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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11 『사상』, 2013년 2월 1부 2장. 정신과 심리의 통치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1부 2장. 

정신과 심리의 통치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 푸코의 원문과 일역본을 대조하여 교정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대신 프랑스어 원문을 아래에 병기해뒀다. 나중에 천천히 대조하여 수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몇몇 대목은  이미 대조를 통해 수정한 대목이 있으나, 별도로 밝히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어 원문은 클릭하면 관련된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다. 

* 내용이 달린 각주만 표기해뒀다.  


1. 평화로운 나라의 내전상태

미셸 푸코는 1950년대에 젊은 심리학자로서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푸코는 그때의 경험에 관해 1982년에 이렇게 말한다.

 

철학을 연구한 후 저는 광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성을 연구하기에는 너무도 미쳐 있었으며, 광기를 연구하기에는 너무도 이성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병원에서 저는 환자들한테서 간호사들에게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명확한 직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신경외과가 활짝 꽃을 피웠으며, 정신약리학이 시작됐으며, 전통적인 제도가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것들이 필수적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석 달 정도가 지났을 때(저는 느려터진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무엇을 위해 필요할까?”라고. 3년 후에, 저는 이 일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커다란 불안감을 품은 채 스웨덴으로 갔습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이런 실천들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362] 1598/310)

Après avoir étudié la philosophie, j'ai voulu voir ce qu'était la folie : j'avais été assez fou pour étudier la raison, j'ai été assez raisonnable pour étudier la folie. Dans cet hôpital, j'étais libre d'aller des patients au personnel soignant, car je n'avais pas de fonction précise. C'était l'époque de la floraison de la neurochirurgie, le début de la psychopharmacologie, le règne de l'institution traditionnelle. Dans un premier temps, j'ai accepté ces choses comme nécessaires, mais au bout de trois mois (j'ai un esprit lent !), j'ai commencé à m'interroger : « Mais en quoi ces choses sont-elles nécessaires ? » Au bout de trois ans, j'ai quitté cet emploi et je suis allé en Suède, avec un sentiment de grand malaise personnel ; là j'ai commencé à écrire une histoire de ces pratiques.

 

이리하여 광기와 비이성을 쓰기 시작했지만, 미리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이 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후 푸코는 신경외과수술이나 향정신성의약이나 병원수용에 비판적이기를 계속했지만, 이런 병원 내부에서의 치료 실천이나 병원을 핵심으로 하는 실천을 폐기하면 결말이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경험을 통해 심리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되었지만, 심리학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푸코의 입장은 단순한 반정신의학도 반의학도 반심리학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 지적되었지만, 본고에서는 조금 더 그 내실에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각주:1] 이 점에서 또 하나의 회상이 중요하다. 1983년의 인터뷰이다. “생트안느(Sainte-Anne) 병원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요? 생트안느는 그 직원의 한 명에게, 정신의학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었나요L'hôpital Sainte-Anne avait-il quelque chose de particulier ? Aurait-il pu donner, à l'un de ses employés, une image particulièrement négative de la psychiatrie?”라고 S. 리긴스(Stephen Riggins)가 물은 것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답한다.

 

아니오. 생트안느는 상상한 대로 큰 병원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생트안느는 제가 나중에 찾아간 지방의 큰 병원의 대부분보다도 오히려 좋은 것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파리의 최고 병원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아니, 심한 것은 무엇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제가 지방의 중소병원에서 똑같은 작업을 했더라면, 아마 그 병원의 실패를 지리적 상황이나 지방 작은 병원의 고유한 결함 탓으로 돌리려고 했을 겁니다. ([336] 1347/428)

Oh non. C'était l'un de ces grands hôpitaux comme vous pouvez en imaginer, et je dois dire qu'il était plutôt mieux que la plupart des grands hôpitaux de province que j'ai visités par la suite. C'était l'un des meilleurs hôpitaux de Paris. Non, il n'avait rien d'épouvantable. Et c'est précisément cela, la chose importante. Si j'avais fait le même travail dans un petit hôpital de province, j'aurais peut-être été tenté d'imputer ses échecs à sa situation géographique ou à ses insuffisances propres.

 

생트안느가 최고 좋은 병원이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최근 들어 정신의학의 진보사관과 그것을 계승한 반정신의학의 진보사관의 영향으로, 예전의 병원·시설의 실정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퍼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탈병원화 이후의 수치와 비교해도, 치유되는 환자나 사회로 복귀하는 환자의 비율은 높았다. 또한 놀랍게도 탈병원화 이후, 20세기 중반 이전의 병원 수용자 수는 매우 적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쁜 역사로 간주하는 편견이 오히려 강해졌지만, 소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도 그 범위 밖에서도 나름대로 잘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푸코는 바로 그것에 큰 불안감을 품었다고 받아들여보자. 이후의 푸코가 연구하게 된 권력의 다양한 형태, 병원 수용시설 수용, 규율훈련, 생명권력생명정치, 통치성은 대체로는 잘 행해진다. 대체로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대체로는, 치안도 통치도 잘 행해진다. 평화로운 것이다. 그래서 문제라고 푸코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하자. 정의상 비정상異常은 소수에 그친다. 그렇다면 그 소수의 비정상을 둘러싸고 이렇게 저렇게 번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압도적 대다수가 정상이라는 그것에 문제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권력·생명정치에 대해서는 신체가 표적으로 간주되고, 마치 정신-심리는 표적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논술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오히려 생명권력·생명정치는 개인적인 신체나 집단적인 단체에 작용됨으로써 간접적으로 정신-심리에 작용된다고 논술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초기 푸코에게서의 심리학 연구 혹은 심리학 비판은 푸코 말년에는 두절되어 있는 것처럼 막연하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1976년의 대담 비합법성과 처벌의 기교([175])에서 G. 타라브(Tarrab)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하고 있듯이 감옥 같은 환경을 분석하면, 심리적 차원을 사상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당신 자신은 신체의 구속에 대해 말하지만, 신체의 기초에는 심적인 것(psyché)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Peut-on faire l'économie de la dimension psychologique, quand on analyse le milieu carcéral, comme vous le faites ? Vous parlez vous-même de «prise de corps», or le corps est sous-tendu par une psyché. Qu'en faites-vous?” 이것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나는 심리적 차원을 사상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분명히 나는 구금자의 인격에 관심이 없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항상 비판되는 동시에 항상 재생하는 감옥이라는, 이 역설적인 시설의 기초에 있는 권력의 전술과 전략이다. 이 방식에 있어서는, 심리적 차원이 직접 분석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감옥의 기구에 있어서는 실제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법이 말하는 단순한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그것 이상의 것이다. 사람들의 신체 병사의 신체, 아이의 신체, 노동자의 신체 에 관심을 갖는 정치권력의 전술이 있으며, 신체는 좋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심리(psychologie)는 그것에 말려들어 있다. 그러나 심리는 권력분석에서 시작되는 분석의 최종단계로 이른바 추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사회학에 대해 심리학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권력의 문제설정이다.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개념이냐 사회학의 개념이냐라는 것이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힘관계이다. 따라서 사용되어야 할 도식을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부터 빌려서는 안 된다. 전략으로부터, 그리고 전쟁의 기교(art)로부터 빌려야 한다.([175] 87/109-110)

Je ne dis pas qu'il faut en faire l'économie. En fait, je ne m'intéresse pas au détenu comme personne. Je m'intéresse aux tactiques et aux stratégies de pouvoir qui sous-tendent cette institution paradoxale, à la fois toujours critiquée et toujours renaissante, qu'est la prison. Dans cette mesure-là, je ne crois pas que la dimension psychologique doive être mise immédiatement au service de l'analyse. Prenez le problème du corps: il est en effet très important dans la mécanique de la prison. Or ce n'est pas, comme dit le droit, une simple privation de la liberté, c'est plus: il y a une tactique du pouvoir politique qui s'intéresse au corps des gens : corps des soldats, des enfants, des ouvriers qu'il faut maintenir en bonne condition. Bien sûr, la psychologie s'y trouve impliquée, mais elle se trouve en quelque sorte reléguée au dernier échelon d'une analyse qui commence par le pouvoir. Le problème n'est pas de mettre la psychologie en face de la sociologie ; le problème, c'est la problématique du pouvoir. Est-ce que oui ou non le pouvoir peut être analysé avec les concepts de la psychologie ou de la sociologie, la question n'est pas là, me semble-t-il. Le pouvoir est essentiellement un rapport de force, donc, jusqu'à un certain point, un rapport de guerre, et, par conséquent, les schémas qu'on doit utiliser ne doivent pas être empruntés à la psychologie ou à la sociologie, mais à la stratégie. Et à l'art de la guerre.

 

재차 확인해둘 것은 전쟁이라고 얘기할 때의 전쟁은 비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교도소는 어떤 점까지는전쟁상태에 있다. 마찬가지로 군대·학교·공장도 어떤 점까지는전쟁상태에 있다. 거기서의 권력관계는 전쟁관계이다. 전쟁이기 때문에, 전술·전략·전쟁기교가 실제로 구사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표적은 신체이다. 심리학의 개념도 사회학의 개념도 쓸모가 없다. 권력의 분석은 신체의 심리학이나 신체의 사회학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역시 심리의 분석은 최종단계로 보류될 뿐인가? 타라브는 이렇게 질문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전쟁관계는 대체로 구금자의 육체와 신체에, 그리고 또한 구금자의 심적인 것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지만Mais ces rapports de guerre laissent généralement une marque profonde dans la chair et dans le corps des détenus, ainsi que dans leur psyché...이라고. 푸코의 대답은 이렇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내게 문제는 권력이 신체와 심인(心因, psychisme)에 각인이 남긴다는 사실이며, 신체와 심인이 분석으로의 안내 실이나 모델로서 도움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분석으로의 안내 실로서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은 전략의 관계일 것이다. 전쟁이 전투원의 신체에 상처를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전략이나 전술이 개인의 신체에 각인을 남길 것이라는 것은 물론 이해되었다. 그러나 상처로부터 시작해도 전략의 실에 도착할 수는 없다. ([175] 87/110)

Mais le problème n'est pas là. Mon problème est de savoir si, du fait que le pouvoir laisse des marques dans le corps et le psychisme, ceux-ci doivent servir de fil directeur et de modèle à l'analyse. Il me semble que ce qui doit servir de fil directeur à l'analyse, ce sont des rapports de stratégie, étant bien entendu que la stratégie ou la tactique du pouvoir va laisser des marques sur le corps des individus, tout comme une guerre laisse des cicatrices sur le corps des combattants. Mais ce n'est pas la cicatrice qui vous permettra de remonter le fil de la stratégie.

 

푸코의 이 대답은 그대로 마음[]에 해당된다. 교도소·군대·학교·공장은 전쟁상태에 있기 때문에, 물론 마음도 상처 입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에서 출발해 전쟁상태의 분석 등을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마음의 상처에서 출발해 전쟁상태를 고발한들 별 것일 수가 없다. 문제는 전쟁상태가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것에도, 마음의 상처가 개인적·인격적으로는 중대한 것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그런 관계를 전쟁상태로서 분석하는 것이다. 대체로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그런 전략·전술·기교를 분석하는 것이다. 강조해야 하는데, 마찬가지의 것은 단순히 네거티브가 아니라 포지티브한 효과이기도 한 마음의 각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권력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나 긍정하는 각인을 마음에 남기는 그런 관계를 전쟁상태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옥에서 교정되고 노동윤리를 익히고, 군대에서 성장하고 유덕해지며, 학교에서 발달하고 사회화되며, 공장에서 노동의 기쁨을 느끼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시설에서 성공리에 변용하는 것이다. 푸코는 거기에서 전쟁상태를 감지한다. 그런 성공 사례는 누구의 승리인지 분명치 않으나, 승리한 전쟁이 마음에 가져오는 각인이다. 그래서 권력분석에 있어서도, 심리적 차원은 결코 사상되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서 시작해 전쟁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시작해 마음에 도달한다고 전망된다. 이 관점에서 심리학자 푸코의 생애를 반추해보자.

 

2. 심리학자 푸코

본고에 관련된 한에서 초기 푸코에 의한 심리학 관련 문서를 읽어두자. 1957년의 1850년부터 1950년의 심리학[2]에서 푸코는 심리학이 실천실용실무와 새로운 관계를 창설한 것에 유의하고 있다.

 

심리학이 교육·정신의학·집단조직 등의 실천과 새로운 관계를 창설한 것도 100년 동안의 일이다. 심리학은 이런 실천들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기초로서 등장했다. , 발생심리학은 있을 수 있는 모든 교육학의 틀로서 구성됐으며, 정신병리학은 정신의학의 실천에 대한 반성으로서 제시됐다. 거꾸로 심리학은 그런 실천들이 불러일으킨 문제, 즉 학교의 성공과 실패의 문제, 환자의 사회 편입의 문제, 직업에 대한 인간의 적응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서 물어왔다. [각주:2]([2] 149/151)

C’est également au cours de ces cent dernières années que la psychologie a instauré des rapports nouveaux avec la pratique : éducation, médecine mentale, organisation des groupes. Elle s’est présentée comme leur fondement rationnel et scientifique; la psychologie génétique s’est constituée comme le cadre de toute pédagogie possible, et la psychopathologie s’est offerte comme réflexion sur la pratique psychiatrique. Inversement, la psychologie s’est posé comme questions les problèmes que soulevaient ces pratiques : problème de la réussite et de l’échec scolaire, problème de l’insertion du malade dans la société problème de l’adaptation de l’homme à son métier.

« La psychologie de 1850 à 1950 », in Huisman (D.) et Weber (A.), Histoire de la philosophie européenne, t.II : Tableau de la philosophie contemporaine, Paris, Librairie Fischbacher, 1957, 33, rue de Seine, pp. 591-606.

 

심리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다. 하물며 단순한 마음의 학문도 아니다. 심리학은 교육심리학·정신병리학·산업심리학으로서, 학교 교육의 성패, 정신병자의 사회 복귀, 노동자의 직업적응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 심리학은 이런 문제들에 유효한 해결책을 주는 것을 곧바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의 각 부문은 실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고 해도, 심리학 그 자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기도 하는 그 실천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기초를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발달 장애아의 교육을 성공으로 이끄는 해결책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교육심리학이지만, 심리학은 발달 장애아의 교육의 성패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조건, 혹은 오히려 발달 장애아의 교육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정신의 영향도 있어서, 심리학은 정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의 탐구로서는 성립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심리학은 비정상異常에 관련되어 성립했다.

 

심리학은 인간의 실천이 그것에 고유한 모순과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 발달 심리학은 발달의 정체에 대한 반성에서 태어나며, 적응 심리학은 부적응의 현상의 분석으로서 태어나며, 기억심리학·의식심리학·감정심리학은 처음에는 망각·무의식·정서교란의 심리학으로서 나타났다. 현대 심리학은 그 기원에 있어서, 비정상성·병리·갈등의 분석이며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2] 149-150/151)

La psychologie, en revanche, naît en ce point où la pratique de l’homme rencontre sa propre contradiction ; la psychologie du développement est née comme une réflexion sur les arrêts du développement; la psychologie de l’adaptation comme une analyse des phénomènes d’inadaptation ; celle de la mémoire, de la conscience, du sentiment est apparue d’abord comme une psychologie de l’oubli, de l’inconscient et des perturbations affectives. Sans forcer l’exactitude, on peut dire que la psychologie contemporaine est, à son origine, une analyse de l’anormal, du pathologique, du conflictuel, une réflexion sur les contradictions de l’homme avec lui-même.

 

기원에 있어서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심리학은 젊은 푸코 같은 사람들을 매료시켜온 셈인데, 여기서 푸코는 심리학을 비정상성·병리·갈등을 직접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학교에서 비정상아동을 교육하고 병원으로부터 사회로 정신병자를 이행시키며, 직장에서 부적응자의 갈등을 성숙으로 이끄는 실천을 대상으로 하며, 그런 실천의 기초·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재파악했다. 심리학은 정신이나 마음의 학문, 그 좀 어두운 의 학문이었다고 해도, 얼핏 보기에 수수하고 평범한 실천과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에 대해서도, 심리학에 대한 이런 관점에서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 시기의 푸코는 프로이트가 생존할 때 고전정신분석에 대해 내놓았던 수정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심리학적 수정을 용인하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본능의 이론(삶 혹은 확장의 본능, 죽음과 반복의 본능)은 생물학적 신화의 잔영에 불과하며, 질병을 발달 단계의 초기로의 퇴행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스펜서 식의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적 몽상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에게는 19세기의 잔재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도 푸코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심리학을 대대적으로 갱신하며, 의미·역사·문화 등의 범주를 도입했다. , 푸코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 정신분석의 언어·역사·문화에의 응용에 의의를 찾아낸 것이다.

이런 한에서는 흔해 빠진 얘기이지만, 주의할 것은, 푸코가 이 논의 맥락에서 그 참고문헌으로 F. 알렉산더(Franz Alexander)심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 its Principles and Applications)(1950), A. 카디너(Abram Kardiner) , 사회의 심리적 경계(Psychological frontiers of Society)(1945)에 덧붙여, J. L. 모레노(Jacob Levy Moreno)누가 살아남을까? 소시오메트리의 기초(Who Shall Survive? Foundation of Sociometry)(1934)를 꼽고 있다는 점이다. , 정신분석이 응용되어 심리학의 실천과 연결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푸코는 모레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레노는 집단에 특징적인 배치布置에 있어서, 개인들을 결합시키고 대립시키는 양의 값이나 음의 값을 결정하기 위한 집단분석의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소시오드라마라는 이름의 집단요법을 확립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 집단요법은 개인의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잠재하는 정서의 주제, 표면적顕在的인 관계가 잿더미가 되는 갈등과 양가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실현하며, 그 방도를 갖고서 상호 재적응과 집단의 정서적 재건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2] 162-163/165)

Moreno a mis au point des méthodes d’analyse du groupe, par lesquelles on détermine les valences positives ou négatives qui unissent et opposent les individus dans une constellation caractéristique du groupe. Il a mêe tenté d’établir sous le nom de sociodrame une thérapeutique de groupes, qui permettrait, comme dans la psychanalyse individuelle, une mise au jour et une actualisation des thèmes affectifs latents, des conflits ou des ambivalences dont les rapports manifestes sont sous-tendus, et qui rendrait possible par cette voie une readaptation mutuelle, et comme une restructuration affective du groupe.

 

푸코에게 심리학의 실천이란 개인에 대한 정신분석의 요법에 덧붙여, 모레노가 개발한 집단분석에 의한 집단요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년의 전개를 내다보고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소시오드라마 같은 기법이야말로 권력분석에는 전술·전쟁 기교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학교에서의 교육심리학의 기법, 지역에서의 정신병리학의 기법, 직장에서의 산업심리학의 기법이야말로 학교·지역·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행사되는 전술·전쟁 기교에 상당하는 것이다.

다른 텍스트에서도 확인해두자. 1957년의 과학연구와 심리학([3])의 노동심리학에 대한 논의를, 그 과학성·기법·실정성의 관련에 주의하면서 살펴보자.

 

노동심리학은 본질적으로, 한편으로는 직업의 지두와 선택의 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위··노동집단·직장에의 개인적 적응의 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고찰 전체가 중요성을 갖고, 그 물음이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제적 조건 덕분이다. 직업의 지도와 선택의 리얼리티는 실업률과 노동지위의 분화 수준에 따라서 달라진다. 산업기술(technique)에 결합된 완전고용의 체제만이 노동자의 고도의 분화를 요청하기 때문에 이 완전고용의 체제만이 과학적 연구에 직접 연결된 심리학의 실천에 자리를 내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화에 불과한 이런 조건이 없으면, 지도와 선택에는 차별의 의미밖에 있을 수 없다. 노동지위에 대한 개인의 적응의 연구는, 생산·과잉생산·노동시간가치·차액 이익금 조정이라는 경제적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 ([3] 178-179/183)

Prenons l’exemple de la psychologie du travail. Elle est feite essentiellement des problèmes d’orientation et de sélection professionnelle d’une part, et, d’autre part, des problèmes de l’adaptation individuelle au poste, au métier, au groupe de travail et à l’atelier. Mais il est bien évident que cet ensemble de considérations ne peut avoir d’importance, ces questions ne peuvent avoir, au sens strict du terme, d'existence qu’à la feveur et par la grâce de certaines conditions économiques. Orientation et sélection professionnelle n’ont de réalité qu’en fonction du taux de chômage et du niveau de spécialisation dans les postes de travail. Seul un régime de plein emploi, lié à une te chnique industrielle exigeant une haute spécialisation ouvriére seul ce régime pourrait donner place à une pratique psychologique liée directement à la recherche scientifique. En dehors de cette condition, pour nous mythique, l’orientation et la sélection ne peuvent avoir que le sens d’une discrimination. Quant aux recherches concernant l’adaptation de l’individu aux postes de travail, elles sont liées, de leur côté, aux problèmes économiques de la production, de la surproduction, de la valeur du temps de travail et de l’aménagement des marges bénéficiaires.

« La recherche scientifique et la psychologie », in Morere (E.), ed., Des chercheurs français s’interrogent. Orientation et organisation du travail scientifique en France, Toulouse, Privat, coll. « Nouvelle Recherche », n° 13, 1957, pp.173-201.

 

노동심리학이 과학성을 표방할 수 있는 것은 완전고용체제 하에서일 뿐이다. 혹은 완전고용체제를 목표로 하는 한에서일 뿐이다. 그런데 완전고용은 신화이다. 그런 것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때 노동심리학의 실천은 지도하고 선별하는 차별의 의미밖에 없다. 그것은 대체로 과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적응의 연구가 과학성을 표방할 수 있는 것도, 생산의 조건들이 그것에 유리한 상황에서일 뿐이다. 그러나 아마 그런 호조건의 상황도 또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개인 적응의 실천은 그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푸코는 노동심리학을 그 비과학성과 차별성과 기만성으로 고발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러한가? 노동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 차별과 기만의 실천이라는 것 등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심리학이 그것으로서 성립되어 기능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그것에 심리학이 반드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라고 푸코는 계속한다.

 

다행스럽게도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경제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부재한 시기에는, 과학의 응용이나 발전이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경제나 전쟁상태와 관계없이, 물체는 계속 낙하하고 전자(electron)는 계속 회전한다. 심리학에 있어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실천을 위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에는, 과학성 그 자체가 심리학의 실정성에 말려든다. , 실업과 과잉생산의 시기에는, 선택은 통합의 기법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의 기법이 된다. 경제불황이나 노동가격상승의 시기에는 인간의 직장에의 적응은 기업의 수익률을 올리고, 인간노동을 단순한 생산요인으로서 합리화하려고 하는 기법이 된다. 요컨대 심리학적 기법이 아니게 되며 경제적 기법이 된다. ([3] 179/184)

Par bonheur, le probleme est un peu plus complexe. Il se peut que l’absence de conditions economiques favorables rende inutile a un moment donne l’application ou le developpement d’une science. Mais, apres tout, même en dehors d’une economie ou d’une situation de guerre, les corps continuent a tomber et les electrons a tourner. En psychologie, lorsque les conditions d’une pratique rationnelle et scientifique ne sont pas reunies, c’est la science elle-même qui est compromise dans sa positivite ; en periode de chomage et de surproduction, la selection cesse d’etre une technique d’integration pour devenir une technique d’exclusion et de discrimination ; en periode de crise economique ou d’augmentation du prix du travail, l’adaptation de l’homme a son metier devient une technique qui vise a augmenter la rentabilite de l’entreprise et a rationaliser le travail humain comme pur et simple facteur de production ; bref, elle cesse d’etre une technique psychologique pour devenir une te chnique economique.

 

심리기법은 경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경제적인 기능을 바꾼다. 실정성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심리학이라고 재파악된다.

 

심리학이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거나, 경제적 관점에 의해 동기 부여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응용과학에는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를 들어, 산업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적성 개념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을 요구받는 경제적 맥락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를 바꾼다는 것이다. 적성 개념은 양성의 문화 규범을 의미하거나, 생산성 기준에서 유래하는 차별의 원리를 의미하거나, 수습기간의 예보를 의미하거나, 교육 가능성의 평가를 의미하거나, 실제로 받은 교육의 성적을 의미하거나 하는 것이다. 심리학의 실천은 경제의 도구가 될 뿐 아니라, 심리학 그 자체가 인간적 척도(échelle)에 따른 경제의 신화가 되는 것이다. ([3] 179/184)

Ce qui ne veut pas dire seulement qu’e lle est utilisee a des fins economiques ou motivee par des propos economiques, c’est le destin de toutes les sciences appliquees. Nous voulons dire, par exemple, que la notion d’aptitude, telle qu’elle est utilisee en psychologie industrielle, change de contenu et de sens selon le contexte economique dans lequel on est amene a la definir : elle peut signifier aussi bien une norme culturelle de formation, un principe de discrimination emprunte a l’echelle du rendement, une prevision du temps d’apprentissage, une estimation de l’educabilite ou finalement le profil d’une education effectivement recue. Non seulement la pratique de la psychologie devient l’instrument de l’economie, mais la psychologie elle-meme en devient la mythologie a l’echelle humaine.

 

개념뿐 아니라 기법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 성립할 것이다. 심리학의 기법은, 경제적 맥락에 따라서는 심리학의 손을 떠나, 예를 들어 경영기법으로서 여러 가지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심리학의 기법은 심리학의 응용으로서는 사라지고, 그 기법에 이름을 따온 심리학은, 기법의 진리의 신화가 된다.” , 경영 기법으로서 사용되는 기법도 또한, 심리학의 기법의 전용으로 간주되는 한, 그 경영기법을 가능케 하는 조건과 기초는, 심리학으로 계속 되돌려보내지는 것이다. 경영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이코드라마를 노무관리에서도 사용해볼까? 사이코드라마의 효과야 뻔한 것이겠지만, 맥락에 따라서, 며칠 동안의 연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도, 아무튼 성실하게만 하면 집단적으로든 경영적으로든 아무리 사소해도 어떤 의미를 가질까?”라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영자도 근로자도 임상심리사도, 아무리 사소한 효과로도 어떤 변화를 인간에게 미칠 것이라는 것의 이론적인 기초가, 그 심리학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심리학이 기법의 진리의 신화로서 통용되고 있는 한, 그 기법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미친다고 믿어진다. 푸코는 오늘날에는 자명시되고 있는 심리학의 이 모습, 즉 과학성을 표방하는 학문과 경제적으로 그 의미와 기능을 끊임없이 변용시키는 실정성과의 필연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연결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래서 1961년의 광기와 비이성』 「서문([4] 194/202)[각주:3]에 있듯이, “심리학의 가능성의 조건들의 역사를 쓰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3.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사이의 심리 요법 

1965년 알랭 바디우와의 대담 철학과 심리학([30]을 봐도, 심리학 교육 플랜을 개진해 보여주는 등, 그것이 최후에는 심리학 비판을 생각나게 하는 교육 플랜이라고 하더라도, 학문은 자신에게 반성적·비판적으로 되는 것을 통해 완결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셈이기 때문에, 심리학자로서의 푸코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 오히려 푸코는 젊은 바디우에게 심리학 전체주의라고 야유받더라도, 심리학이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학문이라고까지 말했다. 그 위에서, 미리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푸코는 심리학과 응용심리학의 실천이나 기법이 불가분하다고 파악했듯이, 심리학과 심리요법을 불가분하다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푸코는, 대면하는 양자관계나 소수의 집단 내부에서 선한 것으로서 계속 행사되고 있는 각종 요법에 대해서도, 이것들을 노동심리학에 있어서의 직업의 선택이나 지도의 기법, 차별과 선별의 기법, 산업적이고 경제적인 기법과 동등한 것으로 재파악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은 구조의 인식이 되며, 심리학에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따른 요법(thérapeutique), 개인이라는 텍스트의 인식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학을 일정한 정규 수업계획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리학은 철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아마, 아니 확실히, 의료이며 요법이다. 심리학의 모든 것은 교육학이며, 독해의 모든 것은 요법이다. 거기서는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 없이는 상대를 알 수 없다. ([30] 472/232)

La psychologie sera la connaissance des structures, et l'éventuelle thérapeutique qui ne peut pas ne pas être liée à la psychologie sera la connaissance du texte individuel, c'est-à-dire que je ne pense pas que la psychologie puisse jamais se dissocier d'un certain programme normatif. La psychologie, c'est peut-être bien, comme la philosophie elle-même, une médecine et une thérapeutique, c'est même certainement une médecine et une thérapeutique, Toute psychologie est une pédagogie, tout déchiffrement est une thérapeutique, vous ne pouvez pas savoir sans transformer.

 

이 관점은 1974년의 광기, 권력의 물음([141])에서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의학과 반정신의학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심리요법의 위치가 부상하게 된다.

 

확실히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실천에 대해 일련의 비판을 행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역사가로서는 또한 일정한 거리를 취한다면,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으로부터의 전면적·기본적인 절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세기의 정신의학은 정신분석의 대부분의 요소를 이미 포함하거나 준비하는 요법의 기법에 도달했다. 정신의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신병자에 대한 주요한 개입의 형식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수용되어 있고 신경이완제의 치료를 받고 있다. 다른 한편, 정신분석을 받는 사람은, 교양인이나 지식인의 아주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이렇게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장소를 취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양자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양자를 떼어놓은 사이에는, 직권의 분할, 상담, 상호지원이 자아내는 시스템이 있다. 순수한 정신의학과 순수한 정신분석을 떼어놓는 사이에는, 심리치료(psychothérapie)나 지역정신의료 같은 일련의 요법의 형식이 있다. 이런 관리(contrôle)의 제도, 정신의 성형외과(orthopédie mentale)의 제도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41] 1530/240)

Il est certain que la psychanalyse a permis de faire une série de critiques à la pratique psychiatrique. Elle a permis de voir que l'internement n'était pas la meilleure forme thérapeutique. En tant qu'historien, et en prenant une certaine distance, il me semble que la psychanalyse n'est pas une coupure totale et radicale par rapport à la psychiatrie la psychiatrie du XIXe siècle a atteint une technique thérapeutique qui contient déjà ou prépare beaucoup d'éléments de la psychanalyse. On ne peut pas oublier que la psychiatrie est, encore aujourd'hui, la principale forme d'intervention sur les malades mentaux. Des millions de personnes sont encore soumises à l'internement, au traitement par neuroleptiques, alors que les psychanalysés se trouvent dans une sphère très restreinte de personnes cultivées ou intellectualisées. Ainsi, la psychanalyse n'est pas arrivée à prendre l'espace de la psychiatrie, mais les deux coexistent dans la société d'aujourd'hui et il y a entre elles tout un système de division d'attributions et de consultations, et d'appui mutuel. En outre, il y a entre la psychiatrie et la psychanalyse pures une série de formes thérapeutiques, comme la psychothérapie, la psychiatrie communautaire ; je pense qu'il serait important de faire une étude détaillée de toutes ces institutions de contrôle, d'orthopédie mentale.

 

푸코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이라기보다는 양자 사이에 퍼져 있는 시스템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현재에서는, 각종 전문직(사회복지사, 정신보건복지사, 간병복지사, 방문간호사, 보건사, 임상심리사), 각종 상담(육아상담, 취학상담, 취업상담, 학생상담, 심리상담, 유전 관련 상담, 결혼상담), 각종 상호지원(자립지원, self-help group, 환자회, 운동단체)이 구성하는 시스템이며, 그리고 각종 치료요법(정신분석적 요법, 담화요법, 인지행동요법, 인간주의적 요법, 가족요법, 집단요법, 정신요법), 각종 정신의료(지역센터, 복약관리, 클리닉, 진료소)가 뒤섞여 있는 상황이며, 게다가 그것들에 의한 관리와 정신 성형의 제도·시설(학교, 대학, 직장, 교도소, 복지시설, 노인시설, 교정시설, 중간시설, 이행시설)이다. 그 시스템은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얘기된 것이지만, 근년에 이르러서 강조되고 누구나 입에 올리게 된 연계이다. 푸코는 바로 거기에 전쟁상태를 감지하고, 권력의 분석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날뛰는 땅을 영토화하고 평화 공존하는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사이에 펼쳐진 전장터에서의 실정성의 진리이자 신화라고 꼽히는 학문이, 심리학으로서 재파악되는 것이다.

푸코가 1975년의 수용소, , 감옥([160])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말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나의 신조로서, 지식인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참칭했던 도덕적 심사관의 역할, 즉 모든 영역에서 선악을 규정하는 역할을 이제 와서 다시 수행해야 할 것 같지 않다je crois que les intellectuels ne doivent pas recommencer à jouer le rôle qu'ils s'attribuaient pendant longtemps, et qui est celui de législateur moral, celui d'être la bonne et la mauvaise conscience dans tous les domaines”([160] 1644/405)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일반적으로 심리 치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Que pensez-vous de la psychothérapie, d'une manière générale?”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서 얘기되고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것에 대답하기란 어렵다. 심리치료에는 다양한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 한쪽에는 사기[위조품]에 불과한 것에서부터, 다른 한쪽에는 환자 개인에 대해서는 옛날 이상의 정신의학 권력을 적용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 범위는 광대하다. 아주 흥미로운 것도 존재한다. 나는 둘 중 하나를 골라잡을 수 없다. 게다가 내가 믿기로는, 지식인이 오랫동안 자신에게 귀속시켜온 역할, 도덕적 입법자의 역할, 어떤 영역에서도 꺼림칙하지 않은 양심이기도 하며 꺼림칙한 양심이기도 하다/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도 하고 느끼기도 한다는 역할을 또한 맡아서는 안 된다. 지식인의 역할은,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맺지 않은 영역에 대해 입장을 취하거나 일반적인 의견을 내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몇 년 동안 매일매일 정신병원에서 지낸 적이 있다. 또한 몇 달 동안 감옥에 들어간 적도 있다. 또한 수년 동안, 전-죄수나 죄수의 가족 집단에 참가했다. 심리 치료에 대해서는 나는 제대로 접촉한 적이 없다. ([160] 1644/405)[각주:4]

Il est difficile d'y répondre pour deux raisons. La psychothérapie embrasse un nombre tel de pratiques différentes, dont les unes ne sont que du charlatanisme, d'autres, l'application du pouvoir psychiatrique plus traditionnel au niveau de la clientèle privée. La gamme est énorme. Il existe même des choses très intéressantes. Je ne peux pas prendre parti sur cette question. En outre, je crois que les intellectuels ne doivent pas recommencer à jouer le rôle qu'ils s'attribuaient pendant longtemps, et qui est celui de législateur moral, celui d'être la bonne et la mauvaise conscience dans tous les domaines. Le rôle de l'intellectuel est celui de se lier aux personnes qui sont concernées par le sujet qui l'intéresse. Donc, je me refuse à prendre position ou à émettre des idées générales sur des domaines auxquels je ne suis pas lié. J'ai passé des jours et des jours, pendant plusieurs années, dans des hôpitaux psychiatriques. J'ai été dans une prison pendant quelques mois * et, pendant quelques années, j'ai participé à des groupes d'ex-prisonniers ou de familles de prisonniers. Avec la psychothérapie, je n'ai pas de contacts précis.

 

푸코가 말하는 것은 심리 치료에 대해 도덕적 판정을 내릴 작정은 아니라는 것, 심리 치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심리 치료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한에서, 심리 치료에 대해 일반론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봤듯이, 푸코는 사기[위조품]로부터 옛날부터의 정신요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법의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좋고 나쁨을 판정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권력·생명정치론에서도 통치성론에서도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이하의 과제가 된다.

 

4. 생명권력의 양극을 매개하는 것

1976년의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의 생명권력·생명정치의 규정은 신체를 표적으로 하고 있으며, 대체로 정신이나 심리에 관련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삶은 정신생활이나 심적 생활을 포함한다고 해석하면 간단하지만, 조금 더 사태는 복잡하다. 생명권력·생명정치의 규정은 이랬다.

 

삶에 대한 이 권력은, 17세기 이후, 두 가지 주요 형태로 발전(발생)했다. 양자는 서로 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는 발전의 두 가지 축을 구성하며, 양자 사이에는 양자를 묶는 관계들의 다발(faisceau intermédiare de relations)이 있다. 극의 하나는, 먼저 형성됐다고 생각되는데, 기계로서의 신체를 중심으로서 형성됐다. 신체의 조련[훈육], 신체의 적성의 가격 상승, 신체의 힘의 찬탈, 신체의 효용과 신체의 고분고분함의 평행적 증가, 관리의 실효적이고 경제적인 시스템으로의 신체의 통합, 이 모든 것은 규율훈련, 인간 신체의 해부-정치의 특징인 권력의 수순에 의해 확보되었다. 조금 늦게 18세기 중반에 형성된 두 번째 극은 신체-종을 중심으로서, 생물의 기구가 され 생물학적 과정의 매체로서 도움이 될 신체를 중심으로서 형성됐다. 이 생물학적 과정이란 번식, 출생수와 사망률, 건강수준, 삶의 지속, 수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조건인데, 그것을 청부를 맡아 행해지는 것이 일련의 개입과 일련의 조정관리, 인구(주민)의 생명정치이다. 신체의 규율훈련과 인구의 조정은 두 개의 극을 이루며, 그 주위에서, 삶에 대한 권력이 발전했다[주].

 [주]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I: La volonté de savoir (Gallimard, 1976), pp.182-183. 여기의 의 용법에 관련하여, 1965년의 프랑스정신의학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병원은 여전히 주요한 극이다. 그리고 정신위생센터의 수준에서 본다면, 시스템에는, 병원과 병원 밖의 두 가지 극성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두 개의 극성의 주위에 병원 밖의 다기능의 다양한 장치가 조직될 것이다. 낮 진료소, 야간 진료소, 치료 후의 홈, 보건작업소 등등. 특별 호스피스 노인 홈”(Michel Audisio, “La réorganization de l’assistance psychiatrique et des organismes de soins,” in Eduard Private (éd), Livre blanc de la psychiatrie française, Tome I(1965), p.82). 

읽을 수 있듯이, 삶에 대한 권력, 생명권력은 그 두 개의 극에 있어서는 신체를 표적으로 한다. 정신이나 심리는 자취도 없다. 다만 두 극 사이에는 관계들의 다발이 있다고 하며, 두 극의 주위에 생명권력이 발전한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그 관계들의 다발이야말로 생명권력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권력이란 권력관계이기 때문에, 생명권력은 생명권력관계이다. 따라서 생명권력관계는 극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주위와 사이에 존재한다. 생명권력관계는 신체규율훈련과 인구조정의 주위와 사이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직장과 보건서의 주위와 사이에 퍼져 있는 관계, 산업의사·위생관리자·위생추진자·안전위생추진자·보건사·간호사·산업상담사·임상심리사·인사노무관리스탭·종업원지원상담사 등이 온통 둘러치는 관계인 것이다.

다른 한편, 이 구절이 발생생물학의 용어로 작성되어 있다는 것에도 주의하고 싶다. 미분화된 배아세포는 힘들의 장을 이루고 있으나, 거기에 극성(極性)이 형성됨으로써 그것이 조직자로서 작동하며, 배아세포는 발생·분화를 수행한다. 그때 극의 주위와 두 극 사이에서의 힘들의 장이야말로 생명력의 장으로서 작동하며, 거기에 다양하고 다채로운 조직이나 기관이 발생한다. 이로부터 유비를 이끌어낸다면, 기계로서의 신체와 생물로서의 신체를 양극으로서, 그 주위와 사이에서의 권력관계의 장이 생명권력·생명력·바이오파워이게 된다. 물어야 할 것은, 혹은 물어도 좋은 것은 그 권력관계의 장에서 발생·분화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말할 것도 없는데 조직이나 기관에 해당하는 장치들, 학교·교도소·공장·병원 등의 시설이다. 그리고 신체라는 단어가 일관되게 단수형으로 적혀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계신체와 생물신체 사이의 권력관계의 장에서 발생·분화하는 것은, 정신과 심리, 축약하면 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신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규율훈련·해부-정치이며, 생물신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조정관리·생명-정치인데, 생명권력관계가 양쪽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관계를 가능케 하거나 실효적으로 하는 매개가 필요하다. 혹은 똑같은 신체의 두 가지 측면을 매개하는 것이며 생명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푸코가 실제로 뒤따라간 발상의 방향에 대해서는 애매한 대목이 남아 있다지만, 생명권력론의 이론구성에서 보면, 양극을 매개로 하는 것이 그것으로서 지목될 필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성의 역사 1에서는 그것이 성기(sexe)’라고 지목되는 것이다.

 

삶의 정치기술의 모든 것은 두 개의 축을 따라 발전해 왔는데, 그것들의 교점(charnière)에 있는 것이 성기이다. 한편으로 성기는 신체는 규율훈련의 관할에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기는 인구의 조정의 관할에 속한다. 성기는 동시에 두 개의 등록기에 삽입되는 것이다. 성기는 미분(微分)적인 감시, 순간적인 관리, 극도로 용의주도한 공간설비, 제한 없는 의학적·심리학적 검사, 신체에 대한 미시권력에 대해 장을 주고 그 이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성기는, 대량의 조치, 통계적 예측, 사회체의 전체나 집단의 전체 집합을 노리는 개입에 대해 자리를 주고 이유를 주는 것이다. 성기는 신체의 삶에의 접근인 동시에 종의 삶에의 접근이다. 성기는 규율훈련의 모체로서도 조정의 원리로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읽을 수 있는 그대로, 동시에 두 가지의 모태가 되며, 동시에 두 가지의 원리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한쪽의 미시적 권력 거기에 심리학의 기법이 포함된다 과 다른 쪽의 거시적 개입 그것에는 사회심리학이나 산업심리학의 기법이 포함된다 을 매개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지금은 그것이 성기와 원한다면 이라고 지목되고 있다. 그리고 푸코는 그 성기·성을 둘러싼 지식, 학문지식과도 실천지식과도 연결되지 않는 지식, 특정한 학문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의지가, 미시적 권력이나 거시적 개입과 뒤얽히는 모습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원래 성의 역사우리가 아는 성(적인 것)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권력관계와 얽혀 있는 지식의 의지가 원하는 것을 분석하려고 한다. 따라서 지식의 의지가 원하는 것에는, 성기·성 이외의 것도 있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장애, 질병이 즉각 머릿속에 떠오른다. 신체의 각 부위, 특히 뇌는 중요하다. 신체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예를 들어본다면, 물론 정신, 마음, 혼일 것이다. 이때 권력과 뒤얽히는 지식은 더 이상 심리학이라고는 불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정신·마음·혼의 지식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다만, 호칭이 바뀌더라도, 초기의 심리학자 푸코의 문제설정은 기본적으로는 바뀌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권력의 한 가지 극에 매몰되는[파묻혀 있는] 한에서의 정신과 심리의 기법이 푸코에게서는 어떻게 되는가를 추적해보자. T. 사즈의 작업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1976년의 규범의 사회적 확대([173]) 읽어보자. 푸코는 사즈의 책의 서평의 형태를 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주].

[주] 또한 “Szasz”의 발음은 그 출신지인 헝가리어에 의하면 싸즈가 될 것이다. Cf. Jeffrey A. Schaler (ed), Szasz Under Fire: The Psychiatrie Abolitionist Faces His Critics (Open Court, 2004), p.xiii. 

푸코도 사즈도 권력의 기법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즈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탐지, 진단, 질문의 기법techniques de repérage, de diagnostic, d'interrogatoire인데, 사즈는 전문가가 직접 개인에게 행사하는 기법에 체현되어 있는 권력의 기법을 문제시하고, 마치 그것을 그만둔다면, 좋은 전문가-클라이언트 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반면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회적-경찰적 분할=분배(partage)의 기법techniques de partages socio-policiers이다. 그 기법은 끊임없는 가시성, 개인의 항상적 분류, 계층화, 자격의 한정, 경계의 설정, 진단의 실시Une visibilité incessante, une classification permanente des individus, une hiérarchisation, une qualification, l'établissement de limites, une mise en diagnostic등이다. 푸코는 전문가가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의 기법을 문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일반적인 분할=분배의 기법의 예로서 문제화하는 것이다. 정신과 심리의 전문직이 행사하는 기법은, 말할 것도 없이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권력관계이다. 그러나 그 기법을 대등한 당사자끼리의 관계에 전용한 곳에서, 집단적 관계에 매몰된[파묻힌] 곳에서, 그것이 사회적-경찰적 분할=분배의 기법의 하위 기법에 거둬지는[수렴되는] 사태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대등관계 같은 환상에 의해 사태는 점점 더 은폐되고 있다. 때로 폭력적이게 되는 알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개별적인 양자관계 내지 그 종합에 있어서 생기는 일상적이고 국소적인 트러블로 간주함으로써, ‘연계를 통해 작동하는 분할=분배는 완전히 묵인된다. 푸코가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인데, 푸코는 이것 자체에 대해 선악의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재범 가능성이 있는 자로 분류하는 것은 학계에서는 나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나쁘다고는 반드시 말할 수 없다. 공해병을 인정받은 환자로 분류되는 것은 세상에 선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선하다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다. 푸코가 보고 있는 것은, 양자가 동시에 권력의 기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에 의한 분할=분배의 기준은 규범(norm)이며, 현대사회는 규범화의 사회(normalisation의 사회)라고 규정되며, 푸코는 이 권력의 중심에 의료권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사즈처럼 의료권력을 비판한다면, 권력을 비판할 수 있게 될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만약 광기가 진단 분류 도표에 견줄 수 있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한다면, 만일 광기에는 병리화하는 것도 의료화하는 것도 미치지 않는 특수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한다면, 그때 광기란 무엇일까? 반정신의학은, 바로 그 무엇인가에 직면해야 한다. 정신병의 용어로 코드화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 사회적 규범성의 용어로 코드화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 그러나 문제를 만들어내는 무엇인가에 직면해야 한다. 반정신의학은 시설의 내부와 의사의 의식의 내부에서는, 광기의 의료화를 해체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의료와 정신의학에 의한 오랜 식민지화를 거쳐, 광기의 물음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173] 76-77/94)

Si la folie n'est pas la maladie mentale se déployant dans un tableau nosographique, si la folie a une réalité spécifique qu'il ne s'agit pas de pathologiser ni de médicaliser, alors, qu'est-ce que c'est, la folie ? L'antipsychiatrie a justement à se confronter à ce quelque chose qu'il ne faut pas coder en termes de maladie mentale ni en termes de normativité sociale, mais qui cependant fait problème. L'antipsychiatrie démolit, à l'intérieur de l'institution et de la conscience des médecins, la médicalisation de la folie. Mais, de ce fait même, la question de la folie nous revient après cette longue colonisation par la médecine et la psychiatrie. Qu'en faire ?

 

분명히 반정신의학은 광기의 식민지화를 끝나게 했다. 탈병원화와 지역정신의료화는 의사에 있어서도 상식화했다. 그런데 포스트식민지주의의 시기가 되어, 이번에는 광기는 다른 문제로서 출현했다. 지역에서의 사회문제로서, 학급운영의 문제, 취업의 문제, 범죄예방의 문제, 노숙생활의 문제로서 출현한다. 이 사회적-경찰적인 분할=분배의 체제, 정상화(normalization) 사회에서는 광기는 절대적인 외부로서 출현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어디까지나 문제화되어야 할 무엇인가, 문제화되어야 하고 특수한 리얼리티로서 등장한다. 그렇게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산 너머 산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을 넘은 후에 올 것을 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산을 넘어 다른 산이 올 때까지의 협간에서 언뜻 엿보이는 무엇인가를 감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논의 맥락에서 푸코는 사즈(Szasz)의 정신분석적 요법에 비평을 가한다.

 

정신분석은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대중적으로는 의료실천처럼 기능하고 있다. 설령 정신분석을 실천하는 것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은 요법으로서, 의료적인 개입으로서 기능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분석은, 도처에서 확립하고 있는 의료적 관리의 네트워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173] 77/95)

Cela dit, la psychanalyse, non seulement aux États-Unis mais en France, fonctionne d'une façon massive comme une pratique médicale : même si elle n'est pas toujours pratiquée par les médecins, c'est bien comme thérapeutique qu'elle fonctionne, comme intervention de type médical. De ce point de vue, elle fait bien partie de ce réseau de «contrôle» médical qui est en train de s'établir partout.

 

푸코는 이렇게 계속한다. “정신의학자는 그 클라이언트에게 환자의 신분을 고액으로 강매한Les psychiatres vendaient cher le statut de malades qu'ils donnaient à leurs clients것인데, 반정신의학 운동 이후의 사즈를 필두로 하는 정신분석적 요법가나 심리요법가는 자신을 환자라고 보는 사람에게 비-질병을 판매한다Szasz vend de la non-maladie à des gens qui se prennent pour malades.” , 의료적 관리 하에 놓인 연계 네트워크 하에서, -질병을 판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일이 장애, 비행, 부적응 등에서도 일어났다. 변함없이, 권력의 네트워크, 사회적-경찰적 분할=분배의 기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푸코는 그것을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푸코가 내다보고 있는 것은, “질문을 만들어내는 무엇인가”, 절대로 직면을 회피하는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5. 혼과 행동의 통치로

생명권력생명정치론에서 통치성론으로의 이행에 대해, 원래 생명권력론생명정치론은 일시적인 정식에 불과하다고 이해된 적이 있다. 확실히 더 나중에는 “생명권력생명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지만, 그러나 문제구성 그 자체에 큰 변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한에서, 심리학 비판의 과제, 정신과 심리의 문제설정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이행에 대해서는, 그것이 전선의 축소나 후퇴가 아니었다는 것도 포함해, 신중하게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 본고에서는 권력의 기법이 개인화의 기법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에, 자기의 기법을 주제화하는 데에 이르는 그 이행에 대해서만 검토하고 싶다. 1978년의 통치성([239])에서는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가라는 물음은 혼의 통치의 문제와 행동의 통치의 문제로서 제기되며, 명확하게 정신적·심리적 차원의 문제설정을 계승하는 것인데([239] 636/247), 거기로의 이행의 논리를 따라가보자.

우선 생명권력의 극 중 하나인 규율권력은 개인화[개별화]하는 권력으로 재파악된다. 그 전쟁터에서는 개인화의 기법이 행사된다. 1981년의 강연 권력의 그물망([297])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권력의 개인화의 기법. 어떻게 누군가를 감시하는가, 어떻게 그 품행·행동·적성을 관리[통제]하는가, 어떻게 그 수행performance을 강화하고 그 능력capability을 증가시키는가, 어떻게 그 누군가를 가장 유용한 장소에 놓아둘까? 이것이야말로 나의 의미에서의 규율훈련이다. ([297] 1010/411)

Techniques de l'individualisation du pouvoir. Comment surveiller quelqu'un, comment contrôler sa conduite, son comportement, ses aptitudes, comment intensifier sa performance, multiplier ses capacités, comment le mettre à la place où il sera plus utile : voilà ce qu'est, à mon sens, la discipline.

 

당연히 (rehabilitation)의 기법, capability approach 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강연 권력의 그물망에서는 이제 권력의 도구법정, , 사법장치가 아니라 의료, 사회관리, 정신의학, 심리학이라고도 얘기되며([297] 1018/420)[주], 심리학은 특권적인 지위로부터 미끄러져 떨어졌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새삼 권력의 도구로서, 전쟁상태의 무기로서 재위치되고 있다. 그리고 1982년의 주체와 권력([306])은 이 개인화하는 권력에서 통치성론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것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거기서 푸코는 권력분석의 출발점을 새로운 사회운동에서 엿볼 수 있었던 전쟁상태에 놓고 있다.

[주] 정신분석은 통치성의 지식 중 하나이다. 푸코가 말하는 정신분석은 각종 정신분석, 심리요법과 혼재하는 정신분석이다. 1984년의 미셸 푸코의 인터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신분석은 과학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증언(aveu)을 기초로서, 자기가 자기에 대해 노동작업하는 기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그것이 성적 욕망의 주위에 자기를 구조화하는 인물을 창조한다는 사정으로부터도, 관리의 기법이기도 하다.”(([349] 1484-1485/150). 

 

출발점으로서 요 몇 년 동안 전개되어 온 일련의 이의제기를 다룰 것을 제안하고 싶다. , 여자에 대한 남자의 권력에 대해, 아이에 대한 부모의 권력에 대해, 정신병자에 대한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해, 거주자에 대한 의학의 권력에 대해,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행정관리(administration)의 권력에 대해 이의제기하는 것이다.([306] 1045/14)

Je proposerai, comme point de départ, de prendre une série d'oppositions qui se sont développées ces quelques dernières années : l'opposition au pouvoir des hommes sur les femmes, des parents sur leurs enfants, de la psychiatrie sur les malades mentaux, de la médecine sur la population, de l'administration sur la manière dont les gens vivent.

 

그리고 푸코는 이런 이의제기를 권위에 대한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것들에 공통되는 것을 정확하게 살펴야 한다면서 여섯 가지 점 정도를 열거한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관리를 염두에 두고, 공통되는 것의 열거로부터 뽑아내본다면, 이의제기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권력의 심급, 즉 개인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심급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1의 적을 찾는 것이 아니고, 직면하는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306] 1045/14). , 그런 삶의 방식을 직접 관리하는 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의 전쟁은 개인의 지위=신분을 묻는 투쟁이다.

 

한편으로 그 투쟁에서는 차이의 권리가 긍정되고 개인을 진정으로 개인적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 강조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 투쟁에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분리하고, 공동생활을 세분화하고,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틀어박히도록 개인에게 강제하고, 개인을 그 정체성에 비끄러매는 모든 것이 공격된다.

이 투쟁은 개인을 위한 것도 개인에 대항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화의 통치라고도 해야 할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306] 1045-1046/15)

d'un côté, elles affirment le droit à la différence et soulignent tout ce qui peut rendre les individus véritablement individuels. De l'autre, elles s'attaquent à tout ce qui peut isoler l'individu, le couper des autres, scinder la vie communautaire, contraindre l'individu à se replier sur lui-même et l'attacher à son identité propre.

Ces luttes ne sont pas exactement pour ou contre l' «individu», mais elles s'opposent à ce qu'on pourrait appeler le «gouvernement par l'individualisation».

 

의 무기는 개인화의 기법이다. 예를 제시해 보면, 개인을 분리하는 기법(시설로부터 지역이나 재택으로 이행시키는 기법, 유닛 케어[주]를 판매하고 살게 하는 기법), 공동생활을 세분화하는 기법(파티션의 기법, 건축에서의 동선의 기법, 개인실을 권장하고 운영하는 기법, 방문의 기법), 개인을 반성적으로 만드는 기법(개인 면담, 상담, 오피스타임オフィスタイム, 입사지원서, 질문표) 등등. ‘은 그것들을 무기로서 전쟁과 통치를 행한다. 그리고 지금 국가개인화의 모태가 되며, 그 권력은 사적 기업, 상호부조단체, 자선가, 인도가에 의해서도 행사된다([306] 1049/18). , 새로운 사회운동의 후예인 자선가나 인도가는 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개인화의 모태인 국가로부터 생겨나고 개인화의 기법을 행사하는 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전문가만이 은 아니다. ‘아군, 아니 아군이야말로 이다.

[주] 자택에 가까운 환경의 간병시설에서 다른 입주자나 간병 인력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입주자 개개인의 개성이나 생활리듬에 따라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간병수법을 가리킨다.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고 있는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 문제는 국가와 국가의 시설=제도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묶는 개인화의 유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몇 세기에 걸쳐 강제된 개인성의 유형을 거부하면서, 주체성의 새로운 형태를 촉진해야 한다. ([306] 1051/20)

On pourrait dire, pour conclure, que le problème à la fois politique, éthique, social et philosophique qui se pose à nous aujourd'hui n'est pas d'essayer de libérer l'individu de l'État et de ses institutions, mais de nous libérer nous de l'État et du type d'individualisation qui s'y rattache. Il nous faut promouvoir de nouvelles formes de subjectivité en refusant le type d'individualité qu'on nous a imposé pendant plusieurs siècles.

 

그래서 문제는 아군과 제휴하거나 공동하거나 협동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군이 초래할 개인화의 유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도 약간 놀라운 것이지만, 개인화에 대해 주체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뿐 아니라, 그 주체성의 탐구에 있어서 기법이 사용된다는 전망을 푸코는 제시한 것이다. “자기의 배려(souci)”에 대해,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세운 1981년의 주체성과 진리([304])를 다시 읽어보자.

 

자기의 배려의 역사와 자기의 기법의 역사는 주체성의 역사를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제 광인과 비-광인, 병자와 비-병자, 범죄자와 비-범죄자의 분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고 말하고 노동하는 주체에 장소를 주면서 과학적 대상성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에서의 자기 자신에의 관계의 성립과 변용 및 그 기법적 뼈대와 그 지식의 효과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른 측면에서, ‘통치성에 대해 질문을 다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에 의한 자기의 통치, 타자에의 관계와 연접하는 자기에 의한 자기의 통치(교육학, 행동상담, 영적 지도, 인생모델의 처방 등에서 보인다).[주] ([304] 1033/445)

L'histoire du « souci » et des « techniques » de soi serait donc une manière de faire l'histoire de la subjectivité : non plus, cependant, à travers les partages entre fous et non-fous, malades et non-malades, délinquants et non-délinquants, non plus à travers la constitution de champs d'objectivité scientifique donnant place au sujet vivant, parlant, travaillant ; mais à travers la mise en place et les transformations dans notre culture des « rapports à soi-même », avec leur armature technique et leurs effets de savoir. Et on pourrait ainsi reprendre sous un autre aspect la question de la « gouvernementalité » : le gouvernement de soi par soi dans son articulation avec les rapports à autrui (comme on le trouve dans la pédagogie, les conseils de conduite, la direction spirituelle, la prescription des modèles de vie, etc.).

[주] 푸코는 권력, 통치성, 자기와 타자의 통치,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 이렇게 네 가지의 연쇄의 분석을 과제로 하는데, 특히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 자기에의 배려는 심리학 등의 역사적 선구에 해당된다고 파악한다. Cf. Michel Foucault, L’hermeneutique du sujet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 (Seuil/Gallimard, 2001), Cours du 17 février 1982.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통치성은 분할하고 분배하고 통치하는 권력이 아니다. 관점은 변화한다.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통치성은,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에 의해 타자에 대한 관계가 연절화連節化되는 통치이다. 그리고 그런 통치성은, 바로 각종 기법에서 발견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통치성에 있어서는, 예를 들어 광인 자신이 자기를 통치하고, 바로 그것에 의해 비-광인과의 관계를 연절화連節化한다. 다른 한편, -광인 자신도 자기를 통치하고, 바로 그것에 의해 광인과의 관계를 연절화連節化한다. 사람들을 분할하고 분리했던 시설은 해체되고 연계가 강조됐기 때문에, 개인화의 기법은 각자가 자기를 통치하고 그것에 의해 타자관계를 구축하는 통치성에 편입[기입]된다. 달리 말하면, 그렇게 해서 각자는 포섭되고 통치된다. 이것이 현재의 권력이다.

아군도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다. 개인화의 기법으로 치안하고 보안하고 관리하고 통치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무기를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을까? 정신과 심리의 기법을 제 것으로 사용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때 주체성의 역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체성의 새로운 형태를 촉진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 푸코의 전망의 귀추는 완전히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심리학자 푸코가 달려온 길은 현재에서도 그 귀추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1954-1988, 2 vol., édition établie sous la direction de Daniel Defert et François Ewald avec la collaboration de Jaques Lagrange (Gallimard, 2001)(蓮資重彦渡辺守家監修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全一O, 筑摩書房, 一九九八-OO二年)으로부터의 인용에 대해서는 문서 번호 후에, 그것이 수록된 원서의 권수에 해당되는 쪽수, 그것에 대응하는 일역본 권수의 쪽수를 표기한다. 예를 들어 “[30] 472/23230번 문서, 원서(1) p.472, 그것에 대응하는 일역본(2) 232이라는 것이다. 문서번호에 의해 권수는 정해져 있어서 권수는 생략했다.

 

  1. 또한 푸코가 젊은 시절에 니체 독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서두에 인용한 인터뷰에서이다. 푸코는 니체 덕분에, 병원 내의 모든 실천에 대해 étranger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글은 anti-나 contre-가 됨으로써 étranger가 되는 것의 권력이라고도 해야 할 것을 탐구한다. [본문으로]
  2.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ie)이 심리학의 일부분으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1984년의 인터뷰 「미셸 푸코에게 듣다」에서는 심리화의 동향에 관심을 보낸다. 이것은 심리학자 푸코의 함수이다. “한편으로, 형벌을 가능한 한 전면적으로 심리화하는(psychologiser) 가능성이 있다. 바꿔 말하면, 형벌을 ‘교정’, ‘개선’ 쪽으로 한꺼번에 쏠리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심리요법이나 집단의 요법이다.” ([353] 1513/194頁). [본문으로]
  4. 심리치료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이 유익하다. Harry Specht and Mark E. Courtney Unfaithful Angels : How Social Work Has Abandoned Its Mission (Free Press, 1994).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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