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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2)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일본의 사상』 2014년 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II. 동물론이 지닌 의미

무엇을 지향[목표]하는가

미야자키 : 지금의 번역론부터 동물론으로 화제를 연결시키고 싶습니다. 우카이 씨는 앞서 언급한 L’animal que donc je suis을 번역하셨는데,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언어론도 번역론도 아닙니다. 데리다의 작업 속에는 다른 페이스의 것으로, 생명이라는 언어를 넘어선 리얼한 것에 대한 데리다의 직접적인 접근법이 보이는 것이라며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번역하신 우카이 씨께서 전체의 인상을 포함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카이 : 이 책은 19977월에 스리지 라 살(Cerisy-la-salle)에서 열린 콜로퀴에서 한 강연인 자서전적 동물[自伝的動物]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하지만 텍스트 상의 문제가 있어서, 콜로퀴의 보고서로서 출판된 책[각주:1]에는 실제로 말한 것 외에 성서해석에 관한, 강연에서는 생략된 부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콜로퀴의 마지막 날, 요청(request)에 응해 즉흥적으로 한 하이데거론도 있습니다. 이번에 번역한 책은 이것들을 합쳐서 저자의 사후에 출판된 하이브드리한 책입니다.

  미야자키 씨는 언어론에서 동물론으로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특히 서양에서는 언어를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전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언어론은 1960년대부터 이 전통의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조를 문제 삼았습니다. 에크리튀르(기록, écriture)의 사유도 이로부터 성장해 온 셈이기에, 데리다 자신의 이 책 속에도 동물은 항상 계속해서 자신의 물음이었다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5명의 철학자이 동물에 대해 한 언급이 분석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 라캉입니다. 번역하면서 느꼈습니다만, 이런 라인업을 어떤 원근법으로 본다면, 데리다의 사유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선택됐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 관해서는 다소 유보가 필요한데요, [데카르트가] 모든 점에서 자신의 대극에 있는 철학자라고 반드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어떤 가까움조차 느끼고 있었던 거겠죠. 이들 사상가들은, 그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동물에 관해서는 심하게 멀다이 책 전체를 통해 그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이 미묘한 거리입니다.

 

미야자키 : 데카르트는 코기토의 철학자로, 신체와 정신의 분할이 기초(base)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데카르트의 신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이죠.

 

우카이 : 정념론등이 바로 그렇죠.

 

미야자키 :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얼마나 비-이원론적인 것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가, 혹은 비-이원론적인 것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는가가 동물론을 통해 보이게 됩니다. 단순한 동물기계론이 아닌 동물론은 오히려 데카르트를 상대로 함으로써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카이 : 물론 데카르트 연구자로부터는 비판이 있었습니다만, 데카르트를 다룬 부분은 이 책에서도 가장 힘이 들어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데리다는 어떤 작업을 했는가. 지금까지 그가 했던 것과 공통점도 많습니다만, 5명의 철학자들이 동물에 관해 여기서는 아무래도 정신분석적 용어가 필요합니다만 부인(否認)’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몸짓을 드러내고 있는 곳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5장과 성찰두 번째에서 보이는 동물기계론을 다른 테제로 대치하고 단순히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목에서 데카르트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듯한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해버리는가에 주의합니다. 그와 같은, 이른바 징후()적 독해의 실천입니다. 다만, 실제로 번역한다면, 예를 들어 라캉의 한 구절에 관해 데리다는 여기서는 불안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한 번 읽고서는 [그렇게] 느낄 수 없었습니다(웃음). 이런 상태이기에, 꽤 미묘한 독해방식을 하고 있습니다만, 번역자로서는, 그러면 인용되는 라캉의 텍스트를 불안이 느껴지도록 번역해야 할까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도중, 과연 이것은 확실히 부인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다른 저자의 텍스트를 번역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경험으로, 데리다를 번역하는 것, 혹은 데리다를 읽는 것은 모종의 전이(轉移)’의 경험이기도 하며, 요컨대 최면술과 같은 곳도 있습니다. 작업의 결과는 읽어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 책의 베이스가 되고 있는 강연을 한 콜로퀴는 []전적 동물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말했습니다만, ‘[]동물이라는 두 개의 주제는 데리다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이 점에 관해, 최근 일본어 번역본이 나온 엘렌 식수(1937년 생)와 데리다의 공저 베일(원저는 1998)[각주:2]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식수의 사부아르(Savoir)라는 작은 텍스트의 뒷부분에, 데리다가 1990년대 중반 브라질로 강연 차 여행을 했을 때 기록한 일기식의 텍스트가 붙어 있는 책으로, 맹인의 기억 : 자화상 및 그 밖의 폐허(원저 1990)[각주:3]의 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제목이 된 베일’, 이것은 당시 프랑스에서는 주지하듯이 정치문제였던 것을 생각해야만 하겠죠. 베일이라고 하면 이슬람의 것만이 부각되기 쉽습니다만, 쿠란에는 머리에 쓴 베일에 관해 예언자의 친족 여성 이외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일신교의 성전 속에서 처음 나온 것은 사실 바울이며, 여성을 베일에 의해 격리하는 사상은 오히려 기독교에서 생겨났습니다. 본서에 수록된 누에라는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바울의 여러 가지 서한과 프로이트의 텍스트 독해에다가, 알제리에서 지낸 소년시절에 누에를 길렀던 자서전적 이야기를 포갭니다. 누에는 페니스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내뱉은 섬유로 감싼다는 의미에서 성적인 결정 불가능성을 체현합니다. 이 기묘한 관찰이 데리다 자신의 성적인 성숙 과정과 어떻게 겹치는지를 상당히 외설스런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다소 거칠게 말하면, 인간의 자서전동물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원래 있을 수 있느냐라는 것이 여기서의 데리다의 물음입니다. 동물에게 보여졌다는 것이 말해야 할 경험으로 생겨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부인의 시작이겠고, 데리다가 다룬 철학자들만 해도 동물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론가로서는 동물의 경험을 말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이라는 자[]전적 텍스트를 남겼다는 의미에서는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억압하지 않았던 철학자로서 데리다에게 가까운존재입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동물이 없는 세계를 가정하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방법서설에 관한 의문에 응답하는 데카르트의 1638년의 편지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코기토가 사유 실체인 이상, 이미 연장에 편입되어 있는 신체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가 살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앞에서 니시야마(西山) 씨가 말한 나는 있다, 고로 나는 죽는다라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후설에 입각해 제시된 테제의 함의가 동물론이라는 틀 속에서, 데카르트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학사와의 관계

고쿠분 : 앞서 우카이 씨가 데리다의 주변성(marginality)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가 항상 거인을 다룬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후설, 데카르트, 칸트처럼 철학자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예를 들어 우시아와 그람메(Ousia et Gramme)(철학의 여백수록)라면, 통속적인 시간 개념과 그렇지 않은 시간 개념은 결국 구별할 수 없다는 형태로 철학사의 한복판에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탈구축하고, 철학사의 정경 자체를 바꾸게 된다는 방식입니다. 반면, 제가 열심히 씨름하고 있는 들뢰즈는 원래 데카르트는 거론하지 않고 스피노자를 논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루지 않고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논하기도 합니다. 이로부터 들뢰즈의 방식은 주변적인가(marginal) 아닌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단순히 선호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논의 대상의 선택에 관한 차이는 아주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선호도 있을 것이고, 체질[기질] 같은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왕도(王道)의 철학사를 피하고 다른 철학사를 만들고자 합니다만, 데리다는 정반대로, 왕도의 철학사를 정면 돌파하려 합니다. 철학사적 텍스트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을 내면에서부터 뚫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이것에 관해 굳이 우직한 의문을 제시한다면, 형이상학을 탈구축한 뒤에 철학은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철학은 이제 타락했다, 그래서 예전에 있던 지식을 사랑하는 것(필레인 토 소폰[φιλείν τό σοφόν])”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데리다는 탈구축 이후의 철학의 광경을 어떻게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을까. 들뢰즈는 나는 형이상학자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철학이란 결국 형이상학이라고 들뢰즈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이데거의 정통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형이상학과 대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 대결의 형태가 탈구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탈구축 후에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계속 탈구축하는가, 아니면 다른 철학이 나타나는가? 이것은 데리다를 아는 사람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철학의 거인[거장]을 거론한 것은 교직(敎職)[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정도 있겠죠. 특히 1960년대는 아그레가시옹(교수자격시험) 대책의 복습교사였기에, 수험자용의 기본적인 철학사 수업을 했습니다. 게다가 데리다는 전통주의자라고 공언하고 있어서, 과도한 도그마와 보수(保守)에 이르지 않는 한, 구축된 것을 존중했습니다. 게다가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면, 하이데거와 달리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은 목적() 없는 마감(clôture sans fin)”이며, 목적론으로 초극하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융통성 있고 거침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형이상학의 마감은 항상 어딘가에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기본적 이해입니다. 항상 탈구축의 도상에 있는 형이상학과 더불어, 철학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견해입니다.

 

미야자키 : 결정적인 탈구축이라는 것은 없다. 이미지로서는,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물가와도 같은 .

 

우카이 : “To be continued”라는 느낌이군요.

 

미야자키 : 탈구축하면 도그마가 돌아오고, 그것을 다시 밀어낸다는 과정이 항상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느새 해안선은 침식되고, 지형이 바뀌어 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요.

 

고쿠분 : 그런 것이겠네요. 그런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와 부끄러움[수치]’

미야자키 : 동물론에 관해 우카이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서전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에서 데리다로서는 드물게 논한 대목에 관해서입니다. 패싱룸[passing room]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이게 됐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에피소드가 얘기되고 있고, 더욱이 그것이 중심적인 문제 같은 형태로 파악되고[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텍스트를 기반(base)으로 접근하는 데리다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특이합니다. 우카이 씨에게는 <알몸>의 스승[각주:4]이라는 글이 있습니다만, 이 부끄러움에는 단순히 알몸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거나, 기르던 고양이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라고는 끝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자체의 부끄러움을 노출시키는 경험이라고도 말해도 좋을까요. 그 체험이 동물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다른 저작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루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겁니다.

 

우카이 : 이 책에는 고양이가 몇 차례 나옵니다. 처음은 아마 들뢰즈와의 관계를 암암리에 가정하고,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거울나라의 엘리스가 다뤄집니다. 집에서 고양에게 알몸을 보여줬을 때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도 거듭 논합니다만, 그때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됩니다. 거기에 인간의 여성이 있었다면, 혹은 거기에 거울이 있었다면, 부끄러움은 더 커진다 등등, 마치 최악의 부끄러움을 상상하고 기뻐하는 듯합니다. 철학을 논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악화되어가는 부끄러움의 얘기로 돌아가고 또 다시 철학을 논한다고 하는 기묘한 순환이 보입니다. 확실히 자신을 알몸으로 할 각오가 없는 자서전등은 의미가 없기에, 이 주제들은 데리다의 루소에 대한 애착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예전의 할례고백[각주:5]에서는 자신의 할례에 관해 장황하게 말한 다음, “이렇게 자신의 페니스 얘기를 구체적으로 한 철학자가 있었을까등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퀴니코스파적 측면도 그에게는 있으며, 철학의 실천으로서 사람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보여주는 것도, 어쩌면 어떤 숨겨진 전통을 떠맡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데리다의 집에는 1980년대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에는 루크레티우스”(Lucirèce)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만, 다른 한 마리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들인 피에르는 오이디푸스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집에서 왜 고양이는 그리스-로마계의 이름을 부여받았는지,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데리다 집의 정원에 있는 고양이의 무덤이 훗날 영화에 나옵니다만,[각주:6] 그 두 마리가 죽은 후, 아마 새로운 고양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텍스트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건이 강연 직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겠죠.

   “부끄러움의 문제를 생각할 경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에 있는 부끄러움의 현상학적 서술을 고려해야 하며, 데리다도 유대인성에 관한 강연 아브라함, 또 다른 사람의[각주:7]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뿐 아니라 라캉, 알튀세르, 푸코, 레비나스 등, 프랑스에는 시선[응시]”의 사유의 전통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 있고, [데리다] 자신도 그 전통 속에 있지만, 그 중 가장 이단적이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물론에서 중요한 점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동물을 명명하기 직전이라는 시간이 설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이전의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 무대를 설정한 신 자신은 그늘에 숨어서 그 과정을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 이 신의 행동거지의 괴이함에 데리다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데리다 자신은 언급하지 않습니다만, 쿠란에서는 이 장면이 고쳐 써져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에 이름을 붙였다고는 하지 않고, 그 대신 아담의 귀에다[귀 밑에서] 신이 동물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습니다(쿠란2 암소). 창세기를 읽는 한에서는, 이름을 붙이는 능력을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고, 그 능력이 여기서 처음으로 발휘됐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 자체, 신의 전능성에 대한 침범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순수한 일신교이고자 했던 이슬람의 시원적인 종교적 직관 속에 있는 것입니다. 데리다는 똑같은 대목에 천착하면서, 인간이 이름을 붙일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그 순간 세계는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혹은 처음으로 의미가 개시되고 원래 역사가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역사 이전의 묵시록적 사건의 가능성이,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과 겹쳐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리지 라 살의 강연에서는, 데리다가 제자들 앞에서 상상적인 스트립을 하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에, 모두 올게 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일면 최후의 만찬과 비슷합니다만, 제자들은 형제가 아니라 동물의 위치에 놓여지고, 스승인 사람이 이것이 내 신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논문(어떤 정동의 미래 : <부끄러움>의 역사성에 관해)[각주:8]에서, 여기에는 죄의 문화부끄러움의 문화같은 기존의 이분법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된 제2차 대전 이후의 사상이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가설을 세워 봤습니다. 들뢰즈도 말년에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이라는 모티프를 프리모 레비로부터 인용해서 중요한 고찰을 남겼습니다만,[각주:9] 하나의 시대의 사상으로서, 데리다도 같은 작업을 다른 스타일로 시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인종주의(racism)가 거세지고 있고 대항(counter) 행동의 참가자도 늘고 있습니다만,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부끄럽다고 적힌 플랜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입에 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것을 덮어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부끄러움, 책임=응답 가능성, 그리고 동물의 물음 사이에는 어떤 깊은 연결이 상정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시선[응시]’에 관해서는 미국의 사상가인 대너 해러웨이가 일본어로도 번역된 개와 사람이 만날 때 : 이종협동의 정치(원저 2008)[각주:10]라는 책에서, 고양이에게 보여진 데리다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데리다는 고양이에게 보여져도 자신의 느꼈던 부끄러움에 관해 물음을 제기했지만, 왜 고양이의 편에 서서 시선[응시]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동물학의 지식도 도입한 다음에 고양이의 시선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셈인데, 데리다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에 서서 탈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우카이 : 데리다는 타자론의 하나의 전개로서 했기 때문이죠.

 

미야자키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면, 해러웨이의 접근법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대칭(symmetry)을 너무 간단하게 뛰어넘어버리는 것이니까요. 데리다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혹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이 어떻게 흔들려 왔는가를 항상 묻습니다.

 

우카이 : 그런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알몸[벌거벗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 책에는 관철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알몸(벌거벗음)은 바로 신체적 경계선이죠. 다양한 인간학적 가치가 기입되고 변용되는 경계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동물학적인 것을 들여오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해러웨이는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하며, 철학적 담론을 중지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대신 데리다의 작업을 동물해방론이나 동물권리론 등의 접근법과 접속시키기 힘든 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카이 : 이것과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영어권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와 포스트모던 : 역사, 문학, 철학은 어떻게 응답했는가[각주:11]의 저자 로버트 이글스턴 씨가 이 책이 영국에서 ‘huge impact’였다고 듣고서는 놀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어권에서는 그런 느낌은 받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에 철학적 동물론을 했던 사람으로서는 예를 들어 티에리 곤티에 등이 있고, 동물론을 축으로 몽테뉴와 데카르트 사이에서 사상사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자세하게 검토한 박사논문[각주:12]을 출판합니다. 하지만 그런 곤티에도 최근의 저작 동물의 질문 : 현대의 논쟁의 기원[각주:13]에서는 인간의 고유성이나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동물을 []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새로운 인간주의의 정초로 향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동물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이 분석철학적인 것과 대항하면서 존재해왔고, 거기에서 데리다의 작업을 수용하는 지평이 준비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프랑스어권에서 방어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많은 것은 역력합니다.

   데리다도 동물학적 식견은 참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동물 일반을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별 동물, 개체로서의 동물과의 관련을 탐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은 그를 위한 작업의 공간을 여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예를 들어 언어처럼 인간에게 고유하고 알려진 것에 관해, 그것은 동물에게도 있다는 형태로 동물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라는 것을 인간이 정말로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척시킵니다. 그것은 이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철학적 동물론의 영역에서 매우 좋은 작업을 해 왔던 플로랑스 뷔르가의 현상학적 동물론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녀는 최근 또 하나의 실존[각주:14]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만, 그 속에서 메를로 퐁티의 행동의 구조(1942)[각주:15]에서 동물의 실존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데리다의 작업을 토대로 재독해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설정은 자칫하면 동물들 중에서 어디까지 실존이 인정되느냐라는 얘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서 문헌학자인 하인츠 비스만(Heinz Wismann, 1935-)이 시사하듯이, 예를 들어 온혈동물냉혈동물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이런 작업으로부터도 얻는 바는 적지 않겠지만, 데리다 자신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방향으로 논의를 열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과의 관계

고쿠분 : 데리다의 동물론이 경계선을 묻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그대로 좋으며, 저도 별다른 반론도 없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 논의에 그다지 큰 자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해두는 것이 정직한 감상입니다. 뭐든지 들뢰즈와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교사였던 들뢰즈가 쓴 교과서 본능과 제도(원서 1953)를 보면, 연어 연구나 거미 연구, 심지어 호르몬에 관한 연구 등, 이런 논의가 많이 나오며, 아주 구체적으로 동물과 본능의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교과서이기 때문에, 질문을 제기하고 학생들더러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그런 구체적 연구를 통해, 예를 들어 본능은 개체의 이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종의 이익이 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고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과 동물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저는 들뢰즈다운 방식이 재미있다고 느껴집니다. 데리다가 어디까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생각하는 것은, 탈구축이기 때문에 탈구축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미야자키 : 일단 거기[이 논의]로 들어가보죠.

 

고쿠분 : 반면, 들뢰즈는 동물의 곁으로 바싹 다가섭니다. 물론 그런 것을 정말로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할지도 모르며,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의문에 부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의문에 부친다는 논의 방식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면, 예를 들어 본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언제 이르게 되는가라는 소박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동물과 인간에 관한 탈구축적인 방식에는 한계를 느낍니다. 탈구축적인 방식이 향하고 있는 소재와 그렇지 않은 소재가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정치에 관해서는 그 유효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저는 정치상황에 대해 발언을 요구받았을 때, 기본적으로 탈구축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이 대상이 될 경우,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철학의 연구자는 동물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원래 연결이 거의 없잖아요. 연어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과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한테 가서 얘기를 들으면, 알 수 있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신의 경험에 천착하고,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 보여지는 경험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상관없으나, 들뢰즈였다면 연어 연구자에게서 얘기를 듣기도 하고, 거미 연구서를 읽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들뢰즈와의 대비에 관해서는 데리다의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에서는 들뢰즈가 정말로 동물을 묻고 있는지, 그 어조는 인간주의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뤄지고 있네요.

 

니시야마 : 들뢰즈는 어리석음(bêtise)은 동물성이 아니다. 동물을 어리석은존재로 만들지 않는 특유한 형식들에 의해, 동물은 지켜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어리석음을 진리나 오류의 판단과는 다른 초월론적 물음으로 간주합니다. 데리다는 이런 어리석음의 규정에서 들뢰즈의 인간주의를 지적하고, 오히려 어리석음의 주제에 인간과 동물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확실히 그런 의문은 있지요. 그것은 그래도 물어보면 좋겠지만, 앞의 탈구축적인 방식으로 향하는 소재와 향하지 않는 소재가 있는 게 아니냐는 논점에 관해 한 가지 말하면, 푸코가 구조주의에 관해 재미있는 것을 말하고 있고, 구조주의라는 것은 수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조주의는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 대상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하는 것예요. , 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축적으로 다룬 것이 유효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니시야마 : 데리다의 항상 변함없는 질문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라마톨로지에 관해는 바로 자연과 문화의 경첩[이음매]을 묻고 있으며, 인간의 종언(철학의 여백수록)에서는 인간의 극한(limit)을 복수형으로 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의 한계를 다양한 단절이나 이질적인 선에 의해 열고, ‘이성이나 로고스’, ‘기술’, ‘상실[]등과 같은 하나의 대립점을 자르고, 형이상학적이고 고전적인 인간주의(humanism)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기부터의 설정이죠.

   다른 한편, 동물의 물음에 관해서는, 자연과학과의 관계는 항상 궁금하네요. 아무리 철학자의 텍스트를 읽더라도, 생명과학의 전문가에게 물으면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남습니다. 실제로, 같은 대학의 생물학 동료에게 인간과 동물은 뭐가 다른가?”라고 물어보면, “차이는 없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동물도 웃으며, 언어도 기술도 갖고 있으며, 상실[, 애도]의 작업도 한다고 말이죠. 물론 실증과학으로서의 생물학과는 상이한 수준에서 텍스트의 탈구축이 있고, 그것은 그것으로 유효합니다만.

 

우카이 : 실제로 철학과 동물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동물 자체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이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우카이 :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動物誌)가 철학적 전통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특이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모두 자신이 조사한 것이 아니며, 어부와 사냥꾼, 목축인, 양봉가 등의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오늘날,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어디서 종합되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화의 동물적 기원[각주:16]의 저자인 도미니크 레스텔은 마사이족 사람들과 함께 사자 사냥을 하러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사이족 사람들이 사자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알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동물행동학자는 자기네의 지식이 동물에 관한 모든 지식 중에서 특권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주 방어적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물과의 관계도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철학적 개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레스텔은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을 때, 그는 데리다의 동물론을 몰랐기에 소개를 해줬습니다만, 고양이의 에피소드를 알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설문조사였습니다. “동물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실증연구와 함께 레스텔은 동물을 다룬 소수자적인 철학자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의 문제도, 서양철학 속에는 확실히 있습니다. 근대의 철학에서는 주변화되어 버린 주제입니다만.

 

고쿠분 : 앙케트 따위를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거네요.

 

우카이 : 정말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데리다의 논의가 역시 탄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른 분야에 갖고 가도 제대로 통용된다는 것이죠. 제 자신의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도래할 민주주의 : 코다이라시 도로(都道) 328호선과 근대정치철학의 문제들[각주:17]에서는 도로문제라는 아주 구체적인 토픽을 다뤘습니다만, 그 속에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넣어도 잘 될 것입니다. 데리다는 인문과학의 서클 속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조하고 싶은 점이죠.

 

미야자키 : 독자의 문제도 있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독자가 가두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는 데리다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습니다. 그것에 노출되지 않으면, 연구자 서클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얘기로 끝나버립니다.

 

니시야마 : 응용 가능성과 관련해 말하면, 아까부터 지적되고 있듯이, 미국을 시작으로 하는 앵글로색슨계와 데리다 사상의 접속이라는 의미에서는 동물의 테마는 침투하기 쉽습니다. 이유는 4가지로, 벤담부터 피터 싱거에 이르는 동물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의 전통이 있다는 것,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 반-휴머니즘과 친화력이 좋다는 것, 인간을 남자로서 표현하는 것의 탈구축이 페미니즘과 친근성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동물의 권리 문제와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데리다는 도래할 세계를 위하여에서도 말하듯이,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권리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등의 가치 전환을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탈구축의 전략은 항상 이중으로, 더욱이 대립하는 이항의 결정 불가능한 문턱까지 따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권리 확장과는 다른 방식과 발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미야자키 : 대형 유인원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피터 싱거와 같은 논의[각주:18]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종차별을 들여올 위험이 있습니다. 원래 권리는 인간의 편의 사정에 의해 산출된 개념이며, 오히려 그런 한계로부터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1. L’animal autobiographique : autour de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Mariel-Louise Mallet, Galilée, 1999. [본문으로]
  2. Hélène Cixous et Jacques Derrida, Voiles, Galilée, 1998.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1990. [본문으로]
  4. 鵜飼哲, 「<裸>の師」, 『思想』 2005년 1월호 ; 『자키 데리다의 무덤(ジャッキー ・デリダの墓)』, みすず書房, 2014년 수록. [본문으로]
  5. «Circonfession», in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Jacques Derrida, Seuil, 1991. [본문으로]
  6. 사파 파티(Safaa Fathy) 감독의 『데리다, 다른 곳에서(D’ailleurs, Derrida)』, 2000년. ‘객지에서’로 옮겨질 수도 있다. [본문으로]
  7. «Abraham, l’autre», in Judéités : question pour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Joseph Cohen et Raphael Zagury-Orly, Galilée, 2003. [본문으로]
  8. 「ある情動の未来──〈恥〉の歴史性をめぐって」, 『思想別冊トレイシーズ』 제1호, 2000년 1월 ; 『主権のかなたで』, 岩波書版, 2008년 수록. [본문으로]
  9. [옮긴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참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은 레비가 체험했던 아우슈비츠의 극한상황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장면에서도 느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시대의 외부에 있다고는 느끼지 않으며, 외부에 있기는커녕 반대로, 우리는 자신의 시대와 부끄러운 타협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부끄러움의 감정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우리는 희생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희생자 앞에서(devant)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카이 사토시는 『주권의 저편에서(主権のかなたで)』에서, “희생자 앞에서 책임이 있다”에서 “앞에서”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카이는 ‘앞에서’에서다가 ‘전방에서’를 덧붙이고, “희생자 앞에서, 전방에서 책임이 있다”고 번역한다. 그는 “전방에서”를 덧붙임으로써, 여기에 “아직 없다/아니다”가 울려 퍼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다. 한편,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감정(sentiment)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라는 말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 특히 『소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워야 할 비열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동물들을 행하는(으르렁거리다, [구멍을] 파다, 방긋거리다, 경련을 일으키다)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카프카의 단편소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동물들에 눈을 돌리라고 역설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공저인 『카프카 : 소수자 문학을 위하여』가 아니었던가. 부끄러움이 나 자신의 존재방식을 넘어서고, 인간이라는 것 자체로까지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동물을 행하다(faire l’animal)”일 뿐이라는 말은 강렬하다. [본문으로]
  10. Donna J. Haraway,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犬と人が出会うとき──異種協働のポリティクス』] [본문으로]
  11. Robert Eaglestone, The Holocaust and the Postmodern, OUP Oxford, 2003. [『ホロコーストとポストモダン──歴史・文学・哲学はどう応答したか』, 田尻芳樹・太田晋 訳, みすず書房, 2013년]. [본문으로]
  12. Thierry Gontier, De l’homme à l’animal : Montaigne et Descartes, ou, les paradoxes de la philosophie moderne sur la nature des animaux, Vrin, 1998. [본문으로]
  13. Thierry Gontier, La question des l’animal : les origines du débat moderne, Hermann, 2011. [본문으로]
  14. Florence Burgat, Une autre existence : la condition animale, Albin Michel, 2012. [본문으로]
  15. Maurice Merleau-Ponty, La structure du comportment, PUF, 1942 7e éd. en 1972. [본문으로]
  16. Dominique Lestel, Les origines animales de la culture, Flammarion, 2001. [본문으로]
  17. 『来るべき民主主義──小平市都道328号線と近代政治哲学の諸問題』, 幻冬舎新書, 2013년. [옮긴이] 한자가 道路가 아니라 都道이다. 우리 식으로는 ‘국도’나 ‘지방도로’에 해당되는 듯하다. [본문으로]
  18. Paola Cavalieri & Peter Singer, eds., The Great Ape Project: Equality Beyond Humanity, St. Martin's Griffin; St Martin’s Gri edition, 1994 [パオラ カヴァリエリ & ピーター・シンガー) 편, 『大型類人猿の権利宣言』, 원저 1993년/山内友三郎・間関利貞敗 訳, 昭和堂, 2001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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