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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화론의 행방 ― 시몽동을 출발점으로 하여
* 中村 大介(Nakamura Daisuke), 「個体化論の行方 : シモンドンを出発点として(Ou va-t-elle la pensee de l'individuation?)」, ≪関西学院哲学研究年報≫, Vol.38. pp. 17-34
* 옮긴이 : sanggels@gmail.com / 2009년 2월 10일.


‘개체’ 또는 ‘개체화’ 문제를 19세기 이래 생물학과 분리하여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에는 분자생물학의 성과나 오토포이에시스 논의 등과 분리하여 ‘개체’를 논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철학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문제에 관해 철학은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 이 글에서는 새로운 개체관, 개체화론을 수립하고자 했던 20세기 중반의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의 논의를 검토하고, 그의 논의로부터 영감을 얻은 철학자들이 어떻게 그의 논의를 전개시켰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현재에 있어서의 개체화론의 두 가지 동향을 다뤄보고자 한다.

논의는 다음의 순서로 진행된다. 우선, 1절에서는 시몽동의 개체화론은 개괄한다. 개체화론의 틀을 간략하게 소개한 후에 이것의 범례로서 기술적 대상의 개체화를 거론하면서 그의 개체화론을 명확하게 한다. 이어서 2절에서는 시몽동의 논의에 포함되어 있는 불철저함을 지적하고, 이러한 불철저함의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그리고 3절과 4절에서는 시몽동의 불철저함을 극복하고자 했던 두 명의 철학자의 논의로부터 시몽동을 기점으로 한 개체화론에 두 가지 동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절에서는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논의를, 4절에서는 질 들뢰즈의 논의를 각각 다룬다.


1. 시몽동의 개체화론 개괄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기본적 발상은 “개체로부터 출발하여 개체화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화를 통해 개체를 사고한다”(IGPB, p. 22)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말의 내실을 끄집어내는 형태로, 그의 개체화론의 틀을 주로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학적 발생≫(1964)을 사용해 정리하고자 한다.

“개체로부터 출발하여 개체화를 사고한다”는 종래의 “개체화론의 원리”의 발상, 바로 이것이 시몽동의 최대 비판 대상이다. 특히 그가 비판하는 것은 ‘질료형상론’과 ‘원자론’이라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다.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발단으로 한 ‘질료형상론’에서는 그 자체로 개체화된 ‘형상’ 및 ‘질료’라는 영역으로부터 개체의 생성이 논해지며, 다른 한편으로 데모크리토스 이래의 ‘원자론’에서는 이미 구성된 개체로부터 개체의 생성이 사고된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개체의 생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개체를 전제로 한다는 “승인하기 힘든 논점 선취”(Garelli, p. 57)를 포함하고 있다. 이 근본적인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질료형상론’과 ‘원자론’이 암묵적으로 인정해 온 전제를 다른 것으로 치환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암묵적 전제는 바로 ‘안정적인’stable 평형상태라는 생각이다. 시몽동에 따르면, “안정된 평형상태밖에는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개체화는 지금까지 적절한 방식으로 사고되지도 기술되지도 못했다”(IGBP, p. 24)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안정적인 평형상태’를 ‘준안정적인’metastable 평형상태라는 생각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2) 이런 평형상태에서는 개체와 다른 현실이 항상 몇 가지 ‘긴장상태tension’(IGBP, p. 29 이후)를 갖고 있는 시스템을 만들며, 더욱이 그것은 ‘실재réel’(IGBP, p. 230)의 수준에 있는 포텐셜을 항상 몰래 갖고 있다.3) 그리고 이러한 ‘긴장상태’에 결정적인 ‘불균형disparation’(IGBP, p. 206~222 이하)이 생겨나면, 그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잠재적이었던 포텐셜이 ‘현재화(顯在化, 現在化, s'actualise)’하며, 새로운 개체가 생성된다. 포텐셜은 이러한 현재화에서만 국소적으로 보여지게 된다.4) 물론 이 새롭게 생성된 개체도 다른 현실과 마찬가지로 포텐셜을 몰래 지닌 시스템을 만들며, 계속적으로 ‘개체화의 과정process’이 진전된다.5) 긴장상태를 지닌 시스템 내부에서 개체를 파악함으로써, 개체를 항상 새로운 개체로 생성해 나가는 상태에 놓여진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시몽동의 “개체화를 통해 개체를 사고한다”는 표현의 내실이다.

시몽동은 이러한 틀을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의 각 영역에서, 조금씩 차이를 집어넣으면서 적용하여 개체화론을 전개해 가는데, 여기에서는 범례로서 그가 ‘구체화concrétisation’라는 특별한 명칭으로 부르는 바의 ‘기술적 대상’의 개체화를 다루고, 그의 개체화론을 보다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6)


‘구체화의 과정’은 시몽동의 기술론을 다룬 책 ≪기술적 대상의 존재양식에 관하여≫(1958)에서 검토된다. 이것은 각 구조가 특정한 하나의 기능밖에는 맡고 있지 않은 기술적 대상(추상적 대상)이, 복수의 기능이 하나의 구조로 응축된 기술적 대상(구체적 대상)으로 발전하는 개체화의 과정으로,7) 전자에 있어서 각 구조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전체의 기능을 훼손하는” “이차적 효과”(MEOT, p. 34)를 상쇄하는 형태로 후자의 구조가 수립되게 된다. 이러한 구체적 대상의 일례로서 시몽동은 Guimbal 터빈이라고 불리는 것을 거론한다. 이 터빈은 금속 커버로 뒤덮인 발전기와 연결된 후에 수압관 속에 들어가 있다. 또한 금속 커버와 발전기 사이에는 오일이 투입되어 있다. 여기에서 물과 오일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복수의 기능을 응축하고 있다. 즉, 한편에서는 물이 터빈과 발전기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고온이 된 발전기의 열을 놓아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오일이 베어링(축받이)의 압력에 의해 발전기에 주유를 하는 동시에 자신의 고압력에 의해 물의 침투를 방지한다.8) 물과 오일은 서로 간에 악영향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이 기능의 응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터빈이 이미 존재하는 물과 오일이라는 환경 속에 단순히 놓여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자발적 요소(물, 오일)와 기술적 요소(터빈, 발전기)가 시스템의 ‘자기-조건화auto-conditionnement’(MEOT, p. 50, 55)에 의해 ‘연합’되며, 하나의 환경(연합환경)이 산출된다. 시몽동은 구체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구체화란 이미 주어져 있는 환경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탄생을 조건짓는 프로세스인 것이다. … 발명이 존재한다는 것, 그 발명이 그 창출된 환경 내부에서 설립하는 관계에 의해서 실현되며, 또한 정당화되는, 그러한 비약이 있기 때문이다.”(MEOT, p. 55) 기술적 대상은 그 자신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불연속적으로 창출함으로써 발전해 간다.9)

이러한 구체화 과정을 개체화론의 논의를 따라서 재구성해 보자. 추상적인 기술적 대상에서는 각 구조가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 반해, 즉 불균형이 생겨나고 있는 데 반해, 여기에서 “발명 이전에는 잠재적으로만 존재하는 환경”(MEOT, p. 55)를 현재화시켜서 그 불균형을 해결함으로써 구체적인 기술적 대상이 발명된다. 그리고 이 구체적이 된 기술적 대상은 더 이상 연합환경과의 사이에서 불균형을 유지하며, 잠재적인 포텐셜을 숨기고 있으며, 더욱 보다 구체적인 된 기술적 대상이 발명되게 된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구체화 과정을 간략하게 제시해 보자. 3절, 4절에서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전재시키는 두 가지 방향을 보여줄 때, 또한 그 두 가지 방향을 비교할 때, 이 간략화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환경에 대응하는 대상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합체된 대상이 창출된다.”(구체화의 정식.)

이상에서 시몽동의 개체화론은 개괄했다. 다음으로는 이 개체화론을 게슈탈트 심리학의 용어로 다시 말해 보고, 그것을 통해 그의 개체화론의 불철저한 부분을 지적하기로 한다.


2.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불철저함

시몽동은 게슈탈트 심리학을 곳곳에서 참조한다. ≪기술적 대상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에서는 특히 게슈탈트 심리학의 ‘그림 ― 땅’ 관계에 관한 사고가 크게 참조되며, 기술적 대상에 ‘그림’의 역할이, 연합환경에 ‘땅’의 역할이 각각 주어져 있다.(MEOT, p. 59.) 또한 앞절에서 보았듯이, ‘연합환경’은 이미 현재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연합환경 자체가 더욱 더 잠재적 환경, 즉 ‘포텐샬’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토대로 하면, 기술적 대상에 관하여 게슈탈트 심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기술적 대상에 있어서의 개체=‘그림’과 연합된 환경=‘땅’은 새로운 ‘그림 ― 땅’ 관계를 산출할 수 있는 포텐샬 = ‘땅 자체’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10)

이러한 “땅 자체”, 즉 포텐셜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근간에 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종래의 개체화 원리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있던 ‘안정적인 평형상태’를 ‘준안정적인 평형상태’로 치환하는 중요성을 지적하고, 후자를 ‘포텐셜’을 숨긴 개체화 시스템으로서 그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과연 시몽동은 그의 철학의 관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땅 자체’를 수미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미묘한 문제이지만, 일단 부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여기에서는 그의 ‘땅’ 개념의 사용 사례를 보기로 하자.

시몽동이 ‘땅’ 개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림 - 땅’ 관계를 산출하는 ‘땅 자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땅은 다이나미즘을 몰래 갖고 있다. … 땅이란 서서히 진전되어 가는 잠재성․포텐셜․힘의 시스템이다.”(MEOT, p. 58) 이것은 땅보다도 그림의 안정성을 지각에 있어서 중시하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하지만 그는 여러 곳에서 ‘땅’을 ‘그림 - 땅’ 관계에 있어서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즉 게슈탈트 심리학의 의미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 것이 ≪기술적 대상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3부이다. 시몽동은 여기에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서서리 이분화되어 가는 과정을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원초적 마술로부터 종교와 기술이 이분화하며, 더욱이 그 종교와 기술의 이론적 양태로부터 과학적 앎이, 양자의 실천적 기능으로부터 윤리적 사고가, 각각 분화하여 나타난다고 말한다. 지금은 이러한 이분화의 과정 자체의 정당성을 묻지 않는다. 문제는 그 자신이 말한 이분화에 있어서의 생성이 개체화론에 있어서의 ‘개체화 과정’과 동의어라고 명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EOT, p. 154 f), 다음과 가은 기술을 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이분화[원초적 마술에서 기술과 종교로의 이분화]는 [마술에 있어서의] 땅과 그림을 분리하여, 그림은 기술의 내용을 부여하고, 땅은 종교의 내용을 부여한다.”(MOET, p. 169) “땅과 그림은 분리”한다, 땅과 그림이 분화한다 등의 표현이 반복하여 등장한다. 하지만 “땅과 그림”을 분리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포텐셜, 즉 ‘땅 자체’가 ‘그림 - 땅’ 관계를 산출한다는 개체화론에서의 논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개체화론의 논의에 따라 이분화 과정을 말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시몽동은 자신의 개체화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말해도 좋은 ‘땅 자체’를 여기에서는 끄집어내지 않는다.

시몽동은 ‘땅’ 개념을 ‘땅 자체’라는 의미로도, ‘그림 - 땅’ 관계에서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그 때문에 ‘땅’과 ‘땅 자체’는 개념적으로 구별하지 않았던 것에, 시몽동이 ‘땅 자체’를 수미일관되게 끄집어낼 수 없었던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것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부자연한 것이 아닐 터이다.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전개시키는 관건은, 확실히 이러한 ‘땅 자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개념화하는가라는 것에 있다. 여기에서는 이 수준을 독자적 방식으로 가다듬어내고,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계승한 두 명의 철학자의 논의를 검토한다. 우선 한 사람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이다. 그는 기술적 대상 자체에 잠복해 있는 것으로서 ‘땅 자체’의 수준을 파악하고, 더욱이 데리다의 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쇄신하고자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질 들뢰즈이다. 그는 ‘땅 자체’, ‘포텐셜’을 시몽동 이상으로 적절하게 개념화함으로써 그의 개체화론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두 사람의 논의를 ‘땅 자체’의 수준에 관한 착상, 그리고 개체화 과정에 관한 논의라는 두 가지 점에서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3. 전개의 방향 (1) ―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경우

이 절에서는 스티글레르의 논의를 다룬다. ‘개체화’에 관한 그의 독자적 논의를 따라가고, 그런 후에 그가 어떻게 ‘땅 자체’의 수준을 생각했는가를 보고자 한다. 하지만 스티글레르의 ‘개체화’에 관한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끊임없이 참조하는 자크 데리다의 ‘차연’이나 ‘대리-보충’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데리다의 ‘차연’différence의 운동이란 그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되듯이, 동일한 운동이면서도 맥락에 따라서만 그 의미나 효과를 확정할 수 있다고 간주된다.11) 하지만 그 기본적 구조는 그 자신의 ‘대리-보충의 구조’라고 불리는 것과 동등하다. 그 대리-보충의 구조는 1967년의 ≪목소리와 현상≫에서는 “어떤 가능성이 거기에 추가될 수 있다고 말해지는 바로 그것을 그 가능성이 뒤늦게 산출한다”(Derrida, 1967 a, p. 99)라고 정식화된다. 여기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에크리튀르론에서 이 ‘대리-보충의 구조’를 확인해 두자. 데리다에 따르면, 파롤(말해진 말)을 에크리튀르(쓰여진 말)가 나중에 대리-보충한다는 유형의 논의가, 플라톤 이래, 철학의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보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사실이 전도되어 있다. 빠롤 속에도 에크리튀르의 성질(예를 들어 반복가능성)은 깃들어 있으며, 에크리튀르로부터 역행적으로 생각된 효과/결과(effet)로서 파롤의 우위는 주어져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파롤과 에크리튀르는 분리될 수 없으며, 대립적으로 산출되는 것이다. 이 대립하는 개념쌍을 산출하는 운동이 여기에서는 ‘차연’이라고 불린다. ‘차연’은 또한 파롤의 선행성과 우위성, 그리고 이것들을 폄하하는 것으로서의 에크리튀르의 이차성을 말하는, 이른바 음성 로고스 중심주의를 폭로하기 위해서도 여기에서는 기능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여기에서의 ‘차연’의 운동은 다음과 같은 ‘대리-보충의 구조’를 갖게 된다. “에크리튀르가, 거기에 추가된다고 말해지는 파롤을, 뒤늦게 산출한다.”

그런데, 스티글레르는 이러한 ‘차연’의 운동, 또는 ‘대리-보충의 구조’가 시몽동의 ‘구체화 정식’과 동일한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시몽동에게 있어서는 기술적 대상과 환경이 대칭을 이루며,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에크리튀르와 파롤이 대칭을 이루어 산출된다는 유비에 스티글레르는 주목했던 것이다. 또한 스티글레르는 ‘구체화의 정식’에 포함된 관계성을 일반화한 시몽동의 ‘전도적transductive’ 관계12)를 “하나의 항이 다른 항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또한 두 항이 함께 구성하고자 하는 관계”(Stiegler, 1996, p. 10)라고 재정식화하며, 이 관계를 산출하는 원동력으로서 데리다의 차연을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전도적 관계를 산출하는 ‘개체화’ 과정은 스티글레르에게 있어서 데리다의 ‘차연’ 운동과 대등하다. 하지만 왜 시몽동의 논의에 데리다의 그것을 겹쳐놓지 않으면 안 되는가?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그것은, 시몽동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MEOT, p. 56.) 포텐셜을 현재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이나 “선취라는 발명적 기능”(Ibid)이 불가결하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연합환경에 선행하여 개체화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시몽동의 사고를 철저하게 하면, 인간과 기술적 대상은 개체화 과정에 의해 동시에 발명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스티글레르는 기술적 대상의 발명을, 새로운 연합 환경의 창출을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기술적 대상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발명하는 것으로서도 파악한다. “기술이 인간을 발명하고, 인간이 기술을 발명한다.”(Stiegler, 1994, p. 148) 스티글레르는 이 기술과 인간의 상호 구성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전자에 대해서는 ‘quoi’(프랑스어로 ‘무엇?’을 의미하는 의문사)라는 말을, 후자에 대해서는 ‘qui’(마찬가지로 ‘누구?’를 나타내는 의문사)라는 말을 각각 배정한다. 그리고 그는 시몽동의 인간주의를 제거하는 이러한 착상을,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살아 있는 것(le vivant)을 살아 있지 않은 것(le non-vivant) 일반 위에서 분절한다”(Derrida, 1967, p. 95)고 말한 ‘차연’의 특징으로부터 이끌어낸다. ‘색명의 역사’의 1단계인, quoi의 발전과 뒤얽혀 진전하는 qui의 역사,13) 그리고 이 양자의 구성이 즈음에 작동하는 ‘차연’의 운동, 바로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개체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시몽동의 ‘땅 자체’의 수준에 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이 수준을 “이미 거기에 있는 것, le déja-là)”라는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14)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란, “내가 체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과거이며, 또한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나 자신의 과조도 내가 가질 수 없는 그러한 과거”(Stiegler, 1994, p. 150)로 간주한다. 우선 “나의 과거”란 무엇일까? 그에 따르면 그것은 후설의 내적 시간 의식의 논의에 있어서의 ‘제1차 기억’(과거 파악), ‘제2차 기억’(상기)이다.15) 그리고 이 “나의 과거”를 떠받치고 있는 과거야말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라는 수준에 있는 과거이며, 기술적 대상, 즉 quoi가 그 전달을, 또는 그러한 것으로의 접근access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로 간주된다. quoi는 시몽동이 주장하는 구체화의 과정에 의해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며, 또한 과거를 담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quoi가 지닌 ‘과거’가 없으면 나의 ‘과거’ 역시 구성되지 않을 것이다. (이 과거는 ‘제1차 기억’과 ‘제2차 기억’을 대비시켜 ‘제3차 기억’이라고도 불린다.) quoi가 축적하고 있는 독자적인 과거를 전제로 하여 qui와 quoi의 새로운 짝짓기를 산출하는 차연의 운동이 생겨나며, 그리고 그 quoi에 축적된 과거로 이루어진 차연의 운동이 생겨난다. … 스티글레르의 개체화론의 틀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그의 개체화론은 시몽동의 개체화론 속에서 특히 기술적 대상의 개체화(구체화)에 주목하고, 거기에 존재하는 인간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데리다의 논의를 중첩시킴으로써,16) 생명의 역사와 불가피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기술적 대상의 발전을 생각하는 것이다.


4. 전개의 방향(2) ― 질 들뢰즈의 경우

다음으로 들뢰즈의 논의가 있다. 그는 만년까지 지속적으로 개체화론을 전개해 왔는데, 여기에서는 시몽동을 토대로 개체화론을 논하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대해 교대로 논하기로 한다. 그리고 앞 절과는 반대로, 그가 “땅 자체”, ‘포텐셜’을 시몽동 이상으로 적절히 개념화한 점을 우선 다루며, 그런 후에 그에 의한 개체화 과정에 관한 기본적 논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들뢰즈가 베르그송과 함께 도입한 ‘가능적인 것le possible ― 실재적인 것le réel’, ‘잠재적인 것le virtuel ― 현재적인 것l'actuel’이라는 두 가지 대립쌍의 구별, 특히 ‘가능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구별은 유명한데, 이러한 구별은 또한 ‘포텐셜’ 개념을 일관되게 다루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으로, 가능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고’, ‘사후적인 산물, 그 가능적인 것과 유사한 것에 닮아 역행적인 것으로 조작된 것’인 반면,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고, 그 자체로 완전한 실재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그 잠재적인 것의 ‘과정이 현재화’이지만 ‘현재적인 항들은 잠재성과 유사하지 않다.’(Deleuze, 1968, p. 272 f)

‘잠재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처럼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발명의 순간에만 현재화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인 것’이다. 이것이 시몽동의 ‘포텐셜’에 대응한다는 것은 명확할 것이다. 또한 ‘잠재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시몽동처럼 현재화한 연합환경 = ‘지도 - 땅’ 관계에 있어서의 ‘땅’과 혼동될 수도 없다.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은 시몽동이 불철저한 방식으로만 다룰 수밖에 없었던 ‘포텐셜’을 보다 적절하게 개념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잠재적인 것’은 예를 들어 지도와 땅과 같은 “적어도 두 가지 큰 수준, 이질적 현실의 2단계” 사이에 배분되어 있다. 이러한 이질적 현실의 2단계는 항상 ‘disparate’ 또는 ‘불균형, disparation’(Ibid., p. 287)의 상태에 있는데, 들뢰즈는 이러한 불균형 상태를 ‘강렬도, intensité’라고 부른다. 불균형 상태를 ‘강렬도’라고 부르는 것의 중요한 함의는, 불균형이야말로 땅과 지도처럼 현실의 두 가지 수준을 산출하는 것이며, 땅과 지도, 높음과 낮음, 좌와 우 등을 산출하는 ‘깊이 자체la profondeur elle-même’이다.(Ibid., p. 295)라는 견해를 제출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가로, 세로, 깊이 등의 연장을 확장하는 불균형, 즉 근원적인 ‘깊이’, 바로 이것들이 개체화가 행해지는 ‘장’이 된다. 개체화란 ‘disparate를 소통시키는 것’이며, 강렬도의 양들/내포량(quantités intensive)17)의 본질적 과정이다. 즉 들뢰즈가 생각하는 개체화 과정이란 배분된 포텐셜, 즉 잠재적인 것을 강렬도의 작동이 현실화시키는 것으로, 불균형을 해결하고 새로운 현실의 수준들을 만드는 것이며,18) 물론 그 기본적인 논의의 틀을 제공하는 것은 시몽동이다. 앞의 1절에서 보았듯이, 시몽동에게 있어서 ‘불균형’이란 개체를 포함한 내부의 불균형, 기술적 대상으로 말하자면 각 구조 사이에, 또는 개체와 연합환경 사이에 이는 불균형이며,19) 그 불균형의 해결 과정이 개체화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들뢰즈는 시몽동의 논의를 기본적으로 답습하면서 ‘포텐셜’, ‘땅 자체’를 ‘잠재적인 것’이라고 보다 적절하게 개념화하며, 더욱이 ‘불균형’을 ‘강렬도’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시몽동 이상으로 그 ‘불균형’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수립한 것이다.


이상에서 스티글레르와 들뢰즈에 의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계승을 살펴보았다. 정리해 보자. 한편으로 스티글레르는 시몽동의 특히 기술적 대상의 개체화(구체화)의 논의를 계승했다. 그때, 시몽동의 논의에 포함된 인간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데리다의 ‘차연’의 발상을 사용하여, qui(인간)와 quoi(기술적 대상)는 서로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quoi가 지닌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라는 특수한 수준의 과거야말로, 시몽동의 “땅 자체”, “포텐셜”에 해당한 것이었다.20) 다른 한편으로, 들뢰즈는 시몽동의 개체화론 일반의 틀을 답습한다. 그런 위에서 시몽동의 불철저한 개념 설정을 제거하고, ‘잠재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땅 자체”, “포텐셜” 수준을 표현하고, 더욱이 개체화 과정을 불균형의 ‘강렬도’가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하고, 시몽동 이상으로 불균형에 큰 힘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스티글레르와 들뢰즈, 어떤 사람의 논의가 보다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개체 및 개체화의 논의로서 어떤 것이 보다 생물학적, 넓게는 과학적인 정당성을 가진 것일까? 전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 양자의 논의의 접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지 않는 이 글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답할 수 없다. 하지만 후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어느 쪽도 과학적 정당성에 관해서는 유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양자의 논의를 부정해 버리는 것은 나무 빠를 것이다. 조르쥬 캉길렘이 1945년에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해 두자. “개체란 하나의 현실인가, 그것도 환상인가, 또는 이상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설령 생물학이든, 어떤 하나의 과학은 아니다. 그리고 설령 모든 과학이 그러한 해명에 각각 기여할 수 있는, 기여해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가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본래적으로 과학적인 것인지 여부는 의심스럽다.”(Canguilhem, p. 78.)



참고문헌

* 시몽동의 저작에만 다음의 약호를 붙여 놓았다. [ ] 안은 초판년도를 나타낸다.

   MEOT : Du modo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 Aubier, 1958.

   IGPB  :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PUF, 1995 [1964].

   IPC   :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Aubier, 1989.


Bachelard, Gaston, Le nouvel esprit scientifique, PUF (14ed.) 1978 [1934].

Beardsworth, Richard, “Thinking Technicity,” in C. Norris & Roden (eds.) Jacques Derrida (Sage Masters of Modern Social Thought) Vol. 3, London, 2003, pp. 39-54.

Canguilhem, Georges, La connaissance de la vie, Vrin, 1992 [1965].

Deleuze, Gilles, Diffe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_____________,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Minuit, 2002.

Derrida, Jacques, La voix et le phénomène, PUF, 1967a.

_______________,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b.

_______________, Positions, Minuit, 1972a.

_______________, La dissémination, Seuil, 1972b.

Garelli, Jacques, “Transduction et information,” in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de l'individuation et de la technique, Albin Michel, 1994, pp. 55-68.

Stiegler, Bernard, La technique et le temps 1. La Faute d'Epiméthée, Galilée/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 1994.

______________, La technique et le temps 2. La désorientation, Galilée, 2001.

______________, La technique et le temps 3. Le temps du cinéma et la question du mal-être, Galilée, 2001.

アリストテレス, ≪形而上學(下)≫(出隆 옮김), 岩波文庫, 1961년.

米虫正巳, 「リクール、メルロ=ポンティとデカルト ― Ego と主體性 (1)」, ≪關西學院哲學硏究年報≫, 제33호, 1999년, 1-42쪽.

広松浩司, 「技術的對象の現象學 ― ジルベルト・シモンドン思想の射程 (2)」, ≪東京大學敎養學部外國語學科硏究紀要≫, 제43권2호, 1996년, 25-45쪽.





1) 이 글은 2004년 9월 22일 日佛철학회에서 같은 해 10월 17일 관학철학회에서 행해진 연구발표를 가필․정정한 것이다.


2) ‘안정된 평형상태’와 ‘준안정적인 평형상태’의 대치는 그의 개체화론의 도달점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IGPB, p. 24, 69, 204, 211, IPC, p. 48이하 등.


3) ‘포텐셜’은 물리적 개체화의 수준에서는 ‘포텐셜 에너지’라고 말해진다. ‘준안정적인 평형상태’, ‘포텐셜 에너지’ 등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시몽동은 개체화론에서 사용하는 몇 가지 개념을 물리학, 특히 열역학에서 차용해 왔다.


4) 이상의 서술을 참조. “포텐셜한 잠재성의 사고가 항상 특유한 것(particuliére)이라는 점을 주기해 두고 싶은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 포텐셜은 현실(réel)의 일종의 영역의 포텐셜이며, 그것이 형성한 안정적인 시스템에 있어서의 현실 전체의 포텐셜은 아니다. … 기술적 행위는 기술적 행동거지 하에서 현실화된 태세(態勢)에 있는 잠재성에,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재성은 삽입되며, 국소화된 것이며, 특유한 것이다.”(MEOT, p. 204) 그 때문에 시몽동에게 있어서 포텐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뒤나미스)과는 아주 상이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목재 안에 있는 헤르메스의 상, 현재 연구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연구할 수 있는 자 등이 ‘가능성’이라고 불리는데(아리스토텔레스, 32-33쪽), 시몽동에게 포텐샬이란 발명의 순간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5) 이상의 서술로부터 시몽동의 사유가 극히 변증법적이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나올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몽동은 변증법과 자신의 개체화론이 구조적으로는 얼핏 보기에 닮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한다. (1) 변증법에서는 존재와 생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생성이 존재를 변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생성한다고 말해져야만 한다.(IGPB, p. 234 이하.) (2) 변증법에서는 생성이 거기에서 작동하는 시간이라는 틀이 필요하지만, 개체화로서의 생성에서는 시간 그 자체가 불균형의 해결이다.(IGPB, p. 32) (3) 부정성은 개체화 속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기술적 세계에서는 부정성이란 개체화이 결여이며, 자연적 세계와 기술적 세계의 불완전한 결합이다. 이 부정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해결의 탐구로 나아가게 하지만, 그 자신이 기술적 존재 안으로 진입하지는 않는다.(MEOT, p. 70.)


6) 기술적 대상을 범례로 했던 것은 자의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비판되어야 할] 질료형상 도식이 형상획득의 기술적 조작으로부터 끄집어내어진 … 범례인”(IGPB, p. 231) 이상, 질료형상 도식이 의거하는 기술적 조작의 과정에 그 도식 이상으로 적절한 설명이 주어질 수 있는가 여부는 시몽동의 사고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7) 그 때문에 広松浩司 씨는 concrétisation을 ‘응집’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한 것이다.(広松, 29쪽).


8) 위의 Guimbal 터빈의 예는 MEOT, p. 54 이하.


9) 한편, 기능의 응집은 또한 차이화를 수반하기도 한다. “두 개의 과정[차이화의 과정과 기능이 응집되어가는 구체화의 과정]은 사실상 결부되어 있다. 차이화가 생길 수 있는 것은 이 차이화가 전반적인global 작동을 위해 상관(相關)하는 효과들을, 필요한 결과의 관점에서 계산된 의식적 방식으로, 집단의 작동으로 통합하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MEOT, p. 31 이하.)


10) ‘지-도(그림-땅, 圖-地)’ 관계를 산출하는 ‘땅 그 자체’라는 사고방식에 관해서는 米虫正巳 씨의 논문을 참조했다.(米虫, 35-36쪽).


11) 차연이란 ‘체계적이고 상호 환원불가능한 개념들의 배치를 모으고 있는’ 것으로, “그 각각이 작업의 결정적 순간에 개입하게 된다고 하는 보다 특출난 것”이다.(Derrida, 1972a, p. 17.)


12) 시몽동에게 ‘전도성(轉導性)’이란 ‘통합(intégration)과 차이화’(IGPB, p. 158)을 통해 개체가 생성하며 확대해 가는 성질을 말하는, 물리적 개체화, 생물적 개체화, 심리적 개체화, 사회적 개체화, 그리고 기술적 구체화 등의 영역들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물리적 개체화에 있어서는 이러한 ‘전도성’은 물리학의 발전을 가능케 했던 논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바슐라르의 ‘귀납’에 관한 사고방식의 영향을 볼 수 있다.(Bachelard, p. 10.)


13) “차연이란 생명 일반의 역사이다. 그 역사 속에서 차연의 분절화, 단계가 산출되는 것이다.”(Stiegler, 1994, p. 148.)


14) “위상의 존재론”으로 불리는 시몽동 독자적인 존재론 속에서, “포텐셜”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전-개체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스티글레르는 “우리들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불려져 온 것”과 동일시한다.(Stiegler, 2001, p. 148 이하.) 그는 ‘전-개체적인 것’에 관한 자신의 해석이 시몽동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보적이다.


15) 여기에서는 자세히 건드릴 수 없었으나, 스티글레르는 후설의 시간론을 Stiegler, 1996, pp. 217-278에서 분석한다.


16) 단, 스티글레르가 생각하는 기술이 ‘기술적 대상’에 머무는 한, 그의 논의가 인간주의로 재귀할 위험을 수반한다고 비어스워드는 지적한다. “… 스티글레르가 껴안고 있는 위험이란 인간화의 과정에 적합한, 기술의 오로지 구체화된 항[기술적 대상]으로 기술성을 생각한다는 점이다.”(Beardsworth, p. 49.)


17) “강렬도”는 항상 ‘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강렬도는 말려들며/전제되며impliqué, 포함되며enveloppée, 배아상태로 주어지는embryonnée 양이다.”(Deleuze, 1968, p. 305.) 한편, quantité intensive는 일반적으로 칸트의 ‘내포량’intensive Größe“의 프랑스 번역어로 알려져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 ‘내포량’이란 부분에서 전체로의 계기적(繼起的)으로 종합되는 외연량과는 반대로, 지각의 예료(豫料)로서 순간적으로 지각되는 질의 ‘도(度)’이며, 들뢰즈는 이 발상을 부분적으로는 평가하면서도, 칸트가 연장에 ‘외연량’을, 질에 ‘내포량’을 할당했다는 것을 비판하고, 연장과 질로 확장되어 가는 하나의 깊은 수준에 ‘내포량=강도량’ 개념을 배정한다.(Ibid., p. 298.)


18) 해당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념들이란 잠재적인 다양체들이며, … 차이적/미분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 무엇이 이념의 안에 공존하는 관계들로 하여금 질과 연장으로 스스로를 이화(異化)/분화하는(se différencier)하게끔 결정하는가? 그 대답은 바로 강렬도량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대답은 현재화(顯在化)/현재화(現在化)의 과정에서의 결정인자인 강렬도이다. 강도야말로 드라마화한다dramatise.”(Deleuze, 1968, p. 315 이하.) 그리고 “강렬도가 개체화를 행하는 것이며, 강렬도량들이 개체화를 수행하는 요인factor인 것이다.”(Ibid., p. 317)


19) 시몽동의 ‘불균형’에 관해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이 출판되기 2년 전에 쓴 시몽동의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개체화≫의 서평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다.(Deleuze, 2002, p. 121.)


20) 또한 스티글레르의 논의를 힌트로 삼아 데리다의 저작을 포텐샬에 관한 독자적인 시론을 포함한 것으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데리다가 90년대에 들어서부터 자주 이용하는 ‘망령fantôme’이나 ‘망령spectre’ 등의 기묘한 개념은 ― 사실 그는 60년대부터 이러한 개념들을 이용했다(Derrida, 1972b, p. 129를 참조) ― 데리다의 포텐셜에 관한 기본적 착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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