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얘기를 현대로 되돌리자.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GDP70%에서 80%“3차 산업이 생산한다. 서비스의 대가, 인적 자본의 렌트 그대로 부가가치로 승인되고 있는 셈이다. 서비스의 부가가치생산비그런 것은 주관적’(따라서 정치적’)으로만 결정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봤다(31) ― 가 무엇인지를 괘념치 않고, 서비스의 대가=렌트가 가치의 생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서비스의 제공은 당당하게 그 대가로서, 화폐를 매개로 사물[물건]을 청구할 수 있다. 이런 현황에 대해, 20%에서 30%의 가치밖에 대표하지 않는 사물[물건]을 모두가 함께 나누고 있다고 말하면, 그만큼 사물[물건]의 생산성이 높아진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선에서 끝내는 방향도 강하겠지만, 우리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물건[사물]을 배분하는 구조가 생산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이 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배분의 구조로서의 렌트는 태초부터 물건[사물]빼앗는일반적인 방식이라고 역사적, 이론적으로 제시하려고 했다(32). 그 지점에서 봤을 때, GDP70%에서 80%를 웃도는 ‘3차 산업은 어디까지나 빼앗는구조가 발달한 결과로 간주되어야 한다. 생산된 모든 물건[사물]70%에서 80%를 이것을 생산하지 않은 인간이 빼앗고있는 것이다.

앞 절에서의 논의를 감안하면, 물건[사물]가격과 관련시켜 얘기할 때의 서비스의 가격은 은유일 수밖에 없다. ‘생산비를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금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으로는 일군의 상품으로 표시되는 생명의 생산비’(=유지비)? 그렇게 생각하고 쉽게 납득해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조금만 멈춰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상하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생명의 생산비는 생명밖에는 생산하지 못하고(그래서 임금이라는 특수 범주로 처리된다), 상품으로서의 서비스 그 자체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급 서비스의 생산에는 높은 비용이 들 것이라는 상식에 의존하여, 가격으로 비용을 결정하려고 해도, 사물의 영역에서의 가격=생산비를 원용하면서 사실은 그것을 무시하고(물건의 경우의 ‘=’는 생산비 쪽에 가격을 정의-결정시킨다), 서비스의 가격을 동어반복적으로 말하는 것밖에 안 된다. ‘가격의 높음/낮음을 가져오는 요인, 서비스의 상대가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가져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임금이라고 간주하려면 동종의 물질적 노동(물건의 생산)을 참조하게 되겠지만, ‘동종참조한다는 것은 바로 은유의 조작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서비스의 가격은 오히려 산업자본가의 이윤에 상당하는가? 그러나 그 경우에는 무엇이 밑천으로서 선불되었는가? 서비스의 가격을 생명의 생산비자본으로서의 인간이 보탠 부가가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임금의 경우보다 더 은유적인 조작이다. 타인을 고용하지 않고, 자신에게 자본투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구매력빌려주다/지불하다라는 것은, 소비를 삼가는 것의 은유일 뿐이며, 경제학적으로는 투자도 뭣도 아니다. 서비스의 가격은 자기투자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인이 보면, 단순한 참을성을 투자로 인정한다는 강변일 뿐이리라.

아무튼 GDP에서 3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화폐적 조작에 의한 은유의 확대 비율이며, ‘생산/교환’-‘임금/이윤강탈’-‘렌트의 병존 비율이며, 자율적인 영역으로서의 경제의 축소 비율이다. 그래도 어쨌든 오늘날에는 실현된 렌트는 부가가치이다. 정당한 보수든 아니든, 렌트는 가치생산의 결과인 것처럼 실제로 보인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근본적으로 부당한지 여부는 옆으로 치워두고, 렌트를 가치에 포함시켜 셈하는 현실적 효과나 결과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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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는 어디까지나 스톡(자산)에 대한 보수이다. 렌트가 실현될 때, 그것은 스톡이 가치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에 관한 한,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스톡이 가치를 낳는다고는 할 수 없고 축장 비용이 드는 잠든자산은 얼마든지 있다 자산 가치의 평가이익을 확정하는 것이 아님은 주식 소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실제로 팔릴때까지, 주식이라는 자산은 갖고 있는 것 자체에 위험이 수반된다. 렌트가 불어남에 따라 스톡도 비례적으로 평가액을 늘리는 것은 틀림없으나, 스톡의 증대란 무엇을 현실적으로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 광산이 갑자기 발견됐다고 하자. 거의 가치가 없는 땅에 갑자기 가격(발굴권료)이 붙고, 스톡이 출현한다. 땅이 팔리면, 그 대금은 부가가치로서 실현되지만, 10년 후에 광산이 이익을 내기 시작할 때까지, 토지대금과 투입된 개발비용은 광산(발굴권)을 산 사람의 구매력을 희생하고 계속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익을 낳을 때까지는 이런 금액들은 순전한 투자’(선불)이며, 같은 금액이 생산 가능 부가가치액으로부터 자동적으로 계속 차감[공제]된다. 스톡은 형성되자마자 곧바로 렌트를 낳는다고는 할 수 없고, 그 경우에 렌트는 선행 투자 자금의 회수로서 취득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통신 회선의 사용료로 지불하는 금액은, 회선의 부설에 필요한 비용을 우리가 사후적으로 상환하면서 지불하는 임대료(rental fee)일 것이다. 벤처 사업에 투자되는 금액도, 아직 렌트를 실현하지 못한 땅값같은 것이다.

케인스 경제학이 가르치는 바로는 투자=저축이다. 어느 정도의 투자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구매력사용하지 않음이 제약으로서 부과되고 있다. 현재의 구매력대여되어투자 자금이 된다. 설령 투자액이 저축액을 끌어당겨증대시키는 효과 케인스가 바라던 것이다 가 관찰되더라도, 이것은 쓰지 않고 대출된 금액이 늘어난다는 결과를 반드시 동반한다. 사회적으로는, 투자액만큼의 부채를 어디서 누군가가 지고 있을 것이다. 기업의 대차대조표에 있어서도, 초기 투자된 자본부채와 똑같은 쪽에 기입되는 자본 제공자로부터 조달된=‘빌린돈으로서 것이 아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투자란 스톡 형성을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거 폭력이나 제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스톡은 그 흔적을 비용으로서의 투자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발권 은행이라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비용없이 창출할 수 있었던 가치를 자본이 반드시 똑같이 낳을 수는 없다는 표시가 투자이다. 사후적으로 취득되는 실물 자산(앞 절 참조)은 기업이 투자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스톡이었지만, 발권 은행 이외로부터 화폐를 조달하여 스톡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희생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 투자가 된다. 기업은 화폐 순환 내에서의 위치로부터 거의 자동적으로 얻게 되는 이익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대신 구매력에 그것을 요구하고, 반란 리스크를 대신해 채무를 지는 것이다.

이때 인적 자본이나 토지, 때때로 흘러드는 투자자금도, 이것이 미래에 올릴 렌트를 기대하여 대출받는 돈으로서, ‘채무를 낳는다. 그러나 이 채무는 설비 투자와는 달리, 대부분 실물경제속에 수요로서 들여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경제 외적인 존재였던 영역(접속이 공짜였던 공유재산)을 사유재산화함으로써 렌트를 발생시키려고 하는 투자, ‘실물경제에 자금을 들이붓는 경로가 매우 가늘다. 그린 뉴딜의 실패는, 그 점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지적인 분야(신산업의 육성)에 아무리 자금을 투입해 봤자, 직접 수요 창출 효과는 뻔하다. ‘성과를 거두기 위한 투입자금은 아무리 있어도 부족할 정도이다. 그것을 회수하려고 한다면, 렌트는 기세가 높으며(의료비나 약품가격을 상기하라), 구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불황의 동시 진행과 똑같은 사태에 돌입한다(비싸서 팔리지 않는다). 게다가 교육투자를 생각하면 좋다. 장학금에 기대되는 효과는 인적 자본의 가치 증대이지만, 얼마나 증대할지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모르며, 그 증가분은 실제로는 완전히 우연이며, 유효 수요 효과에서의 제곱수 같은 파라미터를 거기에 도입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광산은 물적이지만, 발굴권료는 그렇지 않으며, 가치를 가로챈 지대에 불과하다. 발굴권료 수입을 설비투자에 돌려 봤자, 렌트화된 발굴권료는 그 물적 투자에 의한 수요 창출 효과를 빼앗아간다.

렌트를 낳는 것에 대한 투자, 평가가 클수록 그것이 채무라는 것에서 생기는 다양한 이자부담까지 키우며, 렌트가 실현될 때까지의 지출을 추가 비용, 추가 채무로서 증대시키는 것이다. 스톡형성 - 렌트 취득에 필요한 비용은 추가 수요를 낳는 산업적 투자의 경우보다 사회 전체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크다. 렌트 수입을 얻고자 하는 자의 투자를 사회가 내핍에 의해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는 과거의 참주가 품었던 불안, 즉 언제 죽임을 당할 것인가라는 불안 권력의 우연성에서 유래하는 구매력의 감소라는 형태의 비용으로 치환하여 부담해야 한다. 설령 투자수요라고 불려도, 거의 추가 비용이 드는 단순한 소비수요이다. 사태를 타개하려면, 승수 효과분에 해당되는 수요바깥으로부터 들여올 수밖에 없으나, “바깥으로부터의 수요투자수요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유효수요 창출 효과를 수반하지 않는 투자=저축제약의 확대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구매력이 점점 삭감되고, 채무가 부풀어간다.

이 악순환에 감히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현대의 투자이다. 기대에 의해 기대를 부풀리게 하고, 빌리면 빌릴수록 이문이 남는다는 망상에 뒷받침되어, 스톡은 언제부턴가 채무스톡으로 반전된다. 스톡은 가치를 낳는 으로부터 가치를 흡수하는 것으로 바뀐다. 스톡이 형성되고, 렌트라는 제도 또는 장치를 통해 가치가 포획되기 전에, 스톡 형성 그 자체가 채무를 통해 가치를 흡수한다는 사태가 출현한다. 보수인 렌트로부터 비용인 채무로 스톡의 효과가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스톡이란 활동으로부터의 가치의 포획-흡수 장치였기 때문에, 이 귀결은 신기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포획-흡수생산이라고 바꿔 말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

서비스의 대가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종종 국가가 마치 그 결함을 메우듯이, 객관을 대행하듯이 개입한다. 다양한 서비스 노동이 국가적인 전문직 자격에 의해 직접 생산되며, 효과의 견적을 내기가 힘든 연구 개발에 국가 예산이 투입된다. 대학연구자의 급여는 국가에 의한 그런 대항적 견적[어림]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가족이 부담하던 간병을 사회화하는 제도들은, 무상[공짜]이었던 감정노동에 서비스노동의 절대지대’(최저액)를 할당하는 양상을 띤다(아직도 상당 정도로 무상으로 맡고 있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런 영역에서의 국가적 활동 전체를 투자의 논리나 표상이 뒤덮는 정도는 날로 강해지며, 투자객관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전문가의 주관 대신 토의민주주의적인 합의 간주관적인 객관성가 도입된다(‘사업 심사[사업의 우선 순위 매기기]을 보라). 그러나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라는 도입의 기치만큼, 국가에 의한 서비스-지적 생산-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가 순수 채무라는 것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국민으로부터 빌린금전인 것이다. 물론 국가를 통해 국민이 자기 자신과 대차관계[빌려주고 빌리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미 봤듯이, 자신에 대한 투자를 투자라고 부르는 것은 강변일 뿐이다. 게다가 국민의 구매력을 빌리는국가는 고대 코린토 국가가 빈민에게 화폐나 토지와 교환하여 부역 노동을 요구했듯이, 사물(의 구매력)과 서비스의 교환을 강요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도 국가가 그 사물[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똑같은 국민이기 때문에, 국가는 국민에게 사물을 서비스와 맞바꾸라고 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맞바꾸기의 조작 때마다, 화폐적으로는 채무가 국민의 대차대조표에 보태진다. 서비스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세금은, 국가를 통한 국민에 의한 자기 자신에의 강제 투자이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노선은 토목공사에서 서비스 부문으로 투자와 채무의 할당처를 이동시키는 정책이다. ‘빌린구매력을 서비스 부문에 투입하여 복지를 사회화하고, 서비스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의해, 그것을 되돌려주려고 한다. 인적 자본의 논리를 국민이라는 사람에게, 국가를 통해 적용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에 다름없다. ‘민영화를 뼈대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인적 자본론과의 차이는, “국가를 통한다는 점과, ‘사람국민이라는 전체 인격으로 바뀐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뒤에서 자세히 보듯이(다음 절), 개인을 자기 자신에 대한 기업”(푸코) 자신에 대한 투자에 의해 자본으로서의 자기의 가치를 증대시키려고 하는 인간 으로 키우려고 하는 신자유주의는, 교육의 임무를 국가에 맡기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인적 자본으로서의 서비스 노동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사람의 자기투자-채무상환과정 속에 있으며, 그들은 국가에 의한 채무 노예화의 궤도에 올라타 있다. ‘국민이라는 집단이, 거대한 노동 스톡으로 바뀌며, 그 렌트가 국가에 세금으로서 수납되고, 새로운 노동 스톡화에 이용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지불되는 임금은 임금이라는 이름의 채무 전가 나라가 국민에게서 빌린것을 다른 국민에게 지불하는이다. 서비스료=렌트가 지불되는형식에 의해, 노동에 의해 변제해야 할 채무가 창출된다. 현재의 서비스 노동에 임금지불됨으로써, 그것은 국민경제를 경유하여 채무화되며, 다음의 서비스 노동을 의무화한다. 산업자본가는 임금을 선지급함으로써 생산물의 소유권을 손에 넣지만, 여기서는 국가가 개인에 의한 자신을 위한 투자를 개인에 앞서서 대행함으로써, 비용으로서 개인에게 노동을 요구한다. ‘투자비용은 노동에 의해 구입되어야 한다. ‘투자=저축의 현대판이다 나라는 여러분께 이것만을 빌려줬다, 갚으세요.” ‘투자라는 매개 표상을 벗겨내고 사실을 직시한다면, ‘채무속박[멍에]의 맞은편으로부터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얼굴을 내보인다. 산업자본이 사라지고, ‘노동자와 그들을 배치하고 움직이는 간부만이 있는 세계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귀중한 자본 중에서도 가장 귀중하고 가장 결정적인 것, 그것은 인간이며, 간부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것을 이해해야 한다. 공업, 농업, 교통부문, 군대에 많은 우수한 간부가 있다면, 우리나라는 무적이다”(193554, 적군대학교 졸업식에서의 연설).

오늘날의 경제에서는, 이윤과 임금의 상당 비율이 렌트화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를 딱 잘라 나눠서 보여주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GDP 내 제3차산업의 비율은 그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부분을 증대시킴으로써, 채무가 생산을 상회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해지고 있다. 이 형태의 채무에 상한은 없기 때문이다. 전원이 채무 노예가 되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를 그대로 스탈린주의 국가로 변질시키고, 노예로서 일하는 기간을 부모로부터 자식으로 상속시킨다면 좋을 뿐이다. 김일성처럼 대를 이은 혁명”? 채무의 상환 능력에 따라일하는 사회주의에 있어서는, “노동에 따라지불액이 얼마가 되는가는, 국가가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하면 된다. 투자액의 산정 기준이 되는 스톡 국민이라는 노동 스톡 전체의 평가액을 우리나라는 무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투자비용의 공유로서 실현된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최종 부담을 맡길 것인지 미정인 채로 누적된 채무가, ‘국민경제를 이음매없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시킨다. 소련 붕괴는 현재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의 기나긴 길이었음을 밝혔으나, 그 자본주의가, 지금은 안쪽으로부터 스탈린식 사회주의로의 변성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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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만, 문제는 궤도이며 경향이다. 실제로 임금의 렌트화는 고용관계에 중대한 변경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직무가 정해져 있지 않은 멤버십 계약으로서의 일본형 노동계약(이른바 정규직)은 이미, 노동시간을 가치척도로 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논리 안에다 인적 자본의 논리를 억지로 밀어 넣는 고용형태였다. 산업자본이 내부적으로 사람한테 투자하고, 그 효과 즉 렌트를,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에 미리 회수하려는 렌트 청구권을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형태이다. 반대로 직무를 한정하여 고용되는 (job) 노동계약은 어떻게든 산업자본의 논리에 적합하면, 즉 단순노동의 시간에 대해 임금이 지불되면, 간단하게 서비스 제공에 대한 렌트 지불 계약으로 변경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자에게 렌트를 지불하는 것의 답례로 생산물의 소유권을 취득하며, 그것을 파는것도 빌려주는것도 자유이다. 인적 자본에 대한 렌트에는 기준이 없다고 했던, 이미 봤던 점이 여기서 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동일노동 노동임금의 원칙을 지키면서 임금을 얼마라도 낮추는 것이 가능해지며(흔한 서비스에 값싼 렌탈료만 붙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거꾸로 성과의 근거가 모호한 관리자에게 터무니없는[비싼] 보수를 지불하는 것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물적 재화의 생산성이 오르고 잉여가치율(착취율)이 증대할수록, 그 재화를 생산하는 인적 자본에 대한 평가는 내려갈 것이다. 물적 수준에서 계산된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할 때에는, 인적 자본이 받는[수취하는] 렌트도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인적이든 물적이든, 자본은 자본이며, 노동자는 자본의 구성요소, 화폐자본에 통합된 인적 자본으로서, 자본가와 동등한 같은 비율로 오르고 같은 비율로 내리는 보수밖에 받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또 일반적으로 이윤율을 넘는 이자율은 실현되지 않으며, 저하되는 기업(=산업자본) 이윤율, 총체로서 이자를 낳은 자본으로 간주되는 자본의 수익률에 하향 압력을 가할 것이다. 이리하여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으로 합리적이라고 간주되는 비용서비스의 대가로서 합리적인 금액”, 노동이 생산할 터인 렌트로 고쳐 읽을 수 있으며, 기업 이윤과 함께 저하된다. 임금이 독립변수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좁은 의미의 서비스 산업은 서비스 공급자를 문자 그대로 에워싸고’, 렌트 청구권을 착취하려고 하지만, 거기서의 착취율은 원래 임금으로서 지불되는 렌트의 압축에 의해서만 오를 뿐이다.

그 결과 현대에서는, 과거의 농민이 땅에서 추방되어 산업프롤레타리아트가 됐듯이, 노동자가 노동가치의 세계에서 인적 자본의 세계로 내몰리게 되며, 그 렌트/‘구매력누군가가 횡령한다는 형태의 본원적 축적이 진행된다. 물건을 생산하는 산업세계로부터, 한편으로 지금은 자본이라고 고쳐 불리는 노동자의 일군이, 다른 한편으로 18세기와 마찬가지로 화폐, 분리되면서 쫓겨나고, 새로운 마주침을 지닌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본원적 축적에서 불행한 것은 분리된 화폐가 자본으로서 새로운 생산체계에 들어서기 위해 다시금 노동자와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이미 (인적) 자본으로서, (화폐) 자본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폐는 순수 구매력으로서 생산 바깥으로 흘러넘칠 뿐이다. 노동자와 만나지 않고, 그저 축적되고 사용될 뿐이다. 자본 수익률이 좀체 높아지지 않더라도, ‘부자가 계속 산출되고 있다. 노동자에게 눈을 돌리면,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더 이상 본질적인 쟁점이 될 수 없으며, 가치척도의 흔들림과 위기 속에서 노동수입의 전반적 하락이 계속될 뿐이다. 비정규 노동과 정규 노동의 격차 시정을 요구하는 슬로건으로서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기본소득 주장과 마찬가지로, 모든 임금이 자본과 더불어 렌트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생활 향상을 위한 발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저 임금, 최저 생활수준을 둘러싼 논의로 회수되고, 자본가와 함께 성장을 갈망하도록 유도될 것이다.

임금의 렌트화는 노동자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금융자본주의화한다. 임금 자체가 그의 서비스에 대한 렌트인 데다가, 노동자는 임금의 일부를 사회보장비로서 출연[갹출]당하게 되며, 그 기대 렌트에 의해 생애를 설계한다. 인적 자본인 노동자는 벌어들인 렌트를 더 투자하도록 강요당한다. 그 투자는 채권시장에 흘러들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과거라면 산업(물적 생산)에 흘러들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두 번째의 본원적 축적과정에 흡수될 것이다. 공유지를 사유지화하고 또 이렇게 사유지화함으로써 음[] 공유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노동자의 미래 구매력은 불가피하게 말려들어간다. 인적 자본의 투자 대상은 어디까지나 인적 자본이며, 이 투자 과정에서도 저축=투자의 등식은 여전히 타당하며, 양쪽의 가치가 똑같은 렌트 시장 내부를 반사적으로 순환하며, 물적 생산과정으로는 거의 나아가지 않는다. 노동자 전체의 구매력은 확실하게 줄어들 것이다. 개개인의 기대 렌트를 쌓아올림으로써, 실현되지 못한 채 채무로 남아 있는 금액도 증대하며, 언젠가는 증세 또는 사회보장비 삭감에 의해 채무를 상환해야 한다. 이미 서비스의 제공에 의해 실물 변제되는 노동자로부터 화폐적 구매력을 가로챈다. 노동자계급은, 지불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보험조합에 강제 가입되는 것이다. 이 보험이 파탄했을 때, 두 번째의 사회주의화는 완수될 것이다. 벌거벗은 모습을 노출할 것이다.

이것은 국가를 포함한 보험업자가 노동자를 속인다는 것에서보다는 축적 체제 자체의 변화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임금이 서비스에 대한 렌트, 능력의 임대료가 된 시점에서, 인간과 화폐 자본은 둘 다 희소성 때문에 [돈을] 벌어들이는,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이자를 낳는 자본이 되며, 자본축적은 더 높은 수익이 전망되는 토지와 낮은 수익만 전망될 뿐인 토지사이의 차액지대를 수중에 넣고 축적해가는 방법으로 일반화된다. 단순노동에 대한 임금은 이른바 절대지대로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지대와의 차액을 확대하기 위해, 하강압력을 항상적으로 받게 된다. 초기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절대적 잉여가치를 더 많이 취득하기 위해 임금을 내리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산업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저항에 직면하고, 이윽고 이런 임금 인하 경쟁을 포기하고, 기술혁신에 의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취득경쟁으로 축적방법을 전환했다. 모든 것이 이자를 낳는 자본인 세계에서 이러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상당하는 메커니즘은 작동할 수 있을까? 그런 메커니즘은 존재할 수 있을까?

이자는 오늘날 희소성과 기대의 상관값이다. 다양한 희소성이 미래에 오를 것이라고 추정되는 수익의 기댓값이다. 역사적으로는 스톡의 소유로부터 곧바로 얻을 수 있는 이문[돈벌이]로서 출현한 이자는, 스톡의 일반화에 의해 빌려주는것에 대한 보수가 된 후, ‘이자를 낳는 자본이 전반화되는 가운데, 사적으로 소유되는 재화의 희소성 자체가 산출하는 이자로서 인지된다. 이때 기술혁신은, 그 자체로는 재화의 희소성을 감소시키며, 기댓값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업은 부단한 이노베이션을 강요당했다. 새로운 희소가치를 산출하는 것을 스스로 지상명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자를 낳는 자본한테는 원래 토지를 더 희소하게 하는 것밖에는 수익 기댓값을 크게 하는 방법이 없다. 수익은 생산때문에 오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산업자본이윤이라도, ‘이자를 낳는 자본메타자본으로서 군림하게 되면, 수익은 더 이상 생산때문이 아니라 희소성 때문에 오르는 것이다.

수익 기댓값을 크게 하기 위해 오늘날 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저작권이나 특허 같은 국가적 방법이라는 것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전비용이 제로이고 본질적으로 희소성을 갖지 않는 지식에 대해 문자 그대로 에워싸기[인클로저]’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과 시장에 내재적인 방법이 아니다. 내재적인 방법으로서는 지불 렌트를 낮출 수밖에 없다. 더 싼 이자자본을 빌려줄 곳을 찾는 수밖에 없다. 내부적인 기술혁신보다도 아웃소싱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절대지대를 내릴 것인지, 자본 전체로서는 그것이 항상적인 과제가 된다. 종종 현대의 우량기업 모델이라며 극구 칭찬받는 유니클로를 상기하면 좋다. 본사의 정규채용 사원의 숫자를 극력 억제하고, 생산을 모두 인건비가 싼 해외로 아웃소싱하며, ‘값싸게만들어낸다. 포드주의 시대의 대량생산·대량판매와는 달리, 거기에서는 생산의 외부화가 기술이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는 생산기술이 아니라, 저렴한 렌트를 시장으로부터 조달하는 기술이다. 상품 자체의 희소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서만 자본이 현대적인 잉여가치 생산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절호의 예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불해야 할 절대지대를 낮추는 방법이, 오늘날에는 특수한 상대적 잉여가치생산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대성은 더 이상 기업 내부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보면, 그것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일 뿐이다. , 노동자의 빈궁화에 의한 축적의 강행. 자본은 더 값싼 노동력을 해외에서 찾을 뿐 아니라, 자국에서도, 인적 자본이라는 토지절대지대를 낮춰야만 한다.

이리하여 이윤이 저하하면 노동 렌트(임금)는 내리고, 노동 렌트가 내려가면 그 수탈에 의해 가능해지는 화폐 렌트로서의 이윤도 내린다는 악순환이 내장되며, 희소성에 대한 의존을 가속도적으로 깊게 하는 축적 체제가 성립한다. 이 축적 체제를 전제로, 그 속에서 고용과 임금을 얼마간이라도 지키려고 한다면, 모든 기업과 노동자를 강제 가입시키는 산업보국회 유형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일정에 올라올지도 모른다. 국가 통제에 의해 비정규 잡(job) 유형의 노동계약을 안정화시키려고 하는 방향성이다. 렌트에 의한 축적체제 그 자체에 손을 대지 않으면, 산업자본주의적 원칙의 잔재로서의 이윤=이자라는 등식은, 화폐 렌트와 함께 노동 렌트를 저하시킬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기업과 노동자 둘 다로부터 일종의 파시즘에 의한 조정을 요구하는 욕구가 높아져도 이상하지 않다. 채무의 민주적 배분을 도모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렌트를 지키는 파시즘이 하나의 국가 속에서 공존하는 미래를 현실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아마 그것이 포스트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공화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노동의 배분-관리국가로서의 새로운 스탈린 체제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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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1부 2장. 

정신과 심리의 통치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 푸코의 원문과 일역본을 대조하여 교정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대신 프랑스어 원문을 아래에 병기해뒀다. 나중에 천천히 대조하여 수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몇몇 대목은  이미 대조를 통해 수정한 대목이 있으나, 별도로 밝히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어 원문은 클릭하면 관련된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다. 

* 내용이 달린 각주만 표기해뒀다.  


1. 평화로운 나라의 내전상태

미셸 푸코는 1950년대에 젊은 심리학자로서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푸코는 그때의 경험에 관해 1982년에 이렇게 말한다.

 

철학을 연구한 후 저는 광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성을 연구하기에는 너무도 미쳐 있었으며, 광기를 연구하기에는 너무도 이성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병원에서 저는 환자들한테서 간호사들에게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명확한 직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신경외과가 활짝 꽃을 피웠으며, 정신약리학이 시작됐으며, 전통적인 제도가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것들이 필수적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석 달 정도가 지났을 때(저는 느려터진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무엇을 위해 필요할까?”라고. 3년 후에, 저는 이 일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커다란 불안감을 품은 채 스웨덴으로 갔습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이런 실천들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362] 1598/310)

Après avoir étudié la philosophie, j'ai voulu voir ce qu'était la folie : j'avais été assez fou pour étudier la raison, j'ai été assez raisonnable pour étudier la folie. Dans cet hôpital, j'étais libre d'aller des patients au personnel soignant, car je n'avais pas de fonction précise. C'était l'époque de la floraison de la neurochirurgie, le début de la psychopharmacologie, le règne de l'institution traditionnelle. Dans un premier temps, j'ai accepté ces choses comme nécessaires, mais au bout de trois mois (j'ai un esprit lent !), j'ai commencé à m'interroger : « Mais en quoi ces choses sont-elles nécessaires ? » Au bout de trois ans, j'ai quitté cet emploi et je suis allé en Suède, avec un sentiment de grand malaise personnel ; là j'ai commencé à écrire une histoire de ces pratiques.

 

이리하여 광기와 비이성을 쓰기 시작했지만, 미리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이 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후 푸코는 신경외과수술이나 향정신성의약이나 병원수용에 비판적이기를 계속했지만, 이런 병원 내부에서의 치료 실천이나 병원을 핵심으로 하는 실천을 폐기하면 결말이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경험을 통해 심리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되었지만, 심리학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푸코의 입장은 단순한 반정신의학도 반의학도 반심리학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 지적되었지만, 본고에서는 조금 더 그 내실에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각주:1] 이 점에서 또 하나의 회상이 중요하다. 1983년의 인터뷰이다. “생트안느(Sainte-Anne) 병원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요? 생트안느는 그 직원의 한 명에게, 정신의학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었나요L'hôpital Sainte-Anne avait-il quelque chose de particulier ? Aurait-il pu donner, à l'un de ses employés, une image particulièrement négative de la psychiatrie?”라고 S. 리긴스(Stephen Riggins)가 물은 것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답한다.

 

아니오. 생트안느는 상상한 대로 큰 병원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생트안느는 제가 나중에 찾아간 지방의 큰 병원의 대부분보다도 오히려 좋은 것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파리의 최고 병원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아니, 심한 것은 무엇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제가 지방의 중소병원에서 똑같은 작업을 했더라면, 아마 그 병원의 실패를 지리적 상황이나 지방 작은 병원의 고유한 결함 탓으로 돌리려고 했을 겁니다. ([336] 1347/428)

Oh non. C'était l'un de ces grands hôpitaux comme vous pouvez en imaginer, et je dois dire qu'il était plutôt mieux que la plupart des grands hôpitaux de province que j'ai visités par la suite. C'était l'un des meilleurs hôpitaux de Paris. Non, il n'avait rien d'épouvantable. Et c'est précisément cela, la chose importante. Si j'avais fait le même travail dans un petit hôpital de province, j'aurais peut-être été tenté d'imputer ses échecs à sa situation géographique ou à ses insuffisances propres.

 

생트안느가 최고 좋은 병원이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최근 들어 정신의학의 진보사관과 그것을 계승한 반정신의학의 진보사관의 영향으로, 예전의 병원·시설의 실정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퍼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탈병원화 이후의 수치와 비교해도, 치유되는 환자나 사회로 복귀하는 환자의 비율은 높았다. 또한 놀랍게도 탈병원화 이후, 20세기 중반 이전의 병원 수용자 수는 매우 적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쁜 역사로 간주하는 편견이 오히려 강해졌지만, 소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도 그 범위 밖에서도 나름대로 잘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푸코는 바로 그것에 큰 불안감을 품었다고 받아들여보자. 이후의 푸코가 연구하게 된 권력의 다양한 형태, 병원 수용시설 수용, 규율훈련, 생명권력생명정치, 통치성은 대체로는 잘 행해진다. 대체로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대체로는, 치안도 통치도 잘 행해진다. 평화로운 것이다. 그래서 문제라고 푸코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하자. 정의상 비정상異常은 소수에 그친다. 그렇다면 그 소수의 비정상을 둘러싸고 이렇게 저렇게 번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압도적 대다수가 정상이라는 그것에 문제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권력·생명정치에 대해서는 신체가 표적으로 간주되고, 마치 정신-심리는 표적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논술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오히려 생명권력·생명정치는 개인적인 신체나 집단적인 단체에 작용됨으로써 간접적으로 정신-심리에 작용된다고 논술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초기 푸코에게서의 심리학 연구 혹은 심리학 비판은 푸코 말년에는 두절되어 있는 것처럼 막연하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1976년의 대담 비합법성과 처벌의 기교([175])에서 G. 타라브(Tarrab)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하고 있듯이 감옥 같은 환경을 분석하면, 심리적 차원을 사상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당신 자신은 신체의 구속에 대해 말하지만, 신체의 기초에는 심적인 것(psyché)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Peut-on faire l'économie de la dimension psychologique, quand on analyse le milieu carcéral, comme vous le faites ? Vous parlez vous-même de «prise de corps», or le corps est sous-tendu par une psyché. Qu'en faites-vous?” 이것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나는 심리적 차원을 사상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분명히 나는 구금자의 인격에 관심이 없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항상 비판되는 동시에 항상 재생하는 감옥이라는, 이 역설적인 시설의 기초에 있는 권력의 전술과 전략이다. 이 방식에 있어서는, 심리적 차원이 직접 분석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감옥의 기구에 있어서는 실제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법이 말하는 단순한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그것 이상의 것이다. 사람들의 신체 병사의 신체, 아이의 신체, 노동자의 신체 에 관심을 갖는 정치권력의 전술이 있으며, 신체는 좋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심리(psychologie)는 그것에 말려들어 있다. 그러나 심리는 권력분석에서 시작되는 분석의 최종단계로 이른바 추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사회학에 대해 심리학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권력의 문제설정이다.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개념이냐 사회학의 개념이냐라는 것이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힘관계이다. 따라서 사용되어야 할 도식을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부터 빌려서는 안 된다. 전략으로부터, 그리고 전쟁의 기교(art)로부터 빌려야 한다.([175] 87/109-110)

Je ne dis pas qu'il faut en faire l'économie. En fait, je ne m'intéresse pas au détenu comme personne. Je m'intéresse aux tactiques et aux stratégies de pouvoir qui sous-tendent cette institution paradoxale, à la fois toujours critiquée et toujours renaissante, qu'est la prison. Dans cette mesure-là, je ne crois pas que la dimension psychologique doive être mise immédiatement au service de l'analyse. Prenez le problème du corps: il est en effet très important dans la mécanique de la prison. Or ce n'est pas, comme dit le droit, une simple privation de la liberté, c'est plus: il y a une tactique du pouvoir politique qui s'intéresse au corps des gens : corps des soldats, des enfants, des ouvriers qu'il faut maintenir en bonne condition. Bien sûr, la psychologie s'y trouve impliquée, mais elle se trouve en quelque sorte reléguée au dernier échelon d'une analyse qui commence par le pouvoir. Le problème n'est pas de mettre la psychologie en face de la sociologie ; le problème, c'est la problématique du pouvoir. Est-ce que oui ou non le pouvoir peut être analysé avec les concepts de la psychologie ou de la sociologie, la question n'est pas là, me semble-t-il. Le pouvoir est essentiellement un rapport de force, donc, jusqu'à un certain point, un rapport de guerre, et, par conséquent, les schémas qu'on doit utiliser ne doivent pas être empruntés à la psychologie ou à la sociologie, mais à la stratégie. Et à l'art de la guerre.

 

재차 확인해둘 것은 전쟁이라고 얘기할 때의 전쟁은 비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교도소는 어떤 점까지는전쟁상태에 있다. 마찬가지로 군대·학교·공장도 어떤 점까지는전쟁상태에 있다. 거기서의 권력관계는 전쟁관계이다. 전쟁이기 때문에, 전술·전략·전쟁기교가 실제로 구사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표적은 신체이다. 심리학의 개념도 사회학의 개념도 쓸모가 없다. 권력의 분석은 신체의 심리학이나 신체의 사회학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역시 심리의 분석은 최종단계로 보류될 뿐인가? 타라브는 이렇게 질문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전쟁관계는 대체로 구금자의 육체와 신체에, 그리고 또한 구금자의 심적인 것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지만Mais ces rapports de guerre laissent généralement une marque profonde dans la chair et dans le corps des détenus, ainsi que dans leur psyché...이라고. 푸코의 대답은 이렇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내게 문제는 권력이 신체와 심인(心因, psychisme)에 각인이 남긴다는 사실이며, 신체와 심인이 분석으로의 안내 실이나 모델로서 도움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분석으로의 안내 실로서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은 전략의 관계일 것이다. 전쟁이 전투원의 신체에 상처를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전략이나 전술이 개인의 신체에 각인을 남길 것이라는 것은 물론 이해되었다. 그러나 상처로부터 시작해도 전략의 실에 도착할 수는 없다. ([175] 87/110)

Mais le problème n'est pas là. Mon problème est de savoir si, du fait que le pouvoir laisse des marques dans le corps et le psychisme, ceux-ci doivent servir de fil directeur et de modèle à l'analyse. Il me semble que ce qui doit servir de fil directeur à l'analyse, ce sont des rapports de stratégie, étant bien entendu que la stratégie ou la tactique du pouvoir va laisser des marques sur le corps des individus, tout comme une guerre laisse des cicatrices sur le corps des combattants. Mais ce n'est pas la cicatrice qui vous permettra de remonter le fil de la stratégie.

 

푸코의 이 대답은 그대로 마음[]에 해당된다. 교도소·군대·학교·공장은 전쟁상태에 있기 때문에, 물론 마음도 상처 입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에서 출발해 전쟁상태의 분석 등을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마음의 상처에서 출발해 전쟁상태를 고발한들 별 것일 수가 없다. 문제는 전쟁상태가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것에도, 마음의 상처가 개인적·인격적으로는 중대한 것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그런 관계를 전쟁상태로서 분석하는 것이다. 대체로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그런 전략·전술·기교를 분석하는 것이다. 강조해야 하는데, 마찬가지의 것은 단순히 네거티브가 아니라 포지티브한 효과이기도 한 마음의 각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권력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나 긍정하는 각인을 마음에 남기는 그런 관계를 전쟁상태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옥에서 교정되고 노동윤리를 익히고, 군대에서 성장하고 유덕해지며, 학교에서 발달하고 사회화되며, 공장에서 노동의 기쁨을 느끼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시설에서 성공리에 변용하는 것이다. 푸코는 거기에서 전쟁상태를 감지한다. 그런 성공 사례는 누구의 승리인지 분명치 않으나, 승리한 전쟁이 마음에 가져오는 각인이다. 그래서 권력분석에 있어서도, 심리적 차원은 결코 사상되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서 시작해 전쟁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시작해 마음에 도달한다고 전망된다. 이 관점에서 심리학자 푸코의 생애를 반추해보자.

 

2. 심리학자 푸코

본고에 관련된 한에서 초기 푸코에 의한 심리학 관련 문서를 읽어두자. 1957년의 1850년부터 1950년의 심리학[2]에서 푸코는 심리학이 실천실용실무와 새로운 관계를 창설한 것에 유의하고 있다.

 

심리학이 교육·정신의학·집단조직 등의 실천과 새로운 관계를 창설한 것도 100년 동안의 일이다. 심리학은 이런 실천들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기초로서 등장했다. , 발생심리학은 있을 수 있는 모든 교육학의 틀로서 구성됐으며, 정신병리학은 정신의학의 실천에 대한 반성으로서 제시됐다. 거꾸로 심리학은 그런 실천들이 불러일으킨 문제, 즉 학교의 성공과 실패의 문제, 환자의 사회 편입의 문제, 직업에 대한 인간의 적응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서 물어왔다. [각주:2]([2] 149/151)

C’est également au cours de ces cent dernières années que la psychologie a instauré des rapports nouveaux avec la pratique : éducation, médecine mentale, organisation des groupes. Elle s’est présentée comme leur fondement rationnel et scientifique; la psychologie génétique s’est constituée comme le cadre de toute pédagogie possible, et la psychopathologie s’est offerte comme réflexion sur la pratique psychiatrique. Inversement, la psychologie s’est posé comme questions les problèmes que soulevaient ces pratiques : problème de la réussite et de l’échec scolaire, problème de l’insertion du malade dans la société problème de l’adaptation de l’homme à son métier.

« La psychologie de 1850 à 1950 », in Huisman (D.) et Weber (A.), Histoire de la philosophie européenne, t.II : Tableau de la philosophie contemporaine, Paris, Librairie Fischbacher, 1957, 33, rue de Seine, pp. 591-606.

 

심리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다. 하물며 단순한 마음의 학문도 아니다. 심리학은 교육심리학·정신병리학·산업심리학으로서, 학교 교육의 성패, 정신병자의 사회 복귀, 노동자의 직업적응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 심리학은 이런 문제들에 유효한 해결책을 주는 것을 곧바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의 각 부문은 실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고 해도, 심리학 그 자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기도 하는 그 실천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기초를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발달 장애아의 교육을 성공으로 이끄는 해결책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교육심리학이지만, 심리학은 발달 장애아의 교육의 성패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조건, 혹은 오히려 발달 장애아의 교육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정신의 영향도 있어서, 심리학은 정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의 탐구로서는 성립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심리학은 비정상異常에 관련되어 성립했다.

 

심리학은 인간의 실천이 그것에 고유한 모순과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 발달 심리학은 발달의 정체에 대한 반성에서 태어나며, 적응 심리학은 부적응의 현상의 분석으로서 태어나며, 기억심리학·의식심리학·감정심리학은 처음에는 망각·무의식·정서교란의 심리학으로서 나타났다. 현대 심리학은 그 기원에 있어서, 비정상성·병리·갈등의 분석이며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2] 149-150/151)

La psychologie, en revanche, naît en ce point où la pratique de l’homme rencontre sa propre contradiction ; la psychologie du développement est née comme une réflexion sur les arrêts du développement; la psychologie de l’adaptation comme une analyse des phénomènes d’inadaptation ; celle de la mémoire, de la conscience, du sentiment est apparue d’abord comme une psychologie de l’oubli, de l’inconscient et des perturbations affectives. Sans forcer l’exactitude, on peut dire que la psychologie contemporaine est, à son origine, une analyse de l’anormal, du pathologique, du conflictuel, une réflexion sur les contradictions de l’homme avec lui-même.

 

기원에 있어서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심리학은 젊은 푸코 같은 사람들을 매료시켜온 셈인데, 여기서 푸코는 심리학을 비정상성·병리·갈등을 직접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학교에서 비정상아동을 교육하고 병원으로부터 사회로 정신병자를 이행시키며, 직장에서 부적응자의 갈등을 성숙으로 이끄는 실천을 대상으로 하며, 그런 실천의 기초·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재파악했다. 심리학은 정신이나 마음의 학문, 그 좀 어두운 의 학문이었다고 해도, 얼핏 보기에 수수하고 평범한 실천과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에 대해서도, 심리학에 대한 이런 관점에서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 시기의 푸코는 프로이트가 생존할 때 고전정신분석에 대해 내놓았던 수정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심리학적 수정을 용인하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본능의 이론(삶 혹은 확장의 본능, 죽음과 반복의 본능)은 생물학적 신화의 잔영에 불과하며, 질병을 발달 단계의 초기로의 퇴행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스펜서 식의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적 몽상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에게는 19세기의 잔재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도 푸코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심리학을 대대적으로 갱신하며, 의미·역사·문화 등의 범주를 도입했다. , 푸코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 정신분석의 언어·역사·문화에의 응용에 의의를 찾아낸 것이다.

이런 한에서는 흔해 빠진 얘기이지만, 주의할 것은, 푸코가 이 논의 맥락에서 그 참고문헌으로 F. 알렉산더(Franz Alexander)심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 its Principles and Applications)(1950), A. 카디너(Abram Kardiner) , 사회의 심리적 경계(Psychological frontiers of Society)(1945)에 덧붙여, J. L. 모레노(Jacob Levy Moreno)누가 살아남을까? 소시오메트리의 기초(Who Shall Survive? Foundation of Sociometry)(1934)를 꼽고 있다는 점이다. , 정신분석이 응용되어 심리학의 실천과 연결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푸코는 모레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레노는 집단에 특징적인 배치布置에 있어서, 개인들을 결합시키고 대립시키는 양의 값이나 음의 값을 결정하기 위한 집단분석의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소시오드라마라는 이름의 집단요법을 확립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 집단요법은 개인의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잠재하는 정서의 주제, 표면적顕在的인 관계가 잿더미가 되는 갈등과 양가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실현하며, 그 방도를 갖고서 상호 재적응과 집단의 정서적 재건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2] 162-163/165)

Moreno a mis au point des méthodes d’analyse du groupe, par lesquelles on détermine les valences positives ou négatives qui unissent et opposent les individus dans une constellation caractéristique du groupe. Il a mêe tenté d’établir sous le nom de sociodrame une thérapeutique de groupes, qui permettrait, comme dans la psychanalyse individuelle, une mise au jour et une actualisation des thèmes affectifs latents, des conflits ou des ambivalences dont les rapports manifestes sont sous-tendus, et qui rendrait possible par cette voie une readaptation mutuelle, et comme une restructuration affective du groupe.

 

푸코에게 심리학의 실천이란 개인에 대한 정신분석의 요법에 덧붙여, 모레노가 개발한 집단분석에 의한 집단요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년의 전개를 내다보고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소시오드라마 같은 기법이야말로 권력분석에는 전술·전쟁 기교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학교에서의 교육심리학의 기법, 지역에서의 정신병리학의 기법, 직장에서의 산업심리학의 기법이야말로 학교·지역·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행사되는 전술·전쟁 기교에 상당하는 것이다.

다른 텍스트에서도 확인해두자. 1957년의 과학연구와 심리학([3])의 노동심리학에 대한 논의를, 그 과학성·기법·실정성의 관련에 주의하면서 살펴보자.

 

노동심리학은 본질적으로, 한편으로는 직업의 지두와 선택의 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위··노동집단·직장에의 개인적 적응의 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고찰 전체가 중요성을 갖고, 그 물음이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제적 조건 덕분이다. 직업의 지도와 선택의 리얼리티는 실업률과 노동지위의 분화 수준에 따라서 달라진다. 산업기술(technique)에 결합된 완전고용의 체제만이 노동자의 고도의 분화를 요청하기 때문에 이 완전고용의 체제만이 과학적 연구에 직접 연결된 심리학의 실천에 자리를 내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화에 불과한 이런 조건이 없으면, 지도와 선택에는 차별의 의미밖에 있을 수 없다. 노동지위에 대한 개인의 적응의 연구는, 생산·과잉생산·노동시간가치·차액 이익금 조정이라는 경제적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 ([3] 178-179/183)

Prenons l’exemple de la psychologie du travail. Elle est feite essentiellement des problèmes d’orientation et de sélection professionnelle d’une part, et, d’autre part, des problèmes de l’adaptation individuelle au poste, au métier, au groupe de travail et à l’atelier. Mais il est bien évident que cet ensemble de considérations ne peut avoir d’importance, ces questions ne peuvent avoir, au sens strict du terme, d'existence qu’à la feveur et par la grâce de certaines conditions économiques. Orientation et sélection professionnelle n’ont de réalité qu’en fonction du taux de chômage et du niveau de spécialisation dans les postes de travail. Seul un régime de plein emploi, lié à une te chnique industrielle exigeant une haute spécialisation ouvriére seul ce régime pourrait donner place à une pratique psychologique liée directement à la recherche scientifique. En dehors de cette condition, pour nous mythique, l’orientation et la sélection ne peuvent avoir que le sens d’une discrimination. Quant aux recherches concernant l’adaptation de l’individu aux postes de travail, elles sont liées, de leur côté, aux problèmes économiques de la production, de la surproduction, de la valeur du temps de travail et de l’aménagement des marges bénéficiaires.

« La recherche scientifique et la psychologie », in Morere (E.), ed., Des chercheurs français s’interrogent. Orientation et organisation du travail scientifique en France, Toulouse, Privat, coll. « Nouvelle Recherche », n° 13, 1957, pp.173-201.

 

노동심리학이 과학성을 표방할 수 있는 것은 완전고용체제 하에서일 뿐이다. 혹은 완전고용체제를 목표로 하는 한에서일 뿐이다. 그런데 완전고용은 신화이다. 그런 것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때 노동심리학의 실천은 지도하고 선별하는 차별의 의미밖에 없다. 그것은 대체로 과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적응의 연구가 과학성을 표방할 수 있는 것도, 생산의 조건들이 그것에 유리한 상황에서일 뿐이다. 그러나 아마 그런 호조건의 상황도 또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개인 적응의 실천은 그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푸코는 노동심리학을 그 비과학성과 차별성과 기만성으로 고발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러한가? 노동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 차별과 기만의 실천이라는 것 등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심리학이 그것으로서 성립되어 기능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그것에 심리학이 반드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라고 푸코는 계속한다.

 

다행스럽게도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경제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부재한 시기에는, 과학의 응용이나 발전이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경제나 전쟁상태와 관계없이, 물체는 계속 낙하하고 전자(electron)는 계속 회전한다. 심리학에 있어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실천을 위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에는, 과학성 그 자체가 심리학의 실정성에 말려든다. , 실업과 과잉생산의 시기에는, 선택은 통합의 기법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의 기법이 된다. 경제불황이나 노동가격상승의 시기에는 인간의 직장에의 적응은 기업의 수익률을 올리고, 인간노동을 단순한 생산요인으로서 합리화하려고 하는 기법이 된다. 요컨대 심리학적 기법이 아니게 되며 경제적 기법이 된다. ([3] 179/184)

Par bonheur, le probleme est un peu plus complexe. Il se peut que l’absence de conditions economiques favorables rende inutile a un moment donne l’application ou le developpement d’une science. Mais, apres tout, même en dehors d’une economie ou d’une situation de guerre, les corps continuent a tomber et les electrons a tourner. En psychologie, lorsque les conditions d’une pratique rationnelle et scientifique ne sont pas reunies, c’est la science elle-même qui est compromise dans sa positivite ; en periode de chomage et de surproduction, la selection cesse d’etre une technique d’integration pour devenir une technique d’exclusion et de discrimination ; en periode de crise economique ou d’augmentation du prix du travail, l’adaptation de l’homme a son metier devient une technique qui vise a augmenter la rentabilite de l’entreprise et a rationaliser le travail humain comme pur et simple facteur de production ; bref, elle cesse d’etre une technique psychologique pour devenir une te chnique economique.

 

심리기법은 경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경제적인 기능을 바꾼다. 실정성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심리학이라고 재파악된다.

 

심리학이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거나, 경제적 관점에 의해 동기 부여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응용과학에는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를 들어, 산업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적성 개념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을 요구받는 경제적 맥락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를 바꾼다는 것이다. 적성 개념은 양성의 문화 규범을 의미하거나, 생산성 기준에서 유래하는 차별의 원리를 의미하거나, 수습기간의 예보를 의미하거나, 교육 가능성의 평가를 의미하거나, 실제로 받은 교육의 성적을 의미하거나 하는 것이다. 심리학의 실천은 경제의 도구가 될 뿐 아니라, 심리학 그 자체가 인간적 척도(échelle)에 따른 경제의 신화가 되는 것이다. ([3] 179/184)

Ce qui ne veut pas dire seulement qu’e lle est utilisee a des fins economiques ou motivee par des propos economiques, c’est le destin de toutes les sciences appliquees. Nous voulons dire, par exemple, que la notion d’aptitude, telle qu’elle est utilisee en psychologie industrielle, change de contenu et de sens selon le contexte economique dans lequel on est amene a la definir : elle peut signifier aussi bien une norme culturelle de formation, un principe de discrimination emprunte a l’echelle du rendement, une prevision du temps d’apprentissage, une estimation de l’educabilite ou finalement le profil d’une education effectivement recue. Non seulement la pratique de la psychologie devient l’instrument de l’economie, mais la psychologie elle-meme en devient la mythologie a l’echelle humaine.

 

개념뿐 아니라 기법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 성립할 것이다. 심리학의 기법은, 경제적 맥락에 따라서는 심리학의 손을 떠나, 예를 들어 경영기법으로서 여러 가지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심리학의 기법은 심리학의 응용으로서는 사라지고, 그 기법에 이름을 따온 심리학은, 기법의 진리의 신화가 된다.” , 경영 기법으로서 사용되는 기법도 또한, 심리학의 기법의 전용으로 간주되는 한, 그 경영기법을 가능케 하는 조건과 기초는, 심리학으로 계속 되돌려보내지는 것이다. 경영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이코드라마를 노무관리에서도 사용해볼까? 사이코드라마의 효과야 뻔한 것이겠지만, 맥락에 따라서, 며칠 동안의 연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도, 아무튼 성실하게만 하면 집단적으로든 경영적으로든 아무리 사소해도 어떤 의미를 가질까?”라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영자도 근로자도 임상심리사도, 아무리 사소한 효과로도 어떤 변화를 인간에게 미칠 것이라는 것의 이론적인 기초가, 그 심리학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심리학이 기법의 진리의 신화로서 통용되고 있는 한, 그 기법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미친다고 믿어진다. 푸코는 오늘날에는 자명시되고 있는 심리학의 이 모습, 즉 과학성을 표방하는 학문과 경제적으로 그 의미와 기능을 끊임없이 변용시키는 실정성과의 필연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연결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래서 1961년의 광기와 비이성』 「서문([4] 194/202)[각주:3]에 있듯이, “심리학의 가능성의 조건들의 역사를 쓰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3.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사이의 심리 요법 

1965년 알랭 바디우와의 대담 철학과 심리학([30]을 봐도, 심리학 교육 플랜을 개진해 보여주는 등, 그것이 최후에는 심리학 비판을 생각나게 하는 교육 플랜이라고 하더라도, 학문은 자신에게 반성적·비판적으로 되는 것을 통해 완결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셈이기 때문에, 심리학자로서의 푸코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 오히려 푸코는 젊은 바디우에게 심리학 전체주의라고 야유받더라도, 심리학이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학문이라고까지 말했다. 그 위에서, 미리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푸코는 심리학과 응용심리학의 실천이나 기법이 불가분하다고 파악했듯이, 심리학과 심리요법을 불가분하다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푸코는, 대면하는 양자관계나 소수의 집단 내부에서 선한 것으로서 계속 행사되고 있는 각종 요법에 대해서도, 이것들을 노동심리학에 있어서의 직업의 선택이나 지도의 기법, 차별과 선별의 기법, 산업적이고 경제적인 기법과 동등한 것으로 재파악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은 구조의 인식이 되며, 심리학에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따른 요법(thérapeutique), 개인이라는 텍스트의 인식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학을 일정한 정규 수업계획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리학은 철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아마, 아니 확실히, 의료이며 요법이다. 심리학의 모든 것은 교육학이며, 독해의 모든 것은 요법이다. 거기서는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 없이는 상대를 알 수 없다. ([30] 472/232)

La psychologie sera la connaissance des structures, et l'éventuelle thérapeutique qui ne peut pas ne pas être liée à la psychologie sera la connaissance du texte individuel, c'est-à-dire que je ne pense pas que la psychologie puisse jamais se dissocier d'un certain programme normatif. La psychologie, c'est peut-être bien, comme la philosophie elle-même, une médecine et une thérapeutique, c'est même certainement une médecine et une thérapeutique, Toute psychologie est une pédagogie, tout déchiffrement est une thérapeutique, vous ne pouvez pas savoir sans transformer.

 

이 관점은 1974년의 광기, 권력의 물음([141])에서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의학과 반정신의학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심리요법의 위치가 부상하게 된다.

 

확실히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실천에 대해 일련의 비판을 행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역사가로서는 또한 일정한 거리를 취한다면,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으로부터의 전면적·기본적인 절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세기의 정신의학은 정신분석의 대부분의 요소를 이미 포함하거나 준비하는 요법의 기법에 도달했다. 정신의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신병자에 대한 주요한 개입의 형식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수용되어 있고 신경이완제의 치료를 받고 있다. 다른 한편, 정신분석을 받는 사람은, 교양인이나 지식인의 아주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이렇게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장소를 취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양자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양자를 떼어놓은 사이에는, 직권의 분할, 상담, 상호지원이 자아내는 시스템이 있다. 순수한 정신의학과 순수한 정신분석을 떼어놓는 사이에는, 심리치료(psychothérapie)나 지역정신의료 같은 일련의 요법의 형식이 있다. 이런 관리(contrôle)의 제도, 정신의 성형외과(orthopédie mentale)의 제도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41] 1530/240)

Il est certain que la psychanalyse a permis de faire une série de critiques à la pratique psychiatrique. Elle a permis de voir que l'internement n'était pas la meilleure forme thérapeutique. En tant qu'historien, et en prenant une certaine distance, il me semble que la psychanalyse n'est pas une coupure totale et radicale par rapport à la psychiatrie la psychiatrie du XIXe siècle a atteint une technique thérapeutique qui contient déjà ou prépare beaucoup d'éléments de la psychanalyse. On ne peut pas oublier que la psychiatrie est, encore aujourd'hui, la principale forme d'intervention sur les malades mentaux. Des millions de personnes sont encore soumises à l'internement, au traitement par neuroleptiques, alors que les psychanalysés se trouvent dans une sphère très restreinte de personnes cultivées ou intellectualisées. Ainsi, la psychanalyse n'est pas arrivée à prendre l'espace de la psychiatrie, mais les deux coexistent dans la société d'aujourd'hui et il y a entre elles tout un système de division d'attributions et de consultations, et d'appui mutuel. En outre, il y a entre la psychiatrie et la psychanalyse pures une série de formes thérapeutiques, comme la psychothérapie, la psychiatrie communautaire ; je pense qu'il serait important de faire une étude détaillée de toutes ces institutions de contrôle, d'orthopédie mentale.

 

푸코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이라기보다는 양자 사이에 퍼져 있는 시스템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현재에서는, 각종 전문직(사회복지사, 정신보건복지사, 간병복지사, 방문간호사, 보건사, 임상심리사), 각종 상담(육아상담, 취학상담, 취업상담, 학생상담, 심리상담, 유전 관련 상담, 결혼상담), 각종 상호지원(자립지원, self-help group, 환자회, 운동단체)이 구성하는 시스템이며, 그리고 각종 치료요법(정신분석적 요법, 담화요법, 인지행동요법, 인간주의적 요법, 가족요법, 집단요법, 정신요법), 각종 정신의료(지역센터, 복약관리, 클리닉, 진료소)가 뒤섞여 있는 상황이며, 게다가 그것들에 의한 관리와 정신 성형의 제도·시설(학교, 대학, 직장, 교도소, 복지시설, 노인시설, 교정시설, 중간시설, 이행시설)이다. 그 시스템은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얘기된 것이지만, 근년에 이르러서 강조되고 누구나 입에 올리게 된 연계이다. 푸코는 바로 거기에 전쟁상태를 감지하고, 권력의 분석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날뛰는 땅을 영토화하고 평화 공존하는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사이에 펼쳐진 전장터에서의 실정성의 진리이자 신화라고 꼽히는 학문이, 심리학으로서 재파악되는 것이다.

푸코가 1975년의 수용소, , 감옥([160])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말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나의 신조로서, 지식인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참칭했던 도덕적 심사관의 역할, 즉 모든 영역에서 선악을 규정하는 역할을 이제 와서 다시 수행해야 할 것 같지 않다je crois que les intellectuels ne doivent pas recommencer à jouer le rôle qu'ils s'attribuaient pendant longtemps, et qui est celui de législateur moral, celui d'être la bonne et la mauvaise conscience dans tous les domaines”([160] 1644/405)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일반적으로 심리 치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Que pensez-vous de la psychothérapie, d'une manière générale?”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서 얘기되고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것에 대답하기란 어렵다. 심리치료에는 다양한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 한쪽에는 사기[위조품]에 불과한 것에서부터, 다른 한쪽에는 환자 개인에 대해서는 옛날 이상의 정신의학 권력을 적용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 범위는 광대하다. 아주 흥미로운 것도 존재한다. 나는 둘 중 하나를 골라잡을 수 없다. 게다가 내가 믿기로는, 지식인이 오랫동안 자신에게 귀속시켜온 역할, 도덕적 입법자의 역할, 어떤 영역에서도 꺼림칙하지 않은 양심이기도 하며 꺼림칙한 양심이기도 하다/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도 하고 느끼기도 한다는 역할을 또한 맡아서는 안 된다. 지식인의 역할은,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맺지 않은 영역에 대해 입장을 취하거나 일반적인 의견을 내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몇 년 동안 매일매일 정신병원에서 지낸 적이 있다. 또한 몇 달 동안 감옥에 들어간 적도 있다. 또한 수년 동안, 전-죄수나 죄수의 가족 집단에 참가했다. 심리 치료에 대해서는 나는 제대로 접촉한 적이 없다. ([160] 1644/405)[각주:4]

Il est difficile d'y répondre pour deux raisons. La psychothérapie embrasse un nombre tel de pratiques différentes, dont les unes ne sont que du charlatanisme, d'autres, l'application du pouvoir psychiatrique plus traditionnel au niveau de la clientèle privée. La gamme est énorme. Il existe même des choses très intéressantes. Je ne peux pas prendre parti sur cette question. En outre, je crois que les intellectuels ne doivent pas recommencer à jouer le rôle qu'ils s'attribuaient pendant longtemps, et qui est celui de législateur moral, celui d'être la bonne et la mauvaise conscience dans tous les domaines. Le rôle de l'intellectuel est celui de se lier aux personnes qui sont concernées par le sujet qui l'intéresse. Donc, je me refuse à prendre position ou à émettre des idées générales sur des domaines auxquels je ne suis pas lié. J'ai passé des jours et des jours, pendant plusieurs années, dans des hôpitaux psychiatriques. J'ai été dans une prison pendant quelques mois * et, pendant quelques années, j'ai participé à des groupes d'ex-prisonniers ou de familles de prisonniers. Avec la psychothérapie, je n'ai pas de contacts précis.

 

푸코가 말하는 것은 심리 치료에 대해 도덕적 판정을 내릴 작정은 아니라는 것, 심리 치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심리 치료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한에서, 심리 치료에 대해 일반론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봤듯이, 푸코는 사기[위조품]로부터 옛날부터의 정신요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법의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좋고 나쁨을 판정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권력·생명정치론에서도 통치성론에서도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이하의 과제가 된다.

 

4. 생명권력의 양극을 매개하는 것

1976년의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의 생명권력·생명정치의 규정은 신체를 표적으로 하고 있으며, 대체로 정신이나 심리에 관련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삶은 정신생활이나 심적 생활을 포함한다고 해석하면 간단하지만, 조금 더 사태는 복잡하다. 생명권력·생명정치의 규정은 이랬다.

 

삶에 대한 이 권력은, 17세기 이후, 두 가지 주요 형태로 발전(발생)했다. 양자는 서로 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는 발전의 두 가지 축을 구성하며, 양자 사이에는 양자를 묶는 관계들의 다발(faisceau intermédiare de relations)이 있다. 극의 하나는, 먼저 형성됐다고 생각되는데, 기계로서의 신체를 중심으로서 형성됐다. 신체의 조련[훈육], 신체의 적성의 가격 상승, 신체의 힘의 찬탈, 신체의 효용과 신체의 고분고분함의 평행적 증가, 관리의 실효적이고 경제적인 시스템으로의 신체의 통합, 이 모든 것은 규율훈련, 인간 신체의 해부-정치의 특징인 권력의 수순에 의해 확보되었다. 조금 늦게 18세기 중반에 형성된 두 번째 극은 신체-종을 중심으로서, 생물의 기구가 され 생물학적 과정의 매체로서 도움이 될 신체를 중심으로서 형성됐다. 이 생물학적 과정이란 번식, 출생수와 사망률, 건강수준, 삶의 지속, 수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조건인데, 그것을 청부를 맡아 행해지는 것이 일련의 개입과 일련의 조정관리, 인구(주민)의 생명정치이다. 신체의 규율훈련과 인구의 조정은 두 개의 극을 이루며, 그 주위에서, 삶에 대한 권력이 발전했다[주].

 [주]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I: La volonté de savoir (Gallimard, 1976), pp.182-183. 여기의 의 용법에 관련하여, 1965년의 프랑스정신의학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병원은 여전히 주요한 극이다. 그리고 정신위생센터의 수준에서 본다면, 시스템에는, 병원과 병원 밖의 두 가지 극성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두 개의 극성의 주위에 병원 밖의 다기능의 다양한 장치가 조직될 것이다. 낮 진료소, 야간 진료소, 치료 후의 홈, 보건작업소 등등. 특별 호스피스 노인 홈”(Michel Audisio, “La réorganization de l’assistance psychiatrique et des organismes de soins,” in Eduard Private (éd), Livre blanc de la psychiatrie française, Tome I(1965), p.82). 

읽을 수 있듯이, 삶에 대한 권력, 생명권력은 그 두 개의 극에 있어서는 신체를 표적으로 한다. 정신이나 심리는 자취도 없다. 다만 두 극 사이에는 관계들의 다발이 있다고 하며, 두 극의 주위에 생명권력이 발전한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그 관계들의 다발이야말로 생명권력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권력이란 권력관계이기 때문에, 생명권력은 생명권력관계이다. 따라서 생명권력관계는 극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주위와 사이에 존재한다. 생명권력관계는 신체규율훈련과 인구조정의 주위와 사이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직장과 보건서의 주위와 사이에 퍼져 있는 관계, 산업의사·위생관리자·위생추진자·안전위생추진자·보건사·간호사·산업상담사·임상심리사·인사노무관리스탭·종업원지원상담사 등이 온통 둘러치는 관계인 것이다.

다른 한편, 이 구절이 발생생물학의 용어로 작성되어 있다는 것에도 주의하고 싶다. 미분화된 배아세포는 힘들의 장을 이루고 있으나, 거기에 극성(極性)이 형성됨으로써 그것이 조직자로서 작동하며, 배아세포는 발생·분화를 수행한다. 그때 극의 주위와 두 극 사이에서의 힘들의 장이야말로 생명력의 장으로서 작동하며, 거기에 다양하고 다채로운 조직이나 기관이 발생한다. 이로부터 유비를 이끌어낸다면, 기계로서의 신체와 생물로서의 신체를 양극으로서, 그 주위와 사이에서의 권력관계의 장이 생명권력·생명력·바이오파워이게 된다. 물어야 할 것은, 혹은 물어도 좋은 것은 그 권력관계의 장에서 발생·분화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말할 것도 없는데 조직이나 기관에 해당하는 장치들, 학교·교도소·공장·병원 등의 시설이다. 그리고 신체라는 단어가 일관되게 단수형으로 적혀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계신체와 생물신체 사이의 권력관계의 장에서 발생·분화하는 것은, 정신과 심리, 축약하면 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신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규율훈련·해부-정치이며, 생물신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조정관리·생명-정치인데, 생명권력관계가 양쪽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관계를 가능케 하거나 실효적으로 하는 매개가 필요하다. 혹은 똑같은 신체의 두 가지 측면을 매개하는 것이며 생명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푸코가 실제로 뒤따라간 발상의 방향에 대해서는 애매한 대목이 남아 있다지만, 생명권력론의 이론구성에서 보면, 양극을 매개로 하는 것이 그것으로서 지목될 필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성의 역사 1에서는 그것이 성기(sexe)’라고 지목되는 것이다.

 

삶의 정치기술의 모든 것은 두 개의 축을 따라 발전해 왔는데, 그것들의 교점(charnière)에 있는 것이 성기이다. 한편으로 성기는 신체는 규율훈련의 관할에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기는 인구의 조정의 관할에 속한다. 성기는 동시에 두 개의 등록기에 삽입되는 것이다. 성기는 미분(微分)적인 감시, 순간적인 관리, 극도로 용의주도한 공간설비, 제한 없는 의학적·심리학적 검사, 신체에 대한 미시권력에 대해 장을 주고 그 이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성기는, 대량의 조치, 통계적 예측, 사회체의 전체나 집단의 전체 집합을 노리는 개입에 대해 자리를 주고 이유를 주는 것이다. 성기는 신체의 삶에의 접근인 동시에 종의 삶에의 접근이다. 성기는 규율훈련의 모체로서도 조정의 원리로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읽을 수 있는 그대로, 동시에 두 가지의 모태가 되며, 동시에 두 가지의 원리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한쪽의 미시적 권력 거기에 심리학의 기법이 포함된다 과 다른 쪽의 거시적 개입 그것에는 사회심리학이나 산업심리학의 기법이 포함된다 을 매개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지금은 그것이 성기와 원한다면 이라고 지목되고 있다. 그리고 푸코는 그 성기·성을 둘러싼 지식, 학문지식과도 실천지식과도 연결되지 않는 지식, 특정한 학문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의지가, 미시적 권력이나 거시적 개입과 뒤얽히는 모습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원래 성의 역사우리가 아는 성(적인 것)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권력관계와 얽혀 있는 지식의 의지가 원하는 것을 분석하려고 한다. 따라서 지식의 의지가 원하는 것에는, 성기·성 이외의 것도 있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장애, 질병이 즉각 머릿속에 떠오른다. 신체의 각 부위, 특히 뇌는 중요하다. 신체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예를 들어본다면, 물론 정신, 마음, 혼일 것이다. 이때 권력과 뒤얽히는 지식은 더 이상 심리학이라고는 불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정신·마음·혼의 지식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다만, 호칭이 바뀌더라도, 초기의 심리학자 푸코의 문제설정은 기본적으로는 바뀌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권력의 한 가지 극에 매몰되는[파묻혀 있는] 한에서의 정신과 심리의 기법이 푸코에게서는 어떻게 되는가를 추적해보자. T. 사즈의 작업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1976년의 규범의 사회적 확대([173]) 읽어보자. 푸코는 사즈의 책의 서평의 형태를 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주].

[주] 또한 “Szasz”의 발음은 그 출신지인 헝가리어에 의하면 싸즈가 될 것이다. Cf. Jeffrey A. Schaler (ed), Szasz Under Fire: The Psychiatrie Abolitionist Faces His Critics (Open Court, 2004), p.xiii. 

푸코도 사즈도 권력의 기법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즈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탐지, 진단, 질문의 기법techniques de repérage, de diagnostic, d'interrogatoire인데, 사즈는 전문가가 직접 개인에게 행사하는 기법에 체현되어 있는 권력의 기법을 문제시하고, 마치 그것을 그만둔다면, 좋은 전문가-클라이언트 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반면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회적-경찰적 분할=분배(partage)의 기법techniques de partages socio-policiers이다. 그 기법은 끊임없는 가시성, 개인의 항상적 분류, 계층화, 자격의 한정, 경계의 설정, 진단의 실시Une visibilité incessante, une classification permanente des individus, une hiérarchisation, une qualification, l'établissement de limites, une mise en diagnostic등이다. 푸코는 전문가가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의 기법을 문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일반적인 분할=분배의 기법의 예로서 문제화하는 것이다. 정신과 심리의 전문직이 행사하는 기법은, 말할 것도 없이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권력관계이다. 그러나 그 기법을 대등한 당사자끼리의 관계에 전용한 곳에서, 집단적 관계에 매몰된[파묻힌] 곳에서, 그것이 사회적-경찰적 분할=분배의 기법의 하위 기법에 거둬지는[수렴되는] 사태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대등관계 같은 환상에 의해 사태는 점점 더 은폐되고 있다. 때로 폭력적이게 되는 알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개별적인 양자관계 내지 그 종합에 있어서 생기는 일상적이고 국소적인 트러블로 간주함으로써, ‘연계를 통해 작동하는 분할=분배는 완전히 묵인된다. 푸코가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인데, 푸코는 이것 자체에 대해 선악의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재범 가능성이 있는 자로 분류하는 것은 학계에서는 나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나쁘다고는 반드시 말할 수 없다. 공해병을 인정받은 환자로 분류되는 것은 세상에 선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선하다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다. 푸코가 보고 있는 것은, 양자가 동시에 권력의 기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에 의한 분할=분배의 기준은 규범(norm)이며, 현대사회는 규범화의 사회(normalisation의 사회)라고 규정되며, 푸코는 이 권력의 중심에 의료권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사즈처럼 의료권력을 비판한다면, 권력을 비판할 수 있게 될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만약 광기가 진단 분류 도표에 견줄 수 있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한다면, 만일 광기에는 병리화하는 것도 의료화하는 것도 미치지 않는 특수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한다면, 그때 광기란 무엇일까? 반정신의학은, 바로 그 무엇인가에 직면해야 한다. 정신병의 용어로 코드화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 사회적 규범성의 용어로 코드화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 그러나 문제를 만들어내는 무엇인가에 직면해야 한다. 반정신의학은 시설의 내부와 의사의 의식의 내부에서는, 광기의 의료화를 해체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의료와 정신의학에 의한 오랜 식민지화를 거쳐, 광기의 물음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173] 76-77/94)

Si la folie n'est pas la maladie mentale se déployant dans un tableau nosographique, si la folie a une réalité spécifique qu'il ne s'agit pas de pathologiser ni de médicaliser, alors, qu'est-ce que c'est, la folie ? L'antipsychiatrie a justement à se confronter à ce quelque chose qu'il ne faut pas coder en termes de maladie mentale ni en termes de normativité sociale, mais qui cependant fait problème. L'antipsychiatrie démolit, à l'intérieur de l'institution et de la conscience des médecins, la médicalisation de la folie. Mais, de ce fait même, la question de la folie nous revient après cette longue colonisation par la médecine et la psychiatrie. Qu'en faire ?

 

분명히 반정신의학은 광기의 식민지화를 끝나게 했다. 탈병원화와 지역정신의료화는 의사에 있어서도 상식화했다. 그런데 포스트식민지주의의 시기가 되어, 이번에는 광기는 다른 문제로서 출현했다. 지역에서의 사회문제로서, 학급운영의 문제, 취업의 문제, 범죄예방의 문제, 노숙생활의 문제로서 출현한다. 이 사회적-경찰적인 분할=분배의 체제, 정상화(normalization) 사회에서는 광기는 절대적인 외부로서 출현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어디까지나 문제화되어야 할 무엇인가, 문제화되어야 하고 특수한 리얼리티로서 등장한다. 그렇게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산 너머 산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을 넘은 후에 올 것을 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산을 넘어 다른 산이 올 때까지의 협간에서 언뜻 엿보이는 무엇인가를 감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논의 맥락에서 푸코는 사즈(Szasz)의 정신분석적 요법에 비평을 가한다.

 

정신분석은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대중적으로는 의료실천처럼 기능하고 있다. 설령 정신분석을 실천하는 것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은 요법으로서, 의료적인 개입으로서 기능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분석은, 도처에서 확립하고 있는 의료적 관리의 네트워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173] 77/95)

Cela dit, la psychanalyse, non seulement aux États-Unis mais en France, fonctionne d'une façon massive comme une pratique médicale : même si elle n'est pas toujours pratiquée par les médecins, c'est bien comme thérapeutique qu'elle fonctionne, comme intervention de type médical. De ce point de vue, elle fait bien partie de ce réseau de «contrôle» médical qui est en train de s'établir partout.

 

푸코는 이렇게 계속한다. “정신의학자는 그 클라이언트에게 환자의 신분을 고액으로 강매한Les psychiatres vendaient cher le statut de malades qu'ils donnaient à leurs clients것인데, 반정신의학 운동 이후의 사즈를 필두로 하는 정신분석적 요법가나 심리요법가는 자신을 환자라고 보는 사람에게 비-질병을 판매한다Szasz vend de la non-maladie à des gens qui se prennent pour malades.” , 의료적 관리 하에 놓인 연계 네트워크 하에서, -질병을 판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일이 장애, 비행, 부적응 등에서도 일어났다. 변함없이, 권력의 네트워크, 사회적-경찰적 분할=분배의 기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푸코는 그것을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푸코가 내다보고 있는 것은, “질문을 만들어내는 무엇인가”, 절대로 직면을 회피하는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5. 혼과 행동의 통치로

생명권력생명정치론에서 통치성론으로의 이행에 대해, 원래 생명권력론생명정치론은 일시적인 정식에 불과하다고 이해된 적이 있다. 확실히 더 나중에는 “생명권력생명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지만, 그러나 문제구성 그 자체에 큰 변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한에서, 심리학 비판의 과제, 정신과 심리의 문제설정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이행에 대해서는, 그것이 전선의 축소나 후퇴가 아니었다는 것도 포함해, 신중하게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 본고에서는 권력의 기법이 개인화의 기법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에, 자기의 기법을 주제화하는 데에 이르는 그 이행에 대해서만 검토하고 싶다. 1978년의 통치성([239])에서는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가라는 물음은 혼의 통치의 문제와 행동의 통치의 문제로서 제기되며, 명확하게 정신적·심리적 차원의 문제설정을 계승하는 것인데([239] 636/247), 거기로의 이행의 논리를 따라가보자.

우선 생명권력의 극 중 하나인 규율권력은 개인화[개별화]하는 권력으로 재파악된다. 그 전쟁터에서는 개인화의 기법이 행사된다. 1981년의 강연 권력의 그물망([297])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권력의 개인화의 기법. 어떻게 누군가를 감시하는가, 어떻게 그 품행·행동·적성을 관리[통제]하는가, 어떻게 그 수행performance을 강화하고 그 능력capability을 증가시키는가, 어떻게 그 누군가를 가장 유용한 장소에 놓아둘까? 이것이야말로 나의 의미에서의 규율훈련이다. ([297] 1010/411)

Techniques de l'individualisation du pouvoir. Comment surveiller quelqu'un, comment contrôler sa conduite, son comportement, ses aptitudes, comment intensifier sa performance, multiplier ses capacités, comment le mettre à la place où il sera plus utile : voilà ce qu'est, à mon sens, la discipline.

 

당연히 (rehabilitation)의 기법, capability approach 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강연 권력의 그물망에서는 이제 권력의 도구법정, , 사법장치가 아니라 의료, 사회관리, 정신의학, 심리학이라고도 얘기되며([297] 1018/420)[주], 심리학은 특권적인 지위로부터 미끄러져 떨어졌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새삼 권력의 도구로서, 전쟁상태의 무기로서 재위치되고 있다. 그리고 1982년의 주체와 권력([306])은 이 개인화하는 권력에서 통치성론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것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거기서 푸코는 권력분석의 출발점을 새로운 사회운동에서 엿볼 수 있었던 전쟁상태에 놓고 있다.

[주] 정신분석은 통치성의 지식 중 하나이다. 푸코가 말하는 정신분석은 각종 정신분석, 심리요법과 혼재하는 정신분석이다. 1984년의 미셸 푸코의 인터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신분석은 과학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증언(aveu)을 기초로서, 자기가 자기에 대해 노동작업하는 기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그것이 성적 욕망의 주위에 자기를 구조화하는 인물을 창조한다는 사정으로부터도, 관리의 기법이기도 하다.”(([349] 1484-1485/150). 

 

출발점으로서 요 몇 년 동안 전개되어 온 일련의 이의제기를 다룰 것을 제안하고 싶다. , 여자에 대한 남자의 권력에 대해, 아이에 대한 부모의 권력에 대해, 정신병자에 대한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해, 거주자에 대한 의학의 권력에 대해,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행정관리(administration)의 권력에 대해 이의제기하는 것이다.([306] 1045/14)

Je proposerai, comme point de départ, de prendre une série d'oppositions qui se sont développées ces quelques dernières années : l'opposition au pouvoir des hommes sur les femmes, des parents sur leurs enfants, de la psychiatrie sur les malades mentaux, de la médecine sur la population, de l'administration sur la manière dont les gens vivent.

 

그리고 푸코는 이런 이의제기를 권위에 대한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것들에 공통되는 것을 정확하게 살펴야 한다면서 여섯 가지 점 정도를 열거한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관리를 염두에 두고, 공통되는 것의 열거로부터 뽑아내본다면, 이의제기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권력의 심급, 즉 개인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심급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1의 적을 찾는 것이 아니고, 직면하는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306] 1045/14). , 그런 삶의 방식을 직접 관리하는 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의 전쟁은 개인의 지위=신분을 묻는 투쟁이다.

 

한편으로 그 투쟁에서는 차이의 권리가 긍정되고 개인을 진정으로 개인적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 강조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 투쟁에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분리하고, 공동생활을 세분화하고,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틀어박히도록 개인에게 강제하고, 개인을 그 정체성에 비끄러매는 모든 것이 공격된다.

이 투쟁은 개인을 위한 것도 개인에 대항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화의 통치라고도 해야 할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306] 1045-1046/15)

d'un côté, elles affirment le droit à la différence et soulignent tout ce qui peut rendre les individus véritablement individuels. De l'autre, elles s'attaquent à tout ce qui peut isoler l'individu, le couper des autres, scinder la vie communautaire, contraindre l'individu à se replier sur lui-même et l'attacher à son identité propre.

Ces luttes ne sont pas exactement pour ou contre l' «individu», mais elles s'opposent à ce qu'on pourrait appeler le «gouvernement par l'individualisation».

 

의 무기는 개인화의 기법이다. 예를 제시해 보면, 개인을 분리하는 기법(시설로부터 지역이나 재택으로 이행시키는 기법, 유닛 케어[주]를 판매하고 살게 하는 기법), 공동생활을 세분화하는 기법(파티션의 기법, 건축에서의 동선의 기법, 개인실을 권장하고 운영하는 기법, 방문의 기법), 개인을 반성적으로 만드는 기법(개인 면담, 상담, 오피스타임オフィスタイム, 입사지원서, 질문표) 등등. ‘은 그것들을 무기로서 전쟁과 통치를 행한다. 그리고 지금 국가개인화의 모태가 되며, 그 권력은 사적 기업, 상호부조단체, 자선가, 인도가에 의해서도 행사된다([306] 1049/18). , 새로운 사회운동의 후예인 자선가나 인도가는 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개인화의 모태인 국가로부터 생겨나고 개인화의 기법을 행사하는 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전문가만이 은 아니다. ‘아군, 아니 아군이야말로 이다.

[주] 자택에 가까운 환경의 간병시설에서 다른 입주자나 간병 인력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입주자 개개인의 개성이나 생활리듬에 따라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간병수법을 가리킨다.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고 있는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 문제는 국가와 국가의 시설=제도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묶는 개인화의 유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몇 세기에 걸쳐 강제된 개인성의 유형을 거부하면서, 주체성의 새로운 형태를 촉진해야 한다. ([306] 1051/20)

On pourrait dire, pour conclure, que le problème à la fois politique, éthique, social et philosophique qui se pose à nous aujourd'hui n'est pas d'essayer de libérer l'individu de l'État et de ses institutions, mais de nous libérer nous de l'État et du type d'individualisation qui s'y rattache. Il nous faut promouvoir de nouvelles formes de subjectivité en refusant le type d'individualité qu'on nous a imposé pendant plusieurs siècles.

 

그래서 문제는 아군과 제휴하거나 공동하거나 협동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군이 초래할 개인화의 유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도 약간 놀라운 것이지만, 개인화에 대해 주체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뿐 아니라, 그 주체성의 탐구에 있어서 기법이 사용된다는 전망을 푸코는 제시한 것이다. “자기의 배려(souci)”에 대해,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세운 1981년의 주체성과 진리([304])를 다시 읽어보자.

 

자기의 배려의 역사와 자기의 기법의 역사는 주체성의 역사를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제 광인과 비-광인, 병자와 비-병자, 범죄자와 비-범죄자의 분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고 말하고 노동하는 주체에 장소를 주면서 과학적 대상성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에서의 자기 자신에의 관계의 성립과 변용 및 그 기법적 뼈대와 그 지식의 효과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른 측면에서, ‘통치성에 대해 질문을 다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에 의한 자기의 통치, 타자에의 관계와 연접하는 자기에 의한 자기의 통치(교육학, 행동상담, 영적 지도, 인생모델의 처방 등에서 보인다).[주] ([304] 1033/445)

L'histoire du « souci » et des « techniques » de soi serait donc une manière de faire l'histoire de la subjectivité : non plus, cependant, à travers les partages entre fous et non-fous, malades et non-malades, délinquants et non-délinquants, non plus à travers la constitution de champs d'objectivité scientifique donnant place au sujet vivant, parlant, travaillant ; mais à travers la mise en place et les transformations dans notre culture des « rapports à soi-même », avec leur armature technique et leurs effets de savoir. Et on pourrait ainsi reprendre sous un autre aspect la question de la « gouvernementalité » : le gouvernement de soi par soi dans son articulation avec les rapports à autrui (comme on le trouve dans la pédagogie, les conseils de conduite, la direction spirituelle, la prescription des modèles de vie, etc.).

[주] 푸코는 권력, 통치성, 자기와 타자의 통치,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 이렇게 네 가지의 연쇄의 분석을 과제로 하는데, 특히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 자기에의 배려는 심리학 등의 역사적 선구에 해당된다고 파악한다. Cf. Michel Foucault, L’hermeneutique du sujet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 (Seuil/Gallimard, 2001), Cours du 17 février 1982.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통치성은 분할하고 분배하고 통치하는 권력이 아니다. 관점은 변화한다.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통치성은,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에 의해 타자에 대한 관계가 연절화連節化되는 통치이다. 그리고 그런 통치성은, 바로 각종 기법에서 발견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통치성에 있어서는, 예를 들어 광인 자신이 자기를 통치하고, 바로 그것에 의해 비-광인과의 관계를 연절화連節化한다. 다른 한편, -광인 자신도 자기를 통치하고, 바로 그것에 의해 광인과의 관계를 연절화連節化한다. 사람들을 분할하고 분리했던 시설은 해체되고 연계가 강조됐기 때문에, 개인화의 기법은 각자가 자기를 통치하고 그것에 의해 타자관계를 구축하는 통치성에 편입[기입]된다. 달리 말하면, 그렇게 해서 각자는 포섭되고 통치된다. 이것이 현재의 권력이다.

아군도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다. 개인화의 기법으로 치안하고 보안하고 관리하고 통치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무기를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을까? 정신과 심리의 기법을 제 것으로 사용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때 주체성의 역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체성의 새로운 형태를 촉진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 푸코의 전망의 귀추는 완전히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심리학자 푸코가 달려온 길은 현재에서도 그 귀추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1954-1988, 2 vol., édition établie sous la direction de Daniel Defert et François Ewald avec la collaboration de Jaques Lagrange (Gallimard, 2001)(蓮資重彦渡辺守家監修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全一O, 筑摩書房, 一九九八-OO二年)으로부터의 인용에 대해서는 문서 번호 후에, 그것이 수록된 원서의 권수에 해당되는 쪽수, 그것에 대응하는 일역본 권수의 쪽수를 표기한다. 예를 들어 “[30] 472/23230번 문서, 원서(1) p.472, 그것에 대응하는 일역본(2) 232이라는 것이다. 문서번호에 의해 권수는 정해져 있어서 권수는 생략했다.

 

  1. 또한 푸코가 젊은 시절에 니체 독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서두에 인용한 인터뷰에서이다. 푸코는 니체 덕분에, 병원 내의 모든 실천에 대해 étranger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글은 anti-나 contre-가 됨으로써 étranger가 되는 것의 권력이라고도 해야 할 것을 탐구한다. [본문으로]
  2.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ie)이 심리학의 일부분으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1984년의 인터뷰 「미셸 푸코에게 듣다」에서는 심리화의 동향에 관심을 보낸다. 이것은 심리학자 푸코의 함수이다. “한편으로, 형벌을 가능한 한 전면적으로 심리화하는(psychologiser) 가능성이 있다. 바꿔 말하면, 형벌을 ‘교정’, ‘개선’ 쪽으로 한꺼번에 쏠리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심리요법이나 집단의 요법이다.” ([353] 1513/194頁). [본문으로]
  4. 심리치료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이 유익하다. Harry Specht and Mark E. Courtney Unfaithful Angels : How Social Work Has Abandoned Its Mission (Free Press, 1994).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 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 나가하라 유타카


2013930일 초판발행



목차

1. 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 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 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 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 이치다 요시히코

 

*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들뢰즈와 자연

ドゥルーズと 自然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청자 / 해설]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정황343, 2003, 176-189

 


들뢰즈와 ‘자연’.pdf


── 일본의 들뢰즈론은 일반적으로 문학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고, 그의 난해한 문체를 문제 삼거나 예술비평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선생이 쓴 들뢰즈의 철학(ドゥルーズの哲学)(講談社現代新書)이과(理科)”적이랄까, 들뢰즈의 사고법과 근대자연과학의 방법론의 연관이 클로즈업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관을 축으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우선 첫 번째 점으로 들뢰즈와 라이프니츠의 관계를 꼽고 싶습니다. 책에서도 보편수학이 언급되는데요, 이것은 원래 라이프니츠의 개념이죠.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 일본에서 라이프니츠 유행(boom)이 일어났을 때, “보편수학이나 보편기호학이 화제가 됐습니다만, 이것과 당시 역시 주목받은 들뢰즈가 주름에서 전개한 라이프니츠론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요? 원래 관계가 있다면 하는 얘기입니다만.

 

고이즈미 : 들뢰즈가 보편수학을 꺼낸 배경에는 현대의 수리과학의 기초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들뢰즈는 자연물도 생물도, 보편수학에 의해 일의적으로 파악된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생명이나 생물의 시스템론과 모델론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만, 거기서는 수학의 역할이 매우 컸고, 거기에 사고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편수학 mathesis uiversalis”은 데카르트가 복권시키고 라이프니츠가 계승한 구상입니다. 라이프니츠 자신은 보편수학에 대해 짤막하게 여러 가지를 쓰고 있습니다만, 자연물이나 생물을 포함한 존재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정리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보편수학 구상이 꿈에 그칠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만, 들뢰즈는 현대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10년 전의 라이프니츠 유행은, 들뢰즈의 라이프니츠관과 그다지 접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EU통합 붐의 일환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때 얘기된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은 법학자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럽적 보편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습니다. 상당히 이전의 러셀이나 루이 쿠트라(Louis Couturat)의 고전적 라이프니츠 연구 쪽이 풍부합니다.

 

──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씨는 최근 나온 들뢰즈(ドゥルーズ)(NHK出版)에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긍정적인 면으로서 보편성을 추구했다는 것, 부정적인 면으로서 예정조화로 끝났다는 것을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성의 철학자인 들뢰즈는 예정조화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이즈미 : 라이프니츠는 다면적이고 가능성으로 넘치는 철학자입니다. 들뢰즈는 그 가능성을 이용하면서 고쳐서 새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능세계론에 관해서도, 이것은 스즈키 이즈미(鈴木泉) 씨가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들뢰즈는 꽤 초기부터, “가능세계는 타자로서의 여성이 표출되는 장이다고 고쳐 읽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주름 pli”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이 속에 접혀져 있다 = 암시[함축]되어 있다 im-pli-qué”는 것이 펼쳐져 있다 = 해명된다 ex-pli-qué”는 것이 생명의 발생이나 세계의 진전이라고 읽혀집니다만, 이것뿐이라면 단순한 전성(前成)”설이며, 쓸모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들뢰즈의 주름전성설적으로만 읽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름은, 작게 접혀진 현실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주름을, 공간의 왜곡이나 다양체의 곡률로 재파악해서 현대화, 대수화할 필요가 있다. 주름 개념이라 해도, 그것을 현대수학적으로 깊어지고, 생명이나 자연의 잠재성과 생성을, “후성(後成)”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장치로 가다듬는 것이 들뢰즈의 보편수학의 목표였으며,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생성변화라고 기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러면 속류 무상(無常)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 라이프니츠의 수학주름은 반드시 정합성을 갖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들뢰즈가 그것을 해석에 의해 다소 무리하게 연결하고자 했다는 말인가요?

 

고이즈미 : 무한소라는 수학적 개념과 미소지각이나 미소표상과 주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을, 라이프니츠 자신에게 맞부딪쳐 보더라도, 명확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연구자도 그것들을 그저 나란히 늘어놓았을 뿐입니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를 바로크 철학자라고 보는 고색창연한 해석을 멋지게 복권시킨 셈입니다만, 실제로는, 라이프니츠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비판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무한소는 어디까지나 무한 표상에 불과하며, 헤겔보다는 덜하지만, 코시나 데데킨트가 달성하는 극한개념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의미의 논리시네마에서도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론이나 예정조화론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 들뢰즈는 미분개념에서 차이를 도출하려고 한 것입니다만, 우리가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우는 라이프니츠 당대 수준의 미분이라면, 하나의 값으로 예정조화적, 연속적으로 수렴되는 이미지이기에, 철학적인 차이와는 거리가 머네요. 대학에서 배우는 코시 이후의 수학이라면, 미분 속에는 불연속적인 것도 있으며, 결코 하나의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이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차이개념은 라이프니츠 시대의 미분이라기보다는 더 현대적인 미분에 대응하는 셈입니까?

 

고이즈미 : 요는 대학 이후의 수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미분 방정식의 해()가 발산하고 분기하는 경우 등, 수학은 결코 얌전하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규체역학으로 길들이려고 하고, 수치계산 시뮬레이션에 갖고 들어옵니다만, 이번에는, 기계에 설치된 수학이, 야만적이고 길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발판을 놓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마이너과학입니다.

들뢰즈는 자연계에서도 생물계에서도, 차이가 제한없이 자라나서 현실화한다는 사실, 진화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변이가 점점 자라나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합니다. 그리고 차이를 산출하는 장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 장치는 미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를 생산하는 장이 현대의 수학에 의해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제 자신도, 차이를 발생시키는 장에 접근하려면 일상언어로는 안 되며, 해석학과 대수학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자주 사용되었던 강도라 해도, 들뢰즈 자신이 강도와 미분의 관계가 어렵다고 말했으며, 강도는 수학의 방정식에서 자유 변수(파라미터)입니다.

다만 동시에, 실제로 수학자자연과학자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철학자는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게다가 평가하는 쪽도 현대의 수리과학자연과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때, 말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철학윤리학은 수학자연과학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회윤리도 경제학 비판도, 에코메트릭스의 횡포를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후생경제학 이후라고 말해도 좋습니다만, 환경경제학, 진화경제학, 블랙 숄즈 모델 같은 사이비 이론의 횡행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분석철학이 철학 전체를 휩쓸었습니다만, 분석철학계의 과학론은 전혀 쓸모가 없다. 예를 들어, 현대자연과학에서는 자연법칙은 미분방정식으로 적히는 데도, 명제형식 밖에는 염두에 놓이지 않습니다. 전쟁부터 종전 직후까지, 수리철학도 생명철학도 꽤 높은 수준에 있었습니다만, 그 전통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미분이라는 것은 인간이 사물[]”에 대해 점차 접근해갈 때에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거군요. 그렇게 하면, “미분이란 주관적인 것이라는 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선생은 그것을, 일상언어로 그대로 주관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러면,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학의 언어로 엄밀하게 하나의 해답을 낼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주관적이라고도 객관적이라고도 단언할 수 없기에, 좀체 알기 어려워집니다만, “미분주체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할까요?

 

고이즈미 : 수학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천사도 신도 풀지 못한다고 증명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생물과 자연물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면서 생성소멸한다. 그렇다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문제에 대해, 주관적이라고 평가해도 객관적이라고 평가해도, 엉뚱해진다. 주관객관 도식은, 이런 곳에서 파산할 것예요. 들뢰즈는 자주, “식물은 빛을 지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식물은 빛에 자극되어 광합성을 하는 방식으로 빛을 지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에는 지각하는 이 있고, 빛의 정동affection”이 있다. 그 식물의 지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 장을 표현하는 것은 보편수학뿐이며, 식물은 보편수학이 표현하는 빛의 문제를 풀면서, 초월론적인 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보편수학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의 범위 안에 잡힐 리가 없으며, 보편수학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일리도 없다.

기존의 철학자가 말하는 주관은 결국 인간의 주관입니다. 현상학은 지각의 수동적 종합 아래서는, 즉시 휠레(hyle)가 온다고 믿는다. 인간의 주관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은 형상 없는 제일 질료라고 믿고 있다. 구제할 길이 없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거기에서, 현상학 이후의 철학은, 인간주관의 한계를 이러저러하게 밀어 올리고, “역설을 만지작거렸다[당치도 않게 내세웠다].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빛을 지각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는 알 수가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내질 뿐이다, 알았다고 한다면 물리학주의에 불과하다, 고 얘기를 끝내고 사고를 포기했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한계나 역설을 꿰뚫고 긍정적인 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를 몇 군데에서 하며, 칸트론에서의 부조화적 능력론 등, 그것은 그 나름으로 세련된 것입니다만, 그런 것을 좇기보다는, 우선은 소박한 유물론, 소박한 실재론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인간중심주의적 인식론을 일단 벗어난 곳에서부터, 철학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종언을 단순한 공상으로 끝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철학사적으로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자주 한 쌍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마이클 하트도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다른 철학자에 대한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죠. 경건하다고 해도 좋을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기(傳記) 부분도 포함해서 그다지 만지작거려지지 않았기에, 상당히 정중하게 기술되어 있네요.

고이즈미 : 들리즈에게는 스피노자야말로 사랑하는 철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부정적으로 읽히기 쉬운 윤리학』 「3의 정서론도, “외부와의 마주침으로서 긍정하며, 5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높이 날아] 올라가는 곳에서도, 유보없이 긍정한다. 들뢰즈가 통째로 긍정하고 있는 철학자는 스피노자 정도입니다. 들뢰즈에게는 스피노자가 혁명가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스피노자 붐이 있고, 스피노자의 정치사상가로서의 면이 강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은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스피노자를 형이상학자윤리학자로서 평가하고 있다.

 

── 보통의 철학 교과서라면, 스피노자의 실체개념이 범신론적인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신적인 실체의 일부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나온 정동이라 해도, 순수한 외부로부터 온다기보다는 대우주와 소우주가 공명하는, 예정조화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리네요. 그런 교과서적 이미지에서 보면, 들뢰즈는 꽤 이상하게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고이즈미 : “실체속성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은, 이른바 범신론적이고 내부예정조화적인 이미지를 타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강조해도, 아무리 차이를 무한하게 반복하는 것이 실체라고 다시 말하더라도, 기껏해야 차이의 정치의 담론이나 다문화주의의 담론으로만 청취될 뿐이죠.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인데요, 이것으로는 17세기 철학의 영향력impact은 전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권리역능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굉장히 대단한 견해인데도 그 영향력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또한 스피노자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신체의 정동이라고 잘라 말한다. 정치경제적인 이슈에 대해 분노하고 논하고 행동하는 것도 정동이라고 한다. 들뢰즈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정치나 사회의 장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통해 정동이 야기되고, 마주침을 하도록 꾀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감정에 의해 수동감정을 능동감정으로 전환하는 민중이 형성된다는 것만이 중요하며,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건을 그렇게 볼 수 없게 되고 있다. 그만큼 상징적인 것이나 르상티망에 얽매여 있다.

라이프니츠도 스피노자도, 생리적 수준에서 생기는 미세한 변용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수준에서의 변용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만, 두 가지 수준의 변용의 얽힘이라고 사건을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근대철학과 들뢰즈의 사고방식은 체득할 수 없습니다. 철학 교과서는 그것을 왜소한 심신 문제로 파악할 뿐이며, 입구에서 글러먹었습니다. 사고의 동기부여를 모른다.

 

── , ‘정념이라는 형태로 신체적으로 생기는 것의 «원인»을 가능성으로서 탐색하는 가운데, 초월론적인 실체가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현대인이 역전시키고, “실체를 출발점으로, ‘정념’, ‘정동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진부한 예정조화론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고이즈미 : 실체의 보이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과 식물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을 차이화하면서 생산하는 것이 실체라고 본다. , 인간의 생존양식과 식물의 생존양식이, 생태-윤리적으로 차이화되는 방식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편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모종의 생물로서, 정동의 경합을 경험합니다만, 그 경험을 통해 주관이 세워진다. 그때의 원리를, 초월론적이고 경험론적인 장의 원리로서 파악하는 것이, 들뢰즈의 흄론의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주관성이 세워지는 곳에, 신념이나 정념이 몰려들고, 사람들은 그것에 구속된다. 그 속박을 이용하면서도 그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윤리의 핵심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편하게 살자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일체의 현상을 보는 것은 꽤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인격이나 주관성 같은 것에 쾌적하게 얽매여 있습니다.

 

── 최근, 화제가 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서, 키워드로서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다중multitude”이 나오네요. 그들더러 말하라면, “다중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정동입니다. 그 스피노자 독해방식을 그들은 들뢰즈로부터 계승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런 형태에서의 정동론의 응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이즈미 : 나는 다중구성된 힘potestas”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potentia”이라고 해석하는, 네그리나 발리바르 등, 스피노자연구의 2세대의 논의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리가 있기에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저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multitude를 다양체로 끌어들여 사용하는 일은 있어도, 저런 포텐셜의 의미로 사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에 정치적으로 판돈을 거는 것은 모종의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들뢰즈에게 스피노자가 혁명가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의 혁명이라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어떤 삶의 방식일까요?

 

고이즈미 : 들뢰즈가 혁명을 말한다고 했다면, “노마드(유목민)”푀플(민중)”이라는 말을 쓰겠죠. 네그리와 하트는 지배자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신체”, “자연에 무시하는 신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신체를 긍정하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위치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공화주의라든가 자유주의라든가 민주제라고는 지껄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배 속에서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따를 수 없는 신체가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노마드적 인간이 있다. 들뢰즈는 그런 인간에게 기대를 건다. 다만 그것이 구성하는 권력으로서 세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지배를 불러들인다고 말한 게 아닐까.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합니다만, 이미지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들뢰즈도 개별 이슈들에 대해 정치적 견해를 밝히긴 했지만, 그것과 철학적윤리학적 전망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들뢰즈는 보통의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관리사회론이 자주 거론됩니다만, 정치론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뭔가에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관리사회 속에서 신체의 역능이 여는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려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가타리와의 공저이기도 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 자본해체론으로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고이즈미 : 그렇습니다. 자본이나 화폐에 관해, 두 개의 책에서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것보다, 자본제에 대항하는 것이 분열자분석을 간과해 왔다는 것이 중대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왜 이토록 매력적이냐 하면, 서두에 나오는, 잡동사니 기계의 소년이나 산책하는 광인, “도래하는 광인의 힘에 감동했습니다. 그 책이 나온 70년대 초반에는, 반정신의학반임상심리운동장애인자립운동의 물결이 있었고, 당시는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들뢰즈는 그 뒤 새로운 생명체새로운 그리스도를 만들어내자고 호소합니다. ,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안 된다고 인정한 다음, 인간을 소재로, 생명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새로운 생명체로 변용시킬 가능성에 건다. “도래할 광인에 기대를 건다. 그런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는 기존의 정치적 대결도식을 송두리째 뒤집겠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모두 생명론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란 진화하고 변신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낳는 힘입니다. 들뢰즈주의자는 항상 생명을 생활로 잘못 읽어왔습니다. 만일 들뢰즈로부터 아무래도 정치적인 것을 읽어내고 싶다면, 생명론의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바이오인포매틱스(생명정보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수학을 응용한 해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가짜 보편수학이며, 그것을 구실로 어리석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저런 종류의 것에 대해서, 생명의 잠재적인 힘을 표현하는 보편수학을 내걸고, 어떻게 대항하느냐가, 들뢰즈적 정치라고 긴급하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 책에서도 썼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생명윤리라고 할 경우, 뭐가 윤리의 주체이고 객체인가라는 전제 자체가 기존의 윤리학과는 다른 것 같아요. 개인의 생명의 존엄을 제일로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개인=주체를 절대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체=생명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을 말소해버리는 것도 아니다. “개체전체의 이항대립에 얽매이지 않는 생명의 존재방식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고이즈미 : 개인에 관해 생각하면, 아무래도 인격이나 주관성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의 한계입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인용하여,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라고 몇 번이나 말합니다. 들뢰즈주의자는 이것을 신체적 행위의 수준에서 이해할 뿐입니다. 정치적 행위나 사회적 행위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육체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체와 전체의 이항대립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생물로서의 인간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육체의 포텐셜을 끄집어내는 윤리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들뢰즈의 생명윤리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병을 놓고 생각할 때, 왜 인간에게는 병이 되는 힘이나 질병에서 낫는 힘이 있느냐고 질문을 제기한다. 그 힘을 긍정적으로 붙잡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살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힘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인식되면, 생명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소동에 대해 다른 태도가 취해지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제3종의 인식입니다. 그 언저리는 누구나 어슴푸레하게 몸으로 알고 있겠습니다만, 좀체 손을 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뭔가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서 점차 변용되어 가는 거네요. “미분대목에서도 화제가 됐는데요, 그것을 고정한 주관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려고 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게 되네요. 하지만 현재의 생명윤리는 주체에 있어서 무엇이 올바른 해답인가를 일의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간다는 것입니까?

 

고이즈미 : 실천의 장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채로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위에서 우선은 들뢰즈처럼 스토아파의 윤리를 계승해보죠. 생로병사에 있어서, 자기의 몫과 운명의 몫을 정확하게 분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주체로서의 자기의 몫을 과대하게 추측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수다를 떨고 싶어집니다. 인간의 잘못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면할 수 없다. 해답을 원하고, 수다를 떨고 싶어진다. 안 그러면, 아마 할 수 없다. 그래서 동시에, 이론인식을 삶의 방식에 더하는 것입니다. 분자생물학의 진전에 의해 생로병사의 시각은 근본적인 변용을 강요당하고 있다. 줄기세포를 생각한다면, 기관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쓸 수는 없다. 신경계나 면역계는 엄청난 전망을 열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메이저과학으로 회수되고 바이오산업에 의해 빼앗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이너과학의 이론적 탐구의 기쁨을 알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 생명윤리라면 반드시 자기결정권인폼드 콘센트(informed consent: 의사가 환자에게 진료의 목적·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여 납득시킨 다음 치료하는 일)” 얘기가 나오죠.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주체로서의 개인의 통제화에 집어넣으려 하는 발상이 근저에 있는 것인데요, 지금 하셨던 말씀에서 보면, 들뢰즈적인 생명윤리에 있어서, 그런 문제의 제기방식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 : 저는, 바이오기술을 추진하는 쪽도, 그것에 우려를 표명하는 쪽도, 생명의 포텐셜을 조작 가능하고 지배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한통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포텐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단편적인 정보의 교환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 슬퍼집니다.

자기 결정론 비판은 겁내면서 조금씩 나왔습니다만, 생식의 문제에서 자기결정론은 결정적으로 파탄 났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생명체를 낳을 때, 자기결정론은 잘 안 팔립니다. 현재의 생식기술의 동향에서 보더라도, 기존의 틀에서의 생명윤리는 꾸려나갈 수 없겠죠.

 

── 근대의 윤리학이라는 것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최후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마지막에는 구태여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면서 결단한다는 것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는 그런 누락은 없는 것 같아요.

 

고이즈미 : 결단했다는 것으로는 대단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인간 주관에 의한 결정 등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결정하지 않는 쪽이, 방목해 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봅니다. 스피노자론에서도 그것을 논하고 있고, 자기 결정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을 퍼뜨리고, 모종의 지배와 복종의 방식을 살아남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 스피노자는 자유의 사상가라고 붐이 일었을 때 자주 얘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봤을 경우의 자유란 기존에 생각됐던 것과는 꽤 다른 것이 되겠네요. «자유로운 상태»를 이상으로 내걸고, 이를 위해 자기를 해방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신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에 중점이 놓여 있는 겁니까?

 

고이즈미 : 그것이 스토아학파의 윤리입니다. 그 위에서, 17세기의 자유론은, “마음대로 한다는 것뿐의 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릅니다. 의료의 현장에서 환자가 되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렴풋이 알았다면, 그것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자유론을 얘기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되기에, 법적공동체적 규제를 가해 계속 운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결론내립니다. 이것에 철두철미하게 좋아하는 대로 하면 되잖아라고 하는 것이 17세기의 철학이며, 들뢰즈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이상으로, 자유에 관해 사고하는 의미가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기가 막히게 되지만,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것은 이쪽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좋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짓을 해도 좋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들뢰즈더러 말하라면, “나쁜 짓을 해도 되거든요. 나쁜 짓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한다면 그것이 더 착실한 것입니다.

 

── , “/이라는 구별에서도 자유로워진다는 거군요.

 

고이즈미 : 실제로 정말로 자유롭게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의무나 규제와 한 세트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버리자는 것입니다. 위험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안전한 것입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은 야만적인 폭력에 떨고 있습니다. 새로운 단계의 문명화 작용에 대항하는 야만입니다. 그런 야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민족, 인종 환상에 얽매이는 것은 당연하다며 불가사의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환상에 홀려서 자유롭게 행동한다면, 그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전쟁기계라는 야만적인 폭력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도덕주의나 법적정치적인 것이, 야만적인 폭력을 조직화하고 있다. 국가와,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전쟁기계로서의 야만적인 폭력과, 문명화와 시민화에 대항하는 야만을, 폭력적으로 조직화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야만의 제멋대로의 분출이야말로, 들뢰즈의 자유이죠.

 

 

 

[해설] 들뢰즈에게서의 자연인간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이번의 고이즈미 요시유키 씨와의 인터뷰의 중심적 주제가 된 것은 들뢰즈에 의한 근대적인 인간/자연관의 재독해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통상적인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 이후의 서양근대 지식의 기본적 틀은, “주관=정신 / 객관=자연의 이분법이라고 한다. (순수) 주관인 는 물리적인 자연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스스로가 회상하는 관념들을 매개로 해서만 «자연»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속에 대상으로서 재구성된 «자연»자연자체가 아니다. 나의 내부외부의 구별은, 내가 주관인 한에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 근대철학의 대전제가 되어 왔다. 헤겔이나 맑스는 이런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어떻게 외부=물질주관=정신의 지배권에 편입하는가(헤겔) 혹은 어떻게 외부내부에 객관적으로 반영시키는가(맑스)라는 이항대립적인 발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내부외부가 깨끗하게 분리되어 버린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한, 이항대립을 회피할 수는 없다.

현대사상은 이런 이항대립적인 틀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이를 위한 유력한 열쇠로서 부상한 것이 메를로-퐁티의 지각현상학으로 대표되는 신체론의 계보이다. “신체는 외적으로 보면 물질이지만, 거기서 생기는 다양한 지각이나 정동은 )무의식전의식 수준에서) “정신내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정신«자신의 신체»의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외부에 있는 신체의 존재방식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현대사상은 신체및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성적미적인 것을 실마리로, “주관/객관의 이항대립과는 상이한 사고형태를 모색했다.

이런 신체론은 현대사상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데리다와 함께 현대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들뢰즈는 인터뷰에서 고이즈미 씨가 지적하듯이, 신체와 정동을 둘러싼 논의는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활약한 17세기가 현대보다 현실적actual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항대립적인 사고법에 아직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의 신체주위에 생기는 다양한 정동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나와 자연의 관계에 관해 생각했다. 그것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면, “주관/객관의 구분을 넘어서 신의 관점에 서고자 하는 신비주의, 소우주(=)와 대우주(=자연)의 예정조화 같은 비합리주의적인 형이상학의 잔영밖에는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철학사에서도 신체 수준에서의 정동의 문제가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연결하는 송과선의 문제에 집착한 것이나, 정념론을 쓴 것은, 보통의 철학교과서의 데카르트의 항목의 말미에 일단 적혀 있다. 자세한 교과서라면, 라이프니츠가 우리의 지각에 생기는 미소표상”(=미세한 것의 운동)에 관해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기술이 있다. 스피노자가 실체에 생기는 정동에 대해 논한 것도, 대개의 교과서에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헤겔에게도, 신체적인 수난Leiden”을 둘러싼 정동론적(스피노자적) 고찰이 있으며, 경제학-철학 초고의 맑스도 헤겔론이라는 형태로 수난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나름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철학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는 무시해도 상관없는 아무래도 좋은문제로서 취급되기 일쑤였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주권/객관의 분리가 완성됐다고 본다면, 정동론은 이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는 쓸데없는 문제일 뿐인 것이다.

들뢰즈는 그런 근대철학사의 통설적인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신체에 있어서 부상되는 «»«자연» 사이의 긴장관계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텍스트로부터 소박하게 읽어내려고 한다. 흄을 논한 그의 교수자격논문 경험주의와 주체성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매우 쉽게 알게 된다. 인간의 «주관»이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형태로 이미 성립하고 있다는 이항대립적 선입견을 갖고 인성론을 읽으면, 지각에 있어서의 인과관계관습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논의는 진부한 회의주의로만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내부/외부의 경계선은 흄에 의해 자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수준에서 카오스적으로 생기는 정념의 관습적인 결합을 통해 내부가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흄의 포스트근대성이 돋보인다. 스피노자--들뢰즈의 견지에서 보면, “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자립한 폐쇄영역이 아니라 무정형의 정념과 함께 항상 생성도상에 있는, “우연으로 가득 찬 경계선 미확정의 영역이다. 가타리와의 공저인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자아 성립 «이전»의 무의식=기계가 주제화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신체에 생겨나는 정념에 주목한다고 해도, “신체적인 것은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문학적«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고이즈미 씨는, 거기서 수학”, 특히 현대적 미분적분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미적분이라면, 일정한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는 연속적인 함수밖에 나오지 않기에, 예정조화적 인상을 갖게 되기 쉽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더 엄밀하게 정의된 수학에서는, 그래프와 식으로 단순하게 표기할 수 없는 불연속함수나 복수의 변수를 지닌 함수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통 평면으로 취급하는 책상과 책의 표면에는 잘 보면 다양한 주름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으며, 그런 주름적인 것을 일일이 고려한다면, 물건의 길이와 면적을 산출하는 것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주름적인 울퉁불퉁함은 무시하고, 단순화해서 계산하고 있지만, 자연계는 오히려 다양한 주름으로 가득하다. “주름의 파악방식에 의해 (객관적인) “사물을 보는 방식은 꽤 달라진다. 현대에서는 고도로 정밀화된 미적분에 의해, 17-18세기에는 수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됐던, 생물생명의 세계의 «신비»가 서서히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해명되고 있다. 들뢰즈는 그런 현대수리과학과 신체정념론이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그가 끊임없이 미적분을 언급하는 것은, 단순한 비유나 바로크로의 복고 취향이 아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가 현대사상에 도입하려고 한 프랙탈, 매우 대충 말하면, 자연계에서의 주름적인 불규칙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학을 매개로 한 자연-신체-정념의 해명은,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가 보편수학이라는 표어 아래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17세기의 보편수학의 구상을, 현대에 있어서 더 구체적으로 계승하려는 것이다. 물론 현대수학에 대한 재접근에 의해 주관/객관의 이항대립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면, 엥겔스-레닌적인 소박한 객관적 유물론의 우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자연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고이즈미 씨의 주장을, 아이러니라며 흘려듣고 넘겨버릴 수 없다. “주관/객관의 분석 구조를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만으로는 철학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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