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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fond des imagesイメージの奥底で

책의 서두에서 “이미지는 성스러운 것이다”라는 테제를 볼 수 있다. 낭시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개념을 ‘종교적인 것’이라는 개념과 구별하고, 전자의 본질을 분리시키는 것,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지는 멀리 있는 것이다. 이 이미지의 존재방식의 기원을 낭시는 코스모고니에서 찾는다. 대지가 천공과 분리되고 세계가 생긴 바로 그 순간에 천공은 이미지로서 출현한다. “이미지란 늘 천공에서 도래한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이미지가 천공이라고 해도 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출현할 수 없다. “멂”은 대지라는 “가까움”의 장으로 해소되기 힘들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낭시는 이미지의 물질성을 어머니=물질로부터 해석하려고 하지만, 이 물질성이 이미지의 출현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기체(基体)라면, 또한 여기에서 코스모스적인 관점을 유지한다면, 어머니=물질은 무엇보다 대지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낭시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가까이 할 수 없는 멂에 의해 규정하고, 천공(또는 별)을 이미지의 최고의 것으로 간주한 철학자 루드비히 크라게스는 천공과 대지를 떼어놓으면서도 결합시키는 힘을 ‘코스몰로지적 에로스(der kosmogonische Eros)’라고 부르며, 이러한 힘으로 채워질 때 이미지의 세계가 열린다고 했다. 헤시오도스나 삿포(Sappho)는 에로스를 “사지(四肢)를 쇠약하게 만든다(lysimeles)”는 말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잠이나 연정, 병이나 죽음 등에 의해 이른바 개체성이나 자아가 상실되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즉, 에로스가 야기하는 것은 몰아/망아(忘我) 상태이며, 바로 거기에서 이미지는 체험된다. (크라게스는 에로스적 체험을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비교한다.)

크라게스는 이미지가 지닌 가까워짐을 아우라(나 님부스Nimbus)라는 말로 표현했다. 벤야민은 이 말을 사용하면서 근대에서의 지각양식에 관해 고찰했는데, 어떤 메모에서 아우라의 원초적 상은 우리를 응시하는 별들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시선은 아무리 가까이에 있으려고 해도 가까워질 수 없는 멂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존재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벤야민은 정확히 간파했다.

낭시도 역시 하이데거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데스마스크(death mask)의 모티프에 관해 주석을 달 때, 시선의 문제에 직면했다. 얼핏 보면 데스마스크와 시선의 관계는 기묘한 것처럼 보인다. 데스마스크가 지닌 시선은 우리를 응시하지 않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다만, 데스마스크는 몸에 붙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적인 가면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그 시선의 존재방식도 가면과는 크게 다르다. 가면은 눈구멍이 텅 비어 있으며 그 시선은 이른바 눈동자가 없는 시선이다. 그렇다면 데스마스크가 지닌 시선은 어떤 것일까?

데스마스크에 각인된 것은 어떤 자의 시선의 흔적 ― 눈을 뜬 모습이든 눈을 감은 모습이든 ― 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시는 데스마스크란 시선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흔적 자체의 이미지야말로 이미지 중의 이미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 나타나는 것은 이미지의 핵심으로서의 멂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시선의 흔적이란 이 멂이 확실히 절대적인 멂으로 끌려가는 것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데스마스크의 시선은 눈구멍처럼 텅 빈 시선도, 삶으로 흘러넘친 시선도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삶에서 죽음으로의 통로 그 자체, 이행 그 자체이다.

낭시는 죽은 자의 시선이 이미지의 범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핵심에는 반드시 죽음이 존재할 것이다. 에로스에서 체험되는 것은 죽음, 즉 타나토스일까? 낭시는 죽은 자의 시선과의 관계에 상상력의 근저를 ― 하이데거와 함께 ― 지켜보고자 하지만, “이미지의 밑바닥에” 닿으려는 이러한 고찰은 에로스(그리고 타나토스)와 상상력의 근원적 연관을 탐색한다는 다른 시도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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