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1장. 

죽음정치에서 비정치

이탈리아에서의 생명정치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1. 들어가며 : 이탈리아적 차이를 둘러싸고

1970년대 중반 미셸 푸코가 기선을 잡은 생명정치의 사유가 1990년대에 들어 특히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를 선두에서 인솔한 것이 다름 아닌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이라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것도 없다. 나아가 이제 여기에 나폴리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1950년 생)의 이름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도 여태껏 두 사람에 대한 번역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각주:1] 그렇지만 오히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생명이라는 접두사가 약간 붐을 일으키는 식으로, ‘생명미학’(피에트로 몬타니)생명경제학’(라우라 바치칼루포) 같은 신조어가 출현할 지경이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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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물론 이 추세를 고스란히 수긍하는 일은 삼가야 하지만, 다름 아닌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를 둘러싼 사유가 새로운 전개를 이룬 데에는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는 연유가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사유에서, 공공연하든 암묵적이든, 늘 중심적 테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조르다노 브루노, 지암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1688~1744)의 이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주 최근작인 살아 있는 사유 : 이탈리아 철학의 기원과 현실성(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2010)에서 에스포지토 본인이 논하듯이, 거기에는 이 나라의 역사적 특수 사정이 적잖이 관계하고 있다. ,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국가나 유럽열강, 나아가 로마 교회 등과의 갈등이나 밀당에 항상 노출된 이탈리아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국민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 바깥에서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병행하는 것도, 그 형성 이후에 계속된 것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사상은, 예를 들어 주체에 관한 반성이나 인식론이라는, 데카르트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의 왕도로부터는 필연적으로 벗어나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런 반성은 철학의 내부에서 벼려지고 철학의 전문용어로 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생명의 현실을 겨누게 됐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로부터는 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빠져나가 버린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는 서양철학의 이른바 방계가 되어 왔지만, 이것은 시각을 바꾼다면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바깥의 사유를 혹은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탈영토화를 선취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 이질적인 것에 열려 있고, 유동성이나 갈등이나 변화를 환영하는 태도이다.[각주:3]

나아가 여기서 벤야민적인 역사철학의 선취를 보탤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비코는 새로운 학문(1725)에서 지저분하고 더럽고, 절단되고, 본래의 장소로부터 벗어난 곳에 가로놓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지식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고대의 이러저러한 위대한 단편갈고 닦아’ ‘합성하고 본래의 장소에 두는것을 새로운 학의 중요한 원리라고 꼽는데,[각주:4] 이는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비코에게 시나 신화도 역사로부터 배제된 것이 아니며,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자주 역사를 술안주거리로삼는다. 이런 게 허용된다면, 이탈리아의 철학은 항상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얻었다는 측면을 갖는 것처럼 생각된다.

The New Science of Giambattista Vic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면 이탈리아의 특수 사정, 또는 이탈리아적 차이에 관한 서설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에 들어가자. 이 글에서 나는 감히 정면에서 생명정치 자체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이 반전된 것으로서 죽음정치에서 출발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죽음정치라는 특이한 신조어도 푸코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에서 매우 흥미로운 전개를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저간의 사정을 밝힌 후, 이어서 이 죽음정치를 극복하는 것, 혹은 그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비정치에 주목해보자. 장치와 무위, 공동체와 면역, 탈주체화와 비인칭 같은 문제계가 여기에 깊이 관련될 것이다. 주역으로서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아감벤과 에스포지토이지만, 뜻밖의 조연들 예를 들어 시몬 베유 도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죽음정치부터 시작해보자.

 

I. 푸코에서 아감벤으로 : ‘죽음정치로의 전도

방금 전에 나는 죽음정치도 푸코에게서 기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명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저명한 그 텍스트, 1975-76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푸코 자신은 상당히 기묘하게 울려 퍼지는 이 용어 죽음정치를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것을 암시했다.

주권권력의 계보나 전쟁과 국가에 관해 논한 일련의 강의의 마지막 날, 프랑스의 철학자는 아주 당돌하게도, ‘생명정치라고 그 자신이 명명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세기의 극히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권력에 의한 생명의 부담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이 구절로 말문을 열었던, 기념해야 할 하루이다.[각주:5]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서 푸코는 특히 18세기 이후, 인민의 생명이나 건강이 국가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상황을, 생살여탈권으로서의 주권권력으로부터, “생명을 보증하는 권력으로서의 생명권력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했다. , “권력에 의한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파악이며, “생물적인 것의 국가화의 시작이다. 그때까지의 주권권력의 모토가 죽게 만들거나[죽게 하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두는거나였다고 한다면, 생명권력의 그것은 살게 만들고[살게 하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둔다는 것이 된다.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테크놀로지가 생명정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 생명정치는 의학이나 법학, 위생학이나 통계학 등에서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권력의 개입 영역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아포리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위대한 사상가는 날카롭게 꿰뚫어봤다. 생명권력에는 과잉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권력에 대한 주권권력의 과잉이 아니라 주권권력에 대한 생명권력의 과잉입니다.” 그 과잉이 생기는 것은, 예를 들어 생명을 조절할 뿐 아니라 생명을 무성하게 하고 생물을 제조하고 괴물을 제조하며 궁극적으로는 관리 불가능하고 보편적 파괴력을 지닌 바이러스를 제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인간에게 가능해질 때이다.[각주:6] 이 경고가 울렸던 1970년대 당시 이미 생물병기나 핵이 중대한 위협으로 존재했던 것은 물론이지만, 게다가 출생 전 진단이나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기술까지도 포함한 분자생물학이 장족의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증거로, 푸코는 놓치지 않았다. 생명권력은, 그것이 바로 생물학적인 요청과 결부될 때, 가장 위험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을. 나치즘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위험의 제거와 종 자체, 혹은 인종의 강화를 목표로 삼을 경우”, 죽음의 명령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생명권력을 따라 기능하기 시작하자마자, 국가의 살인 기능이 보장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종주의에 의해서인 것이다.[각주:7] 이리하여 푸코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게 된다. “전반화된 생명권력은, 엄청나게 증대한 죽음의 권리와 죽음의 위험에 의해 사회 전체에 골고루 퍼진 절대적인 독재 정치와 일치하는 것이라고.[각주:8]

푸코는 여기서 죽음의 권리죽음의 명령혹은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죽음과 생명권력 사이의 진퇴양난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죽음의 정치혹은 죽음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또 그는 나치즘을 생명권력의 과잉이며, “생명권력을 틀림없이 전반화한 사회라고 해석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죽이다는 주권권력을 전반화한 사회이기도 하다고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각주:9] , 푸코에 따르면, 나치즘은 신구의 두 개의 권력의 메커니즘 생살여탈권의 고전적 메커니즘과 규율과 조절에 의한 생명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 이 합체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논의를 이어받아, 바로 죽음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아감벤이다. 세계적 논쟁을 야기한 책인 1998년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이 이탈리아 철학자는 프랑스 선배의 논의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막강한 전체주의 국가, 특히 나치 국가에서 살리는 생명권력의 전대미문의 절대화는 죽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똑같은 정도로 절대적인 전면화와 일치한다. 그 결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와 무매개적으로 일치한다.[각주:10] 이리하여 아감벤은 죽음정치라는 신조어를 확실하게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게다가 생명정치와 죽음정치 사이의 이 일치는 푸코에게 진정한 역설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무제한의 죽음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왜인가? 이었지만, 아감벤에게서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나치 수용소는 궁극적으로, “죽음과 대량학살의 장소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젤만을 생산하는 장소”, 즉 이제 인종적 차별을 초월해,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문턱에 인간을 몰아넣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이른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이것을 아감벤은 똑같은 저서의 다른 대목에서, 심지어 다음처럼 바꿔 말한다. 신구의 두 개의 권력 모토, “죽게 만들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 두거나살게 만들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두는것 사이에, 이제 세 번째 정식이 몰래 들어선다. , “이제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삶도 죽음도 아니고, 조절 가능하고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생존의 생산이 현대 생명권력의 주요 성능이다.”[각주:11]

그런데 푸코의 텍스트에 대한 아감벤의 이런 접근법을 오해나 곡해로 보느냐, 아니면 반대로 창조적인 확대 해석이라고 보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철학자는 비판도 당하는가 하면 거꾸로 칭찬도 받았다. 그가 상대하는 사람은 푸코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하이데거까지, 혹은 탈무드나 카발라부터 바르부르크나 벤야민까지, 만국박람회 일지로 이미 알려진 이 이탈리아인은, 대략 모든 텍스트를 그런 방식으로 읽어왔다. 이 점에 관해 본인은 자신의 방법을 2008년의 저서 사물의 표시에서 포이어바흐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원용해 이렇게 말한다. “작품의 저자에 속하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자에게 귀속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인 동시에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각주:12] 자기정당화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처럼 충실한 불성실한 자, 혹은 불성실한 충실자라는 문턱에서야말로, 아감벤의 언표는 발생한다.

한편, 원래의 기원은 고대 로마법에서 찾아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철학자와 더불어 2000년 이상의 시간을 가로질러 패러다임으로서 부상했던 호모 사케르에 관해서도,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무젤만에 관해서도, 이것들이 본래의 역사적 문맥을 무시하고, 통시태와 사료에 주의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역시 사물의 표시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전개한다.

 

만약 패러다임성은 사물 속에 있느냐 연구자의 정신 속에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그 물음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패러다임 속에서 문제가 되는 이해 가능성은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에 준거하고 있는 것이다. , 패러다임적 존재론이 있는 것이다.[각주:13]

 

여기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보는 것은 쉬우며, 실제로 본인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보편과 개별의 이원론이 문제인 것도, “하이데거에게서처럼 ’, 선취와 해석의 순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패러다임에는 기원도 아르케도 없다. 진정한 문제는 전체의 인식과 개별의 인식 중 어떤 것이 우선 혹은 선행하느냐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개별 사이의 범례적 배치 속에 있는 것이다.”[각주:14] 이런 의미에서 푸코로부터 발달시켰던 죽음정치도 또한 아감벤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죽음정치로 돌아간다면, 이 철학자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인 것으로 한 1995년의 저서 호모 사케르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 푸코에 대한 독자적인 응답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도 또한 죽음정치라는 단어는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거의 결말 부근에 죽음을 정치화하기라는 제목이 달린 절이 주도면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적절하게 소생기술이나 장기이식기술의 진보의 그늘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대의 벌거벗은 생명”, 혹은 새로운 호모 사케르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파헤친 것이었다.[각주:15] 그리고 이 책은 3년 후에 출판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을 바로 예고하는 것 마냥 근대적인 것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라는 제목이 달린 절로 막을 내린다.

호모 사케르』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후,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 근대정치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 항상화된 예외상태 등 같은 아감벤 식의 말투가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새로울 것이다. 마치 911 이후의 세계정세가 이 아감벤 효과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마냥.[각주:16] 예를 들어, 관타나모 수용소나 아부그라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이나,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생각하면, 아감벤은 마치 현대의 예언자인 셈이다. 사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예를 들어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사(2007324일자)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아감벤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이면서 현대의 호모 사케르살아 있는 죽은 기사들― 을 언급했었다.[각주:17]

아무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로 전도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듣는다면 격렬한 경고로도 받아들여지지만, 반대로 비관주의나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장난치듯이 위기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에 대해 아마 본인은 반론을 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정치의 내부에서만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허무주의의 내부에 머무는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이다.[각주:18] 여기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되지만, 이것에 관해 고찰하기 전에 소론의 또 다른 주역인 에스포지토에게 등장할 기회를 줘보자.

 

II. 아감벤에서 에스포지토로 : ‘면역의 공과

이 나폴리의 철학자도 푸코와 아감벤을 토대로, ‘죽음정치에 관해 파고들어 얘기하려고 한다. 2004년에 출판된 두께감이 있는 책 비오스에서, 꼬박 한 개의 장을 죽음정치”(인종의 사이클)에 할애하고, 푸코가 문제 제기에 머물렀던 나치즘에서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제를 철저하게 논하고 있다.[각주:19] 행위수행적이고 범례론적인 아감벤의 말투에 대해, 에스포지토의 그것은, 얼핏 보면, 굳이 말하면 사실확인적이고 학술논문적인 체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호모 사케르로 상징되듯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문구에 호소하는 것도 굳이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아감벤 정도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본인도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 논의에는 항상 확실한 강도와 신뢰성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굳이 부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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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키아벨리나 비코의 연구에서 출발한 이 정치철학자는 생명정치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 선배인 아감벤과도, 심지어 또 다른 선배인 안토니오 네그리(1933)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전에 논한 적이 있기에 그것을 참조하기를 바라지만,[각주:20]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아감벤의 묵시록에도 네그리의 다행증(euphoria)에도 치우치지 않는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원래 푸코의 생명정치 자체가 이런 양자택일을 초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두 개의 상이한 항으로서 우선 각각 전제되고, 그런 후에 양자가 외재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생명정치는 아감벤처럼 삶에 대한 권력의 과잉 행사로 보게 되거나, 네그리처럼 권력에 대한 삶의 과잉 잠재력으로 보게 되는 식으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하게 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달리 말하면, 생명정치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 속으로 해소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삶의 절대적인 힘 속에 흡수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겨둔 아포리아이다.

이에 대해 나폴리의 철학자가 제기하는 것은 삶 자체가 그 성립에서부터 이미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출생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듯이,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빼어나게 내재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이미 깨달았던 것 그대로이다.[각주:21] 그 때문에, 에스포지토가 그의 저서의 제목으로 골랐던 것이 벌거벗은 생명혹은 자연적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조에가 아니라, 이것과 대치되고, 사회적 삶을 의미하는 비오스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감벤은 비오스를 조에로 접어넣으려 하는 과정 속에 생명정치의 문턱 죽음정치 을 봤지만,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조에는 비오스의 내적 차이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미 어떤 형태로 비오스로 이행하지 않는 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정치의 어디에 죽음정치로 전락할 위험성이 숨어 있는 것인지, 에스포지토에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리하여 나치즘의 생명정치의 철저한 규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기고,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정치를 그것으로 귀착시키려 했던 수용소의 정치학의 수수께끼란, 결국 무엇일까? 여기서 그 자세한 논의를 추적할 수는 없으나, 에스포지토는 그것을 면역혹은 면역화라는 범주 속에서 알아내려고 한다. 의학생리학에서 발전됐던 이 범주는, 나폴리의 철학자에게 새롭게 생명정치의 씨름판으로 불러들여지고, 철저하게 재검토된다. 2002년의 저서 이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이 그것으로, 사실은 비오스보다 먼저 출판됐다.[각주:22]면역이라는 범주가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생명 자체의 내부에서 이른바 내재론적으로 생명정치를 고찰하는 것을 가능케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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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면역화를 생리학의 영역에서 끌어낸 것은 에스포지토가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어 911 이후, 점점 더 자기면역화를 강화하는 사회가 자살행위로 향해가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를 울렸던 것은 주지하듯이 말년의 자크 데리다였다.[각주:23] [각주:24] 그렇지만 프랑스의 탈구축주의자가 지적하는 전지구적 자기면역화의 위기란 생명정치에 직접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꿈꾸었던 오토포이에시스적 면역화와, 에스포지토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반해 나폴리의 정치철학자가 말하는 면역화는 바로 생명정치의 무대의 중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나치즘의 인종주의나 우생학주의가 초래한 완전한 자기면역화에의 지향은, 자기와 타자의 완전한 파괴라는 사태를 초래한 생명정치 결국은 죽음정치 나 다름없다. 아감벤이 생명정치의 묵시록으로 간주하는 것은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사실상 이무니타스(면역)’라는 장치의 궁극적인 활동의 결과나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나치즘적인 면역화는 완전히 과거형으로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면역형 민주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학이나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의해 살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의 새로운 선별이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다(점점 더 고도화되는 출생 전 진단은 그 전형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 기술은 개인 개인의 신체를 넘어 종의 특징까지 꼼짝없이 개입한다. “도처에 맞서기 힘든 방식으로 잠재적인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면역 증후군이 재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을 정도로 나치즘의 이면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는 한,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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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페르소나의 정치학 : ‘인격가면

삶의 선별, 오늘날 이것은 노골적인 인종주의나 전체주의적 사상에서라기보다, 특히 자유주의자라고 지목된 논객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 사상이나 제도의 내부에서 복권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인격이라는 개념 에스포지토의 표현으로는 장치이다. 인격은 개인이나 시민 등 비교적 새로운 개념보다 훨씬 오래되고 보편적이라고 간주됐다. ‘인격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가 수반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호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라틴어 페루소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원래는 가면을 의미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역할이나 등장인물, 자격이나 처지, 심지어 위격이나 인격이나 인칭과 같은 의미가 파생된다. 게다가 이 단어는 특히 고대 로마법이나 기독교 둘 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어였다는 경위가 있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 정치와 사법의 근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페르소나라는 장치, 그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기능했는지, 에스포지토의 3인칭의 철학(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Einaudi, Torino, 2007)은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해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각주:26] [각주:27] 상세한 논의는 이 책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만,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 장치는 고대 이후 줄곧 인간의 분할과 선별, 포함과 배제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기능해 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페르소나는 본래 단일한 것이었을 인간의 삶을 여러 겹으로 분열시키는 장치이며, 이 분열은 개인 수준에서도 집단 수준에서도 작동해 왔다. 이 사실은 노골적으로 인격을 짓밟는 차별적 제도나 담론에 있어서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격 존중을 정면에 내거는 인도적이고 인권주의적이라고 지목되는 사상과 제도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격과 인격 없는 자 사이의 차별화가 거기에서는 항상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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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뜻 보기에 정반대처럼 보이는 정치나 사상, 예를 들어 철저하게 인권을 파괴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와, 이와 반대로 인격을 금과옥조처럼 추켜세우는 자유주의의 인권 사상이 사실은 똑같은 전제 살 가치가 삶, 삶의 생산적 관리 등 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도, 에스포지토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생물학이나 인류학, 언어학이나 사회학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인간을 규명하고자 해온 근대의 여러 과학들을 근저에서 파헤치는 것, 그것이 이 페르소나의 장치이며, 나치즘과 자유주의는 똑같은 장치에 의해서 초래된 서로의 물구나무 선 상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페르소나가 분할과 선택의 장치이라고 한다면, 그 당연한 귀결로서 산출되는 것이 불분명한 경계 영역이며, 그곳에서는 또한 포함적 배제라는 역설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해온 것이다. 나폴리의 철학자는 물론 이 점에도 매우 민감하다(여기에도 역시 아감벤의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로마법에 내포된 이러한 불분명 지대를, 근대의 철학과 사법과 정치 안에서 추적하려 하는 2페르소나, 인간, 사물3인칭의 철학에서도 가장 농밀한 장이다. 최첨단 의료의 발달과 생명윤리의 수립은 이 불분명 지대를 해소시키기는커녕 더더욱 곤란한 아포리아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분할선을 아무리 세밀하고 정밀하게 하더라도, 원리적으로 잔여 ‘~가 아니지 않다는 항상 생기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나 외교, 사법이나 의료 등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인격의 이념이 널리 침투하지 않은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에스포지토에 의하면 이야기는 거꾸로다. 침투하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의 길은 있을까? 여기서 부상되는 것이 비인격혹은 비인칭이라는 문제계인데, 이것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감벤의 논의를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감벤도 페르소나의 주제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다. 희극이라는 제목의 단테론(1976)에서 페르소나의 계보를 간결하게 소묘하면서, 고대나 중세에는 아직 이 단어에 본래의 연극적인 반향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추적한다.[각주:28] 아감벤이 공감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의식이나 도덕의 주체로서의인격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가면으로서의, 혹은 얼굴로서의 페르소나이다. 원래 인간에게서 페르소나와 본성이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떤 가면을 떠맡아 연기하는 것인가,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이다.

최근작 벌거벗음(2009)에 수록된 논문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에서는 생물학적·유전학적인 데이터 새로운 벌거벗은 생명의 양태 로 점점 환원되어가는, 우리 현대인의 정체성이 통렬하게 비판된다. 이제 그것은 페르소나적 정체성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사회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에 의한 승인과 결합된 정체성이 아니며, 사회적 가면을 쓰고, 그래서 가면에 녹아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개인의 능력과 결합된 정체성도 아니다.”[각주:29] 이 인용문에서도 역투사되듯이, 아감벤에게 페르소나는 인격이라기보다는 항상 그 본뜻인 가면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가면과의 접촉 방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로 얼굴이라는 제목의 논문(1990년 초출)이다. “나의 얼굴은 나의 바깥이다. 나의 모든 고유성이 차이를 잃고, 고유한 것과 공통된 것, 내부와 외부가 차이를 잃는 점이다.”[각주:30] 그 때문에 페르소나의 본래 의미인 가면이란 안에 갇힌 나(의 인격)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열려진 나의 얼굴=경계선을 가리킨다.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소수자적 생명정치라는 제목의 인터뷰(2003)에서 아감벤은 푸코의 아포리아를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푸코의 말년의 작업에는 제게 아주 흥미롭게 보이는 한 가지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에의 배려에 관한 작업의 전체가 있습니다. , 자기의 모든 형식과 실천에 있어서 자기에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동시에 반복해서 얘기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정반대의 주제입니다. , 자기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물으려 한다면, 결국 삶으로 나아간다. 산다는 것의 기법은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 심리학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의 경시로, 자기의 분리나 일탈로 이끌어져야 할 것이라는 얘기니까요.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죠. , 주체화의 과정 같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실천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 주체화의 과정은, 반대의 것으로, 즉 분리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발견되는 것은, 단지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것에서만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이중의 운동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각주:31]

* 이탈리아어 : https://www.facebook.com/notes/riccardo-tammaro/una-biopolitica-minore-intervista-di-stany-grelet-e-mathieu-potte-bonneville-a-g/10207385837176982/

* 프랑스어 : http://www.vacarme.org/article255.html

Dans les derniers travaux de Foucault, il y a une aporie qui me semble très intéressante. Il y a d’une part tout le travail sur le « souci de soi » : il faut se soucier de soi, dans toutes les formes de pratique de soi. Et en même temps, à plusieurs reprises, il énonce le thème apparemment opposé : il faut se déprendre de soi. Il dit plusieurs fois : « On est fini dans la vie si l’on s’interroge sur son identité ; l’art de vivre, c’est détruire l’identité, détruire la psychologie. » Donc il y a bien ici une aporie : un souci de soi qui doit aboutir à une déprise de soi. Une manière dont on pourrait poser la question, c’est : qu’est-ce que c’est qu’une pratique de soi, non pas comme processus de subjectivation, mais qui n’aboutirait au contraire qu’à une déprise, qui trouverait son identité uniquement dans une déprise de soi ? Il faudrait pour ainsi dire se tenir en même temps dans ce double mouvement, désubjectivation et subjectivation.

 

여기서도 또한, 아감벤 식의 푸코 해석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또한 페르소나와 주체를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아감벤에게서 정체성은 탈정체성과, 인격(인칭)은 비인격(비인칭), 인격화는 탈인격화와, 주체화는 탈주체화와 언제나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연결된 것이며, 한쪽 없이는 다른 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력을 -잠재력“~하지 않을 수 있다로서 독창적으로 바꿔 읽은 것과도 관련되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졸저에서 논의한 일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우리는 다시 비인칭의 문제계로 돌아오게 된다.

 

IV. ‘비인칭임의(쿼드리베트)’

사실 아감벤이 비인칭에 대해 정면에서 얘기한 것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를 대신하는 것이 라틴어로 말해서 쿼드리베트(quodlibet)’, 즉 불특정한 익명적 임의인 자이다. 그의 정치철학에서, 잠재력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뜻밖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 임의이다. 그렇지만 이 기묘한 대명사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짧으나 농밀한 한 권인 도래하는 공동체는 바로 이 임의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임의[누구든]’야말로, 혹은 이것이 어원이 된 뭐든이야말로 다가올 정치와 공동체의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초월론자들의 스콜라학적 열거법에 따르면, 임의의[뭐든] 존재자는 하나이며 참이며 선 혹은 완전하다.” 그래서 뭐든이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쨌든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비인칭의 마음에 든다(libet)”에 대한 참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32] 유사한 이탈리아어에는 또한 아무리 ~ 해도라는 의미의 콸시볼리아(qualsivoglia)”가 있는데, 여기서도 원하다라는 의미의 볼리아(voglia)”가 포함되어 있다.

, ‘임의의사람은 원해지는 것이며, ‘사랑받는 것이다. ‘뭐든’, ‘누구든무관심하고 무관한 무엇인가라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뭐든임의는 또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essere tale qual è)”라고도, 혹은 특이성=단일성(singolaratà)”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특이성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뛰어난 개성이나 독창성 같은 것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각각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단일하고 특이한 것이다. 임의특이성은 또한 잠재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 같다. ‘임의의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맥에서 바꿔 말한다면, 아감벤이 말하는 임의란 바로 인격의 앞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며, 생명정치적인 선긋기나 선택의 바로 앞에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홉스)친구/의 이항대립(슈미트)도 아니고 이 임의에 그의 정치철학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또 다른 논문에서, 굳이 시대착오적인 개념인 게니우스를 불러내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비인칭()(impersonale)’이라는 형용사이다. 게니우스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에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 두는 신을 가리켜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단어로, ‘천재재능의 어원이 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점이 아니며, “이 매우 친밀하게 인칭적인 신이, 우리 속에 있으며, 더 비인칭적인 것이며, 우리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것의 화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 ‘게니우스에 있어서 암시되고 있는 의미란, “인간이 단순히 자아나 개인적 의식일 뿐 아니라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 굳이 말하면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요소와 더불어 살아 있다는 것이다.[각주:33]

여기서 아감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질베르 시몽동전개체적인 것인데, 새로운 보조선으로서,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키무라 빈(木村敏)이 비인칭의 삶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덧붙여도 될 것이다. “누군가의(저라도 좋고, 어떤 사람이라도 좋지만)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누구든 좋다, 말하자면 비인칭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키무라는 또한,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때문에 특정한 신체에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닌 이 비인칭의 생명을, 조에로서 고쳐 읽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로서의 생명이며, ‘비인칭이고 자타미분화상태에 있다.[각주: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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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칭과 비인칭,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삶의 이중의 운동은, 아감벤의 바틀비(1993)에서 더 나아가, 창조와 탈창조라는 표현으로 불러내지고 있다.[각주:35] 말할 것도 없이, 탈창조라는 단어는, 시몬 베유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본인은 왜 그런지 그 출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창출된 것을, 창출되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속으로 옮겨보내게 하는 것이라는, 베유에 의한 탈창조’(혹은 창조’)의 정의는, 아감벤에게서의 -잠재력과 겹치는 바가 큰 것 같다.[각주: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빌의 소설 주인공 바틀비가 체현하는 -잠재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한 우연성의 존재론은 언급하면서도 베유의 이름은 왜 보이지 않게 깔아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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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최근 십수년 동안의 저작에서 아감벤은 신학적 전회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변화를 수행하는 것인데, 이 전개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신빈화로의 경향을 강화한 베유의 변화에 의해 선취되고 있다는 견해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각주:37] 그녀가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묘사하려고 한 것, 신의 페르소나의 의지로서의 섭리라는 신화는, 아감벤이 왕국과 영광(2007)에서 전개하게 되는 것과 거의 대응한다. 심지어 극빈 : 수도원 규칙과 삶의 형식(2011)에서는 청빈의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그 수도회, 삶의 형식의 하나의 모델이 추적되고 있는 것이다.[각주:38] 아감벤이 여기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시시의 성자와 그 일파 성령파 소유사용을 명확히 구별하고, 전자에 대해 후자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또한 권리나 소유를 인격과 나란히 폭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베유의 그림자가 춤추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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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에스포지토는 그의 저작 상당수에서, 확실히 프랑스의 여성사상가에 대한 준거를 공언하고 있다. 그는 그녀 속에서, 비인칭의 철학의 최초의 표명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 나중에 블랑쇼나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처음의 기점이, 베유에서 찾아지고 있다.[각주:39] 실제로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그녀는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스러운 것이란 인격이기는커녕 한 명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 비인격적인 것이며, 그것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더 말하면, “비인격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에 직면한다. , 그들 속의 인격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 아니라, 인격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몇 가지 가능성으로 덮어져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다.”[각주:40]

에스포지토의 독해를 곱씹는다면, 이리하여 베이는, 인격과 권리 사이에 있는 배타주의적 관계를 고발하고, 정의를 권리로부터 확연하게 떼어낸다. 권리가 인격=인칭에 귀속된다면, 정의는 비인격=비인칭적인 것에 결부된다. 윤리적 차원은, 인칭이 아니라 비인칭에 갖춰져 있다. 결국 비인칭이란 단순히 인격의 소박한 부정이나 대립항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인격이 아닌 것, 더 이상 인격이 아닌 것, 결코 인격이라고는 공언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향해진, 분리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인격의 내부에서 동결시키는 것이다.[각주:41] 그렇다고 한다면, 비인칭적인 것을 둘러싼 사고는, 생명정치의 내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이 된다.

 

V. ‘비정치무위

에스포지토가 베유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환한 것은, 사실 지금부터 4반 세기 전, 1988년 초판된 저작 비정치의 범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에스포지토의 정치철학은 비정치라는 관점에서 정치를 역투영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른바 비정치가 정치에의 주의의 약체화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그 강화와 철저화라는 것은, 시몬 베유부터 한나 아렌트까지, 헤르만 블로흐부터 조르주 바타이유까지, 심지어 최근에는 르네 샬까지의 작업과 전기의 양쪽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다고 말이다.[각주:42]비정치란 정치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래할 정치의 별명이 비정치이며, 그 모델 중 하나가 베유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비인칭으로의 이행은 윤리적이고 신학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요청이기도 했다. 정의나 자유는 우리에 의해 쟁취된다기보다는 비인칭에 호소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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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는 반정치도 초정치도 탈정치도 아니다. 정치의 이면도 아니고 이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거꾸로 바로 정치적인 것의 한복판 속에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는 힘을 가진다. 이런 생각을 정면에서 수립한 것은 이탈리아에서는 마시모 카차리(1944~)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1978년의 논고 니체에게서의 비정치에서, 일찍이 네그리의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이 베네치아의 철학자는, 토마스 만에 의한 니체의 비정치성의 해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각주:43]

독일의 소설가에 따르면, 니체는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독일 문화의 중심적 존재로 간주되고, 그 비정치성이야말로 독일의 정신적 힘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카차리에 따르면, 비정치는 정치를 무가치한 것으로서 단죄하는 것에 있는 것도,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정치야말로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의 정치를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비정치는 허위를 고발하는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이다. 결국 카차리는 거절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 신념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차치하고 베네치아 시장 재직 중에 미시정치로서 실천됐다는 것은 또한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에스포지토에게서의 비정치도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1960-70년대에 일본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이른바 논폴리와는 구별된다. 비정치는 중립적인 게 아니라, 빼어나게 정치적인 몸짓이다. 권리에 근거한 정치라는 발상을 철저하게 비판한 베유를 받아들여, 에스포지토는 의무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구상한다. 이 발상은 또한 공동체의 어원이 된 라틴어 코무니타스와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의무책임을 의미하는 무누스, ‘~와 더불어,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사 타무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이기 때문이다. ,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것 란 본래 각자가 타자에 대한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면역의 어원인 라틴어의 이무니타스는 똑같은 무누스와 지우다를 가리키는 접두사 가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이무니타스는 따라서 의무로부터 면제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의 인식과는 정반대로, 그 어원에 따르면, 공동체란 원래 동일성이나 고유성에 집착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며, 면역은 자기보존은커녕 자기와 타자 쌍방의 파멸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각주:44] 에스포지토는 근대의 정치사법적 범주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면역화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격은 그 으뜸가는 것 중 하나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면역을 하나의 쌍을 파악하고, ‘의무를 끼워 넣어 흡사 정반대의 관계로 양자를 둔 점에 에스포지토의 새로움이 있다. 그래서 코무니타스이무니타스비정치의 범주의 뒤를 쫓듯이 출판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또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공동체가 바타이유부터 블랑쇼를 거쳐 낭시로 이어지는, 이른바 비정치적인 공동체 사상 계보로 연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인칭에 대한 주목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삶의 저치의 지평이 열리게 될지, 그 대답은 아직은 분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페르소나 사이의 형이상학적인 분리를 무효화하는 생명정치는 정말로 가능할까? ‘인격이라는 장치에 빨려 들어가버린 삶을 어떻게 하면 탈환할 수 있을까? 적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선별하거나 계층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감벤을 부연해서 말한다면, 그 누구도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냥 사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럼 아감벤은 어떨까? 내가 아는 한, 그가 정색하고 비정치를 입에 담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대신에 되풀이하여 인용되는 것은 무위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장치론과도 연동되어 있다. ‘장치라는 개념도 푸코에게서 연원되는 것이지만, 이 이탈리아 후배는 여기에서도 그것을 독자적으로 고쳐 읽고 있다. 결국 세계 통치의 다양한 장치 그 으뜸가는 것이 생명정치의 그것 는 세계를 구원하기는커녕 카타스토로피로 이끌어 간다고, 감히 단순화해서 한다면,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이다. 최첨단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도 궁극적으로는 죽음정치에 봉사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답은 단순하다. 이런 장치들을 작동시키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추앙되고 있는 그 신성함을 신성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무위와 신성모독이라는 두 개의 몸짓은, 이리하여 아감벤에게서 밀접하게 결합된다. 아니 양자는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이 왕국과 영광의 결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삼위일체의 교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이코노미아”, 즉 통치의 형태를 자세하게 추적한 끝에 아감벤이 당도하는 것은, 무위로서의 권력의 영광이다. 신이 엿새 동안의 창조 후에 쉬고, 최후의 심판 후에 영원한 안식일이 오듯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상 무위라는 빈 장소이다. 오늘날 가장 초미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 스스로의 장치 속에 이 무위를 탈환하는 것이다.[각주:45] 무위나 신성모독은 종종 자유로운 사용이나 공통의 사용이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이런 아감벤의 장치관, 혹은 더 넓게는 기술관은, 종종 너무도 소박할 뿐 아니라, 너무도 비관적이라고 비난받아 왔다.[각주:46] 그렇지만 무위나 신성모독은 쓸데없이 장치를 중지시키거나 파괴하거나 하는 것도, 게으르게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도 말해지고 있듯이, 그것은 분리·분할된 것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리는 대항장치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장치의 자유로운 사용이며, 장치 아래서 노는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그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각주:47]

앞서 말했듯이, 아감벤은 최근 점점 더 소유에서 사용으로, 풍요에서 가난으로 라는 발상의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리하여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장대한 <호모 사케르> 계획은 정치로부터 출발해 비정치로 급속하게 방향타를 꺾었다(그렇지만 물론 그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 아감벤의 무위나 에스포지토의 비정치는 오늘날 더욱,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에게서의 전-정치에 대한 주목이나, 자크 랑시에르에게서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을 둘러싼 사유와도 맞대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 그런 시도도 시작되고 있지만, 그것은 향후의 과제로 남겨둔다.[각주:48]

아무튼 예전에 시몬 베유가 제창한 비정치, 전체주의의 폭력이라는 동시대의 카타스트로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면, 작금 새롭게 재부상하고 있는 비정치의 사유는, 관리화와 규율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삶의 보호와 부정이 바야흐로 불분명해지는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턱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1. 졸고, 「アイステーシスの潜勢力」, 『ラチオ』 第04号, 講談社, 2007년 11월 및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 講談社選書メチエ, 2008년을 참조. [본문으로]
  2. Pietro Montani, Bioestetica: Senso comune, tecnica et artenell’età della globalizzazione, Roma: Carocci, 2007 ; Laura Bazzicalupo, II governo delle vite : Biopolitica ed economia Roma-Bari: Laterza, 2006. [본문으로]
  3. Roberto Esposito, 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 Torino: Einaudi, 2010. [본문으로]
  4. ジャンバッティスタ•ヴィーコ, 『新しい学 1󰡕, 上村忠男訳、法政大学出版局、ニ〇〇七年、ニ〇五ぺージ。 [본문으로]
  5.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5-1976), Paris: Gallimard-Seuil, 1997, p.213(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콜레주드프랑스강의 1975-1976』, 김상운 옮김, 난장) [본문으로]
  6. Ibid., p.226. [본문으로]
  7. Ibid., p.228. [본문으로]
  8. Ibid., p.232. [본문으로]
  9. Ibid. [본문으로]
  10. Giorgio Agamben, Quel che resta di Auschwitz : L’archivio e il testimone (Homo sacer III),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8. p.78. [본문으로]
  11. Ibid., p.145. [본문으로]
  12. 조르조 아감벤, 『사물의 표시』, 양창렬 옮김, 난장, ****. [본문으로]
  13. 상동, ***쪽. [본문으로]
  14. 상동, ***쪽. [본문으로]
  15. Giorgio Agamben, Homo Sacer: II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1995),Torino: Einaudi, 2005, pp.178-184(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 [본문으로]
  16. 이에 관해서는 졸저, 『アガンペ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17. Slavoj Zizek, “Knights of the Living Dead”, New York Times, March 24, 2007. [본문으로]
  18. Agamben, Homo Sacer, cit. p.69. [본문으로]
  19. Roberto Esposito, Bios: Biopolitica e filosofia, Torino: Einaudi, 2004, chap. IV. [본문으로]
  20. 拙著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ラチオ』 第01号, 講談社, 2006년 2월 및 「ナポリ発、全人類へ──ロべルト・エスポジトの思想圏」(訳者イントロダクション), ロべルト・エスポジト, 『近代政治の脱構築—共同体・免疫・生政治』, 岡田温司 訳, 講談社選書メチエ, 2009년 수록. [본문으로]
  21. Esposito, Bios, cit, pp.194-196. 비오스의 조에로의 환원 속에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메커니즘을 봤던 아감벤에 대해서, 에스포지토도 “조에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물학화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고 날카롭게 견제하고 있다(Ibid., p.153). [본문으로]
  22. Roberto Esposito, Immunitas : Protezione e negazione della vita, Torino: Einaudi, 282. [본문으로]
  23. 다음을 참조. 宮崎裕助 「自己免疫的民主主義とはなにか──ジャック•デリダにおける「来たるベさデモクラシー論」の帰趨」 『思想』 第1060号(2012年8月)岩波書店、45-68頁. [본문으로]
  24. * 데리다의 자기면역화에 대해 데리다의 ‘자기면역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은 『불량배들』이다. 이 책은 두 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리지의 연례적인 10일 동안의 강연과 세미나로, 장문의 기록 「강자의 이성 : 불량국가들은 있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도래할 계몽의 <세계> : 예외, 계산, 주권」이다. 첫 번째 강연에서 데리다는 미국이 일부 국가들을 고발하기 위해 사용한 ‘불량국가’라는 개념을 꺼내들고, 그 의문점을 들춰낸다. 여기까지는 촘스키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정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권과 이성의 문제이며, 생명의 자기보존으로서의 면역과, 이것이 생명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자기면역, ‘죽음충동’(p.299)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까지 끌고 가는 수완은, 아감벤과 데리다 두 명의 사상가의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두 번째의 짧은 강연에서는 시간적인 제약도 있고 해서, 데리다는 “전보적이기도 하고 강령적이기도 한”(p.293) 형태로, 지금까지 얘기한 다양한 문제를 요약적으로, 솜씨 좋게 제시한다. 그 요약의 능수능란함 때문에, 독자는 눈이 어질어질한 부분도 있지만, 거꾸로 인용을 견뎌내는 짧은 문장도 많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시간의 여유가 너무 많아서(데리다는 그래도 모자라다고 계속 말하지만), 우회로를 거칠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인용할 수 있는 대목은 별로 없다. 이 우회로가 즐거운 것은 확실하며, 데리다의 세미나는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서평에서는 전보적인 것을 더욱 인상비평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처음 논문에서는 민주주의가 자기면역을 일으키며, 자살하기 직전에 이른 사태를 고찰한다. 무엇보다 범례적인 것은 알제리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슬람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에서 압승할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선거를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이름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침해의 전형적인 사건(p.74)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정부는 “시작된 선거과정은 민주적으로 민주주의의 종언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주권적으로 결정했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에 있어서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치료를 하기 때문에, 최악의, 거리 전체의 가장 높은 침해에 대해서 그것을 면역화하기 위해서, 적어도 잠정적으로 중지하는 것”(Ibid.)을. 이것은 “자기면역적 자살”(p.75)이었다. 전보적인 두 번째 논문으로부터 자기면역의 간단한 정의를 복습해두자. “어떤 생체 속에,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정체에 부여하는 것, 바로 해당 주체가 자살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p.234)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죽이는 알제리, 주권을 지키기 위해 주권의 근원인 것을 죽이는 쿠데타, 불량국가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불량국가가 되는 미국. 미국 행정부는 ‘악의 축’에 대항한다고 칭하며, 민주적 자유를 “불가피하게, 또한 부인 불가능한 방식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떤 민주주의자도 진심으로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p.86).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폭력적인 불량국가, 그것은 스스로 그 위임자라고 자칭하는 국제법을,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말하고,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는 국제법을,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명하는 경우에는 매번 무시해온 국가, 계속 침범한 국가, 즉 미국이다.”(p.189). 그리고 미국과 동맹하는 국가도, 이것에 대항하는 국가도, 모든 국가도 국익의 이름으로, 주권의 지고성의 이름으로,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똑같이 행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불량국가밖에는 없으며, 그리고 이제 불량국가는 없다. 이 개념은 그 한계에”(p.205) 도달한 것이며, “이 종언은 항상, 처음부터, 가까웠던 것이다”(Ibid.). 또한 데리다는 이 주권성의 이론의 배후에 기독교의 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주적이라 불리는 체제에서조차 주권의 근저에는 존재-신론이 있다”(p.299).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거기까지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면역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바꿔 말하면, 아포리아이기도 하고 이중구속이기도 하다. “아포리아, 이중구속 및 자기면역적 과정은,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지만, 이것들은 바로 공동으로, 그리고 부담=책임으로서, 내적 모순 이상의 것, 결정 불가능성을 … 내적 이율배반을 갖고 있다”(p.78). 이 개념은 여기까지 부연하면, 뭐든지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처럼 되어 버린 것은 확실하다. 그는 전보적으로 몇 개인가? 데리다는 복제를 좋아하지만, 치료적인 복제는 부정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원래 모든 개별성에는 반복이라는 요소가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고 개성의 고귀함을, 하나의 생명의 특이성을 강조해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반복・복제는 생산・재생산과 완전히 똑같이, 문화・지식・언어・교육의 조건을 보증하는 것이다”(p.278). 인간의 특이성에 근거한 복제반대론은 “유전자주의 혹은 생물학주의를, 즉 뿌리 깊은 동물학주의, 근본적인 환원주의를, 스스로 반대하고 있는 공리계와 나눠 갖고 있는”(Ibid.) 것이다. 그러나 자기면역이 절대적인 악인 것은 아니다. 사건이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면, “사건은 절대적인 면역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지평 없이, 벌거벗음의 취약함에 접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타자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치하고 서로 맞서는 것은 여전히 할 수 없다. 혹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자기면역성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대상에 노출되는 것, 즉 도래하는 것이 없는 자에게,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것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에 노출되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성이 있을 뿐이고 자기면역성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p.290). 레비나스의 알레르기 이론과 통저하며, 데리다의 이론의 깊이가 엿보이는 경지이다. [본문으로]
  25. Roberto Esposito, Termini Della Politica, Comunita, Immunita, Biopolitica, Mimesis Edizioni, 2008. [본문으로]
  26. Roberto Esposito, 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 Einaudi, Torino, 2007. 이와 아울러 2011년 3월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강연에 기초한 다음의 논고도 참조. ロベルト•エスポジト「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多賀健太郎 訳, 『表象06』, 2012년. 나아가 이 잡지의 특집 「ベルソナの詩学」에 기고한 젊은 연구자들(岡本源太, 横山太郎, 千葉雅也, 信友建志)의 논고도 참조. [본문으로]
  27. 제목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강연회, 「장치로서의 페르소나(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http://utcp.c.u-tokyo.ac.jp/blog/2011/03/roberto-esposito-persona-as-de/ 2011년 3월 9일, 도쿄대학 코마바 캠퍼스에서 이탈리아 인문고학연구소 소장인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씨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에스포지토 씨 외에도 사회자로 교토대학 교수인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씨, 토론자로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페델리코 루이제티 씨를 맞이한 본 강연회는 총 세 시간 동안 논의가 이뤄졌으며, 그의 사상의 현실성을 음미하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맨 처음으로 진행을 맡은 오카다 씨가 이탈리아 현대사상의 종합적 해설과 그 속에서 에스포지토 씨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정중한 설명이 주어졌다. 오카다 씨의 지적에 따르면, 에스포지토 씨뿐 아니라, 아감벤이나 카차리, 혹은 바티모 등 이른바 이탈리아 현대사상이 주목을 받은 원인으로서, 이탈리아가 ‘국민국가’로서 좋든 나쁘든 기능하지 못한 것과 뒤얽혀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중심적 권력 부재 속에서 태어난 이들 사상이, ‘포스트제국’적인 시대 정황과 부합하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에스포지토 씨는 “비오스bios”, “면역immunitas”, 그리고 “공동체communitas”를 주제로 한 3부작을 중심으로, 푸코 이후의 생명정치의 문제를 공동체론으로 전개하면서, 생명의 탈구축을 기반으로 한 포스트휴먼적 정치철학을 구축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소개됐다. 기조강연에서 에스포지토 씨의 강연 내용은 “페르소나 persona” 개념의 심급과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격, 위계(位階), 혹은 가면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그 다의성 속에서, 특히 법철학적 함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서양사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맡아왔다고 분석된다. 에스포지토 씨에 따르면, 들뢰즈나 아감벤이 ‘장치’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던 오이코노미아를 정초지었던 것이 바로 이 ‘페르소나’에 다름 아니며, 거기서 ‘신/인간’, ‘혼/육체’의 이분법이 유비적으로 구조화됐다고 간주된다. 주체와 비주체의 존재론적 차이를 정초짓는 이 구조가, 후자를 ‘타락’이나 ‘병’, ‘동물’로 명명해 왔던 바로 그것이라는 얘기다. 또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법의 체계와도 접점을 갖고 있다. 무엇이 ‘페르소나(=개인)’인가라는 법적 지표에 의해, 노예와 자유인, 심지어 타고난 자유인과 해방 노예의 자유인의 구별이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즉, 법적 기능에 있어서의 페르소나는 규범과 예외를 무한히 창출함으로써 모든 것을 그 무한한 권리에 있어서의 이분법으로 끌어들이는 부단한 변증법적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법=권리적 통합이나 보편화는 예외자를 배제하고 이어서 이것들을 에워싸면서, 새로운 통합을 지향한다. 에스포지토 씨의 분석은 이 구조를 ‘인간화’의 메커니즘에 내재하는 ‘비-인간화(탈페르소나화)’로서 부각시켜 보여준다. 즉, 비-인간은 페르소나 개념이 촉진했던 주체화 과정의 등 뒤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억압되고, 적어도 개념 수준에서, ‘완벽한 인간’ 아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안락사나 장애와 뒤얽혀 있는 문제도 이런 조류 속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인간/비인간’의 부단한 변증법에 맞서서, 에스포지토 씨가 그 돌파구로서 이번 강연에서 끌어낸 것은 시몬 베이유의 사상이다. 고대 로마를 참조하면서 히틀러주의의 기원을 분석하는 베이유는, 거기에 로마법적인 페르소나의 움직임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낸다. 베이유는 비-인간적인 폭력이 인간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을 냉혹하게 지적하면서도, 인간의 내부에 깃든 다른 비-인간, 즉 ‘신성한 것’을 동시에 희구한다. 상이한 ‘내부’, 상이한 ‘비-인간’을 어떻게 끌어당겨, 주체를 변환할 수 있는가, 에스포지토 씨가 베이유에게서 찾아낸 가능성은 여전히 자세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루이제티 씨의 의견 및 회장의 질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루이제티 씨는 에스포지토 씨의 ‘비인간’의 사상을 프랑스 현대사상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고, 에스포지토 씨의 사상 속에 ‘대륙/영미’와는 상이한 별개의 유럽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첫머리에서 말한 오카다 씨의 지적과도 겹치는 것인데, ‘이탈리아’의 이름 아래서 상이한 근대, 상이한 철학, 상이한 사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라는 지적은 데리다가 『불량배들』 안에서 행한 철학에서의 라틴 기원의 문제와도 관련된 것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이리라. 이 점에 관해서는 강연장에서의 질의에서, “상이한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타자”인 일본인의 사상에 대해서 ‘페르소나’의 탈구축은 의의를 가지느냐는 지적이 있었던 것도 덧붙이고 싶다. 이 밖에도 거점 리더인 코바야시로부터는 베이유의 사상에 있는 종교성이라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함으로써 중성화하는 것이 허용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었다. 보고자인 나 大橋完太郎도, 페르소나의 탈구축이 철저하고 모두가 비인간이 된 세계는 과연 얼마나 살기 좋은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했다.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긍정적 가치로 옮겨 놓을 때, 새로운 개념적 배치의 변용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일까? 어쨌든, 평일에 일찍부터 시작되어 3시간 반이나 되는 대장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명을 넘는 분이 왕림하셔서 성황리에 이번 강연회를 마칠 수 있었다. 에스포지토 씨, 루이제티 씨, 당일 훌륭한 통역을 선 보여주신 무라 마리코(村松真理子) 씨,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그의 초청에 관해서 진력을 다하신 오카다 아츠시 씨와 그 지원 스탭들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본문으로]
  28. 조르조 아감벤, 『이탈리아적 범주』, ***. [본문으로]
  29. 조르조 아감벤, 『벌거벗음』, ***. [본문으로]
  30. Giorgio Agamben, Mezzi senza fine : Note sulla politica,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6, p.80(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 [본문으로]
  31. “Una biopolitica minore: Intervista di Stany Grelet e Mathieu Potte-Bonnnville a Giorgio Agamben”, Biopolitica minore, a cura di Paolo Perticari. Roma: Manifestolibri, 2003, pp.193-194. [본문으로]
  32. Giorgio Agamben, La comunità che viene, Torino: Einaudi, 1990: Nuova edizione accrsciuta. Torino: Bollati Boringhieri, 2001. pp.3-4(조르조 아감벤, 『도래하는 공동체』, ***).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Profanazioni, Roma: Notte tempo, 2005, p.9(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난장, ***). [본문으로]
  34. 木村敏, 『臨床哲学講義』, 創元社, 2012년, 7-8, 12-14頁. 살바토레 나톨리도 최근 저서에서 비오스를 영원히 연속된 조에의 분할이자 개별화라고 해석한다(Salvatore Natoli, L’edificazione di sé : Istruzioni sulla vita interiore, Roma-Bari: Laterza, 2010, p.6).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1993(Agamben, Potentialities, trans. Daniel Heller-Roazen, 1999). [본문으로]
  36. Simone Weil, La Pesanteur et la grâce, 1947[Gravity and Grace, Routledge & Kegan Paul, 1952 ; Routledge Classics 2002]. 에스포지토는 『비정치의 범주』에서 베이유의 ‘탈창조’를 다음처럼 고쳐 읽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아감벤의 ‘비잠재력’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테면 ‘탈창조’는 “자기 멸각自己滅却의 창조이며, 창조적인 자기 멸각이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활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태이다. 심지어 ‘현실태’로 해소되지 않는 활동, 또한 ― 이미 말했던 ‘수동적 잠재력’이라는 범주를 따른다면 ― ‘잠재력’인 채로 머무는 활동이라고 해도 좋다”(Roberto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Bologna: II Mulino. 1988; Nuova ed.. 1999. p.28). [본문으로]
  37. 아감벤과 베유의 숨겨진 관계에 대해서는 최근 몇 명의 젊은 연구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다음을 참조.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pp.22-23; Alessia Ricciardi, “From Decreation to Bare Life: Weil, Agamben, and the Impolitical”, Diacritics, 39 (2), 2009, pp.75- 93. [본문으로]
  38. Giorgio Agamben, Altissima povertà : Regole monastiche e forma di vita, Vicenza: Neri Pozza, 2011. [본문으로]
  39. 예를 들어 『근대정치의 탈구축』의 마지막 장 「비인칭의 철학을 향하여」나 『3인칭의 철학』의 2장 「페르소나, 인간, 사물」을 참조. [본문으로]
  40. シモーヌ•ヴューユ, 「人格と聖なるもの」, 中田光雄訳、『シモーヌ•ヴューユ著作集』 第2巻, 春秋社, 1968年, (新装版) 1998年, 443, 447頁. [본문으로]
  41. 에스포지토, 『근대정치의 탈구축』, 272頁. [본문으로]
  42.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cit, p.XII 이 책에서는 베이유나 바타이유와 더불어, 카프카, 엘리아스 카네티, 헤르만 블로흐, 모리스 블랑쇼 등에 많은 쪽수가 할애되어 있다. [본문으로]
  43. 논고는 니체의 『철학자의 책哲学者の書』의 이탈리아어판 해설로 작성됐다. Massimo Cacciari, “L’impolitico niezschiano”, in Friedrichi Wilhielm Nietzsche, II libro del filsofo, a cura di Marina Beer e Maurizio Ciampa, Roma: Savelli, 1978, pp.103-120. 또한 1970년대부터의 카차리의 주요 논문 9편을 모은 앤솔로지가 영어판으로 2009년에 출판됐는데, 그 제목도 『비정치 : 정치적 이성의 철저한 비판에 대해』이다. Massimo Cacciari, The Unpolitical: On the Radical Critique of Political Reason, translated by Massio Verdicchi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9. [본문으로]
  44. Roberto Esposito, Communitas: Origine e destino della comunità, Torino: Einaudi. 1998, pp.XII-XXVL. [본문으로]
  45. 이 탈환은 “메시아적인 것의 작동”이라고도 불려진다. Giorgio Agamben, Il Regno e la Gloria: Per una genealogia teologtca dell’economia e del governo (Homo Sacer II, 2), Vicenza: Neri Pozza. 2007, p.272(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 [본문으로]
  46.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Bernard Stiegler, Prendre soin : De la jeunesse et des générations, Paris: Flammarion, 2008. [본문으로]
  47. Giorgio Agamben, Che cos é un dispositivo?, Nottetempo, 2006(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 아감벤에게서의 ‘무위’와 ‘신성함’에 관해서는 拙著, 『アガンべン読解』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48. 다음을 참조. Alain Badiou, Logiques des mondes, Paris: Seuil, 2006;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 Laurent Dubruil, “Preamble to Apolitics”, Diacritics, 39 (2), 2009, pp.5-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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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1부 3장.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 미셸 푸코의 생체권력론

히로세 코지(廣瀬浩司)

* 이 글도 푸코의 국역본과 대조하지 않았다. 또한 '생명권력'이라는 용어 대신 '생체권력'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겼다. 그 이유는 처음의 각주에 드러나 있다.    


들어가며

주지하듯이 미셸 푸코가 말하는 생체권력(bio-pouvoir)”[각주:1]은 고전주의적·군주적 주권의 생살여탈의 권리”,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에 대비된다(IFDS, p.214/240). 이에 반해 18세기 후반부터 말에 걸쳐 생겨난 것이 살게 만들면서 이와 더불어 죽게 내버려두는(성의 역사1권에서는 죽음 속으로 집어던지는”) 생체권력이다(IFDS, p.216/240). 이 권력의 하위분류로서, 감시하는 것과 처벌하는 것(일본어 번역본은 감옥의 탄생)(1975)에서 검토된 규율권력과, 생체정치가 있다. 두 번째로 생체권력은, <인간이라는 종>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주로 인구통계학적 수법을 활용한다. 그리하여 인구=주민다양체의 힘의 증대나 쇠퇴를 통제하는 것이다. 셋째로 생체권력은 공중위생, 사회보장, 의학적 지식과 같은, 여러 가지 제도나 지식과 연결되어 확산한다(IFDS, p.217/243).


   

이상은, 생체권력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던 19763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기초한 교과서적 요약인데, 이것은 푸코의 개념 중에서도, 일찍이 빈번하게 이용되었던 것인 동시에, 그의 저작에서는 다소 안착되기 나쁜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나중에 보듯이, 자주 인용되는 성의 역사15장에서 이 개념은, 4장과는 단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도, 이 개념은 끊임없이 예고되면서도 주제화되지 못하고, 통치성, ()자유주의와 같은 문제에 의해 뒤로 미뤄진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자 푸코는 마치 이 개념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자기의 통치타자들의 통치로 이행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빼어나게 정리하고 있듯이,[각주:2] 이러한 애매함이라고도 보일 수 있는 위치부여 때문에, 이 개념은 크게 나눠서 두 개의 방향에서 이용되어 왔다. 하나는 조르조 아감벤처럼, 생체권력을 주권행사의 한 양태로 간주하고, 그 대상을 예외상태에서의 벌거벗은 생명으로 철저화한 다음에 존재신학·정치신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랑시에르에 따르면 하이데거적인) 방향. 또 하나는 생체정치개념에 적극적·정치적 가치를 부여하고 권력에 의한 신체의 객체화나 전지구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통치에 대항하여, 신체화에 뿌리를 둔 주체화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거나 질 들뢰즈의 내재적 삶의 존재론에 기초하여 테크놀로지의 철학을 전개하기도 하는 전통적인 인간학적 맑스주의의 흐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용법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생각이 없지만, 다소 상이한 접근방법을 설정하고 싶다. 그 전제로서 강조해야 할 것은, 생체권력 개념이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어떤 일관된 흐름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이 개념과 규율개념의 차이를 철저하게 명확히 하고, 상이한 수준의 권력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진리의 정치라고 불릴 수 있는 철학에 편입[기입]된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연구하고 싶은 것은, 역사학도 사회학도 경제학도 아니다. 그것은 철학, 즉 진리의 정치에 관계하는 어떤 것이다”(STP, p.5/5). 나중에 보듯이, 이 과제는 1970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개강 강의 담론의 질서나 그것에 이은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전개된 진리에의 의지론에, 권력 테크놀로지의 분석을 접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고해 등의 자기를 말하는테크놀로지의 분석에 의해 매개되며, 말년의 정치적 파르레시아”(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론에 상대적으로 매끄럽게 접속한다.

  

이 전제에 기초를 둔 이 글에서는, 생체권력이나 생체정치와 같은 개념의 가능성을, 할 수 있는 한 다른 문제계에 흡수되지 않는 형태로 제시하고 싶다. 따라서 사목적 통치, 국가이성, 신자유주의 같은 관련 주제에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물론 푸코 자신이 이 흡수를 하고 있기에, 작업은 그렇게 쉽지 않다. 또한 쉽게 이 개념을 고립시키고자 생명정치의 당파적인 긍정에 연결될 수 있기에, 관련 주제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확인[궁구]하는 것이 포인트가 된다. 그런 위에서,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전체를 관통한다고 생각되는 진리의 정치와의 관계를 시사하고 싶다.

 

1.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의 생체권력

이미 말했듯이 성의 역사1지식의 의지5장에서 제시된 생체권력의 개념은 약간 거처가 나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섹슈얼리티의 장치말미의 시대구분”이라는 절에서 푸코는 이 장치를 정신분석의 고고학에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생체권력을 둘러싼 고찰은 이것과 일단 단절한다. 물론 나중에 보듯이 그는, 생체정치와 규율권력의 중간에 섹슈얼리티의 장치를 위치시킨 다음에, 재차 정신분석을 언급한다. 정신분석은 이 장치를 법[]이나 상징질서에 편입해 버린다. 이리하여 단절은 다시 만들어진다.

이에 반해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의 생체권력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것이다. 우선 앞서 말한 1975-76년도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의 첫머리에서 푸코는, 자신이 1970년대부터 시작했던 권력론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IFDS, p.5/6)는 바람을 표명한다. 이리하여 개시된 강의는 역사적 과정의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é)의 독해 격자로서 전쟁 개념을 논한다. 일찍이 전쟁 개념은 지식과 진리의 장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평화와 질서가 진리와 지식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 국가의 규율화의 귀결이다.

그리고 19세기에 이 개념의 중요성을 지워버렸던 것이 국민=민족(nation)” 개념이다. 그것은 다른 국민=민족을 지배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의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핵으로서, 스스로를 행정적으로 관리하거나 국가권력의 체질과 기능을 정비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민족은 타 민족과의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국가를 구성해야 할 개인의 신체로부터, 국가 자체의 실제적인 존재에 이르는 수직의 관계”(IFDS, p.199/222)에 의해 기초지어진다. 그것은 국가라는 형상에 그대로 질서지어진 능력이나 잠재성이다(IFDS, p.200/223).

이 수직의 관계에, 규율권력에서 생체정치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운동을 겹쳐놓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체를 미시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규율권력이라면, 민족 개념은 이로부터 출발하여 국가라는 거시적인 것의 잠재성이 어떻게 조직되는가라는 운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로부터 국가로의 상승 운동에 있어서, “규율권력에서 종으로서의 인간을 거시적으로 조정하는 권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규율권력과 생체정치는 “생물학적인 것의 국가화”(IFDS, p.213/240)라는 잠재적인 운동의 양극인 것이다.

 

1. 규율권력과 생체정치

구체적으로 보자. 지식의 의지에서 푸코는 규율권력과 생체정치라는 두 극이 중간적인 관계들의 끈”(VS, p.183/176)에 의해 매개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한편으로 학교 기숙사에서 소년의 성의 관리와 같은 미시적인 규율화가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생률이나 사망률, 위생, 사회보장 등에 관한 거시적인 관리가 이루어진다. 확실히 후자는 시대적으로는 다소 늦게 18세기 후반에 등장했다고 간주되지만, 그것은 규율권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에 담고, 통합하고, 부분적으로 변용하는, 그리고 특히 규율권력에 뿌리를 두고, 규율기술 덕분에 현실에 끼워넣어지게 됨으로써 규율권력을 이용하는것이다. 그것들은 상이한 수준에서 상이한 도구를 사용하는 두 개의 권력이며,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로 연결한다(IFDS, pp.224, 215-216/250, 242).

이 연결의 양태들이 장치라고 불린다. 두 개의 이질적인 극 사이에서 산일(散逸)하는 전술들이 다양한 장치로서 결정화하며, 고유한 지식과 진리를 창조한다. 이리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역사의 이해 가능성의 분야로서 폭로하는 것이 푸코의 과제였다.

이것은 첫째로, 개인의 규율과 인구의 생체정치를 미시와 거시로 대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가 다른 문맥에서 지적하듯이, 예를 들어 개개인의 거동을 양치기처럼 통제하는 사목적 통치의 거시분석에서, 국가이성이나 자유주의적 통치와 같은 거시분석으로는 모순도 역설도 없이 이행할 수 있다. 다만 그 경우 국가란 초월적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행동양식이나 사고양식으로서 생각되어야만 한다(STP, p.366/441). 이것들은 실천의 총체로서, 국가화해야 할 총체, 국가화하지만 결코 개념이나 제도로서의 국가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서 생각되어야만 한다.

둘째로, 애초에 규율권력의 분석도 미시분석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형무소에서의 실천들의 분석은, 형무소의 바깥에서의 비행의 관리의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미시적인 기능의 배후에 여러 가지 전략이나 전술의 연쇄를 발견하고, 거시적인 사회로 확장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규율권력이 이미 일종의 원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정신병·비행 같은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대상의 자명성을 괄호에 넣는 것은, “지식의 대상들을 수반한, 어떤 진리의 영역”(강조는 인용자)이 구성되는 운동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이 정신의학이며 형벌제도이며 정신분석이다.

이처럼 미시분석에 의해 제도와 기능의 외부의 관점에 서서, 기존의 보편 개념을 괄호에 넣음으로써, 푸코라는 관찰자의 관점 그 자체가 이동한다. 그때 보이게 되는 것이 제도나 기능과는 다른 수준에 있는 결합과 지주와 커뮤니케이션의 그물망 전체”(STP, p.123/149)이며, 이것이 저절로 거시분석을 갈구한다. 이 미시에서 거시로의 저절로 이루어진 이동에 푸코의 질문의 장이 있다.

나아가 이 결합이나 지주는 동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떠받치는 권력관계들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반제도적이지도 반체제적이지도 않는 하나의 운동이나, 어떤 테크놀로지의 발명이, 권력관계들 전체의 경제를 흐트러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제도나 기능이 부동의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발성의 출현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데, 이 우발성은 권력을 변용시키는 계기로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생체권력은 바로 이러한 우발성의 출현을 통제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기 때문이다.[각주:3]

 

2. 주권과 죽음

규율권력과 생체권력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듯이, 양자와 주권적 주권과의 관계도 착종되어 있다. 확실히 푸코는 양자를 양자택일적인 것으로서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전적 주권은 어디까지나 죽게 만드는 것을 축으로, 다른 사람을 살게 내버려두는것이었다. 이에 반해 생체권력은 주민다양체의 생명을 조정함으로써, 살게 만드는 권력이다. 그러나 한 번 읽어서는 그다지 명쾌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죽게 내버려두는권력, 또는 죽음 속에 내던지는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살게 만드는 권력에서, 죽음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질병에 관한 정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말에 중심적 문제였던 것은 페스트 같은 갑자기 엄습한 역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천연두처럼 치료의 비용, 노동력의 감소 등을 초래하는 인구 수준에서의 질병이었다. 질병이나 죽음은 생명에 미끄러져 들어가고, 끊임없이 그것을 좀먹고, 감소시키거나 약화시키는 것으로서 통제된다. 바꿔 말하면 질병은 본질적으로 유한한 것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종을 안쪽에서부터 좀먹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내재적인 경계를 구성한다. 살게 만드는 것으로서의 권력은 죽음을 정면에서 파악할 수 없다. 권력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우발성을 확률론적으로 통제하는 것뿐이다. 거꾸로 말하면, 권력은 사망률이라는 모습으로, 죽음을 건드리지 않고 인구를 통제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죽음 자체는 공공행정에서 제외되며, 사적인 영역에 갇힌다. 그것이 자살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권리로서 확립시켰다(IFDS, p.221/247, VS, p.182/175-176).

또한 1975-1976년도 강의에서는, 이 문제가 인종(차별)주의의 등장과 조합된다. 인종주의의 등장, 정확히 말하면 인종 개념의 국가로의 편입[기입], 죽음이 생체권력의 외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군주권이 살아야 할 자와 죽어야 할 자 사이에 분할선을 긋고자 할 때 가능해진다(IFDS, p.227/253). 그것은 기존의 주권에 의한, 생물학적 위험의 제거와 인구의 현실적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바꿔 말하면, 주권과 생체권력의 양자택일이 무너질 위기적인 지점에서야말로, 새로운 형상의 탄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위기 개념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역사와 생명

우리는 이상과 같은 분석에서 푸코의 생명론적 전회를 발견해야 할까? 그렇지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중요했던 것은 역사의 이해 가능성의 척결에 있어서의 전쟁 개념의 유효성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명이 문제가 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담론과 생물학적 담론의 뒤얽힘에서이다. “인간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한다면, 그 근거는 역사와 생명의 새로운 관계 방식에서 찾아져야 한다. 생명은 역사의 생물학적 주변으로서 역사의 외부에 있는 동시에, 지식과 권력의 기술에 의해 관통되고, 인간의 역사성의 내부에도 있다고 하는 이중의 위치에 놓여 있다”(VS, p.189/181). 일찍이 푸코는 말과 사물(1966)8노동, 생명, 담론에서 문헌학과 경제학과 생물학이라는 3대 지식이 인간이라는 형상을 부각시켰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여기서는 권력이라는 축이 더해지고, 문헌학이 민족성에, 경제학이 사회계급의 분석에, 생물학이 인종주의에 연결된다(IFDS, p.170/190). 생명과 죽음, 생명과 기술[테크네]의 존재론이 아니라, 인간과학들의 고고학에 권력을 접속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한편으로, 생물학 자체의 변용, 특히 유전학이나 진화론이 생체정치의 문제와 깊이 연결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조르주 퀴비에(1769-1832)에 의해 박물학을 대신해 자연의 <역사>가 가능해졌다는 것, “역사성이 이제 자연 속에, 아니 오히려 생체 속에 도입되었다는 것[각주:4]을 지적했다. 생체정치의 문제에 몰두하는 데 있어서 푸코는 이 생명사(bio-histoire)”와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 “생명의 운동과 역사의 과정이 서로 간섭하는 운동을 초래하는 압력을 생명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생명과 그 메커니즘을 명백한 계산의 영역에 등장시키고, <지식인 권력>을 인간의 생명의 변형의 담지자로서 만들어내는 것을 지시하기 위해 생체정치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VS, p.188/280). 생체정치와 생명사는 서로를 모델로 하면서 역사의 이해 가능성을 구성한다.[각주:5] 하지만 그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역사성[각주:6]의 등장이지 역사의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II. 안전·영토·인구와 인구의 자연성

앞 절에서 봤듯이, 1975-76년도의 최종 강의는, 18세기 후반 이후에 성립한 권력을 명확히 하는 것에 할애되었다. 이듬해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는 이 새로운 권력의 장치를 안전=보장=보안(sécurité)의 장치라고 명명한다. 그렇지만 강의 시작으로부터 약 1개월 후에 푸코는 이 제목에 의문을 던지면서, “통치성의 역사가 정확하다고 말한다(STP, p.111/132-133). 이 시대의 통치성이란, 인구를 주요한 표적으로 삼고, 경제학을 지식의 주요한 형식으로 삼으며, 안전의 장치를 기술적 도구로 삼는 것인데, 이 통치성의 역사를 특히 15-16세기의 사목적 통치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논하는 것이 강의의 주요한 내용이다. 따라서 생체권력의 문제는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난다.

그렇지만 안전의 장치의 문제는, 나중의 푸코의 사상을 예고하는 몇 가지 흥미로운 논점을 품고 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주제이다.[각주:7] 이 주제는 정확하게는 권력기술들의 영역에 자연이 들어가는 것을 함의하며, 생명과 역사의 관계의 분석에 관련된 것인 동시에, 이듬해의 자유주의론과 직접 접속하기 때문이다.

규율권력이나 법률과 구별되는 안전의 장치에 관해 푸코는 예를 들어 도난에 대한 대응을 예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전의 장치란, 아주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 즉 도난을, [확률론적으로] 개연적인 일련의 사건에 투입하는 것이다. 둘째, 이 현상에 대한 권력의 반응을 계산 속에 투입한다. , 비용의 계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허가된 것과 금지된 것의 이항적 분할 대신에, 한편으로는 최적이라고 생각된 평균값을 정하고, 이어서 그것을 넘어서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간주된 허용 가능한 한계를 정한다.(STP, p.8/9)

지극히 포괄적으로 말해보면, 첫째로 이 안전장치는 문제가 되는 현상, 예를 들면 절도 같은 현상을 있어날 수 있는 일련의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둘째로 해당 현상에 대한 권력의 반응은 일정한 계산, 즉 비용 계산으로 삽입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허가와 금지라는 이항분할을 설정하는 대신에 최적이라고 여겨지는 평균치가 정해지고, 넘어서면 안 되는 용인의 한계가 정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사물과 메커니즘의 배분은 이제까지의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24)

 

따라서 안전장치란, 금지나 처벌의 법이 아니라, 감시와 구금 실천으로 이루어진 규율적·훈련적 실천도 아니며, 어떤 넓이를 지닌 장소에서의 범죄의 발생률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증가나 감소의 요인, 범죄 내지 그 억제의 비용을 계산하는 장치이다. 그리하여 어떤 평균값의 둘레에서, 안전 유지를 위한 시스템이 설정된다. 이 장치의 일반적 특징을 푸코는 안전공간의 설정, 우발적 사건에 대한 대처, 정상화의 순으로 논하고, 이 장치의 대상이기도 하고 주체이기도 한 인구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여기서는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주제로 연결되는 논점만을 다루자.

 

1. 인구와 그 환경

규율권력은 형무소, 병원, 학교와 같은 폐쇄공간의 분석을 그 주요한 모델로 삼았다. 그에 반해 안전장치가 유효한 것은 우선은 도시계획에서이다. 그것은 위생이나 환기, 도시 내의 통상(通商)의 보장, 도시 바깥과의 교통의 정비이며, 동시에 이러한 기능을 방해하는 위험한 요소를 통제하고, 나쁜 유통을 배제하는 것이다(STP, p.20/22-23)

여기서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1) 규율권력이 형무소와 같이 공허하고 인공적인 공간에서 작동하는 데 반해, 안전장치는 용지(用地), 하천, , 공기 등의 현실적인 소여에 작동된다는 것, (2) 규율권력이 이른바 완전히 통제된 공간을 조직하고자 하는 데 반해, 안전장치는 그러한 소여 중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최대한 유통시키고, 반대로 위험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을 (완전히 제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 (3) 도로 등의 소여의 요소에 할 수 있는 만큼 다기능성을 부여하는 것, (4) 이 장치가 일으킬 수 있는 확실성을 문제로 삼고, 미래에 열린 한없는 계열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전의 주권권력은 영토를 수도화하고, 규율권력은 공간을 건축화하고, 거기에서의 계층적이고 기능적인 요소 배분을 행했다. 그에 반해 안전장치는 가능한 사건 혹은 사건의 계열, 가능한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환경(milieu)”을 정비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변용 가능한 열려진 틀을 정비하는 것이다.

이 열려진 틀로서의 환경이라는 용어에 주목하자. 여기서 푸코는 환경이라는 말을 그 생물학적 함의를 고려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조르주 캉길렘의 생체와 그 환경[각주:8]이라는 논문을 참조하면서 푸코는 이 개념이 뉴튼 역학의 에테르개념을 -밥티스트 라마르크(1744-1829)가 생물학에 이식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환경이란, 본래 원격작용의 매체이며, 힘의 중심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작용의 유통의 매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전장치는 자연적 소여나 주민다양체의 총체의 유통 매체이며, 원인과 결과의 유통의 매체이기도 하다. 인구 증가가 장기瘴気[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의 증가를 야기하고, 이것이 사체의 증가를 야기하며, 이것이 또 다시 장기瘴気의 증가를 야기한다는 식이다.

바꿔 말하면, 안전장치란 자연적·인공적인 환경, 생체의 다양체로서의 주민집단 사이의 접촉면 내지 양자의 복합체에 개입하는 것이다. 인구를 통제하고자 한다면 환경을 통제하면 된다. 그 위생, 유통, 외부와의 관계, 위험성의 제거가 인구를 변용시킬 것이다. 그것은 강제도 금지도 없이 거의 자연적으로이루어진다는 것이다(STP, p.23/27).

 

2. 인구의 자연성과 현실태의 이중화

이런 문맥에서 등장하는 것이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주제이다. 이 말이 큰 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것은 중세·르네상스에서의 좋은 통치를 떠받쳤던 신적이고 자연적인 질서와는 상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성을 주제로 한 강의들에서 푸코가 분명하게 했듯이, “국가이성개념은 이 자연적 질서와 단절하고 공공행정학=폴리차이에 기초한 인공적인 국가관을 확립했다. 인구의 자연성은 이 국가이성의 인공성에 대해서 중농주의자들의 경제학=정치경제학이 재도입했던 새로운 현실태로서의 자연성이며,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초월한 사회의 자연성이기도 하다(STP, pp.357, 359-360/432, 434-435). 그것은 국가이성을 부정한다기보다는 그것을 자연성에 의해 보강하고, 그 잠재성을 통제하는 원리이다.

이 문제는 이듬해의 강의 생체정치의 탄생에서의 자유주의적 통치의 분석, 또는 1981-82년도 강의 주체의 해석학자기통치에서의 재난의 예측[각주:9]이라는 주제 등으로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에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문제는 식량난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 안전장치를 설정하는가라는 것이다. 지표가 되는 것은 18세기 중반의 곡물유통의 자유화이다. 1784년의 칙령에 의해 곡물거래의 거의 전면적인 자유화가 수립되고, 중농주의자가 승리했다. 그러나 이 자유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가?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라는 해괴망측한 제목.
수정하고 싶어도 수정할 수 없는 이 비극.

푸코는 식량난이라는 재난개념의 철학적·정치적 의미를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우선 고대 그리스-로마 이래, 행운과 불운 같은 우주론적·정치적 개념으로 파악되며, 나아가 악한 인간본성(탐욕, 이윤추구, 이기주의)의 귀결로서 법적·도덕적으로 파악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를 뒤집은 것이 경제적 통제에 의한 식량난의 예방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식량난이 일어날 수 없는 시스템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비하고, 그것이 현실태에 기입되어 버리기 전에방해하는 시스템이 모색되는 것이다(STP, p.34/41).

17세기 이후의 중상주의자들이 가격통제로 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던 데 반해, 18세기의 중농주의자들의 안전장치는 대대적인 변화를 구성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우선 식량의 부족·가격급등 같은 사건은 더 이상 불운이나 악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다. 이것은 분석대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분석되어야 할 것은 시장 그 자체가 아니라, “곡물의 역사라고도 해야 할 것, 즉 대지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곡물에 이른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토지의 질, 기후, 수확량 등), 살아 있는 역사성”(Ibid)이다. 아베이유 같은 중농주의자를 논하면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베이유나 중농주의자들이나 18세기의 경제학 이론가가 획득하고자 했던 것은 이렇게 요동치는 현실태 자체에 접속하고, 현실적인 다른 요소와의 관계를 계열화함으로써, 이 현상이, 그 현실태를 이른바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또한 방해되지 않고, 조금씩 보전[補塡]되며, 제동을 걸고, 그리고 이윽고 제한되고, 마지막으로는 폐지되게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이 작동은, 풍작/흉작, 고가/저가와 같은 변동이라는 현실태의 장 자체에서 행해진다. 미리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태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어떤 장치가 배치된다. 이것이 안전장치이며, 법적·규율적 시스템이 아니다(STP, p.39/46).

아베이유, 중농주의자들, 18세기의 경제이론가들은 실제의 변동 상황 자체에 접속하고 현실의 다른 요소들과 일련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런 현상을 조금씩 상쇄하고, 억제하고, 최종적으로는 제한해 결국에는 소멸시키는 장치를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이런 변동이 실제함을 잊는다거나 막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풍작과 흉작, 가격하락과 가격상승이라는 실제의 변동 상황 안에서 작동하는 장치, 예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에 발을 들여놓는 장치가 설치됩니다. 저는 이것이 더 이상 사법적규율적 체계가 아니라 안전장치라고 생각합니다.(69-71)

 

여기서 인구의 자연성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이 현실태[각주:10] 개념이다. 주권적인 이 부정적인 것을 상정하는 상상적인 것이며, 규율권력이 비정상인을 교정하는 제도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현실태를 보족하는 데 반해, 중농주의자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태에 접속하는 장치를 구축한다. 그 접속의 장이 예를 들어 자유로운 유통의 환경이며, 곡물이라는 자연에 역사적인 사건이 도래하는 환경이다.

그것은 현실의 요소가 다른 요소에 작동을 걸며, 스스로에게 포개어지며, 변동을 통제하고자 하는 장에 접속한다. 이것을 현실태의 이중화의 장에의 현실적인 접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구의 자연이란 자연의 내부로, 자연의 도움을 빌려서, 자연에 관해서통치의 절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STP, p.77/91). 바깥으로부터의 통제가 아니라, 현실태의 내적인 이중화의 장, 실이 현실에 대해 겹쳐지는 장에, 현실의 도움을 빌려 개입하는 것이 안전장치이다. 인구는 이 이중성에 자기 자신의 자연성에 있어서 끼워넣어짐[접어넣어짐]으로써, 통치의 객체=주체가 된다. 이러한 이중성이 나중에 사회적인 것의 두께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안전장치의 본질적인 기능은, 어떤 자연적·사회적·역사적 현실을 자유로운 장난에 일임시키고, 이런 현실에 대한 현실의 작동에 대해 합리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현상을 바깥에서 삭제한다기보다는 현상을 현상 자신에 의해 점차적으로 폐지하는”(STP, p.68/81) 것이 문제이다. 이 장치의 앞에는 식량난이라는 현실은 없다. 현실적인 것은 사물이 진척되는 그대로 내버려두는것뿐이다. 죽음의 특이성도 그 한 요소다. 설령 일부의 사람이 식량 부족에 의한 굶주림으로 죽더라도, 그것은 삶과 죽음의 원활한 유통(규정 가능한 사망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통치의 목적은, 인구라는 객체가 환경에 있어서 살거나 죽거나 하는 주체로 되는 것이다. 물론 전유나 식량 부족에 대한 반란은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란자는 인구라는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인민”(STP, p.45/53)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적절하게 스스로 인도하지 못한 주체이며, 안전장치를 어지럽힐 수 있는 주체이다. 이러한 반자연적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죽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정상화하는(normalisant) 장치에서의 비정상인이다.

 

3. 자유 개념의 변용

감시와 처벌(1975)은 형벌의 완화가 초래한 자유가 여러 가지 규율의 테크놀로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전, 영토인구(1977)의 푸코는 이 똑같은 자유가 현실에 대한 현실의 내적 차이, 현실태의 이중화의 현실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거기서 등장하는 것이 안전장치에 의해 통제되는 객체이면서, 권리에도 계약에도 규범에도 의거하지 않고 자유롭게 처신[행동]하면서 자기를 통치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인구=주민다양체이다.

여기서 푸코의 자유에 관련된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변용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감시와 처벌은 형무소의 자유화가 규율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평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가 반드시 내재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안전장치개념도 시장에서의 경제행동의 자유화의 이면에 거시적 조정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안전장치는 규율권력보다도 훨씬 깊게, “자유를 현실태에 편입[기입]하고 있다. 나중의 강의에서 푸코가 명확히 하고 있듯이, 자유주의적 통치란 자유를 소비하는 것, 소비하기 위해 생산하고, 조직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의 주민이 게임에 참가하여 행동하고, 자유를 소비·생산하기 위한 제도적 틀을 설정한다.[각주:11] 나아가 이 틀의 설정이야말로 경쟁이라는 구조”, “현실공간을 산출하며, 나중의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사회적 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NB, pp.137, 145/164, 173). 그것은 규율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이른바 자유롭게 노동하는 개인의 관점에 서서, 그 활동을 촉진하는 틀의 설정이며, 그 틀을 통해서 사회의 뼈대와 두께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다(NB, p.151/179).

이러한 자유의 생산이라는 생각은 규율권력에는 없다. 따라서 생체권력 개념의 의의는, 그때까지 잔존했던 지배/피지배의 모델, 즉 종속화=주체화(assujetissement)의 모델이나, 상징적 []에 의한 주체의 분할 같은 정신분석적 모델로부터 완전히 탈각했다는 것에 있다.[각주:12]

예를 들어 지식의 의지에서 푸코는 성에 관한 관리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이데올로기 지배였기는커녕, 우선 오로지 부르주아적 가족 내에서의 관리, 이른바 그 자기에의 배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VS, pp.158-161/152-155). 푸코의 생체권력”, “생체정치의 분석은, 강화된 규율권력=전체주의라는 의미에서의 관리사회비판과는 무관하며(NB, p.196/235-236), 인구라는 살아 있는 정치적 주체=객체의 역사적 이해 가능성의 영역을 권력 테크놀로지의 분석에 의해서 척결했다는 것에 있어서 평가되어야만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시민사회개념도 반국가적인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경계면에서 생기는 두께를 지닌 현실태의 하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NB, p.299/367).

주체의 분할이라는 정신분석적 주제에 관해 말하면, 자유주의적 통치는 통치되는 주체를 자유와 강제, 자유와 소외 같은 대립에 의해 분할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분할은 통치실천의 내부, 해야 할 것해서는 안 되는 것사이에 있다. 문제는 어떻게 과잉이지 않게 통치할 것인가라는 통치의 내적 제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분할의 끊임없는 비판적 반성에 있다(NB, pp.12-15/13-17). 이 비판의 의의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확인한다.

아무튼 푸코가 집요하게 강조하듯이, 전후 독일의 신자유주의는 이미 대중사회, 소비사회, 상업사회,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통치의 내재적 제한과 국가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이것들에 의해 소외된 주체를 끄집어내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이미 현실태에 있어서 진행되었던 흐름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NB, pp.117, 136, 197/140, 162, 273). 국가비판은 시대에 뒤쳐진 것일 뿐만 아니라 옛날의 안전장치의 카운터파트로서 그것을 강화할 뿐이다. 이리하여 푸코의 비판은, 종래의 투쟁이 표적을 잘못 맞추고, 투쟁상태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비판이 아니라, 피통치자를 포함한 통치성 그 자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하고, 어떠한 현실태를 기능시키는가, 그것을 촉지해야 한다.

  

 

III. 생체정치의 탄생과 진리의 체제의 문제

저는 올해 생체정치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NB, p. 23/28). 이렇게 푸코가 말한 것은 생체정치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1978-79년도의 첫 번째 강의에서이다. 하지만 전년도의 중단 이후에 마침내 다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였던 이 주제는 또 다시 뒤로 늦춰진다. 확실히 출발점이 되는 것은 여전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자유주의적 통치의 변용이다. 하지만 강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생체권력도 안전장치도 아니고, 전후 독일-미국에서의 신자유주의이다.

하지만 푸코는 생체정치의 분석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통치이성을 이해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이 약속도 실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여튼 우리는 이 말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감히 이러한 모든 것이 생체정치 분석을 위한 서설이라는 점에 구애될 때, 무엇이 보이게 되는가를 생각하고 싶다.

 

1. 경제학과 그 이해의 체제

생체정치란 인구로서 구성된 총체에 특유한 현상, 즉 건강, 위생, 출생률, 수명, 인종 등에 의해, 통치실천에 제기된 문제를 합리화하고자 하는 방식이라고 푸코는 이 강의의 요지에서 기록한다(NB, p.323/391). 이러한 통치 실천을 가능케 하는 이론적 도구가 경제학이다. 이것을 푸코가 굳이 강조하는 것은 통치의 내재적인 제한의 문제를 진리의 체제의 문제에 연결하기 위해서다.

경제학과 더불어 하나의 새로운 진리의 체제가 출현한다. 진리의 체제란 무엇인가?

 

제가 진리의 체제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정치나 통치술이 마침내 합리화의 시대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 일종의 인식론적 문턱에 도달하고, 통치술이 과학적인 것이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제가 보여주고자 하는 순간은, 어떤 종류의 담론이 일련의 실천으로 접속함으로써 특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결이, 한편으로는 이 담론을, 이해 가능한 결합에 의해 연결지어진 총체로서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실천에 관해서, 참인가 거짓인가라는 용어로 법칙화하는, 혹은 법칙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NB, p.20/23).

제가 진실의 체제라고 말할 때, 저는 정치나 통치술이 이를테면 이 시대에 비로소 합리성에 도달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바로 이 시기에 일종의 인식론적인 문턱에 도달하고 이 지점에서 시작해 통치술이 과학적인 것이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지금 지적하는 이 시기는 일정 유형의 담론과 일련의 실천이 연결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연결은 한편으로 인지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연결된 총체로서 이 담론을 구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과 거짓에 따라 이 실천에 규칙을 부여합니다.(43)

 

진리의 체제는 담론과 실천의 결합체이다. 그때 담론은 역사적 이해 가능성을 획득하고, 실천은 참과 거짓의 대립에서 법칙화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전의 통치가 군주의 현명함에 의해 측정되었던 데 반해, 경제학의 출현과 더불어, 통치는 최대최소의 원리에 의해 측정된다. 그렇다는 것은 곧, 통치는 자연의 법칙을 잘못 볼 수 있다는 것, 이 법칙에 관해 무지하기 때문에 실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은 통치실천 그 자체의 가시적인 표면의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자연성과 상보관계에 있다(NB, p.43/50).

주의해야 하는데, 경제학이 확률론적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맹목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회의 뼈대와 두께라는 불투명한 것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맹목적이며, 통계학은 이 접속에서의 지식의 하나이다(그렇기에 통계학의 이데올로기등에 관해 말해도 어찌할 수가 없다). 이 맹목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통치실천이 조직된다. 예를 들어 통치가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유용한가 불필요한가, 주민의 욕망에 잘 응답할 수 있는가와 같은 공리주의적 관심에 기초한 통치실천이 모색된다(NB, p.18/21).[각주:13] 또한 자유주의적 경제학에서의 진리의 체제의 장, 그것은 예를 들어 시장이다. 시장은 일찍이 그랬듯이 배분적 정의의 장도, 법 진술의 장도 아니고, “자연적메커니즘을 따르는 정상적인 가격이라는 진리의 장이 된다. 시장이야말로 통치실천에 대해 진리를 말하고 현실적인 실천들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삼는 것이다(NB, pp.34-36/38-42).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자유주의적 경제학은 거의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적이며, “통치성 이성 비판으로서 등장한다(NB, pp.286-287/348).[각주:14] , 종래의 통치는 어디까지나 주권적·봉건적인 법(도덕, 자연법, 신의 법, 국가이성)에 기초한 통치였다. 그에 반해 오늘날, 최대와 최소라는 극한값 사이에서, 사회의 자연성을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이 과세율이나 시장의 조정이라는 실천에 내적으로 합리적인 정합성과 이해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메커니즘이 여러 가지 실천과 그 효과를 서로 연결하고, 그 결과 이 실천을 법률이나 도덕원리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참과 거짓의 분할을 따라야 할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가 판단되게 된다(NB, p.21/24, 강조는 인용자) 이 메커니즘에 의해 여러 다른 실천과 그 효과가 서로 연결되고, 그 모든 실천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법이나 도덕 원칙이 아니라 참과 거짓의 분할에 지배받게 되는 명제들에 기초해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44).

참과 거짓의 분할을 따라야 할 명제들”, 즉 담론이야말로 여러 가지 경제정책에 정합성과 역사적 이해 가능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흩어져 있는 실천을 현실태에 기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역사적 현실로서 결정화된다. 예를 들어 국가나 시민사회나 시장 같은 것,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인데, 참과 거짓을 분할하는 진리의 체제에 의존함으로써 현실태에 기입된다”(NB, p.22/26. 강조는 인용자). 모든 역사적 현실태를 구성하는 것, 그것은 참과 거짓의 분할의 담론과, 실천들의 결합인 것이다.

 

2. 진리진술과 사법진술의 뒤얽힘 : 생체권력 개념의 의의

이러한 진리의 체제를 만들어내는 담론을 푸코는 진리진술”(véridiction)이라고 고쳐 부르고, “사법진술”(juridction)과 대비시킨다. 그렇지만 양자는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공통의 체제를 수립하고자 한다. “지식이 통치에 부과하는 자기 제한을, 법에 정착시킨다는 과제가 여기서 생겨난다.

푸코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사법진술로의 진리진술의 접속의 역사적 양태들의 분석이야말로 권력과 지식이라는 복합체라는 문제계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과 더불어, 적어도 광기의 역사(1961) 이후의 그의 작업을 진리진술의 체제의 계보학”(NB, p.37/44)으로 수렴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1975-76년도의 강의의 첫머리에서 푸코는 정신의학이나 형벌제도를 둘러싼 고찰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3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그 바람이 결실을 맺는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광기, 질병, 비행, 섹슈얼리티 등에 관해서, 문제는 이러한 개념의 발견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이데올로기나 가상으로서 폭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떠한 간섭작용에 의해서, 일련의 실천 전체가 진리의 담론에 의해 조정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던 것(광기, 질병, 비행, 섹슈얼리티 등)을 어떤 것(quelque chose)으로 삼을 수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가상이 아니다. 그것을 현실태에 가차없이 집어처넣고, 각인해 버렸던 것은 현실적인 실천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천들과 진리의 체제의 결합이나 계열이, <지식-권력>이라는 장치를 형성하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태에 있어서 실제로 새겨넣고, 참과 거짓의 분할로 정당한 것으로서 따르게 하는가라는 것이다(NB, pp.21-22/25-26).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모든 일련의 실천들이, 이 실천들이 진리의 체제에 따르게 된 이래로, 어떤 개입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광기, 질병, 범죄, 성 등을 여전히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어떤 것이 되도록 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그것은 환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실제적인 실천의 총체로서,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 또 그 어떤 것을 강압적으로 현실에 각인하기 때문입니다. 관건이 되는 것은 일련의 실천과 진실체제의 연결이 실제로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각인시키고, 그것을 참과 거짓의 분할에 정당하게 복종시키는 것으로서의 지식과 권력의 장치를 어떻게 형성시키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45).

 

일찍이 <지식-권력>의 복합체라고 불렸던 것이 여기서 진리의 체제와 실천들의 현실적 결합이라고 바꿔 말해지고 있다. 이 결합이야말로 광기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왜 어떤 것이 되는가, 즉 왜 존재/비존재, 가상/본체와 같은 대립 이전의 차원에서 현실태를 구성하고, 역사적 이해 가능성의 핵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진리진술과 사법진술의 관계이다. 예를 들어 형벌제도의 연구는, 사법진술이 서서히 진리진술에 의해 침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이루어진 데 반해, 이제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자기의 진리를 말하게 하는 질문이, 이것이 수반하는 지식이나 권력의 배치와 더불어 제기된다. 또한 섹슈얼리티의 연구도, “고해”, “양심의 지도”, “의학적 판정같은 사법진술적 담론과, 욕망에 관련된 진리진술 사이의 뒤얽힘을 논했던 것이다. 이처럼 사법진술에서 출발하여 진리의 어떤 종류의 권리가 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 그것을 푸코는 진리진술의 체제의 계보학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리하여 권력론은 그 순환을 닫는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생체권력개념의 도입에 의해서, 미시와 거시, 지배와 피지배, 소외와 해방, 개인과 국가 같은 일련의 대립으로부터 완전히 탈각할 필요가 있었다. 권력이라는 선(), 국가나 사회로 향하는 사이펀siphon 같은 것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질질 지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규율권력에서 생체권력으로의 상승을, 통치성의 개념을 매개로, 진리진술의 주제 하에 재편할 수 있다. 여기에 생체권력 개념 도입의 의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IV.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이 진리의 체제라는 문제가 이미 1970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개강 강의 담론의 질서에서 서술되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진리의 정치로 이어진다고 지적하고 싶다.[각주:15]

 

1. 담론의 질서에서의 담론의 계보학

개강 강의에서 푸코는 그 당시에 전개하려 한 연구 틀을 확정하는 몇 가지의 가설을 제출하는데, 여기서 다루고 싶은 것은 첫 번째 가설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이 일정 수의 절차에 의해 통제되고 선별되며 재분배된다는 것, 그리고 이 절차는 담론의 생산에서 권력과 위험을 쫓아버리는 , 우발적인 사건을 지배하는 것, 그 무겁고 걱정스러운 질료성을 회피하는 것을 역할로 한다고 하는 가설이다(OD, pp.10-11/9).

반대로 말한다면, 담론의 생산 과정에는 늘 권력과 위험, 우발성과 질료성이 짓누르고 있으며, 그것을 계속 통제하는 절차가 중요해진다. 우선은 이 <담론의 생산>, 이를 위협하는 <질료적·우발적 위험>, <통제의 절차>라는 3대 요소의 긴장관계를 확인해두고 싶다. 후년의 권력론의 과제도, 이 위험을 통제하는 절차를 확인[궁구]함으로써, 합리적이기도 하고 질료적이기도 한 <역사적 현실태>를 부결하는 것, 지식과 권력의 복합체를 내재적으로 규칙부여하는 작동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 절차 중 이 강의에서 논의되는 것은 배제의 절차인데, 그 중 가장 중시되는 것이 참과 거짓의 대립이다. 푸코가 우선 강조하는 것은, 담론을 명제로서 생각하기를 (상정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치고, “진리에의 의지라는 문제계로 이행시키는 것이다.

 

명제의 수준에 위치해 버리면, 어떤 담론 내에서 참과 거짓의 분할은 자의적인 것도, 변용 가능한 것도, 제도적인 것도, 폭력적인 것도 아니게 된다. 다만 만일 다른 수준에 자리 잡고, 서구의 역사를 몇 세기 동안이나 관철되는 진리에의 의지가 어떠한 것이며, 여전히 어떠한 것으로 있는가, 혹은 우리의 지식에의 기준을 지배하는 분할이 매우 일반적인 형식으로서 어떠한 것인가를 안다고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참과 거짓의 분할은 아마도 배제의 시스템(역사적이고, 변용 가능하며 제도적 강제를 행하는 시스템)으로서 그려지게 될 것이다(OD, p.16/15-16).

 

여기서는 아직 배제라는 부정적인 용어가 잔존해 있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 푸코가 진정으로 목표로 한 담론의 자의성, 변용 가능성, 제도에의 내재성, 그리고 폭력성을 강조하고,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까지를 관통하는 진리에의 의지의 역사를 연구한다. 이러한 진리에의 의지와 그것이 품고 있는 배제의 문제화를 푸코는 비판적총체라고 부른다(OD, p.62/62).

하지만 푸코의 기획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러한 배제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현실에 일련의 담론이 생산되고 그 규범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 출현과 증식과 변용의 조건은 어떠한 것인가를 재추적하는 작업이 남겨진다. 그는 그것을 계보학적총체라고 부른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절차의 틀 속에서, 담론들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 “비판적인작업이 담론의 통합이나 통일화를 문제로 삼는 데 반해, “계보학“산일(散逸)한 것이기도 하며, 비연속적이며, 규칙적이기도 한담론의 형성과 수렴을 문제로 삼는다면, 푸코는 이러한 담론의 현실적 생산양식을 긍정적으로 주제화하기 때문에, 우선은 배제와 같은 부정적인 용어를 굳이 사용하면서 그 이면에서 진리에의 의지가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장을 확인[궁구]하고자 한다.[각주:16]

그리고 이 계보학의 연속성은 참과 거짓의 대립이 작동하는 역사적·제도적 조건의 서술, 나아가 그 불연속성의 서술을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진리에의 의지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담론을 좀먹는[침식하는] 질료성과 우연성이, 또한 과학적 지식을 규정하고 있는 제도적 내지 권력론적 조건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이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교차점에서, 거의 후설적 의미에서의 유럽의 위기”(정신의학의 위기, 형벌제도의 위기, 자유주의적 통치의 위기 등), 그리고 역사적 현실태의 이해 가능성이 부상하게 된다.

 

2. 진리의 정치

이러한 계보학적 작업은 어떻게 해서 진리의 정치가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지만, 몇 가지 실마리를 기록해두고 싶다.

푸코는 1976년의 어떤 대담에서, 그가 기존의 보편적 지식인에 대립시킨 특수한 지식인의 역할을 명시한다. 특수한 지식인이 특수한 것은, 위의 진리의 체제와의 관계에서이다. 그의 과제는 과학인가 이데올로기인가라는 문제도, 사람들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것도 아니며, “진리의 생산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체제를 변용시키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 그것은 오류·가상·소외된 의식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다. 거기에 니체의 중요성이 있다.”[각주:17]

왜 니체인가? 푸코는 담론의 질서에 이어 1970-71년도 강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니체에 관한 강의를 행한다.[각주:18] 깊게 파고들 여유는 없지만, 권력론과의 관계를 의식하면서 네 가지 점만을 지적한다.

(1) 니체에게 인식이란 발명품이며, “완전히 다른 것”, 즉 다양한 충동의 겨루기[경합]에서 생겼다(LVS, p.196).

(2) 인식이란 외양의 배후에서 본질이나 대상의 완전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외양과는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그것을 가로질러 파괴하는 폭력적 충동이다. “그것은 외양을 관통하는 것에 있어서, 한없이 신규성을 구성하는 것이다”(LVS, p.198). 이 심술궂고 유혹적인 충동을, 인식은 이용하면서 은폐한다. 과학의 금욕주의나 객관주의가 그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식은 외양과 존재의 대립 이전에 이중으로 포개지는 현실태의 상관물이다. 예를 들어 안전장치도 인식 장치의 하나로서 현상을 현상 자신에 의해 점차적으로 폐지한다”(STP, p.68/81). 이리하여 인식은 주체와 객체, 외양과 존재의 내적 차이의 두께에 있어서, 그것들을 통제하는 규칙의 네트워크를 구성한다(LVS, p.202). 이 네트워크를 통용시키기 위한 투쟁을 나중의 푸코는 권력관계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3) 진리는 이 인식보다 더 늦게 도래한다. 그것은 참도 거짓도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 사건인데, 동시에 그 이전의 것을 거짓으로 만듦으로써 뒷걸음질치도록 하고 참과 거짓의 대립을 제도화한다. 이렇게 인식이 마치 진리를 위해 바쳐진다는 사고방식이 생겨난다(LVS, p.207).

(4) 그러나 인식의 규칙의 네트워크(=권력관계들)는 본질적으로 산일적이며, 중심을 결여한다. 거기서 진리는, 이 산일적 성격을 유사일반성에 의해 시스템화하는 “표시(Zeichen)”를 만들어낸다(LVS, p.203). 이리하여 어떤 종류의 관계가 규정되며, 인식을 떠받치는 내적인 차이의 폭력이 은폐되며, 호모이오시스(homoiosis), 완전성 등의 전통적인 진리관이 확립한다. 생체권력론의 틀 안에서는, 인간, 안전, 환경, 시장, 시민사회, 성도착, 자유 등의 보편 개념(존재하지 않으나 현실태로서는 <무엇이다>로 기입되어 있는 것)이 표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자가 진리의 담지자로서 스스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진리는 사건으로서 출현하면서, 참과 거짓의 대립의 시스템을 창설한다. 따라서 진리의 정치의 첫 번째 과제는, 표시라는 특이점을 끝까지 지켜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유한한 동시에 한계가 없는) 계열들을 하나하나 재추적하고, 진리가 말소해 버린 인식의 폭력적 충동을 폭로하는 것이다. , 외양과 존재의 이중적 주름에서 출발하여, 진리의 체제가 생산하는 참인 것의 한없음(l'indéfini du vrai)”(LVS, p.208), 즉 현실태의 외양의 한없는 이중화의 효과를 추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전장치가 상정하는 가능한 사건의 계열이나 자유주의가 설정하는 자유의 생산과 소비의 연쇄를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의 정치진리의 체제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푸코는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진리의 정치는 권력의 발생 현장인 출현[외양]의 장, 더 정확하게는, 출현[외양]과 존재가 이중화하는 현실태에 대해 안쪽에서부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 출현[외양]과 존재의 이중체의 한복판에 투입하여, 거기서 진위의 시스템을 탈중심화하고자 하는 힘의 선을 탐색해내고, 현실태의 아주 약간의 “흔들림”(메를로 퐁티)을 촉지하는 것이다. 그때 이 힘의 선이 참인 것의 새로운 계열을 생산하는 것 아닐까? 그러한 새로운 객체의 분야와 이 힘의 선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에도 관통하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의 행동양태를 동시에 발생시키고, 새로운 진리의 체제를 열 수 있지 않을까?[각주:19]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실천만이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진리의 역사를 사고하는 것”(이것은 니체 강의의 부제이다)을 가능케 하지 않을까? 이렇게 푸코는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푸코의 생체권력론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 그것은 전지구적 관리사회의 예언(그것은 해석자의 위장된 입장표명일 뿐이다)이나 (생체정치의 절대화로 이어지는) 비정상으로 간주된 당사자의 ()주체화 등이 아니라, 진리의 정치라는 철학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학도 사회학도 경제학도 아니다”(STP, p.5/5). 그러나 그것은 역사주의나 사회학주의나 경제주의와도 평판화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위기를 품은 시련으로서, 다채로운 분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용법을 촉진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에서,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음으로 내팽개쳐지는가? 아니 죽음으로 내던져짐에 대한 비판은 이미 역사를 너무도 많이 갖고 있다. 이제 현대의 죽음에서는 내던져버림 같은 배제적인 조작이 계속 약해지고 있으며, 아마 그 누구도 무엇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가를 알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태어나 자연스럽게 죽는 것,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죽는 것에 관해서 누가(무엇이)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이 진리진술은 어떠한 우발성에 노출되며, 그 제도적·정치적 조절이나 배려를 어떻게 행하며, 그것에 관계하는 학들은 어떠한 위기에 있는가? 이러한 복합적 현실태에 몰입하고, 그 역사성을 폭로함으로써 비로소 생명과 죽음의 사이, 행태[품행]와 존재 사이에서 중지되었던 신체의 <정서적인 떨림>에 있어서,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넘어서는 곳에서, 창조적이고 쾌락으로 가득 찬 경계선이 그어지지 않을까? “우리의 삶 따위는 우리만큼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의 정념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충동 속에 일어나는 것을 시도하고 조사해보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우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각주:20]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진리의 역사를 사고해야 하듯이, 생명에 의거하지 않고 생명의 역사를 생각했을 때, 현실태에 깃든 충동이나 정서가 촉지되며, 그것에 의해 우리의 품행=인(conduite)가 이중적인 의미에서 진동되고, 새로운 생명의 기술이 미시적 신체의 안쪽에서부터 슬로건 없이, 예외자의 특권화 없이, 다만 정치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1. 이하에서는 “bio-pouvoir”를 “생체권력”, “bio-politique”를 “생체정치”라고 번역한다. “생명정치”라고 유통하고 있는 번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감의 문제도 있지만, 권력에 의해 통치되는 “생체”(vivant)가 단순한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자기를 바람직하게 인도하고, 일정한 자유로운 행동양식을 갖춘 능동적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서다. [본문으로]
  2. Jacques Rancière, “Bio-politique ou politique”, Multitudes 1, mars 2000. [본문으로]
  3. 그렇기에 푸코는 권력과 저항점의 내재적 관계에 관해 “이러한 저항점의 전략적 코드화가 혁명을 가능케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국가가, 권력관계들의 제도적 통치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닮았다”고 덧붙인다(VS, p.127/124頁).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Paris: Gallimard, 1966, pp.288-289. [본문으로]
  5. 생명사에 관해서, 푸코는 자크 뤼피에의 『생물학에서 문화로』의 서평 「생명사와 생체권력」(1976년)에서 언급한다. 그 3부(『인종과 인종주의·미래』)에서 저자는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인종주의를 비판하지만, 푸코는 이 책의 공적은, 인종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신석기 시대 이후, 변이variation의 총체인 개체군으로서, 만들어지고 무너지는壊される 것임을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커뮤니케이션과 다형성”의 정치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Michel Foucault, “Bio-histoire et bio-politiqu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II, Paris: Gallimard, 1994, pp.95-97; “Quatro” tome II, Paris: Gallimard, 2001, pp.95-97. [본문으로]
  6.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op. cit., p. 289. [본문으로]
  7. 이 주제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手塚博, 『ミシェル・フーコー ―― 批判的実證主義と主体性の哲学』, 東信堂, 2011년도 지적한다(232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8. Georges Ganguilhem, “Le vivant et son milieu”, in La connnaissance de la vie, 2e édition, Paris: Vrin, 1998, pp.129-154. [본문으로]
  9. 스토아파에서의 “재난의 예측”의 분석에 관해서는, 졸저 『後期フーコー ―― 権力から主体へ』, 靑土社, 2011년, 213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 “현실태”라고 번역한 것은 “la réalité”, “le réel” 등이다. 이 중요한 조작적 개념은, 자크 라캉의 “현실계”와는 무관하며, 이데올로기나 가상에 대립하며, 독일 관념론 이후의 “Wirklichkeit”에 가깝다. 권력분석이나 그 계보학만이 세상에 밝혀내는[공개하는] 역사적이고 합리적인 현실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용법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것은 『생체정치의 탄생』에서, 질서자유주의자로서 푸코가 언급하고 있는 발터 오이켄의 그것이다. 오이켄은 막스 베버의 “이념형”과 대비하여, “개개의 사태에 입각해 ‘중점적으로 부각된(pointeirend hervorhebend)’” 추상에 의해 얻어지는 것을 ‘경제적 현실태(die wirtshaftliche Wirklichkeit)’라고 불렀다(Walter Eucken, Die Grundlagen der Nationalökonomie, 3., erneut durchgearb, Aufl., Jena: G. Fischer, 1943, S. 86). 개인 신체에 대한 규율권력에서 생체권력으로의 연속적 이행을 이 현실태의 섭렵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Fouçois Bilger, La pensée économique libérale dans l'Allemagne contemporaine, Paris: Librairie générale du droit et de jurisprudence, 1964, pp.50-51). “현실태의 이중화”라는 주제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앞의 졸고, 107頁 이하 등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본문으로]
  11. 이 변용에 관해 강조했던 것으로서, Jean Terrel, Politiques de Foucault, Paris: Pressess universitaires de France, 2010, p.93(“자유를 유발하고, 그것을 유발하면 할수록 잘 통제하는 프로세스를 창조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12.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테츠카 히로시(手塚博)가 “규율권력 개념의 재규정”이라고 부른 작업이다(앞의 책, 228頁 이하 참조). [본문으로]
  13. 푸코는 흄의 이름을 거론한다(NB, p.277/278頁). 그러나 이 점에서 볼 때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의 흄론에서의 (법이나 계약과 대비되고, 확장적이고도 교정적인 어떤 일반적인 규칙을 지닌) “제도”론과의 관계이다. “사회의 본질은 법이 아니라 제도이다. … 공리성은 제도적인 것이다. 제도란 법과 같은 제한이 아니라, 반대로 행위의 모델, 진정한 기획, 긍정적 수단의 고안된 시스템, 간접적 수단의 긍정적 창출이다”(Gilles Deleuze, Emp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4e éditio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8, p.35).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생각된다. [본문으로]
  14. 장 테렐에 따르면, 이것은 푸코에게서, 자유주의가 (1) 생체정치의 문제, (2) 통치이성의 급진적인 비판(통치의 과잉의 비판)이라는 두 개의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측면을 갖추고 있으며, 신자유주의론에서는 후자가 서서히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도 함의한다. 테렐은 이 내적 긴장이 자유주의에 내재하는 “위기”에서 유래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Terrel, Politiques de Foucault, op. cit., p.105). 필자로서는 푸코가 (현상학적 목적론에 대한 표면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럽학문들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의 후설의 “위기”론을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통치성의 위기”론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싶다. 사실 푸코는 나중에 후설의 이 책을 니체의 기획과 평행시킨다(“Qui êtes-vous, professeur Foucault”, in Dits et écrits, tome I, Paris: Gallimard, 2001, p.641). [본문으로]
  15. 이하의 점에 관해서는 졸고 「ミシェル・フーコーにおける真理の言説と「現れ」の系譜学」, 『』(筑波大学), 제9호, 2012년 10월, 1-83頁(筑波大学附属図書館 사이트에서 참조 가능해질 예정)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일부 중복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해둔다. [본문으로]
  16. 주권과 생체권력, 규율권력과 생체권력의 구별이 “진리의 형식”의 문제에 잇어서 수렴된다는 것에 관해서는 Alexandre MacMillan, “Pouvoir souverain et pouvoir sur la vie: continuité et rupture dans l'histoire de pouvoir chez Foucault”, in Audrey Kiéfer et David Risse (dir.), La biopolitique outre-atlantique après Foucault, Paris: L'Harmattan, 2012, pp.19-35. [본문으로]
  17. “Entretien avec Michel Foucault”,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II, op. cit., p. 160; “Quarto”, tome II, op. cit., p. 160. [본문으로]
  18. 이 강의의 내용은 1973년 강연 「진리와 재판형태」에 요약되어 있다(Michel Foucault, “La vérité et les forms juridiqu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I, Paris: Gallimard, 1994, pp.542-553; “Quarto”, tome I, op. cit., pp. 1410-1421. [본문으로]
  19.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른바 『제7서한』에 관해 논한 1982-1983년도 강의에서 푸코는 “정치에 있어서의 철학의 시련”이 철학의 현실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에 대한 자기의 실천으로서의 진리진술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Michel Foucault,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2-1983), édition établie par Frédéric Gros, Paris : Gallimard/Seuil, 2008, pp.221, 236. [본문으로]
  20. Pierre Carlet de Chamblain de Marivaux, La vie de Marianne, Paris: Garnier, 1963, p. 129, cité in Maurice Merleau-Ponty, Signes, Paris: Gallimard, 1960, p. 4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1부 2장. 

정신과 심리의 통치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 푸코의 원문과 일역본을 대조하여 교정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대신 프랑스어 원문을 아래에 병기해뒀다. 나중에 천천히 대조하여 수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몇몇 대목은  이미 대조를 통해 수정한 대목이 있으나, 별도로 밝히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어 원문은 클릭하면 관련된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다. 

* 내용이 달린 각주만 표기해뒀다.  


1. 평화로운 나라의 내전상태

미셸 푸코는 1950년대에 젊은 심리학자로서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푸코는 그때의 경험에 관해 1982년에 이렇게 말한다.

 

철학을 연구한 후 저는 광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성을 연구하기에는 너무도 미쳐 있었으며, 광기를 연구하기에는 너무도 이성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병원에서 저는 환자들한테서 간호사들에게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명확한 직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신경외과가 활짝 꽃을 피웠으며, 정신약리학이 시작됐으며, 전통적인 제도가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것들이 필수적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석 달 정도가 지났을 때(저는 느려터진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무엇을 위해 필요할까?”라고. 3년 후에, 저는 이 일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커다란 불안감을 품은 채 스웨덴으로 갔습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이런 실천들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362] 1598/310)

Après avoir étudié la philosophie, j'ai voulu voir ce qu'était la folie : j'avais été assez fou pour étudier la raison, j'ai été assez raisonnable pour étudier la folie. Dans cet hôpital, j'étais libre d'aller des patients au personnel soignant, car je n'avais pas de fonction précise. C'était l'époque de la floraison de la neurochirurgie, le début de la psychopharmacologie, le règne de l'institution traditionnelle. Dans un premier temps, j'ai accepté ces choses comme nécessaires, mais au bout de trois mois (j'ai un esprit lent !), j'ai commencé à m'interroger : « Mais en quoi ces choses sont-elles nécessaires ? » Au bout de trois ans, j'ai quitté cet emploi et je suis allé en Suède, avec un sentiment de grand malaise personnel ; là j'ai commencé à écrire une histoire de ces pratiques.

 

이리하여 광기와 비이성을 쓰기 시작했지만, 미리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이 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후 푸코는 신경외과수술이나 향정신성의약이나 병원수용에 비판적이기를 계속했지만, 이런 병원 내부에서의 치료 실천이나 병원을 핵심으로 하는 실천을 폐기하면 결말이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경험을 통해 심리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되었지만, 심리학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푸코의 입장은 단순한 반정신의학도 반의학도 반심리학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 지적되었지만, 본고에서는 조금 더 그 내실에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각주:1] 이 점에서 또 하나의 회상이 중요하다. 1983년의 인터뷰이다. “생트안느(Sainte-Anne) 병원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요? 생트안느는 그 직원의 한 명에게, 정신의학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었나요L'hôpital Sainte-Anne avait-il quelque chose de particulier ? Aurait-il pu donner, à l'un de ses employés, une image particulièrement négative de la psychiatrie?”라고 S. 리긴스(Stephen Riggins)가 물은 것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답한다.

 

아니오. 생트안느는 상상한 대로 큰 병원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생트안느는 제가 나중에 찾아간 지방의 큰 병원의 대부분보다도 오히려 좋은 것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파리의 최고 병원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아니, 심한 것은 무엇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제가 지방의 중소병원에서 똑같은 작업을 했더라면, 아마 그 병원의 실패를 지리적 상황이나 지방 작은 병원의 고유한 결함 탓으로 돌리려고 했을 겁니다. ([336] 1347/428)

Oh non. C'était l'un de ces grands hôpitaux comme vous pouvez en imaginer, et je dois dire qu'il était plutôt mieux que la plupart des grands hôpitaux de province que j'ai visités par la suite. C'était l'un des meilleurs hôpitaux de Paris. Non, il n'avait rien d'épouvantable. Et c'est précisément cela, la chose importante. Si j'avais fait le même travail dans un petit hôpital de province, j'aurais peut-être été tenté d'imputer ses échecs à sa situation géographique ou à ses insuffisances propres.

 

생트안느가 최고 좋은 병원이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최근 들어 정신의학의 진보사관과 그것을 계승한 반정신의학의 진보사관의 영향으로, 예전의 병원·시설의 실정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퍼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탈병원화 이후의 수치와 비교해도, 치유되는 환자나 사회로 복귀하는 환자의 비율은 높았다. 또한 놀랍게도 탈병원화 이후, 20세기 중반 이전의 병원 수용자 수는 매우 적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쁜 역사로 간주하는 편견이 오히려 강해졌지만, 소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도 그 범위 밖에서도 나름대로 잘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푸코는 바로 그것에 큰 불안감을 품었다고 받아들여보자. 이후의 푸코가 연구하게 된 권력의 다양한 형태, 병원 수용시설 수용, 규율훈련, 생명권력생명정치, 통치성은 대체로는 잘 행해진다. 대체로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대체로는, 치안도 통치도 잘 행해진다. 평화로운 것이다. 그래서 문제라고 푸코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하자. 정의상 비정상異常은 소수에 그친다. 그렇다면 그 소수의 비정상을 둘러싸고 이렇게 저렇게 번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압도적 대다수가 정상이라는 그것에 문제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권력·생명정치에 대해서는 신체가 표적으로 간주되고, 마치 정신-심리는 표적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논술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오히려 생명권력·생명정치는 개인적인 신체나 집단적인 단체에 작용됨으로써 간접적으로 정신-심리에 작용된다고 논술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초기 푸코에게서의 심리학 연구 혹은 심리학 비판은 푸코 말년에는 두절되어 있는 것처럼 막연하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1976년의 대담 비합법성과 처벌의 기교([175])에서 G. 타라브(Tarrab)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하고 있듯이 감옥 같은 환경을 분석하면, 심리적 차원을 사상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당신 자신은 신체의 구속에 대해 말하지만, 신체의 기초에는 심적인 것(psyché)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Peut-on faire l'économie de la dimension psychologique, quand on analyse le milieu carcéral, comme vous le faites ? Vous parlez vous-même de «prise de corps», or le corps est sous-tendu par une psyché. Qu'en faites-vous?” 이것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나는 심리적 차원을 사상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분명히 나는 구금자의 인격에 관심이 없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항상 비판되는 동시에 항상 재생하는 감옥이라는, 이 역설적인 시설의 기초에 있는 권력의 전술과 전략이다. 이 방식에 있어서는, 심리적 차원이 직접 분석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감옥의 기구에 있어서는 실제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법이 말하는 단순한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그것 이상의 것이다. 사람들의 신체 병사의 신체, 아이의 신체, 노동자의 신체 에 관심을 갖는 정치권력의 전술이 있으며, 신체는 좋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심리(psychologie)는 그것에 말려들어 있다. 그러나 심리는 권력분석에서 시작되는 분석의 최종단계로 이른바 추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사회학에 대해 심리학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권력의 문제설정이다.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개념이냐 사회학의 개념이냐라는 것이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힘관계이다. 따라서 사용되어야 할 도식을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부터 빌려서는 안 된다. 전략으로부터, 그리고 전쟁의 기교(art)로부터 빌려야 한다.([175] 87/109-110)

Je ne dis pas qu'il faut en faire l'économie. En fait, je ne m'intéresse pas au détenu comme personne. Je m'intéresse aux tactiques et aux stratégies de pouvoir qui sous-tendent cette institution paradoxale, à la fois toujours critiquée et toujours renaissante, qu'est la prison. Dans cette mesure-là, je ne crois pas que la dimension psychologique doive être mise immédiatement au service de l'analyse. Prenez le problème du corps: il est en effet très important dans la mécanique de la prison. Or ce n'est pas, comme dit le droit, une simple privation de la liberté, c'est plus: il y a une tactique du pouvoir politique qui s'intéresse au corps des gens : corps des soldats, des enfants, des ouvriers qu'il faut maintenir en bonne condition. Bien sûr, la psychologie s'y trouve impliquée, mais elle se trouve en quelque sorte reléguée au dernier échelon d'une analyse qui commence par le pouvoir. Le problème n'est pas de mettre la psychologie en face de la sociologie ; le problème, c'est la problématique du pouvoir. Est-ce que oui ou non le pouvoir peut être analysé avec les concepts de la psychologie ou de la sociologie, la question n'est pas là, me semble-t-il. Le pouvoir est essentiellement un rapport de force, donc, jusqu'à un certain point, un rapport de guerre, et, par conséquent, les schémas qu'on doit utiliser ne doivent pas être empruntés à la psychologie ou à la sociologie, mais à la stratégie. Et à l'art de la guerre.

 

재차 확인해둘 것은 전쟁이라고 얘기할 때의 전쟁은 비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교도소는 어떤 점까지는전쟁상태에 있다. 마찬가지로 군대·학교·공장도 어떤 점까지는전쟁상태에 있다. 거기서의 권력관계는 전쟁관계이다. 전쟁이기 때문에, 전술·전략·전쟁기교가 실제로 구사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표적은 신체이다. 심리학의 개념도 사회학의 개념도 쓸모가 없다. 권력의 분석은 신체의 심리학이나 신체의 사회학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역시 심리의 분석은 최종단계로 보류될 뿐인가? 타라브는 이렇게 질문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전쟁관계는 대체로 구금자의 육체와 신체에, 그리고 또한 구금자의 심적인 것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지만Mais ces rapports de guerre laissent généralement une marque profonde dans la chair et dans le corps des détenus, ainsi que dans leur psyché...이라고. 푸코의 대답은 이렇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내게 문제는 권력이 신체와 심인(心因, psychisme)에 각인이 남긴다는 사실이며, 신체와 심인이 분석으로의 안내 실이나 모델로서 도움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분석으로의 안내 실로서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은 전략의 관계일 것이다. 전쟁이 전투원의 신체에 상처를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전략이나 전술이 개인의 신체에 각인을 남길 것이라는 것은 물론 이해되었다. 그러나 상처로부터 시작해도 전략의 실에 도착할 수는 없다. ([175] 87/110)

Mais le problème n'est pas là. Mon problème est de savoir si, du fait que le pouvoir laisse des marques dans le corps et le psychisme, ceux-ci doivent servir de fil directeur et de modèle à l'analyse. Il me semble que ce qui doit servir de fil directeur à l'analyse, ce sont des rapports de stratégie, étant bien entendu que la stratégie ou la tactique du pouvoir va laisser des marques sur le corps des individus, tout comme une guerre laisse des cicatrices sur le corps des combattants. Mais ce n'est pas la cicatrice qui vous permettra de remonter le fil de la stratégie.

 

푸코의 이 대답은 그대로 마음[]에 해당된다. 교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