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제3. 다중의 삶인 정치 : 스피노자를 둘러싼 항쟁

 들뢰즈의 혁명 혐오 : ‘쾌활한 비관주의’ / 스피노자의 물리학적보수주의 / 기억을 잃은 알튀세르 / 인과성에서 자유인 국가 형성 / 국가 형성과 혁명을 같게하는 정치 / 정치에 작용하는 스피노자적 인과성을 찾아서 / 국가는 비이성적 존재이다 / 그러나 계약 개념의 부재는? / 유일한 원인으로서의 분노’ / 민주주의란 린치이다 / 결과를 인과에 내재시키는 스피노자주의 / 표현과 인과성 의미가 초래하는 지복과 곤혹 / 알튀세르의 장치’ / 결과이고 원인인 나 / 도덕과 착종하다 / ‘가 거울을 깬다 : 희망

 

 

들뢰즈의 혁명 혐오 : ‘쾌활한 비관주의

685월은 순수한 사건에 속한다. 어떤 통상적인, 혹은 규범적인 인과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건이다. 많은 선동, 시위행동, 발언, 어리석은 짓거리, ‘68환상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간파된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가 사회에 포함되도록 허용할 수 없는 곳을 돌연 간파했던 것 같으며, 다른 것의 가능성까지 내다봤던 듯했다. 그것은 가능한 것을! 아니면 나는 질식해 버린다라는 형식의 집단현상이었다. 가능한 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문제이다. 사건이 새로운 생활을 창조하는 것이며, 사건이 새로운 주체성(신체, 시간, , 환경, 문화, 노동 등등에 대한 새로운 관계)만들어내는 것이다. 사회의 전환이 출현할 때, 그 결말이나 효과를,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인과성의 선을 따라서 긋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주체성에 대응하는 집단적 배치를 사회가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의 전환을 바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가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68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 p.215-216 강조는 인용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68년에 관해 한 말이다. 역사에 있어서 예외로 혁명이라는 사건을 생각한 알튀세르, 혁명의 그 예외성을 주체의 특이성에 귀속시킨 네그리, 그리고 결정 불가능한 사건과의 관계에서 주체인 존재를 정의했던 바디우가 형성하는 정치철학의 진영에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름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인과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따라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식이 누락된 사건으로서 685월을 말하고, 그 사건성은 무엇보다 주체의 존재방식에 관련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텍스트에서도, 다른 텍스트에서도, 네그리나 바디우와 나란히 685월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주체가 혁명을 수행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네그리처럼은. 주체는 혁명 앞에 끌려나오며, 혁명을 취급하는한에서 주체인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았다. 알튀세르처럼은. 심지어 저자들은, 어떠한 결단도 혁명을 앞에 둔 주체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바디우처럼은. 그저 사건이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건의 주어는 어디까지나 사회이며, 텍스트 전체를 더욱 주의 깊게 읽어보면, 685월이 혁명이었다는 얘기는 사실상 한 마디도 쓰여 있지 않다. 몇 가지 역사상의 혁명에 비견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건은 전환’(mutation 또는 reconversion)으로 위치지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적인 것을 갈망하던 그 사건은, 따라서 그 주어인 사회도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능적인 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비로소 창조되는것이다. 두 사람의 다른 텍스트를 원용한다면, 사건이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묘하게 다의적인 순간”(안티 오이디푸스, p.453-454)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지배계급의 교체 같은 무엇인가 하나의 가능적인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은, 그들에게는 사건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건에 있어서는, 거의 가능성이 되는 것 자체가 열려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부터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어떤 플랜을 따라,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기획만큼, 들뢰즈와 인연이 먼 것은 없다”(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p.335). 하지만 들뢰즈는 동시에 인간에게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으로 되는 것 속에 있다. 그것만이 치욕을 풀고, 허용[용서]하기 힘든 것에 응할 수 있다”(기호와 사건, p.231)고도 말했기 때문에,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의 정치사상을, 어떠한 정치 강령[프로그램]도 수반하지 않는 극좌주의라고 정의내리게 된다(p.335). 어떤 인과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곳에서, 따라서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발생하지만, 모든 가능적인 것을 창출하고, 인간의 주체성, 삶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사건. 블랑키의 기술에 의해서도, 레닌의 실천에 의해서도, 결코 기도[기획]되었던 것처럼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들을 비롯한 인간이 혁명적이 되기를 통해 산출되고, 그들의 기도를 넘어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사건.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옳을까? 무목적인 한에서, 목적이라는 것을 무화하는 듯한 심도를 가진 사건은, 과연 혁명인 것일까? 그것이 도래하지 않으면 가능성이라는 것의 새로운 주체성도 생기지 않지만, 그것이 도래하는 장인 사회 이외에서는 주어를 갖지 않은 사건은, 커다란 사고와 본성에 있어서 바뀌는 것이 있을까?

그래도 들뢰즈는 혁명적이 되기가 인간에게 유일한 기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은, 조화로 귀결되는 사회의 자연적 힘(자기조직화하는 능력)을 믿는 무정부주의이기는커녕, 혼탁 자체를 무조건 찬미하는 악마적 극좌주의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는 정말로, 바더 마인호프 갱(서독 적군파의 속칭)마저 옹호하는 기색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가 가능성의 모태로서의 혼탁과 역사의 엎치락뒤치락[순식간의 변화, 卓袱台返(ちゃぶだい)같은 파국에 대해 낭만주의적인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상태, 모든 가능성이 소진되는 것이야말로, 베케트론 소진한 것(1992)에서 들뢰즈가 긍정했던 격렬한 스피노자주의”(p.57)이며, 파국이나 혼탁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여전히 생겨나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혁명적으로 되는노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는 한순간의 승리를 구가할 수 있더라도 반드시 실패로 끝나는 것이 혁명의 숙명이며, 그것을 알면서도, 혹은 걸핏하면 잊는 능력을 갖추고, 몇 번이나 혁명적으로 되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다. 최후는 피곤하기는커녕 생명을 소진하여 웅크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야말로, 그는 혁명적으로 되기의 극점을 본다. 때문에 들뢰즈적인 정치를 체현하는 인물상은, ‘무에의 의지에 의해 세계를 파괴하는 허무적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의지의 무속으로 자기 소멸하는 바틀비(허먼 멜빌의 소설 속에서 문자 그대로 스스로 죽는[자기를 죽이는] 주인공)이며, 들뢰즈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쾌활한 비관주의라는 것이다(들뢰즈와 네그리, 두 개의 사고).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 따르면.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 비판자가 아니다. 그는 20대에 들뢰즈 철학의 전체를 두루 살펴본 책을 저술한 철학도이다. 그의 들뢰즈 : 하나의 사건의 철학(1994)은 압축적이지만, 에세이도 아니고 들뢰즈의 OO”론도 아닌 포괄적 연구서이며, 거기서의 저자의 노력 일체는, 들뢰즈의 주요 개념 사이에 정확한 관계맺음을 행하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다방면에 걸친 들뢰즈의 저작군이 전체로서 하나의 커다란 혼돈을 이루고 있는 것만큼, 주라비슈빌리가 이 소책자에서 보여준 뛰어난 솜씨는, 많은 들뢰지안을 놀라게 하고, 경외심을 품게 만들기조차 했다. 태연하게 그리고 무모하게 도전하여 성공한, 웬 젊은이! 가타리에 이어서 들뢰즈가 작고한 뒤에는, 들뢰즈를 올바르게 계승한 철학자로서, 그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그 때문에, 어떤 정치 강령도 거부하는 초ultra-비관주의에서 들뢰즈적 정치의 진면목을 보고 있는, 들뢰즈 추도 콜로키움(1996)에서의 그의 발표 논고(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들뢰지안들 사이에서 조용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 무렵 이미, 프랑스에서의 정치적 들뢰즈=가타리파는, ‘이론적 낙관주의를 거리낌 없이 공언한 네그리의 주변에 거의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라비슈빌리가 말하는 들뢰즈적 무의지주의involontarisme[비자발주의]’, 네그리적 낙관주의나 의지주의volontarisme[자발주의]와는 정반대인 듯이 보인다. 들뢰즈에게 정치 프로그램이 부재하다고 승인하는 것은, “다중의 주문을 아무리 읊어봤자 그로부터 그 어떤 정치적 정의로도 이행하지 않는다”(들뢰즈, 바틀비, 그리고 문학적인 상투어, p.202)고 들뢰즈=네그리를 야유한 바디우=랑시에르에 굴복하는 것 아닌가? 물론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적인 정치전략으로 ‘도착이나 탈주선을 거론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것들도 혁명의 관념이 지닌 전적으로 전복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도착탈주도 적의 의표를 찌르는, 어딘가 숨겨진 꽃의 전략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들뢰즈는 685월을 무조건 옹호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개량주의자일 수밖에 없는가? [칼을] 크게 휘두르며 혁명적으로 되기뒤에서 작은 실리를 몰래 챙기는 것이 들뢰즈적 정치인가? 적어도, ‘도착perversion’이냐 전복subversion’이냐는, 정치노선으로서는 작은 분기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물리학적보수주의

무의지주의로 귀착되는 격렬한 스피노자주의에서 들뢰즈의 정치철학의 기저 내지 근본 윤리를 발견하고, 뭘 하든 쓰잘데기 없다는 비관주의의 토대 위에서 겨우 가능한 전략으로서 도착이나 탈주선을 추구하는 자세는, 그러나 어쩌면, 인간적 세계는 최종 심급에서 완전’, ‘최선으로 향하고 있다는 믿음의 물구나무 세우기일지도 모른다. 혁명을 하다 실패하지만, 무엇을 기도하더라도 계획에서 벗어날 터이지만, 인간은 결과적으로, 편협하고 억압적인 공동성을 서서히 해체, 해소하여 보다 큰 공동성으로 대체하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통치라는 절대민주주의에 도달할 때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영원히 혁명적으로 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낙관주의가, ‘쾌활한 비관주의의 이면에는 들러붙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맑스주의의 소박한 생산력 사관(史觀)과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윤리를 합체해 생산력의 형이상학을 표방하는 네그리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라비슈빌리를 설득할 것이다. 하지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를 이렇게 세계관의 수준에서 다투게 하면, 바로 예상할 수 있듯이, 논란에 어느 정도 철학적 개념을 동원할 뿐 불모의 탁상공론으로 끝난다. 싸우는[다투는] 것은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본윤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비관주의자, 나는 낙관주의자”, 그렇게 확인하고 끝나버린다. 이런 논의는 그 자체에 있어서 반정치적, 반윤리적이기도 할 것이다. 상대에게 작별을 고하고 무대에서 내려와 버리기 때문이다. 뒤에 남는 것은, 정치 내지 윤리는 사고의 이름에 값하지 않는다고 제3자에게 알리는 효과뿐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라비슈빌리는 확신하는 듯하다. “가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p.4) 개념의 정의를 엄격하게 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자며 재차 양해를 구하고, 그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논하는 자신의 책에 스피노자의 역설적 보수주의라는 도발적 제목을 붙였다. 들뢰즈의 비관주의의 뿌리가 되었던 스피노자의 비관주의를 주제로 삼기로 선택한 것이다. 엄격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은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개념이다. 그도 인용하듯이(ibid.),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대중의 개입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형[변혁] 행위의 기초로 삼으며, 스피노자에게 진리란 자유, 변형[변혁], 해방이다”(야생의 별종, p.30, 218). 네그리가 그려낸 스피노자에서는 일관되게, 사람이든 국가든 개체가 그 정체성을 집단적으로 바꾸는 것이 정치이며, 그런 정치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절대민주주의 즉 공산주의의 원리다 을 향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진리 자체이다. 스피노자적 변형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주라비슈빌리는 곡해라고 잘라 말하면서 배격한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변형이란 신의 육화신이 그리스도라는 인간이 되는 로 대표되는 신비주의적 미신에 불괴하며, 그것 때문에 연금술 등이라는 사기를 낳아버린 오류에 불과하다. 화학적 현상에 대해서도 물리학적 접근법을 관철시키려고 한 스피노자에게 ‘본질’(개체의 동일성)무모순율’(A이자 비A인 것은 없다)의 지평은 절대적이며, 변화나 변질의 현상에 관해 이 지평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 것, 말해야 할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 그렇기는커녕, 개체의 성질들은 고사하고 개체를 개체로서 성립시키는 본질을 바꾸는 (다른 개체로 하는) ‘변형’ 따위는 비논리 자체이며, 이성의 파산[파탄]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요컨대 주라비슈빌리는, 네그리적인 변형윤리학이 규정하는 욕망cupiditas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ibid.). 그래도 그는, 말하자면 스피노자에게는 없는 술어로서 스피노자 윤리학에 변형을 도입하며, 그 전체를 네그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네그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질문으로 열어둔 채, 그는 어디까지나 스피노자의 물리학주의에서 끌어내지는 정치에 다가서려고 한다(그는 스피노자 : 사고의 물리학이라는 또 다른 스피노자론을 썼다). 이것이 비관주의이며 역설적 보수주의이다.

물론,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는자기보존의 본능의 범위 내에서, 양태적 개체가 얼마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는, 스피노자가 스스로 떠맡을 문제이다. 국가에는 전제(군주정)도 과두제(귀족정)도 민주제도 있을 수 있다. 국가를 형성하는 어떻게 할 것인가는 우선 빼놓고 멀티튜드 또한, 국가에 관용을 요구할 수도 있다면, 거꾸로 어리석은 폭도가 되어 관용적인 위정자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가권력imperium은 국가권력이며, 멀티튜드는 한 명의 인간에게 작동하는 정동(감정[정서])affect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고 아무것도 끌어들이지 않는 정념적passionnel 집합체이다. 한 명의 인간이 갖지 않는, 집단으로서의 멀티튜드만이 갖는 정념 따위는 없다. 국가, 멀티튜드, 개인, 이것들 중 무엇에 있어서도, 각각의 개체적 본질에는 약간의 변형도 있을 수 없다. 멀티튜드는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는개인의 보수주의를 전체로서 조금도 해치지 않기 때문에, 설령 국가를 형성하더라도, 국가가 정하는 법권리로부터 개인이 사실로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아무것도 빼내지 못한다. 권리=.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이 스피노자의 반계약주의 힘의 양도 계약에 의한 국가형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론 ― 이다. 그렇다면 왜 멀티튜드는 국가를 형성하고, ‘본질의 분할이나 이양이 있을 수 있다는 듯이, ‘육화에 의한 변형같은 미망을 낳아버리는 듯한, 일종의 자기 이중화, 이원화를 행하는 것일까?

윤리학을 참조하는 한, 이 이중화 자체가 착각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든 국가든,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그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 부분들이 자신의 운동을, 일정한 관계를 따라 서로 소통시키는”(IV-39)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으로부터 국가로는, ‘여러 부분들과 그것들 상호간의 일정한 관계’, ‘소통중첩[포개짐], 뒤얽힌 위계가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신체를 형성하는 여러 부분들의 합성체이며, 국가는 그런 우리들의 합성체이다. 물론 나의 여러 부분들은 다른 누군가의 여러 부분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인물들끼리의 합성체(가족과 같은)라고 부를 수는 없는 여러 부분들끼리의 합성체(시장과 같은)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 실체의 관점에서는, 멀티튜드의 자기 이중화로서의 국가 형성은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을 써서 계약에 의한 국가형성을 인정하는 듯한 행태를 보여주고, 심지어 그 후에 쓴 정치론에서는 계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한 대목의 예외를 빼고)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개인들의 합의에 의한 국가 형성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었을까? 이때, 국가는 없으면 곤란한,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듯한 공리주의를, 스피노자의 정동[정서] 물리학에 도입해도 좋을까? 이것도 오늘날에는 잘 알려진 스피노자 정치론에 관련되는 난문이다.

 

기억을 잃은 멀티튜드

이것에 대한 주라비슈빌리의 해답은, 훌륭하면서도 맥 빠지는 격이다. 국가란 멀티튜드이다(때문에 어디까지나 권리=힘이다). 하지만 자신이 멀티튜드라는 것을 잊은 멀티튜드이다. 무슨 말인가?

국가를 만드는 것은 자유로운 멀티튜드이지만, 사람들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은, 전제에서 해방되었을 때나 출애굽기 같은 압정에서 도망칠 때이며, 이를테면 자연상태로 돌아간 순간이다. 이때 사람들은 권력의 공백을 체험한다. 자연상태의 정확한 정의는, 그 전의 상태를 결여하는 것이며, 해방된 멀티튜드는 국가의 바로 앞에서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시원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자유로운 멀티튜드는 곧 기억이 없고, 갓난아기 같은 존재이다. 해방되고 자유로워짐으로써, 멀티튜드는 억압된 시대의 기억을 집단으로서 잃어버린다. 철저한 유물론자인 스피노자에게서는 신체를 결여한 기억이 있을 수 없다. 기억은 신체의 반복적 작동, 관습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때문에 권력이 흩어져 사라진다, 국가(하나의 집단적 신체)를 잃는다는 것은 공통관습을 잃는 집단적 망각의 경험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어떠한 국가의 법에 의해서도 결합되지 못했다. 그들은 그 때문에, 기쁘게도 새로운 법률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새로운 권리를 구성하고,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신학정치론, V-3)

이전의 상태를 결여한 멀티튜드가 만들어낸 국가는, 무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멀티튜드의 힘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은, 구성과정 속에는 없기때문이다. 이 국가의 권리, 국가권력imperium은 무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거기서는 권리=이다. 그리고 멀티튜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룰 권리를 실제로 지닌 국가는,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전제적monarchique이다. 최초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전제국가에 다름없다. 심지어 권리를 구별하지 않는 구성된 권력은 자신의 유래인 자유로운 멀티튜드의 힘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그의 puissance’은 모조리 권리droits’로서 권력pouvoir’(법률lois) 속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상태(권력의 무)에서의 권력의 구성에 있어서는 권력을 구성하는 것이 이며, 최초의 국가imperium를 출현시키는 자유로운 멀티튜드, 힘과 권리와 권력의 이러한 무분할성, 일원성을 군주monarque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에 반해 다른 국가 형식에 익숙한 멀티튜드는 국가를 붕괴시킬 위험 없이는, 국가 전체의 관습적 기초를 무너뜨리고 전체 구조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정치론, VII-2). ‘익숙한[친숙한]멀티튜드는, , 국가의 기억을 습관 속에, 습관으로서 보존하고 있는 멀티튜드는, ‘혁명적 멀티튜드가 될 수 있다. 억압의 기억의 축적이, 그들을 혁명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분노로 미친 그들은 국가 자체를 거꾸러뜨리고폭도를 진압하는 압제자tyran를 등장시켜 버릴 것이다. 혁명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관주의는, 크롬웰의 혁명이나 데 비트 형제의 학살(스피노자를 비호했던 홀랜드 공화국의 정치지도자. 대영국 관계에 있어서의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폭도에 의해 학살되었다)로부터 그가 배운 역사적 교훈이다.

기억을 잃은 갓난아이로서의 멀티튜드만이, 군주정 국가를 기꺼이/기쁘게만들고 권력의 출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자유로우며, 민중의 힘을 없애지도 억누르지도 않는 국가를 만들 수 있다.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적인 어른의 국가를. ‘자유로운 멀티튜드에 의한 국가의 형성이란 따라서, 갓난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성장임에는 틀림없지만, 여기서 돌이켜보면, 이 성장과정에는 어른의 아이로의 생성이라는 정반대의 계기가 두 개 포함되어 있다. 우선, 기존의 국가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상태로 돌아가고, 통치받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 국가에 의해 시달린 어른은, 우선 갓난아이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의 군주를 선택함으로써, ‘권력의 출신, 즉 다수자(멀티튜드)을 잊어버렸다는 것. ‘어른의 국가를 만들든 바로 그때에는, 자신이 갓난아이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갓난아이처럼 잊어버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국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어른의 국가를 만드는 것에 의해서도, ‘자유로운 멀티튜드는 기억이 없는 갓난아이가 된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기억이다. ‘자유로운 멀티튜드와 전제국가는, 이리하여 갓난아이어른교차배열chiasme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 구분되지 않는 교차 속에 틀어박힌다. 해를 거듭할 때마다 자신의 청춘기로, 심지어 유년기로 회귀하는 헤겔의 인간과는 달리, 스피노자의 인간들은, 나이가 들어 성숙하려면, 태어난 순간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른으로의 생성과 아이로의 생성을 직접 무매개적으로 일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주라비슈빌리가 말하는 스피노자의 역설적 보수주의이다. 윤리학은 그것을, 스페인의 어떤 시인의 모습으로 예시하고 있다.

[교차배열chiasme] 메를로-퐁티의 용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서로 가역적으로 침식하는 상태.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용어. 

(변화의 전후에) 그것이 동일한 인간이라고는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변화를 인간이 겪는 경우가 있다. 내가 들었던 스페인의 시인의 얘기인데, 그는 병에 걸려서 병이 나았는데도 과거의 생활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자신이 과거에 썼던 소설이나 비극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모어까지 잊어버린 어른 유아와 같은 것이다. (4권 정리39 보론)

 

전제국가를 만듦으로써, ‘자유로운 멀티튜드는 정말로 동일한 인간이라고는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변화를 이룰 것이다. 한 명의 군주를 지도자로 받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의 병에서 치유되었다. 어른 지도자 아래서 평온하게 어른으로 살아감으로써, 그들은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있다. 신생아로서 국가를 다시 살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다시라는 것을 잊고 있다.

 

인과성에서 자유’로운 국가형성

이것은 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이론이 되고 있을까? 분명, 국가의 형성을 하나의 역설로서 제시하고 있다. “어른 유아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분명히, 국가란 본질적으로 보수적임을 밝히고 있다. 형성된 국가는 우선, 자연상태에서의 멀티튜드가 갖고 있는 힘을 지키기 위해, 그 역설에 적극적으로 죽치고 앉아 있으려 한다. ‘어른 아이, 법을 만들어 놓으면서, 법에 국가의 기억을 축적시키는 것에는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역설을 보수하는 곤란이 법을 둘러싼 다툼을 발생시키고, 군주를 멀티튜드로부터 이반시키고(권력과 권리의 분열), 결국 과두제 지배에 의한 권력의 분립이라는 타협을 초래하지만, 귀족계급의 성립은, 계급분열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낳고, 이 투쟁은 민주제를 필연화한다. 스피노자는, 이 형성 변화의 과정에서 국가 속에서 기억될 분노’(스피노자가 싫어하는 슬픔의 정념중 으뜸가는 것), 국가 그 자체를 쓰러뜨릴 요인이라며 위험시했다. 그 때문에, 전통적인 정체론에 익숙해져, 스피노자도 세 개의 국가형식의 최적화어떻게 균형 있게 조합할 것인가 를 문제로 삼았다. ‘역설적 보수주의는 국가가 본질로서 움켜쥐는 경향과 국가론이 사고해야 할 문제를 정말이지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경향이 어른 유아를 지속시키는 곤란(순수한 기억력에 아무것도 기억시켜서는 안 된다)이며, 그 문제가, 어떻게 혁명을 피할 것인가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역설적 보수주의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존속을 둘러싼 정치일 것이다. 일단 형성된 국가의 보수주의는, ‘자기의 존재를 고집하는자기보존의 본능 자체이며, 발단의 형성이 역설적인 것은, 형성의 원인 물리학이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설의 해소라면, 무모순율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고, 성립한 역설의 유지, 자기 보존을 무모순율보다 우선시키면 설명 가능할 수 있지만, 역설의 성립에 관해 물리학, 현대적인 직관주의 이론이나 양자역학처럼, 승인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는 없다. 역설 그 자체는 무모순율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이 원리 아래서는 누구도,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어른과, 아직 어른이 아닌 아이로 동시에 될 수는 없다. 주라비슈빌리의 어른 아이국가론은, 국가형성을 원인에 의한 설명에서 해방하도록 사실상 요구하는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국가형성을, 우리가 맨 처음에 본 들뢰즈=가타리적인 의미에서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순수한 사건은 어떤 통상적인, 혹은 규범적인 인과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건이다.” 심지어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 따르면, “미래와 과거의, 능동과 수동의, 원인과 결과의 역전이 사건에서는 일어나고 있으며, 사건은 ,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 미래와 과거, 플러스와 마이너스, 여분과 불충분, ‘이미(있다)’아직(없다)’이다”(2계열, p.17-18).

국가형성을 인과적 설명에서 자유롭게 하는 구성적 보수주의’(주라비슈빌리)에서는, “실재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을 실재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 보수주의에서는, ‘지킨다라는 정치적 행위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의미를 갖게 된다. 아무리 예기치 못한 의미에서라도 말이다. , ‘창조한다’ (p.262). 이것이 스피노자의 역설적 보수주의의 문자 그대로의 맺음말이다. 그러나 창조하다 비관주의적 함의를 가질까? 국가는 창조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으며 창조적이지 않으면 유지조차 할 수 없다고, 요컨대 정치에는 아무런 처방전도 없다고 읽으면 분명히 비관주의적 울림을 갖는다. 그렇지만 멀티튜드는 실제로 국가를 만들기 때문에, 국가의 실재 그 자체가 멀티튜드의 창조성을 실증하고 있다고 읽으면, 거꾸로 낙관주의적으로 메아리치며, 이는 네그리처럼 진리란 자유, 변형[변혁], 해방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변형[변혁]이란 창조라고 재정의하면 될 뿐이다. 아무튼, 국가형성을 필연성을 결여한 사건의 하나로 간주한다면,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도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 올바른 스피노자적 정치인지는, 오히려 결정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네그리의 낙관주의가 아무리 도를 넘어서고 있든(국가의 실재가 멀티튜드의 창조성을 증명하고 있다면, 멀티튜드는 언제든 국가에게 승리를 거두며, 설령 지고 있을 때에도 이기고 있다), 그는 이론적 낙관주의에 덧붙여 실천적 비관주의도 자기 규정 속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어찌하면 좋을지 모릅니다, 창조할 수밖에 없습니다며 정직하게 고백하는 스피노자적 비관주의자일지도 모른다. 거꾸로, ‘창조하다는 것이 보수주의의 함의나 요청이라면, 주라비슈빌리의 들뢰즈적 스피노자는 무의지주의이기는커녕 극히 주의주의적이지 않을까? 논쟁은 역시, ‘가짜 논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국가형성과 혁명을 같게하는 정치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국가가 왜 존재하는가, 그 원인을 스피노자주의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가? 국가를 혁명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일반성 속에 방치해두는 것은 과연 스피노자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물리학이 어떤 인과성을 내포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사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 신 즉 자연’ ‘유일한 실체에서 출발하는 유물론의 근본적 입장이 아니었을까? 알튀세르 이후의 좌파정치철학은 스피노자적 인과성에서, 헤겔 변증법이나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맑스를 구해내는 철학적 근거[의지처]를 추구[물색]해 왔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로부터 내재적 인과성이나 구조적 인과성을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에서 시작하여(1965), 그 후 많은 스피노자 연구를 산출하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모험은, 사건에 원인은 없다쾌활하게총괄해도 상관없다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과성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는, 엄밀하게는 스피노자가 아니라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준원인이론(비물체적 사건이 다른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역설한다)이나 사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둘러싼 논의가 있으며(의미의 논리), 심지어 관계의 자율성(물체의 법칙에 대한 비의존)을 주제로 하는 흄론도 있다(경험주의와 주체성). 그리고 그의 일원론적인 자연학’(‘물리학이라고 말해도 마찬가지다)에는 라이프니츠는 물론이고, 한계효용학파의 시조이자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 원천인 제본스(S. Jevons), 네그리가 반동사상가라고 부른 베르그송이나 타르드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것이 주라비슈빌리에게는, “스피노자만으로는 안 된다고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는 그것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서, 스피노자에게는 사실상 고유하게 스피노자적인 국가론은 없다고, 혹은 국가론이란 그 자체로 가짜의’, 적어도 방계의 문제였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관주의에 의해 낙관주의와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그의 기획은, 사실상 그러한 방향으로 해석사(현재적[현실적]이고 잠재적인 논쟁사)를 유도한다. 스피노자 국가론의 한계, 알튀세르 이후의 스피노자론의 역사, 들뢰즈와 네그리가 이정표가 된 역사에 새겨 넣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끌려가고 있을 뿐이다. 사건이 통상적인 인과성을 벗어나 있다는 인식은, “우리는 늘 예외 속에 있다”, “예외가 규칙의 규칙이다라고 말한 알튀세르(1)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알튀세르도 네그리도, 이로부터, 사건에는 어떠한 원인도 없고, 따라서 사건에 대한 어떠한 주체적인 작동도 불가능하며 쓸데없다는 비관주의 세계관으로서의 정치 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건성을 전제로 가능한정치를 생각하고자 한 곳에, 그들에게서의 고유한 스피노자 문제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사건인가 아닌가는 정치문제가 아닌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엇으로 정치로 할 것인가딴 곳으로 옮기고자 한 셈이다. 이때, 우리를 출발점으로 다시 끌고 가는 주라비슈빌리의 논의는, 그러나 크게 새로운 논점을 하나 동반하고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세계관을 둘러싼 불모의 싸움으로 귀결되는 듯한 논의가, 어느새 국가형성을 혁명과 동일한 문제로 만들고 있다. 혁명의 붙잡기[포착하기] 어려움을 묻고 있다. 두 개의 붙잡기[포착하기] 어려움이 만들어내는 씨름판 위에서는, 국가를 만드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하는 혁명은 잘못이라는 (혹은 혁명은 잘못이고 국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으며, 국가와 혁명 둘 다의 필연성/우연성은 동질적이며, 똑같은 인과성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결정 불가능성이, 국가와 혁명의 사건으로서의 동질성에 자리를 내주며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정치를 윤리학의 자연학으로 해소하고 [자연학에] 흡수시킴으로써 미완의 정치론을 보완하는 문제가 아니라, 구성과 해체를 동일하게[같게]하는 동일한 원인에서 생기게 하는 인과성을 두 개의 책에서 읽어낸다는 과제가 설정된다. 정치가, 세계관으로 물든 강령이나 노선으로부터, 동일하다[마찬가지다]를 전제로 한 국가와 혁명의 사이의 동요, 이행, 진화로 이동한다. 국가와의 관계에서만 실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유지나 운영에서도 다른 형태로의 변화나 혁명도 아니고, 구성의 극과 해체의 극 사이에서 흔들리는 추로서, 정치가 재정의되는 것이다. 정치적 인과성은 추의 움직임에 작용하는 인과성으로 순화되며, 구성과 해체는 오히려 하나의 지속으로서 있는 이 동요 내지 진동 과정으로부터 추출되는, 따라서 그것에 내재하는 두 개의 극으로 재파악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건의 내부에서는 미래와 과거의, 능동과 수동의, 원인과 결과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국가형성과 혁명의 마찬가지[동일/같음]에서 출발하여 정의되는 정치는, 역전과 관련될 것이다. 혹은 사건의 성격을 서술하는 들뢰즈의 한 문장에, ‘국가형성’(구성)혁명’(해체)역전을 덧붙여, 사건의 가 아니라 과 관련되는 사고로서 스피노자 정치론을 위치시켜도 좋을 것이다. 그는 정치를 인간의 삶의 것이라고 이해하기”(정치론V-5) 때문에, 윤리학의 정동 물리학을 범사건론적인 생명의 철학으로 받아들인 후에는, 실제로, 그것을 그대로 정치화하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정치에 작용하는 스피노자적 인과성을 찾아서

그러나 이 과제는 새로운 것일까? 예를 들면 생명정치’(푸코의 것이든 네그리의 것이든)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새롭게 기대되는 탐구의 내용인 것일까? 문제를 어디까지나 정치에 특유한 인과성이라고 파악한다면, 그런 것은 아니다. 정치를 무근거라도 개의치않고 결단으로 수렴시키는 슈미트나 바디우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인과성 문제에 손을 놓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주체에 사건을 다루게 하는것을 생각한 알튀세르나, 바로 주체에 사건의 근거를 찾은/요구한 네그리에 관해서는, 특수한 인과성이 주체/객체관계 속에서 탐구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어쨌든 물리학자 스피노자에게, 변증법에서 벗어날 방법을 물색한[찾은] 것이다. 우리가 재건을 시도했던 정치철학의 계보 자체가, 이 인과성 문제를 공유함으로써 성립되며, 과제는 들뢰즈론 내지 네그리론의 최근의 전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의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일부의 아카데믹한 스피노자 연구자밖에 읽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는 최근 갑자기 언급되는 기회가 늘고 있는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고전적인 스피노자 연구,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1969), 스피노자의 정치 텍스트를 좁은 의미의 철학 텍스트에 부수하는 저작으로 간주하기를 그만둔다는 모티프 아래서 쓰여졌다. 철학의 본질은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있다고 상정하는 대가인 마르샬 게루의 데카르트적인 철학사관을 버리고, 인간과 인간관계의 정동적 구성, 즉 사회체나 국가의 분석이,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을 이룬다고 마트롱은 증명하고자 했다. 신학정치론정치론윤리학집필과정 속에 심어두고[집어넣고], 정치의 시각에서 윤리학을 이해하고자 하며, 거꾸로 윤리학에 의해 스피노자 정치론의 누락 부분을 메우려고 했다. 이 왕복운동적 독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국가공동체société politique가 개체로서 실재하는 원인에서 스피노자 특유의 인과성을 찾는 자세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 개체성은 상상적인 속임수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유일한 실체를 절대적 전제로 하는 윤리학의 존재론을 일종의 관계주의(개체적 실재성이 실체적인 것은 전체뿐이라고 하는)로 읽고, ‘계약을 포함하려 하든 포함하지 않으려고 하든 국가형성은 상상력의 범위 안에 들어가는 사태라고 (윤리학에는 확실히 상상력의 이론이 있다) 간주하는 것은 오히려 현대의 유행일지도 모른다(국민국가=상상의 공동체!). 그렇지만 그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한다면, 스피노자가 두 개의 정치논고에서 실제로 행하고 있는 정동[정서] 물리학자체를 속임수[가짜]라고 하는 논리가 필요하며, 그 논리를 따라서, 스피노자적 정치학따위는 없다고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능한가? 스피노자의 죽음에 의해 정치론이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에, 국가공동체를 둘러싼 정동 물리학은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그의 기획이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할까? 오히려 솔직히, 미완의 논고를 윤리학이나 그 밖의 저작을 채용하면서 완성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완성 가능하다면, 윤리학의 독해방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이것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기본적 질문이다.

마트롱이 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론에서 인정되는 누락윤리학3권의 인간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념에 의해 메우려는 시도이다. 여기서의 누락이란 그러나, 미완으로 끝난 정치론의 쓰여질 수 없는 최종부도, 텍스트의 도중에 남겨진 바로 눈에 띄는 누락부분도 아니고,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에 걸쳐 스피노자에게 진화가 있다고 인정했을 때 생기는, 어디까지나 문제적인 누락이다. 신학정치론에 짙게 남아 있는 국가형성을 둘러싼 홉스적인 사회계약론이, 정치론에서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피노자는 사회계약론을 의도적으로 버렸다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생기는 문제이다. 즉 계약론의 누락이라기보다,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새롭게 채택한 이론에서의 누락이다. 사회계약론이 자연상태의 인간에게 갖춰진 힘의 양도 혹은 포기의 계약에 의해 국가권력과 그 아래서의 권리의 성립을 설명한다면, 정치론의 새로운 이론은 그런 양도나 포기를 인정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의 힘이 그대로 권력, 권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 덕분에, 오늘날 잘 알려진 이론일 것이다. 그러나 네그리도, 또한 주라비슈빌리도, 거기에 누락이 있다고는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새다. <=권력=권리>말하자면 스피노자의 근본적 내지 최종적인 테제로 간주하고, 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테제를 전제로 어떠한 정치를 구상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자신들의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그렇지만 마트롱은, 출발점 내지 도달점이 <=권력=권리>였다고 해서, 스피노자가 계약론을 버림으로써 구축하고자 했던 이론은, 역시 정치론속에서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스피노자에게서의 개체와 공동체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속에서는, 그도 그것을 분명하게 누락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윤리학3권에 의해 정치론을 해석하고 있을 뿐인데, 나중에 자신의 책을 더 해석해서 누락을 강조하게 되며, 그 결과, 네그리의 자기비판을 초래한다는 사태가 되었다.

 

국가는 비이성적 존재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계약론을 버렸다고 하더라도, 왜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원인도 없는 데도 버린, 스피노자에게는 맑스처럼 그것 자체가 사건적인 인식론적 절단이 있다고 하는 설명은 결코 스피노자적이지 않다. 그의 철학은 무슨 일에서도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마트롱의 이해에 따르면, 이유는 단순하다. 계약은 이성적 행위이지만, 양태적인 정념passion’에 의해 충동질되는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다. 만일 이성이 바라는 바가 이성에 의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다면, 인간은 자연 발생적으로 합의에 이르며, 국가는 불필요할 것이다. 국가가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성에는 국가를 만드는 힘이 없다고 증명된다”(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8, p.287). 이성의 관점에서는 국가는 불필요하며, 불필요하기 때문에 이성에는 국가를 만드는 힘이 없고, 따라서 계약이 국가를 출현시키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있다고 한다면, 자연발생적이고 맹목적인 간주체적·정념적 삶작용jeu’으로부터만 생겨날 뿐인 것이다. 네그리가 구성이라고 부른 이 작용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 힘의 양도를 부정하고 권력=이라는 것을 인정했더라도, 계약론과 연이 끊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각자의 힘을 제한하지 않고 계약을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는 계약=법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네그리의 절대민주주의는 그런, 거의 있을 수 없는 계약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계약론은 권력의 유래를 말하고 정당성을 기초짓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결과 내지 목적에 의해 원인을 설명하는 편의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간주체적·정념적 삶에는 그러한, 이른바 이성이 바라는 바를 선취하는 힘은 없다. 계약론과 손을 끊기 위해서는, ‘정념의 작용으로부터만 국가를 발생시킬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멀티튜드 속에서 작동하는 간주체적 정념이란, 윤리학3권에 따르면, ‘연민’, ‘명예욕’, ‘지배욕’, ‘질투이다. 마트롱은 그러한 네 개의 정념이 타인의 정념을 서로 모방하는 간주체적 작용에 의해 사이클을 이루는 과정을 윤리학정치론을 오가면서 추적한다. 사이클의 반복에서 필연적으로 국가가 생긴다는 것의 증명이 스피노자에게는 결여되어 있다고 간주하고, 반복에 의한 국가생성을 서술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가] 찾고 있는 스피노자의 인과성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방을 통한 네 개의 정념의 순환적 반복/반복적 순환은 멀티튜드 속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포’(그것에 의해 각자가 각자의 잠재적인 적이 되는)인 동시에 마찬가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희망’(그것에 의해 각자가 각자의 잠재적인 친구가 되는)을 낳을 것이다. ‘공포희망의 병존이 멀티튜드의 힘이라는 것의 정체일 것이다. 양자의 균형이 깨지고, ‘공포분노로 전환할 때, 그들은 전쟁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전쟁상태는 만인을 똑같이 희생자로 삼는다. 그러면 다시 연민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심지어 명예욕도 작동시키고, 만인이 만인의 친구가 되는 상태에 대한 희망이 회복된다. 희망, 전쟁에 의해 입은 손해를 만인에게 보상하는 합의로 실현될 것이다. 국가의 탄생이다. 요체는, ‘희망공포로 이루어진 멀티튜드의 힘은, 그 잠재적 균형이 무너져도, 균형을 고차원에서 회복시키는 내부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하는 설명이다. 확실히, 균형을 깨는 원인도 그것을 회복시키는 원인도, 정념의 모방과정, ‘사이클속에 있다. 성립된 국가는 이 사이클에 대해 고차원 또는 그것에 위치하는 것의, 균형의 파괴에 의해 발생하는 전쟁상태는 사이클 자체의 파탄이기 때문에, 국가와 전쟁은 희망공포처럼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각각 희망공포의 현실화, 실재화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확실히, 국가의 성립이 간주체적·정념적인 삶내재한 것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이 삶의 바깥에서 이성이 진입해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계약 개념의 부재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시점(時点)에서 마트롱은 이것으로 누락은 메워졌다고, 혹은 더 이상은 메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네그리는, 말하자면 그것을 전제로, 멀티튜드의 힘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권력의 구성이라는 도식을 야생의 별종구성적 권력에서 전면 전개했다. 마트롱의 저서의 선구성을, 네그리는 몇 번이나 말하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계약론은 없다, 따라서 헤겔 같은 매개적 사고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거대한 근거를, 네그리는 마트롱에게서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극히 흥미롭게도, 네그리가 자신의 스피노자 이해에 있어서 또 다른 한 명의 선구자로 꼽고 있는 들뢰즈는, 마트롱만큼 스피노자 정치론에서 계약의 계기를 없애려고 하지는 않는다.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계약은, 이익(보다 큰 악에 대한 공포와, 보다 큰 선에 대한 희망) 외에는 원동력을 갖지 않는다”(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p.246). ‘공포희망으로부터 힘의 양도 계약인 사회계약이 맺어진다고 생각하는 들뢰즈는, 신학정치론정치론사이에 단절적 진화가 있다고 상정하지도 않는다. 마트롱과 들뢰즈의 입장은 상이한 것이다.

앞표지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트롱은 그 후, ‘공포희망의 균형이 무너지고, 회복되는 과정으로서 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이, 그것만으로는 과연 누락을 메우고 있는가라고 자문하게 된다. 들뢰즈처럼, ‘공포희망이익계산으로서 계약 개념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트롱은 정치론에서의 계약 개념의 부재에 연연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념의 사이클에 의한) 설명은, 그것대로는, 공리적 계산을 도입시킨다는 부조리를 갖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이런 종류의 계산을 필연적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스피노자의 국가에 있어서 분노와 코나투스, p.220). “어떠한 공리적 계산도 가설에서 배제한다는 것을, 나는 1969년의 시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행하지 않았다”(p.223). , 들뢰즈에게는 동의하지 않는 대신, ‘누락이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 혹은 메워진 누락과는 별개의 누락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공리적 계산에 의한, 또는 공리적 계산으로서의 계약 또한, 결과를 선취하는 이성영위에 다름없을 것이다. 아직 생기지 않은 사태(계약을 맺지 않는 것에 의한 악의 증가)를 앞질러 가서 계산에 의해서 알고 회피하는 능력은, 수동적 반응인 정념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념을 따르기 때문에, 국가공동체는 필연이다라는 정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69년의 가설로부터는, 공리적 계산의 가능성이 철저하게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정식 자체는, 말하는 바의 필연성이 어떤 필연성인가에 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공리적 계산을 배제하지 않는 다의성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필연성영국 경험론적 해석(들뢰즈와 같은?)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다의성이, 정치론에 아직 남은 누락으로서, 스피노자에게서의 개체와 공동체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 발견되었던 것이다. 마트롱의 견해는, 들뢰즈에게 동의하지 않고, 더욱이 네그리에게도, 권력의 스피노자적 구성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고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일원인으로서의 분노’ : 민주주의란 린치(lynch)이다

누락의 재발견과 동시에, 그것을 메우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메우기 위해서 마트롱은 정치론의 두 개의 항목을 대질시킨다.

 

인간은 이성보다도 정념에 의해 이끌리기 때문에, 멀티튜드가 자연스럽게 합의하고, 마치 한 사람의 인간에 의해 이끌리는 듯한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의 행동振舞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공통 정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III-9에서 제시되었듯이) 공통의 희망, 공통의 공포, 또는 공통적으로 입은 손해 복수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본성을 따라 사회상태를 원하는 것이며, 그들이 그것을 완전하게 해체하는 것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VI-1)

자연의 충동에 의해, 인간은 서로 동맹한다. 공통의 공포 때문에, 혹은 공통으로 입은 손해 복수를 하고 싶다고 원해서. (III-9)

 

일독하는 한, 완전히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 앞의 항에 의해 참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 뒤의 항이기 때문에,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앞의 항이, 인간은 정념을 따라서 필연적으로 국가를 만든다고 말하는 반면에, 뒤의 항(정치론에서의 순서로는 이것이 앞이다)은 사실상, 국가의 형성을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동맹’ligue 군주에 저항하는 동맹이며, 혁명을 위한 동맹인 것이다. ‘공포분노’(복수욕)로 전환했을 때에, 인간은 맹약을 맺고 혁명’, 즉 국가의 해체로 향한다고 역설하는 것이 III-9에 다름 아니다. 이 항은, 멀티튜드를 화나게 하면 국가는 해체되어 버린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항으로 독자를 송부함으로써 국가 형성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VI-1, 그 원인을 분노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분노이외에 혁명의 원인은 없고, ‘분노이외에 국가 형성의 원인으로서 참조되는 것은 정치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만이 누락을 최종적으로 메우는 것이라고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계약론을 완전히 버린 정치론의 이론 구성에서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과 동일한/같은 분노, 국가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한 (VI-1에서의) III-9에 대한 참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국가공동체는, 그것이 해체했던 것과 동일한/같은/마찬가지의 과정에 의해 재출현할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분노는, 그것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국가를 낳는 것이다”(스피노자의 국가에 있어서의 분노와 코나투스, p.223). 국가를 해체하고 멀티튜드를 전쟁상태로 복귀시키는, ‘공포분노로의 전화와 성장(이것을 스피노자 고유의 변형이라고 풀이하는 것에, 주라비슈빌리는 이의를 제기할까?), 국가를 형성시키고 그들을 평화상태로 이행시키기도 한다. 전쟁상태에 대한 분노가 치솟음으로써, 국가는 형성된다. 이성에 있어서는 불필요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법(“만일 이성이 바라는 바가 이성에 의해 실행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합의에 이르며, 국가는 불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할 수 있는 것’(즉 힘)에 제약을 도입하는 법은, 결국, 폭력을 본성으로 하는 정념의 그 폭주로서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폭주의 결과, 법이 제정되는 것이 아니라, 폭주 그 자체로서 법이 만들어진다. 폭주를 통제하는 폭주가 법에 다름없다. 그것은 군주의 폭주를 멈추는 멀티튜드의 폭주가 혁명, 국가의 파괴인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과 너무도 분노하여 위정자를 학살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며,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의 기본 형식은 린치이다.”(p.228).

공포희망의 균형이 깨지려고 했을 때 계산이 행해지고 균형이 유지될 것이라는 설이 철두철미하게 배제된다면, 균형 붕괴에 제동이 걸릴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성의 브레이크를 결여한 공포, ‘희망을 이기게 되면, ‘희망을 망친 자에 대한 분노’, “우리의 동류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증오”(윤리학3)에 불을 붙인다. ‘공포는 도를 넘어섬으로써 (‘희망을 이김으로써) ‘분노로 성장한다. 스피노자에 의한 참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정치론누락은 없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국가의 형성과 해체, 둘 다의 유일한 원인으로 남는다. 그러면 왜 스피노자는 단순히 독자에게 참고를 원할 뿐, 양쪽의 과정을 자신이 역사서술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것일까? ‘누락이 있는 것처럼 독자가 생각하게 만들려던 것일까? 국가의 형식들에 관해서는, 그런 서술을 주도면밀하게 행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분노에 의한 설명이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스피노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마트롱은 생각한다.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형성과 해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사회상태로 이행하는 합의와 전쟁상태로 사실로서 복귀하는 사태는, 과정으로는 정반대이다. 그렇지만 존재론적 수준, 즉 참으로 존재적인 것의 수준에서는, 동질의 분노가 국가의 형성과 전쟁상태로의 복귀라는 두 개의 변화의 양쪽에, 늘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분노국가가 되는 것전쟁상태가 되는 것‘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자연상태는 계약국가와 마찬가지로 픽션이지 실재할 수 없다고 스피노자는 시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연상태로부터의 분리로서 국가형성을 생각하는 것이 픽션이었다고 말이다(p.223). 픽션, 다시 한 번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인 분노를 두 개의 상태로 분할하고 있는 게 아닐까? 존재론적으로는, “극한적인 불균형(분노의 효과에 의한 개별 국가 형식의 해체), 역시 극한적인 재균형(분노의 효과에 의한 다른 국가 형식의 재구성)에 의해 메워지는”(p.226) 사태와 국가공동체의 흔해 빠진 내적 역동성”(예를 들어 선거 )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ibid.). 두 방향으로 향한 분노가 멀티튜드의 행동을 추의 흔들림으로서 결정하고 있을 뿐이다. ‘분노란 확실히 감정의 진동이지 않은가? “기성 질서에 대한 분노와 질서의 적에 대한 분노 사이”(ibid.)에서 흔들리는 추가, 실재하는 정치과정이다. 때문에 그것이, 개체로서의 국가공동체이다. 다만 그것을, 멀티튜드의 정치적 공동성이라고 불러도 차이는 없다. 스피노자에게서는 둘 모두 동일한 하나의 말, société politique인 것이다.

 

결과를 원인에 내재시키는 스피노자주의

이것은 어떤 정치론일까? 자기구성과 자기파괴와 자기재구성을 엉거주춤하게 날마다 반복하는 불안정, 부정형적인 집괴[集塊, 모여서 된 덩어리] 결과적으로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들뢰즈=주라비슈빌리적인 비관주의와 친화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보수적인 국가는, 그 존속이 인간에게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분노’에 대한 스피노자적 정의는 우리의 동류에게 악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증오이며, 따라서 분노추의 흔들림인 국가공동체는, 스피노자주의에 비춰보면 존재론적·윤리적인 이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가득 찬 공산주의에 이르는 도정에서, 그 존재 자체가 소멸해야 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자기보존을 하는 일상적 현실에서도, ‘분노가 그것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해체를 내포하지 않는 정치는 존재론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분노의 너머를 전망하는 자)만이 현실주의자(‘분노의 실재를 승인하는 자)인 것이 가능한 정치를 마트롱의 스피노자는 부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흔들리는정치는, 정체의 내부 구성 곧 정치의 상태[状態]와는 겹치지 않으며, 때문에 보이지 않으며(스피노자는 참조라는 조작 속에 이 정치를 감추었다고 마트롱은 말한다 허술하게 누설해서는 안 되는 사상이라는 듯이”, p.227), 기존의 국가를 계속 흔든다. 흔드는 가운데, 그 형식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형식 변화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피노자주의자는, 그것이야말로 의 증거이며, 공산주의를 요구하는 갈망[욕망]cupiditas의 표출임을 알고 있다.

이 정치는 원인이다. 이 정치가 원인이다. 국가를 부단히 생산하고 또한 해체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결과? 탐구되고[찾고] 있는 것은 국가형성을 결과로 하는 원인이었다. 그 원인이 정립되는 장소였을 터인 자연상태는 픽션이라며 배격되었다. 그것과 더불어, 결과는, 자연상태와는 반대의 상태라고 상정된 장소를 잃었다. 남겨진 장소는 원인과 똑같은 곳, ‘추의 흔들림속뿐이다. 그 속에서 국가형성은, 원인이 산출하는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또 하나의 결과인 혁명과, 동떨어져 있지만 연속하고, 불가분하다. 존재론적으로는 국가형성과 혁명은 동일하며, 원인으로서의 정치는 이 같음[동일]을 결과로서 산출하고 있다. 원인과 결과는 연속적인 운동과 그 극한의 과도기적 상태로서 구별되기 때문에, 알튀세르처럼 원인은 결과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이 원인에 관해서는 결과가 원인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쪽이 존재론적으로 정확할 것이다. ‘결과원인의 한 상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과성이 이런 방식으로 특정됨으로써, 이 특정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가 생겨나고 있다. 정치과정 전체가 상태[状態]의 형식이나 존재방식과는 별개의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떤 상태로서의 사회구성체 속의 한 심급이라는 지위도, 정체의 내부구성이라는 성격도 잃고, 정치는 그것들을 과도[기]로 하는 운동 속에 숨는다.’ 그 대신, 자연상태(무질서)도 사회상태(질서)도 표층의 픽션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그것에 인과관계가 쏙 들어갔던 차원을, 결과=효과만이 출현하는 차원으로 변모시켜 버린다. 과거에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이, 아니면 그 반대 방향으로의 이행이, 원인에서 결과로의 추이였지만, 이제는 이 추이 자체가, 방향을 불문하고, 결과=효과로 영락한 것이다. 그 차원에 머물러서 추이의 발단처럼 보이는 원인,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원인은 심층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이 심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원인의 숨겨진 장소가, 스피노자에게서는 참조로서 제시된 또 다른 추이였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이 픽션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피노자적 인과성의 작용, 효과=결과이다. 이 인과성은, 국가형성이든 혁명이든, 결과를 생산하기 (설명하기) 전에, ‘보는것에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다. 자신이 작업을 함으로써, 국가형성과 혁명의 어느 방향이 되었건, 또는 두 방향 모두에도, 결과를 산출하길 원한다. 인과성 자체가 욕망cupiditas을 갖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건에 관해서 마치 사회가 사회에 포함되는 용서할 수 없는 곳을 갑자기 간파한 듯하며, 다른 것의 가능성까지 내다본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간파하다-내다보다의 주어를, 사건이나 사회로부터 인과성과 그 이동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과 인과성 : ‘의미가 초래하는 지복과 곤혹

마트롱에 의한 인과성 문제의 해결, 그러나 그 자체에 있어서 역설적이다. 그 생산과정을 기술[서술]적으로 재현하고, 원인으로부터의 발생, 원인에 의한 결정을 설명해야 했던 결과가, 원인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곳에서는 혁명도 국가형성도 자립적인 목적 내지 도달점으로서는 픽션에 지나지 않으며, 요구되었던 대로의 결과가 아니다. 요구되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법칙, 상태, 구조 등의) 일반성에 대립하는 예외성(사건)의 설명이며, 정동 물리학의 경우에는 개체성에 대립하는 집단성 내지 공동성의 설명이며, 아무튼 원인과 결과를 그런 대립관계에 겹쳐놓고, 분리되고, 서로 자립하여 개체처럼 배분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과성 자체가 픽션으로 인정된 것이다. 없다고 말해졌다. 그런 결과를 요구한 것이 잘못이며[틀렸으며], 문제 자체가 가짜였다고 선고가 내려진 것과 같다. 게다가 올바른 결과는, 원인과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즉 존재론적으로 원인이라고 해결고한다. 혁명도 국가형성도 멀티튜드의 분노의 표출이며, 이 원인에는 원인 그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 이외의 올바른 결과는 없는 것이다. 이 역설에 대해 마트롱은 나중에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한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던 설명이라기보다는, 당혹스러운 사실 확인이었다”(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 48).

당혹한 채로 있기보다, 우선 원인은 특정된 것이기 때문에, 원인의 결과 없는 표출’manifestation(혹은 표현’expression)을 일반문제로서 생각해보면 어떨까라고 들뢰즈라면 권할 것이다. 국가도 혁명도, 멀티듀드에게서의 Evantum tantum(모든 사건으로 이루어진 사건, 단적인 그the 사건)을 이루는 분노의 표출이 아닌지, 사건 세계의 알(‘기관 없는 신체’?)과 같은 분노로부터의 파생이 아닌지? 실제로, 스피노자 이해에 관해 그가 최종적으로 권하고 있는 것은 인과성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확실히 결과는 원인을 표현exprimer한다. 그러나 보다 깊은 곳에는, 결과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을 터의 연결série[계열]을 형성하고, 그 무엇인가는, 다른 연결[계열]이 표현하는 것과 동일하다(혹은 닮았다). , 현실적 인과성은 복수의 표현적 연결[계열] 속에 국소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연결[계열]은 서로 비인과적 조응correspondance의 관계에 있다. 표현되는 것은 의미다. 인과관계보다도 깊은 의미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결론, p.311)

 

국가와 혁명의 원인 없는 의미를 생각하는 것. 들뢰즈의 스피노자도, ‘만들어내는[발명하는] 방법만이 ‘인식방법이다 인과관계의 설정 내지 적출이 인식이다 라는 곳에서 출발했다. 삼각형에 관한 올바른 정의(인식), 삼각형을 실제로 그리는 (만들어내는) 방식을 나타내는[보여주는] 원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결과로서의 사건에 관해서는, 그것을 원인으로부터 만들어내는[발명하는]것은 단념되고, 거기에 표현되는 의미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의미생각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정확하게 말해서 어떤 사태인가? ‘의미이기 때문에, 결과에 이르는 연결[계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복수의 연결[계열]이 수렴되고 교차하는 곳에서 생겨나며, 그러한 복수의 연결[계열]사이에는 비인과적 조응의 관계밖에는 없으며, 더욱이 조응은 문자 그대로는 표현도 아니기 때문에, 수렴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할 수 없다. 실제로, 사건의 인식인 3종의 인식에 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3종의 인식에서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3종의 인식에서는 원인으로서의 신의 이념이 초래하는 기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윤리학5). 사건을 만들어내는[발명하는]’inventer 것은 신 밖에는 할 수 없는 행동이며,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발명하는가]의 인식, 인간이 해석을 거듭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그저 기쁨으로서, ‘지복(béatitude)’(들뢰즈, 앞의 책, 19)으로서, 일거에 전적으로 체험될 뿐이다. 거기서는 개개의 인과관계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삼각형의 정의를 알고 삼각형을 그릴 수 있더라도,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부터는, 어떤 사건도 신 즉 자연이 산출한 것이라고 기쁨속에서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지적인 지복,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발명하는가], 그 원인 자체를 어떻게 없애는가(원인의 소실도 또한 사건 아닌가?)를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는 자에게는, ‘곤혹을 가져다줄 뿐이다. 근본 원인을 근본 원인이라고 알고 얻을 수 있는 지복그것밖에는 알 수 없다고 알고 있는 곤혹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알튀세르의 ‘[기계]장치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출발점으로 끌려가고 있다. 왜냐하면 원인에서 결과로의 추이(만들어내는, 생산하는, 설명하는 )로서의 인과성을 통째로 표현으로 대체해버리는 시도와, 그 결과 맛보게 되는 곤혹,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속의 한 논문(자본론의 대상)에서 이미 행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했던 구조적 인과성을 둘러싸고서다. ‘선형의 인과성’(바로 추이적 인과성이다)본질-현상의 표현적 인과성’(여기서의 표현은 독일어의 Vorstellung으로, 구조에 관해서 문제가 되는 표현[서술]’Darstellung과는 구별된다), 맑스에 특유한 인과성 개념으로부터 배제한 후, 맑스에게서 발견되는 구조작용표현[서술]Darstellung’으로 특징짓고, 알튀세르는 적고 있다.

 

표현은 결과 속에 구조가 현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다. 결과에 현전하는 구조의 작용에 의해, 결과가 수정된다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다. 또는 반대로, 표현이란 부재의 작용의 개념이라고 말해도 좋다. 결과는 구조에 외적이지 않고, 일개의 대상이나 요소가 아니라, 미리 존재하여 구조가 표시를 남기는 공간이 아니다. 구조는 결과에 내재하고 있으며, 말의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결과에 내재하는 원인이다. 구조의 실재는 오로지 그 결과에 있다. (자본론의 대상, pp.170-171)

 

여기서의 구조=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우리가 봤던 분노와 혁명 및 국가형성의 관계에 그대로 겹친다. 각각의 사이에는 거리가 없고, 양자는 존재론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 구조=원인은, 하나의 정해진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차원에 위치하는 무엇인가의 변화나 수정을 만들어낸다. ‘분노가 혁명과 국가형성 사이의 흔들림을 산출했듯이. 구조=원인은 결과에 현전하는”, 즉 결과로서 밖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원인으로서는 특정할 수 없으며, 보이지 않으며, 부재하다. ‘분노, 그 보이는 과도[기]적 상태 아래로 숨듯이[아래에서 감춰지듯이]. 결과로서의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은 모습을 감춘 것처럼. 이때 구조의 작용, 삼각형의 스피노자적 정의가 삼각형의 그리기 방식을 가르쳐줬듯이,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알튀세르가 염두에서 떼어내지 않았던 결과의 모델이다)의 산출되는 방식을 나타내고 있을까? 작용서술하는 마트롱이 스피노자에 요구했던 것이다 것이, ‘구조적 인과성으로 할 수 있을까? 우선 표현Darstellung[서술]’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에 의해, 이 인과성의 작용은 어떻게 밝혀지게 되는가? 알튀세르는 그것을, ‘연극‘[무대]장치machinerie’에 비유함으로써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기계]장치machinerie’라는 말도 표현Darstellung’과 마찬가지로, 자본에서 끄집어낸 말이다(자본에서는 기계장치의 뜻). ‘[기계]장치machinerie’는 자못 작용과 관련된다.

 

(맑스의 기계장치=장치에 있어서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내부와 외부의 구별은 모두 사라진다. 우리는 표현Darstellung’이라는 고도로 징후적인 술어를, 장치라는 말에 접근시켜 봐도 좋을 것이다. ‘표현을 맑스의 문자 그대로, ‘장치가 그 효과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연출의 실재양식인데, 거기서는 연극 자체가 무대이자 각본이자 배우이다. 게다가 관객까지도, 우선 배우라는 것을 강제당하지 않고서는 관객으로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작가가 아닌 각본에 의해 배역이 할당된다. 결국, 이것은 작가 없는 연극인 것이다. (같은 곳, p.177)

 

등장인물도 관객도, 심지어 각본가도 연출가도, ‘장치연극‘[무대]장치이자 연극이라는 ‘[무대]장치에 종속되어 있다. 관객은 관객으로서 연극이라는 무대에 올려지는 (연출되는) 특수한 배우이다. 각본가나 연출가는, ‘장치를 전제로 쓰고, 연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나 장치의 내부의 일부분에 위치지어지고, ‘장치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장치이외에 진실의 작가 효과=결과를 낳는 원인 는 없다. ‘장치에 있어서는, 모든 것의 연출 효과, 연극의 결과, ‘구조장치표현하고 있다. ‘장치는 분명히 결과=효과에 현전하고 있다. ‘장치가 원인이다. ‘장치가 원인이기 때문에, 모든 연극은 작가 없는 연극이다. 물론 장치를 통째로 만든 자가 진정한 작가인데, 그는 상연되는 어떤 연극에 있어서도 당사자가 아니다. 극작가가 그런 장치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연극 만들기를 시작하더라도, 그에게는 누구도 장치의 만들기 방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연극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부터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만들어지는 것이 연극인 한, ‘장치는 이미 눈앞에 있다······.

이 당당함 바로 맑스의 기계장치처럼 내부와 외부의 구별을 소멸시키는 구조작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표현으로 바꿔 말하더라도, 원인에서 결과가 산출되는 방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구조그 자체가 원인이라고 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알더라도, ‘곤혹내지 지복을 느끼는 이외의 인식은 얻을 수 없다. 실제로, 연극의 효과=결과란, 막이 내리고 사람들이 극장을 뒤로 할 때 그들에게 남은 이화효과異化効果[낯설게 하기 효과]가 아니던가? 그것을 느낄 때, 원인 따위는 이미 잊혀졌다. 동일한 극장에 재차 발길을 옮겨서 동일한 효과=결과가 얻어질 수 있는지 아닌지는 수상쩍고, ‘장치의 구체적 상세(어떻게 이 연극은 상연=연출되었는가)를 알더라도, 다시 감탄한다는 곤혹내지 지복이 다시 한 번 얻어질 뿐이다. 어떻게 해서 그 감탄이 원인으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가르칠 수 없다. 원인은 결과에 밀착하기는커녕, 다시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실재하고, ‘어떻게 해서의 서술이 그것을 메우는 것으로서 기대되고, 또한 가능해지는 간극이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해서라는 질문을 봉쇄하는, 잊게 하는 것이, 내재적 인과성 효과=결과인 것이다. ‘장치구조가 효과=결과를 낳는다는 사실 인식만이, ‘결과로서 우리들(관객? 배우? 작가?)에게는 남는다. ‘곤혹내지 지복으로서. ‘표현되고 있는 의미속에서 구조가 발견되더라도, 혹은 거꾸로 구조에서 의미가 발견되더라도, 들뢰즈가 시사하는 대로, 사태는 이제, 탐구되고 있던 인과성과는 관계가 없는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인과성으로부터 어딘가 떨어진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고 있다. 우리는 비인과적 조응의 사실을 자신의 지복이나 곤혹속에서 목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알튀세르도, 논문을 이렇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체의 구조에 의해 전체의 요소들의 규정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최대의 이론적 곤경 중에서 절대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곤경이란 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적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 개념의 모양새[용모], 우리는 겨우 예측하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p.168 강조는 인용자). ‘구조적 인과성은 그에게 긴요한 어떻게 해서인과관계를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가르칠 수 없다고 가르친, 죄 깊은 스피노자.

 

결과이기도 하고 원인이기도 한 나

혁명의 원인을 모색[탐색]하는 입장에서 보면, ‘신에 대한 지적 사랑지복은커녕, 혁명과 마주쳤던 혁명가의 불행을 이야기할 뿐이다. 내가 이런 것의 원인이 되는 것 따위는 도저히 할 수 없다! 누가 멀티듀드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알튀세르는 예측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들뢰즈도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로 사건의 철학을 끝마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인에서 의미로 사건에 표현되는 것을 이동시킨 후에, 그는 자신의 철학을 하나에서[처음부터] 재조립하고자 한다. 의미의 논리(1969)이다. 어디까지나 원인에 연연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더 이상 원인이 아니라 의미만 갖고 있을 뿐인 사건의, 그 원인에 인간이 되는 도덕적 기법을 들뢰즈가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은, 1차 세계대전에서 죽기 직전의 중상을 입고 반신불수가 된 시인 조 부스케Joë Bousquet(1897-1950)이다. “나의 상처는 나에 앞서 실재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내 살로 삼기 위해 태어났다”(21 계열, p.174). 이렇게 적은 부스케는 사건의 ’, 즉 원인(나의 상처에 앞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부스케는, 그렇게 적음으로써, “자신에게 일어난 것의 준원인이 되고 있다고 들뢰즈는 생각한다. 부스케는 사건에 부스케의 나를 만들고 있다(“나는 그것을 나의 살로 삼기 위해 태어났다”). 사건은 내 몸에, 내 소관이 아닌 원인에 의해 도래하고, 실현되는 것인데, 나는 나를 그 사건의 결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결과인 가 이 나라고 굳게 믿고, 나란 상처의 결과라고 말함으로써. 그때, 결과로 삼은[하는] 것은 이 나이기 때문에, 나는 사건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원인인 <>가 출현한다[등장한다]. 결과인 와는 상이한 <>, 나의 이야기에 의해 등장한다. 들뢰즈는 부스케의 이 소행所作, 실현되는s'effectuer 사건에 대한 대항실현contre-effectuation’이라고 부른다. 부스케는 우주적이고 물리적 사건의 실현을, 또 다른 실현에 의해 이중화하고 있다”(ibid.). “자기 자신의 사건의 배우[행위자]가 된다”(ibid.). “일어나는 것의 마임(mime)인 것, 실현을 대항실현에 의해 이중화하는 것”(22 계열, p.188)에 의해, 부스케는 원한(ressentiment)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 <>를 만들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를 원인(<>)으로 고쳐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보면 무한의 저편에 있는 으로부터 내게 도래하고, 내게 내재되어 버린 원인으로,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우리의 몸을 만든다. 나를, 원인의 결과로, 내가 <원인>이 되어 다시 만든다. 일어난 것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이 단순한 도덕적 조작(스토아적인 도덕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내지 운명애에 의해, 그러나 내가 나인 의미를 내게로 전하고, 나를 의미의 표현으로 삼는 연결[계열]은 따라서 두 개로 늘어난다. 결과로서의 사건에 도달하기까지의 연결[계열]’, 도달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연결[계열], ‘에게서 내게로의 그것과 <>에서 나에게로의 그것으로 늘어나, 원인을 에게서 <>에게 횡단이동시킨다는 의미작용을 낳고 있다. 비인과적인 조응이 두 개의 연결[계열]사이에서 생겨나며, 결과인 나의 상처’, 사건, 그리고 상처를 육화하는 또한, ‘표현적 준원인인 이 조응의 <결과>로 바뀐다. 천체의 운행과 나의 행위의 조응이, 이 나이다! 정말이지 스토아적인 도덕적 우주관, 우주론적 도덕이다. 사건이 에코의 시스템’(24 계열, p.199)을 만드는 것이다. ‘연결[계열]공명, 새로운 사건의 가능성을 열 것이다. 부스케의 시 같은. “순수한 사건이 그때마다 실현 속에 갇혔다면, 이것과 같은 정도로, 대항실현은 사건을 그때마다 다른 기회로 해방한다”(22계열, p.188).

극히 흥미롭게도, 알튀세르 또한, 연극적인 장치일반 속에서 특히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공명작용에 의한 특수한 효과=결과의 출현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효과는 보다 훨씬 거대하다[절대이다]. “거울은, 최후에는, 떨어진 곳으로부터 컵을 깬 물리적 공명작용에 의한 것인 양, 갑자기 부서져 땅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피콜로 극장, 베르톨트, 브레히트 어떤 유몰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 1962, p.151). 이 효과를 초래한 것은, ‘거울을 연극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이동시키는 조르조 스톨레르의 연출이었다. ‘장치의 표현Darstellung거울’(관객과 배우를 반조적-변증법적으로 교체한다), 어떤 특정한 연극이 되었을 때, 표현관계의 복수화에 의해, ‘장치자체를 부수기조차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명작용의 궁극의 연원은, “먼 미지의 힘”(ibid.)으로 간주된다. ‘이다.

 

도덕은 도착이다

우리가 거쳐 온 문맥에서, ‘준원인준원인’이 되게 하는 요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항실현이 사건에 대한 도덕적, 인간적 반응으로 간주된다는 것과 관련된다. ‘준원인은 우주적·물리적·‘적인 진정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준원인이다. 진짜[참인] 원인은 따로 있다. 그것을 전제로, 결과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를 원인으로 하는 결과로 간주하는 곳에 ‘준원인과 그 도덕성의 까닭이 있다. 다른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원인이라고 내가 말한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나를 일어난 사건에 부끄럽지 않은 나로 한다. “바로 이것이 도덕이 말하는 것, 말해야 할 것은 그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21 계열, p.174). 그렇지 않다면, “도덕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Ibid.).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진짜[참인] 원인 쪽, 우주 내지 으로부터 나에게 도래하는 원인 쪽은,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 인과관계는 그 전체가 표현관계로, 따라서 원인은 통째로 의미로 치환된 것이 아니었던가? ‘의미와 나의 관계는 이미 물리적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지복하고, 또한 당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이 아니라 반응으로서, ‘대항실현은 출현한다. ‘대항이 합의하는 수동성, ‘, 부정성은, 그 근거나 가능성 자체가 부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능동적으로, 표현관계를 인과관계로 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으로서 ()등장하지 않으면 도덕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가 재건하는 인과성은 마임인 것이지 진짜의[참인] 원인인 연극이 아니라, ‘표현이나 의미의 반쪽이 빠져 있다(그래서 이다). 그래도 이 마임, ‘의미원인으로 돌리는, 혹은 다시 치환하는/옮겨놓는 효과=결과를 수반하고 있다. ‘준원인에는, 준결과가 수반되어 있다.

그 위에 덧붙여, ‘준원인진짜의[참인] 원인 결과도 생산할 수 있다. 그것은 의제적, 상상적인 반복에 그치지 않으며, 바꿔 말하면 단순한 마임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나 표현의 효과든 원인의 결과든 쪽에, ‘연결사이의 비인과적인 에코공명에 의해 의미를 산출할 수 있다. 의미의 논리의 기본 테제는 의미는 사건이다이며, “세계란 사건의 총체로 볼 수 있다”(물체와 사건의 차이는 심층표층의 차이, 심도의 양적인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였다. 개체적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은, 그것이 작용하는 개체의 물체성, 물체의 개체성을 극한으로까지, 정확하게 말하면 극한으로서 축소되고, 사건 사이에서 인정받는 의미의 표현에 자리를 양보한다. 마트롱의 스피노자에 있어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가 원인/결과의 지위를 빼앗기고(어느 쪽이 어느 쪽의 원인이며, 결과이든), 멀티튜드의 분노의 표출로 격하된 것과 마찬가지의 도식이다. 사건이 된 세계에서는, 어떤 사건도 세계가 있다라는 거대한 사건, Evantum tantum의 표현이며, Evantum tantum을 최종적인 의미로서 갖는다. 전쟁상태도 국가도 멀티튜드의 분노의 표출, 하나의 상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준원인은 이 존재론적 사건 세계 속에서,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전체가 이미 사건, ‘의미가 되고 있기 때문에, ‘준원인에 의해 새롭게 생산된 의미, ‘추의 흔들림에 국소적이든 일격을 추가하고, 나의 신체와 같은, 국가권력imperium과 같은, 물체적인 무엇인가의 위에 직접 도래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건임에는 틀림없는 사건을, 사건 사이에서 낳는다. ‘준원인에 의한 의미의 추가는, 그런 사건이다. 문자 그대로 그런 의미에서, ‘준원인의 결과는 가짜(상상적)가 아니라, 진짜의[참인] (현실적) 결과에 다름 아니다.

준원인준원인으로 하는 두 번째 요인은, 그것은 역시 도착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상처는 나보다 앞서 실재했다. 나는 그것을 자신의 살로 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 것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상처는 내가 [상처보다] 앞서야 그 상처인 것이다. 우주적·물리적·‘적인 진정한 인과성은, 어디까지나, ‘준원인을 잘못이라고[틀렸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인이 부재되었던 것은, ‘알 수 없는것이 되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를 인과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우연의 왕국으로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인과성은 그 관철의 끝에, 그저 내게는 보이지 않게 되고, 표현관계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인과관계와 표현관계는 즉, ‘신 즉 자연의 실체에 있어서는 일치한 채로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부스케의 도덕적 소행[행위]은 도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 도착과 맞바꿔서, 원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뿐인 것이며, ‘준원인에는 가짜라는 의미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 “사건의 원인은 <>이다인 한, 도덕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도착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이 도착, ‘준원인의 결과가 진짜[]였다는 것과도 비슷하게, 진정한 인과성에 비춰서 올바른 효과를 발휘한다. ‘준원인의 결과란 우선, 내가 알 수 없는, 내 소관이 아닌 원인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이 나였다. ‘준원인의 등장에 의해, 하나의 동일한 결과가 두 번, 결과로서 규정[同定]된다. 결과라는 것이 승리를 굳힌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잘못 파악하는 것을, 혼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 결과가 결과인 것이다, 다른 결과는 없다고 도덕은 말한다. 마트롱이 말하는 바의 픽션을 현실이라고 잘못 파악하는 혼동, 주라비슈빌리가 곡해라며 물리쳤던,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는 듯한 본질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연금술적 혼동, 스피노자가 경계했던 데카르트주의의 혼동(인간이 만든 국가가 인간을 규정하는 듯한, 혹은 개라는 개념이 짖는다라고 말하는 듯한)은 모두 결과를 결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적 약함이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원인을 다 찾지 못하여, 그러나 알 수 없는것을 못 견뎌서, 결과 속에 원인이 될 힘을 투영해버린 것이 잘못의 토대였다. 돌이켜보면, 결과는 결과이다, 라고 말하는 도덕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바로 이것이 도덕이 말하는 것, 말해야 할 것은 그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도덕이란 무엇보다 물리학의 승인이다. 들뢰즈는 심지어 실현대항실현을 추가하는[덧붙이는] 부스케의 현재에 관해, “그것은 전복의 현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순수한 도착적 순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23계열, p.197). ‘준원인원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전복’, 어디까지나 준원인에 머물러 있으며 도덕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도착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셈이다. 주라비슈빌리에 의한 네그리 비판은 거기서 하나의 근거를 두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도덕적 도착으로서의 대항실현은 착각을 나무라는 바른 효과를 갖고 있다.

 

가 거울을 깬다 : 희망

존재론적으로는 사건만 존재할 뿐이라고 하자. 멀티튜드의 분노만이 원인이며, ‘의미이며, 그 결과 내지 표출이 분노의 외부에서 전개되는 장소는 없다고 하자. 혹은 효과(=결과)(원인=) ‘[기계]장치의 실재라고 하자. 그렇다면 준원인원인의 차원에 속하며, ‘원인의 일부를 구성할 터이다. ‘준원인의 결과 내지 효과는, 존재론적으로 말해서 정말[]이며,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효과가 참[정말]이자 올바르다면, 원인은 존재론적으로 실재할 터이기 때문이다. 인과성(‘물리학’)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준원인이 생산하는 사건은 틀림없이,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준원인원인의 구별, 도덕과 물리학의 차이는, 그것도 또한 존재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의 구별이나 차이는 그 자체가, ‘추의 흔들림의 한 양상이라고. 그 밖의 어딘가에 도덕의 존재근거는 있을 수 있을까? 도덕과 분노의 물리학, 도덕과 세계의 ‘[기계]장치, ‘흔들림속에서 혼동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들뢰즈는 사건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적고 있다. “나는 분기하는 연결을 나의 바깥으로 해방시키고, 나의 바깥에 두는 이접disjoction혼동된다”(‘두 번째 계열’, p.205 강조는 인용자). 논리학적인 이접물리학적으로 바꿔 말하면, 들뢰즈에게 친숙한 미분이며, 존재론적으로 바꿔 말하면, 실현된 사건의 그 실현effectuation, ‘추의 흔들림이다. ‘가 그것과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면, 세계란 사건의 총체가 아니며, ‘구조적 인과성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준원인은 그 준효과로서, 세계를 표현적이 아닌 인과적인 것으로서 재건하고 있다. 표현관계의 한가운데에 인과관계를 재등장시키고 있다. ‘준원인<>를 원인으로 구성함으로써, 세계의 <주체>로 삼는다. 세계를 이 나의 <대상>으로 삼는다. 표현관계로 해소된 인과관계를 순조롭게, 그렇지 않으면 때마침, 세계 속으로 데려오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이리하여 이중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런 이중 세계는 지속 가능할까? ‘지복을 맛본 인간에게, ‘분노로 되돌아가도록 강요하는 이중성은 존속 가능할까? 그것 때문이 아닐까, 알튀세르가 공명작용의 효과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은. “거울은 마지막에는, 갑자기 부서져 땅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효과는 확실히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거울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적 원인을, ‘부재한 채로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복고적이다. 그것은 버려진/버린 것의 관계를 회귀시킨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분노의 원인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것은, ‘거울속에서 반사하여 누진되는 분노산산조각 나 땅바닥에 떨어지는것 말고 달리 있을까?

잔혹한 변증법이다.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바로 그 분노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부스케처럼, 비참 중의 비참을 계속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 또한 비정한 변증법이다. 그렇지만, 그때 세계는 필연성에서도 의미에서도 해방되고, 인간은 준대상을 앞에 둔 준주체의 힘과 자유도를 되찾는다. 이것은 스피노자 정치론의 비관주의적 합의나 독해, 또는 스피노자 그 사람의 예측과는 반대로 커다란 희망이 아닐까? 멀티튜드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분노’, 결과를 외부에 갖지 않는 원인인 분노의 한가운데에서, 그것을 대상화할 수 있는 거리가 열린 것이다. ‘분노의 저편에서의 거리가 아니라, 가운데의 거리가. 두 개의 극한을 제한없이 왕복하는 이른바 자연변증법의 한가운데서, 이질적인 것으로서 비집고 들어가는 <주체>, 왕복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주체>가 출현했다. 다만 이 <주체><대상> 사이의 변증법은, 작용도 효과도 전혀 보증할 수 없는 한에서일 것이다. 아무튼 거울은 마지막에는 부서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희망이 있을 뿐인 것이다. 알튀세르도, 그것은 무대의 소매의 변증법이라고 적었다. 중심에 놓인 거울이 스스로 철수하는 일은 없다. 그래도, 혁명극의 배우는 모였다. ‘소매에서 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대상화(무대로의 등장)를 실현시켜 줄 뿐이다. 이를 위한 연출을 할[수행할] 뿐이다. “모든 것은 따라서 변증법과 관련된다. 우리에게 불행하게도, 대단치 않은 어려움이 남아 있다. 변증법을 ‘두 발로 서게 하다라는 전도를 둘러싼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싶다”(알튀세르, 자본론의 대상, p.27).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