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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2강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2강 두 번째 부분












2강. 『정치적 낭만주의』 (2) :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 번째 부분에 이어서)



(계속)



낭만파 사상의 철학적 배경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읽은 곳에서 약간 뒤의 대목을 봅시다. 슈미트는 모든 것을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실재’를 해체하는 낭만파의 사고를 상당히 끈질기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96쪽을 살펴봅시다. 



개념의 전면적인 교체와 혼합, 터무니없는 말의 난혼 속에서는, 모든 것은 설명 가능하게도 되고 설명 불가능하게도 되며, 동일한 것도 반대되는 것도 되며,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 바뀔 수 있다. 정치적 현실에 관한 문제와 논쟁에 “모든 것을 조피[Sophie]로 변화시키고 또한 그 반대를 행하는” 기교(kunst)가 적용되기에 이른다. 이 보편적인 “또한 그 반대”und umgekehrt는, 모든 썩은 흙[糞土]을 돈으로 바꾸는 위대한 말의 연금술에 있어서, 현자의 돌이 된다. 모든 개념은 하나의 나이며, 또한 거꾸로 모든 나는 하나의 개념, 모든 체계는 개체, 모든 개체는 체계, 국가는 인간, 인간은 국가가 된다. 혹은 뮐러의 대립 이념에서 말해지듯이, 만일 긍정과 부정이 객관과 주관처럼 대립물이라고 한다면, 긍정과 부정은 객관과 주관에 다름 아니며, 뿐만 아니라 또한, 공간과 시간, 자연과 예술, 과학과 종교, 군주제와 공화제, 귀족과 부르주아, 남성적과 여성적, 화자와 청자도 마찬가지다. 

[* 개념들의 일반적 교체와 혼합(confusion), 말들의 엄청난 뒤범벅(promiscuity) 속에서 모든 것은 설명할 수 있는 동시에 설명할 수 없고, 동일한 동시에 동일하지 않게 되며,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기예(art)는 “모든 것을 너무도 사랑하는 조피(Sophie)로 변형하고 또한 그 반대로 하기 위해” 정치적 현실의 문제와 토론에 적용됐다. 이런 일반적인 “또한 그 반대로”는 모든 배설물을 금으로 바꾸고 모든 금을 배설물로 바꿀 수 있는 말들의 위대한 연금술에 있어서 철학자의 돌덩이이다. 모든 개념은 자아(ego)이며 또한 그 반대이다. 모든 자아는 개념이며, 모든 체계는 개인이며, 개인은 체계이다. 국가는 사랑하는 연인이며 인간(person)이 된다. 인간(person)은 국가가 된다. 혹은 뮐러의 『대립론(Lehre vom Gegensatz)』에서처럼, 긍정과 부정이 객관과 주관 같은 대립물(antitheses)이라면, 긍정과 부정은 객관과 주관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또한 공간과 시간, 자연과 예술, 과학과 종교, 군주제와 공화제, 귀족과 부르주아지, 남편과 아내, 화자와 청자이기도 하다(p.77).]



‘조피’란 구체적으로는 1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노발리스의 약혼자 조피 폰 퀸(Sophie von Kühn, 1782-97)을 가리킵니다. 노발리스는 작품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신비화·이상화된 형태로 묘사합니다. ‘여성’의 이상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지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sophia〉에서 유래하니까, 우주의 궁극적 신비로 이끄는 여신이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90년대에 일본에서도 붐이 일었던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 1952~)의 『조피의 세계(Sofies verden)』(1991)의 주인공 ‘조피’라는 이름도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었죠.


* 옮긴이 : 독일어이기 때문에 ‘조피’로 읽어야 하지만, ‘소피’라고 읽으면 이해하기 쉽다. 요스타인 가아더는 요스테인 고르데르로 읽히기도 하며, 『조피의 세계(Sofies verden)』도 『소피의 세계』(장연은 옮김, 현암사, 1996)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다. 

 

노발리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조피’로 연결되며, ‘조피’에 의해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래서 ‘조피’를 경유함으로써,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상호 변환 가능해지는 셈입니다. ‘조피’가 연금술의 ‘현자의 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물론 ‘조피’나 ‘현자의 돌’이라고 말해도, 실제로는 ‘나’ 안에서, ‘나’의 상상력에 의해 그런 양 극단의 맞교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가 통과할 수 있는” 공식이며, “세계는 완벽하게 그것을 따라 순서지어지며”, “우주는 그것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다만 그것은 세계나 우주가 아니라, 자그마한 인공적 도상(figure*)에 불과하다. 실재에의 의지는 외양Schein에의 의지로 끝난다. 그들은 세계의 현실을, 단번에 세계의 모든 것을, 우주의 전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 대신 그들이 얻은 것은, 투사와 흡수, 확장과 수축, 점, 원, 타원, 구(球), 영혼 있는, 즉 주관화된 거대한 공놀이 ludus globi였다. 그들은 사물의 실재성을 헤집고 나가는 데 성공했으나, 그 대신에 다름 아닌 사물도 그들을 헤집고 나갔으며, 그들이 그 저술이나 서신이나 일기에서 우주를 우롱하는 데 급급한 것을 보면, 스웨덴보르크가 묘사한 너무도 교활한 자들의 지옥에서 빠져 있는 저주 받은 사람들을 자주 상기시켜준다. 

[* 그것은 공식이다. 즉, “세계 전체가 통과할 수 있는” 공식이다. 이 공식에 입각해 “세계가 모조리 배열되며”, 이 공식과 더불어 “우주는 증명된다.” 물론 그렇다. 다만 이것은 세계와 우주가 아니며, 오히려 예술의 작은 형상(figure)이다. 실재(reality)에의 의지는 외양에의 의지로 끝났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의 실재를, 세계 전체를, 우주의 총체성을 단숨에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 대신에 그들은 투사(projections)와 재흡수, 연장(elongations)과 축약을 얻었을 뿐이다. 점, 원, 타원, 아라베스크(arabesques), 혼이 불어넣어진(ensouled) ― 즉, 주관화된(subjectified) ― 우주적 게임. 낭만주의자들은 사물의 실재성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러나] 이어서 사물들이 그들을 탈출해 버렸다. 우리가 이들의 저술, 편지, 일기에서 우주의 조작에 이들이 열심인 것을 보았을 때, 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스웨덴보르크의 지옥에서 너무도 교활한 자들에게 내려진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p.78).]



요란한 수사가 계속됩니다만, 아까의 [조피 → 현자의 돌 → 나]의 이야기의 계속으로, 포인트는 알 수 있네요. 낭만파 사람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파악할 작정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말로 만들어낸 ‘외양’에 우롱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사물들의 《실재성》을 넘어서, 궁극의 ‘실재성’을 추구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물들이 그들의 눈앞을 지나쳤을 뿐, 우주를 우롱할 것이고, 그 반대로 우주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다. 


“실재에의 의지는 외양 Schein에 대한 의지로 끝난다”는 원문에서는 〈Der Wille zur Realität ender im Willen zum Schein〉입니다. 독일어 〈Schein〉에는 ‘외양[외관]’, ‘가상’ 외에도 ‘빛’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것의 동사형인 〈scheinen〉에 ‘바깥으로’라는 의미를 지니는 철자, 접두사 〈er-〉을 붙여서 〈erscheinen〉이라고 하면, ‘나타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사물의 본질이 ‘빛을 내다’와 같은 포지티브한 뉘앙스와, 실체가 없는 단순한 ‘외양[외관]’이라는 네거티브한 뉘앙스 둘 다를 띠고 있는 말입니다. 낭만파는 ‘빛나는’ 본질을 포착한 셈이었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자신이 멋대로 만들어낸 ‘외양[외관]’과 놀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관화된 거대한 공놀이”라는 비유는 조금 알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이것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球]으로 보고, 그 속에서 다양한 사물이 난무하고 중심점인 ‘소피[조피]’를 통과할 때 한쪽 극성에서 다른 쪽의 극성으로 변환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 구체(球体)로서의 우주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작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주관으로 구체(球体)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서 자기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웨덴보르크(Emanuel Swedenborg, 1688-1771)는 스웨덴의 과학자·신비주의자로, 결정학(結晶學)의 영역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만, 다양한 영적 체험을 하고,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견문록을 썼습니다. 낭만파 사람들이 자신들이 ‘우주’라고 숭배하는 것을 증명하려고 필사적으로 여러 가지 글을 쓴 것을 보면, 스웨덴보르크의 지옥에서, 너무 교활한 자들이 받고 있는 죄를 상기시킨다는 것이죠. 


그러면 낭만파의 사상의 철학적 배경에 관해 논한 2장 (2) 「낭만주의의 우인론적 구조(The Occasionalist Structure of Romanticism)」로 들어가죠. 



그 힘을 날마다 사실에 있어서 증명하고 있는 실재는 비합리이자 거대한 것으로서 암흑 속에 숨어 있다. 더 이상 존재론적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낭만주의적 정신의 영향을 받은 그 세기의 모든 것은 특유한 기분으로 채워져 있었다. 체계적이든 감정적이든, 전제와 결과와 방법은 다종다양하더라도, 낙천[주의]과 비관[주의]의 차별[차이]을 초월하여 개별 개체의 고뇌가 들리게 되며, 기만을 당했다는 이들의 감정도 들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우롱하는 저 힘의 손아귀 속에 놓여 있다. 

[* 그 힘이 실제로 날마다 증명되고 있는 실재는 비합리적 양으로서 모호하게[암흑 속에] 남겨져 있다. 존재론적 사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낭만주의적 정신의 영향을 받았던 세기 전체에는 특유의 기분(characteristic mood)이 [곳곳에] 침투해 있었다. 전제, 결과, 방법이 얼마나 다양하고 체계적이고 감정적인가와는 무관하게,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서, 한 개인의 불안과 속임을 당한다는 그의 감각도 귓가에 들려올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힘의 손아귀에서 속수무책이다(p.78).]



낭만파에게 ‘실재’의 본체는 어둠 속, 즉 이성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세계, 파악하기 힘든 무의식의 세계에 있다고 상정되는 것이기에, 그들은 피히테처럼 체계적인 ‘존재론’을 전개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감춰진 ‘실재’가 우리의 의식을 배후에서부터 움직인다, 혹은 뭔가의 계기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뭔지 모르지만, 우리는 미지의 비합리적인 힘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다. 좁은 의미의 낭만주의뿐 아니라, 19세기는 특유의 기분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 뒤에 이어진 논의에 비춰 보면, 셸링의 ‘신화’라든가, 쇼펜하우어(1788-1860)의 “그저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라든가 니체(1844-1900)의 “힘에의 의지”, 프로이트(1856-1939)의 ‘무의식’ 등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자신의 의식의 진정한 주인인가? 뭔가 다른 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은 현대사상의 주요 테마인데요, 낭만주의 시대에 이미 그런 사고방식의 원형이 나오는 겁니다. 진보주의적인 합리주의의 진영에서 보면, 가톨릭 보수주의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신봉한 점에서, 낭만주의와 한패거리가 아니냐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라면, 뚜렷한 ‘존재론’을 지녔다는 점에서, 가톨릭 보수주의는 낭만주의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 인간과 세계에서 놀 수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폭풍우』 속의 프로스페로처럼 인간이 극의 ‘조종 장치’를 자신의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로맨티카는 자유로운 주관성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이런 상상을, 좋아하고 사랑해버렸다. 

[* 우리는 인간 존재 및 세계와 아이러니하게 노는 것을 즐긴다. 셰익스피어의 『폭풍우』에 나오는 프로스페로처럼 인간이 자신의 수중에 드라마의 ‘조종 장치(mechanical play)’를 쥐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주체성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그런 관념을 상상하길 아주 좋아한다(pp.78-79).]



“프로스페로 Prospero”란 셰익스피어의 희극 『폭풍우 The Tempest』의 주인공으로, 원래 밀라노를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동생에게 배신당해 딸과 함께 섬으로 유배됩니다. 마술을 배운 그는 마술을 통해 섬의 요정과 괴물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게 되며, 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어느 날 새로운 왕이 된 동생과 나폴리 국왕, 그 아들이 탄 배가 (프로스페로의 하수인이 된 요정이 일으킨)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섬으로 흘러듭니다. 프로스페로는 마술을 사용해 그들을 위협하고 복수하려 하지만, 자신의 딸과 나폴리 왕자가 사랑에 빠졌기에, 그의 진심을 시험한 후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로스페로는 얼핏 보면 마술이라는 ‘조종 장치 Maschinenspiel’에 의해 이야기의 진행을 조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원래 그가 동생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발단인 셈이니까, 프로스페로 자신도 운명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술을 구사하고 있지만, 마술의 바탕이 되는 초자연적인 힘은 그가 산출한 것이 아닙니다. 한발 더 물러선 관점에서 보면, 프로스페로는 극중 인물이기 때문에, 작자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자도 그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낭만주의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힘 eine unsichtbare Macht”을 이용하는 것, 혹은 그것에 몸을 맡기는 것을 “자유로운 주관성 freie Subjektivität”의 행사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무의식에서 부상하게 되는 ‘상상력’이 낭만주의적인 창조의 원천입니다. 문학·예술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것 같은 느낌이지만, 낭만주의 이전의 고전주의 시대, 괴테나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대라면, 그런 비합리적 힘에서 생겨나는 정념을 이성에 의해 통제하고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예술의 본래 존재방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 : 비밀결사geheime Bünde와 음모론 


이후 다소 뜻밖의 얘기가 이어집니다. 독일 문학사·문화사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비밀결사의 힘이라는 것에 관한 공상은 18세기 말에도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통속소설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계몽단이나 프리메이슨의 비밀 음모에 대한 신앙은 버크나 하라 같은 비낭만주의적 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낭만주의자는 거기서 자신의 음모적이고 아이러니한 실재에 대한 충동, 즉 인간을 지배하는 은밀하고 무책임하며 분방한 힘에 대한 감흥을 위한 테마를 보고 있다. 그래서 티크의 최초의 소설(roman)에서는 탁월한 인물들이 주역을 맡고, 다른 자들을 그들의 의지와 기획의 무의식적인 앞잡이[부하]로 삼고 있다. 이런 인물은 ‘모든 배후에 있는 위대한 도구들’로 실험하고, 극을 그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 18세기 말뿐 아니라 그 후에도, 비밀결사의 힘에 관한 공상(fantasies)은 단순히 싸구려 스릴러물의 필수품이 아니었다. 예수회, 일루미나티[광명단], 프리메이슨이 만든 비밀스러운 음모에 대한 신앙은 이 세기의 낭만주의적이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버크와 하라 같은 이들]에 의해서도 표명됐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들이 인간의 역사를 보이지 않게 또 최고의 악의를 갖고 통제할 수 있게 는 해주는 ‘무대 뒤에서’ 실행되는 비밀스러운 힘이라는 관념에 있어서 ― 이와 같은 ‘비밀’의 건축에 있어서, 인간에 의한 역사적 사건들의 의식적 지배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신앙은 막대한 사회적 힘에 대한 악령적-공상적 두려움과 결합되며, 섭리에 대한 세속화된 신앙과 빈번하게 결합된다. 여기서 낭만주의자는 자신의 아이러니하고 모사를 꾸미고 현실을 갈망하는 테마를 봤다. 비밀을 매우 즐겨하며, 무책임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경솔한 힘을 발휘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티크의 초기 소설에는 다른 자들을 자신들의 의지와 음모의 무의식적인 도구로 만드는 탁월한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전체의 배경 속에서 거대한 엔지니어”로서 실험을 하며, 게임의 가닥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다(p.79).]



일본에서도 요즘 음모론이 붐을 이루고 있죠. 음모론이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어둠의 세력이 정치나 경제를 움직이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얘기죠. 현대세계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어서, 미국의 정보기관인 CIA가 9·11을 자작극으로 꾸몄다거나, 알카에다를 그림자로서 조종해서 군사개입의 구실을 꾸며냈다는 등의 얘기가 많습니다만, 그런 수준에 머물지 않고, CIA의 더 깊은 배후에 건국 당초부터 미국을 조종하고 있는 특정한 ‘비밀결사’가 있고, 그것이 진정한 흑막이라는 깊은 음모론이 있죠. 


‘프리메이슨’ 얘기는 꽤 옛날부터 있었죠. 미국의 대통령이나 민주, 공화 양당의 간부의 대다수가 프리메이슨이라든가, 러시아나 중국의 수뇌부에도 멤버가 꽤 있고, 세계의 정치를 그림자로서 움직이고 있다든가, 역사상의 거대 사건의 대부분은 모두 프리메이슨의 계획을 따라 이뤄졌다든가. ‘일루미나티’도 최근 듣게 됐습니다. 일단 다른 조직인 것 같아요. 


슈미트가 말하듯이,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등의 비밀결사는 18세기 말경부터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유럽의 많은 도시에 지부를 결성합니다. 그런 ‘비밀결사 geheime Bünde’가 서유럽국가들의 문학 테마가 됐습니다. 독일문학에서 특히 도드라집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그 속편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9)에는 프리메이슨을 모델로 했다고 생각되는 ‘탑의 결사 Turmgesellschaft’가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유령을 보는 자[환시자, 강신술사] Der Geisterseher』(1787-89)에서는 칼리오스트로(Cagliostro) 백작(1743-95)을 모티프로 삼은 듯한 수수께끼의 아르메니아인이나 영능력자, 비밀결사 부센타우루(Bucentauro) 등이 등장합니다. 호프만의 환상소설은 수상한 사람들 투성이입니다만, 특히 『모래 사나이(Der Sandmann)』(1816)는 영적인 이야기와 음모론, 무의식론이 조합되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1강에서도 조금 소개한 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는 슐레겔 등과 거의 동세대의 낭만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 주로 베를린에서 활약했습니다.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의 『장화 신은 고양이』를 프랑스혁명의 패러디로 보이도록 번안한 희극 「장화 신은 고양이」(1797)이나 기사의 세계를 무대로 한 낭만주의적 소설 『충실한 에카르트 또는 탄호이저Der getreue Eckart oder Tannhäuser』(1799) 등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만 Roman’이란 장편소설을 가리킵니다. 독일문학에서는 그 길이를 이용해서 회상이라든가 서한이라든가 극중극 등을 집어넣어 큰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별개의 장르로 간주됩니다. 원문에서는 〈Romane〉라고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윌리엄 로벨 씨의 이야기Die Geschichte des Herrn William Lovell』(1795-96) 주변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98쪽에 로벨(Lovell)이라는 이름이 나오네요. 이 소설에서는 자신이 사랑한 여성이 월터 로벨이라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외아들인 윌리엄을 출산할 때 사망해버린 것을 원망하는 워털루라는 노인이 이들 부모자식에 대해 복수하는 음모 이야기로서 구성되어 있고, 여러 등장인물이 그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며, 이들 부자를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일을 합니다. 그것을 워털루 자신이 이야기한다는 구성입니다. 98쪽에 로벨이 안드레아(Andrea)의 아이러니의 꼭두각시(Werkzeug)라는 얘기가 나옵니다만. 안드레아는 워털루가 이탈리아에서 쓴 가명입니다. 워털루=안드레아는 로벨을 우롱합니다만, 자기 자신도 ‘아이러니’에 의해 우롱당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밀결사’적인 문학이 테마로 자리 잡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독일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만, 우리가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무의식의 영역에 도사리고 있는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강해진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18세기 말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있고, 계몽적 이성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듯 보였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이성의 이름 아래서의 진보의 마이너스 작용 ―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 당시의 테러라든가, 공동체의 파괴라든가 ― 도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역시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인간을 광기로 몰아가는 힘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식도 싹텄습니다. 계몽의 반동입니다. 그 반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호프만의 소설에서, 당시 유행했던 자기최면(磁氣催眠, mesmerism)을 주제로 한 것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의 알기 쉬운 상징으로서, 세계를 움직이는 ‘비밀결사’의 음모 같은 이미지가 완성됐다고 생각합니다. 낭만파는 ‘아이러니’라는 형태로, 무의식의 차원에서 떠오르는 상상력을 포지티브하게 평가했던 것입니다만, 그것과 정반대로, 우리의 자아의식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 수도 있는 무의식에 대한 불안도 있고, 그것이 ‘비밀결사’의 암약을 둘러싼 표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서도 나타납니다. 슈미트는 무의식적인 것을 원동력으로서 역사가 전개되는 모양을 탐구하는 ‘역사철학’의 동향에도 주의를 돌리고 있습니다. 99쪽에 몇 명인가 대표적인 사상가가 거론됩니다. 셸링은 개인의 의식된 의지를 초월하는 역사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루덴(Heinrich Luden, 1778-1847)은 인간, 민족, 세대 등을 매개로 하여 “삶의 정신 Geist des Lebens”이 자기를 현현한다는 견해를 보여줬습니다. 루덴은 예나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역사학자로, 역사연구를 통해 독일의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정치체제로서는 인민주권을 이상으로 했습니다. 헤겔은 개인들을 우롱하는 ‘이성의 간지 List der Vernunft’를 시사했습니다. 맑스는 생산관계에 의해 역사가 움직인다는 유물사관을 정식화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를 이 세계의 본질로 간주하고, 역사상의 희비극은 그 의지에 의해 일어난다고 봤던 셈입니다. 


100쪽에서는 “무의식의 과정 unbewußte psychische Vorgänge”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 하는 시도로서, ‘성욕’에 주목하는 프로이트의 이론, ‘권력에의 의지’에 주목하는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0) ― 독일어 이름(Alfred Alder)이니까 ‘알프레트 아들러’라고 표기하는 편이 좋겠죠 ― 의 이론 등이 언급되어 있네요. 아들러는 정신분석의 초기에 프로이트와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만, 나중에 ‘개인심리학’이라는 다른 그룹을 만든 인물로, 니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로 기관열등성에 기초한 열등감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우월성 추구의 메커니즘을 이론화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맑스주의나 정신분석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매혹되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나 쇼펜하우어로 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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