頁.


29) 같은 책, 58頁. 번역 수정. 


30) 같은 책, 69頁.


31) 라 브뤼에르, 『캐릭터들(カラクテール<下>)』, 関根秀雄 訳, 岩波文庫, 1953, 136頁.


32) 라 브뤼에르, 『캐릭터들(カラクテール<中>)』, 関根秀雄 訳, 岩波文庫, 1953, 8頁.


33) [옮긴이] 프롱드의 난(프랑스어: La Fronde)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최후의 반항에 의해 일어났던 내란이다. 프롱드라 함은 당시 파리의 어린이들이 관헌에 반항하여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 사용한 ‘투석기’에서 유래된 말인데 점증하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제1회는 고등법원(高等法院)의 프롱드(Fronde Parlementaire, 1648∼1649), 제2회는 귀족의 프롱드(Fronde des nobles, 1649∼1653)이다. 루이 14세의 즉위(1643) 당시 모후(母后)와 로마 가톨릭교회 추기경이자 재상인 마자랭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파리의 고등법원(법복귀족(法服貴族))이 칙령의 등록을 거부함으로써 왕권에 반항하여 왕실도 한때는 피난하여 파리를 퇴각하였으나, 왕당파의 콩데 공(公)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콩데 공은 마자랭과의 반목으로 체포되었고 지방에서는 반왕당파 귀족이 동맹하여 반항하였으므로 왕실과 마자랭은 다시금 파리를 퇴각하였다. 파리는 에스파냐의 원조를 받고 있는 콩데 군(軍)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 시민의 반감을 사서 드디어는 왕당파에 의한 탄압으로 왕실은 파리로 귀환하였다. 이 프롱드의 반란은 프랑스에 있어서의 귀족세력의 왕권에 대한 최후의 반란으로 부르봉 절대왕정 확립의 길을 터놓은 것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위키피디아 전재]


34) [옮긴이] 일본어로 手管(테크다)는 ‘살살 구슬려내는 솜씨나 수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농간’을 부린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순우리말로는 ‘엄펑소니’라 한다.


35) 귀차르디니, 『피렌체의 명문귀족의 처세술 : 리코르디(アィレンツェ名門貴族の処世術 リコルディ)』, 129頁.


36) 같은 책, 238頁.


37) Lipsius, Politicorum, pp.132-138.


38) Charrron, De la Sagesse, p.377.


39) 바루흐 스피노자, 『신학·정치론(神学・政治論)』, 畠中尚志 訳, 岩波文庫, 1944, 55-56頁.


40) 『마키아벨리 전집2 : 로마사논고(マキァヴェッリ全集2 ディスコルシ)』, 永井三明訳, 筑摩書房, 1999, 49-50頁.


41) 귀차르디니, 『피렌체명문귀족의 처세술 : 리코르디(アィレンツェ名門貴族の処世術 リコルディ)』, 191頁.


42) Vgl. Michel Behnen, »ARCANA - HAEC SUNT RATIO STATUS«, in : Zeitschrift für historische Forschung, 14(1987), S.154.


43) Ebd., S.168f.


44) Lipsius, Politicorum, p.121.


45) Cf. Tuck, Philosophy and Government 1572-1651, pp.58-59.


46) 그라시안, 앞의 책, 227頁.


47) 라 로슈푸코, 앞의 책, 42頁.


48) 한나 아렌트, 『혁명에 관하여(革命について)』, 志水速雄 訳, ちくま学芸文庫, 1995, 155-156頁.


49) 같은 책, 153-154頁. 괄호 안은 저자의 것.


50) 같은 책, 159頁.


51) 같은 책, 145頁. [옮긴이] 여기서 추궁으로 옮긴 것은 책임추궁이라고 할 때의 추궁보다는 뒤쫓는다는 의미에 가까운 듯하다. 원문을 봐야 확정할 수 있다.


52) 같은 책, 161頁.


53) 한나 아렌트, 「진리와 정치(真理と政治)」, 『과거와 미래 사이(過去と未来の間)』, 引田隆也/齋藤純一 訳, みすず書房, 1994, 344頁.


54) 한나 아렌트, 「정치에 있어서의 거짓말(政治における嘘)」, 『폭력에 관하여(暴力について)』, 山田正行 訳, みすず書房, 2000, 33-34頁.


55)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上村忠男/廣石正和 訳, 月曜社, 2001, 211頁. 번역수정.


56) 비밀의 이런 구별에 관해서는 Eva, Der geheime Krieg, Frankfurt a. M. 2007, S.105ff.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http://nomadist.tistory.com/423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1강 첫 번째 부분


들어가며

과연 어둡고 위험한가?

칼 슈미트는 결정을 못하는 정치를 뭐라고 하는가?

 

2012년 봄 무렵부터 매스컴의 정치보도에서 결정을 못하는 정치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됐다구체적으로는 여당인 민주당의 내분과 중의원 및 참의원의 갈등 때문에정권이 중요한 정책에 관해 방침을 결정할 수 없고, ‘정치가 정체되게’ 됐다는 것을 가리킨다.


결정을 못하는 정치를 비판하는 저널리스트들이나 평론가들은 결단할 수 있는 정치가에 대한 기대를 입에 올린다평소에는 자유주의적·좌파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애국심이나 공공심에 뿌리를 둔 국민의 생활이 으뜸 정치라고 역설하고보수파 정치인의 리더십이나 돌파력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발언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 지도자’ 대망(待望)론은 민주주의의 한계론과 자주 결부된다상이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의회에 모여 끝없이 이야기하는 곳에서는 본래적 의미에서 누구나 납득하는 합의를 형성하는 것 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민주주의라는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결단력이 있는 지도자에게 맡겨서 위기를 극복하면 좋다는 논의이다이런 사고방식을 결단주의라고 한다다만, ‘결정해주는 지도자에 대한 기대를 막연하게 말하는 논객들은 결단주의가 정치철학정치사상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진심으로 생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결단력 있는 정치가가 민중과 대화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낙관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에서 결단주의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부여함으로써 결단주의의 대명사가 된 사상가가 있었다헌법학자법철학자인 칼 슈미트이다역사상 처음으로 사회권을 헌법에 도입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조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바이마르 체제가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음을 간파한 슈미트는 문제의 뿌리를 파고들었다고대의 공화제에서 유래한 독재론이나 가톨릭 보수주의계열의 정치신학프랑스혁명 이후의 헌법제정권력론맑스주의의 혁명론 등의 연구를 통해 그는 이나 정치의 근저에는 친구와 ’ 사이에 선을 긋고 통상=규범성을 산출하는 결단이라는 행위가 있음을 밝혔다.


가톨릭 보수주의를 기초로 하는 그의 질서사상은 나치식 민족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곳도 있었으나한때 나치정권을 옹호하는 법학자의 대표로 치켜세워졌기 때문에나치의 계관법학자로 불리게 되며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위험하다고 여겨졌다그러나 그의 이론적 영향을 받은 독일 안팎의 법학자나 정치철학자가 적지 않으며정치적으로 보면 슈미트와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되는 혁명적 좌파들도 그의 결단론이나 친구/론을 종종 참조한다마루야마 마사오도 천황제의 특수성을 논하는 맥락에서 슈미트의 국가론을 인용한다. 1990년대 이후는 데리다아감벤무페 등 포스트모던 좌파 논객들의 텍스트에서 슈미트의 이론이 거론되었다.


정치적인 것의 숨어 있는 배타적인 폭력성에 초점을 맞추고 친구/’ 대립을 부각시키는 슈미트의 담론은 어디가 매력적인가여러 가지 입장의 슈미트 연구자해석자가 있기에, [이 질문에는*] 몇 가지 대답이 있을 것인데,내 관점에서 한마디로 정리한다면우리의 사회를 가장 깊은 곳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 어두운 측면(dark side)을 철저하게 해명하고보편적인 법의 이상이 지닌 모순을 차례차례 폭로하고이를 현실의 정치정세 분석에 응용한 곳에 그의 굉장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군사광적인 흥미착각 때문에 슈미트 팬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그런 것은 무시해도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한계나 결단력을 쉽사리 입 밖에 내기 전에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20세기의 가장 위험한 법학자의 눈을 통해 제대로 다시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은 2011년 10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총7(보강도 포함)에 걸쳐 연합설계사 이치가야 건축사무소에서 행했던 연속강의 칼 슈미트의 내용을 토대로적절하게 제목을 넣어 구분한 형태로 편집한 것이다.


문장으로 만들 때 정확을 기해야 할 대목에는 손을 댔지만강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구어체를 유지했다.또 질문도 강의 내용에 입각했을 경우에는 편집해서 수록했다.


강의에서 텍스트로 주로 참조됐던 것은 칼 슈미트 저작집(カール・シュミット著作集)(慈学社出版), 정치적 낭만주의(政治的口マン主義)(未来社), 정치적인 것의 개념(政治的なものの概念)(未来社), 정치신학(政治神学)(未来社), 육지와 바다()(慈学社出版)에 수록된 번역 및 해당 원문을 적절히 참조했다.


 

관람하신 회의장의 여러분협력해주신 연합설계사 이치가야 건축사무소 직원들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편집부)



[옮긴이]


1. 이 책에서 슈미트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일본어 번역본을 그대로 따랐다일본어 번역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저자인 나카마사 마사키가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의를 전개했기 때문이다다만 이런 경우에도 영어 등의 판본을 통해 새롭게 번역한 문장을 [* ] 안에 집어넣었다.


2. 정치적 낭만주의는 영어판을 참고했다. Carl Schmitt, Political Romanticism, trans., Guy Oakes, The MIT Press, 1986.


3. 본서의 원본에는 외국어가 ( ) 안에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다따라서 이것은 옮긴이가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4. 또한 본서의 원본에는 [ ] 표시 안에 문장이나 단어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따라서 이것은 옮긴이의 것이 아니다옮긴이의 것에는 [ *]으로 표기해뒀다



목차


머리말 : 과연 어둡고(dark side) 위험한가!? 칼 슈미트는 ‘결정을 못하는 정치’를 뭐라고 하는가?


1강. 『정치적 낭만주의』 (1) : 질서 사상

진정 위험한 사상가 / 결단주의 / 왜 지금 슈미트인가? : 자유민주주의의 ≪한계≫ / 일본인은 어떻게 슈미트를 읽어왔는가? / 칼 슈미트, 그의 사상의 변천 / 『정치적 낭만주의』를 읽다 : ‘정치적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 낭만파 / ‘문필가Schriftsteller’ / ‘실재’ 개념 ― ‘리얼리티의 구축La recherche de la Realitié’ / ‘국가’와 ‘국민’의 창조 / 슈미트의 낭만주의관 / 〈Volk〉의 버추얼(virtual)성, 유동성 / 질의응답


2강. 『정치적 낭만주의』 (2) : 정치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슈미트와 수사학 / 예외상태〈Ausnahmezustand〉 / 가톨릭 보수주의 / ‘나’를 둘러싼 낭만파의 사고 / 정치적 낭만주의에 대한 ≪정면≫비판 / 포스트모던 보수주의 / 낭만파 사상의 철학적 배경 / ‘눈에 보이지 않는 힘’ : 비밀결사geheime Bünde와 음모론 / ‘우인론Occasionalismus’ 또는 기회원인론 / 고차적인 제3자 / 스피노자주의 : 낭만주의적 ‘나’ / 헤겔주의와 〈über-listen〉 ‘이성의 간지’ / 낭만주의의 정신구조와 피터마이어적 속물성 / 낭만주의적 사고 vs ‘법’과 ‘정치’ / 버크와 낭만주의 / ‘무한한 대화’는 정치적 공론장으로 비약할 수 없다!? / ‘정치적 낭만주의자ein politischer Romantiler’ vs ‘낭만주의적 정치가ein romantischer Politiker’ / 국가와 신 / 낭만주의자의 ≪속임수≫ / 질의응답


3강. 『정치신학』 (1) : 주권자, 법-질서와 예외상태

바이마르 체제와 슈미트 / ‘독재 Diktautur’ / 슈미트의 ‘독재’ 해석 /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을 내리는 자를 가리킨다.’ / 법학적 사유의 세 종류 : ‘규범주의 Normativismus’, ‘결정주의 Dezionismus’, ‘제도적 유형 der institutionelle Typ’ / 슈미트의 삼위일체 사고 ― ‘국가 Staat’, ‘운동 Bewegung’, ‘민족 Volk’ / 법의 ‘중립성’ 비판 / ‘주권자’의 본질 / ‘극한영역 die äußerste Sphāre’ 혹은 ‘한계상황 Grenzfall’ / ‘최고로 (그것 이외의 것으로부터) 연역할 수 없는 지배권력 höchste, nicht abgeleitete Herrschermacht’ / 아감벤 : 호모 사케르와 예외 / 보댕의 주권론 / ‘법-질서 Rechts-Ordnung’ / 결정 / ‘생명의 관계들에 있어서 정상성=질서’ / 주권이라는 이름의 ‘권력 Macht’ / 과연 ≪순수한 법의 논리≫는 현실의 질서와 일치할 수 있는가 / 단체론(Genossenchaftstheorie) / ‘최종심급’ / 법과 형식 / 질의응답


4강. 『정치신학』 (2) ― 누가 법을 만드는가? 혹은 ‘최후의 심판’

켈젠 비판 / ‘세계관 Weltanschauung’과 ‘국제법 Völkerrecht’ / ‘법적 결정 die rechtliche Entscheidung’ / 홉스와 슈미트 :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 누가 결정하는가? / 법과 자연법칙 / ‘법학 개념의 사회학’ / ‘유심론적 역사철학’과 ‘유물론적 역사철학’ / 세계관과 사회의 기본구조 / 신 없는 시대 : ‘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 〈Vox populi, vox Dei〉 / 하르마게든의 싸움 : 독재 vs 민주주의, 아나키 / 반신학적 독재론 / 질의응답


5강. 『정치적인 것의 개념』 (1) : ‘친구 Freund / 적 Feind’, 그리고 타자

‘제3제국의 계관법학자 Kronjurist des Dritten Reiches’ / ‘올바른 적 hostis justus’과 ‘유럽 공법 Jus publicum europaeum’ / ‘정치적 politisch’이란 무엇인가? / ‘국가 Staat’와 ‘사회 Gesellschaft’ / ‘판단기준 Kriterien’ / ‘친구/적’의 구별의 본질 / ‘적’ : ‘공적 öffentlich’ 전투상태에 있는 상대 / ‘국가정치적 staatspolitisch’ / ‘정치적 결정 die politische Entscheidung’ / ‘인류의 최종궁극전쟁 der endgültig letzte Krieg der Menschheit’ / ‘결단’ : ‘주권’과 ‘정치적인 것’ / 질의응답


6강. 『정치적인 것의 개념』 (2) :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국가 ― 다원적 정치의 단위 / ‘결정적 단위’ / ‘교전권’ / 내적과 내란 / 정전론 / 세계평화는 가능한가? / ‘정치적인 것’ → 국제사회의 다원성 / ‘인류 Menschheit’는 전쟁할 수 없다!? / ‘동맹 League-Bund’ / 철학적 국제관계론 / 인간이란? /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길들일 수 있는가? / 참된 정치이론 : 인간의 본성이 ‘악’이며 ‘위험’ / 법과 정치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der individualistische Liberalismus’의 불가능성 / ‘비군사적․비정치적 개념들’로서의 자유주의 / 역사철학과 ‘산업사회 industrielle Gesellschaft’로의 전환 / 질의응답


7강(보강). 『땅과 바다 : 세계사적 일고찰』 : 공간혁명과 ‘인간존재 menschllche Existenz’

슈미트의 세계사관, 신화적 세계관 / 대지의 의미론 /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의 싸움 : 땅과 바다의 근본적 대립 / ‘카테콘 Katechon’ : 신화적 상상력과 세계사의 관계 / 기술․포경․해적 : 바다라는 요소를 둘러싼 흥망사 / ‘공간혁명 Raumrevolution’ / ‘질서 Ordnung’로서의 ‘대지의 노모스 Nomos der Erde’ / 토지취득경쟁과 종교전쟁 / ‘땅’에서 ‘바다’로의 ‘기본요소’의 변동 : 영국의 해군력과 ‘기계 Maschine’ / 공중의 시대 : ‘지구의 노모스 Nomos der Erde’의 근본적 변화 / 공간무기 / 새로운 노모스와 ‘인간존재 menschliche Existenz’ / 질의응답 


맺음말 : ‘결단’에 관해 제대로 사고하라! 

 




1정치적 낭만주의』 (1) : 질서 사상

 

 

주관주의적 유보가 귀결되는 곳은낭만주의는 그것이 추구하는 실재를 자기 안에서도공동체 안에서도세계사의 발전과정에서도그리고 또한 낭만주의적인 한에서낡은 형이상학의 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실재에 대한 동경은 채워질 필요가 있다아이러니의 도움을 받아 그는 개별 실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하지만 그것은 주관이 자기방어하기 위한 무기에 불과했다실재 자체는 주관적으로는 획득할 수 없다.

[* 주관주의적 유보의 결과는 낭만주의자가 추구하는 실재를 자기 자신 속에서공동체 속에서세계사의 전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혹은 그가 낭만주의적인 채로 있는 한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그렇지만 실재에 대한 갈망은 충족되어야 했다아이러니의 도움을 받아그는 유일한 실재에 맞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는 주체[주관]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무기에 불과했다실재 자체는 주관주의적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p.73).]

― 『정치적 낭만주의

 


진정 위험한 사상가


 먼저 칼 슈미트(1888~1985)는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만 얘기하겠습니다주로 바이마르 시기에 활약한 독일 법학자로전공은 헌법학 혹은 법철학입니다. ‘정치의 본질에 관해 말한 저작이 많기에 정치철학자로 간주되기도 합니다그는 나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동조했던 것은 아니나의회제 민주주의의 약점을 비판하고비상사태에서 대통령의 독재권을 명확히 할 것을 주장하는 등나치의 정권수립에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논의를 전개하고나치 시대에는 베를린대학교의 법학부 교수에 취임한 것 외에도한때 나치의 법학부문의 리더 같은 역할을 맡았습니다전후(戰後)에는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됐지만 기소는 면했습니다.


나치시대에 나치에 협력한 법학자법률가는 많이 있습니다슈미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도 있습니다.가령 변호사·법학박사인 빌헬름 슈투카르트(Wilhelm Stuckart, 1902-53)는 인종주의적인 뉘른베르크 법의 작성에 관여하고내무차관까지 돼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을 결정한 반제회의(1942년 1)에도 참여했습니다슈투카르트와 함께 뉘른베르크 법의 작성에 관여하고관련된 법률을 정비한내무관료 출신의 한스 그로프케ハンス・グロプケ(1898-1973)는 전후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정권의 총리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법학박사로 SS(친위대)에서 활동한 베르너 베스트(Karl Rudolf Werner Best, 1903-89)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 1904-42)가 이끄는 RSHA(국가보안본부)의 제1국장으로유대인의 강제수용소 이송에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하이드리히



슈미트는 나치 정권 초기에는 나름의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1936년 무렵부터 SS 등에게서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받고베를린대학교의 교수로 머무르긴 했지만정치의 겉 무대로는 나가지 않게 됐습니다이때 슈미트를 비판한 법률가법학교수가 꽤 많습니다이것만 봐도 슈미트가 나치에 경도되기는 했으나 나치와 완전히 동화됐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나치·반유대주의와 슈미트의 관계에 관해서는 사노 마코토(佐野誠)가 쓴근대계몽비판과 나치즘의 병리 칼 슈미트에게서의 법·국가·유대인(近代啓蒙批判とナチズムの病理──カール・シュミットにおける国家・ユダヤ)(創文社)에서 자세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바이마르 후기에 슈미트의 법학적 영향력이 결정적이며전후에도 의회제 민주주의나 보편주의에 대한 원리적 비판자로서독일을 필두로 한 서방국가들의 법률가법학자혹은 혁명가들에게 계속 영향을 줬기 때문에그와 나치의 연결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96)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이데거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제2제정의 붕괴베르사유 체제에 의해 독일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사람들이 강한 불안을 품었던 때에 존재와 시간(1927)을 내고 한 세대를 풍미했습니다난해한 철학자입니다만군데군데서 존재’ 자체에 주어진 사명을 받아들이고 결의를 하라고 독자에게 촉구하는 듯한신비주의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이 총총 박혀 있기에철학적 내용은 잘 몰라도 감동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명성을 얻은 하이데거는 1933년 4월에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고나치의 당원이 됐습니다총장에 취임하면서 나치의 등장을 철학적으로 의미부여한 듯이 보이는독일대학의 자기주장Die Selbstbehauptung der deutschen Universität라는 악명 높은 연설을 했습니다또 그의 선생이자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강좌의 전임자이기도 한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출입을 금지했습니다유대인의 출입 금지는 나치의 방침이지 하이데거 개인의 판단은 아니었지만자기 스승이자 현상학의 창시자이기도 한 위대한 철학자의 박해에 관여했다는 점에서 인상이 나빠졌습니다.


다만 하이데거의 총장 취임 후 학내 분규가 계속됐으며, 1934년에는 이에 대해 책임을 지는 형태로 총장을 사임했습니다그 후에는 나치 이데올로기와는 직접 관계없이자신의 존재론에 기초하여 조국적인 존재론을 탐구하게 됩니다하이데거와 슈미트 사이에는 접점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슈미트는 하이데거의 권유에 답하는 형태로 나치에 입당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문제에 골몰했던 철학자이며나치의 정책입안 및 추진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어서 나치와의 관계는 그다지 깊게 추궁되지 않았습니다패전 후()의 문부장관 명령으로 대학에서 추방됐지만, 51년에는 명예교수로 대학에 복귀했습니다하이데거 철학의 영향이 사르트르(1905-80)나 데리다(1930-2004)를 경유하는 형태로현대사상의 본고장이 된 프랑스에서 강해졌던 것도 있고 해서세 차례에 걸쳐 그의 나치 관여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는데요그것 때문에 그의 사상이 금기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슈미트는 법학자·정치철학자의 입장에서 (보통의 의미에서의 독재와는 다르지만) ‘독재를 정당화하고 친구/적의 대립을 부추기는 듯한 논의를 하고 있기에정말 위험한 사상가라는 이미지가 끝까지 따라다녔고대학으로 복귀하는 것도 끝까지 인정받지 못했으며고향인 플레텐베르크(Plettenberg)에 틀어박혀 재야학자로서 집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슈미트는 정치나 의 본질에 관해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줬으며, 1990년대 이후 좁은 의미의 슈미트 연구자나 신봉자의 틀을 뛰어넘어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는 사상가특히 포스트모던 좌파의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그가 원래 법학자이고 문학이나 신학의 지식도 구사하여 복잡하게 논의했기에법제사나 법철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소양이 없으면그의 텍스트를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그 때문에 법학·정치사상사 영역이 아닌 사람은 슈미트 읽기를 약간 주저하게 됩니다또 법학·정치사상사 연구자나 전공자들이 보기에슈미트의 논의는 오늘날 법철학·정치철학에서 논해지고 있는 상식적인 주요 테마인 분배적 정의공통선법실증주의법의 통일성공화주의공공적 이성숙의민주주의온정주의(paternalism), 시민권(citizenship), 다문화주의승인 등과 같은 것에서 많이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과 신학의 관계라든가개개인의 가치와 선택을 넘어선 법질서를 문제 삼고 있기에 꽤 다루기 힘든 것 같습니다슈미트 연구 전문가들이 있는데요자유주의를 전제로 하는 통상적인 법·정치철학과의 궁합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결단주의


1990년대에는 서구에서 슈미트 르네상스가 있었고 그 여파로 일본에서도 약간의 슈미트 붐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 왜 슈미트가 중요하냐와 같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으며사상 업계 일반에 침투했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부터 슈미트 사상의 핵심어인 결단주의가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논해지게 됐습니다논하는 사람들은 결단주의가 슈미트와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만.


평론가인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寛, 1978-) 씨의 제로년대의 상상력(ゼロ年代想像力)(2008)에서는 슈미트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결단주의라는 말이 21세기의 제로년대의 하위문화의 이야기성의 변화를 나타내는 핵심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90년대 후반 하위문화 작품의 주인공들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이 전형적으로 그렇듯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선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정신적으로 [자기 안에칩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그것이 제로년대에 들어서자 옳은지는 몰라도아무튼 뭔가 가치에 헌신하겠다고 결단하고 그 방향으로 내달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뚜렷해졌습니다그것을 우노 씨는 결단주의라고 부르는 셈이지요.


잘 생각해 보면, ‘결단주의는 묘한 말입니다어떤 것을 정할 때는어떤 형태로든 결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굳이 결단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정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에 관한 결정의 근거가 없을 때보통이라면 괴로워할 때에과감하게 정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특히 정치에서는 결단이 특별한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많은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현대의 민주주의적인 정치에서는 갖가지 입장의 사람이 각기 그럴듯한 이유어떤 선택지를 고르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말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에전체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결정할 근거가 없는 상황이 종종 있습니다그런 가운데 결단합니다물론 만인이 무턱대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특정한 누군가가 최종적으로 결단하게 됩니다현대사상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중지상태’ 속의 결단입니다.


프랑스 현대사상의 대명사처럼 된 자크 데리다는, 90년대부터 정치와 법에 관해 적극적으로 말하게 됐습니다그런 가운데 결단이라는 테마가 강조됐으며, ‘결단의 사상가인 슈미트에게도 주목하게 됩니다. 93년에 맑스에게서의 유령의 문제계를 독해한 맑스의 유령들, 94년에 이 정립되는 순간, ‘결단의 순간에 발동하는 폭력을 문제 삼은 법의 힘이 나옵니다법의 힘은 1989년에 데리다가 미국의 카도조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이 저작에서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의 폭력비판을 위하여(1921)를 데리다의 관점에서 파고들어 독해하는 것이 시도되었습니다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에 관해서는 졸저 발터 벤야민(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作品社)에서 논했기에 관심 있으신 분은 참조하십시오슈미트와 벤야민은 거의 동년대의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 사상가이지만법학자이고 법제사적 관점에서 정치에 대해 논했던 슈미트와맑스주의에 관심을 보이고 유물론을 미학적으로 재해석한 좌파 문예비평가인 발터 벤야민 사이에는 거의 접점이 없는 듯 느껴지지만벤야민은 자신의 교수자격시험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기원(1928)을 슈미트에게 증정하고,거기에 곁들인 편지에서 슈미트의 저자 중 17세기의 주권론에 관한 서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그 학문적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습니다역사의 개념에 관하여(1940)에서도 슈미트의 예외상태’ 개념을 빌려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르주 소렐(1847-1922)의 폭력론(1908)에 주목하고 높이 평가하는 점에서도 공통됩니다독일사상사에서는 벤야민과 슈미트의 연결이 꽤 전부터 지적됐습니다현대독일의 커뮤니케이션론의 기수로 알려지고벤야민 연구자이기도 한 노베르트 볼츠(Nobert Bolz, 1953-)는 탈주술화된 세계로부터 이탈Auszug aus der Entzauberten Welt(1989) ― 일본어 번역본 제목은 비판이론의 계보학으로 호세대학출판국에서 나왔습니다 ― 이라는 책에서 벤야민과 슈미트의 사상사적 관계에 관해 검토를 가합니다.


이야기를 데리다로 돌리면법의 힘과 같은 1994년에 후기 데리다의 또 다른 주요 저작 우정의 정치학Politiques de l’amitié이 나옵니다일본어로 우애라고 말하면한자가 주는 인상 때문에 애정 이야기 같다는 인상을 받지만프랑스어의 l’amitié에 반드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일본어에서도 사회적 연대라는 의미에서 우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이 있는데오히려 이런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또 보통의 프랑스어의 용법과는 간극이 있습니다만, ‘우정[友性]’이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집니다이 책에서 데리다는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을 플라톤(기원전 427-327), 니체(1844-1900), 하이데거 등과 얽어매면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친구/의 구별이라는 유명한 논의를 전개합니다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관해서는 이 연속 강의의 5, 6회에서 다룹니다우정의 정치학에서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의 벤야민론을 언급하며슈미트와 벤야민의 관계를 상당히 의식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 지금 슈미트인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


그러면슈미트가 다시 주목 받게 된 이유는 뭘까요우선하이데거의 경우와 비슷한 상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나치와 결탁했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점차 옅어지는 가운데좌파포스트모던 좌파계의 사람들이 그의 텍스트를 고쳐 읽고좌우를 넘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제기를 재발견하고그것을 자신들의 이론 속에 포함시키게 됐다는 것입니다우파 혹은 좌파라고 생각되고경원시됐던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가열기가 식은 다음에, “이런 것을 말했던가!”라는 느낌으로 재평가되는 일은 자주 있습니다데리다는 원래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90년대에 좌파로서의 자세stance를 드러내게 됐던 것은 하이데거와 나란히 슈미트의 재평가도 한몫을 거들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좌파적 맥락에서 슈미트 재평가에서 중요한 또 다른 사상가로서 샹탈 무페(Chantal Mouffe, 1943-)를 꼽을 수 있습니다벨기에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좌파계의 정치학자로헤게모니론으로 유명한 사람이에요.그녀는 슈미트의 친구/론을 참조하여, ‘정치의 본질을 재고하는 저작을 여러 권 냈습니다대표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의 복귀The Return of the Political(1993), 민주주의의 역설The Democratic Paradox(2000), 정치적인 것에 관해On The Political(2005) 세 편으로모두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슈미트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둘러싼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가치관을 존중하려는 사고방식이며민주주의는 모두가 사물을 결정하고 모두가 그것에 따르는 구조입니다모두의 가치관이 우연히 일치하면 좋지만큰 국가에서는 그건 무리입니다작은 국가에서도엄밀한 일치는 무리입니다마지막은 다수결로 정하게 되므로소수파의 의견은 억압됩니다토론한 끝에 다수결로 지는 것이라면오히려 나은 것인지도 모릅니다다른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의 가치관·세계관으로부터 너무도 동떨어진 사람들의 의견은 논의의 무대 위에 끼워주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논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유한하며우리의 타자 이해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무페더러 말하게 한다면, ‘정치란 상이한 가치관을 지닌 집단들이 자기네의 주장을 밀어붙이려 하고 싸움을 벌이는 싸움의 무대(arena*)입니다무대의 크기는 유한하기에밀려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렇다면밀려난 사람들은 무대의 모양을 바꾸고 자신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설정하려 듭니다이를 위해 싸움을 벌입니다그에 반해,실제로 무대 위에 있고 민주적 토론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의 모양을 지키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그런 무대를 둘러싼 세력권 다툼입니다무페는 그런 자신의 민주주의관을 경합적 민주주의agonistic democracy’라고 부릅니다그녀의 관점에서 보면공적인 토의를 거듭 축적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점점 충실해지고 사회적 정의에 대한 합의가 형성된다고 한 존 롤즈(1921-2004)나 위르겐 하버마스(1929-) 자유주의 좌파의 논의는 속임수입니다민주주의가 타자’ 배제 위에 수립되어 있음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이죠.


중요한 곳에서 속임수를 쓰고 있는 (듯이 무페에게 보이는자유주의 좌파를 비판하기 위해정반대 입장인 슈미트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일반적으로 급진좌파가 중도좌파를 비판할 경우혹은 그 반대로 급진우파가 중도우파를 비판할 경우좌우대칭의 급진주의즉 의 논의를 빌려 쓴다는 일은 자주 있습니다간단하게 말하면극우와 극좌는 닮았습니다무페는 일단 민주주의라는 무대 자체는 인정하기에전형적인 급진좌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슈미트는 여러 저작에서 자유민주주의 제도로서의 의회제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특히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1923)이라는 저작에서 체계적인 비판을 전개하고 있습니다현대의 의회제 민주주의는 가치관이 다르고 합의가 성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걸고 있다그것에는 의미가 없다민주주의의 본질은 그런 무한한 대화가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Identität’이라는 논의를 전개합니다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려지는 사람의 생각이 처음부터 일치하면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게다가 개인의 가치관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라는 이질적 요소를 들여왔기 때문에 모두가 합의에 이를 때까지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고 하게 됐습니다.


이런 독특한 민주주의관을 친구/’ 이론과 포개놓으면, ‘친구를 결집시키고 친구만으로 정치적 공동체를 창출하자라는 얘기도 되겠죠. ‘친구가 될 수 없는 존재는 입니다. “얘기를 나누면 알 수 있다고 말하고억지로을 친구’ 속에 집어넣으려 하기 때문에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혼란이 생기게 된다경계선을 뚜렷하게 해야 한다.


무페는 좌파이기에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을 배제하자는 논의는 받아들이지 않지만슈미트의 민주주의’ 이해가 본질을 찌르고 있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내부/외부의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기능한다는 리얼리티/현실에 눈을 돌리고 있음을 평가한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계열의 현대사상은 (이성의내부/외부의 경계선에 구애되며내부에 있는 우리들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은 타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문제 삼았습니다만인에게 통용되는 보편적 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면이성적이지 않은 것을 추방하게 됩니다자유민주주의에 의해 만인의 권리를 보장하려 들면 자유민주주의라는 구조를 위협하는 존재들을 추방억압하게 됩니다이런 정의를 위한 이성적인 선긋기를 함으로써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되는 타자가 있다는 것을 집요하리만치 문제 삼았습입니다. ‘친구/의 경계선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슈미트의 이론은 타자’ 문제의 본질을 드러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데리다와 무페는 슈미트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계속>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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