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2/3) (3/3)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3/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3. 야먀모토 준(山本潤)의 논평


 제 전공은 독일중세문학으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는 제임스 조이스나 나쓰메 소세키의 텍스트와는 달리, 데리다의 것과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테네브 선생님의 강연과 그 주제가 되는 고양이에 관해서, 중세연구자로서의 시선에서 코멘트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 대해서인데요, ‘고양이라고 했을 경우,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개체적 존재로서의 고양이가 존재하는 동시에, 그 배후에는 고양이가 표상하는 이미지의 확대[펼쳐짐]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느냐가 문제 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양이를 보면서 그것에 관련시켜 떠올리는 것은, 보고 있는 주체의 문화적 배경에 의거하며, 또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방금 소세키의 고양이와 데리다의 고양이가 화제가 됐습니다만, 소세키와 데리다가 갖고 있는 문화적 배경은 당연히 다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인식하는 고양이는 저절로 다른 것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유럽 그리고 특히 중세에서 고양이’, 심지어 동물에 관한 인식이 무엇이었는지를 간단하게 코멘트하고 싶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동물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선 경험적 관찰과 그 후의 생물학적 파악이라는 관점에 의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중세에는 이런 관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전고대에는,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박물지[Historia Animalium, 동물지] , 경험적 관찰로부터 동물의 생태를 밝히려고 한 시도도 있었지만, 그런 저작은 중세 유럽에는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동물에 대한 지식들이란, 결코 자기 목적적으로 추구되는, 즉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의 파악을 최종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반드시 신의 세계 창조와 신의 세계 구원 계획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중세 사람들이 동물 속에서 읽어냈던 것은, 세계에 대한 신의 시선이며, 동물은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미디어[매개물]였던 것입니다. 동물이라는, 인간과는 의사소통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를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가는, 신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인간과 동물을 그 속에서 어떻게 위치시키는가, 그리고 그런 것을 존재시키는 세계를 어떤 것으로서 인식했는가에 연결됩니다. 이 배경을 이루는 것이, 모든 존재는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동물에 관한 이해는, 동물 우화담의 형식으로 중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전해졌습니다. 옛날에는 2세기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피지오로고스[자연학자]는 다양한 동물이나 광물의 특성을 소개하면서, 그것에 기독교적인 맥락을 주는 것이며, 중세에 이르기까지 범유럽적으로 수용되며, 기독교의 포교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책 등의 영향 아래에서 동물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이 수립됐기에, 중세에서의 동물 이해는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은 죄다 기독교적인 세계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럽 전역이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들어간 것은 대략 10세기 무렵으로 보입니다만, 그때까지 축적된 비기독교적인 동물 이해라는 것도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다름 아닌 동물의 종으로서의 고양이는 이집트 기원으로 생각됐으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래 고양이는 바스테트(Bastet) 신의 성스러운 짐승[인간을 재앙으로부터 지키는 짐승]으로서, 또한 새끼가 많다는 등의 특징 때문에, 풍요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고양이는 아마도 켈트족을 통해서 이집트나 중동으로부터, 즉 유럽의 외부로부터 초래된 동물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미 집고양이로서 고양이는 유럽인의 생활에 결부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고양이는 풍요나 다산의 상징성이 계승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해로운 짐승으로 간주된 쥐를 잡는 등 인간에게 유용한, 긍정적인 존재로 인식됐습니다. 또한 중세 초기에도 각지의 궁정에서 애완동물로서 키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런 고양이는 유럽에는 원래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보다 훨씬 더 시간축을 거슬러 올라간 고대에 탄생한 신화를 살펴보면, 적어도 게르만 계열의 신화에는 고양이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된 고양이는 북유럽 신화의 여신 프레야(Freya)가 타는 수레를 끄는 살쾡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살쾡이는 집고양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이런 세속인들의 긍정적인 인식과는 정반대로, 기독교 교회는 고양이가 야행성이고, 바로 고양이눈빛의 발신원이 된 어둠에서 빛나는 을 마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고양이를 악마와 결부시켜 생각될 수 있는 존재로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상징론(symbolism)에서는, ‘고양이한테는 쥐의 모습을 한 인간의 영혼을 쫓아다니는 악마로서의 의미가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고양이, 악마와 결부시켜 생각되는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존재로서의 고양이라는, 상반된 고양이에 대한 시선이 중세에는 병존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 관한 인식은 점차 후자, 즉 교회의 견해를 따른, 부정적인 것으로 통합되어 버렸습니다. 그 한 가지 계기가 된 것은 13세기의 설교자 레겐스부르크의 베르홀트(Berthold von Regensburg)에 의한, ‘이단자의 상징으로서의 고양이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렇게 비판할 때 베르홀트가 사용한 논리는, 어원적 결부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 베르홀트는, 중세 독일어에서의 이단자 ketzer’고양이 katze’를 어원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이단자고양이를 동질적인 것으로 제시한 거죠. 중세 독일어의 ‘ketzer’는 라틴어의 가타리파 cathari’에서 유래했고, 이 시점에서 이미 때때로 고양이 cattus’와 관련시키게 됩니다만, 이것은 순수하게 어원학적 견지에서 보면,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전성기 이후 고양이이단자와 연관 속에 놓이게 됐습니다. 게다가 베르홀트는 이 시기에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유행을, ‘고양이의 숨결의 확산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양이는 중세 초기의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로부터, ‘악마의 화신, ‘해로운 짐승으로 변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성이 극에 도달한 것이, 마녀가 키우는 마()로서의 고양이파악입니다. 마녀 사냥을 할 때, 마녀 혐의를 받은 인간과 함께 고양이도 고문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이전의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로서의 고양이로부터도 이교도의 성스러운 짐승으로서의 고양이’, 그리고 기독교적 견지로부터의 악마와 결부되는 고양이그런 다양한 고양이의 이미지를 유럽의 문화전통은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 데리다의 사고의 배후에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데리다가 욕실에서 고양이를 봤을 때, 그에게 찾아온 감각의 배후에는, 그런 유럽의 문화적 깊이, 문화의 기억의 존재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논점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역시 왜 데리다의 고양이는 암고양이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까부터 화제로 삼고 있는 유럽의 문화전통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속에, 자발적으로 얘기하는’, 즉 발언자로서의 고양이는 대체로 암고양이입니다. 일례로, 독일 후기 낭만파의 작가 E. T. A. 호프만의 소설 암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의 무르를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말하면, 그가 서 있는 문화적 위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만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암고양이입니다. 이런 관찰로부터는, 문화적 표상으로서의 고양이에 있어서의 성()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과연 데리다는 기르던 고양이가 만약 숫고양이였다면, 그에게 수치의 감정은 생겨났을까요?

고양이의 성을 생각하는 하나의 재료를 다시 중세 유럽에서 찾고 싶습니다. 중세에서, 숫고양이와 암고양이는 어떤 것으로 인식됐을까요? 일괄해서 고양이내로 통합되었는가, 아니면 수컷암컷이라는 성차(性差)에 근거하여 각각 다른 것으로 파악되었을까요? 그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시인[詩作] 활동을 한 데어 슈트리커(Der Stricker)라는 시인입니다. 그는 여러 장르에 걸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요, 그 일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동물우화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숫고양이암고양이각각을 주역 또는 주제로 하는 단편이 있습니다. ‘숫고양이의 이야기는 숫고양이와 암여우의 대화라는 형태로 적혀 있으며, 그 안에서는 숫고양이의 오만함이 주제가 되는데요, 이 숫고양이는 스스로 소리를 내는 주체, ‘이야기의 주체입니다. 반면 암고양이에 관한 단편은 교훈담이며, 거기서의 암고양이는 부정(不貞[순결하지 않음])’의 상징으로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만 숫고양이의 경우와는 달리, 거기서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작품의 화자이며, 암고양이는 얘기되는 대상, 즉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며, 자발적으로 얘기하는주체가 아닙니다. 이 예는, 중세에서 고양이는 성차에 따라 전혀 상이한 모두 부정적인 존재라는 공통항은 있지만 파악이 이뤄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 중세의 여성 신비가 힐데가르트 폰 빈겐(Hildegard von Bingen)은 저작 󰡔동물에 대해󰡕에서 고양이를 언급했습니다. 수녀원의 원장이며, 또한 의학·약학에도 정통하고 작곡까지도 한, 중세 유럽의 유수의 슬기로운 여성으로 일컬어진 힐데가르트가 고양이에 대해 말한 서술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고양이에 대해서, “고양이는 체액 때문에 따듯하다기보다는 차가운 존재이다. 그리고 나쁜 체액을 갖고 있어서, 공기의 정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공기의 정령도 고양이를 겁내지 않는다. 개구리나 뱀과 친근성이 있다. 그리고 마르고 차가운 자신의 성질 때문에 여름의 더위에 시달리면, 그 차가운 체액 때문에 개구리나 뱀의 체액을 핥으며,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그런 체액 때문에 그 살덩어리는 독성을 가진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상으로 독일 중세를 중심으로, 유럽의 문화 전통 속에서의 고양이에 대한 다양한 파악을 소개했습니다. 유럽인의 고양이에 대한 시선의 문화적 배경의 일단을 전달하고 고양이에 관한 텍스트에 대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었다면 다행입니다.

山本潤首都大学東京准教授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2/3)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2/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2. 미나미타니 요시미(南谷奉良)의 응답


 이번에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 번역을 담당한 미나미타니입니다. 전공분야는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인스로, 현재는 근대적 동물‘(modern animals)이라는 관점에서 조이스의 텍스트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셨을지 모르겠는데요, 이번 번역 작업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학부생도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은 조이스와 관련시켜 코멘트를 하는 것이기에, 율리시즈를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알 수 있게끔, “3분만에 알 수 있는 율리시즈의 복잡함이라는 얘기를 생각해 봤습니다. 원하신다면 그 설명으로,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에 대한 비판을 대체하고 싶습니다. 율리시즈의 복잡함이 제대로 반영되고 있느냐는 비판입니다.

 

우선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싶은데요, 저릂 봐주시겠습니까? 어떤 비유를 도입하고 싶은데요, 우선 [율리시즈의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이 책의 페이지를 비유적으로 대지라고 생각하고, ‘대지위에 문자가 심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대지위의 문자에 의해, 1904616일의 더블린에서 일어난 사건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거나 쇼핑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 등, 각각은 뭐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더블린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하 세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율리시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밑바탕으로 하며, 그것이 모종의 지층으로서 지상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조이스 연구에서는 이런 신화적 대응을 호메릭 패러렐[homeric parrels, 호메로스적 평행]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각각, 블룸과 스티븐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에 대응하며,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말, 플롯이나 모티프가 영양의 공급원이 되어 지상의 문자에 들여오게 됩니다.

그리고 오뒷세이아아래에는, 무수한 문학이나 예술, 역사적 담론 등의 뿌리가 퍼져 있는 인터-텍스추얼리티의 지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야기 속에서 스티븐에게 빛이 있었을 때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맥베스가 지상을 향해 뿌리를 뻗고,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의 뿌리와 얽히면서, 대지의 문자에 의미나 이미지를 보급합니다. 이 두 개의 지층이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율리시즈의 지하 구조입니다.

더욱이 율리시즈를 복잡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야기의 뿌리가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소설을 생각할 때에는, 가령 화자에 의한 땅의 글과 등장인물의 말(직접화법과 간접화법)로 이루어져 있는 19세기적인 소설이 상기됩니다만, 율리시즈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 ‘인터-텍스추얼리티의 지층을 설명했습니다만, 더욱이 그 밑에는 세 층의 이야기의 지층이 잠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 등장인물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화자의 지층이 있습니다. 소설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서술하고 정리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화자를 상상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결코 굳건한 화자[이야기꾼]가 아닙니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등장인물과 연관지어 찰스 삼촌의 원리라고 불리는 것인데요, 화자가 사용하는 어구가 반드시 그 화자의 어휘인 것은 아니고, 어떤 때에는 얘기의 진행에 있어서 조명을 받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그런 어구라든가, 그들의 사고언어에서 생길 수 있는 통사법(syntax)을 지상의 글에 반영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화자는 또한 등장인물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말을 내적 독백으로서 그대로 지표에 토해내거나, 혹은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하자면 지하수로서 억압하기도 합니다.

이미 충분히 복잡한데요, 이 이야기의 지층의 가장 바깥쪽에 어레인저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등장인물도 화자도 작자도 아니고, 율리시즈라는 출판물이 가진 문자정보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데리다도 율리시즈 그라모폰에서 비슷한 것을 말합니다만, 율리시즈의 텍스트에는 막대한 참조관계와 잠재적 인과관계에 의한 그물망 조직이 퍼져 있습니다. 어레인저는 그 복잡한 그물망 조직의 특정한 부분을 부각시킴으로써, 독해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삽화에 나오는 말이, 다른 삽화에 나오는 말과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거나, 어떤 장면에서 수백 쪽 떨어진 앞의 대목을 예시적으로 문자 속에 반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외부로부터의 노골적인 조작이 있기에, 우리 독자는 페이지 사이나 삽화 사이의 복잡하게 뒤얽힘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마지막인데요, 텍스트의 최하층에는 작가 조이스의 지층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 작가가 자신의 전기적 기반을 연동시켜 지표로 영양분을 보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금 편의적으로 지층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는데요, 명확한 서열이 있거나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율리시즈라는 텍스트 아래에는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 ‘인터 텍스추얼리티의 지층, ‘작가 율리시즈라는 지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율리시즈의 복잡함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결론입니다. 이런 복수의 지층들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뿌리가 서로 얽힌 결과가, 대지위의 문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를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고구마 뿌리는 아니지만 바로 지하로부터 줄줄이 뽑히게 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조이스 연구에서는 이런 뿌리를 아주 민감하게 다룹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나 글을 인용하고 다른 대지로 이식할 때, 우리는 그 문자의 뿌리에 붙어 있는 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인용합니다. 이른바 신경을 그 뿌리와 동화시키는 것 마냥, 신중한 손놀림으로 빼내는 것을 능사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로 눈을 돌리면,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서는, 이 복잡한 뿌리가 끊기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게 제 비판입니다. 구체적인 비판 대목인데요, 테네브 선생님은 고양이가 발화하는 므크그나오(Mkgnao)’, ‘므르크그나오(Mrkgnao)’, ‘므크르크그나오(Mkrkgnao)’에 관해서, “조이스는 인간에게는 거의 발음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블룸의 고양이는 의인법으로 묘사되는 고양이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율리시즈의 복잡성에서 보면, 그것은 과연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저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객관주의적으로 재현된 목소리인가? 도대체 누가 적은 말인지, 이것들이 중요한 해석 요건입니다.

고양이의 발화 ‘Mkgnao!’를 문자 그대로 하면 무슨 말인가? 우선 고양이는 자주 일본어의 표기처럼 ~’하고는 울지 않죠. 그런 게 아니고, [고양이의 울음소리 흉내를 내고] ‘*****’이라고 울죠?(웃음) 그렇지만 그 소리를 문자로 적는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인간의 언어의 변별 음소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편의상 ‘Mkgnao!’라고 음을 들어맞게 해서 모방적으로 고양이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Mkgnao!’라는 음소를 선택해서, 이 대지 위에 옮겨 적는 것인가? 이것에 답하려면, 앞서 설명한 복잡한 이야기의 뿌리에 의한 해석이 필요해집니다.

원문을 재확인해보면, 블룸이 직접화법으로 Milk for the pussens, he said.”라고 하며, “, 우유를 줄께라고 고양이한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혹은 응답같은 것으로서, “Mkgnao!, the cat cried.”와 고양이의 이 묘사됩니다. , ‘Mkgnao!’는 일차적으로는 약간 철자는 다르지만 밀크’(Milk)를 달라고 조르는 고양이의 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Mkgnao!’라고 적고 있는 것은 블룸일 수 없습니다. 블룸의 의식을 통한 고양이의 말을, 화자나 어레인저‘Mkgnao!’라는 문자로 적는 것입니다.

타이핑을 해야 한다(타이포그래피컬)는 이유 때문에 ‘Mkgnao!’밀크를 원해를 의미한다고 암시되었을 때, 독자는 어레인저에 의해 다른 삽화로 초대된다는 것이 판명합니다. 어레인저는 독자의 주의를 밀크에 걸게 함으로써, 첫 번째 삽화의 마테로 탑의 옥상에서 마라카이 말리건이 휘저어 뒤섞인 면도용 흰 액체를, 게다가 마테로 탑에서 마시는 밀크[우유]를 상기시킴으로써, 첫 번째 삽화와 네 번째 삽화가 서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특히 고양이의 발화가 ‘Mrkrgnao!’이 됐을 때 명확해졌는데요, 이곳에는 호메릭 패러렐(homeric parallels)’의 지층이 영향을 미쳤으며, (마라카이 말리건에게 부여되는 신화적 대응의 속성으로서) 상인이나 도둑의 비호자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철자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삽화에서 블룸은 고양이가 생각하고 있을 법한 것을, “Prr. Scratch my head. Prr.”(“[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며] 프르르. 내 머리를 긁어 달라고. 프르르.”)라고 대변하는 것처럼, 그 고양이에게 말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직접 화법의 므크그나오’(Mkgnao!) ‘므르크그나오’(Mrkgnao!) ‘므르크라그나오’(Mrkrgnao!)의 발화도 그렇고, 고양이의 로 간주된 발화는 모두 인간중심적으로 들리며, 인간중심적으로 적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블룸의 고양이는 그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라는 결론은 끌어내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삽화로 뻗고 있는 뿌리가 잘라져버린 것은 아닌가, 이것이 제 비판입니다.

또한 율리시즈의 복잡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블룸의 발언의 근본에 연결된 동물론의 계보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블룸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에 대해 이 녀석들은 인간이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 녀석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녀석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대목은 몽테뉴의 저작에서 인용한 것임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과 인간의 동등성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웬만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도 또한, 대체로 비슷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끼리 완전히 흡족한 의사소통이 존재하고, 게다가 같은 종류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 사이에서도 상호 이해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宮下志郎 訳, レーモン・スボンの弁護, 白水社, 2010).

 

일찍이 16세기의 시점에서 몽테뉴는 인간과 동물의 서열이나 인간에게 특유하다고 간주되는 역능에 회의의 시선을 보내고, 동물에게 뛰어난 추론·공감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블룸이 몽테뉴를 인용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가축업자로서 일했던 경험도 있으며,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 전반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육·수송·도살·정육이라는 과정에 있어서 동물들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고려하고, 거리에서 보이는 동물의 보건소 시설 “Dogs’ home”(“더블린 동물학대 방지 협회가 운영하는 유기견이나 유기 고양이를 관리하는 시설)에 의식을 기울이는 등, 블룸은 동물의 고통을 하나의 중요한 근대적 사회문제로서 파악했습니다.

블룸이 생각하는 동물의 고통이라는 문제가 의식적인 운동에 끌어들여지게 된 것은, 그것이 기독교의 자선정신과 합류한 19세기 초반부터입니다. 사실 율리시즈가 간행된 1922년부터 100년 전인 1822년에는, 최초의 동물법인 마틴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법안을 제기한 아일랜드의 하원의원인 리처드 마틴에게서 따온 통칭입니다만, 이 법이 기본적인 원안이 되어, 이후, 세계 각국으로 근대적인 동물법으로 수출됩니다. 블룸과 고양이의 주고받기를 볼 때에는, 이런 19세기적인 동물론의 수맥도 동시에 사정거리에 넣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南谷奉良一橋大学博士課程)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마지막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년

‘마지막 유대인’

: 데리다, 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最後のユダヤ人」 : デリダ, ユダヤ教とアブラハム的なもの

URL http://hdl.handle.net/10748/7043

Gisèle Berkman, «ʻLe dernier des juifsʼ : Derrida, le judaïsme et lʼabrahamique», Colloque international «Commemorating the10th Anniversary of Jacques Derridaʼs Death», Shanghai Jiao Tong University, le 27 septembre 2014.

지젤 베르크만

(일역 : 佐藤香織 , 首都大学東京非常勤講師)


** 일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또한 프랑스어 원문과 대조하지 않았다. 


 데리다가 세상을 뜬지 10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살아남기[생존]라는 놀라운 현상에 의해 그의 텍스트가 우리 곁에 도래하고 있는지도 10년이 되려고 한다. 마치 지하납골당〔크립트〕에서 텍스트가 팩스로 보내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저 지하납골당에서 데리다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데리다의 매장을 위해 리스-오랑지스(Ris-Orangis)의 묘지에 갔을 때, 스스로를 “마지막 유대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의 매장은, 유대인의 의식에 입각해 치러질까라고 자문한 적이 있음을 떠올린다. 그것은 10월의 구슬픈 맑은 날이었다. 매장은 유대식이 아니었다. 브누아 페타스의 전기에는, 비유대인인 아내 마르그리트가 사후에 그와 다시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데리다는 유대인 구역에 묻히기를 거부했다고 한다.1) 여기서 보이는 것은, 그의 사고에 따라다녔을 유대성〔judéité〕에 대한, 유대적 조건에 대한 불충실한 충실성〔fidélité infidèle〕에 관한 좋은 예이다. 유대적 조건이라는 문제가 담긴 이런 유산을, 그는 점차 자신의 에크리튀르와 사고의 중심에 두게 됐다. 여기서는 주제 이상의 것이 있으며, 그것은 그의 평생 동안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중심적 동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기보다 더 크다. 그것은 충동이며, 아물지 않는 상처이기도 하며, 중심적 외상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자신을 ‘마지막 유대인〔dernier des juifs〕’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했으며, ‘아랍의 유대인’, 자칭 마라노2)였다. 이런 조건, 혹은 오히려 (인질이란 무조건이라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유대적 무조건은, 폭로되어 있는 동시에 비밀이기도 한 그의 사고의 동인이 됐다. 모리스 블랑쇼는 『끝없는 대화』의 「유대인이라는 것」이라는 장에서, “선택〔élection〕이란 변양이다”3)라고 썼다. 데리다는 블랑쇼와 매우 가까웠기에, 이런 표현 방법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시정권의 반유대적인 법의 이름으로 1942년에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데리다는 수탈〔収奪, expropriation : 탈고유화〕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할례고백』에서 그가 말하듯이, 그것은 창설적인 사건이었다. “1942년, 벤 아크눈 고등학교에서 피부색이 까맣고 작고 아주 아랍적인 유대인이 쫓겨났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부모도 친구들도 그 누구도, 그에게 그 이유를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4)

 탈구축은 뿌리 뽑음〔déracinement〕, 이화〔異化, dissimilation〕, 그리고 추방〔exil〕이라는 이 경험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아낸 것일까? 이런 경험은 유대성〔judaïté〕과 역사적인 파국 ― 유대성이 위태롭게 사라져 없어지게 할 정도의 파국 ― 의 비할 데 없는 경험에 다름 아니다. 데리다는 합일적이고 공동체적인 모든 융합에 항상 비판적이며(이 점에 관해서는 『우정의 정치』를 다시 읽어주기 바란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정세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결코 자신의 유대성을 부인하지 않았고, 몇몇 상황에서는, 2004년에 장 비른바움(Jean Birnbaum)과 한 마지막 대담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 유대인〔nous,les juifs〕”이라고 말하는 데 이르렀다.


우선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확실히 ‘우리’라고 말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는데요, ‘우리’라고 말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저는 모든 문제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며, 그 필두로, 이스라엘과 모종의 시오니즘의, 파멸적이고 자살적인 정책이 있습니다…만, 이 정도의 문제가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문제를 저는 제 ‘유대성’에 대해서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제가 제 ‘유대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죠. 몇 가지 상황에서는, 저는 항상, ‘우리 유대인’이라고 말하죠. 이렇게 못살게 들볶이는 ‘우리’는, 제 사고 속에 있는, 더없이 불안한 것의 핵심에 있습니다. 그것〔그의 사고〕은 제가 거의 농담을 말할 생각도 없이, ‘마지막이자 최저의 유대인’이라고 별명을 붙인 자의 사고입니다. 그것은, 제 사고 속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심원하게도 기도〔eukhé〕에 대해 말한 것도 해당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원래 문자 그대로, 기도입니다. 몇 가지 상황에서는, 그러니까, 저는 ‘우리 유대인’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프랑스인’이라고 말하는 것도.5)


「유대성」이라는 제목의 회의에서 행해진 「아브라함, 또 한 명의」라는 멋진 강연에서, 데리다는 그의 인생의 ‘이론적 뼈대’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것의 독해에 매달렸다. 그가 보여준 것은, 어떻게 해서 유대성의 경험은, 뗄 수 없는 대립하는 수많은 조합 ― 그것은 불충실의 충실함이라는 아포리아의 모든 것이다 ― 사이에서 항상 그를 옥죔으로써, 그에게 다양한 구별을 불가능 혹은 비정통적인 것으로 만드냐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이런 것이 “탈구축뿐만 아니라, 계산할 수 없는 것의 내구력에 노출된 결정의 윤리를 수립하는 것, 아포리아로 운명지어지고 바쳐진 결정으로서의, 내 안의 타자의 결정으로서 내가 결정한다는 법에 노출된 결정의 윤리를 수립하는 것”6)으로 등을 떠밀렸다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유대성에 관한 엘리자베스 웨버와의 대담을 인용한다면, “… 제가 할 수 있는 것, 말할 것의 모든 것 속에서, ‘물론 저는 유대인입니다’와 ‘물론 저는 유대인이 아닙니다’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곧바로 부인에 들어섭니다 ―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의 모든 것 속에, 유대적 조건이라는 조금 어설픈 동시에 아이러니한 방식에서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7)

 유대성의 경험은 탈구축의 요인일까? 불가능한 것, 아포리아, 이중구속, 무한한 분할 가능성, 산종 ― 이런 사고의 행동이 모두 유대성의 경험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이 가설은 아직은 너무 단순하다. 그리고 아마, 이 가설은, 유대교성과 유대성 사이에 위치하는 간극 속에 있다. 여기서 거론되는 유용한 구별은, 역사가 〔요셉 하임〕 예루살레미(Yosef Hayim Yerushalmi)가 유대문화 및 종교로서의 유대교성〔judaïté〕과, 반드시 종교적이지는 않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의 경험으로서의 유대성〔judéité〕 사이에 설정된 것이다.

 처음에, 나는 유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데리다의 사상의 진전을 확인하는 데 매달렸다. 유대성은 처음에는 외적인 동기였으나, 1인칭의 에크리튀르의 동인이 되며, 전대미문의 개념들의 제조소가 됐다. 거기서 “후기 데리다”에 의한 정치적 관심이 말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이렇게 질문을 제기했다. 장-뤽 낭시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탈구축에 착수한 것과 똑같이, 데리다는 유대교의 탈구축을 시도한 것일까? 이 질문에 의해, 나는 데리다가 “아브라함적인 것”이라고 명명한 것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데리다는 몇 번이나 전시의 반유대주의 및 알제리의 벤 아쿠눈 고등학교로부터의 퇴학이 그에게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되돌아갔다. 그는 이로부터 자신에 대한 이타성[타자성]의 경험을 끌어냈다. 이타성의 경험은 정체성에 관한 권리 요구에서부터 가장 멀리 위치해 있다 ― 이런 정체성의 권리 요구는 프랑스에서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의 엄밀하게 동일적인 발상을 둘러싼 장-클로드 밀레르나 베니 레비의 저작에서 발견된다.8) 다만, 데리다는 유대교성을 다루는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유대성으로 향한다.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런 텍스트들은 주로 『에크리튀르와 차이』에 수록되어 있으며, 레비나스, 블랑쇼, 자베스 같은 중개자의 독해가 그에게 가져온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폭력과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으로 레비나스를 다룬 멋진 논고〔잡지 초출은 1964년〕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말하기를, 뿌리 깊은 관념론의 공범자인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 대해 레비나스가 겨눈 비판에 싸움을 건다. 그러나 『그라마톨로지에 대해』(1967년) 이후, 그 자신이 “현전과 로고스중심주의의 형이상학에 관한 하이데거적 상황의 양의성”9)을 비판하면서, 하이데거의 사고는 아직 뿌리 깊이 현전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마치 레비나스의 독해가 데리다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고, 데리다 자신이 “그리스적 로고스에 의한 포위의 무한한 힘”이라고 나타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도우려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우선 레비나스에서 유대사상가만을 보기를 거부한다. 「폭력과 형이상학」이 묻는 것은 레비나스에게서의 그리스적 및 유대적 유산의 각각이다. 레비나스의 사고는 철학을 그 고유한 경계의 너머로, 전적으로 다른 것의 극한인 윤리적 극한으로 이끈다. 『율리시즈』에서의 조이스의 유명한 말, “유대-그리스인은 그리스-유대인이다[Jewgreek is greekjew]”를 인용하면서 데리다는 자문한다. “우리는 유대인일까? 우리는 그리스인일까? 우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 차이가 아마, 역사라고 불리는 것의 통일성이다.”10) 당초 『비평(Critique)』지에 발표된, 레비나스론과 동시기의 논문 「에드몽 자베스와 책의 물음」은 “에크리튀르의 탄생과 정념=수난(passion)”11)으로서의 유대교라는 착상[아이디어]을 발전시킨다. 이 아이디어에 새겨져 있는 것은, 데리다의 유대교성에 대한 진정한 중개자로 볼 수 있는 모리스 블랑쇼에 의한 독해의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이다. 데리다는 각주에서 “중요한 연구들 중” 1964년 5월의 『신프랑스평론(NRF)』지에 발표되고, 블랑쇼에 의해 『끝없는 대화』에 「중단 : 리만 평면 위에서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그리고 『우정』에 부분적으로 재수록되는 블랑쇼의 논문 「중단」을 인용한다. 데리다의 이 논문에는, 작가가 후퇴하는 것[retrait]이나 전적으로 다른 것의 정념=수난으로서의 유대성에 대한, 블랑쇼에 의한 성찰의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에크리튀르의 정념=수난, 문자의 사랑과 인내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유대인>이 그 주어인지 <문자> 그 자체가 그 주어인지를 말할 수 없다”12)고 데리다는 적는다. 또한 모세에 의해 부서지고, 이어서 신이 다시 준, 율법이 적힌 석판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에크리튀르는 기원에 있어서는 봉인된 제2의 것이다.”13) 블랑쇼에 관해 말하면, 『피안으로의 행보』부터 『끝없는 대화』를 거쳐 『재앙의 에크리튀르』로, 그리고 1990년의 『철학잡지』 데리다 특별호에 실린 「자크 데리다 덕분에(자크 데리다에게 감사를)」에 이르기까지, 그는 부서진 석판이라는 일화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했다.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보자. 자신의 사고의 길 그 자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것과 고유화의 탈구축으로 데리다가 전진할수록, 그의 언어는 특이한 관용어Idiom)를 점점 더 가다듬어 가는데, 그것은 이른바 유대적 원천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이다. 『조종』이나 『할례고백』의 말은, 교배하고[혼성화되고] ‘마라노화한’ 이타성의 요소가 보태져 변양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전회는 1970년대 『조종』과 함께 생겨난다. 다단(多段)을 사용한 이 책의 레이아웃은 탈무드의 그것을 연상시키지만, 이 책과 함께 데리다의 유대교성에 대한 특이한 관계가 깊어진다. 이 책이 헤겔과 주네14)를 병치시켜서 동시에 독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후 데리다의 몇 가지 동기가 적절한 위치에 놓인다. 동기란 할례의 상처이며, 또한 『조종』의 표현을 취하면, “무가 되지 않는 것〔le pas-rien〕” 즉 “있는 것이 아니나 무가 아닌 잔여, 엉뚱한 잔여”이다. 이런 표현에 의해 『조종』에서 “지양〔Aufhebung〕에 저항하는 힘들”이 환기되는데, 이 힘들은 헤겔의 논의의 이음매를 전위(転位)시킬 수 있다.15) 무가 되지 않는 것, 이 실체화될 수 없는 잔여는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에서의 헤겔의 경악의 바로 그 정반대이다. 헤겔은 성궤 안에서 바로 “무〔rien〕”를 보고 있으니까.


장막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Rien derrière les rideaux〕. 비유대인이 막사를 열었을 때의, 사람들이 그에게 막사를 열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혹은 그가 막사를 침범했을 때의, 생활 속에, 혹은 신전 속에 그가 들어왔을 때의, 순진한 놀라움은 이로부터 생긴다. 비밀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 의례적인 우회를 여러 번 거친 후, 그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 무〔rien〕밖에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중심은 없다, 마음(심장)은 없다, 공허한 공간, 아무것도.16)


하지만 [이런 헤겔의 주장에 반해] 유대성은 무가 아니다[없는 게 아니다]고 덧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는, 어떤 불가능한 고백의 표명, 즉 유대인이라는 것은 성가신 문제점 중 하나라는 표명을 따라 나아간다. “유대인은 또한 타자이기도 하며, 즉 나이면서 타자이다. 나는 ‘유대인, 그것은 본질이라는 것을 갖지 못하고, 무엇 하나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갖지 못하는, 혹은 그 고유한 본질이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전혀 갖지 못하는 데 있는 그런 타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유대인인 것이다”17)라고 데리다는 『쉽볼렛 : 파울 첼란을 위해』에서 쓰고 있다. 이로부터 동시에 도출되는 것은 유대인의 증인의 보편성과 “유대적 관용어(idiom)의 전달 불가능한 비밀”, 그 특이성, “발음될 수 없는 그 이름”이다. 혹은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향한 표현방법을 다시 다루고,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것”은 이 이타성의 내밀하고 특이한 경험을 이루게 될 것이다.

 데리다가 온몸으로 유대성의 경험에 직면할 때, 아포리아가 상처의 자리, 즉 외상이 언어와 사고의 다수의 파편으로 조각나 울려 퍼지는 장이 된다. 『할례고백』은, 임박한 어머니의 죽음보다 먼저 다 쓰기 위해 허둥대며 서둘러서 쓴 것처럼 읽힌다. 데리다가 제프리 배닝턴의 텍스트 아래에서 전개하는 것은, 1976년의 사적인 노트에서의 다수의 발췌의 인용으로 이루어진 숨이 찬 띠 모양의 에크리튀르이다. 할례의 베인 상처, 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이 홈에 의해 계약(alliance)이 맺어진다. 이 상처는 에크리튀르를 창시하는 알려지지 않은 사건, 에크리튀르의 비할 데 없는 방아쇠가 된다. “할례는 나를 여기에 쓰게 하는 것의 실마리이기를 계속한다. 버티는 것이 고작 하나의 실로 연결되어 있어서, 상실될 우려가 있다고 해도.”18)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은 “사이”라는 비밀의 법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 경우, ‘사이’는 이 새로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문화와 다소 비밀스러운 유대교 문화의 사이이다. 더 말한다면, 이 유대교 문화는 비시정권의 법률에 의해 프랑스 국적을 빼앗김으로써 프랑스 내에서 추방된 알제리계의 어린 유대인이었던 그[데리다]가 어느 정도 묵살해온 문화이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나라고 추방되고 교양을 쌓아 국제인이 되는, 이 알제리의 어린 유대인의 교잡한[복잡한, 혼종적인] 정체성. 그의 진짜 이름은 [자크가 아니라] 자키로, 예언자와 똑같은 울림의 엘리라는 [두 번째] 이름도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하임(히브리어로 ‘삶’), 두 명의 할아버지는 모이즈[외가]와 아브라함[친가]19)이라는 이름이다. 부모는 엘리라는 이름으로 데리다의 시민등록을 굳이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가족보다 자국에서 오히려 인정받고, 자국보다 유럽에서 오히려 인정받고, 유럽보다 오히려 세계 도처에서 인정받는다. ‘야만인’에서 ‘고집쟁이’로 불렸던 나이지만, 라틴어를 스스로 말하고, sA을 읽으려고 라틴어를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취학 중에 라틴어의 지식을 조금 얻었기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할 수 있었다. 비시정권은 라틴어를 초등학교 6년의 필수로 만들었는데, 그 직후, 라틴어로 말하는 ‘정원제한[numerus clausus'’의 명목으로 우리에게서 프랑스 시민권을 앗아간 다음, 나를 고등학교에서 쫓아냈다.”20)

 『할례고백』이 철학에 의한 아카데믹한 문장 표현의 탈구축에 있어서, 데리다가 가장 멀리까지 가는 텍스트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불가능한 것이라는 형식의 경험을, 즉 “유대인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아포리아 그 자체를 우리에게 맡김으로써, 그는 아카데믹한 문장 표현의 다양한 코드를 폭발시킨다. 그것은 할례의 기억 없이 상처 위에 직접 쓰인 텍스트이다. 이 상처는 『쉽볼렛』, 『아카이브의 병』 같은 다른 많은 텍스트에서 환기되며, 이 상처 위에 데리다가 저작들의 일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유대교성을 언급하는 것은 언어를 언급하는 것, 더욱이 시적인 것의 가능성 그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다.21)  『할례고백』은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에 이르기까지 추구되는 운동을 개시한다.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에서는 유대교성의 문제와 언어의 불가능한 고유화라는 문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젠츠바이크는, 독일어 속에서 언어학적으로는 주인이 되는 언어를, 이디시어 속에서 동료들 사이에서의 ‘유대의’ 언어를, 그리고 히브리어 속에서 기도의 언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데리다는 과거의 그 자신의 어린 ‘아랍계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해서 이 세 가지 틀이 금지되고 있는가를 힘차게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묘사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프랑스 ― 마그레브계 유대인의 전형적인 상황이란 ― 또 다시 강조해두자 ― 거기에 있어서 수탈(收奪, expropriation)이 다음 세 가지의 믿고 의지하는 것의 상실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상황인 것이다.”22) “식민지의 프랑스어”를 얘기하는 데리다는 히브리어도 유대계 스페인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데리다가 한 것처럼, 이런 근원적인 탈고유화를 표시할 수 있는 저술가는 거의 없다. 이 근원적인 탈고유화에 있어서, 아슈케나지계 유대인23)과 세파르디계 유대인,24) 신앙을 가진 유대인과 신앙을 갖지 못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아이들과 이스라엘 국가 ― 데리다가 신식민지주의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비판한 이스라엘 국가 ― 사이에서의 유대적 경험이 구성되고 있지만, 이 경험은 데리다가 표시하고, 또 다시 표시하려 한 다양한 차이를 넘어선다.

  몇 개의 텍스트의 행보를 시계열적으로 추적하면, 수많은 차이의 차이에 의해 찢겨진 의식, 국지적인 것, 국가적인 것, 세계적인 것 사이의 다양한 차이화에 의해 찢겨진 의식이, 탈구축의 작용의 이른바 모체(매트릭스)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느냐라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탈고유화〔expropriation〕의 ‘탈〔ex〕’, “‘함께〔cum〕’의 원〔cercle〕, 즉 circum〔라틴어의 원, 서커스〕이라는 곳의 서커스〔cirque du circum〕”,25) 기저재〔基底材, subjectile〕의 ‘아래〔sub〕’ ― 이 모든 전치사는 언어와 사고의 수많은 말투를 변화시킨다. 데리다는 이런 말투에 의해, 항상 기원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탐구함으로써, 초월론적인 기원의 학(아르케올로지) ― 고유한 것의 탈구축 ― 을 작동시킨다. 그때 데리다는 『끝없는 대화』의 「유대인이라는 것」이라는 장에서의 블랑쇼의 발언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대인은 몇 가지의 기원〔des origines〕이 인간이며, 즉 기원이라는 것에 관련된 인간이다. 기원에 머묾으로써가 아니라, 기원에서 거리를 두고, 단초(端初)의 진리는 분리 속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몇 가지의 기원의 인간인 것이다.”26)


데리다는 유대교성에 관한 주요한 개념의 몇 가지를, 그에게 고유한 철학적 관용어로 재번역했다. 그것과 동시에, 그는 이런 개념들을 정치적인 목적지 ― 데리다에게서 그것은 도래할 것〔lʼà-venir〕의 개념이다 ― 에 대한 경유지로 함으로써, 유대교성의 문화적인 차원에서 우회시켰다. 이렇게 데리다는 메시아성 및 유일성에 대한 개념들을 만들고 가다듬는다. 그 기점이 되는 것은 메시아주의 혹은 일신교에서의 신의 통일성이 의미한 것이며,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한 미래에로 이 이름들을 다시 던져 넣는다[되돌려준다]. 그는 『아카이브의 병』에서 『맑스의 유령들』에서 가다듬은 ‘메시아성’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다. 그는 예루살레미가 프로이트의 『모세라는 남자와 일신교』를 논한 책의 재독해를 기점으로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가다듬고, 이때 유대교에 관한 이 위대한 역사가가 프로이트의 죽음을 넘어서 프로이트에게 보낸 유별난 독백을 장황하게 분석하고 있다. 데리다는 “메카-아카이브는 존재하지 않는다”27)고 적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것은, 아카이브가 과거의 죽은 자료가 결코 아니라, 기록 보관자에 의해 작성되고 “환원할 수 없는 미래의 경험”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환원 불가능한 경험을 기점으로 하여 메시아성은 요청[호명]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갖게 된다. 재번역 및 우회〔détournement〕와는 다른 효과인 유일성에 관해 말하면, 유일성이란 일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일자(l’Un)가 존재하자마자, 살인이, 상처가, 외상이 있다. 일자는 타자로부터 몸을 지킨다”28)고 데리다는 쓴다. 『자홀 : 유대인의 역사와 유대인의 기억』에서 “‘상기하라’는 명령이 한 민족 모두에게 종교적 명령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뿐이며, 다른 민족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다”29)고 예루살레미는 적는다. 데리다로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30) 과거와 미래라는 관심사를 오로지 이스라엘에 두는 이런 글이 정당한가라고 자문하고 …, “적어도 이 선택의 논리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유일한 이름으로, 이 예상과 이 명령에 있어서 인정되려고 하는 모든 장과 모든 민족은 부르는 것이 아닌 한에서는…”31)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아듀 : 엠마뉘엘 레비나스』에서 비슷하게 행동한다. 데리다는 유대민족이 토라의 역사적인 사자(使者)를 자칭하거나, 특권적인, 더 나아가 유일한 해석자를 자칭하거나 하는 것을 레비나스가 고발했을 때, 레비나스 안에서 자신의 발언의 울림을 찾아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선택을 지정하는 것이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에 제지되는 채로 되지 않는 선택을 사고해야 할 것이다何らかの民族や何らかの国家におしとどめられるがままにならないような選びを思考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고 주석을 단다.32) 이리하여 유대의 전통의 몇 가지 어휘가 변양되고, 방향을 돌리고〔détourné〕,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것에 대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잠재력을 데리다에 의해 담지되는 것이다.33)

 이렇게 유대적 경험은 “사막 속의 사막”이라는 특이한 장소에서 베껴 써진 듯하다. 데리다에게서 이 장소는 추방과 도래할 것의 경험이라는 비할 데 없는 과장법을 구성한다. “도래하는 대로 되는 것到来するがままになっているもの34)을 나타내는 이 “사막 속의 사막”의 놀라운 이미지가 다듬어졌던 것은 『신앙과 지식』에서이다. 코라(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데리다는 이 비할 데 없는 장을, 모든 장에 있어서 다른 것으로서, 형태를 부여하는 무정형적인 것으로서 이론화했다)가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 “사막 속의 사막”이 있을 것이다. 즉, 그리스적인 것과 유대적인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사이에서 작동하는 게 아닐까? 기원을 정하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함으로써 모든 것은 작동하는 게 아닐까? 사르트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고찰』에서 “본래적인” 유대인과 “비본래적인 유대인” 사이에 분할선을 집어넣는데, 데리다는 강연 「아브라함, 또 하나의」에서 이런 분할을 비판한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자신의 유대적 유산과 그에게서의 라틴-기독교적 문화의 유산을 분리하는 것을 항상 거부했다. 라틴-기독교적 문화란, 『신앙과 지식』에서의 조어를 거론한다면, 바로 “세계 라틴성〔mondialatinité〕”35)의 문화이다. 그는 마라노이며, 마라노이기를 계속하지만, 그는 이것을 『할례고백』에서 표명하고 있다.


저는 프랑스의 가톨릭 문화에 속하는 일종의 마라노이며, 기독교인의 신체도 갖고 있는데, 그 신체는 많든 적든 뒤틀린 계보에 있어서, sA(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계승되고 있다 … 마음속으로 몰래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말하지도 않는, 그런 마라노에 나는 속해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공적인 경계 중 어느 쪽에서 인정받은 마라노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라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결코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 빛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몸을 불태울 각오로, 〔신과 나 사이의〕 불가능한 대면이라는 해괴한 법 아래에서 쓴다는 단지 그 때에….36)


 데리다에게서 <역사〔Histoire〕>는 항상 어떤 출처〔provenance〕와 다른 출처 사이에서 생긴다. 그리고 데리다가 “유대인 문제”로 채운 모든 텍스트에서 사이라는 이 논리를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은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es와 책의 물음」이라는 논문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로 얘기됐다. “<유대인>의 자기에의 동일성 등은 아무 실재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자기임의 이 불가능성의 별명일 것이다. <유대인>은 찢겨져 있으며, 그것도 우선, 이의성(異義性, 알레고리)자의성(字義性)이라는 문자의 두 가지 차원 사에서 찢겨져 있는 것이다.”37) 같은 시대에 쓰여진 논문인 「폭력과 형이상학」에서도 다음의 문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차이 속에 살고 있으며, 이 차이가 아마 역사라고 불리는 것의 통일성이다.” 유대적인 것과 그리스적인 것,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등의 사이에서 구성되는 이 차이의 공간 그 자체에 있어서 항들은 교류하며, 교차(키아즘)를 형성한다. 셰익스피어의 더없이 양의적인 연극인 『베니스의 상인』에서 데리다가 시행한 놀라운 분석을 참조한다면,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사이, 즉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사이라는 사례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다시 유대교인이며, 유대교인은 이미 기독교인이다. 그들은 교류하고 술책을 부리며, 금전상의 화해에 있으며, 거래를 한다 …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교묘하게 짜여진 협상의 이 장면에서, 타자는 한 명의 다른 것이며, 동시에, 각각이 다른 쪽을 제 것으로 삼아야만 한다.”38)

 데리다의 “유대적인 것”은 말하자면 분할되어 있으며, 분할 그 자체이다. 유대교와 유대성 사이에 균열을 넣는 것, 고유한 것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아카이브의 병』에서, 데리다는 예루살레미와 대립한다. 충분히 작동하는 것은, “더 많이 - 더 적게”라는 논리이며, 즉 “<유대인〔Juif〕>보다도 유대인적〔juif〕이며, 또한 <유대인>보다도 유대인적이지 않다”39)는 논리이다. 이것은 마라노의 일격이며, 거짓말을 하는 진실이다. 그렇지만 데리다에게서는, “유대교는 탈구축이다”라는 언명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장-뤽 낭시는 『탈폐쇄 : 기독교의 탈구축』에서 탈구추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탈구축은 “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기원부터 탈구축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의 시작부터, 기독교는, 마치 기원에 있어서의 놀이=느슨함, 간격, 고동鼓動, 개방성에 관계되었듯이, 기독교 자신의 기원으로 관계되기 때문입니다.”40)

 이런 사고의 두 가지 행태는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 작용한다. 데리다는 『신앙과 지식』에서 (『단순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전개된) 반성적 신앙에 대한 칸트적 개념 속에 신의 죽음의 도래를 봤지만, 낭시에게서는 일신교의 유대적 창의(創意)에 대해서조차 무신론을 읽어낼 수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이라는 형상〔figure〕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는 세계에서 통합되고, 데리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일신교를 나타내고 있다. “이 두 개의 일신교는 ‘일신교’가 일자에 대한, 살아 있는 일자에 대한 신앙과 똑같이 유일신에 대한 신빙信憑을 의미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생각나게 하는 점에서, 그리스-기독교적인 유럽, 이교도-기독교적인 유럽의 심정과는 너무도 이질적이며, 또한 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유럽과도 꽤 이질적이다.”41) 데리다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유대교는 기독교와 다르다. 낭시는 말하자면, 야곱(자크)의 묵시록의 복음서를 주제로 데리다를 다룬 텍스트에서 교묘하게 보여줬듯이, 유대인을 유대-기독교적인 배치 구성으로 흡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텍스트에 의해, 낭시는 “유대-기독교”42)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데리다가 “아브라함적인 것”이라고 명명한 것에 대한 실마리를 따라가야만 할 것이다. “아브라함적인 것”은 이삭의 결박을 둘러싸고 은닉화[隠匿化, 크리프트화]된 어떤 특이한 텍스트의 중심적인 동기를 제공한다. 비밀을 논하는 이 숨겨진 텍스트는 『죽음을 주다』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파토츠카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단적 논고』로부터,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전율]』이라는 매개에 의해 도입된 아브라함에 관한 성찰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파토츠카의 논고는 플라톤에서 기독교성에 이르는 “다이몬적인” 억제의 역사를 구축하고 있다. 이 역사에서 유대적 예외는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을 주다』에서는 아브라함의 희생의 중단이라는 중심적 신화를 둘러싸고 모든 것이 신속하게 전개된다. 이 신화에는 법의 힘이 주어져 있으며, 데리다는 텍스트의 말미에서 문학에 관한 아주 특이한 계보학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 계보학은 희생이 중단되는 바로 그 장소에서 창설되는 아브라함의 비밀이라는 전통에 의해, 은닉화[隠匿化, 크리프트화]되는 동시에 정초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전설 속에 문학을 다시 정착시키기 위해, 데리다에게는, 출발점으로서 이 희생이 우화가 아니라는 것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아브라함의 전설]을 우화로 보는 것, 그것은 철학적 혹은 시적 보편성에 잠입하는 것, 그 역사적인 사건성을 해소하는 것이다.”43) 그러나 텍스트의 그 어떤 계기에 있어서도, 데리다는 명시적으로 이 아브라함의 사례를 탈구축 불가능한 것으로 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는 이 장소를 정의에 있어서 두는 것이다. 또한 어쩌면 그는, 아브라함의 전통이 세계적인 규모로 흡수되고 있다고 깨닫고 있다. 『신앙과 지식』에서, 유대적 예외의 생성에 대한 불안으로 찬 이런 종류의 물음이 발견된다. “… 이 존속은, 세계화가 포화된 날에는 (아마 이미 도래하고 있으나) 어떻게 될까?” 그때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인용하는 것이다. “나〔레비나스〕는 유대교를, 성서에 문맥을 주고, 성서를 읽게 만들어 놓을 가능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또한 데리다는 〔세계화〕는 “최악의 것, ‘최종해결’이라는 근본악과 마찬가지로, 살아남기에 있어서의 위협적인”44) 문제이라고 덧붙인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는 전통을, 아직 사고되지 않는 그 다름에 대치하는 방식은 분명히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의 환원 불가능한 멜랑콜리를, 아브라함의 이름을 딴 문장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탈구축의 물음은, 이 모든 멜랑콜리의 중심에 있다. 왜냐하면 멜랑콜리는 항상 어떤 미래와 관계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적인 종교들이 더 이상 지배력을 갖지 않게 된 세상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45) 이 질문은 참신한 방식으로 접목되고 재번역되는 도래할 역사 전체에도 관련되어 있다. 상하이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런 역사의 일례이다. 나치즘의 지배 아래서, 상하이는 무비자의 유대인을 맞아들인 세계에서도 드문 도시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전적으로 다른 역사이다. 똑같은 역사이지만, 또한 다른 역사인 것이다.




1) 〔일역자〕 Benoît Peeters, Derrida, Flammarion, 2010, p. 659.〔『デリダ伝』原宏之・大森晋輔訳, 白水社, 2014年, 736頁〕

2) Cf. “… 나는 더욱 더 진지하게 마라노라는 형상과 놀고 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더욱 너는 유대인일 것이다”(«Abraham, l’autre», in Judéités. Questions pour Jacques Derrida, J. Cohen et R. Zagury-Orly (dir.), Galilée, 2002, p.22.). “실제로 스페인의 마라노들은, 단 하나의 비밀스런 기억마저 잃고 분산하고 복수화되었을지도 모른다”(Foi et savoir. Les deux sources de la «religion» aux limites de la simple raison, Seuil, 1996, p.100.) 〔「信仰と知──たんなる理性の限界における「宗教」の二源泉」松葉祥一・榊原達哉訳, 『批評空間』II-14, 177頁〕). 또한 “마라노들에게 나는 항상 몰래 그들에게 동일화됐다(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Mal d’archive, Galilée, 2008, p.111〔『アーカイヴの病』福本修訳, 法政大学出版局, 2010 年, 115頁〕)도 참조.

3) 〔일역자〕 Maurice Blanchot, L’entretien infini, Gallimard, 1969, p.185. 블랑쇼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안드레 네에르(André Neher)의 분석을 참조하고 있다.

4)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Derrida, Circonfession, Seuil, 2008, p.57.

5) Apprendre à vivre. Entretien avec Jean Birnbaum, Galilée, 2005, p.41.〔『生きることを学ぶ, 終に』鵜飼哲訳, みすず書房, 2005年, 45-46頁〕. “누군가가 ‘우리 유대인’이라고 말할 때, 그는 어떤 본질을 재고유화[再我有化]하는 것, 얼마간의 귀속을 재인하는 것, 즉 얼마간의 분유의 의미를 손에 넣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Schibboleth, pour Paul Celan, Galilée, 1986, p.90.〔『シボレート, パウル・ツェランに向けて』飯吉光夫・小林康夫・守中高明訳, 岩波書店, 1990年, 155頁〕)도 참조.

6) 〔일역자〕 Judéités, op. cit,, p.25.

7) Jacques Derrida, Questions au judaïsme. Entretiens avec Elisabeth Weber, Desclée De Brouwer, 1996, p.77.

8) 〔일역자〕 Cf. Jean-Claude Milner, Le Juif de savoir, Grasset, 2007; Benny Lévy, Être juif. Étude lévinassienne, Verdier, 2003.

9) De la grammatologie, Éditions de Minuit, 1967, p.36. 피터 트라우니가 『검은 노트』에 할애한 최근의 책(Peter Trawny, Heidegger et l’antisémitisme. Sur les «Cahiers noirs», Seuil, 2014)에서 보여줬듯이, 전제를 철저하게 추궁하면서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 속에 “사고의 하자”를 인정하는 것은 훨씬 훗날이다. 레비나스의 독해가 데리다 안에서 갖고 있는 풍부한 사정거리의 더없는 증거이다. 그렇지만 데리다의 이 표명은 당초 독일어로 발표된 논문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프랑스어로는 발표되지 않았다.

10) 〔일역자〕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Seuil, 1967, p.227.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 合田正人・谷口博史 訳, 法政大学出版局, 2013年, 305頁〕

11) 〔訳註〕 Ibid., p.99. 〔同前, 126頁〕

12) 〔訳註〕 Ibid. 〔同前〕

13) 〔訳註〕 Ibid., p.103. 〔同前, 131頁〕

14) 데리다가 주네에 대해 항상 품었던 열정, 바로 주네의 반유대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에 대한 데리다의 침묵, 그리고 그런 것이 일으키는 온갖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취급해야만 할 것이다. 데리다는 당연히 주네에게서 불명예스러운 에릭 마티(Éric Marty)의 논문 「샤틸라의 주네」(Les temps modernes, n°622, décembre 2002-janvier2003. 〔Bref séjour à Jérusalem, Gallimard, 2003에 게재〕)에 의해 심하게 상처를 받았다.

15) Glas, Galilée, 1974, p.53.〔「弔鐘」, 第7回, 鵜飼哲 訳, 『批評空間』, II-23, 1999年, 273頁〕

16) Ibid., p.59.〔「弔鐘」, 第8回, 『批評空間』 II-25, 2000年, 327頁〕. 『불량배들』에서 데리다는 “무가 아니다”를 정치적인 것과 사건에 대한 사고의 조건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무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상 도래하는 것이다”(Voyous, essais sur la raison, Galilée, 2003, p.204, n.1.〔『ならず者たち』, 鵜飼哲・高橋哲哉 訳, みすず書房, 2000年, 282-283頁〕).

17) 〔일역자〕 Schibboleth, op.cit., p.91. 〔 『シボレート』前掲, 156頁〕.

18) 〔일역자〕 Circonfession, op.cit., p.171.

19) 그는 이것을 특히 『할례고백』 및 『아카이브의 병』에서 환기하고 있다.

20) Circonfession, op.cit., p.178. sA의 약자로 데리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나타낸다. 데리다는 『할례고백』에서 스스로를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21) 『쉽볼렛』에서, 데리다는 ツヴェタイエヴァ[사바타이 체비 혹은 러시아의 시인인 마리나 츠베타예바를 가리키는 듯?]의 잘 알려진 말을 인용하고 있다.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이다”(Schibboleth, op.cit., p.91.〔『シボレート』前掲, 156頁〕).

22) Monolinguisme de l’autre, Galilée, 1996, pp.99-100.〔『たった一つの, 私のものではない言葉──他者の単一言語使用』守中高明訳, 岩波書店, 2001年, 154頁〕.

23)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A%88%EC%BC%80%EB%82%98%EC%A7%80_%EC%9C%A0%EB%8C%80%EC%9D%B8

24)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D%8C%8C%EB%A5%B4%EB%94%94_%EC%9C%A0%EB%8C%80%EC%9D%B8

25) 『할례고백』을 참조. “나는 ‘함께〔cum〕’의 원〔cercle〕에, ‘circum〔라틴어로 원, 서커스〕이라는 곳의 서커스〔cirque du circum〕’에, 내가 항상 달아나면서도 찾았던 사람 앞에 … 모이고 싶다”〔Circonfession, op. cit., p.166〕.

26) 〔일역자〕 Maurice Blanchot, L’entretien infini, op. cit., p.185.

27) 〔일역자〕 Mal d’archive, op.cit, p.108. 〔『アーカイヴの病』前掲, 112頁〕.

28) 〔일역자〕 Ibid., p.124. 〔同前, 130頁〕

29) 〔일역자〕 Ibid., p.121. 〔同前, 127頁〕. “자홀”은 히브리어로 “상기하라”의 의미.

30) 〔일역자〕 Ibid., p.124. 〔同前, 130頁〕

31) 〔일역자〕 Ibid., p.122. 〔同前, 128頁〕

32) 〔일역자〕 Cf. Adieu. À Emmanuel Levinas, Galilée, 1997, p.127. 〔『アデュー』藤本一勇訳, 岩波書店, 2004年, 106-107頁〕

33) 할례는 그 비할 데 없는 사례로, 『쉽볼렛』에서 데리다는 참신한 방식으로 시적인 것을 다듬어내고 있다.

34) 〔일역자〕 Foi et Savoir, op.cit., p.29. 〔「信仰と知」, II-12, 93頁〕

35) 〔일역자〕 Cf. 「세계라틴화〔mondialatinisation〕」. Ibid., p.21. 〔同前, 『批評空間』II-11, 96頁〕

36) 〔일역자〕 Circonfession, op. cit., p.145.

37)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op.cit., p.112.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 前掲, 145頁〕

38) Jacques Derrida-Michal Ben-Naftali, «La mélancolie d'Abraham» (entretien), in Les Temps Modernes, n° 669, «Jacques Derrida : L'événement Déconstruction», 2012. 데리다는 여기서 「카이에 드 렐르 : 자크 데리다」(2004년)에 재수록된 「『지양하다』 번역이란 무엇인가」에서 행한 분석을 다시 다루고 있다.

39)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op.cit., p.112.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 前掲, 145頁〕.

40) Jean-Luc Nancy, La Déclosion. Déconstruction du christianisme 1, Paris, Galilée, 2005, p.217. 〔『脱閉域──キリスト教の脱構築1』大西雅一郎訳, 現代企画室, 2009年, 296頁〕

41) Foi et savoir, op.cit., p.22. 〔「信仰と知」, 『批評空間』II-11, 97頁〕

42) “유대-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우선 『유대성』에서 거론되고, 다음으로 『탈폐쇄』에서 다른 형태로 거론됐다. “오늘날 우리에게 유대-기독교인이란 자크〔자크 데리다 및 야곱〕이다. 그리고 그것은 … 어떤 하나의 실, 은밀한 연결부호이며, 그것에 의해 역사상의 야곱과 이 또 하나의 … 또 하나의 유대-기독교인인, 혹은 또 하나의 다른 유대-기독교인인 자크가 결부된다”(La Déclosion, op.cit, p. 70〔.『脱閉域』前掲, 88-89頁〕).

43) 〔일역자〕 Donner la mort, Galilée, 1999, p.95.〔『死を与える』廣瀬浩司・林好雄訳, ちくま学芸文庫, 2004年, 139頁〕

44) Foi et savoir, op.cit, pp.84-85.〔「信仰と知」, 『批評空間』 II-14, 169-170頁〕

45) «La mélancolie dʼAbraham», op.cit., p.66.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현대사상 2015년 2월 임시증간호

자크 데리다

 

<미번역 텍스트>

1. 하이데거에 관한 대담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삶과 사상>

2. 데리다의 최고 전성기, M. 나스

3. 탈구축<, R. 가쉐

4. L’enfant que donc je suis 혹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왜 자전적인가郷原佳以

5. 데리다 처음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자적 은유増田一夫

 

<인터뷰>

6. Deadletter로서의 철학아즈마 히로키

 

<사형>

7. 엑스 렉스 자크 데리다의 사형론 세미나, J. 페닝턴

 

<하이데거>

8. 자기 전승과 자기 촉발 데리다의 하이데거 강연(1964-1965)에 관해,

 

<철학>

9. 평행적 차이 자크 데리다장 뤽 낭시

10. 주변에서 주변으로 데리다/들뢰즈의 곶으로부터,

11. 우뚝 솟은 상태의 철학말라부

12. 타자성의 분유 계획 불가능한 것의 계산藤本一勇

 

<정치>

12. ‘전쟁의 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松葉祥一

13. 호명으로서의 우애애도로서의 우애 자크 데리다의 우애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宮崎裕助

14. 차연과 평등 타자의 윤리인가 아니면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인가梶田裕

 

<신학>

15. 데리다의 급진적 무신론,

16. 현상을 가르치기 레비나스데리다와 메시아주의의 물음마르셀

17. 데리다와 존재신학 칸트하이데거레비나스가 교착하는 장소로長坂真澄

 

<문학>

18. 팔루스유령천황제 자크 데리다와 中上健次

19. 데리다 미학의 연구 문학 혹은 픽션성의 제도立花史

 

 ******************

12. ‘전쟁의 상태화/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 (2/2)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1/2에 이어서....


4. 칸트적 평화와 레비나스적 평화

데리다는 아듀에서 성서의 행방에 수록된 레비나스의 강연 정치는 나중에1(Lévinas 1982)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레비나스의 평화론과 칸트의 평화론을 대립시킨다(Derrida 1997b). 레비나스는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를 옹호하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서 있으며, 그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결론이다.

확실히 칸트는 전쟁과는 다른 차원의 영구평화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평화론은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일상화된[常態的] 전쟁론과는 다른 전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전제는 다음의 두 개의 명제이다. “1, 평화는 자연스러운, 대칭적인, 단순히 전쟁과 대립시킬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평화는 다른 차원의 현상이며, 자연스런 본성이 아니라 제도적인 본성(즉 정치적-사법적 본성)을 가진다. 2, 평화는 단순한 적대행위의 정지, 전쟁을 벌이는 것의 자제, 즉 휴전이 아니다. 평화는 영구평화로서, 영구평화의 약속으로서 제도화되어야 한다”(Derrida 1997b:132). , “만일 평화가 있다면, 그 평화는 영구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제도화된 평화, 법적-정치적 평화로서, 비자연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Derrida 1979b:133)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평화는 가능할까? 적어도 정치적 방법에 의해서는 이런, 영구평화에는 도달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영구평화는 정치적이지 않게 된다. 데리다는 여기서의 칸트가 레비나스에 접근한다”(Derrida 1997b:133)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와 레비나스는 갈라진다. 칸트는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할 환대를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데리다는 만국의 세계시민들이여, 다시 한 번 노력하라!(Derrida 1996)에서, “세계시민의 법권리는 보편적인 환대의 조건들에 제한되어야 한다”(Kant 1795:49)라는 세 번째 확정조항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칸트가 환대의 법을 방문권에 한정하고, 체류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손님의 권리(이 권리를 요구하려면 그를 일정 기간 가족의 구성원으로 다룬다고 하는, 호의 있는 특별한 계약이 필요해질 것이다)가 아니라 방문의 권리인데, 이 권리는 지구의 표면을 공동으로 소유할 권리에 기초하여, 서로 교제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속해 있는 권리이다”(Kant 1795:49). 데리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방인/방문자]는 체류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방문권만 인정받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 점에서 수많은 확연한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건부 환대라고 부르며, ‘무조건의환대 혹은 순수한환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립시키고 싶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환대이며, 설령 신참자가 시민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습니다”(Derrida 1999).

여기서 칸트는 환대에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환대=평화를 진보의 최종 단계로 되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의 평화 개념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칸트에게서 영구평화, 세계시민적인 법권리, 보편적인 환대 같은 것의 제도화는 자연적인 적대성 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Derrida 1997b:134).

그에 반해 레비나스의 경우, 환대=평화는 무조건이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평화를 지금(La paix maitenaint)”(Derrida 1997b:134)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코스모폴리터니즘보다도 보편성을 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레비나스에게서 모든 것은 평화에서 시작되는것이다. “이 평화는 자연이 아니다 . 또 이 평화는 단순히 제도적 내지 법적-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환대 속에서 타자의 얼굴을 맞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Derrida 1997b:137, 강조는 데리다). 레비나스에게서는 칸트와는 반대로, 전쟁 자체도 맨 얼굴의 평화로운 맞아들임의 증언이 되는 흔적을 보존하고 있으며, “전쟁이 평화의 증언인 것, 전쟁은 평화의 한 현상에 머무는 것”(Derrida 1997b:144)이 된다.

레비나스는 전쟁-평화의 대칭성을 절단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같다. 그러나 방향은 정반대이다. 칸트의 경우, 전쟁이 기반이 됐던 반면, 레비나스의 경우 평화-환대가 기반이 된다. “전쟁 자체, 적대성, 나아가 살해마저도 얼굴로의 열림이라는 근원적 맞아들임아직도 전제하며, 변함없이 맞아들임의 표명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에 대해서만이며 타자의 얼굴의 의미이기도 한 살인하지 마라는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윤리의 근원이다”(Derrida 1997b:138, 강조는 데리다). 칸트에게서는 평화를 제도화해도 자연상태로서의 전쟁의 흔적은 남는다. 거꾸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 면역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환대를 스스로 신청하는 경우뿐이다. 레비나스는 칸트적인 무장된 평화’, ‘휴전으로서의 평화’, 법적-세계시민주의와 절연하고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은 수단에 의한 평화의 계속”(Derrida 1997b:144)이며, 전쟁은 환대의 파생물이게 된다. “이 위대한 담론은 종말론적 평화를, 또한 무엇에도 선행될 수 없는 환대적인 맞아들임을 말한다. 거기서 무엇을 듣더라도 상관없으나, 다만 정치적인 평화신학만은 들을 수 없다”(Derrida 1997b:144).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의 평화 개념을 ()-근원적인 환대혹은 과정 없는 평화”(Derrida 1997b:139)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이 평화-환대의 기반을 언어작용에서 간파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언어작용의 본질은 선량함이며, 나아가 언어작용의 본질은 우애이며 환대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errida 1997b:138). 가령 전체성과 무한의 끝부분에서, 언어 속에서 타자, 그 어떤 경계선도 부정도 없는, <타자와의> 평화적 관계의 적극적인 전개가 산출된다고 말했음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거기서는 급진적인 분리의 다원론”(Derrida 1997b:146)이 문제가 됐다. 그것은 전체적인 공동체의 다원성이 아닌 듯한, 다원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정합성이 아닌 듯한 다원론”(Derrida 1997b:146)이다. 거기서의 다원성의 통일이야말로 평화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평화를 전쟁의 종식과 동일시할 수 없다”(Lévinas 1999:471).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에게서의 평화론을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한다. 한편으로, -근원적인 환대’, ‘아나키한 선량함부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Derrida 1997b:143-144). 그 결과, 평화에는 계층질서적인 비대칭성이 남게 된다. 다른 한편 이런 레비나스의 윤리적 평화론은 보편주의-배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죽이지 말라라는 윤리적 명제를 절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입장만이 보편적이며 다른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 배외주의에 빠지며, 폭력적 배제나 처벌에 길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시오니즘이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윤리적 입장이라고 주장할 때, 이 위험에 길을 열고 있다(Derrida 1997b:165). 현실에서 시오니즘이 배타적 폭력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될 때, 이 입장의 위험성을 알 수 있다.

 

5. 윤리적 평화와 정치적 평화 사이에서

우리는 칸트와 레비나스의 평화론을 윤리적 평화냐 정치적 평화냐라는 문제로서 검토했던 적이 있다(松葉 2008). 한편으로 윤리적 평화론이 무력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평화론에 늘 위험이 따라다닌다는 것도 사실이다. 1차 대전 후의 부전조약[不戰條約, Treaty for the Renunciation of War;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나, 유엔헌장에서 무력행사를 행할 수 있는 예외적 조건으로서 자위권이 인정된 이후, 팽창일로를 거듭해 왔다. 그것은 무력행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대외적, 대내적인 논거로서 계속 확대되며, 이제는 예방적·선제적 자위권이나, 확대된 집단적 자위권까지 주장하게 되며, 어떤 군사적 행동도 그 안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런 자위 개념의 팽창을 억누르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 수단만으로는 곤란하다. 칸트나 아베 드 생-피에르(Abbe de Saint-Pierre)가 주장한 이성=이익에 기초한 정치적 수단으로는 자위 개념의 비대화와 그것에 기반한 정전론(正戦論)의 부활을 막을 수 없으며, 정치적 차원에서 윤리적 차원으로의 전회가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다(松葉 1995).

다른 한편으로 윤리적인 평화론이 불충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전쟁의 일상화[常態化]가 기본인 한, 그것이 아무리 일시적이고 위험한 것이라 해도, 정치적인 수단에 의한 해결책의 추구는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칸트적인 세계시민공화국에서의 도래할 민주주의를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칸트는 정치적 평화를 위해 국가연맹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현실주의적인 타협안으로서 제기했던 것에 불과합니다”(Derrida 1997a). 실제로 칸트는 두 번째 확정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관계가 있는 국가들에 있어서 그저 전쟁밖에 없는 무법적인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거한 다음의 방책밖에는 없다. , 국가도 개개인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미개한(무법적인) 자유를 버리고 공적인 강제법에 순응하고, 그리고 하나의(가장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민족들의 합일국가(civitas gentium)을 형성하고, 이 국가가 항상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도록 한다는 방책밖에는 없다”(Kant 1795:47). 그러나 이런 세계시민국가라 해도, 자기 면역으로서의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전쟁의 본질에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평화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평화를 조금씩이라도, 일시적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수단에 의한 것밖에는 없다.

확실히 영구평화를 위해영구평화의 어정쩡한 약속, 유보 없는 환대에 관한 양의적인 혹은 위선적인 약속”(Derrida 1997b:151)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트는 무덤을 갈망하는 것도, 평화주의적 철학자의 달콤한 꿈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Derrida 1997b:151-152). 칸트는 이 양자택일에 대한 응답으로서, 환대의 법권리나 세계시민정치를 제안한다”(Derrida 1997b:152).

여기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적어도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를 여기서 첨예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미국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속의 생베르나르(Saint Bernard) 교회에서, 무수한 상파피에홈리스들이, 다른 국제법, 국경선에 관한 별도의 정치, 인도(人道)에 관한 별도의 정치, 나아가 국민국가의 너머에서 실효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도적 참여engagement, 그런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도처에서, 칸트와 레비나스의 이 치아는 전례 없이 중요한 것이다”(Derrida 1997b:152).

우리는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전쟁의 일상화[常態化]’를 인정하면서도, 그 저편에서 전쟁의 결여태로서의 평화와는 상이한 평화를 찾아내고, 정치적 평화윤리적 평화라는 두 개의 항 사이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방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이의 경계선은 단순하지 않다. “윤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는 하나의 경계선이 지닌 분할 불가능한 단일성을 결정적으로 잃고 있기”(Derrida 1997b:149) 때문이다.

 

****

확실히 지금 요구되는 것은 확고한 전쟁 개념에 대응하는 확고한 평화개념을 대치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떻게 생존 공간을 다시 만들 것인가, 거기서 필요한 최저한의 질서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사고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리라. 집단적 자위권이 도입되고, 무기수출의 3원칙이 변경되고, 비밀보호법이 시행된다는 예외상태속에 있는 현재, 이제 상황은 실재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에서 현전한전쟁 속에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현재는 전시’(辺見 2013)이라는 인식이며, 필요한 것은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전쟁 중>이라는 사고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이런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하고, 할 수 있는 한 명문화된 개헌을 멈추는 최대한의 정치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의 텔로스가 전쟁인 한, 정치적 방법으로는 전쟁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본질이 타자의 존재를 신체적-물리적으로 말소하는 것에 있는 전쟁을, ‘죽이지 말라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평화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가능성의 반대가 아니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불가능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Derrida 2001b:43)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불가능한 것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인용할 때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경우는 그 쪽수를 표기했다. 다만, 문맥에 비춰서 번역문을 일부 변경한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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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하이데거> 2부에 수록된 데리다 인터뷰



프랑스에서의 하이데거에 수록된 데리다 인터뷰 - 영어판.pdf



첨부한 파일은 다음의 영역본이다. 전체 파일은 구글로 쉽게 구할 수 있다. 

1999년이니까, 데리다가 사망하기 몇 년 전이다. 

아무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매우 많다. 

2-3회에 걸쳐서 초역본을 공개할 예정이다. 


Jacques Derrida, Entretiens du 1er juillet et du 22 novembre 1999, in Heidegger en France, II. Entretien, Albin Michel, 2001, pp.8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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