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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02 피터 홀워드, <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1/2)

* 피터 홀워드가 2015년 3월 15일부터 일본을 방문해서 두 번의 강연을 벌였다고 한다. 간단한 정보는 여기를 클릭. http://www2.gensha.hit-u.ac.jp/TransA/lecture20150315.html

* 이 두 번에 걸친 강연 내용이 최근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 『다양체』에 수록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목차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독서의 습관으로 틈틈이 옮겨적을 예정이다. 우선 두 번째 강연에 해당되는 <들뢰즈 이후의 정치>부터 옮긴다. 일본에서 이 강연의 제목은 「ジル・ドゥルーズと政治(”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였으나, 아래의 잡지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수록됐다. ドゥルーズ流の政治/ドゥルーズ後の政治|ピーター・ホルワード|小泉義之訳. 일본과 한국에서는 번역어, 문장 구사 등이 다르기 때문에 홀워드의 원문을 구해서 대조해야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 구태여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 아래의 본문을 보면 나오는 주라비슈빌리[주라비크빌리]의 글은 정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게재하다가 중단한 이치다 요시히코의 <혁명론>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홀워드와 교차하면서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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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1/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최근 25년 동안, 아무래도 질 들뢰즈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대륙철학이나 프렌치 씨어리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들뢰즈 저작의 양상들을 둘러싸고, 이채로운 수의 책과 논문이 넘쳐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실제로 들뢰즈에 관한 전문연구서와 들뢰즈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책을 도서관의 빠른 검색으로 검색해보면, 이제 1200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에딘버러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시리즈 Deleuze Connections, 들뢰즈와 디자인, 들뢰즈와 건축, 들뢰즈와 교육, 들뢰즈와 인종, 들뢰즈와 공간, 들뢰즈와 그 밖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25권을 채웠고, 앞으로도 늘어날 예정입니다.[각주:1]

* 각주1에 달려 있는 주소는 다음으로 변경되었다. https://edinburghuniversitypress.com/series-deleuze-connections.html

이 일련의 제목이 반영하고 있듯이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곳은 차치하더라도, 유럽과 앵글로색슨의 근처에서도 많은 독자가 들뢰즈에게 매료되어 온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정치사상가로서의 그 중요성임을 보여주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파리나 런던의 대학에서 현대유럽철학이나 비평이론의 어떤 연구과정을 전공하려고 해도, 어김없이 들뢰즈와 공저자인 펠릭스 가타리에 관련된 정치적 모티프의 한 쌍과 다소간 직접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만나온 이론 지향의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그 상당수에게는 미시정치, 탈영토화, 노마돌로지, 도주선, 전쟁-기계, 소수자로의 생성변화[소수자-되기],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는 정치적 어휘의 대부분을 이제 뒤덮고 있는 몇 안 되는 용어의 고작 몇 개의 예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많은 것에 대해 논합니다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치하는 바로는, 들뢰즈는, 정치활동의 현대적 형태와 그들이 직면한 속박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참조처이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둘러싸고 금세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들뢰즈 자신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하지 않고, 굳이 말하자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 평등, 자유, 해방 등과 같은 주요한 정치적 개념은 그의 고려 바깥에 있으며, 자본주의와 분열증[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제출된 국가 비판을 별도로 하면, 별의별 정치제도, 통치의 기구, 입법대표정부의 기구에 대해 그는 그 이상의 논의를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거대 신문용으로 작성된 몇 개의 논설(유명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관한 것입니다)을 빼면, 들뢰즈가 정치의 경위나 혁명에의 동원에 대해 일부러 자세하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드뭅니다. 들뢰즈나 들뢰지안이 정치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역시 전적으로 불분명하며, 현재 이용 가능한 들뢰즈 사전의 종류가 한결같이 소수자 정치”, “미시정치”, “혁명의 논의를 등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토픽에 대해 특별한 항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각주:2]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 자신의 정의를 부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오랫동안 전통에 맞춰서, “정치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집단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 1.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조직이나 상호행위(예를 들어 친족, 민족, 지리, 언어에 기초를 둔 형태들)로 환원할 수 없는 집단적 차원이며, 2. 다른 것과 구별하여 정치적집단성이나 공민적집단성을 구성하는 참가자들은, 평등과 포함을 기초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다른 생활영역으로부터 따온 계층성을 기초로 하여 (예를 들어 군사명령을 기초로 하거나, 가정경제종교 권위를 기초로 하여)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는 것을 원리 원칙으로서 전제로 하는 집단적 차원입니다.[각주:3] 더 한정해서 강조해 둡니다만, 데모크라시의 정치는 보통의 인민의 힘에, 즉 그 어떤 형태의 특권단체나 지배계급과도 싸워 이기는 인민 일반의 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논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과두제나 재산제(plutocracy)(그 대부분은 ‘(다른) 민주주의라고 자칭합니다)를 가장 간편하고 명백하게 구별하는 방식은, 루소(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의 자코뱅파가 감복해서 계속 인용하는)가 주권의 기초를 인민의 의지에 둘 때의 논리, 일반의지 혹은 인민의지[의 논리]에 입각하면서, 인민주권의 우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집단의 실재의 기초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에게 짐을 지우는 그 역량, 그렇게 해서 적대적이고 타율적인 결정의 형태들에 (단지 저항한다기보다는) 승리하는 그 역량에 직접적으로 놓여져야 합니다. 거꾸로, 이 일반 역량의 기초는, 서로 강화하는 집단적인 능력들과 역량들, 특히 집회·교육·정보·토의(deliberation)·조직화·결의·실행의 역량들에 놓입니다.

* 각주 4에 붙은 주소는 여기를 클릭.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정치에 대한 위와 같은 노골적으로 주의주의적인 구상은 들뢰즈와의 정면충돌을 야기하는데요, 오늘 여기에서는, 바로 이 충돌을 저는 정밀조사하고 싶습니다. 들뢰즈의 저작에 인민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출현하더라도, “도래할 인민[민중]”이라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형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적인 자동기계를 집단적 형태로 개조했던 것은 아닐까요?[각주:5] 무의식, 욕망의 기계적이고 사실은 자동기계적인 성질, 경험의 분자적 혹은 하위-개체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철학은 정치적 의지와 의지적 활동으로부터 가장 먼 것은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의 최초의 가장 열심인 독자의 한 명이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게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그가 1996년의 중요한 논고에서 엄밀하게 강조했던 것처럼, 정치적 좌파는 일반적으로 주의주의를 참조축으로 하여 자기를 정의하지, “들뢰즈는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철학을 전개했다. 항상 들뢰즈는 진정한 사고와 생성하는 모든 근본적으로 의지적인 성격을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계획에 입각해 세계를 바꾼다거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바꾼다는 등의 일처럼 그에게는 인연이 먼 것은 없었던[각주:6] 것입니다.

들뢰즈적인 정치가 있다면, 물론 그것은 비주의주의적이라고 기술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며, 널리 유럽철학에서 좌파현대정치분석으로서 통용되고 있는 것의 실로 상당수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바로 들뢰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권과 그 동족어에 대한 유행의 산만한 비판을, 특히 그것이 무엇이든 지도 주체나 주권적 주체”(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괴물적인 혼란입니다!)에 대한 거절을 보세요. 자크 데리다에 의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책임을, 적극적 자유의 그 어떤 구상으로부터도, “, 지배, 폭력으로서 규정되는 자유, 나아가 기능으로서, ‘나는 할 수 있다의 가능성으로서 규정되는 자유로부터도 분리하려고 하는 미수에 그친 기획을 계승하는 유산을 생각해 보세요.[각주:7] 조르조 아감벤을, 그리고 또한, 대륙-철학계에서는 최근 들어 일정한 견인력을 갖춘, 티쿤(Tiqqun), 보이지 않는 위원회(the invisible committee), 공산주의이론(Théorie communiste) , 다양한 공산화가속주의의 주장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것들에 공유되고 있는 것은, 활동가와 그 현실적 정치 역량을 합병하는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아감벤에 의한 비판, 숙려[토의](deliberate) 단계와 스텝step을 밟아나가도록 틀이 부여될 수도 있는 활동의 전략적차원 모두에 대한 아감벤의 거절입니다. 모든 구성적권력[]의 거절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라면, 중지[허공에 매달림]와 외톨이로 틀어박히기라는 위로, 그저 결핍시키는힘에 의해 약속되는 저 순수한 비-잠재성의 림보뿐입니다.[각주: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것은 20년 이상 전에 처음으로 학위논문의 1개 장에서 소묘했던 것인데요, 들뢰즈에 대한 저의 비판적 결론의 입장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은 유명하지만, 그 정치적 의의에 관한 한, 그것은 금세기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기간이 계속된 것은 (혹은 시각에 따라서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인민의 의지, 그것에 대항하는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자코뱅적 주장으로부터, 정치적 사고가 철수하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가 정치적 사고에 있어서 중심적인 참조점으로서 부상한 것은, 어떤 기간, 대략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승리의 기간, 1970년대 초기에 시작되고 일련의 현저한 인민의 패배를 특징으로 하며, 19세기와 비교하고 싶어지는 불평등·항복·복종의 형태의 부활을 결과로 하는 기간에, 들뢰즈가 퇴각의 입장을 위해 부족함이 없는 철학적 견해를 제출한 한에서인 것입니다.

주의주의적정치구상과 비주의주의적정치구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부딪칩니다. 한편으로, 정치활동가에 대한 구상, /녀의 의지적 활동의 역량에 관해서, 다른 한편으로 활동가와 활동가가 살아가는 상황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해방식에 관해서입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두 가지 점을 순서대로 쫓습니다.

 

1. 루소와 로베스피에르에서부터 레닌과 그람시를 거쳐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라에 이르는, 넓게 -자코뱅적인 전통은, 정치적 의지의 행사를 목표·의도·동기 등의 고전적인 심리적요인과 연합시키는 것을 늘상 해왔습니다만, 이와 동시에 의지의 실행과 행사를 단순한 소망과 변덕의 표현이 목적에 동의하는 자는 그 수단을 거부할 수 없다”(루소)라는 클리셰, 달리 말하면, “목적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 그 수단도 의지해야 한다”(그람시)라는 클리셰에 입각하고 있더라도, 단순한 소망이나 변덕의 표현과는 구별하고 있습니다.[각주:9] 루소 이후, 의지(vouloir)(pouvoir)은 서로 맞바꿀 수 있으며, 목적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활동가의 역량에 의해 매개되는 것입니다. 활동가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활동가가 교육되고 의식적이고 유덕해지고 단련될수록 그 활동의 영역이나 그 의지의 권역은 점점 더 일반적이게 되고 원대해지는 것입니다.

활동가[배우]에 대한 들뢰즈의 구상 일반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활동을 위한 본래적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기획과 사업을 숙고하고 의식적으로 정식화하고 개시하기 위한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들뢰즈가 전투의 사건을 고찰할 때, 그의 관심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느냐에도, 군사적인 전략의 방식이나 이유에도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관심은, 활동가로서의 병사, 상황에 응답하여 결정을 내리고 개별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잠재적 사건 그 자체로서의 전투의 무차별적이고 익명적인 성질에, 활동이나 퇴각의 역량의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기한 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성질에, 들뢰즈의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활동가, “더 이상 용감도 비겁도 아니고, 더 이상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사건>이 현전하는 그 장소에서, 그렇기에 그 가공할 정도의 비정함에 참여하는 치명상을 입은 병사”(LS, 100~101)인 것입니다. 전투의 위쪽으로, 전투를 넘어서, 전투를 통과하여 존재하는 자만이, 전투를 사건 또는 본질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사무엘 베케트의 범례적인 등장인물이 사물의 잠재적 리얼리티에 대해 적격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진하고, 그저 가능적일 뿐인 것의 영역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소진한 인물만이 가능적인 것을 소진할 수 있다. 모든 욕구need, 선호, 도달목표, 의의를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소진한 인물만이 충분히 이해관심을 떠나고 있다.” 소진한 인물만이 재차 올라가 돌아가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CC, 154-155). 그 조건 하에서 그/녀는, /녀가 그 일부인 리얼리티를 진정으로 수 있다. 소진한 인물은, 그들을 흡수하는 환경에 일체의 주도권을 버리고 맡겨버린다. “거친 대해를 떠다니는 코르크처럼, “그는 이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경계 속에 존재한다”(CC, 26).

들뢰즈가 물색한 다수의 시나리오 중 어떤 것을 취하든, 숙고적이고 목적론적인 자유는 그저 반응적이고 제한적인 편견이라며 기각되고, “더 심층의 형태의 강제, 자동조작, 용해가 지지되고 있습니다. 주체 자신의 결정이 진정한 귀결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견지, 요컨대 전략의 견지는, 들뢰즈의 사고의 구상과는 철저하게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관한 그의 두 권의 책의 궤적을 아주 간단하게 대층 그려보면, 등장인물이 지각과 활동을 조절하는 역량을 계속 갖고 있는 (전쟁-전의) 상황으로부터, 감각-운동역량을 탈취당해 무엇인가에 홀려 있는 모양의 사람이 반응하지 못하고, 반응을 의지하지도 않는상황으로의 이행에 있게 됩니다. “감각-운동의 결합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구상공간은, 긴장과 그 해소에 따라서, 목표, 장벽, 수단, 우회에 따라서 조직화되기를 멈춘다.” 활동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지각은, 압도적이고 환각적이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結晶)을 통하는 듯한 직관을 통해서, 인물은 수동적인 보는 자가 되며, 무엇이든 현재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할지도 모르는 것에는 무관심해지며, 반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무감응해진다. “그토록 그 인물에게 있어서는, 정확하게는 무엇이 상황 속에 있는 것인가를 보는욕구need가 크다는 것이다”(C2, 126-128). 이런 통찰의 비용은 전적으로 명명백백합니다. 그것이 요청하는 것은, 활동가의 카타스트로피적인 마비이며, 유기체의 문자 그대로의 분해, 혹은 이것에 준하는 분해입니다. 전투를 지각하면서 죽어가는 병사를 철저하게 넘어서 사납게 날뛰는 전투처럼, 이제 사건은, 사건을 선동하고 사건에 반응하는 인격에 관계없이, “부동성, 석화작용, 반복”(C1, 207; C2, 103)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구도가, 들뢰즈가 문학을 참조할 때 특권적으로 끄집어내는 많은 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베케트의 소진시키는 자동기계, 카프카의 절대적인 분자적 탈영토화”(K, 58), 나아가 멜빌의 바틀비이며, 그 비타협적인 나는 하지 않고 싶은데요, 변함없이, “말과 활동을 절단하고, 더욱이 사물, 이유, 목표에의 지시를 언어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입니다.[각주:10]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예를 들어 풀이하기 위해(또 다시 들뢰즈의 저작=신체corpus에 이어서는 통상적인 정치적 맥락이 그 관계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들뢰즈의 프루스트 독해를 간단하게 고찰해봅시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1972년판의 짧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가, 비의지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움직이는 기호의 경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PS, vii)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화자가 학습하는 것은, “진리는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누설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의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비의지적이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최대 테마는, 진리의 탐구는 비의지적인 것에 특징적인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유를 강제하고 사유에 폭력을 가하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사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라이프모티프는 단어 강제력이다. 우리에게 보도록 강제하는 인상, 우리에게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조우등등(PS, 61).

일반적으로, 들뢰즈가 논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 기억, 상상, 지성, 사고 같은 능력들은, “의지적으로 행사되는 한에서는 우발적으로만 행사될 뿐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그저 똑같이 우리는 기억하고 상상하고 인식하고, 그 반대도 그렇다.” 이것과 대비적으로,

 

어떤 능력이 그 비의지적인 형태를 걸칠 때마다, 그 능력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곳에 도달하고, 초월적인 행사로까지 상승하고, 다른 것으로 치환 가능한 그 힘과 자신의 필연성을 이해한다. 능력은 교환 가능하기를 멈춘다. 비의지적인 행사는, 각 능력의 초월적인 한계이며 그 사명이다. 의지적인 사고를 대신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고하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사고하기를 강제당한다. (PS, 62-63).

 

그때, 비의지적인 사고란, 필연성의 완전한 강제력과의 조우입니다. 혹은 오히려, 조우의 우발성을 필연성의 무심한 운명과 제휴시키는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비의지적인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유명한 몰두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활동가의 진행성 마비와 활동가의 세속적 기획과 낭만적인 기획 모두의 용해를 다시 요구하는 듯한 그런 내러티브의 도정, 그 최초의 열약(劣弱)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자의 감각-운동 시스템은 소모시키고, 활동과 반응에 있어서의 그저 현실적인시간성에 대해 무관심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가 학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순수상태의 시간에 입력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기관없는 신체이며 미소한 기호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관찰되지 않으며”, 그가 조우하는 다양한 인물을, “그 자신의 망상의 똑같은 수의 마리오네트에, 그의 기관없는 신체의 똑같은 수의 강도적인 힘에, 그 자신의 광기의 똑같의 수의 프로파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각주:11]

프루스트의 화자가 따라가는 궤적과 영화론이 끄는 궤적은, 대체로 비슷한 호[孤]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작품 전체를 통해 상이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 지도에 배치되는 것은, 활동가의 진행성의 무-능력화, -현실화, 대항-현실화, 활동가의 용해이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리얼리티의 절대적 필연성과 충족성 안에서의 직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침례[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immersion) 때문입니다.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경험이 활동에 대한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감각-운동 메커니즘을 통해 감각과 활동을 결부시키는 신체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면, 진정한 통찰을 위해서는 그런 관심의 정지와 그 메커니즘의 탈구가 요청될 겁니다. 현실적인 것은 유기체의 기능[함수]이라고 한다면, 잠재적인 것은 전반적인 탈-유기체화로 이끌 겁니다. , 글자 그대로 탈조직화된 신체, 그 생물로서의 통합성과 정합성을 박탈당한 신체,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르토를 좇아 부르는 바의 저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를 설정하도록 이끌 겁니다. 그런 신체는, 조우하는 사건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이해, 목표, 계획의 매개 없이 즉석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모든 기획은, 존재하는 것, 존재할 터인 것의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무너집니다. 이것이 운명애입니다.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 비주의주의적궤적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궤적은,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 동일한 지점에, 의지가 허위 문제이게 될 뿐인 지점, 허위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지가 사건의 자기-긍정으로서 사건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지점에 도달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묘하고도 철저하게 스피노자적인 세계의 지각에 도달하고, “산소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었음을 마지막에 이해하게 되며, 산소 없이 호흡하려고 하는 지점에 손을 대는[노력을 기울이는][각주:12] 것입니다. 이렇게 제언해도 크게 과장이 되지는 않을 테죠. , 들뢰즈에게서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활동가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모두, 그대로, 우리가 그로부터 도주하려고 해야 할 억압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바로 그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필연성의 유일한 흐름의 지각할 수 없는양태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는 도주선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들뢰즈가 고찰하는 다양한 생성변화 혹은 되기”(예를 들어 여자-되기, 동물-되기, 노마드-되기)의 상대적인 가치가 어찌 될 것이냐 한다면, 그 가치는, 되기가 탈영토화한 형태 없는 질료를 위해활동하는 정도에 따라서, 또한, “지각할 수 없는 것은, 되기의 내재적인 목적이며, 그 우주의 공식이다라는 무자비한 텔로스에 입각하면서 활동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입니다.[각주:13]

주라비슈빌리 같은 독자가 들뢰즈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가차 없는 스피노자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들뢰즈의 이 방향성에 막연한 혁명적억양을 불어넣고자 하는 꽤 어설픈 시도는, 천박한 속임수가 되기 십상이고, 어떤 종류의 정치활동에도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실천적 곤란들에 대해 결단코 무관심해지기 십상입니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스피노자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마오이스트의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들뢰즈의 다른 독자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력(impact)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소책자에서, 들뢰즈의 형이상학의 정치적 함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스토아학파로서, 그리하여 평화주의와 영적 달관[諦観]의 처방전으로 특징지어집니다.[각주:14]

  1. Harvard University Library system, HOLLIS search, 9 March 2015. ‘Deleuze Connections’, ed. Ian Buchanan, University of Edinburgh Press, http://www.euppublishing.com/series/delco [본문으로]
  2. Cf. Adrian Parr, ed. The Deleuze Dictionary (2010); Eugene Young, ed., The Deleuze and Guattari Dictionary(2013)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2003). [본문으로]
  3. 표준이 되는 참고문헌은 Aristotle의 Politics이다. [본문으로]
  4. Cf. Hallward, The Will of the People: Notes Towards a Dialectical Voluntarism, Radical Philosophy 155(May 2009), 17-29. online at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본문으로]
  5. Cf. C2, 263 ; EP,131, 158, 160. [본문으로]
  6. Fran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risme en politique)”, in Eric Alliez et al, eds.,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1996), 335. [본문으로]
  7. Derrida, Rouges[200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40. [본문으로]
  8. cf Agamben, “From the State of Control to a Praxis of Destituent power”, Athens, 16 November 2013 ; cf. Agamben, “From Limbo”, The Coming Community(1993) [본문으로]
  9. Rousseau, Discours sur l’économie politique, Œuvres complètes, vol. 3(Pléiade), 263; Gramsci, Worker’s Democracy (1919), Pre-prison Writings, 99; cf. Trotsky, Terrorism and Communism(1921), Verso ed., 25. [본문으로]
  10. CC, 73-74. 주라비슈빌리의 비주의주의적 독해에 있어서, 바틀비가 “들뢰즈적 정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49). Cf. Agamben, Bartleby, or on Contingency, in Potentialities (1999). [본문으로]
  11. PS, 117-118; AO, 69; PS, 181-182; cf. RF, 30-31, 38-39; NP, 103-110; DR, 147. [본문으로]
  12. Zourav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56-357. [본문으로]
  13. K, 13; TP, 279; Cf. DC, 45; C2, 190. [본문으로]
  14. Guy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à l’occasion de Deleuze(Verdier, 1999), 51. 특히 어떻게 최선의 방식으로 필연성에 적응하는가, 어떻게 “흐름을 타는”가, 혹은 상황의 내재적 “생성”에 따라서 자기를 방향짓는가를 탐구하는 사상가(스토아학파, 스피노자, 흄, 베르크손 …)에 이끌려서, 라르드로는 이렇게 논한다. “푸코와는 달리 … 이성의 존엄[을 지킬] 만한 것에 대항하여 들뢰즈가 떨쳐 일어난 것은 한 번도 없었다”(ED, 45; cf. 72). 물론 라르드로 자신은 중립적인 독자가 아니라, 과거, 이른바 “신철학” 논쟁 무렵, 드물게도 들뢰즈 자신이 비난을 폭발시켰을 때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 다음을 보라. Deleuze, “A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1977), in RF; Guy Lardreau and Christian Jambet, Une derniere fois, contre «la nouvelle philosohie», La Nef 66(January 1978), 35-4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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