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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 松田智裕, 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nimalité. Sur l’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 민주주의의 문제

제롬 레브르(Jérôme Lèbre)

김상운 옮김

 

20012-511-02 - 제롬 레브르 -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 데리다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 - 번역.pd

20012-511-02 - 제롬 레브르 -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 데리다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pdf

Jérôme Lèbre, «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ournée dʼétude: La question de la démocratie: Derrida / Rancière, le 29 mars 2014, Paris.

Reprinted by permission of Jérôme Lèbre.

 

나는 민주주의자들의 합의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하고 싶다. , 민주주의란 하나의 통치형태가 아니라는 합의에서부터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해 사고하려는 자는 누구든 이 합의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고, 혹은 오히려 이를 기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민중의 권력(pouvoir du peuple), 지배(크라토스)는 원리를, 즉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다. 아주 오래 전부터 물려받은 이 유산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은 민주제가 (최선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권력인) 귀족제와의 세력균형 속에 이 권력을 새겨 넣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민주제가 민중의 권력을 오직 한 명의 인물에 의해 제도화된 권력인 군주제, 몇명에 의해 제도화된 권력인 과두제와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는 민중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간극[괴리]이며, 권력을 제도화하는 민중과 그 제도 하에 놓인 민중의 간극, 정치적인 민중과 치안화된 민중의 간극이다.

혹은 원리나 군주야말로 민중이 원치 않는 것이다. 게다가 (20143)프랑스 지방 선거 제1회 투표를 다음처럼 해석할 수 있다. , 우두머리를 갖고 있는 공화제와 혼연일체가 된 민주제에서 지방선거는 반공화주의적인 투표 형식 아래에서 이 체제에 관한 근본적으로 반민주주의적 양상을 보이는 것이며, 그래서 유권자의 일부는 자기네 시장을 선출하는 대신 이 체제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민주주의는 정권의 핵심인사들과의 싸움에서 포퓰리즘이라는 통탄스런 형태를 취한다. 민주주의는 민중이 하나의 통치형태로 구현되지 않는 한, 다른 장소에, 즉 민중 속에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체제라는 형태를 취할 수 없으며, 이것은 하나의 요청이다.

여러 가지의 잘못된 변화, 당장은 생겨나지 않는 변화의 저편(“바뀌려면 지금이다2012년 대통령 연설 때 프랑수아 올랑드가 선거 구호로 사용한 것이다)에서 진정한 논의는, 그 어떤 체제도 민주주의적 요청의 항상성을 실현하지 않는 한에서 그 항상성에 관계된다. , 민중이 여전히 규정된 형태를 갖지 않는 한에서, 진정한 논의는 민중의 일관성에도 관련되는 것이다. 체제의 부재로서의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적 요청은 분명히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진다. 민주주의자들의 합의가 정지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며, 여기에는 데리다와 랑시에르의 합의도 포함되어 있다. 그 합의는 상이한 방식으로 말해진 동일한 요청 앞에서, 즉 민중의 현전에 직면한 동일한 아포리아 앞에서 정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이 어디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이 두 철학자들이 서로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동일한 민중 앞에서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1. 평등의 일관성

일관된 정치란 무엇일까? 일관성은 기본적 현실주의와 쉽게 혼동되어 버리지만, 여기서 말하는 현실주의란 조직화된 사회 전체를 이루고 있는 현실의 불균형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넘어설 수 없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이때 이런 현실주의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평등도 유토피아 속으로 내던져버린다. 랑시에르의 주장에 따르면, 일관성이란 우선 사회의 전반적(global) 조직화의 일관성이며, 치안(police)의 일관성이다. 외부를 결여한 이 충만된 세계는 그 질서와 내부 구조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단계에서 평등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특수한 효과도 낳지 않고 아무런 정치적 일관성consistance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평등을 실천하는 장은 사회계급의 장이 아니며, 평등은 그 한계에 자리매김 된다. 따라서 평등은 우선 그 무엇도 아니고, “무의 별명이며, 치안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그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다른 의미, 다른 논리에 있어서, 평등은 바로 그 무엇인가이다. , 그것은 민중이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간주되지 않는 한에서의 민중이며, 계산해야 하는 한에서의 민중이다. 요컨대 공허한 평등이란 치안화되지 않은 민중의 형태 없는 형식이다. 이로부터 랑시에르는 두 개의 논리, 즉 치안의(policière) 논리와 정치의(politique) 논리를 강조한다. 평등은 그것이라는 것, 즉 근본적으로 공허한 것이면서도 이 두 논리가 교차하고 대립하는 장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 “정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치안 논리와 평등 논리에 마주치는 지점[교차점]이 존재해야 한다. 공허한 평등의 이런 일관성은 [그것 자체로서는] 아테네인들의 자유가 그랬듯이 공허한 고유성에 불과하다.” 혹은 또한, 이것들의 논리는 흔히 말하는 현실주의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정치를 방해하는 것은 평등과 자유라는 공허한 통념들이 아니다. 그 반대로 정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이라는 비정치적 공백에 의해, 아테네 데모스의 자유와 같은 정치적 고유성을 가진 공백이 산출되어야 한다.”

첫째, 이상의 것에 비추어 보면, 원리의 부재와 민주주의의 치안적 형태의 부재는 원리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정치가 아무것도 아니거나 평등이 일관되거나 하는 것은 정치가 치안의 논리와의 충돌에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시초적[원칙적, 근원적] 잘못(tort principiel))”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치안화된 세계 내부에서 무엇보다 우선 규정된 계쟁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피해를 본 측이 모든 민중의 기능을 떠맡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만 논거를 주장할 수 있을 뿐일 때, 그리고 공허한 평등을, 즉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을 표방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만 그것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일 때이다. 이것이 랑시에르의 사유가 향해 걸어가는 완전히 역설적인 곳이다. , 그는 기원-없음(an-archie, -기원), 곧 요구된 원리의 부재를 유일한 원리로 삼고, 평등을 하나의 무기원적인 원리로, 혹은 무기원의 원리 자체로 삼고 있는 것이다. , 그것은 평등이 항상 같으며, 민주주의적 요청이 변화하지 않고, 또한 그 자체로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은 아득히 오래되고(immémorial) 항상 현행적인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치안의 논리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몫 없는 이들의 몫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언표된다. 따라서 잘못, 즉 계산착오는 모든 정치의 원초적 구조이며, 하나의 변경할 수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 랑시에르에게 쟁론(différend)의 포스트모던적 탄생은 없다. 왜냐하면 번역 불가능성은 정치 논리이며, 그것은 근대성이라는 최후의 거대 서사 후에는 생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에서는 정치의 미학화[심미화](esthétisation de la politique)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성론[미학]은 정치의 표명일 뿐 아니라,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감성론적[미학적] 나눔으로서의 잘못의 감성적 짜임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정치는 미학적이며, 혹은 오히려 그 원리에 있어서 논리-미학적(logico-esthétique)이다.

둘째, 잘못이라는 이 무기원적 평등의 원리는, 무엇보다 우선 그리스의 데모스 속에서 현실화됐다. , 앞서 말한 대로, 공허한 평등의 일관성은 아테네인들의 자유가 그랬던 것처럼,”아테네 데모스의 자유와 같은 공허한 고유성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자리매김 할 수 있는 탄생의 장이, 곧 정치적 항상성의 기원이 존재한다. “[아테네] 데모스의 자유는 결코 규정 가능한 고유성이 아니며, 순수한 현사실성(facticité pure)”이며, 어떤 날것의 현사실성(facticité brut)”이다. 이 현사실성은 채무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에 아테네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 결과 모든 장인들이 도시의 구성원으로 편입됐다. “소수의 사람들(oligoï)이 자신들의 채무자들을 노예로 환원할[만들] 수 없다는 이 단순한 불가능성이, 민중의 실정적인[적극적인] 고유성 으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데모스는 잘못의 원초적이고 논리적 구조를 표현한 것이고, 거기에서는 즉각 민중이 전체이며 부분 [당사자]인 것이다. 랑시에르가 평등의 전제 혹은 민주주의의 선행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구조 위에 세워지며, 이것은 늦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항상 이미 거기에 있는(toujours déjà là)” 것이다.

셋째, 이 잘못이라는 기본구조는 더 나아가,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수없이 형성됐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의 데모스에서 보게 되는 근원적인 잘못은 끊임없이 재활성화되어야 한다. , 잘못은 여러 가지 제도 속에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떠난 다양한 주체 속에서 활성화되는 것이다. , 평등의 공백은 다양한 주체의 공허한 고유성이지만, 그 주체는 그 무엇도 아니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즉 누구도 되는 주체이다. 그리고 그들은 적절한 때에 그 평등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란 그때마다 주체화(subjectivation)의 작용이며, “새로운 경험의 장의 생산을 함축하는 일련의 작용[조작]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동체의 치안적인 구성 속에 주어져 있지 않은 어떤 다자를 생산한다.” 가령 블랑키의 시대(1830년경)에서 잘못은 두 종류의 민중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치안화된 민중, 겉으로는 민주주의적인 민중이며, 다른 쪽은 국가의 경제로부터 버림받고 평등이라는 특성을 갖춘 프롤레타리아의 민중이었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주체화의 여러 양태의 증가를, 불일치(dissentiment)의 세계인 공동성의 세계들을 볼 수 있다. 어떤 대담에서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역사로부터, “저는 사건의 사상가, 돌발의 사상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해방의 사상가입니다. 해방에는 어떤 전통이나 역사가 있는데, 그것은 단지 번쩍이는 위대한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형태, 합의형태 등과는 다른 공통적인 것의 형태를 창조해내기 위한 탐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집단적 주체화 작용의 최근 사례로, 파리의 스트라스부르대로 50번지에 있는 네일 업소에서 5명의 중국인 여성 노동자가 일으킨 파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2월초부터 시작됐으며, 이 글을 집필하고 있는(2014) 3월에도 계속됐다. 그녀들은 신분증명서도 없고, 급여명세도, 심지어 임금조차도 소지하지 않았다. , 고용주는 그녀들이 고객을 획득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얻은 돈을 재분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용주가 임금의 총액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용되어 있는 것처럼, CGT(프랑스 노동총동맹)의 지지 아래서 이 네일 업소를 점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녀들은 갑자기 가시적인 것이 된다. 그녀들은 치안의 논리를 망가뜨리고, 프랑스인과 이민자, 그것도 불법이민자 사이의 차이의 논리를, 즉 비합법성(clandestinité)의 근저에 있는 논리를 망가뜨린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장시성(江西省)에서 왔지만, 스트라스부르대로에 있는 저장성 윈저우 시 출신의 중국인들과 코트디부아르의 소상인들에게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상인들은 똑같이 코트디부아르인 여성들도 착취하고 있으며, 이 여성들 중 두 명은 이 파업에서 중국인 여성의 동료로 가세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들은 노동자와 고용주 간의 노동 쟁의의 논리를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이 경우 고용주는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종업원들에게 자기 가게를 맡김으로써, 이런 위법성 중에 자기의 모습을 감추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일으킨 파업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야기했다. , 그들은 고용의 정규화 심사를 위해 주지사에게 포용되고, 이리하여 권리를 결여한 이 여성들은 권리를 입수한 것이다.

이 최초의 계기를 다음처럼 말함으로써 정리하자. , 랑시에르가 사건의 사상가가 아니더라도, 역시 그는 중단(interruption)의 사상가이다. 우리가 불화라고 부르는 데모스의 공허한 자유는 상업적 평등[등가]의 계산에 대해 한계를 부과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공허한 자유, 즉 실적도 부()아무런 실정적인 자격도 갖지 않은 이들의 자격은 산술적 평등을 제반 이익의 나눔에 있어서 중단시키고, 그리하여 평등의 다른 형식을, 즉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형식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모든 원리를 평등으로 끌어올리고, 이를 원리 없는 평등, 무기원적 평등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제도화[설립]에 의해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정치가 존재한다).” 혹은 정치는 정치를 근본적인 잘못[왜곡] 내지 계쟁의 전개로서 설립하는 최초의 중단, 비틀림torsion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잘못, 이것은 랑시에르가 상기시키는 크라튈로스의 어원론에 따르면, 바로 흐름을 방해하는 것 자체인데, 이는 올바른 균형[등가]이라는 이상을 파괴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합의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자유로운 권리의 순환이 잘못을 해소하고, 그것을 중단되지 않는 흐름 속에, 결국 유용한 것(sumpheron) 속에 용해시킬 때이다. 유용한 것은 상품이나 관념, 사람들이나 집단을 동시에 운반하는것이며, 민중의 부재화를 의미한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여러 주체가 중단을 받아들이는 것을 항상 함의하는 독특한 중단이다. “인민이 출현하는 종별적 영역이 존재한다면 민주주의가 존재한다. 국가 장치의 대행자들agents도 아니고 사회의 부분들[당사자들]도 아닌 정치의 종별적인 행위자들acteurs이 존재한다면, 국가 내지 사회의 부분들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정체화를 변화시키는 집합체들이 존재한다면, 민주주의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특수한 정체성에 제약되지 않는[동일화되지 않는]non identitaire 어떤 주체에 의해 인민의 발현[시위 무대] 위에서 수행되는 계쟁이 존재한다면, 민주주의가 존재한다.”

 

2. 일관성과 차연 : 세계는 하나인가 아니면 둘인가?

민중이라는 이름의 주체에 의해 수행되는 이 현실적이고 활동적인 중단, 즉 정치적인 것의 작동은 정치에 다름 아닌 아포리아를 실행시킨다. 랑시에르는 불화의 서두에서 무엇에 관한 평등이고 불평등인지, 이것이야말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아포리아와 정치철학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한 후,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정치에 고유한 아포리아나 당혹을 받아들일 때 정치적이게 된다.” 바로 이때에야 불화의 약간 앞부분에서, 두 개의 정치철학이라는 형식 아래서 발견되는 것이 있다. 첫째, 메타정치적(métapolitique)인 철학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합리적인 질서를 구축하고, 도시의 치안적인 조직화를 절대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아포리아를 배제한다. 반면, 유사정치적(parapolitique)인 철학이 있다. 이것은 몫을 갖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 있는 평등의 아포리아를 맞아들임으로써 메타정치적인 철학을 중단시킨다. 불화란 아포리아이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랑시에르가 데리다에게 바친 논문에는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없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해진다. 데리다는 이러한 불일치(dissensus)를 아포리아로 대체하는데, “이 아포리아가 의미하는 것은 부분에 의한 전체의 그 어떤 대체도 있을 수 없고, 같음과 다름의 등가를 수행하는 그 어떤 주체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화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잘못 혹은 아포리아의 논리 구조로부터 정치적 주체에 의한 이것의 떠맡음으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데리다에 관한 논문에서는 아포리아 속에서 잘못이나 불화와는 정반대의 것이 검토되고 있다. 그래서 탈구축은 유사정치적인 것의 직전에 있지만, 치안을 단순히 정당화한다는 의미에서의 메타정치적인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탈구축은 어디에도 없고, 특히 거기에 민중은 없다. , 탈구축은 민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정치적 주체를 결여하고 있다.

이 아포리아를 묻는 것, 그것은 이미 근원적인 차원, 즉 정치의 논리적이고 불변적인 구조 차원에 위치된다. 이런 것은 다름 아닌 랑시에르에게서도 보인다. 그는 데리다의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텍스트인 법의 힘에 근거하여, 탈구축의 아포리아적인 측면을 읽어낸다. 법의 힘에서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다른 사상가를 거론한 뒤, 실제의 법을 적용하는 규칙의 결단(décision légale), 불가능한 것 안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결단이 내려지기 때문에 진정으로 결단하는 정의의 결단(décision juste)을 구분한다. 이처럼 아포리아는 정의의 결단이 스스로의 기준을 법에 요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혹은 정의의 결단은 법을 스스로에게 주지만, 이 법은 금지되고 물러나고 은닉되고 있는 것으로서, 즉 법권리(droit)가 아니라 정의의 법으로서만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의의 아포리아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두 개의 화해 불가능한 법의 불가능한 화해이다. 다만 그것은 정의의 모든 현실적인 요구를 권리-없음(sans-droits)에 의해 불가능하게 하고, 불화를 마비시킬 것이다. , 랑시에르가 든 예를 따르면, 아포리아는 우리는 인민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말은 이것은 올바른 것이다이것은 부정의하다를 동일하게 제시하고, 1989년에 라이프치히의 시위(월요 시위)의 참가자들이 그랬듯이, 부분을 전체로 간주하고, 다양한 주체들로서 스스로를 전체로서 간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결심하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에게서 정의의 아포리아와 그 민중적, 혁명적인 근거를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법의 힘은 정의의 아포리아에 대한 텍스트와 벤야민에 대한 텍스트를 포함한, 두 개의 측면으로 이루어진 저작이라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벤야민에 대한 책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시위가 아니라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마찬가지의 (혹은 다른) 독일에서 이뤄진 스파르타쿠스 혁명이다. 벤야민은 바로 이 혁명에 기초하여,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혁명적인 총파업의 가능성에 대해 묻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법권리에 내재하는 두 가지 폭력을 구분한다. , 한쪽은 법권리를 정립하는 폭력이며, 다른 한쪽은 그것을 유지하는 폭력이다. 이 두 가지 폭력은 치안 유지의 제도라는 좁고 통상적인 의미를 포함한 모든 법치국가, 모든 정치 질서의 모순을, 그러므로 치안의 모순을 형성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치안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질서를 변화시키고 이를 재정초하려 든다. 그래서 치안은 법권리를 유지하는 폭력과 이를 정립하는 폭력 사이에서 환각 같은 혼합체(mélange hallucinant)”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논의에서는, 겉보기와는 반대로, 데리다는 벤야민을 별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탈구축은 법권리의 정립과 유지 사이의 차연에 의한 오염(contamination différantielle)”을 주장함으로써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데리다가 배척하는 것은 법권리의 바깥에 있는 폭력이라는 생각이며, 이것은 벤야민에게 신적 폭력이기도 할 것인 혁명적 폭력이다. 이 폭력은 정의를 수행하기 위해 법권리를 폐기한다. 그것은 법권리를 중단시키고 정립과 유지의 순환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혁명적이라고 칭하는 이러한 중단은 전적으로 신학적이다. 그것은 민중에서 신으로 이행하고, 신을 혁명의 주체로 파악함으로써 민중을 망각하는 메시아주의에 입각해 있다. 요컨대, 데리다가 벤야민을 비난하는 것은 랑시에르가 데리다를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정치에서 신학으로 이행했기 때문이다. , 데리다가 어떤 폭력과 더불어 정의를 떠맡은 주체 속에서 신학을 찾아내는 것은, 정치적 조직화의 맥락 밖에 주체를 자리매김 함으로써이다. 반면 랑시에르는 이 조직화를 확인하는 가운데 신학을 읽어낸다.

데리다에게 치안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정의를 제외하고, 정치적 조직화를 내부에서 침식하고, 정립적 폭력과 유지적 폭력 사이에서 그 조직화를 분리하는 단 하나의 외부 따위는 없다. 그래서 탈구축의 민주주의적 요청은 랑시에르에게서 불화를 뒷받침했던 평등이라는 전제보다 더 무기원적이다. 평등은 똑같은 폭력을 기능시키는 항상적인 차연과 똑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법은 폭력적으로 정립되지만, 그것은 이 정립의 폭력을 반복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법은 그 정립의 비-폭력적인 측면도 유지한다는 한에서만 법일 뿐이다. , 법이란 법인 것이지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리다가 권위의 신비한 토대[기초]”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법 속에 숨은 이런 차이이다. 달리 말하면, 데리다에게 정의의 논리와 치안의 논리라는 두 개의 논리가 충돌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에게는] 차이로 관통된 하나의 논리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법은 법이다고 하는 치안적 표현도 포함하며, 정의 혹은 법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때 민주주의의 단 하나의 항상성이란 시간 자체, 차이와 불일치의 시간, 원리의 자기 자신과의 합치의 불가능성이다. 랑시에르도 말하듯이, “도래할 것(à venir)”은 아포리아와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야 한다. , “도래할 것은 시간의 구조로서의 아포리아이며, 그것은 논리적인 동시에 미학적이다. “도래할 것이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미래(futur)로의 열림이며, 그래서 그 어떤 사건 속에서도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에 비춰보면, (정치의 원리라는 논점의 뒤에 오는) 두 번째 점으로서 다음이 꼽힌다. , 자기 자신부터 평등의 원리를 분리하는 것 없이, 이 원리를 실현시킬 수 있는 날것의 사실, 즉 민중의, 혹은 그리스적 데모스의 현사실적인 현전조차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민중이 자기 자신과 합치함으로써 자기를 원리라고 밝히게 된 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정치적 조직화에 내재하는 차연이 일으키는 것은 데모스가 유령적이라는 것이다. 데모스는 결코 그 자체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민중(populus), 즉 제도적 라틴어로 재번역된 민중과 전혀 다른 것으로서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같은 것(le même)’의 정치적 논리에서 보면, 민중의 동일성이란 타자의, 즉 환영받고 존중해야 할 타자의 윤리적 논리에 의해 항상 상처를 입고 있다. 반대로 타자의 논리는 항상 같은 것의 논리 속에서, 즉 동일한 논리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비록 <타자(Autre)>의 순수한 논리가 아직도 신적이고 신학적 폭력이며, -폭력이자 절대적 폭력이라고 해도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비난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지만), 거기에는 결코 두 논리가 있는 게 아니다. , 민중의 논리와 치안의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의 논리와 윤리의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은 미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자 정치적이기도 한 단 하나의 논리이다. 그것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동일한 근원적인 착종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적 로고스의 해체가 일으키는 것은 데모스가 단순히 포풀루스나 민중으로서 구성된 자신의 형식에 의해 상처를 입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약속 또는 유대인의 약속으로서의, 자신이 도래할 것이라는 형식에 의해서도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은 초월적이고 신학적이며, 따라서 항상 도래하게 될 것이고 항상 약속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법이] 내재적이고 유한하며, 따라서 이미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민중의 유령은 자기와의 지속적인 차이에 의해 정치에 신들리며[사로잡히며], 언제나 그것에 신들려왔다[사로잡혀 왔다]. 그리고 이 차이가 일으키는 것은 유령이 과거부터 다시-도래하여 끝내는 것은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민주주의의 선행성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민주주의의 요청, 즉 만인의 평등의 끊임없는 회귀와 불가분하다. 이것들은 같음과 다름의 논리를 따라서, 타자들과 자기의 논리에 각각의 차이를 끌어넣는다. 그리고 그 논리는 평등을 특이성이게 하며, 모든 타자가 전적인 타자이게 한다.

이상으로부터 세 번째 점으로서, 역사와 그 주체들에 대한 별도의 이해가 생긴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사건이나 도래가 아니라 주체화의 작용들 속에서 재활성화되는 것이며, 이런 작용은 언제나 새로운 평등의 관계를 요구하는 일련의 작용이다. 그리고 이런 작용은 특이하며 불안정하다. , “민주주의란 지배의 형식들에서의 하나의 우발사이다.” 그 때문에 정치는 매우 드물며, 항상 국소적이고 우발적인 것이다. 동시에 이미 말했듯이 이 주체화의 작용들은 정치적 조직화의 중단의 작용이다. 그런데 탈구축도 끊임없는 중단이며, 그것은 법권리의 모든 체계를 끊임없이 정지시키는 정의의 아포리아이다. 철학자들[랑시에르과 데리다]의 합의가 저지되고, 결정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 이런 힘의 불일치에서 정치란 랑시에르에게 민중의 올곧은 시위 행위이며, 데리다에게서는 우발사의 항상성, 우발적인 구조인 셈이다. 이렇게 해서 데리다에게서의 민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차이화함으로써, 항상 현실화를 결여한 것, 민중을 결여한 것이다. 그 결과, 민중의 주권은 힘과 마찬가지로 정의도 갖춘 주체의 자기에의 긍정 또는 현전으로서, 항상 주권을 결여하고 있다. 주권을 가진 주체는 반복 가능한 주체화라는 양태들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사실성의 균형을 깨뜨리는 주체와 자기 사이의 불균형이라는 현사실성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체는 끊임없이 자기를 구성하고 또 해체하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주체는 자기를 주체화하는 만큼 탈주체화되는 것이며, 혹은 주체가 해방되는 만큼 심지어 자기 자신에 결부되기까지 한다. 이리하여 주권자는 데리다의 마지막 세미나에서 짐승이 된다. 그렇게 해서 탈구축은 주체화와 탈주체화, 해방과 결합을 동시에 묶어 두어 두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탈구축은 데모스의 힘(크라토스)이며, 자기를 주체로 하는 민중의 원리 없는 힘이다. 그래서 탈구축은 결코 민중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물며 주체를 해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논리적인 동시에 미학적이자 정치적이기도 한, 돌이킬 수 없는 자기와의 차이에 의해 항상 제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랑시에르과 데리다의 계쟁을 설명하는 마지막 방법이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불화를 두 개의 논리와 두 개의 세계의 관계라고 본다. 따라서 데리다가 잘못의 논리에 대해 맹목적이지는 않더라도, 그 잘못의 세계에 대해, 즉 민중에 대해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는 데리다를 비난한다. 하지만 그것은 데리다에게서 세계는 하나밖에 없으며, 분리하고, 그 어조를 망가뜨리는 세계 밖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의 논리 밖에는, 세계 민주주의적인 어조를 망가뜨리는 논리 밖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와 민주주의는 항상 똑같은 유령을 가져올 자유주의의 부정의 빈곤, 각종 경제전쟁과 부채, 더욱이 주권의 부채이며, 주체화시키는 동시에 거기에 속박시키는 부채 의 반복과 축적 속에서 스스로를 상실한다. 맑스 이후, 즉 우리의 배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앞에서 찾아내는 내밀하고 명백한 명령의 장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법권리의 이음매에서 어긋남(disjointure)은 정의의 가능성인 동시에 악의 가능성이다.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은 불가분하며, 그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감춤으로써 똑같은 위험의, 똑같은 긴급함의, 그리고 똑같은 탈구의 두 측면인 것이다. 이 탈구는 자기를 정초짓는 중단 중에 있는, 모든 법의 폭력에 기인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항상성은 시대착오적이며 반시대적 규정에 의한, 즉 끊임없이 반시대적인 것(contre-temps)에 의한 동시대적인 것의 조절 부전 속에서 항상성 없이/내지 스스로를 현실화한다. 그러므로 세계의 어조가 나쁘다고 말함으로써, 데리다는 세계의 어떤 유일성에 천착하고 있다. 그것은 민중의 유일성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세계의 유일성이며, 차이가 제도의 핵심에서 기능함으로써 분리되고 자기를 제도화한다. 이 때, 민주주의는 끝없는 생성[élaboration]처럼, 그리고 모든 법권리를 하나의 법권리에 가둬버릴 수 있는 것(이것은 민중을 세계적인 민중으로 만든다)이 아닌 생성처럼 나타나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불가능한 것이며, 자기를 법권리 속에서 이용하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 정의 자체이다.

하지만 이 때 간극은 최대한의 가까움의 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랑시에르에게 정치와 치안라는 두 가지 논리 또는 두 세계는 잘못이라는 동일한 논리에서 교차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 잘못은 자기가 전체라고 간주하는 일부의 민중에 일시적으로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불화에서 인용한다면, 그것은 민중이 민중 자신과 다르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 주권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잡지 바카르메(Vacarme)에 게재된 대담에서 말하듯이, “만일 민중의 주권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주권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은 단순히 주체화로서 나타날 뿐 아니라 탈동일화로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민중의 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질서, 즉 치안에 항상 이미 내포되어 있는 주체의 자기 바깥으로의 탈출로서 나타난다. “해방은 보편적인 정치 이념을 정초하지만, 이는 공통의 법[]을 개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으로서가 더 이상 아니라, 탈동일화의 과정으로서, 즉 어떤 감성적 지위의 침입, 보이는 것과 말해지는 것의 질서에 있는 어떤 장소의 침입에 의한 탈출로서 정초한다.”

이런 점에서 아포리아와 불화는 같은 것이며, 같은 민중 앞에서 멈춰 있다고, 민주주의의 똑같은 항상성과 일관성을 긍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 치안 바깥에서와 마찬가지로, 치안에서도 기능하고 있다면, 그리고 치안이 공백을 맞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에 대해서도 다양한 장소를 남기는 충만한 세계이라면 말이다. 이를 강조해야 하는 것은, 동시에 절대적으로 특이한 누군가인 것 없이, 따라서 또한 치안과 정치의 간극에 있는 것 없이, 인간은 누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아마 치안과 정치 사이가 아니라, 정치와 실존 사이에, 즉 차이와 잘못 속에 위치지어질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치안적인 정치는 아포리아를 내포하고 있으며, 아포리아를 맞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아포리아는 네일 살롱 서플라이 뷰티의 중국 여성과 코트디부아르 여성을 아직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녀들은 아직 찾지 못한 정의의 이름으로 파업을 일으키지만, 파리의 도지사가 그녀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라고 한 것 속에서 아마도 그 정의를 발견할 것이다.

 

 2014428, 즉 이 글을 쓰고 나서 1개월 뒤, 또 파업이 일어난 지 3개월 후, 네일 살롱 서플라이 뷰티의 종업원들은 개별 사정에 맞춰서, 예외 없이, 결국 정규직이 됐다.

 

일역 : 松田智裕(立命館大学博士課程), 横田祐美子(立命館大学博士課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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