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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현대사상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현대사상, 20131월호

 

이탈리아 이론

패션이나 요리만이 아니다. 세계의 사상계에서도 이탈리아는 오늘날 상당히 붐이다. 저작의 대부분이 세계의 주요 언어로 번역된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과 안토니오 네그리(1933년 생)는 그 대표라고도 말해도 좋은 존재일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프랑스 이론을 대신하여 이탈리아 이론이 대두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생각되는 것은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나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철학의 거물들이 차례차례 세상을 떠난 후, 상대적으로 이탈리아 사상가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는 사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시간의 우연이고, 외재적 원인일 뿐이다. 이탈리아에 내재적인 더 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래 이탈리아의 사상은 전통적으로, 국민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큰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영국이나 프랑스나 독일 등과의 현저한 차이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많든 적든 국가의 형성이나 성장과 발맞춰 철학이나 미학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존 로크든, 르네 데카르트든, 헤겔이든,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원래 통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윽고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국가통일운동)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까지는 많은 도시국가가 즐비했으며, 더욱이 여기에 바티칸 세력이 가담했으며, 이와 동시에 반복적으로 유럽 열강의 개입을 경험했다는 경위가 있다. 이탈리아의 사상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에 끊임없이 노출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삶과 정치는 늘 이탈리아 철학의 중심적 주제이길 계속했다. ‘주체진리등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보다도 삶과 역사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 교회가 이단이라고 선고한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를 떠올려 보면 좋다. 이것 이전에도,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의 경쟁 속에서 가다듬어진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독자적인 정치철학이 있다. 좀 더 나중 시대가 되면,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의 역사철학이나 언어철학도 국민국가의 형성과 병행하는 게 아니다. 이와 같은 이탈리아적 전통의 특이성을 빼고서는 아감벤이나 네그리의 사상을 파악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오늘날 정치나 경제 등 모든 국면에서 국민국가의 틀이 사실상 약해지거나 붕괴되는 상황 아래서, 이탈리아의 사상이 갑작스레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면,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래에서는 이탈리아적 사유가 더욱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명정치와 종교(기독교)와 예술을 둘러싼 주제로 논의를 좁혀, 최근 2-30년의 동향을 소묘해 보자.

 

아감벤 효과

특히 최근 십 수년 동안 아감벤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특별하다. 한 미국학자는 이를 아감벤 효과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이다. 실제로 1990년대에는 본국인 이탈리아의 대형 서점에 들어가 봐도, 아감벤의 저서를 보게 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그 시점에서는 이미 몇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도 말이다.

이 상황을 단번에 바꾼 것이 1995년에 출판된 호모 사케르이다. 미셸 푸코에서 유래한 생명정치의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 책은 몇 년 사이에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마치 묵시록적인 예언서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규칙화[일상화]되는 예외상태, ‘벌거벗은 생명’, 근대정치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 등, 호모 사케르에서 계보학적으로 검증된 테제가 특히 9·11 이후의 세계정세 속에서 갑작스레 현실감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관타나모 수감자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이든, 테러리즘과의 싸움이라는 대의명분이든, 아감벤은 흡사 현대의 예언자라는 것이다. 사실,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라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사(2007327일자)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아감벤의 이름을 특별히 거론하고, 현대의 호모 사케르살아 있는 죽은 자의 기사(騎士)를 언급했던 것이다.

호모 사케르가 나온 지 3년 후에 출판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역시 찬반양론을 아울러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아감벤은 푸코(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미결로 남긴 문제, 생명정치는 무엇 때문에 죽음정치로 전도되는가에 도전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 전도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의 것일 터인 을 의학적이고 생물학적, 정치적이고 법학적인 장치에 의해 구획하려고 하는 한, 삶의 서열화와 선별이 행해지는 것은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치즘에서 그것은 더욱 현저한 형태를 띠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이 선별은 더 표면화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런 장치를 중지시키고 장치의 신성함을 파헤치는 것, 무위신성모독(세속화, profanation)이라는 그의 사상의 근거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아감벤의 이런 철학적 몸짓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그의 궁극적 메시지는 정치적 허무주의이다”(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그는 정치적 사명 없는 사상가(파올로 비르노). 역설이나 아포리아나 과장 등의 수사를 부려서 정치를 미학화[심미화]하고 있다(도미니크 라카프라) 등의 어조이다. 네그리도 분열된 두 명의 아감벤을 진단한다. 한편으로 문헌학과 언어학적 분석의 작업에 전념함으로서 존재의 힘에 도달하는아감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실존적이고 운명론적인 무서운 그림자 속을 헤매고 있는아감벤이 있다. 두 얼굴의 야누스, 그것이 아감벤의 정체라는 것이다.

아마 이런 비판들은, 큰 틀에서는 그다지 빗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또한 그의 사상이 지닌 큰 매력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일화와 고정성을 일부러 기피하는 아감벤. 부정성과 긍정성의 문턱에서 놀고 있는 아감벤. 두 개의, 경우에 따라서는 복수의 가면(페르소나)을 교묘하게 골라 쓰는 아감벤.

2000년의 남은 때 : 바울 강의이후, 그의 사유는 더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 전회라고 명명하는데, 2007년의 왕국과 영광이나 2009년의 벌거벗음에서 파헤쳐지는 것은 정치나 법이나 미의식 등, 다양한 국면에서 현대에도 여전히, 신학이 얼마나 환속화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게다가 아감벤의 사유는 환속화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속화[신성모독]’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주권의 패러다임이 신의 초월성의 환속화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에 머무는 한, 그 권력 자체는 [손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벤야민)와 사회 전반의 스펙터클화”(기 드보르)가 점점 더 진행되는 현대, 환속화신성화가 거의 구별되지 않고 있는 현대에서 세속화[신성모독]’이 매우 긴요한 과제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수도회의 이념에 관해 논한 최근작인 극빈(2011)에서 아감벤은 전부터 그가 홀렸던 아이디어, 소유에서 사용으로, ‘풍요에서 가난으로의 발상의 전환을 훨씬 더 밀고 나간다. 근대의 정치와 경제를 지탱하던 번영과 이익 추구, 소유와 사유(私有)의 사상이 철저하게 상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의 경우

그런데 푸코에게서 물려받은 생명정치의 사유가 아감벤에게서 독자적으로 전개됐다면, 아감벤과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상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또 한 명의 존재가 있다. 나폴리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1950년생). 그의 저서 역시 최근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논문이나 강연을 모은 2008년의 정치적인 것의 용어, 인격(페르소나)’이라는 장치를 계보학적으로 답사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한 2009년의 3인칭의 철학[비정치적인 것의 범주들]도 출판되어 있다.

    

에스포지토의 사상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명정치공동체면역의 문제계로 접속시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성과는 토리노의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차례대로 발표되었던 농밀한 3부작, 코무니타스 : 그 기원과 운명(1999), 이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2002), 비오스 : 생명정치와 철학(2004)으로 결실을 맺었다.

     


우선 에스포지토는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고 제안한다. 가령 공동체는 지금까지 귀속의식이나 동료의식, 동일성이나 유사성 등의 관점에서 사고됐지만, 어원적으로는 오히려 반대의 의미라고 한다. 라틴어의 코무니타스‘~와 더불어/함께라는 의미의 증여나 바침혹은 의무나 부담을 의미하는 무누스로 이루어진 말로, 그 때문에 원래는 귀속이나 소유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내가 당신에게 짊어져야 할 어떤 의무를, 즉 잠재적인 부재나 결여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개념은 전통적으로 자기 동일적인 주체의 범주에서 기초를 찾고, 그것에 의해 지켜지고 가다듬어졌다. 에스포지토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집단의 형식으로 확장된 개체로서 공동체를 파악하는 한, 이 공동체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고유성이나 소유권(영토, 민족, 언어, 문화, 종교 등)에 갇힌 개체를 지향하게 된다. 민주주의, 자유, 주권 등 서양의 정치적 전통의 주요 개념도 대부분의 경우 이 관점에서 논해져왔다.

하지만 코무니타스란 본래 집단적인 귀속의 경계 속에 가둬둠으로써 주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기의 바깥으로 주체를 내던지고, 타자와의 접촉이나 전염에 주체를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양의 근대는 타자나 외부에 대해 점점 자신을 닫고, 자기 면역화를 도모하려는 경향을 강화해 왔다고 나폴리의 철학자는 진단한다. , 면역 또는 면역화는 서양에서 문명화의 형식 자체가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누스에 접두사 이 붙은 게 코무니타스라면, ‘면역의 어원이 된 이무니타스는 마찬가지로 무누스에 부정의 접두사 이 붙은 것이다. , 타자에 대한 의무나 증여에서 맺어지는 것이 본래의 코무니타스라면, 반대로 이무니타스는 그런 의무나 부담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면제하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이무니타스는 위해를 가할 위험이 있는 모든 외적인 요소에 대한 방어와 공격이라는 형태로, 정치적·의학적으로 발동된다.

물론 면역체계는 필수적이며, 이것 없이는 개인의 신체도 사회 조직도 존속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면역화가 자기파괴를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9·11 이후, 더 큰 안심과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안전(안보, security) 전략이 과도하게 작동하고, 더 큰 통제가 개입하고 있다. 한편으로 도처에서 보급된 감시카메라가, 다른 한편으로 점점 고도화되는 첨단의료 및 의약품이 우리 삶의 양태를 규제하고 관리하며 공통의 행복이라는 아이기스(Aigis)의 방패 아래서 형성된 합의(consensus)가 자유와 억압, 위험과 안전 사이의 경계를 점점 더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상반되는 힘으로서의 코무니타스이무니타스’, 이것들 사이에 끼어있듯이 전개되는 것이 에스포지토에게서의 생명정치의 사유이다. 물론 생명정치는 한편으로 생명을 보호하고 보증하고 증강시킨다는 역할을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로 푸코가 암시했듯이, 죽음의 정치로 뒤집혀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감벤은 이 뒤집힘 혹은 배반을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필연으로 봤다. 이것에 대해 네그리가 생명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아감벤 같은 비관론과 네그리 같은 다행증(多幸症, euphoria), 에스포지토가 극복하려 계획하는 것이 이 이율배반이다. 왜 이런 양극화가 생겨난 것일까? 그에 따르면, 출발점인 푸코에게 하나의 원인이 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 생명과 정치는 두 개의 상이한 항으로 우선 각각 전제되고, 그 후에는 외재적으로 묶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생명정치는 생명에 대한 주권의 과잉 행사로 간주되거나(아감벤), 아니면 주권에 대한 생명의 과잉 잠재력으로 간주되는(네그리) ,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된다. 이에 대해 에스포지토가 제기하는 것은 생명과 정치가 특출나게 내재적인 관계에 있다는 관점이며, 이를 위해 중요한 핵심 개념이 되는 게 생물학적이고 정치적인 면역이라는 것이다.

생명정치의 계보를 차근차근 더듬어간 그의 책 제목으로 선택된 것이 벌거벗은 생명내지 생물학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조에가 아니라 이와 반대로 사회적인 삶을 뜻하는 비오스라는 말인 것은 그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다. 아감벤은 비오스를 조에에 새겨넣으려 하는 과정 속에서 생명정치의 문턱을 봤지만,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조에는 비오스의 내적인 차이로 간주되어야 한다. 혹은 이미 벌써 비오스화되지 않은 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인 에스포지토라는 이탈리아어에는 또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가 있다. 나아가 에스포지토노출된’, ‘부채를 진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름이 실체를 드러낸다고나 할까, 多孔性’(벤야민)의 마을 나폴리의 철학자이자 버려진 아이는 면역화에 맞서고 자신(의 사고)을 외부로 드러내려 시도한다. 그의 사유에 대해 앞으로도 더욱 더 눈을 뗄 수 없다.

 

기독교를 둘러싼 물음

생명정치공동체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논의가 재연되는 듯한 것은 종교(특히 기독교)를 둘러싼 문제계이다. 아무리 신이 죽었다고 해도, 가톨릭의 대국(大國)이자 바티칸의 근거지라는 지정학적인 요인이 거기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 포퓰리즘적 교회회귀,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원리주의의 대두라는 상황을 앞에 두고, 교리적이지도 강권적이지도 종파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부한 보편주의나 세계교회주의(Ecumenism)도 아닌 새로운 종교철학이 요구되고 있다. 아감벤에 의한 신학적 전회, 그 성격을 달리하긴 하지만 크게는 이런 문맥에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약한 사유1980년대에 씩씩하게 등장한 쟌니 바티모(1936년 생)도 최근 들어 기독교에 대해 거듭 발언하고 있다. 그것은 가령 기독교 이후 : 비종교적인 기독교 사상을 위하여(2002), 나아가 리차드 로티와 공저한 종교의 미래 : 연대, 자애, 아이러니(2005) 등과 같은 저서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Vattimo, Gianni]のAfter Christianity (Italian Academy Lectures)                [Vattimo, Gianni, Rorty, Richard]のThe Future of Religion: Richard Rorty and Gianni Vattimo

니체와 하이데거 연구에서 출발한 바티모는 최근의 종교회귀 현상 속에 필연성과 위험성의 양 측면이 결합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가령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발달에 의해, 특히 생명윤리의 분야에서 합리적 사고나 논리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 삶과 죽음, 자기결정과 운명 사이의 헤라클레스의 기둥 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지 여부는 제쳐놓고) 초월적인 것의 존재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신비주의나 독단적 신앙이 몰래 숨어들어올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현대에서 종교의 이런 야누스성은 더 나아가 익명성의 그늘로 쫓겨났던 사회집단이 종교의 우산 밑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경우에서도 그 얼굴을 내비친다. 종교를 둘러싼 이런 상황을 철학은 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고, 종교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바티모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더 이상 무신론자라고 잘난 체 해서는 안 된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조차, 소박하게 신의 부재 또는 무신론이 선고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이 있는 곳에, 설령 그것이 신의 부재라고 하더라도, 늘 형이상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티모는 교회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비판을 되풀이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제안한다. 흡사 예술의 운명에 있어서 부정하든 긍정하든 미술관이라는 제도와의 모종의 대결이 불가결하듯이, 기독교는 교회라는 제도와 이후에도 줄곧 함께 가야 한다[대결해야 한다].

기독교를 둘러싼 물음과 관련해 여기서 꼭 거론하고 싶은 사상가가 또 한 명 있다. 세르조 퀸초(Sergio Quinzio, 1927-96)이다. 바티모나 마씨모 카차리(1944년 생) , 기독교의 문제를 회피하려 들지 않는 많은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이단의 개종자이다. 그의 사상은 신의 패배를 정면에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강제수용소의 홀로코스트로 귀결되었던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패배의 역사, 신의 침묵의 역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다시금 현실도피와 자기정당화의 폭력에 빠져버릴, 그 심각한 위기의식이 퀸초의 강인하고 진지한 사고를 떠받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 중에는 의문을 가진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면서도 그는 왜 이렇게까지 신앙이나 구원의 문제를 부정적으로 사고하려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이 현대의 예언자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신앙과 비신앙,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사이에는 절대적인 경계선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가 십자가 위에서 신에 대한 불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을 무심코 누설했듯이, 신앙의 핵심에는 불신이 있으며, 신앙이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사이의 갈등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앙은 스스로에게 안주하고 충족해버리며, 아무런 의심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앙의 폭력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오늘날 퀸초의 사유가 새로운 현실성을 갖고 울려 퍼진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적 원리주의가 정치나 외교의 도처에서 폭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이 중요한 사상가에 관해서는 내가 쓴 이탈리아 현대사상으로의 초대(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講談社選書メチェ, 2008년)에서 비교적 소상히 소개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참조하기 바란다).

 

예술과 미/아름다움의 사상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미학사상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 나라는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예술의 나라다. 이것은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미학 혹은 아이스테시스(aisthesis)’라는 그리스어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감성의 학은 바로 이탈리아의 사상의 존재중명 그 자체라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이후로 얘기를 한정하더라도, 시학부터 정치학까지, 모든 앎을 횡단하는 베네딕트 크로체(1866-1952)의 사상의 출발점은 다름 아니라 미학에 있다. 현대에서는 문학부터 철학까지, 움베르토 에코(1932년 생)가 이런 이탈리아적 전통의 훌륭한 계승자이다.

하지만 이뿐이 아니다. 아감벤도 카차리도 영역 횡단적인 사유의 출발점은 바로 미학에 있다. 아감벤의 1970년대의 첫 저작인 내용 없는 인간, 이어서 1977년의 행간은 무엇보다 우선 미학 내지 시학의 책인데, 이미 이 책들에는 철학이나 신학은 물론이고 정치와 법 등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문제계가 다양한 형태로 선취되고 있다(자세한 것은 내가 쓴 아감벤 독해(アガンべ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여기서 더 나아가 다루고 싶은 것은 수수께끼무기적인 것의 섹스어필등의 저서로 알려진 마리오 페르니올라(1941년 생)이다. 아감벤과 거의 동세대로, 1960년대에 서로 교우관계가 있었다고 두 사람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더욱이 에코와 바티모와 함께 같은 토리노 대학에서 이색적인 미학자 루이지 파레이존(1918-91)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경력을 갖고 있다. 이 두 명과 마찬가지로, 페르니올라도 미학을 전문으로 하면서 예술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종교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적극적이고 현실적인(actual) 발언과 저작을 거듭하고 있다.

페르니올라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통과일 것이다. 이탈리아어로 트란지토(trànsito)’, 영어의 트랜지트(transit)’에 해당된다. 비행기를 연결해서 갈아타는 것을 곧바로 연상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단어에는 또한 저승으로 떠났다’, 죽음의 의미도 있다. 일상적으로도 사용되는 말을 굳이 불러냄으로써 이 미학자가 모색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과도,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극복과도 상이한 제3의 길이다. 문제는 종합도 극복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동일물에서 동일물로의 이동, 통과인 것이다.

통과는 결코 수직축의 방향 예를 들어 신이나 ‘(대문자) 타자으로 이뤄지는 것도, 대립물의 종합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수평의 방향으로 미끄러지듯이(slide) 이루어진다. 물론 그 방향성은 일정한 것이 아니며, 갈아타기나 궤도수정도 가능하다. ‘통과의 궁극에 있는 죽음도 위쪽(천국)이나 아래쪽(지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과와 똑같은 평면 위에서 일어난다. 그 때문에 통과란 일상의 자잘한 죽음의 준비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통과는 단숨에 한꺼번에 다른 것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속에서 변화와 비동일성으로 향하는 문을 언제나 열어준다. 감성과 상상력 그 때문에 예술 의 풍부한 가능성은, 초월성이나 과격성 속에서가 아니라 자잘한 통과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 이제 붓을 놓을 때가 왔다. 어쩌면 이탈리아인들은 우리와는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과 마주치면 자주 그렇게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그들이 시간에 느슨(loose)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컨대 많은 미국인이나, 그리고 이제는 우리 일본인도 대부분 그렇듯이, 오로지 현재와 미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그들에게 현재라는 시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바르부르크 식으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태초 이후의 기억의 흔적이, 다양한 형태로 그리고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의 신체 자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로마라는 마을이, 바흐친이 말하는 크로노토프(xpohotoll, chronotope)를 방불케 하는, 복수(複數)의 시공을 다성적(polyphonic, 多聲的)으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에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크로닉(시대착오)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 사상의 계속된 특징이다. 현재성(actualité)은 아나크로닉 때문에 발휘되는 것이다. 이런 기묘한 역설에 아마 이탈리아적 다이몬과 그 부산물인 이 나라의 현대사상의 최대의 특징과 매력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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