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2/3) (3/3)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3/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3. 야먀모토 준(山本潤)의 논평


 제 전공은 독일중세문학으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는 제임스 조이스나 나쓰메 소세키의 텍스트와는 달리, 데리다의 것과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테네브 선생님의 강연과 그 주제가 되는 고양이에 관해서, 중세연구자로서의 시선에서 코멘트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 대해서인데요, ‘고양이라고 했을 경우,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개체적 존재로서의 고양이가 존재하는 동시에, 그 배후에는 고양이가 표상하는 이미지의 확대[펼쳐짐]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느냐가 문제 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양이를 보면서 그것에 관련시켜 떠올리는 것은, 보고 있는 주체의 문화적 배경에 의거하며, 또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방금 소세키의 고양이와 데리다의 고양이가 화제가 됐습니다만, 소세키와 데리다가 갖고 있는 문화적 배경은 당연히 다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인식하는 고양이는 저절로 다른 것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유럽 그리고 특히 중세에서 고양이’, 심지어 동물에 관한 인식이 무엇이었는지를 간단하게 코멘트하고 싶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동물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선 경험적 관찰과 그 후의 생물학적 파악이라는 관점에 의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중세에는 이런 관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전고대에는,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박물지[Historia Animalium, 동물지] , 경험적 관찰로부터 동물의 생태를 밝히려고 한 시도도 있었지만, 그런 저작은 중세 유럽에는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동물에 대한 지식들이란, 결코 자기 목적적으로 추구되는, 즉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의 파악을 최종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반드시 신의 세계 창조와 신의 세계 구원 계획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중세 사람들이 동물 속에서 읽어냈던 것은, 세계에 대한 신의 시선이며, 동물은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미디어[매개물]였던 것입니다. 동물이라는, 인간과는 의사소통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를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가는, 신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인간과 동물을 그 속에서 어떻게 위치시키는가, 그리고 그런 것을 존재시키는 세계를 어떤 것으로서 인식했는가에 연결됩니다. 이 배경을 이루는 것이, 모든 존재는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동물에 관한 이해는, 동물 우화담의 형식으로 중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전해졌습니다. 옛날에는 2세기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피지오로고스[자연학자]는 다양한 동물이나 광물의 특성을 소개하면서, 그것에 기독교적인 맥락을 주는 것이며, 중세에 이르기까지 범유럽적으로 수용되며, 기독교의 포교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책 등의 영향 아래에서 동물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이 수립됐기에, 중세에서의 동물 이해는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은 죄다 기독교적인 세계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럽 전역이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들어간 것은 대략 10세기 무렵으로 보입니다만, 그때까지 축적된 비기독교적인 동물 이해라는 것도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다름 아닌 동물의 종으로서의 고양이는 이집트 기원으로 생각됐으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래 고양이는 바스테트(Bastet) 신의 성스러운 짐승[인간을 재앙으로부터 지키는 짐승]으로서, 또한 새끼가 많다는 등의 특징 때문에, 풍요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고양이는 아마도 켈트족을 통해서 이집트나 중동으로부터, 즉 유럽의 외부로부터 초래된 동물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미 집고양이로서 고양이는 유럽인의 생활에 결부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고양이는 풍요나 다산의 상징성이 계승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해로운 짐승으로 간주된 쥐를 잡는 등 인간에게 유용한, 긍정적인 존재로 인식됐습니다. 또한 중세 초기에도 각지의 궁정에서 애완동물로서 키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런 고양이는 유럽에는 원래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보다 훨씬 더 시간축을 거슬러 올라간 고대에 탄생한 신화를 살펴보면, 적어도 게르만 계열의 신화에는 고양이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된 고양이는 북유럽 신화의 여신 프레야(Freya)가 타는 수레를 끄는 살쾡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살쾡이는 집고양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이런 세속인들의 긍정적인 인식과는 정반대로, 기독교 교회는 고양이가 야행성이고, 바로 고양이눈빛의 발신원이 된 어둠에서 빛나는 을 마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고양이를 악마와 결부시켜 생각될 수 있는 존재로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상징론(symbolism)에서는, ‘고양이한테는 쥐의 모습을 한 인간의 영혼을 쫓아다니는 악마로서의 의미가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고양이, 악마와 결부시켜 생각되는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존재로서의 고양이라는, 상반된 고양이에 대한 시선이 중세에는 병존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 관한 인식은 점차 후자, 즉 교회의 견해를 따른, 부정적인 것으로 통합되어 버렸습니다. 그 한 가지 계기가 된 것은 13세기의 설교자 레겐스부르크의 베르홀트(Berthold von Regensburg)에 의한, ‘이단자의 상징으로서의 고양이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렇게 비판할 때 베르홀트가 사용한 논리는, 어원적 결부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 베르홀트는, 중세 독일어에서의 이단자 ketzer’고양이 katze’를 어원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이단자고양이를 동질적인 것으로 제시한 거죠. 중세 독일어의 ‘ketzer’는 라틴어의 가타리파 cathari’에서 유래했고, 이 시점에서 이미 때때로 고양이 cattus’와 관련시키게 됩니다만, 이것은 순수하게 어원학적 견지에서 보면,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전성기 이후 고양이이단자와 연관 속에 놓이게 됐습니다. 게다가 베르홀트는 이 시기에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유행을, ‘고양이의 숨결의 확산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양이는 중세 초기의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로부터, ‘악마의 화신, ‘해로운 짐승으로 변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성이 극에 도달한 것이, 마녀가 키우는 마()로서의 고양이파악입니다. 마녀 사냥을 할 때, 마녀 혐의를 받은 인간과 함께 고양이도 고문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이전의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로서의 고양이로부터도 이교도의 성스러운 짐승으로서의 고양이’, 그리고 기독교적 견지로부터의 악마와 결부되는 고양이그런 다양한 고양이의 이미지를 유럽의 문화전통은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 데리다의 사고의 배후에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데리다가 욕실에서 고양이를 봤을 때, 그에게 찾아온 감각의 배후에는, 그런 유럽의 문화적 깊이, 문화의 기억의 존재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논점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역시 왜 데리다의 고양이는 암고양이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까부터 화제로 삼고 있는 유럽의 문화전통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속에, 자발적으로 얘기하는’, 즉 발언자로서의 고양이는 대체로 암고양이입니다. 일례로, 독일 후기 낭만파의 작가 E. T. A. 호프만의 소설 암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의 무르를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말하면, 그가 서 있는 문화적 위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만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암고양이입니다. 이런 관찰로부터는, 문화적 표상으로서의 고양이에 있어서의 성()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과연 데리다는 기르던 고양이가 만약 숫고양이였다면, 그에게 수치의 감정은 생겨났을까요?

고양이의 성을 생각하는 하나의 재료를 다시 중세 유럽에서 찾고 싶습니다. 중세에서, 숫고양이와 암고양이는 어떤 것으로 인식됐을까요? 일괄해서 고양이내로 통합되었는가, 아니면 수컷암컷이라는 성차(性差)에 근거하여 각각 다른 것으로 파악되었을까요? 그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시인[詩作] 활동을 한 데어 슈트리커(Der Stricker)라는 시인입니다. 그는 여러 장르에 걸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요, 그 일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동물우화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숫고양이암고양이각각을 주역 또는 주제로 하는 단편이 있습니다. ‘숫고양이의 이야기는 숫고양이와 암여우의 대화라는 형태로 적혀 있으며, 그 안에서는 숫고양이의 오만함이 주제가 되는데요, 이 숫고양이는 스스로 소리를 내는 주체, ‘이야기의 주체입니다. 반면 암고양이에 관한 단편은 교훈담이며, 거기서의 암고양이는 부정(不貞[순결하지 않음])’의 상징으로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만 숫고양이의 경우와는 달리, 거기서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작품의 화자이며, 암고양이는 얘기되는 대상, 즉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며, 자발적으로 얘기하는주체가 아닙니다. 이 예는, 중세에서 고양이는 성차에 따라 전혀 상이한 모두 부정적인 존재라는 공통항은 있지만 파악이 이뤄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 중세의 여성 신비가 힐데가르트 폰 빈겐(Hildegard von Bingen)은 저작 󰡔동물에 대해󰡕에서 고양이를 언급했습니다. 수녀원의 원장이며, 또한 의학·약학에도 정통하고 작곡까지도 한, 중세 유럽의 유수의 슬기로운 여성으로 일컬어진 힐데가르트가 고양이에 대해 말한 서술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고양이에 대해서, “고양이는 체액 때문에 따듯하다기보다는 차가운 존재이다. 그리고 나쁜 체액을 갖고 있어서, 공기의 정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공기의 정령도 고양이를 겁내지 않는다. 개구리나 뱀과 친근성이 있다. 그리고 마르고 차가운 자신의 성질 때문에 여름의 더위에 시달리면, 그 차가운 체액 때문에 개구리나 뱀의 체액을 핥으며,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그런 체액 때문에 그 살덩어리는 독성을 가진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상으로 독일 중세를 중심으로, 유럽의 문화 전통 속에서의 고양이에 대한 다양한 파악을 소개했습니다. 유럽인의 고양이에 대한 시선의 문화적 배경의 일단을 전달하고 고양이에 관한 텍스트에 대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었다면 다행입니다.

山本潤首都大学東京准教授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2/3)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2/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2. 미나미타니 요시미(南谷奉良)의 응답


 이번에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 번역을 담당한 미나미타니입니다. 전공분야는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인스로, 현재는 근대적 동물‘(modern animals)이라는 관점에서 조이스의 텍스트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셨을지 모르겠는데요, 이번 번역 작업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학부생도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은 조이스와 관련시켜 코멘트를 하는 것이기에, 율리시즈를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알 수 있게끔, “3분만에 알 수 있는 율리시즈의 복잡함이라는 얘기를 생각해 봤습니다. 원하신다면 그 설명으로,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에 대한 비판을 대체하고 싶습니다. 율리시즈의 복잡함이 제대로 반영되고 있느냐는 비판입니다.

 

우선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싶은데요, 저릂 봐주시겠습니까? 어떤 비유를 도입하고 싶은데요, 우선 [율리시즈의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이 책의 페이지를 비유적으로 대지라고 생각하고, ‘대지위에 문자가 심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대지위의 문자에 의해, 1904616일의 더블린에서 일어난 사건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거나 쇼핑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 등, 각각은 뭐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더블린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하 세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율리시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밑바탕으로 하며, 그것이 모종의 지층으로서 지상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조이스 연구에서는 이런 신화적 대응을 호메릭 패러렐[homeric parrels, 호메로스적 평행]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각각, 블룸과 스티븐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에 대응하며,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말, 플롯이나 모티프가 영양의 공급원이 되어 지상의 문자에 들여오게 됩니다.

그리고 오뒷세이아아래에는, 무수한 문학이나 예술, 역사적 담론 등의 뿌리가 퍼져 있는 인터-텍스추얼리티의 지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야기 속에서 스티븐에게 빛이 있었을 때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맥베스가 지상을 향해 뿌리를 뻗고,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의 뿌리와 얽히면서, 대지의 문자에 의미나 이미지를 보급합니다. 이 두 개의 지층이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율리시즈의 지하 구조입니다.

더욱이 율리시즈를 복잡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야기의 뿌리가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소설을 생각할 때에는, 가령 화자에 의한 땅의 글과 등장인물의 말(직접화법과 간접화법)로 이루어져 있는 19세기적인 소설이 상기됩니다만, 율리시즈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 ‘인터-텍스추얼리티의 지층을 설명했습니다만, 더욱이 그 밑에는 세 층의 이야기의 지층이 잠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 등장인물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화자의 지층이 있습니다. 소설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서술하고 정리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화자를 상상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결코 굳건한 화자[이야기꾼]가 아닙니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등장인물과 연관지어 찰스 삼촌의 원리라고 불리는 것인데요, 화자가 사용하는 어구가 반드시 그 화자의 어휘인 것은 아니고, 어떤 때에는 얘기의 진행에 있어서 조명을 받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그런 어구라든가, 그들의 사고언어에서 생길 수 있는 통사법(syntax)을 지상의 글에 반영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화자는 또한 등장인물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말을 내적 독백으로서 그대로 지표에 토해내거나, 혹은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하자면 지하수로서 억압하기도 합니다.

이미 충분히 복잡한데요, 이 이야기의 지층의 가장 바깥쪽에 어레인저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등장인물도 화자도 작자도 아니고, 율리시즈라는 출판물이 가진 문자정보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데리다도 율리시즈 그라모폰에서 비슷한 것을 말합니다만, 율리시즈의 텍스트에는 막대한 참조관계와 잠재적 인과관계에 의한 그물망 조직이 퍼져 있습니다. 어레인저는 그 복잡한 그물망 조직의 특정한 부분을 부각시킴으로써, 독해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삽화에 나오는 말이, 다른 삽화에 나오는 말과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거나, 어떤 장면에서 수백 쪽 떨어진 앞의 대목을 예시적으로 문자 속에 반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외부로부터의 노골적인 조작이 있기에, 우리 독자는 페이지 사이나 삽화 사이의 복잡하게 뒤얽힘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마지막인데요, 텍스트의 최하층에는 작가 조이스의 지층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 작가가 자신의 전기적 기반을 연동시켜 지표로 영양분을 보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금 편의적으로 지층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는데요, 명확한 서열이 있거나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율리시즈라는 텍스트 아래에는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 ‘인터 텍스추얼리티의 지층, ‘작가 율리시즈라는 지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율리시즈의 복잡함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결론입니다. 이런 복수의 지층들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뿌리가 서로 얽힌 결과가, 대지위의 문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를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고구마 뿌리는 아니지만 바로 지하로부터 줄줄이 뽑히게 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조이스 연구에서는 이런 뿌리를 아주 민감하게 다룹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나 글을 인용하고 다른 대지로 이식할 때, 우리는 그 문자의 뿌리에 붙어 있는 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인용합니다. 이른바 신경을 그 뿌리와 동화시키는 것 마냥, 신중한 손놀림으로 빼내는 것을 능사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로 눈을 돌리면,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서는, 이 복잡한 뿌리가 끊기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게 제 비판입니다. 구체적인 비판 대목인데요, 테네브 선생님은 고양이가 발화하는 므크그나오(Mkgnao)’, ‘므르크그나오(Mrkgnao)’, ‘므크르크그나오(Mkrkgnao)’에 관해서, “조이스는 인간에게는 거의 발음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블룸의 고양이는 의인법으로 묘사되는 고양이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율리시즈의 복잡성에서 보면, 그것은 과연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저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객관주의적으로 재현된 목소리인가? 도대체 누가 적은 말인지, 이것들이 중요한 해석 요건입니다.

고양이의 발화 ‘Mkgnao!’를 문자 그대로 하면 무슨 말인가? 우선 고양이는 자주 일본어의 표기처럼 ~’하고는 울지 않죠. 그런 게 아니고, [고양이의 울음소리 흉내를 내고] ‘*****’이라고 울죠?(웃음) 그렇지만 그 소리를 문자로 적는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인간의 언어의 변별 음소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편의상 ‘Mkgnao!’라고 음을 들어맞게 해서 모방적으로 고양이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Mkgnao!’라는 음소를 선택해서, 이 대지 위에 옮겨 적는 것인가? 이것에 답하려면, 앞서 설명한 복잡한 이야기의 뿌리에 의한 해석이 필요해집니다.

원문을 재확인해보면, 블룸이 직접화법으로 Milk for the pussens, he said.”라고 하며, “, 우유를 줄께라고 고양이한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혹은 응답같은 것으로서, “Mkgnao!, the cat cried.”와 고양이의 이 묘사됩니다. , ‘Mkgnao!’는 일차적으로는 약간 철자는 다르지만 밀크’(Milk)를 달라고 조르는 고양이의 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Mkgnao!’라고 적고 있는 것은 블룸일 수 없습니다. 블룸의 의식을 통한 고양이의 말을, 화자나 어레인저‘Mkgnao!’라는 문자로 적는 것입니다.

타이핑을 해야 한다(타이포그래피컬)는 이유 때문에 ‘Mkgnao!’밀크를 원해를 의미한다고 암시되었을 때, 독자는 어레인저에 의해 다른 삽화로 초대된다는 것이 판명합니다. 어레인저는 독자의 주의를 밀크에 걸게 함으로써, 첫 번째 삽화의 마테로 탑의 옥상에서 마라카이 말리건이 휘저어 뒤섞인 면도용 흰 액체를, 게다가 마테로 탑에서 마시는 밀크[우유]를 상기시킴으로써, 첫 번째 삽화와 네 번째 삽화가 서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특히 고양이의 발화가 ‘Mrkrgnao!’이 됐을 때 명확해졌는데요, 이곳에는 호메릭 패러렐(homeric parallels)’의 지층이 영향을 미쳤으며, (마라카이 말리건에게 부여되는 신화적 대응의 속성으로서) 상인이나 도둑의 비호자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철자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삽화에서 블룸은 고양이가 생각하고 있을 법한 것을, “Prr. Scratch my head. Prr.”(“[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며] 프르르. 내 머리를 긁어 달라고. 프르르.”)라고 대변하는 것처럼, 그 고양이에게 말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직접 화법의 므크그나오’(Mkgnao!) ‘므르크그나오’(Mrkgnao!) ‘므르크라그나오’(Mrkrgnao!)의 발화도 그렇고, 고양이의 로 간주된 발화는 모두 인간중심적으로 들리며, 인간중심적으로 적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블룸의 고양이는 그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라는 결론은 끌어내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삽화로 뻗고 있는 뿌리가 잘라져버린 것은 아닌가, 이것이 제 비판입니다.

또한 율리시즈의 복잡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블룸의 발언의 근본에 연결된 동물론의 계보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블룸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에 대해 이 녀석들은 인간이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 녀석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녀석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대목은 몽테뉴의 저작에서 인용한 것임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과 인간의 동등성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웬만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도 또한, 대체로 비슷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끼리 완전히 흡족한 의사소통이 존재하고, 게다가 같은 종류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 사이에서도 상호 이해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宮下志郎 訳, レーモン・スボンの弁護, 白水社, 2010).

 

일찍이 16세기의 시점에서 몽테뉴는 인간과 동물의 서열이나 인간에게 특유하다고 간주되는 역능에 회의의 시선을 보내고, 동물에게 뛰어난 추론·공감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블룸이 몽테뉴를 인용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가축업자로서 일했던 경험도 있으며,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 전반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육·수송·도살·정육이라는 과정에 있어서 동물들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고려하고, 거리에서 보이는 동물의 보건소 시설 “Dogs’ home”(“더블린 동물학대 방지 협회가 운영하는 유기견이나 유기 고양이를 관리하는 시설)에 의식을 기울이는 등, 블룸은 동물의 고통을 하나의 중요한 근대적 사회문제로서 파악했습니다.

블룸이 생각하는 동물의 고통이라는 문제가 의식적인 운동에 끌어들여지게 된 것은, 그것이 기독교의 자선정신과 합류한 19세기 초반부터입니다. 사실 율리시즈가 간행된 1922년부터 100년 전인 1822년에는, 최초의 동물법인 마틴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법안을 제기한 아일랜드의 하원의원인 리처드 마틴에게서 따온 통칭입니다만, 이 법이 기본적인 원안이 되어, 이후, 세계 각국으로 근대적인 동물법으로 수출됩니다. 블룸과 고양이의 주고받기를 볼 때에는, 이런 19세기적인 동물론의 수맥도 동시에 사정거리에 넣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南谷奉良一橋大学博士課程)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마지막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년

‘마지막 유대인’

: 데리다, 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最後のユダヤ人」 : デリダ, ユダヤ教とアブラハム的なもの

URL http://hdl.handle.net/10748/7043

Gisèle Berkman, «ʻLe dernier des juifsʼ : Derrida, le judaïsme et lʼabrahamique», Colloque international «Commemorating the10th Anniversary of Jacques Derridaʼs Death», Shanghai Jiao Tong University, le 27 septembre 2014.

지젤 베르크만

(일역 : 佐藤香織 , 首都大学東京非常勤講師)


** 일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또한 프랑스어 원문과 대조하지 않았다. 


 데리다가 세상을 뜬지 10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살아남기[생존]라는 놀라운 현상에 의해 그의 텍스트가 우리 곁에 도래하고 있는지도 10년이 되려고 한다. 마치 지하납골당〔크립트〕에서 텍스트가 팩스로 보내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저 지하납골당에서 데리다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데리다의 매장을 위해 리스-오랑지스(Ris-Orangis)의 묘지에 갔을 때, 스스로를 “마지막 유대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의 매장은, 유대인의 의식에 입각해 치러질까라고 자문한 적이 있음을 떠올린다. 그것은 10월의 구슬픈 맑은 날이었다. 매장은 유대식이 아니었다. 브누아 페타스의 전기에는, 비유대인인 아내 마르그리트가 사후에 그와 다시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데리다는 유대인 구역에 묻히기를 거부했다고 한다.1) 여기서 보이는 것은, 그의 사고에 따라다녔을 유대성〔judéité〕에 대한, 유대적 조건에 대한 불충실한 충실성〔fidélité infidèle〕에 관한 좋은 예이다. 유대적 조건이라는 문제가 담긴 이런 유산을, 그는 점차 자신의 에크리튀르와 사고의 중심에 두게 됐다. 여기서는 주제 이상의 것이 있으며, 그것은 그의 평생 동안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중심적 동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기보다 더 크다. 그것은 충동이며, 아물지 않는 상처이기도 하며, 중심적 외상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자신을 ‘마지막 유대인〔dernier des juifs〕’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했으며, ‘아랍의 유대인’, 자칭 마라노2)였다. 이런 조건, 혹은 오히려 (인질이란 무조건이라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유대적 무조건은, 폭로되어 있는 동시에 비밀이기도 한 그의 사고의 동인이 됐다. 모리스 블랑쇼는 『끝없는 대화』의 「유대인이라는 것」이라는 장에서, “선택〔élection〕이란 변양이다”3)라고 썼다. 데리다는 블랑쇼와 매우 가까웠기에, 이런 표현 방법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시정권의 반유대적인 법의 이름으로 1942년에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데리다는 수탈〔収奪, expropriation : 탈고유화〕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할례고백』에서 그가 말하듯이, 그것은 창설적인 사건이었다. “1942년, 벤 아크눈 고등학교에서 피부색이 까맣고 작고 아주 아랍적인 유대인이 쫓겨났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부모도 친구들도 그 누구도, 그에게 그 이유를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4)

 탈구축은 뿌리 뽑음〔déracinement〕, 이화〔異化, dissimilation〕, 그리고 추방〔exil〕이라는 이 경험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아낸 것일까? 이런 경험은 유대성〔judaïté〕과 역사적인 파국 ― 유대성이 위태롭게 사라져 없어지게 할 정도의 파국 ― 의 비할 데 없는 경험에 다름 아니다. 데리다는 합일적이고 공동체적인 모든 융합에 항상 비판적이며(이 점에 관해서는 『우정의 정치』를 다시 읽어주기 바란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정세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결코 자신의 유대성을 부인하지 않았고, 몇몇 상황에서는, 2004년에 장 비른바움(Jean Birnbaum)과 한 마지막 대담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 유대인〔nous,les juifs〕”이라고 말하는 데 이르렀다.


우선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확실히 ‘우리’라고 말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는데요, ‘우리’라고 말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저는 모든 문제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며, 그 필두로, 이스라엘과 모종의 시오니즘의, 파멸적이고 자살적인 정책이 있습니다…만, 이 정도의 문제가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문제를 저는 제 ‘유대성’에 대해서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제가 제 ‘유대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죠. 몇 가지 상황에서는, 저는 항상, ‘우리 유대인’이라고 말하죠. 이렇게 못살게 들볶이는 ‘우리’는, 제 사고 속에 있는, 더없이 불안한 것의 핵심에 있습니다. 그것〔그의 사고〕은 제가 거의 농담을 말할 생각도 없이, ‘마지막이자 최저의 유대인’이라고 별명을 붙인 자의 사고입니다. 그것은, 제 사고 속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심원하게도 기도〔eukhé〕에 대해 말한 것도 해당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원래 문자 그대로, 기도입니다. 몇 가지 상황에서는, 그러니까, 저는 ‘우리 유대인’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프랑스인’이라고 말하는 것도.5)


「유대성」이라는 제목의 회의에서 행해진 「아브라함, 또 한 명의」라는 멋진 강연에서, 데리다는 그의 인생의 ‘이론적 뼈대’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것의 독해에 매달렸다. 그가 보여준 것은, 어떻게 해서 유대성의 경험은, 뗄 수 없는 대립하는 수많은 조합 ― 그것은 불충실의 충실함이라는 아포리아의 모든 것이다 ― 사이에서 항상 그를 옥죔으로써, 그에게 다양한 구별을 불가능 혹은 비정통적인 것으로 만드냐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이런 것이 “탈구축뿐만 아니라, 계산할 수 없는 것의 내구력에 노출된 결정의 윤리를 수립하는 것, 아포리아로 운명지어지고 바쳐진 결정으로서의, 내 안의 타자의 결정으로서 내가 결정한다는 법에 노출된 결정의 윤리를 수립하는 것”6)으로 등을 떠밀렸다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유대성에 관한 엘리자베스 웨버와의 대담을 인용한다면, “… 제가 할 수 있는 것, 말할 것의 모든 것 속에서, ‘물론 저는 유대인입니다’와 ‘물론 저는 유대인이 아닙니다’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곧바로 부인에 들어섭니다 ―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의 모든 것 속에, 유대적 조건이라는 조금 어설픈 동시에 아이러니한 방식에서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7)

 유대성의 경험은 탈구축의 요인일까? 불가능한 것, 아포리아, 이중구속, 무한한 분할 가능성, 산종 ― 이런 사고의 행동이 모두 유대성의 경험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이 가설은 아직은 너무 단순하다. 그리고 아마, 이 가설은, 유대교성과 유대성 사이에 위치하는 간극 속에 있다. 여기서 거론되는 유용한 구별은, 역사가 〔요셉 하임〕 예루살레미(Yosef Hayim Yerushalmi)가 유대문화 및 종교로서의 유대교성〔judaïté〕과, 반드시 종교적이지는 않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의 경험으로서의 유대성〔judéité〕 사이에 설정된 것이다.

 처음에, 나는 유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데리다의 사상의 진전을 확인하는 데 매달렸다. 유대성은 처음에는 외적인 동기였으나, 1인칭의 에크리튀르의 동인이 되며, 전대미문의 개념들의 제조소가 됐다. 거기서 “후기 데리다”에 의한 정치적 관심이 말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이렇게 질문을 제기했다. 장-뤽 낭시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탈구축에 착수한 것과 똑같이, 데리다는 유대교의 탈구축을 시도한 것일까? 이 질문에 의해, 나는 데리다가 “아브라함적인 것”이라고 명명한 것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데리다는 몇 번이나 전시의 반유대주의 및 알제리의 벤 아쿠눈 고등학교로부터의 퇴학이 그에게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되돌아갔다. 그는 이로부터 자신에 대한 이타성[타자성]의 경험을 끌어냈다. 이타성의 경험은 정체성에 관한 권리 요구에서부터 가장 멀리 위치해 있다 ― 이런 정체성의 권리 요구는 프랑스에서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의 엄밀하게 동일적인 발상을 둘러싼 장-클로드 밀레르나 베니 레비의 저작에서 발견된다.8) 다만, 데리다는 유대교성을 다루는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유대성으로 향한다.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런 텍스트들은 주로 『에크리튀르와 차이』에 수록되어 있으며, 레비나스, 블랑쇼, 자베스 같은 중개자의 독해가 그에게 가져온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폭력과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으로 레비나스를 다룬 멋진 논고〔잡지 초출은 1964년〕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말하기를, 뿌리 깊은 관념론의 공범자인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 대해 레비나스가 겨눈 비판에 싸움을 건다. 그러나 『그라마톨로지에 대해』(1967년) 이후, 그 자신이 “현전과 로고스중심주의의 형이상학에 관한 하이데거적 상황의 양의성”9)을 비판하면서, 하이데거의 사고는 아직 뿌리 깊이 현전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마치 레비나스의 독해가 데리다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고, 데리다 자신이 “그리스적 로고스에 의한 포위의 무한한 힘”이라고 나타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도우려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우선 레비나스에서 유대사상가만을 보기를 거부한다. 「폭력과 형이상학」이 묻는 것은 레비나스에게서의 그리스적 및 유대적 유산의 각각이다. 레비나스의 사고는 철학을 그 고유한 경계의 너머로, 전적으로 다른 것의 극한인 윤리적 극한으로 이끈다. 『율리시즈』에서의 조이스의 유명한 말, “유대-그리스인은 그리스-유대인이다[Jewgreek is greekjew]”를 인용하면서 데리다는 자문한다. “우리는 유대인일까? 우리는 그리스인일까? 우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 차이가 아마, 역사라고 불리는 것의 통일성이다.”10) 당초 『비평(Critique)』지에 발표된, 레비나스론과 동시기의 논문 「에드몽 자베스와 책의 물음」은 “에크리튀르의 탄생과 정념=수난(passion)”11)으로서의 유대교라는 착상[아이디어]을 발전시킨다. 이 아이디어에 새겨져 있는 것은, 데리다의 유대교성에 대한 진정한 중개자로 볼 수 있는 모리스 블랑쇼에 의한 독해의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이다. 데리다는 각주에서 “중요한 연구들 중” 1964년 5월의 『신프랑스평론(NRF)』지에 발표되고, 블랑쇼에 의해 『끝없는 대화』에 「중단 : 리만 평면 위에서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그리고 『우정』에 부분적으로 재수록되는 블랑쇼의 논문 「중단」을 인용한다. 데리다의 이 논문에는, 작가가 후퇴하는 것[retrait]이나 전적으로 다른 것의 정념=수난으로서의 유대성에 대한, 블랑쇼에 의한 성찰의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에크리튀르의 정념=수난, 문자의 사랑과 인내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유대인>이 그 주어인지 <문자> 그 자체가 그 주어인지를 말할 수 없다”12)고 데리다는 적는다. 또한 모세에 의해 부서지고, 이어서 신이 다시 준, 율법이 적힌 석판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에크리튀르는 기원에 있어서는 봉인된 제2의 것이다.”13) 블랑쇼에 관해 말하면, 『피안으로의 행보』부터 『끝없는 대화』를 거쳐 『재앙의 에크리튀르』로, 그리고 1990년의 『철학잡지』 데리다 특별호에 실린 「자크 데리다 덕분에(자크 데리다에게 감사를)」에 이르기까지, 그는 부서진 석판이라는 일화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했다.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보자. 자신의 사고의 길 그 자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것과 고유화의 탈구축으로 데리다가 전진할수록, 그의 언어는 특이한 관용어Idiom)를 점점 더 가다듬어 가는데, 그것은 이른바 유대적 원천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이다. 『조종』이나 『할례고백』의 말은, 교배하고[혼성화되고] ‘마라노화한’ 이타성의 요소가 보태져 변양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전회는 1970년대 『조종』과 함께 생겨난다. 다단(多段)을 사용한 이 책의 레이아웃은 탈무드의 그것을 연상시키지만, 이 책과 함께 데리다의 유대교성에 대한 특이한 관계가 깊어진다. 이 책이 헤겔과 주네14)를 병치시켜서 동시에 독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후 데리다의 몇 가지 동기가 적절한 위치에 놓인다. 동기란 할례의 상처이며, 또한 『조종』의 표현을 취하면, “무가 되지 않는 것〔le pas-rien〕” 즉 “있는 것이 아니나 무가 아닌 잔여, 엉뚱한 잔여”이다. 이런 표현에 의해 『조종』에서 “지양〔Aufhebung〕에 저항하는 힘들”이 환기되는데, 이 힘들은 헤겔의 논의의 이음매를 전위(転位)시킬 수 있다.15) 무가 되지 않는 것, 이 실체화될 수 없는 잔여는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에서의 헤겔의 경악의 바로 그 정반대이다. 헤겔은 성궤 안에서 바로 “무〔rien〕”를 보고 있으니까.


장막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Rien derrière les rideaux〕. 비유대인이 막사를 열었을 때의, 사람들이 그에게 막사를 열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혹은 그가 막사를 침범했을 때의, 생활 속에, 혹은 신전 속에 그가 들어왔을 때의, 순진한 놀라움은 이로부터 생긴다. 비밀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 의례적인 우회를 여러 번 거친 후, 그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 무〔rien〕밖에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중심은 없다, 마음(심장)은 없다, 공허한 공간, 아무것도.16)


하지만 [이런 헤겔의 주장에 반해] 유대성은 무가 아니다[없는 게 아니다]고 덧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는, 어떤 불가능한 고백의 표명, 즉 유대인이라는 것은 성가신 문제점 중 하나라는 표명을 따라 나아간다. “유대인은 또한 타자이기도 하며, 즉 나이면서 타자이다. 나는 ‘유대인, 그것은 본질이라는 것을 갖지 못하고, 무엇 하나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갖지 못하는, 혹은 그 고유한 본질이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전혀 갖지 못하는 데 있는 그런 타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유대인인 것이다”17)라고 데리다는 『쉽볼렛 : 파울 첼란을 위해』에서 쓰고 있다. 이로부터 동시에 도출되는 것은 유대인의 증인의 보편성과 “유대적 관용어(idiom)의 전달 불가능한 비밀”, 그 특이성, “발음될 수 없는 그 이름”이다. 혹은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향한 표현방법을 다시 다루고,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것”은 이 이타성의 내밀하고 특이한 경험을 이루게 될 것이다.

 데리다가 온몸으로 유대성의 경험에 직면할 때, 아포리아가 상처의 자리, 즉 외상이 언어와 사고의 다수의 파편으로 조각나 울려 퍼지는 장이 된다. 『할례고백』은, 임박한 어머니의 죽음보다 먼저 다 쓰기 위해 허둥대며 서둘러서 쓴 것처럼 읽힌다. 데리다가 제프리 배닝턴의 텍스트 아래에서 전개하는 것은, 1976년의 사적인 노트에서의 다수의 발췌의 인용으로 이루어진 숨이 찬 띠 모양의 에크리튀르이다. 할례의 베인 상처, 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이 홈에 의해 계약(alliance)이 맺어진다. 이 상처는 에크리튀르를 창시하는 알려지지 않은 사건, 에크리튀르의 비할 데 없는 방아쇠가 된다. “할례는 나를 여기에 쓰게 하는 것의 실마리이기를 계속한다. 버티는 것이 고작 하나의 실로 연결되어 있어서, 상실될 우려가 있다고 해도.”18)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은 “사이”라는 비밀의 법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 경우, ‘사이’는 이 새로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문화와 다소 비밀스러운 유대교 문화의 사이이다. 더 말한다면, 이 유대교 문화는 비시정권의 법률에 의해 프랑스 국적을 빼앗김으로써 프랑스 내에서 추방된 알제리계의 어린 유대인이었던 그[데리다]가 어느 정도 묵살해온 문화이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나라고 추방되고 교양을 쌓아 국제인이 되는, 이 알제리의 어린 유대인의 교잡한[복잡한, 혼종적인] 정체성. 그의 진짜 이름은 [자크가 아니라] 자키로, 예언자와 똑같은 울림의 엘리라는 [두 번째] 이름도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하임(히브리어로 ‘삶’), 두 명의 할아버지는 모이즈[외가]와 아브라함[친가]19)이라는 이름이다. 부모는 엘리라는 이름으로 데리다의 시민등록을 굳이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가족보다 자국에서 오히려 인정받고, 자국보다 유럽에서 오히려 인정받고, 유럽보다 오히려 세계 도처에서 인정받는다. ‘야만인’에서 ‘고집쟁이’로 불렸던 나이지만, 라틴어를 스스로 말하고, sA을 읽으려고 라틴어를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취학 중에 라틴어의 지식을 조금 얻었기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할 수 있었다. 비시정권은 라틴어를 초등학교 6년의 필수로 만들었는데, 그 직후, 라틴어로 말하는 ‘정원제한[numerus clausus'’의 명목으로 우리에게서 프랑스 시민권을 앗아간 다음, 나를 고등학교에서 쫓아냈다.”20)

 『할례고백』이 철학에 의한 아카데믹한 문장 표현의 탈구축에 있어서, 데리다가 가장 멀리까지 가는 텍스트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불가능한 것이라는 형식의 경험을, 즉 “유대인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아포리아 그 자체를 우리에게 맡김으로써, 그는 아카데믹한 문장 표현의 다양한 코드를 폭발시킨다. 그것은 할례의 기억 없이 상처 위에 직접 쓰인 텍스트이다. 이 상처는 『쉽볼렛』, 『아카이브의 병』 같은 다른 많은 텍스트에서 환기되며, 이 상처 위에 데리다가 저작들의 일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유대교성을 언급하는 것은 언어를 언급하는 것, 더욱이 시적인 것의 가능성 그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다.21)  『할례고백』은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에 이르기까지 추구되는 운동을 개시한다.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에서는 유대교성의 문제와 언어의 불가능한 고유화라는 문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젠츠바이크는, 독일어 속에서 언어학적으로는 주인이 되는 언어를, 이디시어 속에서 동료들 사이에서의 ‘유대의’ 언어를, 그리고 히브리어 속에서 기도의 언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데리다는 과거의 그 자신의 어린 ‘아랍계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해서 이 세 가지 틀이 금지되고 있는가를 힘차게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묘사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프랑스 ― 마그레브계 유대인의 전형적인 상황이란 ― 또 다시 강조해두자 ― 거기에 있어서 수탈(收奪, expropriation)이 다음 세 가지의 믿고 의지하는 것의 상실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상황인 것이다.”22) “식민지의 프랑스어”를 얘기하는 데리다는 히브리어도 유대계 스페인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데리다가 한 것처럼, 이런 근원적인 탈고유화를 표시할 수 있는 저술가는 거의 없다. 이 근원적인 탈고유화에 있어서, 아슈케나지계 유대인23)과 세파르디계 유대인,24) 신앙을 가진 유대인과 신앙을 갖지 못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아이들과 이스라엘 국가 ― 데리다가 신식민지주의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비판한 이스라엘 국가 ― 사이에서의 유대적 경험이 구성되고 있지만, 이 경험은 데리다가 표시하고, 또 다시 표시하려 한 다양한 차이를 넘어선다.

  몇 개의 텍스트의 행보를 시계열적으로 추적하면, 수많은 차이의 차이에 의해 찢겨진 의식, 국지적인 것, 국가적인 것, 세계적인 것 사이의 다양한 차이화에 의해 찢겨진 의식이, 탈구축의 작용의 이른바 모체(매트릭스)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느냐라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탈고유화〔expropriation〕의 ‘탈〔ex〕’, “‘함께〔cum〕’의 원〔cercle〕, 즉 circum〔라틴어의 원, 서커스〕이라는 곳의 서커스〔cirque du circum〕”,25) 기저재〔基底材, subjectile〕의 ‘아래〔sub〕’ ― 이 모든 전치사는 언어와 사고의 수많은 말투를 변화시킨다. 데리다는 이런 말투에 의해, 항상 기원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탐구함으로써, 초월론적인 기원의 학(아르케올로지) ― 고유한 것의 탈구축 ― 을 작동시킨다. 그때 데리다는 『끝없는 대화』의 「유대인이라는 것」이라는 장에서의 블랑쇼의 발언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대인은 몇 가지의 기원〔des origines〕이 인간이며, 즉 기원이라는 것에 관련된 인간이다. 기원에 머묾으로써가 아니라, 기원에서 거리를 두고, 단초(端初)의 진리는 분리 속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몇 가지의 기원의 인간인 것이다.”26)


데리다는 유대교성에 관한 주요한 개념의 몇 가지를, 그에게 고유한 철학적 관용어로 재번역했다. 그것과 동시에, 그는 이런 개념들을 정치적인 목적지 ― 데리다에게서 그것은 도래할 것〔lʼà-venir〕의 개념이다 ― 에 대한 경유지로 함으로써, 유대교성의 문화적인 차원에서 우회시켰다. 이렇게 데리다는 메시아성 및 유일성에 대한 개념들을 만들고 가다듬는다. 그 기점이 되는 것은 메시아주의 혹은 일신교에서의 신의 통일성이 의미한 것이며,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한 미래에로 이 이름들을 다시 던져 넣는다[되돌려준다]. 그는 『아카이브의 병』에서 『맑스의 유령들』에서 가다듬은 ‘메시아성’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다. 그는 예루살레미가 프로이트의 『모세라는 남자와 일신교』를 논한 책의 재독해를 기점으로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가다듬고, 이때 유대교에 관한 이 위대한 역사가가 프로이트의 죽음을 넘어서 프로이트에게 보낸 유별난 독백을 장황하게 분석하고 있다. 데리다는 “메카-아카이브는 존재하지 않는다”27)고 적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것은, 아카이브가 과거의 죽은 자료가 결코 아니라, 기록 보관자에 의해 작성되고 “환원할 수 없는 미래의 경험”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환원 불가능한 경험을 기점으로 하여 메시아성은 요청[호명]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갖게 된다. 재번역 및 우회〔détournement〕와는 다른 효과인 유일성에 관해 말하면, 유일성이란 일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일자(l’Un)가 존재하자마자, 살인이, 상처가, 외상이 있다. 일자는 타자로부터 몸을 지킨다”28)고 데리다는 쓴다. 『자홀 : 유대인의 역사와 유대인의 기억』에서 “‘상기하라’는 명령이 한 민족 모두에게 종교적 명령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뿐이며, 다른 민족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다”29)고 예루살레미는 적는다. 데리다로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30) 과거와 미래라는 관심사를 오로지 이스라엘에 두는 이런 글이 정당한가라고 자문하고 …, “적어도 이 선택의 논리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유일한 이름으로, 이 예상과 이 명령에 있어서 인정되려고 하는 모든 장과 모든 민족은 부르는 것이 아닌 한에서는…”31)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아듀 : 엠마뉘엘 레비나스』에서 비슷하게 행동한다. 데리다는 유대민족이 토라의 역사적인 사자(使者)를 자칭하거나, 특권적인, 더 나아가 유일한 해석자를 자칭하거나 하는 것을 레비나스가 고발했을 때, 레비나스 안에서 자신의 발언의 울림을 찾아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선택을 지정하는 것이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에 제지되는 채로 되지 않는 선택을 사고해야 할 것이다何らかの民族や何らかの国家におしとどめられるがままにならないような選びを思考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고 주석을 단다.32) 이리하여 유대의 전통의 몇 가지 어휘가 변양되고, 방향을 돌리고〔détourné〕,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것에 대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잠재력을 데리다에 의해 담지되는 것이다.33)

 이렇게 유대적 경험은 “사막 속의 사막”이라는 특이한 장소에서 베껴 써진 듯하다. 데리다에게서 이 장소는 추방과 도래할 것의 경험이라는 비할 데 없는 과장법을 구성한다. “도래하는 대로 되는 것到来するがままになっているもの34)을 나타내는 이 “사막 속의 사막”의 놀라운 이미지가 다듬어졌던 것은 『신앙과 지식』에서이다. 코라(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데리다는 이 비할 데 없는 장을, 모든 장에 있어서 다른 것으로서, 형태를 부여하는 무정형적인 것으로서 이론화했다)가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 “사막 속의 사막”이 있을 것이다. 즉, 그리스적인 것과 유대적인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사이에서 작동하는 게 아닐까? 기원을 정하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함으로써 모든 것은 작동하는 게 아닐까? 사르트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고찰』에서 “본래적인” 유대인과 “비본래적인 유대인” 사이에 분할선을 집어넣는데, 데리다는 강연 「아브라함, 또 하나의」에서 이런 분할을 비판한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자신의 유대적 유산과 그에게서의 라틴-기독교적 문화의 유산을 분리하는 것을 항상 거부했다. 라틴-기독교적 문화란, 『신앙과 지식』에서의 조어를 거론한다면, 바로 “세계 라틴성〔mondialatinité〕”35)의 문화이다. 그는 마라노이며, 마라노이기를 계속하지만, 그는 이것을 『할례고백』에서 표명하고 있다.


저는 프랑스의 가톨릭 문화에 속하는 일종의 마라노이며, 기독교인의 신체도 갖고 있는데, 그 신체는 많든 적든 뒤틀린 계보에 있어서, sA(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계승되고 있다 … 마음속으로 몰래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말하지도 않는, 그런 마라노에 나는 속해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공적인 경계 중 어느 쪽에서 인정받은 마라노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라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결코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 빛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몸을 불태울 각오로, 〔신과 나 사이의〕 불가능한 대면이라는 해괴한 법 아래에서 쓴다는 단지 그 때에….36)


 데리다에게서 <역사〔Histoire〕>는 항상 어떤 출처〔provenance〕와 다른 출처 사이에서 생긴다. 그리고 데리다가 “유대인 문제”로 채운 모든 텍스트에서 사이라는 이 논리를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은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es와 책의 물음」이라는 논문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로 얘기됐다. “<유대인>의 자기에의 동일성 등은 아무 실재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자기임의 이 불가능성의 별명일 것이다. <유대인>은 찢겨져 있으며, 그것도 우선, 이의성(異義性, 알레고리)자의성(字義性)이라는 문자의 두 가지 차원 사에서 찢겨져 있는 것이다.”37) 같은 시대에 쓰여진 논문인 「폭력과 형이상학」에서도 다음의 문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차이 속에 살고 있으며, 이 차이가 아마 역사라고 불리는 것의 통일성이다.” 유대적인 것과 그리스적인 것,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등의 사이에서 구성되는 이 차이의 공간 그 자체에 있어서 항들은 교류하며, 교차(키아즘)를 형성한다. 셰익스피어의 더없이 양의적인 연극인 『베니스의 상인』에서 데리다가 시행한 놀라운 분석을 참조한다면,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사이, 즉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사이라는 사례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다시 유대교인이며, 유대교인은 이미 기독교인이다. 그들은 교류하고 술책을 부리며, 금전상의 화해에 있으며, 거래를 한다 …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교묘하게 짜여진 협상의 이 장면에서, 타자는 한 명의 다른 것이며, 동시에, 각각이 다른 쪽을 제 것으로 삼아야만 한다.”38)

 데리다의 “유대적인 것”은 말하자면 분할되어 있으며, 분할 그 자체이다. 유대교와 유대성 사이에 균열을 넣는 것, 고유한 것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아카이브의 병』에서, 데리다는 예루살레미와 대립한다. 충분히 작동하는 것은, “더 많이 - 더 적게”라는 논리이며, 즉 “<유대인〔Juif〕>보다도 유대인적〔juif〕이며, 또한 <유대인>보다도 유대인적이지 않다”39)는 논리이다. 이것은 마라노의 일격이며, 거짓말을 하는 진실이다. 그렇지만 데리다에게서는, “유대교는 탈구축이다”라는 언명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장-뤽 낭시는 『탈폐쇄 : 기독교의 탈구축』에서 탈구추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탈구축은 “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기원부터 탈구축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의 시작부터, 기독교는, 마치 기원에 있어서의 놀이=느슨함, 간격, 고동鼓動, 개방성에 관계되었듯이, 기독교 자신의 기원으로 관계되기 때문입니다.”40)

 이런 사고의 두 가지 행태는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 작용한다. 데리다는 『신앙과 지식』에서 (『단순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전개된) 반성적 신앙에 대한 칸트적 개념 속에 신의 죽음의 도래를 봤지만, 낭시에게서는 일신교의 유대적 창의(創意)에 대해서조차 무신론을 읽어낼 수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이라는 형상〔figure〕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는 세계에서 통합되고, 데리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일신교를 나타내고 있다. “이 두 개의 일신교는 ‘일신교’가 일자에 대한, 살아 있는 일자에 대한 신앙과 똑같이 유일신에 대한 신빙信憑을 의미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생각나게 하는 점에서, 그리스-기독교적인 유럽, 이교도-기독교적인 유럽의 심정과는 너무도 이질적이며, 또한 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유럽과도 꽤 이질적이다.”41) 데리다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유대교는 기독교와 다르다. 낭시는 말하자면, 야곱(자크)의 묵시록의 복음서를 주제로 데리다를 다룬 텍스트에서 교묘하게 보여줬듯이, 유대인을 유대-기독교적인 배치 구성으로 흡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텍스트에 의해, 낭시는 “유대-기독교”42)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데리다가 “아브라함적인 것”이라고 명명한 것에 대한 실마리를 따라가야만 할 것이다. “아브라함적인 것”은 이삭의 결박을 둘러싸고 은닉화[隠匿化, 크리프트화]된 어떤 특이한 텍스트의 중심적인 동기를 제공한다. 비밀을 논하는 이 숨겨진 텍스트는 『죽음을 주다』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파토츠카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단적 논고』로부터,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전율]』이라는 매개에 의해 도입된 아브라함에 관한 성찰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파토츠카의 논고는 플라톤에서 기독교성에 이르는 “다이몬적인” 억제의 역사를 구축하고 있다. 이 역사에서 유대적 예외는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을 주다』에서는 아브라함의 희생의 중단이라는 중심적 신화를 둘러싸고 모든 것이 신속하게 전개된다. 이 신화에는 법의 힘이 주어져 있으며, 데리다는 텍스트의 말미에서 문학에 관한 아주 특이한 계보학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 계보학은 희생이 중단되는 바로 그 장소에서 창설되는 아브라함의 비밀이라는 전통에 의해, 은닉화[隠匿化, 크리프트화]되는 동시에 정초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전설 속에 문학을 다시 정착시키기 위해, 데리다에게는, 출발점으로서 이 희생이 우화가 아니라는 것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아브라함의 전설]을 우화로 보는 것, 그것은 철학적 혹은 시적 보편성에 잠입하는 것, 그 역사적인 사건성을 해소하는 것이다.”43) 그러나 텍스트의 그 어떤 계기에 있어서도, 데리다는 명시적으로 이 아브라함의 사례를 탈구축 불가능한 것으로 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는 이 장소를 정의에 있어서 두는 것이다. 또한 어쩌면 그는, 아브라함의 전통이 세계적인 규모로 흡수되고 있다고 깨닫고 있다. 『신앙과 지식』에서, 유대적 예외의 생성에 대한 불안으로 찬 이런 종류의 물음이 발견된다. “… 이 존속은, 세계화가 포화된 날에는 (아마 이미 도래하고 있으나) 어떻게 될까?” 그때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인용하는 것이다. “나〔레비나스〕는 유대교를, 성서에 문맥을 주고, 성서를 읽게 만들어 놓을 가능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또한 데리다는 〔세계화〕는 “최악의 것, ‘최종해결’이라는 근본악과 마찬가지로, 살아남기에 있어서의 위협적인”44) 문제이라고 덧붙인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는 전통을, 아직 사고되지 않는 그 다름에 대치하는 방식은 분명히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의 환원 불가능한 멜랑콜리를, 아브라함의 이름을 딴 문장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탈구축의 물음은, 이 모든 멜랑콜리의 중심에 있다. 왜냐하면 멜랑콜리는 항상 어떤 미래와 관계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적인 종교들이 더 이상 지배력을 갖지 않게 된 세상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45) 이 질문은 참신한 방식으로 접목되고 재번역되는 도래할 역사 전체에도 관련되어 있다. 상하이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런 역사의 일례이다. 나치즘의 지배 아래서, 상하이는 무비자의 유대인을 맞아들인 세계에서도 드문 도시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전적으로 다른 역사이다. 똑같은 역사이지만, 또한 다른 역사인 것이다.




1) 〔일역자〕 Benoît Peeters, Derrida, Flammarion, 2010, p. 659.〔『デリダ伝』原宏之・大森晋輔訳, 白水社, 2014年, 736頁〕

2) Cf. “… 나는 더욱 더 진지하게 마라노라는 형상과 놀고 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더욱 너는 유대인일 것이다”(«Abraham, l’autre», in Judéités. Questions pour Jacques Derrida, J. Cohen et R. Zagury-Orly (dir.), Galilée, 2002, p.22.). “실제로 스페인의 마라노들은, 단 하나의 비밀스런 기억마저 잃고 분산하고 복수화되었을지도 모른다”(Foi et savoir. Les deux sources de la «religion» aux limites de la simple raison, Seuil, 1996, p.100.) 〔「信仰と知──たんなる理性の限界における「宗教」の二源泉」松葉祥一・榊原達哉訳, 『批評空間』II-14, 177頁〕). 또한 “마라노들에게 나는 항상 몰래 그들에게 동일화됐다(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Mal d’archive, Galilée, 2008, p.111〔『アーカイヴの病』福本修訳, 法政大学出版局, 2010 年, 115頁〕)도 참조.

3) 〔일역자〕 Maurice Blanchot, L’entretien infini, Gallimard, 1969, p.185. 블랑쇼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안드레 네에르(André Neher)의 분석을 참조하고 있다.

4)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Derrida, Circonfession, Seuil, 2008, p.57.

5) Apprendre à vivre. Entretien avec Jean Birnbaum, Galilée, 2005, p.41.〔『生きることを学ぶ, 終に』鵜飼哲訳, みすず書房, 2005年, 45-46頁〕. “누군가가 ‘우리 유대인’이라고 말할 때, 그는 어떤 본질을 재고유화[再我有化]하는 것, 얼마간의 귀속을 재인하는 것, 즉 얼마간의 분유의 의미를 손에 넣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Schibboleth, pour Paul Celan, Galilée, 1986, p.90.〔『シボレート, パウル・ツェランに向けて』飯吉光夫・小林康夫・守中高明訳, 岩波書店, 1990年, 155頁〕)도 참조.

6) 〔일역자〕 Judéités, op. cit,, p.25.

7) Jacques Derrida, Questions au judaïsme. Entretiens avec Elisabeth Weber, Desclée De Brouwer, 1996, p.77.

8) 〔일역자〕 Cf. Jean-Claude Milner, Le Juif de savoir, Grasset, 2007; Benny Lévy, Être juif. Étude lévinassienne, Verdier, 2003.

9) De la grammatologie, Éditions de Minuit, 1967, p.36. 피터 트라우니가 『검은 노트』에 할애한 최근의 책(Peter Trawny, Heidegger et l’antisémitisme. Sur les «Cahiers noirs», Seuil, 2014)에서 보여줬듯이, 전제를 철저하게 추궁하면서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 속에 “사고의 하자”를 인정하는 것은 훨씬 훗날이다. 레비나스의 독해가 데리다 안에서 갖고 있는 풍부한 사정거리의 더없는 증거이다. 그렇지만 데리다의 이 표명은 당초 독일어로 발표된 논문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프랑스어로는 발표되지 않았다.

10) 〔일역자〕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Seuil, 1967, p.227.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 合田正人・谷口博史 訳, 法政大学出版局, 2013年, 305頁〕

11) 〔訳註〕 Ibid., p.99. 〔同前, 126頁〕

12) 〔訳註〕 Ibid. 〔同前〕

13) 〔訳註〕 Ibid., p.103. 〔同前, 131頁〕

14) 데리다가 주네에 대해 항상 품었던 열정, 바로 주네의 반유대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에 대한 데리다의 침묵, 그리고 그런 것이 일으키는 온갖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취급해야만 할 것이다. 데리다는 당연히 주네에게서 불명예스러운 에릭 마티(Éric Marty)의 논문 「샤틸라의 주네」(Les temps modernes, n°622, décembre 2002-janvier2003. 〔Bref séjour à Jérusalem, Gallimard, 2003에 게재〕)에 의해 심하게 상처를 받았다.

15) Glas, Galilée, 1974, p.53.〔「弔鐘」, 第7回, 鵜飼哲 訳, 『批評空間』, II-23, 1999年, 273頁〕

16) Ibid., p.59.〔「弔鐘」, 第8回, 『批評空間』 II-25, 2000年, 327頁〕. 『불량배들』에서 데리다는 “무가 아니다”를 정치적인 것과 사건에 대한 사고의 조건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무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상 도래하는 것이다”(Voyous, essais sur la raison, Galilée, 2003, p.204, n.1.〔『ならず者たち』, 鵜飼哲・高橋哲哉 訳, みすず書房, 2000年, 282-283頁〕).

17) 〔일역자〕 Schibboleth, op.cit., p.91. 〔 『シボレート』前掲, 156頁〕.

18) 〔일역자〕 Circonfession, op.cit., p.171.

19) 그는 이것을 특히 『할례고백』 및 『아카이브의 병』에서 환기하고 있다.

20) Circonfession, op.cit., p.178. sA의 약자로 데리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나타낸다. 데리다는 『할례고백』에서 스스로를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21) 『쉽볼렛』에서, 데리다는 ツヴェタイエヴァ[사바타이 체비 혹은 러시아의 시인인 마리나 츠베타예바를 가리키는 듯?]의 잘 알려진 말을 인용하고 있다.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이다”(Schibboleth, op.cit., p.91.〔『シボレート』前掲, 156頁〕).

22) Monolinguisme de l’autre, Galilée, 1996, pp.99-100.〔『たった一つの, 私のものではない言葉──他者の単一言語使用』守中高明訳, 岩波書店, 2001年, 154頁〕.

23)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A%88%EC%BC%80%EB%82%98%EC%A7%80_%EC%9C%A0%EB%8C%80%EC%9D%B8

24)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D%8C%8C%EB%A5%B4%EB%94%94_%EC%9C%A0%EB%8C%80%EC%9D%B8

25) 『할례고백』을 참조. “나는 ‘함께〔cum〕’의 원〔cercle〕에, ‘circum〔라틴어로 원, 서커스〕이라는 곳의 서커스〔cirque du circum〕’에, 내가 항상 달아나면서도 찾았던 사람 앞에 … 모이고 싶다”〔Circonfession, op. cit., p.166〕.

26) 〔일역자〕 Maurice Blanchot, L’entretien infini, op. cit., p.185.

27) 〔일역자〕 Mal d’archive, op.cit, p.108. 〔『アーカイヴの病』前掲, 112頁〕.

28) 〔일역자〕 Ibid., p.124. 〔同前, 130頁〕

29) 〔일역자〕 Ibid., p.121. 〔同前, 127頁〕. “자홀”은 히브리어로 “상기하라”의 의미.

30) 〔일역자〕 Ibid., p.124. 〔同前, 130頁〕

31) 〔일역자〕 Ibid., p.122. 〔同前, 128頁〕

32) 〔일역자〕 Cf. Adieu. À Emmanuel Levinas, Galilée, 1997, p.127. 〔『アデュー』藤本一勇訳, 岩波書店, 2004年, 106-107頁〕

33) 할례는 그 비할 데 없는 사례로, 『쉽볼렛』에서 데리다는 참신한 방식으로 시적인 것을 다듬어내고 있다.

34) 〔일역자〕 Foi et Savoir, op.cit., p.29. 〔「信仰と知」, II-12, 93頁〕

35) 〔일역자〕 Cf. 「세계라틴화〔mondialatinisation〕」. Ibid., p.21. 〔同前, 『批評空間』II-11, 96頁〕

36) 〔일역자〕 Circonfession, op. cit., p.145.

37)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op.cit., p.112.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 前掲, 145頁〕

38) Jacques Derrida-Michal Ben-Naftali, «La mélancolie d'Abraham» (entretien), in Les Temps Modernes, n° 669, «Jacques Derrida : L'événement Déconstruction», 2012. 데리다는 여기서 「카이에 드 렐르 : 자크 데리다」(2004년)에 재수록된 「『지양하다』 번역이란 무엇인가」에서 행한 분석을 다시 다루고 있다.

39)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op.cit., p.112.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 前掲, 145頁〕.

40) Jean-Luc Nancy, La Déclosion. Déconstruction du christianisme 1, Paris, Galilée, 2005, p.217. 〔『脱閉域──キリスト教の脱構築1』大西雅一郎訳, 現代企画室, 2009年, 296頁〕

41) Foi et savoir, op.cit., p.22. 〔「信仰と知」, 『批評空間』II-11, 97頁〕

42) “유대-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우선 『유대성』에서 거론되고, 다음으로 『탈폐쇄』에서 다른 형태로 거론됐다. “오늘날 우리에게 유대-기독교인이란 자크〔자크 데리다 및 야곱〕이다. 그리고 그것은 … 어떤 하나의 실, 은밀한 연결부호이며, 그것에 의해 역사상의 야곱과 이 또 하나의 … 또 하나의 유대-기독교인인, 혹은 또 하나의 다른 유대-기독교인인 자크가 결부된다”(La Déclosion, op.cit, p. 70〔.『脱閉域』前掲, 88-89頁〕).

43) 〔일역자〕 Donner la mort, Galilée, 1999, p.95.〔『死を与える』廣瀬浩司・林好雄訳, ちくま学芸文庫, 2004年, 139頁〕

44) Foi et savoir, op.cit, pp.84-85.〔「信仰と知」, 『批評空間』 II-14, 169-170頁〕

45) «La mélancolie dʼAbraham», op.cit.,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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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1. 大杉重男의 응답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하고 있기에, 데리다를 기점으로 하는 동시에 종점으로도 하고 있는 ‘고양이’를 둘러싼 세계문학적 계보학 속에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자리매김 되는 것은 매우 많은 것을 자극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하신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나, 고양이의 관점에서 쓴다는 몇 겹이나 불가능한 행위에 대한 테네브 씨의 분석을 듣고서, 소세키의 텍스트에서 ‘고양이’와 ‘눈빛’과 ‘죽음’의 주제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다만 이번에 발표하신 것에서는 데리다론이 중심이고, 소세키에 대해서는 필요 최소한의 언급에 그치셨다고 생각하기에, 보충적으로 소세키의 텍스트에서 고양이가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고 확인하면서 코멘트하고 싶습니다.

 우선 오늘의 말씀을 듣고, 제가 상기한 것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7장에서, 고양이가 공중목욕탕을 들여다보는[覗く]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테네브 씨도 읽으신 것 같은데요, 여기서 고양이는 남탕을 들여다보고 “그림도 되지 않은 대량의 아담들”이 알몸으로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의 테마의 기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알몸을 고양이에게 보인다는 데리다의 에피소드와 비교하면 여러 가지로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중목욕탕을 들여다볼 때 고양이는 옷을 입음으로써 복장의 동물이 되고, 인간은 거꾸로 알몸이 되면 “고양이에 못지않은 짐승”이 된다고 말합니다. 반면 고양이 자신은 벗지도 못하는 ‘털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알몸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짐승’도 될 수 없습니다. ‘동믈’보다 ‘인간’이 ‘짐승’이라는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털옷’이라는 기묘한 형상이 제시되는데, 이 ‘털옷’이 알몸도 옷도 아니라 ‘눈빛’을 교란하는 매우 애매한 옵스큐어(obscure)인 것입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9장 말미에서, 고양이는 ‘독심술’을 발휘하여 주인의 마음을 읽는데요, 그 방법은 육안으로 읽는 게 아니라, 털옷을 주인의 배에 비벼댐으로써 ‘심안(心眼)’에 주인의 마음이 비친다는 것이며, 여기서는 ‘털옷’ 그 자체가 ‘눈빛’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에피소드도 오늘 말씀하신 ‘보기’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맹목과 인식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데리다의 고양이는 암코양이이며, 고양이와 여성은 전통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됐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수고양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르(Murr)도 수고양이이고, 블랑쇼의 고양이도 수컷처럼 보입니다만, 말하는 고양이는 수컷이고, 침묵하는 고양이는 암컷이라는 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요?

 다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무르(Murr)들과도 다른 특이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첫머리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라는 문장입니다. 테네브 씨는 이 문장 뒤에 이어진, 인간이 고양이에 의해서 처음 보이게 되는 장면을 아주 상징적인 것으로서도 거론하고 계십니다만, “이름은 아직 없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인용하실 뿐 특별히 해석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고양이의 ‘자(서)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고양이에게 이름이 아직 없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것이 아닐까요? 이름이 없다면 고양이는 자신이 쓴 이 자(서)전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명이 없는 ‘자(서)전’이란 무엇일까요? 더욱이 이 고양이는 단순히 이름이 없는 것만이 아니고, 이름이 없는 것에 자각적인 고양이이며, 이름이 없는 데 유명해져버린 것에 자각적인 고양이입니다.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동물이다]』의 일본어판이 나왔기에 재빨리 사서 읽었는데요, 거기서 데리다는 창세기를 인용하고, 동물이라는 것의 비애, 상실, 멜랑콜리를, 이름이 부여될 수 없는 무력감에서 보고 있습니다만, 이름이 붙지 않은 소세키의 고양이 이야기에도, 그 유머의 그림자에 항상 멜랑콜리가 뒤따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이렇게 이름이 없다는 것을 소세키의 문화적 정체성의 분열과 결부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오늘 하신 발표에서 소세키 문학은 명예롭게도 서구문학의 전통의 일부에 보태지고 있습니다만, 이름 없는 고양이는 과연 정말로 그 전통에 충분히 속하는가?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중단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그것이 ‘카테르 무르[E. T. A. 호프만의 Lebensansichten des Katers Murr = The Life and Opinions of the Tomcat Murr]’의 모방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적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실증적으로 어떻든 간에, 이 고양이는 무르(murr)보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라고 자기 정의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며, 그리고 고양이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열등의식의 상징이 아닌가. 이 고양이는 이름이 없음으로써, 옵스큐어(obscure)적, 그늘에 사는 사람 같은 존재이며, 그것은 서구 문학의 전통에 대한 일본 근대문학의 옵스큐어(obscure)적인, 그늘에 사는 사람과도 같은 위상을 나타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나[吾輩]’ 이외의 고양이는, 미케코[三毛子; 백색·흑색·갈색이 섞인 털을 가진 고양이], 쿠로[黒]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그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만담[落語]에 나오는 듯한 전통적인 일본문화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이름 없는 ‘나[吾輩]’는 서구문학의 전통에 대해서도 일본문화의 전통에 대해서도 옵스큐어(obscure)적인, 잘 보이지 않고 확실치 않은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죠.

 이 옵스큐어(obscure)적인 성격은, 고양이의 성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나[吾輩]’라고 자신을 부릅니다. 테네브 씨는 ‘humble I’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나[吾輩]’는 영어로는 I라고 번역되는 것이 통상적인 것 같아요.1) 그러나 일본어의 ‘나[吾輩]’는 결코 humble한 I가 아니라, 일본어의 수많은 1인칭 중에서도 가장 남성적인 1인칭 중 하나입니다. 그것을 남성적이 아니라 소심한 고양이가 사용한다는 것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최초의 유머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고양이는 ‘나[吾輩]’라는 과도하게 남성적인 1인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서구적 의미에서도 일본적 의미에서도 ‘수컷’답지 않은 본질을 은폐하는 동시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고양이의 성적인 모호함은 고양이가 알몸의 남자들을 쳐다보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그것은 알몸의 남자들이 설령 이 고양이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거울상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컷 고양이가 알몸의 남자들을 ‘쳐다보다’라는 행위를, 성적 도착과 무관한 부끄러운 것이 조금도 없는 건전함에 있어서 묘사하는 것은, 소세키에게 알몸을 보거나 보여주거나 하는 것이, 데리다의 수치의 체험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일면에서는 당시 일본의 검열제도와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양이가 여탕을 들여다보는(『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발표보다 조금 뒤에 체포된 ‘데바카메(出歯亀, 뻐드렁니를 한 술꾼)’라는 유명한 성범죄자는, 여탕을 들여다본 상습범이었기에 ‘자연주의’에 비유됐습니다) 장면을 쓰는 것을 소세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소세키적인 고유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나중의 『풀베개(草枕)』에서 여주인공 나미(那美) 씨가 목욕탕에 들어오는 장면을 쓰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도 수치의 감정은 ‘몰인정’의 이름 아래 배제되고 있습니다).

* 위키피디아 번역出歯亀(데바가메 또는 데바카메)는 메이지시대에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남성의 별명. 혹은 이 별명이 바뀌어 관음증과 이를 취미로 하는 것, 관음증처럼 병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말이 대체로 이것에 해당된다.

 또한 이번에는 소세키에 있어서의 웅변적으로 말하는 고양이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소세키는 또다른 유형의 고양이, 즉 포나 보들레르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고양이에 대해서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긴 봄날의 소품[永日小品]』 속의 ‘고양이의 무덤’이라는 에세이로, 여기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이 된 고양이가 병으로 죽는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 에세이는 바로 ‘고양이’와 ‘눈빛’과 ‘죽음’의 이야기[서사]입니다. 여기서는 고양이는 이야기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침묵하고 자신 속에 틀어박힌 고양이이며, 더욱이 그 ‘눈빛’은 매우 옵스큐어(obscure)한, 불투명하고 탁한 것이라고 써져 있습니다. 즉, “그 눈알은, 어떤 때든 정원의 숲을 보고 있으나, 그는 아마 나뭇잎도 줄기의 형태도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푸성귀가 달린 노란 눈동자를, 멍하니 한곳에 가라앉히고 있을 뿐이다その眼付きは、何時でも庭の植込みを見てゐるが、彼は恐らく木の葉も、幹の形も意識してゐなかつたのだらう、青味がかつた黄色い瞳子を、ぼんやりと一と所に落ち着けてゐるのみである”라고 써져 있는데요, 이 고양이는, 세계를 볼 수 없게 되며, 아이들이나 아내도 고양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는,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는 존재로서, 소세키에 의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시선의 엇갈림은 흥미롭습니다. 고양이를 보지 않는 아이들은 고양이가 죽자, 부재하게 된 고양이에게서 눈을 돌려서[관심을 돌려서], 무덤을 만들고 애도의 몸짓을 한다. 소세키 자신은 애도하지도 않고 그 모습을 싸늘하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참고로 말년의 에세이 『유리문 안에서(硝子戸の中)』 28장에 따르면, 나쓰메가(家)에서는 세 번째 고양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양이의 무덤」에서 자세하게 그 죽음의 모습이 묘사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이 된 고양이인데요, 두 번째는 새끼 고양이 중에 집안사람이 완쾌됐을 때 밟아서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눈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밟아 죽은 고양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검은 고양이로, 피부병에 걸려 털이 빠지고 벌거숭이가 되어버립니다. 소세키는 안락사시키는 편이 좋다고 가족에게 말하지만, 실행되지 않은 와중에 소세키 자신이 병들어 누워버리고, 회복해서 고양이를 보자, 고양이도 피부병이 치유되어 원래대로 검은 고양이가 되고 있습니다. 소세키는 자신과 고양이의 병의 경과에서 인연을 보게 됩니다.

 이런 고양이들은 아마 모두 수컷 고양이로, 여성적인 것과는 관련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성인 가족들은 무시되고 매몰차게 밀려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집안에서 고립된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을 소세키 자신의 위상과 겹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세키 자신도 그 고양이들에게 상냥했던 것은 아닙니다. 소세키는 그저 보고 있을 뿐입니다. 소세키의 이런 위상은 『마작 유랑기(満漢ところどころ)』(소세키가 제국주의·식민지주의에 대한 헌신commitment을 무방비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좋든 나쁘든 유명한 텍스트입니다)에서 소세키가 길거리에서 부당을 당한 중국인 노인(거기서 소세키가 주목하는 노인의 “우울하다기보다는 땅바닥을 보고 있는曇よりと地面の上を見てゐた” “눈”은 ‘고양이의 무덤’에서의 고양이의 눈빛과 유사합니다)을 다른 중국인이 에워싸고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을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잠자코 그 자리를 떠나는 위상과 겹칩니다.

 소세키의 텍스트에서 보는 권한을 갖는 것은 소세키뿐이고, 고양이도, 제3자도 보이는 존재이며, 소세키를 되쳐다보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소세키가, 데리다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양이에 대해 쓰면서, 데리다가 고양이의 눈빛, 불가능한 맹목의 그 눈빛과 만나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를 열었던 반면, 소세키는 고양이의 시선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데리다가 보여져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소세키는 (아브라함처럼인지는 차치하고) 타자가 자신을 보는 것을 죄로서 금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강연에서 분석하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고양이의 그림에 눈빛이 그려져 있지 않은 에피소드는, 그것과 관련되는 것처럼 제게는 보입니다. 소세키는 고양이의 눈빛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 소세키의 후기 작품인 『마음』에는 그 주인공 ‘선생’이 ‘연구적인 눈’으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특징적인 묘사가 있습니다만, 이 ‘연구적인 눈’이란 고양이의 눈빛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일찍이 ‘선생’은 친구 K를 ‘다른 유사 사람과의 무술 시합[他流試合]’ 같은 (‘연구적’이라는 것과 같은 뜻의 비유)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배신한 것이며, 그리고 그 K의 자살 현장을 목격한 ‘선생’의 ‘눈’은 “유리로 만든 의안(義眼)처럼 움직이는 능력을 잃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알고 스스로 두 눈을 으깨버린 오이디푸스처럼 ‘선생’은 ‘연구적인 눈’으로 K를 관찰하고 자살로 몰아간 죄에 의해 상징적으로 장님이 된다는 벌을 받는 것이며(‘아내’가 된 ‘아가씨’에 대해서 불능이 된 ‘선생’은 ‘거세’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이 교훈을 자신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타자로서 택한 ‘나’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타자는, 단독적으로 보이면서, 독자의 누구나 (‘사모님’을 제외한) 그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을 가짐으로써, 전적인 타자로 회수되는 것처럼 보인다. 테네브 씨의 말씀으로는 데리다는, 말년이 되어 전적인 타자·일반적인 타자를, 단독적인 타자로 탈구축해가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소세키는 오히려 말년이 되어 단독적인 타자를 전적인 타자·일반적인 타자로 탈구축해가는 것(「측천거사(則天去私)」?)으로 기울었던 것은 아닌가. 이것은 소세키에 대해 네거티브적인, 비판적인 생각일지도 모릅니다만, 일본의 국민작가인 소세키가 끌어안은 사각(死角)이며, 맹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오늘 말씀하신 것을 토대로 ‘고양이’와 ‘눈빛’과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소세키의 텍스트를 해석해봤습니다. 강연의 주제에서 크게 일탈한 엉뚱한 해석이 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번에 말씀하신 것은, 제가 소세키를 읽는 데 있어서 매우 시사적인 힌트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감사드립니다.

(大杉重男=首都大学東京教授)


1) 소세키는 1908년 5월 17일이라는 날짜가 붙은 [영에게 보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ハ猫デアル] 헌사]에서, 영이라는 인물(미국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Herein, a cat speaks in the first person plural, we. Whether regal or editorial, it is beyond the ken of the auther to see. Gargantua, Quixote and Tristram Shandy, each has had his day. It is high time this feline King lay in peace upon a shelf in Mr Youngʼ s library. And may all his catspaw-philosophy as well as his quaint language, ever remain hieroglyphic in the eyes of the occidentals!”(『소세키전집(漱石全集)』 26권). 이 헌사는 소세키가 ‘나[吾輩]’라는 말을 1인칭 복수인 ‘we’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we’는 왕의 자기칭호로, 신문의 논설문의 1인칭이기도 하다(Whether regal or editorial, it is beyond the ken of the auther to see). 그러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영역자들은, 소세키의 의도를 무시하고 ‘나[吾輩]’를 ‘I’로 번역해왔다. 그것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화자인 고양이를 가르강튀아(Gargantua)나 돈키호테, 트리스트람 샌디(Tristram Shandy)와 동격의 ‘고양이의 왕’(feline King)으로 진단한 소세키의 유머(와 동시에 서구문학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내셔널리스틱한 프라이드)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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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자크 데리다 사후 10년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

猫、眼差し、そして死

ダリン・テネフ

(訳=南谷奉良)

일본어 번역본은 여기를 클릭.


ダリン・テネフ講演会「文学理論において、いかにしてモデルを構築するべきか?」報告 星野 太

1

 이 논고에서 나는 여러분 ― 이런 나를, 이 대학에, 그리고 이 세미나에 초대해준 여러분 ― 과 함께, 다종다양한 고양이들에게 우리의 눈빛[눈길, 시선]을 향하고 싶다. 이 ‘맹도묘[盲導猫, 시각 장애인의 길을 안내해주는 고양이]’가 되어주는 것이, 데리다의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이하 『동물을 쫓다』로 약칭]의 고양이이다.1) 나는 그녀의 흔적을 쫓음으로써, 고양이의 본질이 아니라, 고양이에 얽힌 전통과 담론 속에서 어떤 윤곽을 이루는, 고양이의 단독성을 추구하고 싶다. 그런 담론의 계보를 망라하여 제시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며,2) 데리다의 저작에 등장하는 고양이를,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이 맺는 관계를, 그 전통과 담론이 고유한 모습으로 부각시키는 모양을 보여주고 싶다.

 이런 기획의 관심 중 하나에는, 데리다 자신의 타자와 ‘단독적인 것’의 이해를 고려하면서 그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단독성’을 생각하는 것이 있다. 데리다의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의 발간 후에는 이 책에 대한 엄청난 양의 비평이 작성되고, 이 프랑스 철학자가 묘사하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장면이 되풀이되어 논해졌다. 현실에서 일어난, 그러나 상상적이기도 한 이 장면은, 지금은 꽤 유명한 에피소드가 됐다. 어느 날 아침의 데리다의 집의 욕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데리다의 고양이 ― 암코양이 ― 가 “그녀의 아침을 달라고”, 욕실에 있는 그의 뒤를 따라오자, 거기서 그녀는 데리다가 알몸인 것을 보고 “욕실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L’animal... p. 30-31 ; The Animal... p. 13; 『動物を追う』 34頁. 이하 프랑스어판, 영어판, 일본어판의 순서로 인용 쪽수를 표기한다). 고양이에게 알몸이라는 것을 보이고, 그 철학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그가 마침 알몸의 상태를 고양이에게 보였기에 부끄럽게 느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자체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수치의 경험은, 데리다가 부르는 바의 ‘수치의 반사’(『동물을 쫓다』 18頁)를 산출한다. 데리다는 그 고양이가 진짜 고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어떤 의미에서 “본질의 고양이”라고 말하는지를 명확히 하려고 한다 ― “알몸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실재의 고양이이다’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 대체 불가능한 단독성[singularity]을 각인[표시]하기 위해서이다[cʼest pour marquer son irremblaçable singularité]”[L’animal...26/9/2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가 그의 고양이와의 현실적/상상적인 장면을 제시하고 있는 [프랑스의] 스리지 라 살에서의 연구집회를 앞두고, 『죽음을 주다』(1990)의 시점에서, 이미 고양이와 단독성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 “다양한 단독자에게, 즉 저 사람이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나 저 사람, 어떤 남성 또는 어떤 여성에, 이런 나를 결부시키는 것은 언제까지나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 당신이 몇 년 동안 매일아침 먹이를 주며 키우고 있는 고양이를 위해, 시시각각 전 세계의 다른 고양이들이 굶어죽고 있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우카이의 번역을 참고로 일부 변경함].3) 고양이를 이용한 예증은 놀라운 것이 아니지만, 『동물을 쫓다』를 읽은 후에는, 위의 인용은 다시금 이채를 내뿜는 것 같다. 『죽음을 주다』에 후속되는 『동물을 쫓다』가 밝히는 것은, 위의 인용부 안에 있는 ‘당신’도 또한, 자[서]전적인 ‘나’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데리다는 마치, 내가 얘기하는 것은 나와 내 고양이에 대해서이다, 라고도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주다』에 그려지고 있는, 그가 고양이에 먹이를 주고 있는 아침 장면은, 『동물을 쫓다』에서 그려진 아침 욕실의 장면 뒤에 일어났다고 추측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후자의 장면에서 데리다는, 이 단독적인 고양이에 의해, 각인[표시]되는 ― 비유적인 고양이가 아니라 ― 실재하는 고양에 의해, 자신의 알몸을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단독성으로서의 고양이를 생각하는 것에는, 그것으로서 고유한 곤란한 문제가 뒤따른다. 우리가, 이 구체적인, 단독적인 고양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예를 들어 타자성(otherness)이나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 같은 일반 개념의 도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타성[他性, alterity]이나 타자성[otherness], 타자[the other]라는, 현재에는 매우 많이 보급되어 있는 개념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단독성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데리다가 『동물을 쫓다』에서 착수하려고 한 문제의 하나이다. 실제로 데리다가 “그들이 ‘동물’이라고, 그리고 예를 들어 ‘고양이’라고 부르는, 전적인 다른 것”[plus autre que tout autre, 전적으로 다른 것보다 더 다른 것]이라고 말할 때(L’animal... 29/11/31), 그것은 모종의, 데리다가 자신에게 겨눈 비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혹은 매우 안이하게 타자성의 개념을 사용하고, 마치 그 타자가 형이상학과 서양적 사고의 모든 문제에 대한 보편적 해답인 양 행동하는 해석자들에 대한 비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데리다의 저작에 있는 문구를 알맹이가 없는 채, 무비판적인 형태로 반추하기를 원하지 않은 독자에게, 단독성과 타자의 관계를 재개념화하는 것은, 진지하게 물어야 할 과제이다. ‘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텍스트는 존재할까? 후기 데리다에게, 그런 텍스트가 과연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다른 것’의 단독성을, 일반개념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그때 일반적 ‘타자’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후기 데리다의 저작이 되면, 타자성을 각각의 구체적인 타자로, 그때마다 단독적인 타자로 분해되는 ― 탈구축이라고 해야 할까? ―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가 단독적인 이 타자 저 타자에 대해 말할 때에는 ― 그것이 아이와 고양이이든, 혹은 유령이든 ― 그때마다 자(서)전적인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을 쫓다』의 고양이의 사례에서 명백하다. 데리다는 (사실 한 마리 이상의) 고양이를 길렀다.4) 다만 자(서)전(autobiography)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데리다 식의 어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단순한 개성[individuality]이나 개체[個] 자기성(ipseity)의 저쪽에 있고, 자기(auto) 속에 각인되면서도, 자기를 구성하는 타자나 단독성이 혼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서)전이다. 데리다는 ‘나’의 존재에 선행하는 ‘나’ 속의 ‘타자’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하나 이상의 타자가, 하나 이상의 단독성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상관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상관적으로 관계하는 형상(figure]을 ‘공형상’[configuration]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양한 공형상이, ‘자(서)전’의 ‘자기’를 형성하는 가운데, 동시에 철학적 사색이 개시되는 것이다. 어떤 철학도 자(서)전적인 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어떤 공형상의 흔적을 재-추적하는 것은, 단순히 자(서)전적 사실 속에서 대답을 찾아낸다기보다는, 개념상의 고고학적 실천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 논고에서는 “왜 고양이인가?”에 대해 나는 대답을 삼가고, 그렇게 묻지도 않겠다. 다만 그 공형상이란 무엇인가, 데리다와 함께 있는 고양이의 자(서)전적인 공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공형상은 자(서)전적이지만 ― 혹은 바로 이 때문에 ― 끊임없이 다른 저작이나, 상이한 전통을 참조하면서, 다양한 담론에 의해 중층결정되고 있다. 그 중 하나로서, 고양이에 얽힌 담론이 있다. 『동물을 쫓다』의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그 담론(혹은 ‘담론들’이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항상 하나 이상의 담론이 있기 때문이다)을 명확한 형태로 언급하고 있다. 이 담론 속에서 고양이들은, 우의(寓意)나 은유, 환유로서 사용될 뿐 아니라, 야생의 동물과 길들여진 동물의 경계라는 까다로운 분리선을 지시하는 수단으로서, 혹은 애완동물이나 신성한 존재의 화신으로서도 유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에 덧붙여,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보다”라는 시도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이 공형상 중에서도, 내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요소 중 세 가지, 즉 ‘고양이’와 ‘눈빛’과 그리고 ‘죽음’을 다루겠다. 이 세 가지가 함의하는 바인 단독적인 공형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철학적 진술을 재-구축해보자.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을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고양이와 눈빛, 죽음의 공형상은, 희미한 윤곽이기는 하지만 이미 데리다의 저작의 꽤 초기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74년에 출판된 『조종』5)의 첫머리, 리토레 사전으로부터의 인용에서,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이 이미 상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리토레 사전에서 공형상을 끄집어낸 구절을 인용하면, 영역판에서는 다음과 같다.


Catafalque(명사) 관(棺)이나 죽은 자를 본 뜬 상을 두기 위해, 경의를 표시하고 교회의 중앙에 설치된 단[台]. … <어원> 이탈리아어 catafalco ; 속(俗) 라틴어 catafaltus, catafaldus, cadafalle, cadapallus, cadaphallus, chafallus. 뒤 강주[17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문헌학자 사전 편찬자)에 따르면 cata는 속 라틴어의 catus, 동물과 연관지어 ‘고양이’로 불리는 전투용 무기에서 유래한다. 또 디에츠에 따르면 catere(보기, 주시하기)에서 파생된다. 가장[du reste], catus(고양이)와 cater(주시하기)는 같은 어근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두 개의 어원은 일치한다. 남은 falco에 대해서는 속 라틴어의 이형(異形)들에 p이 나타나는 것부터가 독일어 balk(balcon을 참조)에서만 있을 수 있다. catafalque는 교수대(scaffold)와 같은 단어이다(échafaud을 참조).6)

 

물론 이것은 그저 인용이며, 데리다 자신이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종』이 이용하는 논리는 그런 주장을 뿌리친다. 데리다가 리트레 사전 안의 이 항목을 인용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의 텍스트상에서는 어떤 부분을 괄호에 넣고, 어떤 부분은 그대로 두고 있는(예를 들면 고양이(catus)와 바라보다(catere)에 공통되는 어근을 데리다는 언급한다) 이유를 생각하면, 이 인용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죽음’과 관련된 ‘눈빛’과 ‘고양이’가 있다. 어원적으로는 고양이와 눈빛은 동일한 것이며, 이것이 죽은 자의 신체를 눕힌 관이 놓인 단의 토대가 된다. 이 단 위에서 죽은 자는 바라보이고, 아마도 명예를 얻게 된다. 마치 고양이가 바라보이게 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여기서, 죽은 자의 몸의 문제와 그것에 대해 이루어져야 할 조치가, 적절한 처치 방법이 암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단 위에 놓여 있는 동안] 시체는 땅에 매장하거나, 화장해서 재로 할 것이냐는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죽은 자는 높은 장소로, 지상보다 높은 곳에 있는 대 위에서 허공에 매달려지고宙吊りにされ,7) 그 모습은 마치, 두 번째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하다. 환상적인 장면이 독자 앞에는 확 열리고, 어떤 환상이 이미 그 효력을 발하기 시작한다. [죽은 자를 향한] 눈빛(주시하는 것)은 마비된다. 마치 그 자신의 한계의 끝을 보려는 것처럼. 죽은 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하는 양. 이중으로 된 환상상의 주시하는 시선이 삶의 문턱‘과’ 죽음의 문턱에 쏟아진다.

 아마 내가 지금 한 『조종』의 몇 구절의 해석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데리다가 1974년의 『조종』 이후, ‘고양이’과 ‘눈빛’, 그리고 ‘죽음’의 공형상을 다루지 않을 때의 얘기이다.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때때로 세 가지 요소 중 두 가지만 명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샛길』8)에서는 고양이와 눈빛, 「애도의 힘에 의해」9)에서는 눈빛과 죽음, 『죽음을 주다』에서는 고양이와 죽음처럼.


2

 여기서 구체적인 고양이들로 눈을 돌리고 싶지만, 내가 ‘고양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진짜 고양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대부분 경우, 우의(寓意)와 은유, 환유로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가 그대로 고양이인지, 다른 뭔가를 상징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으레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문학에 내재하는 하나의 위험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것과는 다른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실은 때로 고양이의 불가해함으로 여겨지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고양이는 수수께끼 같고, 인간은 고양이를 바라보지만 고양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고양이에 얽힌 담론은 아마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여기에서 일단 언급해야 할 것은 보들레르의 고양이에 대한 시 『악의 꽃』과 보르헤스의 소네트 「한 마리의 고양이에게」 등의 작품에서 보듯이, 근대 시대에 이르러서도, 고양이에 얽힌 담론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수수께끼로서, 비밀로서 간주되는 고양이는, 이중적 역할을 맡는다. 한편으로, 고양이는 그 자신에 주목을 끌고, 점점 더 정체모를 것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고양이가 수수께끼와 비밀을 안고 있는 한, 고양이는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서 머문다. 달리 말하면, 그런 고양이는 타자로서 머물며, 기지(旣知)의 것 혹은 알 수 있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에 머문다. 이리하여 고양이는 우의(寓意)나 수사적인 장치를 불러들이는, 뭔가 다른 것 ― 여성 혹은 단순히 초상적인 것 ― 으로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른바 고양이의 우아함이나 품위도 그 위에 보태지고, 고양이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이 여성과의 유비를 만들어내는 것을 가능케 해 왔다. 물론 여성을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서 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프로방스 시와 함께 유럽에 처음 나타난 어떤 조류의 역사적 산물이며, 단테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등 당대의 시인들은, 그들이 사랑한 여성을, 자신들에게는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어서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서 묘사했다.10) 그래서 아마 유럽에서의 최초의 유명한 고양이들이,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고양이인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단테의 고양이는 그 앞발로 촛불을 쥐고, 단테의 저녁식사와 독서를 비춰졌다고 전해지는데, 페트라르카의 고양이가 되면, 그 고양이는 라우라[연애서정시 『칸초니에레Canzoniere』에 등장하는 영원의 여성]의 라이벌이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페트라르카는 그의 고양이에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고, 그 무덤에 “어떤 토스카나 시인의 마음에는 이중적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다. 바깥인 큰 불길을 이런 나를 위해. 안인 작은 불길을 라우라를 위해”라는 묘비명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도 고양이와 죽음이 결부되어 있는데, 고양이는 무덤 아래서 소리를 내는 미라로서,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sur-vivre) 고양이이다. 고양이를 미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미라는 죽은 사람을 구현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중지시키고, 죽음의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죽은 자를 나타내는 미라는, 사체가 그것 자신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체 그 자체는 땅속에 묻히지 않고, 또한 화장되지도 않고, 아직도 자신의 죽음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고양이와 여성이 어떤 형태로든 유비를 이루는 전통은 근대의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보들레르부터, 훌리오 코르타사르, 미셸 투르니에에 이르기까지 찾아볼 수 있다. 『동물을 좇다』에서 데리다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와 여성을 환유적으로 연결한다. 고양이의 시선[눈빛]에 노출된 알몸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은, 여성이 그 욕실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훨씬 더 참기 어려운 것이 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나, 수컷인 이런 나는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방에 여자가 있기에, 고양이에 대한 관계 속에, 내가 알몸인 것을 보고 있는 알몸의 고양이, 그리고 내가 알몸인 것을 그것 자체가 보고 있는, 그것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알몸의 고양이의 눈빛 속에, 모종의 불이 켜졌듯이. 그 불은 빛나고, 향기처럼 방안을 맴돌기 시작한 질투의 연기와 함께”(86/58/113).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가 고양이의 눈빛[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그 방에, 고양이 외에 거울도 있다고 하는 장면이다. 이 두 개의 상황에서 흥미로운 것은, 어느 쪽이든 데리다는 고양이와 거울,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기보다는, 그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 장면의 기술을,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 “나는 여자이며, 그 여자는 또한 남자이다”(86/58/113). 거울도 또한 방 안에 있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그때,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몇 명, 몇 마리인지 모르다. 그리고 나는 주장한다, 자(서)전이 시작된 것은 그때라고” 말해진다(86/58/113). 이처럼 데리다는 고양이와 여성 사이에 병행관계를 만들어내는 전통을 집어들어 그것을 탈구시켜 가는데, 그때, 그가 묘사하는 두 개의 상황의 잠재적인 연결, 고양이와 여성, 고양이와 거울의 연결을 설명하는 것은 없다. 언뜻 보면 데리다는 여성과 거울의 역할의 공통점을 듦으로써 은근히 고양이와 여성이 비슷하다는 것을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가 고양이에게 있어서 거울이라면, 여자는 남자에 대해 고양이를 반사할 것이다. 남자는 보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면, 보이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니까. 거울 속의 이중화에 의해, 여성은 고양이로, 고양이는 여성으로 모습을 바꾼다. 다른 한편, 이런 해석이 들어맞는 것은, 거울 속에 누가 반사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아는 한에서, 즉 우리가 남자 주인공의 관점을 특정하고, 이것과 동일화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데리다의 이야기 속에서, 이것은 난점이다. 거울이든 여성이든, 데리다가 그 방에 제3자를 입실시킨 순간에, 남성의 관점이라는 입장은 중지되고宙づりにされ, 동시에 여성과 고양이의 안정된 병행관계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중지된다宙吊りにされる. 그때 우리에게는 더 이상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반사하고 있는가를 모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그때,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몇 명, 몇 마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 혹은 ‘그녀 ―― 고양이’, ‘나비[고양이의 애칭]’가 되고 있다. 마치 그가 거울인 그를 반사하는 거울이 반사를 반사하듯이. 이때, 고양이의 반사와 여성의 반사, 그리고 남성의 반사가 있다. 단 데리다는 고양이가 보고 있을 것, 고양이가 말할지도 모르는 것, 고양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고양이의 눈빛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 이 고양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는 그 고양이가 몇 살인지, 어느 정도의 사이즈인지, 그 털 색깔에 대해, 그 고양이가 어디서 잠을 자고 먹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입장, 그 자신의 자기를 불안정하게 하는 형태로 그 장면을 묘사하는데, 그가 상대하고 있는 그 고양이라는 타자에 대해, 그 어떤 형태로도 지배적인 지식을 가진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녀를 이해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데리다가 그의 고양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때, 그는 그 단독적인 생물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고양이의 눈빛/시선에 홀린 사태는 결코 데리다의 사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포나 보들레르,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의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근대문학은 특히 고양이의 눈빛에 매료된 구절이 있다. 고양이에 얽힌 담론에는 두 개의 전통이 있는 듯하다. 즉, 하나에는 고양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전통이, 다른 하나에는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보려고 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어떤 전통에서는, 시인의 응시 대상이 된 고양이의 응시가 그려진다. 고양이에게 바라보여지고, 시인이나 작가는 그 눈빛에 매료되지만, 그들은 그 고양이를 외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포, 보들레르, 릴케, 보르헤스, 코르타사르는 이 전통의 일족이다. 고양이가 이쪽을 바라보거나, 세계를 바라보거나 할 때, 이런 작가들의 누구 한 명도, 그 고양이 자체에 보이는 것을 말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페트라르카의 고양이에 이어진 근대문학은, 고양이의 눈빛에 매료됨으로써, 또한 별개의 전통을 산출하고 있으며, 어떤 시인이나 작가들은 마치 고양이의 내부의 관점에서 묘사하는 시도를 실천해왔다. 이 작가들은 고양이에게 언어 능력을 주고, 고양이를 자(서)전적 동물로 변신시킨 것이다. 그 내적 관점의 장치에는, 고양이에게 말하게 하고, 고양이에게 보이는 것을 서술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전통에 대해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루드비히 티크의 희극 『장화 신은 고양이』부터, 현재에도 인기 있는 아동문학, 제임스 보웬의 『내 이름은 밥』 같은 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보웬의 책에서는 저자와 함께 살게 된 고양이 밥의 얘기가 말해진다.11) 이런 전통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E.T.A.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일 것이다.12) 그 이후도, 고양이의 자(서)전을 쓴다는 시도를 한다는 작가들이 있으며, 예를 들어 이폴리트 텐의 『어떤 고양이의 생애와 그 철학적 의견』13)이나, 20세기 초반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같은 작품이 있다.14)

 지금 언급한 작품은 모두,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는 것, 고양이에게 말하게 하는 것, 고양이에게 언어를 주는 것은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즉, 어떤 작품에서든 고양이의 자(서)전은 그 시각의 탄생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든, 첫 장면은, 처음으로 고양이가 눈을 뜨는 곳에서 시작된다. 시각의 탄생은 우의화의 탄생인 동시에, ‘시각이 없는 상태’를 마치 허구적으로 만들어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我輩は猫である)』의 고양이한테 눈을 돌려보자. 다음의 인용에서 보듯이, 고양이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와 동시에 시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왠지 어둡고 눅눅한 곳에서 야옹 야옹 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봤다.” 고양이가 기억하고 있는 첫 번째 것은, 어둑어둑하고 습한 곳에서 울었던 기억이다. 이 장면은 그 이야기를 나[我輩]라는 거만한 ‘나[私]’의 인칭을 사용해, ‘나는[我輩は]’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고양이가, 처음으로 인간을 보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주목해야 할 것이 여럿 보인다. 하나는, 여기서의 눈길의 대상이 인간이며, 인간이 고양이에 의해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바라보인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주인공의 모델은 소세키 자신이다. 이처럼 고양이에게 [주인공이] 보인다는 것에 강하게 [마음이] 끌리는 사태가,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써져 있다. 두 번째 점에서는, 그 사람이 그 장면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눈길[눈빛]의 대상이라는 것이 거론된다. 세 번째 점의 중요한 사실은, 그 장소가 어둑하고,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고양이는 어둠 속에서도 본다고 간주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독자는 오히려 이 고양이와 인간이 만나는 장면을, 똑똑히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진다. 인간이 그 새끼 고양이를 손에 들고 옮길 때 그 인간의 얼굴을 겨우 몸을 구부려 볼 기회가 되자 고양이는 그 얼굴이 ― 적어도 고양이한테 ― 얼마나 기묘한지를 소묘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보일까? 적어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그 대답이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1장에서는 주인이 고양이 스케치를 시작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인용하면,


그는 지금 나의 윤곽을 다 그리고 얼굴 주위를 형형색색으로 수놓고 있다. 나는 자백한다. 나는 고양이로서 결코 최상의 성과가 아니다. 키와 좋은 출신과 좋은 얼굴 생김새라고 말해도 굳이 다른 고양이보다 뛰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못생긴 나라도, 지금 내 주인이 묘사하고 있는 묘한 모습은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어. 첫째, 색이 다르다. 나는 페르시아산 고양이처럼 노란색을 포함한 담회색에다 옻과 같은 무늬의 피부를 갖고 있다. 이것만은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주인의 채색을 보면, 노란색도 아니고 검은 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니고 갈색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것들을 섞은 색도 아니다. 그저 일종의 색깔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평할 방법이 없는 색깔이다. 게다가 신기한 일은, 눈이 없다. 더욱이 이것은 자고 있는 것을 스케치했으니까 무리가 없지만, 눈 같은 곳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먼 고양이인지 잠자는 고양이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다.15)

彼は今吾輩の輪廓をかき上げて顔のあたりを色彩っている。吾輩は自白する。吾輩は猫として決して上乗の出来ではない。背といい毛並といい顔の造作といいあえて他の猫にまさるとは決して思っておらん。しかしいくら不器量の吾輩でも、今吾輩の主人に描き出されつつあるような妙な姿とは、どうしても思われない。第一色が違う。吾輩はペルシャ産の猫のごとく黄を含める淡灰色に漆のごとき斑入りの皮膚を有している。これだけは誰が見ても疑うべからざる事実と思う。しかるに今主人の彩色を見ると、黄でもなければ黒でもない、灰色でもなければ褐色でもない、さればとてこれらを交ぜた色でもない。ただ一種の色であるというよりほかに評し方のない色である。その上不思議な事は眼がない。もっともこれは寝ているところを写生したのだから無理もないが眼らしい所さえ見えないから盲猫だか寝ている猫だか判然しないのである。


이 구절은 본래라면 자세하게 논해야 할 대목이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사항에 머무르고 싶다. (1) 이 장면에서 고양이는 자신이 그려진 스케치를 보고 있다. 거울을 보는 고양이, 텔레비전에 비치는 자신 이외의 다른 고양이를 보는 고양이 등과 같은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세키의 고양이는 그림에 그려진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묘한 사태이다. 그 그림은 고양이 자신을 닮지 않고, 고양이 자신과는 달리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를까? 지적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이다. (2) 하나는 이 그림에 그려진 고양이에게 눈이 없다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은지, 그저 자고 있는지는 판별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그 고양이한테는 눈이 없다.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인간은, 고양이의 보는 방식에,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에 관해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는 그저 눈을 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고양이의 눈을 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3) 두 번째는 고양이의 색을 잘못 그렸다. 즉, 주인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주인은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을 볼(see)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나가 보면, 이 ‘보다’라는 것의 문맥에서는 또 하나 인용해야 할 장면이, 2장의 첫머리에 있다. 새해를 맞아 주인은 어떤 친구가 그림으로 그린 연하장 엽서를 받는다. 그의 친구는 화가였으나, 주인은 고양이의 머리도 꼬리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엽서를 본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훌륭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이해한다.


주인은 그림엽서의 색깔에는 감복했으나, 그려져 있는 동물의 정체는 모르기에, 아까부터 고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모를 그림엽서라고 생각하면서, 졸린 눈을 품위 있게 뜨고, 천천히 내려다보니 영락없이 자신의 초상화이다. … 누가 봐도 고양이에 다름없다. 조금 안식이 있다면, 고양이 중에서도 다른 고양이가 아니라 나[吾輩]라는 것이 분명히 알기 쉽게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이렇게나 명료한 일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나 고심하느냐 생각하자, 조금 인간이 더 안타깝다.16)

主人は絵はがきの色には感服したが、かいてある動物の正体が分らぬので、さっきから苦心をしたものと見える。そんな分らぬ絵はがきかと思いながら、寝ていた眼を上品になかば開いて、落ちつき払って見ると紛れもない、自分の肖像だ。[…中略…]誰が見たって猫に相違ない。少し眼識のあるものなら、猫のうちでもほかの猫じゃない吾輩である事が判然とわかるように立派にかいてある。このくらい明瞭な事を分らずにかくまで苦心するかと思うと、少し人間が気の毒になる。


 (화가가 아니더라도) 그 인간[사람]은 고양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자신이 기르고 있는 고양이를 인식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고양이는 주인에게 이 그림이, 고양이의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지만, 주인은 고양이가 전하려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이 어떤 고양이와 다른 고양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또한 원리적으로 고양이의 성질을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생각할 소지를 마련하고 있다.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라고 하는 욕망은, 번번이, 그 불가능성에 의해 이중화된다. 고양이의 관점에서 그리려고 하면, 그 작가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며, 고양이에 대해 맹목이 되어버린다.

 고양이의 눈빛에 끌리는 근대문학의 강한 관심의 곁에는 언제나,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의 불가능성의 인식이 붙어 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대문학에 있어서, 고양이의 눈빛, 혹은 고양이에 대한 눈빛에, 시각적인 문제가 항상 생기는 까닭이다.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은 곧 고양이에게 그것으로서의 언어를 준다는 것이다. 외부의 관점에서 그려진 고양이와 내부의 관점에서 그려진 고양이를 구별하는 것은 대체로 얘기할 수 있는 고양이와 얘기할 수 없는 고양이의 구분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호프만이나 이폴리트 텐, 소세키의 고양이처럼 고양이가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루이스 캐롤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묘사되는, 항상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검은 아기 고양이도 있다. 데리다도 『동물을 쫓다(動物を追う)』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그 작품 속에서 앨리스는 검은 고양이가 ‘네’를 의미하는가, ‘아니오’를 의미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는 고양이가 있는 반면, 항상 같은 소리를 발성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고 하는 구도가 근대문학 속에는 존재한다.

 이런 문맥 속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에서 고양이를 작품에 등장시키는 방법을 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레오폴드 블룸이 처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 「칼립소」에는 그가 키우는 고양이도 등장한다. 이 네 번째 삽화는 블룸과 그의 고양이를 그린 장면에서 시작되며, 고양이는 블룸에게 먹이를 요구한다. 자유간접화법을 사용함으로써, 조이스는 블룸의 사고를 통해 고양이를 그리고 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블룸의 머리에는 오가는 한편, 그 고양이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저 되풀이해서 ‘야옹’이라고 울 뿐이다. 고양이는 같은 음성을 반복해서 발화한다. 하지만 조이스는 그 ‘야옹’이라는 음을 그때마다 다른 형태로 재현하고, 독자에게는 ‘므크그나오(Mkgnao)’, ‘므그크나오(Mgknao)’, ‘므크르크그나오(Mkrkgnao)’ 등과 같은, 고양이의 주장을 음절로 나타내고, 먹이를 주지 않는 블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음의 잇따름이 주어진다. 이리하여 소세키의 고양이의 웅변과도, 앨리스의 검은 고양이처럼 무의미한 같은 음의 반복과도 상이한 줄거리가 마련된다. 이때 고양이는 같은 음을 되풀이하고, 그것을 조금씩 바꾸고, 그녀의 욕구를 전하려고 한다. 고양이는 그 욕구를 전할 때, 일부러 인간의 언어를 줄 필요가 없다. 조이스는 인간에게는 거의 발음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블룸의 고양이는 의인법으로 묘사되는 고양이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

 일단 언어나 이해와 같은 문제가 도입되면, 텍스트에는 고양이의 눈빛에 대한 강한 관심도 또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블룸의 사고 속에 ― “이 녀석은 인간이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 녀석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이 녀석은 자신이 이해한 것은 모조리 알고 있다. 원망스러운 것도 있어서, … 이 녀석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탑 정도의 높이? 아니 아냐, 나를 뛰어넘는 것도 할 수 있어.” 바로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블룸은 고양이에게 보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 그리고 이 순간에, 블룸은, 고양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양이에게는 그가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 질문에는 일단 답이 이어지고, 다시 의문으로서 “높은 탑이?”라고 적혀 있다. 블룸이 즉각 부인하는 이 대답 속에는, 동물의 지배에 얽힌 모든 담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높은 탑은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 자체는 즉각 블룸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단순히 부정한다기보다는, “아니 아냐, 나를 뛰어넘는 것도 할 수 있어”라고 덧붙임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서열이 뒤집힐 가능성을 시사하고, 게다가 고양이로부터 [인간에게] 발신되는 것[예를 들어 고양이의 말이나 행동, 눈빛]가, 예상 불가능한, 인간을 앞지르는[추월하는] 듯한 존재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고양이의 눈빛이 다시금 하나의 주제가 된 바로 뒤에, 이번에는 눈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 “그녀는 간절히 바라마지 않은, 부끄러운 듯한 눈을 끔벅이고 이쪽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길게 ‘뮤’라고 울고, 그에게 우윳빛 이빨을 보여줬다. 가만히 보면서, 그 검고 가느다랗고 긴 두 눈은 강한 욕망 때문에 점점 가늘어지고, 마침내 두 개의 초록색 보석이 됐다”17)〔U 4: 33-35〕. 보석으로 바뀐 눈은 완전히 대상화되어가지만, 그것은 마치 부끄러움의 의식에 습격당하는 것을 막고, 자꾸자꾸 다가오는 눈빛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양이의 눈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블룸의 관심은 고양이의 수염으로 옮아가고, 이 수염에 의해, 빛이라는 문제 자체의, 본다[視る]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테마가 도입된다. ― “고양이의 그것을 자르면, 쥐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일까? 왜 그럴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거야, 첨단이”〔U 4: 40-41〕. 이 마지막 부분에는, 빛을 가져오며, 주위를 보게끔 하는 고양이와 같은, 예로부터의 전통적 울림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가설로 제기하는 것은, 이런 고양이의 눈빛에 대한 강한 관심, 고양이를 바라볼 때 나타나는 시각의 문제, 그리고 빛을 가져오는 존재로서의 고양이는, 일체적인, 동일의 현상이 되고 있다. 고양이가 보는 것을 가능케 하고, 그 시력 자체가 모종의 빛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고양이는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고양이의 눈빛은 때로, 보이지 않는 것, 맹목인 것 등과 같은 문제와 밀접하게 이어진다. 나쓰메 소세키의 눈이 없는 상태에서 그려진 고양이는, 바로 이런 문제의 우의(寓意)라고 할 수 있다.

 조이스 자신도 또한, 기묘한 형태로 고양이와 시각의 문제를 연계시킨다. 『율리시스』에서 조이스는 고양이가 보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문제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채로 하고 있다. 앞서 인용했듯이, 블룸은 “이 녀석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몰리 블룸이 이 문제를 변주하여 다룬다. ― “…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까, 저렇게 바라보고 계단의 맨 위에 앉아서 쭉……”〔U 18: 936-38〕.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이 어떻게 고양이에게 보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고양이가 보는 것의 차이가 문제가 된다. 그 때문에 특히 인간을 바라본다는 문제가 아니게 되며, 일반적으로 세계를 쳐다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서는 조이스가 그 자신의 시각에 담고 있던 모종의 불안을 간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에게는 인간보다 많은 것은 보이지 않은가, 인간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는지 여부를 묻는 가운데, 마치 조이스가 자기 자신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감각을 표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보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감각이다.

 안타깝게도 조이스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의 눈에 생긴 문제는, 1922년(2월 2일)의 『율리시스』 출판 이후, 점점 더 심각해졌다. 1922년 9월에 해리엇 쇼 위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이스는 자신의 눈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시도 덧붙여져 있다.


― 지미 조이스, 지미 조이스, 어디 갔었어?

― 여왕님을 보러[만나러] 런던에 가고 있었어.

― 지미 조이스, 지미 조이스, 뭘 봤는지 들려줄래?

― 유스턴 호텔에서 놋쇠 침대를 봤어.18)


–Jimmy Joyce, Jimmy Joyce, where have you been?

–Iʼve been to London to see the queen –

–Jimmy Joyce, Jimmy Joyce, what saw you, tell?

–I saw a brass bed in the Euston Hotel.


 이 짧은 시가 어떤 영어의 유명한 동요의 개사곡이 아니라면, 나는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이 되고 있는 동요의 가사는 ―


새끼 고양이야, 새끼 고양이야, 어디 갔어?

여왕님을 [직접] 보러 런던에 갔었어.

새끼 고양이야, 새끼 고양이야, 너는 거기서 뭘 했어?

여왕님의 의자 밑에서 새앙쥐를 놀라게 했어.


Pussy cat, pussy cat, where have you been?

I've been to London to look at the Queen.

Pussy cat, pussy cat, what did you do there?

I frightened a little mouse, under the chair.


― 왜냐하면, ‘지미 조이스’는 원래 ‘새끼 고양이야’였다. 조이스는 자신을 고양이에 포개놓고 있는 듯 보인다. 정말로 조이스는 1922년 8월 중반에, 눈의 보양을 위해서도 파리를 거쳐 런던을 여행했다.19) 그러나 일은 계획대로 옮겨지지는 않았고, 그의 건강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조이스는 아내와 함께 유스턴 호텔에 머물렀으며, 그 이름을 이 시에 등장시킨다.20)여기서 일어나는 원래의 시와는 다른 어구로의 치환은, 고양이와 조이스의 이름을 치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이다. “무엇을 했어?”라는 질문 대신에 “무엇을 봤어?”라는 식으로, ‘보다’를 강조하는 의문으로 치환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뜻 보기에 그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원래 있던 쥐를 쫓아간다는 능동적 행동은, 어떤 장소에 구애받고 있는 수동성을 포함한 어구로 치환되고 있다. 동요의 원문을 거의 허물어뜨리지 않고 사용되는 곳은 두 번째 행뿐이지만, 그래도 “to look at”에서 “to see”로의 변경을 확인할 수 있다. 앞을 바라보지만, 그가 가로누운 초라한 침대보다 먼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말하는 것 같다.

 원래 시의 “여왕님을 이 눈으로 본다”(“to look at the queen”)라는 표현은 유명한 속담 “a cat may look at the queen”(“a cat may look at a king”의 다른 판본에서, “아무리 신분이 미천한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권리가 있다”의 의미)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조이스는 이 표현을 다른 곳에서도 이용하는데, 해리엇 쇼 위버에게 보낸 시에서는, 거의 대부분을 원문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이번에는 그가 보고 싶은 것은 ― 마치 고양이처럼 ― 뭐든지 바라볼 수 있고, 누구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이런 [시각의] 자유가 생기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조이스=고양이는, 고양이의 눈빛을 얻었으나, 그 보상으로 그의 시각을 잃는 것이다.

 이처럼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맹목이라는 것은 조이스의 생애에서 자(서)전적으로 복잡하게 보인다.

 … 슬슬 데리다로 화제를 되돌리기로 하자.



3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고양이라는 동물이 죽음과 눈빛에 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고양이에 얽힌 문학적 담론의 전통을 살펴봤다. 눈빛이든, 죽음이든, 고양이는 그 경계 자체를 문제화하고, 끊임없이 그 경계선을, 삶과 죽음 사이를,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이는 것 사이를, 보는 것과 맹목인 것을 횡단한다. 데리다가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텍스트는 확실히 이 전통을 계승시키고 있다.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는 거듭 되풀이하여 눈빛(주시하다)을, 보는 것(pour voir), 그리고 맹목인 것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데리다는 일반적 혹은 추상적인 의미에서 눈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고양이의, 단독적인 고양이의 눈빛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데리다 앞에 있는 고양이는 어떤 의미에서 맹목[눈이 멀었음]이며, 그녀는 바라보고 있을 뿐, 보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말한다. ― “[그 눈빛은] 보는 자의, 환시자(幻視者)의, 혹은 극도로 명민한 장님[盲者]의 눈빛인지도 모른다”[Un regard de voyant, de visionnaire ou dʼaveugle extra-lucide.”](L’animal…, 4/18/18).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맹목이며, 보는 자이다. 보는 자와 환시자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지금 여기가 아니다. 그들은 직접적인 소여의 것의 저편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맹목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환시자와 장님을 동시에 고양이의 눈빛 속에서 찾아내는 위의 인용 대목보다 1페이지 앞에, 그가 이미 예견과 맹목을 관계시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고양이의 눈빛이 아니라, 데리다 자신의 눈빛이다. Cerisy la salle의 연구집회에서의 제목은 얼핏 보면 무작위적 선택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미리 마련된 것 같은 순서로, 말하자면 ‘신의 뜻 = 기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한 뒤, 그 “정체불명의 선견지명을, 맹목이면서도 제대로 함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미리 형상을 이루어가는 과정”[une obscure prévoyance, le procès dʼune aveugle mais sûe préonfiguration dans la configuration,”]에 대해 말한다(L’animal…, 2/17/16-17). 물론 이 “정체불명의 선견지명”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데리다 그 자신인 것이다. 이때 다시 예견과 맹목이 함께 일어나지만, 그것은 보고 있는 고양이 쪽에서가 아니라, 고양이에게 보이고 있는 데리다의 예견과 맹목으로서 함께 일어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 보이는 것과 맹목인 것에 붙어다니는 복잡한 관계 속에는, 어떤 자(서)전적인 기원이 있는 듯이 보인다.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다른 사항에서도 많이 일어나지만, 이런 ‘예견’이나 ‘맹목’ 등과 같은 문구는 모두, 그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 썼던 다른 텍스트를 암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번 회의 경우에는, 데리다가 맹목과 시각〔vision〕의 문제에 참여한 텍스트, 예를 들어 『장님의 기억』에 눈을 돌리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역시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맹목이라는 것을 예견에 관계시킨다. ― “장님은 보는 자이며, 때로, 환시자의 직을 맡는 경우가 있다.”21) 예견이라는 행위에서는, 뭔가가 맹목의 차원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지닌 환시적인 시각”에 의해, 보는 자는 “가시의 현재의 건너편”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22) 그 때문에 보는 자에게 보이는 광경은, 모종의 ‘전망[내다보임]’〔sur-view〕으로서, 너무 보이는 동시에 끝까지 지켜본다. 보는 자에게는 현전하지 않고 비가시의 대상이 보이지만, 현전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가시의 대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예견에는 그 내부에서부터 따라다녔던 맹목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우, 맹목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장님의 기억』에서 데리다는 보이는 것, 시각, (그림의) 소묘에 내부로부터 따라다니는, 비가시의 양태를 추구하고 있다. “그린 선의 수사학”으로 통하는 묘선[描線, 그린 선]의 비가시성이 있으며, 그때 바로 묘선[그린 선]퇴인함[退引, 뒤로 그어짐]으로써 발화나 담론의 공간이 열린다. 발화나 담론은 시각에 대한 ‘근원적 대체보충’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비가시의 담론의 침투를 받고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에서 그렇듯이.

 그러나 [원래 보이는 것, 시각, 소묘에 내재하는 비가시성 이전에] 그 전 단계에서조차, “보이는 것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이질적인”23) 비가시성이, 보이는 것의 핵심에 있는 절대적인 비가시성이, 보이는 것에 따라다니는 맹점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마주로서의 이마주는, 애초의 처음부터 폐허가 될 운명에 있다. “폐허는 처음 응시되는 순간부터 나타나는 이미지에서 생기는 것이다.”24) 그래서 애초의 시작부터, 시각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결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또 두 개의 보완적인 논의를 감안해야 한다. 하나는 “바라보다”〔looking〕와 “보다”〔seeing〕의 구별에 대해, 또 하나는 이미지가 지닌 특수한 성격에 관련된 것이다.

 고양이의 눈빛에 얽힌 문학의 담론을 재축하는 가운데, 나는 “바라보다”와 “보다”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루지 않았으나, 이 재구축의 작업을 끝냈을 때, 『동물을 쫓다』에서 논지를 다시 전개시켰을 때, 그 구별의 필요성이 다시금 명확해진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구별을 다른 텍스트에서 소묘하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특히 『촉각에 대해 : 장-뤽 낭시를 건드리다』의 처음 장에 관심을 겨누고 싶다. 거기서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눈빛(주시)뿐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타자에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의 눈빛은 접근 가능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로부터의 시점(視点)으로부터만 가능할 뿐이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은 고양이의 눈빛을 바라봄으로써 가능해지지만, 그 내부로부터의 시점(視点), 즉 그녀가 바라보는 것이 [이쪽에] 보이게 되려면, 픽션의 장치 없이는 불가능한 채로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을 재구축하는 가운데 말한 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데리다는 거기서 멈춰 서지 않는다. 그는 다른 구별을, 이번에는 눈과 눈빛의 구별을 도입한다. 우리가 눈을 볼 때, 그 눈빛은 보이지 않은 채이지만, 그 눈 자체는 색이나 모양 같은 속성을 지닌 대상물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 눈이 아니라, [그 눈이 이쪽에 눈빛을 쏟는] 응시를 보려고 하면, 우리는 맹목이 되며, 보일 터인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이도록 노력하면, 그 행위 고유의 맹목성이 산출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주시하는 것이 도둑맞은 것”이다(le dérobement de ce qui vous regarde).25) 응시와 그 눈이 함께 보인다고 믿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매혹이라는 주문에, 데리다가 부르는 “매혹의 사랑”에 사로잡히며,26) 더 이상 보인다기보다는, 닿는[접촉되는] 것에 가까워진다. 눈은 눈빛과는 다르며, 닿을[접촉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설은 확실히 데리다가 고양이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에 해당한다. 그에게는 고양이의 응시가 보이고,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고양이의 눈의 색을 기술하지도 않고, 수염 색깔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고양이는, 그녀의 응시에 의해, 맹목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가시성이, 그녀의 비가시성이 눈에 보임으로써, 그녀의 존재는 이미지로,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의 전통에 의해 중층결정되는 이미지로 바뀌어버린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데리다의 욕실로 들어가는 이 단독적인 고양이가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실재하며, “또한 동시에” 상상적인 듯한 고양이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데리다가 ‘이미지’ 개념에 바친 몇 안 되는 텍스트 중의 하나에 눈을 돌리고 싶다. 「애도의 힘에 의해」라는 제목의 텍스트는 그의 친구 루이 마랑(Louis Marin)이 죽은 후의 1993년에 작성된 것이다.27) 거기서는 ‘보다’와 ‘바라보다’의 문제가, 이미지의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제기된다. 이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이미지에는 ‘존재’로는 환원할 수 없는 힘 또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가능성, 절대적인 ‘가능태(뒤나미스)’이다. ― “죽음만이, 아니 오히려 애도가, 즉 이미 앞자리를 차지한 죽음만이, 이런 절대적인 ‘가능태’ ― 힘, 효력, 그것으로서의 가능성, 그것 없이는 이미지의 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 절대적인 가능태가 들어설 공간을 열 수 있다.”28) 즉, 죽음과 애도만이, 이미지가 지닌 절대적인 가능태에 공간을 열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처음으로 “죽음만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죽음이 아니라 애도가”라고 엄밀한 형태로 바꿔 말한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죽음 “그 자체”라고 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은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이 아니라, 앞서서 죽음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즉 애도가, 라고 하는 것이다. 애도는 그러므로 죽음에 앞서 있는 죽음이다. 죽음 “그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으나, 애도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도는 불가능성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의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한 죽음의 ‘이해’에 대한 반론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발전시킨 죽음의 ‘이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나중에 데리다의 『아포리아』에서 전개되지만, 이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애도의 힘에 의해」를 집필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이란, 실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며, 죽음이란 그때마다 나 자신의 것(Jemeinigkeit = 각자성各自性)이다. 나 이외의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타자의 죽음을, 그것으로서 고유한, 순수한 죽음으로서 경험될 수 없다. 그것 자신의 죽음의 불가능성과의 관계로서, “죽음에 임하는 존재(Sein zum Tode[죽음을 향한 존재])”는 현존재가 그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불가능성의 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현존재가 자신에 선행하는 방법이다. 이리하여 “죽음에 임하는 존재”는 다른 온갖 가능성의 근거가 되어 현존재의 실존을 지탱하고, “~로서-구조”를 가능케 하는 현존재의 이해를 뒷받침한다. “~로서-구조”란 곧, 현존재에, 있는 것을 ‘무엇인가’로서 보게 하고, 사물을 ‘그것으로서’ 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현존재는, 그것으로서 고유한 의미에서 죽을 수는 없는 동물과는 달리, 그것 자신의 죽음에 대해 순수한 관계를 갖는다고 간주된다. 동물에 있어서 죽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존재 이해를 갖지 못하고, 한편으로 현존재에 있어서 그것 자신의 실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있는 죽음은, 참된, 그것으로서 고유한 존재 이해의 조건이 된다.

 『아포리아』에서는 현존재의 죽음은, 가장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도, 순수한 죽음도, 그때마다 “나만”인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비록 현존재의 죽음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죽는 것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이기를 그치고,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것은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은 결코 나의 것일 수 없고, 이런 의미에서, 현존재는 동물에 비해 죽음에 대한 더 순수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으로서 현존재에는 가능한 것, 다른 어떤 형식의 존재자나 산 것에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 그러므로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실제로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라면, 그것은 또한 그것으로서 나타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것으로서만 소멸해버리는 ‘그것으로서’에 대해서 지닌 관계는, 현존재의 실존의 비본래적인 형식에도 본래적인 형식에도 공통되는 특징이며, 또한 모든 양태의 죽음의 경험(그것으로서 고유하게 죽는 것〔Sterben; Dying〕, 소멸하는 것〔Verenden; Perishing〕, 목숨을 잃는 것〔Ableben; Demise〕에도 공통되는 특징이며, 게다가 현존재의 외부에 있는, 온갖 산 것 일반에도 공통되는 특징인 것이다. … 동물도 죽는 것이다29)) 게다가 ”나 자신의 죽음“은 나의 능력이 미치는 영역에는 없다. 때문에 현존재에 있어서, 나 자신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 사이에 순수한 구별은 있을 수 없다. 불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데리다가, 현존재가 자신에 앞서고, 그것 자신의 죽음 ―타자의 죽음이 앞서고,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고유하고 비고유한 죽음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죽음 ― 예기하는 방법을 재-해석하는 까닭이다. 데리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


왜냐하면, 반대로, 만일 죽음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고, 그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 그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가능성인 것이라면, 인간은 혹은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그것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관계를 갖는 것은 결코 할 수 없고, 그저 멸하는 것, 목숨을 잃는 것, 그리고 (더 이상 타자가 아닌)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만 관계를 갖게 된다. 타자의 죽음은 이렇게 다시 ‘시작’의 죽음에, 항상 시작으로서의 죽음이 된다. … 타자의 죽음, ‘나’ 속에 있는 타자의 죽음은, 근원적으로 ‘나의 죽음’이라는 연사(連辞) 속에서 명명되는 유일한 죽음이다. 이것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결과에도 불구하고.30)


 이처럼 애도는 죽음에 관한 데리다의 텍스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타자의 죽음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애도는, 나 자신의 죽음에 선행할 뿐 아니라, 나에 앞서서, 나의 ‘자아’에도 선행한다. 이미지의 힘의 기반은, 앞서서 각인된 죽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렇게 근원적인 애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지가 나타나려면, 그 사람의 죽음[落命, 목숨을 잃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타자의 죽음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이미지는, 가능한 타자의 죽음을 각인해버리기 때문에. 데리다는 어떤 육체가 이미지로 변용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루이 마랑의 개념의 하나인 “상상적 변용”을 다루고 있다. 마랑의 이론에서는, 어떤 육체를 이미지로 변용시킨다. “이 기층적인 힘은, 상상적 변용의 혜택을 입고, 상상적 변용의 결과로서 생긴다. 그 기초는 무엇보다 우선 상상적이다. 그 힘은 원래 시작부터 상상적이고, 환상적이다.”31) 왜 데리다는 여기서 “환상적”(phantasmatic)이라고 말하는 걸까? 어쩌면 여기서의 환상은, 신체가 이미 그런 바의 이미지를 가리킬 것이다. 환상의 문제는, 고양이의 공형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건드리고 싶다.

 그러나 『아포리아』에서의 이미지의 분석에는, 이미지에 대해 말했던 것과, 고양이와 맹목에 대해 말했던 것을 관련시킬 수 있는 대목이 갑자기 나타난다. 텍스트의 어떤 대목에서, 데리다는 말한다. ― “우리에게 이미지는, 그것이 보이고 있는 것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32)[“Lʼimage est voyante, plus que visible. Lʼimage nous regarde”]. 일독하면 이 두 개의 문장은 놀라운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 쪽의 문장도, 이미지와 애도의 관계의 개념적 발전과 완전히 조화하고 있는 것이다. 애도는 타자인 자가 우리에 앞서서 각인되는 방법이다. 애도는 우리 자신의 죽어야 할 운명과의 관계로서도 또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의 힘은, 우리 자신의 비-역능의 일부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앞서서 각인될 수 없는 것의] 불가능성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인데, 애도가 내미는[제출하는] 목적지를 보여주라고 말할 때, 애도는 언뜻 보면 우리로부터 타자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방향은 역방향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자신 속에 들어서고,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타자이다. 그래서 만일 데리다가 말하듯이, 이미지의 힘이 절대적인 가능태라면, 이미지가 우리에게 제출되고[내밀어지고] 있으며, [맞은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맞은편에서] 우리를 횡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애도에 있어서 애도하는[슬퍼하는] 사람은, 죽은 자에 의해, 죽은 자의 이미지에 의해 바라보이고 있는 이미지로 전환된 그/녀 자신인 것이다. 데리다는 이 문맥에서 거울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나, 여기서는 고양이와 거울, 그리고 여성 사이에 생기는 복잡함에도 비슷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타자를 바라볼 때,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 타자가 이미 내 안에 있고, 나를 변용시키기 때문에. 타자의 눈빛은 타자로부터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은 내 안에 있다. 타자는 이렇게 실재하는 타자인 동시에 환상적인 타자이다. ― 타자는 내 앞에 앞서서, 단독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안에 있으며, 나의 시선(주시)을 보내는[내미는], 나의 애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바라보이고 있다, 그렇게 내가 말했다. 루이 마랑에 따르면, 그때마다, 단독적으로. 그가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 속에서[En nous]. 그가 내 안에서 바라본다. [“Il regarde en nous”] … 그때마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 우리가 그러한 바의 사람을 향해 ―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 그 사람은 전적인 타자이며, 무한한 타자이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죽음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그에게 믿음을 두고, 그를 넘어서고, 그를 이 무한의 이타성[他性] 속에서 멀리해 왔다. … 그것은 과잉과 비대칭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루이 마랑이 우리에게 쏟은 눈빛을 받는다[“nous portons en nous-même le regard que Louis Marin porte sur nous”].”33) 타자의 죽음에 의해서, 내 속에서 타자의 이타성[他性]이 숨겨진다[제공된다]. 그것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자기로부터 떼어놓아진다. 일반적인 타자가 있는 동시에, 타자는 그때마다 단독적이기도 하다. 무한의 이타성[他性]은 그/녀의 단독성을, 이 개개의 구체적인 존재나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타성[他性]과 단독성의 관계를 통해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에, 이타성[他性]은, 단독성의 개념화의 한 방법이 되며, 그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모종의 개념으로 지양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애도의 힘에 대해」와 『동물을 쫓다』 같은 텍스트 사이의 차이의 하나인데, 후자에 있어서 데리다는 “plus autre que tout autre”이라는 문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plus autre que tout autre”란 무슨 의미일까. 물론 이것을, 데이비드 윌스를 좇아, “어떤 것보다도 가장”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적인 다른 것 이상으로 다름”과 같이〔『動物を追う』 31頁〕. 그러나 만약 “전적인 타자의 로고스”가 충분하지 않은 점에 대해, 데리다의 설명 의무를 고려하고 있다면(“un autre sans altérité”117/161), 우리가 동물에 대해 생각하고, 타자성 없는 타자로서의 동물에 대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경우에는, 우리는 다른 선택지의 가능성을, 즉 “plus autre que tout autre”라는 문구를 “전적인 타자 이상의”라고 번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애도는 앞서 말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도 향하고 있다. 이미지의 힘은 일방향적이지만, 동시에 ― 이때야말로 환상이 나타나는 시간인데 ―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라는 연사(連辞)에 있어서 명명되는 유일한 죽음이며, 그리하여 “죽음의 저편에 있는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해진다. 이처럼 살아 있고, 내게는, 나 자신의 죽음이 보이는, 이렇게 살아 있고, 내게는, 나 자신의 죽은 육체가, 나의 장례식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그의 세미나의 마지막에서 장대한 분석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이 환상이다. 거기서 그는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아니, 오히려 나의 사체를 상상하는” 시도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구별”을 등한시하고, 죽음을 생각하면, 거기에 상상과 환상이 은연중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34) 상상과 환상은, 〔단순한 자기촉발이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이타-촉발”(auto-hetero-affective, 自己―異他―触発)을 전제하고 있으며, 데리다가 말하듯이 “우리는 ‘자기-이타-촉발’의 차원 없이는 환상을 생각할 수 없다.”35) 본고에서는 이런 ‘자기-이타-촉발’을, 눈빛에서, 이미지에서, 애도에서 봤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우리 속에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 맺어지는데, 이것을 우리에게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데리다가 특히 주안을 두는 환상은, 시신[遺体]에 생길 수 있는 환상이다.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의 실제적으로 두 가지 방법, 즉 매장과 화장이다.



4

 모리스 블랑쇼〔1907-2003〕가 죽은 것은 데리다가 세미나에서 위의 테마에 대해 그의 사색을 전개시킨 때였다. 데리다는 블랑쇼의 화장에 입회하고, 조사(悼辞)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서거 이틀 후에는 블랑쇼에 관한 긴 세미나를 했다(데리다는 그 내용을 나중에 개최된 강연에서 발표했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이 세미나의 종반부에서 블랑쇼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데리다가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초판에서부터 길게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의 환상과 눈빛의 환상, 더욱이 죽음의 환상과 자기 자신의 매장의 환상 등과 같은 형상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 속에서, 한밤중에 주인공 토마가 외출했을 때,36) 그를 본 유일한 자는 장님 같은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가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토마 뒤를 쫓아다니는 가운데, 고양이는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고, 그 몸은 인간의 몸으로, 고양이 자신도 모르는 목소리가 고양이의 안쪽에서 말하기 시작하고, 고양이의 영혼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과정에 대해, 이어서 고양이 자신을 다시 떠밀어내고, 고양이 자신이 횡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허공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고양이는 변신을 계속하면서, 이제 “고등한 고양이”가 됐다고 고양이는 말한다. 그 고양이 자신이 거대한 머리로, 고양이 자신한테 시선을 보내는 거대한 머리로, 시선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 눈빛으로 계속 바뀐다고 말한다. 눈빛이 고양이 그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고양이 자신에 의해 “나는 죽는다, 죽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양이는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다시금 지면에 쓰러진 불상한 고양이가 된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토마를 마지막으로 슬쩍 쳐다본다. 토마는 맨손으로 땅에 무덤을 파고, 그를 또한 “고등한 고양이”라고 부른다. 고양이가 독백을 끝내자, 장면은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토마의 묘사로 옮겨지고, 구멍을 다 판 그는 그 무덤에 들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그 자신의 이미지가, 그의 분신이 되고, 바로 그 자신의 외형을 가진 무덤의 허무에 의해, 그는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사실 그는 죽었고, 동시에 또한 죽음의 현실로부터 떠밀려났다”(菅野昭正訳, 131頁).37) 그는 어찌어찌해서 무덤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마침내는 죽는 것도 소생한 것도 깨닫고, 무덤에서 벗어난다. “그림에 그려진 채색된 미라”처럼, 마치 라자로ラザロ인 것처럼.

 데리다는 세미나에서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내가 죽기”에는 “터무니없는 환상〔phantasm〕”이 있다고 말하고, 이 사례에는 “동물되기”, “자(서)전적 동물되기”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그의 작품에서 인용한 장대한 구절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고, 인용 후에는 하이데거의 “지배”〔walten〕를 다루고, 그것을 블랑쇼의 “중성적인 것”〔neuter〕이라는 문제에 접속시키고 있다.

 이때 고양이에 대해, 혹은 고양이가 맹목인 것에 대해, 그리고 불가능한 죽음이 반복되는 장면에 대해, 더 나아가 고양이와 인간이 서로 거울 사본鏡写し[거울처럼 그대로 복제한 것]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 데리다로부터 조금도 언급이 없는 것은 꽤 기묘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침묵은, 블랑쇼의 소설의 장면이,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해 데리다가 말해야 했던 모든 것에 있어서 계열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왜 데리다는 한마디로 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두 개의 원고(세미나판과 강연판)을 주의깊게 비교하면, 독자는 세 가지 사항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는 문장에 가해진 작은 변경점, 또한 “강연판 원고”에서 블랑쇼의 소설로부터 갑자기 ‘지배’와 중성적인 것으로 이행하기 전에 아주 짧은 구절이 추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블랑쇼의 텍스트를 인용할 때, 어떤 부분을 여러 차례 생략하고 있는 점이다.

 (1) 데리다는 그의 세미나에서, 블랑쇼의 소설 장면을 할 때, 그 소설에는 들뢰즈라면 “동물되기”라고도 부르는 것에 관한 “엄청난 환상”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여기에는 이야기꾼이라는 ‘동물되기’, 이야기꾼이라는 ‘자(서)전적 동물되기’에 대해 설명한다.38) 블랑쇼의 강연에서 읽혀진 세미나 원고에는, 약간의 변경이 가해진다. ― 이야기꾼이라는 ‘동물되기’, 들뢰즈라면 그렇게 부를 것인데, 나로서는 ‘자(서)전적 동물되기’, 그렇게 부르고 싶다.”39)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는 분명히 그의 사상인 자(서)전적 동물의 개념으로 얘기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고 싶다[dirait je pour ma part]”고 데리다는 말한다. 즉, 이 개념은 데리다 자신이 발명한 것이다. 게다가 “강연판 원고”에서는 “이야기꾼”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어 있다. 데리다는 여기서, 어떤 읽기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즉, 블랑쇼의 이야기를 해석할 때, 데리다 자신의 ‘나’를 도입함으로써, 그것을 그 자신의 ― 자(서)전적으로 ― “동물되기”와 연관시키는 읽기를. 데리다는 “자(서)전적 동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자(서)전적 동물이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맹목의 고양이가 나오는 장면에 자(서)전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당히 애매한 형태로 데리다가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블랑쇼의 고양이가 데리다에게 있어서 자(서)전적인 고양이가 된 것처럼.

 (2) 강연판 원고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지배’의 문제에 대해 되풀이하여 논지를 전개시킨다. 이 개념은 그의 세미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련을 갖는데, 그런 전개를 행하는 이유는 블랑쇼에 관한 강연에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이 강연이 행해질 때〕 이 이행에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몇 줄의 문장을 보태고, “그것으로서”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간과 동물의 차이의 기원으로서의 “그것으로서”이며, 그것이 있어서야 비로소, 그 차이가 소설의 장면과 이어지는 것이다.40) 한 가지는 맹목의 고양이와 그의 무덤을 파는 토마의 관계가, 또한 그 한편에서는 “그것으로서”의 문제가 있고, 이것들은 모두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데리다 자신은 그 연결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세 번째의 변경에 대해 말하면, 데리다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고양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인용할 때, 세 개의 단락을 생략하고 있다. 실제로, 이 세 개의 단락은 모두 고양이의 눈과 눈빛에 관련된 것이다. 데리다는 세미나와 강연 둘 다의 경우에도, 이 단락의 인용을 생략하고 있다. 처음 생략된 구절은, 고양이의 눈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한쪽 눈은 닫혀 있고, 다른 쪽 눈은 피에 젖어 있다”고 하며, 그 두 눈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하는 감각을 얻었다”고 적혀 있다.41) 두 번째의 생략된 구절에서는, 고양이가 뛰어넘을 수 없는 허무에 사로잡힌 감각을 고양이가 이야기하며, 미리 예건하는 능력을 잃은 것이 그려져 있다. ― “이리하여 이제 나는, 눈빛 없는 존재이다”[“Et maintenant je suis un être sans regard”].42) 그리고 고양이가 그 혀/언어가 맹목(의 사람의 것)이라는 목소리도 또한 들려온다. ― “langue dʼaveugle.” 세 번째의 생략된 구절은, 고양이 자신이 거대한 머리가 된 것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그 고양이가 머리라기보다는 눈빛이 됐다고 말하는 장면이다[“au lieu dʼun tête, semble nʼêtre quʼun regard”].43) 어떤 경우든, 눈빛과 그 시선이 문제가 되며, 어떤 경우든, 어떤 시점(視点)에서, 불가피하게 허구적이 되는 고양이의 시점(視点)에서, 보이는 것과 맹목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블랑쇼의 고양이의 “자(서)전되기”와 눈빛과 맹목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관계에 대해서 거의 정신분석적인 독해를 가하고 싶은 부분이다. 아마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그것으로서”의 문제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블랑쇼에 관한 데리다의 텍스트에 있어서,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두 번째의 변경점의 기초가 되는 “그것으로서”의 문제이다.

 그것이 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임은 명백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에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은, 죽음과의 관계이며,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과의 관계이다. 현존재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 관계에 있어서이다. 이런 가능성이 ‘이해’(Verstehen)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현존재의 세 가지 결정적인 현실적 요소 중 하나. 남은 두 개는 정태성情態性/심경〔state of mind〕과 퇴락〔falling〕이다). “~로서-구조”, 또는 “그것으로서”의 구조를 ‘봄’〔Sight, 視〕이나 ‘예견’〔Foresight〕에 결부시키는 것이 ‘이해’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모든 ‘봄’[alle Sicht]이 원래 뜻에서는 이해에도 기초한”44) 것이지만(細谷訳, 319頁),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봄’은 가능성을 기투하는 것이며, 우리의 ‘이해’라는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을 해석하는 것을 돕는다. 이런 의미에서 ‘봄’은 “그것으로서”와 관련을 가진다. ‘봄’은 ‘그것으로서’의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현존재의 가능성을 기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봄’은 존재의 ‘개시성’(Erschlossenheit)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가능성의 기투는 “~으로서-구조”를, 세 개의 서로 얽힌 “선-구조” ― ‘앞서 가짐(Vorhabe), 앞서 봄(Vorsicht), 앞서 잡음(Vorgriff)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예견 ― 앞서 가짐과 앞서[先] 개념을 잇는 중간항 ― 은 앞서서 봄으로써, “이해되는 것을 해석 가능한 것으로서 고정시키고”, “내 것으로 하는 행위[Zueigunung45)]〔고유화〕”를 선도한다. 이리하여 현존재는 “그것으로서”를 가진 목적으로, 예견적으로 사항의 점유와 파악을 선도한다.

 블랑쇼의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에서의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이해’라는 개념의 이해에 있어서 이뤄진,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초기의 주석으로 읽을 수 있다. 블랑쇼의 텍스트에서는 “그것으로서”의 죽음에 접근할 방도는 없다. 토마는 “죽음의 현실로부터 떠밀려지고”, 단순히 떠밀려난다/거부된다고 할 뿐 아니라, 그것은, 죽어 있는 “~로서”의 그 자신의 이미지이며, 토마에 죽음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치 고양이에 의해 “앞서서” 반복되듯이, 토마의 섬뜩한[어쩐지 기분 나쁜, 편치 않은] 경험이 반복되는 모양이다. 고양이의 독백은 실제로, 토마에게 일어나는 것의 예언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예견이 예언이 되며, ‘봄’은 언어가 된다. 그리고 이 언어는 맹목이며, 장님의 언어가 된다. 죽음에 관해서 그것 자신이 맹목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예견은, 현재에 대한 맹목과 결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환상이라는 맹목과도 결부된다. 우리는 그 환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해 접근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내 속에 이미 있는 타자의 존재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데리다는 원래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시점(時点)부터, “타자와의 관계나 죽음과의 관계는, 동일한 개구부이다”46)고 말했다. 타자, 예를 들어 동물, 예를 들어 고양이는, 나 자신과 더불어 있는 내게, 나의 종언이라는 심연에 있는 나와 대면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이, “어떤 바닥없는 눈빛에 못지않게, ‘동물의’라고 말해지는 이 눈빛은, 타자의 눈으로서, 인간적인 것의 심연의 한계를 내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비인간적 또는 몰인간적인 것, 인간의 종언의 무수함들”을 주기 때문이다(L’animal…, 30/12/33).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가 강조한 것은, 나를 열고, 내 속에 죽음을 기입하는 것은, 추상적인,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타자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때마다 유일한 타자, 그러므로 ‘이타성[他性]’조차도 아니고, 그저 이 혹은 저, 단독적인 것에 대한 관계는,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내게 모종의 일반적인 것으로 아직 잔존해 있는 듯한(다른 고양이들이나 다른 국어나 언어, 다른 철학자들 등과 같은) 다른 온갖 단독적인 것을, 그들을 단독적인 것으로 하지 않은 희생을 나더러 치르게 한다고 해서, 그 관계는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윤리적인 것으로부터 종교적인 것으로 이행할 때,47) 즉 그가 신앙의 도약을 했을 때의, 데리다에 의한 키에르케고르 해석법이다. 그 신앙의 도약은, 이 프랑스의 철학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성이나 초월적인 신과는 결부되지 않고, 오히려 약하고, 여리고, 상처 받기 쉽고, 그때마다 개개의 존재이며, 경험적으로, 그리고 자(서)전적으로도 나를 각인해 온 것과 결부됐다. 이것은 즉 비오스〔사회적∙정치적 삶〕가, 개개인의 ‘생명’ 또는 ‘생활’이, ‘자기[自]’ 속에, ‘자기성’ 속에, 죽음을, 타자를 ‘기입한다’(graphein)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자(서)전에는, ‘자-타-사-생-기’(auto-hetero-thanato-bio-graphy, 自―他―死―生―記)가 동시적으로 혼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데리다가 “산 것들의 또 다른 사고에, 산 것들의, 이것들의 자기성에 대한, 이것들의 autos에 대한 … 관계”를 강조하는 점을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L’animal…, 173/126/234). 내가 보기에, 눈빛이 데리다를 가로지름으로써, 동물이나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질문, 그리고 희생과 죽음의 물음이 갑작스레 열리는 곳으로 그를 유도한 것은 ― 거의 대부분을 저 환상적이고 실재하는 고양이가 맡고 있지만 ― 그래도 역시 동시에, 그 고양이 이전에 존재한 고양이, 그 고양이를 쫓고 있는 고양이들, 즉 고양이를 그리는 문학의 담론을 모두 통틀어, 저 전통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눈빛 ― 우리는 맹목이 되는 바의 눈빛 ― 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벗어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도덕성과 맺고 있는 관계의 맹점이 되고 있는 장소에, 우리의 단독적인 것을 제출한다. 그리고 이 눈빛은, 우리에게 내던져져 있는 동시에, 우리로부터 환상적으로 발생하는 이 눈빛은, 그때마다 단독적이다. 절대적으로 개개의, 근원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이(tode ti), 욕실의 이 고양이가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환상의 여백을 연다. 결코 개념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환상에 있어서 열려진 여백을.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가 아닌 것이다. 전적인 타자도 아니고, 어쩌면 타자조차도 아니다. 우리가 만난 단독성은, 하나의/한 명의 타자라고조차 부르지 마라. 그것이 나와 만난 순간, 그것이 나를 바라보고, 내가 보이는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나를 건드리고, 나를 가로지르며, 내게 속하지 않는 나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단독적으로 어울린다, 서로의 장소를 교환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도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를.



〔범례〕

1. 본고는 2014년 12월 3일에 首都大学東京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에서 읽은 원고 “The Cat, The Look, andDeath: (Variation on a Derridean Theme)”의 번역이다.

2. 본고에서 참조되는 데리다의 주요 텍스트는 원전 프랑스어판으로서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Paris: Galilée, 2006; L’animal…,로 약칭), 일본어판으로서 『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 年;『動物を追う』로 약칭), 영어판 Jac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trans. David Wills(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The Animal…,로 약칭)을 각각 저본으로 삼고, 인용할 때에는 필요할 경우에는 프랑스어/영어/일본어로 기재했다.

3. 본문 안의 [ ]는 저자가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Paris: Galilée, 2006.에서 원문의 인용을 할 때 사용했다.

4. 본문 안의 “ ”는 저자의 인용을, ( )은 저자의 원어표기 및 보충을, 〔 〕는 역자에 의한 주석을 나타낸다. 저자 ダリン・テネフ의 원문 안에서 이탤릭으로 강조된 대목은 굵은 글씨로 나타냈다.


〔인용・참고문헌〕

본고의 번역에 있어서는 이하의 문헌을 참조했다. 작품으로부터의 인용은, 특히 거절당하지 않은 한 원저 뒤에 적은 ( ) 안의 번역서를 사용하고, 적절하게 필요할 경우에만 역자가 기존 번역에 약간의 변경을 가했고 이를 각주에 적었다.


Blanchot, Maurice. Thomas l’bscur. Première version, 1941, Paris: Gallimard, 2005.(「謎の男トマ」菅野昭正訳、『ベケット・ブランショ』<筑摩世界文学体系82 >所収、筑摩書房、1982 年、121-65 頁)

Derrida, Jacques. De la grammatologie, Paris: Seuil, 1967. ; English translation : Of grammatology, trans. G. Ch. Spivak.(『グラマトロジーについて』(上・下)足立和浩訳、現代思潮社、1972 年)

_______, Mémoires d’veugle. L’utoportrait et autres ruines.(『盲者の記憶―自画像およびその他の廃墟』みすず書房、鵜飼哲訳、1998 年)

_______, Aporias, trans. Thomas Dutoit.(『アポリア 死す―「眞理の諸限界」を「で/相」待―期する』港道隆訳、2000 年)

_______,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The Gift of Death(『死を与える』廣瀬浩司・林好雄訳、ちくま学芸文庫、2004 年)

_______, Le toucher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On Touching.( 『触覚、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に触れる』松葉祥一・榊原達哉ほか訳、青土社、2006 年)

_______, L’animal que donc je suis.(『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鵜飼哲訳、筑摩書房、2014 年)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 English translation: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存在と時間』(上・下)細谷貞雄、筑摩書房、1994 年)


〔著者紹介〕

다린 테네브ダリン・テネフ(Darin Tenev)는 비교문학과 서구현대사상을 주전공으로 하며, 현재는 소피아대학 조교수. 저작으로 조이스와 엘리엇, 불가리아 시인 아타나스 달체프의 문학작품, 볼프강 이자,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론, 후설, 하이데거, 장-뤽 낭시 등의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라캉의 정신분석 등을 비교문학적으로 논한 문학원론 『허구와 이미지, 모델』(Фикция и образ. Модели [Fiction and Image. Models], Пловдив: Жанет 45 [Plovdiv: Zhanet 45], 2012), 가능성이나 증여, 상상력 등과 같은 주제로부터의 데리다론 『탈선 : 자크 데리다론』(Отклонения. Опити върху Жак Дерида [Digressions. Essays on Jacques Derrida], София: Изток-Запад [Sofia: Iztok-Zapad], 2013)이 있다. 일역본으로서 「애도된 영토 : 일본 아방가르드 잡지 『아』의 경우喪われる領土――日本アヴァンギャルド雑誌『亞』の場合」(小川寛大訳・高木信編『日本文学からの批評理論――亡霊・想起・記憶』笠間書院, 2014년)가 있다. 또한 テネフ 씨는 그동안 萩原朔太郎, 高村光太郎, 谷川俊太郎 등의 시인과, 西田幾多郎와 三木清 등의 철학자의 작품의 불가리아어 번역을 했다.


Darin Tenev, “The Cat, the Look, and Death”. Reprinted by permission of Darin Tenev.

訳=南谷奉良(一橋大学博士課程)


1)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Paris: Galilée, 2006. 본고에서는 이하 원문 프랑스어판을 L’animal…이라고 표기하고, 영어판에는 Jac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trans. David Will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을, 일본어판에는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년을 참고했으며, 인용 때에는 쪽수를 프랑스어/영어/일본어의 순서로 빗금과 더불어 표기한다.

2) 아마 고양이에 얽힌 망라적인 계보학 연구를 한 최초의 시도에는 일찍이 1920년대 초반에 집필된 Carl van Vechten, The Tiger in the House, New York: Alfred A. Knopf, 1968 (1920)가 있다. 유익한 책이지만, 꽤 나이브한 필치로 써져 있는 점은 아쉽다. 그렇지만 고양이에 관한 연구서로서는 초석이 되는 저작이다.

3)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p. 101; Derrida, The Gift of Death, trans. David Wills, Chicago: U of Chicago Press, 1995, p. 71. 1990년에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이 텍스트에서 이미 고양이가 등장하고 있다.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In: L’thique du don. Colloque de Royaumont décembre, Paris: Métailié-Transition, 1992, p. 70.를 참조.

4) “리조랑지스(Ris-Orangis)의 묘지 안내도에는 생전에 그가 길렀던 모든 고양이의 무덤이 있다”(Benoît Peeters, Derrida, Paris: Flammarion, 2010, p. 518).

5) Jacques Derrida, Glas, Paris: Galilée, 1974 ;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Glas, trans. John P. Leavey, Jr., Richard Ran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6.

6) Ibid., p. 8bi for the French, p. 2bi for the English edition.

7) [옮긴이] 일본어에서 ‘宙吊りにする[글자 그대로는 <허공에 매달다>]’, ‘宙吊りにされる[글자 그대로는 <허공에 매달리다>]’는 대체로 영어의 suspend, 즉 ‘중지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렇지 않은 경우도 제법 있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구 그대로 번역해야 했다. 물론 영어 원문을 보면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Catherine Malabou, Jacques Derrida, Counterpath. Travelling with Jacques Derrida, trans. D. Wills, Stanford :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p.56에는 “And, as every morning, with only a cat for a witness. Here his name is Settembrino.”라는 기술이 있다.

9) Jacques Derrida, « À force de deuil »,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Paris: Galilée, 2003, pp.177-204;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By Force of Mourning”, The Work of Mourning, edited and translated by Pascale-Anne Brault and Michael Naas,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pp.139-64.

10) Miglena Nikolchina, Devi, ritsari, kralitsi (Maidens, Knights, and Queens), Plovdiv: Janet 45, 2014를 참조.

11) James Bowen & Garry Jenkins, My Name is Bob, London: Red Fox Picture Books, 2014.

12) E. T. A. 호프만,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 양장본(The Life and Opinions of the Tomcat Murr)』, 김선형 옮김, 경남대학교출판부, 2010.

13) Hippolyte Taine, Vie et Opinions Politiques d’un Chat, 1858.

14) 夏目漱石, 『吾輩は猫である』, 東京, 角川文庫, 1972.

15) 同上16-17頁.

16) 同上26頁.

17) James Joyce, Ulysses. Hans Walter Gabler, ed. (Random House: New York, 1982)〔이하 본문 안에서 『율리시스』를 인용할 때에는 약호 U에 이어 삽화 수와 행수를 적는다.〕

18) James Joyce, Poems and Shorter Writings, London: Faber & Faber, 1991, p. 128.

19) Richard Ellmann, James Joyce, Oxford: Oxford UP, 1983, pp. 536-37.

20) ibid, p. 536.

21) Jacques Derrida, Memoirs of the Blind, op.cit., p. 2.

22) Ibid., p. 47.

23) Ibid., p. 51.

24) Ibid., p. 68.

25) Jacques Derrida, Memoirs of the Blind, op.cit., p. 65.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Louvre,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1990, p. 69.)

26) Jacques Derrida, Le toucher, op. cit., p.13;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On Touching, op. cit., p.3.

27) 다음의 문헌을 참조. Jacques Derrida, « À force de deuil »,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Paris: Galilée, 2003, pp. 177-204 ;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 By Force of Mourning », The Work of Mourning, Chicago : U of Chicago Press, pp. 139-63.

28) Ibid., p. 182 for the French; p. 146 for the English text.

29) Jacques Derrida, Aporias, trans. Thomas Dutoi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75.

30) Ibid., p. 76.

31) Ibid., p. 188 for the French; p. 151 for the English text.

32) Ibid., p. 199 for the French; p. 160 for the English text.

33) Ibid., p. 200 for the French; p. 161 for the English text.

34)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II, op.cit., p. 176.

35) Ibid., p. 244.

36)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원저에는 초판 :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remière version, 1941, Paris: Gallimard, 2005, pp. 72-79; 2판 :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aris: Gallimard, 1950, pp. 34-42을 사용했다. 영어판은 2판만 입수 가능하며, Maurice Blanchot, Thomas the Obscure, trans. Robert Lamberton, The Station Hill Blanchot Reader, ed. Georg Quasha, Station Hill: Barrytown, 1999, pp. 71-75을 참조. 〔일역본으로는 門間広明訳『謎の男トマ 一九四一年初版』(叢書・エクリチュールの冒険)月曜社、2014년이 있다.〕

37) Ibid., pp. 77-78 for the first edition; p. 40 for the second edition; pp. 73-74 for the English translation.

38)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II, op.cit., p. 266.

39) Jacques Derrida, Parages, Paris: Galilée, 2003, p. 295.

40) Ibid., p. 299.

41)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remière version, 1941, op. cit., p. 73. 이 대목은 2판에서는 없어졌다.

42) Ibid., p. 74. (Lamberton translates: “And now I am a dull-eyed creature.”, p. 71.)

43) ibid., p. 75.

44)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1986 (1927), S. 147; English translation: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 New York: Harper Collins, 1962, p. 187.

45) Heidegger, Sein un Zeit, op.cit., S. 150; Being and Time, op. cit., p. 191.

46) 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Paris: Seuil, 1967, p. 265. English translation : Of grammatology, trans. G. Ch. Spivak, Baltimore and London : John Hopkins UP, 1997, p. 187.

47)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op. cit. (The Gift of Death, op. cit.)를 참조.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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