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3/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를 살면서

우츠미 그런데 치바 씨는 들뢰즈의 흄론에 주목하셨네요그리고 흄철학에서 절단의 계기를 끄집어내고들뢰즈에게서 생기론이나 잠재성의 파시즘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찾아냈다.

 

치바 그렇습니다모종의 픽션론으로서의 흄론이었습니다.

 

우츠미 흄은 낱개의[개개별별의] 세계를 연합에 의해 묶으려고[통합·정리하려고] 했습니다만그 통합정리할 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치바 씨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거론한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흄의 경우, 파트그래피컬[パトグラフィカル, 바이오그래피컬의 오식인 듯. 즉, 전기적인]한 얘기인데요, 18세부터 23세까지 꽤 힘겨운 우울 상태에 있었고어쩌면 이인증(離人症)을 경험했습니다이인증에서는 사물을 서로 이어주는 아교랄까치바 씨의 말로는 ’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그것이 흄의 어소시에이션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일단 아이러니적인 파괴를 경험한 곳에서부터 턴(turn)해온다유머적인 턴(turn)이랄까대타자 또는 초월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은 통합·결말[まとまり]마조히즘에 있어서의 억압을 변형하는 듯한 턴(turn)입니다그 언저리의 모습이살아가는 지혜랄까경험론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만.

 

치바 제 말투에서 유머를 흄의 맥락으로 연결한다면어떤 우연적으로 생겨난 연합을그렇게 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그 정의나 시스템을 묻겠다고 생각한다면근거는 없습니다어떤 우연의 마주침즉 최초의 자체성애적인 것이 생길 때의 외부와의 마주침의 우연성 같은 것으로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을 떠맡고우연히 뭔가와 뭔가가 서로 달라붙게 됐을 때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다른 것이 또한 달라붙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한다모든 것은 근가가 없다고 하는 곳으로 향해서 비판을 캐고 들어가는 아이러니만을 하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며모든 것이 붕괴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유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츠미 초월론적인 타자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후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네요.

 

마츠모토 : ‘일단은’ 식으로.

 

치바 그렇죠저는 어드혹(ad hoc)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생각해보면제가 전에 기고한 트랜스어딕션 동물-성의 생성변화(トランスアディクション───動物-生成変化(現代思想特集=人間/動物分割線, 2009年 7月号)와도 공명하네요. S1을 되풀이하는 것은 중독적이라고 밀러는 말하고 있으니까요제가 생각한 어딕션(addiction)도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특이적인 증상이며또한 크리에이션(creation)과 결부된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얘기로 말하면, S1이 몸을 옥죄어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변형하여 다른 크리에이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을 트랜스어딕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츠미 단독의 S1에는 그런 어딕션적·에크리튀르적인 측면과 더불어그런 단순한 외침으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외침은 마츠모토 씨의 논의에서 원-상징계의 + - + - … 라는 곳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거기에서 상징적인 심급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 “이 칭얼거림[외침]은 이런 의미예요라고 어머니가 유닛(unit)화한다. “배가 고프구나라고어머니도 칭얼거림이 매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그런 감각적인 차이에 배가 고프다라는 상징적 유닛을 덧씌운다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칭얼거림이 배가 고프다가 된다그러나 자폐증의 경우는 그런 응답이 없기에칭얼거림인 채인 것입니다.

 

마츠모토 그래서 늑대!”, “늑대!”라고 외칠 뿐이다.

 

치바 그리고 똑같은 그 외침이 온갖 것에 적용 가능해진다면.

 

우츠미 자폐증의 언어적인 측면은 매우 다양하네요.

 

마츠모토 정형발달처럼 S1과 S2가 연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자폐증자에게는 하나뿐인 S1과 알고리즘적인 S2가 존재하며그 양자 사이에서 이러저러한 언어의 병리가 생겨나는 거죠그것은 거꾸로 정형발달이 무엇인지를 겉으로 드러내는[해명하는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되죠.

     조금 전 치바 씨의 트랜스어딕션” 말씀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요인프라크리틱 서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思想地図β』, vol. 1, 2011)에서는 장애를 짊어지게 된 후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썼습니다그 논의는 S1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치바 역시그곳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통할지도 모르겠네요그곳은 말라부에게서 얻은 발상입니다만.

 

마츠모토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S1에서 다른 것이 발생한다는 느낌이겠죠아니면 S1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고쳐 써진다는 것일까요?

 

치바 그런 식으로 연결한다면, S1의 변형을 생각했던 게 되겠죠말라부를 좇아 말한다면데리다적인 똑같은 흔적의 이전(移転)오배송[誤配] 모델이 아니고흔적 그 자체가 변형되어 버렸다는 그녀의 모델을 구별하지요그리고 원래 S1을 복수 갖고 있거나, S1을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도제 테마입니다마츠모도 씨의 논의에서도라캉과 가타리의 대비에서특이성을 단수적으로 생각하는가 복수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갈림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네요제가 여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라캉에게는 S1이라는 말을 ‘essaim(무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말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하나이면서도 거기에는 뭔가 무리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마츠모토 : ‘essaim’이 라캉파 에서 사용되는 경우기본적으로는 스키조프레니인 자의 언어사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말 하나하나가 현실계의 수준에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서 서로 분절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언어의 병리의 행방言語病理行方『유이티카ユリイカ, 2012年 9月号)에 적은 사례인데요제가 전에 본 사춘기 유형의 환자로환청을 호소했습니다그 사람은 어느 날, “소리를 질러서[말을 걸어서] 잡아주세요[をかけられたのでってくださ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걸다[かける]라는 말이, “물을 뒤집어썼으니까 닦아줘[をかけられたからいてくれ]라고 할 때의 걸다[かける]라는 뉘앙스가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리는[かけられる]’ 것이었을 터인 목소리라는 말이 현실계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고물질화되는 언어사용이 모든 곳에서 이뤄지고메타포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시니피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バラバラになり]그것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정신분열증의 정신병리로 말하면아마 콘크리티즘concretism(구상화 경향具象化傾向)이 될 것입니다.

     다만처음에 언어가 들어올 때하나의 언어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밀러조차, ‘essaim’에 관해서클로스프스키=니체적인 주체의 동일성의 산란散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치바 과연 그렇군요복수의 언어가 상처로서이른바 폴리트라우마틱’[polytraumatic]한 형태에서 들어온다인프라크리틱(infracritique) 서설」 무렵저는 폴리트라우마티즘과 모노트라우마티즘이라는 대비를 했고, 50년대의 라캉은 전형적으로는 모노트라우마틱한 이론으로서 수용됐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들뢰즈=가타리특히 가타리는폴리트라우마티즘을 도입했다는 것이 제 견해였습니다.

 

마츠모토 그것은 재미있네요라캉은 1974년에 외상(traumatisme)을 구멍-외상(trou-matisme)’이라고 말합니다불가능한 것즉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로서의 외상은 구멍이라고 말이죠그러면 언어의 도입에 의해 구멍이 몇 개 비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들뢰즈=가타리의 라캉 비판에 연결하면외상은 사실 다공적[구멍이 여럿]이고 이러저러한 곳에서 누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 씨는 존재론적우편적(存在論的郵便的)(新潮社, 1998)에서 불가능한 것은 부정신학에서처럼 하나인가아니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그 뒤에 나온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씨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抵抗)(青土社, 2000)각주에서 히로키 씨의 논의를 다루었습니다라캉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을 통해 불가능한 것과 하나[한 가지] 만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라고 해도동시에 불가능한 것은 복수적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각 주체는 각각에 있어서 상이한특이적인 정신분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신분석이라는 리미트(limit, 극한속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하나이게 되지만다른 한편 가타리는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며시니피앙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대립은정신분석과 스키조분석의 양자에 있어서의 임상의 장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개인의 정신분석이라면 역시 시니피앙의 주체를 원칙으로서 다루기 때문에구멍=불가능한 것은 하나가 되는 셈이지만라 보르도 병원처럼 집단적 실천에서 하면 복수가 된다.

 

치바 제 논의라면한 개인 속에 복수의 구멍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집착하는데요그렇기에 해리(解離)나 다중인격을 문제 삼았던 것이죠.

      90년대 말 경은페르소나의 다중성이 인터넷이나 버추얼한 것의 등장으로 강하게 의식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 씨의 복수성에 대한 논의도멀티레이어(multi-layer)한 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죠저도 그 시기에 청춘기를 보냈기에그런 감각을 어떻게 이론과 결부시키면 좋을까줄곧 생각했습니다.

 

우츠미 우리는 본래 이디어트(idiot, 백치) 같은 것이며거기에 조금만 공약 가능한 곳이 있다는 거죠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처럼 관찰해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같은 매우 기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He war”가 아니라 “Ich denke” 같은 녀석이항상 가만히 들러붙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오히려 그것들이 불가사의랄까어째서 그럴게 될까그런 의미에서의 일자여라”, “개체여라는 명령법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지만향후 그것이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치바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오늘의 일련의 화제는 특이성단독성각각의 별개[それぞれパラバラ]라는 방향을 향합니다만굳이 나쁘게 말한다면결국 사람 각각이라는 얘기가 되며그것은 이론적 퇴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만일 이론에 재미가 있다면다소 폭력적이라고 할지라도복수의 것에 걸친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곳에 있으며결국 임상의 현장에서 개개의 것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면이론의 [종언]이 아닌가라고 말이죠마츠모토 씨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마츠모토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싱귤라리티이다라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결론이 되면이론은 죽어버립니다라캉이 목표로 한 것은자기 자신의 분석에서 얻어진 싱귤라리티가 있다며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점입니다분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싱귤라리티에 도달한 곳으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가다듬어 내어야 합니다그것이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가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분석가마다 주목의 중점이 다르다는 거네요그것은 분석가 자신의 생톰의 반영이며그것을 밑천으로 클라이언트와 관계함으로써변화를 야기한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좀 더 근원적으로는학파 속에서 다른 분석가와 공유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다른 분석가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가를 차례로 산출한다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분석가는 다시 새롭게 자신의 특이성과 만나서 정신분석 이론을 갱신한다이른바 영구혁명입니다.

 

치바 그래서 궁금한데요각각의 분석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다른 분석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와 마주대하려고 하며그 다른 방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요?

 

마츠모토 예를 들면라캉의 단시간 세션은그가 특이적으로 발견한 방식이죠.

 

치바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장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츠모토 : 24시간 내구(耐久) 정신분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분석가도 있을지 모르죠(웃음).

 

치바 그래서 효과를 올리도록 별난 분석가가 나와도 원리적으로는 더 좋다고.

 

우츠미 치바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치바 씨가 부분대상과 팔루스적 대상 사이에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전체화하지 않는 정리[모둠]를 놓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습니다한쪽에 부분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있고다른 한쪽에 팔루스적인 대상으로서의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며그 중간에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저는 팔루스적 전체성과 전체 대상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클라인이 말하는 부분대상은 오히려 기관 없는 신체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치바 지금의 3항도식에서는클라인의 부분대상은팔루스적 통일과 전체화하지 않은 정리[모둠] 둘 다를 거듭[중첩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저의 해석입니다.

 

우츠미 아까 말한 아이러니적 잠재성과 분화·현동성의 중간에 유모적 개체화가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치바 글쎄요그것을 저는 특히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상상적인 것혹은 요도[尿道]적인 것을 넣는 곳이 급소라고 하죠이 구도는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그리고 치료가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이냐 하면각각의 별개バラバラ의 단편으로부터 자그마한 [turn, 선회]을 만드는버추얼리티 쪽으로 확산하면서도, [갔던 길을] 약간 되짚어와서 기관 없는 신체 쪽으로 간다아마 여기에 싱귤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흄도 데카르트도 비슷한 것을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흄의 경우이인증(離人症)적으로 각각의 별개가 된[산산조각 난] 단편을 어소시에이트[associate, 연합]합니다만그렇다고 강력한 자기는 만들지 않는다일단 다발 같은 자신으로 좋다고 한다데카르트가 과장적인 회의를 하는 곳은 급진적인 사디즘이죠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고어느 정도의 네거티비티[부정성]을 견딜 수 있는가그 위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 아래에서마지막으로 잠깐 그래도 생각하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turn, 선회]한다. “코기토” 등이라고 잘난 체 하는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그저 자그마한잠깐 동안 생각한다는 형식뿐으로아무런 내실도 갖지 못하는미결정의 중지[허공에 붕 떠있는 것]로서 코기토가 산출된다마지막은 신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증명하고 보증인으로 합니다만그것은 그가 정말로 했는가 여부는 의문입니다.

 

치바 그렇게 하면-코기토-회의(악령)상징-상상-현실이라는 3항도식을 할 수 있다.

 

우츠미 그렇네요흄의 경우는 공간이 단편화하는 반면데카르트의 경우는악령이 시간적으로 절단하는 건데요이런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turn, 선회]한다는 도식이 임상적으로도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바 단편화를 거쳐서가까스로 정리[모둠, 종합]로 돌아간다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고 저라면 말할 것제 논의의 경우그 차원은 특히 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판타슴이죠라캉파에서는판타슴의 횡단이라는 논의가 될까요?

 

마츠모토 판타슴의 횡단의 경우는모든 상징체계의 폐절까지를 지향하는 아이러니이죠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한.

 

치바 그래도 뭔가가 남죠?

 

마츠모토 외상적인 핵이 남는다그 잔여를 꺼내기 위해라캉은 생톰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우츠미 씨가 지금 말했듯이조금 돌아온다고 할까당분간의 정리[모둠, 통일]를 만든다고 할까.

 

우츠미 생톰 그 자체가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는 논의가 아닙니까?

 

마츠모토 콩시스탕스[consistance]의 이마지네르(imaginaire)라는 논의이죠(フィリップ・ジュリアンラカンフロイトへの回帰誠信書房). 밀러는 타투나 피어스로 무너지고 있는 신체의 고리를 지탱해도 되잖아라고도 말합니다.

 

우츠미 들뢰즈에게 공백의 [바둑판] 칸(case vide)”이라는 개념이 있죠단적으로 말하면상상력은 빈 그릇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습니다제가 자주 드는 사례로, “나는 퍼즐에 비유하면 빈 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혹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포화되어 버린다는 것 같습니다이것이 자폐증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상상의 부자유의 원형입니다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었고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만이번에는 정형자의 얄팍한 세계いい加減世界에 들어가는 것의 고통이 있다후설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그는 이 방의 건너편この部屋こう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혹은 자신에게는 등이 없다がない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혹은 집들의 건너편에 사람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든가.

    이른바 장애의 세 쌍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상상력의 장애는 매우 조잡한 취급방식을 하고 있습니다수집벽이나 철도 마니아 등흥미 관심의 폭이 좁다든가곧바로 그런 얘기가 되어버립니다그런 게 아니라경험 속에 빈 눈금을 어떻게 만들까이렇게 그들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마츠모토 빈 칸이 있어서 처음으로 전개되는 유형의 공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우츠미 다른 식으로 공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당사자인 후지이 히로코(藤家寛子) 씨는분명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이는 수많은 집의 각각에 가정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썼네요집이 일 뿐이고그 속에는 가정이 있고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공상이 미치는 공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우츠미 그것을 가진다고 포지티브하게 파악되지 않을까요정형으로 이끌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작업이 아니니까.

 

마츠모토 공상하는 공백의 칸이 없는 대신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우츠미 후설의 현상학도 하나의 예일 수 있죠가령 타인의 마음도 지금 보이고 있는 세계의 건너편이니까그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것은 아닌 겁니다.

 

치바 얼마나 그것이 임시로 마련된 것인가에 대한 이론 구성이 되는 거네요.

 

우츠미 또 한 명을 거론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일까요그의 논리철학논고는 명제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도중에논리에서 윤리로 문제가 이행합니다이 전회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하여다시금 개체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관은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하듯이한계라는 막간隙間가까스로 자신의 장소가 확보되고 있습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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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2/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S1또는 S1뿐인 세계

치바 그런데 초보적으로 투박하게 여쭈는데요자체성애가 처음 생길 때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언어 체험이 충격(shock)적으로 도입되고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라는 것으로원래 갖고 있던 유전적기질적 경향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의 특이성의 조합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건가요모든 것을 특이성에 기초해 말씀하신 거라면유소년기에 특수한 외적 사태가 있었다고 하신 것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요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질이 다르다는 얘기에도 가깝다고 느껴지네요.

 

마츠모토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꽤 가까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에서도라의 기침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에서의 향락의 체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시니피앙의 수준에서 증상을 해석하면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그러면 도라가 유년기부터 고무젖꼭지만 빨고 있었다는 등 신체의 소인(素因)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이런 소인(素因)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고 있으며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유전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소질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거꾸로 말하면거기까지 다다르지 않으면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치바 정신분석은 기질성이 아니라 심인성의 영역 안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가라는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그러나 그것으로는 너무 단순하죠라캉의 경우는 끝이 있는 분석을 믿었는데요왜 끝이 있냐 하면낫지 않고 제거할 수 없는 증상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대충 말하면기질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계면界面으로서 있는움직이기 힘든 부분에 부딪칠 때까지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만거기에 부딪침으로써정신분석의 한계이며또한 신체의 의학과 어울리는 듯한 장면이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는 것일 테죠.

 

마츠모토 그곳이 바로 라캉이 프로이트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입니다프로이트의 경우끝이 없는 분석에 왜 끝이 없냐 하면거세 콤플렉스와 페니스 선망이라는 벽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팔루스의 존재/부재에 대해 구축된 콤플렉스라는 곳에서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다른 한편라캉의 경우는 그것을 뚫고 나온 분석을 목표로 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거기에서 프로이트로부터 라캉에게로라는 정신분석의 갱신 또는 재정의를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아까 치바 씨의 물음에 대해서인데요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애당초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폐증의 정신병리의 기본입니다반응은 일어나지만 응답은 없다타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해오는 지향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시선이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처음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서 이비인후과로 데려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마츠모토 씨라고 부르면 마츠모토 씨는 이쪽을 봅니다만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혹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는 거의 자발적 운동을 할 수 없지만그래도 부모가 품에 안으면 그것에 맞춰서 몸의 자세를 취합니다그런데 자폐증 아이를 품에 안으면곡물이 든 배낭을 안고 있는 것처럼 너무 무겁습니다그렇게 품에 안는 것에 포함되는 지향성에 대해서도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반응성의 결여가 자폐성의 핵심 특징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품에 안는 것에 대한 응답은 꽤 이른 단계부터 느껴집니다만눈빛이나 호명에 대한 응답은대부분 9개월부터 시작됩니다시선이 맞으면 수줍은 듯이 낯가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이것이 자기라는 것의 밑바탕[元基] 같은 것입니다그 이전에는전반적인 짜임새가 없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마츠모토 씨의 얘기와 관련되는 것은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의 맨 처음에서 -상징계에 대해 논한 대목입니다그곳에서는 부분대상과 전체대상이 전적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데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라캉적으로는부분대상은 현실적[실재적]인 것인 반면전체대상은 팔루스적인 다발[묶음]에 의해 만들어져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클라인파는 발달사적으로 보면우선 부분대상이 있고그것이 통합되어 전체대상이 된다고 해설합니다만그것은 전혀 얘기가 다릅니다부분대상은 전체대상이라는 관점이 있고서야 비로소 소급해서 나오는 것입니다전체대상은시선이 마주치거나 부름에 반응하는 등의 상징적인 개체화로의 힘이 걸리는 9개월만에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차원의 것입니다부분대상은 이런 상징적인 것의 설정의 피안에 있습니다.

    자폐아의 행동에서부분대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은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그들이 뭔가를 갖고서 놀고 있는데그걸 집어들어 방해했다고 칩시다보통의 아이라면방해한 상대로 향합니다만자폐아는 방해를 하는 손으로만 향합니다혹은 카나의 논문의 있는 사례인데요바늘로 찌르면찌른 상대가 아니라 바늘 자체를 두려워한다이처럼 자폐아는 단편적 세계 속에 있으며그것을 자체성애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츠모토 부분대상만이 있고전체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일어서지 않는다는 거죠.

 

우츠미 그렇게 되면다음으로 S2 없는 S1의 신분이 문제가 됩니다. S1은 S2가 있어서 사후적으로 설정되는 것입니다만, S1밖에 없을 때그 양태는 어떻게 될까요?

 

마츠모토 얼마전 한밤중에 NHK 방송을 봤다면아르 브루트(Art Brut, 아웃사이더 아트)의 특집을 했습니다그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시설에 있는 분으로해외에서도 개인전을 열게 된 시바타 에이이치(柴田鋭一) 씨라는 분의 작품을 소개했는데요그 분은 처음 무렵에는, ‘2’와 ‘3’만을 오로지 반복해서 캔버스에 그렸어요그것이 대단한 작품이 되었습니다오랫동안 ‘2’와 ‘3’을 반복했는데요그 후에 비누[石鹸세켄]의 []’”라는 문자만 줄곧 그리게 됩니다그것이 해외에서 받아들여져 개인전까지도 열게 됐다고 합니다이 경우, ‘2’와 ‘3’, ‘[]’ 같은 문자가 S1입니다이런 문자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본인도 자폐적이며 중독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극치인 것은반복하고 있는 []’라는 글자가 다름 아닌 비누[세켄]의 []’”라는 것입니다본인은 단순히 []’라고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이 []’는 예를 들어 세계[세카이]’나 석유[세키유]’ 등으로 분절화되는 세[]’가 아니라항상 비누[세켄]의 []’” 그 자체이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치바 문맥 형성을 하지 않는 문자로서의 문자.

 

마츠모토 바로 레트르(lettre)’네요그런 자체성애적인 것의 향락성의 제시와 에크리튀르 사이의 관계를라캉은 조이스론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마츠모토 씨는 에릭 로랑이 언급한 로신느 르포르Rosine Lefort의 분석에서, “늑대!”라고 고함을 지르는 사례를 참조했습니다저것은 [누군가의시선을 받거나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패닉 상태가 됐을 때 외치는 것이었죠.

 

마츠모토 (증례인 로베르Robert[Rosine et Robert LEFORT : Naissance de l'Autre, Seuil, 1980])는 자신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구멍의 출현에 대한 명명으로서 늑대!”라는 소리를 지르는데요그 시니피앙은 분절화되지 않고항상 늑대!”인 채입니다.

 

우츠미 반면 청년기 혹은 성인기의 자폐증 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일정한혹은 그것 이상의 언어능력이 있습니다그 경우의 특징은말을 도구처럼혹은 모국어인데도 외국어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말이 신체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고 할까말하자면 앱(App)처럼 사용됩니다바꿔 말한다면신체가 언어에 의해 포맷되지 않았다이 경우는 S2만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다른 한편에릭 로랑이 언급한 사례처럼 중증 자폐아가 내뱉는 것은 단독적인 S1이며주술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지시한다고 하는처음 부분만 있습니다언어는이 지시에 의해 대상을 절취하고공동 주의(注意등에 의해 공유되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합니다그러나 그 앞에서는무엇이든 늑대!”라고 말하면 일단은 패닉 상태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식으로주술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치바 매직워드이며와일드카드인 거네요.

 

마츠모토 자폐증자에게는정형발달의 사람과 똑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그 말(S1)뿐이며그들은 그것에 이어진 S2를 거절하고 있습니다라캉은 그것을자폐증자는 말에 대해 자신을 지킨다고 표현합니다그런 사람들이 현행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S2를 S1과 떼어낸 상태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S1 없는 S2입니다그러면공공공간에서 그들이 이용하는 언어(S2)일종의 컴퓨터 언어처럼 되어 버린다현대 라캉파에서는 자폐증에 있어서의 언어의 병리는이처럼 S1과 S2의 분리로서 파악되는 것입니다한편에는 주술적반복적중독적인 매직워드로서의 언어(S1)의 사용이 있으며그것이 똑같은 말에 대한 상동적(常同的)인 집착이 된다다른 한편에서는그들이 S2를 인공언어로서 만들어냅니다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상징적인 논리만으로 쓴 루이스 캐롤이 그 일례입니다.

 

우츠미 자폐증 스펙트럼의 S2는 사적 언어처럼 기능할 뿐인 곳이 있습니다사용하는 말은 우리와 공통이며대화가 가능하지만Speech act[발화행위, 발화수행]로서는 기능하지 않는다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함께 [맞물려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기어” 같은 것입니다제가 경험한 어떤 청년 사례는자신의 괴로움을 현실감이 없다”, “이인감(離人感)이 있다[자신이 자신이라는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것]”, “만족감이 없다라는 세 개의 말로 나눠서 호소한다그러나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매회 그렇듯이그것이 어떤 괴로움인지를 물어보는 처지가 된다그도 끊임없이 그때마다 알려줍니다만역시 금방 잊어버린다사적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증의 경우처럼 아파!’라는 것에 의해 공통의 코드가 열리고타인에게 이해되는 동시에 자신밖에는 모르는 고유한 감각이 남는다는 것이 되지 않는다감각만이 있고그것에 태그를 열심히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치바 극히 사적인 기준으로 연합을 하기 때문에듣는 쪽에도 전해지지 않는군요.

 

우츠미 그렇군요에르곤즉 잘 만들어진 언어에 가까운개념 규정이 먼저 있고그 태그로서 말이 있다아까의 늑대!”의 예에서는지시만 있고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만이번에는 정반대로개념이 있고거기에 말이 붙어 있을 뿐지시가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가 아파라든가 이것 때문에 괴로운 거야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치바 시스템이랄까언어 체계만이 있다논리의 공리계의 세계.

 

마츠모토 바로 수학기초론이라든가 분석철학 같은 세계네요.

     그런데 우츠미 씨가 방황하는 자기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さまよえる自己───ポストモダンの精神病理)(筑摩選書, 2012)의 마지막에서 논하신 것은근대의 노모스가 만들어져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던 시대 이후에 초월론적인 것이 절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도래하면타자의 부름이나 시선에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비근한 예로 깊숙이 들어갑니다만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이떠들고 있는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으면그 시선을 눈치 챈 학생들이 차츰차츰 조용해진다선생님은 거기서 여러분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3분이 걸렸습니다” 등이라고 말하는 거네요(웃음).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 않아도눈빛의 힘에 의해,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묻는 자로서 기능하는 타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그런 시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근대적 주체였던 것입니다.

 

치바 :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가 근대의 기조네요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는눈앞에 서 있어도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 수 있다교실의 뒤로 돌아가면 판옵티콘의 기능이 작동한다는 예가 [아사다 아키라의구조와 힘』[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나오는 것입니다만현재에는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관계가 없다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마츠모토 현대의 주체는 타자성과 시선이 기능하지 않게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우츠미 씨는 그런 주체의 모습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를 따른 계산기적 합리성이며거기에는 결단의 계기도 없고근대적인 의미의 자기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시네요. 이 논의는 확실히 그렇다고 실감할 수 있는 것도 많네요더 흥미롭게도 근대적 주체가 전제로 삼았던 타자성의 일어섬がり이나 시선과 목소리에 의한 주체화가 기능하지 못한 후에 등장한이런 포스트 휴먼적 인간상에국내의 정신병리학자들이 거의 동시대적으로 주목하고여러 가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예를 들어스즈키 쿠니후미(鈴木國文씨는 신자유주의란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는 가능한가?” 등의 물음을 빼고서, “자유니까 이렇다”, “자유니까 이래도 된다고 말하는 원리라고 지적하십니다바로 직전에서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은 채어떤 전제를 바탕으로 알고리듬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입니다현대에서는 그런 논리가 이러저러한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고그것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발달장애의 임상풍경과 꽤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스즈키 씨는 지적합니다카토 사토시(加藤敏) 씨는 똑같은 사태를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부릅니다.

 

우츠미 그것은 자유가 S1에서 S2가 되었다는 것인가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의 보증인으로서 있었던 S1지금은 하인처럼 혹사한다[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전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가요?

 

마츠모토 아마 자유를 S2만으로 생각하게 되며진리(S1)가 배제되어 버린즉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우리 세대가 보면그렇게 되는데요꽤 올드 패션한 시각이 아닐까요그래서 마츠모토 씨나 치바 씨의 세대에서는 어떻게 보는지흥미가 있습니다.

 

치바 저는 우츠미 씨의 그런 감각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제가 신세대에 속해 있고 알고리즘적인 사물의 처리에 친화성을 느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근본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듯한 물음그 문제성이라는 부정성 ― 들뢰즈는 문제성을 부정성이라고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존재” 같은 식으로 불렀습니다만 ― 이 근본에 있은 다음에그 부정성을 달래면서가설(仮設)된 체계에서 어떻게 사물을 움직이는가그 위에서그래도 답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다시 되돌아간다이런 답할 수 없는 문제와당장의 시스템 운용의 이중구조로 해온 것이 근대문화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설되고 있는 것을 그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지금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분석철학 등의 논의에는 그런 경향이 강하네요대륙철학에서는 사물의 정의가 반드시 약정되지는 않은 상황에서 얘기를 하기 때문에분석철학자로부터는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이쪽에서 보면거꾸로 그런 절차적 논의를 하고 있는 쪽이 섬뜩하고[낯설면서 친숙하고]조금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분석철학은 언어의 사용방식 자체가 S2적이고, “그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항상 듣는다그런 게 아니라사용이야말로 본래의 언어이죠그러나 그 전에,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함으로써단단하게 다져버린다[확고하게 해버린다].

 

마츠모토 저는 알고리즘적인 사고방식은 싫어하지는 않지만그래도 지난날 눈에 띄게 됐던 S2만의 원리에는 자주 놀라며분석철학 책은 읽는 데 꽤 고생니다자폐증자였던 템플 그랜딘은, “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해 괴로워하고모든 개를 관찰한 결과, “라고 불리는 것은 코의 모양이 모두 한결 같다는 것을 깨닫고그것에 의해 라는 개념의 내포를 처음으로 만들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치바 일부의 분석철학은 [단단하게 다져진 것이 아니라] 흔들림이 있는 프래그머틱스로 사용된 사물의 정의를형식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 재검토해 S2만의 구성으로 봤을 때이전의 애매함이 붕괴하고, “사실은 개의 본질은 그 코에만 있었던 것이다처럼 이상하게 한정적인 결론이 되는 것을특별히 지적인 놀라움이나 학문의 발전인 것처럼 말하고그것의 향락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마츠모토 그렇게 함으로써 향락하고 있다.

 

치바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프래그머틱스에 있어서의 말의 두께가 S2적인 단조로움 속에 해체되는 것을 기분 좋다고 생각하고 있죠그리고 그것을말의 두께의 세계에 대해모종의 위협적으로 대치시키는 것에 쾌를 느끼고 있다.

 

우츠미 아이가 말을 배울 때에도혹은 부모가 말을 가르칠 때에도개념은 가르칠 수 없죠차를 보고 붕붕이라고 가르쳐보죠그래서 차가 아닌 것을 아이가 붕붕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붕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개념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처음에 지시가 있는 것입니다개념 규정에 너무 얽매이면 잘 안 되는 거죠.

 

치바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절차적인 것을 직장에서 요구합니다. “이러저러할 때에는 이러저러한 목소리를 내고 몇 초 기다렸다가 이렇게 해라” 같은 것을 하는 것이 분명한 가게도 있습니다그런 것은 바로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말하고 싶은 상황입니다대학 업무에서도 그것에 가까운 것을 하도록 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우츠미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수십 시간의 연수가 있다고 합니다다만셀프엔조이먼트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커피가.

 

마츠모토 최근의 전지구적 기업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개개의 고객에 인간적인 대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매뉴얼로 인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치바 그런 건 왠지 섬뜩하죠[낯선 친숙함이죠].

 

마츠모토 섬뜩합니다[낯선 친숙함입니다].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사람에게 점장이 개인적으로 코칭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아요거기에는 꽤 심리학의 메소드가 들어 있어서그래서 나오는 것이 완전히 통제된 인간미가 있는 접객입니다.

 

치바 : S2밖에 없는 가설적 공리체계로서의 인간 같음.

 

마츠모토 인공지능은 그곳에서 이미 완성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바 불가능한 것이나 무한이라는 것이 지성에 있어서 문제였던 시대에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만거꾸로 시대가 인간의 지성을 인공지능적으로 했다면그건 인공지능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최근에는 알고리듬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이 인공 지능이라고 꽤 흔하게(casual) 불리게 됐네요.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인공지능 알고리듬으로 라든가저런 캐주얼화는 기묘하다고 생각합니다옛날 같으면 인공지능이 만들었다고까지 야단스럽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요이렇게 인공지능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원래 모델이 되는 인간 문명이 인공 지능적으로 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 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 이 글은  現代思想』 2015년 3월호 '정신병리의 시대'에 수록된 첫 번째 대담을 옮긴 것이다. 이 대담을 옮기면서 다시금 실감한 것은, '영어'나 '불어'를 번역하지 않고 쓰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말을 할 때, 꼭 필요한 경우를 빼면 절대로 영어나 불어 등을 그대로 얘기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아무튼 위 사진의 가운데 인물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기 위해 이 글을 옮긴다. 그리고 세 번째 인물인 마츠모토 타쿠야의 글은 이미 <현대 라캉파의 논점들>이라는 번역으로 소개했으므로 그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現代思想』 2015년 3월호를 전체적으로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에 기반한 논의가 중심이라는 점도 지적해둔다. 

* 일본에서는 라캉의 '실재계'를 대체로 '현실계'로 옮긴다. 이를 다시 '실재계'로 옮겨적었으나, '현실'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에도 이것이 '실재계'와 연결된 것임을 생각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바꾸긴 했으나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 또한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예전에는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자' 등으로 옮겨졌으나, 요즘에는 '조현병', '조현병 환자' 등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전처럼 이해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이것도 '스키조프레니'로 그대로 적어뒀다. 그들이 그렇게 발음했기 때문이다. 

  

일자의 향락

마츠모토 : 이번에 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 : 자크 라캉과 감별진단의 사상(はみな妄想する : ジャック・ラカンと鑑別診断思想(青土社, 2015)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대적인 라캉 연구를 참조하면서, 라캉을 통사적으로 재독해함으로써 라캉을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속에 다시금 자리매김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서서히 실감하며 알게 된 것은, 라캉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자크 알랭 밀러의 라캉 독해, 표준판 라캉을 만드는 공식화 작업이 전기·중기 라캉뿐 아니라 후기 라캉에도 미치며, 하나의 도달점이랄까, 모종의 일단락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일단락은 밀러가 2011년에 한 존재와 일자(l’Étre et l’Un)(별명 : 하나뿐인 일자(L’Un-tout-seul), 하나뿐인 자들(Les-tout-seuls))라는 강의입니다. 이 강의는 70년대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후기 라캉의 행보를 지금까지 읽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사후적으로 보면, 이 독해는 밀러가 편집한 [라캉의] 세미나출판의 흐름과도 합치했습니다. 2005년에 13권인 생톰이 출판되고, 2007년에는 18권인 외양이 아닐 수도 있는 담론에 대해(On a discourse that might not be a semblance), 2011년에 19권인 우 피르(Ou Pire)가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그 집대성인 밀러의 2011년의 강의는 우 피르의 해설이기도 합니다. 제 책이 노린 것은 우선 우 피르에 이르는 라캉 독해를 밀러에 의거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 독해의 성과를 프랑스의 정신병리학의 논의에 떨궈놓고, 더 나아가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대결 등 현대사상의 여러 가지 과제 속에서 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밀러 주변 논자들의 논의에는 아무래도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논의와 친근성을 가진 논의가 있는데도 그 누구도 그것을 정색하면서 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존재와 일자에서의 라캉 독해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라캉은 그동안 주로 하이데거 존재론의 영향이 강한 이론가로 불렸지만, 밀러에 따르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캉은 세미나18, 19권의 논의를 거쳐, 20권인 앙코르에서 성별화의 식(性別化)”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존재론(ontologie)”을 버리고,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일자론(hénologie)”으로 전회했다고 밀러는 주장합니다. 물론 라캉은 71~72년의 우 피르세미나에서 일자론이라는 말을 이미 썼어요. 하지만 세미나 해적판을 편찬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자론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거의 모든 해적판이 라캉이 일자론(hénologie)’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정확하게 옮겨 적지(transcription) 못했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에서 일자론으로의 전회를 중시하는 밀러의 2011년 강의에 의해, 아마 처음으로 후기 라캉의 일자론의 이론적 의의가 끄집어내진 것입니다.

    헌데, 이 일자론은 치바 씨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哲学)(河出書房新社, 2013)에서 다룬 존재론적 파시즘얘기와 유비적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들뢰즈한테는 모든 것이 융합하고 점점 연결되어 하나(일자)가 된다는 논의의 흐름이 있으며, 그것은 특히 네그리=하트화된 들뢰즈에서 현저한데요, 그것은 일자의 파시즘이 되어버릴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런 접속적 들뢰즈와는 정반대의 들뢰즈 상()을 치바 씨는 절단이라는 키워드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다른 한편, 밀러가 후기 라캉의 일자론에서 끄집어낸 일자도 존재론적 파시즘의 일자 밀러는 그것을 융합적 일자(Un fusionnel)’라고 말합니다 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존재와 일자의 다른 제목이기도 한 “L’Un-tout-seul”, 즉 단 하나뿐이며, 타자와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별개의 형태인 듯한 일자임을 하이데거적인 라캉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라캉 속에서 밀러는 끄집어낸 것입니다.

 

치바 : 일자에 대해 융합적 일자라는 이해가 있다는 것을 한 번 말한 뒤에, 그런 게 아니라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마츠모토 : 그렇죠. 앙코르의 세미나에서도, 맨 처음에 융합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일자였다고 간주되는 남자와 여자가 재융합하는 것을 지향하는 안드로귀노스(androgynos)의 신화처럼, 융합적인 것을 지향하는 에로스적 향락을 라캉은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보편적 융합의 일자와는 상이한 향락으로서, “여성의 향락(<다름>의 향락)”을 끄집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의 일자론은 여성의 향락의 발견을 경유하여, 보편적 융합의 원리로부터 벗어나는 각각의 개별적인 일자의 향락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앙코르6장과 7장에서, 라캉은 유명한 성별화의 공식을 완성시킵니다. 7, 8장에는 백치[바보]의 향락(jouissance de l’idiot)”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백치인가? 라캉은 남성의 향락이 기본적으로 자위행위(masterbation) 같은 것이며, 자신의 팔루스를 사용해 자위하는 듯한 것이며, 그래서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성의 향락은 타자와 관계를 갖지 않는 어리석고 못난 향락이라는 의미에서 라캉은 백치의 향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앙코르 8장에서 백치의 향락이라고 말할 경우의 백치라는 말에는 사실 그리스어의 어원인 ίδιώτης가 지닌 기묘한개별적인이라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고 라캉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백치의 향락이 지닌 개별적이라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이적=단독적(singulier)”이라는 의미를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그 향락이, 융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하나뿐인 각각의 개별적인 형태인 일자의 향락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앙코르성별화의 식이 완성된 후에 라캉이 발견한 것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앙코르8장 이후의 라캉은 전년도의 우 피르에서 도입된 일자론을 논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후 라캉은, 그 일자의 향락은 자체성애적인 것이며, 거기에 주체의 향락의 특이성=단독성(singulalit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서 분석의 종결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톰의 세미나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임스 조이스는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예술을 만든 것이라는, 꽤 표층적인 이해가 생톰에 관해 이뤄져왔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신병 같은 증상이 있은 후에 창작을 한 사람이라면 뭐든지 생톰입니다. 그러나 라캉의 주안점은, 사실은 거기에 없는 게 아닐까? 라캉은 생톰을 개강하기 직전에 증상으로서의 조이스(Joyce le symptôme)라는 강연을 했습니다만, 거기에서 라캉은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가 자신의 향락의 특이성을 전면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하다, 보통이라면 분석을 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지만, 조이스는 분석을 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도달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체성애적인 향락은 무엇이냐 하면, 라캉은 그것을 신체의 사건이라는 말로 얘기합니다. 신체의 사건이란, 어린이가 자체성애적으로 향락하는 곳에 처음으로 언어가 개입할 때에 주어진 충격 같은 것이며, 거기에서는 시니피앙이 물론 들어오지만, 그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 분절화되지 않고 하나뿐이며, 게다가 그것은 향락과 일체가 된 일종의 에크리튀르 같은 것이다. 그 에크리튀르의 장소를 정신분석은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를 라캉은 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논의가 2011년까지 프랑스에서 라캉 독해의 모종의 일단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화제에 올린 치바 씨의 책과 닮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 , 공통의 규범화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개 별별의 특이성을 어떻게 격려하는가, 부활하는가라는 방향으로 후기 라캉의 임상은 향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들뢰즈-가타리와 거의 같죠. 다만, 거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더라도 어떤 규범화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분석을 밀고나가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규범성에 의거하는 기술과 특이성을 장려하는 기술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각날 수밖에 없죠. 이것은 나중에 재차 건들고 싶습니다.

    그 전에, 일자론 얘기는 재미있네요. 여기에서 얘기되는 일자성, 혼자서 있는 것의 일자성은 일종의 자위(onanism)를 긍정한다는 의미이죠. 그것도 바로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욕망의 특이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통하며, 제 책에서 독신자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전과도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 책에서는 일자-전체가 융합적 기능을 갖는 것을 경계한 것인데요, 일자에게 다른 의미를 나누고, 분리한 상태, ‘분리성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은 있죠.

 

마츠모토 :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서, 자기항략(self-enjoyment, 이하 '셀프엔조이먼트'로 옮김)론을 전개하는 곳에서 바로 플로티누스를 인용하고 있고, 전체화 불가능한 단편의 세계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도 논합니다만, 꽤 자폐증적인 세계에 가깝다고 느끼며, 후기 라캉이 봤던 특이성의 세계에 겹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밀러의 존재와 일자를 읽은 것은 2012년 혹은 13년인데요, 2013년에 치바 씨의 책이 나왔을 때, 양자의 가까움에 꽤 놀랐습니다.

 

치바 : 저는 밀러를 읽지 않았지만, 뭔가 세계동시적으로 움직이던 해석 경향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폐증 개념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어떤 밸런스로 생각하는가가 오늘날에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양보할 수 없는 향락의 장소라는 의미를 자폐라는 말로 형언하고 싶다는 것은 제게도 전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의료 전문가가 아니라서,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도 포함해 자폐증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할 수 없다며 제 자신에게 금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자폐증을 비유로서는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사실 이 책을 한창 쓰고 있을 때부터 마츠모토 씨와는 몇 번이나 얘기는 나눴고, 그 속에서 자폐증 개념을 셀프엔조이먼트와 가깝게 하는 고찰은 이미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죽치고 앉아 있던 맥락이 마침내 마츠모토 씨의 책에서 전면 전개됐다는 형태가 됐으며, 이것이 이후 어떤 식으로 논의를 파급시키게 될지는 참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얽혀 있는 얘기인데요, 자체성애는 브로일러1911년에 스키조프레니를 개념화했을 때, 구스타프 융을 경유하여 프로이트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만일 자체성애를 싱귤라리티(singularité)로 바꿔 읽으면,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싱귤라리티(singularité)의 도상에서 초월론적인 것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미지화해서 말하면, 카프카의 법의 문 앞에서같은 것이랄까요. 시골에서 온 남자는 문 앞에 가까스로 도착합니다만, 문지기한테 걸려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거기에 머뭅니다. 마지막에 문지기는 이 문은 너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집니다. 스키조프레니싱귤라리티에 대해 어피니티(affinity, 친화성)를 갖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치료자는, 이런 싱귤라리티를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요구됩니다. 기묘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싱귤러(singular)양자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여부가 치료자로서의 자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스키조프레니의 경우에는, 아직 초월론적 심급이 기능하고 있으며, 부정신학적 구도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은 그 빈 곳에 출현하는 자기장에 홀리고 이끌립니다. 라캉은 그것을 인격신(대타자)에게 말을 걸고 파라노이아에 준한 방향에서 얘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역시 카프카의 문이 이미지로는 가깝습니다. 실재계와 상징계가 떼어내진(decoupling) 양태랄까, 슈미트가 형식적인 법과 그것을 행사하는 힘을 나눠서 얘기하는 것을 흉내 낸다, 그 힘이 충만한 공백지대 같은 것이 개시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치료관계에 있어서의 싱귤라리티는 이런 강한 자기장으로부터, 얼마나 이심적(離心的)인 지점까지 데려오게 되느냐는 것에 관련된 프락시스입니다. 두 사람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폐증 임상과 스키조프레니 임상을 대비해 보는 관점이 부상하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마츠모토 : 예전에 기무라 빈(木村敏) 씨는 정신분열증이 개별화의 위기에서 발병한다고 말했습니다만, 어쩌면 혹시 청년기에 다시금 싱귤라리티를 낼 때에 실패하여 발병한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면, 자폐증에서 왜 싱귤라리티가 정신분열증만큼 위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안전하게 나오게 되는가 하면, 그들은 개별화의 위기가 위기로 되지 않도록, 초월론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모종의 방식으로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싱귤라리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츠미 : 우리가 일반임상에서 관련된 자폐증 스펙트럼의 사례는, 주로 청년기 이후의 사람들에서, 자타미분화의 상태로부터 개체화가 시작될 무렵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아주 고통스러운 시기에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타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만, 반드시 그것이 초월론적 차원의 것이지는 않습니다.

    밀러는 라캉 독해에서 배제가 최종적으로는 일반화 배제이며, 신경증과 정신병 둘 다가 토템과 터부적인 구도 하에 있다고 했습니다. , “아버지의 이름이 배제되는 것은 정신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양자에 공통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자폐증 스펙트럼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현재에서 돌이켜보면, 이 일반화 배제에 의해 정신병도 신경증도 정형 발달定型発達한 것이라고 말한 게 됩니다.

 

치바 : 일반화 배제를 정형 발달의 표식으로 보는 읽기를 할 수 있다고.

 

우츠미 : 그렇군요. 정형자(定型者)라는 것은, 자신에게 눈뜨기 전에, 타자와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키조프레니에게 찾아온 타자는, “어딘가에서 한번쯤 만난 듯한 타자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혀 만난 적이 없었을 텐데도, 왠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인 것 같다는 느낌이니까, 전적으로 무관한 타자가 아닌 것입니다.

 

마츠모토 : 그래서 무서움이 있다는 것이죠.

 

우츠미 : 그렇군요. 반면, 자폐증 사람들은 바로 처음에 타자와 만나는 것입니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타자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니!”라는 식으로 놀라게 됩니다. 레오 카나1943년의 논고에서 자폐증개념을 제시했습니다만, 그때, 똑같은 자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스키조프레니withdrawal인 반면, 자폐증은 aloneness이며, 양자는 철저하게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브로이어 식으로 말하면, 스키조프레니는 한 번 구성된 현실로부터 철퇴[뒤로 물러섬]하여 공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아까 말한 셀프엔조이먼트나 자체성애는 카나가 자폐증 속에서 찾아낸 aloneness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츠모토 : 자체성애라는 곳으로 얘기를 되돌리면, 우츠미 씨가 아까 설명하셨듯이, 자체성애는 원래 정신분열증 개념이 생길 때 문제가 된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1911년의 슈레버 증례론에서 슈레버의 파라노이아를 논합니다만, 그는 거기서 동시에 스키조프레니를 논합니다. 그는 거기서, 스키조프레니파라노이아보다 더 옛날까지, 즉 자체성애에 가까운 곳까지 퇴행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자폐증과 스키조프레니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자, 프로이트-라캉파에서는 자폐증을 정신병과 똑같은 것으로 보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라캉파 속에서도 생깁니다. 그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퇴행의 지점에 의해, 라캉파의 말투로 얘기하면 향락의 회귀모드(mode)의 차이에 의해,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을 차이화하려고 했다는 것이 에릭 로랑(Éric Laurent) 등의 논의입니다. 어떻게 차이화하는가 하면, 파라노이아는 향락을 대타자 쪽에서 찾아내기에, 슈레버처럼 대타자(신이나 파울 에밀 플렉지히Paul Emil Flechsig(1847~1929) 교수)가 나를 향락하려고 한다는 망상을 구축한다. 스키조프레니에서는 향락이 자신의 신체에 회귀하기에, 몸 위에 향락이 다양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는 원래 대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폐증자에게는 일자의 시니피앙”(S1)만이 도입되고 있지만, 그들은 S1에 연쇄하게 되는 시니피앙(S2)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S2를 거절하는 대신, 자체성애가 새겨진 일자의 시니피앙”(S1)을 줄곧 반복해서 사용하고, 특히 신체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향락한다. 그것은, 신체의 이른바 전체의 향락이 회귀해오는 스키조프레니와는 다른 향락의 방식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스키조프레니 환자에게는 향락의 신체로의 회귀가 실제로 증상으로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음부를 이리저리 쓰다듬다”, “의미가 불분명한 힘이 몸을 조작하고 있다등의 증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증상들은 어느 정도 섹슈얼한[성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무서운 타자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성화(性化)된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에게 보이는 향락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허그 머신(Hug machine)에는 자폐증자의 향락의 모습이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를 억누르는 기기에 자신이 들어감으로써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화(性化)된 방식에서 벗어난 곳에서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통제하는가가 자폐증에서의 일자의 향락에서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은 둘 다 신체에 있어서 향락하는 체제가 전면에 나오는 병의 용태는 아니지만, 양자의 향락의 체제는 상이하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체성애의 혁신성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연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사건에서 사건의 생산으로

: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들뢰즈=가타리적 정치

出来事から出来事生産: アンチ・オイディプスにおけるドゥルーズ=ガタリ的政治

 

사토 요시유키(佐藤 嘉幸)

思想(1087), 7-32, 2014-11, 岩波書店

(http://ci.nii.ac.jp/naid/40020237216/)

 

* 프랑스어 원문 및 한국어 번역본 대조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2017년 3월 24일]



1.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또한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위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본고를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런 질문을 던질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들뢰즈의 철학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모종의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들뢰즈론인 들뢰즈 :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심지어 들뢰즈의 존재론이 다양성의 존재론이 아니라 여럿을 하나에 구속시키는 존재론, 말하자면 존재론적 파시즘[각주:1]이라고 논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들뢰즈의 근본 문제란 분명히 여럿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여럿의 사유를 <하나>의 쇄신된 개념에 접어넣는 것이다.”[각주:2]

 또 슬라보이 지젝은 바디우의 강한 영향 아래서 작성된 들뢰즈론인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가 혼자서 쓴 의미의 논리에서의 정적 생성의 탐구, 즉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높이 평가하고, 반대로 들뢰즈=가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의 최악의 책이라고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 속의 그 어떤 것도 결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적시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들뢰즈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들뢰즈 홀로의 작업에서는]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필자이며, 정치에는 무관심하다.”[각주:3]

바디우와 지젝이 들뢰즈를 평가하는 전략은 매우 닮았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들뢰즈 홀로의 작업, 특히 그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평가하는(혹은 단죄하는) 것이다.[각주:4] 그런 전략은 바디우와 지젝이 둘 다 라캉과 매우 가까운 이론적 입장postion에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바디우와 지젝은 정치적 라캉주의라는 그들의 이론적 입장에서 라캉 이론 혹은 정신분석 자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들뢰즈 철학에서 전면적으로 삭제한다는 전략을 선택하고,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정치성을 완전히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반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회체와 주체의 생성변화의 탐구를 높이 평가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야말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의 정치성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책이며, 그 가치는 이 책이 주체뿐 아니라 사회체 자체의 생성변화를 사고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는 들뢰즈의,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최고의 도달점이라고 위치짓는다.

여기서 또 다른 한명, 다른 철학자에 의한 들뢰즈 비판을 다뤄보자. 그것은 들뢰즈파 철학자로 간주되고 실제로 바디우나 지젝보다 들뢰즈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 의한 비판이다.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 정치에 있어서 비주의주의에 관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주로 들뢰즈=가타리의 논고 68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각주:5]를 참조하면서, 들뢰즈에게서의 사건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건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으로 되기에 있다. 이것만이 치욕을 불식하는 것, 혹은 참기 힘든 것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런 명법은 전혀 주의주의적인 게 아니다. 이제 의무 존재에서 존재로 복귀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을 어떤 외적이고 초월적인, 따라서 전제적이고 무능한 판단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의지는 이제 사건에 선행하지 않으며, 대립은 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지, 어떤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건에 응답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더 이상 그 세계를 참을 수 없는 한에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책임=응답 가능성이, 통치나 주요한 주체들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고유하게 혁명적인 책임=응답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일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계획도, 어떤 집단의 이해도 대표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 이해는 바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방향=의미에서 변화하고 있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앞에 두고 책임=응답 가능성을 지고 있는 것이다.[각주:6]

 

한편으로 사건은 견디기 힘든 것의 새로운 의미를 출현시킨다(잠재적 변동). 다른 한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의 이 새로운 의미는 어떤 창조행위를 호소한다. 그 창조행위란 변동에 응답하는 것이며, 새로운 이미지의 도면이며, 문가 그대로 가능한 것을 창조한다(현동적 변동). 가능한 것을 창조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집단적 공간-시간적인 배치arrangement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창조된 삶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에 응답하는 것이며, 혹은 그 가능성의 표현이다.[각주:7]

 

주라비슈빌리에 따르면, 들뢰즈적 정치(“혁명적으로 되기”)란 주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선, 세계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의미가 산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산출된 새로운 의미=사건에 응답하는 것이 들뢰즈적 정치이다. 그때 사건이란 새로운 의미(‘견디기 힘든 것’)가 산출되는 것이며, 물질적인 것의 효과로서 새로운 의미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산출되는 것이다(잠재적 변동).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산출된 새로운 의미, 즉 사건에 응답함으로써 주체를 변용시키고 집단적인 공간-시간적 배치arrangement를 변용시키는 것(현동적 변용)이 들뢰즈적 정치라고 간주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적 정치란 사건을 기다리고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의미를 주체가 수용하고 새로운 의미에 의해 주체가 변용된다는 것 이외를 의미하지 않을까?

 주라비슈빌리의 도발적인 들뢰즈 비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주라비슈빌리의 가설은 들뢰즈 홀로의 철학, 특히 의미의 논리에는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과는 달리,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다.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란 사건에 의한 세계나 주체의 수동적 변용을 다루는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사건을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철학이다.

 『의미의 논리에서의 사건의 개념을 돌이켜보자. 이 책에서 사건이란 물체적인 것의 효과로서 바로 초월론적인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물체에 대한 원인이지만, 무엇의 원인인가? 물체는 일정한 사물의 원인, 전혀 다른 본성의 원인이다. 그 효과는 물체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물체적인것이다. 효과는 물리적 형질, 특성이 아니라, 논리적 혹은 변증론적 속성이다. 효과는 사물이나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사건이다. 효과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효과가 존속한다거나 존립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효과는 사물이 아닌 것이나 실재하지 않는 존재자성에 걸맞은 최소의 존재를 갖고 있다. 효과는 실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효과는 능동자나 수동자가 아니라 능동과 수동의 결과이며, ‘비정한, 비정한 결과이다. 효과는 살아 있는 현재형이 아니라 부정형(不定形)이다. , 한계 없는 아이온, 과거와 미래로 무한하게 분할되고, 항상 현재를 벗어나는 생성이다.”[각주:8]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는 에밀 브루이에의 예를 빌린다면, “칼이 새로운 고기를 썰, 그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속성, 의미가, 즉 생성변화가 생산된다. , “칼이 새로운 살을 썬다는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의미, 생성변화가 산출되는 것이다.[각주:9]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부른 것은, 그런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며, 그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그것을 정적 발생(genèse statiqu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의 후반인 제27계열에서 갑자기 동적 발생(genèse dynamiqu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초월론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제반 특이성들로부터 주체라는 존재자가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의미의 논리에서는 동적 발생은 이제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 동적 발생의 논리를 더욱 추구하고,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의 철학을, 사건의 생산의 철학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 경우의 사건의 생산이란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 혹은 생성변화에 머물지 않고 사회라는 현실적인 것의 생성변화도 함의하고 있다.

 이 점을 둘러싸고 네그리=하트가 커먼웰스에서 행하는 푸코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의 비교가 참고가 된다.

 

이 시점에서 푸코에 의한 사건 개념과 알랭 바디우가 제창한 그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의 장이라고 하며, 그것을 현대철학의 중심적 문제로서 제기하고, 커다란 공헌을 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삭감할 수 없는 다양성, 달리 말하면 다의적인성질을 갖는 사건은, 단순한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진리의 심문을 빼낸다. 이 점에서의 바디우와 푸코의 차이는 두 사람이 사건에 관해서 시간적으로 어디에 관심을 기울였는가라는 것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디우에게서는 사건(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프랑스 혁명,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을 빈번하게 예로 들고 있다)이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주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사건에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개입과, 그 사건에 지속적으로 계속 언급하는 충실성과 유-생성적[類生成的] 과정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production and productivity of the event)을 강조하며, 거기에는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향한 주시가 필요해진다. 말하자면 사건은 내적인 존재이며, 그것을 가로지르는 전략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디우의 접근법으로는 푸코가 사건의 내부로부터 강조하고 있는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파악할 수 없다. 실제로 사건에 대한 소급적 접근법으로는 봉기 활동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봉기 활동은 역사적 과정의 안쪽에서 혁명적 사건을 창출하고 지배적인 정치적 주체성으로부터 이탈하려고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논리 없이는 그저 바깥쪽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어야 할지 아닐지의 문제로서 긍정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으며, 결국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일반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라고 간주되는 역설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각주:10]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바디우의 사건 개념은 (프랑스 혁명, 5월 혁명 같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해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에 충실하기를 계속하는 것을 함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에게서의 사건이란 항상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다.[각주:11] 반면 푸코에게서의 사건 개념은 사건의 생산과 그 생산성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건의 내부에서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보는 것이다. 푸코의 사건 개념은 자유와 역능에 의거해서 도래할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라고 네그리=하트는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들뢰즈=가타리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건 개념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바디우에게서 사건이란 역사상의 단순한 우연적 점으로서만 정위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사건에 질을 부여하고 사건을 상황 속에 포함되도록 하는 부위의 위에 주사위를 던지도록 하는 개입, 즉 사건을 만들어내는역능(puissance de «faire» l’événement)”이야말로 중요하다.[각주:12]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했다고 한다면, 거기서의 사건 개념은 바로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푸코의 사건 개념과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바로 강도적인 욕망을 매개로 한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에 대해,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에 대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건(événement)” 대신 절단(coupur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각주:13] 심지어 과정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다음의 짧은 한 구절에 주목하자.

 

정신의학의 실효적인 정치화만이 우리를 이것들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반정신의학은 레인과 쿠퍼와 더불어, 이 방향으로 사실은 멀리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은 이 정치화를, 과정 자체의 어휘보다도 오히려 구조와 사건의 어휘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각주:14]

 

왜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정치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과정(porcess)’이라는 개념을 특권화하고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사건개념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구조개념에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면, 구조 개념보다 오히려 기계욕망하는 생산 과정개념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과정이란 욕망의 흐름의 과정이며, 욕망의 흐름의 교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떼어놓는 벽이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것이다”(AO, p.434). 욕망하는 생산 과정은,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사건을 구조로부터 생각한다면, 정적인(statique) 구조의 재생산과 그 절단이라는 사고에 스스로를 한정하게 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성변화의 과정을 사고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부단한 생성변화의 과정이야말로 사건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생산은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과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세계의 모든 것은 생산과 소비에 의해 시시각각 계속 변용하는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이며, 정치 또한 욕망하는 생산 과정으로부터 사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관점(perspective)에 의거함으로써 정치에 자유와 역능의 관계를 도입할 수 있고, 권력에 의한 주체와 세계의 재생산 과정에 대해 어떻게 사건을, 혹은 절단을 도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정치를 정적 구조의 재생산과 그 재생산의 절단이라는 구조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생각하게 되며, 사건을 사후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정치를 구조와 사건이 아니라 과정과 절단혹은 구조와 절단으로부터 사고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바로 사건의 생산에 관해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II. 욕망 기계들과 욕망하는 생산

여기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건의 생산전략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본절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 ‘과정기계라는 개념에서부터 고찰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본적인 테제는 세계의 모든 것은 욕망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의 서두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다. 중단하지 않고, 혹은 단속적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과열하여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애무한다. <그것>이라고 불러 버리는 것은 무슨 오류일 것이다. 도처에서 기계가 있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연결이나 접속을 수반하는 다양한 기계의 기계가 있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연결된다. 어떤 기계는 흐름을 발생시키고, 다른 기계는 흐름을 절단한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입은 이 기계에 연결되는 기계이다. 거식증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하는 기계(천식의 발작)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대용 작업을 하서는, 각각에 자신의 작은 기계를 조립하고 있다. 에너지 기계에 대해 기관 기계가 있고, 항상 흐름과 절단이 있다. 슈레버 공소원장은 엉덩이 속에 태양광선을 반짝이다. 이것은 태양항문이다. <그것>이 기능한다고는 확신하라. 슈레버 공소원장은 뭔가를 느끼고, 뭔가를 생산하며, 그리고 이것에 관해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뭔가가 생산된다. 이 뭔가는 기계가 초래하는 결과이며,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AO, p.7/()15-16)

 

그것이란 에스’, 즉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심적, 물리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며, 욕망의 흐름이다. 세계는 제반 욕망의 흐름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며, 그런 무수한 흐름의 접속을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이라고 부른다. 욕망 기계들은 연결과 분리를 반복하며,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생산과 소비를 반복한다.

 그러면 그때, 앞서 언급한 과정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과정이란 생산의 과정, 즉 욕망적 주체의 과정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라고 바꿔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욕망적,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란 소비, 등록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생산은 그 생산물의 등록(분배), 소비로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생산등록소비생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이다. “생산은 그대로 소비이며, 등록이다. 등록과 소비는 직접적으로 생산을 규정하고 있지만, 더욱이 생산 자체의 한복판에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생산의 생산, 즉 능동과 수동의 생산이며, 등록의 생산, 즉 분배와 지표의 생산이며, 소비의 생산, 향락과 불안과 고통의 생산인 것이다. 모든 것은 바로 생산이기 때문에, 등록은 곧바로 소비되고 소진되며, 이 소비는 곧바로 재생산된다”(AO, pp.9-11/()19-20). 이런 의미에서 자연과 인간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AO, p.10/()20). 자연은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은 자연을 생산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에너지-생산의 기계의 연쇄이다.

 둘째,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으로부터 구별해야 한다. “과정은 목표나 목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과정 자체를 무한하게 계속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과정의 무한한 계속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과정의 너무 빠른 무모한 정지와 똑같은 것이며, 그것은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인공적 분열증자, 자평증화되어 폐인이 되고, 임상 실체로서 산출되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조작이나 다름없다. 분열증적 특성이나, 그 임상 실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증이란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이며,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실재로서의 근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AO, p.11/()21).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란 욕망하는 생산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생산성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라캉의 정의에 따르면, 분열증이란 대문자의 타자가 배제되고 실효되어 있기 때문에, 상징계가 부서졌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가 무한하게 증식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은 분열증이 대문자 타자를 결여하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를 무한하게 증식시켜가듯이, 초월적 심급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을 내재평면 위에 횡단적으로 증식시켜가는 것이다.[각주:15]

 그러나 다른 한편, 과정 자체를 목적화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그 정지는 욕망의 자연스런 흐름을 해치며,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분열증과, 그 목적화나 정지로서의 임상 실체의 분열증을 구별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흐름의 생산을 목적화하거나 정지하여 임상실체로서의 분열증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과정이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 혹은 분열증적 과정일 때,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기묘한 개념은, 거기서 어떤 역할을 맡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 기계들에 대립하는 강도 제로(0)로서의 죽음 본능이다.

 

이 기관 없는 충실 실체는 비생산적인 것, 불모인 것이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있었던 것, 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는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형상도 없이 존재했을 때, 이것을 발견했다. 죽음의 본능[instinct de mort], 이것이 이 신체의 이름이다. 이 죽음에는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욕망은 그것도 또한, 죽음도 또한 욕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충실 신체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삶의 기관들이 작동하는 기계(working machine)이기 때문에 욕망이 삶을 욕망하게 되게 되듯이.(AO, p.14/()26)

 

기관 없는 신체는 강도 제로(0)죽음 본능이며, 스스로는 생동하지 않고, 욕망을 생동하게 하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다. 들뢰즈가 자흐 마조흐 소개에서 죽음 본능(instinct de mort)’을 경험적인 파괴욕동으로서의 죽음 충동(pulsion de mort)’과는 다른,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라고 정의했다는 것을 상기해두자.[각주:16] 그것은 욕망 기계들에 운동을 부여하고, 욕망에 흐름을 부여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죽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본능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란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이며, 경험적 소여로서의 욕망 기계들에 대립한다. 강도 제로의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 기계들을 등록하는 등록 표면 혹은 내재 평면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이 모든 은유와 무관하게 진정으로 기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에서일까?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의 특성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기계는 여러 가지 물질적 흐름에 접속하며, 그 흐름을 절단, 채취한다. “우선 첫째로, 무릇 기계는 모두 연속된 물질적 흐름(즉 질료)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계는 이 흐름을 잘라낸다. 절단은 연합하는 흐름으로부터 뭔가를 채취하는 작동을 한다. 예를 들어 항문과 이 항문이 절단하는 똥의 흐름과의 관계. 입과 젖의 흐름과의 관계. 심지어 입과 공기나 음의 흐름과의 관계. 페니스와 오줌의 흐름, 그리고 또한 정자의 흐름과의 관계(AO, pp.43-44/()72-73). 예를 들어 입 기계는 모유 기계에 접속되고, 이로부터 젖의 흐름을 잘라내고 채취한다(채취-절단). 기계가 접속하는 여러 가지의 물질적 흐름 그 자체도 또한 다른 기계에 의해 생산되는 이상, 기계와 흐름의 접속은 기계와 기계의 접속이기도 하다(기계의 기계). 또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반드시 다른 흐름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세 번째의 기계에 접속하며 채취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무한하게 연속된 흐름이기도 하다(생산의 생산). 욕망 기계들 상호 접속의 접속은 욕망의 생산성 자체를 생산한다. 이 세계에는 부분 대상으로서의 욕망 기계들과 욕망의 흐름의 다양성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 기계들이 여러 가지 욕망의 흐름들에 접속하고, 그것을 채취하고 스스로도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는 것, 즉 생산의 작동을 끊임없이 생산물에 접목해가는 것, 이것이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 특성이다.

 둘째, 이접적 종합, 등록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모든 기계는 그 안에 일종의 코드를 짜넣고 있지만, 그 코드는 매우 다양한 단편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단편들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고 각각 다른 기계에 접속되며, 그로부터 잉여가치(코드의 잉여가치)를 끌어낸다(이탈-절단). 그 예로서 거론되는 것이 말벌과 난초의 코드의 접속과, 그것에 의한 코드의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난초는 말벌이 꽃가루를 수술에서 암술로 운반하지 않고는, 자신의 재생산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난초와 말벌의 생식기를 본 따 말벌의 이마주가 되며, 말벌의 코드와 접속되며, 그로부터 수분과 재생산이라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각각의 연쇄는 다른 여러 가지 연쇄의 단편을 포착하고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는데, 이것은 바로 난초의 코드가 말벌로부터 그 모양[]추출하는듯하다. 이것은 코드의 잉여가치의 현상이다”(AO, p.47/()77-78).[각주:17] 이런 의미에서 욕망 기계와 다른 욕망 기계의 횡단적 접속에 있어서, 기계 사이에서의 코드의 등록, 전달은 이접적(disjonctif)이며, 코드 사이의 차이는 항상 유지되고 있다. 코드의 단편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며, 다른 코드와 접속되어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드란 하나의 시니피앙 연쇄’(라캉)로는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다양체이며, 결코 단일한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니피앙의 연쇄 혹은 연쇄들을 말려들게 하는 무의식의 코드라고 하는, 저 풍부한 영역을 발견하고, 이것에 의해 분석 방식을 변용한 공적은, 라캉의 것이다(이것에 관핸 기본 텍스트는 도둑맞은 편지[「『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에크리수록]이다). 이 영역은 그 다양성을 위해서, 실로 기묘한 것이 되며, 하나의 연쇄로서, 혹은 하나의 욕망적 코드로서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된다. 이런 연쇄는 여러 가지 기호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시니피앙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기호들 자체는 시니피앙이 아니다. 코드는 일반의 언어활동보다도, 은어와 닮았고,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거기서 기호는 임의의 성질을 가지며, 그 지지체와는 무관한 것이다(혹은 오히려 이 지지체 쪽이 기호와 무관한 게 아닌가. 지지체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기호는 정해진 평면을 갖지 않고, 모든 단계에서, 모든 접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각각의 기호는 자기 자신의 언어를 말하며, 다른 기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종합을 실현하지만, 이런 종합은 그 구성요소의 차원에 있어서는 간접적이기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만큼 갈수록 횡단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인 종합을 수립한다. 이런 연쇄들에 고유한 이접의 작동은 아직 배타적이 아니며, 배타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억지하는 것이나 억압하는 것의 작동에 의한다. 억지하고 억압하는 것은 지지체를 규정하고 특정한 인칭적 주체를 고정하려 한다. (AO, p.46/()76-77).

 

라캉 이론에서 시니피앙 연쇄는 특권적 시니피앙인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에 의해 통제된다. 그런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의 통제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인칭적 주체를 조직한다. 라캉은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의 시니피앙의 정의(그것에 관해 이것 이상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음과 꼭 같다. «하나의 시니피앙, 그것은 다른 어떤 시니피앙에 대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것이다따라서 이 시니피앙은 다른 모든 시니피앙이 그것을 향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시니피앙이 될 것이다. 이것은 즉 이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다면, 다른 모든 시니피앙은 아무것도 대리 표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도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대리 표상되기 때문이다.”[각주:18]하나의 시니피앙”, 즉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는 다른 모든 시니피앙을 대리 표상하고, 따라서 주체를 대리 표상한다. 라캉에게서는 이런 결여의 시니피앙을 부재의 중심으로서 고정적인 인칭적 주체가 조직화되고, 주체의 안정성이 확보된다.

 반면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코드란 시니피앙이 아니라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그것은 결코 특권적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해서는 통제되지 않는다. 코드란 순수한 다양체이다.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란 다양한 코드의 등록 표면에 불과하다. 그런 다양한 코드와 이것들의 접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이런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라는 가정으로부터, 연접적 종합, 소비의 생산이라는 제3의 특성이 도출된다.

 

욕망 기계의 세 번째 절단은 잔여-절단 또는 잔재-절단이며, 기계의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으로서 산출하는 절단이다. 그런데 이 주체가 특정한 인칭적인 자기 동일성을 갖지 않으며, 또한 이 주체가, 기관 없는 신체의 미분화 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이 신체를 횡단하려고 하면, 이 주체가 단순히 기계의 곁의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 자체 분할된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흐름으로부터의 채취와 연쇄로부터의 이탈에 대응하는 부분들이, 이 부분에 각각 귀속해간다. 이리하여 주체는 자신이 통과하는 상태들을 소비하고, 이런 상태들로부터 탄생한다. , 여러 가지 부분들로 이루어진 한 부분으로서, 이런 상태들의 하나하나로부터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런 부분들 각각은 한순간에 있어서의 기관 없는 신체의 내용을 이룬다. (AO, pp.48-49/()80-81).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주체는 욕망 기계들이 욕망의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그 기계의 곁에, 잔여로서 생산된다(잔여-절단).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의식에 의해 중심화된 인칭적 주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으로부터 구성된 탈중심화된(AO, p.27/()47) 주체, 즉 무의식의 주체이다. 또한 이 주체는 다양한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시시각각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이다. 따라서 그러한 주체는 팔루스라는 특권적 시니피앙에 의해 안정적으로 조직화된 라캉적인 인칭적 주체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한다.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곧 탈중심화되고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의 철저한 생산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코 결여’, ‘거세같은 부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성변화의 원리 자체이다.

 

III. 오이디푸스화와 욕망하는 생산의 억압

욕망 기계들은 항상 생산의 작동을 멈추지 않으며 상호 접속을 반복하며, 이로부터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에 의해 구성된 생성변화의 주체를 생산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아래서의 오이디푸스화가 그런 철저한 생산성을 억압한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억압되는 것일까? 그것은 욕망의 생산의 작동을 억압하고 유순한 주체(복종화된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권력이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만일 그것이 해방되면 곧바로 권력이 전복되는 듯한,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든, 모든 욕망의 입장은 사회의 기성 질서를 규탄하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은 거꾸로 비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욕망은 무엇인가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사회의 여러 부문의 전체를 떨구어 내버리지 않고 정립되는 욕망 기계들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모종의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욕망은 그 본질에 있어서 혁명적이다”(AO, p.138/()223).

 이런 입론의 전제로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사회적 억제(repression)’와 심적 억압(refoulement)’을 구별한다. 사회적 억제는 권력장치들에 의한 작용이며, 권력에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의 억제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사회적 억제는 단순히 자신만으로 완결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 억제는 그 도구로서 심적 억제를, 즉 오이디푸스화를 필요로 한다.

 

라이히의 힘은 억압이 어떻게 억제에 의존하는가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 두 가지 개념의 혼동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억제는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를 이 억제적 구조에 있어서 재생산하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바로 억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억제는 문명과 외연을 함께 하는 가족적 억압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게 아니라, 가족적 억압 쪽이 특정한 사회적 생산형태에 내속하는 억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억제는 단순히 욕구나 이익만으로 향하는 게 아니며, 성적 억압을 통해 욕망으로도 향한다. ‘한 사회의 경제체제의 집단심리에 의한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가족은 바로 이 성적 억압을 의탁받은 대행자인 것이다. (AO, pp.140-141/()227).

 

사회적 억제는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생산, 재생산하고, 사회적 권력관계(계급관계나 착취의 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해, 심적 억압(오이디푸스화)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화로부터 사회적 억제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로, 사회적 억제와 권력관계의 재생산의 필요로부터 심적 억압으로서의 오이디푸스화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렇게 가족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화야말로 권력의 대행자로서,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형성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질 것이다. 첫째, 억제적인 사회적 생산은 억압적인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의해 대행된다. 그리고 둘째, 욕망적 생산이 치환된 이미지가 억압적 가족이며, 이 이미지가 억압된 것을 가족적, 근친상간적 충동으로서 표상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조작은 사회적 억제=심적 억압이라는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AO, p.142/()230). 욕망적 생산은 잠재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그것을 억제하고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이, 복종이 욕망되는 심적 메커니즘, 즉 억압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은 일체를 이룬다. 사회적 생산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억제를 행사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이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룬다고 한다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대해 단순히 억압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작동을 걸고, 욕망적 생산이 스스로 억제=억압을 욕망하는 체제를 만들어낸다.

 

사실 사회적 생산은 한정된 조건들에 있어서는 오로지 욕망적 생산 자체인 것이다. 사회적 영역은 직접적으로 욕망에 의해 횡단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욕망의 산물이며, 리비도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투자하기 위해, 그 어떤 매개도, 그 어떤 승화도, 그 어떤 심리적 조작도, 그 어떤 변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저 욕망과 사회적인 것이 존재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억압적, 굴욕적 형태도 욕망에 의해 생산되고, 욕망으로부터 출현하는 조직에 있어서 생산된다. 바로 우리는 이 조직이 어떤 조건에서 출현하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는 스피노자가 일찍이 제기했던 것과 똑같다(라이히는 그것을 재발견했다). , ‘인간은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왜 우리는 더 많은 세금을! 더 적은 빵을!”이라고 외치게 될까? 라이히가 말하듯이,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파업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굶주린 사람들이 반드시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파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몇 세기 전부터 착취, 굴욕, 노예상태를 견디며 타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조차 이것들을 원하게 될까? 라이히는 파시즘의 성공을 설명하려 하며, 대중의 오해나 착각을 그 원인으로 언급하기를 거부하고, 욕망의 관점에서, 욕망의 말로 설명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라이히가 이때만큼 위대한 사상가였던 적은 없다. 대중은 일정한 때, 일정한 상황에서 파시즘을 욕망했던 것이며, 바로 이것, 군중심리적 욕망의 이 도착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AO, pp.36-37/()62-63).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권력에의 복종화마저도 복종화의 욕망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정치철학의 근본문제란 인간이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스피노자, 신학정치론)라는 것이며, 라이히는 그것을 대중의 파시즘에 대한 욕망이라는 형태로 재발견했다(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런 의미에서 권력에의 복종화의 사회적 생산이란,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의 사회적 생산이다. 오이디푸스적 가족이란 그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 권력의 대행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어떤 방식으로 심적 억압을 부과하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가? 들뢰즈=가타리는 그것을 세 가지 과정으로부터 설명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접속적 종합이란 욕망 기계들이 횡단적으로 서로 접속과 절단을 반복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 과정을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 비특수적 사용이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 포괄적, 특수적 사용으로 포섭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이고 비특수적 사용이 오이디푸스적,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대립했다. 이 포괄적-특수적 사용은 양친적과 혼인적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니며, 이것들에는 오이디푸스 삼각형과, 이 삼각형의 재생산이 대응했다. 이 전체적-특수적 사용은 단락적인 일반화라는 착오에 기초하여, 이것이 결국 오이디푸스의 형상인을 이루고 있으며, 그 부당성은 다음과 같은 조작의 전체를 걸었다. , 시니피앙 연쇄로부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으로서의 초월적 완전 대상을 추출한다는 조작이다. 이리하여 연쇄의 전체가 이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의존하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은 욕망의 각각의 위치에 결여를 할당하며, 욕망을 법에 용접하여, 연쇄로부터 이탈하는 것의 환영을 준 것이다(AO, p.131/() 211-212).

 

접속적 종합의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의해 아이들은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동성의 부모로 동일화하며(오이디푸스적 삼각형화), 심지어 자신이 부모가 되는 이성애적인 혼인관계에 있어서 오이디푸스를 재생산한다. 오이디푸스화란 다양체로서의 시니피앙 연쇄 혹은 코드를, 특권적인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이란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이며, 그것은 욕망에 결여를 할당하고, 욕망을 법에 종속시킨다. 그것에 의해 욕망의 다양성이 억압된 자기 동일적 자아가 형성된다.

 둘째로, 이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각각이 스스로에게 독자적인 코드를 내포하지만, 그 코드는 다양하며, 항상 단편화되어 다른 코드와 접속되며, 이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는 그런 코드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둘째, 이접적 종합의 포괄적 또는 무제한적 사용은 오이디푸스적, 배타적, 제한적 사용에 대립한다. 이 제한적 사용은 심지어 상상적과 추상적이라는 두 가지 극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에 의해 상관적으로 규정된 두 항 사이, 즉 배타적 상징적인 구별과, 미분화 상태의 상상계라는 두 항 사이에서만, 선택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 사용은 이 때, 오이디푸스의 작법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중구속의, 즉 이중의 막다른 골목의 오류 추리이다. (AO, p.131/()212).

 

이접적 종합의 배타적-제한적 사용, 즉 오이디푸스적 사용이란 상징계의 법을 수용하거나 혹은 미분화 상태의 상징계로 떨어지거나,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중구속이다. 이 두 개의 선택지는 단순히 외관상의 것이며, 실제로는 상징계의 법, 즉 사회적인 법을 받아들이는 수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런 조작에 의해, 주체는 상징계의 법=사회적인 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한다.

 셋째, 연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이것들이 서로 접속되고, 여러 가지 흐름들을 소비함으로써, 그 곁에, 항상 생성변화를 계속 하는 비인칭적인 주체를 생산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성변화의 주체의 생산을,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것은 격리적, 일대일 대응적 사용으로 변용된다.

 

셋째로,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이고 다의적 사용은 격리적이고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대립한다. 여기서도 또한 무의식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이 일대일 사용은, 말하자면 두 개의 계기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인종주의적, 국가주의적, 종교적 등등의 계기이며, 격리에 의해, 오이디푸스가 언제나 전제하는 출발점의 집합을 구성한다. 이것은 완전히 암암리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가족적 계기이며, 사상(寫像, application)에 의해 도달점의 집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상(寫像)이라는 세 번째 오류추리가 생긴다. 이 오류추리는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군의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수립하며, 이런 방식으로 리비도 투자를 영원한 아빠-엄마로 환원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불가피하게 하며 오이디푸스의 조건을 고정한다. (AO, pp.131-132/()212-213).

 

연접적 종합의 격리적-일대일 대응적 사용은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대일 대응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 일대일 대응에 기초하여 욕망적 생산에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사상(寫像)하며, 욕망적 생산의 다양성을 억압한다. 그것에 의해 여러 가지 특이성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성변화하는 비인칭적 주체는, 오이디푸스화된 인칭적 주체로 개별화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일대일 대응화가 실현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개체화뿐만이 아니다. 오이디푸스화는 제반 주체들을, 인종, 국가, 가족 같은, 어떤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 아래에 통합된 집단으로 동일화시킴으로써 예속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속집단(groupes assujettis)’이란 주체 집단(groupes sujets)’에 대립하는 개념이며, 둘 다 가타리가 정신분석과 횡단성의 논문들에서 도입한 개념이다.[각주:19] 들뢰즈는 가타리의 정신분석과 횡단성에 붙인 서문에서,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속집단은 총체로서 예속적일 뿐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예속적이라는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속집단을 특징짓는 위계질서, 수직적 혹은 위계형 조직은 집단이 무의미, 죽음, 혹은 분해 등으로 내파하는 일체의 가능성을 뿌리치고, 창조적 절단의 발전을 가로막고, 다른 집단의 배제 위에서 수립되는 자기 보존의 메커니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예속집단의 중앙집권주의는 구조화, 전체화, 통합화라는 과정을 거쳐 작용하며, 진정한 집단적 언표행위의 조건들을 대신해, 현실과 동시에 주체성으로부터도 절단된, 틀에 박힌 언표의 배치를 초래한다(집단적 오이디푸스화 작용, 초자아화, 거세 효과 같은 상상 위의 현상이 생기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거꾸로 주체집단은 전체성이나 위계를 뿌리치는 횡단성의 계수에 의해 정의된다. 주체집단은 언표행위의 행위자(agent)이며, 욕망의 지지체이며, 제도적 창설의 구성요소이다. 주체집단은 그 실천을 통해, 스스로의 무의미, 죽음, 또는 절단의 극한에 도전하길 마지 않는다.”[각주:20]예속집단이란 특히 프로이트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각주:21]에 영향을 받은 개념이며, 어떤 초월적 중심으로의 동일화에 의해 위계질서적, 수직적, 중앙집권적으로 통합된 전체성을 가리킨다. 그에 반해 주체집단은 그런 주체성이나 위계적 통합을 해체하는 분자적 다양성과 횡단성에 의해 정의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주체집단예속집단을 집단 환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의하는 점이다.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 사이의 수많은 구별을 전개하면, 결국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오히려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이 존재할 뿐이다. 오이디푸스와 거세는 상상계의 구조를 형성하며, 이 구조를 따라 예속 집단의 구성원은 자신들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혹은 환상화하도록 규정된다. 게다가 이런 두 종류의 집단은 끊임없이 서로로 이행하는 상태에 있다고 말해져야 한다. 주체 집단은 끊임없이 종속의 위험에 처해 있으며, 예속 집단이 있는 경우에는 혁명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어떻게 환상으로부터 배타적인 이접의 방향만을 끄집어내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환상을 그 개인적, 혹은 의사-개인적인 차원 속으로 내리누르고 있는지를 볼수록, 우려해야 할 것은 없다. 이런 개인적, 의사-개인적 차원은 본성적으로 환상을 예속 집단에 관계시킬 뿐이며, 정반대의 조작을 행하여 환상을 집단의 차원에서 포착하며, 환상 속에서, 집단의 혁명적 잠재성의 숨겨진 요소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AO. pp.75- 76/() 124. 강조는 인용자)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개인 환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실제로는 집단 환상이다. 그들은 제도론적 정신 분석에 의거하면서,[각주:22]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집단 환상만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 형성은 바로 집단 환상의 메커니즘에 의거하고 있다. 주체 집단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에 의해 개인 환상으로 파악된 것이야말로 예속 집단의 형성에 본질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 주목하자. 오이디푸스화란 바로 개인화이며, 가족 환상이라는 개인 환상의 형성 메커니즘인데, 그런 가족 환상의 형태를 통해서만 개인들은 개인화된 채의 상태에서 아버지의 이름 같은 초월론적 시니피앙에 예속화된다. 그리고 그 초월론적 시니피앙이 국가, 인종, 신 같은 사회적인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전위됨으로써 개인들은 예속 집단의 전체성(과 그 집단 환상)에 통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심적 억압의 형성이란 바로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있어서의 개인화를 통한 예속 집단에의 예속화이며, 개인화된 주체들을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통합하는 예속 집단의 형성과 동의어이다.[각주:23] 이런 의미에서 개인 환상으로서의 가족 환상은 틀림없이 집단 환상인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조작은 주체들을 예속 집단으로 통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오이디푸스적 조작의 주체들로의 사상(寫像)은 이렇게 예속 집단을 형성하고, 예속 집단의 규정들을 이루는 리비도 투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IV. 자본주의와 사건의 생산

욕망 기계들의 철저한 생산성은 반생산을 초래하는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억제=억압되며, 개인들은 예속 집단으로 전체화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화를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억압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자본주의와 오이디푸스화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사건의 생산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다.

우선,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정의를 보자.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화폐-자본의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생산의 흐름과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노동의 흐름 사이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한다. 이 정의는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주의의 성립, 즉 자본주의와 토지로부터 떼어내진 자유로운 노동자와의 만남[마주침]이라는 설명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의 운동에 의해서 정의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가 전자본주의에서의 코드를 대신해, 화폐라는 추상량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화폐라는 추상량의 공리계는 탈영토화의 운동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며, 탈영토화된 영역에서 욕망의 흐름을 해방한다(AO. p.41/()68-69).

 이처럼 자본주의란 흐름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즉 절대적 한계로 향하는 분열증적 운동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가 해방된 흐름을 공리계에 의해 억제하고, 흐름을 내재적, 상대적 극으로 닫아버린다. 자본주의는 이 내재적 한계를 확대시키면서 재생산하며, 흐름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분열증은 자본주의 자체의 외적 극한, 즉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경향의 종착점인데, 자본주의는 이 경향을 억제하고 이 극한을 거절하고 치환하며, 이것을 자기 자신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확대하는 규모에 있어서, 이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탈코드화하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한다”(AO, p.292/()62).[각주:24]

 이처럼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조절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공리계에 요청되며,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사회적 힘들의 장에 내재하는방식으로 조절하고, 자본주의의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부단한 경제 발전과 자본의 탈영토화를 추진하는) 것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운동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그것을 상대적 극한 속에 억눌러둔다(사회 혁명을 억제한다)(AO, pp.299-300/()72-74).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국가도 복지국가도 둘 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국가조차도, 이런 자본의 공리계의 틀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세 종류의 국가는 모두, 국가가 자본의 운동의 중요한 조절 역할을 맡으며,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가 자본의 운동에 어떤 개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와 복지국가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직접 주도하고, 노동자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자본이 운동을 조절한다. 또 신자유주의 국가는 자본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억제하고 자본의 운동의 게임의 규칙(시장에서의 경쟁 상태)을 만들어낸다는 방식으로 자본의 운동을 조절한다.[각주:25]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의 운동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억압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체가 자본-화폐로서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 추상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가족은 자신의 사회적 형태를 경제적 재생산에 부여하기를 그만두고, 사회적 장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가족의 사인화(privatis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족이 사회적 장 바깥에 놓인다는 것은 가족에게 최대의 사회적 호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 장 전체가 가족으로 사상(寫像)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조건이기 때문이다”(AO, p.314/() 96). 개별 인물은 자본주의의 공리계에 의해 산출된 사회적 인물(예를 들어 자본가, 노동자)이지만, 그들은 동시에 가족에 있어서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 중 어느 하나라는 사적인 인물이다. 오이디푸스화의 조작이란, 개인의 첫 번째 차원의 사회적 이미지를 그 두 번째 차원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사상(寫像)하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개인들은 권력에 예속된 주체로 식민지화된다.

 

사회적 장에서 각자는 언표행위의 집단적 대행자로서, 혹은 생산, 반생산의 대행자로서 작용하는 작용받지만, 이 사회적 장은 오이디푸스의 위에 포개진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에서 이제 각자는 자신의 구석에 갇히고, 각자를 개체로서 분할하는 선에 의해서 절단된다. 각자는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로 분할되는 것이다. 언표의 주체는 사회적 인물이고, 언표행위의 주체는 사적 인물이다. ‘그 때문에이것은 너의 아버지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의 어머니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다. 자본주의의 여러 가지 연접이 사인(私人)이 된 인물로 사상(寫像)되는 한에서, 이 연접에서 가족의 연접이 귀결된다. 아빠-엄마-, 이것이 도처에서 확실히 발견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기에 사상(寫像)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의한 통치,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분열을 이용하고 흐름을 우회시키는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혼성된 이미지, 이미지 위에 포개지는 이미지, 이런 조작의 결과, 각자의 작은 자아는 아버지-어머니에 관계되며, 진정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A, pp.316-317/()99)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사회적 인물,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는 사적 인물, 즉 개인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포개지며 사상(寫像)된다. 그것에 의해 주체는 언표의 주체(사회적 인물)와 언표행위의 주체(사적 인물)의 두 층으로 분할된다. 라캉에 따르면 언표행위의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이며, 그것은 의식의 주체에 대해 상위에 있으며, 의식의 주체를 초월론적인 방식으로 통제한다.[각주:26]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라캉적 주체 개념이 사실상 사회적인 예속화의 메커니즘을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언표행위의 주체, 즉 자아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란 오이디푸스화된 초월론적 자아이며, 그것은 상위로부터 언표의 주체,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를 통제한다. 그리고 초월론적 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바로 상징계의 법=사회적 법, 즉 예속화의 법을 체내화한 심급이다.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푸코)은 바로 오이디푸스화된 주체의 형성에 의해 성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야말로 권력에 순종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통치하는 예속화된 주체 자체이며, 그런 주체는 욕망의 생산성을 스스로 심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사회적 억제 메커니즘에 스스로 복종할 것을 욕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화란 사회적 통치의 메커니즘이며, 예속화의, 그리고 예속 집단의 형성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오이디푸스화되고 예속화된 주체와, 이들 예속화된 주체로 이루어진 위계적이고 몰적인 예속 집단을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으로 이루어지며, “집단적 언표행위의 대행자agent”의 횡단적이고 수평적 연결로 이루어진 주체 집단으로 변용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어떤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한까지 가속화하고, 그것이 억제하고 있는 욕망의 역능을 해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자본의 운동의 내적 극한을 확대하고 그것을 절대적 극한으로 접근시키며, 욕망의 흐름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따라서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무의식적 욕망의 흐름을 전면적으로 해방하는 분열증적, 절대적 극한으로 이를 것이다. 그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수평적 다양체로서의 주체 집단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말단으로부터 계속 도주한다. 자본주의의 생산, 그 예술, 그 과학은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여러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이것들의 흐름은 단순히 대응하는 공리계에 종속할 뿐 아니라 공리계의 그물망을 관통하고, 재코드화나 재영토화의 밑을 뚫고, 몇 가지 흐름을 교통시킨다. 이번에는 주체 집단이, 단절을 통해서 예속 집단에서 파생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흐름을 틀어막고 흐름을 절단하고 절단을 멀리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의 흐름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자본주의에 반항하고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여러 가지 분열에 따라 스스로를 계속 절단한다. 자본주의는 내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대비가 있으나, 변함없이 외적 극한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외적 극한은 내적 극한이 확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본주의에 침입하고, 내부로부터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위험을 증가시킨다. 그 때문에 도주선은 매우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게 된다. , 도주선은 사회적 장에 대한 한 가지 투자를 구성하는 것이며, 이 투자는 반대 방향의 투자에 못지않게 완전한 것, 전체적인 것이다. 파라노이아적 투자와 분열 기질적 투자는, 말하자면 무의식적 리비도의 투자가 대립하는 두 극을 이룬다. 한쪽 극은 주권 조직체나 이 주권 조직체에서 발생하는 군() 거세 집합에 욕망적 생산을 종속시키는 극이며, 다른 한쪽 극은 반대의 예속집단을 실현하고, 권력을 전복하고,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다양체에 군거성 집합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AO, p.451/()297-298)

 

자본주의의 외적 극한이란 분열증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의 가속에 수반되는 이 분여증적인 것의 침입이야말로 긍정적인 도주선의 형성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가속은 욕망의 해방을 가속시키고, 자본주의를 불안정화시키며,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을 긋는 것을 가능케 한다. ᄄᆞ라서 예속집단에서 주체집단으로의 변용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적 생산의 가속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충실 신체로서의 새로운 사회체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사회적 충실 신체의 또 다른 국면으로 이행해야 한다. 거기에는 욕망의 분자적 조직체가 작동하고 등기되며 새로운 몰적 집합을 자신에게 예속시킬 것이다. 이곳에서만, 우리는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과 투자(la coupure et l’investissement revolutionnaires inconscients de la libido)에 도달한다. 그런데 다만 인과관계의 단절(rupture de causalité)과 맞바꿔서, 이 단절에 올라타 이것은 실현된다(AO, pp.452/()299)

 

자본주의의 가속에 의한 욕망의 해방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인과관계의 단절”,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 즉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변용이 무의식적 절단으로 불릴까? 그것은 이 절단전의식적 혁명”, 즉 계급과 이익 수준에서의 혁명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혁명”,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집단성의 형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각주:27] 예속 집단에서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은 단순히 계급의 이익에 의해서는 발생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 집단의 구조는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이라는 바로 무의식의 수준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리라.

 

혁명적 잠재성이 어떻게 현동화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잠재성을 품은 전의식적인 인과성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어느 특정한 순간에서의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이다. 이것은 곧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즉 인과관계의 단절이며, 이 단절은 현실적인 것에 밀착하여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낳는다.(AO. pp.453-454/()301)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최종적으로 욕망의 흐름을 절대적 극한으로까지 가속시키고, 자본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예속 집단을 물어 찢으며, 그것을 주체 집단으로 변용시키는 무의식적 절단,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초래하는 것이다. 욕망의 역능이, 그리고 욕망의 역능에 의거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이,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사건을 생산한다.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의 절대적 해방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에게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욕망이라는 원인(스피노자적으로 말하면 내재원인’)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각주:28] 그리고 그때 사건의 생산은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비위계적인 횡단적 집단성의 실현이다.[각주:29]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적 정치를, 단순히 사건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런 사건의 생산의 논리, 달리 말하면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이라는 전략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치바 마사야(千葉雅也)의 표현. 다음을 참조.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 河出書房新社, 2013. [김상운 옮김, 󰡔너무 움직이지마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 바다출판사, 2017년 근간 예정.] [본문으로]
  2. Alain Badiou, Deleuze : la clameur de l’être, Hachette, 1997, p.20. [본문으로]
  3. Slavoj Zizek, Organs without Bodies: Deleuze and Consequences, Routledge, 2004, p.20. [본문으로]
  4. 바디우파 철학자인 피터 홀워드도 바디우-지젝과 거의 같은 전략에 의거하며(혹은 그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라) 들뢰즈 철학은 잠재적 창조행위의 철학이며 “세계의 변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cf. Peter Hallward, Out of This World: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reation, Verso, 200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ai 68 n’a pas eu lieu»,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본문으로]
  6. Fra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lisme en politique)», in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sous la direction d’Erlc Alliez, Institut Synthélabo, 1998, p.347. [본문으로]
  7. Ibid., p.346. [본문으로]
  8.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13-14. [본문으로]
  9. Ibid., pp.13-14. “미셸 부르이에가 스토아학파의 사고를 빼어나게 재구성하여 말했듯이, ‘칼이 새로운 살을 자를 때, 전자의 물체는 후자의 물체 위에서 새로운 특성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속성을, 잘려진다는 속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속성(attribut)은 어떤 실제적인 형질(qualité)도 지시하지 않는다. … 반대로 속성은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말하자면, 속성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 이 존재양식은 이른바 극한에 있어서, 존재자의 표면에 있어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존재양식은 존재자의 본성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 존재양식은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수동성은 능동을 겪은 물체적 본성을 상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양식은 그저 단순히, 성과이며, 존재자로는 분류되지 않는 효과이다. … 그때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으나 (스토아학파의 구별에서는) 기본적으로, 존재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한편으로 깊은 실제적인 존재자, 힘이 있으며, 다른 쪽에는 존재자의 표면 위에서 상연되고 끝도 없이 많은 비물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사실의 면이 있다.” [본문으로]
  10. Michael Hardt / Antonio Negrl, Commonwealth,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pp.60-61. [본문으로]
  11. 에티엔 발리바르도 다음의 논고에서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이 사건(에 대한 충실함)을 특권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cf. Etienne Balibar, «La philosophie et l’actualité : Au-delà de l’événement?», in Le moment philosophique des années 1960 en France. sous la direction de Patrice Maniglier, PUF, 2011. [본문으로]
  12.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144. 또 이 점에 관해 들뢰즈, 바디우와의 관계를 포함해 네그리를 논한 다음의 중요한 작업에서 시사를 얻었다. 廣瀬純, 『アントニオ•ネグリ-革命の哲学』, 青土社, 2013년. [본문으로]
  13. ‘절단’은 데리다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며, 이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분석한다. ‘절단’ 개념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Machine et structur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essais d’anaylyse institutionnelle, Maspero, 1972 (rééd. Découverte, 2003). ; Félix Guattari, Écrits pour l’Anti-Œdipe, Lignes manifeste, 2004. [본문으로]
  14.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L’Anti-Œ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1, Minuit, 1972/73, p.382. 강조는 인용자. 이하 ‘AO’로 약칭하고 본문 속에 원서, 번역서 쪽수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15. 라캉에 의한 분열증 정의에 대해서는 세미나 3권 『정신병』(Jacques Lacan, Le séminaire, livre III : Les psychoses, 1955-1956, texte établi par Jacques-Alain Miller, Seuil, 1981을 참조.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분열증’, ‘분열분석’ 개념의 형성에는 가타리의 역할이 크다. 이 점에 관해서는 추후 논의한다. [본문으로]
  16. Gilles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Minuit, 1967, pp.27-28. 이 점에 관한 자세한 것은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김상운 옮김, 난장, 2장 참조. [본문으로]
  17. 다음도 참조. Félix Guattari, Ecrits pour l’Anti-Œdipe, pp.257—58, 384. ;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 2, Minuit, 1980, p.17. [본문으로]
  18.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e de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 in Ecrits. Seuil, 1966, p.819. [본문으로]
  19.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troduction à la psychothérapie institutionnell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0. Gilles Deleuze, «Préface», in Félix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p.VI. [본문으로]
  21. Sigmund Freud,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in Gesammelte Werke, Bd. 13, Fischer, 1999. [본문으로]
  22. “환상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론적 정신분석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어디까지나 집단 환상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두 종류의 집단 환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 동일성이 두 개의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욕망기계가, 이것을 형성하는 거대한 군중적 총체에 있어서 파악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기계들이 이것을 형성하는 욕망의 기본적 힘들에 관계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집단 환상에서는 리비도가 현존의 사회적 장을, 그 가장 억제적인 형태도 포함해 투자할 수 있으며, 혹은 완전히 거꾸로, 리비도가 역투자를 발생시키고, 이 현존의 사회적 장에 혁명적 욕망의 접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AO, p.38/(上)64頁). 이하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3. “오이디푸스는 집단에의 통합의 한 수단이며,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체를 재생산하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행시키기 위한 적용의 형태를 취하는 것도 있다면, 정비된 막다른 골목 속에 욕망을 봉쇄하는 신경증적 축적에 빠져드는 것도 있다. 그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예속 집단 속에서 개화하며, 여기서 기성 질서는 이 집단의 억제적 형태 자체 속에 투자된다. 따라서 예속 집단의 형태들이, 오이디푸스적 투영과 동일화에 의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바로 오이디푸스의 수많은 적용이 출발점의 집합으로서의 예속 집단의 규정들에 의존하며, 이것들의 리비도의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AO, p.123/(上)199頁). [본문으로]
  24. 자본주의에 관한 다음의 서술은 아래의 맑스의 서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순환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동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운동은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3, Dietz, 1962, S.167 ; AO, p.296에서 인용).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이러한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수단은 이 한계를 다시 새롭게, 게다가 더욱 막강한 규모로 자신에게 가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5, Dietz, 1964, S.260 ; AO, p.274, n.82에서 인용. [본문으로]
  25.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다음에서 상술했다. 『新自由主義と権力-フ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人文書院、2009년. [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본문으로]
  26. cf.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u dé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in Ecrits, p.800. [본문으로]
  27. “리비도가 새로운 신체에 결부될 때조차, 또한 전의식의 관점에서 보고, 실제로 혁명적인 목표나 종합에 대응하는 새로운 권력에 결부될 때조차도, 무의식적인 리비도 투자 자체가 혁명적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똑같은 절단이, 무의식의 욕망의 차원과 전의식의 이익의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전의식적 혁명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체제에 관련되는데, 이 체제는 새로운 목표와 이익을 창조하고 분배하고 만족시킨다. 그런데 무의식적 혁명은 단순히 그런 변화를 권력 형태로서 조건짓는 사회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체에서의 욕망적 생산의 체제에, 즉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전복된 권력으로서의 욕망적 생산 체제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흐름과 분열의 똑같은 상태가 아니다. 전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두 개의 사회체 사이에 존재하며, 혁명적 사회체는 새로운 코드나 이익의 새로운 공리계의 안에 욕망의 흐름을 도입하는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무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사회체 자체 속에 있다. 이 사회체는 긍정적인 도주선을 따라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힘을 가지고, 또한 생산적 절단의 절단에 따라 욕망의 흐름을 다시 재단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AO, p.416/(下)244-245頁). [본문으로]
  28. 들뢰즈=가타리의 이러한 ‘내재 원인’에 기초한 ‘사건의 생산’의 전략을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경향성을 따른 형태로 현대적으로 부여해 보여준 것이 네그리=하트이다.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상은 20세기 말의 수십년 동안이 공장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 이행했다. 비물질적 노동이란 지식, 정보, 커뮤니케이션, 관계성, 정동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가리키며, 지식, 언어 코드, 정보를 산출하는 지적, 언어적 노동과 돌봄(care)에 의해 정동을 산출하는 정동노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비물질적 노동에 있어서 다중은 갈수록 서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산출하면서 협동하며, 지금까지 생산되어 온 «공통적»인 지식, 정보, 관련성으로부터 새로운 지식, 정보, 관계성을 창출한다. 네그리=하트는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을 산출하는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생산형태가, 다중이 수립해야 할 자기통치로서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이것을 실현하는 혁명적 절단의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비물질적 노동의 경향적 우위성이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사건의 생산’의 원인)을 실현하며, 혁명적 절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중” 개념은 “주체집단” 개념을 스피노자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특히 다음을 참조. Micheal Hardt / Antonio Negri, Multitude :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Penguin Press, 2004. [본문으로]
  29. 이치다 요시히코(市田良彦)는 『혁명론 : 다중의 정치철학 서설(革命論──マルチチュードの政治哲学序説)』, 平凡社新書, 2012년에서 이런 “사건”을 푸코의 말을 사용해 “반사목혁명”이라고 불렀다. “반사목혁명”(révolution antipastorale)이란 사목권력에 의해 “전체적이면서도 개별적으로” ― 즉 개인화를 통해 전체화하는 혁명을 가리킨다. 푸코는 1977-78년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반사목혁명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후의 “주체의 자기 통치”의 문제계에 있어서, 이런 혁명과 탈예속화의 가능성을 구상했다. cf.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édition établie sous la direction de François Ewald et Alessandro Fontana, par Michel Senellart, Gallimard / Seuil, 284, p.15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