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03.30 『사상』, 2013년 2월 -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연재 예고)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I. 푸코 재고

1. -‘생명정치학적 고찰

우노 쿠니이치(字野邦一)

2. 정신과 심리의 통치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3.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 미셸 푸코의 생체권력론

히로세 고지(廣瀬浩司)

4. 구조주의의 생성변화

에두아르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II. 이탈리아에서

5. ‘죽음정치에서 비정치: 이탈리아에서의 생명정치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6. 인간과 동물의 문턱 :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7. 생명권력과 생명역량[잠재력]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III. 인류학의 지평

8. 오늘날의 생명정치학 :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프레데릭 켁

9. 생명권력의 외부 : 현대인류학을 통해서 생각하기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

10. 3종의 정치를 향하여 : 인류학적 생명권력론의 한 시도

야나이 타다지(箭内匡)

11. 신체의 산출, 개념의 연장 : 마릴린 스트라썬에게서의 멜라네시아, 민족지, -생식기술을 둘러싸고

사토미 류지(里見龍樹)구보 아키노리(久保明教)

 

IV. 착종의 장으로

12. 합성생물의 생명정치학

가나모리 오사무(金森 修)

13. 출현하고 있는 생명의 형식?

니콜라스 로스

14. 스스로 움직이는 것의 생태학

노타카 테츠시(野中哲士)

15. 라 보르도 병원의 transversalité

미와키 야스오(三脇康生)

==========================================================================

사상의 말 : 언어와 생명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원래 이 글은 조르조 아감벤이 집필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선생에 따르면, 언제나 그렇듯이 지연되어) 마감을 넘겼는데도 아감벤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내가 이 특집의 좌담, 원고, 번역에 많이 힘을 쓰긴 했지만, 이런 종류의 원고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부득이하게 떠맡게 되었다.

언어와 생명은 어려운 테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학문을 그리스부터든 고대 중국에서부터든 아무튼 시작한 이래,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고 학문을 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다. 학문이 학문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야생의 사고든, 언어적 상징을 이용한 논리 조작이 어딘가에서 필요할 터이다. 그러한 합리화나 논리화, 혹은 규범화를 갖지 않은 지적 활동은 원래 있을 수 없다. 근세 이후, 유럽에서 학문이,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경이로운 발전을 이룬 배경에는 수학이라는 추상적인 기호계의 전개가 있었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언어란 어떤 것이든,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이 세계를 범주로 구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언어의 조작에 의해 인식의 계층성이 생겨나며, 분류로서의 학이 시작된다.

하지만 언어란 우선 인간의 것이다. 우선이라고 말한 까닭은 인간 이외의 생물이 (잠재적으로든) 언어적인 무엇을 사용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고, 또 인간이 언어를 획득한 것도 분명히 자연 진화의 과정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어를 명시적인 수준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렇기에 자연에 대해, 물질에 대해, 생명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존재방식을 주장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언어의 힘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 경향은 고대의 언령적言霊的 발상에도, 지난 세기에 언어론적 전회가 (내게 그것은 근대의 결실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전되었을 때에도 발견된다. 특히 후자에서는, 언어가 의식을 대신하여, ‘인간을 지키는 보루가 되었다. 확실히 그래서 언어의 광기가 얘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어가 지닌 다양성이 다문화주의의 원천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아무튼, ‘인간이란 역시 하나의 에 불과하다. 다언어주의 속에서 번역의 문제가 인문학의 열쇠처럼 다뤄졌다고 하더라도, 늘 번역은 이루어진다. 번역은 물론 인간이 갖추고 있는 근원적인 차이나 교통 불가능성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번역은 동종의 인간 사이에서의, 마찬가지로 진화한 뇌의 기능 사이에서의 번역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생명은 전혀 다르다. 물론 생물학으로서의 생명의 지식, 즉 생명을 분류하고 논리화하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옛날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나,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는, 윤리적인 삶의 방식의 문제이기는 해도, 원리적으로 지식의 문제가 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생명에 독특한 물질=질료성, 그저 태어나고 그저 생식하고 그저 죽어갈 뿐인 생명으로서의 이러한 나, 이것은 지식의 대상으로서는 기피되어야 할 영역이었던 것이 아닐까? 너무 분류하고 명석화하는 것으로부터는, 뭔가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닐까?

거기에는 상반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지성을 축으로 한 생물인 인간에게, 스스로가 포함하는 역설, 스스로가 품고 있는 모순을 노정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물질적 생명을 포섭할 수 없다. 지식은 어디서든 생명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생명 자체를 묻는다면, 자신의 근거가 희박하고 소멸한다는 감각이, 즉 일종의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의 감각이 항상 따라다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두려운 낯설음일까?

두려운 낯설음은 현대사상(혹은 그 발단의 시기)에서 처음부터 중시된 말이다. 실존주의나 생철학은 지식의 너머인 이러한 영역이나, 거기서 발견되는 부조리성이나 우연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학들은, 이 영역이 품고 있는 본질적인 실정성을 명시할 수 없었다. 언어론적 사고를 섭취한 정신분석은 언어화도 상징화도 할 수 없는 이 너머실재자체로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방치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극히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그저 살아 있다고 하는 너머를 실정적으로 밝혀주는 것은 바로 인간 지식의 극한 같은 생물학이었다. 뇌과학이 해명하는 시냅스 연쇄로서의 지식이나 정서의 기능, 분자생물학이 그리는 분자적으로 해체되는 신체의 이미지, 면역 기능이 제시하는 흔들리는 자기의 애매함 . 그것은 확실히 지식이 노정시키는 신체이자 자기이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언어를 축으로 한 근대적 지식이 자기의 기반에 위험한 방식으로 구부려왔던[주름을 접혀왔던] 것의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식으로 생명을 파악하는 것, 이것은 지식이 지식이라는 것(인간이라는 것)을 붕괴시키는 사태를 포함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의 지식에 집착하는 철학만으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었다. 물질로서의 지식을, 생의 한가운데서 다루는 것은 불가피해진다.

여기에는 다른 방면에서의 호응도 있었다. 그것은 이론보다 훨씬 실천적인 지향이 강한, 정치나 윤리에서의 지식의 담론으로부터의 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생 그 자체의 정치학’, 이것은 본 특집에 그 일부의 번역이 게재된 니콜라스 로즈의 말인데, 정치의 중심에 생명을 두는 것은, 돌이켜보면 20세기를 뒤덮었고 21세기에서 더욱 첨예화되고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감벤이 강조하는(그것이 얼마나 인류사적 비정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우슈비츠에 한정되지 않는다. 19세기적 민족주의를 이어받은 20세기는, 필연적으로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의 세기이기도 했다. 살아 있는 것의 인종성이, 자유나 민주주의, 그리고 국가의 시스템의 저변에 깔려 있고, 그것을 떠받친 구조가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그저 살아 있는 것의 신체성이 그것만으로 정치화되고 분석되는 극한적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의 다양한 사례는 이미 이러저러하게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을 축으로 한 생식에 대해서는 기술적 조작이 가능해지고 있고(클론, 인공수정, 대리모), 그것은 세포 자체의 생식성(ES세포나 iPS세포)까지 미치고 있다. 인종차별=인간차별적 사태는 이제 양수 검사에서의 태아의 장애의 명확화에 의한 암묵적인 생의 선별, DNA 검사에 의해 제시되는 잠재적인 병의 가능성까지 확대되며, 살아 있는 미시적 물질성을 대상으로 하면서 광역화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의 고도화는 뇌사의 문제를 야기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 자체의 애매함을, 단순히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문제로서도 초래하고 있다. 이것들은 언어와 지식을 갖춘 인간 자체가 그 범주로는 수습될 수 없는 생명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사례이다.

미셸 푸코는 자신이 설정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학이 이런 사정거리를 갖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은 유효하면 유효할수록 발명자의 의도를 넘어서 확산된다. 이렇게 확산된 결과, 생명권력은 이제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조차도 규정하기 어려워졌지만, 그러나 이와 동시에 21세기의 사고의 구도를 그릴 때 불가결한 조작 개념이 되었다. 이것이 향후에도 계속 유효한 개념일 수 있는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가 언어나 의식을 넘어서 그 기반에 시선을 돌릴 때, 그리고 정치나 윤리라는 사태 속에 언어를 넘어선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파고들어온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 언어와 생명이 결정적으로 뒤얽혀 있는 이 위상이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그것은 조화로운 생명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 생명을 원리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언어가, 뭔가 그 모습을 꼼짝 못하게 누르려고 하는 어려움이야말로 거기에서 노정되어야 한다.

생명의 윤리학이나 정치적 사고는, 스스로 이러한 역설적 상황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부터 너무도 외면해 왔다. 일본에서의 생명윤리적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몇 사람의 논자들이, 지난 세기의 생명윤리의 불철저함을 자각하면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학에서 그 존재론적 검토의 재료를 찾고자 했던 것은 (예를 들어 金森修, 『〈生政治哲学(ミネルグァ書房, 2010), 小松美彦, 生権力歴史 脳死尊厳死人間尊厳をめぐって(青土社, 2012))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징조처럼 보인다. 단순한 윤리를 넘어서, 생명의 존재론이나 그 근원적 정치성을 묻는 탐구는, 향후 아마도, 예상도 못할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가지로 결실을 맺을 것이다. 거꾸로, 거기서는 푸코의 의도에 따른 한에서의 생명권력이라는 용어는, 이제 소멸해도 상관없을 것이 될 터이다.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