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읽기


atプラス 15, 2013년 2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가라타니 고진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 미번역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민주주의의 이름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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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3/3)

      デモクラシーからイソノミアへ―自由―民主主義を乗り越える哲学

가라타니 고진 고쿠분 고이치로

(2012년 12월 6太田出版会議案にて)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의 이소노미아

고쿠분 : 가라타니 씨는 이 책에서 이소노미아=타운십의 존립은 내적 및 외적 조건에 의해 존립한다. 따라서 그런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 내지 변질되어 버린다”(같은 책, 47)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동 가능한 프론티어가 있고, 상공업이 발달하고 주위에 이소노미아=타운십을 위협하는 국가가 없는 것 등이죠(같은 책 47).

   이소노미아라는 것이 이처럼 매우 한정된 역사적 조건에서만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목표로 한다고는 할 수 없는 셈이죠. 그러면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만 남아 있다는 것인가요?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가라타니 : 이소노미아가 매우 한정된 역사적 조건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빌론 유수 시기의 유대인 사회에도 해당됩니다. 그때에는 제사장·율법학자의 지배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소노미아적 사회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수로부터 해방되자마자, 곧바로 제사장·율법학자가 지배하는 집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소노미아 같은 상태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며, 향후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 아니라, 훨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계사의 구조에서 교환양식 D를 교환양식 A의 고차원에서의 회귀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경우 몇 가지 주의할 게 있습니다. 첫째, 교환양식 A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호혜성 원리는 정주하여 부의 격차가 생겼을 때, “그것은 좋지 않아, 모두와 나누자라고 상담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맞은 편에서 왔습니다. 증여의 명령은 정령과 같은 힘에 의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환양식 D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하다, 훌륭하기 때문에, 해보자고 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맞은 편으로부터 강박적으로 옵니다. 말하자면, 신의 힘입니다. 교환양식 D를 보편종교라는 관점에서 생각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물론 교환양식 D, 즉 종교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철학의 기원에서는 그것을 철학에 있어서 생각하려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D가 이쪽의 소망과 의지에 의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D의 도래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맑스도 공산주의에 관해 그렇게 생각했다고 봅니다. 맑스는 미래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오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설계한 것과 같은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확실히 이소노미아라는 것은 이것이 이소노미아이다라고 지목할 수는 없으며, 만일 향후 이소노미아가 있다고 해도, “혹시 저게 이소노미아였는지도 모른다라는 식으로, 사후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가라타니 씨는 철학의 기원에서도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오니아라는 억압된 것의 회귀였다고 쓰고 있죠.

 

가라타니 :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이몬(정령)으로부터의 신호를 따른 결과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배후에 있는 이중 세계, 공인과 사인을 나눈 계급대립을 부정하며, “사인(=자유)이면서도 공적(=평등)이다라는 이소노미아의 원리를 들여왔습니다. 그것에 의해 그는 재판을 받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지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사실은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웃음).

 

고쿠분 : 철학의 기원의 마지막 주(5장 주38)에서 데리다의 탈구축을 소크라테스적인 실천이라고 쓰셨잖아요? 저는 2000~05년까지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고, 2004년에 데리다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수업을 받았는데요, 그때 느낀 것은 역시 그는 매우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 그렇군요. 또 한 가지, 제가 거기서 언급했던 것은 푸코의 최후의 강의(진실의 용기)입니다. 거기서 푸코는 소크라테스를 파르레시아(진실을 말하기)에 대한 용기를 지닌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각각의 동기가 다르지만, 데리다나 푸코가 소크라테스로 향했다는 것은 제게 아주 든든한 일입니다(웃음).

 

고쿠분 : 가령 이오니아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철학의 역사 속에서 소수자적인 것으로서 있으면서도, 그러나 단속적으로 끈질기게 출현하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르다노 브루노나 스피노자는 그렇고, 아마 한 시기의 셀링도 그렇죠. 나중에는 들뢰즈. 데리다와 푸코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는 것은, 철학사 속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망각할 수도 없으며, 왠지 어금니에 계속 걸려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 전문인 스피노자가 바로 그렇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유는 몇 번이나 살펴보더라도, 아무래도 철학은 스피노자의 일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근대 철학 속에다 그를 잘 자리매김 할 장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스피노자에 대해 강의를 자주 하는데, 스피노자의 사고방식을 들으면 모두 놀랍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 사유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질문을 받습니다만, 저도 언제나 어디서 왔는지를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것을 이오니아적인 것의 회귀로서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 이 책에다 썼는데, 스피노자는 신인동형론을 비판하고 만약 삼각형이 입을 연다면, 신은 뛰어난 의미에서 삼각형적일 것이다라고 비아냥댑니다. 이것은 이오니아의 크세노파네스가 말했던 만일 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을 갖고 있다면, 혹은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인간들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면, 말들은 말들과 비슷한 신의 모습을, 소들은 소와 비슷한 신의 모습을 그리고, 각자가 자신들이 지닌 모습과 같은 몸을 만들 것이다라고 야유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오니아 사람들은 신들을 단순히 부정했다고 일컬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자는 유일신이라는 것을 근저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말했다고 해도, 신의 부정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곳이 스피노자와 평행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쿠분 : 역시 신을 갖지 않고 있지 않으면 신을 부정할 수 없다는 역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탐구 2무렵의 가라타니 씨는 스피노자의 무한의 이야기를 강조했습니다만, 이것을 이오니아의 이야기로 연결하면, ‘무한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사고방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장에서도 그런 생각이 발견됩니다만,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자연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죠.

 

가라타니 : 이오니아 자연 철학에 관해서는 모두 그런 견해를 갖고 있더군요. 단순한 자연학이라고 생각되고 있고, 윤리나 자기의 문제와도 관련된 사회철학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더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오니아 자연 철학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단순히 이오니아 자연철학은 신들을 부정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식에서 신들을 부정했느냐는 문제는 생각하고 있지 않더군요.

 

 

철학과 정치

고쿠분 : 얘기를 바꾸겠습니다만, 철학의 기원에서 제시된 소피스트 상()도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소피스트라고 하면 모두, 단순히 심술궂고 싫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라타니 씨는 전혀 다른 소피스트 상을 내놨습니다. 아테네에 의해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정복된 후에, 시민권을 갖지 못한 외국인들이 소피스트가 됐습니다.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정치적인 변론기술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정치와 거리를 두는 형태로만 폴리스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해서도 그런데, 그는 자주 대중을 멸시하는 귀족주의자라고 여겨집니다. 실은 저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한 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이 국가동굴의 비유에서 말하는, 지상으로 나와 다시금 동굴(민중의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철학자들의 전형이 헤라클레이토스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가라타니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헤라클레이토스가 살았던 당시의 에페소스의 정치사회 상황을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헤라클레이토스 상이 나타납니다. 그 당시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이 페르시아 정복에 대해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에페소스의 민중은 정복을 감수했고 예종 속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민중을 매도한 맥락에는 그런 사회배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모든 것의 왕이다”(단장 53)라는 그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라타니 : 나는 소피스트의 기분을 조금 알겠더군요(웃음). 저는 미국에서 오래 가르쳤는데요, 미국에 있는 외국의 지식인은 소피스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간 것은 1975년으로, 그 때 폴 드 만과 서로 알게 됐습니다. 또 드 만을 통해 데리다 등과도 알게 됐습니다. 이른바 예일학파는 이후 미국 전체의 지적 세계를 석권했는데요, 드 만의 사후, 곧바로 그가 스캔들에 의해 매장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절감한 적이 있습니다. 드 만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지만, 어차피 외국인입니다. 미국인에게는 없는 지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애지중지되지만, 그것이 어떤 선을 넘으면, 크게 혼쭐이 납니다. 아테네에 있던 소피스트도 그랬습니다. 그럼, 왜 그들은 아테네로 왔을까요? 그것은 아테네가 헤게모니 국가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있던 폴리스에서는 충분한 활동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드 만이든, 데리다든, 그들이 미국에 온 것은 미국이 다양한 의미에서 중심적이게 됐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도 그렇습니다. 맑스가 런던에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일테죠. 그는 귀국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습니다. 맑스도 영국에서의 정치활동은 신중하게 했습니다. 외국에서 온 지식인들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로 온 소피스트도 그와 똑같은 것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정치적(political)이라는 것을 폴리스적이라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견유파나 스토아 학파의 단계에서 철학은 폴리스에서 벗어나고, 개인주의적인 것이 됩니다. 현재도 철학이라고 하면 그런 이미지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적·자의식적으로 묻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폴리스들이 무화되고 있는 상황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것(폴리스적인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 : 마지막으로 시사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철학의 기원에서 소크라테스가 아고라(광장)에서 사람들과 문답하는 모습은 이오니아의 사상과 정치를 아테네(광장)에서 회복하려 한 실천이었다고 쓰셨습니다. 이 모습은 현재 탈핵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위나 광장에서의 집회를 방불케 하는데요, 이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라타니 : 저는 처음에 말했듯이, 20111월에 인도로 가서 철학의 기원에 대해 구상을 다졌는데요, 얼마 후 311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4월부터 탈원전 시위에 나가게 됐습니다. 이 책의 토대가 되는 잡지 연재 논문은 시위하러 가면서 쓴 거예요. 하지만 논문과 시위가 직접 결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20121월에 오사와 마사치(大澤真幸)문학계소크라테스가 광장에 나가듯이 가라타니 고진은 시위를 하러 가다라는 에세이를 썼습니다.

   이것을 읽고 정말로 생각했는데요, 제 자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실감했던 것은 오히려 20126, 총리관저국회 앞에서의 집회가 시작됐을 때부터입니다. 의회도 시위집회도 영어로 말하면 어셈블리이죠. 그래서 국회 앞에서의 집회라는 것은 거기에서 두 개의 어셈블리가 대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회에도 어셈블리가 있겠지만 이쪽에도 어셈블리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정한 어셈블리인지는 명백하죠. 실제로 국회 측에서 이쪽의 어셈블리에 인사하러 왔습니다(웃음).

   아테네의 경우 민회라는 어셈블리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노예, 여성, 외국인은 민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다는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시기입니다. 이 민회에 의한 지배가 민주주의(다수자 지배)입니다. 그에 반해, 아고라(광장)에는 누구든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이소노미아(무지배)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일을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다 쓰고 난 후에, 아니 오히려, 이듬해의 국회 앞의 집회에서 그것을 실감했습니다. 이런 어셈블리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일어났어요. 원래 지진원전사고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말해도, 이것뿐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맞은 편에서 강박적으로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까지 시위에 관해 몇 번인가 썼습니다만, 이론에서 시위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아무리 설득해도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시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래했다면, 제대로 그것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쿠분 : 저는 국회 앞의 모임을 봤을 때, “, 21세기의 일본은 어떻게 될까라고 지금까지 모두가 다양하게 상상했지만, 지금 여기에 실제의 21세기의 일본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 시위는 과거 일본의 질서 중에서 좋아하는 곳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꽤 품행이 단정하면서도, 할 말을 제대로 말한다는 자세가 관철되어 있습니다. 그것에 저는 강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의 일본 사회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덧붙이겠습니다. 제가 철학의 기원의 연재를 읽고 줄곧 마음에 간직했던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였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는 예종 속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던 에페소스의 민중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가라타니 씨가 강하게 강조하셨듯이(같은 책 141), 헤라클레이토스는 결코 에페소스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코스모폴리탄이었고 이소노미아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폴리스에서, 이 에페소스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헤라클레이토스 상은 제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습니다.

   저는 지금 고향인 도쿄도 코다이라 시에서 도로건설(지방도로 3.2.8호선) 반대운동을 응원하고 있는데요, 항상 헤라클레이토스를 생각합니다. 여기, 제가 살고 있는 코다이라 시에서 운동을 할 수 없으면 도대체 어디서 할 수 있단 말인가. 제게 코다이라 시는 녹음이 우거지고 가라타니 씨가 말씀하신 이소노미아같은 것입니다(웃음). 저도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에서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년 생. 평론가. 저작으로 정본 가라타니 고진집(定本 柄谷行人集)(5, 岩波書店),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맑스에 관해(Transcritique : On Kant and Marx)(The MIT Press), 세계공화국으로 :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世界共和国資本=ネーション=国家えて)(岩波新書), 세계사의 구조(世界史構造)(岩波書店) 등 다수.

 

고쿠분 코이치로(國分功一郎)

1974년 생. 高崎経済大学経済学部准教授. 전공은 철학. 저서로 스피노자의 방법(スピノザの方法)(みすず書房),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退屈倫理学)(朝日出版社), 번역서로 자크 데리다, 맑스와 아들들(岩波書店), 질 들뢰즈, 칸트의 비판철학(ちくま学芸文庫)

            * 국역본 :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원제 : 들뢰즈의 철학원리]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읽기


atプラス 15, 2013 2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미번역

|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 민주주의의 이름

|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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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2/3)

      デモクラシーからイソノミアへ―自由―民主主義を乗り越える哲学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012 12 6, 太田出版会議案にて)

 

이소노이마와 이동성

고쿠분 : 또 하나, 제가 철학의 기원을 읽으면서 줄곧 생각했던 것은 이동의 문제입니다. 가라타니 씨는 이소노미아의 근간에는 이동의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거기서 정주혁명이라는 사고방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주14] 지금까지는 농업 등 식량 생산 기술의 발전에 의해 정주가 가능해졌다고 여겨졌지만, 식량 생산을 할 수 없어도 정주는 가능합니다. 오히려 인류는 약 1만년 전, 기후 변동이라는 외적 요인 때문에 정주하도록 강제되고, 어쩔 수 없이 몇 백 만년이나 익숙해졌던 유동 생활을 버리고 정주생활을 시작하고, 그러던 중에 식량 생산 기술을 획득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저도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마찬가지로 이 정주혁명을 언급했습니다.[주15] 저도 이 생각을 취했던 것입니다. 정주혁명의 사고방식은 우리들의 견해를 일신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14] [고쿠분] 西田正規, 人類史のなかの定住革命, 講談社学芸文庫를 참조

[주15]  [고쿠분] 国分功一郎, 退屈倫理学, 朝日出版社2장을 참조. 신판도 참조

   가라타니 씨는 이 정주혁명의 관점에서 이소노미아의 이념을 고찰하고 계십니다. 정주 이전에는 사물[물건]을 많이 소유할 수 없었기에, 사유재산이라는 생각이 거의 없고 빈부격차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유롭기에 평등이라는 이소노미아의 원리는 정주혁명 이전의 수렵채집민이 지녔던 순수증여, 공동기탁()의 원리의 반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르셀 모스[주16]는 호혜성에 의해 증여를 특징지었지만, 사실 그것은 인류에게 보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유동적인 수렵채집민의 무리band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여의 호혜성은 유동민이 정주한 후에야 비로소 처음 형성됐습니다.

[주16] [편집부] 1872-1950. 프랑스의 사회학자문화인류학자. 증여론에서는 미개사회 속에 있는 '증여'가 자본제 사회 속에 있는 '교환'과는 다른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인류의 경제적 사태事象의 기초에 뒀다.

   저는 정주혁명에 대한 가라타니 씨의 해석을 읽으면서, 아무래도 자유의 근간에 있는 것은 이동의 자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듯이, 18세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형벌이 고안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감옥이 형벌의 중심이 됩니다.[주17]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데에도 이동의 자유를 요구한 민중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주17] [고쿠분] 미셸 푸코는 18세기에 고안됐으면서도 채택되지 않았던 무수한 형벌의 방법을 감시와 처벌22유순해진 형벌에서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철학이 과거에 크게 논했던 자연상태와의 관계입니다. 자연상태 개념을 골똘히 생각한 것은 루소입니다만, 루소가 생각하는 자연상태란 인간이 궁극적인 자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인간불평등기원론). 거기서는 확실히 사람의 물건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복종시킬 수는 없습니다. 가령 주거지인 움막을 누군가가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빼앗긴 당사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이동의 자유가 있으면 지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는 궁극적인 자유의 상태입니다만,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실은 이동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루소는 자연상태에 관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아마 존재한 적이 없으며, 다분히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루소의 자연상태론은 이념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타라니 씨의 논의를 읽다가 깨달은 것은,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와 아주 비슷한 상태가 현실에서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령 새로운 토지로 갈 수 있는 징표가 있고, 이동할 수 있는 프런티어가 충분히 남아 있는 경우에는 그런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정말로 놀랐습니다.

 

가라타니 : 알랭 테스타르(Alain Testart)라는 인류학자가 루소를 흉내내 신불평등기원론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그도 불평등의 원인을 정주에 의한 변화에서 찾습니다. 저는 201210월에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에서 정주혁명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요, 제가 강연하기 2년 전에 마샬 살린스[주18]가 왔다고 해요. 그 기록이 대학에서 소책자로 출판됐습니다. 제 강연과 질의응답도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 탓도 있어서, 저는 살린스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주18] 1930~.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저서로 석기시대의 경제학역사의 섬들 

   살린스는 수렵채집사회에 관해, 그것이 풍요로운 사회임을 보여줬습니다. 그것은 획기적인 인식입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수렵채집사회가 정주적이냐 유동적이냐에 주의를 쏟지 않았습니다. 살린스는 풀링(pooling, 공동기탁)과 호혜성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전자가 유동적인 사회에 의해, 후자가 정주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맑스주의자이며, ‘생산양식에 집착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 교환양식이라는 관점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살린스는 가족제 생산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이라는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그리고 가족제적 생산은 과소생산(underproduction)이 된다고 하는데요, 원래 호혜교환이 과소생산을 초래한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한편, 마르셀 모스는 호혜성을 태고부터 있는 원리라고 생각하므로, 역시 그것이 정주혁명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역사적인 시각이 됩니다.

   앞에서 고쿠분 씨가 지적하셨듯이, 호혜성(교환양식 A)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주하면서 시작됐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근친상간의 금지도 그 시점에서 시작됐습니다. 그것은 증여를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를 저는 정주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정주혁명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니시다 마사키(西田正規) 씨입니다만, 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정주혁명이란, 정주 후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호혜 시스템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동적인 사회와 정주한 사회의 구별은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유동적인 수렵채집민 사회와 씨족적인 수렵채집민 사회의 차이는 경시됐습니다.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원시공산제도 그 차이를 무시하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유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씨족사회의 이미지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 평등하지만 자유가 없는 사회로서 말입니다. 그리스로 말하면, 스파르타적인 사회가 됩니다. 플라톤은 스파르타를 동경했던 것이 아닐까요? 아테네에서는 자유가 있으나 평등이 없습니다. 평등을 실현하려고 하면 자유가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기에 평등이라는 사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오니아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는 근본적으로 이동성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고쿠분 : 그러네요. 자유의 조건으로서의 이동성이라는 것에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하여의 논의입니다. 영구평화를 위하여6개의 예비조항과 3개의 확정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주19]  이 확정조항의 세 번째가 방문권의 얘기입니다. 3조항 : 세계시민법은 보편적인 우호를 가져오는 조건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세계 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에 국한되어야 한다].”[주20] 이 조항은 굉장히 급진적입니다. ‘세계시민법같은 것이 실현됐다고 해도, 그 내용은 각국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으며,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지 않는다는 규칙만으로 좋다고 말하는 거예요. 요컨대 자유롭게 사람들이 서로 이동한다면, 세계는 저절로 진보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동은 저 나라에서는 이러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니 이상하다라는 감정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우호라는 대목에는 라틴어의 ‘hospitalitas’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환대라는 것이죠.[주21] 영구평화를 위하여의 결론은 환대입니다. 칸트가 평화의 문제를 이렇게 이동의 문제로부터 생각했던 것은 매우 흥미롭고, 가라타니 씨의 철학의 기원의 논의로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주19] [고쿠분] 예비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항. “장래의 전쟁의 씨앗을 몰래 보유하여 체결된 평화조약은 결코 평화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조항. “독립해 있는 모든 국가(소국이든 대국이든, 이 경우 문제가 아니다)도 계승, 교환, 매수, 또는 증여에 의해, 다른 국가가 이것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조항. “상비군은 때와 더불어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 넷째 조항. “국가의 대외분쟁에 관해서는, 그 어떤 국채도 발행되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조항.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나 통치에, 폭력을 통해 간섭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조항. “어떤 국가도 타국과의 전쟁에 있어서 장래의 평화시에서의 상호간의 신뢰를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확정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확정조항. “각 국가에서의 시민적 체제는, 공화제이어야만 한다.” 둘째 확정조항.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합제도에 기초를 둬야 한다.” 셋째 확정조항. “세계시민법은 보편적인 우호를 가져오는 조건들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주20]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이한구 옮김, 서광사, 2008.

[주21] [고쿠분] 또한 영구평화를 위하여의 예비조항과 확정조항에는 각각 한 개씩의 라틴어 단어를 붙인 조항이 있다. 확정조항에서의 그것은 여기서 소개한 환대(Hospitalitas)’를 규정하는 셋째 조항이며, 예비조항에서의 그것은 상비군(miles perpetuus)’을 규정한 셋째 조항이다. 라틴어가 사용됐다는 것은, 그 단어를 절대로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상비군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군대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사력 자체의 폐기는 무리일지도 모르나, 상비군은 폐기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방문권이 인정된다면, ‘영구평화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현실적인 제안이 아닐까?

 

가라타니 : 환대의 문제는 데리다가 했기 때문에, 저는 그에 대해 쓰는 것을 그만뒀어요(웃음). 다만, 그것에 대해 조금 말하면, 사람은 유동하고 있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환대가 성립하거든요. 정주하지 않으면, 사유(私有)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베이징의 칭화대학교 강의에서 얘기했더니, “알고 있습니다. 저는 빈번하게 이사를 하기 때문에, 소지품은 거의 다른 사람들에게 줍니다라고 말한 학생이 있더라구요(웃음).

   반면, 정주하는 것은 축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축적한 것을 강제적으로 증여하라고 하지 않으면, 격차가 생기고, 권력자가 생겨버리게 됩니다. 유동하고 있을 때는, 원래 그런 것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동한다라는 조건 자체가 평등을 산출하는 것이죠. , 유동민에게서는 환대해야 한다는 규칙만 있는 게 아니라, 원래 축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손님이든 누구든, 서로의 것을 나누는 일이 생겨납니다.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주 혁명 이후에 나타나는 문제로, 그 이전에는 그것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재에도 유목민에게는 그런 규칙[, ]이 있습니다만, 같은 것이 어민에게도 있습니다. 어민도 수렵채집민을 계승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민의 사회에서는 바다에서 조난된 사람들이 있다면, 돕기 위해 전력을 다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대로 보살펴주고, 안전한 곳에 도달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는 어부의 철칙 같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물론 이들이 칸트를 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웃음). 반대로 말하면, 칸트적인 환대의 원리는 그가 제멋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시대의 원리가 고차원에서 회귀한 것이라고 간주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이동이 있으면 지배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물건을 축적할 수 없으니까 사유(私有)가 생겨나지 않고, 타인을 지배하려고 생각해도 쉽게 달아나버립니다.

   이에 관해서는 맑스도 자본에서 재미있는 것을 썼습니다. 이것은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도 인용한 것인데요, 맑스는 경제학자인 E. G. 웨이크필드라는 사람이 소개한 영국인인 필 씨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 씨는 5만 파운드의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잉글랜드에서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강으로 가지고 가, 거기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동자를 거느리고 이주하자마자, 다들 곧바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 맑스는 필 군은 그 밖에도 노동자 계급의 남녀와 아이들도 3천명을 동반할 정도로 주도면밀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필 씨에게는 그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하거나 물을 긷거나 할 한 명의 하인도 없었다.’ 무엇이든 준비했으면서도 잉글랜드의 생산관계를 스완강으로 수출하는 것만은 잊었던 불행한 필 군!”[주22]

   가엾은 필 군’(웃음). 그건 그렇고, 이동 가능한 토지가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잉글랜드의 생산관계를 수출할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봐도, 이동의 자유가 막혔을 때 지배가 생긴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주22] 칼 맑스, 자본3권 [カール・マルクス, 󰡔資本論󰡕 三巻向坂逸郎 訳岩波文庫一九六九年420]

 

가라타니 : 저는 미국의 타운십을 가능케 한 조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스가 자본의 어딘가에 썼다고 생각합니다만, 19세기 미국에서는 산업노동자가 없었기에 산업자본이 발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민은 대거 왔지만, 타인에게 사역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프론티어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산업자본주의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토지가 많았기에 대토지소유는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금지됐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토지에서 노동하기보다는 서부로 가서 자기의 토지에서 노동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18세기 미국 동부에서 타운십이 성립됩니다. 이것은 이소노미아적입니다.

   그러나 점차 토지가 부족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이동하려고 해도, 영국이 미국의 선주민과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서부로 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습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칭송을 받고 있으나, 내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미국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시기에는, 이미 타운십(이소노미아)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원래 선주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으로는 타운십(이소노미아)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저는 신조(新潮)에서의 연재 원고에서는 도널드 A. 그린데(Jr.,Donald A. Grinde)와 브루스 E. 요한센(Bruce E. Johansen)미국건국과 이로코이 민주제[주23]라는 책을 인용해 썼습니다만, 미국의 타운십에 영향을 줬던 것은 북미의 선주민이 형성한 이로코이 연방입니다.[주24] 미국의 연방제는 몽테스키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지지만, 원래 몽테스키외 자신이 이로코이 연방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연방제는 직접·간접으로 북미의 선주민으로부터 배운 것이구요, 유럽의 이론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주23] [옮긴이] Jr.,Donald A. Grinde & Bruce E. Johansen, Exemplar of Liberty: Native America and the Evolution of Democracy, American Indian Studies Center, UCLA, 1991. [ドナルド・A. グリンデ Jr. & ブルース・E. ジョハンセン, アメリカ建国とイロコイ民主制, みすず書房, 2006.]

[주24] [편집부] 뉴욕주 북부의 온타리오 호수 남쪽 연안과 캐나다에 걸쳐서 보유지를 영유하는, 6개의 미국 선주민족에 의해 구성된 부족국가집단. 17세기-18세기의 전반기에 성립됐다

    [옮긴이] Iroquois Confederacy, 이로코이 연맹으로 불린다

   또 한 가지, 이 책에서 18세기의 북미와 더불어 예로 든 것은, 10~13세기의 아이슬란드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슬란드도 북미와 마찬가지로, 차례차례 이주한 이민자들에 의해 이소노미아적 자치사회가 성립됐습니다. 제가 이 아이슬란드라는 장소의 이질성을 깨달았던 것은, 사실은 제 첫 책인 두려워하는 인간畏怖する人間(1971년 출판)에 수록된 서평, W. H. 오든(Auden)2의 세계라는 책의 서평을 썼을 무렵입니다.

   『2의 세계라는 책에서 오든은 아이슬란드 사가(Icelanders’ sagas)[주25]에는 보통의 유럽의 서사시와는 다른 특징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리얼리즘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리얼리즘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 사가의 니얄(Njáls) 전설에서는 영웅을 묘사하는 데 이런 표현을 합니다.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밤색이며, 눈도 아름다웠다. 얼굴빛은 아주 파랗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매부리코에다, 뻐드렁니 때문에 입가는 보기 힘들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전사였다.”

[주25] [옮긴이] 아일랜드인이 자국어로 쓴 기록·이야기의 총칭. 사가는 이야기된 것이라는 뜻이다. 원래 바이킹족은 기록을 문자로 남기는 관습이 없었으며, 아이슬란드에서는 법률조차도 구전되고 낭송시인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계승됐다. 모든 사가는 원래 이런 구전이다

   보통의 서사시에서 영웅의 육체는 그 정신의 정확한 외화이며, 육체적으로 완벽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사가에서는 영웅인 것과 흉한 것, 아름다운 것과 흉한 입가가 모순을 구성하지 않고 양립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리얼리즘이란 이른바, 그는 영웅이었으나 흉했다고 쓰는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사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을 오든이 지적했고, 당시 저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저는 아이슬란드 사가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오니아를 경유해 풀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이슬란드 사가 혹은 사회사 연구서를 읽어봐도, 이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동시기의 유럽 혹은 북유럽에 비해, 아이슬란드 사회는 생산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압도적으로 낮았습니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것은, 모두 아이슬란드의 것만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의 사례를 고립시켜 보면, 문제의 공통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를 보기 위해서는 이오니아를 보면 됩니다. 실제로 아이슬란드 사가는 이오니아에서 태어난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유사합니다. 호메로스에 의해 묘사된 영웅은 유럽 중세의 영웅무훈시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아이슬란드 사가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와 이오니아를 잇는 것은 뭐냐고 하면, 그것은 동시에 이동성에 의해 생겨난 자치사회이라는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아이슬란드 사가는 이소노미아적인 사회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속>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연재 예고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읽기


atプラス 15, 20132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미번역

|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 민주주의의 이름

|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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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1/3)

      デモクラシーからイソノミアへ―自由―民主主義を乗り越える哲学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012126, 太田出版会議案にて)

 

질문 : 가라타니 고진 씨는 201211월에 철학의 기원을 출판했습니다. 철학의 기원은 고대 이오니아[주1], 자유롭기에 평등하다는 이소노미아(무지배)[주2]에서 철학의 기원을 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 이소노미아의 사상은, 소크라테스를 마지막으로 망각되어 버렸다고도 쓰셨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그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고대 이오니아에서는 탈레스[주3]를 시조로 하여 자연철학이 무르익었습니다만, 그 망각된 사상을 계승한 철학자의 한 명으로 이 책에서는 스피노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쿠분 고이치로 씨는 스피노자의 방법을 쓰고, 데카르트와 비교하면서 스피노자의 방법을 탐구하고, -스피노자적인 방향으로 진행된 17세기 이후의 철학에 맞서 다시금 스피노자의 가능성을 제기하셨습니다.

    오늘은 두 분께 철학의 기원에 관해, 또 이 책이 제기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사상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주1] [편집부] 아나톨리아 반도(현재의 터키) 남서부 및 에게해 동부의 섬들에 고대에 존재했던 지방.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주2] [옮긴이] no rule은 비지배, 무지배로 모두 번역가능하다. 필립 페팃 등과 같은 신공화주의자들이 자유를 논할 때 <지배 없는 자유><간섭 없는 자유>를 구별하여 언급하듯이, '아니다'라는 의미는 물론이고 '없다'는 의미도 가능하기에 무지배가 꼭 잘못된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3] [편집부] 기원전 6세기 전반기의 인물. 고대 그리스의 기록에 남겨진 가장 오래된 자연철학자이며, 이오니아의 밀레토스학파의 시조. 만물의 시원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와 철학의 기원

고쿠분 : 가라타니 씨는 철학의 기원에서 소크라테스 이전(pre-socrates)의 철학자에 관해 논하고 계십니다. 아주 우연인데요, 사실 저도 3·11 이후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 경우는 하이데거가 계기입니다. 하이데거는 원자력 기술에 관해 철학적으로 고찰한 유일한 철학자인데요, 그 전제에는 그의 기술(테크네*)’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연(퓌지스*)’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기술(테크네*)’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연 개념에 관해 생각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기묘하게 생각될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원자력 발전의 문제를 경유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에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11년부터 그 공부를 시작해, 2012년의 전반기에는 대학에서, 하이데거를 이용하면서 -소크라테스 기의 철학과 원자력 발전이라는 테마로 수업도 했습니다. 아마 이런 제목의 수업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웃음).

   이런 셈이어서, 신조(新潮)를 드문드문 보고 가라타니 씨의 철학의 기원의 연재를 봤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 “나만 이런 게 아니잖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거기서 공통되는 시대정신을 느꼈다고나 할까, 왠지 나는 지금 시대의 파도에 올라타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웃음).

   음, 이러저러하게 시작한 프리소크라테스의 공부인데요, 처음에 느꼈던 것은 어떤 책을 읽어도 같은 것이 써져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저는 처음에 프리소크라테스의 고전적 연구인 존 바넷의 초기 그리스 철학등을 읽었습니다. 그 후 다른 책과도 맞춰봤지만, 물론 자세한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어디에든 같은 것이 써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하더군요. 이 시기의 철학에 관해서는 원래 자료가 적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상당히 한정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초보적인 것을 확인해 두면, 그들이 기록한 책이 남아 있지 않고, 후세의 철학자에 의한 증언이나 인용밖에는 존재하지 않죠. 가령 탈레스가 만물의 시원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때문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런 증언이나 인용으로 남겨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말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재구성했던 것이 헤르만 딜스가 편찬하고 나중에 발터 크란츠가 수정 증보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 단편집(초판은 1905, 수정증보판은 1951)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프리소크라테스 연구의 출발점이 되어 있고, 아까 이름을 언급한 바넷의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도 이 딜스=크란츠의 단편집이 전제에 있습니다.[주4]

[주4] [고쿠분] 딜스=크란츠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프리소크라테스 연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만 당연하게도 비판도 있다. 버넷은 가령 헤라클레이토스의 단장의 나열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초기 그리스 철학, 以文社一九一頁). 딜스는 주제에 따른 배열의 시도를 일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버넷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단 하나의 단장에 관해, 그 단장의 첫 부분은 단장 자체를 전한 심플리키오스(Simplicius of Cilicia: c.490-c.560)에 의한 패러프레이즈라고 말한다(같은 책, 八三頁). 하이데거는 버넷의 설에 동의하면서, 같은 이유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 본인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말미의 12 말에 불과하다고 한다(ハイデッガー, アナクシマンドロスの箴言, 杣道』〔ハイデッガー全集第五巻, 創文社, 378-380). 아마 이것 외에도 다양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딜스=크란츠의 작업의 의의는 향후에도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 김인곤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선집, 아카넷, 2005, 218266.

   이처럼 프리소크라테스적 철학은 자료가 아주 한정되어 있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는 셈인데요, 거기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온 것이 하이데거죠.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돌아갈 필요를 강하게 주장하고, 아주 독창적인 독해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주5]나 아낙시만드로스[주6] 등이 남긴 단편을 독특한 방식으로 독해했습니다.

[주5] [편집부] BC535년 무렵~475년 무렵. 에페소스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일컬어지는 자연철학자. 만물의 시원물질을 불이라고 생각했다.

[주6] [편집부] BC 610년 무렵 ~ 547년 무렵. 만물의 시원을 무한정한 것이라고 했던 밀레토스학파의 자연철학자

   이것은 정직한 감상으로 말하는 건데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을 하나의 강력한 전체적인 비전을 좇아 독해해 낸 사상가는 하이데거 이후, 가라타니 씨로 단숨에 건너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하겠습니다.

   단편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른바 몇 개만 남은 퍼즐 조각을 통해 퍼즐 전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하이데거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시도했던 것은 그와 같은 작업입니다. 하이데거는 결코 몰락하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몸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인가/어떻게 하면 사람은 소멸하지 않는 것의 앞에서 숨어 있을 수 있을까!/결코 몰락하지 않는 것 앞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를 숨길 수 있는가?’”(단장 번호 16)이라는 단편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합니다. 그는 결코 몰락하지 않는 것이란, 달리 말하면 줄곧, 바꿔 말하면 부단히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요컨대 자연(퓌지스*)’을 가리킨다고 단언합니다.[주7]  퓌지스는 원래 나타나다[등장하다, 출현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연(퓌지스*)’ 개념 자체의 해석에 씨름합니다. 확실히 하이데거의 독해에는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압도적인 매력이 있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을까요?

[주7] [고쿠분] ハイデッガー, ヘラクレイトス」〔ハイデッガー全集第五五巻, 創文社, 九九頁 이하

   그러면 왜 이런 독해가 가능했는가? 그것은 하이데거 안에 존재자연(퓌지스*)’에 관한 강렬한 퍼스펙티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퍼스펙티브 속에 다양한 단편을 던져 넣으면, 하나의 그림이 선명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단편밖에 없는 철학자를 전체적으로 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런 독해는 실증적인 연구와는 구별해야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역시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철학의 기원을 읽으면, 가라타니 씨에게도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퍼스펙티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퍼스펙티브의 구성요소 중 하나가 이 책의 중심적 테마인 이소노미아(무지배)라는 정치체제이죠. 가라타니 씨의 강렬한 퍼스펙티브 안으로 단편이 던져 넣어졌을 때, 하이데거에 필적하는 듯한,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다른 독해가 선명한 그림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철학의 기원이라는 책의 일관성과 전체성은 여기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 이후에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그런 독해상의 사건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씨는 본서에서 철학의 기원을 이오니아에서의 이소노미아 자유롭기에 평등하다무지배의 자치적 사회 의 위기에서 찾았습니다. 현재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테네에서 시작됐고 이오니아에서는 단순히 그 싹이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됩”(철학의 기원19)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스에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거의 모두 이오니아에서 시작됐다”(20)고 하면서, 이오니아의 몰락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이소노미아의 부활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철학은 시작됐다(“이소노미아의 위기에서 철학이 시작됐다”, 49)고 적혀 있습니다.

   게다가 아테네에서 시작된 데모크라시도 이오니아에 있었던 이소노미아를 재건하려 했으나 그리 할 수 없었던 기획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오니아에 존재했던 이소노미아(무지배)는 아테네에서 지배(크라시*)’의 한 형태인 데모크라시(다수자 지배)로 변질되고, 그것과 더불어 철학의 참된 기원인 이오니아는 망각되고, 철학은 아테네에서 기원했다는 통념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죠.

   제가 하이데거에서 가라타니 씨로 단숨에 건너뛰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강렬한 퍼스펙티브를 갖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의 독해로 향함으로써, 아주 매력적인 그림을 부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가라타니 : 저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서는, 흔하게, 누구나 쓰고 있는 것밖에는 몰랐어요. 이렇게 말해도, 그것에 관해 특히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생각하게 됐던 것은 철학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제 관심은 보편종교에 있었습니다. 보편종교에서 처음으로 교환양식 D가 제시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2010년에 세계사의 구조를 다 썼을 무렵, 이른바 보편종교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교환양식 D가 제시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세계사의 구조에는 이를 위한 지면이 없었습니다. 이번의 철학의 기원에서는 거기서 쓰지 못했던 것을 썼습니다.

 

질문 : 가타라니 씨는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에서 세계사를 네 가지 교환양식, A 호혜, B 약탈과 재분배, C 상품교환, A를 고차원에서 회복한 D 등으로 설명하고, 각각이 지배적인 교환양식의 사회로서, 씨족사회(A), 국가사회(B), 근대자본제사회(C)를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D의 강박적 회귀로서 보편종교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철학의 기원D가 사실은 철학의 기원이기도 한 이소노미아라고 간주하는 거네요.

B

약탈과 재분배

(지배와 보호)

A

호혜

(증여와 답례)

C

상품교환

(화폐와 상품)

D

X

교환양식

 

 

가라타니 : 그렇습니다. 세계사의 구조에서는 보편종교를 꽤 상세하게 썼습니다. 일반적으로 철학과 종교는 별개로 나눠져 생각되어 왔습니다만, 보편종교의 경우는 그런 구별이 쉽게 성립하지 않습니다. 저는 베버의 윤리적 예언자와 모범적 예언자라는 개념을 빌려 생각했던 것인데, 윤리적 예언자는 예수나 무함마드처럼, 신의 신탁을 받고 그 의지를 고지하는 매개자가 됩니다. 반면, 모범적 예언자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붓다나 노자나 공자처럼, 모범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범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리키는 자입니다. , 모범적 예언자란 사실은 철학자 같은 자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도 예언자 같다는 겁니다. 원래는 철학자였던 것이 나중에 종교의 교조처럼 간주된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구약성서의 예언자는 신의 말을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은 무함마드처럼 신이 깃든[접신된] 말이 아닙니다. 나미키 코우이치(並木浩一)구약성서에서의 문화와 인간에서 쓰고 있는데요, 사실은 예언자의 말이란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음미한 지식을 신의 말이라고 쓴 것입니다. 여기서는 종교와 철학이 판연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사의 구조에서 제가 보편종교에 관해 썼던 것은 철학에도 들어맞을 것입니다. 보편종교가 그 기원에 있어서 교환양식 D의 차원을 개시하는 것이라면, 철학의 기원에서도 같은 것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 셈입니다.

   하지만 20111월까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서는 저도 버넷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의 이해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이데거의 논의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읽기는 했지만, 그다지 와 닿는 게 없었습니다. 다만 아까 하이데거에 관한 고쿠분 씨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 가지 생각이 드네요. 하이데거는 원래 신학과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유대·그리스도교에 의해 제시된 사항과 유사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보편종교의 문제가 다른 형태로, 즉 철학으로서 발견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자신은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죠. 저도 그것을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만일 이런 시각이 옳다면, 그것은 제가 보편종교의 문제로부터 이오니아 철학으로 향했다는 것과 어느 정도 평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20111월까지, 저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그때까지의 틀을 넘어서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령 철학자의 역사적 순서는 책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순서, 즉 그들의 구조적 연관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급격하게 보이게 됐던 것이 그 무렵으로, 인도에 2주일 정도 체류한 이후입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도가 지리적으로 이오니아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보면 그리스는 아주 멀리 느껴집니다만, 인도에서 보면 비교적 가깝죠. 인도는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와 연결이 강하고, 언어에도 페르시아어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을 제패한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원정하려 했던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거기서 문득 생각했던 것은 인도까지 찾아온 것으로 알려진 이오니아 출신의 철학자입니다. 그것은 피타고라스입니다.[주8] 일반적으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아시아, 특히 인도에서 갖고 돌아간 것이라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는, 피타고라스는 그렇게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한, 피타고라스의 수수께끼뿐 아니라, ‘초기 그리스 철학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습니다.

[주8] [편집부] BC 570년 무렵 ~ 사망년도 불명확.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수학자. 만물의 시원을 수라고 봤다. 또한 음악에서의 화음의 발견자로도 알려져 있다. 사모스 섬을 떠나 각지를 방랑한 후, 남부 이탈리아에서 피타고라스 교단을 설립하고 플라톤 등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저는 인도에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인도가 아니라 그가 젊은 시절에 머물렀던 이오니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이오니아적인 것의 부정이지만, 이오니아를 매개체로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성질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가 만물의 시원에 수를 놓은 것은 명백히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발상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정치 혹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에서 나와서 더욱이 그것들과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사상을 초래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도에서 수입한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의 생각을 그리스에 가져왔다고들 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전에 오르페우스교[주9]로서 그리스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오니아인은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오니아의 풍토에서 나온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을 말했다면, 그것을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처리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오니아의 정치(이소노미아)와 철학(자연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주9] [편집부] 고대 그리스의 밀의교密儀教, 기원전 6세기에 각지로 번졌다. 음악이나 계율에 의해 깨끗하게 정화된 혼만이 윤회전생의 고리 바깥으로 나가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제 생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주10]와 헤라클레이토스는 피타고라스에 대항하여 이오니아적인 정치와 철학을 옹호하려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심오한 해석을 부여했지만, 제게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에, 또 누구에게 대항하는지 알았을 때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피타고라스에 대항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목표였습니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 등에게서 반-소크라테스=플라톤적인 사고를 보려고 했습니다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후계자가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후계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이오니아적인 것을 회복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상가들의 관계를 보려면, 피타고라스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피타고라스를 무시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피타고라스라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 저는 그 언저리의 사상가의 관계를 일순간 알게 됐습니다(웃음).

[주10] [편집부] BC515년 무렵 ~ 사망년도 불명확. 남부 이탈리아의 엘레아 출신 철학자. 알레아파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고쿠분 : 저도 철학의 기원을 읽다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피타고라스 얘기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폴리크라테스와 함께 정치 개혁을 행하고, 그것에 좌절합니다. 그리고 사모스 섬을 떠났고, 그 후 40년 정도 방랑을 하고, 인도까지 갔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단을 만들지요.

  『철학의 기원에서는 피타고라스가 사모스 섬에서 실현하려 한 것도, 이오니아에서 상실되고 있었던 이소노미아의 회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와 폴리크라테스가 실시한 정치 개혁은 결과적으로 이소노미아와 언뜻 보면 비슷하나 실제로는 다른 데모크라시(다수자지배)’(114)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폴리크라테스는 민중 자신의 요청에 의해 민중을 지배하는 참주가 되어 버리고, 피타고라스는 그것에 절망해 사모스 섬을 떠나고, 그리고 40년의 방랑 생활과 교단 설립에 이르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의 교단에서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이 절대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은 이른바 절대적인 규율에 의해 절대적 평등을 실현한 공동체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즉, 자신을 절대선=절대악의 위치에 둠으로써 절대적 평등을 실현했습니다. 가라타니 씨는 피타고라스가 과거 실패한 정치 개혁을 교단에서 다시 하려고 했다고 적으셨는데,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의 매우 엄격한 정치적 진리군요. 민중에게 지배를 맡기는 민주제는 최종적으로 참주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동지인 폴리크라테스도 참주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민중의 요구에 의해 그렇게 됐다. 그렇다면 민중의 평등을 위해서는 절대자를 둬야 한다 .

   피타고라스는 또 이오니아의 지적 전통을 매개하면서도 이오니아 자연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관념론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퓌지스*)의 근원(아르케*)을 탐구했다는 의미에서는 이오니아적이었지만, 그것을 수학적인 관계에서 구함으로써 이오니아 자연철학에 있던 자연(퓌지스*)의 관념을 한없이 멀리하고 말았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에서도 철학에서도 이오니아에 대해 비틀린[엇나간] 관계에 있습니다. 가라타니 씨는 이것에 대해 이소노미아를 추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가장 이소노미아에 반하는 정치형태, 혹은 가장 자연철학에 반하는 철학으로 귀결됐다”(123)고 쓰셨습니다.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저는 이 책을 읽어 버렸기에 더 이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만(웃음), 피타고라스에 대한 가라타니 씨의 이 설은 역시 독창적인 것이 아닐까요?

 

가라타니 : 초기 그리스 철학이라는 것은 자료가 제대로 없으니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처럼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유리합니다만(웃음). 피타고라스의 위치가 정해지면,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뿐 아니라 플라톤의 위치도 정해집니다.

 

고쿠분 : 어떤 의미에서는 피타고라스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의 기원이라는 것이군요. 피타고라스가 감성적 세계와는 구분되며, 감성적 세계를 관장하는 수학적인 관계를 실체화하고 플라톤이 그것을 이데아론으로서 정치화(精緻化)했다고 말입니다. 반면, 이오니아 자연철학은 그런 관념적인 이중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고 가라타니 씨는 쓰고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 플라톤적인 철학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철학(필로조피아)’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앎의 방식을 앎을 사랑하는 것(필레인 토 소폰)”이라고 말합니다.[주11] 물론 하이데거에게 낭만주의적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주11] [고쿠분] 하이데거는 철학(필로소피아)’ 이전의 지적 노력을 그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필레인 토 소폰(φιλείν τό σοφόν)’이라고 부르고, 예를 들어 그 담지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아직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보다 위대한 사유자였기 때문입니다”(하이데거, 철학이란 무엇인가, 理想社, 一九頁). 또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에 따르면, ‘철학(필로스피아)’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고,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 피타고라스라고 한다

 

가라타니 : 이 책에서도 인용했지만 헤겔이 이오니아에 대해 매우 시사적인 것을 말해서 저는 사실 놀랐습니다. 헤겔은 이오니아의 아름다운 세상이 끝날 때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오니아 철학이 이오니아적 세계가 끝나고 있을 때 나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점에서 현재의 학자와는 다릅니다. 다만 그는 이오니아의 공화국”, “아름다운 세계라고 말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헤겔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것은 하이데거의 경우보다 더 모르겠네요.

   만약 한마디 해 둔다면, 저는 이 책에서 피타고라스를 비판적으로 썼지만, 최종적으로 피타고라스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피타고라스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는 궁극적으로 피타고라스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립자론의 근원적 물질은 수학적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실재한다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실증되지는 않겠죠. 왜냐하면 그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드니까요. 저는 옛날부터 말했습니다. “돈이 떨어지면 진리도 떨어진다[주12](웃음). 수학적으로 맞다면 그것은 존재한다는 생각은 피타고라스가 들여온 관념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는 다릅니다. , 이데아는 물리칠 수 있지만 수학은 쉽게 물리칠 수 없거든요.

[주12] [옮긴이] 원문은 真理이다. 일본어에서 는 돈의 경우에는 떨어지다, 끊기다 등의 의미이지만, 진리의 경우에는 (효력이) 다 하다, (의미가) 없어진다 등의 의미이다. 따라서 "돈이 떨어지면 진리도 소용없다" 정도의 의미이다

   베르그손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읽으면, 그는 그리스에서의 종교의 기원을 디오뉘소스교나 오르페우스교에서 보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닫힌 사회를 여는 특권적 개인을 그리스에서 찾으려 했지만 못했죠. 그래서 디오뉘소스교나 오르페우스교에서 그것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이고, 원래 보편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에서 보편종교의 출현을 보고 싶다면, 그것을 오히려 철학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 모범적 예언자로서의 철학자에게서 말입니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종교와 철학이라는 통속적인 구별을 넘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의 관념을 그리스에 전했다는 설은 난센스입니다. 피타고라스의 문제는 이중세계론에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윤회전생이라는 생각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붓다가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그것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윤회전생이라는 관념에서 끌어내지는 종교적·정치적 태도를 비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중세계론을 비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붓다가 비판한 것은 이중세계입니다. 붓다는 종교가가 아니라 당시의 자유사상가의 한 명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무신론자도 있고 논쟁을 했습니다. 인도에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자백가시대가 있었습니다. 붓다의 생각은 나중에 종교가 되었습니다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노자나 공자의 철학이 후에 유교나 도교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한편,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가 가져온 이중세계론에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저항했습니다. 그것은 중국과 인도의 제자백가시대와 거의 평행합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시대와도 말입니다. 종교와 철학, 아시아와 그리스 같은 구별에 기초하면, 그런 연결이 안 보이지요. 저는 이오니아에서의 사건을 바빌론에서의 사건과 비교해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동시에 중국과 인도에서의 사건을 염두에 뒀습니다.

 

고쿠분 : 철학의 기원을 이오니아에서 본다는 것도 매우 재미있지만, 이 책의 서두에서 바빌론 유수[주13]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도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바빌론 유수에서 끌려간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압도적인 문화나 종교에 에워싸여, 자신들의 종교를 재고하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엄격한 계율을 기초로 한 훗날의 유대교가 나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진정한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는 철학의 참된 기원으로서의 이오니아와 마찬가지로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주13] [옮긴이] 일본에서는 바빌론 유수(幽囚)가 아니라 捕囚라고 부른다. 포로라는 뜻도 있으나 유수를 이렇게 부른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며,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 동안의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


가라타니 : 바빌론 유수란 유대교의 역사에서 오랜 시련의 한 장면[cut]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사실은 거기서 진정으로 유대교가 시작됐다고 해야 할 사건이군요. 지금까지의 종교에서는 어떤 초월적 신도, 국가가 멸망하면 신이 패한 것이 되며, 인간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증유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을 버리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의 책임을 묻게 됐습니다. 이때 신과 인간의 관계가 반전됐다고 해도 좋습니다. , 주술적 사고에 있는 인간중심주의가 부정된 셈이죠. 그러나 바로 이로부터 유대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제사장들은 그것을 모세의 옛날에 투사하고, 그 이후의 유대인의 시련의 한 에피소드로 바빌론 유수를 보게 됐습니다. 물론 바빌론의 일을 숨기지 않습니다. 매우 중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빌론에서 일어났던 것을 감춰버립니다.

   저는 그 부분이 그리스 정치 및 철학에 있어서 이오니아의 위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바빌론 유수에 관해서도, 이오니아에 관해서도, 누구나 피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책에도 아테네 이전에 이오니아에는 고도의 경제 발전, 기술적 발전, 정치적 발전이 있다 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느새 이오니아가 펑 하고 사라지고,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성립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저로서는 이오니아는 어떻게 된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지죠(웃음). , 조금도 숨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그 때문에 가장 감춰져 있는 것이 이오니아와 바빌론인 것입니다. 늘 논하고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논하지 않았습니다.

 

고쿠분 : 마치 에드가 앨런 포우의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같아요(웃음). 숨기지 않고 거기에 뒀기 때문에,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거죠.

 

가라타니 : 바로 그런 거예요. 이런 문제에 관해 그때까지 탐정이 없었습니다(웃음). 


<계속>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일본어 서평 2


토호쿠대학의 모리 이치로 교수가 쓴 것이다. 다음은 원문 링크이다. 

http://booklog.kinokuniya.co.jp/mori/archives/2013/02/post_8.html?hc_location=ufi


아래는 번역이라기보다는 대체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그리고 글의 앞 부분은 번역을 안 했는데 생각해보니 중요한 대목이기는 하다. 


앞 부분에서 서평자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했던 세 개의 구분인 노동, 작업, 활동의 구별이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아래에서 보듯이 이소노미아를 풀이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에서 페팃의 공화주의로 이어지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읽기 전에 다음의 정보도 미리 전달한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는 <철학의 기원>을 다룬 잡지의 특집호가 있었다.http://www.ohtabooks.com/publish/2013/02/08165414.html

나는 당분간 읽을 시간이 없지만, 아무튼 구입은 해 놔야겠다.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여기에 大竹弘二가 쓴 「イソノミアの名、民主主義の名」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에 따르면, 발리바르와 호이징거, 하이에크도 이소노미아에 대해 언급을 했다고 한다.

1. 발리바르
1)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2)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 분명 두 개의 글을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뒤적여봐야겠다.

2. 호이징거는 일본어 번역본 『汚された世界』(磯見昭太郎訳、河出書房新社)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3. 하이에크는 『自由の条件Ⅱ 自由と法』(気賀健三・古賀勝次郎訳、春秋社)이라고 하니, The Constitution of Liberty인 것 같다. 
* 이 책도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ㅠㅠ

** 이 정보는 http://makorin.blog.jp/archives/51951042.html에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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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절호의 기회에, 다시금 이렇게 물어보자.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에서 끄집어낸 ‘이소노미아’란 무엇이었는가라고. 이것을 감안해야 가라타니의 이소노미아 해석의 특이성도 부각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소노미아란 ‘이소(같다, 동등하다)’와 ‘노모스(관습, 법)’의 합성어다. ‘법적 평등’이라는 번역어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말에는 강한 의미에서의 ‘법’이라는 함의는 없다. 오히려 이 경우의 ‘노모스’란 ‘퓌시스(자연)’와 대비되는 ‘인위’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즉 자연적으로는 평등하지 않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근저에 있으며, 그렇기에 자연적 격차와는 별도로, 어디까지나 인간들 사이의 약속으로서, 서로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서 간주한다는 약정이 오간다. 그러 합의 아래서 형성된 동등한 자들의 공동체 형성이 ‘이소노미아’라고 불린다. [지금] 봤듯이, 이 발상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근대의 공리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인간들 사이에는 외모, 능력, 재산 등의 사적 처지[境遇]의 점에서, 메우기 힘든 불평등이 있다. 하지만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면 좋은 것이며, 그렇기에 공동체에 대한 각자의 귀속의식도 강해지고, 그 결과 공동체 전체의 사기도 올라간다. 한줌의 주인(owner)이 홀로 판단[専断]하기보다는 구성원 전체가 공동 참가자로서 나란히 서로 겨루는 쪽이 [그 기세가] 드높여진다. 역시 각자가 경합을 벌이고 자기를 주장하는 만큼, 귀찮은 일이 생기고 비효율적으로도 보이겠지만, 길게 보면 가장 잘 된다. 크고 작은 단체에 관해서도 해당되는, 이 조직 활성화의 비결을 국가공동체의 구성원리로서 채용하는 것이 정치형태로서의 이소노미아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대등제도’(対等制度)라고 직역하기로 했다. 
가라타니는 이소노미아를 ‘민주정(데모크라티아)’과 대비시키고, 고대에 출현한 탁월한 정치형태로서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정당하며, 이 책의 가치도 거기에 있다. ‘민중’의 ‘지배’라는 뜻의 약간 자극이 강한 말에 비해, 페어플레이의 경기정신을 구현하는 ‘대등제도’는, 헤로도투스부터 플라톤까지 아름다운 말로 간주됐다. 그렇지만 고대민주정과 근대민주주의를 싸잡아 생각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소노미아를 ‘무지배’라고 번역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가라타니가 인용하는 혁명론의 대목에서 아렌트도 ‘무지배(no rule)’라는 이소노미아의 첫 번째 뜻을 강조한다. 하지만 ‘무지배’라는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이소노미아의 본 뜻은 분명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배로부터의 자유’는, 적극적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라타니는 여기서, 빈부의 격차 없음, 즉 경제적 평등이라는 논점을 꺼낸다.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식민도시에서는 당초, 식민지 이주자들이 구속이나 특권 없는 맹약 공동체를 창설하고, “사람들은 실제로 경제적으로도 평등했다”(25頁).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료는 거의 없음”(42頁)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담하게 몰아붙이는 것의 옳고 그름은 차지하더라도, 적어도 이소노미아를 경제적 평등에 귀착시키는 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가라타니는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이소노미아 개념을 발견한 유일한 논자가 아렌트라는 것을 인정한다(24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를 논할 때 경제적 평등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척도로서 들여오는 것에 대해 아렌트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은 아주 깨끗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원래 맑스의 유물사관에서의 ‘생산양식’에 대한 정위[위치규정定位] 대신에, ‘교환양식’의 차이로부터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보고자 한다. 그 위에서 자신의 ‘세계공화국’이라는 선전문구(catchphrase)에 걸맞는, 더욱이 보편종교일 수 없는 이상적 ‘교환양식’을 추구하며, 이것을 이소노미아에서 자유와 평등이 양립됐다는 흔적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발견한 ‘어디에도 없는 나라(유토피아)’는, 어떤 사정거리를 간직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실측(実測)은 다른 논자들에게 맡기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사관의 재검토에 관해서도 제외한다. 나로서는 윤색된 이소노미아 개념의 향배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고대에 구축된 대등제도의 의미 차원을 발굴하고자 하는 아렌트의 시도를, 자신에게 맞게 왜곡하고, 그 중 맛있는 곳만 집어먹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의 풍경을 일신하는 듯 보이는 이 책은, 사실 현대인에게 흔해빠진 편견에 휩싸여 있다. 정치적 평등을 “단순한 추상적 평등성”(27頁)으로 간주하고, 경제적 평등을 중시하는 발상부터가 그렇지만, 그것과 나란히 눈에 띄는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그것이 노예제에 의거하고 있음을 방패로 삼아 단죄하는 상투적인 논조이다. 노동이나 작업을 시민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경멸한, 활동 본위의 폴리스적 신분질서가 허용될 수 없는 것도, 생산성에 무게를 둔 근대인의 품질증명일 것이다. 현대의 논자가 보기에, ‘노동/작업/활동’이라는 아렌트적 삼분법은, 난센스처럼 비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아테네 ‘제국’이, 이것도 현대식으로 고발되는 한편, 여러 차례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불려진다. 폴리스를 뛰어넘은 ‘코스모폴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의 장점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을 철폐하려고 한 점에 있다고 한다. 공과 사의 구별이라는, 근대사회에서 들어맞는 표적이, 여기서도 저격된다. 그 무차별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정치적인 것’은 완전히 지워진다.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한 것은 통치 자체의 폐기이며, 이소노미아(무지배)이다”(213頁). 맑스주의자라면 ‘국가의 폐절’을 이상으로 삼는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폴리스를 사랑한 고대의 시민철학자에게, 그 취향을 강요할 수는 없다. 정말이지 “‘소크라테스 이전’이라고 하면, 소크라테스 그 사람을 거기에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217頁)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크라테스를 폴리스를 싫어하는 근대인에 포함시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이소노미아란 ‘무지배’, 즉 지배하는 것에도 지배되는 것에도 무게를 두지 않는 정치체제이다. 특히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다. 누군가에게 지배된다는 것은 사절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지배된다는 것은 예속되는 것, 즉 자유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 반대로,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쪽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달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지배하는 것은 대등한 관계에서 경합할 가능성을 빼앗기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을 재미없다고 느끼는 유형의 인간도 있다. 이소노미아는 이렇게, 지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배하는 것도 좋다고 하지 않는, 자유를 사랑하는 자들이 공동으로 구축하고 대등한 유동공간의 것이다. 
이소노미아를 이소노미아답게 하는 것은 공공의 사항에 동등하게 참여할 자유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의 기쁨이다. 이 경우의 ‘자유’란, 빈부의 격차의 해소도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도 아니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새로운 시작’에서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빈 틈’을 의미한다. 
복수성에서 빛을 내며 나타나는 자유의 경험. 이런 경험 지평이 고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이소노미아라는 고어는 전하고 있다. 이 공적 자유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근대에서 혁명정신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번번이 재발견됐다. 그 이야기꾼이고자 했던 것이 아렌트였다. 이소노미아의 빛줄기에, 우리는 몇 번이나 이것저것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 회상의 기회를 다시 갖게 된 것을 새삼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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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1. 일본어 서평 

* 아래의 링크는 아래의 서평 원문이고, 밑의 글은 알라딘에 올라와 있다가 삭제된 것이다. 논의를 위한 자료 차원에서 블로그에 복제해둔다. 

* http://d.hatena.ne.jp/whomoro/touch/20130217/1361065937?hc_location=ufi

* http://d.hatena.ne.jp/whomoro/touch/20130222/1361537378?hc_location=ufi


기발하거나 조잡하거나 새창으로 보기
siruall ㅣ 2015-04-08 ㅣ 공감(5) ㅣ 댓글 (0)
1. 가라타니의 매너리즘 또는 아집
철학의 시작을 서술한 서적은 허다하지만 철학의 기원을 탐구한 서적은 적다. 그 탐구를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라타니는 행하겠다고 한다. 철학에 대한 희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기원』은 사람들의 관심 저 밑에 있는 것을 다루려고 하는 저작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라타니의 탐구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무지배)’가 역사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논증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논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오니아사회와 이소노미아가 단순하게 등호(等號)로 연결되고, 그것을 전제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史實)의 오인이다. 이소노미아라는 말도 정확하게 분석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배’라는 번역어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비판 없이 자명한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이오니아=이소노미아=무지배’는 유토피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이 가라타니의 처음부터의 목적이었는지 궁금하다. 그것이 유토피아인 이상, 역사상의 아테네가 단죄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것은 통치 그 자체의 폐기이며, 이소노미아”라고 말하는 것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가라타니가 지향한 것은 ‘통치 그 자체의 폐기’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그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 사술(詐術)적인 논리이며, 소크라테스를 강인하게 자신과 동일한 사상을 갖는 주체로 설정한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소노미아를 등장시켰다. 이 이소노미아가 허구인 것은 자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해 언제나 ‘이소노미아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환기하는 효과를 갖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라타니는 자신의 투쟁을 이소노미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2. 통설과의 접목
서장에서는 기원전 6~기원전 5세기에 관한 통설적인 윤리사상사(가령 야스퍼스의 ‘세계사의 기축시대’가 떠오른다)가 소개되며 거기에 가라타니의 교환양식설이 접목되고 있다. 윤리사상사 자체는 다소 고풍스럽고 평범하여 새로운 시점이 보이지 않는다. 예전 풍부한 참고자료를 자랑하던 가라타니의 저작을 생각해 보면 일본 내의 동 시기에 대한 많은 저작들을 참고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점이 의문이다. 보다 근원적인 곳부터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대해서는 ‘유대교-기독교’라는 유럽 중심의 발상범위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이원론이나 최후의 심판으로 유대교에 큰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는 가라타니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가라타니가 조로아스터교의 강한 윤리성을 주목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의 철학적 사고의 탄생은 중요하지만, 화폐의 등장(역사상 최초의 주조화폐는 기원전 7세기에 소아시아의 리디아에서 만들어졌다)과 화폐의 일정한 보급은 인간의 사고와 경제생활 진전에 깊이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화폐의 상징기능이 사회에 침투해 가는 가운데 처음으로 철학적 사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배경에는 엄청난 시간 속에서 배양된 신화적 사고가 있다. 철학의 기원이라는 문제는 신화적 사고(유토피아)와 철학적 사고(로고스)와의 관계/단절이라는 문제이다. 거기에는 문학의 발생이라는 문제도 포함될 것이다. 신화적 사고 속에서 철학적 사고는 어떻게 석출(析出)되었는가. 그러나 가라타니에게는 그러한 발상을 볼 수 없다. 덧붙이면 가라타니는 “주술은 정주 이후의 씨족사회에서 발달했다”고 논하고 있지만, 유목민에게도 수렵민에게도 주술전통은 존재하고 있었다.

3. 이오니아와 이소노미아
가라타니는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나타내는 사료는 거의 없다”고 서술하면서도, 이오니아와 이소노미아를 스스럼없이 등호로 연결해 버렸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설을 전개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 스파르타 등의 폴리스와 이오니아의 폴리스를 구별해 ‘씨족적인 여러 제도가 농후한 사회’ vs ‘씨족적 전통이 없는 식민사회’로 대치시키는 것에 치중한다. 그러나 보통 밀레토스 등은 식민도시로 분류하지 않으며, 모시(母市)와 식민도시(그 성격은 일률적이지 않다)를 전혀 별개로 논의할 수는 없다. 일본의 그리스 역사가 사쿠라이 마리코(?井万里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인의 식민활동의 전제로서 폴리스의 성립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식민활동을 포함한 거대한 시대의 너울 속의 여러 요인이 상호 작용해 결정화한 결과가 폴리스의 성립이었다고 간주된다.” 더욱이 “다양한 공동체로부터 나온 식민지인들로 이루어진 이오니아에서는 처음부터 ‘개인’이 존재했다. 이오니아의 폴리스는 그러한 개인의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근대의 개인이나 사회계약의 개념을 고대 이오니아에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도 종종 인용되고 있다. 가라타니는 아렌트의 『혁명론』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이오니아=이소노미아’설을 뒷받침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소노미아라고 하는 말을 어디까지나 도시국가의 평등을 논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이오니아라고 하는 말은 전혀 쓰지 않았다. ‘이오니아=이소노미아’를 아렌트로부터 끌어와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가라타니는 ‘이오니아=이소노미아’를 역사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오니아=이소노미아’는 『철학의 기원』을 관통하는 개념이 되고 말았다. ‘이소노미아로서의 이오니아’는 말하자면 유토피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소노미아로서의 이오니아’ 인 것이다.

원래 이소노미아는 무엇인가. ‘무지배’라는 번역어는 적절한 것인가. 이소노미아라고 하는 말은 ‘이소(iso, 같다는 의미)’와 ‘노모스(nomos, 법, 넓게는 인위적인 것)’로 나뉜다(노모스는 physis(자연)과 대비되는 언어다). 따라서 아렌트의 이소노미아라는 말의 사용법은 옳다. 이소노미아의 원뜻은 도시국가의 ‘인위적 공공공간에서의 평등’=법적 평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무지배’라는 번역어는 이것을 등한시한 편협한 기능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인용한 부분의 바로 뒤에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소노미아는 평등을 보장했으나,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고 평등하게 자라나서가 아니라, 반대로 사람은 자연에서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인위적인 제도인 법 즉 법률에 따라 사람들을 평등하게 하는 도시국가를 필요로 한 것이다. 평등은 사람들이 서로 사인(私人)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만나는 이 특수한 정치적인 영역에서만 존재했다.”

또한 아렌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로도토스가 자유를 무지배와 동일시했을 때, 그 논점은 지배자 자신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타인을 지배하는 것에 의해 지배자는 타인과의 사이에서 본래라면 자유로웠을 타인들을 스스로 떠났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정치적 공간 그 자체를 파괴한 것이며, 그 결과 그 자신에게도, 그가 지배한 사람들에게도 이미 자유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자유는 시민들의 법적 평등과 동의라고 이해된다.

이상으로부터 고대 그리스에서의 이소노미아는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노력’ 자체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노력은 폴리스라는 인위적 공공공간(‘사람들이 서로 사인이 아니라 시민으로 만나는 특수한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민은 정치와 군사를 공동으로 담당하고 폴리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이소노미아는 도시국가의 통치방식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통치의 폐기’를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소노미아와 노예제는 병존하게 된다. 가라타니는 “이오니아에서는 노예제 생산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오니아를 이상화했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오니아의 반란에서 큰 역할을 한 폴리스인 키오스는 ‘섬의 강 건너 소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페라이아(Per?a, 해외 영토)에서 노예를 이용하여 곡물 재배를 행하여’ 번영했다. 원래 ‘식민 시절에 원주민을 종속민의 지위에 빠뜨리는 일도 있었고, 주변의 이민족으로부터 노예를 조달하는 것도 차츰 잦아진’다고 사쿠라이 마리코는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가라타니는 이소노미아가 실현된 예로서 아이슬란드와 18세기 미국의 타운쉽을 거론하지만, 이것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 대한 놀라운 사실(史實) 오인이다. 가라타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왔다. 한편 영국 식민지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시민혁명(1648년 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정도의 사람이 이런 오류를 태연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놀랍고도 슬픈 일이다.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담배 플랜테이션 노동력으로서 흑인노예의 도입이 시작된 것은 1619년의 일이었다. 시민혁명과 노예제의 부정을 연결하는 논술은 논외라고 할 수밖에 없다.

4. 자연철학, 플라톤
이른바 자연철학에 대한 가라타니의 기술은 ‘이오니아=이소노미아’에 집착하고 있는 것 외에는 그다지 통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파르메니데스에 대해서는 통설과 다른 위상(반 피타고라스=반 플라톤)을 부여하고 있지만 과연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비교적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고 있지만 독해 자체가 치밀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오니아의 유물론적 사상’이라는 표현이 보이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물질과 영혼은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리스의 철학의 기원을 논하면서 로고스에 별로 언급이 없는 것도 의문이다. ‘이소노미아’에 집착한 나머지 왜 이오니아에서 로고스가 생겼는지를 가라타니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뮈토스((muthos, 이야기 또는 신화)와 로고스의 관계야말로 철학탄생의 비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있다’의 사색을 시의 형태로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을 상기해 보자. “영혼의 끝을 당신은 걸어가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길을 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깊은 로고스를 그것은 갖고 있다.”

가라타니의 단조로운 플라톤 비판(이데아론 비판, 철인정치 비판)은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플라톤 철학이 비판을 받으면서도 강력하게 생존하고 있다는 것, 거기에 오히려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관념론으로 간단하게 치부하지 않는 것은 관념의 강렬한 자기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물론을 표방하는 가라타니의 표면적인 플라톤 비판은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온다. 가라타니의 ‘이소노미아’론은 대부분 플라톤적인 이데아론으로 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소노미아’라고 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애타게 연정을 보이는 가라타니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5. 소크라테스
가라타니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사회에 대하여 아테네를 ‘정치적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열’이라는 근대적인(헤겔-맑스적인) 개념으로 분석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소크라테스까지도 이소노미아와 연결하고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의 “사인(私人)으로 있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공인으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소크라테스가 가져온 것은 공인인 것과 사인인 것의 가치 전도다”라 하고,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한 것은 통치 자체의 폐기이며, 이소노미아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비판을 예상했는지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모르고’ ‘그렇게 의식함이 없이’ 이오니아적 사상을 부활시켰다는 논리를 편다. 이 정도면 견강부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통치 자체의 폐기’를 지향하고 ‘사인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 및 사상과 폴리스라는 공공공간은 분리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사회적인 규약(노모스)’에 따라 정의를 존중하는 신념이 각인의 삶의 방식에 관련된 신념군 중 최고 중핵을 구성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활동은 곤란에 처한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기는 펠로폰네소스전쟁과 그 패전 후의, 노모스의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노모스의 동요 속에서 왜 소크라테스는 아고라라는 공공적인 장으로 나가 집요한 대화를 행했는가. 거기에는 폴리스라고 하는 인위적 공공공간의 소생을 ‘영혼에 대한 배려’로부터 행하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고투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란 그 고투에 다름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그 싸움을 최후까지 이끈 것을 그의 죽음이 나타낸다.

30인 정권의 전제정치와 그것의 붕괴, 혼란기에 소크라테스의 ‘공인과 사인’의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은 법과 일체가 됨으로써 자유롭다고 하는 그리스적 법사상을 소크라테스도 신봉했다. 그것이 어떤 정의의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지던, 국법에 대해 개개 시민의 저항이 허락된다면 그것은 국법 자체의 파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테나이의 국법이 시민에게 다른 폴리스로의 이주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이상, 그러한 근원적인 구속이 거기에서 생겨 시민과 국법 사이에 실제 존재한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다만, 국법과 시민의 일체성을 강조하면서 소크라테스에게는 진정한 정치술(즉 영혼의 정화)은 폴리스의 공적인 일에 종사하기보다, 오히려 개개 시민과의 사적인 대화에 의해 달성된다고 하는 현실정치와 덕(탁월성)의 함양과의 사이의 긴장관계를 파악하려는 사고였지 않나 싶다.

더 중요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공과 사’를 근대사고의 틀에서 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사쿠라이 마리코는 공적(데모시오스)인 영역과 사적(이디오스)인 영역 외에 ‘코이노스’의 영역이 있음을 지적하고, ‘공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데모시오스와 코이노스의 두 종류가 있었다는 것’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한 ‘사적인 대화’의 장은 바로 ‘코이노스’의 영역이었다. “코이노스의 영역은 일상생활에서의 다양한 집합활동을 하는 그룹이 공유하는 영역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민뿐만 아니라 재류 외국인과 노예, 여성 등 아테나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생활의 장, 즉 주민 사이의 다양한 교류, 커뮤니케이션이 실현되던 공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폴리스적) 공간도, 오이코스(집)에 해당하는 공간도 아니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한 것은 이러한 코이노스의 영역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는 아고라에서 열렸지만, 아고라는 ‘코이노스’라는 ‘공’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소크라테스를 ‘이소노미아’와 결부시켜 허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철학의 기원’에 대해 무엇을 밝혔는가. 유감스럽게도 ‘이소노미아’라는 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역설적으로 『철학의 기원』은 ‘이소노미아’나 ‘통치 자체의 폐기’을 애타게 사모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새삼 가르쳐 주었다. 우리의 현실은 비참한 사건으로 넘쳐나지만, 요구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이소노미아’로 일탈하는 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어려움 그 속에서 민주주의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 아래의 링크에 <자신이 쓴 글인 양> 누군가가 올려 놨다가 최근 문제가 불거지면서 삭제됐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06916

출처를 밝히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왜 삭제했는지 모르겠다. 내 개인적으로는 출처를 안 밝히는 것이 삭제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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