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식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흔적 
: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론』에서 운명과 해방 

歴史認識理論における精神分析の痕跡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の『パサージュ論』における運命と解放

프랑수아즈 나이슈타트(Francisco Naishtat)

Francisco NAISHTAT, « Les traces de la psychanalyse dans la théorie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 Destin et délivrance dans les Passages benjaminiens (Passagen-Werk)», Philosophie et Éducation, UTCP Booklet 1, UTCP, 2008.


Ⅰ. 서론 

 20세기를 통해, 역사기술은 인문과학의 형태와 그 변형과도 관련된 철학적 충격이나 인식론적 충격을 받아왔다. 역사이론의 변용에 수반된 다른 인문과학은 인식론적으로 새롭게 방향이 지어지고, 현대철학은 전회해 왔는데, 본론에서는 이런 변용의 전부를 열거할 수는 없다. 현대의 역사기술에서의 결정적인 변화를 세 가지만 지적한다. 

 (1) 해석학적인 전환 : 역사가의 이해와 해석을 역사인식의 구조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결과로 간주하는 것. 

 (2) 사회학적인 전환 : 사회나 역사의 장기적인 구조에 입각해 역사기술의 차원을 재설정하는 것. 이 경우, 개별 사건에 대한 접근법으로부터 구성된 역사기술은 배격된다. 

 (3) 언어학적인 전환 : 역사의 에크리튀르(역사 이야기), 더욱이 역사기술의 텍스트의 에크리튀르에 대한 인식론적 관점을 수정하는 것. 역사기술의 분야에 텍스트 이론이나 언어이론을 둘러싼 논의를 도입하는 것. 

 이런 역사기술의 변용(우리는 20세기의 철학의 변용과 결부시켜, 이것을 굳이 '전회'라고 표현했다)에 있어서, 정신분석은 얼핏 보면,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정신분석의 작업에 있어서는, 피분석자의 기억이나 억압된 과거를 현재시와의 동적인 관계에 있어서 파악하기 때문에, 시간 형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역사학 갗은 학문 분야에서 정신분석이 인식론적 충격도 '전회'도 초래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기묘한 것 아닐까? 역사학의 사명은 바로 "현재시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반론은 다음 세 가지 유보를 포함할 것이다. 

 (a) 최근의 역사기술은 분명히 정신분석의 충격을 받고 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의 트라우마를 짊어진 희생자의 역사적 기억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제수용소, 전쟁, 학살, 민족간 폭력 등의 역사적 재앙의 기억이다. 그런데 트라우마의 물음은 분명히 담론이나 이야기의 단절에 관계한다. 즉, 통상적인 사건의 증언과는 달리, 희생자가 사건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파울 첼란이 "아무도 증인을 대신해 증언하지 않는다"(Niemand zeugt für den zeugen)[각주:1]는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만 한다. 이 점에서 정신분석은 역사기술에 선행한다. 유아기나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은 누락 부분이나 트라우마의 어떤 기억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 앞에서 이야기가 단편화될 때, 담론의 한계가 드러날 때, 정신분석은 역사가에게 어떤 모델을 제공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뭔가를 지시하고, 상징하고 암시한다는 모델이다.[각주:2] 

 (b) 정신분석에 대한 역사기술의 유보는 후자의 편만이 아니라 전자로부터도 생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석을 어떤 형식(문화, 사회, 역사)에 있어서도 금지했다. 초자아의 차원에서, 의식은 자기 동일성이나 승화 같은 문화적 모델을 포함시킬지도 모르지만, 무의식 쪽은 각 주체의 개별적인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며, 항상 개인적인 채로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에게서는 집단적인 정신분석은 인정되지 않으며, 르 봉의 군중심리학에서의 집단심리도, 헤겔의 역사적 관념론에서의 민족정신도 상정되지 않는다.[각주:3] 무의식에서의 집단적 내지 개인적 지위status의 물음은, 프로이트(및 라캉)이 보기에, 이른바 정당한 정신분석과 미숙하고 잘못된 분석이론을 식별하는 시금석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성의 차원에 한정된다면, 역사기술은 정신분석을 간접적이고 완곡하게 사용하게 된다. 대체로 역사 해석은 개인적 차원에 한정된 정신분석의 가능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개인들의 심리 ― 프로이트나 라캉에게서의 주요한 쟁점 ― 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c) 이런 설명은 더 나아가, 제3의 유보와 깊이 관련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이론과 역사기술의 실천에 있어서 정신분석과 독자적인 관계를 발전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역사기술의 작업과 이른바 정치, 과거와 역사가의 현재 사이에서 중요한 접점 ― 역사가가 공식적으로는 부정해왔던 접점 ― 을 설치함으로써 실증주의와 역사주의라는 두 개의 극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과거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관해서는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적어도 꼽을 수 있다. 

① 벤야민은 성별(聖別)된 과거와 억압된 과거의 이분법을 시간성의 이론에서 끌어내고, 과거는 두 번 지나간다는 형태로 제시한다. 과거는 첫 번째에는 성취된 과거로서, 두 번째에는 현재시에 대한 새로운 기회chance를 포함한 아직 성취되지 못한 과거로서 지나가는 것이다.[각주:4] 실제로,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추도적追悼的 상기의 작업에 의해 과거는 현재시의 중핵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가 신화로서 경험되고, 각자에게 이른바 숙명으로서 부과될 때, 그런 숙명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있어서, 특히 19세기에 관한 그의 말년의 탐구에 있어서, 역사가의 작업은 과거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실증주의)도, 지나가버린 시대가 우리의 반성적 의식에 대해 보유하는 의식을 과거의 한복판으로부터 사후적으로 폭로하는[파헤치는] 것(역사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실들의] 응축이나 변증법적 이미지의 기법이나 몽타주에 의해, 시간의 연속된 흐름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의 족쇄를 현재시에 있어서 파탄나게 하는 섬광으로서 과거를 발생시키고, 현재시의 중핵에서 특이한 기회chance를 개시하는 것이다.[각주:5] 

② 벤야민은 꿈과 각성의 대립을 정신분석으로부터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섭취한다[받아들인다]. 이 대립에 의해 우리는 모종의 도식을 손에 넣고, 그의 역사인식의 이론에 손을 댈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과거는 역사가에 의해 고정화되고 영원화되지 않고, 반대로 시간의 연속성을 파탄시킬 수 있도록 재활성화되는 것이다.[각주:6] 여기서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편으로, 벤야민에게서, 우리의 과거 ― 이 경우는 19세기 ― 는 판타스마고리를 포함한다. 판타스마고리가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분석하는 상품 물신주의의 현상과, 공산주의의 선구자나 계급 없는 사회라고 하는 죄 없는 유토피아주의이다. 상품의 물상화의 세계와 그 부정 ―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우정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적 소망 ― 이라는 두 개의 극은 벤야민이 보기에, 같은 시대나 같은 역사적 현상, 즉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적 표현인 것이다.[각주:7] 사회주의적 진보주의는 인류의 역사의 텔로스[목적]를 권위적으로 설정하고, 죄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지만, 그것은 결국, 천년낙원을 약속하거나 메시아의 회귀나 시대의 끝[종언]을 한없이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적어도 외관상, 역사유물론은 무적이 된다. 왜냐하면 목적론적 장치는 우리가 진정으로 승부하지 않고, 모든 승부에서 이기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이나 카타스트로프가 생기더라도, 구원은 이윽고 도래한다는 카드[패]가 수중에 있다.[각주:8] 이리하여 상품 물신주의와 공산주의의 약속에 의한 목적론적 유토피아주의라는 두 개의 극은 동일한 판타스마고리로 집약되며, 그것은 역사를 사는 자에게 피험자의 꿈과 똑같은 의미를 띠게 된다. 즉,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이 속박을 파탄시키려고 하는 바람이다. 둘 다 배우[행위자]는 꿈을 꾸는 방관자이다.[각주:9] 

③ 벤야민에게서 과거의 인식이 우리의 현재의 조건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반대로, 벤야민은 독특한 몽타주 기법[각주:10]을 갖고서, 과거와 이른바 물신주의의 톱니바퀴가 연관되는 메커니즘을 내다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벤야민은 역사인식이 어떤 충격을, 즉 각성을 일으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때 역사인식은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의 역할을 맡으며, 우리는 어떤 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운명의 마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체의 역사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형태로서 해석하는 것에는 조심해야 한다. 정신분석 후에 '해방된' 주체의 상태가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사정거리를 넘어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회귀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하는 각성이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언표하는 것은 역사기술의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각성은 소묘되고, 예상될 수 있는 경험적 사태와 똑같은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각성을 인식하기 위한 기준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고, 각성은 바로 탈신비화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적합한 때에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운명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또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뒤집고, 역사의 필연이라는 무서운 기계장치를 멈출 수 있도 있을 것이다.[각주:11] 그러나 이런 역사인식은 독일관념론 및 역사주의에 의해 해명된 의식과 동등한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이성적이고 몽매한 의식의 안티테제로서, 꿈을 파탄나게 할 수 있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기묘한 의미에서, 데리다가 벤야민에 관한 빼어난 텍스트[각주:12]에서 인정했듯이,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가는 꿈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한다〔veiller sur le rêve〕. 즉, 역사가는 꿈을 그 원천으로 소급시켜 감으로써 꿈과 대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이나 동질성을 파괴하는, 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나 다름없다.[각주:13] 꿈의 허를 찌르고, 각성에 의해 기회chance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작업이 해석의 작업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적 삶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인내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무한하게 설정되는 해방을 목적론적으로 갈망[대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분석작업이 무한하게 연장되는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분석을 헐뜯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거꾸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분석이 우리의 지성의 마력을 언어에 의해 배신하는 것을 가능케 했듯이, 분석작업에 의해 마력의 단절이 준비되는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게임을 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됐다고 해도, 사물이 무엇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각주:14] 이리하여 벤야민이 역사기술의 기회로서 논한 역사적 메시아주의는, 영원히 대망되는 메시아의 목적론적 차원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시의 각 순간이 갖고 있는 기회이며, 출구의 문이며, 역사의 연속의 단절이다. 이런 단절의 시간성에 있어서 메시아적인 것 ― 벤야민에게서의 진정한 신비 ― 이란 도래하는 것(예를 들어 구원이나 낙원 같은 목적론적 사태)이 아니라, 도래 그 자체이다. 즉, 운명의 뒤통수를 치고, 우리 자신의 과거를 해방하는 시간의 열림, 마치 두 번째로, 다만 기회로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시간의 열림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기술의 작업에 있어서 해석 모델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정신분석을 다뤄왔지만, 그러나 집합적 무의식의 원형 ― 선천적이고 비시간적으로 간주되는 원형 ― 이라는 융의 실체적 해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주체의 철학 및 역사의 목적론의 아포리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역사, 정치, 철학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파사주론』의 역사인식이론이 불러일으킨 반론의 몇 가지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5]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의 테제는 『파사주론』과 분리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몇 가지의 단장에 입각해 논의를 계속하자. 벤야민이 역사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몇 가지 범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더 예증해보자. 


Ⅱ. 역사인식이론과 벤야민의 『파사주론』

 『파사주론』(Pasaggen-Werk)으로 알려진 저작은 벤야민의 기념비적인 텍스트인데, 1940년 9월에 그가 자살했을 때에는 미완성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사후 42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간행됐다. 1982년 아도르노의 제자 롤프 티데만 등의 손에 의해 편집되고, 주어캄프판의 전집 5권에 수록됐다(프랑스어로는 1989년, 장 라코스트에 의해 번역됐다). 이 책의 제목은 벤야민에 의해 착상된 것이며, 이미 1927년에는 이 기획에 대한 최초의 언급 속에 "파리의 파사주 : 변증법의 요정의 나라"(1928년 1월 30일,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라고 적혀 있다. 파사주의 도시적인 오브제, 19세기 이후 건축된 파리의 갤러리는 벤야민의 텍스트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루이 아라공은 이미 이 대상들 ― 특히 오페라 자리의 파사주에 시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파리의 도시와 19세기가 이 미완의 책에 통일을 가져다주는 중심적 쟁점이라고 하더라도, 『파사주론』은 단순한 역사론도, 도시론이나 문화해석론도 아니고, 오히려 원칙적으로 역사의 정치철학의 책이다. 「파리 : 19세기의 수도」의 처음 노트를 읽었을 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기대한 것은 이것이었다. 

 『파사주론』은 미학, 도시론, 사회학, 역사학 등 이른바 이종혼합적인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그런 특징을 넘어서, 이 책이 전개하는 것은 분석철학의 조류에서 유행하고 있듯이, 역사의 의미를, 더 간결하게 말하면 역사인식의 틀을 철학적으로 파악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철학적 인식과 현재의 철학적 존재론 사이의 정치적 관계, 즉 역사의 정치에 관련된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관계는 독립적 형태로 방법론으로서 미리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책의 내용 그 자체이며, 그 전체에 새겨져 있다. 즉 이것은 무엇인가를 언표하고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몽타주 장치를 통해 역사인식의 정치적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책인 것이다. 의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다양한 단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단순하게는 말할 수 없는 의미를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관건[내깃돈]으로 삼고 있다. 벤야민의 철학적 인식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미학, 역사기술, 사회, 정치 등 여러 차원의 역사인식을 통합하는 중심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을 통해서 그는 '역사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얘기하고 있다. 역사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유명한 테제는 아도르노의 배려에 의해 이미 50년대에 출판됐지만, 이 테제는 『파사주론』과 독립된 형태로 읽혀져서는 안 되었다. 공교롭게도 따로따로 수용됐기 때문에, 벤야민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역사철학을 전개시키려고 했다고 간주되고, 19세기에 관련된 매우 특이한 조사는 떼어내져 버렸다.[각주:16]

  그의 인식이론에서는 페티시즘, 판타스마고리아, 무의식, 꿈, 몽상, 잠, 각성[잠에서 깸], 눈을 뜸, 기억, 신화적 이미지, 변증법적 이미지, 상기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영향의 혼합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만, 그 주된 것은 마르크스, 루카치, 프로이트, 프루스트, 초현실주의이다.  다만, 이미 첫머리에서 설명했는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파사주론』과 프로이트의 저작의 관계이다. 실제로 벤야민은 꿈, 모앙, 판타스마고리아 같은 정신분석의 개념을 자신의 분석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다만 그는 꿈이나 판타스마고리아를 개인적 심리상태의 차원이 아니라, 파리의 파사주나 만국박람회처럼, 집단이 물질이나 도시를 통해 구현되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또한 오스만, 블랑키, 푸리에, 보들레르 등과 같은 상징적인 역사적 인물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즉, 벤야민은 프로이트처럼, 개인의 심리의 현상에서 출발해서, 정신분석적 해석에 입각해 숨어 있는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구체적인 역사적 물질에서 출발해, 정신분석적 수법(꿈해석)에서 착상을 얻은 해석을 시행하는 것이다. 파사주나 만국박람회는 물질적 현실인 동시에 판타스마고리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자본주의의 상품 페티시즘의 욕망을 나타내며, 계급투쟁이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유토피아적 소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판타스마고리아의 현상은 맑스에 있어서는 경제이론에 한정되고, 아도르노나 루카치에 있어서는 맑스가 확립한 페티시즘 현상의 틀 안에서 설명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 있어서 판타스마고리아 현상은 더 나아가 역사구조의 중핵에 위치지어진다. 즉, 판타스마고리아는 자본주의와 그 물질화라는 형태로 19세기 파리의 생활양식의 모든 수준에 침투해 있는 것이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소외적이고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현상을 모순된 변증법으로서 표현하고, 게다가, 이 변증법은 이른바 19세기의 틀을 넘어서, 다음 세기로 연관하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파사주론』의 철학적 힘인데, 꿈 개념은 지나가버린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시現在時로 연장된다. 19세기는 다음의 시대를 규정하고 조건짓는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사회적 현실이며, 어떤 시대의 잠 ― 그 꿈이 더 나아가 우리 시대를 조건짓는다 ― 인 것이다. 즉, 벤야민은 추모적 상기의 작업의 계기를 이루는 "[잠, 꿈에서] 눈을 뜸=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의 심리에 있어서의 정신분석의 상기와 유사한, 꿈의 작업의 도달점을 이루고, 몽상의 출구나 해방의 조건을 이루는 "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흔적은 해석상의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즉, 벤야민은 집단 수준에서 정신분석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35년의 편지에서 그것은 융 심리학의 아류라고 지적하고, 벤야민은 융과 선을 긋는다고 자기 변호했다.[각주:17] 벤야민의 말투는 그렇다고 치고, '각성' 개념 ― 꿈이나 판타스마고리 개념을 보완하는 개념 ー 의 사용에서부터, 그는 결국, 프로이트에 가깝다고 가정할 수 있다. 즉, 프로이트의 임상실천에 의한 마력에서의 해방의 구조 속에는, 벤야민의 각성 개념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벤야민이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면 몇 가지 문제나 아포리아가 반드시 생겨난다. 다음 장에서는 이를 살펴보자. 


Ⅲ. 『파사주론』에서의 벤야민의 아포리아 

 꿈과 깨어남의 물음은 『파사주론』 전체를 통해서, 벤야민 식의 역사기술의 방법과 결부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 망라적인 분석을 행할 여유는 없으나, 역사기술과 꿈이나 깨어남의 관계에 관해서, 『파사주론』의 K 분류에 수록된 몇 가지 단장断章을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함께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휩쓴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 힘들의 재활성화를 동반하는[따르는] 것이었다.[각주:18][K1a,8]

19세기는 개인적 의식이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서, 그런 것으로서 점점 더 유지되는 반면, 집단적 의식은 점점 더 깊은 잠에 떨어지는 시대〔Zeitraum〕(혹은 시대가 꾸는 꿈〔Zeit-traum〕)이다.[각주:19][K1,4]

기디온의 명제로부터 더 전진하기 위한 시도. '19세기에 건축 구조는 하위의식의 역하을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건축 구조는 흡사 꿈이 생리적 과정이라는 발판에 들러붙어서 태어나듯이, 그 주위에 이윽고 '예술적인' 건축이 들러붙는 신체적 과정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바꿔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각주:20][K1a, 7]

여기에서는 꿈의 현상은 단지 개인의 심리현상이 아니라, 집단 수준에서 분석된다는 사고방식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다른 대목에서는 판타스마고리와 묶이고 있다. 

졸저의 조사는 문명의 이 물체화적 표상에 의해, 우리가 지난 세기부터 물려받은 새로운 생활의 형태들이나 경제적 기술적 기반에 선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하나의 판타스마고리에 돌입하는지를 나타내고 싶다.[각주:21]

 분명히 벤야민은 판타슴, 꿈, 몽상 같은 정신분석 또는 심리학의 범주를 사회・경제적인 차원으로 이행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개념의 이행 속에서,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전개한 상품 페티시즘 개념의 흔적을 인식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극히 환상적인 성질을 이미 기술하고 있다. 상품과 주체의 관계는 페티시즘이라는 표현으로 규정되며, 이것은 "사태들의 관계의 판타스마고리 형식"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바에서는, 상품의 사용가치 자체는 전혀 신비가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신비적인 가치'나 '혼' 같은 것이 부가되어 있다. 루카치도 또한, 『역사와 계급의식』의 「물상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라는 장에서 물상화 현상에 있어서의 '환상적 객관성', 주체의 행동에 대한 그 영향을 강조했다. 상품은 그 외관에 의해, 욕망을 깨어나게 하며, 상기를 약속하는 그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힘을 성취시킨다. 욕망되는 대상이 끊임없이 연기되며, 유동적이고 표층적인 채로 머물기에, 욕구는 덧없는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계열성, 나아가 로크의 "불안〔uneasiness〕", 헤겔의 악무한 같은 유명한 개념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감각적인 것이나 현상의 왕국에 입각해 덧없음을 기술한 것도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상품의 소유는 항상 사라질 운명에 있지만, 그러나 항상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상품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그림자처럼 상징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을 구성하고, 객관성의 기준을 산출한다. 우리의 신체는 꿈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되며, 욕망이 무제한으로 투영되는 장이 된다. 이런 욕망의 지연에 출구는 없으며, 외관상 이를 정복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악몽의 특징을 띠며, 다나이데스[다나오스의 딸들]나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마술적 내지 신화적인 관계의 불명료한 가혹함을 연상시킨다.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인간의 끝없는, 불가능한 노력의 허무함이 암시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악몽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이 항상 사라지고 만다, 그때마다 손 안에서 무로 돌아가버린다고 하는 악몽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페티시즘 이론에 남다른 특징을 덧붙인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어떤 시대 전체의 생활양식에 있어서 일반화된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품은 어떤 시대의 꿈이나 집단적 무의식에 바로 유혹을 거는 것이다.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를 둘러싼 분석을 순수하게 경제학적인 것에 머물게 했으나, 벤야민은 페티시즘적 대상과 산보하는 관찰자의 복잡한 관계를 둘러싼 진정한 현상학을 묘사해냈다. 후자에게 상품은 사회 전체의 상징이나 소우주를 이루는 것이다."[각주:22] 이것은 『파사주론』의 서두인 「파리 : 19세기의 수도」라는 유명한 도입부분에서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개인은 오락산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기분전환에 잠기지만, 그 내부에서, 그는 밀집한 대중의 한 구성요소이길 계속한다. 이런 종류의 대중은 유원지의 제트코스터나 '회전장치'나 '애벌레'에 올라타,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즐기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산업적 혹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기대할 수 있는 전적으로 반동적인 복종에의 훈련을 받는 것이다― 상품의 지고권의 확인과 상품을 에워싼 다양한 기분 전환용 빛, 이것은 그랑빌의 예술의 숨겨진 주제이다. 그의 유토피아적 요소와 시니컬한 요소 사이의 불균형은 여기에서 생긴다. 생명 없는 물체의 묘사에 있어서의 그의 교묘한 기교는, 마르크스가 상품의 '신학적 변덕'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한다.[각주:23]

 『파사주론』에서는 상품의 페티시즘적 성격을 꿈의 집단(Traumkollektiv)의 관념과 결부시킨다. 이런 연관은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구조가 아니라, 거꾸로, 19세기를 둘러싸고, 잠과 깨어남의 대칭 개념에 의해 정치의 기능을 상기의 역사서술의 내깃돈으로 하는 작업의 중핵을 차지한다. 물론 어떤 역사적 시대의 물질이나 도시의 현상에 있어서 꿈과 환상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벤야민뿐이 아니며, 그가 처음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1983년에 레모 보데이[각주:24]는 벤야민의 『파사주론』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분석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의 '물질적 의미론'을 논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루이 아라공의 『파리의 농민』 ― 벤야민이 찬양한 작품 ― 도 다시 주목해야 할 텍스트이다. 특히 오페라좌의 파사주」라는 제목의 텍스트에서, 아라공은 부동산 투기에 의해 소멸하고 있던 19세기의 파사주의 분석에 전념하고, 자본주의의 판타슴적 구조에 의해 산출된 그 시대착오적 모양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벤야민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정치적인 의미 ― 현재시에의 결정적인 방향 설정 ― 를 부여받고 응축되어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런 현재시에의 방향 설정은 잠에서 깨어남[각성]의 관념과 떼어낼 수 없다(벤야민에게 있어서 잠에서 깨어남[각성]은 꿈의 집단의 범주에 부수한다). 『파사주론』의 몇 가지 단편을 더 인용하자. 

19세기의 집단적 꿈의 현상형식은 무시할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런 현상인식은 과거의 그 어떤 세기를 특징짓는 것보다도 훨씬 결정적으로 19세기를 특징짓고 있다. ―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으며, 그런 현상형식들은,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매우 실천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항해하려고 하는 바다와, 우리가 떠나간 해변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각주:25][K1a, 6]

〔…〕 내가 아래에서 제시하려는 것은 깨어남의 기법에 대한 시론이다. 즉, 추모적인 상기의 변증법적 전환 혹은 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인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각주:26][K1, 1]

역사를 보는 데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이런 것이다. 즉, 지금까지 "일찍이 있었던 것"은 고정점으로 간주되고, 현재는, 더듬어가면서 인식을 이 고정점을 이끌려고 노력한다고 겨져졌지만, 이제 이 관계는 역전되고, 일찍이 있었던 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전환의 장소가 되며, 깨어난 의식이 갑자기 출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는 정치가 역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여러 가지 사실이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것이 되며,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상기의 작업이다. 실제로 깨어남은 이런 상기의 모범적인 경우, 즉 우리가 가장 가까운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자명한 것을 상기하는 것에 성공하는 경우이다. 프루스트가 깨어난 상태에서 가구를 실험적으로 재배치한다는 얘기에 의해 말하려고 한 것, 블로흐가 태어난 순간의 어두움이라는 표현으로 간파했던 것이, 여기에서, 역사적인 것의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확정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찍이 있었던 것에 대한 아직은 의식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지식의 발굴은 깨어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각주:27][K1, 2]

 이런 세 가지 단편에 의해 역사인식의 조감도의 핵심에 벤야민의 방법을 뒷받침하는 개념들의 경첩이 놓인다. 그것은 곧 꿈의 집단(Traumkollektiv), 19세기의 비판, 깨어남(Erwachen), 추모적 상기(Erinnerung, Eingedenken), 과거(Gewesene), 현재(Gegenwart), 지금(Jetzt),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등의 개념이다. 

 우선 벤야민에 있어서, 꿈의 집단이란 대중심리가 물상화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생리학"에 관한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자연주의적인 방법보다도, 오히려 초현실주의적,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가깝다. 마리오 페첼라가 지적하듯이,[각주:28] 벤야민에게서의 집단적 무의식의 관념에 있어서 '변증법이 첫 번째 계기를, 깨어남이 두 번째 계기를 이룬다. 즉, 깨어남이란, 타자성을 띤 꿈으로 우리의 의식을 열고, 이해와 해석을 위한 순간이다." 이리하여 꿈의 집단은 현실 그 자체와 동일한 심리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역사적인 생활양식의 물질적 표현을 해석함으로써 역사가가 벗겨내는 상징적인 형식이나 상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벤야민은 융과는 달리, 이런 상징적인 형식들을 역사적 변화로부터 떼어내지 않고,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그의 모델이 된다. 즉 역사가의 사명은 집단에 관계하면서도, 개인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사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페첼라가 더 논하듯이, "특정한 문화에 있어서 작용하는 신화적 요소란 변증법적 사고가 독해해야 하는 꿈의 상징이다. 이런 비평 활동의 절박을, 자아와 무의식 사이의 통합의 결여로부터 신경증이 생길 경우에서의 개인의 분석의 절박과 비교할 수 있다. 프로이트 자신, 문명의 집단적 병을 고찰할 필요를 느꼈다. 이러한 요구에 무관심한 논리는, 현대의 대중의 격정 속에서 해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각주:29]

 그런데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개"라는 표현 속에서, 꿈과 깨어남의 관계 ― 이것이 역사기술의 작업에 정치적 차원을 부여한다 ― 를 둘러싼 모든 의미를 응축시킨다. 역사기술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던 것(Gewesene)>은 역사가가 접근하고 관계해야 하는 고정점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있어서는, <일찍이 있었던 것>은 해석의 변증법에 의한 추모적 상기(Eingedenken)의 작동을 통해 위치를 바꾸고, 섬광처럼 현재시에 충격을 주고, 순간이나 지금(Jetzt)을 비연속적인 것으로 한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의 작업은 비의지적 기억이나 연상의 작동을 결합한 프루스트적 상기를 연상시킨다. 억압되어 잠든 과거의 의식의 흐름을 그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일종의 유물론적 기호론은 깨어남을 초래하고, 시대의 물상화나 다음 시대로 계승되는 그 정치적 공허함의 허를 찌른다. 

 이렇게 논한 단계에서,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나 아포리아가 생긴다. 우선 첫째로, 몇몇 비평가가 시사하듯이,[각주:30] 벤야민은 각성 개념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라는 역사적 범주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깨어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구를 통해 예기치 않은 깨어남이 생기는 것일까? 자신의 시대에 명석한 의식을 향하는 벤야민의 역사가를,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올빼미]에 포개보고 싶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벤야민은 몰래 역사주의를 다시 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자신, 근대성의 마약적인 잠을 초래하는 요인으로서 역사주의를 명백하게 비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에서 부정되었던 진보 관념이 부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본주의의 페티시즘의 형식들 속에서 과거가 마비하고 잠들어 있으며, 그에 반해 현재시가 깨어 있다고 하는 진보적인 구도가 도입되는 게 아닐까?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각성한 집단(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의식)이라는 전위적이고 본질적인 관념을, 게다가 각성한 민족이라는 개념(예를 들어 전체주의적 관념)을 재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굴욕과 자유주의의 해악에 맞서서 "독일이여, 깨어나라"고 호소했다. 결국 벤야민은 빛이나 진리에 접근하는 특권적인 철학자-대화자라는 플라톤적 인물상을 부활시킬 우려가 없을까? 그것은 곧, 동물의 마력으로부터 처음으로 해방되고, 감각적 세계의 현상들 속에서 졸고 있는 집단을 깨우는 인물의 복권이다.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약된다. 벤야민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범주들을 채용하여 집단을 독해하면서도 후자가 우려하는 지평에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즉, 천계설이나 엘리트적인 전위주의 ― 이것이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에서의 "위인"의 이론을 가능케 한 것이다 ― 와 접근함으로써, 분석 치료의 전체주의적 관념이 생긴다는 우려이다. 그것은 대중에 선행하는 역사의식이 정념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낡은 형식을 오로지 파괴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이런 물음은 이리하여 깨어남의 종말론적・신학적 관념을 경유하여, 주술사나 세기말의 지도자 같은 카리스마적 재능으로 귀착하는 모종의 신학정치와도 닮아 있다. 벤야민의 정치적 사상이 물리칠 권위적인 온정주의와 관계하는 것이다. 


Ⅳ. 정신분석과 각성의 세속적 구조 

 우리는 정신분석의 모델을 바탕으로, 이런 아포리아로부터 『파사주론』을 구출해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는 정치적 역사기술에 입각해 그 의의를 다시 방향지을 수 있다. 깨어남에 대해서는 두 개의 모델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본질화된 집단 개념과 결합된 깨어남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프루스트적 기법과 결합된 깨어남이 있다. 그것은 꿈의 기억을 둘러싼 정신분석의 작업에 가깝다. 후자의 모델에 따르면, 깨어남은 시대에 앞선 의식의 도입이 아니라, 각자가 어떤 해석 기법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상기의 결과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식견 있는 집단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현재의 조건이나 생활양식이 과거에서 유래하는 꿈이나 무의식의 구조에 얽매여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작업의 관점을 연 것이다. 정신분석이 드러내듯이, 각성의 진정한 경험이란 유물론적 역사가가 예기하고 기술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시대가 스스로에 대한 정치적 작업 ― 이것은 데리다의 "꿈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실천(각주 13을 참조)과 불가분하다 ― 으로서 이뤄져야 하는 경험이다. 벤야민에 있어서,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시대에 선행하는 "위인"이나 새로운 역사적 영웅에 대한 주의주의적인 호소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신비를 드러내는 아이러니라는 더 겸허한 차원에 위치된다. 이제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아이러니에 의해,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허를 찌르고, 과거의 찬스[기회]를 새롭게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찬스는 집단이나 선택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메시아주의는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열림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다(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밝음〔Lichtung〕'[각주:3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다시금 인용하면, "아무도 증인 대신 증언하지 않는다"(주1을 참조)는 것이며, 바로 각자가 유물론적 몽타주에 의해, 역사기술의 흐름을 뛰어넘어, 역사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우월 ― 벤야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중핵을 이루는 생각 ― 을 개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단장을 두 개 인용한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즉, 착수되어야 할 것은 19세기의 기계론이나 동물기계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19세기의 마취적인 역사주의나 그 가장벽(仮装癖)에 대한 비판이다. 누가 뭐래도, 그런 가장벽(仮装癖) 안에야말로,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가 숨어 있다. 이 신호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 신호를 해독하는 것, 이것이 당분간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혁명적・유물론적인 기초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여기서 화제가 되고 있는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에 있어서 19세기의 자신의 경제적 기초를 최고도로 표현한다는 것의 충분한 보증이 될 것이다.[각주:32][K1a, 6]

모든 역사적 사건은, 메시아 자신이 도래해야 처음으로 완성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 의미하는 바는, 역사적 사건과 메시아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메시아 자신이 처음으로 구제하고 완성하고 창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관계시키려고 바랄 수 없다. 따라서 신의 나라는, 역사라는 가능태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신의 나라가 목표로서 설정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의 나라는 목표가 아니라 종언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나라라는 생각 아래에서 수립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신정정치에는 정치적인 의미는 없으며, 오로지 종교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정정치가 가진 정치적 의미를 철저하게 부인한 공적에 있어서는, E.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각주:33]


 깨어남의 기법이 가져올 비판적 차원은, 벤야민의 역사적 메시아주의를 매우 특수한 것으로 한다. 즉 메시아주의가 정치적인 것의 신학화가 아니라, 역사를 정치화하는 충돌로서 이해된다. 이 충돌에 의해 시간은 내재적인 진보의 타성에서, 신의 초월성에 의한 신학적 기회주의에서 벗어난다. 



  1. P. Celan, Aschenglorie, in Strette, Mercure de France, 1971, tr. A. Bouchet, pp. 48–51, repris de J. Derrida, Fichus, Paris, Galilée, 2002, p. 51.〔『フィッシュ』逸見龍生訳、白水社、二〇〇三年、六六頁〕 [본문으로]
  2. P. Ricoeur, La mémoire, l’histoire, l’oubli, Paris, Seuil, 2000.〔『記憶・歴史・忘却』久米博訳、新曜社、二〇〇四―〇五年〕. 트라우마와 역사적 이야기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María Inés Mudrovcik, Historia, narración y memoria(Buenos Aires, Paidós, 2007)를 참조. [본문으로]
  3. S. Freud, Psychologie des masses et analyse du moi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1921), OEuvres Complètes, vol. XVI, Paris, PUF, 2003〔「集団心理学と自我分析」、『フロイト全集17』須藤訓任他訳、岩波書店、二〇〇六年〕; G. Le Bon, Psychologie des foules, Paris, PUF, 1991.〔『群衆心理』櫻井成夫訳、講談社学術文庫、一九九三年〕 [본문으로]
  4. 이 표현은 프랑수아즈 프루스트의 것이다. "시간은 <두 번> 지나간다. 시간은 한 번은 죽은 이미지, 공허한 시간, 과거의 추억이 된다. ...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지나감으로써 다른 장소에 새겨진다. ... 이것이 두 번째 시간, 두 번째 과거, 즉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첫 번째 시간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보는 자가 이 그림자를 부각시키고, 재독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Françoise Proust, L’histoire à contretemps. Le temps historique chez Walter Benjamin, Paris, Cerf, 1994, p. 104. [본문으로]
  5. 역사실증주의나 역사주의와 벤야민의 대립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日本語訳は『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Ⅰ』ちくま学芸文庫、一九九五年などに所収〕에서 명백하다. 특히 테제 Ⅵ, ⅩⅥ, ⅩⅦ를 참조. [본문으로]
  6.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ⅩⅣ 등을 참조. [본문으로]
  7.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최근 논고에서 판타스마고리의 내적 변증법을 해명하고 있다. 이 변증법은 상품 물신주의와 황금시대의 유토피아를 함의한다. 이런 이중성은 물신주의 현상에 대한 순수하게 맑스적, 혹은 아도르노적 사고방식과는 선을 긋는다. 왜냐하면 후자는 물신화된 상품에 있어서의 의식의 소외밖에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cf. J.-M. Palmier, Walter Benjamin. Le chifonnier, l’Ange et le Petit Bossu, Paris, Klincksieck, 2006, p. 447f. [본문으로]
  8.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Ⅰ에 묘사된 유명한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를 참조. 일반적으로 이 테제는 맑스주의의 신학적 요소를 지적한 대목으로 간주됐다. 그렇다고 한다면, 속류 맑스주의와는 다른 맑스주의를 벤야민은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목적론적 신학과, 역사의 연속을 현재시에 있어서 단절시키는 메시아주의가 있다. 자동인형의 알레고리에 있어서, 난쟁이[小人]는 거짓 자동인형이 모든 승부에서 이기도록 했지만, 이것은 이중의 해석을 띤다. 한편으로 그것은 벤야민이 격투한 역사적 기계론의 경향이다. 이 경우, 신학적 요소는 속류 역사주의나 진보주의 같은 목적론적 성격을 두르고, 현재시의 행동을 무디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메시아적 시간이며, 그 기회chance는 그때마다 꽉 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작용하는 것은 모든 점진적인 기대를 경시하는 비속류적 유물론이다. 점진적 혁명에 의한 천년왕국의 테제와 마찬가지로, 속류 맑스주의는 어떤 패배도 피하고, 완전무결하게 되지만, 자동인형장치는 이런 협잡의 메커니즘의 뒤통수를 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는 현대의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의해 반전되는 게 아닐까? 살아 있는 인간의 배후에 지능 로봇이 숨어 있고, 목적론적 신학의 역할을 맡는다고 하는 사태를 상상해보자. 숨겨진 지능 로봇이 인간 대신 게임을 하고, 모든 승부에서 이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이 자신의 게임을 할 여지가 없어진다. ... 역사의 맑스주의 내지 목적론적 신학은 현재시를 무디게 하고, 끝없는 가상성에 우리를 내맡긴다. 이런 가상성은 사실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고, 승부에 한 번도 패하지 않고, 하지만 그 때문에, 역사의 행위자는 자신의 게임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분명히 벤야민은 역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이런 자동인형의 반전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사주론』 서두에서는 미슐레의 "어떤 시대에도 그것에 이어진 시대를 꿈꾼다"는 문구가 인용되고 있는데, 그 의미를 깊게 이해하면, 이것은 충분히 시사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자동인형은 현대의 틀림없는 자동인형을 예견한 판타스마고리적인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현대의 자동인형은 인간이나 행동, 정치에 있어서 더욱 가혹하고, 어찌할 수 없이 무적이다. [본문으로]
  9.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꿈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더불어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습격하는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인 힘들의 재활성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K1a,8]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Le livre des Passages, Paris, Cerf, 2006, p. 408.〔『パサージュ論』今村仁司他訳、岩波現代文庫、二〇〇三年、第三巻、一二頁. 이하 Le livre des Passages는 P-W의 약칭으로 표기한다. 일본어 번역본은 岩波現代文庫版의 권수와 쪽수를 나타낸다.〕 [본문으로]
  10. 벤야민의 텍스트에 있어서의 몽타주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Actas del II Congreso Internacional de Filosofía de la Historia, Buenos Aires, 2008. [본문으로]
  11. 흥미롭게도 벤야민에게서 혁명은 목적의 왕국의 도래를 앞당기는, 역사라는 증기기관차에 대한 급속한 접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런 증기기관차의 급브레이크이며, 시간을 중지시키고, 위기의 발생을 먹어치운다. 정의를 위한 혁명의 진정한 개입은 천상의 왕국의 약속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게 아니라, 솔직한 '아니오'의 힘, 즉 거절이나 항의를 내뱉는 폭력을 동반한다. 급브레이크로서의 혁명에 대해서는 W. Benjamin, Paralipomena, Gesammelte Schcriften, 1–3, 1228–1252, Berlin, ed. Rolf Tiedemann, Suhrkamp를 참조. [본문으로]
  12. J . Derrida, Fichus, op. cit., pp. 20–21.〔『フィッシュ』前掲、二三頁〕 [본문으로]
  13. P-W., p. 493 [N10, 3].〔第三巻、二一七頁〕 [본문으로]
  14. 칸트에게서의 이성의 역사를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현대성과,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의 점진적 혁명의 가상성의 대립에 관해서는 다음의 졸고를 참조. F. Naishtat, « Revolution, discontinuity and progress in Kant. Copernican revolution and Asymptotic revolution in critical philosophy », Proceedings of the Xth Kant International Congress, Berlín, Walter de Gruyter, 2008. [본문으로]
  15. 특히Rita Bischof et Elizabeth Lenk, « L’imbrication surréelle du rêve et de l’histoire dans les Passages de Benjamin », in H. Wismann compilateur, Walter Benjamin et Paris, Paris, Cerf, 1986, pp. 179-200. [본문으로]
  16. 이 점에 관해서는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op. cit. [본문으로]
  17. 『파사주론』의 K 및 N을 참조. [본문으로]
  18. P-W, p. 408.〔第三巻、一二頁〕 [본문으로]
  19. Ibid., p. 406.〔第三巻、七頁〕 [본문으로]
  20. Ibid., p. 408.〔第三巻、一二頁〕 [본문으로]
  21.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Introduction, op. cit., p. 47.〔第一巻、三五頁〕 [본문으로]
  22. J.-M Palmier, op. cit. p. 458. [본문으로]
  23.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section B. « Grandville ou les expositions universelles », op. cit. p. 51.〔第一巻、四四頁〕 [본문으로]
  24. Cf. Remo Bodei, « L’expérience et les formes. Le Paris de Walter Benjamin et de Siegfried Kracauer », in H Wisman, op. cit. pp. 33–48. [본문으로]
  25. P-W, p. 408.〔第三巻、一一頁〕 [본문으로]
  26. Ibid., p.405.〔第三巻、五頁〕 [본문으로]
  27. Ibid., pp. 405-406.〔第三巻、六頁〕 [본문으로]
  28. Mario Pezzella, « Image mythique et image dialectique. Remarques sur le Passagen-Werk », H. Wisman, op. cit., pp. 517–428. [본문으로]
  29. Ibid. [본문으로]
  30. Cf. notamment Rita Bischof et Elisabeth Lenk, op. cit. [본문으로]
  31. Martin Heidegger, « La fin de la Philosophie et le tournant », in Questions IV, Paris, Gallimard, 2005, p. 295. [본문으로]
  32. P-W., p. 408.〔第三巻、11-12頁〕 [본문으로]
  33. Theologisch-politisches Fragment, GS II, 1, 203, en W. Benjmin, La dialéctica en suspenso, Santiago de Chile, Arcis, 1995, pp. 181–183.〔「神学的・政治的断章」、『来たるべき哲学のプログラム』道籏泰三訳、晶文社、一九九二年、三六〇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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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윤리학

: 벤야민과 데리다 (2)

翻訳の倫理学

   ベンヤミンとデリダ(二)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 국역본이나 프랑스어본과 대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번역의 윤리학 : 벤야민과 데리다 (1)>보다 훨씬 더 초벌이다. 



언어의 다수성과 유령성[亡霊性]

데리다는 벤야민의 번역론을 논한 「바벨의 탑」에서, 언어의 다수성 혹은 언어의 타자성에서 출발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데리다에게서 언어에 있어서의 다수성∙타자성의 물음은 항상 이로부터 출발해야 할 기점인 동시에, 이것으로 귀착되어야 할 기점이기도 하다. 그 경우의 다수성이나 타자성은, 일반적으로 「바벨의 탑」이 빗대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다수의 언어가 지상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통일이 없다는 사태를 시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데리다에게서의 다수성이나 타자성의 물음은, 더욱 근원적인 다수성∙타자성, 즉 어떤 단위나 통일을 전제로 하는 복수성이 아니라, 단위나 통일의 내파 그 자체를 나타내는 ‘산종’을 문제 삼는다.

 이 언저리의 사정은 그의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 : 혹은 기원의 보철』(1996년)에서 명료하게 논해지고 있기에 그것을 참조하자.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은 “나는 하나밖에 언어를 갖지 못하며,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언어의 타자성의 선언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또한 “우리는 결코 단 하나의 언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언어의 복수성의 논의로 전개된다. 인간에게서 각자의 언어는 ― 설령 그것이 모어(母語)라고 불리는 것이든 ― 스스로가 선택한 언어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기 이전에 주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어’는 단적으로 ‘타자의 언어’이다.


즉, 나는 하나밖에 언어를 갖지 못하며, 더욱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고유한’ 언어는 내게 있어서 동화 불가능한 언어이다. 내 언어, 내 자신이 얘기하는 것을 내가 듣고 있고, 말하는 것을 잘 하는 하나의 언어, 그것은 타자의 언어이다.1)


‘모(母)’라는 가장 ‘자연’적이고 ‘친밀’하다고 생각되는 것(사실상 가장 ‘자연’적이고 ‘친밀’한 것)은 사실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누락[欠落]’된 ‘소원(疎遠)’한 것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소외 없는 소외의 구조, 이 소외 불가능한 소외”2), 즉 “본질적 소외”3)라고 부른다.

 이 근원적 소외는, 데리다의 경우,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는 이중∙삼중으로 찢겨진 개인적 상황, 분열적 정체성에 의해 훨씬 첨예해진다. 그의 ‘모어’는 단순히 타자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타자의 언어 자체가 복수로 분열된 것이다. “일찍이 한 번도, 프랑스어를, 즉 내가 지금 여러분께 말하고 있는 이 언어를, ‘나의 모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할 수 없었다.”4)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대인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타자로부터 강제된 단일 언어 사용”5)의 문제를, 데리다는 “전쟁을 다른 수단으로 연장해가는”, “상징적 정복”,6) “정치의 문제”7)의 물음으로서, 더 나아가 “호명을 강제하고 정당화하는 이 권력”,8) “<언어>로서의 <법>”,9) 근원적인 ‘주권성’의 물음으로서 비판적으로 들춰서 폭로한다. 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혹은 ‘찬탈’되고 ‘강간’10)당한, 순수한, 본래적인, 기원적인, 자연의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유대인의 인종성이나 문화성이나 히브리어도, 또한 식민권력인 프랑스 ‘본국’의 문화나 언어도, 더 나아가 알제리의 이슬람성이나 아프리카성도, 이 중 어느 하나가, 데리다의 단일하고 유일한 정체성의 원천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또 이 중 어느 하나가 그의 정체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동일성)이란 이렇게 근원적으로 찢겨진 복수적∙다수적인 것(차이들의 효과들)으로부터 형성된 직물(텍스트)이며, 데리다의 경우는 특히 두드러진다고는 하지만, 이 다수다양체로서의 개별성(특이성)이라는 분열적 정체성 구조는, 누구에게나 많든 적든 공통된 것이리라.

 사실 따지고 보면, 개체[個]라는 다수다양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그 ‘자체’가 (데리다의 경우로 말하면, 유대인성, 히브리성, 아프리카성, 아랍성 등이) 그 순결∙순혈적인 유일성을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분할된 다수다양체이며, 집합적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유령성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형상 중 하나, 유령성 그 자체는, 프랑스 … 가 아니었을까 ….”11) “국가와도 국민과도 종교와도 일치하지 않고, 굳이 말하면 뭔가 어떤 진정한 공동체와도 일치하지 않는, 이 말의 그런 불투명한 의미에서의 국가[알제리]."12) 즉, 데리다가 근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단위(통일체)가 복수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복수성(예를 들어 단어나 의미의 다양성이나 상호주관성이나 국가연합 등)이 아니라, 그 이전의 곳에서 단위(통일체)의 성립을 방해하는, 혹은 통일체가 그 환상적 효과의 산물인, 통일에 선행하는 잠재적 복수성이라고 말하자. 복수의 통일체가 아니라, 통일체가 되지 않는, 통일체 이전의 복수성. 즉, 데리다가 초기부터 ‘산종’ 혹은 ‘차연’으로서 추구한 사태이다.13)


과장법의 래디컬리즘

이러한 언어의 산종 구조에 입각한 데리다가 그에게 주어진 타자의 언어인 ‘모어’ ― 즉 ‘프랑스어’ ― 를 ‘사용’할 때(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 “나는 하나밖에 언어를 갖지 못한다 …”), 특히 철학적∙문학적 사용법에 있어서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나에게만 맡겨져 있을 것인 언어”14) 속에 침잠해 있는 복수의 잠재적인 가능성의 발굴이며, 정통적이라고 말해지는 프랑스어가 감춰버린 “언어로부터의 유언”15)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주장하는 ‘유산상속’의 방식, 더욱이 그의 독특한 ‘과장법’의 래디컬리즘, 뿌리 뽑힘의 근본주의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탈구축은 모든 장면에서의 순수주의 전반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 삼고 있다.


내가 ‘순수성’이라는 모티프를 재문제화하는 것을 그만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탈구축’이라고 불리는 것의 첫 번째 운동은 순수성이라는 환상 내지 공리의 이러한 ‘비판’으로, 혹은 기원이라는 해체 불가능한 단순성으로 사람들을 이끌 순화 작용을 분석적으로 해체하는 것으로, 순수성을 실어다주는 것이다).16)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순수성의 탈구축이 단순히 순수성 일반의 거부가 아니라 한층 급진적으로 된 순수주의, 순수함의 래디컬리즘에서 생기고 있다고 그가 고백하는 점이다.


… 내가 가끔 공언하고 있는 모든 것에 반하여, 나는 ― 여기에서 털어놓지만 ―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지만 감당 못할 어떤 무관용을 체득하고 말았다. 즉, 적어도 프랑스어에서는, 그리고 그것은 언어에 관해서만인데, 내가 참거나 칭찬하는 것은 그저 순수한 프랑스어뿐이다.17)


프랑스어에 대한 나의 집착은 때로 나 자신도 "신경증적"이라고 생각하는 형태를 취한다.18)


데리다의 고백하는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이 강박적 요청”19)은 물론, 알제리에서 프랑스어 교육과 프랑스 문화 교육의 식민 정책의 효과(결과・성과)이다. 이른바 ‘문화 변용’의 압력 속에서 피식민지인이 식민자의 가치를 해당 식민자 이상으로 강하게 내면화하는 것은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더 잘 살기 위해서 스스로의 특유 언어를 잃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비극적 에코노미라고 말해야 하며 대체로 참기 힘든 충고이다.”20) 그러나 데리다의 ‘내부’에 신들린 ‘순수한 프랑스어’에 대한 강박관념은 식민자들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프랑스어’의 순수성, 본래성・고유성을 허물어뜨리는 데까지 철저화=근본화(radicalisation)된다.


좋은 프랑스어로, 순수한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 그것도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때로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을 무수한 방식으로 비난할 때에도 그렇게 하는 것. 이 과장법(그것은 ‘프랑스어보다도 프랑스어적으로’, 즉 순수 어법주의자들의 순수성이 요청한 것보다 더 ‘순수하게 프랑스어적으로’라는 것이다 …), 이 지나친 강박적인 과격주의 ― 나는 그것을 아마 학교에서, 바로 내가 인생을 보낸 프랑스의 여러 학교에서 습득한 것이다.21)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이 과장된 선호”,22) “전반화된 과장법”23)은 데리다의 탈구축의 본질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즉 탈구축은 그 대상이 철학이나 문학의 텍스트이든, 정치·경제·법률 같은 현실적 구조이든, 대체로 대상이 주장하는 자기 정당화나 자기 순화의 논리를 바로 이 논리가 어떻게 배반하는지를 들춰서 폭로한다. 다양한 논리나 개념을 과잉될 정도로까지 ‘성실하게’, ‘문자 그대로’·‘액면 그대로’(littéral) 떠맡아 논리나 개념의 순수한 핵을 근저에 이르기까지 래디컬하게, 과격할 정도로 극한까지 래디컬하게, 철저히 따져나간 끝에, 바로 이 개념이나 논리의 한계나 편의주의[기회주의]가 그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드러나도록 이끄는 것, 이것이 탈구축의 기본 전략이며, 탈구축의 과장법, 래디컬리즘이다. 그것은 개념이나 논리의 확장이자 자기 탈구축이며, 끊임없는 무한의 ‘서로 끌어올림[競り上げ]’, ‘상고(上告(grief)’24)라고도 할 수 있다. 논리나 개념이나 제도가 자신 속에 안고 있으면서도 억압하고 배제하는 이 특이점을, 탈구축은 그것들 자신의 말을 통해서 고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탈구축만의 전략이 아니다. 원래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무지의 앎’ 자체가 유사한 전략이었고, 플라톤의 ‘문답법’에서 헤겔의 ‘변증법’(특히 ‘이성의 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에서는 그 외견이나 일반적 평가와는 달리, 탈구축은 극히 ‘철학’적인 수법이며, 철학에 있어서의 전통적이고 왕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때로 너무 철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25) 그러나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처럼 순수함에 대한 욕망에 의해 순수함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목표로서 진정한 순수함 혹은 진리로서의 순수함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순수함의 진리로서, 불순한 것의 불가피성, 불순한 것에 의한 오염의 필연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 단일의 순수성 혹은 순수한 단일성을 요구하는 순수주의(데리다가 ‘현전성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순수함의 불순한 본성을 부인하고 망각하려고 하는 폭력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것은 주어진 언어의 구성과 배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단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를 재편하고[변형시키고] 미래를 향해서 해방해가는 작업이다(그것이 거꾸로 자신의 해방될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언어로서의 자신의 언어에 굴복한다는 것이며, 더구나 내가 자신의 언어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한다는, 거의 항상 계획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 거기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여기에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어떤 하나의 주어진 것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도래할 것에만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니까 나는 유산 상속 또는 유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너무 순수하지 않는 순수성을 털어놓고 있는 셈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순정 어법주의 따위가 전혀 아니다. 적어도 그것은 유일한 불순한 "순수성"이며, 그것에 대한 선호를 나는 굳이 고백하고 있다.26)


이러한 데리다의 ‘순수성’의 탈구축을 둘러싼 논의는, 벤야민의 ‘순수 언어’에 대한 욕망을 상기시킨다. 벤야민의 "‘순수 언어’는 “스스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고, 표현을 갖지 않는 창조적인 단어”27)였다. 알기 쉽게 바꾸면, 존재 자체와 일체가 된 듯한, 주관과 객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기호와 의미,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이상적 또는 신적인 언어였다. 그것은 역사적·시간적 기원에 실재한 것도, 미래의 어떤 시점이나 종점에 실재하게 되는 것도 결코 아닌 언어지만, 그래도 “모든 언어에서 지향되는 것”28)이었다. 이른바 산종된 언어들의 내부에 숨겨져 있고, 이 언어들을 구동하는 숨겨진 욕망적 동인이면서 결코 현실화되지 않고 현전화하지 않고 오로지 ‘도래할’ 것에 머무는, 도래할 것으로서 잔류하고 잔여하며, 여백에 머무는 것이었다. 순수 언어는 각 개별 언어가 그 달성·성취를 불가능하다고 알면서, 그래도 그 ‘해방’과 ‘구원’을 자신의 ‘과제’로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언어 일반에 그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들이대며 그렇게 언어의 존재 이유와 책임을 심문하는 ‘허초점’이다. 극한까지 순화된 순수성에 대한 욕망은 순수 존재의 불가능성과 불순한 것의 불가피성을 결론으로서 이끌고, 또한 이것에 그치지 않고 언어가 형식과 내용의 합치라는 효과에 (비록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입각한 이상, 순수 언어라는 불가능한 것을 ‘과제’로서 떠맡는다는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순수 언어론(그리고 번역론)도 순수의 과장법, 순수함의 래디컬리즘, 즉 근저를 어디까지든 파고들어 간 끝에 뿌리 자체를 앞지른다는 ‘래디컬라즘’, 근저성(根底性)이 무저성(無底性)으로 전도되는 과잉적인, 잉여의 ‘래디컬리즘’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 지점에서는 더 이상 근거와 무근거, 조건부와 무조건성, 정치와 윤리, 합법성과 정의, 교환과 증여, 계산과 계산 불가능성은 단순하게 분리되거나 대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벤야민과 데리다의 래디컬리즘은 칸트의 ‘규제적 이념’과 비슷한 면 또는 효과를 갖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칸트의 경우 아무리 인간 이성의 유한성과 절대 존재에의 도달 불가능성이 강조된다고 해도, 그 유한성과 완성 불가능성은 예지계[叡智界]29)라는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신에 대한 신앙과 역사의 섭리에 대한 신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신과 예지계[叡智界]의 절대성에 대한 신앙이 대칭적 혹은 상보적으로 인간과 이성의 유한성을 요구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순수 언어’라고 말하고 데리다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들은 ‘인간적인 것’의 유한성과 상대성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것을 구원하는 초월자나 절대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의 말처럼 ‘구원’하는 것은 오히려 유한자 측의 사명인 것이다.


이질적인 언어의 내부에 속박되는 그 순수 언어를 스스로 언어 속에서 구원하는 것, 작품 속에 갇힌 것을 언어 치환 속에서 해방하는 것이 번역자의 사명이나 다름없다. 이 사명을 위해서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썩은 울타리를 부서뜨린다.30)


데리다의 ‘도래할’이라는 사고방식도 미리 목표로 설정된 어떤 이념이 도래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물론 그것도 ‘도래할’의 양상 중 하나, 가능성 중 하나이지만). 그것은 ‘규제적 이념’의 그것을 포함해 대체로 온갖 도래의 가능성을 여는, 도래를 도래시키는 ‘지금 여기’에서의 단독적 결정이며 ‘구조상의 엶’31)이다. 그것은 “더 이상 재고유화=재본래화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다른 언어를 발명하는 것”32)이라고도 불린다. 이 “새로운 특유 언어는 도래시킨다. 이 서명은 도래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소여의 언어 속에서 무수한 사건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 주어진다기보다는 항상 약속되는 무수한 사건들.”33)

 이 수많은 사건을 약속하는 언어, 사건의 도래에 열린, 도래를 도래시키는 언어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복합적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이라는 타자에 자신을 여는 한에서, “자신의 언어의 썩은 울타리를 부서뜨림”으로써 항상 이미 복수적인 것으로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34) 언어는 체계이며, 일견 통일성을 갖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외견상의 통일성은 특이한 통일성이며, “대체로 가장 급진적인 접목에 의해서, 뒤틀린 모양[歪形], 변형, 접수[接収, 받아들임, 징발], 모종의 비-규범성에 의해, 이례성, 비-준칙화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 이 [언어의] 몸짓은 그 자체에 있어서 복합적이며 분할되며 중층 결정되고 있다.”35)

 데리다가 향해 가는 것은 이러한 언어의 통일성의 외관 아래에 묻혀 있는 잠재력의 교배로서의 언어, 착종된 잠재체로서의 언어인 것이다.


항상 이미 번역으로서의 언어

이러한 착종 잠재체로서의 데리다의 언어관에서는 어떤 번역론이 도출될 것인가? 착종  잠재체로서의 언어는 이미 일종의 번역 존재라고 말해도 좋지만, 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벤야민의 번역론을 논한 「바벨의 탑」에서 그가 일반적인 번역론에 대해 행하고 있는 비판을 확인하자.

 데리다는 “번역에 관한 이론들의 한계”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 이론들은 너무 자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이행을 논하고, 몇 가지 언어가 하나의 텍스트 속으로 두 개 이상의 방식으로 감아 넣어질[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을 충분히 고찰하지 않는다. 동시에 몇 개의 언어로 쓰인 하나의 텍스트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복수성의 효과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그리고 동시에 몇 개의 언어로 번역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번역이라고 부를까?36)


즉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번역론은 야콥슨의 분류를 따라 말하면, ‘언어 간 번역’에 논의가 집중되고 있으며 이 종류의 번역을 번역 그 자체로 본다. 또한, 그러한 언어 간 번역은 개별적으로 복수 존재하는 언어 시스템의 통일성을 전제로 한다. 이 전제는 야콥슨 같은 예민하고 주도면밀한 언어학자의 번역론에서도 의심되지 않는다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데리다는 야콥슨의 『번역에 대해』(1959년)이라는 논문을 거론하고, 야콥슨에 의한 번역의 세 유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야콥슨은 번역에는 ‘언어 내 번역’, ‘언어 간 번역’, ‘기호법 간 번역’의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언어 내 번역’이란, 동일 언어 내에 있는 몇 개의 언어 기호를, 그 동일한 언어 내의 다른 언어 기호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전의 정의에서 보듯이, ‘책’이라는 언어 기호를 ‘서책’이나 ‘서적’이라는 다른 언어 기호로 ‘말 바꾸기’하거나(실제로 야콥슨은 ‘언어 내 번역’을 ‘말 바꾸기’라고 바꿔 말한다), ‘책의 본질’이라는 언어 기호를, “어느 정도 이상의 분량이 있는, 장정(装丁)된 종이 매체”라든가 “저자의 메시지나 이야기가 적힌 종이 매체”라든가로 해석할 때의 기호 조작이다. 데리다는 이 ‘언어 내 번역’은 다음의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언어의 통일성 및 동일성을, 바꿔 말하면 그 언어의 경계들의 결정 가능한 형태가 엄밀하게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 이것을 궁극적으로는 알고 있다”37)라고. 다음으로 ‘언어 간 번역’(보통 ‘번역’이라고 했을 때 생각되는 ‘이른바 번역’)도 ‘언어 내 번역’과 똑같은 전제, 즉 언어는 궁극적으로 그 윤곽이 명확한 통일체이라고 하는 전제를 믿고 있다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호법 간 번역’인데, 이것은 언어기호를 비언어기호로 해석하는 것이며, 알기 쉬운 예로 말하면, 일상 언어를 논리 기호로 ‘옮겨심는[移し換える, 옮겨적는]’(‘옮겨심기[옮겨적기]’라는 말도 야콥슨에 의한 ‘기호법 간 번역’의 정의이다) 논리학적 조작 등이 해당된다. 당연히 이 경우도 기호의 질이 다르다고 하지만, 언어 간 번역과 같은 전제가 작동하고 있다.

 요컨대, 데리다가 보기에는, 야콥슨이 정밀하게 추출한 세 가지 번역 유형 모두 언어 시스템의,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기호 시스템의 통일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벨탑’의 전설에 대해 다수의 언어가 지상에 분산되는 보편성을 가진 ‘큰’ 통일 언어가 상실됐다고 하는 해석(바벨의 일반적 해석이다)은 분산된 개별 언어의 ‘작은’ 통일성까지는 의심하고 있지 않지 않느냐, 데리다는 이렇게 생각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어떤 언어와 다른 언어의 관계는 무엇인가, 특히 언어라는 것에 있어서 동일성 혹은 차이성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간주되고 있다. 바벨에 의해서 타격을 가할 수 없었던 듯한 투명성이 만약 있다면, 바로 이것, 즉 언어들의 다수성의 경험 및 ‘번역’이라는 말의 ‘이른바’ 의미이다.38)


이것은 ‘큰 이야기’가 권위를 실추하고 ‘작은 이야기’의 무리(‘섬 우주’의 난립)만 남아 있다고 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상황이라 불리는 것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앞서 말한 착종 잠재체로서의 언어라는 데리다의 생각은 거대한 통일 언어 즉 ‘절대적 메타언어’의 ‘불가능성’39)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더 나아가 ‘작은’ 개별 언어의 통일성, 즉 다른 것과 통약 가능성을 갖지 못한 닫힌 ‘섬 우주’의 언어 게임의 울타리라고 하는 사고방식도 비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번역론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착종 잠재체로서의 언어 자체가 이미 번역 효과로부터 빚어낸 운동체라는 것이다. 데리다에게서 근원적인 번역 현상이나 번역 행위는 동일 언어 내의 말 바꾸기도, 복수의 언어 통일체 간의 거래도, 이질적인 기호 간의 옮겨심기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전제하는 통일체를 구성하면서도 벗어나는[초과하는], 통일화될 수 없는 하부-통일적이고 초-통일적인, 타생[他生, 전생과 내세]적인 작용이다. 복수의 타발[他発]적인 사건은 그 접촉의 계기·순간에 있어서 항상 이미 번역 작용을 발생시키고 있다. 혹은 오히려 번역 작용이 타발성=다발성의 교착 운동 그 자체라고 말하는 편이 좋다. 통일성과 자기성(그것 자체·그것 자신인 것)을 구성하는, 이 동시적이면서도 착시(錯時)적인 운동에 있어서는 더 이상 원본(original)과 번역의 구별이 의미를 갖지 않는다. 얼마간의 윤곽이나 심지어 단위=통일성(즉 자기성 또는 원문성)을 보유한다고 보이는 텍스트는 이미 번역의 한 효과이다. 근원적인 번역은 언어 간 번역 이전에, 또는 언어 내에서의 번역 이전에, 통상적인 번역 개념이 전제로 하는 어떤 단위=통일성 이전에 생기는 번역 작용이다.


번역의 윤리학과 정치학

데리다의 번역 개념은 그가 초기부터 탐구한 에크리튀르나 차연이나 대체보충 같은 구조를 새롭게 고쳐 쓴[갱신한] 것이다. 이 구조는 통일성·단일성(그리고 상보 관계에 있는, 단위를 전제로 한 복수성), 투명성, 동시성·순간성, 기원, 합치로서의 진리, 자연, 예지적[叡智的]인 것, 합목적성·합법성·합법칙성이라는 서양 형이상학의 기본적 개념들을 내파(자기 탈구축)시키고, 그러한 개념 체제 및 그것과 연관된 정치·사회·문화의 체제들이 어떤 억압과 배제의 폭력 구조를 갖는지를 고백시켰다. 이 탈구축 작업의 근저에는 그런 체제들 아래서 억압되고 배제되는 ‘타자’(외발적인 것)들에 대한 윤리적 반응이라는 동기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또 동시에 ‘타자’(외발적인 것)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는 ‘자기’(자발적인 것)에 대한 윤리적 반응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떠맡는 ‘번역자의 사명’에 있어서의 타자의 도래에 대한 요청[외침]은 “자기에 대한 차이 속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와 함께 있는 차이 속에, 언어를 맞아들이고, 언어를 끌어 모은다.”40)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획득한) 기존의 ‘언어’(개념, 발상, 행동 패턴, 감수성)에 유폐되지 않고 자기를 생성 변화시킬 가능성을 준다. 언어는 그 자본에 있어서, 초기 설정에 있어서 자기를 특정한 틀에 끼우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의 군집으로 구성된 착종체라는 그 본질에 있어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기의 다른 관계의 가능성도 준다.


다른 사물에 대해 얘기하고, 타자에게 말을 거는 것을 스스로에게 가능케 해주는 이질 논리적인 열림을 불러들이는 힘이, 하나의 언어에는 항상 이미 있다는 것이다.41)


현재 소유하고 그곳에 안주하는 언어적 배치를 타자(이타성他性·타발적인 것)와의 접촉에 의해 재편[변형]하고, 현재의 언어적 배치 아래 억압되고 파묻혀 있는 잠재력을 부각시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불안이나 공포를 야기하고, 망연자실한 ‘실어증’ 속에 사람들을 둘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이나 철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존 언어에서 일탈하는 “이질 논리적인 열림”의 ‘언어 사용’(‘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이야말로 자기의 새로운 가능성의 발굴로 이어진다. 새로운 언어적 배치의 발명은 새로운 자기나 세계의 발명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단일 언어 사용자는 이른바 실어증이기 때문에 (아마 실어증이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것을 썼다) 그는 절대적인 번역 속에, 준거의 극(極) 없는, 기원의 언어 없는, 출발의 언어 없는 번역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에게서 존재하는 것은 그저,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다면, 도래의 다양한 언어뿐이다….42)


이런 ‘도래의 언어’, 혹은 도래로 열린 언어사용이야말로 ‘절대적인 번역’이며, 타자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자신의 래디컬한 교착 잠재력에 기초하여 여는 구조적 가능성이다. 이 “특이한 번역 현상”43)은 도래할 타자와 도래할 언어(심지어 도래할 ‘자기’)를 소환하고 여는 것으로서, 특이한 ‘메시아성’이라고 불린다.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1993년)에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형식적’·‘구조적’ 메시아주의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며, 구체적인 구원의 내용이나 표현을 동반하는 메시아주의가 아니라(이것은 전통적인 종교적 혹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이다), 구원이나 해방의 실현 내용보다도 그 ‘약속’에만 초점이 맞춰진 ‘메시아주의’이다(그런 것이 아직 메시아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뿐만 아니라 모든 말의 가능성을 약속하고 있다고 이제 내가 주장하는 약속[우리의 문맥으로 번역하면, 이것은 타자와 다른 가능성에 충실을 맹세하는, 열린 번역이다], 이 특이한 약속은, 여기에서는 어떤 메시아적 혹은 종말론적인 내용도 털어놓지 않고, 넘겨주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구원을 구원하거나 약속하는 듯한 어떤 구원도 없다. 모든 구원론의 피안 또는 앞에 있는 이 약속 …. 이 타자의 약속 안에는, 그리고 타자의 언어 속에는 어떤 필연적으로 한정 가능한 내용도 없다는 것 …. 이는 구조적인 열림, 메시아이며, 이것 없이는 좁은 의미의 또는 문자 그대로의 메시아주의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게 바로 메시아주의 ― 즉, 기원적이고 고유한 내용을 결여한 약속 ― 인 한에서, 그리고 모든 메시아주의가 그 엄격하고 사막 같은 가혹함을, 모든 것을 몽땅 빼앗겨버린 그 메시아성을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는 한에 있어서.44)


데리다는 통상적인 메시아주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속’이라는 구조를 형식적(혹은 형상적)으로 추출하고, 그것을 모든 메시아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메시아’(강조는 데리다)으로서 적극적으로 끄집어낸다. 이것은 구원의 내실이나 그 실현 자체보다도, 구원의 약속의 장소(플랫폼)을 항상 열어 놓겠다고 하는, 도래의 가능성을 열어 두겠다고 하는 ‘메시아주의’이다. 초점이 되는 것은 일체의 도래에 대해 닫히지 않다고 하는, 엶에 대한 약속이며, 엶에 대한 엶이다. 이것도 또한 데리다 식의 메시아주의의 ‘탈구축’(과장의 래디컬리즘)인데, 자칫하면 자기언급성의 형식화=형상화라고도 생각될 수 있는 이 데리다에 의한 메시아주의의 ‘번역=번안’은 정말로 타자와 이타성에의 윤리적 환대로 가득 차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정치성을 갖는가? 절대적으로 타자에 열려 있으라는 윤리적 명법(命法)은, 이것이 구체적 상황과 관련된 경우, 정치적인 것과 충돌하고, 정치적인 것에 지장을 주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모든 이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는 이민 제한 문제의 경우처럼.

 그러나 아마 데리다는 이 ‘충돌’·‘지장’ 혹은 ‘불화’야말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와 이타성[他性]에 대한 극도의 ‘윤리’성은, 이것이 정치나 정치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을 갖기 때문에, 심지어 정치와 충돌하고 이것에 균열을 생기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를 불가능하게 때문에 ‘정치성’을, 특이한 정치적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정치는 자기성과 타자성의 관계를 근본적 국면이라고 하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성의 물음은 정치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급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타자에의 윤리는 정치에 내재하면서, 그러나 정치의 한계=경계를 부각시키는 임계점을 들춰서 폭로한다. 이 임계점에서 정치를 논의하고 구체적인 개입을 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국가, 주권, 폴리스, 법권리, 국민·시민성, 전문 정치, 관료제 등등 ―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의 관리囲い込み, 정치의 일자화)에 한정되지 않는 다른 정치를 발명하는 것이다. 이타성[他性]으로의 열림의 약속이 약속이기 위해서는 약속의 언어행위(협의의 performativity)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당연히 현실 개입과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윤리는 윤리적인 것에만 틀어박혀서는 윤리적이지 않다. 타자에의 열림을 약속하는 것만으로 일을 끝내버리면, 자신의 ‘아름다운 혼’에 박수를 보내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참으로 윤리적인 자세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윤리는 자신이 세운 격률(약속·명법命法)에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윤리가 된다. 윤리는 그것이 진정으로 있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정치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사르트르가 말하는 앙가주망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 실천이 어디까지나 윤리적이기 위해서는 정치의 논리와 제도들(이른바 ‘현실주의’)에 시야가 한정돼서도 안 된다. 거기에 필연적으로 정치와 윤리 사이의 강한 긴장 관계가 생긴다.

 이 긴장관계는 경우에 따라서는 양측의 배타적 관계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긴장관계가 있어야, 현존의 정치와는 다른, 별개의 정치의 가능성이, 또 주권 및 치안 유지(이른바 폴리스 정치) 같은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 정치적인 것과는 이질적인 정치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적어도 정치와 윤리라는 이질적인 언어 사이의 번역을 끈질기게 지속하고 상호 협상과 감염 속에서 양자의 담론을 가다듬는 것이, ‘도래할’ 정치, ‘도래할’ 윤리에는 요구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정치와 윤리가 어떤 구체적 내용을 동반하더라도, 근본적인 것은 이타성(타발성)으로 여는 번역 행위이다. 그것은 내용 없는 내용을 지시한다는 의미에서, 극히 취약한, 최소한의 것이지만(그래서 관념론과 이상주의로 보인다), 그것 없이는 구체적인 정치나 윤리의 알맹이도 정당화될 수 없는, 그러한 플랫폼이다.

 데리다는 번역 공간을 이 플랫폼의 하나로 제시함으로써 하나의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을 했다고 한다. 그의 번역론은 역사, 사회, 정치나 문화에 있어서의 좁은 의미에서의 번역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성과 존재론의 기초 구조의 내부에까지 번역의 문제를 확장하고(과장법에 의해서 래디컬하고), 이타성과 교착하는 잠재체의 존재방식을 부각시켰다. 이 언뜻 보기에 너무나 추상적으로, 너무나 철학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나 윤리적으로 보이는 그의 ‘논증’(프랑스어의 démonstration)은, 그러나 일종의 정치력을 가진 ‘시위’(영어의 demonstration)로서 의도되고 있다. 반쯤은 말장난이면서도 진심이 담긴 사고인 이 파사주(이행·통과·통로·한 구절)는 기존 정치, 윤리, 철학, 예술 같은 선 긋기를 동요시키는 연극적인 정치 효과를 가진다. 정치 원리의 하나에 힘들의 배분(역할 분배=분담)이 있다면, 정치의 본질에는 힘의 연극이 있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사고와 에크리튀르에 연극적 요소가 있으며, 또 연극적이라는 것을 데리다가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정치나 사회에 있어서의 ‘현실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본질에 날카롭게 파고들어 가기 위해서이다.


나는 아마 지금 막 하나의 «demonstration»을 했다 ….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도대체 어떤 언어로 이 단어를 듣게 해주면 좋은지 모른다. 악상 기호 없는 경우의 demonstration은 하나의 결론을 강요하는 논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정치적 사건, 거리에서의 하나의 의지 표명이며(아까 나는 매일 아침 내가 어떻게 길거리[街路]로 내려가는지를 얘기했다 ― 결코 도로[街道]가 아니라 길거리이다), 행진, 행위, 호소[외침], 요구이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의 무대이다. 나는 지금 막 하나의 무대를 만든 것이다. 프랑스어에서도 또한, 악상 기호가 붙은 démonstration은 무엇보다 우선 하나의 몸짓, 신체의 운동, 즉 ‘의지 표명=시위’의 행위이다. 바로 그것은 무대다. 극장 없이, 그러나 하나의 무대, 길거리의 무대다.45)


두 개의 ― 혹은 이중의 ― de(dé)monstration의 불가능한 번역의 효과는 언어의 안과 밖이 주름처럼 서로 얽힌 교착 잠재체를 형성하고, 이것이 기존의 언어적 배치와 의미 분배를 흔든다. 이것이 데리다가 생각하는 첫 번째의 정치력, 아마도 탈정치적인 정치력이다.46) 번역이 착종체는 이타성으로부터의 촉발에 의해 끊임없이 언어와 세계관의 경계선을 다시 작성하여 자리가 옮겨지며, 날마다 새로운 다수다양한 언어들을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데리다에게서의 ‘도래할 민주주의’이며,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리라. 그것은 심지어 ‘새로운 인터내셔널’(『맑스의 유령들』) ― ‘내셔널’한 것의 틈새 ― 일지도 모른다.


만약 네가 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혹은 네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너의 언어 속에서 발명하기를. 즉, 만약 네가 그것을 이해하도록 내밀 수 있고 혹은 그러기를 원한다면 나의 언어를 너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발명하기를. 그 언어의 운율법이라는 사건이 단 한번만 그 언어에서 일어난 곳에서, 그 ‘언어의 아래=집에서(chez)’라는 것이 동거자들, 같은 시민들, 동향자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바로 그 곳에서. 만국의 동향자들, 시인-번역자들이여, 애국주의에 반항하라! 뭔가 어떤 단어를, 내가 사랑하고 쓰기가 좋아하는 뭔가 어떤 단어를 내가 쓸 때마다, 이 단어의 시간에, 단 하나의 음절의 순간에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노래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것이다. 나는 그 노래에 결코 항거하지 않는다. 그 부름을 받고 나는 길거리에 있다 ― 비록 외관상은 아침 일찍부터 조용히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47)


이 ‘길거리’야말로 ― 노숙자나 퍼포머들이 있는 ― 이 길 위와 길가의 무대야말로, 데리다가 생각하는 다수다양체의 플랫폼, 도래할 민주주의의 번역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사고(에크리튀르)와 현실이 교착하는 번역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길거리에 있다 ― 비록 외관상은 아침 일찍부터 조용히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1) ジャック・デリダ, 『たった一つの, 私のものではない言葉――他者の単一言語使用』, 守中高明訳, 岩波書店, 2001년, 46頁.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이 일역본에 의거하지만, 논지의 전개상 필요하다고 여겨질 경우 적절하게 변경했다.

2) 同書, 47頁.

3) 同書, 110頁.

4) 同書, 64頁.

5) 同書, 76頁.

6) 同書, 75頁.

7) 同書, 74頁.

8) 同書, 同頁.

9) 同書, 75頁.

10) 同書, 44頁.

11) 同書, 80頁.

12) 同書, 82頁.

13) 여기서 초기 데리다에게서의 의미론의 탈구축, 심지어 가장 근원적인 이론 기반인 시간론의 탈구축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지면 사정상 생략한다.

14) 同書, 88頁.

15) 同書, 同頁.

16) 同書, 87頁.

17) 同書, 同頁.

18) 同書, 105頁.

19) 同書, 87頁.

20) 同書, 58頁.

21) 同書, 92頁.

22) 同書, 91頁.

23) 同書, 91-93頁.

24) ‘경합하여 값을 끌어올림(競り上げ, surenchère)’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우정의 정치(友愛のポリティックス1)』(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 訳, みすず書房, 2003년)의 73頁, ‘상고(上告, grief)’에 대해서는 이 책의 11頁을 참조.

25)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지적한 두 개의 웃음의 전략인 아이러니와 유머로 말하면, 데리다의 탈구축의 전략은 어느 쪽인가 하면, 원리의 이름으로 원리의 원리를 추구하고 그 근원적 무근거성을 밝히는 아이러니의 전략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러니의 전략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의 전통적 수법이다. 물론 아이러니와 유머의 전략이 확연이 분리되거나 대립되거나 하는 것은 아님을 이해한 위에서의 얘기이지만.

26) 前掲, 『他者の単一言語使用』, 89-90頁.

27)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 「翻訳者の使命」, 『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2』, 浅井健二郎 編訳, 三宅晶子・久保哲司・内村博信・西村龍一 訳, ちくま学芸文庫, 1996년, 407頁.

28) 同書, 同頁.

29) [옮긴이] 일본에서 인간의 예지(叡智, 밝은 지혜, 사물의 도리에 깊이 통달한 지혜나 높은 지성; 사물의 참 실재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 능력)로써 밝힐 수 있는 세계라는 의미로, 감성계와 대립시켜 사용된다.

30) 同書, 407-408頁.

31) 前掲, 『他者の単一言語使用』, 130頁.

32) 同書, 126頁.

33) 同書, 126-127頁.

34) 同書, 124頁. 강조는 데리다.

35) 同書, 124-125頁.

36) ジャック・デリダ, 「バベルの塔」, 高橋允昭 編訳, 『他者の言語』 수록, 8頁. 강조는 데리다.

37) 同書, 12頁.

38) 同書, 12-13頁.

39) 前掲『他者の単一言語使用』, 41頁.

40) 同書, 129頁. 강조는 데리다.

41) 同書, 132頁.

42) 同書, 116頁. 강조는 데리다.

43) 同書, 124頁.

44) 同書, 130頁. 강조는 데리다.

45) 同書, 137頁.

46) 前掲, 『友愛のポリティックス1』, 170-171頁을 참조. “이 탈-정치화는 … 정치적인 것(그리고 그 중에서 민주제적인 것)의 계보학적 탈구축을 통해, 다른 정치, 다른 민주제를 사고하기, 해석하기, 실제로 작동시키기를 요구한다. … 말하기, 주제화하기, 형식화하기, 이것은 사후적으로 위에부터 아래로 내려다보며 찾아오는 중립적 내지 비정치적인 행동거지가 아니다. 이 행동거지는 어떤 과정에서 입장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다”(同書, 171頁).

47) 前掲, 『他者の単一言語使用』, 108頁.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번역의 윤리학

: 벤야민과 데리다 (1)

翻訳倫理学

ベンヤミンとデリダ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 이 글은 두 번에 걸쳐 발표된 것이다. 원문은 인터넷 검색 요망.

*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쪽수만 가리키는 각주는 모두 본문으로 옮겼다.

* 초역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은 문예비평, 예술비평, 미디어론, 사회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이지만, 또한 그는 비교적 수수한 영역인 번역론에서도 단 한편의 짧은 텍스트 게다가 자신이 번역한 보들레르 번역서에 붙인 서문이라는 위상을 지닌 텍스트 에 의해 후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오늘날, 번역연구(translation studies)가 화려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으나, ‘번역의 문제가 각광을 받고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서 인지되기에 이르는 데 있어서 벤야민이나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조지 스타이너의 바벨 후에[각주:1]의 힘이 크다. 또한 견실한 번역학의 전문적기술적 연구의 발전에 덧붙여,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에 의한, 번역이 지닌 사상적문화적 의의의 부각(close-up)도 빼놓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번역학의 전문기술적인 고찰이 아니라, 번역을 둘러싼 철학적 고찰의 맥락의 하나로서, 벤야민과 데리다의 번역 사상을 소묘한다. 번역이라는 일견 기술적으로 보이는 작업에서 그들은 어떤 사상적철학적 가능성을 보았는가? 그 커다란 방향성을 밝혀보자.

우선 (1)에서는 벤야민의 번역사상의 틀을 번역자의 사명속에서 탐구하기로 한다. 그런 다음 (2)에서는 데리다의 번역론을 프쉬케에 수록된 바벨의 탑타자의 단일언어사용이라는 두 개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벤야민과의 관계성을 논의한다.

 

전달론의 문제점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Die Aufgabe des Übersetzeis), 보들레르의 파리의 풍경의 스스로의 번역에 붙인 서문이다. 벤야민의 개별 연구로서는, 이 번역의 경위와 배경도 흥미롭고, 또한 번역자가 스스로의 번역의 서문에 번역론을 썼다는 자기 언급적인 메타계층구조에 대한 논의도 재미있으나, 여기서는 벤야민의 주장의 내용을 추출하는 것에 집중하자.

[* 국역본은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잘 알려져 있듯이, 벤야민은 번역의 본질은 의미전달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려 한다는 의도를, 의미를 최대한 도외시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원작은 번역가에 있어서, 원작이 번역자와 그의 번역작품을, 전달될 수 있는 것이 부과하는 노고와 질서로부터 이미 해방하고 있는 한에서만, 본질적인 것이다.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翻訳者使命, 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2, 浅井健二郎編訳, 三宅晶子久保哲司内村博信西村龍一訳, ちくま学芸文庫, 1996, 405. 이하 벤야민의 텍스트로부터의 인용은 이 번역을 따르지만, 논의의 맥락에 비춰 약간 수정을 가했다.)

* 국역본 : ... 번역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의도, 즉 의미를 아주 상당한 정도로 도외시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 그런 정도에서 원작은 단지 그것이 전달의 노력과 전달할 내용의 질서에서 번역자와 그의 작품을 이미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번역에 본질적이다(137쪽).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번역관이나 통역관에서는, 번역이나 통역이 번역하는대상은 번역되는 언어(번역학의 용어로 말하면 기점 언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나 내용(메시지)이며, 이것을 번역하는 쪽의 언어(마찬가지로 번역학의 용어로는 목표 언어’)전사하고, ‘옮겨놓는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경우, 번역가능성은 상이한 두 개의 언어에 걸쳐 있으며, 3자의 위치에 선 초월적인 의미(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의해 보증된다. 상이한 두 개의 개별 언어는, 3심급에 있는 의미의, 두 개의 상이한 표현이며, 이 두 개의 표현의 연락소통이나 그 적절함은 이 제3심급에 의해 최종적으로 판단(심판)되는 동시에 보증된다.

이것은 곧 알게 되겠지만, 복수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일자로 회수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의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려고 꾀하는 신학적 구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말하면, 현실의 복수적 존재자들은, 이것들을 초월하는 이데아로부터 그 존재 기반(실재성)을 부여받는(메텍시스) 가상물이다. 또 기독교신학으로 말하면, 현세의 모든 복수적 존재자는, 유일자인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두 경우 모두, 이런 복수적 존재자들의 궁극적 존재 이유(의미), 이데아든 신이든, 어떤 일자가 쥐고 있다. 언어론의 역사에서 자주 원용되는 전설로 말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의 탑의 완성된 형태라고나 할까.

그러나 바벨의 신화가 이야기하듯이, ‘은 완성되지 못하고, 언어는 다수어로 분산되며, 사람들은 대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그런 산종이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번역이 가능해지며, 필요해진다. ‘번역가능성은 오히려 의미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에서 생긴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만일 제3자의 심급으로서의 의미(진리)가 언어들을 관통하고 있다면, 번역을 할 것도 없이 각각의 언어에 있어서 의미의 파악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원래 번역의 필요는 없다. 또 언어들이 각각의 입장을 넘어선 일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언어행위는 의미되어야 할 일자(소기, 시니피에)표현’, ‘표상’, ‘능기/시니피앙로 간주되기 때문에, 원작도 번역과 마찬가지로 일개의 복사[모사]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번역과 동렬의 지위에 놓이고, 설령 원작이 번역 이상의 가치나 힘을 갖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전달을 번역의 본질이나 가능성의 원천으로 보는 것은 (이런 사고방식은 좁게는 번역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일반에 대한 상식이기도 한데) 거꾸로 번역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빼앗는 것이다.

 

원작이 전달에 전념하는 것이면 그럴수록, 번역에 있어서 이바지하는 것은 갈수록 줄어들고, 마침내 그 의미의 완전한 우위가, 어디까지나 형식으로 이루어진 번역의 지렛대가 되기는커녕, 번역은 헛된 일이 되고 만다(409).

* 국역본 : 원작의 언어가 가치와 품위를 적게 지니면 지닐수록, 그것이 전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기서 번역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적으며, 결국에 그러한 [의역이 추구하는] 의미의 비중이 과도하게 커짐으로써 그것이 풍부한 형식의 번역을 위한 지렛대가 되기는커녕 번역을 좌초시킨다(141쪽).

 

전달 불가능한 것

벤야민은 번역 가능성의 근원이 오히려 전달 불가능성’, 심지어 번역 불가능성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작에는 번역에 있어서 전달 이상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이 본질적인 핵심은, 번역 그 자체에 있어서 더 이상 번역 불가능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번역에서 전달에 관련된 요소를 가능한 한 추출해서, 그것을 번역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번역자의 작업이 목표로 한 것은 건드려질 수 없는 채로 남겨진다. 그것은 원작의 시인의 말과 마찬가지로, 치환(Obertragung[번역]) 불가능한 것이다(399).

* 국역본 : ... 어떤 한 번역에서 전달을 넘어서는 무엇이 놓여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본질적인 핵은 그 번역 자체에서 다시금 번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번역에서 전달에 해당하는 부분을 얼마든지 뽑아내어 이를 번역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번역자의 작업이 지향한 어떤 것이 건드릴 수 없는 채 남는다. 그것은 원작과 작가의 말처럼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131쪽)

 

벤야민은 전달이라는 개념을 위에서 봤듯이, ‘의미전달로 좁게 파악하고 있으며, 더욱이 의미개념이나 사물등의 의미되어야 할 것으로서만 파악하고 있다. 이런 파악방식 자체는, 전달을 의미로부터 규정하고, 의미도 전달로부터 규정한다는 점에서 순환논법이다. 물론 이 순환논법은 전통적인 전달론, 의미론 자신의 논법이기 때문에, 벤야민의 책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의미나 전달의 개념에 대해, 벤야민 자신은 전통적인 순환논법을 비판하는 데 머물러 있으며, 울타리를 탈각하는[장벽을 부숴뜨리는] 더 새로운 의미전달개념을 구축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벤야민의 논의 구성은 데리다의 탈구축이 안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를 이미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지레 짐작해서는 안 되는 것은, 벤야민은 전달 가능한 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이상의 것이라든가 번역으로부터 전달에 관련된 요소를 가능한 한 추출해서라는 문장에는,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이 있다고 하는 전제가 언뜻 엿보인다. 그러나 벤야민에게서 전달 가능한 것은 번역의 본질이 아니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은 번역의 전부가 아니라 그 일부에 불과하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이 번역을 성립시킨다고 생각하면 본말전도인 것이라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언어와 각각의 언어에 의한 형성물에는, 전달 가능한 것 외에, 전달 불가능한 것 이 존재하는 것이다”(406)["모든 언어와 그 형성물들에는 전달 가능한 것 이외에 전달 불가능한 어떤 것, ...이 남아 있다"(138쪽)].

이런 조심을 한 위에서,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 불가능한 것을 생각해보자. 그가 끄집어낸 번역의 본질로서의 번역 불가능한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흔히 말해지듯이 (이것도 번역의 의미론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이다) 원문이 지닌 다의성, 미묘한 뉘앙스, 음영, 함축, 문장의 리듬 등의, 일반적으로 행간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벤야민의 문장 그 자체는, 이것들의 어떤 해석도 배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다. 또한 원문의 자구 배열을 말하는 것일까? 벤야민은 축자성(축자적 번역)’에 매달리고 있기에, 이것을 번역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고 싶어지지만, 그러나 자구의 모습과 그 배열이 번역 불가능한 것임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들을 그대로 재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원문을 그대로 제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번역이 아니다.

또한 아까 번역의 본질의 논의로부터 벤야민이 배제하는 것처럼 생각된 의미’(의미로서 지향되는 것)도 번역 불가능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의미란 말이 말하려고 하는 지시대상, 예를 들어 물자체를 가리키는데, 물자체가 엄밀하게는 인식 불가능하다는 것은 칸트 철학 이후의 상식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번역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유형의 의미론적 번역관을 벤야민은 비판했던 것이다. 벤야민은 그의 번역론을 분명히 인식 비판과 결부시켰다.

 

원작과 번역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 비판이 모사이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할 때 걷게 되는 사고과정과, 그 의도에 있어서 더 닮은 고찰이 이뤄져야 한다. 인식비판에 있어서, 인식은 현실적인 것의 모사인 경우에는 객관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객관성을 주장하는 권리조차도 없다는 것이 제시된다면, 이 고찰에 있어서는, 번역은 그 궁극적 본질로서 원작과의 유사를 지향하는 한, 원래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394-395).

* 국역본 : 원작과 번역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를 해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비판을 통해 인식에서 객관성이란 그것이 현실적인 것의 모사 속에 존재할 것 같으면 성립할 수 없고, 심지어 여기서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그 자신의 마지막 본질에 따라 추구할 경우 어떠한 번역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입증될 수 있다(127쪽). 

 

벤야민의 번역론은 번역의 인식비판론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 번역=표상이라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며,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 불가능한 것, 번역 불가능성이란, 표상 불가능한 것, 표상 불가능성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확하다. 따라서 번역 불가능한 것을 앞에 둔 번역의 완수 불가능성이 번역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벤야민의 아이러니한 번역관은, 결코 모순어법이 아니다. 그것은 표상 불가능한 것이 번역을 요구하고, 번역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로 취해야 할 것이다. , 표상 불가능한 것을 건드리고자 하기 때문에 번역인 것이며, 즉 번역은 변형, 변환, 전이, 치환을 통해, 표상 불가능한 것을 구멍’, ‘구덩이로서 부각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의 임계

의미자구배열이든 행간이든, 아무튼 벤야민의 번역론의 사고대상은, 표상 불가능한 것의 일반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표상 불가능한 것에 부딪치는 번역의 한계=경계이다. 한계와 경계의 의미를 아울러서 여기서는 임계라고 부르기로 하자. 번역의 임계를 묻는 벤야민의 사고는, 노하우로서의 번역술을 논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한데, 더욱이 개별의 번역 방식을 논하는 번역연구도 아니다. 분명히 번역을 메타의 시점에서 사고하고 있다. 벤야민의 번역론이 실천적 번역자들이나 실제적 번역 메커니즘의 연구자들에게서 평판이 나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행위의 임계를 묻는 사고는, 그 행위의 실천에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으며, 또한 메커니즘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주저하게 하며 저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의 사명이 아니라 번역가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벤야민의 관심은 번역의 메커니즘이나 테크놀로지에 있는 게 아니라, 번역에 있어서의 윤리나 철학에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번역의 불가능성의 문제가 언어에 있어서의 폭력의 문제라는 것을 들이댄다. ‘번역 불가능한 것은 번역의 피하기 힘든 한계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번역의 경계선상에 있어서의 폭력도 보여주는 것이다. ‘번역 불가능한 것에 대해 언급한 후, 벤야민은 이렇게 계속한다.

 

번역의 언어는 그 내실을, 넉넉한 주름을 갖춘 왕의 망토처럼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의 언어는 그것 자신보다도 고차적인 언어를 의미하고, 그것에 의해 그 자신의 내용에 대해 부적당하고 폭력적이고 이질적인 것에 머물기 때문이다(399).

* 국역본 : 번역의 언어는 마치 주름들이 잡혀 있는 널따란 왕의 외투처럼 그것의 내용을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보다 더 상위의 언어를 의미하며, 그로써 번역 자신의 내용에 어울리지 않고 강압적이며 낯선 채로 머물기 때문이다(132쪽). 

 

번역이란 기점언어를 목표언어로 변형하는 작업인 이상, 거기에는 일종의 폭력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변형의 폭력을 두려워해 번역의 작업을 포기해버리면, 원작의 위광(威光)은 생겨나지 않는다. 번역은 스스로가 휘두르는 변형의 폭력을 자각하고 떠맡으면서도 그 폭력에 대해 협박을 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을 원작인 채로 전이시킨다는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 번역이 번역인 이상, 스스로가 원문의 대체자(데리다라면 대체보충supplément‘이라고 말할 것이다)임을 은폐말소하고, 원문을 탈취하거나 개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자신이 휘두르는 변형의 폭력 속에서, 그래도 원문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상 불가능한 충실성에 계속 빙의된다는 충실성 말하자면, 충실성에 대한 충실성이야말로 번역자의 사명이다. 그것은 번역의 임계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계속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역과 원작의 상호 확증

이런 번역의 행위는, 이른바 원작의 증언, 원작의 영광의 증언이라는 의미를 띤다.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이란 그것이 존재함으로써 원작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드높이는 것이다.

 

번역은 원작을 어떤 하나의 언어영역으로 이식한다. 그것은 적어도 원작이 이 영역으로부터 더 이상 어떤 치환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이 영역으로 오로지 새롭게, 다른 부분에 이르기까지 드높여질 수 있는 한에서 아이러니한 의미에서 더 궁극적인 언어영역인 것이다(400).

* 국역본 : 따라서 번역은 원작을 어떤 ― 아이러니하고 ― 보다 궁극적인 언어 영역으로 옮겨 심는 작업인데, 그것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원작을 그 영역으로부터 더 이상 어떤 번역을 통해서도 옮길 수 없고 오로지 그 영역 속으로 항상 새로이, 그리고 다른 부분들에서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32쪽).

 

벤야민은 번역이 원작보다 사후의 존재임을 지적한다(당연한 것이지만). 그리고 번역은 원작이 그 삶 이후에도 사후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번역은 원작에서 유래한다. 게다가 원작의 삶이라기보다 그 <살아남음 Überleben>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번역은 원작보다 나중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번역은 그 작품의 <사후의 삶 Fortleben>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삶과 그 사후의 삶이라는 사고방식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번역에 있어서, 원작의 삶은 그 항상 새롭고 최종적인, 가장 포괄적인 발전단계에 도달한다(392-393).

* 국역본 : ...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에서 나온다. 번역은 그렇지 않아도 원작보다 뒤늦게 생겨나며, ... 번역은 그것들의 사후의 삶의 단계를 지칭하게 마련이다. 완전히 비은유적인 객관성 속에서 예술작품의 삶과 사후의 삶에 대한 생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 번역들은 그것들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들은 열악한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에 요구하곤 하듯이 명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명성 덕택에 생겨난다. 그 번역들 속에서 원작의 삶은 언제나 새롭게 자신의 가장 뒤늦으면서 포괄적인 전개의 단계에 도달한다(124-125쪽). 

 

번역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원작이 번역될 정도로 값어치가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어야만 하지만, 그러나 번역이 없다면, 원작의 탁월성은 제시되지 않으며, 현전하지 않는다. 번역은 원작의 사후에 도래하며, 원작의 삶을 소생시키고, 오래토록 살게 하며, 명성이나 영광이 높아지는 것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는 원작과 번역이 공존관계, 상호확증관계에 있다.

이것이 유대-기독교(특히 유대교)에서의, 창조자인 신과 증언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관계의 유비라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사의 오더(order)인 신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업(작품)을 기리는 관객으로서의 증언자를 원했다. 그래서 신은 세계라는 작품 전체를 대충 만든 후, 증언자로서의 인간을 만들고, 로고스를 주고, 자신의 작품을 기리게 만든다. 인간은 신의 업의 증언자로서 존재 이유를 부여받고, 신은 증언자인 인간에 의해 그 존재나 힘을 확증받는다. 이런 신과 인간의 교류, 상호 승인의 증표가 계약의 책인 성서가 된다.

벤야민이 역설한 원작과 번역의 관계는 신(창조)와 인간(증언)의 관계에 대응한다. 사실 벤야민은 번역의 모델을 신의 말과의 관계 속에서 보고 있다(390, 401을 참조). 그러나 역점은 이동하고 있다. 유대-기독교의 정통(正統)에서 신의 창조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다. 그러나 벤야민에게서는 마치 증언이 증언되어야 할 것(원작)의 가치를 그때마다 창조해가는 것 같지 않은가. “번역에 있어서, 원작의 삶은 그 항상 새롭게 최종적인, 가장 포괄적인 발전 단계에 도달한다.” 원작을 번역이, 기원을 말단이, ‘흔적으로서, ‘에크리튀르로서 입증해가는 운동은, 그것을 더욱 급진적으로 한다면, 데리다가 대체보충이라고 부른 것이 되리라. ‘유래는 이미 경유인 것이다.

벤야민의 논의를 더욱 급진적으로 하면, 원작은 번역의 시련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살아남게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기독교의 전통에서는, 당연히 시련을 받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데, 여기서는 번역뿐 아니라 (번역이 시련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원작도 번역의 시련을 받는다[겪는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뛰어난 번역을 산출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작은 번역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자명한 것이다. 뛰어난 번역을 다시 산출할 수 있는가 여부는 원작의 힘에 달려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원작은 그것이 완전히 번역되어 버리지 못한다면, 원작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원작은, 뛰어난 번역이 아무리 밀려오더라도, 반드시 그 잔여, ‘번역 불가능한 저항의 부분이 없으면 오리지널(original)할 수가 없다. 원작이 원작인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저항력을 가진 점에 있다. 원작의 풍요로운 저항력 때문에, 상이한 무수한 번역이 산출되는 것이다. 저항 없이 하나의 번역으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소진되는] 작품에서는 원작으로서의 힘이 약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번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잠재력을 가져야만 다수의 번역을 산출할 수 있다. 이 저항의 잠재력을 많이 갖고 있는 작품이야말로 뛰어난 원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 얼마나 저항의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번역의 시련에 부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원작과 번역의 상호 확증 관계는 단순한 한통속이나 예정조화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엄격한 시련을 주는 관계라고 말해도 좋다. 게다가 그것은 항쟁이나 전쟁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분유=분할의 공동성을 구성하는 관계이다.

 

순수언어

그러므로 번역은 원작의 모사copy가 아니다. “번역은 하나의 고유한 형식이며, 번역자의 사명도 또한 하나의 고유한 사명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401)["번역이 하나의 고유한 형식이라면 번역자의 과제도 작가의 과제와 확연히 구별된느 고유한 과제로 파악될 수 있다"(133쪽)]. “번역은 언어활동의 자유 속에서 충실한 법칙을 따르면서 그 가장 고유한 궤도를 따라 걷는다”(408)["번역도 ... 충실성의 법칙에 따라 언어운동의 자유 속에서 그 고유한 궤도를 따라간다"(139쪽)]. 그것은 표상이면서 표상의 임계를 돌파하려고 하는 특이한 욕망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번역 불가능한 것,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요구하고, 자신의 한계까지, 경계선상에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달 불가능한 것의 도래를 오로지 희구하는 기도와도 같은 작업이다. 그것을 전적인 타자의 도래에 대한 기원(祈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벤야민에 있어서, 기도를 잘 보여주는 용어가 순수언어이다. ‘순수언어라는 개념은 많은 논자를 끌어드ㅡㄹ이면서도, 번역자의 사명에서도 특히 난해한 개념으로 유명하다. 벤야민에 의한 순수언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순수언어란 스스로는 더 이상 무엇도 지향하지 않고, 무엇도 표현하지 않고, 표현을 갖지 않은 창조적인 단어로서, 모든 언어 하에서 지향되는 것인데, 이 순수언어에 있어서 마침내, 모든 전달, 모든 의미, 모든 지향은, 이것들이 모조리 소멸하도록 정해진 하나의 층에 도달한다(407).

* 국역본 : 더 이상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며 표현할 수 없는 말, 창조적인 말로서 모든 언어 속에 의도된 것이라 할 이 순수언어 속에 결국 모든 전달, 모든 의미, 그리고 모든 의도가 하나의 층위에서 만나며, 이 층위에서 그것들은 소멸하게끔 되어 있다(139쪽). 

 

순수언어란 그 자체가 존재 자체와 일체가 되는, 주관과 객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기호와 의미,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그런 신적 로고스의 이미지로 이해되고 있다. 그것은 지금 거론한 이항대립을 전제하는 전달’, ‘의미’, ‘지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언어이며, 언어가 그대로 존재의 창조인 언어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얘기될 때의 =로고스이다.

이런 순수언어는 모든 언어 아래서 지향되는 것이다. 모든 개별 언어는 순수 언어를 동경한다(402)[134쪽]. 그것은 원작이라는 것, 원문이라는 것도 아니다. 원문도 개별 언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문의 원어도 순수언어를 내포하면서도 덮어 감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원문도 번역도 구조상의 자격은 동등하다. 그러나 번역 언어는 그 대체보충적인 입장 때문에, 원작 이상으로, 모든 언어가 지향하는 순수언어에 대한 동경을 강하게 지닌다. 이런 점에서는 번역이 순수언어에 대한 지향이라는 언어 일반의 지향 구조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벤야민은 원작에 있어서는, ‘창작에 있어서는, ‘시인의 행위에 있어서는, 언어가 그 내실에 대한 연관으로 직접적으로 향하는 반면, 번역에 있어서는, 언어가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문의 언어이며, 직접적인 내실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창작의 지향은 결코 언어 그 자체, 언어의 전체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직접적으로, 언어에 관련된 특정한 내실의 연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번역은, 창작과는 달리 이른바 언어 그 자체의 깊은 숲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번역은 이 숲의 외부에 있으며, 이 숲에 대치하며, 그리고 이 숲에 발을 내딛는 것도 아니며, 그때마다 번역의 언어 자신 속의 메아리가 다른 언어로 쓰여진 작품의 반향을 울리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에 서서, 원작을 불러들인다. 번역의 지향은, 창작의 지향과는 뭔가 다른 것을, 즉 다른 언어로 쓰여진 개별 예술작품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언어 전체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신이 다른 지향이기도 하다. , 시인의 지향은 소박한, 시원적인, 직감적인 지향이며, 번역자의 지향은 파생적인, 궁극적인, 이념적인 지향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언어를 저 하나의 진정한 언어로 통합한다는 장대한 모티프가 그의 작업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401-402).

* 국역본 : 문학작품의 의도는 결코 언어 자체, 그 언어의 총체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언어적 의미 연관만 직접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은 문학작품과는 달리 자신이 마치 언어 내부의 숲속 자체에 있는 듯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숲의 외부에서 그 숲과 대면한다고 여기며 그 숲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서 원작을 불러들이는데, 자신의 언어로 울리는 메아리가 낯선 [원작의] 언어로 쓰인 작품에 대한 반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불러들인다. 번역의 의돈느 문학작품의 의도와는 무언가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 즉 낯선 [번역자의] 언어로 재현된 개개 예술작품의 언어 전체를 지향하는 것만 아니다. 번역의 의도는 그 자체가 또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작가의 의도가 소박하고 일차적이며 구체적이라면 번역자의 의도는 파생된 것이고 궁극적이며 이념적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언어들을 하나의 진정한 언어로 통합하려는 거대한 동기가 그의 작업을 채우기 때문이다(133-134쪽). 

 

저 하나의 진정한 언어순수언어이다. 개별 언어는 그 언어구조, 문화구조, 역사상황 등에 대한 구속에 의해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지향의 방식은 다양한 것이다. 그렇지만 언어들은 지향하는 그 방식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고 조화롭게 합일되는”(402)["스스로 의도하는 방식에서 보완되고 화해되어 서로 합일되는"(134쪽)] 것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 성과가 순수언어라고 불린다.


언어들 사이의 모든 역사를 넘어선 친연성의 성질은, 각각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개별 언어에 있어서, 그때마다 하나의, 더욱이 동일한 것이 지향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일한 것은, 개별적인 언어들로는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언어들이 서로 보완하는 이러저러한 지향(intention)의 총체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순수언어(die reine Sprache)>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언어들의 모든 개별 요소가, 즉 단어, 문장, 문맥이 서로 배제하는 반면, 언어들은 그 지향 자체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는 것이다(396-397).

* 국역본 : 오히려 언어들의 초역사적 근친성은 각각의 언어에서 전체 언어로서 그때그때 어떤 똑같은 것이, 그럼에도 그 언어들 가운에 어떤 개별 언어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언어들이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똑같은 것이 의도되어 있다는 점에 바탕을 둔다. 그것은 곧 순수언어이다. 즉 서로 낯선 언어들의 모든 개별적 요소들, 단어, 문장, 구문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반면, 이 언어들은 그것들의 의도 자체에서는 서로 보완한다(129쪽). 

 

순수언어에 대한 지향은, 서로 다르며, 세계는 분산된 언어들을 어떤 친연성’, ‘공동성속에 둔다. “각각의 언어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오리하게, 모든 역사적인 연관과는 무관하게, 언어들이 말하고(Sagen) 있는 것에 있어서 서로 친연성을 갖고 있다”(394)["언어들은 서로 낯설지 않고 선험적으로, 그리고 모든 역사적 관계를 차치하더라도 그 언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서로 근친관계에 있다"(126쪽)]. 이것은 새로운 바벨의 탑의 건설을 이미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순수언어라는 지향 대상은, 벤야민이 인용하고 있는 의 사례(394)[130쪽]와는 다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언어는 어디까지나 언어들의 동경으로서, 꿈으로서 지향되는 것이다. 번역의 언어(목표언어)는 스스로의 언어가 번역대상의 언어(기점언어)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하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하지만 이것은 번역에 한정되지 않고, 무릇 언어인 이상, 모든 언어(원작, 창작도 포함해)가 지닌 꿈이다. 번역은 언어일반이 가진 이 불가능한 과제(표현매체와 대상 사이의 합치, 기호와 존재의 즉융(即融)), 범례적으로 부각시키는 각별한 통로이며, ‘아케이드이다.

 

불가능한 메시아주의

벤야민의 바벨의 탑은 잃어버린 바벨의 탑이다.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에 의해, 언어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낭만주의나 유대신비주의 사상을 방불케 한다. 낭만주의와의 관련은 독일 비애극의 근원이나 그 밖의 논문을 보면 분명하며, 번역자의 사명에서도 번역과 낭만파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400-401)[132-133쪽]. 유대신비주의와의 관련은, 숄렘과의 관계로부터 이것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이 두 개의 관련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지는 않으나, 아래의 대목이 숄렘을 통한 유대신비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은 많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다.

 

하나의 그릇 조각을 조합하려면, 이 조작들은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서로 합치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번역은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닮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랑을 갖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갖고 있는 지향하는 방식을 자신의 언어 속에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작과 번역은, 마치 그 조각이 하나의 그릇의 파편으로 인정되듯이, 하나의 더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404-405).

* 국역본 : 즉 어떤 사기그릇의 파편들이 다시 합쳐져 완성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미세한 파편 부분들이 하나하나 이어져야 하면서 그 파편들이 서로 닮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도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비슷하게 만드는 대신 애정을 가지고 또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마치 사기그릇의 파편이 사기그릇의 일부를 이루듯이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136-137쪽). 

 

우리는 여기서는 유대신비주의와의 관련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바벨의 탑의 더욱 일반적인 이미지와 결부시켜두려고 할 뿐인데, 벤야민의 순수언어론에는, 잃어버린 그릇에 대한 향수가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실낙원으로 대표되는 기원의 상실의 얘기가 아니다. ‘순수언어는 과거 어딘가에 실재했던 역사상의 어떤 기원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래, ‘종말의 언어이다. 벤야민은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지향되는 것이, 다양한 지향하는 방식[=언어들] 모두의 조화 가운데에서, 순수언어로서 나타날 수 있게 될때이다(398)["의도된 것이 모든 의도하는 방식들의 조화에서 순수언어로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130쪽)].

 

그때까지, 지향되는 것은 언어들 속에 숨어 있는 채이다. 그러나 만일 언어들이 이렇게 해서, 그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한다면, 그때야말로 번역은, 작품들의 영원한 사후의 삶과 언어들의 무한한 활성화에 의해 불타오르며, 끊임없이 새롭게, 언어들의 저 성스러운 생장(生長)을 검증하는 것이다(同頁).

* 국역본 : 그처럼 오랫동안 그 의도된 것은 언어들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언어들이 이처럼 그것들의 역사의 메시아적 종점에 이를 때까지 성장한다면, 작품들의 영원한 사후의 삶에서, 그리고 언어들의 무한한 생기에서 점화되면서 항상 새롭게 언어들의 성스러운 성장을 시험해보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130쪽). 

 

잃어버린 기원이 종말의 메시아적 때에 있어서 회복된다는 종말-목적론도 유대-기독교의 역사 이야기이다. 벤야민에게 그 향수가, 잔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벤야민은 전통적인 종말-목적론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이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의 때는, 그 자체로서는, 즉 역사상의, 시간축상의 사건으로서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고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질성[언어들의 이질성]순간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은, 인간에게는 거절되고 있다. 혹은 어찌됐든 그것을 직접 지향할 수는 없다”(同頁)["이러한 이질성을 이처럼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해결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해결방식, 어떤 순간적이고 궁극적인 해결방식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거나 어쨌든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다(131쪽)]. ‘순수언어가 출현하는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해결은 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 항상 이미 그것은 생겨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번역의 순간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의 지금 여기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그때마다 메시아적 종말구원완전한 구원으로서는 불가능한 구원’, 그래도 무가 아닌 어떤 누력으로서의 구원(혹은 구원의 기원)의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번역은 언어들의 이질성과 대결하는 하나의, 아무튼 잠정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번역은 모든 언어 결합의 궁극적, 최종적, 결정적인 단계로 향하는 스스로의 방향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同頁).

* 국역본 : 이로써 물론 모든 번역은 언어들의 이질성과 대결하는 모종의 임시적 방식일 뿐이라는 점이 인정된 셈이다. 이러한 이질성을 이처럼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해결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해결방식, 어떤 순간적이고 궁극적인 해결방식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거나 어쨌든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다(130-131쪽)

 

번역자에게는 번역에 있어서 순수언어의 씨앗을 성숙시킨다는 과제”(403)["번역 속에서 순수언어의 씨앗들이 익어가도록 한다는 과제"(135쪽)]가 부과된다. 과제=사명”(Aufgabe), 단순히 상실된 기원을 회상하는 것도, 미래의 종말의 때의 현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이 언어들의 번역 속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순수언어를 형성된 형태에 있어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 이것이 번역이 짊어진 강력한, 더욱이 유일한 힘인 것(407)["순수언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번역이 지닌 엄청나면서 유일한 능력"(138-139쪽)]이지만, 그것은 산종된 개별언어의, 개별 번역의 지금 여기에서, 기다림 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번역의 지금 여기의 작업이 이뤄짐으로써, 번역은 스스로가 순수언어를 지향하여 작업을 하면서도, 그 작업이 결코 순수언어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때마다 돌이켜 생각하고, 또한 새롭게 스스로를 순수언어라고 부르게 하면서 기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스스로의 좌절과거’(이것은 원리적인 실패이며, 단순한 실책이 아니다)를 용수철[계기]미래에 기투하는 것인데, ‘기는 그 미래도 반드시 좌절과거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가운데에서의 기획이다. 이 목표(goal) 없는 기투, 미래에의 열림의 운동 그 자체,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불가능한)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의 때이며, ‘순수언어의 때가 아닐까.

우리는 나중에 이런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과 결부시켜, 그 관련성을 논하기로 한다.

 

타자의 언어

아무튼 벤야민의 번역론은 언어가 지닌 근원적인 타자성으로 우리를 꼬드기는 것처럼 생각된다. “순수언어란 그런 언어의 타자성을 집약한 생각이 아닐까? ‘순수언어는 번역의 언어가 목표로 하면서도, 실현 불가능한, 타자로서의 언어였다(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도래할 언어[각주:2]일까?).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순수언어는 원작의 언어에 있어서도 타자의 언어인 것이다.

 

이질적인 언어의 내부에 속박되어 있는 그 순수언어를 스스로의 언어 속에서 구원하는 것, 작품 속에 갇힌 것을 언어 치환 속에서 해방하는 것이, 번역자의 사명에 다름없다. 이 사명을 위해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썩은 울타리를 부숴뜨린다(407-408).

* 국역본 : 낯선 [원작의] 언어 마력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순수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이다. 이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낡은 장벽을 무너뜨린다(139쪽). 

 

번역은 그 변형 작업에 있어서, 원문이 원문 자신에 있어서도 보지 못했던 부분을 부각시킨다. 원작의 언어도 또한 하나의 개별 언어인 이상, 원문에 있어서도 순수언어이며, 스스로가 내포하면서도, 혹은 스스로가 체현하고 있으면서도, 원문만으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언어이다. 번역은 이 원문의 원문 자체에 대한 타자성을 조사한다. 복수의 번역이 있으며, 그 수만큼 원문은 그 풍성한 양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원문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프리즘을 형성할 것이다. 원문과 그것을 둘러싼 다수다양한 번역이 빚어내는 다면체 그것이 저 다양한 지양하는 모든 방식의 조화 속에서, 순수언어로서 나타나는것 아닐까? 벤야민은 조화라고 말하는데, 물론 이 다면체는 결코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긴장이나 충돌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체고정된 전체가 아니라 항상 그때마다, 번역의 개별성을 따라 변모하는 전체 , 분열과 과리를 토대로 하는 동적인 일체성’(데리다는 타자의 언어의 단일성이라고 말한다)을 형성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다수다양한 타자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분유=분할체는, 개별 언어의 타자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성을 구축한다. <타자의 언어> 혹은 <언어의 타자성>에 대한 지향은, 데리다의 번역론과, 어떤 관계를 맞부딪치며 맺을까?

 

이상으로 베냥민의 번역자의 사명의 독해를 통해, 번역의 문제에서 타자의 언어의 문제에 이르렀는데, (2)에서는 데리다에게서의 타자의 언어론에서 출발해, 그의 번역론으로 접근해보자.

 

 

  1. ジョージ・スタイナー, 『パベルの後に : 言葉と翻訳の諸相』, 全二巻, 亀山健吉訳, 法政大学出版局, 上巻 1999년, 下巻 2009년. [본문으로]
  2. デリダ, 『たった一つの、私のものではない言葉ーー他者の単一言語使用』, 守中高明訳, 岩波書店, 2001년. 128頁.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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