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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2강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2강 두 번째 부분












2강. 『정치적 낭만주의』 (2) :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 번째 부분에 이어서)



(계속)



낭만파 사상의 철학적 배경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읽은 곳에서 약간 뒤의 대목을 봅시다. 슈미트는 모든 것을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실재’를 해체하는 낭만파의 사고를 상당히 끈질기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96쪽을 살펴봅시다. 



개념의 전면적인 교체와 혼합, 터무니없는 말의 난혼 속에서는, 모든 것은 설명 가능하게도 되고 설명 불가능하게도 되며, 동일한 것도 반대되는 것도 되며,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 바뀔 수 있다. 정치적 현실에 관한 문제와 논쟁에 “모든 것을 조피[Sophie]로 변화시키고 또한 그 반대를 행하는” 기교(kunst)가 적용되기에 이른다. 이 보편적인 “또한 그 반대”und umgekehrt는, 모든 썩은 흙[糞土]을 돈으로 바꾸는 위대한 말의 연금술에 있어서, 현자의 돌이 된다. 모든 개념은 하나의 나이며, 또한 거꾸로 모든 나는 하나의 개념, 모든 체계는 개체, 모든 개체는 체계, 국가는 인간, 인간은 국가가 된다. 혹은 뮐러의 대립 이념에서 말해지듯이, 만일 긍정과 부정이 객관과 주관처럼 대립물이라고 한다면, 긍정과 부정은 객관과 주관에 다름 아니며, 뿐만 아니라 또한, 공간과 시간, 자연과 예술, 과학과 종교, 군주제와 공화제, 귀족과 부르주아, 남성적과 여성적, 화자와 청자도 마찬가지다. 

[* 개념들의 일반적 교체와 혼합(confusion), 말들의 엄청난 뒤범벅(promiscuity) 속에서 모든 것은 설명할 수 있는 동시에 설명할 수 없고, 동일한 동시에 동일하지 않게 되며,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기예(art)는 “모든 것을 너무도 사랑하는 조피(Sophie)로 변형하고 또한 그 반대로 하기 위해” 정치적 현실의 문제와 토론에 적용됐다. 이런 일반적인 “또한 그 반대로”는 모든 배설물을 금으로 바꾸고 모든 금을 배설물로 바꿀 수 있는 말들의 위대한 연금술에 있어서 철학자의 돌덩이이다. 모든 개념은 자아(ego)이며 또한 그 반대이다. 모든 자아는 개념이며, 모든 체계는 개인이며, 개인은 체계이다. 국가는 사랑하는 연인이며 인간(person)이 된다. 인간(person)은 국가가 된다. 혹은 뮐러의 『대립론(Lehre vom Gegensatz)』에서처럼, 긍정과 부정이 객관과 주관 같은 대립물(antitheses)이라면, 긍정과 부정은 객관과 주관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또한 공간과 시간, 자연과 예술, 과학과 종교, 군주제와 공화제, 귀족과 부르주아지, 남편과 아내, 화자와 청자이기도 하다(p.77).]



‘조피’란 구체적으로는 1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노발리스의 약혼자 조피 폰 퀸(Sophie von Kühn, 1782-97)을 가리킵니다. 노발리스는 작품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신비화·이상화된 형태로 묘사합니다. ‘여성’의 이상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지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sophia〉에서 유래하니까, 우주의 궁극적 신비로 이끄는 여신이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90년대에 일본에서도 붐이 일었던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 1952~)의 『조피의 세계(Sofies verden)』(1991)의 주인공 ‘조피’라는 이름도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었죠.


* 옮긴이 : 독일어이기 때문에 ‘조피’로 읽어야 하지만, ‘소피’라고 읽으면 이해하기 쉽다. 요스타인 가아더는 요스테인 고르데르로 읽히기도 하며, 『조피의 세계(Sofies verden)』도 『소피의 세계』(장연은 옮김, 현암사, 1996)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다. 

 

노발리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조피’로 연결되며, ‘조피’에 의해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래서 ‘조피’를 경유함으로써,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상호 변환 가능해지는 셈입니다. ‘조피’가 연금술의 ‘현자의 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물론 ‘조피’나 ‘현자의 돌’이라고 말해도, 실제로는 ‘나’ 안에서, ‘나’의 상상력에 의해 그런 양 극단의 맞교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가 통과할 수 있는” 공식이며, “세계는 완벽하게 그것을 따라 순서지어지며”, “우주는 그것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다만 그것은 세계나 우주가 아니라, 자그마한 인공적 도상(figure*)에 불과하다. 실재에의 의지는 외양Schein에의 의지로 끝난다. 그들은 세계의 현실을, 단번에 세계의 모든 것을, 우주의 전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 대신 그들이 얻은 것은, 투사와 흡수, 확장과 수축, 점, 원, 타원, 구(球), 영혼 있는, 즉 주관화된 거대한 공놀이 ludus globi였다. 그들은 사물의 실재성을 헤집고 나가는 데 성공했으나, 그 대신에 다름 아닌 사물도 그들을 헤집고 나갔으며, 그들이 그 저술이나 서신이나 일기에서 우주를 우롱하는 데 급급한 것을 보면, 스웨덴보르크가 묘사한 너무도 교활한 자들의 지옥에서 빠져 있는 저주 받은 사람들을 자주 상기시켜준다. 

[* 그것은 공식이다. 즉, “세계 전체가 통과할 수 있는” 공식이다. 이 공식에 입각해 “세계가 모조리 배열되며”, 이 공식과 더불어 “우주는 증명된다.” 물론 그렇다. 다만 이것은 세계와 우주가 아니며, 오히려 예술의 작은 형상(figure)이다. 실재(reality)에의 의지는 외양에의 의지로 끝났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의 실재를, 세계 전체를, 우주의 총체성을 단숨에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 대신에 그들은 투사(projections)와 재흡수, 연장(elongations)과 축약을 얻었을 뿐이다. 점, 원, 타원, 아라베스크(arabesques), 혼이 불어넣어진(ensouled) ― 즉, 주관화된(subjectified) ― 우주적 게임. 낭만주의자들은 사물의 실재성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러나] 이어서 사물들이 그들을 탈출해 버렸다. 우리가 이들의 저술, 편지, 일기에서 우주의 조작에 이들이 열심인 것을 보았을 때, 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스웨덴보르크의 지옥에서 너무도 교활한 자들에게 내려진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p.78).]



요란한 수사가 계속됩니다만, 아까의 [조피 → 현자의 돌 → 나]의 이야기의 계속으로, 포인트는 알 수 있네요. 낭만파 사람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파악할 작정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말로 만들어낸 ‘외양’에 우롱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사물들의 《실재성》을 넘어서, 궁극의 ‘실재성’을 추구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물들이 그들의 눈앞을 지나쳤을 뿐, 우주를 우롱할 것이고, 그 반대로 우주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다. 


“실재에의 의지는 외양 Schein에 대한 의지로 끝난다”는 원문에서는 〈Der Wille zur Realität ender im Willen zum Schein〉입니다. 독일어 〈Schein〉에는 ‘외양[외관]’, ‘가상’ 외에도 ‘빛’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것의 동사형인 〈scheinen〉에 ‘바깥으로’라는 의미를 지니는 철자, 접두사 〈er-〉을 붙여서 〈erscheinen〉이라고 하면, ‘나타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사물의 본질이 ‘빛을 내다’와 같은 포지티브한 뉘앙스와, 실체가 없는 단순한 ‘외양[외관]’이라는 네거티브한 뉘앙스 둘 다를 띠고 있는 말입니다. 낭만파는 ‘빛나는’ 본질을 포착한 셈이었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자신이 멋대로 만들어낸 ‘외양[외관]’과 놀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관화된 거대한 공놀이”라는 비유는 조금 알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이것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球]으로 보고, 그 속에서 다양한 사물이 난무하고 중심점인 ‘소피[조피]’를 통과할 때 한쪽 극성에서 다른 쪽의 극성으로 변환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 구체(球体)로서의 우주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작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주관으로 구체(球体)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서 자기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웨덴보르크(Emanuel Swedenborg, 1688-1771)는 스웨덴의 과학자·신비주의자로, 결정학(結晶學)의 영역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만, 다양한 영적 체험을 하고,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견문록을 썼습니다. 낭만파 사람들이 자신들이 ‘우주’라고 숭배하는 것을 증명하려고 필사적으로 여러 가지 글을 쓴 것을 보면, 스웨덴보르크의 지옥에서, 너무 교활한 자들이 받고 있는 죄를 상기시킨다는 것이죠. 


그러면 낭만파의 사상의 철학적 배경에 관해 논한 2장 (2) 「낭만주의의 우인론적 구조(The Occasionalist Structure of Romanticism)」로 들어가죠. 



그 힘을 날마다 사실에 있어서 증명하고 있는 실재는 비합리이자 거대한 것으로서 암흑 속에 숨어 있다. 더 이상 존재론적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낭만주의적 정신의 영향을 받은 그 세기의 모든 것은 특유한 기분으로 채워져 있었다. 체계적이든 감정적이든, 전제와 결과와 방법은 다종다양하더라도, 낙천[주의]과 비관[주의]의 차별[차이]을 초월하여 개별 개체의 고뇌가 들리게 되며, 기만을 당했다는 이들의 감정도 들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우롱하는 저 힘의 손아귀 속에 놓여 있다. 

[* 그 힘이 실제로 날마다 증명되고 있는 실재는 비합리적 양으로서 모호하게[암흑 속에] 남겨져 있다. 존재론적 사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낭만주의적 정신의 영향을 받았던 세기 전체에는 특유의 기분(characteristic mood)이 [곳곳에] 침투해 있었다. 전제, 결과, 방법이 얼마나 다양하고 체계적이고 감정적인가와는 무관하게,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서, 한 개인의 불안과 속임을 당한다는 그의 감각도 귓가에 들려올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힘의 손아귀에서 속수무책이다(p.78).]



낭만파에게 ‘실재’의 본체는 어둠 속, 즉 이성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세계, 파악하기 힘든 무의식의 세계에 있다고 상정되는 것이기에, 그들은 피히테처럼 체계적인 ‘존재론’을 전개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감춰진 ‘실재’가 우리의 의식을 배후에서부터 움직인다, 혹은 뭔가의 계기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뭔지 모르지만, 우리는 미지의 비합리적인 힘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다. 좁은 의미의 낭만주의뿐 아니라, 19세기는 특유의 기분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 뒤에 이어진 논의에 비춰 보면, 셸링의 ‘신화’라든가, 쇼펜하우어(1788-1860)의 “그저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라든가 니체(1844-1900)의 “힘에의 의지”, 프로이트(1856-1939)의 ‘무의식’ 등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자신의 의식의 진정한 주인인가? 뭔가 다른 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은 현대사상의 주요 테마인데요, 낭만주의 시대에 이미 그런 사고방식의 원형이 나오는 겁니다. 진보주의적인 합리주의의 진영에서 보면, 가톨릭 보수주의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신봉한 점에서, 낭만주의와 한패거리가 아니냐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라면, 뚜렷한 ‘존재론’을 지녔다는 점에서, 가톨릭 보수주의는 낭만주의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 인간과 세계에서 놀 수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폭풍우』 속의 프로스페로처럼 인간이 극의 ‘조종 장치’를 자신의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로맨티카는 자유로운 주관성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이런 상상을, 좋아하고 사랑해버렸다. 

[* 우리는 인간 존재 및 세계와 아이러니하게 노는 것을 즐긴다. 셰익스피어의 『폭풍우』에 나오는 프로스페로처럼 인간이 자신의 수중에 드라마의 ‘조종 장치(mechanical play)’를 쥐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주체성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그런 관념을 상상하길 아주 좋아한다(pp.78-79).]



“프로스페로 Prospero”란 셰익스피어의 희극 『폭풍우 The Tempest』의 주인공으로, 원래 밀라노를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동생에게 배신당해 딸과 함께 섬으로 유배됩니다. 마술을 배운 그는 마술을 통해 섬의 요정과 괴물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게 되며, 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어느 날 새로운 왕이 된 동생과 나폴리 국왕, 그 아들이 탄 배가 (프로스페로의 하수인이 된 요정이 일으킨)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섬으로 흘러듭니다. 프로스페로는 마술을 사용해 그들을 위협하고 복수하려 하지만, 자신의 딸과 나폴리 왕자가 사랑에 빠졌기에, 그의 진심을 시험한 후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로스페로는 얼핏 보면 마술이라는 ‘조종 장치 Maschinenspiel’에 의해 이야기의 진행을 조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원래 그가 동생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발단인 셈이니까, 프로스페로 자신도 운명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술을 구사하고 있지만, 마술의 바탕이 되는 초자연적인 힘은 그가 산출한 것이 아닙니다. 한발 더 물러선 관점에서 보면, 프로스페로는 극중 인물이기 때문에, 작자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자도 그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낭만주의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힘 eine unsichtbare Macht”을 이용하는 것, 혹은 그것에 몸을 맡기는 것을 “자유로운 주관성 freie Subjektivität”의 행사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무의식에서 부상하게 되는 ‘상상력’이 낭만주의적인 창조의 원천입니다. 문학·예술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것 같은 느낌이지만, 낭만주의 이전의 고전주의 시대, 괴테나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대라면, 그런 비합리적 힘에서 생겨나는 정념을 이성에 의해 통제하고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예술의 본래 존재방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 : 비밀결사geheime Bünde와 음모론 


이후 다소 뜻밖의 얘기가 이어집니다. 독일 문학사·문화사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비밀결사의 힘이라는 것에 관한 공상은 18세기 말에도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통속소설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계몽단이나 프리메이슨의 비밀 음모에 대한 신앙은 버크나 하라 같은 비낭만주의적 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낭만주의자는 거기서 자신의 음모적이고 아이러니한 실재에 대한 충동, 즉 인간을 지배하는 은밀하고 무책임하며 분방한 힘에 대한 감흥을 위한 테마를 보고 있다. 그래서 티크의 최초의 소설(roman)에서는 탁월한 인물들이 주역을 맡고, 다른 자들을 그들의 의지와 기획의 무의식적인 앞잡이[부하]로 삼고 있다. 이런 인물은 ‘모든 배후에 있는 위대한 도구들’로 실험하고, 극을 그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 18세기 말뿐 아니라 그 후에도, 비밀결사의 힘에 관한 공상(fantasies)은 단순히 싸구려 스릴러물의 필수품이 아니었다. 예수회, 일루미나티[광명단], 프리메이슨이 만든 비밀스러운 음모에 대한 신앙은 이 세기의 낭만주의적이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버크와 하라 같은 이들]에 의해서도 표명됐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들이 인간의 역사를 보이지 않게 또 최고의 악의를 갖고 통제할 수 있게 는 해주는 ‘무대 뒤에서’ 실행되는 비밀스러운 힘이라는 관념에 있어서 ― 이와 같은 ‘비밀’의 건축에 있어서, 인간에 의한 역사적 사건들의 의식적 지배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신앙은 막대한 사회적 힘에 대한 악령적-공상적 두려움과 결합되며, 섭리에 대한 세속화된 신앙과 빈번하게 결합된다. 여기서 낭만주의자는 자신의 아이러니하고 모사를 꾸미고 현실을 갈망하는 테마를 봤다. 비밀을 매우 즐겨하며, 무책임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경솔한 힘을 발휘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티크의 초기 소설에는 다른 자들을 자신들의 의지와 음모의 무의식적인 도구로 만드는 탁월한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전체의 배경 속에서 거대한 엔지니어”로서 실험을 하며, 게임의 가닥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다(p.79).]



일본에서도 요즘 음모론이 붐을 이루고 있죠. 음모론이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어둠의 세력이 정치나 경제를 움직이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얘기죠. 현대세계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어서, 미국의 정보기관인 CIA가 9·11을 자작극으로 꾸몄다거나, 알카에다를 그림자로서 조종해서 군사개입의 구실을 꾸며냈다는 등의 얘기가 많습니다만, 그런 수준에 머물지 않고, CIA의 더 깊은 배후에 건국 당초부터 미국을 조종하고 있는 특정한 ‘비밀결사’가 있고, 그것이 진정한 흑막이라는 깊은 음모론이 있죠. 


‘프리메이슨’ 얘기는 꽤 옛날부터 있었죠. 미국의 대통령이나 민주, 공화 양당의 간부의 대다수가 프리메이슨이라든가, 러시아나 중국의 수뇌부에도 멤버가 꽤 있고, 세계의 정치를 그림자로서 움직이고 있다든가, 역사상의 거대 사건의 대부분은 모두 프리메이슨의 계획을 따라 이뤄졌다든가. ‘일루미나티’도 최근 듣게 됐습니다. 일단 다른 조직인 것 같아요. 


슈미트가 말하듯이,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등의 비밀결사는 18세기 말경부터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유럽의 많은 도시에 지부를 결성합니다. 그런 ‘비밀결사 geheime Bünde’가 서유럽국가들의 문학 테마가 됐습니다. 독일문학에서 특히 도드라집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그 속편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9)에는 프리메이슨을 모델로 했다고 생각되는 ‘탑의 결사 Turmgesellschaft’가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유령을 보는 자[환시자, 강신술사] Der Geisterseher』(1787-89)에서는 칼리오스트로(Cagliostro) 백작(1743-95)을 모티프로 삼은 듯한 수수께끼의 아르메니아인이나 영능력자, 비밀결사 부센타우루(Bucentauro) 등이 등장합니다. 호프만의 환상소설은 수상한 사람들 투성이입니다만, 특히 『모래 사나이(Der Sandmann)』(1816)는 영적인 이야기와 음모론, 무의식론이 조합되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1강에서도 조금 소개한 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는 슐레겔 등과 거의 동세대의 낭만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 주로 베를린에서 활약했습니다.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의 『장화 신은 고양이』를 프랑스혁명의 패러디로 보이도록 번안한 희극 「장화 신은 고양이」(1797)이나 기사의 세계를 무대로 한 낭만주의적 소설 『충실한 에카르트 또는 탄호이저Der getreue Eckart oder Tannhäuser』(1799) 등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만 Roman’이란 장편소설을 가리킵니다. 독일문학에서는 그 길이를 이용해서 회상이라든가 서한이라든가 극중극 등을 집어넣어 큰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별개의 장르로 간주됩니다. 원문에서는 〈Romane〉라고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윌리엄 로벨 씨의 이야기Die Geschichte des Herrn William Lovell』(1795-96) 주변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98쪽에 로벨(Lovell)이라는 이름이 나오네요. 이 소설에서는 자신이 사랑한 여성이 월터 로벨이라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외아들인 윌리엄을 출산할 때 사망해버린 것을 원망하는 워털루라는 노인이 이들 부모자식에 대해 복수하는 음모 이야기로서 구성되어 있고, 여러 등장인물이 그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며, 이들 부자를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일을 합니다. 그것을 워털루 자신이 이야기한다는 구성입니다. 98쪽에 로벨이 안드레아(Andrea)의 아이러니의 꼭두각시(Werkzeug)라는 얘기가 나옵니다만. 안드레아는 워털루가 이탈리아에서 쓴 가명입니다. 워털루=안드레아는 로벨을 우롱합니다만, 자기 자신도 ‘아이러니’에 의해 우롱당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밀결사’적인 문학이 테마로 자리 잡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독일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만, 우리가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무의식의 영역에 도사리고 있는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강해진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18세기 말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있고, 계몽적 이성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듯 보였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이성의 이름 아래서의 진보의 마이너스 작용 ―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 당시의 테러라든가, 공동체의 파괴라든가 ― 도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역시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인간을 광기로 몰아가는 힘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식도 싹텄습니다. 계몽의 반동입니다. 그 반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호프만의 소설에서, 당시 유행했던 자기최면(磁氣催眠, mesmerism)을 주제로 한 것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의 알기 쉬운 상징으로서, 세계를 움직이는 ‘비밀결사’의 음모 같은 이미지가 완성됐다고 생각합니다. 낭만파는 ‘아이러니’라는 형태로, 무의식의 차원에서 떠오르는 상상력을 포지티브하게 평가했던 것입니다만, 그것과 정반대로, 우리의 자아의식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 수도 있는 무의식에 대한 불안도 있고, 그것이 ‘비밀결사’의 암약을 둘러싼 표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서도 나타납니다. 슈미트는 무의식적인 것을 원동력으로서 역사가 전개되는 모양을 탐구하는 ‘역사철학’의 동향에도 주의를 돌리고 있습니다. 99쪽에 몇 명인가 대표적인 사상가가 거론됩니다. 셸링은 개인의 의식된 의지를 초월하는 역사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루덴(Heinrich Luden, 1778-1847)은 인간, 민족, 세대 등을 매개로 하여 “삶의 정신 Geist des Lebens”이 자기를 현현한다는 견해를 보여줬습니다. 루덴은 예나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역사학자로, 역사연구를 통해 독일의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정치체제로서는 인민주권을 이상으로 했습니다. 헤겔은 개인들을 우롱하는 ‘이성의 간지 List der Vernunft’를 시사했습니다. 맑스는 생산관계에 의해 역사가 움직인다는 유물사관을 정식화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를 이 세계의 본질로 간주하고, 역사상의 희비극은 그 의지에 의해 일어난다고 봤던 셈입니다. 


100쪽에서는 “무의식의 과정 unbewußte psychische Vorgänge”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 하는 시도로서, ‘성욕’에 주목하는 프로이트의 이론, ‘권력에의 의지’에 주목하는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0) ― 독일어 이름(Alfred Alder)이니까 ‘알프레트 아들러’라고 표기하는 편이 좋겠죠 ― 의 이론 등이 언급되어 있네요. 아들러는 정신분석의 초기에 프로이트와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만, 나중에 ‘개인심리학’이라는 다른 그룹을 만든 인물로, 니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로 기관열등성에 기초한 열등감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우월성 추구의 메커니즘을 이론화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맑스주의나 정신분석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매혹되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나 쇼펜하우어로 통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칼 슈미트 입문 강의 2강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2강 첫 번째 부분



2강. 『정치적 낭만주의』 (2) :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비밀결사의 힘이라는 것에 관한 공상은 18세기 말에도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통속소설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계몽단이나 프리메이슨의 비밀 음모에 대한 신앙은 버크나 하라 같은 비낭만주의적 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낭만주의자는 거기서 자신의 음모적이고 아이러니한 실재에 대한 충동, 즉 인간을 지배하는 은밀하고 무책임하며 분방한 힘에 대한 감흥을 위한 테마를 보고 있다. 그래서 티크의 최초의 소설(roman)에서는 탁월한 인물들이 주역을 맡고, 다른 자들을 그들의 의지와 기획의 무의식적인 앞잡이[부하]로 삼고 있다. 이런 인물은 ‘모든 배후에 있는 위대한 도구들’로 실험하고, 극을 그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 18세기 말뿐 아니라 그 후에도, 비밀결사의 힘에 관한 공상(fantasies)은 단순히 싸구려 스릴러물의 필수품이 아니었다. 예수회, 일루미나티[광명단], 프리메이슨이 만든 비밀스러운 음모에 대한 신앙은 이 세기의 낭만주의적이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버크와 하라 같은 이들]에 의해서도 표명됐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들이 인간의 역사를 보이지 않게 또 최고의 악의를 갖고 통제할 수 있게 는 해주는 ‘무대 뒤에서’ 실행되는 비밀스러운 힘이라는 관념에 있어서 ― 이와 같은 ‘비밀’의 건축에 있어서, 인간에 의한 역사적 사건들의 의식적 지배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신앙은 막대한 사회적 힘에 대한 악령적-공상적 두려움과 결합되며, 섭리에 대한 세속화된 신앙과 빈번하게 결합된다. 여기서 낭만주의자는 자신의 아이러니하고 모사를 꾸미고 현실을 갈망하는 테마를 봤다. 비밀을 매우 즐겨하며, 무책임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경솔한 힘을 발휘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티크의 초기 소설에는 다른 자들을 자신들의 의지와 음모의 무의식적인 도구로 만드는 탁월한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전체의 배경 속에서 거대한 엔지니어”로서 실험을 하며, 게임의 가닥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다(p.79).]

『정치적 낭만주의』




슈미트와 수사학 


1강에서는 도입으로서 칼 슈미트가 어떤 사상가이고 어떤 식으로 평가받았는가라는 얘기와, 『정치적 낭만주의』의 전반부, 즉 낭만주의를 소개하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 텍스트는 낭만주의론이기 때문에 법학자나 정치철학자보다 문학연구자의 주목을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참고로 제 자신도 석사 시절에 낭만주의 연구의 일환으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슈미트와 문학의 관계에 관해 조금만 보충하겠습니다. 슈미트는 헌법학자이며, 법철학적·법제사적으로 법이나 정치의 본질을 독특한(unique) 형태로 논한 인물입니다. 그의 문체는 우리가 법학논문이라고 들으면 떠올리게 되는, 잘 모르는 추상적인 말을 늘어놓은,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느낌이 아닙니다. 상식을 뒤흔드는, 이상한 수사학이 효과를 발휘하는 문체를 구사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극단적인 결론으로 끌고 가는 느낌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도 그렇지만, 법학의 틀 안에 들지 않는 논문도 많이 썼습니다. 슈미트는 젊은 시절 법학자로서 배우면서도, 문예평론과 풍자문 같은 것을 썼습니다. 표현주의 계열의 시인인 도이블러(Theodor Däubler, 1876-1934)의 시집 『북극광(Nordlicht)』(1910)에 관해 자세하게 논평한 「테오도르 도이블러의 『북극광』에 관하여(Theodor Däublers ‘Nordlicht’: Drei Studien über die Elemente, den Geist und die Aktualität des Werkes)」(1916)나, 동시대 지식인의 생태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브리분켄(Die Buribunken)』(1917-18)이 알려져 있습니다. 전후에도 햄릿론인 『햄릿 혹은 헤쿠바(Hamlet oder Hekuba. Der Einbruch der Zeit in das Spiel)』(1956) 등을 썼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는 문예비평과 정치철학의 중간적 저작으로, 초기 낭만파의 비평이론에 관해 꽤 깊이 파고들어 논평하고 있기에 슈미트의 문학가적 측면이 강하게 드러납니다만, 다음 번 강의 이후에 읽는 『정치신학』이나 『정치적인 것의 개념』 등에서도 수사학이 상당히 효력을 발휘하는 문장으로 쓰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는 자신이 말하려 하는 책의 본질을 직관에 호소하며, 유무를 말하게 하지 않고 납득하게 만드는 강렬한 말로 표현하며, 이를 개념적으로 엄밀화해 가는 것이 훌륭합니다. 수사와 논리의 조합이 절묘하다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미트의 논문 대부분이 법학 자체라기보다는 법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는 법의 근저에 있는 신화적·신학적 차원을 문제 삼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평소와는 다른 《논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수사는 최대한 쓰지 않고, ‘법규범’ 상호의 논리적인 관계만으로 논의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려는 법실증주의의 입장인 한스 켈젠과는 대조적인 느낌이 듭니다. 두 사람은 쾰른 대학에서 한때 동료였기도 했고, 바이마르 시기 독일 법철학의 양대 거두로서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켈젠의 ‘순수법학’은 도덕이나 정치, 종교, 예술 등에서 분리된 순수한 ‘법’의 논리를 추구합니다. 다만 켈젠도 법학 이외의 영역, 예를 들면, 신화나 종교 등에 대해 글도 썼으며, 그런 방면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슈미트 이상으로 문학적 수사를 구사하고 있으며,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トンデル感じさえします. 그것을 법학의 틀 속에 들여오지 않는 것이 켈젠입니다. 



‘예외상태’ 〈Ausnahmezustand〉


『정치신학』의 서두에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것이다”라는 자극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이 문장을 서두에 갖고 오는 솜씨가 절묘합니다. 오늘날의 일본에서 이렇게 말하면 그다지 감이 오지 않지만, [슈미트가] 이 문장을 쓴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예외상태’의 원어는 〈Ausnahmezustand〉로, 헌법이나 정치체제와 관련된 맥락에서는 ‘비상사태’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통상적인 법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계엄령 등에 의해 치안유지를 꾀하려 하는 그 ‘비상사태’입니다.


제1차 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에서는 제정(帝政)이 붕괴하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고 간주된 바이마르 공화제가 발족했습니다만, 거액의 배상 책임을 짊어졌고, 극우와 극좌에 의한 체제 전복 시도가 번번이 있었으며, 많은 정당이 난립했고 정권이 자주 교체됐습니다. 국가가 여전히 매우 불안정했으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줄곧 ‘예외상황’이었습니다. 혹은 ‘예외상태’와 ‘보통상태’가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이마르 헌법에는 헌법=국가체제가 위기에 빠졌을 때, 즉 ‘비상사태’에 처했을 때 헌법의 일부 규정을 중지하고, 특별한 명령을 냄으로써 혼란을 수습할 권한이 대통령에게 주어졌습니다. 슈미트는 대통령이 대권을 발동할 수 있는 ‘비상사태’를 둘러싼 현실적인(actual) 문제를 국가의 존립이 걸린 ‘예외상태’, 다시 말하면 ‘법’의 ‘예외상태’, ‘인간존재’에게 있어서의 예외상태처럼 더 추상적·철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파고들어 가는 형태로 논의를 전개한 것인데요, 그것을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셈입니다. 단순히 대통령이 비상사태 대권으로 혼란을 수습한다는 얘기에서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것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죠.


현실적인(actual) 헌법 해석의 문제를 논하면서 어느 샌가 법률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신학 혹은 신화적인 심층으로 논의 수준을 깊이 있게 해 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독자를 끌고 갔던 《깊은 차원》에 비춰서 당초의 문제를 재고하라고 촉구합니다. 법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나 문학가의 방식입니다.



가톨릭 보수주의  


그러면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정치적 낭만주의』는 ‘정치적 낭만주의’의 특징을 슈미트 자신의 관점에서 매우 정확하고(pinpoint) 아이러니하게 묘사한 다음, 이것과 그가 인정하는 본래의 ‘보수주의’, 특히 가톨릭 보수주의와의 차이를 밝히고, 상대적으로 후자를 높이 평가하려는 노림수를 지닌 저작입니다. 


가톨릭 보수주의의 대표로 드 메스트르와 보날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혁명 시대의 정치사상가로, 가톨릭의 교의와 결부된 국가관·민족관을 내세웠습니다. 이들은 특별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도 신학자도 아니고, 중세의 신학을 그대로 부활시키려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국가나 민족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반드시 가톨릭 교리에서 나오는 얘기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가톨릭이 길러낸 계층구조가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을 이론화한 인물들로, 슈미트는 이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드 메스트르는 일본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구 근대의 정치사상사에서는 꽤 중요 인물로 취급되고 있으며, 보수주의 계열의 사상사에서는 대개 이름이 나옵니다. 「두 개의 자유」론으로 유명한 이사야 벌린(1909-97)도 드 메스트르에 관한 논문을 썼습니다. 



도노소 코르테스



슈미트가 자주 이름을 들먹이는 가톨릭 보수주의의 사상가로는 다른 한 명, 다음 번 강의 이후에도 나오는, 19세기의 스페인 정치이론가이자 외교관인 도노소 코르테스(Juan Donoso Cortes, 1809-93)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2월 혁명 시기의 스페인에서 반혁명의 사상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슈미트가 이 세 명에게서 받은 영향에 대해서는 코가 케이타 씨(古賀敬太, 1952~)가 저서 『칼 슈미트와 가톨리시즘 : 정치적 종말론의 비극(カール・シュミットとカトリシズム──政治的終末論の悲劇)』(1999)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에서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나 보수주의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버크는 전통을 비합리적인 것이라며 파괴하고 영(zero)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한 프랑스혁명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영국국교회와 국가의 결부가 영국의 ‘국가=헌법체제constitution’를 안정시키고 있다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다른 개신교와 달리, 영국국교회는 신앙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에 가톨릭에서 이탈한 것이라서, 교리와 의례에 그다지 큰 차이는 없습니다. 게다가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기에 국가와의 융합도가 가톨릭보다 높습니다.


낭만주의자 중에는 과거에 대한 동경 때문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복고주의적 정치를 지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낭만주의입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라면, 그들은 그저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무한한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민족’이나 ‘역사’를 말했을 뿐이며, 가톨릭 보수주의자처럼 실재하는 ‘민족’이나 ‘역사’를 튼실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보수주의자는 자신들이 ‘실재’하는 ‘민족’이나 ‘역사’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 한정성 위에 자신들의 삶이 성립된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안정된 ‘질서’ 지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그런 ‘한정’을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 미화한 ‘민족’과 ‘역사’의 《이미지》와 무한하게 계속 놀려고 합니다. 그 《이미지》는 ‘실재’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기에, 계속 변용되며 안정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그런 불성실한 불안정성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싼 낭만파의 사고 


여기서 슈미트가 집요하리만치 계속 비난하고 있는 낭만파의 사고방식에 관해 조금만 긍정적인(positive) 관점에서 소개하겠습니다.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계열의 독일사상에서 낭만파를 재평가하게 된 계기가 됐던 것은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노발리스의 ‘비평’ 개념을 ‘무한한 반성’이라는 관점에서 재파악한 벤야민의 논문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발터 벤야민,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심철민 옮김, 도서출판b, 2013 ; Walter Benjamin, Der Begriff der Kunstkritik in der Deutschen Romantik, 1920]입니다. 벤야민이 이를 박사논문으로 쓴 것은 『정치적 낭만주의』가 간행된 것과 같은 해인 1919년입니다. 제 석사논문을 책으로 낸 『근대의 갈등(モデルネの葛藤)』에서도 벤야민의 이 논문을 참고했습니다.


초기 낭만파의 ‘비평’ 이론은 합리적인 주체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상정되는 [데카르트-칸트-피히테]적인 ‘자아’의 개념을 유동화시키고 《나》를 무한의 오토포이에시스의 연쇄 속에서 재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데카르트(1596-1650)는 방법적 회의 끝에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내’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에 관해 계속 생각했습니다. 반면, 슈레겔 등은 “‘실제로 사고하고 있는 나’에 관해 사고하는 나”라는 형태로 생겨나는 ‘반성’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나’의 실재성을 상대화합니다.


“생각하고 있는 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생각한다”에서 “내가 존재한다”를 도출시킨다고 판단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 낭만파에 강한 영향을 미친 피히테는 이것을 “나의 존재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나 자신에 의해 단적으로 정립(setzen)되어 있다”고 표현합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판단의 최종 근거는 나 자신이며, 이것 이상으로 소급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 낭만파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를 둘러싼 수수께끼에 관해 계속 생각하려 합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나’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런 ‘나’는…? 이렇게 계속 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 …”고 무한히 계속됩니다.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한다”는 반성의 구조가 무한하게 반복되는 셈입니다. 이 연쇄가 어디까지나 계속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의 진정한 근거가 결국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의 존재’라는 것은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라는 무한한 연쇄의 단축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데카르트 - 칸트 - 피히테]적 자아

합리적인 입체로서의 실재한다고 상정

‘자아’의 개념을 유동화시키고 《나》를 무한의 오토포이에시스의 연쇄 속에서 재발견하는 것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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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낭만파의 ‘비평’ 이론

방법론적 회의 끝에,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은 “내가 존재한다”를 전제로 하여 ‘나’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에 관해 계속 사고했다. 

            

“‘실제로 사고하고 있는 나’에 관해 사고하고 있는 나”라는 형태로 생겨나는 ‘반성’의 문제를 골똘히 사고함으로써 ‘나’의 실재성을 상대화


더구나 나 자신 속에서만 자기반성이 무한하게 연쇄하는 것일 뿐 아니라, 나의 ‘바깥’에까지 반성의 연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에 관해 ‘언어’에 의해 생각할 때, 언어를 통해서, 외부에서 다양한 관념이 《나》의 안으로 유입됩니다. 다른 《나》들이 사고한 것, 시적으로 창작·상상한 것이 언어를 매개로 ‘나’ 속에 수시로 들어오고, ‘나’라는 장 속에서 오토포이에시스(자기산출)를 계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종횡으로 연결된 반성의 연쇄를 통해, “우리의 세계”가 ― 항상 생성변화하면서 ― 구성됩니다. 그리고 ‘세계’ 속에 《있는(有る)》 다양한 《사물[物]》은 반성 운동 속에서의 ‘나’의 관점의 변화에 의해 다양하고 상이한 양상을 띱니다. 예술적 오브제가 보는 각도나 상황에 따라, 보는 주체의 관심에 따라 다른 면모를 보여주듯이, 예술가는 그런 모든 것을 끌어넣으면서 오토포이에시스를 계속하는 ‘초월론적 포에지(Transzendentalpoesie)’의 운동에, 눈에 띄는 형태로 공헌한 인물입니다만, 우리들 개개인도 얼마간의 형태로 그것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비평Kritik’이란 당사자, 구체적으로는 ‘작품’의 저자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무의식 아래에서 진행되는 그런 반성의 연쇄를 여실히 드러내고, 다시금 창작으로 나설 자극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발상은 포스트 문제계의 현대사상에서 에크리튀르(=쓰인 것 + 쓰는 행위), 혹은 확대된 의미의 ‘텍스트’를 둘러싼 문제로서 논해지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다양한 수준의 ‘텍스트’ ― 어딘가에 적힌 문장뿐 아니라 예술작품, 건물, 상징적 기호 등, 의미의 체계를 이루는 것 일반이 포함됩니다 ― 를 매개로, 불특정 다수의 타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보기에 따라서는 각종 텍스트화된 담론의 다발로서 《주체》로서의 ‘나’가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미 텍스트화되어 있습니다. 안 그러면 대상에 제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대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확대된 의미의 ‘텍스트’는 사람들이 쓰는 행위(에크리튀르)에 의해 점점 증식되고, 또 그것에 뒤따라 새로운 의미의 연관을 산출하기 때문에, 텍스트 속에서 일어나는[벌어지는]  우리의 《주체성》도 계속 변용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에크리튀르의 무한한 놀이에 의해 우롱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체》를 텍스트의 연쇄=에크리튀르의 작용으로 보는 발상은 독일 낭만파와 포스트모던 사상에 공통적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에 대한 《정면》비판 


『정치적 낭만주의』를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슈미트는 슐레겔과 노발리스가 이런 발상을 하고 있음을 어떤 의미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다음에 그것을 ‘정치’에 응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러니’의 문제입니다. 아이러니는 ‘나’ 자신을 제3자의 관점에서 반성적으로 재파악하고, ‘나’ 자신이나 주위의 타자, 여러 대상들에 관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을 발견하고, 《주체》와 《객체》 둘 다를 변용시키는 행위입니다. 아이러니는 모든 개념을 메타적 관점에서 상대화합니다. ‘민족’과 ‘역사’조차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A씨가 “민족의 본질은 ○○○이다”라고 파악했다고 합시다. 반면 B씨가 “A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A씨가 ▽▽▽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에서 입장이 다른 것으로 바뀌면 민족에 관해, 예를 들어 □□□라는 다른 시각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A씨와 B씨가 동일 인물인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C씨가 “B씨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라는 식으로 계속하려고 하면, ‘민족’의 《본질》은 무한한 반성의 연쇄 속에서 점점 변모합니다.


안정된 질서를 찾아내고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보면, 이런 느낌으로 메타 사고를 계속하고, ‘실재’에 다다르지 않는 사고는 쓸모없으며 불성실합니다. 낭만파 입장에서 보면, 성실하게, 하나의 관점을 고집한 나머지, 사물의 다른 측면에 눈을 닫아버리는 《성실한 사상가》들보다는 반성=비평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점점 아이러니컬하게 변화시키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불성실한》 자기네가 결과적으로 사물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는 성실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 되면, 곧바로 《성실한 사람들》은 더욱 더 화를 내죠.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얘기네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이루어진 것과 똑같은 비판이 진보적 합리주의자, 보수주의자, 맑스주의자 등에게서 낭만파에 대해 던져졌습니다. 이런 뜻에서 ‘성실/불성실’ 얘기만 나오면, 우와 좌의 공동투쟁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바뀌지 않은 구도인지도 모릅니다. 슈미트는 그런 낭만주의에 대한 《성실한》 비판을 정치철학의 측면에서 철저히 행하는 것입니다. 


슈미트는 아담 뮐러의 ‘정치적 낭만주의’도, 슐레겔의 아이러니의 응용편일 뿐이라고 봅니다. 일반적 이미지로서는, 뮐러는 메테르니히 아래서 정치적으로 활약하고, 국가유기체설을 내놓고, 애덤 스미스적인 자유주의 경제를 공동체적·전통적 관계성에 의해 보정하는 독자적인 국민경제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비평가·문헌학자일 뿐인 슐레겔과는 다르다고 생각되기 십상입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할 겁니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게, ‘정치적 낭만주의’를 가톨릭 보수주의와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이상하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슈미트 자신의 사상적 결단이 겹쳐져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슈미트가 이렇게나 낭만주의에 집착하는 것은 슈미트 자신 속에 낭만주의적인 체질, 사물을 메타적 관점에서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현실로부터 추상화된 관념에서부터 세계를 재구축하려는 아이러니한 체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슈미트 자신 속에 있는 낭만주의적인 부분을 떼어내, 실재하는 질서를 지향하는 보수주의를 철저히 하기 위한 선언문으로 『정치적 낭만주의』를 쓴 것은 아닐까요? 



포스트모던 보수주의 


최근에는 별로 들리지 않습니다만, 90년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포스트모던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사상 경향이 조금이나마 주목을 받았습니다. 본인이 그렇다고 인정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만, 프랑스의 파시즘 문학 연구에서 문예비평으로 들어간 후쿠다 가즈야 씨(福田和也, 1960~)가 그 대표로 여겼습니다. 포스트모던 보수의 사상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 굳게 믿을 수 있는 게 없지만, 일단 사회를 통합하고 안정시키도록 기능하는 상징이 있는 쪽이 편리하다. 그 ‘상징’의 진정한 유래라든가 배후에 있는 전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천황제나 신도를 그다지 진심으로 믿지는 않지만, 옛 것이 상징으로서 기능하기 쉬우니까 옛 것, 혹은 옛날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이용해서 하면 좋다. 자신은 별로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지만, 집착하고 있는 척 하는 편이 진심으로 집착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과 말을 통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다. 뭔가에 헌신하는 것도, 아무것에도 헌신하지 않는 것도, 모두 결국에는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같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헌신하는 척하고, 임시의 ‘상징’ 아래서 안정해도 좋지 않은가…. 이런 느낌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칸트학파의 철학자 루돌프 파이힝거(Rudolf Vaihinger, 1852-1933)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인 듯이 Als-Ob”의 철학입니다. 


물론 그런 비뚤어진, 무늬(pose)만 보수주의와 진정한 보수주의를 정말로 구별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드 메스트르와 보날은 프랑스혁명에 의해 기존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을 일단 경험하고, 그 과정을 견디면서 실재하는 것으로서 ‘민족’과 ‘역사’에 의거하려 든 것인데요, 이것들이 그들이 바라는 바를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때까지 가톨릭의 정통파 신학에는 없었던 개념을 가톨릭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니까, 꽤 수상쩍습니다. 그들도 가톨릭교회의 이미지를 자기네 사상에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을 뿐인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허접한 보수의 대표적인 전형으로서의 정치적 낭만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고 가톨릭 보수주의를 구출해낼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좌파 혹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과 ‘역사’의 초월적 실재성을 실체적으로 믿는 것도, 놀이에 이용하는 것도, 근대화에 저항하려는 반동적 사고라는 점에서 마찬가지 아니냐고 보이지만, 슈미트는 정말로 질서를 회복하려면 불순한 요소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보기에 설령 ‘적’의 입장에 있을 법한 맑스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가 ‘정치’의 본질 ― 다음 번 강의와 그 다음 번 강의에서 읽는 『정치신학』에서는 그가 ‘정치’와 ‘신학’의 구조적 유사성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에 관해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면, 즉 ‘정치’를 지배하는 신학적 논리야말로 자신들이 분쇄해야 할 최종 표적(target)이라고 짐작했다면, 그것은 제대로 평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루동(1809-65), 바쿠닌(1814-76), 소렐을 뜻밖일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등장을 사상사적으로 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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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1강 질의 응답 부분













질의응답 73




Q : ‘구체적 질서’란 어떤 이미지인가요? 


A : ‘구체적 질서’라는 것치고는 그다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전체 인류라든가 전체 세계에 똑같이 통용되는, 보편적 질서가 아니라, 그 민족이라든가 지역에 고유한 ‘질서’로, 법적인 제도들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학이나 정치학에서 종종 ‘질서’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이것은 매우 추상적인 의미밖에는 갖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거기에 대항해 ‘구체성’을 강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켈젠(1881-1973)이라면, 수학에서 최초로 공리가 설정·규정되고, 이로부터의 연역에서, 체계가 전개되는 것과 똑같이, 처음에 설정된 ‘근본규범 Grundnorm’으로부터 법질서가 논리적·단계적으로 도출된다는 식으로 상정합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켈젠은 근본규범의 내용은 묻지 않는 셈인데, 슈미트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정치적 공동체를 만드는 ‘구체적 질서’에 맞지 않는 것은, ‘근본규범’이 될 수 없으며, 수학처럼 추상적 논리만으로 법이 체계화되고 안정화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슈미트 연구자로부터 ‘구체적 질서’론은 경관법(景観法)의 문제와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이나 강 등의 자연 경관에 어울린 시가지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과 적합하지 않고 오히려 파괴하는 건물을 거기에 만드는 것은, 설령 민법상의 권리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허용되는가를 생각할 때, ‘구체적 질서’론이 살아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Q : 켈젠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지만, 모두가 사회계약적으로 합의해서 영(0)에서 결정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군요. 


A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합의에 의해, 어떤 질서에서도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대전제입니다. 


 아까 얘기한 낭만파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을 다시 뒤집은 것이, 슈미트 자신의 ‘질서’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낭만파는 ‘민족’과 ‘역사’를 버추얼화하고, 자신들의 시작(詩作)의 도구로서 자의적으로 이용합니다. 그에 반해 그 자신은 버크, 드 메스트르, 보날에 의거해, ‘실재하는 민족’, ‘실재의 역사’에 입각해 사고하려고 합니다. 그런 발상이 ‘구체적 질서’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는 일반적으로 ‘결단주의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단주의’라고 말하면, 영(0)에서 어떤 것에서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결단’한다는 듯이 다뤄지기에, 켈젠의 ‘근본규범’론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정말로 무(無) 속에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질서’를 지향하는 결단인 것 같습니다. 



Q : 그런 흐름에서 듣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구체적 질서론과 결단주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상반되는 듯합니다. 구체적 질서론은 주체가 선택한다는 이미지가 아니죠. 


A : 슈미트 속에서도 ‘결단’과 ‘질서’의 관계는 꽤 변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만, 아마도 구체적 질서는 ‘있다’지만, 확실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있었다’지만, 무너져버렸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것을 재발견하고, “이것이 질서다!”라고 ‘결단’하고 ‘질서’를 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이데거와 같은 느낌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존재 자체로부터의 요청에 의해, 본래적 존재방식으로 [나아가려고] “각오하게 만드는 entschlossen” 상태에 있지만, 보통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기투 entwerfen’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입니다. 슈미트에게도 그와 같은, 스스로가 본래 속해 있는 ‘질서’를, ≪주체≫적으로 선택한다는 발상이 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상이한 수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고 있기에, 신비적인 분위기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슈미트가 좌파계열의 ‘결단주의’의 화신이라고 말해야 할 조르주 소렐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소렐은 기성의 부패한 질서를 파괴하는, ‘신화’에 이끌려진 ‘폭력’을 찬양한 것인데요, 슈미트는 신학적 차원으로까지 파고든 ‘결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렐처럼 좌파의 혁명론도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 메스트르, 보날은 가톨릭적 질서를 지키는 방향으로 ‘결단’한 반면, 그것을 일단 파괴하고 새로운 신화적 질서를 지키는 방향으로 ‘결단’하고자 했습니다.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적이지만 ‘앗, 들켜버렸네’라는 것입니다. 



Q : ‘구체적 질서’도 낭만주의의 세계관처럼 있지도 않은 이상이라는 건가요? 


A :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슈미트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죠. 그는 가톨릭적 질서에 상당하는 것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으며, 스스로가 의거하는 ‘질서’를, 적어도 가톨릭 → 독일민족 → 유럽공법공동체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정말로는, 구체적 질서 따위는 더 이상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억지를 부리는 사유의 경로를 밟았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텍스트가 재미있는 것은, 슈미트의 낭만주의에 대한 거센 비판을 보면, 같은 비판이 버크, 드 메스트르, 그리고 슈미트 자신에게도 되돌아오지 않느냐라는 의문이 솟구치는 대목입니다. 슈미트는 열심히, 보수주의자들의 ‘민족’이나 ‘역사’에는 실재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가톨릭 신자도, 낭만주의자도 아닌, 제3자적인 입장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말도 수상쩍다고 생각되죠. 자신들도 한 패거리 아닌가라는 불안이 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헐뜯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슈미트의 ‘결단’에도, 더 이상 의거해야 할 것이 정말로는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Q : 하이데거와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이데거도 대상이, 신에서 민족 같은 것으로 옮겨간 것 아니냐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질서란, 하이데거의 ‘민족’과 가깝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지역적 한정성 같은 것인가요?


A : 30년대 중반 이후의 하이데거는 민족의 존재의 기반으로서의 ‘조국 Vaterland’에 매달리게 됩니다. 수립된 ‘조국’에 의해, 구체적으로는, 시인에 의해 발견된 본래의 ‘언어’에 의해, 사람들의 존재와의 관계맺음 방식이 규정되게 됩니다. 그의 발상은 확실히 ‘구체적 질서’에 가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철학자이기에, 그가 의거한 기반으로서의 ‘조국’을, 횔덜린(1770-1834)의 이 또한 추상적인 시에 기대어 꽤 추상적으로밖에는 얘기하지 않았고, 현실의 독일과는 다른 것이라는 변명이 되지만, 법학자인 슈미트는 현실에 존재하는 법제도에 입각해 논의를 전개하기에, 그 나름의 구체성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앞서 말씀드렸듯이, 슈미트의 ‘질서’의 기본단위는 시기에 따라 변동합니다. 



Q : 슈미트는 바이마르 시기에, 구체적인 법과 정치적으로 관련된 작업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일은 지역적으로 문화의 변주(variation)가 크죠. 특히 북부와 남부에서. 이것을 묶은 총결산의 시기가 바이마르 시기라고 한다면, 슈미트도 너무 고생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구체적 질서’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A : 독일은 통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독일제국이 되어서도 복잡한 연방제를 채택했죠. 가톨릭은 전체 인구의 1/3 정도로, 2/3은 개신교 계열입니다. 가톨릭의 대부분은 남부에 살고 있습니다만, 슈미트 자신은 독일 북서쪽의 베스트팔렌 주의 외진 가톨릭 지역[플레텐베르크] 출신입니다. 가톨릭 계열의 정치신학자를 전체 독일적인 질서의 기반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산출할 것이라고 기대를 받았으나, 처음부터 혼란의 연속으로, 불안정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로, 의회 내의 군소정당 난립과, 극좌 및 극우에 의한 공화국 전복의 시도, 중앙정부와 주정부의 대립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힌덴부르크(Paul Ludwig von Beneckendorf und von Hindenburg, 1847-1934) 아래에서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1879-1969)이 총리를 지내던 1932년 7월, 중앙정부와 사민당 계열의 프로이센 주정부가 대립하고, 중앙정부가 군사력을 배경으로 삼아 프로이센 정부를 해체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슈미트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라도 한 듯이, 일찍부터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대통령’의 (한정적인 의미에서의) ‘독재’를 기대하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헌법상 그런 역할이 부여됐던 ‘대통령’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에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치도 지지했습니다. 전후에는 유럽 전체에 있어서의 ‘대지의 노모스(법)’을 상정하고, 그것을 지키려 했습니다. 


 슈미트의 입장에서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에 버금가는, 종교와 결탁된 법·정치적 질서가 있으면 수월했겠지만, 그것이 없었기에,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1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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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1강 다섯 번째 부분









<네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Volk〉의 버추얼(virtual)성, 유동성 


슈미트는 뮐러의 ‘민족’관은 그런 슐레겔의 아이러니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83쪽에서, 1819년에 쓴 뮐러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사계절의 변화와 신의 축복을 매일 받고 있는 단순한 마을사람이나, 공동체 생활의 수수한 일원인 차분한 장인이야말로 우리의 신분과 자유를 간직하며, 유럽을 위대하게 만든 지조를 살리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귀족을 논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정치적 이유로 그는 민중(Volk*)라는 말을 피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10년 전에 그가 『국가술 원리』에서 민중 대신에 국가라 부르고, 이를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라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낭만주의적 기능은 명백하다. [『원리』에서는] 민중의 의지는 그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바로 진리에 있어서 법이며, 진리의 목소리라고 한다. … 그러나 새로운 실재로서의 ‘민족(Volk*)’과 낭만주의적 대상인 ‘민중(Volk*)’을 혼동하고, 낭만주의자를 새로운 민족 혹은 국민감정의 발견자로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실재를 너무도 빨리 낭만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예의 뮐러의 말에서 민중(Volk*)이라는 단어가 기피되고 있는 것은 특징적이나, 여기에 이미 본질적인 차이가 포함되어 있다. 즉, 낭만주의적 대상[으로서의 민중]으로부터는 혁명적 신경이 끊겨있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는 가능성의 원천이 된다는 사명을 지시하는 낭만주의적 주관을 섬기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그것은 사실상 계몽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것을 의무부여 한다. 왜냐하면 읽는 것과 쓰는 것, 또한 모든 근대적인 교양의 유혹은, 위대한 무의식이라는 것을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 ‘사계절[의 변화]과 신의 축복을 매일 받고 있는 단순한 마을사람, 평화로운 장인, 공동체의 미미한 구성원, 바로 이들이 우리의 신분과 자유를 지탱해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럽을 위대하게 만든 감정을 보존하고 있다.’ 여기서 귀족은 심지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인민people이라는 말을 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낭만주의적 기능은 일찍이 10년 전에 그가 『국가술의 기초(Elemente der Staatskunst)』에서 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명백하다. 이 책에서 그는 불가피하게도 인민 대신 국가라고 칭하고, 국가를 모든 가능성들의 궁극적 기반으로 격상시켰다. 인민의 의지는 단순히 법률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 법이며 진리의 목소리이다. … 그러나 ‘인민’이라는 새로운 실재를 낭만적 대상으로서의 ‘인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새로운 인민적 혹은 국민적 감정의 발견자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이 실재를 낭만화하려고 재빨리 시도했기 때문이다. 뮐러의 언급에서 인민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게도 기피되고 있다는 점에 본질적인 차이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즉, 혁명적 신경은 낭만적 대상으로부터 끊어져 있다. 이 대상은 지칠 줄 모르는 가능성들의 원천이라는 임무를 이 대상에 배정하는 낭만적 주체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적으로, 이것은 계몽주의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무를 갖는다. 읽기와 쓰기, 그리고 [근대적] 교양의 모든 사기술은 무의식의 방대한 영역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p.68).]



여기서 ‘국가’로 번역된 것은 〈Staat〉입니다. 1809년의 『국가술 원리 Die Elemente der Staatskunst』에서 본래 〈Volk〉라고 말해야 할 곳에서 〈Staat〉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Staat≒Volk〉를 아까의 의미에서의 ‘가능성’의 ‘근원 Urgrund’이라고 다뤘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 같네요. 


〈Volk〉를 ‘가능성의 근원’이라고 강조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하면, 〈Volk〉의 실제적 존재방식과 관계없이, 낭만주의적 이상을 내포한 집합체로 보는 것입니다. 〈Volk〉를 매체로 삼아 ≪커다란 연관≫이 무한하게 변용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출현합니다. 맨 처음의 인용 부분은 제법, 근대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농촌 공동체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는, 순수하고 소박한 〈Volk〉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네요. 그런 소박한 〈Volk〉가 내는 목소리 속에는 근대에 감염된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 Wahrheit’가 있다는 것입니다. 슐레겔도 이런 소박하고, 진리를 체감적으로 알고 있는 〈Volk〉를, 낭만주의적인 예술의 진정한 담지자라고 묘사합니다. 이런 식의 얘기는 현대일본의 문화보수적인 논의에서도 자주 나오죠. 


당연히 “그런 소박한 민중이 어디에 있어? 실제의 민중은 교활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매일의 생활에 급급하잖아!”라고 제동을 거는 사람이 나올 만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민중’은 어떤 특정한 시대, 지역에 속하는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생성하는 ‘민중’이라는 이념이야”라고 슐레겔 식으로 응수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슈미트는, 뮐러의 〈Volk〉가 그런 버추얼(virtual)성, 유동성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는 셈입니다. 


“새로운 실재로서의 ‘민족 Volk’”과 “낭만주의적인 대상인 ‘민중 Volk’”의 구별이라는 것도 좀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자의 〈Volk〉는 보날이나 드 메스트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민족’, 종교에 의해 뒷받침되어 몇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실재하고 일정한 국민성과 공공도덕을 갖춘 ‘민족’이고, 후자의 〈Volk〉는 앞서 말했던, 낭만주의적이고 버추얼화된 ‘민중’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낭만주의적인 ‘민중’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일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정치적 혁명으로 이어지는 짜릿짜릿한 긴장감은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당연히 전자를 지지하고 후자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낭만주의적, 예술적인 동경의 대상으로서 〈Volk〉와 대비시킴으로써 (슈미트의) 진정한 보수주의 계열의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Volk〉”관이 특징지어지는 셈이죠. 



국가 〈Staat ≒ Volk〉

‘가능성의 근원’으로서 본다

실재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낭만주의적인 이상을 내포한 집합체


“새로운 실재로서의 ‘민족 Volk’”

 보날이나 드 메스트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민족’, 종교에 의해 뒷받침되어 몇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실재하고 일정한 민족성이나 공공도덕을 갖춘 ‘민족’


“낭만주의적 대상인 ‘민중 Volk’”

  낭만주의적으로 버추얼화된 ‘민중’, 문학적인 상상력의 원천일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정치적 혁명으로 이어지는 짜릿한 긴장감은 갖춰져 있지 않다. 



“계몽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무로 부과한다[계몽주의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무를 갖는다]”라는 것도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이는 곧바로 뒤에 나오는, ‘독해’ 등의 ‘교양 Bildung’을 익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지식을 익히지 않고, 계몽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관에 의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셈이기 때문에, 슐레겔이나 뮐러 등의 관점에서 보면, 그 순수함을 그대로 계속 유지하는 존재라고 상정하려 합니다. 다분히 제멋대로 만들어낸 이미지네요. 서양인이 ‘동양인’을 ≪순진무구한 미개인≫으로 표상하고 싶어 하는 것을, 현대의 포스트콜로니얼계열의 논의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데, 낭만파도 ‘민중’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낭만주의는 ‘민중’과 마찬가지로 ‘아이’나 ‘미개 민족들 primitive Völker’도 버추얼화하여 표상합니다. 



아이들도 낭만주의자가 생각한 대로 다루는 이런 비합리로 넘쳐나는 지주(持主)이다. 그러나 모든 아이, ‘왜곡된, 유약한, 어리광부리는 아이들’이 아니라, 노발리스가 말하듯이 ‘어느 쪽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아이들’에 한정된다. … 아이와 같은 인류, 미개의 민족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무한한 가능성의 지주(持主)이다. 합리적인 피한국성(被限局性)과 비합리적인 가능 충일성(可能充溢性) 사이의 모순은 한정된 현실에 대해 다른 동일한 실재적(real)인, 그러나 아직 한정되지 않은 현실을 통해 대응함으로써 낭만주의적으로 제거된다. 즉, 합리적·기계화적 국가에 대해서는 아이와 같은 민중을 통해, 그 직업과 업적에 의해 이미 한계가 부여된 어른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과 시시덕거리는 아이를 통해, 고전적인 것의 명석한 윤곽에 대해서는 무한하게 다의적인 소박함을 통해 응하는 것이다. 한정이 있는 현실은 공허하며, 실현된 가능성은 꿈을 깨거나 환멸을 초래하고, 당첨되어 버린 복권이 지닌 빛바랜 우울을 수반한, ‘지나가버린 해의 달력’ 같은 것이다. 원시의 소박함은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행복한 상태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내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 어린아이들도 낭만주의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다루는 비합리로 풍부한 담지자이다. 심지어 모든 아이가 아니다. 노발리스가 말하듯이, ‘응석받이에다가 버르장머리 없고 칭얼대기만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저 ‘결정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일 뿐이다. … 어린아이와 같은 인류인 원시민족들도 이런 무제한적인 가능성들의 담지자이다. 합리적 한계설정과 비합리적 가능성들의 충만함 사이의 이런 모순은 또 다른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나 여전히 무제한적인 실재[현실]가 제한된 실재[한정된 현실, die begrenzte Wirklicheit]와 서로 싸움이 붙게 되기 때문에 낭만주의적으로 제거된다. 즉, 합리주의적, 기계화된 상태에 대해 어린아이 같은 인민이 대립한다. 또 직업과 업적에 의해 이미 제한된 어른에 대해 모든 가능성들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대립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것의 명석한 노선에 대해 그 무한한 의미에 있어서 원시적인 것[무한하게 다의적인 소박성, die unendlich vieldeutige Primitivität]이 대립한다. 제한된 실재[한정된 현실, die begrenzte Wirklicheit]는 공허하며, 실현된 가능성, 결정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환멸을 느끼고 착각에서 깨어난 그것은 당첨된 후의 복권이 지닌 빛바랜 우울melancholy을 지녔다. 그것은 ‘지나가 버린 해의 달력’이다. 원시적 순박함은 가장 행복한 상태이지만, 소극적으로만 그럴 뿐이고, 적극적인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p.69).]



사물을 합리적·기계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이 아직 작동하지 않은 ‘아이’와 ‘미개 민족들’을 죄를 모르는 존재로 아름답게 묘사하는 사상의 원점은 아마 루소(1712-78)일 거예요. 82쪽에서도, 루소가 ‘자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비합리적·감정적인 공동체로서의 〈Volk〉를 표상했다고 언급되어 있네요.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1755)에서 ‘자연상태’에 있는 ‘야생인’을, 『에밀』(1761)에서 ‘아이’를 미적으로 이상화된 모습으로 묘사하며, 그런 이미지가 낭만파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낭만파는 ‘아이’나 ‘민중’을, 자신들의 이상인, ‘무한하게 다의적인 소박성 die unendlich vieldeutige Primitivität’의 보고(寶庫)로 보는 것입니다. 무한하게 다의적이기를 계속하는 것은, 사회의 ‘현실’에 의한 ‘한정’을 겪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정’되지 않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우리는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다양한 가치관이나 라이프스타일, 공동체로의 귀속에 의한 정체성, 교육, 직업규범 등을 익히고, ‘자기’를 고정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정화된, 혹은 더 부정적인 말투로 하면, 경직된 ‘자기’의 존재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따분합니다. 하지만 어엿한 어른은 그 지루함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낭만파는 ‘한정된 어떤 현실 die begrenzte Wirklicheit’은 공허하다고 단언합니다. 규정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상황을 지향합니다. 그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헤겔은 비판한 것이며, 슈미트도 그런 관점에서의 낭만파 비판을 계승한 것입니다. 


85쪽을 보십시오. ‘민중’과 나란히 또 다른 근대의 ‘데미우르고스’로서의 ‘역사’를 낭만주의가 어떻게 다뤘는가가 논해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데미우르고스의 또 다른 하나, 역사도, 마찬가지로 낭만적으로 이용된다. 순간순간에 시간은 인간을 한정하고, 가장 강대한 의지도 제약한다. 모든 순간은 이렇게 압도적인, 비합리적인, 유령 같은 현상이 된다. 그것은 죽어갈 무수한 가능성의 끊임없는 부정이다. 그 힘을 피해서 낭만주의자는 역사 속으로 도망친다. 

[* 두 개의 새로운 데미우르고스 중 두 번째인 역사는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매 순간마다 시간은 인간존재를 한정하며 가장 강력한 인간 의지도 제약한다. 그 결과 매 순간은 압도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유령과도 같은 사건이 된다. 그것은 그것이 파괴하는 무수한 가능성들의 항상-현재적이고 끊임없는 부정이다. 그 힘의 면전에서 낭만주의자는 역사에 굴복한다(p.69).] 



순간순간에 시간이 인간을 한정한다는 것은 알겠죠.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시간의 작용에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수한 가능성이 조금씩 소멸하고, 나는 한정된 존재가 되어갑니다. “압도적인, 비합리적인, 유령과도 같은”의 “유령과도 같은”의 원어는 〈gespenstig〉입니다. 독일어의 〈Gespenst〉에는 ‘유령’ 또는 ‘요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시가와 씨는 가능성이 부정된다는 것 때문에 ‘유령’이라는 말을 택한 것 같은데요, ‘압도적, 비합리 …’라는 연결을 놓고 보면, 오히려 ‘요괴’가 낫지 않은가 저는 생각합니다. 각 ‘순간’이 괴물처럼 문답무용으로, 저를 압도하고, 점점 제가 원치 않은 쪽으로 저를 몰고 간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라면 그런 시간의 작용을 받아들일 터지만, 낭만주의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역사’로 도피합니다. 



과거는 현재의 부정이다. 현재가 부정된 가능성이라 한다면, 과거에 있어서 이 부정은 다시 부정되고, 제약은 지양된다. 과거의 사실은 현실적인 것의 존재성Seinsqualität des Wirklichen을 띠고, 구체적·실재적이며, 변덕스러운 공상이 아니지만, 그래도 실존하는 개인으로서의 낭만주의자를 모든 순간에 압박하는 현재의 실재의 가열참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런 한에서는 동시에 실재이기도 하며 비실재이기도 하며, 해석이나 종합이나 구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손안에서 빼앗을 수 있는 누락된 시간이다. 공간적으로 빨리 분리된 실재 또한, 현재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마찬가지로 이용된다. 

[* 과거는 현재의 부정이다. 현재가 부정된 가능성이었다면, 과거에 있어서 [이런] 부정은 또 다시 부정되고, 한계설정[제약]은 무화[지양]된다. 지나간 사실은 실재[현실]적인 것의 존재성Seinsqualität des Wirklichen을 띠고, 구체적·실재[현실]적이며, 변덕스러운 공상[capricious poetry]이 아니다. 그렇지만 매 순간에 낭만주의자를 실존하는 개인으로서 억누르는 현재적 실재의 주제넘음[가열참, obtrusiveness]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한에서 이것은 실재인 동시에 비실재이다. 또한 이것은 해석되고 결합되고 구성[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기막히게 형상화하는 데 착수할 수 있는 응고된 시간이다[It is congealed time with which one can undertake to make marvelous figures].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는 실재는 현재의 실재[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길로 사용될 수 있다(pp.69-70).]



앞서 봤듯이, ‘현재 die Gegenwart’는 무한한 ‘가능성’의 ‘부정’인데, ‘과거 Vergangenheit’는 그 ‘현재’를 ‘부정’하고, ‘부정의 부정’이라는 형태로 ‘제약’을 ‘지양 aufheben’합니다. ‘지양’이란 헤겔의 용어로, 대립을 이 대립보다 높은 차원에서 해소한다는 것이죠. ‘과거’가 ‘현재’의 ‘부정’이라는 말은 조금 알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것은 ‘과거’에는 현재, 이미 부정되고 있는 ‘가능성’이 아직 ≪있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겁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능성’이 늘어납니다. ‘아이’나 ‘미개민족’이 갖고 있는 듯한 것을, ≪우리≫도 ‘과거’에는 갖고 있었을 겁니다. 


낭만파는 이렇게 해서 ‘상상력’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입니다. 뭔가 ‘공상’ 같지만, 낭만파도 전혀 근거 없는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에 대한 기록이나 기억에 의지하여 재현합니다. 〈Dichtung〉이라는 독일어는 구어로는 ‘만든 얘기’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만, 본래의 의미는 ‘시작(詩作)’입니다. ‘과거’의 ‘사실’은, 단순한 ‘허구’만이 아니라, 일정한 ‘현실성’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것의 존재성 Seinsqualität des Wirklichen”입니다. 〈Seinsqualität〉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존재의 질’입니다. ‘존재’의 방식에 강함 혹은 등급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떤 사건 혹은 사물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파악할 때에,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존재의 질”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는 나름대로의 ‘실재성’이 있지만, ‘현재’만큼의 압박감은 없으며, 주체에 의한 일정한 ‘해석 deuen’, ‘종합 kombinieren’, ‘구성 konstruieren’을 허용합니다. 거기에 낭만주의적 상상을 작동시킬, 새로 만들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렇게 ‘역사’를 이용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용 verwerten’인 것이지 역사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서, 실제로는 어떤지 분명히 확인할 수 없기에, 버추얼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86쪽의 마지막 단락부터 87쪽에 걸쳐, 그런 낭만주의적인 ≪떨어져 있는 것≫의 미화가 어떤 곳에 이르게 되는가가 상당히 신랄한 느낌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낭만주의자에게 원시적인 착한 인간에 관한 관념, 원-민족(原民族), 빛의 아이들, 진정한 사제직, 시원의 인류 및 고대의 높은 자연적 지혜 등에 관한 관념은 낭만주의자 자신의 것이었다. 또 그것은 현대에 관한 낭만주의적인 비판과 자주 결부되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낙원에 관한 신비주의적 관념과 낭만주의적 관념은 여전히 달랐다. 플라톤적 및 그노시스파적인 이념도, 전통주의적 논증도,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인 시각을 위해 이용됐다. 과거는 현재의 보다 나은 기초로서 등장했으며, 현재는 또 다시 과거의 기생물(parasit, 파라지트)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보다 나은 시대의 과실에 의해 여전히 살고 있다’(노발리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자산을 탕진한다’(뮐러). 이 경우 낭만적이란 단순히 과거를 현실의 부정으로서, 구체적으로 실제로 있는 실재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로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적인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낭만주의자는 허무로 달아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재를 추구하지만, 그저 실제로 있는 것과는 다른 별개의 실재를 추구하는 것이다.

[* 낭만주의자가 자연적으로 선량한 인간이라는 관념, 원민족, 빛의 자손, 진정한 사제직, 최초의 인류, 고상하고 자연적인 고대적 지혜와 얼마나 친숙한가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이것이 현재에 관한 이들의 낭만적 비판[ihre romantische Kritik der Gegenwart]과 얼마나 종종 연결되는가와 무관하게,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종교적 혹은 신비적 관념은 낭만적 관념과 여전히 다르다. 종교적이고 신비적 관념들, 그노시스적 관념들, 뿐만 아니라 전통주의적 논점들도 낭만적 태도에 봉사하도록 끌어들여졌다. 과거는 현재의 더 나은 기반처럼 보인다. 심지어 현재는 과거의 기생물이 된다.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시대의 과실로 먹고 산다’(노발리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자산을 탕진하고 있다’(뮐러). 이런 경우 낭만적인 것은 과거를 현재의 부정으로서 사용할 뿐이며, 구체적이고 현재적인[현존적인] 실재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로서 사용할 뿐이다. 이것은 불교적 방식으로 체험되지 않는다[This is not experienced in a Buddhist fashion]. 낭만주의자는 무(無)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구체적 실재를 추구하지만, 그 실재는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pp.70-71).]

[옮긴이 : 불교 관련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어판의 신뢰도도 떨어지는 편이다.]



여기서도 자세하게 말하면, ‘기생물 Parasit’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독일어의 발음으로 하면 ‘파라지트’라고 하는 편이 옳을 거예요. 


낭만파는 시원의 상태에서의 ‘원-민족 Urvolk’적인 사람들을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이네요. ‘참된 사제직 das reine Priestertum’이란 ‘신’과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네요. 


“그들의 현대에 관한 낭만주의적 비판”이라는 표현은 알기 어렵습니다만, 이것은 번역이 곤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어로는 〈ihre romantische Kritik der Gegenwart〉입니다. ‘현대’가 아니라 ‘현재 Gegenwart’이며, ‘그들의’는 ‘비판’에 걸립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그들의 현대’라는 시대가 상정되는 듯이 들리지만, 그렇지 않으며, ‘현재’를 그들(=낭만주의자들)이 ‘낭만주의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한 낭만주의적인 ‘현재’ 비판”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원민족’이라든가 ‘빛의 아이들’, ‘시원의 인류 die Menschheit’는 성서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네요. 다만, 이것들은 신비주의적인 ‘잃어버린 낙원’의 관념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신비주의가 그런 ‘잃어버린 낙원’을 신비적인 의례를 통해 부활시키려고 한 반면, 낭만파는 단순히 ‘현재’ 비판을 위해 ‘이용’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노시스’란 3세기부터 4세기에 걸쳐 지중해지역에 퍼진, 물질과 영혼의 이원론을 특징으로 하고, 진정한 ‘자기’에 관한 인식(그노시스)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사상입니다. 낭만파는 ‘원민족’적인 것에 관한 플라톤, 그노시스, 혹은 전통주의의 논의 등, 다양하고 상이한 계보의 담론을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표면적으로 이것들과 비슷한 대목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다르다는 것을 슈미트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낭만파가 그렇게 생생한 원천으로서 ‘과거’를 표상했던 것은 “구체적으로 실제로 있는 실재 die konkrete gegenwärtige Realität”를 감옥처럼 느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렇게 ‘현재’를 ‘감옥’처럼 보고 탈출하려 하는 태도는 불교와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상당히 의문이 드네요. ‘해탈’ 얘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 후에 말한 것은 아닐 겁니다. 


88쪽부터 90쪽까지, 슐레겔의 사상의 핵심어인 ‘아이러니’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해설되어 있네요. 슈미트가, 90쪽에 나오는 자기풍자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사유의 대상을 제3자처럼 떨어진 곳에서 보는 것이 ‘아이러니’의 본질이기에, 본래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사유의 주체인 ‘자기’(나) 자신을 아이러니하게 봐야 하지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낭만주의자는 실제로는 자기풍자(Selbstironie)를 피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풍자 속에 있는 객관화, 주관주의적 환상의 마지막 잔재의 포기라는 것은 낭만적인 입장을 위태롭게 할 것이며, 낭만주의자는 낭만주의자인 한에서 본능적으로 이런 포기는 피한다. 그 아이러니의 공격 목표는 주관에서는 더 이상 없고 주관에 관련되지 않는 객관적 실재였다. 다만 아이러니는 실재를 말살하는 게 아니라, 실재적인 존재의 성질을 보존하면서도 주관에 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이것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보다 높은 진정한 실재에 대한 요구는 이것에 의해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두 가지 뜻에 걸친 입장에 낭만주의적인 태도는 오랫동안 머물 수 없다. 

[* 자기-아이러니 속에 놓여 있는 객관화, 주관주의적 환상의 마지막 자취마저 포기하는 것은 낭만적인 상황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낭만주의자는 그가 낭만적인 한에서, 이를 본능적으로 피한다. 그의 아이러니의 표적은 분명히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 실재이다. 주체를 보지 못하는 객관적 실재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실재를 파괴하기로 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실재적 존재의 성질을 간직하면서 아이러니는 방책으로서의 주체에게 이용 가능하도록 실재를 만들기로 되어 있으며, 또한 주체가 그 어떤 명확한 태도(position)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식으로 더 높고 진정한 실재에 대한 요구는 포기되지 않는다. 물론, 낭만주의적 주체는 이런 애매한 태도를 오랫동안 견지할 수 없다(p.73).]



“자기의 아이러니 속에 있는 객체화=주관주의적 환상의 마지막 잔재의 포기”라는 것은 조금 어렵겠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을 정말로 아이러니하게 바라본다면, 주관을 뺀 채 자기를 객관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자기를 객관시한다면, 주관주의적인 환상(subjektivistische Illusion)에 몸을 맡길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환상이라는 것을 ≪객관시≫한다면, 환상의 효과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아이러니는 피합니다. 


그래서 ‘주관=자기’가 아니라 ‘주관’에서 멀리 떨어진 객관적 실재, 예를 들어 ‘민족’이라든가 ‘역사’를 아이러니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만, 아이러니가 너무 효과를 내게 한 나머지 (자신의 상상 속에서 구성된) ‘민족’이라든가 ‘역사’의 실재성마저도 부정해 버린다면, 이번에는 낭만주의적인 상상을 발휘할 대상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핵심들에 있을 터인 ‘실재적 존재의 (성)질 Qualität realen Seins’은 건드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러니’는 상상력을 발휘할 계기가 됩니다만, 아이러니를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면, 상상력의 원천이 고갈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주관, 객관 둘 다, ≪스스로≫ 발판이 되지 않습니다. 낭만주의적인 아이러니는 그런 모순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주의적 유보가 귀결되는 곳은, 낭만주의는 그것이 추구하는 실재를 자기 안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세계사의 발전과정에서도, 그리고 또한 낭만주의적인 한에서, 낡은 형이상학의 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동경은 채워질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의 도움을 받아 그는 개별 실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관이 자기방어하기 위한 무기에 불과했다. 실재 자체는 주관적으로는 획득할 수 없다. 

[* 주관주의적 유보의 결과는 낭만주의자가 추구하는 실재를 자기 자신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세계사의 전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은 그가 낭만주의적인 채로 있는 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실재에 대한 갈망은 충족되어야 했다. 아이러니의 도움을 받아, 그는 유일한 실재에 맞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는 주체[주관]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무기에 불과했다. 실재 자체는 주관주의적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p.73).] 



즉, 아이러니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나’가, 모종의 ≪실재≫에 근접할 수 있고, 환멸하지 않도록 ‘나’를 방어하는 기능을 할 뿐, 모종의 ≪참된 실재≫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참된 실재≫에 대한 동경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아이러니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슈미트에 따르면, ≪참된 실재≫를 요구하면서도, 거기에서 정말로 도달하려 하지 않는 낭만주의는, 세계의 전부를, 비현실적인 ‘구성물 Konstruktion’,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할 수 있는 ‘형상 Figur’으로 다룹니다. 이 때문에 모든 ≪사물≫이 자의적으로 결부됩니다. 93쪽부터 94쪽까지의 대목을 보십시오. 



모든 것은 점으로 축소된다. 한계 혹은 한정을 의미한다고 해서, 낭만주의자가 그렇게도 거부하는 정의는, 여기서는 내용 없는 점이 된다. 정신이란 … 종교란 … 도덕이란 … 지식이란 … 감각이란 … 동물이란 … 식물이란 … 機智란 … 우아미란 … 초월적이란 … 소박함이란 … 아이러니란 … 모든 대상을 하나의 점으로 귀착시키려 하는 충동은, ‘~에 다름 아닌にほかならぬ’ nichts anderes als라는 말에 의한 무수한 설명이 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뭔가 특별하게 강조된 개념적 한정을 포함하는 게 아니라, 한 점에 응집되는 필연적 동일 판단 apodiktische Identifikation인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아담 뮐러는 모든 사람을 능가하고 있다. 최고의 미는 … ~에 다름 아니며 … 예술은 … ~에 다름 아니며 …화폐는 …~에 다름 아니며 … 통속이란 … ~에 다름 아니며 …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에 다름 아니며 … 적극과 소극은 …~에 다름 아니며 … 전체 세계는 다름 아니라 그것에 다름 아니다 Die ganze Welt ist nichts anderes als nichts anderes. 

[* 모든 것은 점으로 축소된다. 한계설정과 제한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낭만주의자들이 그토록 완벽하게 거부했던 정의는 실체 없는 구두점이 된다. 정신은 … 종교는 … 도덕은 … 지식은 … 감각은 … 동물은 … 식물은 … 재치는 … 매력은 … 초월론적인 것은 … 순박한 것은 … 아이러니는 …. 모든 대상을 하나의 점으로 환원시키려는 충동은 ‘~에 다름 아닌’nichts anderes als이라는 말처럼 사물에 대한 셀 수 없는 설명 속에서 강화된다. 그것은 특별하게 강조된 개념적 한정[한계설정]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점으로 결정화하는 필연적 동일판단 apodiktische Identifikation이다. 여기서 아담 뮐러는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한다. 가장 숭고한 미는 … 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 에 다름 아니다. 화폐는 …에 다름 아니다. 통속[인기]이란 … 에 다름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분리[괴리]는 …에 다름 아니다. 적극과 소극은 …에 다름 아니다. 전체 세계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것에 다름 아니다 Die ganze Welt ist nichts anderes als nichts anderes(pp.75-76)]



낭만파가 ‘정의’를 ‘제약[한계설정]’으로 보고 싫어한다는 얘기는 이미 나왔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사물을 말에 의해 ‘형상’화하고 미적으로 만지작거리려 합니다. 그래서 정의도 비슷한 것을 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정신이란 … 종교란 …”과 “…”을 연결하고 있는 의미를 알기 어렵네요. 원문도 〈Geist ist … Religion ist …〉와 점을 연결하고 있을 뿐, 독일어를 읽어도, 낭만파의 말투를 어느 정도 모르면, 무순 말인지 감이 오지 않을 겁니다. 


이런 “…”은 ‘정의’라고는 말할 수 없는 막연한 형태로 ≪정의≫하는, 그런 사물의 특징이 되고 그런 말을 고를 수 있고 “…이다”라고 잠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이라면, ‘정신이란 인간의 보다 본질적인 부분이다’라든가, ‘정신이란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라든가, ‘정신은 신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느낌으로, ‘정신’의 ≪본질≫의 기술합니다. 당연히 그런 느낌이라고, 거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말을 연결하게 됩니다. ‘정신이란 종교의 원천이다’라고 말한다면, 다음은 ‘종교란 …’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연상 게임처럼 “…”이 명확하지 않게 연결되어 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정의’하고 체계적으로 전개한다면, 어떤 곳으로 수렴되거나 어느 정도 예측이 되지만, 하나하나의 말이 독자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점처럼 되어 있고, 점과 점이 닥치는 대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고 수렴되지 않습니다. 〈apodiktisch〉는 처음부터 절대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다는 의미의 형용사로, 철학용어로는 ‘필연·당연적[必当然的]’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뮐러는 그런 말투의 ≪명인≫으로, “~는 ~에 다름없다 nichts anderes als”라는 단언적 표현의 수사학적인 효과를 이용했다는 것이죠. 


낭만파는 그렇게 해서 “a는 b이고 … b는 c이고 …”라는 느낌으로 말을 이어나가고, “무한한 생성”을 상징적으로 연출합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계열의 논의에서는 평가받고 있습니다만, 헤겔이나 슈미트는 그것을 척박하다고 보는 셈입니다. 


97쪽부터 2장 2절이 시작됩니다. “낭만주의의 우인론[기회원인론]적 구조”라는 제목이 붙어 있네요. 다음 번에는 여기부터 시작합시다. 낭만주의는 이 세계가 필연성의 법칙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연쇄로 계속 생성하고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는 얘깁니다. 이를 바탕으로 3장에서, 책 제목인 ‘정치적 낭만주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게 됩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칼 슈미트 입문 강의], 1강 네 번째 부분









<세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국가’와 ‘국민’의 창조 


하시가와 씨는 〈Nation〉을 ‘국가’라고 번역합니다만, 현재에는 ‘국민’이라고 번역하거나, ‘네이션’이라고 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국가’는 〈Staat〉의 번역어로 한다는 것이 정착되어 있습니다. 〈Nation〉은 언어와 종교, 정치적 의식을 핵으로 하는 문화공동체이고, 〈Staat〉는 통치기구로서의 국가를 가리킵니다. 


“국민이라는 형태에 있어서의 새로운 실재의 용인(인식) die Anerkennung der neuen Realität in der Form der Nation”이 뭔 말인지 딱 하고 와 닿지 않을 수 있으나, 여기서 ‘국민’이라는 개념이 근대의 것임을 상기해 주십시오. 근대 이전에는 ‘국민’이라는 의식은 명확하지 않았으며, 민중에게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군주가 누구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자신이 ‘국민’이라는 집합체에 속해 있음을 의식하게 돼서야 비로소 외국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에 대해 저항감을 깨닫게 되는 셈입니다. 유럽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국민’ 의식이 확산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라고 합니다.


보날은 앞서 말한 대응관계론을, 전통적인 왕제주의와 귀족정치를 잘 보여주기 위해 전개하는 것인데요, 거기에다 ‘국민’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고 있습니다. 그는 ‘국민’이라는 실재를 직시해야 한다는 사상을 품었던 것입니다. 자코뱅파는 사회계약에 의해 결합된 ‘민중’을 실체로 간주하고 일ㄹ 신과 비슷한 위치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이런 것에 반대하는 보날도 ‘국민’을 실체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드 메스트르의 경우에도 이 실재의 승인은 마찬가지로 명확했다. 버크 및 보날과 마찬가지로, 그는 거듭거듭 개개인이 아무것도 창출하지(schaffen) 못하고 단순히 뭔가를 ‘만들’(machen)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법이나 헌법이나 언어는 인간 공동체의 생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국민은 원래부터 신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의 논증을 더 정밀하게 본다면, 그것이 결정적인 요점이다. 블라카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논증의 진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종교 없이 공중도덕과 국민적 성격은 없고, 기독교 없이 유럽적 (!) 종교도 없다. 가톨리시즘 없이 기독교도 없으며, 교황 없이 가톨리시즘도 없다.’ … 기독교는 유럽적 종교로 간주되며 … 교황제는 국민적 성격에 있어서 결여돼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적법화되며, 가톨릭은 프랑스의 국민적 요소로 여겨지며, 또한 한 국가에 제한된 경우는 종교의 실제적 효과는 경험상 발견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국교로서는 부정된다. 국가(nation)는 가톨리시즘[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지향]을 방기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국민 자체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 드 메스트르의 경우에도 이런 실재의 승인은 마찬가지로 실정적이다. 버크 및 보날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개인이 아무것도 창출할(schaffen) 수 없고 그저 어떤 것을 ‘제조할’(machen) 수 있을 뿐인 반면, 법, 헌법, 언어는 인간사회의 산물임을 거듭 강조한다. 물론 국민은 신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의 논점을 좀 더 꼼꼼하게 검토하면, [다음과 같은] 이것이 결정적인 요점이다. 블라카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논점의 진수를 다음과 같은 용어로 요약했다. ‘종교 없이 공중도덕이나 국민적 성격은 없다. 기독교 없이 유럽적 (!) 종교도 없다. 가톨리시즘 없이 기독교도 없다. 교황 없이 가톨리시즘도 없다.’ … 기독교는 유럽적 종교가 된다. 교황제papacy는 국민적 성격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덕분에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가톨리시즘은 프랑스의 국민적 요소이며, 하나의 국가에 제한된다면 종교의 실천적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주기 때문에 국가 종교로서는 부정될 뿐이다. 국민(nation)은 프랑스식 가톨리시즘Gallic Catholicism을 단념해야 하지만, 이는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pp.60-61).]



독일어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schaffen〉과 〈machen〉은 둘 다 ‘만들다’라는 의미이며, 엄밀하게 구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schaffen〉에는 ‘창조하다’나 ‘제작하다’ 같은 예술적 의미가 있으며,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할 때 〈schaffen〉을 씁니다. 〈machen〉은 ‘만들다’라는 의미 말고도 영어의 〈do〉에 해당하는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의문문은 〈Was machen Sie?〉입니다. 그리고 인용부의 문장도 프랑스어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블라카 백작(Pierre Louis Jean Casimir de Blacas, 1771-1839)은 반혁명군에서 활동하고, 루이18세(1755-1824)의 왕정복고기에 장관과 외교관을 지낸 귀족입니다. 


‘법’, ‘국제=헌법 Verfassung’, ‘언어’는 인간 공동체 = ‘국민 Nation’의 산물이지만, 그 ‘국민’은 ‘신’에 의해 ‘창출’됐다는 것이 (슈미트가 기술하는) 드 메스트르의 논의의 요점입니다. 이 경우 “신에 의해 창출”됐다는 것은 신이 전체 인류의 창조주라는 함의뿐 아니라, 교황제를 수반한 교회의 영향·교화 아래서 각각의 ‘국민’의 ‘국민성 caractère national’이나 ‘공공 도덕 morale publique’이 형성된다고 하는 사회이론적인 것도 함의합니다. 드 메스트르 등은 ‘국민’이라는 새롭게 발견된 ‘실재’를 가톨릭적 관점에서 새롭게 의미부여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국민’ 형성에 불가결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내셔널리즘의 시대가 돼서 나온 새로운 주장입니다. 


‘갈리카니슴 gallicanisme’ ― 언어학적으로 세밀하게 말하면, 영어의 〈gallicanism〉은 〈~주의〉와 헷갈릴 수 있지만, 프랑스어의 〈gallicanisme〉은 헷갈리지 않습니다 ― 이란 프랑스 특유의 가톨릭교회 체제를 가리킵니다.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지도 아래에 있는 교회라기보다는 국왕을 섬기는 국가기관의 일부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 국교화됐다고 합니다. 루이14세(1638-1715)의 궁정설교사로 ‘왕권신수설’을 설파한 장 보댕(1627-1704)에 의해 이 노선이 명확해졌다고 합니다. 


드 메스트르는 ‘갈리카니슴’이라고 하면, 가톨릭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교황제가 누락되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 국민’을 위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갈리카니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한 거예요. 


74쪽에서 초월신을 대신한 (〈Gemeinschaft〉와 나란히) 또 다른 초개인적인 실재, 새로운 조물주(Demiurg)로서 ‘역사 Geschichte’가 상정되기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네요. 〈Demiurg〉란 그리스어의 ‘데미우르고스 demiurgos’의 독일어형으로, 원래는 ‘장인’의 의미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이데아계를 모방해 이 물질세계를 만든 조물주로서 등장합니다. 


‘역사’는 ‘진보’라는 관점에서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는 일도 있으나, 그 반대로 그때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오랜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유기적 실체로서의 ‘민족 Volk’의 관점에서 ‘혁명’에 제동을 걸기 위해 이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독일어의 〈Volk〉는 원래 단순히 ‘민중’이라는 의미밖에는 없었습니다만 ― 영어의 〈folk dance〉라든가 〈folklore〉의 〈folk〉와 어원이 같습니다 ― 19세기 이후 한편으로는 정치적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민’,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인 문화·관습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는 양의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말입니다. 


〈Volk〉와 〈Nation〉은 의미가 겹치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Nation〉이 라틴어 어원의 말로,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당시 프랑스어의 〈nation〉이 프랑스인의 정치적 주체성, 자유로운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사용됐던 적도 있고, 민중의 정치적 의식의 존재방식을 강하게 함의하는,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뉘앙스가 강해졌던 반면, (‘민족’이라는 의미에서의) 〈Volk〉는 일반인들의 전통적 생활방식이라든가, 오랜 기간에 걸친 관습에 기반하여 ― 많은 경우 본인들이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자연히 몸에 붙인 ― 공동성이라는 뉘앙스로 사용됐습니다. 맑스주의적인 〈Volk(인민)〉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활의 실감에 기반한 ‘공동체’죠. 


75쪽부터 76쪽에 걸쳐 반혁명=보수진영에 의한 ‘민족=국민’의 의미부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지속을 따르려 하는 것이 그대로 보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논의이다. 지속적 존립만이 모든 사태에 이유를 부여하고, 장기성longum tempus이 그대로 궁극적 근거이다. 종교의 국가에 있어서의 의미는 귀족의 가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국가에 지속성을, 따라서 또한 처음으로 실재성을 부여한다는 것 속에 존재한다. 

[* 지속에 대한 호소는 수용된 보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논점이다. 연속적 지속의 조건만이 모든 사태를 정당화한다. 태곳적 시간 자체는 권리의 궁극적 토대이다. 국가의 경우, 종교와 귀족 가문이라는 양자의 중요성은, 이것들이 국가에 지속을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국가가 그 실재를 획득하기 때문이다(p.62).] 


보날은 ‘실재는 역사 속에 있다’고 말한다. 버크도 세대를 넘어서 지속하는 영속적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재삼재사 논급하고, 분할세습 농지의 정당화의 근거를 그것이 국가 존속의 기초라는 것 속에서 발견하고, 수도원의 토지소유의 그것을 장기간의 전망을 요구하는 원대한 계획을 가능케 하는 것 속에서 본다. 

[* 그리고 보날은 실재가 역사 속에 있다고 말한다. 버크도 세대를 넘어 확장되는 지속적인 공동체로서의 국민의 성격에 관해 거듭 암시했다. 버크는 국가의 지속이 세습entailments에 의존한다는 사실에서 세습의 정당화를 찾아낸다. 또 교회의 재산소유가 오랫동안 설명해야만 했던 선견지명이 있는 계획들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교회의 재산소유의 정당화를 찾아낸다(p.63).]



약간 헷갈립니다만, 처음의 ‘국가’는 〈Staat〉이고, 나중에 나오는 ‘국가’는 〈Nation〉입니다. “세대를 넘어 지속되는 영속적 공동체”로서의 ‘국민=민족’이 정치에 지속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종교’가 뒷받침한다는 구도죠. 버크, 보날, 드 메스트르 같은 보수주의 진영의 논객들은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된 공동체인 ‘국민=민족’이 그 지속성과 질서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종교’와의 결탁 덕분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와 전통을 파괴하는 ‘아나키’한 혁명세력에 이론적으로 대항하려 했던 셈입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모든 사태에 이유를 부여하고”에서 “이유부여”의 원어는 영어의 〈justify〉에 해당하는 〈rechtfertigen〉이라는 동사로, 정확하게는 ‘정당화’라고 번역돼야 해요. 그 뒤의 ‘궁극의 근거’라는 대목은 〈der letzte Grund〉이며, ‘법’ 또는 ‘옳음’을 의미하는 〈Recht〉이 들어 있기에 ‘정당성의 궁극적 근거’ 혹은 ‘궁극적인 법적 근거’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습니다. 



슈미트의 낭만주의관 54


이렇게 해서 ‘공동체’와 ‘역사’가 보수주의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한 뒤, 이것들을 낭만주의자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차이를 강조하는 형태로, 슈미트 식의 낭만주의관을 전개합니다. 80쪽을 보십시오. 



18세기 말, 이 낭만주의적 세대는 특히 곤란한 상황에 있었다. 그들 앞에는 고전적인 업적을 이룩했던 한 세대가 있었는데, 그 대표자인 괴테에 대해 그들은 흥분한 경이의 열광을 바치는 것 이외에 아무런 창조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의 업적은 비평과 성격묘사(하라크테리스티크*)였다. 그것 이상의 것을 원한다고 했을 경우, 그것은 모두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돌한 계획과 대담한 예고를 행하고, 암시를 하거나 기대하게 하거나, 그 약속의 실현을 기대하면 다시 새로운 예고에 의해 응하고, 예술에서 철학으로, 역사로, 정치학으로, 신학으로 후퇴했으나, 그러나 그들이 현실에 대해 설정한 엄청난 가능성은 결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이런 곤란을 낭만주의적으로 해결하려면 가능성을 더 높은 범주로 설정하면 된다. 세계를 창조하는 자아의 역할을 일상의 현실 속에서 수행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영원의 생성과 결코 완결하지 않은 가능성을, 그들은 구체적 현실의 제약성보다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현되는 것은 분명히 단순히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이며, 실현의 순간에 그 밖의 모든 무한한 가능성은 차단[除権]präkludieen되고, 하나의 세계가 편협한 현실 때문에 망가지며, ‘관념[이념]의 충만함’이 비참한 결정성의 희생물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모든 말해진 말은 이 때문에 이미 진실이 아니며, 한계 없는 사상을 한계짓는 것이다. 모든 정의는 죽임의 기계론적인 것이며, 그것은 무한한 생명을 한정한다. 모든 논증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유라는 것도 또한 한계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 18세기 말, 낭만주의적 세대는 특히 곤란한 상황에 있었다. 그들은 고전적인 업적을 이룩한 한 세대와 대면했다. 이 세대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인 괴테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이 보여줬던 유일한 생산성이란 존경과 강렬한 열광뿐이었다. 이들의 산출물은 비평과 성격 묘사의 영역에 놓여 있었다. 이것 너머에 있다고 하는 이들의 모든 허세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었다. 이들은 당돌한 계획과 대담한 약속을 했다. 넌지시 시사했고 전도유망하다고 했다. 이들이 한 약속이 실현되기를 한껏 기대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약속으로 응답했다. 이들은 예술에서 철학, 역사, 정치, 신학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이들이 실재[현실]에 대립시켰던 엄청난 가능성들은 결코 실재[현실]가 되지 못했다. 이런 난점에 대한 낭만적 해법은 가능성을 더 높은 범주로 재현/표상하는 데 있다. 평범한 실재[현실]에서는, 낭만주의자들은 세계를 창조하는 자아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들은 구체적 실재[현실]의 제약성으로 결코 소모되지 않는 영원한 생성과 가능성들의 상태를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무수한 가능성들 중 하나만이 실현될 뿐이기 때문이다. 실현의 순간에는, 다른 모든 무한한 가능성들이 미리 차단된다. 하나의 세계는 편협한 실재[현실] 때문에 파괴된다. ‘관념의 충만함’은 비참한 특정성[구체성]에 희생된다. 결국 모든 말해진 말은 이미 허위이다. 이는 무제약적 사유를 제한한다. 모든 정의는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것이다. 이것은 무한정한 생명을 한정한다(define). 모든 정초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정초와 더불어, 한계 또한 항상 주어지기 때문이다(p.66).]



처음에 자세하게 말해두면, ‘성격 묘사 Charakteristik’에 ‘하라크테리스티크’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은 아마 실수일 것이며, ‘카라크테리스티크’라고 해야 할 곳입니다. 독일어에서는 〈-ch〉라는 철자는 기본적으로 ‘하’ 혹은 ‘히’로 들리는 마찰음으로 발음하지만, 독일어에서 〈Charakteristik〉는 프랑스를 경유해 들어온 외국어이기에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k〉음이 됩니다. 


독일문학·사상사를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요점은 괴테 등의 직전 세대, 고전주의의 세대가 독일문학의 기본적 스타일을 확립하고 대단한 작품을 많은 산출했으며, [낭만주의자들은*]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을 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피히테의 지식학을 넘어서는 것을 내놓기가 어려웠던 셈입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처럼 괴테의 작품에 ‘비평’을 가하고 ‘비평’을 독립된 장르로 삼고자 한 사람도 있었는데요, 짓궂은 시각에서 보면, ‘비평’이라는 것은 제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역시 ‘작품’ 본체에 기생하는 것이며, ‘위대한 작품’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묘사’란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비평적인 관점에서 묘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도 그 등장인물을 재현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위대한 작품이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하려고 해도, 좀체 떠오르지 않기에, 일단은 “이런 대단한 일을 하겠어!”라는 선언을 내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전망이 있는 게 아니라, 아주 막연한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처음에는 기대를 모을지도 모르지만, 곧바로 “그건 어떻게 됐어?”라고 질문을 받습니다. 대답하지 못하면, 공중을 실망시키고, 관심을 끌지 못하므로, “아니, 당신들이 기대하는 상식적인 방식으로 현실화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우리의 인식 방법을 근본부터 변혁하는 방식으로 …”라는 식으로, 더 새롭게 호언장담하는 선언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비평’의 대상영역도, “예술에서 철학으로, 역사로, 정치학으로, 신학으로”라는 식으로 바뀝니다.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네요(웃음). 그보다는 논단의 세계에서 자주 듣는 얘기네요. 


물론 확신이 없는 데도 호언장담이나 일삼고, 나중에 얘기의 초점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하고, 논점이 흔들리는 놈이라고 낙인 찍혀 버리면,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논단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냅니다. ‘가능성’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인식 가능한 형태로 현실화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넘어선 메타 수준에서 나타난다. 즉, 개별 구체적인 것만을 보고 있는 한, ≪현실을 초월한 것=무한한 것≫(=가능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사물 사이의 시간적 생성변화나 사물들 사이의 직접·간접의 무한한 다양한 수준의 연결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세계를 포괄하는 ≪커다란 연관≫이 보이게 된다. 그 연관 속에 ≪무한한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출현 방식은 무한하게 다양합니다. 우리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항상 보이는, 그런 ≪커다란 연관≫의 일단을, 상상력을 구사해 파악하는 것을, 낭만주의적인 예술의 목표라고 설정하는 셈입니다. 각자의 자아는 그런 ≪커다란 연관≫을 쫓아다니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표상’하는 것을 통해, 세계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초기 낭만파 자신의 용어로는 ‘발전적 보편성 포에지 eine progressive Universalpoesie’라든가 ‘초월론적 포에지 Transzendentalpoesie’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의 〈Poesie〉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문학’, ‘시작(詩作)’뿐 아니라 포이에시스(창작 또는 산출) 작용 일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어의 〈poiesis〉의 원뜻은 ‘만들기’네요. 뭔가 초월론적인 이념을 중심으로 세계 전체를 휘감아 넣는 오토포이에시스(자기산출운동)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런 식으로 메타이론적인 설정을 해두면, “이것이야말로 이상이 현실화된 형태다!”라고 말하며, 구체적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어집니다. 오히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대상에 집착하고, 그것이야말로 ‘현실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면, 무한한 것의 생성운동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한한 가능성 unzählige Möglichkeiten” 안의 하나만을 ‘실현 realisieren’한다면, 그 ‘실현의 순간 im Augenblick der Realisierung’, 그 밖의 다른 모든 가능성은 ‘차단[除権]=배제 präkludieren’되는 셈입니다. 달리 말하면, 말로 사물을 ‘정의 definieren’하려 들면, ‘한계 없는 사상’이 ‘한계지어’지며, 죽어버리게 됩니다. 〈definieren〉이라는 동사의 〈-fini-〉라는 부분은 프랑스어로 ‘유한한’이나 ‘끝나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바탕에 있는 명사 〈fin〉은 ‘끝’ 또는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의하다’라는 것은 마침표를 찍어 ‘끝을 내다’, ‘한계짓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슐레겔이나 노발리스는 사물을 한정=유한화하여 인식하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생성하는 커다란 연관을 메타 수준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합니다. 무한한 것을 시야에 넣기 때문에,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이 슐레겔의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에 있어서는 주체와 객체 둘 다가 계속 변용하며, 어딘가에서 고정화되지 않습니다. 슐레겔의 [아이러니 → 무한한 생성]론은, 동시대인인 헤겔(1770-1831)의 변증법과 대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처음의 막연했던 무규정적인 것이 이성에 의한 규정=부정을 겪고, ‘현존재[定在] Dasein’가 되는 것, ‘정신’이 현실화해가는 것을 긍정적으로positive 평가하는 것인데, 슐레겔의 아이러니는 사물을 규정하고 왜소화시켜 버리는 이성의 작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무한정한 채로 계속 생성하는 오토포이에시스에 눈을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실의 고정화를 거부하고, 무한한 생성에 눈을 돌리는 초기 낭만파의 예술론은, 포스트모던계의 예술론, 특히 동일성으로 회수되지 않은 ‘차이 différence’의 운동을 축으로 전개하는 데리다와 들뢰즈(1925-95)의 그것과 통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실제로 데리다는 이런 관점에서 초기 낭만파를 평가했습니다. 이런 것은 『근대의 갈등(モデルネの葛藤)』에서 꽤 자세하게 논했습니다. 그런 포스트모던과의 친연성이 발견됐기에, 1980년대부터 독일 낭만파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된 것입니다. 다만,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포스트모던 사상이 겪고 있는 비판을 낭만파도 받기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낭만파의 운동이 시작된 이래, 동일한 비판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반복되고 있는 비판을 요약한다면, “당신은 무한의 생성이라든가 중지상태 등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런 비평을 하고 있는 당신 자신이 서 있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딘가 특정한 지점에 서 있지 않으면, 원래 아무런 인식도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건데? 당신 자신이 사물을 한정하고, 이성적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 쓰는 것에는 아무런 정당화의 근거도 없지 않은가? 당신은 자기 자신의 담론,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되겠죠.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얘기네요. 좀 더 투박하게 요약하면, 현실에서 벗어나 있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슐레겔 등과 동시대에, 이런 수법을 사용해 비판을 전개한 선봉장이 헤겔입니다. 『정신현상학』(1807)에는 분명히 슐레겔이나 노발리스를 염두에 두고, 낭만파의 정신의 불안정성을 야유하는 대목이 있으며, 슈미트의 동시대인인 맑스주의 미학자 루카치(1885-1971)도 낭만파의 현실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슈미트도 헤겔=맑스적인 낭만주의 비판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그는 초기 낭만파의 예술론의 발상법을 적확하게 이해한 뒤에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지 못한 채로 현실 이탈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이지만, 포스트모던 계열의 초기 낭만파 재평가의 실마리가 된 벤야민의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의 개념』도 1919년에, 그의 박사논문으로 집필됐습니다. 책으로 간행된 것은 이듬해인 20년입니다. 벤야민은 초기 낭만파의 무한한 생성론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것을, 슈미트는 낭만파의 이론적 얄팍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180도 반대로 평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도 벤야민이 슈미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지닌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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