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3/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를 살면서

우츠미 그런데 치바 씨는 들뢰즈의 흄론에 주목하셨네요그리고 흄철학에서 절단의 계기를 끄집어내고들뢰즈에게서 생기론이나 잠재성의 파시즘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찾아냈다.

 

치바 그렇습니다모종의 픽션론으로서의 흄론이었습니다.

 

우츠미 흄은 낱개의[개개별별의] 세계를 연합에 의해 묶으려고[통합·정리하려고] 했습니다만그 통합정리할 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치바 씨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거론한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흄의 경우, 파트그래피컬[パトグラフィカル, 바이오그래피컬의 오식인 듯. 즉, 전기적인]한 얘기인데요, 18세부터 23세까지 꽤 힘겨운 우울 상태에 있었고어쩌면 이인증(離人症)을 경험했습니다이인증에서는 사물을 서로 이어주는 아교랄까치바 씨의 말로는 ’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그것이 흄의 어소시에이션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일단 아이러니적인 파괴를 경험한 곳에서부터 턴(turn)해온다유머적인 턴(turn)이랄까대타자 또는 초월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은 통합·결말[まとまり]마조히즘에 있어서의 억압을 변형하는 듯한 턴(turn)입니다그 언저리의 모습이살아가는 지혜랄까경험론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만.

 

치바 제 말투에서 유머를 흄의 맥락으로 연결한다면어떤 우연적으로 생겨난 연합을그렇게 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그 정의나 시스템을 묻겠다고 생각한다면근거는 없습니다어떤 우연의 마주침즉 최초의 자체성애적인 것이 생길 때의 외부와의 마주침의 우연성 같은 것으로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을 떠맡고우연히 뭔가와 뭔가가 서로 달라붙게 됐을 때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다른 것이 또한 달라붙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한다모든 것은 근가가 없다고 하는 곳으로 향해서 비판을 캐고 들어가는 아이러니만을 하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며모든 것이 붕괴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유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츠미 초월론적인 타자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후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네요.

 

마츠모토 : ‘일단은’ 식으로.

 

치바 그렇죠저는 어드혹(ad hoc)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생각해보면제가 전에 기고한 트랜스어딕션 동물-성의 생성변화(トランスアディクション───動物-生成変化(現代思想特集=人間/動物分割線, 2009年 7月号)와도 공명하네요. S1을 되풀이하는 것은 중독적이라고 밀레르는 말하고 있으니까요제가 생각한 어딕션(addiction)도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특이적인 증상이며또한 크리에이션(creation)과 결부된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얘기로 말하면, S1이 몸을 옥죄어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변형하여 다른 크리에이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을 트랜스어딕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츠미 단독의 S1에는 그런 어딕션적·에크리튀르적인 측면과 더불어그런 단순한 외침으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외침은 마츠모토 씨의 논의에서 원-상징계의 + - + - … 라는 곳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거기에서 상징적인 심급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 “이 칭얼거림[외침]은 이런 의미예요라고 어머니가 유닛(unit)화한다. “배가 고프구나라고어머니도 칭얼거림이 매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그런 감각적인 차이에 배가 고프다라는 상징적 유닛을 덧씌운다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칭얼거림이 배가 고프다가 된다그러나 자폐증의 경우는 그런 응답이 없기에칭얼거림인 채인 것입니다.

 

마츠모토 그래서 늑대!”, “늑대!”라고 외칠 뿐이다.

 

치바 그리고 똑같은 그 외침이 온갖 것에 적용 가능해진다면.

 

우츠미 자폐증의 언어적인 측면은 매우 다양하네요.

 

마츠모토 정형발달처럼 S1과 S2가 연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자폐증자에게는 하나뿐인 S1과 알고리즘적인 S2가 존재하며그 양자 사이에서 이러저러한 언어의 병리가 생겨나는 거죠그것은 거꾸로 정형발달이 무엇인지를 겉으로 드러내는[해명하는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되죠.

     조금 전 치바 씨의 트랜스어딕션” 말씀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요인프라크리틱 서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思想地図β』, vol. 1, 2011)에서는 장애를 짊어지게 된 후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썼습니다그 논의는 S1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치바 역시그곳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통할지도 모르겠네요그곳은 말라부에게서 얻은 발상입니다만.

 

마츠모토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S1에서 다른 것이 발생한다는 느낌이겠죠아니면 S1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고쳐 써진다는 것일까요?

 

치바 그런 식으로 연결한다면, S1의 변형을 생각했던 게 되겠죠말라부를 좇아 말한다면데리다적인 똑같은 흔적의 이전(移転)오배송[誤配] 모델이 아니고흔적 그 자체가 변형되어 버렸다는 그녀의 모델을 구별하지요그리고 원래 S1을 복수 갖고 있거나, S1을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도제 테마입니다마츠모도 씨의 논의에서도라캉과 가타리의 대비에서특이성을 단수적으로 생각하는가 복수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갈림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네요제가 여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라캉에게는 S1이라는 말을 ‘essaim(무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말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하나이면서도 거기에는 뭔가 무리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마츠모토 : ‘essaim’이 라캉파 에서 사용되는 경우기본적으로는 스키조프레니인 자의 언어사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말 하나하나가 현실계의 수준에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서 서로 분절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언어의 병리의 행방言語病理行方『유이티카ユリイカ, 2012年 9月号)에 적은 사례인데요제가 전에 본 사춘기 유형의 환자로환청을 호소했습니다그 사람은 어느 날, “소리를 질러서[말을 걸어서] 잡아주세요[をかけられたのでってくださ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걸다[かける]라는 말이, “물을 뒤집어썼으니까 닦아줘[をかけられたからいてくれ]라고 할 때의 걸다[かける]라는 뉘앙스가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리는[かけられる]’ 것이었을 터인 목소리라는 말이 현실계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고물질화되는 언어사용이 모든 곳에서 이뤄지고메타포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시니피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バラバラになり]그것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정신분열증의 정신병리로 말하면아마 콘크리티즘concretism(구상화 경향具象化傾向)이 될 것입니다.

     다만처음에 언어가 들어올 때하나의 언어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밀레르조차, ‘essaim’에 관해서클로스프스키=니체적인 주체의 동일성의 산란散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치바 과연 그렇군요복수의 언어가 상처로서이른바 폴리트라우마틱’[polytraumatic]한 형태에서 들어온다인프라크리틱(infracritique) 서설」 무렵저는 폴리트라우마티즘과 모노트라우마티즘이라는 대비를 했고, 50년대의 라캉은 전형적으로는 모노트라우마틱한 이론으로서 수용됐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들뢰즈=가타리특히 가타리는폴리트라우마티즘을 도입했다는 것이 제 견해였습니다.

 

마츠모토 그것은 재미있네요라캉은 1974년에 외상(traumatisme)을 구멍-외상(trou-matisme)’이라고 말합니다불가능한 것즉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로서의 외상은 구멍이라고 말이죠그러면 언어의 도입에 의해 구멍이 몇 개 비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들뢰즈=가타리의 라캉 비판에 연결하면외상은 사실 다공적[구멍이 여럿]이고 이러저러한 곳에서 누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 씨는 존재론적우편적(存在論的郵便的)(新潮社, 1998)에서 불가능한 것은 부정신학에서처럼 하나인가아니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그 뒤에 나온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씨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抵抗)(青土社, 2000)각주에서 히로키 씨의 논의를 다루었습니다라캉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을 통해 불가능한 것과 하나[한 가지] 만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라고 해도동시에 불가능한 것은 복수적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각 주체는 각각에 있어서 상이한특이적인 정신분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신분석이라는 리미트(limit, 극한속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하나이게 되지만다른 한편 가타리는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며시니피앙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대립은정신분석과 스키조분석의 양자에 있어서의 임상의 장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개인의 정신분석이라면 역시 시니피앙의 주체를 원칙으로서 다루기 때문에구멍=불가능한 것은 하나가 되는 셈이지만라 보르도 병원처럼 집단적 실천에서 하면 복수가 된다.

 

치바 제 논의라면한 개인 속에 복수의 구멍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집착하는데요그렇기에 해리(解離)나 다중인격을 문제 삼았던 것이죠.

      90년대 말 경은페르소나의 다중성이 인터넷이나 버추얼한 것의 등장으로 강하게 의식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 씨의 복수성에 대한 논의도멀티레이어(multi-layer)한 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죠저도 그 시기에 청춘기를 보냈기에그런 감각을 어떻게 이론과 결부시키면 좋을까줄곧 생각했습니다.

 

우츠미 우리는 본래 이디어트(idiot, 백치) 같은 것이며거기에 조금만 공약 가능한 곳이 있다는 거죠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처럼 관찰해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같은 매우 기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He war”가 아니라 “Ich denke” 같은 녀석이항상 가만히 들러붙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오히려 그것들이 불가사의랄까어째서 그럴게 될까그런 의미에서의 일자여라”, “개체여라는 명령법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지만향후 그것이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치바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오늘의 일련의 화제는 특이성단독성각각의 별개[それぞれパラバラ]라는 방향을 향합니다만굳이 나쁘게 말한다면결국 사람 각각이라는 얘기가 되며그것은 이론적 퇴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만일 이론에 재미가 있다면다소 폭력적이라고 할지라도복수의 것에 걸친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곳에 있으며결국 임상의 현장에서 개개의 것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면이론의 [종언]이 아닌가라고 말이죠마츠모토 씨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마츠모토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싱귤라리티이다라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결론이 되면이론은 죽어버립니다라캉이 목표로 한 것은자기 자신의 분석에서 얻어진 싱귤라리티가 있다며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점입니다분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싱귤라리티에 도달한 곳으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가다듬어 내어야 합니다그것이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가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분석가마다 주목의 중점이 다르다는 거네요그것은 분석가 자신의 생톰의 반영이며그것을 밑천으로 클라이언트와 관계함으로써변화를 야기한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좀 더 근원적으로는학파 속에서 다른 분석가와 공유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다른 분석가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가를 차례로 산출한다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분석가는 다시 새롭게 자신의 특이성과 만나서 정신분석 이론을 갱신한다이른바 영구혁명입니다.

 

치바 그래서 궁금한데요각각의 분석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다른 분석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와 마주대하려고 하며그 다른 방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요?

 

마츠모토 예를 들면라캉의 단시간 세션은그가 특이적으로 발견한 방식이죠.

 

치바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장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츠모토 : 24시간 내구(耐久) 정신분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분석가도 있을지 모르죠(웃음).

 

치바 그래서 효과를 올리도록 별난 분석가가 나와도 원리적으로는 더 좋다고.

 

우츠미 치바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치바 씨가 부분대상과 팔루스적 대상 사이에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전체화하지 않는 정리[모둠]를 놓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습니다한쪽에 부분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있고다른 한쪽에 팔루스적인 대상으로서의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며그 중간에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저는 팔루스적 전체성과 전체 대상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클라인이 말하는 부분대상은 오히려 기관 없는 신체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치바 지금의 3항도식에서는클라인의 부분대상은팔루스적 통일과 전체화하지 않은 정리[모둠] 둘 다를 거듭[중첩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저의 해석입니다.

 

우츠미 아까 말한 아이러니적 잠재성과 분화·현동성의 중간에 유모적 개체화가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치바 글쎄요그것을 저는 특히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상상적인 것혹은 요도[尿道]적인 것을 넣는 곳이 급소라고 하죠이 구도는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그리고 치료가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이냐 하면각각의 별개バラバラ의 단편으로부터 자그마한 [turn, 선회]을 만드는버추얼리티 쪽으로 확산하면서도, [갔던 길을] 약간 되짚어와서 기관 없는 신체 쪽으로 간다아마 여기에 싱귤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흄도 데카르트도 비슷한 것을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흄의 경우이인증(離人症)적으로 각각의 별개가 된[산산조각 난] 단편을 어소시에이트[associate, 연합]합니다만그렇다고 강력한 자기는 만들지 않는다일단 다발 같은 자신으로 좋다고 한다데카르트가 과장적인 회의를 하는 곳은 급진적인 사디즘이죠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고어느 정도의 네거티비티[부정성]을 견딜 수 있는가그 위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 아래에서마지막으로 잠깐 그래도 생각하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turn, 선회]한다. “코기토” 등이라고 잘난 체 하는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그저 자그마한잠깐 동안 생각한다는 형식뿐으로아무런 내실도 갖지 못하는미결정의 중지[허공에 붕 떠있는 것]로서 코기토가 산출된다마지막은 신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증명하고 보증인으로 합니다만그것은 그가 정말로 했는가 여부는 의문입니다.

 

치바 그렇게 하면-코기토-회의(악령)상징-상상-현실이라는 3항도식을 할 수 있다.

 

우츠미 그렇네요흄의 경우는 공간이 단편화하는 반면데카르트의 경우는악령이 시간적으로 절단하는 건데요이런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turn, 선회]한다는 도식이 임상적으로도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바 단편화를 거쳐서가까스로 정리[모둠, 종합]로 돌아간다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고 저라면 말할 것제 논의의 경우그 차원은 특히 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판타슴이죠라캉파에서는판타슴의 횡단이라는 논의가 될까요?

 

마츠모토 판타슴의 횡단의 경우는모든 상징체계의 폐절까지를 지향하는 아이러니이죠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한.

 

치바 그래도 뭔가가 남죠?

 

마츠모토 외상적인 핵이 남는다그 잔여를 꺼내기 위해라캉은 생톰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우츠미 씨가 지금 말했듯이조금 돌아온다고 할까당분간의 정리[모둠, 통일]를 만든다고 할까.

 

우츠미 생톰 그 자체가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는 논의가 아닙니까?

 

마츠모토 콩시스탕스[consistance]의 이마지네르(imaginaire)라는 논의이죠(フィリップ・ジュリアンラカンフロイトへの回帰誠信書房). 밀레르는 타투나 피어스로 무너지고 있는 신체의 고리를 지탱해도 되잖아라고도 말합니다.

 

우츠미 들뢰즈에게 공백의 [바둑판] 칸(case vide)”이라는 개념이 있죠단적으로 말하면상상력은 빈 그릇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습니다제가 자주 드는 사례로, “나는 퍼즐에 비유하면 빈 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혹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포화되어 버린다는 것 같습니다이것이 자폐증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상상의 부자유의 원형입니다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었고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만이번에는 정형자의 얄팍한 세계いい加減世界에 들어가는 것의 고통이 있다후설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그는 이 방의 건너편この部屋こう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혹은 자신에게는 등이 없다がない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혹은 집들의 건너편에 사람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든가.

    이른바 장애의 세 쌍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상상력의 장애는 매우 조잡한 취급방식을 하고 있습니다수집벽이나 철도 마니아 등흥미 관심의 폭이 좁다든가곧바로 그런 얘기가 되어버립니다그런 게 아니라경험 속에 빈 눈금을 어떻게 만들까이렇게 그들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마츠모토 빈 칸이 있어서 처음으로 전개되는 유형의 공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우츠미 다른 식으로 공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당사자인 후지이 히로코(藤家寛子) 씨는분명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이는 수많은 집의 각각에 가정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썼네요집이 일 뿐이고그 속에는 가정이 있고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공상이 미치는 공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우츠미 그것을 가진다고 포지티브하게 파악되지 않을까요정형으로 이끌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작업이 아니니까.

 

마츠모토 공상하는 공백의 칸이 없는 대신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우츠미 후설의 현상학도 하나의 예일 수 있죠가령 타인의 마음도 지금 보이고 있는 세계의 건너편이니까그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것은 아닌 겁니다.

 

치바 얼마나 그것이 임시로 마련된 것인가에 대한 이론 구성이 되는 거네요.

 

우츠미 또 한 명을 거론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일까요그의 논리철학논고는 명제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도중에논리에서 윤리로 문제가 이행합니다이 전회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하여다시금 개체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관은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하듯이한계라는 막간隙間가까스로 자신의 장소가 확보되고 있습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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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2/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S1또는 S1뿐인 세계

치바 그런데 초보적으로 투박하게 여쭈는데요자체성애가 처음 생길 때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언어 체험이 충격(shock)적으로 도입되고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라는 것으로원래 갖고 있던 유전적기질적 경향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의 특이성의 조합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건가요모든 것을 특이성에 기초해 말씀하신 거라면유소년기에 특수한 외적 사태가 있었다고 하신 것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요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질이 다르다는 얘기에도 가깝다고 느껴지네요.

 

마츠모토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꽤 가까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에서도라의 기침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에서의 향락의 체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시니피앙의 수준에서 증상을 해석하면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그러면 도라가 유년기부터 고무젖꼭지만 빨고 있었다는 등 신체의 소인(素因)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이런 소인(素因)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고 있으며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유전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소질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거꾸로 말하면거기까지 다다르지 않으면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치바 정신분석은 기질성이 아니라 심인성의 영역 안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가라는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그러나 그것으로는 너무 단순하죠라캉의 경우는 끝이 있는 분석을 믿었는데요왜 끝이 있냐 하면낫지 않고 제거할 수 없는 증상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대충 말하면기질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계면界面으로서 있는움직이기 힘든 부분에 부딪칠 때까지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만거기에 부딪침으로써정신분석의 한계이며또한 신체의 의학과 어울리는 듯한 장면이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는 것일 테죠.

 

마츠모토 그곳이 바로 라캉이 프로이트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입니다프로이트의 경우끝이 없는 분석에 왜 끝이 없냐 하면거세 콤플렉스와 페니스 선망이라는 벽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팔루스의 존재/부재에 대해 구축된 콤플렉스라는 곳에서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다른 한편라캉의 경우는 그것을 뚫고 나온 분석을 목표로 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거기에서 프로이트로부터 라캉에게로라는 정신분석의 갱신 또는 재정의를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아까 치바 씨의 물음에 대해서인데요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애당초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폐증의 정신병리의 기본입니다반응은 일어나지만 응답은 없다타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해오는 지향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시선이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처음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서 이비인후과로 데려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마츠모토 씨라고 부르면 마츠모토 씨는 이쪽을 봅니다만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혹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는 거의 자발적 운동을 할 수 없지만그래도 부모가 품에 안으면 그것에 맞춰서 몸의 자세를 취합니다그런데 자폐증 아이를 품에 안으면곡물이 든 배낭을 안고 있는 것처럼 너무 무겁습니다그렇게 품에 안는 것에 포함되는 지향성에 대해서도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반응성의 결여가 자폐성의 핵심 특징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품에 안는 것에 대한 응답은 꽤 이른 단계부터 느껴집니다만눈빛이나 호명에 대한 응답은대부분 9개월부터 시작됩니다시선이 맞으면 수줍은 듯이 낯가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이것이 자기라는 것의 밑바탕[元基] 같은 것입니다그 이전에는전반적인 짜임새가 없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마츠모토 씨의 얘기와 관련되는 것은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의 맨 처음에서 -상징계에 대해 논한 대목입니다그곳에서는 부분대상과 전체대상이 전적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데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라캉적으로는부분대상은 현실적[실재적]인 것인 반면전체대상은 팔루스적인 다발[묶음]에 의해 만들어져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클라인파는 발달사적으로 보면우선 부분대상이 있고그것이 통합되어 전체대상이 된다고 해설합니다만그것은 전혀 얘기가 다릅니다부분대상은 전체대상이라는 관점이 있고서야 비로소 소급해서 나오는 것입니다전체대상은시선이 마주치거나 부름에 반응하는 등의 상징적인 개체화로의 힘이 걸리는 9개월만에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차원의 것입니다부분대상은 이런 상징적인 것의 설정의 피안에 있습니다.

    자폐아의 행동에서부분대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은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그들이 뭔가를 갖고서 놀고 있는데그걸 집어들어 방해했다고 칩시다보통의 아이라면방해한 상대로 향합니다만자폐아는 방해를 하는 손으로만 향합니다혹은 카나의 논문의 있는 사례인데요바늘로 찌르면찌른 상대가 아니라 바늘 자체를 두려워한다이처럼 자폐아는 단편적 세계 속에 있으며그것을 자체성애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츠모토 부분대상만이 있고전체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일어서지 않는다는 거죠.

 

우츠미 그렇게 되면다음으로 S2 없는 S1의 신분이 문제가 됩니다. S1은 S2가 있어서 사후적으로 설정되는 것입니다만, S1밖에 없을 때그 양태는 어떻게 될까요?

 

마츠모토 얼마전 한밤중에 NHK 방송을 봤다면아르 브루트(Art Brut, 아웃사이더 아트)의 특집을 했습니다그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시설에 있는 분으로해외에서도 개인전을 열게 된 시바타 에이이치(柴田鋭一) 씨라는 분의 작품을 소개했는데요그 분은 처음 무렵에는, ‘2’와 ‘3’만을 오로지 반복해서 캔버스에 그렸어요그것이 대단한 작품이 되었습니다오랫동안 ‘2’와 ‘3’을 반복했는데요그 후에 비누[石鹸세켄]의 []’”라는 문자만 줄곧 그리게 됩니다그것이 해외에서 받아들여져 개인전까지도 열게 됐다고 합니다이 경우, ‘2’와 ‘3’, ‘[]’ 같은 문자가 S1입니다이런 문자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본인도 자폐적이며 중독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극치인 것은반복하고 있는 []’라는 글자가 다름 아닌 비누[세켄]의 []’”라는 것입니다본인은 단순히 []’라고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이 []’는 예를 들어 세계[세카이]’나 석유[세키유]’ 등으로 분절화되는 세[]’가 아니라항상 비누[세켄]의 []’” 그 자체이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치바 문맥 형성을 하지 않는 문자로서의 문자.

 

마츠모토 바로 레트르(lettre)’네요그런 자체성애적인 것의 향락성의 제시와 에크리튀르 사이의 관계를라캉은 조이스론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마츠모토 씨는 에릭 로랑이 언급한 로신느 르포르Rosine Lefort의 분석에서, “늑대!”라고 고함을 지르는 사례를 참조했습니다저것은 [누군가의시선을 받거나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패닉 상태가 됐을 때 외치는 것이었죠.

 

마츠모토 (증례인 로베르Robert[Rosine et Robert LEFORT : Naissance de l'Autre, Seuil, 1980])는 자신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구멍의 출현에 대한 명명으로서 늑대!”라는 소리를 지르는데요그 시니피앙은 분절화되지 않고항상 늑대!”인 채입니다.

 

우츠미 반면 청년기 혹은 성인기의 자폐증 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일정한혹은 그것 이상의 언어능력이 있습니다그 경우의 특징은말을 도구처럼혹은 모국어인데도 외국어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말이 신체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고 할까말하자면 앱(App)처럼 사용됩니다바꿔 말한다면신체가 언어에 의해 포맷되지 않았다이 경우는 S2만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다른 한편에릭 로랑이 언급한 사례처럼 중증 자폐아가 내뱉는 것은 단독적인 S1이며주술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지시한다고 하는처음 부분만 있습니다언어는이 지시에 의해 대상을 절취하고공동 주의(注意등에 의해 공유되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합니다그러나 그 앞에서는무엇이든 늑대!”라고 말하면 일단은 패닉 상태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식으로주술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치바 매직워드이며와일드카드인 거네요.

 

마츠모토 자폐증자에게는정형발달의 사람과 똑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그 말(S1)뿐이며그들은 그것에 이어진 S2를 거절하고 있습니다라캉은 그것을자폐증자는 말에 대해 자신을 지킨다고 표현합니다그런 사람들이 현행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S2를 S1과 떼어낸 상태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S1 없는 S2입니다그러면공공공간에서 그들이 이용하는 언어(S2)일종의 컴퓨터 언어처럼 되어 버린다현대 라캉파에서는 자폐증에 있어서의 언어의 병리는이처럼 S1과 S2의 분리로서 파악되는 것입니다한편에는 주술적반복적중독적인 매직워드로서의 언어(S1)의 사용이 있으며그것이 똑같은 말에 대한 상동적(常同的)인 집착이 된다다른 한편에서는그들이 S2를 인공언어로서 만들어냅니다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상징적인 논리만으로 쓴 루이스 캐롤이 그 일례입니다.

 

우츠미 자폐증 스펙트럼의 S2는 사적 언어처럼 기능할 뿐인 곳이 있습니다사용하는 말은 우리와 공통이며대화가 가능하지만Speech act[발화행위, 발화수행]로서는 기능하지 않는다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함께 [맞물려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기어” 같은 것입니다제가 경험한 어떤 청년 사례는자신의 괴로움을 현실감이 없다”, “이인감(離人感)이 있다[자신이 자신이라는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것]”, “만족감이 없다라는 세 개의 말로 나눠서 호소한다그러나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매회 그렇듯이그것이 어떤 괴로움인지를 물어보는 처지가 된다그도 끊임없이 그때마다 알려줍니다만역시 금방 잊어버린다사적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증의 경우처럼 아파!’라는 것에 의해 공통의 코드가 열리고타인에게 이해되는 동시에 자신밖에는 모르는 고유한 감각이 남는다는 것이 되지 않는다감각만이 있고그것에 태그를 열심히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치바 극히 사적인 기준으로 연합을 하기 때문에듣는 쪽에도 전해지지 않는군요.

 

우츠미 그렇군요에르곤즉 잘 만들어진 언어에 가까운개념 규정이 먼저 있고그 태그로서 말이 있다아까의 늑대!”의 예에서는지시만 있고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만이번에는 정반대로개념이 있고거기에 말이 붙어 있을 뿐지시가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가 아파라든가 이것 때문에 괴로운 거야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치바 시스템이랄까언어 체계만이 있다논리의 공리계의 세계.

 

마츠모토 바로 수학기초론이라든가 분석철학 같은 세계네요.

     그런데 우츠미 씨가 방황하는 자기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さまよえる自己───ポストモダンの精神病理)(筑摩選書, 2012)의 마지막에서 논하신 것은근대의 노모스가 만들어져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던 시대 이후에 초월론적인 것이 절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도래하면타자의 부름이나 시선에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비근한 예로 깊숙이 들어갑니다만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이떠들고 있는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으면그 시선을 눈치 챈 학생들이 차츰차츰 조용해진다선생님은 거기서 여러분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3분이 걸렸습니다” 등이라고 말하는 거네요(웃음).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 않아도눈빛의 힘에 의해,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묻는 자로서 기능하는 타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그런 시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근대적 주체였던 것입니다.

 

치바 :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가 근대의 기조네요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는눈앞에 서 있어도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 수 있다교실의 뒤로 돌아가면 판옵티콘의 기능이 작동한다는 예가 [아사다 아키라의구조와 힘』[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나오는 것입니다만현재에는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관계가 없다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마츠모토 현대의 주체는 타자성과 시선이 기능하지 않게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우츠미 씨는 그런 주체의 모습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를 따른 계산기적 합리성이며거기에는 결단의 계기도 없고근대적인 의미의 자기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시네요. 이 논의는 확실히 그렇다고 실감할 수 있는 것도 많네요더 흥미롭게도 근대적 주체가 전제로 삼았던 타자성의 일어섬がり이나 시선과 목소리에 의한 주체화가 기능하지 못한 후에 등장한이런 포스트 휴먼적 인간상에국내의 정신병리학자들이 거의 동시대적으로 주목하고여러 가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예를 들어스즈키 쿠니후미(鈴木國文씨는 신자유주의란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는 가능한가?” 등의 물음을 빼고서, “자유니까 이렇다”, “자유니까 이래도 된다고 말하는 원리라고 지적하십니다바로 직전에서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은 채어떤 전제를 바탕으로 알고리듬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입니다현대에서는 그런 논리가 이러저러한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고그것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발달장애의 임상풍경과 꽤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스즈키 씨는 지적합니다카토 사토시(加藤敏) 씨는 똑같은 사태를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부릅니다.

 

우츠미 그것은 자유가 S1에서 S2가 되었다는 것인가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의 보증인으로서 있었던 S1지금은 하인처럼 혹사한다[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전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가요?

 

마츠모토 아마 자유를 S2만으로 생각하게 되며진리(S1)가 배제되어 버린즉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우리 세대가 보면그렇게 되는데요꽤 올드 패션한 시각이 아닐까요그래서 마츠모토 씨나 치바 씨의 세대에서는 어떻게 보는지흥미가 있습니다.

 

치바 저는 우츠미 씨의 그런 감각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제가 신세대에 속해 있고 알고리즘적인 사물의 처리에 친화성을 느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근본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듯한 물음그 문제성이라는 부정성 ― 들뢰즈는 문제성을 부정성이라고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존재” 같은 식으로 불렀습니다만 ― 이 근본에 있은 다음에그 부정성을 달래면서가설(仮設)된 체계에서 어떻게 사물을 움직이는가그 위에서그래도 답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다시 되돌아간다이런 답할 수 없는 문제와당장의 시스템 운용의 이중구조로 해온 것이 근대문화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설되고 있는 것을 그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지금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분석철학 등의 논의에는 그런 경향이 강하네요대륙철학에서는 사물의 정의가 반드시 약정되지는 않은 상황에서 얘기를 하기 때문에분석철학자로부터는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이쪽에서 보면거꾸로 그런 절차적 논의를 하고 있는 쪽이 섬뜩하고[낯설면서 친숙하고]조금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분석철학은 언어의 사용방식 자체가 S2적이고, “그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항상 듣는다그런 게 아니라사용이야말로 본래의 언어이죠그러나 그 전에,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함으로써단단하게 다져버린다[확고하게 해버린다].

 

마츠모토 저는 알고리즘적인 사고방식은 싫어하지는 않지만그래도 지난날 눈에 띄게 됐던 S2만의 원리에는 자주 놀라며분석철학 책은 읽는 데 꽤 고생니다자폐증자였던 템플 그랜딘은, “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해 괴로워하고모든 개를 관찰한 결과, “라고 불리는 것은 코의 모양이 모두 한결 같다는 것을 깨닫고그것에 의해 라는 개념의 내포를 처음으로 만들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치바 일부의 분석철학은 [단단하게 다져진 것이 아니라] 흔들림이 있는 프래그머틱스로 사용된 사물의 정의를형식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 재검토해 S2만의 구성으로 봤을 때이전의 애매함이 붕괴하고, “사실은 개의 본질은 그 코에만 있었던 것이다처럼 이상하게 한정적인 결론이 되는 것을특별히 지적인 놀라움이나 학문의 발전인 것처럼 말하고그것의 향락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마츠모토 그렇게 함으로써 향락하고 있다.

 

치바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프래그머틱스에 있어서의 말의 두께가 S2적인 단조로움 속에 해체되는 것을 기분 좋다고 생각하고 있죠그리고 그것을말의 두께의 세계에 대해모종의 위협적으로 대치시키는 것에 쾌를 느끼고 있다.

 

우츠미 아이가 말을 배울 때에도혹은 부모가 말을 가르칠 때에도개념은 가르칠 수 없죠차를 보고 붕붕이라고 가르쳐보죠그래서 차가 아닌 것을 아이가 붕붕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붕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개념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처음에 지시가 있는 것입니다개념 규정에 너무 얽매이면 잘 안 되는 거죠.

 

치바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절차적인 것을 직장에서 요구합니다. “이러저러할 때에는 이러저러한 목소리를 내고 몇 초 기다렸다가 이렇게 해라” 같은 것을 하는 것이 분명한 가게도 있습니다그런 것은 바로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말하고 싶은 상황입니다대학 업무에서도 그것에 가까운 것을 하도록 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우츠미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수십 시간의 연수가 있다고 합니다다만셀프엔조이먼트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커피가.

 

마츠모토 최근의 전지구적 기업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개개의 고객에 인간적인 대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매뉴얼로 인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치바 그런 건 왠지 섬뜩하죠[낯선 친숙함이죠].

 

마츠모토 섬뜩합니다[낯선 친숙함입니다].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사람에게 점장이 개인적으로 코칭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아요거기에는 꽤 심리학의 메소드가 들어 있어서그래서 나오는 것이 완전히 통제된 인간미가 있는 접객입니다.

 

치바 : S2밖에 없는 가설적 공리체계로서의 인간 같음.

 

마츠모토 인공지능은 그곳에서 이미 완성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바 불가능한 것이나 무한이라는 것이 지성에 있어서 문제였던 시대에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만거꾸로 시대가 인간의 지성을 인공지능적으로 했다면그건 인공지능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최근에는 알고리듬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이 인공 지능이라고 꽤 흔하게(casual) 불리게 됐네요.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인공지능 알고리듬으로 라든가저런 캐주얼화는 기묘하다고 생각합니다옛날 같으면 인공지능이 만들었다고까지 야단스럽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요이렇게 인공지능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원래 모델이 되는 인간 문명이 인공 지능적으로 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 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 이 글은  現代思想』 2015년 3월호 '정신병리의 시대'에 수록된 첫 번째 대담을 옮긴 것이다. 이 대담을 옮기면서 다시금 실감한 것은, '영어'나 '불어'를 번역하지 않고 쓰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말을 할 때, 꼭 필요한 경우를 빼면 절대로 영어나 불어 등을 그대로 얘기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아무튼 위 사진의 가운데 인물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기 위해 이 글을 옮긴다. 그리고 세 번째 인물인 마츠모토 타쿠야의 글은 이미 <현대 라캉파의 논점들>이라는 번역으로 소개했으므로 그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現代思想』 2015년 3월호를 전체적으로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에 기반한 논의가 중심이라는 점도 지적해둔다. 

* 일본에서는 라캉의 '실재계'를 대체로 '현실계'로 옮긴다. 이를 다시 '실재계'로 옮겨적었으나, '현실'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에도 이것이 '실재계'와 연결된 것임을 생각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바꾸긴 했으나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 또한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예전에는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자' 등으로 옮겨졌으나, 요즘에는 '조현병', '조현병 환자' 등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전처럼 이해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이것도 '스키조프레니'로 그대로 적어뒀다. 그들이 그렇게 발음했기 때문이다. 

  

일자의 향락

마츠모토 : 이번에 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 : 자크 라캉과 감별진단의 사상(はみな妄想する : ジャック・ラカンと鑑別診断思想(青土社, 2015)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대적인 라캉 연구를 참조하면서, 라캉을 통사적으로 재독해함으로써 라캉을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속에 다시금 자리매김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서서히 실감하며 알게 된 것은, 라캉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자크 알랭 밀레르의 라캉 독해, 표준판 라캉을 만드는 공식화 작업이 전기·중기 라캉뿐 아니라 후기 라캉에도 미치며, 하나의 도달점이랄까, 모종의 일단락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일단락은 밀레르가 2011년에 한 존재와 일자(l’Étre et l’Un)(별명 : 하나뿐인 일자(L’Un-tout-seul), 하나뿐인 자들(Les-tout-seuls))라는 강의입니다. 이 강의는 70년대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후기 라캉의 행보를 지금까지 읽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사후적으로 보면, 이 독해는 밀레르가 편집한 [라캉의] 세미나출판의 흐름과도 합치했습니다. 2005년에 13권인 생톰이 출판되고, 2007년에는 18권인 외양이 아닐 수도 있는 담론에 대해(On a discourse that might not be a semblance), 2011년에 19권인 우 피르(Ou Pire)가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그 집대성인 밀레르의 2011년의 강의는 우 피르의 해설이기도 합니다. 제 책이 노린 것은 우선 우 피르에 이르는 라캉 독해를 밀레르에 의거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 독해의 성과를 프랑스의 정신병리학의 논의에 떨궈놓고, 더 나아가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대결 등 현대사상의 여러 가지 과제 속에서 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밀레르 주변 논자들의 논의에는 아무래도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논의와 친근성을 가진 논의가 있는데도 그 누구도 그것을 정색하면서 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존재와 일자에서의 라캉 독해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라캉은 그동안 주로 하이데거 존재론의 영향이 강한 이론가로 불렸지만, 밀레르에 따르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캉은 세미나18, 19권의 논의를 거쳐, 20권인 앙코르에서 성별화의 식(性別化)”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존재론(ontologie)”을 버리고,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일자론(hénologie)”으로 전회했다고 밀레르는 주장합니다. 물론 라캉은 71~72년의 우 피르세미나에서 일자론이라는 말을 이미 썼어요. 하지만 세미나 해적판을 편찬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자론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거의 모든 해적판이 라캉이 일자론(hénologie)’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정확하게 옮겨 적지(transcription) 못했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에서 일자론으로의 전회를 중시하는 밀레르의 2011년 강의에 의해, 아마 처음으로 후기 라캉의 일자론의 이론적 의의가 끄집어내진 것입니다.

    헌데, 이 일자론은 치바 씨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哲学)(河出書房新社, 2013)에서 다룬 존재론적 파시즘얘기와 유비적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들뢰즈한테는 모든 것이 융합하고 점점 연결되어 하나(일자)가 된다는 논의의 흐름이 있으며, 그것은 특히 네그리=하트화된 들뢰즈에서 현저한데요, 그것은 일자의 파시즘이 되어버릴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런 접속적 들뢰즈와는 정반대의 들뢰즈 상()을 치바 씨는 절단이라는 키워드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다른 한편, 밀레르가 후기 라캉의 일자론에서 끄집어낸 일자도 존재론적 파시즘의 일자 밀레르는 그것을 융합적 일자(Un fusionnel)’라고 말합니다 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존재와 일자의 다른 제목이기도 한 “L’Un-tout-seul”, 즉 단 하나뿐이며, 타자와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별개의 형태인 듯한 일자임을 하이데거적인 라캉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라캉 속에서 밀레르는 끄집어낸 것입니다.

 

치바 : 일자에 대해 융합적 일자라는 이해가 있다는 것을 한 번 말한 뒤에, 그런 게 아니라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마츠모토 : 그렇죠. 앙코르의 세미나에서도, 맨 처음에 융합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일자였다고 간주되는 남자와 여자가 재융합하는 것을 지향하는 안드로귀노스(androgynos)의 신화처럼, 융합적인 것을 지향하는 에로스적 향락을 라캉은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보편적 융합의 일자와는 상이한 향락으로서, “여성의 향락(<다름>의 향락)”을 끄집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의 일자론은 여성의 향락의 발견을 경유하여, 보편적 융합의 원리로부터 벗어나는 각각의 개별적인 일자의 향락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앙코르6장과 7장에서, 라캉은 유명한 성별화의 공식을 완성시킵니다. 7, 8장에는 백치[바보]의 향락(jouissance de l’idiot)”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백치인가? 라캉은 남성의 향락이 기본적으로 자위행위(masterbation) 같은 것이며, 자신의 팔루스를 사용해 자위하는 듯한 것이며, 그래서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성의 향락은 타자와 관계를 갖지 않는 어리석고 못난 향락이라는 의미에서 라캉은 백치의 향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앙코르 8장에서 백치의 향락이라고 말할 경우의 백치라는 말에는 사실 그리스어의 어원인 ίδιώτης가 지닌 기묘한개별적인이라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고 라캉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백치의 향락이 지닌 개별적이라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이적=단독적(singulier)”이라는 의미를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그 향락이, 융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하나뿐인 각각의 개별적인 형태인 일자의 향락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앙코르성별화의 식이 완성된 후에 라캉이 발견한 것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앙코르8장 이후의 라캉은 전년도의 우 피르에서 도입된 일자론을 논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후 라캉은, 그 일자의 향락은 자체성애적인 것이며, 거기에 주체의 향락의 특이성=단독성(singulalit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서 분석의 종결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톰의 세미나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임스 조이스는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예술을 만든 것이라는, 꽤 표층적인 이해가 생톰에 관해 이뤄져왔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신병 같은 증상이 있은 후에 창작을 한 사람이라면 뭐든지 생톰입니다. 그러나 라캉의 주안점은, 사실은 거기에 없는 게 아닐까? 라캉은 생톰을 개강하기 직전에 증상으로서의 조이스(Joyce le symptôme)라는 강연을 했습니다만, 거기에서 라캉은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가 자신의 향락의 특이성을 전면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하다, 보통이라면 분석을 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지만, 조이스는 분석을 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도달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체성애적인 향락은 무엇이냐 하면, 라캉은 그것을 신체의 사건이라는 말로 얘기합니다. 신체의 사건이란, 어린이가 자체성애적으로 향락하는 곳에 처음으로 언어가 개입할 때에 주어진 충격 같은 것이며, 거기에서는 시니피앙이 물론 들어오지만, 그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 분절화되지 않고 하나뿐이며, 게다가 그것은 향락과 일체가 된 일종의 에크리튀르 같은 것이다. 그 에크리튀르의 장소를 정신분석은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를 라캉은 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논의가 2011년까지 프랑스에서 라캉 독해의 모종의 일단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화제에 올린 치바 씨의 책과 닮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 , 공통의 규범화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개 별별의 특이성을 어떻게 격려하는가, 부활하는가라는 방향으로 후기 라캉의 임상은 향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들뢰즈-가타리와 거의 같죠. 다만, 거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더라도 어떤 규범화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분석을 밀고나가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규범성에 의거하는 기술과 특이성을 장려하는 기술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각날 수밖에 없죠. 이것은 나중에 재차 건들고 싶습니다.

    그 전에, 일자론 얘기는 재미있네요. 여기에서 얘기되는 일자성, 혼자서 있는 것의 일자성은 일종의 자위(onanism)를 긍정한다는 의미이죠. 그것도 바로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욕망의 특이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통하며, 제 책에서 독신자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전과도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 책에서는 일자-전체가 융합적 기능을 갖는 것을 경계한 것인데요, 일자에게 다른 의미를 나누고, 분리한 상태, ‘분리성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은 있죠.

 

마츠모토 :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서, 자기항략(self-enjoyment, 이하 '셀프엔조이먼트'로 옮김)론을 전개하는 곳에서 바로 플로티누스를 인용하고 있고, 전체화 불가능한 단편의 세계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도 논합니다만, 꽤 자폐증적인 세계에 가깝다고 느끼며, 후기 라캉이 봤던 특이성의 세계에 겹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밀레르의 존재와 일자를 읽은 것은 2012년 혹은 13년인데요, 2013년에 치바 씨의 책이 나왔을 때, 양자의 가까움에 꽤 놀랐습니다.

 

치바 : 저는 밀레르를 읽지 않았지만, 뭔가 세계동시적으로 움직이던 해석 경향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폐증 개념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어떤 밸런스로 생각하는가가 오늘날에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양보할 수 없는 향락의 장소라는 의미를 자폐라는 말로 형언하고 싶다는 것은 제게도 전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의료 전문가가 아니라서,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도 포함해 자폐증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할 수 없다며 제 자신에게 금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자폐증을 비유로서는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사실 이 책을 한창 쓰고 있을 때부터 마츠모토 씨와는 몇 번이나 얘기는 나눴고, 그 속에서 자폐증 개념을 셀프엔조이먼트와 가깝게 하는 고찰은 이미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죽치고 앉아 있던 맥락이 마침내 마츠모토 씨의 책에서 전면 전개됐다는 형태가 됐으며, 이것이 이후 어떤 식으로 논의를 파급시키게 될지는 참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얽혀 있는 얘기인데요, 자체성애는 브로일러1911년에 스키조프레니를 개념화했을 때, 구스타프 융을 경유하여 프로이트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만일 자체성애를 싱귤라리티(singularité)로 바꿔 읽으면,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싱귤라리티(singularité)의 도상에서 초월론적인 것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미지화해서 말하면, 카프카의 법의 문 앞에서같은 것이랄까요. 시골에서 온 남자는 문 앞에 가까스로 도착합니다만, 문지기한테 걸려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거기에 머뭅니다. 마지막에 문지기는 이 문은 너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집니다. 스키조프레니싱귤라리티에 대해 어피니티(affinity, 친화성)를 갖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치료자는, 이런 싱귤라리티를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요구됩니다. 기묘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싱귤러(singular)양자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여부가 치료자로서의 자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스키조프레니의 경우에는, 아직 초월론적 심급이 기능하고 있으며, 부정신학적 구도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은 그 빈 곳에 출현하는 자기장에 홀리고 이끌립니다. 라캉은 그것을 인격신(대타자)에게 말을 걸고 파라노이아에 준한 방향에서 얘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역시 카프카의 문이 이미지로는 가깝습니다. 실재계와 상징계가 떼어내진(decoupling) 양태랄까, 슈미트가 형식적인 법과 그것을 행사하는 힘을 나눠서 얘기하는 것을 흉내 낸다, 그 힘이 충만한 공백지대 같은 것이 개시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치료관계에 있어서의 싱귤라리티는 이런 강한 자기장으로부터, 얼마나 이심적(離心的)인 지점까지 데려오게 되느냐는 것에 관련된 프락시스입니다. 두 사람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폐증 임상과 스키조프레니 임상을 대비해 보는 관점이 부상하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마츠모토 : 예전에 기무라 빈(木村敏) 씨는 정신분열증이 개별화의 위기에서 발병한다고 말했습니다만, 어쩌면 혹시 청년기에 다시금 싱귤라리티를 낼 때에 실패하여 발병한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면, 자폐증에서 왜 싱귤라리티가 정신분열증만큼 위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안전하게 나오게 되는가 하면, 그들은 개별화의 위기가 위기로 되지 않도록, 초월론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모종의 방식으로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싱귤라리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츠미 : 우리가 일반임상에서 관련된 자폐증 스펙트럼의 사례는, 주로 청년기 이후의 사람들에서, 자타미분화의 상태로부터 개체화가 시작될 무렵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아주 고통스러운 시기에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타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만, 반드시 그것이 초월론적 차원의 것이지는 않습니다.

    밀레르는 라캉 독해에서 배제가 최종적으로는 일반화 배제이며, 신경증과 정신병 둘 다가 토템과 터부적인 구도 하에 있다고 했습니다. , “아버지의 이름이 배제되는 것은 정신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양자에 공통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자폐증 스펙트럼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현재에서 돌이켜보면, 이 일반화 배제에 의해 정신병도 신경증도 정형 발달定型発達한 것이라고 말한 게 됩니다.

 

치바 : 일반화 배제를 정형 발달의 표식으로 보는 읽기를 할 수 있다고.

 

우츠미 : 그렇군요. 정형자(定型者)라는 것은, 자신에게 눈뜨기 전에, 타자와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키조프레니에게 찾아온 타자는, “어딘가에서 한번쯤 만난 듯한 타자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혀 만난 적이 없었을 텐데도, 왠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인 것 같다는 느낌이니까, 전적으로 무관한 타자가 아닌 것입니다.

 

마츠모토 : 그래서 무서움이 있다는 것이죠.

 

우츠미 : 그렇군요. 반면, 자폐증 사람들은 바로 처음에 타자와 만나는 것입니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타자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니!”라는 식으로 놀라게 됩니다. 레오 카나1943년의 논고에서 자폐증개념을 제시했습니다만, 그때, 똑같은 자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스키조프레니withdrawal인 반면, 자폐증은 aloneness이며, 양자는 철저하게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브로이어 식으로 말하면, 스키조프레니는 한 번 구성된 현실로부터 철퇴[뒤로 물러섬]하여 공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아까 말한 셀프엔조이먼트나 자체성애는 카나가 자폐증 속에서 찾아낸 aloneness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츠모토 : 자체성애라는 곳으로 얘기를 되돌리면, 우츠미 씨가 아까 설명하셨듯이, 자체성애는 원래 정신분열증 개념이 생길 때 문제가 된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1911년의 슈레버 증례론에서 슈레버의 파라노이아를 논합니다만, 그는 거기서 동시에 스키조프레니를 논합니다. 그는 거기서, 스키조프레니파라노이아보다 더 옛날까지, 즉 자체성애에 가까운 곳까지 퇴행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자폐증과 스키조프레니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자, 프로이트-라캉파에서는 자폐증을 정신병과 똑같은 것으로 보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라캉파 속에서도 생깁니다. 그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퇴행의 지점에 의해, 라캉파의 말투로 얘기하면 향락의 회귀모드(mode)의 차이에 의해,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을 차이화하려고 했다는 것이 에릭 로랑(Éric Laurent) 등의 논의입니다. 어떻게 차이화하는가 하면, 파라노이아는 향락을 대타자 쪽에서 찾아내기에, 슈레버처럼 대타자(신이나 파울 에밀 플렉지히Paul Emil Flechsig(1847~1929) 교수)가 나를 향락하려고 한다는 망상을 구축한다. 스키조프레니에서는 향락이 자신의 신체에 회귀하기에, 몸 위에 향락이 다양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는 원래 대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폐증자에게는 일자의 시니피앙”(S1)만이 도입되고 있지만, 그들은 S1에 연쇄하게 되는 시니피앙(S2)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S2를 거절하는 대신, 자체성애가 새겨진 일자의 시니피앙”(S1)을 줄곧 반복해서 사용하고, 특히 신체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향락한다. 그것은, 신체의 이른바 전체의 향락이 회귀해오는 스키조프레니와는 다른 향락의 방식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스키조프레니 환자에게는 향락의 신체로의 회귀가 실제로 증상으로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음부를 이리저리 쓰다듬다”, “의미가 불분명한 힘이 몸을 조작하고 있다등의 증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증상들은 어느 정도 섹슈얼한[성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무서운 타자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성화(性化)된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에게 보이는 향락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허그 머신(Hug machine)에는 자폐증자의 향락의 모습이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를 억누르는 기기에 자신이 들어감으로써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화(性化)된 방식에서 벗어난 곳에서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통제하는가가 자폐증에서의 일자의 향락에서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은 둘 다 신체에 있어서 향락하는 체제가 전면에 나오는 병의 용태는 아니지만, 양자의 향락의 체제는 상이하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체성애의 혁신성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연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현대 라캉파의 논점들

자크-알랭 밀레르의 논의를 중심으로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atプラス19(20142)

 

『atプラス19』 著:周防正行、國分功一郎、大澤真幸、大竹弘二、山崎亮、斎藤環、木村草太、松井茂記、松本卓也、海渡雄一、港千尋、鈴木一誌

* 치바 마사야의 너무 움직이지 마라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ゥルーズと生成変化哲学)』를 국역 출판한지 좀 되었으나 반응이 별로 없어서 내심 걱정하고 있다. 치바의 책에 대해 내용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문체는 영 내 스타일이 아니다. 아무튼 옮긴이 해제도 붙이지 못한 채 출간된 책이라 내심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마음의 빚을 털기 위해 2개의 글을 준비했다. 하나는 지금 이 글이다. 뒤에 보면 치바의 책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다른 하나는 이 글의 필자와 치바 등이 나눈 대담을 번역한 것인데, 이것도 곧 공개할 예정이다. 


1. 들어가며

플라톤(다이몬과 광기)과 아리스토텔레스(천재와 우울)의 시대에도 광기가 철학적 모티프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광기와 인간 사이의 떼어낼 수 없는 관계가 서양사상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된 것은 어쩌면 칸트 이후일 것이다.

가령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1789)에서 지각의 랩소디는 정신의학자가 정신분열증의 환각 내지 자아 장애에 대해 금세기에 이르기까지도 말하고 있는 논의를 확실하게 선취했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는 근원적 통각에 의해 산출되는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라는 표상이 다른 모든 표상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통은 대체로 생각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표상으로서 난무하게 된다(환각). 혹은 표상이 의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지 않으면, ‘는 그것이 의식하고 있는 여러 가지 표상에 따라서, 몇 가지 다양한 자기를 갖게 된다(자아장애, 인격의 이중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의식이 갖는 광기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이런 의미에서 말년의 칸트가 실용적 견지에서 본 인간학(1798)에서 광기에 흥미를 갖고 이를 분류하려 시도한 것은 일종의 이론적 필연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똑같은 사태는 문학에도 지적할 수 있다. 푸코(1970)에 따르면, 17세기 이후의 유럽에서 행해졌던 광기의 감금이라는 원리적 선택은 이른바 배제된 것의 회귀처럼 19세기 이후의 문학 속에서, 광기의 세계를 갑자기 출현시켰다. 19세기 이후, 광기라는 문제를 빼놓고, 더 이상 사상이나 문학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분수령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있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가령 칸트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 근대적 자기의 구조였다고 한다면, 그 구조의 발견은 근대적 자기를 확고한 것으로 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 자기라는 것이 고장나버릴 수 있다는 것,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그 구조적 필연으로서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들춰낸 것이다.

 

 ç´”粋理性批判

イマニュエルカント, 純粋理性批判, 熊野純彦訳, 作品社, 2012.

 

광기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서양사상의 한 가지 목표(objection)가 됐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바로 칸트가 말하는 바의 나는 생각한다를 수반하지 않는 표상의 존재와 그 표상의 복잡한 운동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 정교화된 개념이다(“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라캉의 말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칸트적 의미에서도 읽을 필요가 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증상을 만들고 그로부터 고통과 여러 가지가 뒤섞인 향락을 얻고 있다. 그것이 무의식이다. 프로이트는 그 무의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콤플렉스)라는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1950년대 라캉의 작업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이 무의식을 일종의 초월론적 시스템으로 체계화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에게서의 (말실수나 증상을 포함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언어사용의 메커니즘인 상징계는 <아버지의 이름>(le Nom-du-Père)이라는 특권적 시니피앙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그런 상징계에 지배되는 인간은 신경증자라고 불리며, 이른바 정상인과 이웃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이 시기의 라캉에게 신경증과 정신병은 분명히 감별 진단이 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이 <아버지의 이름>의 유무로 이 둘이 나뉘기 때문이다. , 정신병자에게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배제되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상징계를 지닌 그들은, 시니피앙()이 머릿속에서 난무하는 정신 자동증으로 대표되는 지각의 랩소디의 먹잇감이 되며, 배제된 <아버지의 이름>을 둘러싸고 생기는 과정을 따라 망상을 점차 발전시킨다. 이리하여 50년대 라캉의 이론에서는 정신병자만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예외자로 기능할 수 있다고 지목됐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이론 확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있었다.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 비판했던 것은, 프로이트처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무의식의 유일하게 가능한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하는 입장 및 라캉처럼 과정을 정신병에서만 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 무의식은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과정을 살 수 있는 것이며, 신경증·정신병·도착 등 여러 가지 병의 임상적 형태는, ‘과정이 오이디푸스적인 벽에 부딪힌 결과로서 생기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여겨진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는 모든 인간이 가진 스키조 과정을 해방하는 것을 사상적, 실천적 목표로 삼았다. 즉 그들은 라캉이 정신병자에게서만 찾아낸 과정오이디푸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을 모든 인간에게서의 가능성으로 재파악한 것이다.

한정된 지면으로는 충분히 검토할 수 없으나, 들뢰즈=가타리 및 이들과 동시대적인 몇몇 사유는 이런 라캉 비판의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 이에 대해 라캉파는 어떻게 대답할까? 확실히 정면에서 재반론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더라도, 필자가 보기에, 라캉의 사후, 현대 라캉파[각주:1]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론적 작업은 이런 비판에 대해 다소나마 자각적인 듯하다. 아무튼,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의 반라캉적 모티프와 현대 라캉파의 논의를 비교하는 것은, 이 과거의 사상을 다시금 현대의 것을 삼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 작업의 단초를 시도하려고 한다.

 

2. 상징계의 쇠퇴와 <아버지>의 복수화

라캉과 들뢰즈=가타리의 대립은, 전자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인간에게 유일한 초월론적 시스템으로 파악한 반면, 후자는 그것을 비판한 것이라는 식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 견해가 유효한 것은 고작 1958년 전반기까지의 라캉 이론일 뿐이다.

현대 라캉파의 지도자 자크 알랭 밀레르[각주:2]에 따르면, 상징적 질서(대타자 l’Autre)정상적인 형태로 (,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통제된 형태로) 기능했던 것은 정신분석의 프로이트적 시대뿐이다. 즉 그것은 과거의 것이다. 한편, “정신분석의 라캉적 시대는 오히려 대타자의 부재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그는 말한다. 무슨 말인가? 라캉은 세미나 5무의식의 형성물(1957-58)에서 대타자의 대타자”, 즉 상징계(=대타자)를 근거짓는 다른 대타자가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듬해 세미나 6욕망과 그 해석(1958-59)에서 그는 갑자기 대타자의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앞의 말을 뒤집어버린다.

Le Séminaire. Les formations de l'inconscient (1957-1958) (5) Formations of the Unconscious: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V pdf(해적판)

 Le Séminaire, livre VI. Le désir et son interprétatio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Desire and Its Interpretation 1958-1959 Book Vi pdf(해적판)

이것이 대타자의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러분께 말씀 드렸을 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수많은 시니피앙의 그 어떤 표현의 구체적인 연속을 보증하는 그 어떤 시니피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빗금을 그은 A[대타자]라는 용어가 도입되는 것은 여기에서입니다.”[각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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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ャックラカン, 無意識形成物, ジャック=アラン ミレ
木孝次ほか, 岩波書店, 2005

 

 

작년(2013)에 정식으로 출판된 이 세미나 6권의 뒤표지에는 편집자 밀레르가 쓴 설명문이 붙어 있다. 다음과 같은 이 문장은 이 시기의 라캉의 입장 변경이 가진 임팩트를 충분하게 나타내줄 것이다.

 

동물이라는 종은 자연의 나침반을 갖고 있으며, 그 나침반은 [각각의 종에] 독자적이다. 인간이라는 종에 있어서 나침반은 복수적이다. 인간에게서 나침반은 시니피앙의 조합, 담론에 속한다. 이런 것이, 해야 할 것을 [인간에게] 알린다. 어떻게 사고하는가, 어떻게 향락하는가, 어떻게 번식하는가를 알리는 것이다. 최근 시대까지, 우리의 나침반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똑같은 극을 향했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극이다. 가부장제는 인류학적인 불변의 것이라고 믿어졌다. 가부장제의 몰락은 신분의 평등, 자본주의의 힘의 증대, 기술의 지배에 의해 가속화됐다. 우리는 <아버지>의 시대의 출구라는 국면에 이르고 있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시대에 있었다. 그는 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일을 저질렀다. 교회는 그것을 깨닫게 됐다. 라캉은 프로이트에 의해 열린 길을 추종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버지>가 하나의 증상이라고 상정하라고 그에게 부과했다.”

 

이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라캉은 1959년 시점에서, 가부장제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해 지배되는 무의식을 표준적인 모델로서 간주하기를 그만뒀다. 이 논의는 그 후에도 발전된다. <아버지의 이름>1960년대 전반에는 복수형으로 아버지의 이름들(noms-du-père)”로 철자화되며, 1970년대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의 심적 구조의 위상학적(topological) 매듭을 연결시키는 복수의 방법 중의 한 가지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버전이 다른 아버지(père-version)’라는 말년의 라캉의 말장난은 그렇게 읽을 필요가 있다).

현대의 라캉파에서 얘기되는 배제의 일반화”, “부성 은유[=<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은유]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망상적 은유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앞서 말한 1959년의 라캉의 논의로부터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대타자가 궁극적으로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보증되지 않는다는 것은, 작금의 정상으로 간주된 대타자도 일반화된 의미에서의 배제를 그 안에 끌어안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 배제로부터 귀결하는 집단적 망상을 살고 있으나, 그것이 망상이라고 불리지 않게 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한 오이디푸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모티프는 라캉에게도 공유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과도한 단순화는 삼가야 하지만, 현대의 일본에서도 과거에 있었던 종신고용제도와 함께 가능해진 가부장제는 쇠퇴하고, 그것에 동반해 연애나 결혼의 모습은 실로 다양화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더 이상 대문자로 쓸 수 있는 <아버지>는 무효화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의 사상의 문맥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안할 수 있다. 1998년부터 2003년에 걸쳐, 현대에서의 상징계의 쇠퇴를 주장한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에 대해서, 정신과의사인 사이토 타마키斎藤環상징계가 쇠퇴했다고 한다면, 모두 정신병에 걸려버린다고 반론해 조금 논쟁이 된 적이 있다.[각주:4] 라캉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현대에서의 상징적 질서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아버지의 기능은 프로이트의 시대에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밀레르에 따르면, 아버지의 기능의 쇠퇴는 전혀 현대에 한정되는 얘기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왕의 머리를 잘라버린 프랑스혁명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며, 그 시점부터 이미 아버지는 더 이상 사회적 명성의 보유자로서도, 왕년의 입법자로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각주:5]

    

사이토 다마키의 책들


다만 <아버지>가 더 이상 자명한 존재가 아니게 됐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될 가능성을 갖는다는 유토피아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라캉이 세미나 생톰에서 말했듯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용한다는 조건에서, <아버지의 이름> 없이 끝낼 수 있다”(S23, p.136). <아버지>가 부재하기 때문에, 겉보기(semblent)로서의 아버지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Le Séminaire. Le Sinthome (1975-1976) (23)  The Sinthome: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XXIII  pdf

 

3. 보통정신병과 감별진단의 행방

<아버지>의 위상을 둘러싼 이런 이론적 변화와 평행하여, 1998년에 프랑스의 라캉파에서는 보통정신병(psychose ordinaire)”이라는 용어가 제창됐다.[각주:6]

현대의 정신병(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정신분열증이나 협의의 파라노이아에 대부분 상당한다)에는, 옛날의 증례처럼 눈부신 환각이나 망상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정신병 구조를 가지면서도 발병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증례가 많다는 것이 자주 지적됐다. 지금까지 그런 증례에는 하얀 정신병(psychose blanche)”이나 미발병 정신병(psychose non-déclenchée)” 같은 진단명이 붙어졌다. 그런 증례는, 슈레버처럼 뚜렷한 발병(déclenchement)을 나타내거나, 남다른(extraordinaire) 망상을 개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양한 것으로부터 탈접속(débranchement)한다. 이런 증례는, 슈레버처럼 화려한 망상을 개화시키는 정신병(남다른 정신병psychose extraordinaire)과는 달리, <아버지의 이름>의 배제로부터 귀결하는 분명한 정신병의 표식(고전적 요소 현상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한다.

다만 보통 정신병이라는 진단명이 그런 증례에 대해 곧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통 정신병은 오히려 신경증이다라는 확실한 증거가 보이지 않을 때, 숨겨진 정신병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 진단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진단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도 밀레르는 말한다. ‘보통 정신병이라는 용어는 발병하는 대신에 탈접속이라는 모드에서 나타나는 현대적인 정신병을, 미세한 특징에 의해 진단 가능케 하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 미세한 특징을, 밀레르는 다음의 세 가지 외부성의 양태에 의해 예시하고 있다.[각주:7] 

(1) 사회적 외부성 : 루소를 필두로 하여, 정신분열증자의 방랑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자주 관찰되었지만, 이처럼 사회 속에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외부성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정신병에서는, 직장이나 가정으로부터 탈접속하다는 특징이 보인다. 반대로, 사회(직장)에 대해 과잉 동일화하는 형식에서의 보통정신병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일자리를 잃는 것을 계기로 발병하는 것도 있다고 밀레르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일자리를 갖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기때문이다.

(2) 신체적 외부성 : 보통 정신병에서는 신체가 자기에 접속되지 않고, 간극을 내포하는 것이 있다. 이 실례는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기술한, 자기의 신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체험이다. 이런 신체의 불안정성에 대한 대처 행동으로서, 밀레르는 타투를 들고 있다. , 그들에게서 타투는 신체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아버지의 이름>이 된다는 것이다.

(3) 주체적 외부성 : 보통 정신병에서는 독특한 공허감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런 공허감은 신경증에서도 보일 수 있지만, 보통 정신병의 경우는 그 공허감을 변증법적으로 부정할[변증법적 부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한다.

           

 

밀레르에 따르면, 보통 정신병이라고 하는 용어의 도입은, 그 이론적, 임상적 귀결로서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초래한다.

한편으로는, 보통 정신병이라는 존재를 깨닫게 된 이후, 임상가는 신경증의 진단의 정밀화를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환각이나 망상이 없다고 해서 신경증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1950년대의 라캉이 이론적 전제로 삼았던 <아버지의 이름>의 유무에 의한 신경증/정신병의 감별 진단의 원칙이 유지되게 된다.

반대로 다른 한편에서는 정신병의 보편화라는 방향을 얻게 된다. 정신병이 이전 시대처럼 명확한 발병을 나타내지 못하고, 게다가 신경증과 정신병을 나눈다고 간주됐던 <아버지의 이름>의 기능이 쇠퇴하고 있는 이상, 정신병이라는 병리가 희석된 형태로 만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과 호응하듯이, 최후기의 라캉은 사람은 모두 광인이다. 달리 말하면 망상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신경증/정신병의 감별진단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는 이론도 또한 라캉으로부터 끄집어내지는 것이다. 토마스 스볼로스[각주:8]는 이 두 가지 방향성은 물리학에 있어서의 뉴턴과 아인슈타인 같은 관계에 있으며, 양립 가능하다고 말했다. , 신경증과 정신병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임상과, “사람은 모두 광인(정신병)”이라고 위치짓는 임상이 양립할 수 있다는 절충적인 견해가 나오는 것이다.[각주:9]

* 토마스 스볼로스의 글은 다음 사이트를 클릭. http://www.lacan.com/symptom10a/ordinary-psychosis.html

 

4. 섹슈얼리티의 변화 : ‘노출중독/의존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정신분석 이론에는 수많은 비판이 가해졌다.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함께 되는 것을 욕망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도식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친 유럽에서 국지적으로만 타당한 것일지도 모르고, 보편성을 갖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는 모계사회인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민족을 연구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여러 논고(애정 생활의 심리학愛情生活心理学, 문화 속의 편치 않음[문명 속의 불만])를 읽으면, 그가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문명과 성에 대한 사회적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인간(근대 이후의 유럽인이라고 해석하듯이)에게 있어서는, 유아기의 성욕이 인세스트[근친상간] 금지의 관습에 의해 제한을 얻음으로써 그 완수가 아무런 결실도 없는 채 끝나는 것이 /그녀들의 성애생활을 규정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리고 이 욕동의 단념에 의해 얻어지는 결여가 우리에게 다양한 대상을 욕망시키고, 다양한 증상을 만들고, 승화를 통해서 다양한 창조를 행하게 하는 원천이라고 프로이트는 파악했다. , 우리의 섹슈얼리티, 욕망, 증상, 창조는 초시대적인 보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결여의, 이른바 함수로서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에 대한 제도나 상황이 변화한다면, 우리의 섹슈얼리티도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확연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제한도 철폐한, 해방된 성의 모습도 결코 좋은 결과를 이끄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성의] 제도가 바뀌면, 다른, 혹여나 더 중대한 희생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여부라는 의구심을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정신분석에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캉이 1970년대 전반에 행해진 지적 현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문명에 있어서, 바로 욕망이나 섹슈얼리티에 있어서의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지적 은 이런 프로이트의 고찰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시기의 라캉은, 이 변화를 담론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밀레르가 말하는 정신분석의 프로이트적 시대에서의 주체(근대적 주체)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바탕으로 한 주인의 담론에 의해 구동됐다고 한다면, 신자유주의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석권하는 현대에서의 주체의 모습은, 더 이상 똑같은 주인의 담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라캉은 자본주의의 담론을 발명한 것이다[그림1].

라캉의 담론의 도식은 각각 좌우상하의 네 개의 위치를 갖고 있다[그림 2]. 좌측 상단은 동인(agent), 좌측 하단은 진리(vérité), 우측 상단은 타자(autre), 우측 하단은 생산물(production)의 위치이다. 이 네 개의 위치에, 주인의 시니피앙(S1), 지식(S2), 빗금이 그어진 주체(), 대상 a(a)의 네 개 항처럼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각각의 담론은 규정된다. 기본적인 법칙으로서는, ‘진리에 의해 뒷받침된 동인타자에게 명령하고, 그 결과로서 생산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진리생산물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림 1: 주인의 담론과 자본주의의 담론

주인의 담론            자본주의의 담론

 

그림 2: 담론의 도식


 

주인의 담론은 시니피앙 연쇄(S1 S2)에 의해 주체()가 대리 표상됨으로써, 원초적으로 있었다고 상정되는 향락을 잃고, 이로부터 잉여향락(a)이 생긴다는 구조를 나타낸다. , 이 담론에서는 결여(상실)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리하여 주체()와 대상 a 사이에는 판타슴(a)의 구조가 생기고, 주체는 그 판타슴 속에서 결여를 추구하는 욕망을 품게 된다.

자본주의의 담론은 주인의 담론의 좌측(S1/)의 상하를 역전시킨 것이다. 그것에 수반해, 주체()와 대상 a실선으로 묶이게 된다. 이 실선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후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잉여향락은 이제 계산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 욕망의 대상을 통해 향락을 얻으려고 시도하지만, 거기서 제공되는 상품은 시장 원리라는 질서를 따르고, 계산 가능성의 논리에 의거한다. 이리하여 현대의 우리는, 대량 소비용의 균질화된 공업 제품을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차례차례 추구하는, 끝나지 않는 소비에 농락당하게 된다. , 일찍이 욕망을 구동한 결여는, 상품에 의해 메워지게 된다. 달리 말하면, 차례차례 새로운 상품이 주체에 적용됨으로써 주체의 욕구나 요구를 일시적인 형태로 곧바로 만족시켜주게 될 때, 욕구의 피안에 나타날 터의 결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라캉은 생트안느 병원에서의 세미나 정신분석가의 지식(1971~72)에서 “자본주의의 담론은 거세를 배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일찍이 욕망을 구조화한 상실(결여)의 무시 또는 무효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담론에 있어서 상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실 없이 향락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주체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Le savoir du psychanaliste et. ou pire -Séminaires 1971 -1972 


츠이키 코스케(立木康介)의 최근작 노출하라, 고 현대문명은 말한다(露出せよ, 現代文明)는 바로 이 상실(결여)의 무시 혹은 무효화를 주축으로서 현대문명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츠이키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섹슈얼리티라는 것은 퇴화하고 있는 기능이 아닌가? 라는 프로이트의 의심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露出せよ、と現代文明は言う: 「心の闇」の喪失と精神分析

立木康介露出せよ現代文明河出書房新社, 2013. 


욕동의 원천으로부터의 대상의 분리(대상상실)가 적절하게 수행되지 않은 곳에, 과연 섹슈얼리티의 구조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츠이키가 다양한 문화 현상이나 현대예술의 예를 인용하면서 명료하게 제시하듯이, 현대문명은 표상’(거기에 없는 것을, 대리함으로써 표현하는 시도)으로부터 노출’(거기에 있는 것을, 벌거벗은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로 크게 조타를 꺾는다[방향을 바꾼다]. 과거 시대의 멘탈리티가, 그 장소에서 이미 부여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중요성을 주고 있다고 한다면, 현대 멘탈리티는 주어진 것을 부정하는 계기를 잃고 있다. 그리고 상실을 더 이상 없는 것이라며, “뭔가가 무엇이든 향락한다를 목표로 하고, 자신이 우회에 의한 그 어떤 손실도 겪지 않고 생각한 그대로 향락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를 향해 과시하는 듯한 도착적 표현이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다. 츠이키의 논의는, 라캉이 자본주의의 담론을 이론화함으로써 조명한 현대 문명의 길의 끝에, 지금 현재 보여왔던 것을 노출이라는 키워드로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의미에서 노출하라, 고 현대문명은 말한다21세기의 현 시점에서의, 우리의 시대의 문화 속의 편치 않음[문명 속의 불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결여를 기반으로 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욕망이나 향락, 섹슈얼리티는, 앞으로 어디로 향할까? 밀레르는 2011년 강의 단 하나뿐인 <일자>(l’Un-tout-seul)[각주:10]에서, 현대의 향락의 모습에 대한 대담한 방향전환을 제시했다. 우선 이 강의의 방향성을 요약한 인터뷰에서의 밀레르의 발언을 살펴보자.

 

라캉이 결론을 내린 것은, 낡은 모델이 확실하지 않게 되며, 섹슈얼리티가 융합적인 일자’(«Uu» fusionnel)로부터 단 하나뿐인 <일자>(Un-tout-seul)’로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에, 자신의 길이 있다! 각각에, 자신이 향락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라캉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자체애[자기애]라고 불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21세기의 일상생활의 일반 모델은 중독(addiction: 의존)입니다. ‘일자는 자신의 마약과 더불어 홀로 향락합니다, 그리고 모든 활동이 마약(drogue)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섹스, , 스마트폰, 페이스북.[각주:11] ***

 

인간의 기존의 섹슈얼리티가 남성과 여성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에로스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성관계의 부재의 시대의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결여를 포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포스트-성관계의 부재라고도 해야 할 섹슈얼리티가 출현하고 있다. 그 모델을, 밀레르는 프로이트의 자체애중독”, “마약같은 실로 자극적인 용어로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기하고 싶은 것이 노출하라, 고 현대문명은 말한다와 거의 동시기에 간행된, 치바 마사야의 너무 움직이지 마라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哲学)이다. 치바의 논의는, 지금까지의 들뢰즈 이해가 마이너리티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일자>로서 하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접속적 들뢰즈에 치우쳤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접속적 들뢰즈의 대극에 있으면서, 언제나 들뢰즈의 사고 속에 잠재하는 절단적 들뢰즈를 들뢰즈의 텍스트 안에서 끄집어내 보여준다. 치바가 취하는 입장은 이 두 가지 극단적인 들뢰즈 사이를 왕래하며, 그 두 가지 사이의 중간에 머물 것을 제창하는 것이다.

   å‹•ãã™ãŽã¦ã¯ã„けない: 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 (河出文庫)

 

헌데, 치바의 논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도 또한 셀프 엔조이먼트(자체애)’, ‘중독’, ‘마약이라는 키워드를, 고전적인 구조주의적 라캉(대략 50년대의 라캉 이론에 상당할 것이다)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장치로 등용한다는 것이다.

 

그림 3: 프로이트의 심적 장치


들뢰즈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생각하는 심적 시스템은, 욕망이 기억 흔적과 정서의 시스템에 대해 투여[투자]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마 유명한 프로이트의 심적 장치의 모델[그림 3]을 말하는 것이리라. 프로이트의 심적 장치는, 지각 말단에 있어서 외부세계로부터의 자극이 수용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 자극이 기억흔적으로서 몇 층에 걸쳐 다양하게 처리되고, 최종적으로 운동신경에 이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몇 층에 걸친 기억 흔적의 층의 일부가 무의식이다. 중요한 것은, 외부세계로부터 얻어진 유아기의 만족 체험의 기호가, 기억 흔적(시니피앙)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원초적인 만족 체험 그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으며, 결여(상실)를 안에 끌어안고 있다. 그 대신 이 결여를 추구하는 운동(욕망)이 무의식에 있어서 전개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욕망을 무의식에 있어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들뢰즈는 마약에는 욕망이 지각의 시스템을 직접 투자[투여]한다는 특수성이 있다고 한다. , 마약은 기억 흔적에 의해 구성되는 시스템, 즉 시니피앙에 의해 구성되는 프로이트=라캉적 무의식의 층을 단숨에 뛰어넘어, 욕망을 직접적으로 지각으로서 만족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각주:12] 그러니까 들뢰즈는 약물 분석을 정신분석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하는 것이다.

혹은, 치바가 주목하는 의존은 마치 아이가 한눈을 판 끝에 찾아낸 대상에 몰입하는 시야 협착적인 의존이다. 그것은 뛰어나게 비의지적인 것이며, 시니피앙의 연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과성을 비의미적으로 절단한다.[각주:13] 마약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기억 흔적(시니피앙)의 층을 통과하지 않는 것에 적극적인 의의를 찾아내는 논의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마약에 의해 생기는 사태가 정말로 무의식을 뛰어넘고 있는지 여부, 혹은 들뢰즈가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신분석에서는 욕동[충동]이나 향락이라고 불리는 것 아닌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해질 것이다. 또한 라캉파의 관점에서는, 치바가 말하는 비의미적 절단이 스키조 키즈처럼 모종의 내키는 대로, [의식이] 흐릿한 형태로 행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절단은, 우리의 신체에 더 이상 떼어낼 수 없는 듯한 형태로 새겨져 있는, 우리 각각의 향락의 고립의 증거는 아닐까? 그러나 결여를 기반으로 하는 섹슈얼리티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지평을 파악하기 위해, 현대 라캉파와 들뢰즈파의 양자가 마약’, ‘의존같은 은유를 사용하는 데에는 충분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5. 증상에서 생톰으로

앞 절에서 본 단 하나뿐인 <일자>” 개개인마다 고립된 향락의 방식 에 대한 주목은, 사실상 증상에 대한 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여기서는 현대 라캉파에 있어서의 증상론을, 증상에서 생톰으로라는 절개면을 통해 개괄해보자.

우선 확인해 두어야 하는 것은, 정신분석에서의 증상은, 증상이 메타포(은유)로서의 성질을 갖는다는 프로이트의 발견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의 히스테리 환자가 드러낸 컵으로 물을 못 마신다라는 증상은, “자신이 싫어하는 인물이 기르던 개에게 컵으로 물을 마시게 했다라는 부정적인 장면을 바꿔버린[치환한] 메타포가 된다. 증상은 지금 거기에 없는 것(싫어하는 인물이 행한 견디기 힘든 행동)을 대리하는 표현이며, 그 증상의 원인이 된 사건을 상징적 표현으로 가공한 것이다. 증상은, 그 증상을 가진 환자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한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증상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다면, 그 증상이 소실된다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라캉은 이런 증상의 원리를, 어떤 시니피앙이 다른 시니피앙에 의해 치환되는 메커니즘으로 재파악한 것이다.

이처럼 정신분석에서의 증상론은, 증상이 지닌(시니피앙의 치환에 의해 만들어진다) 메타포로서의 성질을 중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증상을 모조리 다 해석해도 여전히 증상이 소실하지 않는 사례를, 정신분석가들은 여러 차례 만나게 됐다. 증상의 시니피앙으로서의 측면을 침전시키는 것만으로는 증상이 소실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상은 시니피앙 이외의 측면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프로이트는 그런 의문에서 음성 치료 반응이나 죽음의 욕동[충동]같은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을 평생토록 계속했다. 이렇게 라캉의 말로 하면, 증상이 지닌 향락으로서의 측면이 부각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정신분석이 상당히 진행되어도, 사람이 자신의 증상을 놓으려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증상이 지닌 향락의 핵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증상의 메타포로서의 측면이 아니라, 향락으로서의 측면을 더 중시하는 논의가 생기게 됐다. 라캉 자신이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증상(symptôme)에서 생톰(sinthome)으로 그의 증상론을 전회시킨 것도 이런 이행에 상응한다. 또한 밀레르는 약 30년에 걸친 자신의 강의에서, 이 이행을 다양한 형태로 가다듬어왔다. 예를 들어, 생톰을 증상과 판타슴의 혼합물이라고 하는 1986-87년의 강의 기장을 이루는 것(記章をなすもの)[각주:14]에 있어서의 재정의는, 메타포로서의 증상과 그 증상 속에서 판타슴을 통해 주체가 은밀하게 얻고 있는 향락 사이의 혼합물로서 라캉의 생톰 개념을 재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1999년의 강의 분석 치료에 있어서의 실재계의 경험[각주:15]에서는, 증상이 지닌 이 두 측면은 의미작용의 도래신체의 사건의 두 가지로 재파악됐다. 이 정리는 메타포에 의해 의미작용을 발생시키는 증상과, 신체의 수준에서의 만족을 담당하는 증상이라는, 증상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을 나눠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게다가 2011년의 단 하나뿐인 <일자>에서는, 신체의 사건으로서의 생톰이 우선 처음에 있으며, 이 신체의 사건을 기점으로서 의미론적인 증상을 전개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식으로 양자의 관계가 위치지어졌다. , 프로이트적인, 메타포적인 의미를 지닌 증상은 모두, 그 뿌리에 향락의 단 하나뿐인 <일자>”, 즉 신체의 사건을 갖고 있다고 간주됐다. 모든 주체가 의존’, ‘마약하에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 고립된 향락이 주체 속에서 항상 반복되고, 주체가 스스로 떼어낼 수 없는 형태로 그 향락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 라캉파의 논의에서는, 이제 증상의 의미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환자에게 베푸는 것의 중요성은 떨어진다. 오히려 증상이 뛰어나게 신체에 관련되는 국면, 즉 순수한 향락의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에 분석가는 주목해야 한다고 간주된다. 다만, 그것은 시니피앙을 중시한 해석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시니피앙은 아직도 라캉파의 실천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적인 증상의 해석은 시니피앙에 의해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삭감하는 방향으로 시니피앙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 이미 어떤 증상에 대해 다른 의미를 덧붙이고, 의미의 포화상태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증상이 지닌 의미를 깎아 없애고, 모든 주체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무의미의 시니피앙(요소 현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신체 수준에서의 향락을 파악하는 것이 현대 라캉파의 해석에 있어서 내깃돈으로 걸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의 기법은, 1964년에 라캉 자신이 해석이란 주체에 있어서의 무의미의 핵을 추려내는[끄집어내는 것이다”(S11, p.226)라고 말했듯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라캉 이론 속에서 배태됐던 것이다.

밀레르는 이런 현대적 해석을 역방향의 해석(interprétation à l’envers)”이라고 부르고, 증상에 의미를 덧붙이는 순방향의 해석과는 구별한다.[각주:16] 이런 역방향의 해석이야말로 주체를 자신의 향락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현실계에 있어서의 신체의 사건을 취급할 수 있는 기법이다. 이 해석에 의해 꺼내지는 것은, 다른 누구와도 다른 주체에 고유한 향락의 모드, 단 하나뿐인 <일자>”라고 불리는 고립된 향락의 모습이며, 다른 시니피앙 S2로부터 격리된 단 하나뿐인 시니피앙 S1으로서의 요소 현상(phénomène élémentaire)이다.[각주:17] 이리하여 주체는 스스로에게 고유한 향락의 모드와 잘 해가는 것(savoir y faire)”, 혹은 향락의 모드를 변경할 가능성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밀레르가 말하듯이, 현대의 라캉파에게 증상을 읽는다는 것은 증상의 의미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상의 무의미를 읽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각주:18]

츠이키도 소개하고 있듯이, 1970년대 라캉에 의한 생톰개념의 도입 이후, 라캉파는 증상의 의미론’(증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독해하는 것)으로부터 어용론[화용론]’(증상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를 밝혀내는 것)으로의 변동shift”을 어떻게 이론화하는가에 전념했다. 그 결과, 위에서 서술한 다양한 논의가 산출됐던 것이다. 이 이론은 조이스 같은, 우리를 당혹으로 데려가는 전대미문의 에크리튀르를, 그의 생톰으로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로부터는, 창조성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6. 남성의 식에서 여성의 식으로

지금까지 상징계, 정신병, 섹슈얼리티, 증상이라는 각각의 관점에서 현대 라캉파의 논의를 소개했다. 물론 이것은 망라적이라는 것에는 매우 거리가 먼 소묘 정도의 것이지만, 현대 라캉파의 대체적인 방향성은 전달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영역에서의 라캉파의 이론의 전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 일련의 움직임은, 라캉이 세미나 20앙코르(1972-73)를 전후로 제시한 성별화의 식性別化”[그림 4]에서의, 남성의 도식에서 여성의 도식으로의 이행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림 4: 성별화의 식


확인하자. 라캉의 성별화의 식은, 남성의 식과 여성의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식의 발명에 의해, 단일의 예외에 의해 보편을 구축하고 안정화시키는 기존의 고전적 라캉이론은 남성의 식 속에 거두어지게 됐다. 남성의 식이란, 하나의 예외를 이용함으로써 모두(tout)’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논리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제시한 원-아버지의 신화에서는, 어떤 원시 부족에서 막강한 힘을 가졌던 원-아버지가 모든 여성을 소유했다고 여겨진다. 이 원-아버지는 부족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 거세되지 않으며(), 다른 모든 남성에 대해 예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외의 존재가 보편(‘모든 여성’, ‘모든 남성’)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다.[각주:19] 첨언하면, 아즈마 히로키가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른바 부정신학적인 라캉, 즉 단일한 결여=예외에 의해 상징 시스템 전체를 안정화시킨다는 라캉의 상(), 이 남성의 식으로 거의 수렴된다.

한편, 여성의 식은 그런 보편(‘모두’)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보편의 양화자量化子 가 부정되어 라고 기록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성의 식에서의 패러다임이 원-아버지-신화라면, 여성의 식에서의 그것은 돈 후안(Don Juan)의 전설이다. 라캉은 세미나 10불안(1962-63)에서 이미 돈 후안이 여성의 꿈이라고 언급하고,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향락의 모습에 주목했다. 앙코르의 여성의 식의 논의에서 돈 후안이 중요해지는 것은, 그가 여성들을 한 명 한 명(une par une) 다루기”(S20, p.15) 때문이다. 돈 후안은, 모든 여성을 소유하는 원-아버지처럼 여성을 하나의 집합으로서 움켜쥐고 에워싸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여성을 항상 새로운 플러스 1로서 취급한다. 즉 그에게 여성이란 모두가 아니다(pas tout)”, 모두라는 보편(집합)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 논리에서는 이미 보편을 성립시키기 위한 예외가 불필요해진다.[각주:20]

 pdf  Anxiety: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X

정신분석가 마리 엘렌느 브루스에 따르면, 전중기 라캉에서 후기 라캉으로의 이행은, 보편을 가능케 하는 남성의 식으로부터, 더 이상 보편이 불가능해지는 여성의 식으로의 이행으로 파악된다.

 

후기 라캉을 읽으면, 라캉이 (정관사 le, la가 붙은) 보편적인 것을 (부정관사인) ‘un, une’으로 점차 대체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이라는 것(l’homme), 여성이라는 것(la femme)이 어떤 남성(un homme), 어떤 여성(une femme), 어떤 해결법, 어떤 증상, 어떤 이름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 이행은, 완전하고 조직화된 클래스의 보편성으로부터 부정성(不定性), 비완전성으로 향한다. ‘le, la’, 정해진 집합을 참조하는 것이, 집합에 있어서의 외부인 하나의 점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라캉은 이 점에 관해 논리학을 원용한다. ‘le, la’을 사용하는 것은, 집합의 기능에 대해 예외를 이루는 한 가지 점을 존재하게 만든다. 앙코르의 이른바 성별화의 식의 표의 좌측 부분을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 식은 남성적 기능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의 귀결은 정신병은 더 이상 예외와의 관계에 있는 심적 조직화로서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각주:21]

 

후기 라캉은, 정관사를 가능케 하는 예외와 보편의 논리(남성의 식)로부터, 더 이상 정관사나 보편이 성립하지 않는 논리(여성의 식)로 이행한다. 후자의 논리에 있어서는, 보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정관사에 의해, 하나씩 열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 글에서 개괄한 사항을 잘 설명해줄 것이다. , <아버지>에 대해서는, 대문자로 적을 수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이름>(le Nom-du-Père)”으로부터 복수의 아버지의 이름(noms-du-père)”로의 이행이. 향락과 증상에 대해서는, 결여를 기반으로 한 섹슈얼리티/증상으로부터, 개인 각각에 특이적인 향락의 모드/생톰으로의 이행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브루스는 보통 정신병에 대해서도, 예외의 논리에서 예외가 성립하지 않은 논리로의 이행으로서 파악했다.

 

자크-알랭 밀레르가, 슈레버를 예로 들어 남다른 정신병이라고 부른 것을 거론해보자. 남다른 정신병은, 남다른 망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 망상은 어떤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는 장소에 상상계를 갖고 치료를 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이 경우, 주체는 스스로, 결여되어 있는 예외, 즉 결여되어 있는 명명하는 아버지라는 예외를 수육화하는 것에 헌신하고 있다. 이리하여 슈레버는 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 된다. 이 예외의 위치는, 우리가 남다른 정신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한다. Φx가 아닌 x가 한 가지 존재한다는 공리를 지탱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 최초의 가설은, 보통 정신병은 이런 예외를 원리로 하는 방법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보통 정신병에 있어서는, 환자는 상징적 조직화에 결여되어 있는 예외의 기능을 스스로 수육화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때래서 보통 정신병에서의 보통이란, 예외적으로가 아니라, 공통의, 범용한이라는 의미이며, 그것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이라는 표현에 있어서와 같은 의미이다.

 

슈레버 같은 정신병자는, 예외의 위치를 스스로 떠맡는다. , 그들은 원-아버지와 일체화하는 것이다. 한편, 보통 정신병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이 예외는 기능하지 않는다. 기괴한 망상 체계를 만들어내는 남다른 정신병으로부터, 커다란 비정상으로서는 두드러지지 않는 보통 정신병으로의 이행도 또한, 남성의 식에서 여성의 식으로의 이행과 관련지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사해둔다면, 치바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서 지적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생성변화론의 레토릭의 양면성[二面性], 단일한 X로의 수렴으로서의 <만물제동의 익명성>”복수의 x, y, z 라는 <구별 있는 익명성>”[각주:22]의 두 극으로의 분화는, 이 라캉의 남성의 식과 여성의 식의 각각의 논리와 아주 비슷하지 않는가?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여성으로의 생성변화, 정관사가 붙은 여성, 즉 슈레버 같은 신의 여자라는 예외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되는 것, 새로운 존재의 자세를 취하는 것”, “n개의 성이라는 형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현대 라캉파의 관점에서 다시금 후기 라캉 대 들뢰즈(=가타리)의 대결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각주:23] 이것은 너무 움직이지 마라, 똑같이 남성의 식(부정신학 시스템)과 여성의 식(우편=오배송 시스템)을 대치한 존재론적, 우편적의 후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줄 것이다.

그나저나, 이 형식상의 기묘한 수렴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각주:24]가 평했듯이, 치바의 논의가 라캉 중심사관에 서 있기 때문일까? 지금, 속단은 삼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의 문맥에서 생각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필자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남성의 식과 여성의 식이 반드시 양자택일적이 아니라, 일종의 평행세계(parallel worlds)처럼 작동하는 세계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의 감별 진단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정신병이다)”라는 입장이 양립하는 것이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관계에서 파악됐듯이, 아버지의 쇠퇴는 더 못난 아버지의 회귀와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증상이 지니는 메타포로서의 의미와, 증상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라는 의의를 동시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것들은 열린 물음으로서 있다.

 

 

 

  1. 프랑스의 라캉파는 여러 단체로 분열하고, 이 모든 것을 조감하듯이 논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다. 이 글에서 ‘현대 라캉파’라고 지칭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대의파(Ecole de la Cause freudienne), 특히 자크 알랭 밀레르와 그 주변 논자들의 논의이다. [본문으로]
  2. Miller, J-. A., L’Autre qui n’existe pas et ses comités d’éthique, La Cause freudienne, no 35, 7-20, 1997. [본문으로]
  3. 라캉의 인용에 대해서는, 각주가 번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에크리󰡕에 관해서는 E 기호 뒤에 Seuil판의 쪽수를 적는다. 강의록인 󰡔세미나󰡕에 관해서는 이미 간행된 권에 대해서는 S 기호 뒤에 권수와 Seuil판의 쪽수를 적는다. 그 이외의 텍스트에 대해서는 주에 표시한다. [본문으로]
  4. 斎藤環, 『メディアは存在しない󰡕, NTT出版, 2007年. [본문으로]
  5. Miller, J.-A., Lacan disait que les femmes étaient les meilleures psychanalystes. Et aussi les pires, Lacan Quotidien, no205, 2013. [본문으로]
  6. Miller, J.-A., Effet retour sur la psychose ordinaire, Quarto, no94-95, 42-47, 2009. [본문으로]
  7. 밀레르에 따르면 이런 외부성의 특징은 라캉이 1958년에 이미 “삶의 감각이라는, 주체에게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생기는 부조화”(E558)라고 부른 것에 대응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8. Svolos, T., ‘Ordinary Psychosis’, Psychoanalytical Notebook, n。19, 79-82, 2008. [본문으로]
  9. 감별진단에 관한 라캉파의 이론 변천은 다음의 논문에서 정리했다. 松本卓也, 「ラカン派の精神病硏究───「精神病の鑑別診断」から「普通精神病」へ」, 『思想󰡕, 2012년 8월호, 25-44頁. [본문으로]
  10. Miller, J.-A., L’Un-tout-seul. Cours de 2011(indédit). [본문으로]
  11. Jacques-Alain Miller: les prophéties de Lacan. Le point. fr, 18/08/2011. [본문으로]
  12. 千葉雅也,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 河出書房新社, 2013年, 75-6頁. [본문으로]
  13. 앞의 책, 36頁. [본문으로]
  14. Miller, J.-A., Le sinthome, un mixte de symptôme et fantasme. La Cause freudiennie, no 39, 7-17, 1998. [본문으로]
  15. Miller, J.-A., Biologie lacanienne et événement de corps. La Cause freudienne, no 44, 7-59, 2000. [본문으로]
  16. Miller, J.-A,, L’interprétation à l’envers. La Cause freudienne, no 32, 7-14, 1996. [본문으로]
  17. 이런 다른 것으로부터 고립된 향락으로서의 “단 하나뿐인 <일자>”, 다른 것으로부터 떼어내진 시니피앙 S1의 모습은, 치바가 말하는 “비의미적 절단”과 비교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바로 인과성의 틈새이기 때문이다. 다만 치바가 들뢰즈로부터 끌어낸 세계관이 “전면적으로 인과적이지 않은, 도처에 절단이, 비의미적 절단이 달리고 있는 세계사·자연사의 철학”(278頁, 강조는 인용자)인 한에서, 각각의 주체에 있어서의 비의미적 절단을 하나라고 하는 라캉파와는 차이화되어야 한다. [본문으로]
  18. Miller, J.-A., Lire un symptôme. Mental, no 26, 49-58, 221. [본문으로]
  19. 이 논의에서는 세계에는 존재라는 단 하나의 영원불변에 정지한 일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플로티누스의 일자(토 헨) 개념이 참조되고 있다. [본문으로]
  20. 일찍이 프로이트는, 리비도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남성적 리비도라고 말했다. 즉, 팔루스(페니스)에 의해 향락을 얻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또한 페니스 선망을 통해 남성의 성기관과 관련됨으로써 향락을 얻는다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던 것이다. 라캉은 성별화의 식에 의해 이 프로이트의 생각을 갱신했다. 즉, 남성은 평소에는 팔루스 향락밖에 얻을 수 없으나, 여성은 팔루스의 향락(페니스 선망)뿐 아니라, 팔루스 향락이 아닌 ‘<다른 것>의 향락’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본문으로]
  21. Brousse, M.-H., La psychose ordinaire à la lumière de la théorie lacanienne du discours, Quarto, no 94-95, 10-15, 2009. [본문으로]
  22. 千葉雅也, 前掲書, 六七頁. [본문으로]
  23. 그 단서는 다음의 논고에서 제시됐다. 松本卓也, 「人はみな妄想する──ガタリと後期ラカンについてのエチュ—ド」, 󰡔現代思想󰡕, 2013년 6월호, 113-127頁. [본문으로]
  24. 小泉義之, 「書評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 󰡔文藝󰡕, 2013년 겨울호, 河出書房新社, 380頁.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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