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2장. 

인간과 동물의 문턱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槍垣立哉)

들어가며

생명정치의 장래를 향해 무엇을 써야 할까? 후기 푸코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리[통제]사회의 문제들, 즉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미 문제거리조차도 안 되는 비참한 삶을 톺아내고, 거기서 희미하게 뭔가의 전망을 찾아내야 할까? 들뢰즈=가타리가 물론 어둠을 간직하면서도 보다 분명하게 미래의 생명을 그려냈듯이, 현재의 인간이나 그 사회의 해체를 함의하기도 하는 생명의 밝음을 부각시켜야 할까? 생명정치학의 개념이, 항상 이런 양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원래 미래가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은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다. 미래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아니다. 미래라고 하면서 뭔가가 말해질 때, 나나 우리는 그것을 가치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런 물음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좋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몽상 같은 철학자의 말은 생명정치학이 현실적인 정치의 물음과 연관되는 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그 자연사적 깊이를 지닌 시계(視界)에서 재파악하는 것, 말하자면 법, 제도, 윤리, 말 등을 고작 2000년부터 3000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인 근원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멀리 생명 자체에 뿌리를 내려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정치학의 독자성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이런 방향성에서 생명정치학의 광대함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상가가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이다. 아감벤이 세계적 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도 끝나갈 무렵이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학을 이어받아 쓴 작품군과, 거기서 제시된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이라는 개념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감벤의 저작의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그와 생명정치학 자체의 관련이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러 가지 논점에서 분명해졌다(일본에서는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다카쿠와 가즈미(高桑和巳) 등에 의한 이탈리아어로부터의 빼어난 번역과 해설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라는, 철학지리학에서는 변방적인 사상가의 논의가, 프랑스 및 미국과 거의 동시에 일본에 영향을 주었던 속도성에서도, 위의 번역자들의 작업은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기서 감안되어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호모 사케르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전적 소양의 광대함과, 종교나 법에 관련된 지식의 풍성함이다. ,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도 벤야민을 애호하고(시대를 공유하는 이 두 사람의 사유는, 상식적으로는 거의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기독교 역사도 곱씹으면서, 현재적인 정치의 논의에도 깊이 헤집고 들어가는, 그 독특한 사유법 자체이다(벤야민이 말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접합이야말로 그의 모토인 듯하다).

확실히 오카다 아츠시가 아감벤의 종교신학을 강조하듯이,[각주:1] 특히 금세기에 양산된 작품군(세속화 예찬(2005), 왕국과 영광(2007), 벌거벗음(2010))은 생명정치라기보다는 종교성과의 연관이 매우 깊다. 그 때문에 아감벤을 생명정치학의 개념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철학의 영역에 한정해도, 푸코나 들뢰즈를 언급하는 논의는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아감벤의 논의를 생명정치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가 주장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나 잠재력(potenza)’이라는 개념이 설령 우연의 결과일지라도 푸코나 들뢰즈가 논하는 유사 개념에 매우 접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그것도 벤야민의 텍스트를 읽는 한 상당히 미묘한 논맥에서) 끌어낸 용어이다. 그래도 아감벤의 독창성은 벌거벗은이라는 개념을, 생물적 신체가 정치적 과제이게 되는 푸코의 논의와 관련시키고 벤야민적 논맥으로부터는 벗어난 의미를 끄집어냈던 것에 있다. ‘잠재력에 관해 말하면, 아감벤의 고찰의 원천은, 일관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뒤나미스 분석에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재성(virtualité)을 논하는 들뢰즈와, 스피노자를 매개로 맺어지고 생명을 그러내는 주요한 위상에 놓인다. 양자 모두와 더불어, ‘생명신체를 사고하는 키워드 자체로서, 아감벤에 의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감벤은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다른 생명정치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법이나 말에 강하게 천착하는 데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아감벤은 생명정치학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법과 언어를 중시한 논의를 펼친다. 그것은 푸코가 기본적으로 정신분석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혹은 들뢰즈(들뢰즈=가타리)가 시니피앙 중심주의적 언어론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명 개념과 그 질료성에 시선을 돌렸던 것과는 명확하게 대조적인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아감벤은 푸코 등이 비판했던 정신분석이나 법이라는 초월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생명에 파묻혀 있는 법이나 언어, 달리 말하면 생명을 반사하고 생명으로부터 반사되는 법이나 언어의 위상을 솜씨 좋게 세세하게 집어냄으로써, 생명정치학의 개념을 더욱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아렌트와 푸코 쌍방의 부족분을 연결시키는 호모 사케르의 서두 부분 등에서[각주:2]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감벤은 법과 언어의 경시 때문에 푸코도 (나아가 들뢰즈도)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비판했던 대상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생명정치학 속에서 꺼내진 언어와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이다.

아감벤은 매우 견실한 지식으로 뒷받침된 역사학자로서 행동하면서도, 거기서의 종교의 파악 방식은, 앞서 말했듯이 시공을 종횡무진 횡단하고, 현대의 첨단적인 장면과 고대세계를 결부시킨다. 그의 자세는 역사를 논하면서도 역사 자체를 원리로 삼지 않는, 말하자면 근원을 논하면서도 근원자체를 허공에 매다는[중지시키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이는 오히려 푸코가 고대를 다룬[문제 삼은] 그 방식에,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분석하는 그 방법에,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태계적인 자연사를 그려내는 그 시각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중지하다[허공에 매달다]라는 말이 아감벤의 핵심어의 하나이듯이, 거기에는 근원을 탐구하면서 근원을 탈근거화하는 지식의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동 방식 자체가 생명정치학의 시도와 강하게 겹쳐진다.[각주:3]

이렇게 제시되는 아감벤의 독자적인 영역이란 바로 애매함이며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아감벤은 생명에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방식을 항상 언어와 연관시키고, 벌거벗은 질료성이 법이나 제도의 막간[틈새]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와 같은 이중의 방법에 의한 중간성이나 문턱의 존재가, 앞의 중지라는 방법론과 포개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아감벤에게 생명 그 자체란 어떤 개념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이다.

아감벤에게서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열림(2002)이라는 저작, 특히 거기서 다뤄지는 하이데거의 동물론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라는 주제가 겨냥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물론은 절대적 내재성(사유의 역량, 2005년 수록)이라는 들뢰즈와 푸코의 관계를 논한 텍스트의 귀결이, 하이데거와도 맞물린 이 주제에 의해 도출됐다는 것과도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과 푸코의 생명 개념을 대립시키면서 생명론이 향하는 곳을 탐색한다. 그런데 약간 희화화되어 그려진 최후의 생명론의 계보도에서, 푸코와 들뢰즈는 대립되기는커녕 내재성의 라인에 똑같이 배분되고, 다른 쪽의 초월의 라인에 데리다나 레비나스 등을 적은 뒤, 굳이 하이데거를 그 중간 영역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기묘한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논할 때, 그 중간적인 위상에 있어서도, 하이데거를 내재의 방향에 위치시키는 것은 꽤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적 존재론과 존재의 언어를 논하는 자로서, 흔히 어디까지나 초월의 라인에 위치시켜야 할 사상가로 간주될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내재적 생명론에 대한 공헌을 보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런 도식을 그려내는 아감벤은 자신의 시도를 어디에 위치시키는 것일까? 이것들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관련된 동물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그것이 생명정치학의 사고에 있어서 새로운 문턱으로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닐까?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논고 절대적 내재성은 푸코와 들뢰즈 둘 다의 생전의 마지막 텍스트가 각각 생명을 둘러싼 것이었음을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양자에게 생명을 논하는 것은 유언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텍스트란. 푸코의 경우 생명 : 경험과 과학[각주:4]이라는 캉길렘을 다룬 비교적 긴 논고이며, 들뢰즈의 경우 내재성 : 하나의 삶 …」(1995)[각주:5]이라는 아주 짧은 문서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들뢰즈의 글 제목과 스타일 등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솔직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아감벤의 사유의 위상이 제시된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두 사람과의 대비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를 검토하기 전에, 아감벤에게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다시 살펴보자.

호모 사케르의 서두에서 아감벤은 비오스조에라는, 이제는 주지의 바가 된 말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동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에 공통된,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했다. 그에 반해 비오스는 각각의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살아가는 형식, 삶의 방식을 가리켰다.”[각주:6]

여기서 조에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살아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잠재적인 힘이다. 그리고 후자인 비오스란 이른바 정치적인 삶,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폴리스적인 삶을 모델로 한 것이다.

조에비오스라는 생명에 관련된 말하기 방식을, 현대정치와 관련시켜 얘기하는 아감벤의 주장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벌거벗은 생명과도 강하게 관련되는 조에가 그대로 정치의 주제로 간주되는 것, 혹은 말을 사용하여 행하는 폴리스적 사태에, 다만 살아 있을 뿐인 생명성인 조에가 침입해 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18세기 이후의 근대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푸코가 생명정치학으로 논했던 것과 겹쳐진다.


폴리스의 영역에 조에가 진입한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근대의 결정적 사건을 이루며, 고전적 사유의 정치적-철학적 범주가 근원적으로 변용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각주:7]


이것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이런 범주의 변용은 모종의 회색지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삶과 죽음, 공과 사, 우파와 좌파, 절대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대립 도식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치적 장면이 형성된다.[각주:8]

, 생명정치학과 벌거벗은 생명의 정치화는 겹쳐 있지만, 근대에 특징적으로 현현한 독자적인 방식에 있어서, 근대를 지배했던 기존의 정치적 범주가, 모두 회색지대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살아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신체, 혹은 생물학적 인체 실험을 겪은 생체를 예로 든다는 것, 더 나아가 호모 사케르에서도 국가라는 법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난민, 삶과 죽음 자체를 규정할 수 없는 뇌사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런 논의들이 근대 후기라는 시대성과 강하게 관련된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감벤이 푸코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회색지대가 현재화하는 것이 근대 후기였다고 해도, ‘조에비오스와 얽혀 있는 착종된 사정 자체는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는 원리로서 당초부터 숨어 있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은 호모 사케르의 모델 자체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방식으로 그것에 포함되는 신체를 다루는 로마 시대의 처벌에 있는 것으로부터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란 신성화된 사람들이지만, 그 신체는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물로 될 수 없다는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 흔히 이 두 개의 특징은 병치될 수 없다. (뭔가의 형벌을 받은) 살해 가능한 신체(법으로부터의 폐기)는 손쉽게 희생화되지만(종교로의 포함), 여기서는 살해 가능성은 희생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살해 가능성과 희생화 불가능성의 교점에 있어서, “인간의 법으로부터도 신의 법으로부터도 배제된 신체가 출현하게 된다. 이 신체가 벌거벗은 생명의 원상原像인 것이다.[각주:9]

그래서 이것은 법에 있어서 모든 의미에서의 예외이기도 하다. ‘은 신성화되지 않지만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된 것으로서 포함해버린다. 그리고 주권이란 칼 슈미트가 말했듯이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자라고 한다면, 이런 신체를 다루는 것 자체가 법을 주권적인 법으로 만드는 원리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배제하는 것은 배제로서 포함하는 것, 이것이 법을 성립시키는 원점에 있다.

배제와 포함이 서로를 맞아들이는 이런 사정이 바로 아우슈비츠로 나타나는 비참한 신체의 전형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그것은 법의 원리이면서도, 현실적인 무엇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은 이리하여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 되며 시민의 생물학적 생명과 일치하고자 한다[각주:10]는 시대 진단이 거기에 포개지게 된다.

여기서 우선 논의되는 것은 법이 초월적인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생명 자체를 포함한다는 사정이다. 바타유적 살해가 초월화된 신성성을 묻는다면, 이것과는 정반대의 관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여기서 법은 시니피앙이 아니며, 또한 명령하는 것일 수도 없다. 법은 법이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포함한다. 거꾸로 말하면, 법 자신이,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예외상태에서의 규정 불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으로부터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아감벤에게서의 벌거벗은 생명은 그 벌거벗은이라는 방식에 있어서, 규정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정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각주:11]

거기에는 조에비오스의 연관에 관해서도, 단순하지 않는 사태가 출현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신체란, 물론 조에인 동시에 비오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신체의 특정한 동물적, 식물적 기능이 조에이며, 특정한 인간적 기능이 비오스라는 것이 아니다. ‘비오스비오스인 한에서 항상 조에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비오스에 있어서 조에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또한 어디에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과 신체, 로고스와 물질, 이것들도 마찬가지의 배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바로 그것이다. ‘예외상태라는 외부를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규정하는 것, 이것이 양자의 관계성이다.

벌거벗은 생명예외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감벤의 발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관계를 이루는 것인 비오스조에는 마치 단순히 이층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도 배제와 포함을 둘러싸고 서로 얽혀 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감벤에게서 생명은 법이나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예외성인데, 동시에 그것에 의해 법이나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도 그려진다. 생명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식물적 생명이나 동물적 생명이라기보다도 언어화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언어를 떠받치는 무엇인가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나 들뢰즈가 법적, 언어적 위상의 초월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생명의 위상을 끄집어낸 것과는 대조적인 위치에 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과 언어를 시니피앙적 초월로서가 아니라, 생명과의 역접적 관계에서 끌어내게 된다.


들뢰즈 및 푸코 비판

그러면 여기서 절대적 내재성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이 글에서 아감벤은 푸코와 들뢰즈의 생애 마지막 텍스트가 모두 생명을 다뤘다는 기묘한 부합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이 논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한다.

대부분이 들뢰즈를 향한 이 논고의 처음 소소한 부분에서 아감벤은 푸코를 언급한다. 그 소재가 되는 푸코의 캉길렘론은 푸코의 최후기의 다양한 사유, 즉 프랑스 철학에서의 인식론과 영성주의(spiritualism)라는 두 개의 계보의 구분이나, 계몽의 논의의 재검토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감벤은 특히 푸코의 서술의 마지막에 눈길을 돌린다. 거기서는 생명의 중심에는 잘못[착오]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써져 있지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해독의 작동[기능]은 우연히 주어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이 되기 이전의, 정보 시스템의 변조나 잘못 취함[오용]같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이란 잘못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12]


그리고 그 후에 푸코는 이런 캉길렘의 생명에 관한 견해를, 시대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니체의 그것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는 생명의 기나긴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잘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했던 가장 특이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아감벤은 생명과 오류라는 주제는 푸코가 성의 역사1권 이후에서 보여줬던 논의의 흔들림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그것은 들뢰즈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감벤은 또한 푸코의 이런 생명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경험과도 같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지면에 뿌리내린 별도의 주체성을 향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거기서는 그저 생명과 생명의 일탈과만 상관관계를 가진 인식[각주:14]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푸코(1986)에서 지식과도 권력과도 구분되는 3의 축으로 간주했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아감벤은 지적한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의 최후기의 시도를 들뢰즈의 그것과 교차시킨다. 들뢰즈가 그려내는 생명의 권역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바로 최후기의 푸코가 행했듯이)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정치의 향후 과제라고 아감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자신 아감벤의 고찰과 깊이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에 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것을 감안한 다음, 푸코적인 주체의 논의를 구성해가는 라인은 어떻게 그어짓는다는 것일까?

아감벤은 들뢰즈 최후의 텍스트 내재성 ; 하나의 삶 …」의 표제에 있는 콜론에 강하게 집착한다. 여기서 중간에 배치된 콜론은 단순한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내재성, ‘거리도 동일성도 아닌 일종의 통과, 아무런 공간적 변동도 없는 이행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내재성과 생명은 각각이 다른 것에 열려 있으면서, 생명은 생명에 내재한다는 형태로 그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내재성이라기보다는 내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논의는, 바로 들뢰즈의 내재성과 아감벤이 잠재력으로 말하는 것을 결부시킨다.

여기서 아감벤이 증거로 삼는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들뢰즈이다. 이 저작에서의 내재성또는 내재평면(plan d’immanence)’의 논의야말로 여기서의 포인트가 된다.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내재성이란 그저 자신에 대해 내재하는것뿐이며, “무엇에 대해 내재하는것이 아니라고 논한다(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 대한 의미의 논리에서의 높은 평가를 여기서 참조하고 있다).[각주:15]내재성이란 의식에의 내재성도 자아로의 내재성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하는 것에의 내재인 것이며, 바로 자기 완결적인 운동성이다.

  

후기 들뢰즈의 텍스트를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감벤이, 여기서의 내재평면을 바로 (현실화한 생명체를 상정하는 베르크손적인 잠재성이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일의성으로 끌어당겨, 거기서 내재 그 자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원리란, 존재의 초월을 모두 배제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없다. 하지만 일의성을 절대화하면, 존재의 모든 점에서 존재 자체와 동등한 것이 되며, 관성과 부동성이 존재 위에 짓눌러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원인이라는 사유는, 행위자 자신에 대해서는 행위자 자체의 수동성이라는 것이며, 이 사유에 의해 존재는 그 의심에서 해방된다.[각주:16]


내재성은 바로 초월을 거부하면서 내재성자신이 내재하는 운동으로서 작동하는 가운데 있다고 간주된다. ‘내재성이 그 자체로, 초월이 아니라 작동을 갖는다는 것, 이것에 아감벤은 들뢰즈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의 원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며, 다양한 반론을 가한다. 그것은 아감벤과 들뢰즈의 사유가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그 비판 중 하나는 들뢰즈가 이 텍스트에서 디킨스의 소설을 다루는 장면과 관련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에 처한 어떤 악당이 묘사된다. 죽어가고 있는 그에 대해, 주위의 누구나 상냥함을 드러낸다. 그에게 발견되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과 비슷한, 순수한 내재로서의 신체이다. 그런데 병에서 회복되면서, 악당은 단순한 생명이기를 그치고 다시 악당이 되며, 나쁜 짓과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도 다시 그에게서 멀어진다.

여기서 묘사되는 비인칭의 삶[생명]’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모습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협간에 있는 이런 중간지대의 묘사에 아감벤은 공명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죽음에 가까운 이 장면에서, 삶을 개체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들뢰즈는 또한 거의 분간되지 않는 아기의 웃음이라는 비인칭성도 언급한다. 비인칭적인 아기의 웃음은 아기가 개체화되면(, 거기에 개성이 출현하면) 사라지는 것, 개체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벌거벗은 존재방식과 평행적인, 원초적인 생명의 형상이며, 아감벤이 진술하는 중간영역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이렇게 논한다. , 여기서 제시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양섭취의 생명이라고 부른 것, 혹은 비샤가 우리에 갇힌 동물이라고 지목한 것, 즉 생명적 신체가 지닌 동물적인 혹은 식물적인 기능 방식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까 여기서 질문되고 있는 것은 일면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불분명함 아니냐고. 그 때문에 이들의 논의는, 정말로는 (들뢰즈 자신이 하고 있지는 않은) 이런 방향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이렇게 읽을 수 있는 서술이란, 내재를 생명이라는 영역으로 비켜 놓는 것에 관해서, 매우 위험한 토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들뢰즈와 푸코의 차이도 선명해진다고 한다. 들뢰즈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 묘사한 권력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나 푸코가 생물학적인 실존이 정치 속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명정치로서 파악한 반면, 들뢰즈는 푸코에서 이런 생명 자체란 무엇인가, 권력과의 관련에서의 그 의의는 무엇인가를 캐묻지 않고, “생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바로 그것이라고 단적으로 정리해버린다. 하지만 그래서는 생명정치적인 갈등의 양의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되지 않지 않을까?[각주:17]

아감벤은 들뢰즈가 거론하는 내재의 생명에 실제로는 생물학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논한다(이것도 푸코에게서의 생명의 구체성과 대비를 이루는 사태이다). 최종적으로는 스피노자적인 내재의 지복에 이르는 들뢰즈의 에 있어서, ‘하나의 삶이란 절대적으로 무매개적이면서, 모든 생명에 깃든 무엇인가로서, ‘인식 없는 순전한 관조가 되고 만다. 그것은 들뢰즈 자신이 생기론에 두 가지 길을 찾아내려고 하면서도, 그 한쪽인 행동하는 이데아가 아니라 [다른 한쪽인] 순전한 내적 감각을 선택하는 것과도 포개져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것은 인식의 모든 대상주체의 저편에 있어서의 순전한 관조이며, 행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순수한 잠재력이 아닐까.[각주:18]

이에 반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 생명이 깃든 불분명성의 지대에서가 아니라, 내재 자체의 위상에 가둬두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양섭취의 생명과 반대의 것 밖에만 발견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혹은 비샤적)인 생명이란 식물적인 생명/관계의 생명, 바깥의 동물/안의 동물, 식물/인간, 조에/비오스, 벌거벗은 생명/정치적인 삶이란느 다양한 구분선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생명에 의거하는 푸코도, 아감벤과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구분을 전제로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고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명이 절대적 내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계층성이나 분리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이 일의성이 지닌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명 논의는, 스피노자적인 지복으로서의, ‘내재속의 운동에 머물러 버린다.[각주:19] 이것은 생명에 대한 취급방식으로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학적인 상황에, 어떤 길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바로 중간지대의 사상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논의를 수습하려 한다.


푸코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가 둘 다 극단적인 유언으로서 남긴 생명이라는 개념은, 도래하는 철학의 테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우리는 서두에서 단언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단언을 할 수 있는가는 이제 분명하다. 이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권력과 주체화 과정에 관한 최후의 푸코의 얼핏 보면 음울한 고찰과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 내재지복으로서의 하나의 삶에 관한 들뢰즈의 얼핏 보면 명랑한 고찰, 이 두 개의 고찰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다.[각주:20]


함께 읽어본다는 것은 물론 양자를 평균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측을 양측의 걸림돌로서 읽는 것, 양측을 양측에 대항시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논하는 비인칭성의 일의성에는, 아감벤은 그 위상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푸코의 주체화에 관해서도 최후기의 그것에 아슬아슬할 정도로까지 찬성하면서도 배제와 포함에 관한 논의의 부재를 계속 묻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고찰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앞서 말한 도식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제시한다. 일련의 논의가 푸코와 들뢰즈의 생명에 관한 개념의 애매함을 논의한 반면, 마지막에 놓인 이 도식에서는, 한편으로 푸코와 들뢰즈가 동거하는 내재의 선이 그려지고(그것은 스피노자와 니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에 대립시키듯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초월의 선(후설이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설정된다(앞의 153쪽의 그림을 참조).

들뢰즈와 푸코의 유사성과 대비에 의해 전개되는 논의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은 여기서 따지지 말자. 이것 이상으로 문제인 것은, 이 양자의 선의 중간에 하이데거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마치 하이데거를 축으로 초월과 내재라는 두 개의 선이 배치 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생명의 철학의 탐구의 마지막에, 왜 하이데거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갑자기 도입되게 되는 것일까?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도식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사유 자체는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변은 아마 한 가지밖에 없다. 아감벤은 항상 자신의 사유를 중간지대로 설정하려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 한에서, 여기서 아감벤은 자신과 하이데거를, 생명의 사유에 있어서 분명하게 포개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감벤과 하이데거의 관련 : 동물과 인간

하이데거는, 여기서 이른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명의 문제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끌어내지고 있다. 아감벤은 법이나 초월을 자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라는 주제로 끌어들이고 생명을 논하는 한, 중간지대에 자신의 입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감벤이 본래 자신을 두어야 할 위치에, 하이데거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바로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존재론을 구상하고, 언어에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한 점에서 초월의 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생명의 논의가 발견되는 것일까?

절대적 내재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내재와 사르트르의 논의의 가까움을 논하는 부분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의식이 가졌던 가치들을 정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철학자의 몸짓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 철학자의 작업을 들뢰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세기 현상학의 대표자 속에서는, 이 철학자가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들뢰즈에게 가장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철학자란 하이데거, 그 멋들어진 알프레드 자리론에 등장하는 파타퓌직한 하이데거이다.[각주: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파타퓌직으로서의 하이데거(들뢰즈, 하이데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구자 알프레드 자리, 비평과 임상 수록)를 토대로 했다고 해도, 생명론적인 위상에는 아직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각주:22]

오히려 아감벤 자신의 하이데거론인 열림이 여기서의 논의와 더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아감벤의 저작 열림으로 넘어가자.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동물성을 둘러싸고 하이데거의 생명론이라는 문제계를 추적한다.

말할 것도 없으나, 존재와 시간(1927)에서의 하이데거는 생물학이나 생명의 철학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견해를 제시했다. 거기서는 자신의 존재론을, 당시 융성을 뽐냈던 생명의 철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나, 현존재의 논의가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하이데거도, ‘세계세계성의 개념에 이르는 직전에서라고는 하지만, ‘환경세계(Umwelt)’라는 윅스퀼의 술어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윅스퀼의 환경세계론, 하이데거의 도구 존재로서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테마를 생각할 때, 존재와 시간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1929-30년의 강의록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각주:23]이다. 이 방대한 강의록에서는, 그 전반부에서 권태(Langeweile)’라는 (‘불안과는 다른) 정동성이 논의되고, 또한 후반부에서는 윅스퀼을 축으로 한 생물학적 논의가 주제화되며, 동물성을 둘러싸고도 상당한 서술이 이뤄진다. 거기서는 동물적인 생명은, “세계가 가난하다(Weltarmut)”고 규정되며, 돌이 세계를 갖지 않는 것(Weltlos)이나 인간이 세계(Welt)를 살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 묘사된다.

이 하이데거의 강의록 자체가 수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성을 노정시키는 근원적인 정서로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에 할당되었던 역할이, ‘깊은 권태[지루함]’로 대체된다(‘깊은 권태는 특정한 지루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불안과 겹칠 것이다). 거기서는 불안이 죽음에의 선취로 현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순간과 시간의 오랫동안(Langweil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이다.[각주:24] 심지어 이 깊은 권태(die tiefe Langweile)’의 논의가 전단계가 되어, 동물적 생명을 다루는 후반부로 향할 때, 현존재가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 규정되게 된다. 이른바 하이데거 자신이 2년 전에 간행된 미완의 저서 존재와 시간, 다른 종류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이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열림의 논의를 밀고 나간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형태로서의 깊은 권태라는 정동성과, 동물이 환경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가난함사이의, 역설적인 결합 자체이다. 이 두 가지는 유사하지만, 인간(현존재)의 본질과 동물의 본질로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논의에 있어서의 이 두 개의 착종된 관계에, 앞의 도식에서 초월과 내재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있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초미의 과제는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Weltlos)’,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다(weltbildend)’의 관계를 통해서, 현존재 세계--존재 라는 근본 구조 자체를 동물에 대해 위치짓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생물 속에 나타나는 개시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5]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이성적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동물적 생명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도록 묘사하는 것은, 바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하이데거가 계속 거부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생물학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만, 그런 거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오히려 존재와 시간에서는 몇 줄로 처리되고 말았던 생물학과의 대결재부상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각주:26] 동물과 인간의 연관을 차이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 현존재의 규정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동물은 환경세계를 억지해제(das Enthemmende)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동물이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고리를 이루면서도, 이로부터 열려져 있는 존재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억지해제에 있어서는 동물이 그것에 에워싸여 있는 고리로부터 열려 있다.”[각주:27] 하지만 그런 동물의 존재방식은 또한 사로잡혀 있다=방심(Benommenheit)”고 말해진다. “사로잡힘=방심도 또한 환경세계 속에서, 열려지고 있으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존재 자체로의 열림(Offenbarheit)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로잡힘=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어떤 지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꿀벌이 꿀을 빨고 있을 때에는, 오로지 그 대상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푹 잠겨 있다]. 거기서 자신의 신체가 절단돼도, 꿀벌은 꿀을 계속 빨고 있다.[각주:28] 이것은 주어진 환경성의 규정에 대한 사로잡힘=방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물의 행동거지는 억지해제로서, 열림에 대한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문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심 속에서는 존재자는 열려 있는(offenbar) 것이 아니며, 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닫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각주:29]

동물은 존재자에게 열려있지만, 그런 존재자는 존재로서 노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매우 양의적인 사태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 환경세계 속에서 억지해제고리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열림의 방향성을 갖는 것과, 그것이 사로잡힘=방심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양의성은, 하이데거가 이 강의록의 전반부에서 논한 깊은 권태의 논의로 결부된다. 하이데거 자신이 동물의 사로잡힘=방심, 인간이 지닌 깊은 권태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이르러서 하이데거는 강의의 1부에서 다뤘던 깊은 권태에 관한 논술을 불러일으키며, 동물의 방심과 깊은 권태라고 불렸던 근본적인 정서를 뜻밖의 형태로 공명시킬 수 있다.[각주:30]


깊은 권태란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장면 자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하이데거의 깊은 권태

이로부터 아감벤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의 깊은 권태를 주제로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것은 동물의 사로잡힘=방심과 매우 유사하지만, “사로잡힘=방심이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도 스스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깊은 권태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의 근본에 있는 정동성이며, 그 때문에 닫혀 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권태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우선 거기서는, 현존재가 거절되고 있는 존재자에게 건네지고[넘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기는, 동물성이 지닌 억지해제고리’, 즉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다는 존재방식과 흡사하다. 현존재는 보통은 존재자의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권태라는 존재방식 속에서, 그 닫힘 자체에 있어서, 인간은 존재자에게 건네지고 있다(ausfeliefert)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깊은 권태의 특징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Hingehaltenheit)”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는 것은 거기서 비활성인 채로 체류하는 것(brachliegende)이기도 하다고 얘기된다. 그것은 손에 넣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경작지를 의미하는 농경용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능성을 가지면서 어떤 가능성도 현재화시키지 못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눈앞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아감벤이 잠재력에 의해 말했던 것과 강하게 겹친다. ‘깊은 권태특정한 구체적 가능성 전부를 중지시키고, 탈취하는 가운데, 근원적인 가능성(즉 잠재력)이 그 가치를 드러내는 체험[각주:31]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권태론은 특히 불안과의 연관에서 많은 논의해야 할 테마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감벤의 논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감벤은 여기서의 논의에, 자신의 잠재력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을 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들뢰즈의 잠재성이나 내재라는 사고와의, 강한 결부를 시사하는 것이다. 거부함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계속 갖는 것. 그것은 아감벤도 들뢰즈도 논의하는 바틀비(허만 멜빌),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안 하는 게 좋습니다=안 하는 걸 좋아합니다](I would prefer noto to)라는 말과도 결부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모종의 무능력을 축으로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각주:32]

그러면 이런 깊은 권태는 동물성과 연관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으로는, 동물이 환경세계속에서 사로잡힘=방심하는 것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틀비적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능력은, 들뢰즈라면 곧바로 bêtise=어리석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며, 동물적인 무력함에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깊은 권태를 아슬아슬하게 접근시키면서 이것들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억지해제하는 것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억지해제하는 것 속에 노출되고 마비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들통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바로 특정한 억지해제 영역과의 관계를 중지하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하는 것을 동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깊은 권태는 세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로, 동물환경으로부터 인간세계로 이행이 실현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조작인 것처럼 생각된다.[각주:33]


그래서 인간이란 동물성의 억지해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동물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권태를 살아감으로써, 시간성의 무한의 가능성에, 그 비활성의 존재방식에 그칠 수 있는 존재자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세계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아감벤의 고찰의 귀결은, 이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중립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이뤄지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사정을 그대로 중지의 중지에 두는 것이다.


타원의 두 개의 초점

그러면 이런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 관한 논의는, 절대적 내재성에서의 아감벤에 의한 들뢰즈나 푸코의 독해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일까?

거기에서 하이데거가 맡는 역할은 명확하다. 하이데거가 생명의 사유의 계보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의 의미는 열림에서 깊은 권태를 둘러싸고 제시된 매우 들뢰즈적인 내재성의 모습을 전제로 할 때에야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아감벤은 이렇게 파악되는 하이데거의 이중성, 즉 동물성에 있어서의 열림이면서도 돌파는 하지 않는 사로잡힘=방심, 인간에 있어서의 무능력으로서의 가능성인 깊은 권태, 대립하면서도 접하는 지점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타원 속에서, 들뢰즈와는 달리, 동물과 인간에 관해 생명 속에서의 본질적인 구분선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아감벤이 (들뢰즈적인 삶의 일의성에 반하여) 요청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탐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해석하는 들뢰즈적인 내재가 갖추고 있는 불만이, 여기서 동물/인간의 분할선을 둘러싼 방식에서 다시 설정되고, 생명정치학적인 장면으로서 재파악된다.

여기서 아감벤은, 정당한 독해인지는 제쳐놓더라도, 하이데거의 생물론에서 배제와 포함을 둘러싼 자신의 논의와 가까운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내재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적 초월의 편으로도, 다른 방향으로도 자리매김 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벌거벗은 생명은 동물성과 아주 가깝더라도, 하이데거의 권태쪽에 강하게 겹쳐진다. 무위가 지닌 가능성이 여기서는 논의의 요점이 된다.

포함과 배제를 둘러싼 아감벤의 사고는, “벌거벗은 생명을 생물학적인 논의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니나, 하지만 거기서 생물성과 인간성을 역접적 연관 속에서 억누르려 하는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나 법이라는 영역을 인정하면서, 중지에 있어서 깊은 권태를 노출시킨다는 전술은, 아감벤적인 양의성에 그대로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거기서 하이데거는 본래는 삶의 계보학의 중간이라기보다도 어디까지나 초월과 내재를 분할하는 선의 초월 쪽으로 기운 것으로 묘사되어야 할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아감벤은 하이데거와 똑같은 타원 내부에서 동거하면서도, 들뢰즈적인 내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약간 내재에 기우는 곳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이라는 테마이다. 동물성을 고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명 속에서의 인간과 이것 이외의 존재자 사이의 분할선이다. 거기서는 동물과 인간이, 둘 다 생명이면서도, 배제와 포함을 반복하는 그 접점이 제시된다. 생명정치학의 논의가 인간의 동물화와 동시에 동물의 인간화(권리부여)와도 교차되면서 말해지는 의의도 여기에 있다.[각주:34]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타원, 하이데거와 아감벤이 동거하면서 두 개의 초점을 그리는 타원, 여기에 생명정치학의, 혹은 생명의 철학의 새로운 형상을 보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감벤의 들뢰즈 독해가 끄집어내는, 최대의 논점이 아닐까?


  1. 생명정치학의 측면에서는 얘기되지 않은 아감벤의 저술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岡田温司, 『アガンベ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2. Cf. Giorgio Agamben, Homo sacer :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Einaudi, 1995, pp.6ff. [본문으로]
  3. 푸코의 ‘고고학’ 및 ‘계보학’의 서술이 일관되게 단선적인 시간 배치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중지’라는 관점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해」에서의 ‘중지상태의 변증법’에, 혹은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한 ‘부감俯瞰’이라는 관점 없는 관점과 매우 가깝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생명을 논하는 생명정치란 이런 “현실적인actual 관점”의 포기에 의해 바로 현실성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a vie: l’expérience et la scienc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V, Gallimard. 1994. pp.763-77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pp.359-363. [본문으로]
  6. Agamben, Homo sacer, p.3. [본문으로]
  7. ibid., pp.6—7. [본문으로]
  8. ibid., p.7. [본문으로]
  9. 『호모 사케르』 2부를 참조. [본문으로]
  10. Ibid., p.127. [본문으로]
  11. 그러나 동시에 바타이유의 사유가 현대적 정치학 속에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런 초월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닌 방향성, 즉 바타이유 자신이 “저열한 유물론”이라고 부른 영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기를 계속한다. [본문으로]
  12. Foucault, «La vie», p.774. [본문으로]
  13. ibid: p. 775. [본문으로]
  14. Giorgio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saggi e conferenze, Neri Pozza, 2005, p.386. [본문으로]
  15.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49-50. [본문으로]
  16.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p.393. [본문으로]
  17. ibid., pp.401ff. [본문으로]
  18. ibid., p.404. [본문으로]
  19. 그렇지만 이것에 이어진 「산보하다(pasearse)」라는 절에서, 이런 스피노자적 내재 자체에 있어서의 운동성에, 아감벤이 모종의 찬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순수한 관조에 상응하는 ‘산보’에, 아감벤이 벤야민적인 산책자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점은 아감벤 자신의 ‘애매함’을 잘 드러낸다. [본문으로]
  20. ibid., p.410. [본문으로]
  21. ibid.. p.392. [본문으로]
  22. 오히려 이 논고에서는 알프레드 자리를 끌어들여 기묘한 언어 사용으로서의 하이데거가 찬양된다. 하이데거에 관해서는 물론 『차이와 반복』에서의 각주(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188) 등의 검토 재료가 있는데, 이 양자에서의 ‘생명’을 둘러싼 관계성은 아감벤에 의한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역시 사고하는 데 어렵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23.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in Gesamtausgabe, Bd. 2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본문으로]
  24. 본 논고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나, 이 강의록에서의 시간론은 하이데거의 문맥에서도, 또한 그것 이외의 맥락에서도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 논의되는데, 그 존재방식이 면밀하게는 기술되지 않은 “순간=찰나(Augen-blick)”이라는 주제가 “깊은 권태”라는 “시간의 사이가 길어지는 것”의 논의에 관련되어 재파악되고, 그것이 “순간의 첨단이 도망쳐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지는 점(33, 34절 등)은 시간과 순간, 현재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테마를 고찰할 때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5. Giorgio Agamben, L’aperto: l’uomo e l’animale, Bollati Boringhieri. 2002, p.53. [본문으로]
  26. ibid., p.53. [본문으로]
  27.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S.370-371. [본문으로]
  28. ibid., S.352. [본문으로]
  29. ibid., S.361. [본문으로]
  30. Agamben, L’aperto, pp.64-65. [본문으로]
  31. ibid., p. 70. [본문으로]
  32. 들뢰즈의 논의란 『비판과 임상』에 수록되어 있는 「바틀비 또는 상투어」이다. 아감벤은 이 책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에 긴 해설을 붙여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Gilles Deleuze et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Quodlibet, 1998). [본문으로]
  33. Agamben, L’aperto, pp.70-71. [본문으로]
  34. 인간의 동물화와 함께 동물의 인간화라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발생하고, 거기서 ― 바로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가 다시 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여러 가지 논의의 구체성에 있어서 ― 동물윤리, 환경문제, 생물다양성 등 ― 이것들을 재차 형이상학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리라. 이 점에 대해서는 小泉義之, 「人間の消失、動物の消失」, 『現代思想』, 2009년 7월호. ; 市野川容孝, 「動物の人間化、人間の動物化──バイオポリティクスの一断面」, 『現代思想』, 2009년 7월호를 참조. 두 논문 모두 양자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교차점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3/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를 살면서

우츠미 그런데 치바 씨는 들뢰즈의 흄론에 주목하셨네요그리고 흄철학에서 절단의 계기를 끄집어내고들뢰즈에게서 생기론이나 잠재성의 파시즘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찾아냈다.

 

치바 그렇습니다모종의 픽션론으로서의 흄론이었습니다.

 

우츠미 흄은 낱개의[개개별별의] 세계를 연합에 의해 묶으려고[통합·정리하려고] 했습니다만그 통합정리할 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치바 씨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거론한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흄의 경우, 파트그래피컬[パトグラフィカル, 바이오그래피컬의 오식인 듯. 즉, 전기적인]한 얘기인데요, 18세부터 23세까지 꽤 힘겨운 우울 상태에 있었고어쩌면 이인증(離人症)을 경험했습니다이인증에서는 사물을 서로 이어주는 아교랄까치바 씨의 말로는 ’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그것이 흄의 어소시에이션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일단 아이러니적인 파괴를 경험한 곳에서부터 턴(turn)해온다유머적인 턴(turn)이랄까대타자 또는 초월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은 통합·결말[まとまり]마조히즘에 있어서의 억압을 변형하는 듯한 턴(turn)입니다그 언저리의 모습이살아가는 지혜랄까경험론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만.

 

치바 제 말투에서 유머를 흄의 맥락으로 연결한다면어떤 우연적으로 생겨난 연합을그렇게 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그 정의나 시스템을 묻겠다고 생각한다면근거는 없습니다어떤 우연의 마주침즉 최초의 자체성애적인 것이 생길 때의 외부와의 마주침의 우연성 같은 것으로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을 떠맡고우연히 뭔가와 뭔가가 서로 달라붙게 됐을 때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다른 것이 또한 달라붙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한다모든 것은 근가가 없다고 하는 곳으로 향해서 비판을 캐고 들어가는 아이러니만을 하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며모든 것이 붕괴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유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츠미 초월론적인 타자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후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네요.

 

마츠모토 : ‘일단은’ 식으로.

 

치바 그렇죠저는 어드혹(ad hoc)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생각해보면제가 전에 기고한 트랜스어딕션 동물-성의 생성변화(トランスアディクション───動物-生成変化(現代思想特集=人間/動物分割線, 2009年 7月号)와도 공명하네요. S1을 되풀이하는 것은 중독적이라고 밀러는 말하고 있으니까요제가 생각한 어딕션(addiction)도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특이적인 증상이며또한 크리에이션(creation)과 결부된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얘기로 말하면, S1이 몸을 옥죄어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변형하여 다른 크리에이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을 트랜스어딕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츠미 단독의 S1에는 그런 어딕션적·에크리튀르적인 측면과 더불어그런 단순한 외침으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외침은 마츠모토 씨의 논의에서 원-상징계의 + - + - … 라는 곳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거기에서 상징적인 심급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 “이 칭얼거림[외침]은 이런 의미예요라고 어머니가 유닛(unit)화한다. “배가 고프구나라고어머니도 칭얼거림이 매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그런 감각적인 차이에 배가 고프다라는 상징적 유닛을 덧씌운다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칭얼거림이 배가 고프다가 된다그러나 자폐증의 경우는 그런 응답이 없기에칭얼거림인 채인 것입니다.

 

마츠모토 그래서 늑대!”, “늑대!”라고 외칠 뿐이다.

 

치바 그리고 똑같은 그 외침이 온갖 것에 적용 가능해진다면.

 

우츠미 자폐증의 언어적인 측면은 매우 다양하네요.

 

마츠모토 정형발달처럼 S1과 S2가 연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자폐증자에게는 하나뿐인 S1과 알고리즘적인 S2가 존재하며그 양자 사이에서 이러저러한 언어의 병리가 생겨나는 거죠그것은 거꾸로 정형발달이 무엇인지를 겉으로 드러내는[해명하는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되죠.

     조금 전 치바 씨의 트랜스어딕션” 말씀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요인프라크리틱 서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思想地図β』, vol. 1, 2011)에서는 장애를 짊어지게 된 후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썼습니다그 논의는 S1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치바 역시그곳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통할지도 모르겠네요그곳은 말라부에게서 얻은 발상입니다만.

 

마츠모토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S1에서 다른 것이 발생한다는 느낌이겠죠아니면 S1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고쳐 써진다는 것일까요?

 

치바 그런 식으로 연결한다면, S1의 변형을 생각했던 게 되겠죠말라부를 좇아 말한다면데리다적인 똑같은 흔적의 이전(移転)오배송[誤配] 모델이 아니고흔적 그 자체가 변형되어 버렸다는 그녀의 모델을 구별하지요그리고 원래 S1을 복수 갖고 있거나, S1을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도제 테마입니다마츠모도 씨의 논의에서도라캉과 가타리의 대비에서특이성을 단수적으로 생각하는가 복수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갈림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네요제가 여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라캉에게는 S1이라는 말을 ‘essaim(무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말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하나이면서도 거기에는 뭔가 무리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마츠모토 : ‘essaim’이 라캉파 에서 사용되는 경우기본적으로는 스키조프레니인 자의 언어사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말 하나하나가 현실계의 수준에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서 서로 분절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언어의 병리의 행방言語病理行方『유이티카ユリイカ, 2012年 9月号)에 적은 사례인데요제가 전에 본 사춘기 유형의 환자로환청을 호소했습니다그 사람은 어느 날, “소리를 질러서[말을 걸어서] 잡아주세요[をかけられたのでってくださ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걸다[かける]라는 말이, “물을 뒤집어썼으니까 닦아줘[をかけられたからいてくれ]라고 할 때의 걸다[かける]라는 뉘앙스가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리는[かけられる]’ 것이었을 터인 목소리라는 말이 현실계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고물질화되는 언어사용이 모든 곳에서 이뤄지고메타포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시니피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バラバラになり]그것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정신분열증의 정신병리로 말하면아마 콘크리티즘concretism(구상화 경향具象化傾向)이 될 것입니다.

     다만처음에 언어가 들어올 때하나의 언어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밀러조차, ‘essaim’에 관해서클로스프스키=니체적인 주체의 동일성의 산란散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치바 과연 그렇군요복수의 언어가 상처로서이른바 폴리트라우마틱’[polytraumatic]한 형태에서 들어온다인프라크리틱(infracritique) 서설」 무렵저는 폴리트라우마티즘과 모노트라우마티즘이라는 대비를 했고, 50년대의 라캉은 전형적으로는 모노트라우마틱한 이론으로서 수용됐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들뢰즈=가타리특히 가타리는폴리트라우마티즘을 도입했다는 것이 제 견해였습니다.

 

마츠모토 그것은 재미있네요라캉은 1974년에 외상(traumatisme)을 구멍-외상(trou-matisme)’이라고 말합니다불가능한 것즉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로서의 외상은 구멍이라고 말이죠그러면 언어의 도입에 의해 구멍이 몇 개 비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들뢰즈=가타리의 라캉 비판에 연결하면외상은 사실 다공적[구멍이 여럿]이고 이러저러한 곳에서 누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 씨는 존재론적우편적(存在論的郵便的)(新潮社, 1998)에서 불가능한 것은 부정신학에서처럼 하나인가아니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그 뒤에 나온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씨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抵抗)(青土社, 2000)각주에서 히로키 씨의 논의를 다루었습니다라캉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을 통해 불가능한 것과 하나[한 가지] 만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라고 해도동시에 불가능한 것은 복수적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각 주체는 각각에 있어서 상이한특이적인 정신분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신분석이라는 리미트(limit, 극한속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하나이게 되지만다른 한편 가타리는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며시니피앙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대립은정신분석과 스키조분석의 양자에 있어서의 임상의 장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개인의 정신분석이라면 역시 시니피앙의 주체를 원칙으로서 다루기 때문에구멍=불가능한 것은 하나가 되는 셈이지만라 보르도 병원처럼 집단적 실천에서 하면 복수가 된다.

 

치바 제 논의라면한 개인 속에 복수의 구멍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집착하는데요그렇기에 해리(解離)나 다중인격을 문제 삼았던 것이죠.

      90년대 말 경은페르소나의 다중성이 인터넷이나 버추얼한 것의 등장으로 강하게 의식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 씨의 복수성에 대한 논의도멀티레이어(multi-layer)한 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죠저도 그 시기에 청춘기를 보냈기에그런 감각을 어떻게 이론과 결부시키면 좋을까줄곧 생각했습니다.

 

우츠미 우리는 본래 이디어트(idiot, 백치) 같은 것이며거기에 조금만 공약 가능한 곳이 있다는 거죠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처럼 관찰해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같은 매우 기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He war”가 아니라 “Ich denke” 같은 녀석이항상 가만히 들러붙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오히려 그것들이 불가사의랄까어째서 그럴게 될까그런 의미에서의 일자여라”, “개체여라는 명령법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지만향후 그것이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치바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오늘의 일련의 화제는 특이성단독성각각의 별개[それぞれパラバラ]라는 방향을 향합니다만굳이 나쁘게 말한다면결국 사람 각각이라는 얘기가 되며그것은 이론적 퇴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만일 이론에 재미가 있다면다소 폭력적이라고 할지라도복수의 것에 걸친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곳에 있으며결국 임상의 현장에서 개개의 것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면이론의 [종언]이 아닌가라고 말이죠마츠모토 씨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마츠모토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싱귤라리티이다라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결론이 되면이론은 죽어버립니다라캉이 목표로 한 것은자기 자신의 분석에서 얻어진 싱귤라리티가 있다며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점입니다분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싱귤라리티에 도달한 곳으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가다듬어 내어야 합니다그것이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가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분석가마다 주목의 중점이 다르다는 거네요그것은 분석가 자신의 생톰의 반영이며그것을 밑천으로 클라이언트와 관계함으로써변화를 야기한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좀 더 근원적으로는학파 속에서 다른 분석가와 공유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다른 분석가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가를 차례로 산출한다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분석가는 다시 새롭게 자신의 특이성과 만나서 정신분석 이론을 갱신한다이른바 영구혁명입니다.

 

치바 그래서 궁금한데요각각의 분석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다른 분석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와 마주대하려고 하며그 다른 방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요?

 

마츠모토 예를 들면라캉의 단시간 세션은그가 특이적으로 발견한 방식이죠.

 

치바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장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츠모토 : 24시간 내구(耐久) 정신분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분석가도 있을지 모르죠(웃음).

 

치바 그래서 효과를 올리도록 별난 분석가가 나와도 원리적으로는 더 좋다고.

 

우츠미 치바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치바 씨가 부분대상과 팔루스적 대상 사이에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전체화하지 않는 정리[모둠]를 놓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습니다한쪽에 부분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있고다른 한쪽에 팔루스적인 대상으로서의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며그 중간에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저는 팔루스적 전체성과 전체 대상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클라인이 말하는 부분대상은 오히려 기관 없는 신체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치바 지금의 3항도식에서는클라인의 부분대상은팔루스적 통일과 전체화하지 않은 정리[모둠] 둘 다를 거듭[중첩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저의 해석입니다.

 

우츠미 아까 말한 아이러니적 잠재성과 분화·현동성의 중간에 유모적 개체화가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치바 글쎄요그것을 저는 특히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상상적인 것혹은 요도[尿道]적인 것을 넣는 곳이 급소라고 하죠이 구도는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그리고 치료가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이냐 하면각각의 별개バラバラ의 단편으로부터 자그마한 [turn, 선회]을 만드는버추얼리티 쪽으로 확산하면서도, [갔던 길을] 약간 되짚어와서 기관 없는 신체 쪽으로 간다아마 여기에 싱귤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흄도 데카르트도 비슷한 것을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흄의 경우이인증(離人症)적으로 각각의 별개가 된[산산조각 난] 단편을 어소시에이트[associate, 연합]합니다만그렇다고 강력한 자기는 만들지 않는다일단 다발 같은 자신으로 좋다고 한다데카르트가 과장적인 회의를 하는 곳은 급진적인 사디즘이죠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고어느 정도의 네거티비티[부정성]을 견딜 수 있는가그 위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 아래에서마지막으로 잠깐 그래도 생각하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turn, 선회]한다. “코기토” 등이라고 잘난 체 하는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그저 자그마한잠깐 동안 생각한다는 형식뿐으로아무런 내실도 갖지 못하는미결정의 중지[허공에 붕 떠있는 것]로서 코기토가 산출된다마지막은 신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증명하고 보증인으로 합니다만그것은 그가 정말로 했는가 여부는 의문입니다.

 

치바 그렇게 하면-코기토-회의(악령)상징-상상-현실이라는 3항도식을 할 수 있다.

 

우츠미 그렇네요흄의 경우는 공간이 단편화하는 반면데카르트의 경우는악령이 시간적으로 절단하는 건데요이런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turn, 선회]한다는 도식이 임상적으로도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바 단편화를 거쳐서가까스로 정리[모둠, 종합]로 돌아간다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고 저라면 말할 것제 논의의 경우그 차원은 특히 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판타슴이죠라캉파에서는판타슴의 횡단이라는 논의가 될까요?

 

마츠모토 판타슴의 횡단의 경우는모든 상징체계의 폐절까지를 지향하는 아이러니이죠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한.

 

치바 그래도 뭔가가 남죠?

 

마츠모토 외상적인 핵이 남는다그 잔여를 꺼내기 위해라캉은 생톰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우츠미 씨가 지금 말했듯이조금 돌아온다고 할까당분간의 정리[모둠, 통일]를 만든다고 할까.

 

우츠미 생톰 그 자체가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는 논의가 아닙니까?

 

마츠모토 콩시스탕스[consistance]의 이마지네르(imaginaire)라는 논의이죠(フィリップ・ジュリアンラカンフロイトへの回帰誠信書房). 밀러는 타투나 피어스로 무너지고 있는 신체의 고리를 지탱해도 되잖아라고도 말합니다.

 

우츠미 들뢰즈에게 공백의 [바둑판] 칸(case vide)”이라는 개념이 있죠단적으로 말하면상상력은 빈 그릇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습니다제가 자주 드는 사례로, “나는 퍼즐에 비유하면 빈 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혹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포화되어 버린다는 것 같습니다이것이 자폐증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상상의 부자유의 원형입니다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었고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만이번에는 정형자의 얄팍한 세계いい加減世界에 들어가는 것의 고통이 있다후설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그는 이 방의 건너편この部屋こう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혹은 자신에게는 등이 없다がない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혹은 집들의 건너편에 사람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든가.

    이른바 장애의 세 쌍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상상력의 장애는 매우 조잡한 취급방식을 하고 있습니다수집벽이나 철도 마니아 등흥미 관심의 폭이 좁다든가곧바로 그런 얘기가 되어버립니다그런 게 아니라경험 속에 빈 눈금을 어떻게 만들까이렇게 그들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마츠모토 빈 칸이 있어서 처음으로 전개되는 유형의 공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우츠미 다른 식으로 공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당사자인 후지이 히로코(藤家寛子) 씨는분명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이는 수많은 집의 각각에 가정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썼네요집이 일 뿐이고그 속에는 가정이 있고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공상이 미치는 공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우츠미 그것을 가진다고 포지티브하게 파악되지 않을까요정형으로 이끌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작업이 아니니까.

 

마츠모토 공상하는 공백의 칸이 없는 대신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우츠미 후설의 현상학도 하나의 예일 수 있죠가령 타인의 마음도 지금 보이고 있는 세계의 건너편이니까그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것은 아닌 겁니다.

 

치바 얼마나 그것이 임시로 마련된 것인가에 대한 이론 구성이 되는 거네요.

 

우츠미 또 한 명을 거론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일까요그의 논리철학논고는 명제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도중에논리에서 윤리로 문제가 이행합니다이 전회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하여다시금 개체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관은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하듯이한계라는 막간隙間가까스로 자신의 장소가 확보되고 있습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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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2/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S1또는 S1뿐인 세계

치바 그런데 초보적으로 투박하게 여쭈는데요자체성애가 처음 생길 때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언어 체험이 충격(shock)적으로 도입되고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라는 것으로원래 갖고 있던 유전적기질적 경향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의 특이성의 조합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건가요모든 것을 특이성에 기초해 말씀하신 거라면유소년기에 특수한 외적 사태가 있었다고 하신 것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요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질이 다르다는 얘기에도 가깝다고 느껴지네요.

 

마츠모토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꽤 가까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에서도라의 기침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에서의 향락의 체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시니피앙의 수준에서 증상을 해석하면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그러면 도라가 유년기부터 고무젖꼭지만 빨고 있었다는 등 신체의 소인(素因)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이런 소인(素因)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고 있으며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유전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소질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거꾸로 말하면거기까지 다다르지 않으면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치바 정신분석은 기질성이 아니라 심인성의 영역 안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가라는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그러나 그것으로는 너무 단순하죠라캉의 경우는 끝이 있는 분석을 믿었는데요왜 끝이 있냐 하면낫지 않고 제거할 수 없는 증상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대충 말하면기질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계면界面으로서 있는움직이기 힘든 부분에 부딪칠 때까지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만거기에 부딪침으로써정신분석의 한계이며또한 신체의 의학과 어울리는 듯한 장면이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는 것일 테죠.

 

마츠모토 그곳이 바로 라캉이 프로이트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입니다프로이트의 경우끝이 없는 분석에 왜 끝이 없냐 하면거세 콤플렉스와 페니스 선망이라는 벽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팔루스의 존재/부재에 대해 구축된 콤플렉스라는 곳에서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다른 한편라캉의 경우는 그것을 뚫고 나온 분석을 목표로 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거기에서 프로이트로부터 라캉에게로라는 정신분석의 갱신 또는 재정의를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아까 치바 씨의 물음에 대해서인데요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애당초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폐증의 정신병리의 기본입니다반응은 일어나지만 응답은 없다타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해오는 지향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시선이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처음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서 이비인후과로 데려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마츠모토 씨라고 부르면 마츠모토 씨는 이쪽을 봅니다만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혹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는 거의 자발적 운동을 할 수 없지만그래도 부모가 품에 안으면 그것에 맞춰서 몸의 자세를 취합니다그런데 자폐증 아이를 품에 안으면곡물이 든 배낭을 안고 있는 것처럼 너무 무겁습니다그렇게 품에 안는 것에 포함되는 지향성에 대해서도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반응성의 결여가 자폐성의 핵심 특징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품에 안는 것에 대한 응답은 꽤 이른 단계부터 느껴집니다만눈빛이나 호명에 대한 응답은대부분 9개월부터 시작됩니다시선이 맞으면 수줍은 듯이 낯가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이것이 자기라는 것의 밑바탕[元基] 같은 것입니다그 이전에는전반적인 짜임새가 없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마츠모토 씨의 얘기와 관련되는 것은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의 맨 처음에서 -상징계에 대해 논한 대목입니다그곳에서는 부분대상과 전체대상이 전적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데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라캉적으로는부분대상은 현실적[실재적]인 것인 반면전체대상은 팔루스적인 다발[묶음]에 의해 만들어져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클라인파는 발달사적으로 보면우선 부분대상이 있고그것이 통합되어 전체대상이 된다고 해설합니다만그것은 전혀 얘기가 다릅니다부분대상은 전체대상이라는 관점이 있고서야 비로소 소급해서 나오는 것입니다전체대상은시선이 마주치거나 부름에 반응하는 등의 상징적인 개체화로의 힘이 걸리는 9개월만에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차원의 것입니다부분대상은 이런 상징적인 것의 설정의 피안에 있습니다.

    자폐아의 행동에서부분대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은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그들이 뭔가를 갖고서 놀고 있는데그걸 집어들어 방해했다고 칩시다보통의 아이라면방해한 상대로 향합니다만자폐아는 방해를 하는 손으로만 향합니다혹은 카나의 논문의 있는 사례인데요바늘로 찌르면찌른 상대가 아니라 바늘 자체를 두려워한다이처럼 자폐아는 단편적 세계 속에 있으며그것을 자체성애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츠모토 부분대상만이 있고전체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일어서지 않는다는 거죠.

 

우츠미 그렇게 되면다음으로 S2 없는 S1의 신분이 문제가 됩니다. S1은 S2가 있어서 사후적으로 설정되는 것입니다만, S1밖에 없을 때그 양태는 어떻게 될까요?

 

마츠모토 얼마전 한밤중에 NHK 방송을 봤다면아르 브루트(Art Brut, 아웃사이더 아트)의 특집을 했습니다그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시설에 있는 분으로해외에서도 개인전을 열게 된 시바타 에이이치(柴田鋭一) 씨라는 분의 작품을 소개했는데요그 분은 처음 무렵에는, ‘2’와 ‘3’만을 오로지 반복해서 캔버스에 그렸어요그것이 대단한 작품이 되었습니다오랫동안 ‘2’와 ‘3’을 반복했는데요그 후에 비누[石鹸세켄]의 []’”라는 문자만 줄곧 그리게 됩니다그것이 해외에서 받아들여져 개인전까지도 열게 됐다고 합니다이 경우, ‘2’와 ‘3’, ‘[]’ 같은 문자가 S1입니다이런 문자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본인도 자폐적이며 중독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극치인 것은반복하고 있는 []’라는 글자가 다름 아닌 비누[세켄]의 []’”라는 것입니다본인은 단순히 []’라고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이 []’는 예를 들어 세계[세카이]’나 석유[세키유]’ 등으로 분절화되는 세[]’가 아니라항상 비누[세켄]의 []’” 그 자체이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치바 문맥 형성을 하지 않는 문자로서의 문자.

 

마츠모토 바로 레트르(lettre)’네요그런 자체성애적인 것의 향락성의 제시와 에크리튀르 사이의 관계를라캉은 조이스론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마츠모토 씨는 에릭 로랑이 언급한 로신느 르포르Rosine Lefort의 분석에서, “늑대!”라고 고함을 지르는 사례를 참조했습니다저것은 [누군가의시선을 받거나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패닉 상태가 됐을 때 외치는 것이었죠.

 

마츠모토 (증례인 로베르Robert[Rosine et Robert LEFORT : Naissance de l'Autre, Seuil, 1980])는 자신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구멍의 출현에 대한 명명으로서 늑대!”라는 소리를 지르는데요그 시니피앙은 분절화되지 않고항상 늑대!”인 채입니다.

 

우츠미 반면 청년기 혹은 성인기의 자폐증 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일정한혹은 그것 이상의 언어능력이 있습니다그 경우의 특징은말을 도구처럼혹은 모국어인데도 외국어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말이 신체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고 할까말하자면 앱(App)처럼 사용됩니다바꿔 말한다면신체가 언어에 의해 포맷되지 않았다이 경우는 S2만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다른 한편에릭 로랑이 언급한 사례처럼 중증 자폐아가 내뱉는 것은 단독적인 S1이며주술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지시한다고 하는처음 부분만 있습니다언어는이 지시에 의해 대상을 절취하고공동 주의(注意등에 의해 공유되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합니다그러나 그 앞에서는무엇이든 늑대!”라고 말하면 일단은 패닉 상태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식으로주술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치바 매직워드이며와일드카드인 거네요.

 

마츠모토 자폐증자에게는정형발달의 사람과 똑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그 말(S1)뿐이며그들은 그것에 이어진 S2를 거절하고 있습니다라캉은 그것을자폐증자는 말에 대해 자신을 지킨다고 표현합니다그런 사람들이 현행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S2를 S1과 떼어낸 상태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S1 없는 S2입니다그러면공공공간에서 그들이 이용하는 언어(S2)일종의 컴퓨터 언어처럼 되어 버린다현대 라캉파에서는 자폐증에 있어서의 언어의 병리는이처럼 S1과 S2의 분리로서 파악되는 것입니다한편에는 주술적반복적중독적인 매직워드로서의 언어(S1)의 사용이 있으며그것이 똑같은 말에 대한 상동적(常同的)인 집착이 된다다른 한편에서는그들이 S2를 인공언어로서 만들어냅니다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상징적인 논리만으로 쓴 루이스 캐롤이 그 일례입니다.

 

우츠미 자폐증 스펙트럼의 S2는 사적 언어처럼 기능할 뿐인 곳이 있습니다사용하는 말은 우리와 공통이며대화가 가능하지만Speech act[발화행위, 발화수행]로서는 기능하지 않는다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함께 [맞물려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기어” 같은 것입니다제가 경험한 어떤 청년 사례는자신의 괴로움을 현실감이 없다”, “이인감(離人感)이 있다[자신이 자신이라는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것]”, “만족감이 없다라는 세 개의 말로 나눠서 호소한다그러나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매회 그렇듯이그것이 어떤 괴로움인지를 물어보는 처지가 된다그도 끊임없이 그때마다 알려줍니다만역시 금방 잊어버린다사적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증의 경우처럼 아파!’라는 것에 의해 공통의 코드가 열리고타인에게 이해되는 동시에 자신밖에는 모르는 고유한 감각이 남는다는 것이 되지 않는다감각만이 있고그것에 태그를 열심히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치바 극히 사적인 기준으로 연합을 하기 때문에듣는 쪽에도 전해지지 않는군요.

 

우츠미 그렇군요에르곤즉 잘 만들어진 언어에 가까운개념 규정이 먼저 있고그 태그로서 말이 있다아까의 늑대!”의 예에서는지시만 있고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만이번에는 정반대로개념이 있고거기에 말이 붙어 있을 뿐지시가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가 아파라든가 이것 때문에 괴로운 거야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치바 시스템이랄까언어 체계만이 있다논리의 공리계의 세계.

 

마츠모토 바로 수학기초론이라든가 분석철학 같은 세계네요.

     그런데 우츠미 씨가 방황하는 자기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さまよえる自己───ポストモダンの精神病理)(筑摩選書, 2012)의 마지막에서 논하신 것은근대의 노모스가 만들어져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던 시대 이후에 초월론적인 것이 절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도래하면타자의 부름이나 시선에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비근한 예로 깊숙이 들어갑니다만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이떠들고 있는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으면그 시선을 눈치 챈 학생들이 차츰차츰 조용해진다선생님은 거기서 여러분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3분이 걸렸습니다” 등이라고 말하는 거네요(웃음).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 않아도눈빛의 힘에 의해,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묻는 자로서 기능하는 타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그런 시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근대적 주체였던 것입니다.

 

치바 :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가 근대의 기조네요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는눈앞에 서 있어도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 수 있다교실의 뒤로 돌아가면 판옵티콘의 기능이 작동한다는 예가 [아사다 아키라의구조와 힘』[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나오는 것입니다만현재에는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관계가 없다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마츠모토 현대의 주체는 타자성과 시선이 기능하지 않게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우츠미 씨는 그런 주체의 모습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를 따른 계산기적 합리성이며거기에는 결단의 계기도 없고근대적인 의미의 자기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시네요. 이 논의는 확실히 그렇다고 실감할 수 있는 것도 많네요더 흥미롭게도 근대적 주체가 전제로 삼았던 타자성의 일어섬がり이나 시선과 목소리에 의한 주체화가 기능하지 못한 후에 등장한이런 포스트 휴먼적 인간상에국내의 정신병리학자들이 거의 동시대적으로 주목하고여러 가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예를 들어스즈키 쿠니후미(鈴木國文씨는 신자유주의란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는 가능한가?” 등의 물음을 빼고서, “자유니까 이렇다”, “자유니까 이래도 된다고 말하는 원리라고 지적하십니다바로 직전에서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은 채어떤 전제를 바탕으로 알고리듬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입니다현대에서는 그런 논리가 이러저러한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고그것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발달장애의 임상풍경과 꽤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스즈키 씨는 지적합니다카토 사토시(加藤敏) 씨는 똑같은 사태를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부릅니다.

 

우츠미 그것은 자유가 S1에서 S2가 되었다는 것인가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의 보증인으로서 있었던 S1지금은 하인처럼 혹사한다[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전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가요?

 

마츠모토 아마 자유를 S2만으로 생각하게 되며진리(S1)가 배제되어 버린즉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우리 세대가 보면그렇게 되는데요꽤 올드 패션한 시각이 아닐까요그래서 마츠모토 씨나 치바 씨의 세대에서는 어떻게 보는지흥미가 있습니다.

 

치바 저는 우츠미 씨의 그런 감각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제가 신세대에 속해 있고 알고리즘적인 사물의 처리에 친화성을 느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근본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듯한 물음그 문제성이라는 부정성 ― 들뢰즈는 문제성을 부정성이라고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존재” 같은 식으로 불렀습니다만 ― 이 근본에 있은 다음에그 부정성을 달래면서가설(仮設)된 체계에서 어떻게 사물을 움직이는가그 위에서그래도 답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다시 되돌아간다이런 답할 수 없는 문제와당장의 시스템 운용의 이중구조로 해온 것이 근대문화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설되고 있는 것을 그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지금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분석철학 등의 논의에는 그런 경향이 강하네요대륙철학에서는 사물의 정의가 반드시 약정되지는 않은 상황에서 얘기를 하기 때문에분석철학자로부터는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이쪽에서 보면거꾸로 그런 절차적 논의를 하고 있는 쪽이 섬뜩하고[낯설면서 친숙하고]조금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분석철학은 언어의 사용방식 자체가 S2적이고, “그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항상 듣는다그런 게 아니라사용이야말로 본래의 언어이죠그러나 그 전에,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함으로써단단하게 다져버린다[확고하게 해버린다].

 

마츠모토 저는 알고리즘적인 사고방식은 싫어하지는 않지만그래도 지난날 눈에 띄게 됐던 S2만의 원리에는 자주 놀라며분석철학 책은 읽는 데 꽤 고생니다자폐증자였던 템플 그랜딘은, “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해 괴로워하고모든 개를 관찰한 결과, “라고 불리는 것은 코의 모양이 모두 한결 같다는 것을 깨닫고그것에 의해 라는 개념의 내포를 처음으로 만들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치바 일부의 분석철학은 [단단하게 다져진 것이 아니라] 흔들림이 있는 프래그머틱스로 사용된 사물의 정의를형식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 재검토해 S2만의 구성으로 봤을 때이전의 애매함이 붕괴하고, “사실은 개의 본질은 그 코에만 있었던 것이다처럼 이상하게 한정적인 결론이 되는 것을특별히 지적인 놀라움이나 학문의 발전인 것처럼 말하고그것의 향락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마츠모토 그렇게 함으로써 향락하고 있다.

 

치바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프래그머틱스에 있어서의 말의 두께가 S2적인 단조로움 속에 해체되는 것을 기분 좋다고 생각하고 있죠그리고 그것을말의 두께의 세계에 대해모종의 위협적으로 대치시키는 것에 쾌를 느끼고 있다.

 

우츠미 아이가 말을 배울 때에도혹은 부모가 말을 가르칠 때에도개념은 가르칠 수 없죠차를 보고 붕붕이라고 가르쳐보죠그래서 차가 아닌 것을 아이가 붕붕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붕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개념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처음에 지시가 있는 것입니다개념 규정에 너무 얽매이면 잘 안 되는 거죠.

 

치바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절차적인 것을 직장에서 요구합니다. “이러저러할 때에는 이러저러한 목소리를 내고 몇 초 기다렸다가 이렇게 해라” 같은 것을 하는 것이 분명한 가게도 있습니다그런 것은 바로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말하고 싶은 상황입니다대학 업무에서도 그것에 가까운 것을 하도록 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우츠미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수십 시간의 연수가 있다고 합니다다만셀프엔조이먼트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커피가.

 

마츠모토 최근의 전지구적 기업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개개의 고객에 인간적인 대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매뉴얼로 인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치바 그런 건 왠지 섬뜩하죠[낯선 친숙함이죠].

 

마츠모토 섬뜩합니다[낯선 친숙함입니다].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사람에게 점장이 개인적으로 코칭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아요거기에는 꽤 심리학의 메소드가 들어 있어서그래서 나오는 것이 완전히 통제된 인간미가 있는 접객입니다.

 

치바 : S2밖에 없는 가설적 공리체계로서의 인간 같음.

 

마츠모토 인공지능은 그곳에서 이미 완성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바 불가능한 것이나 무한이라는 것이 지성에 있어서 문제였던 시대에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만거꾸로 시대가 인간의 지성을 인공지능적으로 했다면그건 인공지능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최근에는 알고리듬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이 인공 지능이라고 꽤 흔하게(casual) 불리게 됐네요.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인공지능 알고리듬으로 라든가저런 캐주얼화는 기묘하다고 생각합니다옛날 같으면 인공지능이 만들었다고까지 야단스럽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요이렇게 인공지능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원래 모델이 되는 인간 문명이 인공 지능적으로 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 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 이 글은  現代思想』 2015년 3월호 '정신병리의 시대'에 수록된 첫 번째 대담을 옮긴 것이다. 이 대담을 옮기면서 다시금 실감한 것은, '영어'나 '불어'를 번역하지 않고 쓰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말을 할 때, 꼭 필요한 경우를 빼면 절대로 영어나 불어 등을 그대로 얘기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아무튼 위 사진의 가운데 인물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기 위해 이 글을 옮긴다. 그리고 세 번째 인물인 마츠모토 타쿠야의 글은 이미 <현대 라캉파의 논점들>이라는 번역으로 소개했으므로 그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現代思想』 2015년 3월호를 전체적으로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에 기반한 논의가 중심이라는 점도 지적해둔다. 

* 일본에서는 라캉의 '실재계'를 대체로 '현실계'로 옮긴다. 이를 다시 '실재계'로 옮겨적었으나, '현실'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에도 이것이 '실재계'와 연결된 것임을 생각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바꾸긴 했으나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 또한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예전에는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자' 등으로 옮겨졌으나, 요즘에는 '조현병', '조현병 환자' 등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전처럼 이해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이것도 '스키조프레니'로 그대로 적어뒀다. 그들이 그렇게 발음했기 때문이다. 

  

일자의 향락

마츠모토 : 이번에 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 : 자크 라캉과 감별진단의 사상(はみな妄想する : ジャック・ラカンと鑑別診断思想(青土社, 2015)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대적인 라캉 연구를 참조하면서, 라캉을 통사적으로 재독해함으로써 라캉을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속에 다시금 자리매김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서서히 실감하며 알게 된 것은, 라캉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자크 알랭 밀러의 라캉 독해, 표준판 라캉을 만드는 공식화 작업이 전기·중기 라캉뿐 아니라 후기 라캉에도 미치며, 하나의 도달점이랄까, 모종의 일단락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일단락은 밀러가 2011년에 한 존재와 일자(l’Étre et l’Un)(별명 : 하나뿐인 일자(L’Un-tout-seul), 하나뿐인 자들(Les-tout-seuls))라는 강의입니다. 이 강의는 70년대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후기 라캉의 행보를 지금까지 읽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사후적으로 보면, 이 독해는 밀러가 편집한 [라캉의] 세미나출판의 흐름과도 합치했습니다. 2005년에 13권인 생톰이 출판되고, 2007년에는 18권인 외양이 아닐 수도 있는 담론에 대해(On a discourse that might not be a semblance), 2011년에 19권인 우 피르(Ou Pire)가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그 집대성인 밀러의 2011년의 강의는 우 피르의 해설이기도 합니다. 제 책이 노린 것은 우선 우 피르에 이르는 라캉 독해를 밀러에 의거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 독해의 성과를 프랑스의 정신병리학의 논의에 떨궈놓고, 더 나아가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대결 등 현대사상의 여러 가지 과제 속에서 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밀러 주변 논자들의 논의에는 아무래도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논의와 친근성을 가진 논의가 있는데도 그 누구도 그것을 정색하면서 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존재와 일자에서의 라캉 독해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라캉은 그동안 주로 하이데거 존재론의 영향이 강한 이론가로 불렸지만, 밀러에 따르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캉은 세미나18, 19권의 논의를 거쳐, 20권인 앙코르에서 성별화의 식(性別化)”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존재론(ontologie)”을 버리고,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일자론(hénologie)”으로 전회했다고 밀러는 주장합니다. 물론 라캉은 71~72년의 우 피르세미나에서 일자론이라는 말을 이미 썼어요. 하지만 세미나 해적판을 편찬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자론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거의 모든 해적판이 라캉이 일자론(hénologie)’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정확하게 옮겨 적지(transcription) 못했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에서 일자론으로의 전회를 중시하는 밀러의 2011년 강의에 의해, 아마 처음으로 후기 라캉의 일자론의 이론적 의의가 끄집어내진 것입니다.

    헌데, 이 일자론은 치바 씨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哲学)(河出書房新社, 2013)에서 다룬 존재론적 파시즘얘기와 유비적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들뢰즈한테는 모든 것이 융합하고 점점 연결되어 하나(일자)가 된다는 논의의 흐름이 있으며, 그것은 특히 네그리=하트화된 들뢰즈에서 현저한데요, 그것은 일자의 파시즘이 되어버릴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런 접속적 들뢰즈와는 정반대의 들뢰즈 상()을 치바 씨는 절단이라는 키워드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다른 한편, 밀러가 후기 라캉의 일자론에서 끄집어낸 일자도 존재론적 파시즘의 일자 밀러는 그것을 융합적 일자(Un fusionnel)’라고 말합니다 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존재와 일자의 다른 제목이기도 한 “L’Un-tout-seul”, 즉 단 하나뿐이며, 타자와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별개의 형태인 듯한 일자임을 하이데거적인 라캉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라캉 속에서 밀러는 끄집어낸 것입니다.

 

치바 : 일자에 대해 융합적 일자라는 이해가 있다는 것을 한 번 말한 뒤에, 그런 게 아니라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마츠모토 : 그렇죠. 앙코르의 세미나에서도, 맨 처음에 융합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일자였다고 간주되는 남자와 여자가 재융합하는 것을 지향하는 안드로귀노스(androgynos)의 신화처럼, 융합적인 것을 지향하는 에로스적 향락을 라캉은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보편적 융합의 일자와는 상이한 향락으로서, “여성의 향락(<다름>의 향락)”을 끄집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의 일자론은 여성의 향락의 발견을 경유하여, 보편적 융합의 원리로부터 벗어나는 각각의 개별적인 일자의 향락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앙코르6장과 7장에서, 라캉은 유명한 성별화의 공식을 완성시킵니다. 7, 8장에는 백치[바보]의 향락(jouissance de l’idiot)”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백치인가? 라캉은 남성의 향락이 기본적으로 자위행위(masterbation) 같은 것이며, 자신의 팔루스를 사용해 자위하는 듯한 것이며, 그래서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성의 향락은 타자와 관계를 갖지 않는 어리석고 못난 향락이라는 의미에서 라캉은 백치의 향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앙코르 8장에서 백치의 향락이라고 말할 경우의 백치라는 말에는 사실 그리스어의 어원인 ίδιώτης가 지닌 기묘한개별적인이라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고 라캉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백치의 향락이 지닌 개별적이라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이적=단독적(singulier)”이라는 의미를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그 향락이, 융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하나뿐인 각각의 개별적인 형태인 일자의 향락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앙코르성별화의 식이 완성된 후에 라캉이 발견한 것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앙코르8장 이후의 라캉은 전년도의 우 피르에서 도입된 일자론을 논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후 라캉은, 그 일자의 향락은 자체성애적인 것이며, 거기에 주체의 향락의 특이성=단독성(singulalit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서 분석의 종결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톰의 세미나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임스 조이스는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예술을 만든 것이라는, 꽤 표층적인 이해가 생톰에 관해 이뤄져왔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신병 같은 증상이 있은 후에 창작을 한 사람이라면 뭐든지 생톰입니다. 그러나 라캉의 주안점은, 사실은 거기에 없는 게 아닐까? 라캉은 생톰을 개강하기 직전에 증상으로서의 조이스(Joyce le symptôme)라는 강연을 했습니다만, 거기에서 라캉은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가 자신의 향락의 특이성을 전면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하다, 보통이라면 분석을 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지만, 조이스는 분석을 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도달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체성애적인 향락은 무엇이냐 하면, 라캉은 그것을 신체의 사건이라는 말로 얘기합니다. 신체의 사건이란, 어린이가 자체성애적으로 향락하는 곳에 처음으로 언어가 개입할 때에 주어진 충격 같은 것이며, 거기에서는 시니피앙이 물론 들어오지만, 그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 분절화되지 않고 하나뿐이며, 게다가 그것은 향락과 일체가 된 일종의 에크리튀르 같은 것이다. 그 에크리튀르의 장소를 정신분석은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를 라캉은 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논의가 2011년까지 프랑스에서 라캉 독해의 모종의 일단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화제에 올린 치바 씨의 책과 닮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 , 공통의 규범화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개 별별의 특이성을 어떻게 격려하는가, 부활하는가라는 방향으로 후기 라캉의 임상은 향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들뢰즈-가타리와 거의 같죠. 다만, 거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더라도 어떤 규범화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분석을 밀고나가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규범성에 의거하는 기술과 특이성을 장려하는 기술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각날 수밖에 없죠. 이것은 나중에 재차 건들고 싶습니다.

    그 전에, 일자론 얘기는 재미있네요. 여기에서 얘기되는 일자성, 혼자서 있는 것의 일자성은 일종의 자위(onanism)를 긍정한다는 의미이죠. 그것도 바로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욕망의 특이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통하며, 제 책에서 독신자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전과도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 책에서는 일자-전체가 융합적 기능을 갖는 것을 경계한 것인데요, 일자에게 다른 의미를 나누고, 분리한 상태, ‘분리성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은 있죠.

 

마츠모토 :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서, 자기항략(self-enjoyment, 이하 '셀프엔조이먼트'로 옮김)론을 전개하는 곳에서 바로 플로티누스를 인용하고 있고, 전체화 불가능한 단편의 세계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도 논합니다만, 꽤 자폐증적인 세계에 가깝다고 느끼며, 후기 라캉이 봤던 특이성의 세계에 겹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밀러의 존재와 일자를 읽은 것은 2012년 혹은 13년인데요, 2013년에 치바 씨의 책이 나왔을 때, 양자의 가까움에 꽤 놀랐습니다.

 

치바 : 저는 밀러를 읽지 않았지만, 뭔가 세계동시적으로 움직이던 해석 경향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폐증 개념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어떤 밸런스로 생각하는가가 오늘날에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양보할 수 없는 향락의 장소라는 의미를 자폐라는 말로 형언하고 싶다는 것은 제게도 전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의료 전문가가 아니라서,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도 포함해 자폐증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할 수 없다며 제 자신에게 금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자폐증을 비유로서는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사실 이 책을 한창 쓰고 있을 때부터 마츠모토 씨와는 몇 번이나 얘기는 나눴고, 그 속에서 자폐증 개념을 셀프엔조이먼트와 가깝게 하는 고찰은 이미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죽치고 앉아 있던 맥락이 마침내 마츠모토 씨의 책에서 전면 전개됐다는 형태가 됐으며, 이것이 이후 어떤 식으로 논의를 파급시키게 될지는 참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얽혀 있는 얘기인데요, 자체성애는 브로일러1911년에 스키조프레니를 개념화했을 때, 구스타프 융을 경유하여 프로이트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만일 자체성애를 싱귤라리티(singularité)로 바꿔 읽으면,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싱귤라리티(singularité)의 도상에서 초월론적인 것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미지화해서 말하면, 카프카의 법의 문 앞에서같은 것이랄까요. 시골에서 온 남자는 문 앞에 가까스로 도착합니다만, 문지기한테 걸려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거기에 머뭅니다. 마지막에 문지기는 이 문은 너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집니다. 스키조프레니싱귤라리티에 대해 어피니티(affinity, 친화성)를 갖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치료자는, 이런 싱귤라리티를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요구됩니다. 기묘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싱귤러(singular)양자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여부가 치료자로서의 자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스키조프레니의 경우에는, 아직 초월론적 심급이 기능하고 있으며, 부정신학적 구도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은 그 빈 곳에 출현하는 자기장에 홀리고 이끌립니다. 라캉은 그것을 인격신(대타자)에게 말을 걸고 파라노이아에 준한 방향에서 얘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역시 카프카의 문이 이미지로는 가깝습니다. 실재계와 상징계가 떼어내진(decoupling) 양태랄까, 슈미트가 형식적인 법과 그것을 행사하는 힘을 나눠서 얘기하는 것을 흉내 낸다, 그 힘이 충만한 공백지대 같은 것이 개시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치료관계에 있어서의 싱귤라리티는 이런 강한 자기장으로부터, 얼마나 이심적(離心的)인 지점까지 데려오게 되느냐는 것에 관련된 프락시스입니다. 두 사람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폐증 임상과 스키조프레니 임상을 대비해 보는 관점이 부상하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마츠모토 : 예전에 기무라 빈(木村敏) 씨는 정신분열증이 개별화의 위기에서 발병한다고 말했습니다만, 어쩌면 혹시 청년기에 다시금 싱귤라리티를 낼 때에 실패하여 발병한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면, 자폐증에서 왜 싱귤라리티가 정신분열증만큼 위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안전하게 나오게 되는가 하면, 그들은 개별화의 위기가 위기로 되지 않도록, 초월론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모종의 방식으로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싱귤라리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츠미 : 우리가 일반임상에서 관련된 자폐증 스펙트럼의 사례는, 주로 청년기 이후의 사람들에서, 자타미분화의 상태로부터 개체화가 시작될 무렵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아주 고통스러운 시기에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타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만, 반드시 그것이 초월론적 차원의 것이지는 않습니다.

    밀러는 라캉 독해에서 배제가 최종적으로는 일반화 배제이며, 신경증과 정신병 둘 다가 토템과 터부적인 구도 하에 있다고 했습니다. , “아버지의 이름이 배제되는 것은 정신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양자에 공통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자폐증 스펙트럼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현재에서 돌이켜보면, 이 일반화 배제에 의해 정신병도 신경증도 정형 발달定型発達한 것이라고 말한 게 됩니다.

 

치바 : 일반화 배제를 정형 발달의 표식으로 보는 읽기를 할 수 있다고.

 

우츠미 : 그렇군요. 정형자(定型者)라는 것은, 자신에게 눈뜨기 전에, 타자와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키조프레니에게 찾아온 타자는, “어딘가에서 한번쯤 만난 듯한 타자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혀 만난 적이 없었을 텐데도, 왠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인 것 같다는 느낌이니까, 전적으로 무관한 타자가 아닌 것입니다.

 

마츠모토 : 그래서 무서움이 있다는 것이죠.

 

우츠미 : 그렇군요. 반면, 자폐증 사람들은 바로 처음에 타자와 만나는 것입니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타자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니!”라는 식으로 놀라게 됩니다. 레오 카나1943년의 논고에서 자폐증개념을 제시했습니다만, 그때, 똑같은 자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스키조프레니withdrawal인 반면, 자폐증은 aloneness이며, 양자는 철저하게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브로이어 식으로 말하면, 스키조프레니는 한 번 구성된 현실로부터 철퇴[뒤로 물러섬]하여 공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아까 말한 셀프엔조이먼트나 자체성애는 카나가 자폐증 속에서 찾아낸 aloneness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츠모토 : 자체성애라는 곳으로 얘기를 되돌리면, 우츠미 씨가 아까 설명하셨듯이, 자체성애는 원래 정신분열증 개념이 생길 때 문제가 된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1911년의 슈레버 증례론에서 슈레버의 파라노이아를 논합니다만, 그는 거기서 동시에 스키조프레니를 논합니다. 그는 거기서, 스키조프레니파라노이아보다 더 옛날까지, 즉 자체성애에 가까운 곳까지 퇴행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자폐증과 스키조프레니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자, 프로이트-라캉파에서는 자폐증을 정신병과 똑같은 것으로 보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라캉파 속에서도 생깁니다. 그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퇴행의 지점에 의해, 라캉파의 말투로 얘기하면 향락의 회귀모드(mode)의 차이에 의해,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을 차이화하려고 했다는 것이 에릭 로랑(Éric Laurent) 등의 논의입니다. 어떻게 차이화하는가 하면, 파라노이아는 향락을 대타자 쪽에서 찾아내기에, 슈레버처럼 대타자(신이나 파울 에밀 플렉지히Paul Emil Flechsig(1847~1929) 교수)가 나를 향락하려고 한다는 망상을 구축한다. 스키조프레니에서는 향락이 자신의 신체에 회귀하기에, 몸 위에 향락이 다양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는 원래 대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폐증자에게는 일자의 시니피앙”(S1)만이 도입되고 있지만, 그들은 S1에 연쇄하게 되는 시니피앙(S2)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S2를 거절하는 대신, 자체성애가 새겨진 일자의 시니피앙”(S1)을 줄곧 반복해서 사용하고, 특히 신체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향락한다. 그것은, 신체의 이른바 전체의 향락이 회귀해오는 스키조프레니와는 다른 향락의 방식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스키조프레니 환자에게는 향락의 신체로의 회귀가 실제로 증상으로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음부를 이리저리 쓰다듬다”, “의미가 불분명한 힘이 몸을 조작하고 있다등의 증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증상들은 어느 정도 섹슈얼한[성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무서운 타자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성화(性化)된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에게 보이는 향락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허그 머신(Hug machine)에는 자폐증자의 향락의 모습이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를 억누르는 기기에 자신이 들어감으로써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화(性化)된 방식에서 벗어난 곳에서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통제하는가가 자폐증에서의 일자의 향락에서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은 둘 다 신체에 있어서 향락하는 체제가 전면에 나오는 병의 용태는 아니지만, 양자의 향락의 체제는 상이하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체성애의 혁신성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연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사건에서 사건의 생산으로

: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들뢰즈=가타리적 정치

出来事から出来事生産: アンチ・オイディプスにおけるドゥルーズ=ガタリ的政治

 

사토 요시유키(佐藤 嘉幸)

思想(1087), 7-32, 2014-11, 岩波書店

(http://ci.nii.ac.jp/naid/40020237216/)

 

* 프랑스어 원문 및 한국어 번역본 대조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2017년 3월 24일]



1.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또한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위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본고를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런 질문을 던질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들뢰즈의 철학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모종의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들뢰즈론인 들뢰즈 :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심지어 들뢰즈의 존재론이 다양성의 존재론이 아니라 여럿을 하나에 구속시키는 존재론, 말하자면 존재론적 파시즘[각주:1]이라고 논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들뢰즈의 근본 문제란 분명히 여럿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여럿의 사유를 <하나>의 쇄신된 개념에 접어넣는 것이다.”[각주:2]

 또 슬라보이 지젝은 바디우의 강한 영향 아래서 작성된 들뢰즈론인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가 혼자서 쓴 의미의 논리에서의 정적 생성의 탐구, 즉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높이 평가하고, 반대로 들뢰즈=가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의 최악의 책이라고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 속의 그 어떤 것도 결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적시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들뢰즈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들뢰즈 홀로의 작업에서는]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필자이며, 정치에는 무관심하다.”[각주:3]

바디우와 지젝이 들뢰즈를 평가하는 전략은 매우 닮았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들뢰즈 홀로의 작업, 특히 그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평가하는(혹은 단죄하는) 것이다.[각주:4] 그런 전략은 바디우와 지젝이 둘 다 라캉과 매우 가까운 이론적 입장postion에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바디우와 지젝은 정치적 라캉주의라는 그들의 이론적 입장에서 라캉 이론 혹은 정신분석 자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들뢰즈 철학에서 전면적으로 삭제한다는 전략을 선택하고,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정치성을 완전히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반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회체와 주체의 생성변화의 탐구를 높이 평가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야말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의 정치성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책이며, 그 가치는 이 책이 주체뿐 아니라 사회체 자체의 생성변화를 사고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는 들뢰즈의,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최고의 도달점이라고 위치짓는다.

여기서 또 다른 한명, 다른 철학자에 의한 들뢰즈 비판을 다뤄보자. 그것은 들뢰즈파 철학자로 간주되고 실제로 바디우나 지젝보다 들뢰즈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 의한 비판이다.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 정치에 있어서 비주의주의에 관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주로 들뢰즈=가타리의 논고 68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각주:5]를 참조하면서, 들뢰즈에게서의 사건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건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으로 되기에 있다. 이것만이 치욕을 불식하는 것, 혹은 참기 힘든 것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런 명법은 전혀 주의주의적인 게 아니다. 이제 의무 존재에서 존재로 복귀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을 어떤 외적이고 초월적인, 따라서 전제적이고 무능한 판단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의지는 이제 사건에 선행하지 않으며, 대립은 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지, 어떤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건에 응답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더 이상 그 세계를 참을 수 없는 한에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책임=응답 가능성이, 통치나 주요한 주체들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고유하게 혁명적인 책임=응답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일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계획도, 어떤 집단의 이해도 대표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 이해는 바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방향=의미에서 변화하고 있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앞에 두고 책임=응답 가능성을 지고 있는 것이다.[각주:6]

 

한편으로 사건은 견디기 힘든 것의 새로운 의미를 출현시킨다(잠재적 변동). 다른 한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의 이 새로운 의미는 어떤 창조행위를 호소한다. 그 창조행위란 변동에 응답하는 것이며, 새로운 이미지의 도면이며, 문가 그대로 가능한 것을 창조한다(현동적 변동). 가능한 것을 창조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집단적 공간-시간적인 배치arrangement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창조된 삶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에 응답하는 것이며, 혹은 그 가능성의 표현이다.[각주:7]

 

주라비슈빌리에 따르면, 들뢰즈적 정치(“혁명적으로 되기”)란 주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선, 세계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의미가 산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산출된 새로운 의미=사건에 응답하는 것이 들뢰즈적 정치이다. 그때 사건이란 새로운 의미(‘견디기 힘든 것’)가 산출되는 것이며, 물질적인 것의 효과로서 새로운 의미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산출되는 것이다(잠재적 변동).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산출된 새로운 의미, 즉 사건에 응답함으로써 주체를 변용시키고 집단적인 공간-시간적 배치arrangement를 변용시키는 것(현동적 변용)이 들뢰즈적 정치라고 간주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적 정치란 사건을 기다리고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의미를 주체가 수용하고 새로운 의미에 의해 주체가 변용된다는 것 이외를 의미하지 않을까?

 주라비슈빌리의 도발적인 들뢰즈 비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주라비슈빌리의 가설은 들뢰즈 홀로의 철학, 특히 의미의 논리에는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과는 달리,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다.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란 사건에 의한 세계나 주체의 수동적 변용을 다루는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사건을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철학이다.

 『의미의 논리에서의 사건의 개념을 돌이켜보자. 이 책에서 사건이란 물체적인 것의 효과로서 바로 초월론적인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물체에 대한 원인이지만, 무엇의 원인인가? 물체는 일정한 사물의 원인, 전혀 다른 본성의 원인이다. 그 효과는 물체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물체적인것이다. 효과는 물리적 형질, 특성이 아니라, 논리적 혹은 변증론적 속성이다. 효과는 사물이나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사건이다. 효과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효과가 존속한다거나 존립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효과는 사물이 아닌 것이나 실재하지 않는 존재자성에 걸맞은 최소의 존재를 갖고 있다. 효과는 실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효과는 능동자나 수동자가 아니라 능동과 수동의 결과이며, ‘비정한, 비정한 결과이다. 효과는 살아 있는 현재형이 아니라 부정형(不定形)이다. , 한계 없는 아이온, 과거와 미래로 무한하게 분할되고, 항상 현재를 벗어나는 생성이다.”[각주:8]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는 에밀 브루이에의 예를 빌린다면, “칼이 새로운 고기를 썰, 그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속성, 의미가, 즉 생성변화가 생산된다. , “칼이 새로운 살을 썬다는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의미, 생성변화가 산출되는 것이다.[각주:9]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부른 것은, 그런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며, 그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그것을 정적 발생(genèse statiqu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의 후반인 제27계열에서 갑자기 동적 발생(genèse dynamiqu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초월론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제반 특이성들로부터 주체라는 존재자가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의미의 논리에서는 동적 발생은 이제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 동적 발생의 논리를 더욱 추구하고,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의 철학을, 사건의 생산의 철학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 경우의 사건의 생산이란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 혹은 생성변화에 머물지 않고 사회라는 현실적인 것의 생성변화도 함의하고 있다.

 이 점을 둘러싸고 네그리=하트가 커먼웰스에서 행하는 푸코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의 비교가 참고가 된다.

 

이 시점에서 푸코에 의한 사건 개념과 알랭 바디우가 제창한 그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의 장이라고 하며, 그것을 현대철학의 중심적 문제로서 제기하고, 커다란 공헌을 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삭감할 수 없는 다양성, 달리 말하면 다의적인성질을 갖는 사건은, 단순한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진리의 심문을 빼낸다. 이 점에서의 바디우와 푸코의 차이는 두 사람이 사건에 관해서 시간적으로 어디에 관심을 기울였는가라는 것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디우에게서는 사건(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프랑스 혁명,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을 빈번하게 예로 들고 있다)이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주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사건에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개입과, 그 사건에 지속적으로 계속 언급하는 충실성과 유-생성적[類生成的] 과정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production and productivity of the event)을 강조하며, 거기에는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향한 주시가 필요해진다. 말하자면 사건은 내적인 존재이며, 그것을 가로지르는 전략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디우의 접근법으로는 푸코가 사건의 내부로부터 강조하고 있는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파악할 수 없다. 실제로 사건에 대한 소급적 접근법으로는 봉기 활동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봉기 활동은 역사적 과정의 안쪽에서 혁명적 사건을 창출하고 지배적인 정치적 주체성으로부터 이탈하려고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논리 없이는 그저 바깥쪽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어야 할지 아닐지의 문제로서 긍정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으며, 결국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일반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라고 간주되는 역설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각주:10]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바디우의 사건 개념은 (프랑스 혁명, 5월 혁명 같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해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에 충실하기를 계속하는 것을 함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에게서의 사건이란 항상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다.[각주:11] 반면 푸코에게서의 사건 개념은 사건의 생산과 그 생산성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건의 내부에서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보는 것이다. 푸코의 사건 개념은 자유와 역능에 의거해서 도래할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라고 네그리=하트는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들뢰즈=가타리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건 개념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바디우에게서 사건이란 역사상의 단순한 우연적 점으로서만 정위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사건에 질을 부여하고 사건을 상황 속에 포함되도록 하는 부위의 위에 주사위를 던지도록 하는 개입, 즉 사건을 만들어내는역능(puissance de «faire» l’événement)”이야말로 중요하다.[각주:12]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했다고 한다면, 거기서의 사건 개념은 바로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푸코의 사건 개념과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바로 강도적인 욕망을 매개로 한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에 대해,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에 대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건(événement)” 대신 절단(coupur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각주:13] 심지어 과정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다음의 짧은 한 구절에 주목하자.

 

정신의학의 실효적인 정치화만이 우리를 이것들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반정신의학은 레인과 쿠퍼와 더불어, 이 방향으로 사실은 멀리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은 이 정치화를, 과정 자체의 어휘보다도 오히려 구조와 사건의 어휘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각주:14]

 

왜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정치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과정(porcess)’이라는 개념을 특권화하고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사건개념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구조개념에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면, 구조 개념보다 오히려 기계욕망하는 생산 과정개념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과정이란 욕망의 흐름의 과정이며, 욕망의 흐름의 교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떼어놓는 벽이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것이다”(AO, p.434). 욕망하는 생산 과정은,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사건을 구조로부터 생각한다면, 정적인(statique) 구조의 재생산과 그 절단이라는 사고에 스스로를 한정하게 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성변화의 과정을 사고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부단한 생성변화의 과정이야말로 사건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생산은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과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세계의 모든 것은 생산과 소비에 의해 시시각각 계속 변용하는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이며, 정치 또한 욕망하는 생산 과정으로부터 사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관점(perspective)에 의거함으로써 정치에 자유와 역능의 관계를 도입할 수 있고, 권력에 의한 주체와 세계의 재생산 과정에 대해 어떻게 사건을, 혹은 절단을 도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정치를 정적 구조의 재생산과 그 재생산의 절단이라는 구조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생각하게 되며, 사건을 사후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정치를 구조와 사건이 아니라 과정과 절단혹은 구조와 절단으로부터 사고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바로 사건의 생산에 관해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II. 욕망 기계들과 욕망하는 생산

여기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건의 생산전략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본절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 ‘과정기계라는 개념에서부터 고찰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본적인 테제는 세계의 모든 것은 욕망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의 서두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다. 중단하지 않고, 혹은 단속적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과열하여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애무한다. <그것>이라고 불러 버리는 것은 무슨 오류일 것이다. 도처에서 기계가 있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연결이나 접속을 수반하는 다양한 기계의 기계가 있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연결된다. 어떤 기계는 흐름을 발생시키고, 다른 기계는 흐름을 절단한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입은 이 기계에 연결되는 기계이다. 거식증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하는 기계(천식의 발작)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대용 작업을 하서는, 각각에 자신의 작은 기계를 조립하고 있다. 에너지 기계에 대해 기관 기계가 있고, 항상 흐름과 절단이 있다. 슈레버 공소원장은 엉덩이 속에 태양광선을 반짝이다. 이것은 태양항문이다. <그것>이 기능한다고는 확신하라. 슈레버 공소원장은 뭔가를 느끼고, 뭔가를 생산하며, 그리고 이것에 관해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뭔가가 생산된다. 이 뭔가는 기계가 초래하는 결과이며,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AO, p.7/()15-16)

 

그것이란 에스’, 즉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