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ltitude/Solitude

: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네그리, 포콕, 알튀세르

우지 켄다(王寺賢太, 사회사상사·프랑스문학)

현대사상, 20137월 특집호, 129-143頁(각주는 생략했다)



국가를 세우려면 혼자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

공산주의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알튀세르

 

시대착오적인 사상사가 : 구성적 권력vs 마키아벨리적 모멘트

구성적 권력 : 근대성의 대안들에 관한 논고(Le pouvoir constituant : Essai sur les alternatives de la modernité)(1992)의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뿌리 깊게 시대착오적인 사상가이다. 소련 붕괴의 이듬해, 역사의 종언이 운운되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마키아벨리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정치사상사를 다시 말하고, 그것을 결코 끝나지 않는 혁명 사상의 계보로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네그리는 이 책에서 구성된 권력에 대해 구성하는 권력편에 서서, 근대사에는 구성하는 권력과 그 주체인 다중이 편재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가 혁명을 어쩔 수 없이 수렴収束시키는 인과의 계열에 역공을 가하면서, 되풀이하여 혁명의 사전(事前)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에게 특유한 시대착오가 있다. 종종 과감한 단정이나 무리가 추론에 의해 이뤄지는 이 시대착오를 파악하고, 네그리의 작업이 지닌 결점을 들춰내는 일은 쉽다. 다만 그 때에는 역사가가 사후로부터, 객관적으로 역사를 말하려고 할수록 역사, 혹은 시간의 어떤 차원이 간과된다는 것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그리의 시대착오는 바로 그런 차원, 인간 주체가 그 안에서 존재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시간의 창조적인 차원을 탈환하기 위한 방법이다. 1990년대,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이었던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가, 2000년대에 반-전지구화 운동의 사상가로 일약 시대의 인물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구성적 권력맑스를 넘어선 맑스(1978)와 스피노자론인 야생의 아노말리(1981)를 이어받아 네그리 개인의 작업의 집대성을 이루며, 2000년대에 연달아 간행된 마이클 하트와의 공저 제국3부작의 현대정치경제론을 예고하는 전회점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서 중심에 놓인 구성적 권력이나 다중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에 관한 정치적 독해로부터 도출됐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구성적 권력에서 제국이후의 연결을 나타내는 것은 네그리/하트의 가장 논쟁적인 개념인 제국이며, 다중에서 <제국>의 정치적 재편성의 도식을 제공하는 일자소수자다수자로 구성된 폴리비오스적 혼합정체론이며, 공통체에서 제창되는 소유 없는 공화국공화국개념이다. 왜냐하면 구성적 권력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발단하고, 마키아벨리를 거쳐 근대 초기의 대서양 양안에 계승된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근대혁명사상의 계보로 고쳐 읽은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때 네그리에게 최대의 참조항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1976)J. G. A. 포콕이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미국에서, 공공선의 실현에 헌신하는 시민의 멸사봉공의 군사적·정치적 에토스 에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보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추적하며, 공화국의 통일을 방어하는 시민의 ,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공화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운명사이의 대립도식으로부터 역사주의의 생성을 묘사해낸 정치사상사가이다. 여기서 역사주의는 역사의 운동에 인간의 활동을 관여시키고, 역사 자체를 새로운 가치나 규범을 산출하는 것으로 그려내는 시도를 가리킨다.

실제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에서, 포콕을 좇아, 16세기 피렌체의 마키아벨리로부터 청교도혁명기 잉글랜드의 해링턴을 거쳐, 미국독립혁명의 이데올로그들까지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따라간 후, 그것에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관한 사상사적 분석을 접목하고 있다. 포콕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 재고가 자연법론과 계약론의 계보를 중시하는 서구정치사상사에서 법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이의제기인 한, 이미 스피노자론에서 -법제주의를 선명하게 했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서 큰 자극을 받은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원래 17세기 네덜란드의 공화주의자 스피노자의 정치적 구성 la constitution”의 논리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론에서 헌법제정권력 le pouvoir constituant”을 법학적인 틀로부터 뽑아내어, 정치체를 구성하는 다중의 힘으로서 위치시킨 후에, 네그리는 포콕에 의거하면서, 구성적 권력을 근대혁명사상의 계보에 부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히려 포콕과 네그리의 차이일 것이다. 그 차이는 미국독립선언혁명으로 책을 닫는 마키아벨리적 모멘트대서양적인 전망과 러시아 혁명을 시야에 넣은 구성적 권력대륙적인 전망을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분명해진다. 그 차이는 아렌트의 혁명론이 말하는 정치혁명사회혁명의 계보의 차이이기도 하다. 원래 운명에 대한 의 되풀이되는 패배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역사주의에 근거한 보수주의를 표방하게 되는 포콕과 의 에토스를 본성상 끝나지 않는 혁명의 잠재력에 결부시키는 네그리는 정치적 입장이 전적으로 다르다. 이하에서는 구성적 권력에서 전개되는 마키아벨리론에 초점을 맞추서 네그리가 얼마나 포콕을 뒤따르면서도 포콕과 갈라서는가를 밝히고 싶다. 이 두 사람에게 마키아벨리는 각각의 책 전체의 테마를 단숨에 제시하는 사상가이며, 그곳에서는 모두 시간과의 관계에서 의 정치학이 문제가 되는 이상, 네그리의 근대혁명 사상사의 특이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것보다 더 나은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우리는 또 한 명, 네그리의 시대착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어떤 철학자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1990, 네그리가 책임 편집자 중 한 명이던 잡지 전미래의 창간호에 게재된 마키아벨리의 고독 La solitude de Machiavel의 저자 루이 알튀세르이다. 아이러니한 공화주의의 역사가와, 고독 속에서 죽음의 침대에 있었던 맑스주의 철학자 사이에서, 바닥없이 낙관주의적으로도 비치는 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가 스스로 껴안으려고 한 고독을 분명히 밝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본고의 목표이다.

 

변동의 정치학 : 정치이론가의 탄생

덕과 운명 : 마키아벨리적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의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중심에는 군주론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놓여 있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마키아벨리 해석사에서의 큰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했다. 한편으로, “이탈리아적 전통을 이어받은 자는 마키아벨리즘책으로 유명한 군주론을 특권시하고, 이 책에서 획득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개념이 마키아벨리의 전체 저작을 지배한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적 전통에는 데 산크티스(Francesco de Sanctis)부터 그람시를 거쳐 트론티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그 끄트머리에는 그람시를 토대로 하면서 군주론의 저작을 국민국가시작의 사상가로 위치시킨 알튀세르도 연이어 있다. 다른 한편,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소재로 공화국론을 전개하는 로마사논고를 중시한 영미의 연구자들은 이 책의 공화주의를 마키아멜리의 중심적 사상으로 평가하면서, 군주론을 이론적으로 애매한 상황적 산물로 간주한다. 이런 연구자들 중 최대 거물이 포콕이다. 즉 네그리에게 군주론로마사 논고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알튀세르와 포콕 사이에서 마키아벨리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에 다름없으며, 그 반대도 또한 참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네그리가 갑작스럽게 이 커다란 문제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군주론이전,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 시절까지로 소급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이론적 경력을 하나하나 추적해간다는 점이다. 게다가 네그리는 로마사 논고이후, 피렌체사를 필두로 하는 후기의 저작에 대해서도 논급하기 때문에, 이 마키아벨리론은 마치 피렌체의 정치사상가에 대한 응축된 이론적 전기(biography)의 양상을 띤다. 알튀세르에게서도 포콕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마키아벨리의 에 대한 이런 관심을 통해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처럼 우뚝 일어서고 부서지며, 재차 더욱 강고하게 일어서려고 하는 모습을 그려내려고 하는 것이다.

 

잰 걸음의 태양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표면을 이미 1494번이나 돌았네. / 그 이후, 서로 다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인들에게 문을 열었고, 야만인들에게 짓밟히는 고통을 겪었다네.

 

마키아벨리의 10년사(1504)에서 인용한 이 문장을 네그리는 자신의 마키아벨리론의 첫머리에 둔다. 1494년 프랑스군 침공에 직면해 용병으로 맞선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맥없이 패배했다는 것을 전하는 구절이다. 그것을 계기로 시작된 11차에 걸친 이탈리아 전쟁은 유럽에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한 세력균형의 체계를 산출하고, 이탈리아의 공화국들로부터 알프스 북부에서 할거[거점을 두고 활동]한 군주정 국가로 결정적으로 패권을 이행시켰다. 이 사건이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과 신대륙발견(1492)과 더불어, 근대 유럽의 기점으로 지목된 것도 그 때문이다. 포콕은 이미,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가 일단 붕괴한 1494년부터 근대 공화주의 사상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이 날짜는 단순히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정치상황의 변화의 지표가 아니라 근대의 가장 근원적인 소여가 개시된 날짜이다. 그 주어진 이름이 바로 변동[변전] mutatio’이다. 10년사의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 이후에 변동의 시작을 돌이켜봤듯이, 네그리는 근대의 끝에서부터 근대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거기에서 변동을 찾아내고 있다.

다만, 마키아벨리는 결코 변동을 소여로서 찾아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미 외교관 시절의 제언에서, 그는 무력양식(良識)’의 종합에 정치적 변동을 관장하는 활동적 원리가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관찰의 대상이든 활동의 대상이든, 거기서는 변동이 주체에 대립하는 객체에 머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더 중요한 한 걸음은, 주객의 대립 이전의 차원에서 변동을 파악하고, 주체의 활동을 변동과 일치시키고, ‘변동그 자체를 통째로 주체화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네그리가 자연주의적 지평으로부터 역사적 구조로라고 부르는 이 이행과 더불어, “변동은 인간이 그 내부에서 활동하고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 그렇게 구성된 현실을 돌파해서는 새로운 현실을 다시 구성하는 박동에 의해 획기화된 역동적인 과정이 된다. 피렌체에서, 혹은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 왕국의 궁정에서, 역사적 회고를 감안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고, 그 장래를 점쳤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미 변동그 자체, ‘시간그 자체에 구성하는 권력이 내재한다는 입장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키아벨리가 이 역사의 역동성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긴 과정을 경과해야 했으며, ‘생명의 철학같은 역사주의로 마키아벨리의 정치가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긴장의 누적이며, 폭발의 기대이며, 기성 질서와 균형의 파탄으로 향하는 잠재력을 품고 있는 중층적 결정의 힘이 존재자 하에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런 중층적 결정의 힘 = 위로부터의 결정의 힘 la surdétermination”을 체현하는 군주의 정치기술을, 1502년부터 1504년에 걸쳐 체류한 체사레 보르자의 궁정에서 목격했다. 시간 속에서 비롯되고 변동하는 상황 속에서 호기(好機)를 붙잡고, 시간을 지배하기 위한 그 기술 , ‘운명에 맞서는 의 관찰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또한, 관습에 의한 것도 계약에 의한 것도 아니라 활동 그 자체에 입각하여 자기를 유지하는 새로운 주권의 개념을 품게 된다.

그러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에게 한층 더 중요한 전기(轉機)라고 생각하는 것은 1503년의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이었다. 그의 아버지교황 알렉상드르 6세 사후, 우유부단을 드러내고, 순식간에 상황이 그를 앞질러간 자신의 영웅의 모습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있어서의 의지주체적 기투의 중요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역사적 시간을 내면화하고, 인간적 시간에 통합하고, 공공연하게 드러난 잠재력을 특이한 것으로 하는 것이다.” 이후,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관찰자이기를 그만두고, 이탈리아의 종속상태를 타개하는 길을 물색한다. 정치이론가로서든, 스스로 활동의 주체로서,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본 잠재력을 제 것으로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권력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구성적 주체로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탐구는 1512,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피렌체의 공화적 정부가 붕괴하고 메디치가가 권력에 복귀하는 것과 더불어 훨씬 절박해졌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궁정에서 쫓겨나고, 투옥의 쓰라림과 조우한 이 위기적 상황 속에서 씨름했는데, 우선 공화국의 책』 ― 『로마사 논고』 ― 을 썼고, 이어서 투옥 이후,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쓰게 된 군주론이었다, 이렇게 네그리는 단정한다. 이리하여 군주론객관적인 한계와 주관적인 절망의 특이성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지어진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우리의 시야에 부상하는 것이다.

 

구성적 원리의 고독 : 군주론

군주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네그리는 맨 처음에,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la principauté”가 폴리비오스 식의 정체 분류론에서 말하는 군주정귀족정도 아니고, 따라서 공화국의 책이 다루는 공화국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고찰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역사적 주체”, 혹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원리에 바쳐지고 있다. 네그리에게 군주론구성적 원리의 책이며, 정치체를 정치체로서 구성하는 기초조건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론적책인 것이다.

하기야 이 해석 자체가 반드시 네그리의 독자적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논의를, 활동 그 자체에 의해 정당성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정치적 혁신자에 대한 고찰로 위치시키는 포콕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국민적 국가의 시작을 사고한 책으로 위치시키는 알튀세르도, 그다지 다른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렌트도 서양 근대에서 최초로 국가의 창설을 사고한 인물로 마키아벨리를 위치시켰다. 그러나 이 구성적 원리의 급진성을 평가하면서 네그리가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군주론에 내포된 아포리아이며, 실천적인 불능(不能)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불능을 지적할 때에, 네그리가 참조를 요구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이다.

 

이 원리가 지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존재론적 깊이를 부정하려고 한다든가, 그 고독과 기투의 반전이 얼마나 강력한 삶의 원천을 나타내는가를 잊자는 것이 아니다[주는 여기에 붙는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혁신은 귀결의 공허 위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나 그 때문에 절망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실제,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원리는 여기에서 전복적이며, 전복적인 로 머문다. 그의 사고의 운동은 적대의 운동이지 경향의 운동이 아니며, 위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해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혹은 그 해결을 찾아내려고 해도 미리 그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기투의 반전은, 혹은 (훗날 출판된 마키아벨리와 우리에 입각해 말한다면) 실천적·이론적인 불능역능의 교착은, 그가 자기 스스로는 해결 불가능한 물음을 제기한 점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달성[성취]된 사실로서의 국가의 정당성을 묻는 근대의 모든 정치철학자들과 갈라서며, ‘고독속에서, “성취[달성]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국가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현실적인 조건을 사고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의 시작의 불가능성과 더불어, 시작에 있어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효(実効)적인 힘을 폭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말투는 충분히 알고 있기에, 네그리는 이렇게 매우 알튀세르적인 반전에 그치려고 하지 않는다. ‘역능 = 잠재력 la puissance’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 네그리에게 알튀세르의 불능 l’impuissance’고독 la solitude’은 너무도 관념적으로 비쳤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때, 네그리의 유물론이 시간과의 관계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군주론에는 전복의 운동만 있으며 경향의 운동이 결여되어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위기를 인식하면서 해결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으며,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무엇보다도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알튀세르와 네그리의 관계와 관련된 한, 사태는 조금 복잡하다. ‘역능불능, 혹은 고독다중, 구성적 권력에 있어서도 또한, 서로를 뒷받침하면서, 끊임없이 반전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네그리에게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네그리는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 알튀세르를 호출하고,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성원을 보내게 되는데, 그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제 잠시 동안 네그리의 논의를 추적해야 한다.

일단 군주론의 한계를 시간으로부터의 고립,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견줘본 뒤에, 네그리는 이 책의 존재론적 깊이와 실천적인 불능의 교착을 더욱 파고들어 검토한다. 그때 네그리가 우선 주의하는 것은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이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새로운 군주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은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구성적 원리무장한 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마키아벨리에게서의 군사력 문제에 대해서 아렌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네그리는 그것을 기피해야 할 정치적 폭력의 행사 문제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시민은 스스로 무기를 취해 공화국을 방어하는 전사여야 한다는 주장에 고전적 공화주의의 한 가지 핵심을 인정한 포콕의 고찰이 똬리를 틀고 있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포콕을 따라 말하면, 유럽의 군주정 국가가 국왕 상비군을 정비했던 시대에 시민의 민병조직에서 공화국의 자유의 요체를 본 마키아벨리의 관점으로, 근대주권국가에 의한 정당성 있는 폭력 행사의 독점”(베버)에 근본적인 이의를 들이는 현대적인 사정거리도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에서 마키아벨리의 한계를 간파한다. 정말로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군사력의 문제는 단순한 폭력행사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력은 정치체를 조직화하고, 그 구성원의 을 함양하므로 평상시에도 국가의 구성의 역동성을 체현하기 때문이다.새로운 군주에게 이 절대적인 원리인 이상, 군사력이 절대화된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의 점에 있다. 무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군주를 위한 것인가, 인민을 위한 것인가?”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는 이 가장 긴요한 물음에 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네그리는 민주정의 선택 그 자체의 포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도 지적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무장하고 덕이 높은 군주에게 구성적 원리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그 군주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거기에서는 분명히, 힘이 인식을 낳고, 인식이 힘을 낳는다는 직관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새로운 군주는 단순히 국가의 저자일 뿐 아니라 논리와 언어의, 혹은 윤리와 법률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다만, 체사레 보르자라고 생각되는 정치적 영웅을 모델로, 군주가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을 역설하는 데 머문다. 그리고 이 윤리적 호소는 구성적 원리의 존재론적 차원 파고 들어갈수록 강조되고 공회전하게 되는 것이다.

강렬한 군사주의와 극단적인 주관주의 네그리가 군주론의 한계로 보고 있는 것은 네그리 자신도 포함한 70년대의 좌익운동의 조류들을 생각나게도 하는 그런 전복으로의 과격한 경도이다. 구성적 원리의 운동은, 흡사 체사레 보르자가 순식간에 몰락했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장애에 부딪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장애의 유래를 물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 끊임없이 새롭게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려고 더 한층 군사력과 주관성에 박차를 걸고, “전방으로의 도주를 결행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 하에서 실행되는 작전의 절대성 외에 기초를 갖지 않는 이 [구성적] 원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구성적 권력이란 모든 한계의 돌파이며, 결코 편히 쉬지 않는 의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전방으로의 도주에 불모의 과격주의의 귀결을 보고 그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전방으로의 도주에서 군주론의 중심적인 주제를 간파한다. ‘구성적 원리의 비극이라고도, ‘덕의 비극이라고도, ‘정치적인 것의 비극이라고도 불리는 주제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비극은 필연적이다.”구성적 원리가 자신의 활동에 의해,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하는 이상, 그 활동 자체는 창조되어야 할 가치의 직전에, 진위와 선악의 저편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그 활동은 항상 사후의 관점에서 판가름될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성적 원리는 항상 우연적인 상황에서 사물의 실효적인 원리”(마키아벨리)에 직면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원리의 활동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활동 그 자체를 배반하고, 되풀이되는 활동에 대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네그리더러 말하게 하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다양한 상황을 열거하고, 지칠 줄 모르게 권모술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시도하면서, 항상 뜻대로는 안 되는 결과의 배신에 우롱당할 수밖에 없는, 이런 구성적 원리의 비극을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네그리의 비극에 대한 고찰은, 틀림없이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포콕은 이미, 군주론의 주제가, 부단한 행위의 연속에 의해 자기 정통화를 꾀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 정치적 혁신자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항상 결과의 타율 행위의 결과가 바로 그 행위의 의도를 배반한다는 것 에 의해 아이러니컬하게 배반당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님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 있어서 거기에, ‘운명을 앞에 둔 의 불행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 불행의 인식이야말로 정치질서의 정통화는 단기적인 혁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기적인 지속 속에서 관용에 의해 도모되는 것에 다름없다고 하는, 포콕의 역사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입장의 배경에 똬리를 틀고 있다. 아무래도 위대한 역사가에 어울리는 사후의 사상이다.

포콕과 더불어 구성적 원리의 위기를 눈여겨보면서, 네그리는 이 역사가의 비관주의를 단호하게 물리치려고 한다. 정말이지, 군주론의 말미에서 이나 자유의지에 의한 운명의 지배의 가능성이 역설되고, 도래할 새로운 군주에 이탈리아 재건의 꿈이 맡겨져 있다는 것을 보고, 네그리는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막다른 골목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을 단념하고, ‘구성적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군주론에서는 구성적 원리절대성이 철저하게 추구되지 않고 끝나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군사력이나 주관의 절대화 등에는 전혀 없다. 그와 반대로, 절대화가 불철저했다는 것, 그리고 운명에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야말로 문제이다. 이리하여 군주론에서 로마사 논고로의 행적이, ‘구성적 원리의 심화의 과정으로서 독해된다. 마키아벨리는 고독의 사상가로부터 다중의 사상가로, 그리고 스피노자보다 훨씬 선구적으로 절대적 통치로서의 민주정의 사상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다중의 분리로부터 민주정의 구성으로 : 로마사논고

다만 네그리의 군주론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단순한 직선적 도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에게서 군주론의 사정거리는, 로마사논고와의 상호관계에 놓여서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로마사논고의 사정거리도, 군주론이 가져온 질적인 비약없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콕은 로마사논고에서의 로마를 여러 공화국들 중의 새로운 군주에 빗댔다. 네그리는 그 비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1512년부터 1513년에 쓴 군주론공화국의 책, 군주론이전에 기획되고, 일단 중단된 후에 1515년부터 1517년에 완성한 로마사논고의 생성과정 속에 다시 놓는 것이다.

당장 네그리는 로마사에서 소재를 취하는 로마사논고의 정치적 고찰이 고대를 모델로 하는 온갖 사고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서론에서 얘기되는 고대인의 범례는 인간 본성이나 정념에 대한 보편적인 사정거리를 가진 고찰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며, 마키아벨리는 이 정념론을 매개로, 역사 속에 주체를 우뚝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로마사논고에서는, 경험론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가 처음부터 돌파되는 것이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로마사논고1편에서 제시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체론이, 폴리비오스적인 도식으로부터 이탈한다는 지적이다. 정말이지, 거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분류에 기초하여, 군주정에서 폭적, 폭정에서 귀족정과 과두정, 나아가 민주정과 무정부상태로의 순환이 얘기되고 있다. 또한 그 정체의 부패의 순환에 맞서는 최선의 정체로서, 로마공화국의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혼합정체의 우위조차 역설될 것이다. 그러나 네그리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러나 [혼합정체의 분석에 있어서] 민주정 원리의 도입은 전적으로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바로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 헌정은 혼합적인 한에서, 가장 완성된 공화국을 형성했다. 이 완성에 이른 것은 인민과 원로원의 분열 la désunion에 의해서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열로부터 소요로 가득 찬 공화국이 생기고, 소요로부터 공화국에서의 자유를 방어하는 좋은 질서가 생긴다. 이리하여 로마사논고의 고명한 테제가 민주정의 원리의 도입과 결부되는 것이다. 다만 그때, 일반적으로는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에 기초한 헌정론의 틀을 돌파할 때까지 극화(劇化)시킨다. 그 결과, ‘la constitution’은 이제 헌정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성의 문제로서 논해진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그 돌파를 수행하는 것이, 로마사논고117·18장이었다. “부패한 인민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는, 자유를 계속 시키는 것은 곤란하다고 역설한 뒤, 또한 부패한 도시국가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정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가, 또한 자유로운 정체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에는 그것을 도입할 수 있는가라고 마키아벨리가 묻는 대목이다. 네그리는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 정체의 부패아 자유의 상실을 필연으로 보는 역사가의 비관주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혐오를 읽어낸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군주론에 씨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군주론은 이리하여 폴리비오스적인 비관주의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부패와 자유의 상실을 필연적인 것으로 하는 순환사관을 거부하는 책으로서 재파악된다. 그때 동시에, ‘시간의 절단군주에 의한 위로부터의 결정이라는 군주론의 주제가, 역사 속의 주체의 활동의 계기를 강조하고, 그 주체의 구성 그 자체에 정치적 활동의 중심적 과제를 보는 입장과 결부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군주론구성적 원리는 인민과 원로원 사이에서 발견된 분열을 극화하고,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론의 틀로부터 다수자=다중을 분리하여, ‘인민의 창설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던 구성적 원리가 인민이라는 신체를 획득하고, 민주정을 창조하기 위한 구성적 권력으로서 재정의된다. 그것과 더불어 구성적 권력의 주체는 인민 그 자체, 혹은 인민을 구성하려고 하는 다중그 자체가 된다. ‘군주는 이 구성의 원리=시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사논고1편에 민주정으로의 지향을 확인한 후, 네그리는 2편의 을 둘러싼 고찰에 대해, 거기에서는 다중이야말로 의 집단적 주체로서 위치지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은 더 이상 단순히 운명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끊임없이 대치되는 장애를, ‘운명에 기대면서 극복하는 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덕은 산 노동이며, 생명에 대립하여 견고한 것으로 된 전통이나 권력을 조금씩 파괴할 수 있다.”, 혹은 구성적 권력다중이라는 집단적 주체와 더불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하는 경향의 운동, 혹은 자기 결정을 요구하는 투쟁이 된다. 여기에는 네그리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의 급진화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의 도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혼합정체에 기초한 공화국의 통치체제가, 교환가치로 환원된 죽은 노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사이클에 비유되며, ‘다중이 영위하는 공동의 삶 그 자체가, 삶의 재생산을 자본의 재생산과정으로부터 점차 분리시키는 산 노동고유의 생산 사이클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적 권력, 민주정구성, 로마사논고3편의 과제로서 부상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과제는, “르네상스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유를 가져다준 르네상스에 편승하면서, 특히 = 운명 la foritune’의 축적이 가져다준 나쁜 귀결에 맞서, ‘자유의 원리로 회귀하면서, ‘의 주체의 구성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때, 네그리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군사의 조직화를 통한 다중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구성이다. 이제 무장한 덕은 공화국 내부의 조직화와 의 함양이라는 문제계에 명확하게 결부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네그리는 이미 민주정은 강하게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명제를 거론하면서, 이 민주정에서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을 갖고서 조국의 방어에 종사하는 인민 그 자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때, 인민의 구성 요건, 민주정적인 자유의 구성요건으로 간주되는 것이 평등이다. “다중이 부패하지 않는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것을 기능시키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평등이 지배하는 도시국가에서는 군주국을 만들 수는 없으며, 평등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 네그리에게 있어서는 이 고찰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민주정의 예언자로 위치시키는 것을 허용한 것이었다.

그 선행하는 논의를 계승하면서,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가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로마사논고3편에서의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고대 그리스-로마 이후의 공화주의의 판에 박힌 정형화로부터 분리되고, ‘의 축적의 해악에 맞서 평등을 유지하고, 시민의 을 함양하고, 민주적인 공화국의 구성으로 향하는 정치=경제학의 효시로 위치지어진다.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가난의 정치=경제학이,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고찰을 정치적인 정념론에 접속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난의 옹호는 공화국에서의 군사력 유지의 요구에 뿌리를 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 자유를 요구하는 정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정념론에 정치적 구성에 대한 고찰의 요체를 간파했던 자신의 스피노자론과 평행하여, 정념의 정치에 대한 고찰에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론의 정점을 찾아낸다. 거기서 마키아벨리는 정념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현실의 구축, 새로운 현실의 구축을 향해 해방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해방된 정념은 공화국 속에 소요를 산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념은 욕망사랑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 한,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 정념적 주체인 다중, 그 자체 유동적이고 시간적인 존재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타성[관성]이나 객관성과는 무관하게, 공화국을 위협하는 부패와 자유의 상실에, 부단한 재창설, 부단한 개혁을 갖고 맞설 수도 있다. ‘의 주체를 집단적인 것으로 하고, 그 집단적 주체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념적인 양상에 있어서 파악함으로써, 마키아벨리는 시간의 주체화를, 즉 민주적인 자기 통치의 과정으로서의 역사적 과정의 절대화를 철저하게 추진해나간다. 네그리에 따르면,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로마사논고117~18장에서 환기된 질적 비약의 도달점인 것이다.

위와 같은 분석을, 또 다시 포콕과 맞댈 수 있을 것이다. 포콕도 로마사논고순환을 피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완전히 균형을 이룬 정체를 어떻게 수립하는가라는 폴리비오스적인 문제설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지적한 뒤,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군주를 포함한 일체의 초월적인 차원의 개입 없이, 단지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정치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논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서는, 그런 인식이야말로 군주론이상으로 파괴적인 로마사논고의 핵심에 있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포콕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관심은, 제국적 확대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 자기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유를 상실하게 된 로마공화국의 역사의 변천을, 그 특이한 헌정의 ()균형에 기초한 것으로서 분석하는 데 있으며, 원로원과 인민 사이의 분열도 군사-경제-정념-정치를 잇는 론의 분석도 이 점, 포콕의 분석은 분명히 네그리를 선취하고 있는데 그 헌정론·역사론의 틀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포콕이 집단적인 역사과정에 정치질서를 창조하고, 정통화하는 힘을 인정하더라도, 그 힘은 최종적으로 과거의 역사적 순환의 설명원리를 제공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포콕은 로마사논고에 공화주의적인 현양을 간파하기는커녕 오히려 로마의 길에는 최종적인 쇠퇴에 대한 보증은 없다. 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근미래에 있어서는, 로마의 길은 더 현명하며, 더 영광으로 가득 찬 길이다라는 아이러니한 인식을 간파하게 됐다.

로마사논고론에서도 또한, 네그리가, 최종적으로 운명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의 불행을 내다보는 포콕의 고전적 공화주의론을 전도하고, 그 틀을 돌파하고, ‘구성적 권력에까지 철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그리에게서, 마키아벨리는 결단코 역사철학자가 아니며,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네그리의 포콕에 대한 이런 관계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폴리비오스적인 균형론으로부터의 다중의 분리에 로마사논고의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을 인정한 네그리는, 동시에 그 마키아벨리의 논의가, 그람시가 말하듯이 민주적 결정의 주체형성으로 향하는지, 포콕이 보듯이 간신히 균형론의 틀 안에서의 다수자의 역할의 강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는 애매하다고 일부러 주석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유일한 해결의 길은 이런 애매함을 불식하는 것이 아니라 극화시키는 것이다.” 애매함의 극화는 단순히 공화주의적인 다수자=다중의 역할의 강조를 자의적으로 민주정의 구성으로 고쳐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마, 고전적인 공화주의의 틀로부터 다중분리하고, 그 정치적 주체화를 도모하려고 하는 네그리의 시도에 내재하는 애매함이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가 그 애매함의 이론적·실천적인 사정거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를 겨냥한 고찰이다. 그리고 포콕도 알튀세르도 논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 저작의 독해를 통해서, 네그리는 다시 이 두 명의 선행자와 교착하게 된다.

 

다중과 고독 : 피렌체사

네그리는 이 피렌체사(1525-1527 완성), 군주론로마사논고를 거쳐 완전한 표현을 얻은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책으로 위치시킨다.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근간에는, ‘사물의 질서구성적 권력에 의해 구성된 산물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으며, 그 인식은, 이미 본 듯한 시간의 주체화, 역사의 주체화의 귀결에 다름 아니다. 마키아벨 리가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라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가 실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의해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열고, 인식과 실천의 일치를 체현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이런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역사유물론이라고 바꿔 말한다. 로마나 아테네 이상으로 다수의 분열을 품고 있었던 피렌체의 공화국이, 바로 이 분열 그 자체를 동력으로서 발전을 이룩해왔다는 것을 강조할 때,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에 역사의 동력을 보는, 맑스적인 인식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피렌체사의 해석에 있어서, 네그리는 다시금, 이 책의 구성 그 자체에 들어 있는 균열에 눈길을 머문다. 그 서문도 증언하고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당초 이 역사서를 1434년의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에서의 메디치가 지배의 획기(劃期) 에서부터 얘기했는데, 그 당초의 예정을 변경하고, 1434년까지의 피렌체사 서술에 몰두하게 됐다는 것이다. 피렌체사는 그것이 구성된후의 모습에 거스르며, “구성하는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을 좇아 재독해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네그리는 우선 피렌체사후반부의 독해에 착수한다. 처음에 다뤄지는 것은, 이 후반부의 첫머리, 51장의 첫 구절이다. 마키아벨리는 거기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국가의 끊임없는 요동을,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사물의 끊임없는 동요에 빗대고, 그것을 덕의 성쇠의 순환과도 결부시켰다.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이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적냄새를 맡는 네그리는 이 자연주의비관주의피렌체사의 출발점이 있다고 단정한다. 로마사논고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다중분리구성으로 향했듯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도 또한, 이 회귀하는 비관주의내다보면서 이로부터 몸을 떼어내고 역사유물론의 정교화로 향하는 것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피렌체사후반부의 서두에는 마키아벨리의 자연주의, 의뢰주이기도 한 메디치가에 대한 예찬이 현저하게 간파된다. 서술이 기본적으로 연대기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연주의와 메디치가 예찬은 뒤로 갈수록 사라지고, 정치분석은 보다 생동감을 띠게 된다. 7편의 로렌초 디 메디치의 시대의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균형의 분석에는, 마키아벨리의 중요한 전기(轉機)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8편에서의 파치(Pazzi)의 음모의 분석에서는, 이미 유물론적이고 근대적인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 뚜렷하게 간파된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서술의 대상이 된 것은, 메디치가에 맞선 귀족집단의 반란과 메디치가에 가담한 민중봉기의 대결이었다. 거기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두 개의 구성적 권력이 격돌하는 것이며, 그 격돌을 배경으로서, “엄숙하고도 쾌락적이기도 하며, 두 명의 상반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결합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인간, 로렌초 디 메디치의 정치적 이 분석된다 네그리는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피렌체사후반부의 운동을 소묘하면서, 네그리는 전반부로 되돌아가며, 특히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까지의 15세기의 피렌체 정치사의 분석에 입각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의 주요한 논점을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15세기 중반까지, 확대된 교황권 하에서 이탈리아는 분열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군주들은 나태 속에서 비열한 무기사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침체하는 이 중세적 시간을 끊어내고, 제도의 변동을 초래한 것이,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계급투쟁의 전개였다. 실제로 피렌체사3권의 치옴피의 난(Tumulto dei Ciompi)의 서술에는, 모직물업이 번창한 당시의 피렌체의 계급분석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가 부유민영세민을 두 개의 정치적 주체로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이런 유물론적인 계급분석 이상으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진 마키아벨리의 정치-경제적 진단이다. , “피렌체는 혼합정체를 획득할 수 없다.” 근대적인 시장의 발전은, 계급투쟁의 심화가 혼합정체적인 균형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고, 그저 부유자의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뿐이었다. 떨쳐 일어난 영세민은 무장 해제되어버린 한에서, 더 이상 급진적인 민주정도 실현의 가능성을 단념해버렸다.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양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중간적인 길을 따라 좋은 법률과 좋은 질서를 대신해 유일자의 덕에 호소하고, 메디치가 지배의 현황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수자인 귀족의 패배와, ‘다수자=다중인 인민의 주변화를 통해 메디치가의 발흥이 묘사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로렌체 디 메디치가 체현하는 있을 수 없는 결합이 전망된다. 네그리는 바로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핵심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리하여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중심적 모멘트에 도달했다. 이상이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이 갖춰지고, 덕이 역사가 된 경우라도, 종합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발견에 말이다. 이상이 조금이라도 현실화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결합으로서일 뿐이며, 예외적인 경우로서 시간과 더불어 곧바로 소진한다. 단절은 사실상 종합보다도 훨씬 더 현실적인 것이다. 구성적 권력이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쟁란, 봉기, 군주 등처럼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은 결코 역사적 변증법으로는 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종합과 지양의 모멘트를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단절이야말로 구성적인 것이다.

 

군주론에서 구성적 원리로서의 을 발견하고, 구성적 원리의 위기에 직면한 후, 로마사논고에서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절대적인 구성적 과정을 파악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는 이 구성적 과정의 원동력으로서 계급투쟁을 찾아냈다. 그러나 구성적 권력의 탐구에 바쳐진 이 행로는, 피렌체사에서 결국 실패에 직면한다. 마키아벨리에 있어서는, ‘계급투쟁이 종합되거나 지양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중이 담지하는 구성적 권력 = 구성하는 권력구성된 권력이 된 순간에, ‘구성적 권력으로부터 이반(離反)하기 때문이다. ‘덕의 비극이 회귀한다. 실제로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담론이 근대정치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저 그가 처음으로 의지와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서 잠재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특히, 의지와 결과, 덕과 운명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문제적인 것으로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단절종합보다도 현실적인 한에서, 모든 종합은 모름지기 일시적인 것, 사이비 융화로만 있을 수 있다. 주체화를 요구하는 다중의 운동은, 최종적으로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그리에게서는, 이 미완성이야말로, 단절이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 지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복음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이 끝날 수 없다는 것, 다중의 주체화의 과정이 열려 있는 것, 비판적인 과정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에서 포콕에 대한 네그리의 애매한 가까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포콕처럼 구성적 과정의 중핵에 있는 단절을 헌정론의 틀 속에 가두고, 단절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 공화국의 성쇠를 관조하며, ‘덕의 비극을 비관주의적으로 확인하며 끝나지는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계급투쟁은 어디까지나 다중에 의해 담지되는 주체적인 투쟁이며, ‘계급투쟁이야말로 헌정을 포함한 모든 제도의 근간에 있다. 그렇지만 단절, ‘한 명·소수자·다수자사이의 균형론의 테두리 안에 집어넣은 포콕이, 네그리가 고전적 공화주의를 계급투쟁의 중심에 있어서 재해석할 때의 중요한 참조항이 된다는 것도 의심스럽지 않다. 포콕은 균형의 관념에 의거하기 때문에, 헌정의 중심에 파고든 단절그 자체를 소거하는 것이 아니며, 바로 그렇기에, 공화국의 질서가 항상 허약한 균형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공화국의 유지를 위해서는 시민이 항상 직접적으로 헌정의 유지를 담지하는 이 높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 그렇지만 그 의 활동은, 뜻대로 되지 않는 귀결에 농락당하고, ‘운명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 인식 위에 서서 보수주의를 선택하는 포콕에게, 네그리는 단호하게 등을 돌린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회귀하는 비관주의,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의 탐구의 배후에 항상 들러붙어 있었던 만큼, 포콕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친근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계속해서 말한다. 단절치유하기 어려움, 어이없게도 구성적 권력의 비판적 권능의 끝이 없음을 보려고 하는 낙관주의를, 마키아벨리는 반드시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구성적인 잠재력의 닫혀 있음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중의 힘과 그 기획의 내재적인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잠재력에 대립하는 장애로부터, 즉 지금 여기서 다중이 주체가 되는 것의 무능력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나 패배자였다. 다중의 주체화, 민주정의 구성을 향한 모든 탐구는, 결국 마키아벨리를 자신의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는 객관적 현실에 직면하게 했을 뿐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어디까지나 고독했던 것이다. ,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 고독 속에서도, 결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을 손에서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패배를 웃음과 더불어 받아들이고, 연애의 욕망의 놀이를 통해 개개의 주체에게 숨겨져 있는 힘을 응시하는 희극작품도, 주권을 법적인 정통화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시민의 군사로의 참여에 의해 계속 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 혹은 또한 구성적 권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적합적 주체의 신화적 이미지를 제출하는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La vita di Castruccio Castracani da Lucca), 마키아벨리의 불굴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그 사정은, 1527,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개혁되지 못하고 종언한 것을 지켜본 뒤에도 변함이 없다. 말년의 사신(私信)모든 것은 멸할 것이다라는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가 결코 쾌활함도 부드러움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삶을 그 종국까지 추적하면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금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알튀세르에게 인사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근대의 어떤 작가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여느 때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의 사상가도, 구성을 요구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원리와 민주정의 모든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재, 이 공허로부터, 마키아벨리는 문자 그대로 주체의 욕망을 탈취하고, 그것을 프로그램으로서 구성한다. 마키아벨리에게서 구성적 권력은 그런 것이었다.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는 절대주의의 사상가도, 구성을 향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며, 원리와 민주정의, 달성[성취]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를 실현하는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뛰어난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였던 것이다 단절치유하기 어려움이야말로 구성적 권력을 끝이 없는 운동을 향해 휘몰아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우리로서는 이 논의에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네그리에게서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조건의 부재야말로, 주체의 욕망을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향해 활기를 북돋는다. 여기서 네그리는, 알튀세르에 대해, 포콕에 대해 행했던 것과 완전히 닮은 전도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 『구성적 권력집필 당시의 네그리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사후 간행된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의 독자는, 이것과 똑같은 전도를 알튀세르 자신이 수행했음을 알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일련의 마키아벨리론에서, 마키아벨리의 실천적인 불능과 이론적인 역능의 반전에 멈춰 섰던 알튀세르는, 그의 우연성의 유물론에 대한 논고에서는, “성취[달성]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건설의 조건의 부재를 인식한 마키아벨리야말로 성취[달성]된 사실로서의 기존의 국가의 근간에 있는 조건의 부재혹은 우연성을 폭로하는 것이며, 조건의 부재그 자체 없이 우연성의 필연성의 인식에 의해, 항상 머물러 있는/그치고 있는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조건의 부재로부터 주체의 욕망으로 향하는 네그리와, 그 동일한 조건의 부재를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우연성에서 찾아내는 알튀세르의 차이는 있더라도, 네그리에 의한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전도는, 이 알지 못했던 알튀세르 자신에 의한 알튀세르의 전도에 정확하게 선행하며, 그것을 정확하게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구절에서 네그리의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상 구성의 정치적 존재론도, 구성과정으로서의 역사도 아니다. 그런 다중구성적 권력이 전개되는 장소 바로 앞에서, ‘다중구성적 권력에 대한 사색을 가다듬은 마키아벨리 그 사람의 고독에야말로, 네그리는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하고, 그 기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의 부재에 직면하면서도 여전히, 거기에서 새로운 욕망의 주체를 찾아내려는 주체의 고독이다. 그런 고독 la solitude’한 주체야말로 다중 la multitude’의 주체화를 요구하는 모든 이론적=정치적 활동의 출발점에 있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또한, 네그리 자신의 고독일 것이다. 사실 네그리는 다시금 알튀세르와 함께 이렇게 말한다.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우리는 우리를 잊은 듯 그에게 사로잡힌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뭔가 억압된 것에 대한 친근감, 저 기묘한 친근감이다.” 마키아벨리가 억압된 사상가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은, 바로 그가 정치적인 것의 존재의 근간에, ‘조건의 부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포콕도, 알튀세르도, 그리고 네그리도 또한, 그 억압될 사상가의 인식에 주목한다. “마키아벨리, 모든 억압을 넘어서 정치를 사고하려고 하는 자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존재론의 지평의 이름인 것이며, 바로 그 지평에서, 네그리는 포콕이나 알튀세르와 함께, 정치의 비극과 동시에 그 가능성이, 혹은 정치의 가능성과 더불어 그 비극이 한꺼번에 개시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정치적 양가성을 둘러싼 교착과 반전에 이것 이상으로 계속 구애되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을 것이다. 네그리는 마키아벨리의 뒤를 쫓아, ‘고독에서 다중으로의 길을 쾌활하게 밟고 나선다. 바닥없이 쾌활한 낙관주의 끝에, 끝도 없는 계급투쟁의 장소가 열려 있을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내용이라 굳이 번역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지만, 일련의 작업을 위한 참고 문헌 목록에 들어 있어서 입문용을 겸해서 번역, 공유한다. (2018년 3월 27일)


대중의 정념의 향방

안토니오 네그리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오오타 유스케(太田悠介)

현대사상, 20137월호. <大衆情念のゆくえ: アンネグリとエティエンヌバリバルのスピノザ,>



서론

제국, 다중에 이어 공통체가 간행됨으로써 안토니오 네그리(1933-)와 마이클 하트(1960-)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전개한 논의의 전모가 드러났다. 현대세계 분석과 도발적 예언이 교착하는 이 3부작은, 많은 시사와 논점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논의가 집중된 것이 다중(multitude)’ 개념임에 틀림없다[주1]. 네그리/하트의 뜻을 받들어서 군중=다수성으로 때로 번역된다는 것이 드러내듯이, 이 개념은 동일성에 의거하지 않는 집단의 존재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주1]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Daniel Bensaïd. Résistances. Essai de taupologie générale, Paris, Fayard, 2001, pp.191-212 ; Ernesto Laclau, La Raison populiste, traduit de l’anglais par Jean-Pierre Ricard, Paris, Seuil, 2005, pp.278-283.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다중은 스피노자에게서 유래한다고 한다. 네그리/하트에게 <제국>이란 지배적인 주권국가군, 그 주권국가의 정당성을 우회하는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등의 초국가적인 정치적·경제적 제도, 나아가 이것들을 보완하는 메가뱅크나 국제인도주의조직이 한 몸이 되어 구성하는, 특정한 극을 갖지 않는 네트워크적 권력이다. 반면 다중은 <제국>과 마찬가지의 유동성을 갖고서 이것에 대항하는 주체로서, 극히 긍정적인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저작군에 이 개념들을 다시 놓는다면, 이 긍정성이 반드시 자명한 것은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어휘의 차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점이 밝혀진다. 다중이라는 단어는 [스피노자의] 미완의 정치론(1677)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이것보다 2배 이상의 분량인 신학정치론(1670)에서는 불과 세 번, 주저인 윤리학(1677)에 이르러서는 많은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서 한 번 등장할 뿐이다[주2]. 이 간단명료한 사실이 나타내는 것은, 다중을 축으로 <제국> 3부작을 쓴다는 네그리/하트의 수법 그 자체에, 이미 두 사람에 의한 스피노자 해석, 다중 해석의 일정한 방향성이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네그리/하트가 사용하는 다중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의 위험성이 있다. 더 유의해야 할 것은 신학정치론의 다중이라는 단어가, 어느 대목에서든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다중은 미신에 사로잡히기 쉽고[주3],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질은 감정에 좌우되며[주4], 때로는 흉폭해져서 국가를 위협한다고 간주됐다[주5]. 이런 서술을 감안한다면, 네그리/하트의 해석에 반하여, 다중의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스피노자로 돌아간다면, 다중의 부정성이 확실해진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다중의 양의성이라는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주2] Emilia Gancotti Boscherini, Lexicon spinozanum, t.2, La Haye, Martinus Nijhoff, 1970, pp.728-729.

[주3] Baruch de Spinoza,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traduit et annoté par Charles Appuhn, Paris, Flammarion, 1965, p.21(畠中尚志 訳, 神学政治論───聖書批判言論自由, 岩波書店, 1944, 上巻, 43).

[주4]  Ibid., p.279(同書, 下巻, 194).

[주5]  Ibid., p.307(同書, 下巻, 241). 

이런 전제를 토대로, 본고에서는 네그리의 단독 저서 야생의 아노말리(1981)를 소재로 하여, 그 다중론을 검토한다. 야생의 아노말리는 동시기에 간행된 맑스를 넘어선 맑스(1979)와 나란히 네그리의 주저이며, 나중의 하트와의 공동작업에 대해, 이른바 이론적인 뼈대에 해당한다. 야생의 아노말리에서는 네그리/하트의 다중론의 원형을 찾아낼 수 있을 듯하며, 그래서 야생의 아노말리에서의 다중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오늘날의 네그리/하트의 논의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네그리의 다중론을 검토하는 데 있어서, 본고에서는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1942-)대중(masses)”론과의 비교를 시도한다. 발리바르는 네그리의 단독저서 구성적 권력(1997)의 불역자를 맡는 등, 프랑스에서 네그리의 소개자 중 한 명이다. 또한 네그리와 발리바르 둘 다 맑스주의를 사상적인 배경으로 갖고 있으면서, 1980년대에 스피노자 독해에 착수했다는 공통적인 문제관심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발리바르와 네그리 사이에는 사실상 스피노자 해석을 둘러싼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사상적인 차이가 두 사람 각각의 여정에 깊은 영향을 주면서, 현대세계를 둘러싼 두 개의 상이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본고는 이렇게 네그리와 발리바르에 의한 스피노자의 사상의 수용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이 점의 해명에 있어서는 두 사람을 1980년대에 스피노자로 향하게 했던 유럽의 사회상황의 변화에도 주목하고, 사상과 역사의 두 측면으로부터 문제를 개시하도록 힘쓰고 싶다.

 

1. 네그리의 다중론

1)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례성과 스피노자의 이례성

야생의 아노말리1982년에 간행된 불역본에 수록된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알렉상드르 마트롱, 이렇게 세 명이 각각 쓴 서문과 더불어, 196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퍼졌던 스피노자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스피노자 재독해의 기운을 대표하는 한 권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다.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의 타당성을 둘러싸고 많은 난점이 지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이 여전히 독자를 매료시킨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 17세기의 스피노자가 그 시대로 환원되지 않는 이례성(anomalie)”을 갖추고 있었다는 테제가 내뿜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주6]

[주6] 네그리의 스피노자론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浅野俊哉上野修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浅野俊哉, スピノザ───共同性のポリティクス, 洛北出版, 2006. 浅野俊哉, 「「絶対民主主義Civitas条件───ネグリのスピノザ解釈をめぐって, 思想, 1024, 20098월호, 117-142. 上野修, アントニオ・ネグリのスピノザ, 現代思想, 263, 1998년 3월호, 166-174. 上野修, 精神論証そのもの───デカルト, ホッブズ, スピノザ, 学樹書院, 1999. 본고는 이처럼 네그리의 스피노자론에 관한 선행연구에 옥상옥을 놓는 것이 아니다. 본고의 주안점은 이런 선행연구의 축적을 토대로 하면서,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의 차이를 밝히는 데 있다

야만적 별종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 이례성은 첫째, 17세기 네덜란드가 차지했던 특이한 위치에서 유래한다. 스피노자가 평생을 보낸 당시의 네덜란드는 절대왕정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후, 생산·무역·금융의 중심으로서 세계사적인 패권국가의 지위를 손에 넣었던 시기에 해당된다. 세계시장을 수중에 거둔 해운업으로 부를 축적하는 상인층이 힘을 쥐고, 정부의 개입은 자유경쟁의 방해가 된다는 그들의 의향이, 암스테르담을 중핵으로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분권화된 무역시장 사이의 완만한 결합으로 구체화됐다[주7]. 그리고 이런 상인층들 사이에서 공유됐던 관용적인 분위기가 철학하기의 자유를 가능케 하는 토양을 형성했던 것이다[주8].

[주7] Immanuel Wallerstein, The Modern World-System II. Mercantilism and the Consolidation of the European World-Economy, 1600-1750, New York. Academic Press Inc. 1980, pp.36-71(川北稔 訳近代世界システム 1600-1750───重商主義ヨーロッパ世界経済凝集名古屋大学出版会, 1993, 43-89).

[주8] Pierre-François Moreau, Spinoza et spinozisme, Paris, PUF, 2003. pp.12-19(松田克進樋口義郎 訳スピノザ入門白水社, 2008, 19-27).

네그리는 당시의 네덜란드에서는 정치권력이 아직 발달하지 않고, 경제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가한다[주9]. 이 점은, 네그리에 의한 영유화領有化[전유, appropriation]’라는 개념의 독특한 이해에서 유래한다(AS: 59). 사실 네그리는 이 영유화[전유]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혹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 이전의 위상을 문제 삼았다(AS: 304-305). 그것은 들뢰즈가 지적했듯이, 구체적인 개개의 힘의 집합을 그것 이외의 것으로 대체하거나, 그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힘들의 성질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역학적인 합성”(AS: 10)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이 힘들의 수와 양이 증대할수록, 그 총합은 더욱 커진다.

[주9]  Antonio Negri, L’Anomalie sauvage. Puissance et pouvoir chez Spinoza, traduit de l’italien par François Matheron et préfacé par Gille Deleuze, Pierre Macherey et Alexandre Matheron, Paris, PUF. 1982 (édition italienne, Milano, Feltrineili, 1981). p.76(杉村昌昭信友健志 訳野生のアノマリー ───スピノザにおける力能権力作品社, 2008이하이 책에서 인용할 때에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AS라는 약호와 함께 원서의 쪽수만 본문 속에 표기한다

그러나 이런 힘들의 자연적 총합의 증대라는 스피노자의 비전(vision)이야말로, 홉스-루소-헤겔이라는, 네그리가 부르는 부르주아적 질서의 계보에 의해 부정된 것이다(AS: 226-227). 우선 정치에 있어서는 각자가 지닌 자연권이 포기되고, 사회상태로 이행함으로써, 권력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 힘들은 상호 결합함으로써 산술적으로 자기 성장하는 길을 차단하고, 권력이라는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제약에 의한 매개를 거쳐야 한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민사회에 있어서는 힘들의 발전은 각자의 자기중심적인 이익의 추구로 환원되고, 이익의 추구를 둘러싼 충돌이 생긴 경우에는, 국가가 그 외부로부터 개입하여 이것을 시정한다고 간주된다(AS: 224). 그리고 네그리가 가장 문제시하는 것은, 힘들의 증대를 이 국가와 시민사회로 분리하여 조직화한다는 전제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생산력생산관계의 질서에 의해 영유화[전유]하는 짓거리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생산관계에 대한 생산력의 우위를 원리로 삼았다고 네그리는 생각한다(AS: 225). 네그리가 말하기를, 스피노자에게 시민사회와 정치국가는 완전히 서로 뒤얽혀 있다”(AS: 305). 이처럼 네그리는 스피노자를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정하는 사상가로서 파악함으로써,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직접 대치하는 일원적인 세계를 묘사해낸다[주10]. 이리하여 힘들의 자생적인 자기 성장에 의거하는 스피노자는, 힘들의 영유화[전유]에 의해 이 가능성을 닫아버린 이후의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항상 이형(異形)의 존재로 비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이 네그리에 의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례성, 그리고 그 시대가 길러온 스피노자의 이례성이다.

[주10] 야생의 아노말리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여전히 헤겔적인 변증법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서 다음을 참조. Pierre Macherey, Avec Spinoza, Études sur la doctrine et l’histoire du spinozisme, Paris, PUF, 1992, pp.245-270. 

couverture de [REVUE_ID_NUMPUBLIE]

네그리의 이 스피노자 해석에서 핵심은 스피노자의 죽음에 의해 미완으로 남겨진 정치론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민주제 개념의 독해이다. 네그리가 정식화한 생산양식의 영유화[전유]에 대한 생산력의 자기 성장이라는 관념은 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의 포기와 분명히 일치한다(AS: 298). 사회계약에 의한 자연상태로부터 사회상태로의 이행과 국가의 설립은 한 번 체결되면 다시 물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취소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다[주11]. 그래서 통치자의 권리란 다중의 집합적인 힘 그 자체일 뿐이다. 그 결과, 통치자가 한 명의 군주제, 약간의 통치자로 구성되는 귀족제, 모두가 통치자인 민주제라는 정치체제를 가리킨다고 생각된 범주도, 실제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각각 상이한 종류의 통치형태를 가진 정치사회에서 다중이 스스로의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공통의 조건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네그리는 이렇게 정치론을 독해해간다.

[주11] 홉스와의 쟁점에 관한 스피노자의 다음 설명을 참조. “국가론에 관해서 저와 홉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그 차이는 다음의 점에 있습니다. , 저는 자연권을 항상 그대로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어떤 도시의 정부도 힘에 있어서 시민보다 나은 정도에 상당할 뿐인 권리밖에 시민에 대해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상태에 있어서는 이것이 상도常道이기 때문입니다.” Baruch de Spinoza, «Lettre L. Spinoza à Jarig Jelles (2 juin 1674)», dans Traité politique. Lettres, traduit et annoté par Charles Appuhn, Paris, Flammarion, 1966. pp.283-284(畠中尚志 訳, 書簡五(一六七四年六月二日忖のイエレス宛書簡), スピノザ往復書簡集, 岩波書店, 1958, 237-238). 

정치론은 이 책의 편집자가 스피노자 사후에 덧붙인 이하 누락(Reliqua desiderantur)”이라는 말로 중단된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이 책의 전반부에서 국가의 원리를 제시한 후,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라는 정치사회의 구체적인 검토로 옮김으로써 현실의 장애에 부닥쳤다는 해석을 촉구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네그리는 이것을 정치론의 실패라고는 판단하지 않고, 다중의 힘들을 영유화[전유]하는 것 없이, 이것을 합성한다는 스피노자의 비전이 남겨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주12]. 야생의 아노말리의 거의 결론부에 해당되는 구절에서 네그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12] Antonio Negri, «Reliqua desiderantur. Congruetta per una definizione del concetto di democrazia nell’ultimo Spinoza», Studia Spinozana, vol.1, pp.143-182(小林満丹生谷貴志 訳, 以下───スピノザ最晩年民主制政体概念定義推察する, 現代思想1510, 1987, 124-150). 

 

정치론의 실패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라면, 그 정치적 실패가 곧 세계의 승리, ‘다중의 승리, 인간의 승리의 필연적 결과였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지금 구축의 기획은 정체되어 있으나, 그것은 그 기획에 의해 전개된 역능에 정확하게 호응한다. 정치철학은 마키아벨리의 경험에 의해 예고되고 이후 처음으로 대중의 이론이 된 것이다. 그것은 르네상스에 출현한 위기가 갖고 있던, 비종교적-민주주의적 의의를 계승한다. 여기서 대중이라는 차원이, 혁명이라는 역사적 문제로 된다. 기획은 거기에 현전하며, 긴장감을 멈추고, 사명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AS: 317-318)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정치론으로부터 민주제라는 제도가 안고 있는 논리적 불가능성을 연역한다. 민주제는 제도로서 구성된 시점에서, 다중의 목소리와는 간극을 낳는다. 그래서 이 제도를 다시 재구성해야 한다. 그 결과, 민주제는 제도조차도 아닌 운동체로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네그리는 스피노자를 통해서 이 민주제의 이론화 불가능성을 포착함으로써, 이것을 현실의 운동체의 가능성으로서 되파악한다. 네그리는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남긴 기획을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네그리가 어떤 구체적인 국면에서 이 스피노자의 기획을 받아들이는가를 아는 것이다.

 

2) 다중의 생명정치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친 네그리의 발자취는 노동자주의(operaismo)’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맑스주의의 특이한 흐름 속에 있었다. 네그리는 1961년에 라니에로 판치에리가 창간한 잡지 붉은 노트(Quaderni rossi), 이 잡지의 분열을 거쳐 마리오 트론티, 마시모 차카리 등이 새롭게 1964년에 창간한 노동자계급(Classe operaia)에 참여한 후, 1970년대에는 특정한 조직에 수렴되지 않는 더 유연한 운동형태인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로 활동의 장을 옮겼다. 엔리코 베를링게르가 이끄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현실노선을 내건 유로 코뮤니즘하에서 여당인 기독교 민주당과 1973년에 역사적 타협에 이르고, 세력을 잃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산당의 외부에 발판을 둔 노동자주의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는 독자적인 실험적 장을 형성했다.

노동자주의는 토리노에 피아트사가 건설한 대규모 미라피오리 공장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근대화가 이탈리아에 도래했다는 것을 중시하고, 이것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는다. 북부 이탈리아에 남부로부터 대량의 노동자가 유입되고, 장인의 숙련을 요하던 일이 공장노동자로 대체되는 산업구조의 변화이다. 트론티가 자서전적 작품에서 되돌아보듯이, 그것은 노동과정에 있어서의 테일러주의, 생산과정에 있어서의 포드주의[주13]의 개시를 의미하며, ‘노동자주의는 이것을 지렛대로 삼아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대중노동자가 사회에서 중심성을 갖는다고 주장하게 된다[주14].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 공장의 논리가 사회 전체를 포섭하고 있으며, 그 결과 거꾸로 공장의 자주관리노동의 거부가 사회 전체에 파급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주13] Mario Tronti, Nous opéraistes. Le ‘roman de formation’ des années soixante en Italie, traduit de l’italien pjar Michel Valensi, Paris/Lausanne Éditions de l’éclat et Éditions d’en bas, 2013, p.53.

[주14] Maria Turchetto, «De “l’ouvrier masses” à l’entrepreneurialité commune. La trajectoire déconcertante de l’opéraisme italien», traduit de l’italien par Michel Buée, dans Jacques Bidet et Eustache Kouvélakis (dir.) Dictionnaire Marx contemporain, Paris, PUF, 2001, pp.296-301.

tronti-nous Dictionnaire Marx contemporain

대규모 공장에서의 노동자의 의사결정이 사회 전체의 추세를 결정한다는 이 주장을 1970년대의 네그리는 3차산업의 확대로 연결시킨다. 1973년의 오일쇼크 이후, 표면화되는 자본의 논리 하에서의 산업구조의 재편을 시야에 넣으면서, 네그리는 생산 및 노동자의 정의를 단숨에 확대한 것이다. 이것에 따르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장처럼 부를 가져오는 것이며, 공장노동자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주체가 그 부의 생산자라고 간주된다[주15]. 다양한 주체의 힘들이 결합하고,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는 이 네그리의 전략은 야생의 아노말리에서의 스피노자론과 확실히 잘 조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스피노자로부터 도출한 생산력 개념을 산업구조의 변화에 대응시켜가는 네그리가 이탈리아 외에서도 독자를 획득했다는 것은, 그 후의 네그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보여준다.

[주15] Ibid., pp.301-304. 

그러나 사회 전체를 생산의 장이라고 보는 네그리의 입장은 생산이나 노동자의 저변을 크게 확대한 반면, 네그리가 생각하는 생산력이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가는 불투명하다. 이 점은 예를 들어 피에르 마슈레에 의해 지적된다.

 

어떻게 해서 다중의 육체는, 분명히 구체적인 것이 되는가? 이를 위해서는 어떤 정치적 결정 심급의 개입이 필요하다. 다중의 리좀 구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것 자체, 집단적이며, 또한 수평적인 동일 평면 위에 전개하도록 명령하는 내적인 사명을 지키고, 모든 수직적인 배치형태를 거부하는 심급의 개입이 필요하다[주16].

[주16] ピエールマシュレ(桑田光平 ), マルチチュードの未来, 現代思想, 3312, 2005, 82. [* 이 텍스트는 2004년 11월 19일에 릴에서 개최된 심포지엄 <시테필로>에서 발표된 것이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의 불역본은 La Decouverte사에서 같은 해 9월에 판단됐으며, 마슈레의 이 텍스트는 불역판의 간행에 즈음해 이 저작에 대해 평론으로 발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네그리의 답변이 Réponse à Pierre Macherey로 발표된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아직 추정이다.]

이 질문에 대한 네그리의 응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공통체에서 네그리/하트는 이 물음으로 돌아가지만, 그 대답은 생명정치가 심화함으로써 다중의 생명 그 자체가 이미 정치라는 것이었다[주17]. 농촌적인 이탈리아로부터, 자본에 의해 생명이 완전히 포섭되는 단계로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고, 이 포섭에 대해 생명을 탈환하는 것[주18]이 정치 그 자체였던 1970년대 이후의 네그리 자신의 경험에 비춰본다면, 생명이 정치라는 이 언명은 확실한 절실함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하지만 다중의 정치가, 때로 네그리가 상정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다음 절 이하에서 검토의 대상이 되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이다.

[주17] Michael Hardt et Antonio Negri, Commonwealth, traduit de l’anglais par Elsa Boyer, Paris, Stock. 2012. pp.236-242(幾島幸子古賀祥子 訳, 水嶋一憲 監訳, コモンウェルス───<帝国>える革命論, NHKブックス, 2012, 上巻, 276-283). 

[주18] Antonio Negri, Du retour. Abécédaire biopolitique. Entretiens avec Anne Dufournantelle, Paris, Calmann-Lévy, pp.35-36. 

 

 

2. 발리바르의 대중론

발리바르는 주저 대중의/에 대한 공포(1997)에서 네그리의 야생의 아노말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스피노자론의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 그것에 따르면,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은 다중에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다중이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어떤 양태로 나타나고 있는가가 고찰의 주제라고 한다. 발리바르는 다중이라는 단어의 일의성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대신해 대중(masses)’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주19]. 이 대중이라는 단어에 있어서는, 수량적인 크기에 덧붙여, 대중이 지닌 감정적인 측면에 빛이 내리 쪼인다.

[주19] Étienne Balibar, «Spinoza, l’anti-rwell», dans La Crante des masses. Politique et philosophies avant et après Marx, Paris, Galilée, 1997, p.58-60(水嶋一憲 訳, スビノザ大衆恐怖, 現代思想, 1510, 1987, 152-153).


 


1) 대중의 공포의 향배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에서도 정치론의 민주제 독해에 초점이 맞춰진다. 네그리는 생산관계에 의한 생산력의 영유화에 대해, 생산력의 자생적인 발전에 의한 개화를 거기서 읽어 들였다. 그러나 이 도식에서 경시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정념[정서]’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사상가라는 점이다[주20].

[주20] Baruch de Spinoza. Traité politique. Lettres, op. cit,, chap. I, §5, p.13(畠中尚志 訳, 国家論. 岩波書店, 1940, 15, 14-15). 

자연권을 보유한 채로 사회상태로 이행하는 대중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국가는 정치체제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본성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의 집합적 힘이 해체되어 버리면, 통치자의 권력도 즉각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치자는 규범에 인간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이것과는 반대로, 연민, 질투, 명예욕, 지배욕 같은 인간의 정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설계해야 한다. 이 정념의 공유를 확대하고, 이것을 국가의 강화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마트롱이 지적하듯이, 대중에 의해 공유된 정념은 이미 국가의 싹[주21]이다. 문제는 그 정념을 어떤 방향으로 회로화하느냐는 점이다. 발리바르의 정치론독해도 이런 스피노자의 정념을 둘러싼 논의 속에 있다.

[주21] Alexandre Matheron, Études sur Spinoza et les philosophies de l’age classique, Lyon, ENS Êditions, 2011. p.233.

발리바르가 그 중에서도 주목하는 것은 공포(crainte)’, 특히 대중의 공포(crainte des masses)’의 존재이다. 발리바르는 정치론을 이 공포라는 관점에서 독해해간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의 세 정체 중에서, 군주제와 귀족제는 대중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주권자인 대중의 의향을 수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군주제는 고문관을 둠으로써[주22], 또한 귀족제는 의회를 설치함으로써[주23], 비주권자인 대중이 체제를 전복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를 마련할 여지가 있다고 한다. 발리바르는 여기에 체제로서는 민주제를 채용할 수 없는 군주와 귀족이 각각의 방식으로 거듭하는, ‘민주화의 노력을 알아차린다[주24].

[주22] Baruch de Spinoza, Traité politique. Lettres, op. cit., chap. 6, §15, p.45(邦訳, 615, 71). 

[주23] Ibid., chap. 8. §11, pp.76-77(邦訳, 811, 127). 

[주24] Étienne Balibar, Spinoza et la politique, Paris, PUF, 1985, p.90(水嶋一憲 訳, スビノザと政治, 水声社, 2011, 133). 

군주제에서도 귀족제에서도, 대중은 국가를 파괴하는 힘을 항상 유지하면서, 주권자인 군주나 귀족한테 압력을 가한다. 발리바르는 이로부터, 대중이 주권자에게 불어넣는 공포가 군주제와 귀족제의 존망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달리 말하면, 주권자가 대중한테 느끼는 공포가 두 체제의 결정적인 구동인이다. 이 대중의 공포에 주목한 결과, 발리바르의 민주제 정의는 네그리와 저절로 달라진다.

스피노자는 귀족제의 안정을 위한 요건으로서, 대중의 절대수에 비례하여 귀족의 절대수를 늘리는 것을 권장했다[주25]. 그래서 귀족의 절대수를 더욱 늘려서 모두를 주권자(귀족)로 삼는다면, 정체는 민주제로 이행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확대된 귀족제로서의 민주제의 정의일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에 따르면, 거기서 새로운 문제가 일어난다.

[주25] Baruch de Spinoza, Traité politique. Lettres, op. cit., chap, 8 §13, p.78(813, 129-130). 

 

대중은 본성적으로 권력의 보유자에게서 무서운’(정치론84)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권력은 실제로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을 근거로 한계(민주주의)로의 이행은, 권력의 자리에 있는 대중이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 있을까?[주26]

[주26] Étienne Balibar, «Spinoza, l’anti-Orwell», op. cit., p.80(邦訳, 161). 

대중이 주권자에게 불어넣는 공포는 대중 스스로가 주권자가 될 때, 스스로에게 되튀어오는 것 아닐까? 군주제와 귀족제에서는 대중의 공포가 민주화를 추진함으로써 긍정적으로 작용한 반면, 민주제에서는 그렇지 않다. 대중과 주권자가 일치함으로써, 대중 사이에서 공포가 상호적으로 증폭하며 만연한다. 이처럼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독해를 추적하면, 스피노자의 미완의 민주제로부터, 대중의 공포라는 논점이 도출된다.

모든 외적인 심급이나 억제가 없는 상태에서, 대중의 내재적인 의사결정이 절대적인 운동체로서의 민주제는, 이론상으로는 한없이 전체주의 운동에 접근한다. 발리바르가 대중과의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것은 이 점에서이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을 뒤따라가는 한, 스피노자는 대중의 힘이 향하는 방향, 즉 대중의 정념의 향배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정치론독해로부터, 대중의 양의성을 도출한다. 스피노자의 미완의 민주제를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이것을 연장해감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는 이 대중의 양의성을 독파했다는 것, 이것이 발리바르의 정치론독해의 요체이다.

그러나 발리바르가 주장하는 대중의 양의성은 대중의 운동이 항상 전체주의 운동으로 귀착한다는 결정론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대중의 정념의 향방이라는 문제를 열린 채로 남겨둔 이상, 이 물음을 더욱 더 검토하기 위해서는, 발리바르가 이 물음을 어떻게 떠맡았는가를, 그 도정에 비추어 이해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서구맑스주의에서 대중의 초점화로

발리바르에게 대중의 양의성이라는 주제가 부상하게 된 배경을 검토하는 데 있어서는, 대중의 개념과 프롤레타리아트(prolétariat)’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모리스 메를로 퐁티(1908-1961)변증법의 모험(1955)에서 사용한 서구맑스주의라는 인식틀을 실마리로 삼아 이 관계성을 검토한다.

메를로 퐁티는 죄르쥐 루카치(1885-1971)역사와 계급의식(1923)을 서구맑스주의의 시발점에 둔다. 역사와 계급의식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자신의 선으로 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원한 힘으로서 인간 앞에 출현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주체객체로 분열된 상태로서 묘사된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여 인간의 소외상태를 폐기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종합을 이룬다고 여겨졌다. 메를로 퐁티는 이런 루카치의 변증법을 주체가 개입하는 변증법이라고 하며,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으로 대표되는 형이상학화한 유물론에 대항하는 시도로 평가한 것이다[주27]. 그래서 서구맑스주의란 서구와 소비에트의 지리적인 거리를 나타낼 뿐 아니라, 주체를 둘러싼 분기라는 의미론적 쟁점을 포함했다.

[주27] Maurice Merleau-Ponty, 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 Paris, Gallimard, 1955. p.49(滝浦静雄木田元田島節夫市川浩 訳, 弁証法冒険, みすず書房, 1972, 47). 

그러나 그 후의 서구맑스주의는, 메를로 퐁티가 아마 예상했던 것 이상의 속도로 다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주체일 터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대중이 분리한다는 사태이다.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허위의식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을 획득함으로써 이것을 지양한다는 것이 상정됐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는 오히려 그런 계급의식의 획득에 이르지 못한 대중이야말로 상태(常態)라는 인식이 확산된다. 이 사태는 소비사회에 매몰된 얼굴을 보이지 않는 대중이나, 공적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사적 권리의 유지에 전념하는 소리 없는 대중으로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주28]. 달리 말하면, 그것은 메를로 퐁티가 전제했던 주체의 윤곽이 점차 불분명해지는 과정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주28] Jean Baudrillard, À l’ombre des majorités silencieuses ou la fin du social, Fontenay-Sous-Bois, Cahiers d’Utopie, 1978 ; Marcel Gauchet, La Démocratie contre elle-même, Paris, Gallimard, 2002. 

1965년의 초기작 『『자본을 읽자이후, 발리바르의 작업은, 이 주체의 불분명화의 흐름 속에서, 주체를 어떻게 재정의하느냐를 관건으로 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리바르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프랑스 공산당을 주된 활동의 장소로 삼았다. “유로코뮤니즘의 조류는 이탈리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도 찾아왔고, 프랑스 공산당은 1976년에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포기한다. 하지만 이 노선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공산당의 독자적인 색깔의 상실과 기성 정당이 되는 것으로 이어지며, 그 후의 장기적 하락의 한 가지 원인이 됐다. 발리바르는 1981년에 공산당에서 제명 처분을 당했는데, 그 원인이 된 것은, 프랑스 공산당의 이민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문제를 지적한 것이었다[주29]. 발리바르의 1980년대의 작업을 떠받쳤던 공산당의 후퇴에 의해, 적대적인 힘을 표현하는 회로가 계급투쟁으로부터 인종을 둘러싼 투쟁으로 이행한 것 아니냐라는 위기감이다[주30]. 여기에 발리바르가 스피노자론으로부터 끌어낸 대중의 양의성을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것 같다.

[주29] Étienne Balibar,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Paris, La Découverte, 1992, pp.19-95. 

[주30] Étienne Balibar et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 les identités ambiguës, Paris. La Découverte. 1988, pp.207-246((新装版) 人種国民階級───らぐアイデンティティ, 若森彰孝 他 訳大村書店, 1997, 273-325). 

 couverture de [REVUE_ID_NUMPUBLIE] 

한편으로는, 발리바르는 이민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닌 대중의 실상으로 파악한다. 이민노동자의 운동을 국경 횡단적인 시민권의 기초에 놓을 때, 대중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주31]. 이것은 메를로 퐁티가 생각한 주체의 자명성의 해체의 적극적인 측면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을 이민노동자로서 읽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수자(majority)로서의 프랑스인으로 파악할 때에는, 대중은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이 후자의 의미의 대중에 있어서는, 그 정념은 다수자의 이민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로 표면화된다. 발리바르는 그 스피노자론에 있어서 대중의 힘과 정념이 결정화하는 양태를 문제로 삼았는데, 1980년대에 현실로 나타난 이 대중의 양의성은 그 스피노자론의 표적과 정학하게 대응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주31] Étienne Balibar, Droit de cité, Paris. PUF, 2002(松葉祥一 訳, 市民権哲学───民主主義における文化政治, 靑土社, 2000).


 

3. ‘신권정치의 대두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정치론이라는 네그리와 똑같은 대상을 다루고, 대중의 양의성이라는 네그리에게는 부재한 논점을 연역했다. 네그리에게 이 논점이 부재하다는 것은, 생산관계와 생산력, 권력과 반권력, 혹은 군주제/귀족제와 민주제 같은 대립축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하는 네그리의 수법에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이에 반해 발리바르의 대중의 양의성이라는 관점을 연장해가면, 네그리에 있어서는 비가시적인 어떤 문제계가 부상하게 된다. 이번 절에서는, 프랑스에서 스카프 문제라고 불리는 현대적인 현상에 대한 발리바르의 개입을 고찰함으로써 이 문제계의 소재를 시사하고 싶다.

스카프 문제의 직접적인 계기는 1989년에 파리근교 클레이유의 공립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시작됐다. 이슬람교도인 세 명의 여학생이 교실에서 스카프를 벗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은 사건이다.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인권단체, 종교적 공동체의 대표자, 페미니스트 등이 각각의 입장에서 이 사건에 관해 발언하고, 자주 논의는 소녀들을 젖혀두고 이루어졌다[주32]. 그 후, 2004년에 여봐란 듯한종교적 표장(標章)을 공립학교 내에서 몸에 부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사건은 일단 결말을 봤다.

[주32] 스카프를 착용한 소녀의 다양한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작에 자세하다. 宮島喬, 移民社会フランスの危機, 岩波書店, 2006

발리바르는 세기(2012)에서 스카프 문제를 언급하고, 여태까지의 스피노자를 둘러싼 사색을 바탕으로 세속화된 세속주의(sécularisme sécularisé)”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주33]. 본고의 관심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개념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모범을 취하는 것이다. “스카프 문제에서 공화주의자, 나아가 자유주의자가 원용하는 것은 라이시테라고 불리는 세속주의 또는 정교분리의 원칙이다. 공립학교를 포함한 공적 공간에 종교를 들여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그것은 개인의 속내에 담아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원칙의 근본에 있다. 이 지배적인 입장에서 보면, 스카프를 착용하는 여학생은 종교적 신조를 공적 공간에 들여오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치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 권위로부터 오랜 역사를 걸쳐 쟁취한 라이시테의 성과를 위협하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신권정치의 재래로 간주되기도 한다.

[주33] Étienne Balibar, Saeculum, Culture, religion, idéologie, Paris, Galilée, 2012, pp.91-104. 

그러나 발리바르가 세속화된 세속주의의 개념에 의해 시사하는 것은, 스카프의 금지를 법률로 제정하는 국가야말로, 사실은 숨어 있는 신권정치의 실천자라는 것이다[주34]. 공적 공간으로부터 각종 종교를 철퇴시키는 국가는, 복수의 종교를 병렬적으로 취급하며, 심지어 사적인 선택의 문제로 변환하는 것을 통해서, 이것들을 최종적으로 총괄하는 수호자로서 나타난다. 공적 공간에서의 다원성의 확보의 권한을 국가가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 국가는 라이시테로 대표되는 무신론적 시민종교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라이시테란 그 때문에 종교로부터의 이탈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국가에 의한 정치와 종교 혹은 공과 사의 분할의 요체이다. 스카프를 법으로 금지하는 국가는 그 행위 자체에 의해, 뜻하지 않게 국가를 지탱하는 이 시민종교의 존재를 폭로해 보여준다. 발리바르가 더욱 더 세속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 국가의 시민종교이다.

[주34] 이번 절 이하의 서술에 관해서는 아래의 저서로부터 시사점을 얻었다. 柴田奇子, リベラル-デモクラシーと神権政治───スピノザからレオ・シュトラゥスまで, 東京大学出版会, 2009. 특히 8ポスト形而上学における政治的無神論」───マルクス宗教一般再檢討를 참조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철학(이성)과 종교(계시)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정교분리의 양식과는 다른 방식에서였다. 스피노자는, 대중이 믿고 있는 각각의 종교를, 이성이 진리의 이름으로 부정하는 것에 반대했다. 게다가 라이시테같은 무신론적 종교의 대체물을 강제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바르에 의한 대중의 양의성이라는 주장이 살아 있는 것은, 여기에 있어서이다. ‘스카프의 금지를 다수자로서의 프랑스인이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국가의 시민종교에 대한 더 많은 의존을 가져다준다. 여기에서 대중을 좌우하는 정념의 불확실성의 한 가지 표현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 국가의 시민종교에 억압됨으로써, 무슬림은 더욱 더 정체성=동일성에 대한 집착의 경향을 강화한다[주35]. 발리바르는 이 순환을 피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름을 들면서 세속주의의 세속화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35] 일부 무슬림이 본질화하는 이 정체성이, 해당 주체를 압도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은, 페티 벤슬라마이다. 그의 작업은 이슬람이라는 상이한 대상을 다루면서, 바로 스피노자를 상기시키는 이단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Fethi Benslama, Déclaration d’insoumission, À l’usage des musulmans et de ceux qui ne le sont pas, Paris, Flammarion, 2005. 

 

매개(혹은 매개자) 역할을 여기서 맡을 수 있는 상징적인 요소 혹은 일종의 담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똑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선택지로서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그것은 새로운 종교로서조차도 종교의 시스템 속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며, 아마 유일한 예외는, 일종의 전면적인 이단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재까지의 사상사(예를 들어 스피노자)에 있어서 때때로 얼굴을 내미는 어떤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상이한 종교의 담론의 마주침을 간접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 혹은 공적 공간에 있어서 자유로운 대화를 함께 발전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똑같은 공간에, -종교적인a-religieux(그러나 반드시 -종교적anti-religieux는 아닌) 추가적인 어떤 요소를 도입 혹은 개입시키는 것이다[주36].

 [주36] Étienne Balibar, Saeculum. Culture, religion, idéologie, op. cit., p.100. 

발리바르는 여기서, 상이한 종교를 믿는 자들의 마주침을 성립시키는 장을 생각하라고 촉구한다. 이 장은 국가라는 무신론적 시민종교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 사이에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대중의 정념을 투자[備給]하는 국가의 세속주의를 포함한 종교 일반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장의 탐구이다. 발리바르는 이처럼 정치론에 내재하고 대중의 양의성을 이끈 결과로서, 오늘날에는 신학정치론신권정치비판으로 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네그리의 다중으로 돌아가, 그 문제점을 한 가지 지적하고 싶다. 네그리의 스피노자 독해는 정치론에서 스피노자의 핵으로서의 다중을 찾아내고, 이것을 전면적으로 전개하는 점에 그 강점이 있었다. 하지만 당연한 것인데, 스피노자는 정치론의 저자인 동시에, 신학정치론의 저자이기도 했다. 발리바르가 시사하듯이 정치론의 대중(=다중)론과 신학정치론의 신권정치 비판은, 상이한 의도 하에서 작성되고, 두 저작의 한쪽을 다른 쪽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차이는, 특히 신학정치론에 있어서, 종교에 의해 충동질된 대중의 정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거리로서 나타났다. 네그리의 다중에는 확실히 종교의 문제는 표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그리가 이 다중의 다양성을 묶는 공통점을 끄집어내려고 했을 때, 그것이 의사적인 시민종교가 되지 않는 보증은 어디에 있을까? 이 가능성은 오늘날의 네그리/하트의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사색에 있어서도, 지워지지 않고 의연하게 뒤따르고 있는 그림자인 것이다.

 

결어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의 대비는, 사상의 형성 및 이것과 깊게 결부된 사회상황을 동시에 고찰함으로써 처음으로 그 의의가 분명히 밝혀진다는 의미에서, 뛰어나게 사상사적인 과제였다.

우선, 두 사람 사이에는 스피노자의 요구 정치론을 둘러싼 해석상의 쟁점이 존재했다. 네그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극이라는 관점에 서서, 이 저작의 미완성 부분을 추측함으로써, 다중에 의한 힘의 합성이 열어젖힌 미래라는 이야기를 거기서 읽어냈다. 반면 발리바르에 있어서는, 네그리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른바 생산력의 성질이 문제인 것이며, 혹은 또한, 네그리가 선험적으로 선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듯한 대중(=다중)을 충동시키는 정념이 문제였다.

다음으로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이런 사상적 차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친 두 사람의 여정을 검토했다. 1970년대의 유로코뮤니즘의 흐름 속에서, 공산당이 영향력을 잃어가는 똑같은 시대 배경에서 출발하고, 두 사람은 각각의 길로 분기했다. 네그리는 생명정치 개념을 부연함으로써 3차산업의 확대에 역점을 두고, 오늘날의 비물질적 노동의 전개를 시야에 넣었다. 발리바르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인종차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대중의 정념의 결정화가 자의성을 수반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과정은, 네그리에 있어서는 다중의 전면적 긍정, 발리바르에 있어서는 대중의 양의성이라는 각각의 스피노자론에 대응한다.

역사를 풀어헤친다, 대중의 양의성에 주목하는 발리바르는 파시즘 시기에서의 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중(빌헬름 라이히)이나, 19세기의 길거리를 떠돌면서 소란을 일으켰다고 간주되는 위험한군집(귀스타프 르 봉) 같은 대중론의 계보와 부분적으로 관심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중을 이렇게 결정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대중의 정념의 향배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회로화하는 방법을 찾는 데 있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대조로부터, 하나의 방향성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네그리는 정치론신학정치론을 종속시키기 위해, 신학정치론고유의 신권정치의 비판이라는 물음을 비가시화하고 있다. 이 점은 네그리가 하트와의 공동 작업을 시작한 후에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서, 발리바르는 정치론에서 대중의 양의성을 이끌어냄으로써, 근래에는 정치론신학정치론의 논의의 위상이 다르다는 점을 재차 중시하고 있다. 이 점을 본고의 끝에서 국가의 라이시테를 포함한 종교 일반의 비판으로서 검토했다. 그리고 네그리/하트의 공통적인 것이 사이비적인 시민종교와 어떻게 차이화되는가라는 논점이, 네그리/하트에 있어서의 향휴의 과제가 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사했다.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은 상당한 차이점을 갖고 있으며, 각각 정치론신학정치론이라는 스피노자의 두 개의 측면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이 네그리의 스피노자론의 부족을 지적하고, 이것을 결과적으로 보완한다는 의미에서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은 최종적으로는, 네그리/하트가 오늘날 전개하는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논의에 비판적으로 합류해가는 것이다.

 

* 본고는 일본학술진흥회 신진연구자 인터내셔널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의한 연구 성과의 일부이다. 여기에 적어서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또한 프랑스에서의 재외 연구 중에 본고를 집필했다는 경위 때문에, 번역서가 있는 문헌에 관해서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번역서의 저본이 아닌 불역본을 참조해 새롭게 번역한 것이 있었다는 것도 모두 일러둔다. 번역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바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제3. 다중의 삶인 정치 : 스피노자를 둘러싼 항쟁

 들뢰즈의 혁명 혐오 : ‘쾌활한 비관주의’ / 스피노자의 물리학적보수주의 / 기억을 잃은 알튀세르 / 인과성에서 자유인 국가 형성 / 국가 형성과 혁명을 같게하는 정치 / 정치에 작용하는 스피노자적 인과성을 찾아서 / 국가는 비이성적 존재이다 / 그러나 계약 개념의 부재는? / 유일한 원인으로서의 분노’ / 민주주의란 린치이다 / 결과를 인과에 내재시키는 스피노자주의 / 표현과 인과성 의미가 초래하는 지복과 곤혹 / 알튀세르의 장치’ / 결과이고 원인인 나 / 도덕과 착종하다 / ‘가 거울을 깬다 : 희망

 

 

들뢰즈의 혁명 혐오 : ‘쾌활한 비관주의

685월은 순수한 사건에 속한다. 어떤 통상적인, 혹은 규범적인 인과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건이다. 많은 선동, 시위행동, 발언, 어리석은 짓거리, ‘68환상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간파된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가 사회에 포함되도록 허용할 수 없는 곳을 돌연 간파했던 것 같으며, 다른 것의 가능성까지 내다봤던 듯했다. 그것은 가능한 것을! 아니면 나는 질식해 버린다라는 형식의 집단현상이었다. 가능한 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문제이다. 사건이 새로운 생활을 창조하는 것이며, 사건이 새로운 주체성(신체, 시간, , 환경, 문화, 노동 등등에 대한 새로운 관계)만들어내는 것이다. 사회의 전환이 출현할 때, 그 결말이나 효과를,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인과성의 선을 따라서 긋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주체성에 대응하는 집단적 배치를 사회가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의 전환을 바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가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68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 p.215-216 강조는 인용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68년에 관해 한 말이다. 역사에 있어서 예외로 혁명이라는 사건을 생각한 알튀세르, 혁명의 그 예외성을 주체의 특이성에 귀속시킨 네그리, 그리고 결정 불가능한 사건과의 관계에서 주체인 존재를 정의했던 바디우가 형성하는 정치철학의 진영에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름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인과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따라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식이 누락된 사건으로서 685월을 말하고, 그 사건성은 무엇보다 주체의 존재방식에 관련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텍스트에서도, 다른 텍스트에서도, 네그리나 바디우와 나란히 685월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주체가 혁명을 수행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네그리처럼은. 주체는 혁명 앞에 끌려나오며, 혁명을 취급하는한에서 주체인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았다. 알튀세르처럼은. 심지어 저자들은, 어떠한 결단도 혁명을 앞에 둔 주체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바디우처럼은. 그저 사건이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건의 주어는 어디까지나 사회이며, 텍스트 전체를 더욱 주의 깊게 읽어보면, 685월이 혁명이었다는 얘기는 사실상 한 마디도 쓰여 있지 않다. 몇 가지 역사상의 혁명에 비견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건은 전환’(mutation 또는 reconversion)으로 위치지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적인 것을 갈망하던 그 사건은, 따라서 그 주어인 사회도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능적인 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비로소 창조되는것이다. 두 사람의 다른 텍스트를 원용한다면, 사건이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묘하게 다의적인 순간”(안티 오이디푸스, p.453-454)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지배계급의 교체 같은 무엇인가 하나의 가능적인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은, 그들에게는 사건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건에 있어서는, 거의 가능성이 되는 것 자체가 열려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부터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어떤 플랜을 따라,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기획만큼, 들뢰즈와 인연이 먼 것은 없다”(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p.335). 하지만 들뢰즈는 동시에 인간에게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으로 되는 것 속에 있다. 그것만이 치욕을 풀고, 허용[용서]하기 힘든 것에 응할 수 있다”(기호와 사건, p.231)고도 말했기 때문에,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의 정치사상을, 어떠한 정치 강령[프로그램]도 수반하지 않는 극좌주의라고 정의내리게 된다(p.335). 어떤 인과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곳에서, 따라서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발생하지만, 모든 가능적인 것을 창출하고, 인간의 주체성, 삶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사건. 블랑키의 기술에 의해서도, 레닌의 실천에 의해서도, 결코 기도[기획]되었던 것처럼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들을 비롯한 인간이 혁명적이 되기를 통해 산출되고, 그들의 기도를 넘어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사건.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옳을까? 무목적인 한에서, 목적이라는 것을 무화하는 듯한 심도를 가진 사건은, 과연 혁명인 것일까? 그것이 도래하지 않으면 가능성이라는 것의 새로운 주체성도 생기지 않지만, 그것이 도래하는 장인 사회 이외에서는 주어를 갖지 않은 사건은, 커다란 사고와 본성에 있어서 바뀌는 것이 있을까?

그래도 들뢰즈는 혁명적이 되기가 인간에게 유일한 기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은, 조화로 귀결되는 사회의 자연적 힘(자기조직화하는 능력)을 믿는 무정부주의이기는커녕, 혼탁 자체를 무조건 찬미하는 악마적 극좌주의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는 정말로, 바더 마인호프 갱(서독 적군파의 속칭)마저 옹호하는 기색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가 가능성의 모태로서의 혼탁과 역사의 엎치락뒤치락[순식간의 변화, 卓袱台返(ちゃぶだい)같은 파국에 대해 낭만주의적인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상태, 모든 가능성이 소진되는 것이야말로, 베케트론 소진한 것(1992)에서 들뢰즈가 긍정했던 격렬한 스피노자주의”(p.57)이며, 파국이나 혼탁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여전히 생겨나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혁명적으로 되는노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는 한순간의 승리를 구가할 수 있더라도 반드시 실패로 끝나는 것이 혁명의 숙명이며, 그것을 알면서도, 혹은 걸핏하면 잊는 능력을 갖추고, 몇 번이나 혁명적으로 되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다. 최후는 피곤하기는커녕 생명을 소진하여 웅크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야말로, 그는 혁명적으로 되기의 극점을 본다. 때문에 들뢰즈적인 정치를 체현하는 인물상은, ‘무에의 의지에 의해 세계를 파괴하는 허무적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의지의 무속으로 자기 소멸하는 바틀비(허먼 멜빌의 소설 속에서 문자 그대로 스스로 죽는[자기를 죽이는] 주인공)이며, 들뢰즈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쾌활한 비관주의라는 것이다(들뢰즈와 네그리, 두 개의 사고).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 따르면.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 비판자가 아니다. 그는 20대에 들뢰즈 철학의 전체를 두루 살펴본 책을 저술한 철학도이다. 그의 들뢰즈 : 하나의 사건의 철학(1994)은 압축적이지만, 에세이도 아니고 들뢰즈의 OO”론도 아닌 포괄적 연구서이며, 거기서의 저자의 노력 일체는, 들뢰즈의 주요 개념 사이에 정확한 관계맺음을 행하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다방면에 걸친 들뢰즈의 저작군이 전체로서 하나의 커다란 혼돈을 이루고 있는 것만큼, 주라비슈빌리가 이 소책자에서 보여준 뛰어난 솜씨는, 많은 들뢰지안을 놀라게 하고, 경외심을 품게 만들기조차 했다. 태연하게 그리고 무모하게 도전하여 성공한, 웬 젊은이! 가타리에 이어서 들뢰즈가 작고한 뒤에는, 들뢰즈를 올바르게 계승한 철학자로서, 그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그 때문에, 어떤 정치 강령도 거부하는 초ultra-비관주의에서 들뢰즈적 정치의 진면목을 보고 있는, 들뢰즈 추도 콜로키움(1996)에서의 그의 발표 논고(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들뢰지안들 사이에서 조용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 무렵 이미, 프랑스에서의 정치적 들뢰즈=가타리파는, ‘이론적 낙관주의를 거리낌 없이 공언한 네그리의 주변에 거의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라비슈빌리가 말하는 들뢰즈적 무의지주의involontarisme[비자발주의]’, 네그리적 낙관주의나 의지주의volontarisme[자발주의]와는 정반대인 듯이 보인다. 들뢰즈에게 정치 프로그램이 부재하다고 승인하는 것은, “다중의 주문을 아무리 읊어봤자 그로부터 그 어떤 정치적 정의로도 이행하지 않는다”(들뢰즈, 바틀비, 그리고 문학적인 상투어, p.202)고 들뢰즈=네그리를 야유한 바디우=랑시에르에 굴복하는 것 아닌가? 물론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적인 정치전략으로 ‘도착이나 탈주선을 거론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것들도 혁명의 관념이 지닌 전적으로 전복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도착탈주도 적의 의표를 찌르는, 어딘가 숨겨진 꽃의 전략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들뢰즈는 685월을 무조건 옹호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개량주의자일 수밖에 없는가? [칼을] 크게 휘두르며 혁명적으로 되기뒤에서 작은 실리를 몰래 챙기는 것이 들뢰즈적 정치인가? 적어도, ‘도착perversion’이냐 전복subversion’이냐는, 정치노선으로서는 작은 분기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물리학적보수주의

무의지주의로 귀착되는 격렬한 스피노자주의에서 들뢰즈의 정치철학의 기저 내지 근본 윤리를 발견하고, 뭘 하든 쓰잘데기 없다는 비관주의의 토대 위에서 겨우 가능한 전략으로서 도착이나 탈주선을 추구하는 자세는, 그러나 어쩌면, 인간적 세계는 최종 심급에서 완전’, ‘최선으로 향하고 있다는 믿음의 물구나무 세우기일지도 모른다. 혁명을 하다 실패하지만, 무엇을 기도하더라도 계획에서 벗어날 터이지만, 인간은 결과적으로, 편협하고 억압적인 공동성을 서서히 해체, 해소하여 보다 큰 공동성으로 대체하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통치라는 절대민주주의에 도달할 때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영원히 혁명적으로 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낙관주의가, ‘쾌활한 비관주의의 이면에는 들러붙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맑스주의의 소박한 생산력 사관(史觀)과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윤리를 합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