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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일본어 서평 2


토호쿠대학의 모리 이치로 교수가 쓴 것이다. 다음은 원문 링크이다. 

http://booklog.kinokuniya.co.jp/mori/archives/2013/02/post_8.html?hc_location=ufi


아래는 번역이라기보다는 대체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그리고 글의 앞 부분은 번역을 안 했는데 생각해보니 중요한 대목이기는 하다. 


앞 부분에서 서평자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했던 세 개의 구분인 노동, 작업, 활동의 구별이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아래에서 보듯이 이소노미아를 풀이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에서 페팃의 공화주의로 이어지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읽기 전에 다음의 정보도 미리 전달한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는 <철학의 기원>을 다룬 잡지의 특집호가 있었다.http://www.ohtabooks.com/publish/2013/02/08165414.html

나는 당분간 읽을 시간이 없지만, 아무튼 구입은 해 놔야겠다.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여기에 大竹弘二가 쓴 「イソノミアの名、民主主義の名」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에 따르면, 발리바르와 호이징거, 하이에크도 이소노미아에 대해 언급을 했다고 한다.

1. 발리바르
1)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2)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 분명 두 개의 글을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뒤적여봐야겠다.

2. 호이징거는 일본어 번역본 『汚された世界』(磯見昭太郎訳、河出書房新社)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3. 하이에크는 『自由の条件Ⅱ 自由と法』(気賀健三・古賀勝次郎訳、春秋社)이라고 하니, The Constitution of Liberty인 것 같다. 
* 이 책도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ㅠㅠ

** 이 정보는 http://makorin.blog.jp/archives/51951042.html에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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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절호의 기회에, 다시금 이렇게 물어보자.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에서 끄집어낸 ‘이소노미아’란 무엇이었는가라고. 이것을 감안해야 가라타니의 이소노미아 해석의 특이성도 부각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소노미아란 ‘이소(같다, 동등하다)’와 ‘노모스(관습, 법)’의 합성어다. ‘법적 평등’이라는 번역어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말에는 강한 의미에서의 ‘법’이라는 함의는 없다. 오히려 이 경우의 ‘노모스’란 ‘퓌시스(자연)’와 대비되는 ‘인위’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즉 자연적으로는 평등하지 않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근저에 있으며, 그렇기에 자연적 격차와는 별도로, 어디까지나 인간들 사이의 약속으로서, 서로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서 간주한다는 약정이 오간다. 그러 합의 아래서 형성된 동등한 자들의 공동체 형성이 ‘이소노미아’라고 불린다. [지금] 봤듯이, 이 발상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근대의 공리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인간들 사이에는 외모, 능력, 재산 등의 사적 처지[境遇]의 점에서, 메우기 힘든 불평등이 있다. 하지만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면 좋은 것이며, 그렇기에 공동체에 대한 각자의 귀속의식도 강해지고, 그 결과 공동체 전체의 사기도 올라간다. 한줌의 주인(owner)이 홀로 판단[専断]하기보다는 구성원 전체가 공동 참가자로서 나란히 서로 겨루는 쪽이 [그 기세가] 드높여진다. 역시 각자가 경합을 벌이고 자기를 주장하는 만큼, 귀찮은 일이 생기고 비효율적으로도 보이겠지만, 길게 보면 가장 잘 된다. 크고 작은 단체에 관해서도 해당되는, 이 조직 활성화의 비결을 국가공동체의 구성원리로서 채용하는 것이 정치형태로서의 이소노미아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대등제도’(対等制度)라고 직역하기로 했다. 
가라타니는 이소노미아를 ‘민주정(데모크라티아)’과 대비시키고, 고대에 출현한 탁월한 정치형태로서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정당하며, 이 책의 가치도 거기에 있다. ‘민중’의 ‘지배’라는 뜻의 약간 자극이 강한 말에 비해, 페어플레이의 경기정신을 구현하는 ‘대등제도’는, 헤로도투스부터 플라톤까지 아름다운 말로 간주됐다. 그렇지만 고대민주정과 근대민주주의를 싸잡아 생각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소노미아를 ‘무지배’라고 번역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가라타니가 인용하는 혁명론의 대목에서 아렌트도 ‘무지배(no rule)’라는 이소노미아의 첫 번째 뜻을 강조한다. 하지만 ‘무지배’라는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이소노미아의 본 뜻은 분명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배로부터의 자유’는, 적극적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라타니는 여기서, 빈부의 격차 없음, 즉 경제적 평등이라는 논점을 꺼낸다.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식민도시에서는 당초, 식민지 이주자들이 구속이나 특권 없는 맹약 공동체를 창설하고, “사람들은 실제로 경제적으로도 평등했다”(25頁).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료는 거의 없음”(42頁)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담하게 몰아붙이는 것의 옳고 그름은 차지하더라도, 적어도 이소노미아를 경제적 평등에 귀착시키는 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가라타니는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이소노미아 개념을 발견한 유일한 논자가 아렌트라는 것을 인정한다(24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를 논할 때 경제적 평등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척도로서 들여오는 것에 대해 아렌트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은 아주 깨끗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원래 맑스의 유물사관에서의 ‘생산양식’에 대한 정위[위치규정定位] 대신에, ‘교환양식’의 차이로부터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보고자 한다. 그 위에서 자신의 ‘세계공화국’이라는 선전문구(catchphrase)에 걸맞는, 더욱이 보편종교일 수 없는 이상적 ‘교환양식’을 추구하며, 이것을 이소노미아에서 자유와 평등이 양립됐다는 흔적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발견한 ‘어디에도 없는 나라(유토피아)’는, 어떤 사정거리를 간직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실측(実測)은 다른 논자들에게 맡기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사관의 재검토에 관해서도 제외한다. 나로서는 윤색된 이소노미아 개념의 향배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고대에 구축된 대등제도의 의미 차원을 발굴하고자 하는 아렌트의 시도를, 자신에게 맞게 왜곡하고, 그 중 맛있는 곳만 집어먹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의 풍경을 일신하는 듯 보이는 이 책은, 사실 현대인에게 흔해빠진 편견에 휩싸여 있다. 정치적 평등을 “단순한 추상적 평등성”(27頁)으로 간주하고, 경제적 평등을 중시하는 발상부터가 그렇지만, 그것과 나란히 눈에 띄는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그것이 노예제에 의거하고 있음을 방패로 삼아 단죄하는 상투적인 논조이다. 노동이나 작업을 시민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경멸한, 활동 본위의 폴리스적 신분질서가 허용될 수 없는 것도, 생산성에 무게를 둔 근대인의 품질증명일 것이다. 현대의 논자가 보기에, ‘노동/작업/활동’이라는 아렌트적 삼분법은, 난센스처럼 비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아테네 ‘제국’이, 이것도 현대식으로 고발되는 한편, 여러 차례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불려진다. 폴리스를 뛰어넘은 ‘코스모폴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의 장점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을 철폐하려고 한 점에 있다고 한다. 공과 사의 구별이라는, 근대사회에서 들어맞는 표적이, 여기서도 저격된다. 그 무차별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정치적인 것’은 완전히 지워진다.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한 것은 통치 자체의 폐기이며, 이소노미아(무지배)이다”(213頁). 맑스주의자라면 ‘국가의 폐절’을 이상으로 삼는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폴리스를 사랑한 고대의 시민철학자에게, 그 취향을 강요할 수는 없다. 정말이지 “‘소크라테스 이전’이라고 하면, 소크라테스 그 사람을 거기에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217頁)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크라테스를 폴리스를 싫어하는 근대인에 포함시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이소노미아란 ‘무지배’, 즉 지배하는 것에도 지배되는 것에도 무게를 두지 않는 정치체제이다. 특히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다. 누군가에게 지배된다는 것은 사절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지배된다는 것은 예속되는 것, 즉 자유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 반대로,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쪽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달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지배하는 것은 대등한 관계에서 경합할 가능성을 빼앗기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을 재미없다고 느끼는 유형의 인간도 있다. 이소노미아는 이렇게, 지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배하는 것도 좋다고 하지 않는, 자유를 사랑하는 자들이 공동으로 구축하고 대등한 유동공간의 것이다. 
이소노미아를 이소노미아답게 하는 것은 공공의 사항에 동등하게 참여할 자유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의 기쁨이다. 이 경우의 ‘자유’란, 빈부의 격차의 해소도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도 아니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새로운 시작’에서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빈 틈’을 의미한다. 
복수성에서 빛을 내며 나타나는 자유의 경험. 이런 경험 지평이 고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이소노미아라는 고어는 전하고 있다. 이 공적 자유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근대에서 혁명정신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번번이 재발견됐다. 그 이야기꾼이고자 했던 것이 아렌트였다. 이소노미아의 빛줄기에, 우리는 몇 번이나 이것저것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 회상의 기회를 다시 갖게 된 것을 새삼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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