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20. 존재의 바깥에서


비교주의esotericism는 비-앎의 양태를 분절화하는 것을 뜻한다.

푸리오 이에지

 

2세기 중반 무렵의 이집트에서 그노시스파의 바실리데스는 두 권짜리 복음서 주해를 썼다. 바타이유가 도큐먼트지에 게재한 동물의 머리를 가진 형상군은 바실리데스가 속한 동아리에서 나온 것이다. 바실리데스가 고안한 구원론적 드라마에 따르면, 태초에 실존하지 않은[부재의]nonexistent 신은 세 개의 씨앗 혹은 자손(filial line)을 우주로 방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마지막 씨앗은 물질체corporeal matter거대한 더미속에 유산miscarriage과도 같이뒤엉킨 채 머물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로부터 원래 유래한 신의 부재nonexistence 속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지점까지라면, 바실리데스의 우주론을 우주의 혼합과 분리라는 그노시스파의 장대한 드라마와 구별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별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바실리데스의 비할 데 없는 독창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 바실리데스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상가라는 점이다. , 신적 혹은 영적인 요소들 모두가 자신들의 원래 장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일단 물질과 자연적 생명을 내던져버린 뒤에 물질과 자연적 생명은 어떤 상태가 되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 진통과 고투를 벌이며 괴로워하는 자연에 관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는 구절에 관한 천재적인 주해를 통해 그는 이렇게 하고 있다[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있다].

 

모든 자손(filial line)이 높은 곳에 이르고 혼의 경계를 넘어설 때, 모든 창조는 연민을 받을 것이다. 자손의 모든 인류가 여기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르기 위해 현재까지도 창조는 신의 아들들의 계시[현현]에 대해 고민하고 번민하며 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신은 모든 피조물이 그 자연적 조건 안에[katá phýsin] 머물러 있고 누구 하나 그 자연에 반하는 것을 바라지 않듯이, 온 세계에 걸쳐 커다란 무지[megálē ágnoia]를 가져올 것이다. 이리하여 이 팽창 속에 있는 모든 영혼, 그 본성이 이 장소에서만 불사인 채로 남을 모든 영혼은 이 팽창과 다른 것이나 이보다 나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여기서 계속 머물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양과 함께 언덕배기에서 풀을 뜯으려고 애쓰는 것 마냥, 하계의 혼들이 불가능한 것을 욕망함으로써 괴로워하지 않도록, 하계에서는 어떤 새소식도 없을 것이고 상계의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현세를 초월한 존재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in the regions below there will be no news and no knowledge of the realities above. 왜냐하면 이런 허황된 욕망은 이들의 파괴일 수 있기 때문이다[이들의 파멸의 원천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Simonetti, 72).

 

모든 영적인 요소에 의해 완전히 내버려지고[고립되고] 구할 길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무지때문에 완전한 지복에 있는 이 자연적 생명이라는 관념 속에서, 바실리데스는 역사의 종언에서 인간이 동물성을 다시 얻는다는[인간 안에서 다시금 동물성이 발견된다는] 일종의 장대한 대항이미지counterimage[현실을 벗어난 일종의 장대한 이미지]를 생각했던 것인데, 이런 이미지가 바타이유를 그토록 괴롭혔다[촉발시켰다]. 여기서 빛과 어둠, 영혼과 물질, 로고스와 동물적 생명 인간학 기계에서는 이것들의 절합이 인간을 산출했다 이 영구히 분리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 자신을 더 불가해한[인간의 앎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에 닫아두기close 위해서가 오히려 인간의 더 참된 본성을 해방시키기[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비평가가 알프레드 자리에 관해 쓴 바로는, 그의 작품을 푸는 연금술적 열쇠는 중세의 학문에서 승계받은 신앙에 있는 것 같다. “실존existence[생존]하는 동안에 긴밀하게 뒤엉킨 다양한 자연들을 분리하려고 애를 쓴 인간은 [이 신앙을 따라] 자기 자신 내부에서 생명의 심오한 의미를 자유롭게 하는[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할 것이다the belief, inherited from medieval science, that the man who managed to separate the different natures tightly bound together during his existence would succeed in freeing within himself the profound sense of life”(Massat, 12). 자연(특히 인간적 자연[인간본성]natura humana)이 로고스와, 자신의 역사와 명확히[결정적으로] 결별한 후에도 영원히, 구원될 수 없이 생존하는데, 이런 자연의 구원된[구출된] 에 환하게 빛나는 생명의 이런 형상을, 이 형상이 새로운 것이든 아니면 아주 고대적인 것이든[고금의] 사고하기란 쉽지 않다[생명에 관한 이미지들을 어설프게 고찰해서는 안 된다]. 동물적인 생명을 지배하려는 모든 이성적 요소를, 모든 기획을 완전히 망각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동물성이 세계가 가난하다고, 계시와 구원을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의해 정의됐다면, 이 생명은 동물적인 생명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동물적 생명이 열림을 지배의 도구[구조]와 인식의 도구[구조]로서 전유하지[제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동물적 생명은 분명히 열림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적 생명이 자신의 방심captivation 속에 단순히 닫혀져 있는 채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적인 생명에 드리워진descended upon -(ágnoia)은 자신의 은폐concealment와의 모든 관계의 상실을 수반[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생명은 비-앎의 지대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본성[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차분하게 머물러 있다(ménei katá phýsin).

어원 연구자들은 라틴어 동사 ignoscere와 접했을 때 항상 당혹스러워했다[모두 항상 모호한 답변을 되풀이하는 데 머물러 있다]. 이 동사는 *in-gnosco로서[라는 어형으로] 해명될 수 있는 듯하나, 이것은 모르다, 무시하다[ignorare]”가 아니라 용서하다[perdonare]”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인식[불가지]아니 오히려 무-인식(ignoscenza)지대를 분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것이 있게 하다[존재하게 두다, 존재를 허용하다][lasciar essere]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존재의 바깥에 내버려두다[존재로부터 제외하다][lasciar fuori dall’essere], 어떤 것을 구제[구원]할 수 없게 하다도 뜻한다. 티치아노가 그린 연인들이 자신들의 신비의 부재를 서로에게 용서하듯이, 구출된 밤에 생명 열려 있지도 않고 탈은폐될 수 없지도undisconcealable 않은 은 자신의 은폐되어 있음concealedness과의 관계를 차분하게 유지하며, 이를 존재의 바깥에 있게 하는 것이다[두게 하는 것이다][lasciar essere fuori dall’essere].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동물은 하나의 존재자로서도, 비존재자로서도 스스로를 억제 해제하는 것disinhibitor과 스스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과 더불어서만 억제 해제하는 것disinhibitor은 처음으로 그런 것으로서 존재하도록 허용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더불어서만 존재와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자들은 접근할 수 있으며 명확하게manifest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최고 범주는 존재하게 내버려두다[lasciar essere]라고 진술[평가]된다. 이 기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가능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인간은 기투 속에서 가능적인 것에 대해 해방된다]. 그리고 이 가능적인 것에 스스로를 넘겨줌으로써 세계와 존재자들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 내버려둔다. 하지만 우리의 독해가 정곡을 찔렀다고 한다면, 만일 인간이 동물과 억제 해제하는 것disinhibitor 사이의 관계를 권태의 체험 속에서 중지시키고 비활성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만 세계를 열고 가능적인 것을 자유롭게 할[해방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만일 열림의 중심부에 동물의 비탈은폐되어 있음비폭로성(undisconcealedness)이 놓여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 이 관계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은 동물을 존재하게 내버려둘 수 있고, 이 동물을 중지시킴으로써 세계를 열린 채로 유지할 수 있는가?

동물이 존재자들도 비존재자들도, 열린 것도 닫힌 것도 모르는 한에서, 동물은 존재[]의 바깥에 있다. , 모든 열림보다 더 외적인 외부성exteriority에 있어서의 외부outside, 모든 닫혀 있음보다 더 내적인 내밀성intimacy에 있어서의 내부inside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을 존재하게 내버려둔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할 것이다. , 동물을 존재의 외부[바깥]outside of being에 존재하게 내버려둔다는 것. 여기서 쟁점이 되는 비인식[-]nonknowledge 혹은 무인식[-]a-knowledge 의 지대는 앎과 알지 못함knowing and not knowing, 탈은폐와 은폐disconcealing and concealing, 존재와 무 둘 다를 넘어선다. 하지만 이렇게 존재의 외부[바깥]에 존재하게 내버려진 것은 부정되는 것이나 제거되는 것이 아니며, 이런 이유 때문에 비실존하는inexistent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는 실존하며 실재하는 것이다It is an existing, real thing that has gone beyond the difference between being and beings.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새로운 창조의 윤곽을 추적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이런 시도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것이 될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 이미 봤듯이, 우리 문화에서 인간은 항상 인간과 동물의 분할과 접합articulation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의 결과였으며, 여기서는 조작의 두 항 중 어느 하나가 또한 관건이었다. 인간에 관한 우리의 개념화를 다스리는 기계를 작동 불능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러므로 새로운 훨씬 효과적이거나 훨씬 본래적인authentic 접합articulation을 모색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중심의 공허성central emptiness, 인간과 동물을 인간 내부에서 분리하는 단절[틈새](hiatus)을 보여준다는 것이며, 이 공허성 속에서 우리 자신을 위태롭게 한다[이 공허성 속에서 우리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 즉 중지의 중지를, 인간과 동물 둘 다의 무위Shabbat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어느 날, 이제는 고전적 이미지가 된 것을 따라, 인간의 과학들이 우리 역사의 해안가에서 형성했던 모래에 그려진 얼굴을 마침내 지워야만 한다면, 그 장소에서 대신 등장할 것은 다시 손에 넣은 인간성이나 동물성의 새로운 성안포(聖顔布)mandylion성해포(聖骸布)Veronica도 아닐 것이다. 암브로시아의 세밀화에 그려진 동물 머리를 한 의인들은 인간-동물[인간과 동물의 관계]의 새로운 어형변화[경향]declension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과 동물 둘 다를 존재의 외부[바깥]에 존재하게 내버려두고 이들이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구원되는 커다란 무지의 형상이다. 아마 생명 존재들living beings이 역사적 임무[사명]을 떠맡지 않으며 인간학적 기계를 가동시키지도 않으면서 의인들의 메시아적 연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길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또 다시 인간이 그것에 의해 산출되었던 접합의 신비(mysterium coniunctionis)’의 해결책은 분리의 실천적-정치적 신비에 대한 전례 없는 탐구를 거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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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인간과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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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9. 무위


빈 예술사 미술관에는 티치아노의 후기 작품 중 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의 백조의 노래(ultima poesia)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회화로부터의 작별 인사라고도 칭하기도 한다 ― 『님프와 목동(Nymph and Shepherd)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그림 한 점이 수장(收藏)되어 있다. 전경에는 두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음울한 전원 풍경 속에 담구어져 있다. 몸은 우리를 향하나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는 목동은 입술에서 이제 막 떼어낸 것인 양 두 손에 피리를 쥐고 있다. [그 옆에는] 등이 그려져 있는 나체의 님프는 전통적으로 방탕함과 성욕(libido, 음탕함)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표범 가죽 위에 다리를 펴고 누워, 풍만하고 빛나는 엉덩이를 보여준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몸짓으로, 관객에게 사색에 잠긴 얼굴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마치 애무하듯이 왼팔로 오른팔을 가볍게 건드린다. [그림의] 조금 더 안쪽에는 로렌초 로토(Lorenzo Lotto)«알레고리»[1505]에 있는 나무처럼, 반은 시들고 반은 잎이 우거진, 번개를 맞은 듯한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리고 그 잎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기라도 하듯이, 한 마리 동물 일설에는 대담한 산양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새끼 사슴일 것이다 이 극적이게도 뒷다리로 일어서 이 나무에 기대고 있다. 종종 인상파를 연상시키는 말년의 티치아노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의] 위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우리의 시선은 그림의 강렬한 [불그스름한] 덩어리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모조리 소진된 관능과 가라앉은 멜랑콜리, 이 둘 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수수께끼 같은 도덕화된 풍경(paysage moralisé)을 접한 학자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고, 어떤 설명도 완벽하지 않은 듯했다. 분명히 이 정경(scene)알레고리이긴 하지만 너무도 감정이 교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너무도 절제되어 있고 우중충하기에, 제안된 가설 중 어떤 것과도 합치하지 않는 것이다”(Panofsky, 172). 님프와 목동이 에로틱하게 연결된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하지만 난잡하면서도[긴밀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는 이들의 관계는 이토록 특이하기에, “육체적으로는 매우 가깝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너무 떨어져 있는, 서로 마음이 식어버린 연인들”(ibid.)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서 모든 것 거의 단색인 톤, 여자의 어둡고 음울한 표정은 물론이고 자세 이 커플이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그네들의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음을 시사하고 있다”(Dundas, 54).

이 그림이 티치아노의 또 다른 그림, 즉 에딘버러에 소재한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인간의 3단계(The Three Ages of Man)»와 맺는 관계에 관해서는 주디스 던다스가 올바르게 지적했다[다행스럽게도 주디스 던다스가 지적한 게 있다]. 던다스에 따르면, 비엔나의 그림 수 년 뒤에 그려진 [에딘버러에 소장된] 기존 작품에 있는 요소들 중 몇 가지(한 쌍의 연인, 피리, 고목, 필경 같은 것인 동물의 현존)를 다시 취하지만, «세 단계»의 맑고 화창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공통 관계도 없는 더 어둡고 더 절망적인 기조(key) 속에서 이런 요소들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의 관계는 이보다는 훨씬 복잡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작품들에] 공통적인 에로틱한 주제를 더 파헤친다는 의미에서, 티치아노가 의도적으로 젊은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 이를 조목조목 반박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기에 이를 수 있다(연인들Erota과 고목이 그려져 있는 것에서 증명되듯이, ‘인간의 세 단계라는 도상학적 주제는 에딘버러의 그림에서도 사랑에 관한 명상meditation이라는 형태로 반복된다). 무엇보다도 우선 두 연인들의 형상이 뒤집혀 있다. 이를 테면, 초기 작품[에딘버러의 그림]에서는 남자가 알몸이고 여자가 옷을 입고 있다. 등이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 옆모습이 그려져 있는 여자는 피리를 들고 있는데, 이 피리는 비엔나의 그림에서는 목동의 손에 건네지게 된다. 또 우리는 «세 단계»의 오른쪽에서 지혜와 원죄의 상징인 부러진 고목을 볼 수 있는데, 한 명의 아모르Eros가 이 나무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티치아노가 말년 작품에서도 이 고목의 모티프를 다시 취했을 때, 이 나무의 한쪽에서는 잎이 만발했으며, 이리하여 그는 <생명의 나무><선악을 인식하는 나무>라는 에덴동산의 두 개의 나무를 하나의 줄기에 합쳐 놓았다. 그리고 «세 단계»에서는 새끼 사슴이 목초지 위에 조용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비엔나의 그림에서는 [에딘버러의 그림에 나오는] 아모르Eros의 장소를 차지하고 <생명의 나무>기어오르고 있다[뛰어넘으려 한다, 마주보고 있다].

 

이리하여 이미 에딘버러의 그림의 중심에 있던 남녀 사이의 성적 관계의 수수께끼는 새롭고 더 원숙한 정식화를 받게 된다. 성적[관능적] 쾌락과 사랑은 절반은 잎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증언하고 있듯이 죽음과 죄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성[적 만족]을 충족시킴으로써, 연인들은 서로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게 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신비를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더 잘 통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비밀에서 이렇게 서로 각성(disenchantment)하게 됨으로써, 벤야민의 아포리즘에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동물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는, 새롭고 더 지복의[은혜로운] 삶에 들어서는[향유하는] 것이다. [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서 도달하게 된 것은 자연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의 나무><지혜의 나무> 옆에서 뒷다리로 일어서 있는 동물에 의해 상징되듯이, 도달하게 되는 것은 자연과 지혜, 은폐와 탈은폐를 넘어선 더 높은 단계이다. 이 연인들은 자신들의 신비의 부재로 서로를 들어서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서로에게 접하게 한다[비밀에 관여하게 된다]. , 이들은 서로를 번갈아가며 용서하며, 자신들의 공허(vanitas)[서로에게] 겉으로 드러낸다. 벌거벗었든 옷을 입고 있든, 이것들은 더 이상 은폐되는 것도 탈은폐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불분명하다(inapparenti). 두 명의 연인들의 자세를 통해, 그리고 입술에서 떼어낸 피리를 통해 분명해지듯이, 이들이 놓은 상황은 무위(otium)이며, 작동하지 않는다(senz’opera). 던다스가 적고 있듯이, 이 그림들에서 티치아노가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관해 성찰하는 영역”(ibid., 55)을 창출했다는 게 정말이라면, 비엔나의 그림에서 이 관계는 이른바 중성화된다. [성적 욕망의] 충족 후에, 자신들의 신비를 잃어버린 연인들은 완벽하게 무활동적(inoperative)이게[작동 불능이] 된 인간 본성 삶의 최고이자 구원될 수 없는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동물의 무활동(inoperosità)과 무위(désœuvrement) 을 관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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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8. 사이

세계의 모든 수수께끼는 성sex이라는 자그마한 비밀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 같다.”

미셸 푸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연과 역사의 관계에 관해 벤야민의 여러 텍스트들은 전적으로 상이한 이미지[마치 이미지를 쏙 빼닮은 듯한 것]를 제공한다. 이 이미지에서 인간학적 기계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out of play 듯 보인다. 최초의 텍스트는 구출된 밤에 관해 192312월에 [플로렌스 크리스티안] (Rang)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서 닫혀 있음closedness(Verschlossenheit)의 세계와 밤의 세계로 간주되는 자연은 계시(Offenbarung)의 영역으로서의 역사에 대립된다. 그러나 벤야민은 자연이라는 닫힌 영역에 놀랍게도 관념뿐 아니라 예술작품도 속하게 한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어떠한 낮도 기다리지 않는 자연의 모델이라고정의된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어떠한 심판의 날도 기다리지 않는 자연의 모델이다. 역사의 극장도 아니고 인간의 거처도 아닌 자연의 모델로서 정의됩니다. 즉 구출된 밤(die gerettete Nacht)인 겁니다.”(Benjamin, 1996, 393).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apokaradokín tēs ktíseōs)에 관한 바울의 텍스트가 자연과 구원, 피조물과 구원된 인류 사이에 수립한 연결은 여기서 산산이 부서진다[완벽하게 분절된다]. “자연의 밤에만 반짝이는별들처럼 이념들은 피조물의 생명을 계시하기[드러내기, 계시를 부여하기] 위해서도, 이 생명을 인간의 언어활동에 열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을 그 닫혀 있음과 침묵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서 피조물의 생명을 그러모은다[집약한다]. 자연과 구원redemption의 분리는 고대 그노시스파의 모티프이다. 그리고 이는 야콥 테우베스가 벤야민을 그노시스파의 마르키온과 나란히 놓게 만들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서 [자연과 구원의] 분리는 마르키온의 분리와는 대척점에 있는 벤야민의 특유의 전략을 따른다. 대다수의 그노시스파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키온에게서는 자연을 사악한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이라며 과소평가하고 비난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 여기서[벤야민에게서]는 오히려 자연을 지복(beatitudo)’의 원형으로 설정하는 가치전환transvaluation으로 이어진다. 구출된 밤saved night[구원된 밤]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보내진 자연의 이름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또 다른 단편들에 따르면, 이것의 성격[이런 자연을 해방하는 열쇠]은 무상함[덧없음]transience이며 이것의 리듬은 지복이다. 여기서 쟁점인 구원은 상실되었기에 또 다시 찾아져야만 하는 어떤 것, 망각되었기에 기억[회상]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과 관련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구출된[구원된] 밤은 상실된 것과 망각된 것 그 자체와 관련된다. , 구원될 수 없는 어떤 것과 관련된다. 구원된[구출된] 밤은 구원될 수 없는 어떤 것과의 관계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그가 어느 단계까지는또한 자연인 한에서 두 개의 분명히 구별된 긴장관계, 두 개의 상이한 구원redemptions에 의해 횡단된 장field으로서 등장한다.

 

불멸성을 도입하는 영혼의 회복(restitutio in integrum)’에는 몰락의 영원성[영원의 몰락]에 이르게 하는 현세적인 복원restitution[매춘부가] 대응한다. 그리고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인 총체성에 있어서도, 그 총체성으로 사그라지는,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으로 영원히 사그라지는 이 현세적 실존의 리듬이 행복이다[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영원히 그 전체를 향해 옮겨 걸어가는 이 속세의 리듬, 메시아적인 자연의 리듬이야말로 행복이다].”(Benjamin, 1980a, 172).

 

이 유별난singular 그노시스에 있어서 인간은 피조물의 생명과 영혼, 창조와 구원[속죄]redemption, 자연과 역사가 계속해서 식별되고 분리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원salvation을 향해 계속해서 음모를 꾸미는 체sieve이다.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의 끝에 수록된 플라네타리움을 향해(Zum Planetarium)라는 제목이 달린 텍스트에서 벤야민은 근대인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고대인이 우주와 맺는 관계와 비교하면서 개괄하려고 한다. 고대인은 무아지경의 상태ecstatic trance에서 [우주와 관련된] 자신의 장소를 갖고 있었다. [반면] 근대인에게 [자연과의] 이런 관계의 고유한 장소는 테크놀로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널리 인식되는 것처럼, 인간의 자연 지배로서 인식된 테크놀로지가 확실히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이 가르치듯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모든 테크놀로지의 의미이다. 하지만 성인에 의한 아이들의 지배가 교육의 의미라고 천명하면서 회초리를 휘두르는 교사를 누가 신뢰할까?

제국주의자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모든 기술의 의미이라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성인에 의한 아이들의 지배가 교육의 의미이라고 공언하여 회초리를 휘두르는 교사를 누가 신뢰할까? 교육이란 어쩌면 무엇보다 세대 간의 관계에 필요불가결한 질서이며, 따라서 만일 지배가 좋다면, 아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동시에 기술이라는 것도 역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류의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확실히 종으로서의 인간은 몇 만년도 전에 발전의 종극에 도달했지만, 종으로서의 인류는 그 발단에 서 있을 뿐이다.”(Benjamin, 1980b, 68)

 

자연과 인류 사이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도, 자연이 인간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또한 두 항의 변증법적 종합을 대표하게 될 제3항으로 이 두 항들이 능가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마치 둘이 제3항으로 그럴싸하게 지양됨으로써, 변증법적인 종합이 형성될 것이라는 얘기도 아니다]. 오히려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라는 벤야민의 모델에 따르면,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두 항의 사이’, 간격interval,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두 항 사이의 놀이play일 뿐이며, 일치되지 않은 채로 놓인 이것들의 즉각적인 성좌일 뿐이다. [여기서] 인간학 기계는 비인간적인 것의 중지와 포획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산출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을 더 이상 분절하지 않는다[인간학 기계는 더 이상 자연과 인간을 분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의 중지와 포획을 통해 인간을 산출한다]. 인간학 기계는 이른바 멈춰서 있다. , ‘정지상태에 있는것이다. 그리고 두 항들의 상호적 중지에 있어서, 아마 우리가 아무런 이름도 갖지 못하고 있고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떤 것이 자연과 인류 사이에 또아리를 틀고 있으며, 지배된 관계 속에서, 구원된[구출된] 밤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고[자리잡고] 있다.

벤야민은 이 책의 불과 몇 쪽 앞에 있는 가장 밀도 높은 아포리즘 중 하나에서, 이런 생명의 어슴푸레한uncertain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이 생명은 자신의 신비를 잃는 것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자연과 맺는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한다[관계로부터 해방된다]. 하지만 인간을 생명에 묶는 이 비밀스런 끈푸는 것이 아니라 끊어버리는 것은 완전히 자연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오히려 도처에서 자연을 벗어나고[능가하고] 있는 요소, 즉 성적 충족이다. 감각적[성적] 쾌락의 극한적 대전환에서, 이른바 비자연[자연일 수 없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 신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생명이라는 역설적 이미지 속에서, 벤야민은 새로운 비-인간성[인간일 수 없는 것]의 상형문자와도 같은 것을 적어둔다.

 

성이 충족됨으로써 남성은 자신의 신비로부터 해방된다. 다만 이 신비는 성욕에 있는 게 아니며, 성욕의 충족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충족에서야 비로소 이 신비는 풀리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게 된다. 그것은 남성을 생명에 연결시키는 끈에 비유할 수 있다. 여성이 이 끈을 끊어버리면, 남성은 죽음에 대해 자유롭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신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에 의해 남성은 새롭게 태어나고 바뀌게 된다. 그리고 연인이 남성을,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 떼어놓듯이, 여성은 남성을, 문자 그대로 어머니 대지로부터 떼어낸다. 이 여성이야말로 자연의 신비로부터 직조된 탯줄을 끊을 수 있는 산파인 것이다(Ibid., 62).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7. 인간발생


서양철학의 인간학 기계에 관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독해의 잠정적 결과들을 테제의 형태로 진술해보려 노력하자.

 

1. 인간발생[인류창생]Anthropogenesis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틈새/중간휴지/균열caesura와 분절articulation의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다. 이 중간휴지caesura는 무엇보다 우선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2. 존재론 혹은 제일철학은 [인간과 가축에] 무해한 학문분과가 아니라 인간발생, 즉 생명 존재living being의 인간-되기가 실현되는, 모든 의미에서 근본적인 조작이다. 당초부터 형이상학은 이런 전략에 사로잡혀 있었다. , 형이상학은 인간적 역사의 방향으로 동물적 퓌시스의 극복을 완성하고 보존하는 메타와 관련되어 있다[형이상학은 바로 동물의 자연을 인간의 역사로 지양하고 온존시키는 메타와 관련되어 있다]. 이 극복[지양]은 한꺼번에 완성된 사건event이 아니며, 오히려 항상 진행 중인 사건occurrence이며, 매 시간마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 있어서[이것이야말로 끊임없이 개개인 각자에게 있어서] 인간과 동물, 자연과 역사,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결정한다.

3. 하지만 존재, 세계, 열림은 동물적 환경 및 생명과 관련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생명과 비교해 봐도, 이것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 이것들은 생명 존재living being가 자신을 억제 해제하는 것과 맺는 관계의 중단과 포획[교착]capture에 다름 아니다. 열림은 열려 있지 않은 동물의 포착grasping[보충]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동물성을 중지시키고, 이런 식으로 생명이 예외의 지대에서 포획되고 내버려지게 되는[추방되는](ab-bandonata) ‘자유롭고 공허한지대를 연다.

4. 동물적 생명을 중지시키고 포획함으로써만 세계가 인간에게 열려지기 때문에, 존재는 항상 이미 무에 의해 가로질러져 있다. ‘열림(Lichtung)’은 항상 이미 무화(Nichtung)’이다.

5. 우리 [현대] 문화에서 모든 다른 갈등을 다스리는 결정적인 정치적 갈등은 인간의 동물성과 인간성 사이의 갈등이다. 말하자면 서구의 정치는 그 기원에 있어서 또한 생명정치이다.

6. 인간학 기계가 인간의 역사적으로 되기의 동력이었다고 한다면, 철학의 종언과 존재의 획기적인 이정표의 완성[시대에 좌우되는 존재목적의 완수]은 오늘날 기계가 공회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두 개의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a) 포스트-역사적[역사 이후의] 인간은 자신의 동물성을 탈은폐될 수 없는[열리지 않는] 것으로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테크놀로지에 입각해 그것을 채용하고 다스리려 한다[그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한다]. (b) 존재의 목자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은폐성, 자기 자신의 동물성을 고유화하는데[제 것으로 삼는데, 수탈.징발하는데], 이것은 감춰진 채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지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것 자체로서, 순수한 내던져짐으로서 사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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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6. 동물화

인간이라는 동물에는 자신의 동류를 가축으로 하는 자도 있다
[인간은 동물로, 그 중 몇몇은 자신의 고유한 종류들을 키워낸다]
.

피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하이데거는 정치공동체은폐성과 비은폐성, 인간의 동물성(animalitas)’인간성(humanitas)’ 사이의 갈등이 군림하는 천개(天蓋, polos) 라는 장소가 여전히 실천 가능한 장소였다고 선의의 믿음을 갖고 믿은 아마도 최후의 철학자였다. ‘폴리스라는 위험한 장소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인간이, 하나의 인민[민족]이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적 숙명destiny을 발견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 의심과 모순[어긋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지점까지는, 하이데거는 인간학 기계가 인간과 동물, 열림과 열리지-않음 사이의 갈등을 매번 결단하고 재합성[재편]함으로써 하나의 인민[민족]에게 있어서 역사와 운명destiny을 여전히 산출할 수 있다고 믿은 최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는 자신의 오류를 깨달은 것 같으며, 존재의 역사적 사명mission[기투]에 응답한 결단이 어디에서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 것 같다. 이미 1934-35년의 횔덜린에 관한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역사성의 근본적인 감정적 어조를 환기시키려고 시도하는데, 여기서 그는 이렇게 쓴다. “한 인민[민족]의 역사적 실존의 거대한 두절[흔들려 움직임]disruption[탈은폐되지 않은 어떤 것에 동물이 노출되는 것을 기술하는 똑같은 용어인 Erschütterung]의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사원들, 이미지들, 의복들은 한 인민[민족]의 역사적 소명을 새로운 과제[사명]로 강제할[충동질할] 수 있기 위해서 이런 소명을 더 이상 취할 수 없다”(Heidegger 1980, 99).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이후(post-history)는 종결된 형이상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이데거가 이런 말을 한 것에서부터] 거의 70년의 거리가 있는 오늘날, 인간이 취할[맡을] 수 있는, 혹은 심지어 인간에게 그저 할당될 수 있을 뿐인 역사적 과제[사명]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완벽하게 불성실한 자들이 아닌 한에서는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유럽의 국민국가가 더 이상 역사적 과제[사명]를 취할[맡을] 수 없고, 인민들 자신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언젠가는 사라지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1차 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이미 명백했다. 만일 우리가 20세기의 전체주의를 19세기의 국민국가의 최후의 거대한 과제[사명]의 지속으로만, 즉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로만 인식할 뿐이라면, 우리는 20세기의 거대한 전체주의적 실험들의 본성을 완벽하게 오해한 것이다. [20세기의 전체주의적 경험들에서] 관건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훨씬 더 과격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민이라는 현사실적인factical 실존 자체, 즉 최종 분석에서는 인민의 벌거벗은 생명을 과제[사명]로 취하는[떠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은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코제브적인 관념과는 정말로 다른 얼굴[양상]을 구성한다. , 이제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텔로스[목적, 결말]에 도달하며, 또 다시 동물이 된 인류humanity에게는 오이코노미아를 무조건적으로 펼치는 것에 입각해서, 혹은 생물학적 생명 자체를 최고의 정치적 (혹은 오히려 비정치적impolitical) 과제로 취하는 것에 입각해서 인간 사회들을 탈정치화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런 아포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들과 인민들의 주변과 이들 가운데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그 어떤 본질이나 정체성도 갖고 있지 못한 이른바 이들의 비본질성과 비활동성(inoperosità)에 넘겨져버린 인간들과 인민들이 도처에서 더듬어가면서, 철저한 위조gross falsifications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상속inheritance과 과제[사명], 과제[사명]로서의 상속을 더듬어가면서 추구하는 광경을 말이다. 심지어 경제의 승리라는 이름으로 (국내외의 경찰이라는 단순한 기능으로 환원된) 모든 역사적 과제[사명]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포기하는 것마저도 오늘날은 종종 너무 강조[과장]된다. 여기서는 자연적 생명 자체와 그 행복이 마치 인류의 마지막 역사적 과제[사명]인 것처럼 실제로 과제[사명]’에 대해 여기서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보이는 듯하다.

전통적인 역사의 잠재성들(potentia) , 종교, 철학 은 헤겔-코제브의 관점에서도 하이데거의 관점에서도 모두 인민들의 역사적-정치적인 운명destiny을 각성시킨[깨어있게 한] 것이었으나, 얼마 전부터 문화적 스펙터클과 사적 체험으로 변형됐으며, 모든 역사적 효력을 잃어버렸다. 이런 침식과 접했을 때, 얼마간의 진지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듯한 유일한 과제[사명]는 생물학적 생명, 즉 인간의 동물성 자체를 짊어진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는 가정이다. 게놈, 전지구적 경제, 인도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역사-이후의 인류가 자신들의 생리학을 그 최후의, 비정치적인 위탁mandate으로서 취하는[떠맡는] 듯이 보이는 이 과정의 세 가지 통일된 얼굴[국면들]이다.

자기 자신의 동물성에 대한 총체적 관리를 자신에게 위탁하는 인류가, 인간학 기계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매번 결단(분담)de-ciding으로써 산출한 인류(humanitas)’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인간적인지 여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또한 더 이상 인간이라거나 동물이라고 인정될 수 없는 한 생명의 행복이 충족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지 여부도 분명하지 않다. 확실히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인류는 동물의 비탈은폐된 것[탈은폐되어 있지 않은 것]에 스스로를 연 채로 유지하는 형식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영역[분야]에서 열리지-않은-것을 열고 확보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 더불어 인류는 자신의 열림에 스스로를 닫어두고, 자신의 인간성(humanitas)’을 망각하며, 존재를 자신의 특정한 억제 해제하는 것으로 만든다[변모시킨다]. 동물의 총체적 인간화는 인간의 총체적 동물화와 일치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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