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04.12 『사상』, 2013년 2월 1부 3장.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 미셸 푸코의 생체권력론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1부 3장.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 미셸 푸코의 생체권력론

히로세 코지(廣瀬浩司)

* 이 글도 푸코의 국역본과 대조하지 않았다. 또한 '생명권력'이라는 용어 대신 '생체권력'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겼다. 그 이유는 처음의 각주에 드러나 있다.    


들어가며

주지하듯이 미셸 푸코가 말하는 생체권력(bio-pouvoir)”[각주:1]은 고전주의적·군주적 주권의 생살여탈의 권리”,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에 대비된다(IFDS, p.214/240). 이에 반해 18세기 후반부터 말에 걸쳐 생겨난 것이 살게 만들면서 이와 더불어 죽게 내버려두는(성의 역사1권에서는 죽음 속으로 집어던지는”) 생체권력이다(IFDS, p.216/240). 이 권력의 하위분류로서, 감시하는 것과 처벌하는 것(일본어 번역본은 감옥의 탄생)(1975)에서 검토된 규율권력과, 생체정치가 있다. 두 번째로 생체권력은, <인간이라는 종>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주로 인구통계학적 수법을 활용한다. 그리하여 인구=주민다양체의 힘의 증대나 쇠퇴를 통제하는 것이다. 셋째로 생체권력은 공중위생, 사회보장, 의학적 지식과 같은, 여러 가지 제도나 지식과 연결되어 확산한다(IFDS, p.217/243).


   

이상은, 생체권력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던 19763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기초한 교과서적 요약인데, 이것은 푸코의 개념 중에서도, 일찍이 빈번하게 이용되었던 것인 동시에, 그의 저작에서는 다소 안착되기 나쁜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나중에 보듯이, 자주 인용되는 성의 역사15장에서 이 개념은, 4장과는 단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도, 이 개념은 끊임없이 예고되면서도 주제화되지 못하고, 통치성, ()자유주의와 같은 문제에 의해 뒤로 미뤄진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자 푸코는 마치 이 개념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자기의 통치타자들의 통치로 이행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빼어나게 정리하고 있듯이,[각주:2] 이러한 애매함이라고도 보일 수 있는 위치부여 때문에, 이 개념은 크게 나눠서 두 개의 방향에서 이용되어 왔다. 하나는 조르조 아감벤처럼, 생체권력을 주권행사의 한 양태로 간주하고, 그 대상을 예외상태에서의 벌거벗은 생명으로 철저화한 다음에 존재신학·정치신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랑시에르에 따르면 하이데거적인) 방향. 또 하나는 생체정치개념에 적극적·정치적 가치를 부여하고 권력에 의한 신체의 객체화나 전지구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통치에 대항하여, 신체화에 뿌리를 둔 주체화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거나 질 들뢰즈의 내재적 삶의 존재론에 기초하여 테크놀로지의 철학을 전개하기도 하는 전통적인 인간학적 맑스주의의 흐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용법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생각이 없지만, 다소 상이한 접근방법을 설정하고 싶다. 그 전제로서 강조해야 할 것은, 생체권력 개념이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어떤 일관된 흐름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이 개념과 규율개념의 차이를 철저하게 명확히 하고, 상이한 수준의 권력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진리의 정치라고 불릴 수 있는 철학에 편입[기입]된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연구하고 싶은 것은, 역사학도 사회학도 경제학도 아니다. 그것은 철학, 즉 진리의 정치에 관계하는 어떤 것이다”(STP, p.5/5). 나중에 보듯이, 이 과제는 1970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개강 강의 담론의 질서나 그것에 이은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전개된 진리에의 의지론에, 권력 테크놀로지의 분석을 접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고해 등의 자기를 말하는테크놀로지의 분석에 의해 매개되며, 말년의 정치적 파르레시아”(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론에 상대적으로 매끄럽게 접속한다.

  

이 전제에 기초를 둔 이 글에서는, 생체권력이나 생체정치와 같은 개념의 가능성을, 할 수 있는 한 다른 문제계에 흡수되지 않는 형태로 제시하고 싶다. 따라서 사목적 통치, 국가이성, 신자유주의 같은 관련 주제에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물론 푸코 자신이 이 흡수를 하고 있기에, 작업은 그렇게 쉽지 않다. 또한 쉽게 이 개념을 고립시키고자 생명정치의 당파적인 긍정에 연결될 수 있기에, 관련 주제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확인[궁구]하는 것이 포인트가 된다. 그런 위에서,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전체를 관통한다고 생각되는 진리의 정치와의 관계를 시사하고 싶다.

 

1.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의 생체권력

이미 말했듯이 성의 역사1지식의 의지5장에서 제시된 생체권력의 개념은 약간 거처가 나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섹슈얼리티의 장치말미의 시대구분”이라는 절에서 푸코는 이 장치를 정신분석의 고고학에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생체권력을 둘러싼 고찰은 이것과 일단 단절한다. 물론 나중에 보듯이 그는, 생체정치와 규율권력의 중간에 섹슈얼리티의 장치를 위치시킨 다음에, 재차 정신분석을 언급한다. 정신분석은 이 장치를 법[]이나 상징질서에 편입해 버린다. 이리하여 단절은 다시 만들어진다.

이에 반해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의 생체권력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것이다. 우선 앞서 말한 1975-76년도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의 첫머리에서 푸코는, 자신이 1970년대부터 시작했던 권력론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IFDS, p.5/6)는 바람을 표명한다. 이리하여 개시된 강의는 역사적 과정의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é)의 독해 격자로서 전쟁 개념을 논한다. 일찍이 전쟁 개념은 지식과 진리의 장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평화와 질서가 진리와 지식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 국가의 규율화의 귀결이다.

그리고 19세기에 이 개념의 중요성을 지워버렸던 것이 국민=민족(nation)” 개념이다. 그것은 다른 국민=민족을 지배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의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핵으로서, 스스로를 행정적으로 관리하거나 국가권력의 체질과 기능을 정비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민족은 타 민족과의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국가를 구성해야 할 개인의 신체로부터, 국가 자체의 실제적인 존재에 이르는 수직의 관계”(IFDS, p.199/222)에 의해 기초지어진다. 그것은 국가라는 형상에 그대로 질서지어진 능력이나 잠재성이다(IFDS, p.200/223).

이 수직의 관계에, 규율권력에서 생체정치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운동을 겹쳐놓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체를 미시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규율권력이라면, 민족 개념은 이로부터 출발하여 국가라는 거시적인 것의 잠재성이 어떻게 조직되는가라는 운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로부터 국가로의 상승 운동에 있어서, “규율권력에서 종으로서의 인간을 거시적으로 조정하는 권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규율권력과 생체정치는 “생물학적인 것의 국가화”(IFDS, p.213/240)라는 잠재적인 운동의 양극인 것이다.

 

1. 규율권력과 생체정치

구체적으로 보자. 지식의 의지에서 푸코는 규율권력과 생체정치라는 두 극이 중간적인 관계들의 끈”(VS, p.183/176)에 의해 매개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한편으로 학교 기숙사에서 소년의 성의 관리와 같은 미시적인 규율화가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생률이나 사망률, 위생, 사회보장 등에 관한 거시적인 관리가 이루어진다. 확실히 후자는 시대적으로는 다소 늦게 18세기 후반에 등장했다고 간주되지만, 그것은 규율권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에 담고, 통합하고, 부분적으로 변용하는, 그리고 특히 규율권력에 뿌리를 두고, 규율기술 덕분에 현실에 끼워넣어지게 됨으로써 규율권력을 이용하는것이다. 그것들은 상이한 수준에서 상이한 도구를 사용하는 두 개의 권력이며,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로 연결한다(IFDS, pp.224, 215-216/250, 242).

이 연결의 양태들이 장치라고 불린다. 두 개의 이질적인 극 사이에서 산일(散逸)하는 전술들이 다양한 장치로서 결정화하며, 고유한 지식과 진리를 창조한다. 이리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역사의 이해 가능성의 분야로서 폭로하는 것이 푸코의 과제였다.

이것은 첫째로, 개인의 규율과 인구의 생체정치를 미시와 거시로 대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가 다른 문맥에서 지적하듯이, 예를 들어 개개인의 거동을 양치기처럼 통제하는 사목적 통치의 거시분석에서, 국가이성이나 자유주의적 통치와 같은 거시분석으로는 모순도 역설도 없이 이행할 수 있다. 다만 그 경우 국가란 초월적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행동양식이나 사고양식으로서 생각되어야만 한다(STP, p.366/441). 이것들은 실천의 총체로서, 국가화해야 할 총체, 국가화하지만 결코 개념이나 제도로서의 국가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서 생각되어야만 한다.

둘째로, 애초에 규율권력의 분석도 미시분석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형무소에서의 실천들의 분석은, 형무소의 바깥에서의 비행의 관리의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미시적인 기능의 배후에 여러 가지 전략이나 전술의 연쇄를 발견하고, 거시적인 사회로 확장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규율권력이 이미 일종의 원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정신병·비행 같은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대상의 자명성을 괄호에 넣는 것은, “지식의 대상들을 수반한, 어떤 진리의 영역”(강조는 인용자)이 구성되는 운동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이 정신의학이며 형벌제도이며 정신분석이다.

이처럼 미시분석에 의해 제도와 기능의 외부의 관점에 서서, 기존의 보편 개념을 괄호에 넣음으로써, 푸코라는 관찰자의 관점 그 자체가 이동한다. 그때 보이게 되는 것이 제도나 기능과는 다른 수준에 있는 결합과 지주와 커뮤니케이션의 그물망 전체”(STP, p.123/149)이며, 이것이 저절로 거시분석을 갈구한다. 이 미시에서 거시로의 저절로 이루어진 이동에 푸코의 질문의 장이 있다.

나아가 이 결합이나 지주는 동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떠받치는 권력관계들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반제도적이지도 반체제적이지도 않는 하나의 운동이나, 어떤 테크놀로지의 발명이, 권력관계들 전체의 경제를 흐트러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제도나 기능이 부동의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발성의 출현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데, 이 우발성은 권력을 변용시키는 계기로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생체권력은 바로 이러한 우발성의 출현을 통제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기 때문이다.[각주:3]

 

2. 주권과 죽음

규율권력과 생체권력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듯이, 양자와 주권적 주권과의 관계도 착종되어 있다. 확실히 푸코는 양자를 양자택일적인 것으로서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전적 주권은 어디까지나 죽게 만드는 것을 축으로, 다른 사람을 살게 내버려두는것이었다. 이에 반해 생체권력은 주민다양체의 생명을 조정함으로써, 살게 만드는 권력이다. 그러나 한 번 읽어서는 그다지 명쾌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죽게 내버려두는권력, 또는 죽음 속에 내던지는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살게 만드는 권력에서, 죽음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질병에 관한 정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말에 중심적 문제였던 것은 페스트 같은 갑자기 엄습한 역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천연두처럼 치료의 비용, 노동력의 감소 등을 초래하는 인구 수준에서의 질병이었다. 질병이나 죽음은 생명에 미끄러져 들어가고, 끊임없이 그것을 좀먹고, 감소시키거나 약화시키는 것으로서 통제된다. 바꿔 말하면 질병은 본질적으로 유한한 것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종을 안쪽에서부터 좀먹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내재적인 경계를 구성한다. 살게 만드는 것으로서의 권력은 죽음을 정면에서 파악할 수 없다. 권력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우발성을 확률론적으로 통제하는 것뿐이다. 거꾸로 말하면, 권력은 사망률이라는 모습으로, 죽음을 건드리지 않고 인구를 통제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죽음 자체는 공공행정에서 제외되며, 사적인 영역에 갇힌다. 그것이 자살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권리로서 확립시켰다(IFDS, p.221/247, VS, p.182/175-176).

또한 1975-1976년도 강의에서는, 이 문제가 인종(차별)주의의 등장과 조합된다. 인종주의의 등장, 정확히 말하면 인종 개념의 국가로의 편입[기입], 죽음이 생체권력의 외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군주권이 살아야 할 자와 죽어야 할 자 사이에 분할선을 긋고자 할 때 가능해진다(IFDS, p.227/253). 그것은 기존의 주권에 의한, 생물학적 위험의 제거와 인구의 현실적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바꿔 말하면, 주권과 생체권력의 양자택일이 무너질 위기적인 지점에서야말로, 새로운 형상의 탄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위기 개념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역사와 생명

우리는 이상과 같은 분석에서 푸코의 생명론적 전회를 발견해야 할까? 그렇지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중요했던 것은 역사의 이해 가능성의 척결에 있어서의 전쟁 개념의 유효성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명이 문제가 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담론과 생물학적 담론의 뒤얽힘에서이다. “인간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한다면, 그 근거는 역사와 생명의 새로운 관계 방식에서 찾아져야 한다. 생명은 역사의 생물학적 주변으로서 역사의 외부에 있는 동시에, 지식과 권력의 기술에 의해 관통되고, 인간의 역사성의 내부에도 있다고 하는 이중의 위치에 놓여 있다”(VS, p.189/181). 일찍이 푸코는 말과 사물(1966)8노동, 생명, 담론에서 문헌학과 경제학과 생물학이라는 3대 지식이 인간이라는 형상을 부각시켰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여기서는 권력이라는 축이 더해지고, 문헌학이 민족성에, 경제학이 사회계급의 분석에, 생물학이 인종주의에 연결된다(IFDS, p.170/190). 생명과 죽음, 생명과 기술[테크네]의 존재론이 아니라, 인간과학들의 고고학에 권력을 접속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한편으로, 생물학 자체의 변용, 특히 유전학이나 진화론이 생체정치의 문제와 깊이 연결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조르주 퀴비에(1769-1832)에 의해 박물학을 대신해 자연의 <역사>가 가능해졌다는 것, “역사성이 이제 자연 속에, 아니 오히려 생체 속에 도입되었다는 것[각주:4]을 지적했다. 생체정치의 문제에 몰두하는 데 있어서 푸코는 이 생명사(bio-histoire)”와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 “생명의 운동과 역사의 과정이 서로 간섭하는 운동을 초래하는 압력을 생명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생명과 그 메커니즘을 명백한 계산의 영역에 등장시키고, <지식인 권력>을 인간의 생명의 변형의 담지자로서 만들어내는 것을 지시하기 위해 생체정치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VS, p.188/280). 생체정치와 생명사는 서로를 모델로 하면서 역사의 이해 가능성을 구성한다.[각주:5] 하지만 그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역사성[각주:6]의 등장이지 역사의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II. 안전·영토·인구와 인구의 자연성

앞 절에서 봤듯이, 1975-76년도의 최종 강의는, 18세기 후반 이후에 성립한 권력을 명확히 하는 것에 할애되었다. 이듬해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는 이 새로운 권력의 장치를 안전=보장=보안(sécurité)의 장치라고 명명한다. 그렇지만 강의 시작으로부터 약 1개월 후에 푸코는 이 제목에 의문을 던지면서, “통치성의 역사가 정확하다고 말한다(STP, p.111/132-133). 이 시대의 통치성이란, 인구를 주요한 표적으로 삼고, 경제학을 지식의 주요한 형식으로 삼으며, 안전의 장치를 기술적 도구로 삼는 것인데, 이 통치성의 역사를 특히 15-16세기의 사목적 통치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논하는 것이 강의의 주요한 내용이다. 따라서 생체권력의 문제는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난다.

그렇지만 안전의 장치의 문제는, 나중의 푸코의 사상을 예고하는 몇 가지 흥미로운 논점을 품고 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주제이다.[각주:7] 이 주제는 정확하게는 권력기술들의 영역에 자연이 들어가는 것을 함의하며, 생명과 역사의 관계의 분석에 관련된 것인 동시에, 이듬해의 자유주의론과 직접 접속하기 때문이다.

규율권력이나 법률과 구별되는 안전의 장치에 관해 푸코는 예를 들어 도난에 대한 대응을 예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전의 장치란, 아주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 즉 도난을, [확률론적으로] 개연적인 일련의 사건에 투입하는 것이다. 둘째, 이 현상에 대한 권력의 반응을 계산 속에 투입한다. , 비용의 계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허가된 것과 금지된 것의 이항적 분할 대신에, 한편으로는 최적이라고 생각된 평균값을 정하고, 이어서 그것을 넘어서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간주된 허용 가능한 한계를 정한다.(STP, p.8/9)

지극히 포괄적으로 말해보면, 첫째로 이 안전장치는 문제가 되는 현상, 예를 들면 절도 같은 현상을 있어날 수 있는 일련의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둘째로 해당 현상에 대한 권력의 반응은 일정한 계산, 즉 비용 계산으로 삽입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허가와 금지라는 이항분할을 설정하는 대신에 최적이라고 여겨지는 평균치가 정해지고, 넘어서면 안 되는 용인의 한계가 정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사물과 메커니즘의 배분은 이제까지의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24)

 

따라서 안전장치란, 금지나 처벌의 법이 아니라, 감시와 구금 실천으로 이루어진 규율적·훈련적 실천도 아니며, 어떤 넓이를 지닌 장소에서의 범죄의 발생률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증가나 감소의 요인, 범죄 내지 그 억제의 비용을 계산하는 장치이다. 그리하여 어떤 평균값의 둘레에서, 안전 유지를 위한 시스템이 설정된다. 이 장치의 일반적 특징을 푸코는 안전공간의 설정, 우발적 사건에 대한 대처, 정상화의 순으로 논하고, 이 장치의 대상이기도 하고 주체이기도 한 인구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여기서는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주제로 연결되는 논점만을 다루자.

 

1. 인구와 그 환경

규율권력은 형무소, 병원, 학교와 같은 폐쇄공간의 분석을 그 주요한 모델로 삼았다. 그에 반해 안전장치가 유효한 것은 우선은 도시계획에서이다. 그것은 위생이나 환기, 도시 내의 통상(通商)의 보장, 도시 바깥과의 교통의 정비이며, 동시에 이러한 기능을 방해하는 위험한 요소를 통제하고, 나쁜 유통을 배제하는 것이다(STP, p.20/22-23)

여기서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1) 규율권력이 형무소와 같이 공허하고 인공적인 공간에서 작동하는 데 반해, 안전장치는 용지(用地), 하천, , 공기 등의 현실적인 소여에 작동된다는 것, (2) 규율권력이 이른바 완전히 통제된 공간을 조직하고자 하는 데 반해, 안전장치는 그러한 소여 중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최대한 유통시키고, 반대로 위험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을 (완전히 제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 (3) 도로 등의 소여의 요소에 할 수 있는 만큼 다기능성을 부여하는 것, (4) 이 장치가 일으킬 수 있는 확실성을 문제로 삼고, 미래에 열린 한없는 계열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전의 주권권력은 영토를 수도화하고, 규율권력은 공간을 건축화하고, 거기에서의 계층적이고 기능적인 요소 배분을 행했다. 그에 반해 안전장치는 가능한 사건 혹은 사건의 계열, 가능한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환경(milieu)”을 정비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변용 가능한 열려진 틀을 정비하는 것이다.

이 열려진 틀로서의 환경이라는 용어에 주목하자. 여기서 푸코는 환경이라는 말을 그 생물학적 함의를 고려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조르주 캉길렘의 생체와 그 환경[각주:8]이라는 논문을 참조하면서 푸코는 이 개념이 뉴튼 역학의 에테르개념을 -밥티스트 라마르크(1744-1829)가 생물학에 이식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환경이란, 본래 원격작용의 매체이며, 힘의 중심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작용의 유통의 매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전장치는 자연적 소여나 주민다양체의 총체의 유통 매체이며, 원인과 결과의 유통의 매체이기도 하다. 인구 증가가 장기瘴気[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의 증가를 야기하고, 이것이 사체의 증가를 야기하며, 이것이 또 다시 장기瘴気의 증가를 야기한다는 식이다.

바꿔 말하면, 안전장치란 자연적·인공적인 환경, 생체의 다양체로서의 주민집단 사이의 접촉면 내지 양자의 복합체에 개입하는 것이다. 인구를 통제하고자 한다면 환경을 통제하면 된다. 그 위생, 유통, 외부와의 관계, 위험성의 제거가 인구를 변용시킬 것이다. 그것은 강제도 금지도 없이 거의 자연적으로이루어진다는 것이다(STP, p.23/27).

 

2. 인구의 자연성과 현실태의 이중화

이런 문맥에서 등장하는 것이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주제이다. 이 말이 큰 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것은 중세·르네상스에서의 좋은 통치를 떠받쳤던 신적이고 자연적인 질서와는 상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성을 주제로 한 강의들에서 푸코가 분명하게 했듯이, “국가이성개념은 이 자연적 질서와 단절하고 공공행정학=폴리차이에 기초한 인공적인 국가관을 확립했다. 인구의 자연성은 이 국가이성의 인공성에 대해서 중농주의자들의 경제학=정치경제학이 재도입했던 새로운 현실태로서의 자연성이며,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초월한 사회의 자연성이기도 하다(STP, pp.357, 359-360/432, 434-435). 그것은 국가이성을 부정한다기보다는 그것을 자연성에 의해 보강하고, 그 잠재성을 통제하는 원리이다.

이 문제는 이듬해의 강의 생체정치의 탄생에서의 자유주의적 통치의 분석, 또는 1981-82년도 강의 주체의 해석학자기통치에서의 재난의 예측[각주:9]이라는 주제 등으로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에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문제는 식량난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 안전장치를 설정하는가라는 것이다. 지표가 되는 것은 18세기 중반의 곡물유통의 자유화이다. 1784년의 칙령에 의해 곡물거래의 거의 전면적인 자유화가 수립되고, 중농주의자가 승리했다. 그러나 이 자유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가?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라는 해괴망측한 제목.
수정하고 싶어도 수정할 수 없는 이 비극.

푸코는 식량난이라는 재난개념의 철학적·정치적 의미를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우선 고대 그리스-로마 이래, 행운과 불운 같은 우주론적·정치적 개념으로 파악되며, 나아가 악한 인간본성(탐욕, 이윤추구, 이기주의)의 귀결로서 법적·도덕적으로 파악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를 뒤집은 것이 경제적 통제에 의한 식량난의 예방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식량난이 일어날 수 없는 시스템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비하고, 그것이 현실태에 기입되어 버리기 전에방해하는 시스템이 모색되는 것이다(STP, p.34/41).

17세기 이후의 중상주의자들이 가격통제로 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던 데 반해, 18세기의 중농주의자들의 안전장치는 대대적인 변화를 구성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우선 식량의 부족·가격급등 같은 사건은 더 이상 불운이나 악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다. 이것은 분석대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분석되어야 할 것은 시장 그 자체가 아니라, “곡물의 역사라고도 해야 할 것, 즉 대지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곡물에 이른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토지의 질, 기후, 수확량 등), 살아 있는 역사성”(Ibid)이다. 아베이유 같은 중농주의자를 논하면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베이유나 중농주의자들이나 18세기의 경제학 이론가가 획득하고자 했던 것은 이렇게 요동치는 현실태 자체에 접속하고, 현실적인 다른 요소와의 관계를 계열화함으로써, 이 현상이, 그 현실태를 이른바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또한 방해되지 않고, 조금씩 보전[補塡]되며, 제동을 걸고, 그리고 이윽고 제한되고, 마지막으로는 폐지되게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이 작동은, 풍작/흉작, 고가/저가와 같은 변동이라는 현실태의 장 자체에서 행해진다. 미리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태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어떤 장치가 배치된다. 이것이 안전장치이며, 법적·규율적 시스템이 아니다(STP, p.39/46).

아베이유, 중농주의자들, 18세기의 경제이론가들은 실제의 변동 상황 자체에 접속하고 현실의 다른 요소들과 일련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런 현상을 조금씩 상쇄하고, 억제하고, 최종적으로는 제한해 결국에는 소멸시키는 장치를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이런 변동이 실제함을 잊는다거나 막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풍작과 흉작, 가격하락과 가격상승이라는 실제의 변동 상황 안에서 작동하는 장치, 예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에 발을 들여놓는 장치가 설치됩니다. 저는 이것이 더 이상 사법적규율적 체계가 아니라 안전장치라고 생각합니다.(69-71)

 

여기서 인구의 자연성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이 현실태[각주:10] 개념이다. 주권적인 이 부정적인 것을 상정하는 상상적인 것이며, 규율권력이 비정상인을 교정하는 제도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현실태를 보족하는 데 반해, 중농주의자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태에 접속하는 장치를 구축한다. 그 접속의 장이 예를 들어 자유로운 유통의 환경이며, 곡물이라는 자연에 역사적인 사건이 도래하는 환경이다.

그것은 현실의 요소가 다른 요소에 작동을 걸며, 스스로에게 포개어지며, 변동을 통제하고자 하는 장에 접속한다. 이것을 현실태의 이중화의 장에의 현실적인 접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구의 자연이란 자연의 내부로, 자연의 도움을 빌려서, 자연에 관해서통치의 절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STP, p.77/91). 바깥으로부터의 통제가 아니라, 현실태의 내적인 이중화의 장, 실이 현실에 대해 겹쳐지는 장에, 현실의 도움을 빌려 개입하는 것이 안전장치이다. 인구는 이 이중성에 자기 자신의 자연성에 있어서 끼워넣어짐[접어넣어짐]으로써, 통치의 객체=주체가 된다. 이러한 이중성이 나중에 사회적인 것의 두께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안전장치의 본질적인 기능은, 어떤 자연적·사회적·역사적 현실을 자유로운 장난에 일임시키고, 이런 현실에 대한 현실의 작동에 대해 합리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현상을 바깥에서 삭제한다기보다는 현상을 현상 자신에 의해 점차적으로 폐지하는”(STP, p.68/81) 것이 문제이다. 이 장치의 앞에는 식량난이라는 현실은 없다. 현실적인 것은 사물이 진척되는 그대로 내버려두는것뿐이다. 죽음의 특이성도 그 한 요소다. 설령 일부의 사람이 식량 부족에 의한 굶주림으로 죽더라도, 그것은 삶과 죽음의 원활한 유통(규정 가능한 사망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통치의 목적은, 인구라는 객체가 환경에 있어서 살거나 죽거나 하는 주체로 되는 것이다. 물론 전유나 식량 부족에 대한 반란은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란자는 인구라는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인민”(STP, p.45/53)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적절하게 스스로 인도하지 못한 주체이며, 안전장치를 어지럽힐 수 있는 주체이다. 이러한 반자연적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죽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정상화하는(normalisant) 장치에서의 비정상인이다.

 

3. 자유 개념의 변용

감시와 처벌(1975)은 형벌의 완화가 초래한 자유가 여러 가지 규율의 테크놀로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전, 영토인구(1977)의 푸코는 이 똑같은 자유가 현실에 대한 현실의 내적 차이, 현실태의 이중화의 현실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거기서 등장하는 것이 안전장치에 의해 통제되는 객체이면서, 권리에도 계약에도 규범에도 의거하지 않고 자유롭게 처신[행동]하면서 자기를 통치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인구=주민다양체이다.

여기서 푸코의 자유에 관련된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변용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감시와 처벌은 형무소의 자유화가 규율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평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가 반드시 내재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안전장치개념도 시장에서의 경제행동의 자유화의 이면에 거시적 조정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안전장치는 규율권력보다도 훨씬 깊게, “자유를 현실태에 편입[기입]하고 있다. 나중의 강의에서 푸코가 명확히 하고 있듯이, 자유주의적 통치란 자유를 소비하는 것, 소비하기 위해 생산하고, 조직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의 주민이 게임에 참가하여 행동하고, 자유를 소비·생산하기 위한 제도적 틀을 설정한다.[각주:11] 나아가 이 틀의 설정이야말로 경쟁이라는 구조”, “현실공간을 산출하며, 나중의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사회적 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NB, pp.137, 145/164, 173). 그것은 규율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이른바 자유롭게 노동하는 개인의 관점에 서서, 그 활동을 촉진하는 틀의 설정이며, 그 틀을 통해서 사회의 뼈대와 두께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다(NB, p.151/179).

이러한 자유의 생산이라는 생각은 규율권력에는 없다. 따라서 생체권력 개념의 의의는, 그때까지 잔존했던 지배/피지배의 모델, 즉 종속화=주체화(assujetissement)의 모델이나, 상징적 []에 의한 주체의 분할 같은 정신분석적 모델로부터 완전히 탈각했다는 것에 있다.[각주:12]

예를 들어 지식의 의지에서 푸코는 성에 관한 관리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이데올로기 지배였기는커녕, 우선 오로지 부르주아적 가족 내에서의 관리, 이른바 그 자기에의 배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VS, pp.158-161/152-155). 푸코의 생체권력”, “생체정치의 분석은, 강화된 규율권력=전체주의라는 의미에서의 관리사회비판과는 무관하며(NB, p.196/235-236), 인구라는 살아 있는 정치적 주체=객체의 역사적 이해 가능성의 영역을 권력 테크놀로지의 분석에 의해서 척결했다는 것에 있어서 평가되어야만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시민사회개념도 반국가적인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경계면에서 생기는 두께를 지닌 현실태의 하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NB, p.299/367).

주체의 분할이라는 정신분석적 주제에 관해 말하면, 자유주의적 통치는 통치되는 주체를 자유와 강제, 자유와 소외 같은 대립에 의해 분할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분할은 통치실천의 내부, 해야 할 것해서는 안 되는 것사이에 있다. 문제는 어떻게 과잉이지 않게 통치할 것인가라는 통치의 내적 제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분할의 끊임없는 비판적 반성에 있다(NB, pp.12-15/13-17). 이 비판의 의의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확인한다.

아무튼 푸코가 집요하게 강조하듯이, 전후 독일의 신자유주의는 이미 대중사회, 소비사회, 상업사회,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통치의 내재적 제한과 국가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이것들에 의해 소외된 주체를 끄집어내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이미 현실태에 있어서 진행되었던 흐름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NB, pp.117, 136, 197/140, 162, 273). 국가비판은 시대에 뒤쳐진 것일 뿐만 아니라 옛날의 안전장치의 카운터파트로서 그것을 강화할 뿐이다. 이리하여 푸코의 비판은, 종래의 투쟁이 표적을 잘못 맞추고, 투쟁상태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비판이 아니라, 피통치자를 포함한 통치성 그 자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하고, 어떠한 현실태를 기능시키는가, 그것을 촉지해야 한다.

  

 

III. 생체정치의 탄생과 진리의 체제의 문제

저는 올해 생체정치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NB, p. 23/28). 이렇게 푸코가 말한 것은 생체정치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1978-79년도의 첫 번째 강의에서이다. 하지만 전년도의 중단 이후에 마침내 다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였던 이 주제는 또 다시 뒤로 늦춰진다. 확실히 출발점이 되는 것은 여전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자유주의적 통치의 변용이다. 하지만 강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생체권력도 안전장치도 아니고, 전후 독일-미국에서의 신자유주의이다.

하지만 푸코는 생체정치의 분석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통치이성을 이해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이 약속도 실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여튼 우리는 이 말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감히 이러한 모든 것이 생체정치 분석을 위한 서설이라는 점에 구애될 때, 무엇이 보이게 되는가를 생각하고 싶다.

 

1. 경제학과 그 이해의 체제

생체정치란 인구로서 구성된 총체에 특유한 현상, 즉 건강, 위생, 출생률, 수명, 인종 등에 의해, 통치실천에 제기된 문제를 합리화하고자 하는 방식이라고 푸코는 이 강의의 요지에서 기록한다(NB, p.323/391). 이러한 통치 실천을 가능케 하는 이론적 도구가 경제학이다. 이것을 푸코가 굳이 강조하는 것은 통치의 내재적인 제한의 문제를 진리의 체제의 문제에 연결하기 위해서다.

경제학과 더불어 하나의 새로운 진리의 체제가 출현한다. 진리의 체제란 무엇인가?

 

제가 진리의 체제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정치나 통치술이 마침내 합리화의 시대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 일종의 인식론적 문턱에 도달하고, 통치술이 과학적인 것이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제가 보여주고자 하는 순간은, 어떤 종류의 담론이 일련의 실천으로 접속함으로써 특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결이, 한편으로는 이 담론을, 이해 가능한 결합에 의해 연결지어진 총체로서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실천에 관해서, 참인가 거짓인가라는 용어로 법칙화하는, 혹은 법칙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NB, p.20/23).

제가 진실의 체제라고 말할 때, 저는 정치나 통치술이 이를테면 이 시대에 비로소 합리성에 도달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바로 이 시기에 일종의 인식론적인 문턱에 도달하고 이 지점에서 시작해 통치술이 과학적인 것이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지금 지적하는 이 시기는 일정 유형의 담론과 일련의 실천이 연결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연결은 한편으로 인지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연결된 총체로서 이 담론을 구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과 거짓에 따라 이 실천에 규칙을 부여합니다.(43)

 

진리의 체제는 담론과 실천의 결합체이다. 그때 담론은 역사적 이해 가능성을 획득하고, 실천은 참과 거짓의 대립에서 법칙화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전의 통치가 군주의 현명함에 의해 측정되었던 데 반해, 경제학의 출현과 더불어, 통치는 최대최소의 원리에 의해 측정된다. 그렇다는 것은 곧, 통치는 자연의 법칙을 잘못 볼 수 있다는 것, 이 법칙에 관해 무지하기 때문에 실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은 통치실천 그 자체의 가시적인 표면의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자연성과 상보관계에 있다(NB, p.43/50).

주의해야 하는데, 경제학이 확률론적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맹목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회의 뼈대와 두께라는 불투명한 것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맹목적이며, 통계학은 이 접속에서의 지식의 하나이다(그렇기에 통계학의 이데올로기등에 관해 말해도 어찌할 수가 없다). 이 맹목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통치실천이 조직된다. 예를 들어 통치가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유용한가 불필요한가, 주민의 욕망에 잘 응답할 수 있는가와 같은 공리주의적 관심에 기초한 통치실천이 모색된다(NB, p.18/21).[각주:13] 또한 자유주의적 경제학에서의 진리의 체제의 장, 그것은 예를 들어 시장이다. 시장은 일찍이 그랬듯이 배분적 정의의 장도, 법 진술의 장도 아니고, “자연적메커니즘을 따르는 정상적인 가격이라는 진리의 장이 된다. 시장이야말로 통치실천에 대해 진리를 말하고 현실적인 실천들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삼는 것이다(NB, pp.34-36/38-42).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자유주의적 경제학은 거의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적이며, “통치성 이성 비판으로서 등장한다(NB, pp.286-287/348).[각주:14] , 종래의 통치는 어디까지나 주권적·봉건적인 법(도덕, 자연법, 신의 법, 국가이성)에 기초한 통치였다. 그에 반해 오늘날, 최대와 최소라는 극한값 사이에서, 사회의 자연성을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이 과세율이나 시장의 조정이라는 실천에 내적으로 합리적인 정합성과 이해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메커니즘이 여러 가지 실천과 그 효과를 서로 연결하고, 그 결과 이 실천을 법률이나 도덕원리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참과 거짓의 분할을 따라야 할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가 판단되게 된다(NB, p.21/24, 강조는 인용자) 이 메커니즘에 의해 여러 다른 실천과 그 효과가 서로 연결되고, 그 모든 실천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법이나 도덕 원칙이 아니라 참과 거짓의 분할에 지배받게 되는 명제들에 기초해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44).

참과 거짓의 분할을 따라야 할 명제들”, 즉 담론이야말로 여러 가지 경제정책에 정합성과 역사적 이해 가능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흩어져 있는 실천을 현실태에 기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역사적 현실로서 결정화된다. 예를 들어 국가나 시민사회나 시장 같은 것,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인데, 참과 거짓을 분할하는 진리의 체제에 의존함으로써 현실태에 기입된다”(NB, p.22/26. 강조는 인용자). 모든 역사적 현실태를 구성하는 것, 그것은 참과 거짓의 분할의 담론과, 실천들의 결합인 것이다.

 

2. 진리진술과 사법진술의 뒤얽힘 : 생체권력 개념의 의의

이러한 진리의 체제를 만들어내는 담론을 푸코는 진리진술”(véridiction)이라고 고쳐 부르고, “사법진술”(juridction)과 대비시킨다. 그렇지만 양자는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공통의 체제를 수립하고자 한다. “지식이 통치에 부과하는 자기 제한을, 법에 정착시킨다는 과제가 여기서 생겨난다.

푸코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사법진술로의 진리진술의 접속의 역사적 양태들의 분석이야말로 권력과 지식이라는 복합체라는 문제계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과 더불어, 적어도 광기의 역사(1961) 이후의 그의 작업을 진리진술의 체제의 계보학”(NB, p.37/44)으로 수렴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1975-76년도의 강의의 첫머리에서 푸코는 정신의학이나 형벌제도를 둘러싼 고찰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3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그 바람이 결실을 맺는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광기, 질병, 비행, 섹슈얼리티 등에 관해서, 문제는 이러한 개념의 발견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이데올로기나 가상으로서 폭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떠한 간섭작용에 의해서, 일련의 실천 전체가 진리의 담론에 의해 조정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던 것(광기, 질병, 비행, 섹슈얼리티 등)을 어떤 것(quelque chose)으로 삼을 수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가상이 아니다. 그것을 현실태에 가차없이 집어처넣고, 각인해 버렸던 것은 현실적인 실천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천들과 진리의 체제의 결합이나 계열이, <지식-권력>이라는 장치를 형성하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태에 있어서 실제로 새겨넣고, 참과 거짓의 분할로 정당한 것으로서 따르게 하는가라는 것이다(NB, pp.21-22/25-26).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모든 일련의 실천들이, 이 실천들이 진리의 체제에 따르게 된 이래로, 어떤 개입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광기, 질병, 범죄, 성 등을 여전히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어떤 것이 되도록 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그것은 환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실제적인 실천의 총체로서,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 또 그 어떤 것을 강압적으로 현실에 각인하기 때문입니다. 관건이 되는 것은 일련의 실천과 진실체제의 연결이 실제로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각인시키고, 그것을 참과 거짓의 분할에 정당하게 복종시키는 것으로서의 지식과 권력의 장치를 어떻게 형성시키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45).

 

일찍이 <지식-권력>의 복합체라고 불렸던 것이 여기서 진리의 체제와 실천들의 현실적 결합이라고 바꿔 말해지고 있다. 이 결합이야말로 광기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왜 어떤 것이 되는가, 즉 왜 존재/비존재, 가상/본체와 같은 대립 이전의 차원에서 현실태를 구성하고, 역사적 이해 가능성의 핵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진리진술과 사법진술의 관계이다. 예를 들어 형벌제도의 연구는, 사법진술이 서서히 진리진술에 의해 침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이루어진 데 반해, 이제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자기의 진리를 말하게 하는 질문이, 이것이 수반하는 지식이나 권력의 배치와 더불어 제기된다. 또한 섹슈얼리티의 연구도, “고해”, “양심의 지도”, “의학적 판정같은 사법진술적 담론과, 욕망에 관련된 진리진술 사이의 뒤얽힘을 논했던 것이다. 이처럼 사법진술에서 출발하여 진리의 어떤 종류의 권리가 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 그것을 푸코는 진리진술의 체제의 계보학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리하여 권력론은 그 순환을 닫는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생체권력개념의 도입에 의해서, 미시와 거시, 지배와 피지배, 소외와 해방, 개인과 국가 같은 일련의 대립으로부터 완전히 탈각할 필요가 있었다. 권력이라는 선(), 국가나 사회로 향하는 사이펀siphon 같은 것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질질 지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규율권력에서 생체권력으로의 상승을, 통치성의 개념을 매개로, 진리진술의 주제 하에 재편할 수 있다. 여기에 생체권력 개념 도입의 의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IV.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이 진리의 체제라는 문제가 이미 1970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개강 강의 담론의 질서에서 서술되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진리의 정치로 이어진다고 지적하고 싶다.[각주:15]

 

1. 담론의 질서에서의 담론의 계보학

개강 강의에서 푸코는 그 당시에 전개하려 한 연구 틀을 확정하는 몇 가지의 가설을 제출하는데, 여기서 다루고 싶은 것은 첫 번째 가설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이 일정 수의 절차에 의해 통제되고 선별되며 재분배된다는 것, 그리고 이 절차는 담론의 생산에서 권력과 위험을 쫓아버리는 , 우발적인 사건을 지배하는 것, 그 무겁고 걱정스러운 질료성을 회피하는 것을 역할로 한다고 하는 가설이다(OD, pp.10-11/9).

반대로 말한다면, 담론의 생산 과정에는 늘 권력과 위험, 우발성과 질료성이 짓누르고 있으며, 그것을 계속 통제하는 절차가 중요해진다. 우선은 이 <담론의 생산>, 이를 위협하는 <질료적·우발적 위험>, <통제의 절차>라는 3대 요소의 긴장관계를 확인해두고 싶다. 후년의 권력론의 과제도, 이 위험을 통제하는 절차를 확인[궁구]함으로써, 합리적이기도 하고 질료적이기도 한 <역사적 현실태>를 부결하는 것, 지식과 권력의 복합체를 내재적으로 규칙부여하는 작동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 절차 중 이 강의에서 논의되는 것은 배제의 절차인데, 그 중 가장 중시되는 것이 참과 거짓의 대립이다. 푸코가 우선 강조하는 것은, 담론을 명제로서 생각하기를 (상정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치고, “진리에의 의지라는 문제계로 이행시키는 것이다.

 

명제의 수준에 위치해 버리면, 어떤 담론 내에서 참과 거짓의 분할은 자의적인 것도, 변용 가능한 것도, 제도적인 것도, 폭력적인 것도 아니게 된다. 다만 만일 다른 수준에 자리 잡고, 서구의 역사를 몇 세기 동안이나 관철되는 진리에의 의지가 어떠한 것이며, 여전히 어떠한 것으로 있는가, 혹은 우리의 지식에의 기준을 지배하는 분할이 매우 일반적인 형식으로서 어떠한 것인가를 안다고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참과 거짓의 분할은 아마도 배제의 시스템(역사적이고, 변용 가능하며 제도적 강제를 행하는 시스템)으로서 그려지게 될 것이다(OD, p.16/15-16).

 

여기서는 아직 배제라는 부정적인 용어가 잔존해 있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 푸코가 진정으로 목표로 한 담론의 자의성, 변용 가능성, 제도에의 내재성, 그리고 폭력성을 강조하고,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까지를 관통하는 진리에의 의지의 역사를 연구한다. 이러한 진리에의 의지와 그것이 품고 있는 배제의 문제화를 푸코는 비판적총체라고 부른다(OD, p.62/62).

하지만 푸코의 기획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러한 배제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현실에 일련의 담론이 생산되고 그 규범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 출현과 증식과 변용의 조건은 어떠한 것인가를 재추적하는 작업이 남겨진다. 그는 그것을 계보학적총체라고 부른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절차의 틀 속에서, 담론들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 “비판적인작업이 담론의 통합이나 통일화를 문제로 삼는 데 반해, “계보학“산일(散逸)한 것이기도 하며, 비연속적이며, 규칙적이기도 한담론의 형성과 수렴을 문제로 삼는다면, 푸코는 이러한 담론의 현실적 생산양식을 긍정적으로 주제화하기 때문에, 우선은 배제와 같은 부정적인 용어를 굳이 사용하면서 그 이면에서 진리에의 의지가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장을 확인[궁구]하고자 한다.[각주:16]

그리고 이 계보학의 연속성은 참과 거짓의 대립이 작동하는 역사적·제도적 조건의 서술, 나아가 그 불연속성의 서술을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진리에의 의지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담론을 좀먹는[침식하는] 질료성과 우연성이, 또한 과학적 지식을 규정하고 있는 제도적 내지 권력론적 조건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이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교차점에서, 거의 후설적 의미에서의 유럽의 위기”(정신의학의 위기, 형벌제도의 위기, 자유주의적 통치의 위기 등), 그리고 역사적 현실태의 이해 가능성이 부상하게 된다.

 

2. 진리의 정치

이러한 계보학적 작업은 어떻게 해서 진리의 정치가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지만, 몇 가지 실마리를 기록해두고 싶다.

푸코는 1976년의 어떤 대담에서, 그가 기존의 보편적 지식인에 대립시킨 특수한 지식인의 역할을 명시한다. 특수한 지식인이 특수한 것은, 위의 진리의 체제와의 관계에서이다. 그의 과제는 과학인가 이데올로기인가라는 문제도, 사람들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것도 아니며, “진리의 생산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체제를 변용시키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 그것은 오류·가상·소외된 의식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다. 거기에 니체의 중요성이 있다.”[각주:17]

왜 니체인가? 푸코는 담론의 질서에 이어 1970-71년도 강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니체에 관한 강의를 행한다.[각주:18] 깊게 파고들 여유는 없지만, 권력론과의 관계를 의식하면서 네 가지 점만을 지적한다.

(1) 니체에게 인식이란 발명품이며, “완전히 다른 것”, 즉 다양한 충동의 겨루기[경합]에서 생겼다(LVS, p.196).

(2) 인식이란 외양의 배후에서 본질이나 대상의 완전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외양과는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그것을 가로질러 파괴하는 폭력적 충동이다. “그것은 외양을 관통하는 것에 있어서, 한없이 신규성을 구성하는 것이다”(LVS, p.198). 이 심술궂고 유혹적인 충동을, 인식은 이용하면서 은폐한다. 과학의 금욕주의나 객관주의가 그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식은 외양과 존재의 대립 이전에 이중으로 포개지는 현실태의 상관물이다. 예를 들어 안전장치도 인식 장치의 하나로서 현상을 현상 자신에 의해 점차적으로 폐지한다”(STP, p.68/81). 이리하여 인식은 주체와 객체, 외양과 존재의 내적 차이의 두께에 있어서, 그것들을 통제하는 규칙의 네트워크를 구성한다(LVS, p.202). 이 네트워크를 통용시키기 위한 투쟁을 나중의 푸코는 권력관계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3) 진리는 이 인식보다 더 늦게 도래한다. 그것은 참도 거짓도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 사건인데, 동시에 그 이전의 것을 거짓으로 만듦으로써 뒷걸음질치도록 하고 참과 거짓의 대립을 제도화한다. 이렇게 인식이 마치 진리를 위해 바쳐진다는 사고방식이 생겨난다(LVS, p.207).

(4) 그러나 인식의 규칙의 네트워크(=권력관계들)는 본질적으로 산일적이며, 중심을 결여한다. 거기서 진리는, 이 산일적 성격을 유사일반성에 의해 시스템화하는 “표시(Zeichen)”를 만들어낸다(LVS, p.203). 이리하여 어떤 종류의 관계가 규정되며, 인식을 떠받치는 내적인 차이의 폭력이 은폐되며, 호모이오시스(homoiosis), 완전성 등의 전통적인 진리관이 확립한다. 생체권력론의 틀 안에서는, 인간, 안전, 환경, 시장, 시민사회, 성도착, 자유 등의 보편 개념(존재하지 않으나 현실태로서는 <무엇이다>로 기입되어 있는 것)이 표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자가 진리의 담지자로서 스스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진리는 사건으로서 출현하면서, 참과 거짓의 대립의 시스템을 창설한다. 따라서 진리의 정치의 첫 번째 과제는, 표시라는 특이점을 끝까지 지켜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유한한 동시에 한계가 없는) 계열들을 하나하나 재추적하고, 진리가 말소해 버린 인식의 폭력적 충동을 폭로하는 것이다. , 외양과 존재의 이중적 주름에서 출발하여, 진리의 체제가 생산하는 참인 것의 한없음(l'indéfini du vrai)”(LVS, p.208), 즉 현실태의 외양의 한없는 이중화의 효과를 추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전장치가 상정하는 가능한 사건의 계열이나 자유주의가 설정하는 자유의 생산과 소비의 연쇄를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의 정치진리의 체제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푸코는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진리의 정치는 권력의 발생 현장인 출현[외양]의 장, 더 정확하게는, 출현[외양]과 존재가 이중화하는 현실태에 대해 안쪽에서부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 출현[외양]과 존재의 이중체의 한복판에 투입하여, 거기서 진위의 시스템을 탈중심화하고자 하는 힘의 선을 탐색해내고, 현실태의 아주 약간의 “흔들림”(메를로 퐁티)을 촉지하는 것이다. 그때 이 힘의 선이 참인 것의 새로운 계열을 생산하는 것 아닐까? 그러한 새로운 객체의 분야와 이 힘의 선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에도 관통하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의 행동양태를 동시에 발생시키고, 새로운 진리의 체제를 열 수 있지 않을까?[각주:19]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실천만이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진리의 역사를 사고하는 것”(이것은 니체 강의의 부제이다)을 가능케 하지 않을까? 이렇게 푸코는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푸코의 생체권력론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 그것은 전지구적 관리사회의 예언(그것은 해석자의 위장된 입장표명일 뿐이다)이나 (생체정치의 절대화로 이어지는) 비정상으로 간주된 당사자의 ()주체화 등이 아니라, 진리의 정치라는 철학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학도 사회학도 경제학도 아니다”(STP, p.5/5). 그러나 그것은 역사주의나 사회학주의나 경제주의와도 평판화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위기를 품은 시련으로서, 다채로운 분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용법을 촉진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에서,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음으로 내팽개쳐지는가? 아니 죽음으로 내던져짐에 대한 비판은 이미 역사를 너무도 많이 갖고 있다. 이제 현대의 죽음에서는 내던져버림 같은 배제적인 조작이 계속 약해지고 있으며, 아마 그 누구도 무엇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가를 알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태어나 자연스럽게 죽는 것,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죽는 것에 관해서 누가(무엇이)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이 진리진술은 어떠한 우발성에 노출되며, 그 제도적·정치적 조절이나 배려를 어떻게 행하며, 그것에 관계하는 학들은 어떠한 위기에 있는가? 이러한 복합적 현실태에 몰입하고, 그 역사성을 폭로함으로써 비로소 생명과 죽음의 사이, 행태[품행]와 존재 사이에서 중지되었던 신체의 <정서적인 떨림>에 있어서,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넘어서는 곳에서, 창조적이고 쾌락으로 가득 찬 경계선이 그어지지 않을까? “우리의 삶 따위는 우리만큼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의 정념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충동 속에 일어나는 것을 시도하고 조사해보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우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각주:20]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진리의 역사를 사고해야 하듯이, 생명에 의거하지 않고 생명의 역사를 생각했을 때, 현실태에 깃든 충동이나 정서가 촉지되며, 그것에 의해 우리의 품행=인(conduite)가 이중적인 의미에서 진동되고, 새로운 생명의 기술이 미시적 신체의 안쪽에서부터 슬로건 없이, 예외자의 특권화 없이, 다만 정치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1. 이하에서는 “bio-pouvoir”를 “생체권력”, “bio-politique”를 “생체정치”라고 번역한다. “생명정치”라고 유통하고 있는 번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감의 문제도 있지만, 권력에 의해 통치되는 “생체”(vivant)가 단순한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자기를 바람직하게 인도하고, 일정한 자유로운 행동양식을 갖춘 능동적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서다. [본문으로]
  2. Jacques Rancière, “Bio-politique ou politique”, Multitudes 1, mars 2000. [본문으로]
  3. 그렇기에 푸코는 권력과 저항점의 내재적 관계에 관해 “이러한 저항점의 전략적 코드화가 혁명을 가능케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국가가, 권력관계들의 제도적 통치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닮았다”고 덧붙인다(VS, p.127/124頁).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Paris: Gallimard, 1966, pp.288-289. [본문으로]
  5. 생명사에 관해서, 푸코는 자크 뤼피에의 『생물학에서 문화로』의 서평 「생명사와 생체권력」(1976년)에서 언급한다. 그 3부(『인종과 인종주의·미래』)에서 저자는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인종주의를 비판하지만, 푸코는 이 책의 공적은, 인종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신석기 시대 이후, 변이variation의 총체인 개체군으로서, 만들어지고 무너지는壊される 것임을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커뮤니케이션과 다형성”의 정치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Michel Foucault, “Bio-histoire et bio-politiqu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II, Paris: Gallimard, 1994, pp.95-97; “Quatro” tome II, Paris: Gallimard, 2001, pp.95-97. [본문으로]
  6.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op. cit., p. 289. [본문으로]
  7. 이 주제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手塚博, 『ミシェル・フーコー ―― 批判的実證主義と主体性の哲学』, 東信堂, 2011년도 지적한다(232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8. Georges Ganguilhem, “Le vivant et son milieu”, in La connnaissance de la vie, 2e édition, Paris: Vrin, 1998, pp.129-154. [본문으로]
  9. 스토아파에서의 “재난의 예측”의 분석에 관해서는, 졸저 『後期フーコー ―― 権力から主体へ』, 靑土社, 2011년, 213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 “현실태”라고 번역한 것은 “la réalité”, “le réel” 등이다. 이 중요한 조작적 개념은, 자크 라캉의 “현실계”와는 무관하며, 이데올로기나 가상에 대립하며, 독일 관념론 이후의 “Wirklichkeit”에 가깝다. 권력분석이나 그 계보학만이 세상에 밝혀내는[공개하는] 역사적이고 합리적인 현실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용법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것은 『생체정치의 탄생』에서, 질서자유주의자로서 푸코가 언급하고 있는 발터 오이켄의 그것이다. 오이켄은 막스 베버의 “이념형”과 대비하여, “개개의 사태에 입각해 ‘중점적으로 부각된(pointeirend hervorhebend)’” 추상에 의해 얻어지는 것을 ‘경제적 현실태(die wirtshaftliche Wirklichkeit)’라고 불렀다(Walter Eucken, Die Grundlagen der Nationalökonomie, 3., erneut durchgearb, Aufl., Jena: G. Fischer, 1943, S. 86). 개인 신체에 대한 규율권력에서 생체권력으로의 연속적 이행을 이 현실태의 섭렵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Fouçois Bilger, La pensée économique libérale dans l'Allemagne contemporaine, Paris: Librairie générale du droit et de jurisprudence, 1964, pp.50-51). “현실태의 이중화”라는 주제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앞의 졸고, 107頁 이하 등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본문으로]
  11. 이 변용에 관해 강조했던 것으로서, Jean Terrel, Politiques de Foucault, Paris: Pressess universitaires de France, 2010, p.93(“자유를 유발하고, 그것을 유발하면 할수록 잘 통제하는 프로세스를 창조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12.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테츠카 히로시(手塚博)가 “규율권력 개념의 재규정”이라고 부른 작업이다(앞의 책, 228頁 이하 참조). [본문으로]
  13. 푸코는 흄의 이름을 거론한다(NB, p.277/278頁). 그러나 이 점에서 볼 때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의 흄론에서의 (법이나 계약과 대비되고, 확장적이고도 교정적인 어떤 일반적인 규칙을 지닌) “제도”론과의 관계이다. “사회의 본질은 법이 아니라 제도이다. … 공리성은 제도적인 것이다. 제도란 법과 같은 제한이 아니라, 반대로 행위의 모델, 진정한 기획, 긍정적 수단의 고안된 시스템, 간접적 수단의 긍정적 창출이다”(Gilles Deleuze, Emp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4e éditio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8, p.35).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구의 자연성”이라는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생각된다. [본문으로]
  14. 장 테렐에 따르면, 이것은 푸코에게서, 자유주의가 (1) 생체정치의 문제, (2) 통치이성의 급진적인 비판(통치의 과잉의 비판)이라는 두 개의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측면을 갖추고 있으며, 신자유주의론에서는 후자가 서서히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도 함의한다. 테렐은 이 내적 긴장이 자유주의에 내재하는 “위기”에서 유래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Terrel, Politiques de Foucault, op. cit., p.105). 필자로서는 푸코가 (현상학적 목적론에 대한 표면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럽학문들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의 후설의 “위기”론을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통치성의 위기”론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싶다. 사실 푸코는 나중에 후설의 이 책을 니체의 기획과 평행시킨다(“Qui êtes-vous, professeur Foucault”, in Dits et écrits, tome I, Paris: Gallimard, 2001, p.641). [본문으로]
  15. 이하의 점에 관해서는 졸고 「ミシェル・フーコーにおける真理の言説と「現れ」の系譜学」, 『』(筑波大学), 제9호, 2012년 10월, 1-83頁(筑波大学附属図書館 사이트에서 참조 가능해질 예정)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일부 중복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해둔다. [본문으로]
  16. 주권과 생체권력, 규율권력과 생체권력의 구별이 “진리의 형식”의 문제에 잇어서 수렴된다는 것에 관해서는 Alexandre MacMillan, “Pouvoir souverain et pouvoir sur la vie: continuité et rupture dans l'histoire de pouvoir chez Foucault”, in Audrey Kiéfer et David Risse (dir.), La biopolitique outre-atlantique après Foucault, Paris: L'Harmattan, 2012, pp.19-35. [본문으로]
  17. “Entretien avec Michel Foucault”,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II, op. cit., p. 160; “Quarto”, tome II, op. cit., p. 160. [본문으로]
  18. 이 강의의 내용은 1973년 강연 「진리와 재판형태」에 요약되어 있다(Michel Foucault, “La vérité et les forms juridiqu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I, Paris: Gallimard, 1994, pp.542-553; “Quarto”, tome I, op. cit., pp. 1410-1421. [본문으로]
  19.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른바 『제7서한』에 관해 논한 1982-1983년도 강의에서 푸코는 “정치에 있어서의 철학의 시련”이 철학의 현실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에 대한 자기의 실천으로서의 진리진술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Michel Foucault,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2-1983), édition établie par Frédéric Gros, Paris : Gallimard/Seuil, 2008, pp.221, 236. [본문으로]
  20. Pierre Carlet de Chamblain de Marivaux, La vie de Marianne, Paris: Garnier, 1963, p. 129, cité in Maurice Merleau-Ponty, Signes, Paris: Gallimard, 1960, p. 4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