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홀워드가 2015년 3월 15일부터 일본을 방문해서 두 번의 강연을 벌였다고 한다. 간단한 정보는 여기를 클릭. http://www2.gensha.hit-u.ac.jp/TransA/lecture20150315.html

* 이 두 번에 걸친 강연 내용이 최근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 『다양체』에 수록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목차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독서의 습관으로 틈틈이 옮겨적을 예정이다. 우선 두 번째 강연에 해당되는 <들뢰즈 이후의 정치>부터 옮긴다. 일본에서 이 강연의 제목은 「ジル・ドゥルーズと政治(”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였으나, 아래의 잡지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수록됐다. ドゥルーズ流の政治/ドゥルーズ後の政治|ピーター・ホルワード|小泉義之訳. 일본과 한국에서는 번역어, 문장 구사 등이 다르기 때문에 홀워드의 원문을 구해서 대조해야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 구태여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 아래의 본문을 보면 나오는 주라비슈빌리[주라비크빌리]의 글은 정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게재하다가 중단한 이치다 요시히코의 <혁명론>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홀워드와 교차하면서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

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1/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최근 25년 동안, 아무래도 질 들뢰즈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대륙철학이나 프렌치 씨어리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들뢰즈 저작의 양상들을 둘러싸고, 이채로운 수의 책과 논문이 넘쳐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실제로 들뢰즈에 관한 전문연구서와 들뢰즈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책을 도서관의 빠른 검색으로 검색해보면, 이제 1200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에딘버러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시리즈 Deleuze Connections, 들뢰즈와 디자인, 들뢰즈와 건축, 들뢰즈와 교육, 들뢰즈와 인종, 들뢰즈와 공간, 들뢰즈와 그 밖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25권을 채웠고, 앞으로도 늘어날 예정입니다.[각주:1]

* 각주1에 달려 있는 주소는 다음으로 변경되었다. https://edinburghuniversitypress.com/series-deleuze-connections.html

이 일련의 제목이 반영하고 있듯이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곳은 차치하더라도, 유럽과 앵글로색슨의 근처에서도 많은 독자가 들뢰즈에게 매료되어 온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정치사상가로서의 그 중요성임을 보여주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파리나 런던의 대학에서 현대유럽철학이나 비평이론의 어떤 연구과정을 전공하려고 해도, 어김없이 들뢰즈와 공저자인 펠릭스 가타리에 관련된 정치적 모티프의 한 쌍과 다소간 직접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만나온 이론 지향의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그 상당수에게는 미시정치, 탈영토화, 노마돌로지, 도주선, 전쟁-기계, 소수자로의 생성변화[소수자-되기],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는 정치적 어휘의 대부분을 이제 뒤덮고 있는 몇 안 되는 용어의 고작 몇 개의 예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많은 것에 대해 논합니다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치하는 바로는, 들뢰즈는, 정치활동의 현대적 형태와 그들이 직면한 속박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참조처이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둘러싸고 금세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들뢰즈 자신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하지 않고, 굳이 말하자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 평등, 자유, 해방 등과 같은 주요한 정치적 개념은 그의 고려 바깥에 있으며, 자본주의와 분열증[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제출된 국가 비판을 별도로 하면, 별의별 정치제도, 통치의 기구, 입법대표정부의 기구에 대해 그는 그 이상의 논의를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거대 신문용으로 작성된 몇 개의 논설(유명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관한 것입니다)을 빼면, 들뢰즈가 정치의 경위나 혁명에의 동원에 대해 일부러 자세하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드뭅니다. 들뢰즈나 들뢰지안이 정치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역시 전적으로 불분명하며, 현재 이용 가능한 들뢰즈 사전의 종류가 한결같이 소수자 정치”, “미시정치”, “혁명의 논의를 등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토픽에 대해 특별한 항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각주:2]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 자신의 정의를 부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오랫동안 전통에 맞춰서, “정치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집단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 1.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조직이나 상호행위(예를 들어 친족, 민족, 지리, 언어에 기초를 둔 형태들)로 환원할 수 없는 집단적 차원이며, 2. 다른 것과 구별하여 정치적집단성이나 공민적집단성을 구성하는 참가자들은, 평등과 포함을 기초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다른 생활영역으로부터 따온 계층성을 기초로 하여 (예를 들어 군사명령을 기초로 하거나, 가정경제종교 권위를 기초로 하여)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는 것을 원리 원칙으로서 전제로 하는 집단적 차원입니다.[각주:3] 더 한정해서 강조해 둡니다만, 데모크라시의 정치는 보통의 인민의 힘에, 즉 그 어떤 형태의 특권단체나 지배계급과도 싸워 이기는 인민 일반의 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논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과두제나 재산제(plutocracy)(그 대부분은 ‘(다른) 민주주의라고 자칭합니다)를 가장 간편하고 명백하게 구별하는 방식은, 루소(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의 자코뱅파가 감복해서 계속 인용하는)가 주권의 기초를 인민의 의지에 둘 때의 논리, 일반의지 혹은 인민의지[의 논리]에 입각하면서, 인민주권의 우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집단의 실재의 기초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에게 짐을 지우는 그 역량, 그렇게 해서 적대적이고 타율적인 결정의 형태들에 (단지 저항한다기보다는) 승리하는 그 역량에 직접적으로 놓여져야 합니다. 거꾸로, 이 일반 역량의 기초는, 서로 강화하는 집단적인 능력들과 역량들, 특히 집회·교육·정보·토의(deliberation)·조직화·결의·실행의 역량들에 놓입니다.

* 각주 4에 붙은 주소는 여기를 클릭.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정치에 대한 위와 같은 노골적으로 주의주의적인 구상은 들뢰즈와의 정면충돌을 야기하는데요, 오늘 여기에서는, 바로 이 충돌을 저는 정밀조사하고 싶습니다. 들뢰즈의 저작에 인민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출현하더라도, “도래할 인민[민중]”이라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형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적인 자동기계를 집단적 형태로 개조했던 것은 아닐까요?[각주:5] 무의식, 욕망의 기계적이고 사실은 자동기계적인 성질, 경험의 분자적 혹은 하위-개체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철학은 정치적 의지와 의지적 활동으로부터 가장 먼 것은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의 최초의 가장 열심인 독자의 한 명이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게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그가 1996년의 중요한 논고에서 엄밀하게 강조했던 것처럼, 정치적 좌파는 일반적으로 주의주의를 참조축으로 하여 자기를 정의하지, “들뢰즈는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철학을 전개했다. 항상 들뢰즈는 진정한 사고와 생성하는 모든 근본적으로 의지적인 성격을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계획에 입각해 세계를 바꾼다거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바꾼다는 등의 일처럼 그에게는 인연이 먼 것은 없었던[각주:6] 것입니다.

들뢰즈적인 정치가 있다면, 물론 그것은 비주의주의적이라고 기술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며, 널리 유럽철학에서 좌파현대정치분석으로서 통용되고 있는 것의 실로 상당수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바로 들뢰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권과 그 동족어에 대한 유행의 산만한 비판을, 특히 그것이 무엇이든 지도 주체나 주권적 주체”(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괴물적인 혼란입니다!)에 대한 거절을 보세요. 자크 데리다에 의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책임을, 적극적 자유의 그 어떤 구상으로부터도, “, 지배, 폭력으로서 규정되는 자유, 나아가 기능으로서, ‘나는 할 수 있다의 가능성으로서 규정되는 자유로부터도 분리하려고 하는 미수에 그친 기획을 계승하는 유산을 생각해 보세요.[각주:7] 조르조 아감벤을, 그리고 또한, 대륙-철학계에서는 최근 들어 일정한 견인력을 갖춘, 티쿤(Tiqqun), 보이지 않는 위원회(the invisible committee), 공산주의이론(Théorie communiste) , 다양한 공산화가속주의의 주장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것들에 공유되고 있는 것은, 활동가와 그 현실적 정치 역량을 합병하는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아감벤에 의한 비판, 숙려[토의](deliberate) 단계와 스텝step을 밟아나가도록 틀이 부여될 수도 있는 활동의 전략적차원 모두에 대한 아감벤의 거절입니다. 모든 구성적권력[]의 거절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라면, 중지[허공에 매달림]와 외톨이로 틀어박히기라는 위로, 그저 결핍시키는힘에 의해 약속되는 저 순수한 비-잠재성의 림보뿐입니다.[각주: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것은 20년 이상 전에 처음으로 학위논문의 1개 장에서 소묘했던 것인데요, 들뢰즈에 대한 저의 비판적 결론의 입장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은 유명하지만, 그 정치적 의의에 관한 한, 그것은 금세기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기간이 계속된 것은 (혹은 시각에 따라서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인민의 의지, 그것에 대항하는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자코뱅적 주장으로부터, 정치적 사고가 철수하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가 정치적 사고에 있어서 중심적인 참조점으로서 부상한 것은, 어떤 기간, 대략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승리의 기간, 1970년대 초기에 시작되고 일련의 현저한 인민의 패배를 특징으로 하며, 19세기와 비교하고 싶어지는 불평등·항복·복종의 형태의 부활을 결과로 하는 기간에, 들뢰즈가 퇴각의 입장을 위해 부족함이 없는 철학적 견해를 제출한 한에서인 것입니다.

주의주의적정치구상과 비주의주의적정치구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부딪칩니다. 한편으로, 정치활동가에 대한 구상, /녀의 의지적 활동의 역량에 관해서, 다른 한편으로 활동가와 활동가가 살아가는 상황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해방식에 관해서입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두 가지 점을 순서대로 쫓습니다.

 

1. 루소와 로베스피에르에서부터 레닌과 그람시를 거쳐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라에 이르는, 넓게 -자코뱅적인 전통은, 정치적 의지의 행사를 목표·의도·동기 등의 고전적인 심리적요인과 연합시키는 것을 늘상 해왔습니다만, 이와 동시에 의지의 실행과 행사를 단순한 소망과 변덕의 표현이 목적에 동의하는 자는 그 수단을 거부할 수 없다”(루소)라는 클리셰, 달리 말하면, “목적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 그 수단도 의지해야 한다”(그람시)라는 클리셰에 입각하고 있더라도, 단순한 소망이나 변덕의 표현과는 구별하고 있습니다.[각주:9] 루소 이후, 의지(vouloir)(pouvoir)은 서로 맞바꿀 수 있으며, 목적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활동가의 역량에 의해 매개되는 것입니다. 활동가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활동가가 교육되고 의식적이고 유덕해지고 단련될수록 그 활동의 영역이나 그 의지의 권역은 점점 더 일반적이게 되고 원대해지는 것입니다.

활동가[배우]에 대한 들뢰즈의 구상 일반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활동을 위한 본래적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기획과 사업을 숙고하고 의식적으로 정식화하고 개시하기 위한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들뢰즈가 전투의 사건을 고찰할 때, 그의 관심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느냐에도, 군사적인 전략의 방식이나 이유에도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관심은, 활동가로서의 병사, 상황에 응답하여 결정을 내리고 개별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잠재적 사건 그 자체로서의 전투의 무차별적이고 익명적인 성질에, 활동이나 퇴각의 역량의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기한 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성질에, 들뢰즈의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활동가, “더 이상 용감도 비겁도 아니고, 더 이상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사건>이 현전하는 그 장소에서, 그렇기에 그 가공할 정도의 비정함에 참여하는 치명상을 입은 병사”(LS, 100~101)인 것입니다. 전투의 위쪽으로, 전투를 넘어서, 전투를 통과하여 존재하는 자만이, 전투를 사건 또는 본질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사무엘 베케트의 범례적인 등장인물이 사물의 잠재적 리얼리티에 대해 적격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진하고, 그저 가능적일 뿐인 것의 영역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소진한 인물만이 가능적인 것을 소진할 수 있다. 모든 욕구need, 선호, 도달목표, 의의를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소진한 인물만이 충분히 이해관심을 떠나고 있다.” 소진한 인물만이 재차 올라가 돌아가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CC, 154-155). 그 조건 하에서 그/녀는, /녀가 그 일부인 리얼리티를 진정으로 수 있다. 소진한 인물은, 그들을 흡수하는 환경에 일체의 주도권을 버리고 맡겨버린다. “거친 대해를 떠다니는 코르크처럼, “그는 이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경계 속에 존재한다”(CC, 26).

들뢰즈가 물색한 다수의 시나리오 중 어떤 것을 취하든, 숙고적이고 목적론적인 자유는 그저 반응적이고 제한적인 편견이라며 기각되고, “더 심층의 형태의 강제, 자동조작, 용해가 지지되고 있습니다. 주체 자신의 결정이 진정한 귀결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견지, 요컨대 전략의 견지는, 들뢰즈의 사고의 구상과는 철저하게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관한 그의 두 권의 책의 궤적을 아주 간단하게 대층 그려보면, 등장인물이 지각과 활동을 조절하는 역량을 계속 갖고 있는 (전쟁-전의) 상황으로부터, 감각-운동역량을 탈취당해 무엇인가에 홀려 있는 모양의 사람이 반응하지 못하고, 반응을 의지하지도 않는상황으로의 이행에 있게 됩니다. “감각-운동의 결합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구상공간은, 긴장과 그 해소에 따라서, 목표, 장벽, 수단, 우회에 따라서 조직화되기를 멈춘다.” 활동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지각은, 압도적이고 환각적이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結晶)을 통하는 듯한 직관을 통해서, 인물은 수동적인 보는 자가 되며, 무엇이든 현재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할지도 모르는 것에는 무관심해지며, 반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무감응해진다. “그토록 그 인물에게 있어서는, 정확하게는 무엇이 상황 속에 있는 것인가를 보는욕구need가 크다는 것이다”(C2, 126-128). 이런 통찰의 비용은 전적으로 명명백백합니다. 그것이 요청하는 것은, 활동가의 카타스트로피적인 마비이며, 유기체의 문자 그대로의 분해, 혹은 이것에 준하는 분해입니다. 전투를 지각하면서 죽어가는 병사를 철저하게 넘어서 사납게 날뛰는 전투처럼, 이제 사건은, 사건을 선동하고 사건에 반응하는 인격에 관계없이, “부동성, 석화작용, 반복”(C1, 207; C2, 103)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구도가, 들뢰즈가 문학을 참조할 때 특권적으로 끄집어내는 많은 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베케트의 소진시키는 자동기계, 카프카의 절대적인 분자적 탈영토화”(K, 58), 나아가 멜빌의 바틀비이며, 그 비타협적인 나는 하지 않고 싶은데요, 변함없이, “말과 활동을 절단하고, 더욱이 사물, 이유, 목표에의 지시를 언어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입니다.[각주:10]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예를 들어 풀이하기 위해(또 다시 들뢰즈의 저작=신체corpus에 이어서는 통상적인 정치적 맥락이 그 관계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들뢰즈의 프루스트 독해를 간단하게 고찰해봅시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1972년판의 짧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가, 비의지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움직이는 기호의 경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PS, vii)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화자가 학습하는 것은, “진리는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누설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의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비의지적이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최대 테마는, 진리의 탐구는 비의지적인 것에 특징적인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유를 강제하고 사유에 폭력을 가하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사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라이프모티프는 단어 강제력이다. 우리에게 보도록 강제하는 인상, 우리에게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조우등등(PS, 61).

일반적으로, 들뢰즈가 논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 기억, 상상, 지성, 사고 같은 능력들은, “의지적으로 행사되는 한에서는 우발적으로만 행사될 뿐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그저 똑같이 우리는 기억하고 상상하고 인식하고, 그 반대도 그렇다.” 이것과 대비적으로,

 

어떤 능력이 그 비의지적인 형태를 걸칠 때마다, 그 능력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곳에 도달하고, 초월적인 행사로까지 상승하고, 다른 것으로 치환 가능한 그 힘과 자신의 필연성을 이해한다. 능력은 교환 가능하기를 멈춘다. 비의지적인 행사는, 각 능력의 초월적인 한계이며 그 사명이다. 의지적인 사고를 대신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고하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사고하기를 강제당한다. (PS, 62-63).

 

그때, 비의지적인 사고란, 필연성의 완전한 강제력과의 조우입니다. 혹은 오히려, 조우의 우발성을 필연성의 무심한 운명과 제휴시키는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비의지적인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유명한 몰두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활동가의 진행성 마비와 활동가의 세속적 기획과 낭만적인 기획 모두의 용해를 다시 요구하는 듯한 그런 내러티브의 도정, 그 최초의 열약(劣弱)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자의 감각-운동 시스템은 소모시키고, 활동과 반응에 있어서의 그저 현실적인시간성에 대해 무관심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가 학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순수상태의 시간에 입력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기관없는 신체이며 미소한 기호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관찰되지 않으며”, 그가 조우하는 다양한 인물을, “그 자신의 망상의 똑같은 수의 마리오네트에, 그의 기관없는 신체의 똑같은 수의 강도적인 힘에, 그 자신의 광기의 똑같의 수의 프로파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각주:11]

프루스트의 화자가 따라가는 궤적과 영화론이 끄는 궤적은, 대체로 비슷한 호[孤]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작품 전체를 통해 상이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 지도에 배치되는 것은, 활동가의 진행성의 무-능력화, -현실화, 대항-현실화, 활동가의 용해이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리얼리티의 절대적 필연성과 충족성 안에서의 직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침례[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immersion) 때문입니다.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경험이 활동에 대한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감각-운동 메커니즘을 통해 감각과 활동을 결부시키는 신체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면, 진정한 통찰을 위해서는 그런 관심의 정지와 그 메커니즘의 탈구가 요청될 겁니다. 현실적인 것은 유기체의 기능[함수]이라고 한다면, 잠재적인 것은 전반적인 탈-유기체화로 이끌 겁니다. , 글자 그대로 탈조직화된 신체, 그 생물로서의 통합성과 정합성을 박탈당한 신체,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르토를 좇아 부르는 바의 저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를 설정하도록 이끌 겁니다. 그런 신체는, 조우하는 사건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이해, 목표, 계획의 매개 없이 즉석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모든 기획은, 존재하는 것, 존재할 터인 것의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무너집니다. 이것이 운명애입니다.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 비주의주의적궤적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궤적은,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 동일한 지점에, 의지가 허위 문제이게 될 뿐인 지점, 허위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지가 사건의 자기-긍정으로서 사건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지점에 도달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묘하고도 철저하게 스피노자적인 세계의 지각에 도달하고, “산소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었음을 마지막에 이해하게 되며, 산소 없이 호흡하려고 하는 지점에 손을 대는[노력을 기울이는][각주:12] 것입니다. 이렇게 제언해도 크게 과장이 되지는 않을 테죠. , 들뢰즈에게서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활동가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모두, 그대로, 우리가 그로부터 도주하려고 해야 할 억압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바로 그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필연성의 유일한 흐름의 지각할 수 없는양태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는 도주선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들뢰즈가 고찰하는 다양한 생성변화 혹은 되기”(예를 들어 여자-되기, 동물-되기, 노마드-되기)의 상대적인 가치가 어찌 될 것이냐 한다면, 그 가치는, 되기가 탈영토화한 형태 없는 질료를 위해활동하는 정도에 따라서, 또한, “지각할 수 없는 것은, 되기의 내재적인 목적이며, 그 우주의 공식이다라는 무자비한 텔로스에 입각하면서 활동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입니다.[각주:13]

주라비슈빌리 같은 독자가 들뢰즈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가차 없는 스피노자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들뢰즈의 이 방향성에 막연한 혁명적억양을 불어넣고자 하는 꽤 어설픈 시도는, 천박한 속임수가 되기 십상이고, 어떤 종류의 정치활동에도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실천적 곤란들에 대해 결단코 무관심해지기 십상입니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스피노자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마오이스트의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들뢰즈의 다른 독자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력(impact)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소책자에서, 들뢰즈의 형이상학의 정치적 함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스토아학파로서, 그리하여 평화주의와 영적 달관[諦観]의 처방전으로 특징지어집니다.[각주:14]

  1. Harvard University Library system, HOLLIS search, 9 March 2015. ‘Deleuze Connections’, ed. Ian Buchanan, University of Edinburgh Press, http://www.euppublishing.com/series/delco [본문으로]
  2. Cf. Adrian Parr, ed. The Deleuze Dictionary (2010); Eugene Young, ed., The Deleuze and Guattari Dictionary(2013)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2003). [본문으로]
  3. 표준이 되는 참고문헌은 Aristotle의 Politics이다. [본문으로]
  4. Cf. Hallward, The Will of the People: Notes Towards a Dialectical Voluntarism, Radical Philosophy 155(May 2009), 17-29. online at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본문으로]
  5. Cf. C2, 263 ; EP,131, 158, 160. [본문으로]
  6. Fran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risme en politique)”, in Eric Alliez et al, eds.,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1996), 335. [본문으로]
  7. Derrida, Rouges[200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40. [본문으로]
  8. cf Agamben, “From the State of Control to a Praxis of Destituent power”, Athens, 16 November 2013 ; cf. Agamben, “From Limbo”, The Coming Community(1993) [본문으로]
  9. Rousseau, Discours sur l’économie politique, Œuvres complètes, vol. 3(Pléiade), 263; Gramsci, Worker’s Democracy (1919), Pre-prison Writings, 99; cf. Trotsky, Terrorism and Communism(1921), Verso ed., 25. [본문으로]
  10. CC, 73-74. 주라비슈빌리의 비주의주의적 독해에 있어서, 바틀비가 “들뢰즈적 정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49). Cf. Agamben, Bartleby, or on Contingency, in Potentialities (1999). [본문으로]
  11. PS, 117-118; AO, 69; PS, 181-182; cf. RF, 30-31, 38-39; NP, 103-110; DR, 147. [본문으로]
  12. Zourav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56-357. [본문으로]
  13. K, 13; TP, 279; Cf. DC, 45; C2, 190. [본문으로]
  14. Guy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à l’occasion de Deleuze(Verdier, 1999), 51. 특히 어떻게 최선의 방식으로 필연성에 적응하는가, 어떻게 “흐름을 타는”가, 혹은 상황의 내재적 “생성”에 따라서 자기를 방향짓는가를 탐구하는 사상가(스토아학파, 스피노자, 흄, 베르크손 …)에 이끌려서, 라르드로는 이렇게 논한다. “푸코와는 달리 … 이성의 존엄[을 지킬] 만한 것에 대항하여 들뢰즈가 떨쳐 일어난 것은 한 번도 없었다”(ED, 45; cf. 72). 물론 라르드로 자신은 중립적인 독자가 아니라, 과거, 이른바 “신철학” 논쟁 무렵, 드물게도 들뢰즈 자신이 비난을 폭발시켰을 때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 다음을 보라. Deleuze, “A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1977), in RF; Guy Lardreau and Christian Jambet, Une derniere fois, contre «la nouvelle philosohie», La Nef 66(January 1978), 35-4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공개성의 근원 (9) : 대표와 민주주의

大竹弘二

atプラス 19호(2014년 2월)


공개성의 근원 (9) - 대표와 민주주의20151103.pdf



1. 대표의 양의성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치지배자가 궁정에서의 의례, 혹은 법을 뛰어넘는 ‘자비’에 의해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는 정치적 공론장1)은 시민혁명의 시대와 더불어 소멸한다. 하버마스의 유명한 정식에 따르면, 지배자가 자신의 위신을 화려하게 상연하는 ‘대표적 공공성’은, 이념[원론]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토의에 기초한 ‘시민적 공공성’으로 이행한 것이다. 이제 공공성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지배자의 ‘광채[빛]’가 현시되는 극장적인 정치공간의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다양한 법권리나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 합리적 의사소통의 공간이 된다. 정치의 공개성은 이제 권력의 가시적인 현전의 그것이 아니라, 담론적 토의를 통한 권력의 끊임없는 검증 가능성이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시민적 공공성의 중심을 이루는 정치제도는 토의를 그 본질로 하는 의회제이다.2) 그렇지만 의회주의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폭넓은 이해관심이 정치에 반영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는 비판이 자주 이뤄졌다. 의회는 때때로 ‘국민의 의지’와 합치하지 않는, 혹은 그에 반한다고 생각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의회를 특수한 부르주아적 제도라고 비판하는 과거의 사회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게 됐다. 의회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로서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일까? 대의제[대표제]로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대변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보다 직접민주주의적인 제도로 개량하는 것이 본래 바람직한 것인가? 의회주의에 대한 이런 불만은 ‘대의제(representative)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애매한 성격과 관련된다. 즉, ‘대표(representation)’라는 개념의 양의성이 의회의 역할에 관한 이해의 엇갈림·간극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의회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말해지고 있는가?

도대체 일본어로 ‘대표’라고 번역되는 ‘representation’이란 무엇인가?3) 그것은 원래, 국민의 의지든 특정한 사회계층이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해를 대리하거나 대변하는 것을 반드시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의 ‘대표제=대의적’ 민주주의에 관해 말해지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대중민주주의의 진전 속에서이다. 하지만 절대왕정기의 ‘대표적 공공성’이라고 말해지는 경우의 ‘대의’란,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대표(representative)’라는 말은 중세가 되어 그 전문 분야적인 용법이 확정되는데,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충실하게 ‘모사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현전화함’으로써 처음으로 그것에 실재성을 부여한다는 것도 뜻한다. 이 말은 중세의 신학적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필두로 하는 ‘신비체’로서의 교회라는 사상과 결합되어, 비가시적인 것의 인격적 가시화·구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런 대표 원리는 근세의 절대주의 국가에서도 전용되어 그 지배의 정당화4)의 기초가 된다. 이 ‘대표적인’ 정치적 공론장에서는 영광 있는[영광스런] 지배자가 사람들 앞에 현전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그 때문에 이런 의미의 ‘대표적’이라는 말에는 자주 ‘구현적’, ‘시위적’, ‘과시적’ 등등의 번역어도 배정된다). 즉, 대표에 있어서는 정치체이든 종교적 신비체이든, 하나의 질서가 상징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며, 바로 이것에 의해 비로소 그 질서가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신학에서 유래하는 이와 같은 대표 원리는 지배를 ‘위로부터’ 정당화한다는 성격을 강하게 띤다. 대표로서의 지배자는 결코 특정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해를, 하물며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질서는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대표자에 의해 ‘위로부터’ 구성된다. 따라서 이 정치신학적인 대표 개념은 권위주의적인 함의를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대립 개념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혁명 이후의 대의제[대표] 민주주의 아래서, 대표 이념은 민주주의와 결합된다. 그리고 19세기가 되면, 대표는 정치 질서의 가시적인 현시라기보다는 차츰 국민의 의견이나 이해의 대리 또는 대변이라는 의미를 강화하게 된다. 의회는 국민 또는 유권자의 이해의 대변자가 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질서를 상징적으로 ‘현전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민의 의지를 충실하게 ‘모사’하는 것이다. 즉, 국민이 발흥하고 있는 ‘사회적인 것’으로의 종속을 피할 수 없는 가운데, 여러 가지 경제적·사회적인 이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것이 대표라는 의원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표’의 본뜻에서 보면 하나의 추락으로도 보인다. 가령 칼 슈미트는 이 과정에 관해 “의회는 점점 더 정치 통일의 대표가 아니게 된다”5)고 표현한다. 의회에서의 토론 혹은 이해의 절충에는 어떤 영광도 기대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특히 19세기 이후의 독일에서는 ‘대표’와 ‘대리’를 구별하려고 하는 국법학[헌법학]적 담론이 누적되고, 단순한 (이익의) 대리에는 그치지 않는 대표의 의의가 강조된다.6)

이처럼 대표 이념과 민주주의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은 없으며, 오히려 근대민주주의의 발생기에서 이 둘은 대립하는 원리로서 나타났다. 이런 대립이 가장 명확하게 발견되는 것은 루소이다. 그의 민주주의론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정치의 극장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 다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과전서』에서 제네바에 극장건설을 제언한 달랑베르에 대해 루소는 유명한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1758)에서 반박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모든 시각적인 표상으로부터 순화된 순수민주주의이다. 루소에 따르면, 극장은 공화국에 해롭다. 고대 아테네의 예가 보여주듯이, 정치가 극장과 비슷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몰락한다. 왜냐하면 극장은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와 관객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시민들은 단순한 관중으로서, 정치가라는 배우를 보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에 의해 정치라는 무대는 공중으로부터 분리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슨 일이든, 그것을 연극에서 연기하면([mettre] en représentation au théatre), 그것을 우리에게 접근시키지 않고,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7) 루소가 보기에, 스토아적인 주인공의 항심(恒心)에 대한 ‘놀라움’에 의해서든, 비극의 주인공의 고난에 대한 ‘동정’에 의해서든, 연극이 관객에게 능동적인 작용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념을 환기시키는 것이든, 정치가 극장을 모델로 하여 이해되는 한, 시민이 단순한 수동적인 관중이 되어버린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주의란 상연되고 있는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하는 배우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 사이에서는 어떤 공동성도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모였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는 모두 혼자이고 외톨이가 됩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가 공화국에서 뭔가 ‘구경거리(spectacle)’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면, 그것은 민중 자신이 참여자로서 함께 행위하는 다양한 집회로서이다.9) 거기서는 이른바 관객 자신이 무대에 오르고 그 등장인물이 된다. 따라서 공화국의 축제는 반극장적인 극장이다. 그것은 대표(=표상)를 결여한 의사소통의 장에 다름없다.

정치에 관한 ‘안티 스펙터클’적인 이해는 아테네의 “극장지배(테아트로크라티아)”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이후 자주 보이게 된다(『법률』 3권 15). 그것은 종종 이성이 아니라 눈으로 판단하는 대중을 멸시하는 반민주주의적인 사상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렇지만 루소에게 민주주의는 오히려 극장 지배와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에게 극장에 맞선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같은 말이다. 인민주권이 완전히 달성되는 것은 극장적인 공간에서가 아니라 공중 앞에서 스스로를 극장적으로 제시하는 모든 대표자가 소멸함으로써이다. 주권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10)고 하는 『사회계약론』(1782)의 유명한 구절은 이런 스펙터클 비판의 관점에서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 이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 주권은 본질상 일반의지 속에 존재한다. 더욱이 일반의지는 결코 대표되는 것이 아니다.11)


대표가 있는 곳에서는 주권의 절대성이 훼손되며 주권자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게 된다. 루소는 인민주권을 그 순수성에 있어서 실현하기 위해 연기자와 관중 사이의 그 어떤 거리도 말소하려고 한다.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이 주권의 최고의 발현인 것이다. 정치는 인민‘의 앞에서의’ 실천이 아니라 인민‘에 의한’ 실천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크 주권의 기초인 대표 원리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은 바로 루소 안에서 가장 현저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어떤 국가형태든, 대표와 민주주의(‘동일성’)라는 양극을 이루는 두 개의 원리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대의제(대표) 민주주의란 본래의 ‘대표’ 개념에 관한 오해 위에서 성립되며, 이것들의 타협형태이다. 그의 이런 반의회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와는 별개로, 단순한 대리가 아닌 ‘대표’라는 뜻에 비추어 볼 때, 현대의 민주주의론의 상당수가 이것과는 대립하는 반-이미지적인 성격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하버마스처럼 담론적 토의에 의해 민주주의를 정초하려고 하는 심의민주주의적인 시도는 말할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믿지 않더라도, 적어도 정치적인 것의 극장화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보는 시각은 많은 논자들에게 공통적이다. 주지하듯이 기 드보르는 루소를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스펙터클 사회를 비판한다. “과거 직접 생겨났던 것은 모두, 표상(représentation) 속에서 멀어졌다.”12) 대표(표상)가 자립화되는 곳에서 인민은 그 스펙터클의 단순한 수신자, 혹은 소비자가 되어 정치로부터 소외된다. 권력으로부터 극장적인 성격을 빼앗고, 그 이미지성을 극복하는 것은 민주주의 이론의 계속적인 이상인 것 같다.


2. 죽음의 극장 : 영광의 신체와 그 종언?

역사적으로 보면, 프랑스혁명은 당장은 루소가 원했던 “대표적 공공성”의 극장장치의 해체를 수행한 듯이 보인다. 그것은 ‘죽음’의 상연이라는 바로크적 실천이 혁명과 더불어 의미를 상실했다는 사정 속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절대왕정 시기에는 죽음의 연극적 제시는 ‘대표적 공공성’의 한 가지 범형을 이루었다. 그것은 왕의 주권을 과시하기 위한 특히 주목해야 할 수단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미 거듭거듭 다뤄졌듯이, 왕을 순교자로 묘사하는 바로크 시기의 문헌들 속에서 간파할 수 있다. 『에이콘 바실리케(왕의 상)』(1649)의 찰스1세, 또는 그리피우스의 바로크 극장의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왕은 죽는 것을 통해서야 스스로가 주권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들에게 닥쳐온 비참은, 그들을 영광으로 높이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다. 군주에게 필요하다고 간주된 스토아적인 항심의 덕은, 바로 죽음의 경험을 참아내는 가운데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증명되고, 그것이 순교자인 왕에게 주권자로서의 존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의 너무도 유명한 분석이 보여주듯이, ‘죽음’을 통해 주권권력을 현현시키는 절대왕정기의 실천은, 범인에게 가해진 신체형의 ‘화려함=빛남(éclat)’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처형에서 수형자는 고문이 뒤섞인 여러 가지 잔인한 수단에 의해 사지가 불에 태워지거나 잘리곤 했다. 군중은 공개적인 장에서 행해지는 이런 스펙터클을 구경하러 모이고, 시간을 들여 잔혹하고 심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신체를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고통을 주면서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런 처형법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죄인에게 가한다는 단순한 동해보복(탈리오)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같은 죄를 저지를 자를 위협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가혹한 형벌이 가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체를 훼손하는 일련의 과정을 일종의 스펙터클로서 연출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권력에 영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용되는 폭력의 극단적임 자체가 사법의 영광의 일부분을 만드는 것이다. 즉, 죄인이 고문을 당하고 비명을 지르는 큰소리를 낸다는 것은, 사법이 부끄러워 해야 할 측면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법의 의례 자체인 것이다.13)


범죄에 의해 훼손된 것은 단순한 법 형식이 아니라 군주의 인격 자체이다. 그러므로 형벌은 단순히 죄에 걸맞은 벌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위신을 ‘광채[빛남]’ 속에서 회복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형이 공개적인 장에서 민중에게 목격될 필요가 있는 것은 그것이 군주의 영광을 현현시키는 대표적인 공공성의 의례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라신느의 비극이 인간 정념의 혼돈 속에서 출현[등장]하는 주권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형은 바로 수감자의 신체가 찢겨지는 광경을 통해 주권을 현전시킨다.


일단 상처 입은 주권을 부흥시키기 위해, 그것을 하나의 의식이라고 말하자. 신체형은 주권을 그 완전한 빛남[광채] 속에서 현시하면서 그것을 부활시킨다.14)


이런 영광의 의례인 한에서, 신체형은 그 자체로, 군주에 의해 내려진 ‘자비’와 같은 기능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체형의 집행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군주는 집행의 한복판에 자비에 의해 개입하고, 이를 중단시킴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그 으뜸가는 ‘광채[빛남]’ 속에 노출시킬 수도 있다.15)

신체형은 군주에게 영광을 부여하는 한편, 수형자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보여줄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의례의 두려움 때문에 “수형자에게 부과됐던 치욕은 동정 내지 영광으로 역전될 여지가 항상 있었다.”16) 즉, 수형자는 그 비참한 죽음에 따라서, 일종의 성인 혹은 순교자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형의 공포를 앞두고, 혹은 가혹한 형의 한복판에서 만인의 눈앞에 나타난다. 스토아적 항심의 덕은 군주에서 죄인으로 그 장을 역전시키고, 바로 수형자가 비극의 순교자 왕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때, 그 자가 저지른 범죄도 (군주에게 허용되는 것과 동일한) 영광을 수반하는 범죄자로서 사람들에게 찬양받게 되며, 민중 사이에서 범죄자의 영웅화가 행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군주의 비극적인 희생이든, 죄인에 대한 신체형이든, 죽음을 상연함으로써 주권을 찬양하는 앙시앙 레짐의 비극적 실천은 혁명과 더불어 소멸한다. 혁명은 대표적 공공성으로부터 궁정이라는 의례와 축제의 장을 빼앗을 뿐 아니라, 영광스런 처형을 제시하기 위한 무대 장치도 빼앗는다. 이때 결정적인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길로틴 처형의 보급에 다름 아니다.17)

혁명의 한복판인 1792년, 길로틴을 통한 참수는 정식 처형법으로 채택된다. 그것에 의해 집행에 시간을 필요로 하고 수형자에게 많은 고통을 줬던 절대왕정기의 다양한 처형법은 이 신속하고 고통 없는 ‘인도적인’ 처형법으로 통일된다. 동시에 이제 처형의 기계화가 이루어진다. 이 기술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유례없는 대량처형이다. 길로틴이라는 처형기계 없이는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이른바 자코뱅 독재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길로틴 형벌에 의해 초래됐던 것은 ‘처형의 민주화’18)이다. 이 형이 도입됨으로써 전에는 일반적이었던 것인 신분의 차이에 따른 처형법의 차별화도 이뤄지지 않게 된다. 또한 길로틴에 의한 참수라는 단순명쾌한 방법은 신체와 형벌 사이의 접촉을 한없이 순간적인 것으로 한다. 과거의 신체형과는 달리, 길로틴 형은 인간의 신체성과는 무관한 사건이다. 그것은 형의 집행인이 어느 정도 숙달된 기량을 갖추었는가, 혹은 수형자가 어느 정도 강인한 신체 혹은 정신력을 갖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죽음을 보장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수형자는 신체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귀책 능력이 있는 법적 주체로서 처벌받게 된다. 개별 인간의 물질적 신체성을 사상(捨象)하고, 그것을 보편 평등한 추상적 주체로 하는 근대 계몽의 이상은 길로틴과 더불어 그 실현으로 향하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길로틴 처형은 형벌을 신체적 스펙터클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같은 것에는 같은 것을>의 원칙에 따라 죄인에게 귀책을 행하는 근대적 처벌로 나아가는 첫발을 나타낸다. 이것에 의해 생기는 것이 처벌의 탈극장화에 다름 아니다. 처형은 민중에게 더 이상 각별한 흥미를 끄는 사건이 아니게 된다. 잘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기에 민중은 공개적으로 행해진 길로틴 처형에 몰려들고, 자주 그것에 환희를 느끼고 갈채를 퍼부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길로틴 처형은 과거의 신체형에 비해 볼거리로서의 성격이 현저하게 옅어지고, 민중은 그것에 열광한다기보다는 공개 처형 자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주게 됐다는 것이 실상인 듯하다.19) 순식간이자 대량으로 행해진 혁명기의 길로틴 처형은, 이전의 처형에 있었던 연극적·종교적 분위기를 잃게 됐다. 거기서는 이제 어떤 비극성도 느껴지지 않게 되며, 수형자에게서는 그 성스러움을 빼앗게 되는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이제 처형을 통해 영웅적으로 죽을 수는 없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기에는 처형을 대신해 종종 자살이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죽음의 수단으로서 선택된 것이리라.20) 실제로 이 시기에는 정쟁에서 패배하거나 수감되기도 한 정치가의 상당수가 처형되기 전에 스스로 죽는 것을 택했다. 이 ‘영웅적 자살’의 유형에도 고대 스토아파의 윤리가 강하게 영향을 줬음을 간파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프랑스 혁명의 정치가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영웅에 빗대고 이들의 행동거지를 모방했는데, 그들은 그 비참한 죽음에서조차 인간적 자유의 궁극적 징표로서의 자살이라는 로마 시대의 스토아적인 이상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기에는 구체제 하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것, 즉 자살을 연극적으로 제시하는 시도가 행해지게 된다(자크 루이 다비드의 회화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죽음의 상연이라는 대표적 공공성의 무대 장치를 자기 것으로 하려 했다.

마찬가지로, 혁명기에서 절대왕정의 판타시즘의 흔적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공포정치 종료 후인 1795년 무렵에 일어났던 길로틴의 비인간성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다.21) 즉, 길로틴 형에 처해진 목이 처형 후에도 의식이 남아 있는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의학논쟁이다. 독일의 과학·해부학자 사무엘 토마스 폰 젠메링(Samuel Thomas von Soemmerring)의 연구에 의해 지지된 견해[所説]에 따르면, 몸통에서 분리된 목은 한동안 의식을 유지하며 고통을 계속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길로틴 형은 결코 인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신체형에 못지않게 잔혹한 형벌임을 뜻한다. 의식의 중추를 머리에서 찾는 이 생리학적 관점에서의 길로틴 반대론은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체(정치적 신체)라는 ‘왕당파적인’ 국가표상에서 그 대응물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려나간 후에도 계속 살아 있는 머리라는 이런 악몽은, 의학·생리학자인 피에르 카바니스에 의해 반박된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신체 전체의 유기적 기능이 공동 작용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의 통일적 순환이 끊어진 시점에서 의식은 소멸된다. 머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체라는 이 ‘공화파적인’ 생리학적 견해와 더불어, 국가를 인간 신체에 의해 구현화하는 절대왕정기의 상징적 이미지는 종언을 맞게 될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유명한 반박서에서 계몽과 이성의 ‘기계론적 철학’을 따르면 “우리의 제도가 어떤 인격 속에서 체현”되지 않게 된다고 한탄한다.22) 이른바 공화국이란 신체를 잃은 정치체(정치적 신체)라는 셈인 것이다.

길로틴 형은 “대표적 공공성”에서 보여진 가시성의 정치의 종언을 범례적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구체제 하의 처형에 있어서 죽음이 띠던 아우라를 상실케 했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게 되며, 그 죽음은 그저 무명의 죽음이 된다. 이제 수형자가 처벌 속에서 자신의 오욕을 영광으로 전화시킬 수 없다. 이리하여 19세기 이후, 개별 범죄는 단순한 익명의 사건, 무수한 데이터의 한 사례가 되며, 범죄자는 갱생 또는 관리를 행하는 통치 실천의 대상으로 변용된다. 군주에 의한 것이든, 범죄자에 의한 것이든, 더 이상 법 침해 행위가 ‘광채[빛남]’ 아래에서 찬양될 수 없게 된 것이다.


3. 의회주의의 미학 : 공화국의 정치적 신체

그러나 근대의 정치적 공론장은 정말로 극장모델로부터 손을 떼려고 했을까? 근대 민주주의는 미적 표상에 의한 정당화를 거부하고 정치적 스펙터클에서 부정적인 가치만 찾아냈을까? 사실상 정치 질서를 가시적으로 현현시킨다는 의미에서의 ‘대표’ 관념은 시민 혁명 이후의 민주주의 안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시각적인 ‘대표적 공공성’에서 담론적인 ‘시민적 공공성’으로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이해는 너무도 도식적이다. 상징적 대표에 기초한 전근대의 정치공간에도 이미 담론적 의사소통이 존재했듯이, 시민적 토의를 이상으로 삼은 근대의 정치공간에서도 대표적 현전의 계기는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토론을 그 주요 기능으로 삼는다고 간주되는 의회에 관해서도 들어맞는다. 즉, 근대의 의회제를 구성하는 요소들 안에서는 주권자의 영광의 현시라는 낡은 정치적 기능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단순히 유권자의 이해나 국민의 의견의 ‘대리’에 머물지 않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측면이 겉으로 드러날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가 “왕의 그림자 속에서”(필립 마노우) 검토해야 할 것은 대표로서의 의회가 지닌 미학적 성격이나 다름없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1년 9월 3일 국민의회에서 제정된 이른바 <1791년 헌법>은 루이16세기의 처형과 자코뱅독재에 앞서 프랑스사상 최초의 헌법이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데, 그 3편 2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모든 권력이 그것에서 유래하는 국민은, 파견대표(위임, délégation)에 의해서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랑스 헌법은 대표제적(représentative)이다. 대표자는 입법부와 국왕이다.23)


이 헌법은 행정부의 대표적 성격을 부정하는 한편, 입법부와 국왕이라는 이원대표제를 채택했다. 이들은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표’의 역할을 국민의 의견과 이해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이전의 바로크적인 대표 관념을 계승한 것이며, 그 기능은 국왕과 의회 사이에서 분유되고 있다. 즉, 정치 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국민’은 이들 대표자를 통해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다.

국민의 대표에 대한 이런 규정은 시에예스에서 그 이론적 기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개개인의 이해의 단순한 집합 이상의 것인 ‘인민의 의지’는 대표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대표만이 통일된 인민이다. 국민의 통합은 바로 대표일 뿐인 통일된 인민의 의지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대표를 넘어서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대표가 유일한 조직체이다. 분산된 인민은 조직체가 아니며, 그것은 하나의 의지를 갖지도 않으며, 하나의 생각을 갖는 것도 아니며, 뭔가 하나의 것이 결코 아니다.24)


 여기서 보이는 시에예스와 루소의 단절은 분명하다. 인민의 의지는 대표로서만 존재하는 한, 대표 없는 직접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시에예스에게 의회제는 ‘간접’ 민주주의 따위가 아니라 이상적인 민주주의 형태나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인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 보면 의회제는 직접민주주의의 단순한 대체물로 볼 수 없다. 즉, 그것은 근대 국가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된 제도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의회주의의 질적 우위를 강조하는 담론은 역사적으로 거듭 나타났다. 예를 들어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은 『영국 헌정론』(1876)에서 의회의 ‘교육적 기능’을 주장하고, 선량(選良)으로서의 의원은 국민 여론을 이끄는 역할을 갖는다고 말했다.25) 만약 대표에 의해 비로소 국민의 의지가 구성된다면, 국민과 대표자를 연결하고 대표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거’는, 그것이 어떤 제도를 취하든, 대표를 대표답게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본질적인 것은 아니고, 우연적으로 채택된 절차라고 간주되기까지도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의원이 (국민 전체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판단에만 따르는) ‘자유위임’에 근거하여 행동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선거구민의 의지와 이해에 종속되는) ‘명령위임’에 근거하는가 같은 친숙한 헌법학적 문제에는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은 근대 의회주의가 여전히 ‘대표적 공공성’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의례적·미학적인 계기를 통해 정당성을 산출해 왔다는 점이다.

근대의 의회는 담론적이라기보다는 종종 상징적인 의사소통의 장이 됐다.26) 즉, 그것은 의례적인 수사나 이미지를 매체로 하여 대표(=표상)을 제시한다는 성격도 갖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궁정의 전례가 주권의 절대성을 대표했다고 한다면, 의회에서 대표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인민이다. 그것은 단순한 국가의 통일이 아니라 국민의 통일을 대표한다. 즉, 거기서는 평등한 국민으로 이루어진 정치질서라는 것이 사람들의 눈앞에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국민 전체가 법권리상 혹은 경제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국민이 실제로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국민은 평등하다는 의제를 가시화시키는 것이 문제이며, 사실로서 국민이 대등하게 민주적 토의에 참가한다기보다는 그렇다고 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한 가지 예로, 근대의 의회건축에서 채택된 회의장의 공간배치를 들 수 있다.27) 그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지했음을 알 수 있다. 왜 (영국이라는 예외를 빼고) 많은 나라의 의회 본회의장은 반원형의 의식과 그것에 대면하는 연단 사이의 조합이라는 배치를 취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민혁명기에 유행한 신고전주의적 건축의 고대로의 회귀를 나타낼 뿐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반원형의 극장을 모방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 때 나온 의회건축 계획에서는, 국민 전체의 통일성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한 양식으로서, 의석을 완전히 원형으로 배치하는 것이 상당수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장된 이후 1798년부터 의사당이 된 파리의 부르봉궁전에서 볼 수 있듯이, 최종적으로는 그런 원형 플랜을 억누르고, 연단을 정면에서 보는 반원형의 의식이라는 배치가 보급된다. 이것은 단순한 기능적인 편리성 때문에 채택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원형의 의석에 앉는 것은 국민 각층으로 구성된 의원들이다. 거기서는 사회의 다양성이 가능한 한 충실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근대국가란 차이화를 수반하는 통일이다. 따라서 차이성과 동시에 인민의 통일성도 표현되어야 한다. 연설자가 선 연단이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즉, 연단은 왕의 죽음에 의해 공백이 된 국가의 중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제 각각의 연설자들은 (자신의 의석이 아니라) 그 연단에서 국민의 이름으로 연설한다. 그리고 의석의 의원들은 관중으로서, 무대 위의 연설자를 목격한다. 따라서 반원형의 의석과 연단의 조합은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지닌 국민국가를 상징하는 것에 다름없다. 그때마다 연설자에 의해 채워진 공허한 연단은 국가의 (부재의) 머리이며, 사회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의원들이 앉는 좌석은 그 몸통이다. 그런 한에서 의회는 이른바 공화국의 새로운 상징적 신체이다.

이런 왕의 정치적 신체의 유산은 근대 의회주의의 또 다른 요소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국민의회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주도 하에서 선언된 의원의 인신의 불가침 원칙이 그렇다.28) 이른바 불체포특권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듯이, 과거의 절대 군주가 행하는 의원의 자의적인 체포를 방지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국민의 대표체(coprs représentatif)”에 대해서는 어떤 권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의 표현이며, 이런 한에서 대표로서의 국왕의 신체가 갖고 있던 불가침성의 흔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슈미트는 이 특권을 “의회가 가진 대표로서의 성격의 한 가지 귀결”29)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대외적인 대표로서의 외교관의 신체의 불가침성과도 닮은 것이며, 과거 왕의 신성성을 이어받은 것에 다름없다.

그렇다면 푸코처럼 왕정 하의 국왕의 신체와 똑같은 기능을 맡는 “공화국의 신체라는 것은 없다”,30) 혹은 르포르처럼 “민주주의 사회는 유기체적 전체성의 표상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로서, 신체 없는 사회로서 창설된다”31)고 진단하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의회제는 종종 절대왕권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 대표로서의 역할도 담지했다. 즉, 열린 장에서 투명한 논의를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는 어떤 정치질서도 이룩할 수 없는 무정형의 인민을 주권자로서 현전시킨다는 기능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사회적 이해의) 대리자로는 맡을 수 없는, 영광으로서의 대표 기능에 다름없다. 여기서 의회는 직접민주주의의 부득이 한 대용물에 머물지 않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은 결코 루소가 몽상했던 대표 없는 순수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여전히 자신에 관한 상징적 이미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의회주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토의의 공개성이라는 전제를 무조건 수긍할 수는 없다. 근대의 의회는 종종, 토의를 통한 합리적 결정에 의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국민의 대표라는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집행권에 대립해왔다. 독일 통일 후의 제정기에서 독일 제국의회는 그 한 가지 예를 이루고 있다.32) 프랑스의 1791년 헌법에서 볼 수 있는 이원대표의 문제가 계속 남아 있던 19세기 독일에서 제국의회는 집행권을 가진 또 다른 대표인 황제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신문·미디어와의 협력 아래서 스스로를 국민 대표로서 상징화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을 시도하게 됐다. 즉, 여기서 공개성이란 이미지 전략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로서의 정당성은 ‘담론적’이 아니라 ‘미적’ 공개성을 통해 조달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국가에 대한 경제·사회적 세력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의원이 단순한 이익대리가 됨에 따라, 대표로서의 의회의 역할은 변질된다. 그리고 의회의 결정이 점점 더 비밀스런 이해 절충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가운데, ‘미적’이든 ‘담론적’이든, 대표로서의 의회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될 터이다. 슈미트가 개탄하는 바에 따르면, 당대의 의회는 “보이지 않는 권력 보유자의 사무소 내지 위원회로 들어가는 하나의 커다란 옆문(Antichambre)”33)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적 이익집단에 의한 토론의 이념의 이런 타락은 원래 근대 의회주의가 토론 절차 자체의 공개성을 반드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는 간주하지 않았던 것의 내재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모든 결정과정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인민에게 열린 형태로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가라는 문제보다도, 얼마나 결정을 상징적·의례적으로 정당화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 종종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의 공개성은 결코 계몽의 이념이 상정하듯이, 이성적인 비판의 심급이 될 수 있는 정치의 근본원칙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원칙이 아니라 단순한 수단, 즉 대중조작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정당화의 도구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과정을 정치원릭 비밀에서 공개로 이행하는 것이락 파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비밀의 실천뿐 아니라 공개성조차도 통치의 에코노미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과정으로 간주할 수 없을까?34) 즉, 통치는 더 이상 기밀과 음모를 조종함으로써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보를 공개하다는 것이 종종 효율적인 정치 운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근대의 통치는 그것을 수단으로 이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공개성의 유용성인 것이다. 여기서 공개성은 비밀과 마찬가지로, 통치를 위한 전술적 장치나 다름없다. 근대정치에서 공개성의 원칙이 점점 중요하다고 간주되기에 이른 것은, 사실상 이런 통치 메커니즘의 재편성의 징후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끝)



1) [옮긴이] 공공권(公共圈)은 공론장으로 옮긴다.


2) [옮긴이] 일본의 경우 의회제와 의회주의, 민주제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같이 쓴다. 이때 둘의 차이는 제도적 측면을 더 강조하느냐 이념이나 원리를 더 강조하느냐에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둘 다를 의미하기 위해 데모크라시라고 음차하기도 한다.


3) 대표 개념에 관해서 참조한 것은 Hasso Hofmann, Repräsentation, Berlin 1974: Adalberr Podlech, «Repräsentation», in : Otto Brunner et al. (Hg.) Geschichtliche Grndbegriffe, Bd5, Stutgart 1984, S.509-547. ; 칼 슈미트, 『憲法論』, 阿部間総裁/村上義弘 訳, みすず書房, 1974년, 제16장 및 24장, 나아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真理と方法I』, 轡田収ほか 訳, 法政大学出版局, 1986년, 205, 282頁.


4) [옮긴이] 정통화, 정통성은 각각 정당화, 정당성으로 옮긴다.


5)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364頁.


6) Vgl. Hofmann, Repräsentation, a.a.O., S.15-37.


7) 루소, 『연극에 관해 :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演劇について ダランベールへの手紙)』, 今野一雄 訳, 岩波文庫, 1979, 56頁.


8) Ibid., 42頁.


9) Ibid., 224頁.


10) 루소, 『사회계약론(社会契約論)』, 桑原武夫/前川貞次郎 訳, 岩波文庫, 1954, 42頁(인용은 원문을 참조하여 수정).


11) Ibid., 133頁.


12)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スペクタクルの社会)』, 木下誠 訳, ちくま学芸文庫, 2003, 14頁.


13) 미셸 풐코, 『감시와 처벌[監獄の誕生]』, 田村倣 訳, 新潮社, 1977, 39頁.


14) Ibid., 52頁. (번역 수정).


15) Ibid., 56頁.


16) Ibid., 14頁.


17) 길로틴의 도입이 공개처형에 초래한 변화에 관해서는 ドリンダ・ウートラム, 『フランス革命と身体』, 高木勇夫 訳, 平凡社, 1993, 7장 참조. Dorinda Outram, The Body and the French Revolution. Sex, Class and Political Culture, Yale University Press, 1989.


18) Ibid., 184頁.


19) Ibid., 193頁.


20) Ibid., 6장 참조.


21) 이 논쟁에 관해서는 Philip Manow, Im Schatn des Königs, Frankfurt a.M. 2008, S.97ff ; ウートラム, 『フランス革命と身体』, 앞의 책, 187-190頁[Dorinda Outram, The Body and the French Revolution. Sex, Class and Political Culture, Yale University Press, 1989] 및 ダニエル・アラス, 『ギロチンと恐怖の幻想』, 野口雄司 訳, 福武書店, 1989, 66-89頁[Daniel Arasse, La Guillotine et l’Imaginaire de la terreur, Paris : Flammarion, 1987.] 참조.


22)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의 성찰(フランス革命の省察)』, 半漆孝麿 訳, みすず書房, 1978, 99頁.


23) Zit, nach : Podlech, »Repräsentation«, a.a.O., S.526. 이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 개념의 의미에 관해 논하는 것은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246-247頁. ; 이 밖에도 Hofmann, Repräsentation, Gallimard 1998, p.27-63.


24) Cité par Rossanvallon, Le people introuvable, ibid. p.38.


25) 월터 배젓, 「영국헌정론(イギリス憲政論)」, 『世界の名著60 バジョット, ラスキ, マッキーヴァー』, 辻淸明責任編集, 中央公論新社, 1970, 172, 201-204頁.


26) 근대의 의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미학적 표상 전략에 관해서는 최근 급속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Vgl.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Andreas Schulz / Andreas Wirsching (Hg.), Parlamentarische Kulturen in Europa. Das Parlament als Kommunikationsraum, Berlin 2012; Jörg Feuchter / Johannes Helmarth (Hg.), Parlamentarische Kulturen vom Mittelater bis in die Moderne, Reden-Räume-Bilder, Berlin 2013.


27)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S.16-56. ; Philip Manow, »Kuppel, Rostra, Sitzordnung-das architektorische Bilderprogramm moderner Parlamente«, in : Feuchter / Helmrath, Parlamentarische Kulturen vom Mittelalter bis in die Moderne, a.a.O., S.115-129.


28)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S.64-75.


29)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336頁.


30) 미셸 푸코, 「권력과 신체(権力と身体)」, 中澤信一 訳, 『미셸 푸코 사고집성5(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V)』, 筑摩書房, 2000, 373頁.


31) 클로드 르포르, 「민주주의라는 문제(民主主義という問題)」, 本郷均 訳, 『現代思想』 23권 12호, 1995, 49頁.


32) 제정기의 독일 제국의회에 의한 자기 상징화의 실천들에 관해서는 Andreas Biefang, Die andere Seite der Macht : Reichstag und Offentlichkeit im »System Bismark«, 1971-1890, Düsseldorf 2009.


33) 칼 슈미트, 『현대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現代議会主義の精神史的地位)』, 稲葉素之 訳, みすず書房, 2000, 11頁(번역 수정).


34) Cf. Michel Senellart, Les arts de gouvener, Seuil, 1995, pp.279-284.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