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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20. 존재의 바깥에서


비교주의esotericism는 비-앎의 양태를 분절화하는 것을 뜻한다.

푸리오 이에지

 

2세기 중반 무렵의 이집트에서 그노시스파의 바실리데스는 두 권짜리 복음서 주해를 썼다. 바타이유가 도큐먼트지에 게재한 동물의 머리를 가진 형상군은 바실리데스가 속한 동아리에서 나온 것이다. 바실리데스가 고안한 구원론적 드라마에 따르면, 태초에 실존하지 않은[부재의]nonexistent 신은 세 개의 씨앗 혹은 자손(filial line)을 우주로 방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마지막 씨앗은 물질체corporeal matter거대한 더미속에 유산miscarriage과도 같이뒤엉킨 채 머물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로부터 원래 유래한 신의 부재nonexistence 속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지점까지라면, 바실리데스의 우주론을 우주의 혼합과 분리라는 그노시스파의 장대한 드라마와 구별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별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바실리데스의 비할 데 없는 독창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 바실리데스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상가라는 점이다. , 신적 혹은 영적인 요소들 모두가 자신들의 원래 장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일단 물질과 자연적 생명을 내던져버린 뒤에 물질과 자연적 생명은 어떤 상태가 되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 진통과 고투를 벌이며 괴로워하는 자연에 관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는 구절에 관한 천재적인 주해를 통해 그는 이렇게 하고 있다[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있다].

 

모든 자손(filial line)이 높은 곳에 이르고 혼의 경계를 넘어설 때, 모든 창조는 연민을 받을 것이다. 자손의 모든 인류가 여기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르기 위해 현재까지도 창조는 신의 아들들의 계시[현현]에 대해 고민하고 번민하며 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신은 모든 피조물이 그 자연적 조건 안에[katá phýsin] 머물러 있고 누구 하나 그 자연에 반하는 것을 바라지 않듯이, 온 세계에 걸쳐 커다란 무지[megálē ágnoia]를 가져올 것이다. 이리하여 이 팽창 속에 있는 모든 영혼, 그 본성이 이 장소에서만 불사인 채로 남을 모든 영혼은 이 팽창과 다른 것이나 이보다 나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여기서 계속 머물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양과 함께 언덕배기에서 풀을 뜯으려고 애쓰는 것 마냥, 하계의 혼들이 불가능한 것을 욕망함으로써 괴로워하지 않도록, 하계에서는 어떤 새소식도 없을 것이고 상계의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현세를 초월한 존재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in the regions below there will be no news and no knowledge of the realities above. 왜냐하면 이런 허황된 욕망은 이들의 파괴일 수 있기 때문이다[이들의 파멸의 원천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Simonetti, 72).

 

모든 영적인 요소에 의해 완전히 내버려지고[고립되고] 구할 길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무지때문에 완전한 지복에 있는 이 자연적 생명이라는 관념 속에서, 바실리데스는 역사의 종언에서 인간이 동물성을 다시 얻는다는[인간 안에서 다시금 동물성이 발견된다는] 일종의 장대한 대항이미지counterimage[현실을 벗어난 일종의 장대한 이미지]를 생각했던 것인데, 이런 이미지가 바타이유를 그토록 괴롭혔다[촉발시켰다]. 여기서 빛과 어둠, 영혼과 물질, 로고스와 동물적 생명 인간학 기계에서는 이것들의 절합이 인간을 산출했다 이 영구히 분리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 자신을 더 불가해한[인간의 앎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에 닫아두기close 위해서가 오히려 인간의 더 참된 본성을 해방시키기[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비평가가 알프레드 자리에 관해 쓴 바로는, 그의 작품을 푸는 연금술적 열쇠는 중세의 학문에서 승계받은 신앙에 있는 것 같다. “실존existence[생존]하는 동안에 긴밀하게 뒤엉킨 다양한 자연들을 분리하려고 애를 쓴 인간은 [이 신앙을 따라] 자기 자신 내부에서 생명의 심오한 의미를 자유롭게 하는[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할 것이다the belief, inherited from medieval science, that the man who managed to separate the different natures tightly bound together during his existence would succeed in freeing within himself the profound sense of life”(Massat, 12). 자연(특히 인간적 자연[인간본성]natura humana)이 로고스와, 자신의 역사와 명확히[결정적으로] 결별한 후에도 영원히, 구원될 수 없이 생존하는데, 이런 자연의 구원된[구출된] 에 환하게 빛나는 생명의 이런 형상을, 이 형상이 새로운 것이든 아니면 아주 고대적인 것이든[고금의] 사고하기란 쉽지 않다[생명에 관한 이미지들을 어설프게 고찰해서는 안 된다]. 동물적인 생명을 지배하려는 모든 이성적 요소를, 모든 기획을 완전히 망각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동물성이 세계가 가난하다고, 계시와 구원을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의해 정의됐다면, 이 생명은 동물적인 생명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동물적 생명이 열림을 지배의 도구[구조]와 인식의 도구[구조]로서 전유하지[제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동물적 생명은 분명히 열림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적 생명이 자신의 방심captivation 속에 단순히 닫혀져 있는 채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적인 생명에 드리워진descended upon -(ágnoia)은 자신의 은폐concealment와의 모든 관계의 상실을 수반[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생명은 비-앎의 지대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본성[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차분하게 머물러 있다(ménei katá phýsin).

어원 연구자들은 라틴어 동사 ignoscere와 접했을 때 항상 당혹스러워했다[모두 항상 모호한 답변을 되풀이하는 데 머물러 있다]. 이 동사는 *in-gnosco로서[라는 어형으로] 해명될 수 있는 듯하나, 이것은 모르다, 무시하다[ignorare]”가 아니라 용서하다[perdonare]”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인식[불가지]아니 오히려 무-인식(ignoscenza)지대를 분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것이 있게 하다[존재하게 두다, 존재를 허용하다][lasciar essere]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존재의 바깥에 내버려두다[존재로부터 제외하다][lasciar fuori dall’essere], 어떤 것을 구제[구원]할 수 없게 하다도 뜻한다. 티치아노가 그린 연인들이 자신들의 신비의 부재를 서로에게 용서하듯이, 구출된 밤에 생명 열려 있지도 않고 탈은폐될 수 없지도undisconcealable 않은 은 자신의 은폐되어 있음concealedness과의 관계를 차분하게 유지하며, 이를 존재의 바깥에 있게 하는 것이다[두게 하는 것이다][lasciar essere fuori dall’essere].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동물은 하나의 존재자로서도, 비존재자로서도 스스로를 억제 해제하는 것disinhibitor과 스스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과 더불어서만 억제 해제하는 것disinhibitor은 처음으로 그런 것으로서 존재하도록 허용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더불어서만 존재와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자들은 접근할 수 있으며 명확하게manifest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최고 범주는 존재하게 내버려두다[lasciar essere]라고 진술[평가]된다. 이 기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가능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인간은 기투 속에서 가능적인 것에 대해 해방된다]. 그리고 이 가능적인 것에 스스로를 넘겨줌으로써 세계와 존재자들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 내버려둔다. 하지만 우리의 독해가 정곡을 찔렀다고 한다면, 만일 인간이 동물과 억제 해제하는 것disinhibitor 사이의 관계를 권태의 체험 속에서 중지시키고 비활성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만 세계를 열고 가능적인 것을 자유롭게 할[해방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만일 열림의 중심부에 동물의 비탈은폐되어 있음비폭로성(undisconcealedness)이 놓여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 이 관계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은 동물을 존재하게 내버려둘 수 있고, 이 동물을 중지시킴으로써 세계를 열린 채로 유지할 수 있는가?

동물이 존재자들도 비존재자들도, 열린 것도 닫힌 것도 모르는 한에서, 동물은 존재[]의 바깥에 있다. , 모든 열림보다 더 외적인 외부성exteriority에 있어서의 외부outside, 모든 닫혀 있음보다 더 내적인 내밀성intimacy에 있어서의 내부inside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을 존재하게 내버려둔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할 것이다. , 동물을 존재의 외부[바깥]outside of being에 존재하게 내버려둔다는 것. 여기서 쟁점이 되는 비인식[-]nonknowledge 혹은 무인식[-]a-knowledge 의 지대는 앎과 알지 못함knowing and not knowing, 탈은폐와 은폐disconcealing and concealing, 존재와 무 둘 다를 넘어선다. 하지만 이렇게 존재의 외부[바깥]에 존재하게 내버려진 것은 부정되는 것이나 제거되는 것이 아니며, 이런 이유 때문에 비실존하는inexistent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는 실존하며 실재하는 것이다It is an existing, real thing that has gone beyond the difference between being and beings.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새로운 창조의 윤곽을 추적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이런 시도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것이 될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 이미 봤듯이, 우리 문화에서 인간은 항상 인간과 동물의 분할과 접합articulation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의 결과였으며, 여기서는 조작의 두 항 중 어느 하나가 또한 관건이었다. 인간에 관한 우리의 개념화를 다스리는 기계를 작동 불능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러므로 새로운 훨씬 효과적이거나 훨씬 본래적인authentic 접합articulation을 모색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중심의 공허성central emptiness, 인간과 동물을 인간 내부에서 분리하는 단절[틈새](hiatus)을 보여준다는 것이며, 이 공허성 속에서 우리 자신을 위태롭게 한다[이 공허성 속에서 우리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 즉 중지의 중지를, 인간과 동물 둘 다의 무위Shabbat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어느 날, 이제는 고전적 이미지가 된 것을 따라, 인간의 과학들이 우리 역사의 해안가에서 형성했던 모래에 그려진 얼굴을 마침내 지워야만 한다면, 그 장소에서 대신 등장할 것은 다시 손에 넣은 인간성이나 동물성의 새로운 성안포(聖顔布)mandylion성해포(聖骸布)Veronica도 아닐 것이다. 암브로시아의 세밀화에 그려진 동물 머리를 한 의인들은 인간-동물[인간과 동물의 관계]의 새로운 어형변화[경향]declension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과 동물 둘 다를 존재의 외부[바깥]에 존재하게 내버려두고 이들이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구원되는 커다란 무지의 형상이다. 아마 생명 존재들living beings이 역사적 임무[사명]을 떠맡지 않으며 인간학적 기계를 가동시키지도 않으면서 의인들의 메시아적 연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길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또 다시 인간이 그것에 의해 산출되었던 접합의 신비(mysterium coniunctionis)’의 해결책은 분리의 실천적-정치적 신비에 대한 전례 없는 탐구를 거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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