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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라차라토, <부채 기계를 전복하기>

Maurizio Lazzarato: Subverting the Debt Machine

 

* 출처 : http://thenewreader.org/Issues/1/SubvertingTheDebtMachine

Interview by Antonio Alia, Loris Narda and Vincenzo Boccanfuso.

Translated and edited by Yari Lanci and Tom Vandeputte.


maurizio lazzarat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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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인간의 제조에서 당신은 부채가 권력의 만연한 메커니즘으로서 기능하는 신자유주의에 관한 설명을 개진합니다. 맑스의 말을 달리 표현하면, 부채는 사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소유와 연결되어 있는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In The Making of the Indebted Man, you develop an account of neoliberalism in which debt functions as an all-pervasive mechanism of power. Paraphrasing Marx we could say that debt is not a thing but a social relation. How do you understand the creditor-debtor relation to be connected to property?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소유를 중심으로 조직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돈을 갖고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소유는 맑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증권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입니다(titoli di proprièta del capitale). 그러므로 이것은 권력관계와 연관되는데, 이 권력관계는 맑스적 전통과 관련해서 바뀌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탈영토화됩니다. 그것은 더 고차적인 추상화의 수준에 서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모종의 소유를 둘러싸고 조직됩니다. , 돈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하는 자 사이의 구별입니다.

The creditor-debtor relation is organised around property: it is a relation between those who do have money at their disposal and those who do not. Property is not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as it was for Marx, but rather revolves around capital securities (titoli di proprièta del capitale). Therefore it concerns a relation of power that has changed with respect to the Marxian tradition, that is deterritorialised as Deleuze and Guattari would say. It stands at a higher level of abstraction, but it is still organised around a certain kind of property: a distinction between those who do have access to money and those who do not.

 

이런 권력관계는 교환의 평등에서 유래하는 게 아니라 채권자-채무자의 불평등에서 유래합니다. 이 후자는 즉각적으로 사회적입니다. 부채의 경제는 임금노동자와 비임금노동자, 고용자와 피고용자, 물질적 노동과 비물질적 노동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채 속에 있습니다. 동시에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즉각적으로 전지구적인 차원을 갖습니다. 이 차원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모든 분할에 횡단적으로 명령하며 이것에 작용합니다. 부채는 1970년대 이래 자본주의적 발전의 근본 무기였습니다. 1970년대는 사회적·전지구적 수준에서 계급투쟁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 버렸으며, 우리는 여전히 오늘날 이를 제기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This relation of power does not stem from the equality of exchange, but from the inequality of the creditor-debtor relation, which is immediately social. The economy of debt makes no distinction between waged workers and non-waged workers, between the employed and unemployed, between material and immaterial labour. We are all in debt. At the same time, the creditor-debtor relation has an immediately global dimension, which transversally commands and acts on all divisions between rich and poor countries, established and developing. Debt has been the fundamental weapon of the capitalist strategy since the 1970s, one that has completely displaced the terrain of class struggle at a social and a global level, and that we still find difficult to address today.

 

이런 점에서 저는 제가 책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논점을 취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논점을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반동적이기로 악명 높은 칼 슈미트에게서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소유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논점은 화폐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유용합니다. 설령 슈미트가 이 마지막 측면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정치적-경제적 질서는 세 가지 원리 위에서 구축되고 조직됩니다. 이 원리는 노모스라는 말의 세 가지 상이한 의미에 대응합니다. 이 세 가지 원리는 마찬가지로 채권자-채무자 경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첫째 노모스취하다/정복하다이며, 따라서 전유(appropriation, 제 것으로 삼기; 고유화)를 뜻합니다. 모든 새로운 사회(와 자본주의적 영역의 모든 새로운 단계, 가령 포스트-포드주의)는 정복과 약탈에서, 일종의 원시적 전유와 수탈에서 시작됩니다. 자본주의 전까지, 이 국면은 모든 경제의 출발점으로서 토지의 전유와 수탈, 그리고 여타 부가적 권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현대자본주의에서 이 국면은 금융과 신용에 의해 조직됩니다. 화폐라는 수단에 의해 사회 전체(노동뿐 아니라 사회관계 전체, 지식 관계, 부의 관계 등등의 전체)를 수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융은 포식적인 포획장치로서 기능합니다. ‘노모스의 두 번째 뜻은 나누다[분배하다]/분할하다입니다. 분할과 분배는 몫을 취하는것입니다(하지만 랑시에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말입니다). 소유와 법적 권리는 내 것과 그대의 것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정의됩니다. 현대자본주의에서 소유는 화폐와 신용/부채라는 수단에 의해 분배되며, 이것은 원칙적으로 자본 증권의 소유권이나 박탈에 있습니다.

At this point I would like to take up an argument that I have not used in my book, because it comes from the notorious reactionary Carl Schmitt, but which also addresses the problem of property. This argument has been very useful for me in order to understand the power of money, even if Schmitt did not speak about this last aspect. Every politico-economical order is constructed and organised on the basis of three principles that correspond to three different meanings of the word ‘nomos’. These same three principles are at the basis of the creditor-debtor economy. In the first place ‘nomos’ means ‘to take/conquest’, and therefore appropriation. Every new society (and every new stage of capitalist dominion, for example post-Fordism) begins with conquest and robbery, with a kind of primitive appropriation and expropriation. Until capitalism, this phase consisted in the appropriation and expropriation of land as a starting point for every economy and any additional right. In contemporary capitalism that phase is organized by finance and credit, which have expropriated, by means of money, the society as a whole (not only labour, but the entirety of social relations, of knowledge, of wealth, etcetera). Finance, therefore, functions as a predatory apparatus of capture. The second meaning of ‘nomos’ is ‘to portion out/divide’. Division and distribution ‘make the parts’ (but in a way that is radically different from Rancière). Property and legal rights are defined by ascribing ‘what is mine and what is thine’. In contemporary capitalism, property is distributed by means of money and credit/debt, and it consists, principally, in the ownership or deprivation of capital securities.

 

노모스의 세 번째 뜻은 생산하다, 생산입니다. 이제 1970년대 말에서 시작된 단계에는 생산에 선행한 전유와 수탈, (소유의) 분배와 분할이 있다는 것이 제게는 더 분명해보입니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경제주의자이지 않으려면 생산 개념은 이 세 가지 원칙을 포함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생산의 전제조건으로서의 화폐는 기능과 소유의 분배는 물론이고 전유의 과정을 조직합니다.

The third meaning of ‘nomos’ is to produce production. Now, it also seems clear to me that also in the stage that started at the end of the 1970s, there is an appropriation and expropriation, a distribution and division (of property) that precedes production logically, if not in reality. In order not to be economicist, the concept of production must include these three principles. In my view, in 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 money, as a prerequisite of ‘production’, organises the distribution of functions and property as well as the process of appropriation.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의 대두 이전까지, 한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사건의 질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전유, 분할, 생산 말입니다. 고전적 경제와 자유주의는 생산력의 해방과 구체제의 사회의 잔여에 의해 규정된 생산이 그 자체로 전유와 분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 양 우리더러 믿게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과 이들의 전문관료적인 정부가 계속 확언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삶의 표준이 성장일 때, “분할은 더 쉬워지며,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전유는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무감각해진다”(슈미트). 슈미트는 생산의 환상에 굴복하지 않은 저자로 레닌과 맑스를 언급합니다. 물론 슈미트는 이들이 부분적으로 그렇다고 말합니다. 레닌은 제국주의와 식민화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필수적인 전유와 수탈의 과정으로 여기는 반면, 맑스는 원시적 축적과 그 흉악무도한 폭력을 <자본> 자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여깁니다. 생산을 바꾸려면 수탈자들을 수탈해야 하며, ‘소유/재산을 상이한 방식으로 분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작금의 위기에 의해 제기된 문제입니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면 이들은 아주 잘 보고 있으나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죠!

What is interesting is that, until the rise of capitalism, the order of events in the process of formation of a society can be described like that: appropriation, division, production. Classical economy and liberalism wanted to make one believe that ‘production’, characterised by the liberation of productive forces and by the remnants of the society of the Ancien Régime, would by itself resolve the problem of appropriation and division. And this is precisely what the neoliberals and their technocratic governments continue to affirm. When the standard of life is rising (‘growth’), ‘division becomes easier, and appropriation is not only immoral, but also irrational from the economical perspective, and therefore senseless’ (Schmitt). Schmitt refers to Lenin and Marx as authors that in part, as he argues have not given in to the illusion of production. The former considers imperialism and colonization as processes of appropriation and expropriation necessary for resolving ‘the social question’, whereas Marx considers primitive accumulation and its ferocious violence as conditions inseparable from Capital as such. To change production one needs to ‘expropriate the expropriators’ and distribute ‘property’ in a different way. And this is the problem posed by the current crisis that the liberals and the social democrats do not want to see or better, a problem they see very well, but cannot accept!

 

새로운 전유 개념과 새로운 소유 개념을 내포하지 않는 수탈자들을 수탈하라가 여전히 요점입니다! 새로운 성장모델, 새로운 뉴딜은 위기의 조건들을 영속화할 뿐입니다. 성장은 경제적 관계방식이기에 앞서서 정치적 관계방식입니다. ‘녹색성장, 두말할 것도 없는 성장, -뉴딜, 고용의 정치 등등은 위기의 정치적 관건, 즉 신자유주의에 고유한 전유와 분할의 양상을 결코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자유주의적이고 사회민주주의적인 제안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위기가 심화되는 것을 목격할 뿐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미 발생하고 있는 과정 말입니다. 가령 독일식 성장 모델은 위기의 원인들을 변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차이, 불평등, 가난한 노동자 및 조건부 임금 노동자qualified wage workers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반면, 소수의 손에 부를 집중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생산을 수탈하고 분할하고 명령하는 것은 부채의 경제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독일이 유로화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현대적 형태, 통제로서의 화폐의 현대적 형태 의 통제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부과하고 싶어 하는 긴축정책은 작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긴축정책은 이미 전례 없는 결과와 더불어 자본/국가 관계를 뒤틀면서 시장의 불안정성을 정치적 영역에 이식시켰습니다.

A new model of growth, a new New Deal, that does not imply a new concept of appropriation and a new concept of property to expropriates the expropriators, that is still the point! would only perpetuate the conditions of the crisis. Growth is a political relationship before an economical one. ‘Green’ growth, growth tout court, the New New Deal, politics of employment, et cetera do not at all address the political stakes of the crisis, namely the modalities of appropriation and division proper to neo-liberalism. Since these are the liberal and ‘social-democratic’ proposals to escape the crisis, we will only witness its deepening a process that is actually already taking place. The growth model of Germany, for example, does not modify the causes of the crisis, because it increases class differences and inequalities, the precarity of poor workers and qualified wage workers, while concentrating wealth in the hands of a few. Today it is the economy of debt that ‘expropriates’, ‘divides’ and commands ‘production’. Luckily, the austerity that Germany wants to impose on the Europeans through the control of the euro the contemporary form of money as capital, of money as control is not working. This austerity has already transposed the ‘instability’ of the market to the political realm, distorting the capital/state relation with unpredictable outcomes.

 

그러니까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여러 가지 상이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이 관계는 사회적 부를 포획하는 장치입니다. 또 이 관계는 통제의 장치입니다. 왜냐하면 신용을 통해서 이 관계는 투자의 할당allocation을 재정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척도와 가치평가의 새로운 형태이기도 합니다. 대학을 포함해 모든 영역에 도입됐던 가치평가의 메커니즘/장치는 금융에서 유래합니다. 금융은 포드주의적 공장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볼 때 측정 불가능했던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과정을 실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에 투자할 수 있기 위해서, 금융은 모든 가능한 가치평가의 수단을 요구했습니다. 새로운 회계 표준에 의해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 제공됐던 완벽한 투명성을 말입니다.

The creditor-debtor relation is thus several different things at once. It is a mechanism (dispositivo) for capturing social wealth; it is a mechanism of control because, through credit, it redefines the allocation of investments; but it is also a new form of measurement and evaluation. The mechanisms of evaluation that have been introduced in all realms the university included come from finance. Finance has instigated this process, claiming that the Fordist factory was an opaque situation that was, from its point of view, impossible to measure. In order to be able to invest, for example in a company, finance required all possible instruments of evaluation a perfect transparency that has been provided since the 1980s and 1990s by new standards of accountancy.

 

척도는 칼 슈미트가 정복, 발견, 수탈을 통해 획득된 전유의 결과가 측정되고’ ‘계량되고’ ‘분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도입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척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금융과 신용이 증명하듯이, 척도는 주체적이 됐습니다. 이런 척도 형태는 확실히 새로우며, 권력의 논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자의적입니다. 가치평가와 척도의 논리는 전문가의 형상과 가치평가의 형상을 학교에, 경찰에, 대학에, 병원에, 심지어 정부 등등에도 도입함으로써 삶의 모든 측면에 부과되고 있습니다. 이런 위계적 구조는 사회적 재전유와 지식의 공유에 초점을 맞추면서 전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척도, 가치평가, 전문가의 논리를 깨뜨리는 것이 단연코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Measurement is again a principle that Carl Schmitt introduces, arguing that the result of appropriation, what is acquired through ‘conquest, discovery, expropriation’, must be ‘measured’, ‘weighed’ and ‘divided’. Today measurement has not disappeared: as finance and credit demonstrate, it has just become ‘subjective’. This form of measurement is certainly new and it is arbitrary, depending solely on logics of power. The logic of evaluation and measurement is imposed on all aspects of life by introducing the figure of the expert and of evaluation into the school, into the police, into the university, into hospitals, even into the government, et cetera. This hierarchical structure needs to be overthrown, focusing on social reappropriation and the sharing of knowledge. I think it is absolutely fundamental to break this logic of measurement, of evaluation, of the expert.


당신 책의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에서 당신은 랑시에르와 바디우의 -역사적인 평등주의와 울리히 벡과 하버마스의 2의 근대성에 대해 논박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유의 이 두 조류가 아주 다르긴 하지만, 이들은 확실히 공통적인 무엇인가를 갖고 있습니다. 가령 좌파의 논쟁으로부터 계급투쟁의 물음을 제거합니다. 맑스주의자이기로 돌아갈 시기일까요?

Among the most beautiful passages of the book are those where you engage in a polemic against the ‘a-historical egalitarianism’ of Rancière and Badiou and the ‘second modernity’ of Beck and Habermas. Even though both strands of thought are very different, they certainly have things in common, for instance the removal of the question of class struggle from the debates on the left. Is it time to return to being Marxists?

 

바디우와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인 것은 있으나 자본주의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것은 있으나, 그건 전-자본주의적입니다. 맑스 대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생산이 없는 거죠. 공장이 없는 겁니다. 여기서 공장은 인간, 기계, 기호의 아상블라주의 현동화를 뜻합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생산과 마주칠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복지국가에도 있고 이것의 다양한 현시형태에도 있습니다. 저는 바디우와 랑시에르에게는 기계개념이 없다는 사실을 항상 지적했습니다. 단어만 없는 게 아니라, 기술이나 과학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사회적 기계와 기술적 기계라는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기계는 다른 비판적 이론들에서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오늘날 도처에 있고,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몸짓, 표현, 행동을 수반하는 데도 말입니다.

In Badiou and Rancière there is the political, but there is no capitalism. There is the political, but it is pre-capitalist. There is Plato, and Aristotle, instead of Marx. There is no production. There is no factory. ‘Factory’ here means the actualisation of the assemblage of humans, machines and signs, which is today not only encountered in production, but in every social relation also in the welfare state and its various manifestations. I have always been struck by the fact that there is no concept of the ‘machine’ in Badiou and Rancière not even the word, just like there is no mention of technics or science. The machine (both in the sense of the social machine and the technical machine) has also disappeared from other critical theories, even though it is everywhere today, even though it accompanies every gesture, expression, and action of our everyday life.

 

저는 언어 개념, 그리고 분석 철학에서의 언어적 전회 개념이 큰 문제를 낳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것들은 제가 보기에는 유물론적이지 않은 주체화의 과정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주체화는 항상 기술적이고 사회적인 기계 때문에, 또 이것들과 더불어 일어납니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이며, 권력관계입니다. 하지만 사회적·기술적 기계들에 의해 조력을 받는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특정성입니다. 자본은 인간들사이의 단순한 관계가 아닙니다. 아렌트에게서처럼 (혹은 랑시에르에게서처럼) 상호주체적인 관계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계에서 행동은 물질의 어떤 요소도 결여합니다. 우리는 맑스의 기계에 관한 단장충실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바디우와 랑시에르에게서 발견되는 정치적 주체화가 관념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디우에게 계급투쟁은 추상적인 용어로 사유됩니다. 수학이 그의 작품집anthology입니다.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경제가 마치 정치의 다른 것인 양 말하는 반면, 정치적인 것은 항상 경제에 의해 재정의됩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경제이다.” , 권력관계인 것이고, 권력을 관리하는 자들과 권력에 종속된 자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며, 종속된 자들이 상황을 전복하고 뒤집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그런 관계인 것입니다. 주체화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적이 되는 착취와 지배의 기계적 과정에서 출발합니다.

I think that the concept of language and of the linguistic turn in analytic philosophy have created large problems, because they refer to a process of subjectivation that is in my view not materialist. In capitalism, subjectivation always takes place for and with the technical and social machine. Capital is a social relation, a relation of power, but one that is ‘assisted’ by social and technical machines. That is precisely the specificity of capitalism. Capital is not merely a relation between ‘humans’, an intersubjective relation as in Hannah Arendt (or Rancière), where action lacks any element of ‘matter’. We need to stay ‘loyal’ to Marx’ ‘Fragment on Machines’. For these reasons I think that the political subjectivation found in Badiou and Rancière is ‘idealistic’. In Badiou, the class struggle is thought in abstract terms mathematics is his anthology. Badiou and Rancière refer to economy as if it were the other of politics, whereas the political is always being redefined by the economy. Capitalism is nothing but this. ‘Our destiny is the economy’ that is a power relation, a relation between those who manage power and those who are subjected to it, and where those who are subjected have the possibility to revolt, to overthrow the situation. Subjectivation does not occur around democracy as a given, but starts from machinic processes of exploitation and domination that become democratic through struggles.

 

울리히 벡은 불가능한 3의 길의 모델,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의 모델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저는 벡의 리스크사회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계급 차이가 위험 자체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론들은 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론들에서는 계급투쟁이 낡고 다 헤진 도구로 처리됩니다. 자본가들은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유일한 자들입니다. 낡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이 리스크를 모두 떠안습니다. 부채 경제의 맥락에서 리스크 담론을 고수한다면, 주권적 부채에 투자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투자자들은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국민국가들이 파산으로 치닫는다면, 투자자들은 자기네 돈을, 시기를 잃을 것입니다. 사실은 오히려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은 경제체제가 떠맡기는 리스크를 치러야만 합니다. 진정한 리스크는 주민이 떠맡습니다. 똑같은 것이 생태학적 리스크에도 적용됩니다.

Beck needs to be understood as one of the models of the impossible ‘third way’, of the new social democracy. I think that Beck’s ‘risk society’ is completely ridiculous because, to put it in very simple terms, class differences traverse risk as well. This is inconceivable for such theories, in which the class struggle is disposed of as an old, worn out tool. Capitalists are the only ones who do not risk anything. The risks are all taken on by the old and new proletarians. If we stick to the discourse of risk in the context of the economy of debt, the investors who risked investing in sovereign debt should take on the responsibility for it. If the national States go bankrupt they lose their money, period. Instead, the absolute contrary is true: those who are not responsible are supposed to pay the risk taken on by the economic system. The true risk is taken on by the population. The same applies for ecological risk.

 

벡은 정치적인 것을 결정과 통치의 중심의 분산과 민주화에 입각해서, 성찰의, ‘토론의 증식에 입각해서 사고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는 작금 결정과 거버넌스 테크놀로지들의 중심화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기술적 통치를 통해, 이 위기는 통제의 재집중화를, 국가 및 비-국가 거버넌스의 메커니즘의 재집중화를 부과합니다. 이런 재집중화는 대의제적 정치, 시민들의 민주주의 등등을 내쫓습니다. 사실 기술적 통치는 결정을 합니다만, 이 결정은 실제로는 임금, 소득, 사회 지출을 축소하는 반면, 이것이 위기를 자극하게 될 때에는 묘하게도 너무도 절대적으로 비효과적입니다. 이것들은 장벽에 부딪치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들과 벽 사이에서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벡이 제안하는 용어들로는 오늘날 재생산될 수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 특정한 정치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정교화된 제3의 길 이론들은 작금의 위기에 의해 산산조각 났습니다.

Beck thinks the political in terms of a diffusion and a democratisation of the centres of decision and government, the multiplication of mediations, of ‘discussions’. What is happening in front of our eyes is precisely the opposite. It seems to me that we are currently witnessing a centralisation of decision and of technologies of governance. Through technical government, this crisis imposes a recentralisation of control, a recentralisation of mechanisms of state and non-state governance, which dismisses ‘representative politics’, the democracy of citizens, etcetera. It is true that the technical government decides, but its decisions, while effectively reducing wages, incomes, and social spending, are funnily enough absolutely ineffective when it comes to exiting the crisis. They are running up against a wall, and we are caught between them and the wall. Social democracy was built on specific political bases that do not appear to be reproducible today in the terms that Beck proposes. That possibility no longer exists: the theories of the third way, elaborated during the 1980s and 1990s, have been shattered by the current crisis.


위기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노동조합의 부적절함과 현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급진 좌파의 무능력은 전적으로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부채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학생 부채에 맞선 시위, 이탈리아에서 Equitalia에 맞선 소심한 항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노한 자들Indignados><오큐파이>는 광장을 물리적으로 점거함으로써 도시의 재전유에 관여하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여느 때보다 오늘날 훨씬 더 열려 있는 듯이 보이는 조직화의 문제에 관한 당신의 견해는 뭡니까?

The inadequacy of unions in dealing with the crisis and the incapacity of the radical left to interpret the present have become entirely evident. New movements are beginning to pose the question of debt: think of the campaign against student debt in the United States and the timid protests against Equitalia in Italy. The Indignados and Occupy have started to engage in a reappropriation of the city by physically occupying squares. What are your views on the question of organisation, which now seems to be more open than ever?

 

지금 우리는 정치적일 뿐 아니라 언어적이기도 한 대표=재현의 논리의 쇠약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재현=대표의 오랜 위기는 자본의 관점에서는 물론이고 해방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도 그 종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부채 위기는 무엇보다 우선 피통치자(부채인간)와 통치자(기술적 통치) 둘 다를 재정의하는 통치성의 위기입니다. 이것은 푸코의 계보학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 새롭게 조명을 비춰줍니다. 대처 시대 이후 우리는 화폐의 민영화의 맞짝인 통치성의 민영화를 목격했습니다. 통치 테크놀로지는 더 이상 국가의 테크놀로지가 아닙니다. 비록 국가가 그 속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그저 민영화된제도로서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경제는 내부로부터 통치하기의 가능성을 제안할 뿐 아니라, 통치하기의 기능을 그 전체에 있어서 떠맡습니다. 기술적 통치는 이런 민영화 과정의 완결입니다. 재현=대표의 논리는 화폐/신용의 기능적, 작동적 논리(들뢰즈와 가타리가 부르는 바의 다이어그램)에 의해 대체됩니다. 이 논리는 재현=대표를 거쳐가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기표작용적이고 재현적 어의론(언어)를 거쳐가는 것도, 혹은 슈미트 식으로 말하면 주체들을 결정하는 것을 거쳐가는 것도 아닙니다. ‘생산의 논리와 (정치적이고 언어적인) 재현=대표의 논리는 자본주의에서 함께 기능하지만, 생산의 우월성에 바탕을 두고 작동합니다. 그리고 위기에서 생산의 논리는 정치적 공간 전체의 구석구석에 퍼집니다.

Here we should start from the exhaustion of the logic of representation, political as much as linguistic. A long crisis of representation is approaching its end, both from the point of view of capital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emancipation. The crisis of debt is first of all a crisis of governmentality that redefines both the governed (indebted man) and those governing (technical government). This sheds a new light on Foucault’s concept of governmentality that breaks radically with his genealogy. Since the Thatcher era we have witnessed a privatisation of governmentality that is the counterpart of the privatisation of money. The governmental technology is no longer a technology of the State although the State plays a central role in it, but only as a ‘privatised’ institution and the economy does not only limit the possibilities of governing from within, but takes on the function of governing in its entirety. Technical government is the accomplishment of this process of privatisation. The logic of representation is replaced by the functional, operative logic (diagrammatic, Deleuze and Guattari would call it) of money/credit. This logic does not pass through representation, not even through signifying and representative semiotics (language) or through deciding ‘subjects’ à la Schmitt. The logic of ‘production’ and the logic of representation (political and linguistic) work together in capitalism, but on the basis of the supremacy of the former. And in the crisis, the logic of production pervades the entire political space.

 

기술적 통치, -대표적=재현적 통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때의 논리를 사업에서 정치에 이식시키려는 시도입니다. 통치는 주민이 경제적 변수들의 수정에 실시간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확산이 증가하면, 주식시장은 무너집니다. 임금, 소득, 사회 지출은 부채의 경제가 내는 신호들에 실시간으로 적응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피통치자의 주체성을 인간자본[인적자본]’ 개념을 통해, 정의합니다. 푸코도 사용하는 정의이죠. ‘인간자본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자본환경에 인공적으로 도입된 수정에 대해 체계적으로 반응하는 그/그녀입니다. 인간자본은 더 이상 고전경제학의 자유의 원자가 아니라, 상이한 행태가 적응해야 하고 양립해야 하며 경제가 내는 신호들에 제때에응답해야 하는 체계적이고 종속된 변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자본에서 얻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을 부채인간에게서 갈취하고 싶어 합니다. 채권자들의 필요에 실시간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말이죠.

What is a technical government, a non-representative government? It is an attempt to transpose the ‘just-in-time’ logic from business to politics. The government must make sure that the population responds in real time to the modifications of economic variables. The ‘spread’ increases, the stock market falls; wages, incomes and social spending need to adapt in real time to signals given out by the economy of debt. Neoliberals define the subjectivity of the governed through the concept of ‘human capital’, a definition also used by Foucault. What is ‘human capital’? ‘Human capital’ is s/he who responds systematically to the modifications that are artificially introduced in the ‘environment’. Human capital is no longer the ‘atom of liberty’ of classical economics, but a systemic and subordinated variable of which the different behaviours must adapt, be compatible with, and respond ‘just in time’ to the signals given out by the economy. Neoliberalism wants to extort from indebted man what it has not succeeded to obtain from human capital the capacity to respond in real time to needs of the ‘creditors’.

 

얼마 전부터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전문정치(technical politics)’의 한계와 불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통치성의 자기-조절에 대한 광란은 시장의 자기-조절에 관한 이미 현존하는 광란에다 추가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동적인 통치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면 이것을 사이버네틱이라 부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본의 이 파괴적이고 반-생산적인 광기의 한복판에서 어떤 것이 명료해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따라 실제로 통치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일 이 논리가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용어로 정식화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작금의 통치 테크닉은 바로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척도를 초과합니다. 스스로를 자본의 강점으로 제시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약점을 감춥니다.

For some time it seems to have succeeded in doing precisely that, but we can already see the limits and the impossibilities of this ‘technical politics’. The frenzy about the ‘self-regulation’ of governmentality is added up to the already existing frenzy about the ‘self-regulation’ of the market. It is a kind of automatic government cybernetic, as Deleuze and Guattari would call it. But it will not work. In the midst of all of this destructive and anti-productive madness of capital, something is becoming clear. Contemporary society cannot actually be governed according to a capitalist logic if this is not formulated in authoritarian (and reactionary) terms and the current techniques of government are moving in precisely that direction. Society exceeds the measure of the neo-liberal economy. What presents itself as a strength of capital, hides a considerable weakness.

 

우리는 항구적인 예외상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규칙[일상]이 됨에 따라, 이제 이것을 예외라고 계속 언급하는 것조차도 쓸모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주권자란 이런 조건에서 결정하는 자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주권자는 <자본>입니다. 이것은 주권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를 현실적으로는 이 개념의 종언을 분명히 내포하는데요, 이는 슈미트의 한계를, 슈미트로 돌아가는 모든 이론들(아감벤 등등)의 한계를 정의합니다. 자본은 인격결정을 위한 슈미트식 전제 이 아닙니다. 심지어 인격들의 집단도 아니고, 오히려 그 주체화들이나 인격화들을 갖고 있는 기계’(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많은 기계들)입니다. 더욱이, <자본>은 그 자체로는 영토를 갖지 않으며,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한 공동체나 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따뜻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인 것도 아닙니다. 시장, 사업, 경쟁은 균일화[통일화]가 아니라 분산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한 사회를 단합하게 만드는 것을 체계적으로 파괴합니다. <자본>은 정치적 통합의 결여를 보상하기 위해 빌려온 영토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자본>은 이런 영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국민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체계적인 시도를 저질렀습니다. 대표적[대의적]이고 제도적인 모든 매개들은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약해졌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과정이 가장 명료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Padania’는 이른바 제3부문이 결여된 영토와 공동체주의적 따뜻한 가치들이라는 소극(笑劇)에 기초해 있습니다. 소극의 다른 쪽인 베를루스코니와 신-파시스트들이 대표하는 <자본>은 민족적[일국적]이고 국가적 가치들의 대용품을 제공합니다. 또 다시, 자본이 힘을 진열하는 것은 그 약점의 기호입니다. 투쟁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면서 똑같은 수준에서 자본과 싸우는 주체성이 있는 한은 말입니다.

* ‘Padania’는 이탈리아 북부동맹이 포 밸리(국가의 중앙통제로부터 더 많은 자율을 요구하는 지역)의 이탈리아 쪽 부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

We live in a permanent state of exception. As this has become the rule, it is by now useless to even continue referring to it as exception. If the sovereign is he who decides in these conditions, the sovereign of today is Capital. This evidently implies a radical change of the concept of sovereignty its end, actually that defines the limit of Schmitt and of all the theories that return to him (Agamben, etcetera). Capital is not a ‘person’ the Schmittian presupposition for the decision and not even a group of persons, but a ‘machine’ (or more precisely a number of machines) with its subjectivations or personifications. Moreover, Capital does not have a territory in itself, nor the ability to express the ‘warm values’ capable of constructing a community or a society, as the German ordoliberals would claim. The market, business, and competition are based on principles of dispersal, not of unification. They systematically destroy what holds a society together. Capital always needed to make use of borrowed territories to compensate for its lack of political integration. Since the 1970s it has committed itself to a systematic attempt to undermine the most important of these, namely the Nation-State. All of the representative and institutional mediations have either been destroyed or forcefully weakened. In Italy, this process is clearly visible. On the one hand, the ‘Padania’1 is based on a farce of territory and of the communitarian ‘warm values’ that lack in the so-called tertiary sector. Capital, as represented by Berlusconi and the neo-fascists, which are the other side of the farce, provides a surrogate of national and state values. Once again, Capital’s display of the force is rather a sign of its weakness, insofar as there is a subjectivity that fights it at the same level, exposing its own weaknesses through struggles.

 

또한 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대표[대의]적 논리는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노동조합, 사회제도 등등) 대표[대의] 위에 서 있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는 지난 30여년 동안 출현한 운동들에 의해 거부됐습니다. 새로운 운동은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들은 <자본>의 공격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분노한 자들’, ‘월가를 점거하라’, 특히 오클랜드의 실험들이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한편으로, 이 실험들은 노동조합의 기업적이고 부문적 전통과 단절하면서 즉각적으로 사회적인 수준에 스스로를 위치시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실험들은 대의[대표]’ 때문에 움찔합니다. 아무튼 위기의 가속화와 심화는 우리가 새로운 조직화의 양상과 새롭게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쟁점들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지를 가장 잘 알려줄 겁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채무자로서 주체화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저는 그게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할당된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채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채는 즉각적으로 어떤 사회적 지형을, 우리가 전에는 갖지 못했던 횡단적으로 사회화된 차원을 내포합니다. 맑스가 말하듯이,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벌거벗은 채 드러냅니다. 승리주의적 담론이나 역사의 철학을 통해서가 아닌 거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비교해 보면, 조건은 바뀌었습니다. 상이한 사회적 투쟁들과 상이한 삶의 형태들의 이질발생성과 관련해 봤을 때 재-특이성화되어야 하는 공통의 기반이 지금은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제 메트로폴리스의 재전유에, 소득을 위한 투쟁 등등에 참여하는 실천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Also from the point of view of movements, the representative logic is in crisis. Political democracy and social democracy founded on representation (unions, social institutions, etcetera) have been rejected by the movements that have emerged in the last thirty years. Between numerous difficulties and ambiguities something new is taking place. The new movements are involved in very interesting experiments. However, they do not yet seem to be up to par with the attacks of Capital, even though the experiments of the Indignados, of Occupy Wall Street and especially of Oakland are certainly advanced. On the one hand, they position themselves at a level that is immediately social, breaking with the corporative and sectorial traditions of unions. On the other hand, they recoil from ‘representation’. At any rate the acceleration and deepening of the crisis will best teach us how to find new modalities of organisation and new mobilising issues. I do not think that we can subjectivate ourselves as debtors: I do not think it is possible, since it is a category assigned by capitalism you are forced to be a debtor. Nonetheless, debt immediately implies a social terrain, a transversally socialised dimension that we did not have before. As Marx would say, capitalism reveals itself in all its nakedness, but not through a triumphalist discourse or a philosophy of history quite the opposite. But compared to the 1980s and 1990s the conditions have changed, for there is now a common ground that has to be re-singularised in relation to the heterogeneity of different social struggles and different forms of life. We need to start once again from practices engaged in the reappropriation of the metropolis, the struggles over income, etcetera.

 

자본주의의 팽창적 동학은 끝났습니다. 1980년대에 이 동학은 모두를 위한 부의 증대를 우리에게 여전히 약속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미래의 부라는 이 약속을 더 이상 유지할[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약속받고 있는 것은, 다음 10년에서 15년까지 피와 눈물이며, 그들의 특권에 대한 맹렬한 방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계급투쟁의 낡은[] 목표의 상당수가 또 다시 적실해지고 있습니다.

The expansive dynamics of capitalism have ended. In the 1980s they could still promise us the increase of wealth for everyone. Today capitalism can no longer maintain this promise of future wealth. What we are promised today is ‘blood and tears’ for the next ten to fifteen years and the ferocious defence of their ‘privileges’. In this context, many of the old aims of the class struggle become relevant again.

 

This text is a translated and edited version of an interview that was originally published in Italian on the UniNomade 2.0 website in May 2012.

 

With special thanks to Riccardo Baldissone, Rory Rowan and UniNomade.

 

‘Padania’ is the name used by the Northern League in order to refer to the Italian part of the Po Valley: the territory for which they demand more autonomy from the central control of th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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