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케 코지 + 고쿠분 코이치로, <통치신론 : 민주주의의 매니지먼트>(2015년 1월 출판된 것을 2018년 5월에 번역하고 8월에 올림)

통치신론 - 민주주의의 매니지먼트 - 오오다케 및 고쿠분 20180514.pdf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읽기


atプラス 15, 2013년 2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가라타니 고진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 미번역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민주주의의 이름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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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3/3)

      デモクラシーからイソノミアへ―自由―民主主義を乗り越える哲学

가라타니 고진 고쿠분 고이치로

(2012년 12월 6太田出版会議案にて)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의 이소노미아

고쿠분 : 가라타니 씨는 이 책에서 이소노미아=타운십의 존립은 내적 및 외적 조건에 의해 존립한다. 따라서 그런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 내지 변질되어 버린다”(같은 책, 47)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동 가능한 프론티어가 있고, 상공업이 발달하고 주위에 이소노미아=타운십을 위협하는 국가가 없는 것 등이죠(같은 책 47).

   이소노미아라는 것이 이처럼 매우 한정된 역사적 조건에서만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목표로 한다고는 할 수 없는 셈이죠. 그러면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만 남아 있다는 것인가요?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가라타니 : 이소노미아가 매우 한정된 역사적 조건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빌론 유수 시기의 유대인 사회에도 해당됩니다. 그때에는 제사장·율법학자의 지배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소노미아적 사회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수로부터 해방되자마자, 곧바로 제사장·율법학자가 지배하는 집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소노미아 같은 상태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며, 향후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 아니라, 훨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계사의 구조에서 교환양식 D를 교환양식 A의 고차원에서의 회귀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경우 몇 가지 주의할 게 있습니다. 첫째, 교환양식 A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호혜성 원리는 정주하여 부의 격차가 생겼을 때, “그것은 좋지 않아, 모두와 나누자라고 상담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맞은 편에서 왔습니다. 증여의 명령은 정령과 같은 힘에 의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환양식 D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하다, 훌륭하기 때문에, 해보자고 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맞은 편으로부터 강박적으로 옵니다. 말하자면, 신의 힘입니다. 교환양식 D를 보편종교라는 관점에서 생각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물론 교환양식 D, 즉 종교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철학의 기원에서는 그것을 철학에 있어서 생각하려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D가 이쪽의 소망과 의지에 의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D의 도래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맑스도 공산주의에 관해 그렇게 생각했다고 봅니다. 맑스는 미래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오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설계한 것과 같은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확실히 이소노미아라는 것은 이것이 이소노미아이다라고 지목할 수는 없으며, 만일 향후 이소노미아가 있다고 해도, “혹시 저게 이소노미아였는지도 모른다라는 식으로, 사후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가라타니 씨는 철학의 기원에서도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오니아라는 억압된 것의 회귀였다고 쓰고 있죠.

 

가라타니 :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이몬(정령)으로부터의 신호를 따른 결과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배후에 있는 이중 세계, 공인과 사인을 나눈 계급대립을 부정하며, “사인(=자유)이면서도 공적(=평등)이다라는 이소노미아의 원리를 들여왔습니다. 그것에 의해 그는 재판을 받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지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사실은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웃음).

 

고쿠분 : 철학의 기원의 마지막 주(5장 주38)에서 데리다의 탈구축을 소크라테스적인 실천이라고 쓰셨잖아요? 저는 2000~05년까지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고, 2004년에 데리다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수업을 받았는데요, 그때 느낀 것은 역시 그는 매우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 그렇군요. 또 한 가지, 제가 거기서 언급했던 것은 푸코의 최후의 강의(진실의 용기)입니다. 거기서 푸코는 소크라테스를 파르레시아(진실을 말하기)에 대한 용기를 지닌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각각의 동기가 다르지만, 데리다나 푸코가 소크라테스로 향했다는 것은 제게 아주 든든한 일입니다(웃음).

 

고쿠분 : 가령 이오니아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철학의 역사 속에서 소수자적인 것으로서 있으면서도, 그러나 단속적으로 끈질기게 출현하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르다노 브루노나 스피노자는 그렇고, 아마 한 시기의 셀링도 그렇죠. 나중에는 들뢰즈. 데리다와 푸코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는 것은, 철학사 속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망각할 수도 없으며, 왠지 어금니에 계속 걸려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 전문인 스피노자가 바로 그렇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유는 몇 번이나 살펴보더라도, 아무래도 철학은 스피노자의 일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근대 철학 속에다 그를 잘 자리매김 할 장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스피노자에 대해 강의를 자주 하는데, 스피노자의 사고방식을 들으면 모두 놀랍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 사유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질문을 받습니다만, 저도 언제나 어디서 왔는지를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것을 이오니아적인 것의 회귀로서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 이 책에다 썼는데, 스피노자는 신인동형론을 비판하고 만약 삼각형이 입을 연다면, 신은 뛰어난 의미에서 삼각형적일 것이다라고 비아냥댑니다. 이것은 이오니아의 크세노파네스가 말했던 만일 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을 갖고 있다면, 혹은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인간들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면, 말들은 말들과 비슷한 신의 모습을, 소들은 소와 비슷한 신의 모습을 그리고, 각자가 자신들이 지닌 모습과 같은 몸을 만들 것이다라고 야유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오니아 사람들은 신들을 단순히 부정했다고 일컬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자는 유일신이라는 것을 근저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말했다고 해도, 신의 부정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곳이 스피노자와 평행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쿠분 : 역시 신을 갖지 않고 있지 않으면 신을 부정할 수 없다는 역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탐구 2무렵의 가라타니 씨는 스피노자의 무한의 이야기를 강조했습니다만, 이것을 이오니아의 이야기로 연결하면, ‘무한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사고방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장에서도 그런 생각이 발견됩니다만,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자연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죠.

 

가라타니 : 이오니아 자연 철학에 관해서는 모두 그런 견해를 갖고 있더군요. 단순한 자연학이라고 생각되고 있고, 윤리나 자기의 문제와도 관련된 사회철학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더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오니아 자연 철학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단순히 이오니아 자연철학은 신들을 부정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식에서 신들을 부정했느냐는 문제는 생각하고 있지 않더군요.

 

 

철학과 정치

고쿠분 : 얘기를 바꾸겠습니다만, 철학의 기원에서 제시된 소피스트 상()도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소피스트라고 하면 모두, 단순히 심술궂고 싫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라타니 씨는 전혀 다른 소피스트 상을 내놨습니다. 아테네에 의해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정복된 후에, 시민권을 갖지 못한 외국인들이 소피스트가 됐습니다.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정치적인 변론기술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정치와 거리를 두는 형태로만 폴리스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해서도 그런데, 그는 자주 대중을 멸시하는 귀족주의자라고 여겨집니다. 실은 저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한 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이 국가동굴의 비유에서 말하는, 지상으로 나와 다시금 동굴(민중의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철학자들의 전형이 헤라클레이토스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가라타니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헤라클레이토스가 살았던 당시의 에페소스의 정치사회 상황을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헤라클레이토스 상이 나타납니다. 그 당시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이 페르시아 정복에 대해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에페소스의 민중은 정복을 감수했고 예종 속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민중을 매도한 맥락에는 그런 사회배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모든 것의 왕이다”(단장 53)라는 그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라타니 : 나는 소피스트의 기분을 조금 알겠더군요(웃음). 저는 미국에서 오래 가르쳤는데요, 미국에 있는 외국의 지식인은 소피스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간 것은 1975년으로, 그 때 폴 드 만과 서로 알게 됐습니다. 또 드 만을 통해 데리다 등과도 알게 됐습니다. 이른바 예일학파는 이후 미국 전체의 지적 세계를 석권했는데요, 드 만의 사후, 곧바로 그가 스캔들에 의해 매장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절감한 적이 있습니다. 드 만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지만, 어차피 외국인입니다. 미국인에게는 없는 지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애지중지되지만, 그것이 어떤 선을 넘으면, 크게 혼쭐이 납니다. 아테네에 있던 소피스트도 그랬습니다. 그럼, 왜 그들은 아테네로 왔을까요? 그것은 아테네가 헤게모니 국가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있던 폴리스에서는 충분한 활동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드 만이든, 데리다든, 그들이 미국에 온 것은 미국이 다양한 의미에서 중심적이게 됐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도 그렇습니다. 맑스가 런던에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일테죠. 그는 귀국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습니다. 맑스도 영국에서의 정치활동은 신중하게 했습니다. 외국에서 온 지식인들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로 온 소피스트도 그와 똑같은 것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정치적(political)이라는 것을 폴리스적이라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견유파나 스토아 학파의 단계에서 철학은 폴리스에서 벗어나고, 개인주의적인 것이 됩니다. 현재도 철학이라고 하면 그런 이미지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적·자의식적으로 묻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폴리스들이 무화되고 있는 상황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것(폴리스적인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 : 마지막으로 시사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철학의 기원에서 소크라테스가 아고라(광장)에서 사람들과 문답하는 모습은 이오니아의 사상과 정치를 아테네(광장)에서 회복하려 한 실천이었다고 쓰셨습니다. 이 모습은 현재 탈핵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위나 광장에서의 집회를 방불케 하는데요, 이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라타니 : 저는 처음에 말했듯이, 20111월에 인도로 가서 철학의 기원에 대해 구상을 다졌는데요, 얼마 후 311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4월부터 탈원전 시위에 나가게 됐습니다. 이 책의 토대가 되는 잡지 연재 논문은 시위하러 가면서 쓴 거예요. 하지만 논문과 시위가 직접 결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20121월에 오사와 마사치(大澤真幸)문학계소크라테스가 광장에 나가듯이 가라타니 고진은 시위를 하러 가다라는 에세이를 썼습니다.

   이것을 읽고 정말로 생각했는데요, 제 자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실감했던 것은 오히려 20126, 총리관저국회 앞에서의 집회가 시작됐을 때부터입니다. 의회도 시위집회도 영어로 말하면 어셈블리이죠. 그래서 국회 앞에서의 집회라는 것은 거기에서 두 개의 어셈블리가 대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회에도 어셈블리가 있겠지만 이쪽에도 어셈블리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정한 어셈블리인지는 명백하죠. 실제로 국회 측에서 이쪽의 어셈블리에 인사하러 왔습니다(웃음).

   아테네의 경우 민회라는 어셈블리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노예, 여성, 외국인은 민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다는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시기입니다. 이 민회에 의한 지배가 민주주의(다수자 지배)입니다. 그에 반해, 아고라(광장)에는 누구든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이소노미아(무지배)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일을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다 쓰고 난 후에, 아니 오히려, 이듬해의 국회 앞의 집회에서 그것을 실감했습니다. 이런 어셈블리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일어났어요. 원래 지진원전사고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말해도, 이것뿐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맞은 편에서 강박적으로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까지 시위에 관해 몇 번인가 썼습니다만, 이론에서 시위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아무리 설득해도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시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래했다면, 제대로 그것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쿠분 : 저는 국회 앞의 모임을 봤을 때, “, 21세기의 일본은 어떻게 될까라고 지금까지 모두가 다양하게 상상했지만, 지금 여기에 실제의 21세기의 일본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 시위는 과거 일본의 질서 중에서 좋아하는 곳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꽤 품행이 단정하면서도, 할 말을 제대로 말한다는 자세가 관철되어 있습니다. 그것에 저는 강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의 일본 사회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덧붙이겠습니다. 제가 철학의 기원의 연재를 읽고 줄곧 마음에 간직했던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였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는 예종 속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던 에페소스의 민중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가라타니 씨가 강하게 강조하셨듯이(같은 책 141), 헤라클레이토스는 결코 에페소스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코스모폴리탄이었고 이소노미아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폴리스에서, 이 에페소스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헤라클레이토스 상은 제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습니다.

   저는 지금 고향인 도쿄도 코다이라 시에서 도로건설(지방도로 3.2.8호선) 반대운동을 응원하고 있는데요, 항상 헤라클레이토스를 생각합니다. 여기, 제가 살고 있는 코다이라 시에서 운동을 할 수 없으면 도대체 어디서 할 수 있단 말인가. 제게 코다이라 시는 녹음이 우거지고 가라타니 씨가 말씀하신 이소노미아같은 것입니다(웃음). 저도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에서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년 생. 평론가. 저작으로 정본 가라타니 고진집(定本 柄谷行人集)(5, 岩波書店),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맑스에 관해(Transcritique : On Kant and Marx)(The MIT Press), 세계공화국으로 :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世界共和国資本=ネーション=国家えて)(岩波新書), 세계사의 구조(世界史構造)(岩波書店) 등 다수.

 

고쿠분 코이치로(國分功一郎)

1974년 생. 高崎経済大学経済学部准教授. 전공은 철학. 저서로 스피노자의 방법(スピノザの方法)(みすず書房),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退屈倫理学)(朝日出版社), 번역서로 자크 데리다, 맑스와 아들들(岩波書店), 질 들뢰즈, 칸트의 비판철학(ちくま学芸文庫)

            * 국역본 :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원제 : 들뢰즈의 철학원리]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읽기


atプラス 15, 2013 2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미번역

|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 민주주의의 이름

|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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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2/3)

      デモクラシーからイソノミアへ―自由―民主主義を乗り越える哲学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012 12 6, 太田出版会議案にて)

 

이소노이마와 이동성

고쿠분 : 또 하나, 제가 철학의 기원을 읽으면서 줄곧 생각했던 것은 이동의 문제입니다. 가라타니 씨는 이소노미아의 근간에는 이동의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거기서 정주혁명이라는 사고방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주14] 지금까지는 농업 등 식량 생산 기술의 발전에 의해 정주가 가능해졌다고 여겨졌지만, 식량 생산을 할 수 없어도 정주는 가능합니다. 오히려 인류는 약 1만년 전, 기후 변동이라는 외적 요인 때문에 정주하도록 강제되고, 어쩔 수 없이 몇 백 만년이나 익숙해졌던 유동 생활을 버리고 정주생활을 시작하고, 그러던 중에 식량 생산 기술을 획득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저도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마찬가지로 이 정주혁명을 언급했습니다.[주15] 저도 이 생각을 취했던 것입니다. 정주혁명의 사고방식은 우리들의 견해를 일신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14] [고쿠분] 西田正規, 人類史のなかの定住革命, 講談社学芸文庫를 참조

[주15]  [고쿠분] 国分功一郎, 退屈倫理学, 朝日出版社2장을 참조. 신판도 참조

   가라타니 씨는 이 정주혁명의 관점에서 이소노미아의 이념을 고찰하고 계십니다. 정주 이전에는 사물[물건]을 많이 소유할 수 없었기에, 사유재산이라는 생각이 거의 없고 빈부격차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유롭기에 평등이라는 이소노미아의 원리는 정주혁명 이전의 수렵채집민이 지녔던 순수증여, 공동기탁()의 원리의 반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르셀 모스[주16]는 호혜성에 의해 증여를 특징지었지만, 사실 그것은 인류에게 보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유동적인 수렵채집민의 무리band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여의 호혜성은 유동민이 정주한 후에야 비로소 처음 형성됐습니다.

[주16] [편집부] 1872-1950. 프랑스의 사회학자문화인류학자. 증여론에서는 미개사회 속에 있는 '증여'가 자본제 사회 속에 있는 '교환'과는 다른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인류의 경제적 사태事象의 기초에 뒀다.

   저는 정주혁명에 대한 가라타니 씨의 해석을 읽으면서, 아무래도 자유의 근간에 있는 것은 이동의 자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듯이, 18세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형벌이 고안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감옥이 형벌의 중심이 됩니다.[주17]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데에도 이동의 자유를 요구한 민중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주17] [고쿠분] 미셸 푸코는 18세기에 고안됐으면서도 채택되지 않았던 무수한 형벌의 방법을 감시와 처벌22유순해진 형벌에서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철학이 과거에 크게 논했던 자연상태와의 관계입니다. 자연상태 개념을 골똘히 생각한 것은 루소입니다만, 루소가 생각하는 자연상태란 인간이 궁극적인 자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인간불평등기원론). 거기서는 확실히 사람의 물건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복종시킬 수는 없습니다. 가령 주거지인 움막을 누군가가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빼앗긴 당사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이동의 자유가 있으면 지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는 궁극적인 자유의 상태입니다만,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실은 이동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루소는 자연상태에 관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아마 존재한 적이 없으며, 다분히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루소의 자연상태론은 이념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타라니 씨의 논의를 읽다가 깨달은 것은,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와 아주 비슷한 상태가 현실에서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령 새로운 토지로 갈 수 있는 징표가 있고, 이동할 수 있는 프런티어가 충분히 남아 있는 경우에는 그런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정말로 놀랐습니다.

 

가라타니 : 알랭 테스타르(Alain Testart)라는 인류학자가 루소를 흉내내 신불평등기원론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그도 불평등의 원인을 정주에 의한 변화에서 찾습니다. 저는 201210월에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에서 정주혁명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요, 제가 강연하기 2년 전에 마샬 살린스[주18]가 왔다고 해요. 그 기록이 대학에서 소책자로 출판됐습니다. 제 강연과 질의응답도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 탓도 있어서, 저는 살린스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주18] 1930~.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저서로 석기시대의 경제학역사의 섬들 

   살린스는 수렵채집사회에 관해, 그것이 풍요로운 사회임을 보여줬습니다. 그것은 획기적인 인식입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수렵채집사회가 정주적이냐 유동적이냐에 주의를 쏟지 않았습니다. 살린스는 풀링(pooling, 공동기탁)과 호혜성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전자가 유동적인 사회에 의해, 후자가 정주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맑스주의자이며, ‘생산양식에 집착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 교환양식이라는 관점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살린스는 가족제 생산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이라는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그리고 가족제적 생산은 과소생산(underproduction)이 된다고 하는데요, 원래 호혜교환이 과소생산을 초래한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한편, 마르셀 모스는 호혜성을 태고부터 있는 원리라고 생각하므로, 역시 그것이 정주혁명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역사적인 시각이 됩니다.

   앞에서 고쿠분 씨가 지적하셨듯이, 호혜성(교환양식 A)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주하면서 시작됐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근친상간의 금지도 그 시점에서 시작됐습니다. 그것은 증여를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를 저는 정주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정주혁명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니시다 마사키(西田正規) 씨입니다만, 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정주혁명이란, 정주 후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호혜 시스템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동적인 사회와 정주한 사회의 구별은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유동적인 수렵채집민 사회와 씨족적인 수렵채집민 사회의 차이는 경시됐습니다.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원시공산제도 그 차이를 무시하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유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씨족사회의 이미지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 평등하지만 자유가 없는 사회로서 말입니다. 그리스로 말하면, 스파르타적인 사회가 됩니다. 플라톤은 스파르타를 동경했던 것이 아닐까요? 아테네에서는 자유가 있으나 평등이 없습니다. 평등을 실현하려고 하면 자유가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기에 평등이라는 사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오니아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는 근본적으로 이동성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고쿠분 : 그러네요. 자유의 조건으로서의 이동성이라는 것에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하여의 논의입니다. 영구평화를 위하여6개의 예비조항과 3개의 확정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주19]  이 확정조항의 세 번째가 방문권의 얘기입니다. 3조항 : 세계시민법은 보편적인 우호를 가져오는 조건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세계 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에 국한되어야 한다].”[주20] 이 조항은 굉장히 급진적입니다. ‘세계시민법같은 것이 실현됐다고 해도, 그 내용은 각국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으며,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지 않는다는 규칙만으로 좋다고 말하는 거예요. 요컨대 자유롭게 사람들이 서로 이동한다면, 세계는 저절로 진보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동은 저 나라에서는 이러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니 이상하다라는 감정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우호라는 대목에는 라틴어의 ‘hospitalitas’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환대라는 것이죠.[주21] 영구평화를 위하여의 결론은 환대입니다. 칸트가 평화의 문제를 이렇게 이동의 문제로부터 생각했던 것은 매우 흥미롭고, 가라타니 씨의 철학의 기원의 논의로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주19] [고쿠분] 예비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항. “장래의 전쟁의 씨앗을 몰래 보유하여 체결된 평화조약은 결코 평화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조항. “독립해 있는 모든 국가(소국이든 대국이든, 이 경우 문제가 아니다)도 계승, 교환, 매수, 또는 증여에 의해, 다른 국가가 이것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조항. “상비군은 때와 더불어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 넷째 조항. “국가의 대외분쟁에 관해서는, 그 어떤 국채도 발행되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조항.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나 통치에, 폭력을 통해 간섭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조항. “어떤 국가도 타국과의 전쟁에 있어서 장래의 평화시에서의 상호간의 신뢰를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확정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확정조항. “각 국가에서의 시민적 체제는, 공화제이어야만 한다.” 둘째 확정조항.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합제도에 기초를 둬야 한다.” 셋째 확정조항. “세계시민법은 보편적인 우호를 가져오는 조건들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주20]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이한구 옮김, 서광사, 2008.

[주21] [고쿠분] 또한 영구평화를 위하여의 예비조항과 확정조항에는 각각 한 개씩의 라틴어 단어를 붙인 조항이 있다. 확정조항에서의 그것은 여기서 소개한 환대(Hospitalitas)’를 규정하는 셋째 조항이며, 예비조항에서의 그것은 상비군(miles perpetuus)’을 규정한 셋째 조항이다. 라틴어가 사용됐다는 것은, 그 단어를 절대로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상비군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군대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사력 자체의 폐기는 무리일지도 모르나, 상비군은 폐기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방문권이 인정된다면, ‘영구평화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현실적인 제안이 아닐까?

 

가라타니 : 환대의 문제는 데리다가 했기 때문에, 저는 그에 대해 쓰는 것을 그만뒀어요(웃음). 다만, 그것에 대해 조금 말하면, 사람은 유동하고 있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환대가 성립하거든요. 정주하지 않으면, 사유(私有)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베이징의 칭화대학교 강의에서 얘기했더니, “알고 있습니다. 저는 빈번하게 이사를 하기 때문에, 소지품은 거의 다른 사람들에게 줍니다라고 말한 학생이 있더라구요(웃음).

   반면, 정주하는 것은 축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축적한 것을 강제적으로 증여하라고 하지 않으면, 격차가 생기고, 권력자가 생겨버리게 됩니다. 유동하고 있을 때는, 원래 그런 것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동한다라는 조건 자체가 평등을 산출하는 것이죠. , 유동민에게서는 환대해야 한다는 규칙만 있는 게 아니라, 원래 축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손님이든 누구든, 서로의 것을 나누는 일이 생겨납니다.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주 혁명 이후에 나타나는 문제로, 그 이전에는 그것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재에도 유목민에게는 그런 규칙[, ]이 있습니다만, 같은 것이 어민에게도 있습니다. 어민도 수렵채집민을 계승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민의 사회에서는 바다에서 조난된 사람들이 있다면, 돕기 위해 전력을 다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대로 보살펴주고, 안전한 곳에 도달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는 어부의 철칙 같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물론 이들이 칸트를 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웃음). 반대로 말하면, 칸트적인 환대의 원리는 그가 제멋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시대의 원리가 고차원에서 회귀한 것이라고 간주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이동이 있으면 지배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물건을 축적할 수 없으니까 사유(私有)가 생겨나지 않고, 타인을 지배하려고 생각해도 쉽게 달아나버립니다.

   이에 관해서는 맑스도 자본에서 재미있는 것을 썼습니다. 이것은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도 인용한 것인데요, 맑스는 경제학자인 E. G. 웨이크필드라는 사람이 소개한 영국인인 필 씨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 씨는 5만 파운드의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잉글랜드에서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강으로 가지고 가, 거기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동자를 거느리고 이주하자마자, 다들 곧바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 맑스는 필 군은 그 밖에도 노동자 계급의 남녀와 아이들도 3천명을 동반할 정도로 주도면밀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필 씨에게는 그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하거나 물을 긷거나 할 한 명의 하인도 없었다.’ 무엇이든 준비했으면서도 잉글랜드의 생산관계를 스완강으로 수출하는 것만은 잊었던 불행한 필 군!”[주22]

   가엾은 필 군’(웃음). 그건 그렇고, 이동 가능한 토지가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잉글랜드의 생산관계를 수출할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봐도, 이동의 자유가 막혔을 때 지배가 생긴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주22] 칼 맑스, 자본3권 [カール・マルクス, 󰡔資本論󰡕 三巻向坂逸郎 訳岩波文庫一九六九年420]

 

가라타니 : 저는 미국의 타운십을 가능케 한 조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스가 자본의 어딘가에 썼다고 생각합니다만, 19세기 미국에서는 산업노동자가 없었기에 산업자본이 발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민은 대거 왔지만, 타인에게 사역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프론티어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산업자본주의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토지가 많았기에 대토지소유는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금지됐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토지에서 노동하기보다는 서부로 가서 자기의 토지에서 노동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18세기 미국 동부에서 타운십이 성립됩니다. 이것은 이소노미아적입니다.

   그러나 점차 토지가 부족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이동하려고 해도, 영국이 미국의 선주민과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서부로 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습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칭송을 받고 있으나, 내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미국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시기에는, 이미 타운십(이소노미아)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원래 선주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으로는 타운십(이소노미아)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저는 신조(新潮)에서의 연재 원고에서는 도널드 A. 그린데(Jr.,Donald A. Grinde)와 브루스 E. 요한센(Bruce E. Johansen)미국건국과 이로코이 민주제[주23]라는 책을 인용해 썼습니다만, 미국의 타운십에 영향을 줬던 것은 북미의 선주민이 형성한 이로코이 연방입니다.[주24] 미국의 연방제는 몽테스키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지지만, 원래 몽테스키외 자신이 이로코이 연방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연방제는 직접·간접으로 북미의 선주민으로부터 배운 것이구요, 유럽의 이론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주23] [옮긴이] Jr.,Donald A. Grinde & Bruce E. Johansen, Exemplar of Liberty: Native America and the Evolution of Democracy, American Indian Studies Center, UCLA, 1991. [ドナルド・A. グリンデ Jr. & ブルース・E. ジョハンセン, アメリカ建国とイロコイ民主制, みすず書房, 2006.]

[주24] [편집부] 뉴욕주 북부의 온타리오 호수 남쪽 연안과 캐나다에 걸쳐서 보유지를 영유하는, 6개의 미국 선주민족에 의해 구성된 부족국가집단. 17세기-18세기의 전반기에 성립됐다

    [옮긴이] Iroquois Confederacy, 이로코이 연맹으로 불린다

   또 한 가지, 이 책에서 18세기의 북미와 더불어 예로 든 것은, 10~13세기의 아이슬란드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슬란드도 북미와 마찬가지로, 차례차례 이주한 이민자들에 의해 이소노미아적 자치사회가 성립됐습니다. 제가 이 아이슬란드라는 장소의 이질성을 깨달았던 것은, 사실은 제 첫 책인 두려워하는 인간畏怖する人間(1971년 출판)에 수록된 서평, W. H. 오든(Auden)2의 세계라는 책의 서평을 썼을 무렵입니다.

   『2의 세계라는 책에서 오든은 아이슬란드 사가(Icelanders’ sagas)[주25]에는 보통의 유럽의 서사시와는 다른 특징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리얼리즘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리얼리즘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 사가의 니얄(Njáls) 전설에서는 영웅을 묘사하는 데 이런 표현을 합니다.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밤색이며, 눈도 아름다웠다. 얼굴빛은 아주 파랗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매부리코에다, 뻐드렁니 때문에 입가는 보기 힘들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전사였다.”

[주25] [옮긴이] 아일랜드인이 자국어로 쓴 기록·이야기의 총칭. 사가는 이야기된 것이라는 뜻이다. 원래 바이킹족은 기록을 문자로 남기는 관습이 없었으며, 아이슬란드에서는 법률조차도 구전되고 낭송시인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계승됐다. 모든 사가는 원래 이런 구전이다

   보통의 서사시에서 영웅의 육체는 그 정신의 정확한 외화이며, 육체적으로 완벽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사가에서는 영웅인 것과 흉한 것, 아름다운 것과 흉한 입가가 모순을 구성하지 않고 양립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리얼리즘이란 이른바, 그는 영웅이었으나 흉했다고 쓰는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사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을 오든이 지적했고, 당시 저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저는 아이슬란드 사가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오니아를 경유해 풀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이슬란드 사가 혹은 사회사 연구서를 읽어봐도, 이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동시기의 유럽 혹은 북유럽에 비해, 아이슬란드 사회는 생산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압도적으로 낮았습니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것은, 모두 아이슬란드의 것만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의 사례를 고립시켜 보면, 문제의 공통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를 보기 위해서는 이오니아를 보면 됩니다. 실제로 아이슬란드 사가는 이오니아에서 태어난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유사합니다. 호메로스에 의해 묘사된 영웅은 유럽 중세의 영웅무훈시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아이슬란드 사가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와 이오니아를 잇는 것은 뭐냐고 하면, 그것은 동시에 이동성에 의해 생겨난 자치사회이라는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아이슬란드 사가는 이소노미아적인 사회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속>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연재 예고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읽기


atプラス 15, 20132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미번역

|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 민주주의의 이름

|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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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1/3)

      デモクラシーからイソノミアへ―自由―民主主義を乗り越える哲学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012126, 太田出版会議案にて)

 

질문 : 가라타니 고진 씨는 201211월에 철학의 기원을 출판했습니다. 철학의 기원은 고대 이오니아[주1], 자유롭기에 평등하다는 이소노미아(무지배)[주2]에서 철학의 기원을 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 이소노미아의 사상은, 소크라테스를 마지막으로 망각되어 버렸다고도 쓰셨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그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고대 이오니아에서는 탈레스[주3]를 시조로 하여 자연철학이 무르익었습니다만, 그 망각된 사상을 계승한 철학자의 한 명으로 이 책에서는 스피노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쿠분 고이치로 씨는 스피노자의 방법을 쓰고, 데카르트와 비교하면서 스피노자의 방법을 탐구하고, -스피노자적인 방향으로 진행된 17세기 이후의 철학에 맞서 다시금 스피노자의 가능성을 제기하셨습니다.

    오늘은 두 분께 철학의 기원에 관해, 또 이 책이 제기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사상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주1] [편집부] 아나톨리아 반도(현재의 터키) 남서부 및 에게해 동부의 섬들에 고대에 존재했던 지방.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주2] [옮긴이] no rule은 비지배, 무지배로 모두 번역가능하다. 필립 페팃 등과 같은 신공화주의자들이 자유를 논할 때 <지배 없는 자유><간섭 없는 자유>를 구별하여 언급하듯이, '아니다'라는 의미는 물론이고 '없다'는 의미도 가능하기에 무지배가 꼭 잘못된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3] [편집부] 기원전 6세기 전반기의 인물. 고대 그리스의 기록에 남겨진 가장 오래된 자연철학자이며, 이오니아의 밀레토스학파의 시조. 만물의 시원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와 철학의 기원

고쿠분 : 가라타니 씨는 철학의 기원에서 소크라테스 이전(pre-socrates)의 철학자에 관해 논하고 계십니다. 아주 우연인데요, 사실 저도 3·11 이후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 경우는 하이데거가 계기입니다. 하이데거는 원자력 기술에 관해 철학적으로 고찰한 유일한 철학자인데요, 그 전제에는 그의 기술(테크네*)’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연(퓌지스*)’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기술(테크네*)’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연 개념에 관해 생각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기묘하게 생각될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원자력 발전의 문제를 경유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에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11년부터 그 공부를 시작해, 2012년의 전반기에는 대학에서, 하이데거를 이용하면서 -소크라테스 기의 철학과 원자력 발전이라는 테마로 수업도 했습니다. 아마 이런 제목의 수업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웃음).

   이런 셈이어서, 신조(新潮)를 드문드문 보고 가라타니 씨의 철학의 기원의 연재를 봤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 “나만 이런 게 아니잖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거기서 공통되는 시대정신을 느꼈다고나 할까, 왠지 나는 지금 시대의 파도에 올라타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웃음).

   음, 이러저러하게 시작한 프리소크라테스의 공부인데요, 처음에 느꼈던 것은 어떤 책을 읽어도 같은 것이 써져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저는 처음에 프리소크라테스의 고전적 연구인 존 바넷의 초기 그리스 철학등을 읽었습니다. 그 후 다른 책과도 맞춰봤지만, 물론 자세한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어디에든 같은 것이 써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하더군요. 이 시기의 철학에 관해서는 원래 자료가 적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상당히 한정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초보적인 것을 확인해 두면, 그들이 기록한 책이 남아 있지 않고, 후세의 철학자에 의한 증언이나 인용밖에는 존재하지 않죠. 가령 탈레스가 만물의 시원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때문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런 증언이나 인용으로 남겨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말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재구성했던 것이 헤르만 딜스가 편찬하고 나중에 발터 크란츠가 수정 증보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 단편집(초판은 1905, 수정증보판은 1951)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프리소크라테스 연구의 출발점이 되어 있고, 아까 이름을 언급한 바넷의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도 이 딜스=크란츠의 단편집이 전제에 있습니다.[주4]

[주4] [고쿠분] 딜스=크란츠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프리소크라테스 연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만 당연하게도 비판도 있다. 버넷은 가령 헤라클레이토스의 단장의 나열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초기 그리스 철학, 以文社一九一頁). 딜스는 주제에 따른 배열의 시도를 일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버넷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단 하나의 단장에 관해, 그 단장의 첫 부분은 단장 자체를 전한 심플리키오스(Simplicius of Cilicia: c.490-c.560)에 의한 패러프레이즈라고 말한다(같은 책, 八三頁). 하이데거는 버넷의 설에 동의하면서, 같은 이유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 본인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말미의 12 말에 불과하다고 한다(ハイデッガー, アナクシマンドロスの箴言, 杣道』〔ハイデッガー全集第五巻, 創文社, 378-380). 아마 이것 외에도 다양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딜스=크란츠의 작업의 의의는 향후에도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 김인곤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선집, 아카넷, 2005, 218266.

   이처럼 프리소크라테스적 철학은 자료가 아주 한정되어 있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는 셈인데요, 거기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온 것이 하이데거죠.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돌아갈 필요를 강하게 주장하고, 아주 독창적인 독해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주5]나 아낙시만드로스[주6] 등이 남긴 단편을 독특한 방식으로 독해했습니다.

[주5] [편집부] BC535년 무렵~475년 무렵. 에페소스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일컬어지는 자연철학자. 만물의 시원물질을 불이라고 생각했다.

[주6] [편집부] BC 610년 무렵 ~ 547년 무렵. 만물의 시원을 무한정한 것이라고 했던 밀레토스학파의 자연철학자

   이것은 정직한 감상으로 말하는 건데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을 하나의 강력한 전체적인 비전을 좇아 독해해 낸 사상가는 하이데거 이후, 가라타니 씨로 단숨에 건너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하겠습니다.

   단편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른바 몇 개만 남은 퍼즐 조각을 통해 퍼즐 전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하이데거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시도했던 것은 그와 같은 작업입니다. 하이데거는 결코 몰락하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몸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인가/어떻게 하면 사람은 소멸하지 않는 것의 앞에서 숨어 있을 수 있을까!/결코 몰락하지 않는 것 앞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를 숨길 수 있는가?’”(단장 번호 16)이라는 단편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합니다. 그는 결코 몰락하지 않는 것이란, 달리 말하면 줄곧, 바꿔 말하면 부단히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요컨대 자연(퓌지스*)’을 가리킨다고 단언합니다.[주7]  퓌지스는 원래 나타나다[등장하다, 출현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연(퓌지스*)’ 개념 자체의 해석에 씨름합니다. 확실히 하이데거의 독해에는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압도적인 매력이 있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을까요?

[주7] [고쿠분] ハイデッガー, ヘラクレイトス」〔ハイデッガー全集第五五巻, 創文社, 九九頁 이하

   그러면 왜 이런 독해가 가능했는가? 그것은 하이데거 안에 존재자연(퓌지스*)’에 관한 강렬한 퍼스펙티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퍼스펙티브 속에 다양한 단편을 던져 넣으면, 하나의 그림이 선명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단편밖에 없는 철학자를 전체적으로 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런 독해는 실증적인 연구와는 구별해야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역시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철학의 기원을 읽으면, 가라타니 씨에게도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퍼스펙티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퍼스펙티브의 구성요소 중 하나가 이 책의 중심적 테마인 이소노미아(무지배)라는 정치체제이죠. 가라타니 씨의 강렬한 퍼스펙티브 안으로 단편이 던져 넣어졌을 때, 하이데거에 필적하는 듯한,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다른 독해가 선명한 그림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철학의 기원이라는 책의 일관성과 전체성은 여기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 이후에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그런 독해상의 사건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씨는 본서에서 철학의 기원을 이오니아에서의 이소노미아 자유롭기에 평등하다무지배의 자치적 사회 의 위기에서 찾았습니다. 현재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테네에서 시작됐고 이오니아에서는 단순히 그 싹이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됩”(철학의 기원19)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스에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거의 모두 이오니아에서 시작됐다”(20)고 하면서, 이오니아의 몰락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이소노미아의 부활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철학은 시작됐다(“이소노미아의 위기에서 철학이 시작됐다”, 49)고 적혀 있습니다.

   게다가 아테네에서 시작된 데모크라시도 이오니아에 있었던 이소노미아를 재건하려 했으나 그리 할 수 없었던 기획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오니아에 존재했던 이소노미아(무지배)는 아테네에서 지배(크라시*)’의 한 형태인 데모크라시(다수자 지배)로 변질되고, 그것과 더불어 철학의 참된 기원인 이오니아는 망각되고, 철학은 아테네에서 기원했다는 통념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죠.

   제가 하이데거에서 가라타니 씨로 단숨에 건너뛰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강렬한 퍼스펙티브를 갖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의 독해로 향함으로써, 아주 매력적인 그림을 부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가라타니 : 저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서는, 흔하게, 누구나 쓰고 있는 것밖에는 몰랐어요. 이렇게 말해도, 그것에 관해 특히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생각하게 됐던 것은 철학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제 관심은 보편종교에 있었습니다. 보편종교에서 처음으로 교환양식 D가 제시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2010년에 세계사의 구조를 다 썼을 무렵, 이른바 보편종교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교환양식 D가 제시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세계사의 구조에는 이를 위한 지면이 없었습니다. 이번의 철학의 기원에서는 거기서 쓰지 못했던 것을 썼습니다.

 

질문 : 가타라니 씨는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에서 세계사를 네 가지 교환양식, A 호혜, B 약탈과 재분배, C 상품교환, A를 고차원에서 회복한 D 등으로 설명하고, 각각이 지배적인 교환양식의 사회로서, 씨족사회(A), 국가사회(B), 근대자본제사회(C)를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D의 강박적 회귀로서 보편종교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철학의 기원D가 사실은 철학의 기원이기도 한 이소노미아라고 간주하는 거네요.

B

약탈과 재분배

(지배와 보호)

A

호혜

(증여와 답례)

C

상품교환

(화폐와 상품)

D

X

교환양식

 

 

가라타니 : 그렇습니다. 세계사의 구조에서는 보편종교를 꽤 상세하게 썼습니다. 일반적으로 철학과 종교는 별개로 나눠져 생각되어 왔습니다만, 보편종교의 경우는 그런 구별이 쉽게 성립하지 않습니다. 저는 베버의 윤리적 예언자와 모범적 예언자라는 개념을 빌려 생각했던 것인데, 윤리적 예언자는 예수나 무함마드처럼, 신의 신탁을 받고 그 의지를 고지하는 매개자가 됩니다. 반면, 모범적 예언자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붓다나 노자나 공자처럼, 모범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범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리키는 자입니다. , 모범적 예언자란 사실은 철학자 같은 자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도 예언자 같다는 겁니다. 원래는 철학자였던 것이 나중에 종교의 교조처럼 간주된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구약성서의 예언자는 신의 말을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은 무함마드처럼 신이 깃든[접신된] 말이 아닙니다. 나미키 코우이치(並木浩一)구약성서에서의 문화와 인간에서 쓰고 있는데요, 사실은 예언자의 말이란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음미한 지식을 신의 말이라고 쓴 것입니다. 여기서는 종교와 철학이 판연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사의 구조에서 제가 보편종교에 관해 썼던 것은 철학에도 들어맞을 것입니다. 보편종교가 그 기원에 있어서 교환양식 D의 차원을 개시하는 것이라면, 철학의 기원에서도 같은 것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 셈입니다.

   하지만 20111월까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서는 저도 버넷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의 이해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이데거의 논의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읽기는 했지만, 그다지 와 닿는 게 없었습니다. 다만 아까 하이데거에 관한 고쿠분 씨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 가지 생각이 드네요. 하이데거는 원래 신학과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유대·그리스도교에 의해 제시된 사항과 유사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보편종교의 문제가 다른 형태로, 즉 철학으로서 발견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자신은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죠. 저도 그것을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만일 이런 시각이 옳다면, 그것은 제가 보편종교의 문제로부터 이오니아 철학으로 향했다는 것과 어느 정도 평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20111월까지, 저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그때까지의 틀을 넘어서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령 철학자의 역사적 순서는 책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순서, 즉 그들의 구조적 연관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급격하게 보이게 됐던 것이 그 무렵으로, 인도에 2주일 정도 체류한 이후입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도가 지리적으로 이오니아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보면 그리스는 아주 멀리 느껴집니다만, 인도에서 보면 비교적 가깝죠. 인도는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와 연결이 강하고, 언어에도 페르시아어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을 제패한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원정하려 했던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거기서 문득 생각했던 것은 인도까지 찾아온 것으로 알려진 이오니아 출신의 철학자입니다. 그것은 피타고라스입니다.[주8] 일반적으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아시아, 특히 인도에서 갖고 돌아간 것이라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는, 피타고라스는 그렇게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한, 피타고라스의 수수께끼뿐 아니라, ‘초기 그리스 철학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습니다.

[주8] [편집부] BC 570년 무렵 ~ 사망년도 불명확.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수학자. 만물의 시원을 수라고 봤다. 또한 음악에서의 화음의 발견자로도 알려져 있다. 사모스 섬을 떠나 각지를 방랑한 후, 남부 이탈리아에서 피타고라스 교단을 설립하고 플라톤 등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저는 인도에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인도가 아니라 그가 젊은 시절에 머물렀던 이오니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이오니아적인 것의 부정이지만, 이오니아를 매개체로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성질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가 만물의 시원에 수를 놓은 것은 명백히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발상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정치 혹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에서 나와서 더욱이 그것들과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사상을 초래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도에서 수입한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의 생각을 그리스에 가져왔다고들 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전에 오르페우스교[주9]로서 그리스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오니아인은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오니아의 풍토에서 나온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을 말했다면, 그것을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처리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오니아의 정치(이소노미아)와 철학(자연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주9] [편집부] 고대 그리스의 밀의교密儀教, 기원전 6세기에 각지로 번졌다. 음악이나 계율에 의해 깨끗하게 정화된 혼만이 윤회전생의 고리 바깥으로 나가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제 생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주10]와 헤라클레이토스는 피타고라스에 대항하여 이오니아적인 정치와 철학을 옹호하려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심오한 해석을 부여했지만, 제게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에, 또 누구에게 대항하는지 알았을 때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피타고라스에 대항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목표였습니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 등에게서 반-소크라테스=플라톤적인 사고를 보려고 했습니다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후계자가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후계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이오니아적인 것을 회복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상가들의 관계를 보려면, 피타고라스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피타고라스를 무시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피타고라스라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 저는 그 언저리의 사상가의 관계를 일순간 알게 됐습니다(웃음).

[주10] [편집부] BC515년 무렵 ~ 사망년도 불명확. 남부 이탈리아의 엘레아 출신 철학자. 알레아파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고쿠분 : 저도 철학의 기원을 읽다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피타고라스 얘기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폴리크라테스와 함께 정치 개혁을 행하고, 그것에 좌절합니다. 그리고 사모스 섬을 떠났고, 그 후 40년 정도 방랑을 하고, 인도까지 갔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단을 만들지요.

  『철학의 기원에서는 피타고라스가 사모스 섬에서 실현하려 한 것도, 이오니아에서 상실되고 있었던 이소노미아의 회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와 폴리크라테스가 실시한 정치 개혁은 결과적으로 이소노미아와 언뜻 보면 비슷하나 실제로는 다른 데모크라시(다수자지배)’(114)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폴리크라테스는 민중 자신의 요청에 의해 민중을 지배하는 참주가 되어 버리고, 피타고라스는 그것에 절망해 사모스 섬을 떠나고, 그리고 40년의 방랑 생활과 교단 설립에 이르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의 교단에서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이 절대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은 이른바 절대적인 규율에 의해 절대적 평등을 실현한 공동체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즉, 자신을 절대선=절대악의 위치에 둠으로써 절대적 평등을 실현했습니다. 가라타니 씨는 피타고라스가 과거 실패한 정치 개혁을 교단에서 다시 하려고 했다고 적으셨는데,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의 매우 엄격한 정치적 진리군요. 민중에게 지배를 맡기는 민주제는 최종적으로 참주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동지인 폴리크라테스도 참주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민중의 요구에 의해 그렇게 됐다. 그렇다면 민중의 평등을 위해서는 절대자를 둬야 한다 .

   피타고라스는 또 이오니아의 지적 전통을 매개하면서도 이오니아 자연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관념론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퓌지스*)의 근원(아르케*)을 탐구했다는 의미에서는 이오니아적이었지만, 그것을 수학적인 관계에서 구함으로써 이오니아 자연철학에 있던 자연(퓌지스*)의 관념을 한없이 멀리하고 말았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에서도 철학에서도 이오니아에 대해 비틀린[엇나간] 관계에 있습니다. 가라타니 씨는 이것에 대해 이소노미아를 추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가장 이소노미아에 반하는 정치형태, 혹은 가장 자연철학에 반하는 철학으로 귀결됐다”(123)고 쓰셨습니다.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저는 이 책을 읽어 버렸기에 더 이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만(웃음), 피타고라스에 대한 가라타니 씨의 이 설은 역시 독창적인 것이 아닐까요?

 

가라타니 : 초기 그리스 철학이라는 것은 자료가 제대로 없으니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처럼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유리합니다만(웃음). 피타고라스의 위치가 정해지면,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뿐 아니라 플라톤의 위치도 정해집니다.

 

고쿠분 : 어떤 의미에서는 피타고라스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의 기원이라는 것이군요. 피타고라스가 감성적 세계와는 구분되며, 감성적 세계를 관장하는 수학적인 관계를 실체화하고 플라톤이 그것을 이데아론으로서 정치화(精緻化)했다고 말입니다. 반면, 이오니아 자연철학은 그런 관념적인 이중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고 가라타니 씨는 쓰고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 플라톤적인 철학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철학(필로조피아)’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앎의 방식을 앎을 사랑하는 것(필레인 토 소폰)”이라고 말합니다.[주11] 물론 하이데거에게 낭만주의적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주11] [고쿠분] 하이데거는 철학(필로소피아)’ 이전의 지적 노력을 그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필레인 토 소폰(φιλείν τό σοφόν)’이라고 부르고, 예를 들어 그 담지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아직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보다 위대한 사유자였기 때문입니다”(하이데거, 철학이란 무엇인가, 理想社, 一九頁). 또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에 따르면, ‘철학(필로스피아)’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고,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 피타고라스라고 한다

 

가라타니 : 이 책에서도 인용했지만 헤겔이 이오니아에 대해 매우 시사적인 것을 말해서 저는 사실 놀랐습니다. 헤겔은 이오니아의 아름다운 세상이 끝날 때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오니아 철학이 이오니아적 세계가 끝나고 있을 때 나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점에서 현재의 학자와는 다릅니다. 다만 그는 이오니아의 공화국”, “아름다운 세계라고 말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헤겔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것은 하이데거의 경우보다 더 모르겠네요.

   만약 한마디 해 둔다면, 저는 이 책에서 피타고라스를 비판적으로 썼지만, 최종적으로 피타고라스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피타고라스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는 궁극적으로 피타고라스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립자론의 근원적 물질은 수학적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실재한다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실증되지는 않겠죠. 왜냐하면 그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드니까요. 저는 옛날부터 말했습니다. “돈이 떨어지면 진리도 떨어진다[주12](웃음). 수학적으로 맞다면 그것은 존재한다는 생각은 피타고라스가 들여온 관념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는 다릅니다. , 이데아는 물리칠 수 있지만 수학은 쉽게 물리칠 수 없거든요.

[주12] [옮긴이] 원문은 真理이다. 일본어에서 는 돈의 경우에는 떨어지다, 끊기다 등의 의미이지만, 진리의 경우에는 (효력이) 다 하다, (의미가) 없어진다 등의 의미이다. 따라서 "돈이 떨어지면 진리도 소용없다" 정도의 의미이다

   베르그손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읽으면, 그는 그리스에서의 종교의 기원을 디오뉘소스교나 오르페우스교에서 보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닫힌 사회를 여는 특권적 개인을 그리스에서 찾으려 했지만 못했죠. 그래서 디오뉘소스교나 오르페우스교에서 그것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이고, 원래 보편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에서 보편종교의 출현을 보고 싶다면, 그것을 오히려 철학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 모범적 예언자로서의 철학자에게서 말입니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종교와 철학이라는 통속적인 구별을 넘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의 관념을 그리스에 전했다는 설은 난센스입니다. 피타고라스의 문제는 이중세계론에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윤회전생이라는 생각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붓다가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그것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윤회전생이라는 관념에서 끌어내지는 종교적·정치적 태도를 비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중세계론을 비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붓다가 비판한 것은 이중세계입니다. 붓다는 종교가가 아니라 당시의 자유사상가의 한 명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무신론자도 있고 논쟁을 했습니다. 인도에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자백가시대가 있었습니다. 붓다의 생각은 나중에 종교가 되었습니다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노자나 공자의 철학이 후에 유교나 도교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한편,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가 가져온 이중세계론에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저항했습니다. 그것은 중국과 인도의 제자백가시대와 거의 평행합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시대와도 말입니다. 종교와 철학, 아시아와 그리스 같은 구별에 기초하면, 그런 연결이 안 보이지요. 저는 이오니아에서의 사건을 바빌론에서의 사건과 비교해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동시에 중국과 인도에서의 사건을 염두에 뒀습니다.

 

고쿠분 : 철학의 기원을 이오니아에서 본다는 것도 매우 재미있지만, 이 책의 서두에서 바빌론 유수[주13]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도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바빌론 유수에서 끌려간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압도적인 문화나 종교에 에워싸여, 자신들의 종교를 재고하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엄격한 계율을 기초로 한 훗날의 유대교가 나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진정한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는 철학의 참된 기원으로서의 이오니아와 마찬가지로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주13] [옮긴이] 일본에서는 바빌론 유수(幽囚)가 아니라 捕囚라고 부른다. 포로라는 뜻도 있으나 유수를 이렇게 부른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며,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 동안의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


가라타니 : 바빌론 유수란 유대교의 역사에서 오랜 시련의 한 장면[cut]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사실은 거기서 진정으로 유대교가 시작됐다고 해야 할 사건이군요. 지금까지의 종교에서는 어떤 초월적 신도, 국가가 멸망하면 신이 패한 것이 되며, 인간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증유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을 버리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의 책임을 묻게 됐습니다. 이때 신과 인간의 관계가 반전됐다고 해도 좋습니다. , 주술적 사고에 있는 인간중심주의가 부정된 셈이죠. 그러나 바로 이로부터 유대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제사장들은 그것을 모세의 옛날에 투사하고, 그 이후의 유대인의 시련의 한 에피소드로 바빌론 유수를 보게 됐습니다. 물론 바빌론의 일을 숨기지 않습니다. 매우 중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빌론에서 일어났던 것을 감춰버립니다.

   저는 그 부분이 그리스 정치 및 철학에 있어서 이오니아의 위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바빌론 유수에 관해서도, 이오니아에 관해서도, 누구나 피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책에도 아테네 이전에 이오니아에는 고도의 경제 발전, 기술적 발전, 정치적 발전이 있다 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느새 이오니아가 펑 하고 사라지고,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성립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저로서는 이오니아는 어떻게 된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지죠(웃음). , 조금도 숨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그 때문에 가장 감춰져 있는 것이 이오니아와 바빌론인 것입니다. 늘 논하고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논하지 않았습니다.

 

고쿠분 : 마치 에드가 앨런 포우의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같아요(웃음). 숨기지 않고 거기에 뒀기 때문에,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거죠.

 

가라타니 : 바로 그런 거예요. 이런 문제에 관해 그때까지 탐정이 없었습니다(웃음). 


<계속>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사상 201412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사상의 말

타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

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2]  [3]  [4]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코이지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崎裕助)

 

1

3. 미국독립선언

자크 데리다

   * 생략 : 자크 데리다, <법의 힘>(진태원 옮김, 민음사)에 수록되어 있음. 


4. 국가창설의 퍼포머티브와 서명의 정치 : 자크 데리다의 미국독립선언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5. 입헌 민주주의의 위기와 예외상태 : 데리다, 아감벤, 벤야민, 슈미트와 유령의 회귀

사토 요시유키(佐藤嘉幸)


6. 세계의 종언 후에 : 말년의 자크 데리다의 묵시록적 어조에 관해

니시야마 유지(酉山雄二)


7. 목적론에서의 종말론의 균열

카메이 다이스케(亀井大輔)

* * *


8. 신조어, 새로운 ~주의, 포스트~주의, 기생 및 그 밖의 작은 지진현상에 관한 몇 개의 성명과 자명의 이치

자크 데리다

 

 

2

9. 베리테에서 바리테 : 라캉-데리다 논쟁을 재고하다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10 언어·표상·: 인지과학 대 탈구축

케어리 울프


11. 시간의 원물질성 : 탈구축, 진화, 사변적 유물론

Martin Hägglund


12. 그라마톨로지와 가소성可塑性

카트린 말라부

 

 

3

13. 테크놀로지와 도래할 텍스트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14. 더욱 잉여의 사랑 : 자크 데리다에 의한 에코포이에시스와 표박의 나르시시즘

リピット水田尭


15. <인터뷰> 자크 데리다 영화와 그 유령들

앙투안 드 베크, 티에리 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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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철학의 재묘再描 : 데리다/낭시, 사라지는 선()을 묘사하며

카키나미 류스케(柿並良佑)


17. <토의> 자크 데리다, 필립 라쿠 라바르트, 장 뤽 낭시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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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 일본의 사상2014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들어가며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하 미야자키’) : 올해는 자크 데리다(1930~2004)의 사후 10년이 됩니다. 돌아가신 때를 떠올려 보면, 바로 프랑스 현대사상의 마지막 거성이 졌구나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미셸 푸코(1926~84), 질 들뢰즈(1925~95),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95),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98) 같은 사람들이 죽었고, 마침내 데리다마저? 라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데리다는 죽기 직전까지도 맹렬한 속도와 밀도로 집필 활동과 발언을 계속 했습니다. 거기서 제시된 주제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본질적 물음을 데리다와 공유하고 있다는 긴장감과 기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데리다의 사망은 사유의 주춧돌을 잃어버렸다고도 느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데리다의 죽음은 현대사상 자체의 종언을 고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데리다가 사망한 후의 10년을 돌이켜보면, 세계사적 격동이 있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형태로 세계금융위기가 생긴 결과, 미국에서는 부시 시대의 단독패권주의를 대신해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일련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3년 전[2011]에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고, 그 여파로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영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격동의 배경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비롯한 미디어 상황의 대변화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사상의 장면(scene)을 보면, 프랑스현대사상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영미권의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 커졌으며, 원래 사상이라는 것이 지닌 소구력이 확산되는 듯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유 없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만큼 데리다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이를] 학분 분야를 넘어서 전개할 것인가는, 자크 데리다라는 거대한 존재를 아는 사람에게 질문되고 있는 과제입니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 서서, 오늘은 고쿠분 고이치로 씨, 니시야마 유우지 씨, 그리고 우카이 사토시 씨와 함께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1. 사후 10년을 돌이켜보기

데리다의 텍스트에 관한 상황

미야자키 : 맨 처음으로, 최근 10년의 데리다에 관한 텍스트의 상황을 개괄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본어로 데리다 수용에 관해 말하면, 정직하게 말해서 유산상속은 그다지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푸코와 들뢰즈는 번역이 거의 정비됐으나, 이에 비해 데리다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주요 저서가 있으며, 젊은 세대의 연구자도 결코 많지 않습니다. 데리다의 작업이 지닌 놀라운 범위와 다양함에 걸맞은 응답=책임을 맡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이번의 특집이 조금이라도 그 보충이 되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뤄진 작업에 한정해 데리다의 주요 저작을 꼽아보면, 드 만에 관한 장대한 논의를 포함한 파피에 머신(Papier machine)(Galilée, 2001), 노동론이 되기도 하는 응축된 대학론인 조건 없는 대학(L’université sans condition)(Galilée, 2001), 정신분석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와의 대담 도래한 세계를 위해(De quoi demain ... Dialogue)(Fayard Galiléé, 2001), 911 동시다발 테러의 여파 속에서 편찬된 위르겐 하버마스와 지오반나 보라도리와의 공저 테러 시대의 철학의 사명 [각주:1], 추도문집인 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언(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Galilée, 2003), 가장 완성된 민주주의론인 불량배들(Voyous)(Galilée, 2003) 등이 있습니다. 데리다의 최후의 발언 중 하나인 인터뷰 사는 것을 배우다, 마침내에는 나는 나 자신과 전쟁상태에 있다는 인상적인 문장이 있는데요, 마지막 4, 5년은 정말 치열하게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했던 즉흥적 대담과 인터뷰, 영화출연 등의 작업도 받아들이고, 정말로 분골쇄신으로 활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숨진 뒤에도 마치 데리다의 유령이 계속 쓰고 있는 것 마냥 저작들이 줄줄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세미나의 간행입니다. 말년의 2001년부터 03년에 행한 강의 짐승과 주권자가 총 2권으로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각주:2] 1999년부터 2001년의 사형론 강의[각주:3] 그리고 단숨에 초기로 돌아가 1964년부터 65년에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 : ENS)에서 행한 하이데거에 관한 강의 [각주:4]가 현재까지 간행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죽음의 직전까지, 40년 이상에 미치는 강의록의 출판이 계획되고 있고, 실현되면 엄청난 양이 될 것입니다.


  


   


  


 

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이하 니시야마’) : 전체 43, 총계 104천 장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미야자키 : 터무니없이 많은 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전에 출판된 저작이 얇은 것까지 포함해 7, 80권은 있으니까, 게다가 대량의 강의록까지 보태면, 도대체 누가 다 읽을 수 있겠나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웃음).

 

니시야마 : 사후 출판된 책 중에서도 세미나는 매우 중요해요. 포인트는 세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 이것은 편집자 서문에서도 말해진 바가 있습니다만 세미나에서는 데리다가 생전에 출판한 막대한 텍스트가 형태를 이뤄가는 과정, 교육을 통해 사유가 세련되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데리다에 의한 교육의 실천인 동시에, 사유의 작업 현장 자체입니다. 사후 출판이기 때문에, 편집자가 최저한도로 체크했을 뿐 저자 자신의 퇴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며, 실수도 모두 그대로 되어 있는 만큼, 더욱 그런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둘째 [말투, 어조]”을 들고 싶습니다. 강의록은 여름방학에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분명히 청중을 앞에 둔 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읽다[낭독하다]”, “논평하다”, “판서”, “번역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시도 기입되어 있고, 출판된 저작과는 다른 독특한 톤이 있습니다. 데리다는 톤이라는 것을 중요한 사상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세미나의 출판에 의해 초기, 중기, 후기 등의 단계론에 대해 재독해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1960년대까지의 초기에는 철학이나 문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있고, 70년대부터 중기에는 실험적 시도가 전개되며,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시작되는 후기에는 정치학적, 종교학적, 윤리학적인 전회가 일어났다고 말해집니다. 그러나 강의록을 보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연구자들이 나눈] 기존의 시기 구분과 관계없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단계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연속적인 산종에 의한 사상 형성의 확대가 보이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총 43권이 출판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에, 이런 전모가 분명해지려면 50년 이상이 걸릴 겁니다(웃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 이하 고쿠분’) : [그때가 되면] 오늘의 멤버는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겠죠(웃음).

 

미야자키 : 사후 출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동물론입니다. L’animal que donc je suis(Galilée, 2006)이 그것으로, “나는 동물이다로도, “내가 동물을 쫓고 있다고도 번역되는 다의적 제목입니다. [각주:5] 동시대적으로 보면, 푸코에서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에 이르는 생명정치론이나, 영미권을 중심으로 한 동물의 권리론, 동물윤리학 등과 길항하는 형태로, 데리다의 동물론이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10년을 생각할 때, 동물론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불가결한 토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데리다를 둘러싼 움직임에 눈을 돌리면, 브누와 피터스가 쓴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빼어난 평전 [각주:6]이 간행되며, 영어권을 중심으로 잡지의 특집이나 논집이 여럿 출판되는 등 다양한 반응과 반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금년[2014] 5월 말에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학회 오늘의 데리다(Derrida Today)4회 대회가 뉴욕에서 개최됩니다만, 전환점이 되는 해인지라 대규모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우카이 씨, 니시야마 씨, 그리고 제가 중개인이 되어 지난해 탈구축연구회를 발족시키고, 금년에도 심포지엄 등의 기획을 생각 중입니다(또 이런 학회나 심포지엄의 기록에 관해서는 탈구축연구회의 홈페이지[각주:7]를 참조해 주세요).

 

니시야마 : 평전에 대해서는 또 한 권, 에드워드 베어링의 청년 데리다와 프랑스 철학[각주:8]도 보태고 싶습니다. 데리다의 문서고가 일반에 공개된 것을 받아들여 쓰인 노작으로, 루이 르 그랑 학교에서의 학생시절부터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교원시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청년 데리다가 어떻게 자기[] 형성했는가를 텍스트의 변천과 지식사회의 분석으로부터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평전 등에서는 알제리 시대의 데리다의 경험과 추억으로부터, 알제리의 유대인인 자키[각주:9]가 어떻게 철학자 데리다가 됐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말년의 데리다는 무스타파 셀리프와 알제리에 관한 대화를 했습니다, [각주:10] 사후인 2006년에는 알제리국립도서관에서 심포지엄도 열렸습니다[각주:11] 지중해 남북 양안 주변이나 연안은 탈구축적인 물음 자체입니다 이 데리다의 중요한 사상적 광경임을 재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데리다를 대상으로 한 사전(事典)이 두 권 나왔으며[각주:12] 작년은 키워드북도 나왔습니다[각주:13]

   「오늘의 데리다를 말씀하셨는데, 프랑스에서도 200510월에 고등사범학교에서 데리다, 철학의 전통(Derrida, la tradition de la philosophie)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철학자가 데리다를 독해한 것으로, 데리다의 철학을 탈구축’, ‘차연’, ‘에크리튀르[기록]를 축으로 하여 철학의 전통과 대치시키는 시도였습니다. 다른 한편, 오늘의 데리다는 프랑스인이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교에서 개최됐습니다만, 어떤 프랑스인을 보고 뭘 연구하십니까?”라고 물어봤더니 나보코프” [각주:14]라고 말해서 아주 놀랐습니다. 이렇게 보면, 데리다의 사유가 계승되는 흐름이나 인맥이 영미계와 프랑스계로 나눠지는 조짐이 느껴집니다.

Derrida, la tradition de la philosophie

 

미야자키 : 적어도 사람[연구자]의 흐름에 관해서는 분단되어 있네요.

 

세대의 문제

니시야마 : 오늘은 사후 10년을 계기로 한 좌담회입니다만, 데리다 본인이 누군가의 죽음에 임해서 뭔가를 특권적으로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죠. 미야자키 씨가 말씀하신 추도문집[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언[각주:15]에도 분명히 있지만, 이것은 미국에서, 게다가 데리다 자신이 아니라 두 명의 편집자의 책임 아래서 나온 것입니다. 데리다 속에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죽어간다고 하는 목소리와 현상(원저 1967)의 테제에 의한 협박이 항상 있었습니다. 항상 이미 내가 죽어가고 있는 듯한 상태의 존재론(ontologie), 유령적인 유재론(幽在論, hantologie) [각주:16]입니다. 이것을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나의 죽음’, 레비나스의 타자의 죽음’, 그리고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라는 세 종류의 근본적 경험으로부터 불가능한 것이라는 형태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데리다만의 물음입니다만, “사후라는 표현과 계기는 이미 이런 사상적 과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고쿠분 : 오늘의 멤버 중에서는 [제가] 데리다에 관해 가장 초보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입장에서 말씀 드리면, 저는 옛날의 데리다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은 것을 조금 어렵게 말하고 말장난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재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EHSS)에서 했던 데리다의 강의에 참석해보니, 제가 생각했던 사람과는 전혀 달랐어요. 하이데거라든가 칼 슈미트 등에 점점 파고들어가면서, 아주 호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청중을 웃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제가 처음에 갖고 있던 데리다의 이미지는 단순히 일부의 데리다 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잔하고 신비적이며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깨질 것 같은 이미지더군요. 생각하면, 데리다뿐 아니라 프랑스 현대사상은, 특히 1960년대에는 신비적인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인상에 남은 것은 현대사상의 특집 미번역 북가이드 : 현대사상 22(19864월호)입니다.

 

미야자키 : 그랬군요.

 

고쿠분 : 마치 외래품의 이미지입니다. 아직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훌륭한 보물이 이역만리 땅에 있다는 이미지 말입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거꾸로 사상에 끌려들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때에 데리다 본인을 만났던 것은 매우 행운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놀란 것은 데리다가 논의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장난을 하면서 까다로운 말을 하잖아요. 매우 어려워서 간단하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든 알기 쉽게 하려고 고심하면서 자세하게 논의를 해부하여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말장난으로 보이는 것은, 거기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란 말인가!”라고 감격했으며, 데리다의 강의를 들은 것은 제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말하기 방식이나 쓰기 방식을 다시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고바야시 야스오(小林康夫) 선생에게 이런 발표에서 자네는 데리다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게 없군이라고 말씀하시며 혼내셨던 것도 있고(웃음), 제 자신은 데리다를 기준으로 하여 단련되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제가 데리다의 강의를 청강했던 것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즉 그의 마지막 4년 동안입니다. 사형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했듯이, 아주 자극적이었습니다만, 한 가지 깨닫게 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데리다 속에서 언어라는 문제가 뒤로 물려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데리다라는 것은 뭐니 해도 언어의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역사가 데리다의 사상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크리튀르라는 것은 물론 언어와 관련된 것이지만, 원래 역사의 담지자이기도 하잖아요. 데리다는 에크리튀르라는 토픽을 통해 언어를, 따라서 역사를 계속 물었습니다.

   최근에야 [일본어] 번역이 나온 철학의 여백(원저 1972)이라는 중기의 작업 등을 읽으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현 상태를 다시 보면, 데리다 자신의 강의에서 언어의 문제가 후퇴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인문 지식이 어딘가 언어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1960년대부터 70년대는 누구나 소쉬르를 읽었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한 과거의 열광적인 관심도 그것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1990년대 중반에 학생시절을 보냈는데, 그 무렵에도 아직 언어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저하게 후퇴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면, 최근 10년 동안에, 적어도 일본에서는 그다지 데리다의 이름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어역사에 대한 관심의 저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오늘날, 일본에서 함부로 역사, 역사 라고 말합니다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 ‘언어역사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절대적인 조건이 지금 제대로 따져 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한 것의 의의를 알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바로 그렇기에 저는 데리다에게서 언어의 문제, 따라서 역사의 문제를 다시금 강조하고 싶네요.

 

우카이 사토시(鵜飼哲, 이하 우카이’) : 고쿠분 씨가 말씀하신 것에 저도 찬성으로, 데리다는 처음부터 역사의 물음에 천착했습니다. 후설에 관해서도 생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앞서 소개된 1964~65년의 강의도 하이데거 : 존재의 물음과 역사라는 제목입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제는 냉전의 종언 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영향도 있어서, 당시 이미 한창 논의되었습니다. 데리다에게서는 다른 역사의 사고를 어떻게 열 것이냐가 첫 번째에 놓인 물음으로, 그라마톨로지에 관해(원저는 1969)도 그 문제의식 속에서 가다듬어졌다고 말할 수 있죠.

  

 

미야자키 : 확실히 생명정치나 영미계의 문제의식에서 보면, 언어의 문제를 중심으로 파악한 데리다는 텍스트주의적 혹은 문헌[]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최근 카바이예스를 중심으로 프랑스 인식론(epistemologie)의 빼어난 연구를 하고 있는 곤도 가즈노리(近藤和敬) 씨가 데리다를 필두로 하는 프랑스 현대사상에는 명작을 감상하는 듯한 태도가 근본에 있다고 쓰고 있고(문제-인식론과 물음-존재론 : 들뢰즈에서 메이야수, 데란다로),[각주:17] 자신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텍스트를 읽는다라는 것이 그렇게 비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것의 다층성이 간과되고, 국어시간에 독서 감상문을 쓸 때와 같은 어휘로 회피되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보는 방식이 완전히 변해버렸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니시야마 : 고쿠분 씨가 말씀하신 세대 경험은 매우 중요하고, 키워드는 신비성언어의 놀이[게임]’가 아닐까요. 신비성에 관해서는, 들뢰즈의 철학 등의 긍정성과의 대비도 있고, 부정신학이라는 문제가 유포되어 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부정신학이라고 하면, 사유의 몽매주의적이지 않은 어색함을 이끄는 것으로, 그것을 회피하고 긍정적이고 내재적인 사유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다만, 데리다 자신, 부정신학에는 아주 주의 깊게, 부정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근원성과 복수성을 고찰했던 것도 있습니다(이름을 구하다 : 부정신학에 관한 복수의 목소리).[각주:18] 언어의 놀이에 관해서는 말의 다의성이나 조어가 많이 사용되는 데리다의 텍스트가 일본어에 다양한 부하를 거는 형태로 번역되고 있으며, 그 복잡함에 대한 피로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물의 데리다를 보고 몽매함이 깨졌다는 고쿠분 씨의 증언은 사실 납득이 가는 것으로, 제 자신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습니다. 데리다의 세미나는 독특하고, 결코 언어의 놀이에 의한 텍스트주의라고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간행된 세미나의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교육자 데리다 특유의 명쾌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들려줄 작정입니다. 우리는 살아생전의 데리다에게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서, 살아생전의 데리다를 모르고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만 출발하는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합니다. 이 때문에라도 이 신비성언어의 놀이라는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해결하는 작업을 연구교육번역의 면에서 전개하고 싶습니다.

 

데리다와의 기억

우카이 : 저는 데리다와 개인적으로 꽤 오랫동안 교류가 있어서, 우선 말년의 일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1980년대의 일본에서 온 유학생 가운데 데리다와 직접 관련을 맺은 그룹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으로, 데리다의 집에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망하기 두 달 전, 20048월에도 그의 집에서 만났으며, 이후에도 두 차례 전화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데리다가 사망한 것은 109일이었습니다만, 설마 그렇게 일찍이 [사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항암제 치료제로 식욕은 떨어져 있었지만, 검사 수치는 변함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8월 말부터 9월 초에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콜로퀴를 위해 마지막 강연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만류했지만, 그는 이 콜로퀴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취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는데요, 데리다는 취소를 하지 않는 사람이죠. 그것은 병을 얻고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 전에도 종교에 대한 심포지엄 때문에 질 아니자르(Gil Anidjar),[각주:19] 하셈 포다(Hashem Foda)와 함께 미국의 서해안으로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않은 것은 원래 블랙팬더로, 경찰 살해 혐의로 미국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현재에는 종신형으로 감형됐습니다만 흑인 저널리스트 무미아 아부-자말(Mumia Abu-Jamal)을 방문하는 계획입니다. 데리다가 국제적인 사형폐지 운동에 거의 활동가라고 말해도 좋을 자세로 관여했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한 마디 해두고 싶습니다.

   여기서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에 데리다를 선택한다는 것이, 어디서부터 어떤 동기로 생겨났는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오직 들뢰즈만 유행한다고들 하지만, 제 감각으로 말하면 항상 들뢰즈가 주류였습니다. 특히 제가 있는 교토대학교에서는 학년 위에도 아래에도 우수하고 개성적인 들뢰지안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다. “왜 너는 데리다인 거야라는 얘기를 듣는 환경에 처음부터 몸담고 있었기에, 데리다가 인기가 없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상한 것도 없고, 그의 작업은 항상 일종의 떠맡게 된 주변부성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데리다의 텍스트는 [궁합이 맞는] 사람을 고른다는 게 있기에, 제 자신은 이른바 유행과는 무관한 곳에서 부합한다고 느낍니다.

   1930년대 생인 데리다는 사르트르 이후의 사상가 가운데서는 이른바 막내입니다. 한편, 1940년대 생의 후속 인물들과는 전쟁 경험도 포함해 큰 세대적 단절이 있습니다. 데리다에게는 모종의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으며, 형인 르네 데리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대립했으며, 르네는 유대계의 잡지에 친이스라엘적인 투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피터스의 평전에는 어린 시절부터 형이 정치적으로 우파의 입장에 서 있어서 동생과 사사건건 부딪쳤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떤 영화작품에서 형은, “우리 집에는 별로 책도 없었는데 동생의 정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각주:20] 가정환경이나 상징자본이라는 면에서 보면, 데리다라는 존재는 돌연변이라는 거죠. 미야자키 씨가 프랑스 현대사상 최후의 거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확실히 데리다는 동생적 존재로, 가장 나중에 외래자로서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까 고쿠분 씨가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의 구조주의를 중심으로 한 전개입니다. 저는 포스트구조주의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베어링의 평전에서는 데리다의 초기 발상이 오히려 포스트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합니다. 즉흥적인 말씀처럼 느껴지는 바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자료를 본 뒤에 선택된 이 말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고쿠분 씨나 미야자키 씨가 거론하신 데리다에게 있어서의 키에르케고르적인 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제와도 관여하고 있습니다[각주:21] 푸코론인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에크리튀르와 차이, 원저 1967년에 수록)에도 제사[銘句]로서 키에르케고르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언어의 문제는 당연히 번역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게 그 커다란 계기는 1983년에 데리다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강연 중 하나가 바벨의 탑(타자의 언어 : 데리다의 일본 강연[각주:22]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우리 세대에게는 이 논문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언어론 일반에서 번역론으로의 이동(shift)은 언어의 복수성을 처음부터 그 안에 담고 있는 사유를 요청합니다. 그것은 단일하다고 간주되는 언어의 내적복수성의 물음에도 열려 있습니다.

   나중에 데리다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작업을 하게 됐는데, 번역의 사상가의 텍스트를 번역하고 있다는 긴장감은 [지금도] 항상 [갖고] 있습니다. 제 자신의 작업으로서 데리다를 참조하면서 번역론을 축으로 벤야민을 수용했던 것도 같은 무렵입니다. 하나의 텍스트는 복수의 언어로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데리다가 드 만에 대한 추도문 속에 부여한 탈구축의 정의가 하나 이상의 말(plus d’une langue)”라는 것이었다는 것으로도 연결됩니다[각주:23] 현대의 문화상황에서는 한 언어로 써져 있는 것을 한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투명성에 대한 지향이 회귀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데리다만이 아니라 크레올(Créole, 크리올) 문학처럼, 원래 복수의 언어로 써 있는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다는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안고 있는 작업이 경원시되고 있습니다. 그런 경향이 데리다를 읽기 어렵게 느끼게 하며, 번역론이라는 회전(curve)을 거친 후의 언어론을 성가시게 느껴지게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계속)

  1. [옮긴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손월성, 김은주, 김준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본문으로]
  2. Séminaire : La bête e le souverain, 2. vol. édition établie par Michel Lisse, Marie-Louise Mallet et Cinette Michard, Galilée, 2008-10. [본문으로]
  3. Séminaire : La peine de mort, édition établie par Geoffrey Bennington, Marc Crépon et Thomas Dutoit, tome I (1999-2000), Galilée, 2012. [본문으로]
  4. Heidegger : la question de l’Êtat et l’Histoire. Cours de l’ENS-Un (1964-1965), édition établie par Thomas Dutoit avec la collaboration de Marguerite Derrida, Galilée, 2013. [본문으로]
  5. [옮긴이] 자크 데리다,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계속)」, 『문화과학』, 76호, 299-378쪽. 뒤의 ‘동물론’ 관련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판본에 차이가 있다. [본문으로]
  6. Benoît Peeters, Derrida, Flammarion, 2010. [본문으로]
  7. http://www.comp.tmu.ac.jp/decon [본문으로]
  8. Edward Baring, The Young Derrida and French Philosophy, 1945-15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본문으로]
  9. [옮긴이] 자크가 아니라 자키로 불렸다. [본문으로]
  10. Jacques Derrida et Mustapha Chérif, Islam et l’Occcident : Rencontre avec Jacques Derrida, Odile Jacob, 2006. [본문으로]
  11. Derrida à Alger : un regard sur le monde, sous la direction de Mustapha Chérif, Actes Sud, 2008. [본문으로]
  12. Niall Lucy, A Derrida Dictionary, Blackwell, 2004 ; Simon Morgan Wortham, The Derrida Dictionary, Continuum, 2010. [본문으로]
  13. Maria-Daniella Dick and Julian Wolfreys, The Derrida Wordbook,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3. [본문으로]
  14. [옮긴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 소설가. [본문으로]
  15. Jacques Derrida,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Textes présentés par Pascale-Anne Brault et Michael Nass, Galilée, 2003. [본문으로]
  16. [옮긴이] 일본에서는 빙재론 유재론 등으로 불리고 '유령론'으로 불린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처럼 유령론이라고 하게 되면 '존재'와 관련된 어감이 사라지는 문제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유령론'이라고 쓰고 원어를 병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본문으로]
  17. 近藤和敬, 「問題i認識論と問い存在論──ドゥルーズからメイヤスー、デランダヘ)」, 『現代思想』, 2014년 1월호. [본문으로]
  18. Jacques Derrida, Sauf le nom, Galilée, 1993. [본문으로]
  19. [옮긴이] 질 아니자르는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Routledge, 2002의 영어판 편집자이자 서문을 썼다. [본문으로]
  20. Derrida. directed by Kriby Dick and Amy Ziering Kofman, Zeitgeist Films, 2004. [본문으로]
  21. 특집 「キルケゴール」, 『現代思想』, 2014년 2월호. [본문으로]
  22. 「バベルの塔」, 『他者の言語──デリダの日本講演』, 高橋允紹 編訳, 法政大学出版局, 1989년 수록. [본문으로]
  23. Jacques Derrida, Mémoires : pour de Paul de Man, Galilée, 1988.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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