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번역 출간되었다. 10여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뒤늦음은 무의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리라... 얼마전에 이 책의 영어판 PDF를 우연히 입수했지만, 돈이 모이는 대로 이 책을 사서 읽을 생각이다. 아래는 한겨레신문에서 퍼온 것이다.
장점과 단점이라.. 글쎄...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근래에 읽은 라클라우의 몇몇 글은 짜증과 실망투성이었다. 상대방의 주장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대화상대자의 논리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그것에 대해 상대자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하면, 나로서는 라클라우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다. 어쨌든, 이 책의 라클라우는 그런 모습이 약간 약하게 드러난다... 그게 나름 강점일 수 있겠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63863.html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우연성을 고민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역사 발전의 필연성 없는
우연적 지위의 집단이라면
어떻게 헤게모니 얻나 논쟁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주디스 버틀러·에르네스토 라클라우·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대진·박미선 옮김/도서출판b·1만8000원

영국 진보 출판사 ‘버소’가 기획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은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사진), 슬라보예 지젝의 정치철학적 대화를 묶은 책이다. 우리 시대 가장 논쟁적인 급진 철학자들이 지상 토론을 벌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은 흥미롭다. 1999년에 기획돼 집필된 책이지만,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이라는 부제가 가리키는 대로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은 쟁점들을 품은 책이다.

논쟁이 많은 소출을 내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생각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논쟁 당사자들이 인식의 지반을 어느 정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세 사람은 상대의 저서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이 지상 대화 이전에도 몇 차례 서로 의견을 교환한 바 있고, 또 ‘민주주의의 급진적 재구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통한다. 논쟁의 전제 조건이 일단은 충족된 셈이다.

»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이 책은 구성이 독특하다. 세 철학자가 먼저 각각 다른 두 사람에게 ‘질문들’을 던진다. 그런 다음 제1라운드에서 이 질문들을 근거로 삼아 각각 자기 주장을 편다. 이 제1라운드 글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다시 제2라운드 글이 이어지고, 마지막 제3라운드에서 논점을 명확히하고 결론을 낸다. 시차를 두고 글로써 이루어지는 토론을 묶은 것이 이 책인 셈이다.

세 사람이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논쟁자 중의 한 사람인 라클라우가 그의 지적 동업자 샹탈 무페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이다. 이 책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시한 ‘헤게모니’ 개념을 발전시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간과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변혁의 전략을 가다듬는다. 이른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전개에 전환점 구실을 한 것이 이 책인 셈이다. 논쟁자들은 이 책의 기본 발상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논쟁에 입회할 때 세 사람의 관심은 ‘헤게모니’ 개념이 내장한 정치철학적 쟁점을 좀더 깊이 따져들어가, 이 쟁점을 상호 토론을 통해 더 분명하게 이해해보려는 데 있다. 그 쟁점의 핵심이 되는 것이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보편성’과 ‘우연성’ 문제다.

헤게모니 개념은 어느 한 집단이나 계급이 혼자 힘으로 권력을 단숨에 장악할 수 없고, 다른 경합적 세력의 동의를 얻어내야만 지배적 지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한 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대변하는 보편적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계급이 보편적 지위를 얻는다는 사실에서 ‘보편성’ 문제가 드러난다. 특수한 계급들이 보편적 지위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상황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적 경쟁의 장소라는 것이 이 논의의 바탕에 깔린 생각이다. 또 보편성은 필연성과도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에서 그 관계는 뚜렷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보편 계급일 뿐만 아니라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구현할 계급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단지 진보를 놓고 경합하는 여러 계급·집단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면, 이들의 역사적 지위는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헤게모니 문제를 고민한다면, 필연성의 보장이 없는 특수한 계급이 어떻게 보편적 계급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철학적인 논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논쟁은 라운드를 거듭하면서 점차 격렬해지고 또 공격적인 모습을 띤다. 때로는 세 사람이 혼전을 벌이고 때로는 2 대 1의 패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뚜렷한 대립전선은 지젝과 라클라우 사이에서 형성되는데, 이 전선은 ‘급진 민주주의 기획’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라클라우를 향해 이렇게 쏘아붙인다. “(라클라우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의 근본 원리를 결코 문제 삼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라클라우는 “이런 순진한 자기만족적 주장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고 일축한다. 그는 “버틀러와는 대화가 되지만 지젝과는 정치토론을 시작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전복하라는, 또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하라는 명령”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근거를 충분히 대지도 않은 채 전복하고 폐기하라고만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라클라우의 비판에 대해 지젝은 “실상 이것(라클라우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 자본주의의 실행 가능한 대안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며, 라클라우의 고민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의 협박에 굴복하지 말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고 요구하자고 말한다. 한쪽은 근거 없이 과격하다고, 다른 한쪽은 현존 체제에 굴복했다고 비판을 받는 것이다. 논쟁은 명확한 결말 없이 끝나지만, 그 논쟁을 거치면서 세 철학자들의 강점과 약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성과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보이지 않는 손’ ‘보이는 손’ 둘 다 고쳐라
“하와이까지 98%만 가면 태평양 풍덩”
100% 완전경쟁 근접 가정한 시장주의 비판
“절전형 전구로도 전력소모 못줄여”
튀는 사례 제시하며 좌파에도 “더 공부하라”
한겨레 한승동 기자
» 우파는 자본주의가 생물 진화처럼 자연스레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좌파는 자본주의 소멸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국가에 의해 창조됐으나 살아남았다. 왼쪽부터 카를 마르크스, 애덤 스미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조지프 히스 지음·노시내 옮김/마티·1만6000원

달걀프라이, 스테이크, 베이컨 같은 지방과 단백질만 섭취하고 탄수화물 섭취를 완전히 차단하는 식이요법 황제 다이어트. 정말 몸을 날씬하게 만들어줄까? 그렇게 하면 몸이 굶주리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저장돼 있는 지방을 분해·연소하게 된다고 한다. 한데, 이론대로 성공하려면 몸이 그런 착각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유도하기 위해선 탄수화물 섭취는 절대 엄금이다. 이 요건을 100% 충족시킬 수 있다면 체중이 엄청 감소한다고 한다. 만일 그 요건을 99%만 충족시키면 어떻게 될까?

»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혁명을 팝니다>라는 책으로 알려진 조지프 히스 캐나다 토론토대학 철학과 교수의 신작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Filthy Lucre: Economics for people who hate capitalism)은 이 얘기를 시카고학파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완전경쟁 신화를 논박하는 도구로 쓴다.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요건을 99% 충족시켜서는, 말하자면 탄수화물을 조금이라도 섭취했다가는 오히려 엄청난 역효과가 난다. 99% 요건을 충족시켰으니 99% 다이어트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탄수화물이 몸에 들어오는 순간 몸은 굶주리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자체 저장 지방 분해·연소를 중단한다. 그렇게 되면 다량 섭취한 지방과 단백질 때문에 체중은 오히려 엄청나게 불어난다.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하다.

완전경쟁 시장에선 ‘보이지 않는 손’이 완전효율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 신화가 지닌 허점도 이와 같다. 실험실이 아닌 현실에서 완전경쟁이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완전경쟁을 상정한 시장은 그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역효과만 더욱 키우는 셈이 된다.

또 하나의 비유. 미국 본토에 사는 사람이 하와이에 휴가여행을 가고 싶은데 비행기삯이 조금 모자란다. 그래서 라스베이거스 등에 자동차로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워낙 가고 싶은 하와이에 비하면 다른 곳은 만족도가 절반에도 못 미친다. 고민하는 그에게 여행사 직원이 제안한다. 비행기삯의 98%쯤 되는 지닌 돈을 주면 그 값에 해당하는 거리만큼만 표를 끊어주겠다. 하와이에 98% 접근하는 게 그래도 50%도 만족할 수 없는 다른 지역 가기보다는 낫지 않으냐?

물론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제안이다.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까지 거리의 98% 지점이라면 태평양 한복판이다. 거기서 내리면 98%는커녕 0.1%의 만족도도 건질 수 없다. 인생 자체가 끝장이다. 히스 교수는 완전경쟁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거기에 가능한 한 근접하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선택보다는 낫지 않으냐는 우파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런 비유로 한 방 먹였다. 좌우파 경제학 모두 외면해온 켈빈 랭커스터와 리처드 립시의 ‘차선이론’을 차용했다.

경제학을 독학한 좌파 철학도 히스는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적이다’라는 우파의 또다른 명제도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의 약점을 원용해 격파한다. 예컨대 공작새는 수컷이 꼬리가 길고 화려할수록 암컷을 유인하고 번식하는 데 유리하지만, 큰 꼬리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할 뿐 아니라 나는 데도 불리하다. 모든 수컷이 성공한 큰 꼬리의 특정 수컷 모델을 뒤쫓아 진화하게 되면 공작새 전체 종은 결국 절멸하게 될 것이다. 가능한 한 다른 나무들보다 더 높이 자라 햇빛을 많이 차지하려는 나무도 특정의 개별 나무는 그렇게 해서 진화상의 이점을 차지할 수 있겠지만 나무 전체가 그 추세를 따라가면 연약해지고 물과 양분 공급로도 길어져 오히려 무리 전체는 집합적 자멸로 갈 수 있다. 다윈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접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배경에 깔고 있는 자유경쟁 시장만능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최고 효율을 향한 진화의 무한질주 그 자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도 같은 맥락에서 살핀다.

히스 교수는 이 밖에 인간 행위를 좌우하는 것은 인센티브라고 보는 표준경제이론을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조건이 되면 오히려 일찍 귀가하는 택시기사들의 사례로 반박하며, 역시 신자유주의·세계화·자유무역의 사도들이 지난 수십년간 읊조려온 ‘국가경쟁력’의 허구(그 전도사인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이름에서 따온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오류’로 명명)를 까발린다. 히스는 우파가 허구한 날 입에 올리는 ‘국가경쟁력’은 기업과 국가의 작동기제를 혼동한 결과이며, 가진 자들이 임금 삭감, 세금 인하, 규제 완화, 환경기준 약화, 안전기준 면제, 노동 유연성 제고 등을 협박하기 위한 무기로 동원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은 이처럼 우파들의 낡은 레퍼토리만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책 2부는 좌파의 오류를 비판한다. 요즘 떠오르고 있는 ‘공정가격’ 운동을 백열등을 절전형 전구로 바꾸거나 전기값을 내린다고 해서 전력 소모가 줄지 않는다는 것,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심리적 이완효과 때문에 휘발유 소비를 오히려 늘릴 수 있다는 것, 옥스팸 같은 사회단체나 더바디숍 같은 기업의 원자재값 올려주기가 과잉생산과 현지 경제 난조를 오히려 심화시킨 예를 들며 비판한다. 또 이윤추구를 ‘정신병’으로 매도하는 데 반대하며, 각국 임금 격차는 생산성 차이 때문이고 성장정책이 그 문제를 푸는 지름길이며 환경 파괴 없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4대강 개발처럼 환경 파괴, 즉 외부효과 비용 증대로 이어지는 아둔한 성장정책을 그는 ‘비용은 빼고 편익만 (계산에) 넣자’ 오류라고 부른다.) 부의 분배나 평등한 임금, 하향평준화식 평등을 강제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고 부작용만 낳을 뿐이라는 이론도 설파한다.

에스에프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미래도시의 대형 전광판이 여전히 자본주의식 광고를 내보내고 있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히스는, 그러나 시장과 자본주의를 일단 긍정한다. 그는 우파가 신봉하는 시장만능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를 인류가 종내에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기존 좌파 이론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2부의 좌파 시각 비판은 “우파들 주장을 깨려면 그런 실효성 없는 ‘안티’ 논리로는 안 되니까, 이렇게 하라”고 코치라도 하는 듯하다. 좌파도 공부 좀 더 하란다. 히스가 옳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책과 삶]‘행복공식’어떻게 변해왔나
입력: 2007년 06월 15일 14:02:18
▲행복의 역사…미셀 포쉐|열린터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스피노자·쇼펜하우어·러셀·파스칼 등의 공통점을 찾으면 이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행복론을 설파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꿈꾸고, 증명하려 했던 행복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만큼 서로 어긋나기도 하고, 나름의 체계를 가지며 지성사를 장식했다.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도 지상에 만인의 행복을 실현하려는 실험이랄 수 있다.

프랑스 리옹 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런 행복론이 창세기부터 자본주의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인식됐는지 정리했다. 행복이 처음 펼쳐진 곳은 낙원인 에덴이었고 인간은 그곳에서 추방당하면서 행복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신으로부터 탄생한 인간의 천복과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완벽한 행복’을 가르치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복은 그런 신성한 혜택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지적활동을 가능케 하는 지혜의 결과로 봤다. 우리가 ‘암흑기’라 일컫는 중세에는 인간의 행복 자체를 하늘에 일임해 역설적으로 인간은 홀가분한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고대 철학자들의 의지를 현실에 실천한다거나 지혜의 활용에서 행복이 아니라 신에게 구원받아야 하는 사명감으로 신에게 존재를 위탁하면서 행복하게 웃을 줄 알았다는 말이다.

21세기 들어서는 철학이나 종교, 사상뿐 아니라 심리학자, 경제학자들도 가세해 행복에 대한 교차연구가 진행 중이다. 현대의 행복연구자들은 더 많은 개인적·경제적·정치적 자유와 부패하지 않는 정부·기업, 인권 신장과 소수자에 대한 관용, 성 평등이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수준과 밀접하게 관련됐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과 독서, 즐거운 일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사회는 ‘관계’가 결여됐기 때문에 내가 맺는 관계, 일상속에서 이어지는 사물과 사람의 관계를 ‘달리’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행복에 이르는 개종’이다. 이권이나 돈보다는 타인의 인격과 입장을 고려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결론이다. 조재룡 옮김. 1만3500원

〈김주현기자 amicus@kyunghyang.com〉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