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클로드 르포르의 낡음과 새로움

解説 クロード・ルフォールのさとしさ

토나키 요테츠(渡名喜庸哲)

 

* 아래에 번역한 것은 클로드 르포르의 책 <민주주의의 발명>의 일역자 토나키 요테츠가 이 번역서에 붙인 해설이다. 평이한 내용도 있고 정보도 있기에 번역해둔다. 이 파일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L’invention démocratique. Les limites de la domination totalitair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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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번역한 것은 한 권의 낡은 책이다.

낡았다고 한 것은 단순히 이미 최초로 출판된 때로부터 3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다. 이 책 전체에서 금세 읽을 수 있듯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직 소련이 세계에 대해 패권 중 하나를 쥐고, 동유럽의 민주화의 다양한 운동들을 억압했던 시대의 사건이다. 냉전 붕괴 이후, 이런 틀 자체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된 오늘날에서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 있다.

이렇게 낡고, 게다가 읽기 쉽다고 얘기할 수 없는 문체로 써진 책을 굳이 번역한 까닭은, 르포르가 지닌 뻣뻣하고 느릿한 충격을 전하는 이론적 분석이, 오늘날이라는 시대에도 명확하게 손에 닿을 정도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술하듯이, 이 책은 이후 현대 프랑스의 정치철학의 한 가지 조류를 창시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런 영향관계만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한쪽의 전체주의라는 말이 마땅히 있어야 할 학문적 검토를 받지 못하고, 억압적으로 보이는 체제라면 어느 체제에나 적용할 수 있는 제멋대로 사용하기 좋은 형용사나 비판을 위한 욕설로 격하되고, 다른 한편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마치 다수결이나 숫자 세기의 표대결 게임과 동의어인 양 회자되고, 현실에서 작동하는 의사결정 과정(르포르라면 권력자본지식이 융합된 과정이라고 말할 것이다)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는 시대에, ‘민주주의전체주의에 대해 지금도 색이 바래지지 않은 근원적인 고찰이 르포르에게는 있을 터이다.

얼핏 보면, 소련형 혹은 프랑스형 공산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하는 르포르의 손놀림은 자유주의’, 더 나아가 보수주의에 의한 공산주의 비판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이 책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전체주의에 대한 맹목을 비판하는 형태로, 르포르 나름의 전체주의 비판을 제시하려고 했기 때문에, 르포르가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보이기 어렵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한 반공서’로 읽는 것은 완전한 오독이다. 맑스를 공부하면서도 이른바 맑스주의와는 선을 긋는 르포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양식이나 지배양식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하여, 이로부터의 해방을 기치로 창설됐을 공산주의를 자칭하는 사회에서조차도 왜 똑같은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조직화된 지배양식이 발견되는가, 그리고 좌파를 자칭해온 지식인들은 왜 이것을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을 일관되게 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르포르가 문제 삼는 것은 공산주의자유주의라는 구도 자체가 더 이상 효력을 보유하지 않는 포스트공산주의’(iv)의 사회라는 것을 잊지 말자. 어쩌면 전체주의공산주의가 죽은 후에도 다른 형태로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전체주의민주주의의 둘 다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는 불가분의 것이라고 한다면, ‘전체주의의 모습을 한계까지 추적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그 자체의 의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당분간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사회는 정말로 그렇게 부르기에 알맞은가? 원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런 물음을 계속 제기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르포르의 딱딱하고 둔탁한 충격은 확실히 전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클로드 르포르의 저작과 경력

클로드 르포르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La Brèche, avec Edgar Morin et Jean-Marc Coudray, Paris, Fayard, 1968/2008〔『学生コミューン西川一郎訳合同出版一九六九年

Éléments d’une critique de la bureaucratique, Genève, Droz, 1971/Paris, Gallimard, 1979〔『官僚制批判諸要素未邦訳

Le Travail de l’oeuvre Machiavel, Paris, Gallimard, 1972〔『マキァヴェッリ作品研究未邦訳

Un homme en trop. Essai sur « L’Archipel du Goulag », Paris, Seuil, 1975〔『余分人間──『収容所群島をめぐる考察宇京頼三訳未来社一九九一年

Sur une colonne absente. Écrits autour de Merleau-Ponty, Paris, Gallimard, 1978.〔『不在──メルロ= ポンティをめぐって未邦訳

Les Formes de l’histoire, Paris, Gallimard, 1978〔『歴史諸形象未邦訳

L’invention démocratique. Les limites de la domination totalitaire, Paris, Fayard, 1981/1994.本書

Essais sur le politique (XIXe-XXe sièle), Paris, Seuil, 1986.〔『政治的なものについての試論一九世紀世紀)』未邦訳〕 ->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Écrire à l’épreuve du politique, Paris, Calmann-Lévy, 1992/Paris, Pocket, 1995〔『エクリール──政治的なるものにえて宇京頼三訳法政大学出版局一九九五年

La Complication ── retour sur le communisme, Paris, Fayard, 1999.〔『錯綜──共産主義への回帰未邦訳

Le Temps présent. Écrits 1945-2005, Paris, Belin, 2007.〔『現在── 一九四五年〇〇五年未邦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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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많은 논문을 집필했다.[각주:1] 또한 서문가序文家로서의 모습도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의 프랑스어 번역(Flammarion, 1985), 에드가르 키네의 『혁명(Belin, 1987), 단테의 『제정론(帝政論)의 프랑스어 번역(Belin, 1993)이나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필두로 하는 많은 저작에 서문을 붙였다.

 

클로드 르포드는 1924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1941년에 파리의 카르노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거기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철학자 메를로-퐁티와 만난다. 메를로-퐁티의 영향으로 맑스에 눈을 뜬 르포르이지만, 서서히 트로츠키주의에 접근한다. 그렇다고 해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설에 포함된 결정론적, 환원주의적 생각에 대해서는 이미 이 시기부터 거부감을 깨닫고, 소련과 공산당에 대해 위화감을 품는다. 전후 유네스코에서 근무한 후, 1949년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전후 곧바로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한 르포르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등과 함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라는 그룹을 설립하고,[각주:2] 동명의 잡지에서 이미 동구권의 관료주의적 지배양식에 대해 호된 비판을 던졌다. 50년대에 작성된 논문 중 주요한 것은, 이후 관료제 비판의 요소들역사의 형상들에 수록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던 공산주의에서도 훨씬 더 지배억압의 기구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카스토리아스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주류파가 자치또는 자율을 지향한 하나의 혁명정당으로서의 활동의 방향성을 탐색한 반면, 르포르는 그 어떤 조직화도 경직화하고 억압장치로 전환될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를 도저히 감추지 못했고, 1958년에 갈라선다. 맑스주의적인 문제계를 르포르 자신이 어떻게 빠져나갔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의 5장에서의 회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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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Merleau-Po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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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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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르포르는 두 개의 중요한 논쟁을 했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의 논집 인류학과 사회학(1950)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서문을 붙였는데, 이것에 대해 르포르는 51년에 『레 탕 모데른느(Les Temps Modernes)에 발표한 논문 교환과 인간 사이의 투쟁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해석에 (특히 상징의 지위를 둘러싸고) 반론을 가했다.[각주:3] 다른 한편, 르포르는 실존주의에 가담하지도 않는다. 사르트르의 52년의 논고 공산주의자와 평화에 대해 『레 탕 모데른느195389호에 맑스와 사르트르를 발표하고, 사르트르가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을 동일시한다며 비판을 서슴지 않고, 이 때문에 『레 탕 모데른느』와도 멀어지게 된다.[각주:4]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와의 이별은 르포르에게 정치활동보다 대학에서 연구자·교육자로서 집필을 통한 정치철학의 이론화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65년부터 71년에는 칸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했다. 거기서의 제자들로는 알랭 카이예, 마르셀 고셰, -피에르 르고프 등이 있다.

이른바 <685> 때에는, 옛 친구 에드가 모랭 및 카스토리아디스와 함께 곧바로 반응하고, 현재 진행형인 사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공저 685: 균열(일역본 제목은 학생코뮌)을 같은 해에 저술했다(이 책의 장-마르크 크드레이는 카스토리아디스의 가명이다). 혁명의 주체를 학생운동에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노동계급에만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제쳐놓고, 르포르는 학생반란에, 단지 대학 내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 대학으로 구현된 근대 산업사회 전반에 대한 재물음을 보고 있다. 동유럽의 민주화에 대해 논한 이 책에도 밑바탕에 깔린 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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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박사논문을 레이몽 아롱에게 제출하고, 국가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을 거쳐,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교수로 재직한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는 애드가 모랭과 함께 사회학·인류학·정치학의 영역횡단적 연구소”(현재의 에드가 모랭 연구소)를 지휘하고, 나중에 피에르 로장발롱과 함께 레이몽 아롱 정치학 연구소를 세운다. 1989년에 이 연구원을 퇴직한 후에도 정력적으로 집필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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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후의 르포르의 과제는, 1950년대부터의 관료제 비판의 작업에 의거하여, 후술하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출판을 필두로 하는 동시대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여분의 인간을 참조) 마키아벨리뿐 아니라 한나 아렌트 등의 정치철학의 성과를 끌어들여 전체주의개념을 정밀화하고, 거꾸로 그것과 대쌍이 되는 형태로 민주주의개념을 도출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 민주주의의 발명은 그런 일련의 작업의 성과에 다름없다.

그런데 모든 조직에 안주하기를 거부한 르포르에게 그때마다의 친구들과 더불어 발간하고, 열띤 논고를 모은 몇 호의 잡지를 간행하고는 또 다른 형태의 잡지로 이행하고 또 다시 새로운 친구들 특히 젊은 연구자들 과 새로운 잡지를 세운다는 단속적인 학술잡지를 통한 논의의 장이야말로 그의 주된 활동 무대였다. 앞서 언급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레 탕 모데른느이후에도, 68년에는, 현재는 현상학자로서 알려진 마르크 리실(이 책의 7장 참조) 등 브뤼셀자유대학의 학생이 중심이 되어 창간된 잡지 텍스처에 마르셀 고셰와 함께 참여하여 이 잡지의 편집에도 종사한다. 게다가 77년부터는 고셰와 더불어, ‘유토피아개념에 대한 사회사상사로 나중에 유명해진 미구엘 아방수르(Miguel Abensour) 등과 리브르를 창간한다(이 책의 1, 9장의 초출은 이 잡지이다). 이 잡지는 80년대까지 계속되지만, 부언하면, 리브르의 면면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와 함께 시도한 것이 에티엔 드 라 보에티의 재독해이다. 현재도 프랑스에서 읽히는 자발적 복종론의 파이요 사의 문고판에는 당시에 쓴 고셰와 아방수르가 연명한 서문과 클라스트르의 라 보에티론에 덧붙여, 르포르의 <일자>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곳곳에서도 보이는 <하나인 인민>에 대항하는 사상의 실마리를 라 보에티한테서 찾고 있는 것이다.[각주:5] 그 후 80년대에는 아방수르, 피에르 파셰, 니콜 로로 등과 새로운 잡지 과거/현재(Passé/Présent)를 창간하고, ‘개인이나 테러등을 테마로 특집을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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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드 라 보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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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아방수르(Miguel Abensour)

80년대에는 민주주의론, 혁명론에 덧붙여, 한나 아렌트에 대한 논고 등을 보탠 논집 정치적인 것에 관한 시론(19세기-20세기)을 저술했다. 이것은 본서와 나란히 르포르 정치철학의 이론적 고찰이 정리되어 있는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본서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면서 시사되고 있는 것에만 머물고 있는 중세적인 신학적 정치관의 현대적 잔존을 문제 삼는 중요 논문 신학-정치적인 것의 영속성?은 특필할 만하다.

이 시기의 르포르의 활동으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위와 같은 이론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1988년의 이른바 라쉬디[루시디] 사건을 겪으면서 프랑스에서의 살만 라쉬디[루시디] 옹호위원회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 라쉬디[루시디]론은 1992년 간행된 에크리르에 수록되어 일본어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지 오웰론이나 다른 한편으로 마키아벨리, 사드, 토크빌, 기조 등에 관한 논고도 수록되어 있고, 르포르의 사상적 영향관계나 동시대적 관심을 두루 살필 수 있다.

1999년 간행된 착종은 부제로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강조했지만, 물론 그때까지의 신랄한 공산주의 비판을 거친 말년의 변절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냉전 붕괴 이후 다시금 공산주의의 문제를 재검토한다는 계획 하에서 이와 관련된 논고가 정리되어 있다. 2007년의 현재 : 1945-2005은 그때까지 단행본에 수록되지 않은 논문을 중심으로 모은 선집(anthology)이다.

최후의 르포르는 췌장암을 앓았다. 파리 좌안 7구의 벡(Beck)가에 있는 5층짜리 자택에서, 엘리베이터가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오르내리기를 하고, 뤽상브르 공원에 나가 친구들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이 일과였던 것 같다. 전부터 친한 벗인 에드가 모랭이 뻔질나게 병문안을 한 보람도 없이, 2010103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의 장례식 때, 모랭은 르포르의 죽음을 앞에 둔 스토아학파 같은 고귀함을 증언하고, 그를 “그 어떤 진보주의적 환상에도 양보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사상가, 그리고 그래서 민주주의의 사상가를 그리워했다.[각주:6]

 

클로드 르포르를 어떻게 위치시킬까?

우노 시게키(宇野重規)는 현대 프랑스의 정치철학의 조류들을 개괄하는 저서 정치철학으로에서, 거기에는 세 가지 원류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레이몽 아롱으로 대표되는 우파 또는 반-맑스주의적 흐름이다. 둘째는 알튀세르 이후의 맑스주의적 사상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 장치비판이나 주체론이다. 그리고 셋째가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및 클로드 르포르 등처럼 맑스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맑스주의 비판을 거쳐 전체주의 비판에 이르는 조류라고 한다. 우노의 정리에 따르면, 그 후의 프랑스 정치철학은 알튀세르의 흐름에 속하는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뤽 낭시나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 등을 포함한 그룹, ‘68년 사상을 비판하는 소르본 계열의 알랭 르노나 뤽-페리 등의 그룹, 그리고 아롱 및 르포르의 영향을 받은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을 중심으로 한 그룹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고 한다.[각주:7]

이처럼 르포르는 80년대 이후 복권이 외쳐지는 프랑스 정치철학의 하나의 원류를 이루었는데,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르포르에 대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절친인 카스토리아디스에 대해서는 주요 저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도한 에구치 칸(江口幹) 씨가 쓴 평전이 있으나,[각주:8] 르포르에 대한 연구 논문은 매우 적다.[각주:9] 르포르가 경원시됐던 것은 그의 난해한 문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른바 정통파 맑스주의 사상은 물론, 실존주의에도, 구조주의에도 과감하게 논쟁을 걸고, 유행하고 있는 학파로의 귀속을 항상 거부했다는 독자적인 입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방금 80년대 이후 프랑스 정치철학복권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의의를 갖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돌이켜보면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1981년, 프랑스의 사상계는 꽤 커다란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미 50년대부터 스탈린비판과 폴란드의 폭동(이 책의 10) 및 헝가리 봉기(이 책의 8, 9) 등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68),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79) 등의 사건, 게다가 소련의 강제수용소 실태를 그린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 50년대 말부터 집필된 이 책이 출판된 것은 73년의 프랑스어 번역이 처음이었다 에 의해 소련 및 공산당을 근거의 하나로 삼았던 정당 및 사상의 틀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뚜렷한 조짐은 이 책의 11장에서 논하는 폴란드의 민주화에서 나타날 것이다. 물론 프랑스 정치의 겉 무대에서는 70년대부터 이미 프랑스 공산당이 유로코뮤니즘의 구호와 더불어 소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프랑스 사회당과 공동강령을 맺은 좌파연합을 실현시켰다(이 책의 4장 참조).

좌파연합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결국 81년의 미테랑 사회당 정권을 실현시켰지만, 아무튼 그것이 다양한 모순이나 균열을 숨기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미테랑 정권이 사회주의적 기업 국유화 노선으로부터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자유주의 노선으로 대전환을 보였던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상 면에서는 알튀세르의 맑스주의의 주축 중 하나였던 구조주의적 틀이 해체되고, 다양한 사상 조류가 생겨난다. 대체로 <685> 이후, <>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에 기초한 혁명이론에 무게를 둔 사상으로부터, <좌익 급진주의>라고 불리는 극좌파조직이나, 3세계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사상 등이 활짝 꽃피게 된다. 그 중에서,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얘기되는 앙드레 글뤽스만, 베르나르-앙리 레비 등 신철학(누벨 필로조피)”이라고 불리는 젊은 지식인들에 의한, 미디어용 전체주의 비판도 등장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더욱 광범위한 사상의 변동이 프랑스를 덮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치의 이름으로 경시됐던 종교윤리가 복권되는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예를 들어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일반적으로 인지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며, 유대사상뿐 아니라 기독교 쪽에서도 프랑스 현상학의 신학적 전회가 회자됐다. 그리고 정치철학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논해진 것도 역설적으로 이 시기이다. 그때까지 정치철학이라고 하면, 생산관계를 도외시한 부르주아 이론이라고 보이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나 구조주의의 퇴조에 의해, 한나 아렌트, 레오 스트라우스를 중심으로 한 영어권의 정치철학에 본격적인 주목이 모이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 공산주의는 물론 실존주의로도 구조주의로도, 더 나아가 자유주의로도 공화주의로도 스스로를 동일시하지 않고, 바로 난간[그 무엇에도 기댈 곳] 없는 사고를 실천한 르포르는, 1983년의 논문 민주주의라는 문제에서 정치철학의 부흥을 부르짖고,[각주:10]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이 부흥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각주:11] 르포르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는 많다. 맑스를 근본으로, 박사논문의 주제인 마키아벨리, 그리고 보에티, 미슐레, 토크빌 등 과거의 사상가, 게다가 메를로-퐁티뿐 아니라 레오 스트라우스, 한나 아렌트, 레이몽 아롱, 에른스트 칸토로비치 같은 동시대의 사상가들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르포르의 정치철학은 흔한 정치철학사또는 정치사상사로는 귀착하지 않는다. 제도로서의 정치(la politique)’와 그 배후에서 그 구체적인 현상형태를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을 구별하고, 후자의 모습을 철학적 관점에서 밝히려고 하는 스승 메를로-퐁티에게서 물려받은 정치적인 것의 현상학이라고도 말해야 할 자세를 바탕으로,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서쪽에도 동쪽에도 통저(通底)하는 현대의 정치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특히 관료제와 전체주의라는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도려내는 것,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를 자명시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비웃지도 않고, 그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는 것, 이른바 이런 비판적 사회철학이야말로 르포르가 시도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 자세 때문에 르포르는 그 어떤 유파도 구성하지 않았지만, 그 영향은 폭넓다.

앞서 인용한 우노(宇野)가 서술하는 것처럼, 르포르 자신이 소속했던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레이몽 아롱 연구소의 정치철학자에 대한 영향은 물론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특히 칸대학 시절의 제자인 마르셀 고셰에 의한, “근대의 탄생을 정치적인 것종교적인 것의 관계로 파악하는 최초의 주저 세계의 탈마술화세[네] 권짜리 대작민주주의의 도래는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을 신학정치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르포르의 관점을 확대 심화시킨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각주:12] 또한 마찬가지로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피에르 마냉이나 필립 레노 등에 의한, 특히 토크빌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의 재평가나, 피에르 로장발롱의 대표제개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사의 시도도 크게 말하면 똑같은 조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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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르포르의 영향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상사나 사상가 연구에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역사, 종교 등등 다양한 사회과학의 영역을 횡단하는 비판적 사회철학이라는 관점이야말로 르포르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고셰와 마찬가지로 칸대학에서 르포르에게 배운 알랭 카이예와 장-피에르 르고프의 사회학적 경향을 지닌 정치철학의 시도를 언급해야 한다. 특히 르포르로부터의 영향을 자인하는 카이예는 모스의 증여개념을 기축으로 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등등의 사회과학 전체를 내다보는 영역 횡단적인 관점 하에서 연구 그룹 “MAUSS(사회과학에서의 반공리주의 운동)”을 수립하고, 동명의 잡지를 무대로 다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현대의 경제주의나 의회제 민주주의에 통저하는 것으로서 공리주의적 이성을 비판적으로 독파한 카이예의 자세는 바로 르포르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3] 또한 르고프는 <685>의 사상의 비판적 총괄에서 출발하고, 르포르가 논하는 시대보다도 나중인 미테랑의 현대화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프랑스의 정치적·사상적 변동을 분석 대상으로 한다. 르포르 및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을 이론적 전거로 삼고, 매니지먼트적 사상이 기업이나 교육에 침투하는 온화한 야만이나 포스트전체주의시대에서의 전체주의그 자체의 변용된 모습을 그러내는 르고프의 작업 또한 르포르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각주:14]

위와 같은 직접적인 영향관계와는 별개로, 80년대 이후 프랑스의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사상적 고찰과 르포르 사이의 공명도 주목할 만하다. 이미 동시대부터, 특히 권력론이나 근대의 파악방식을 놓고 푸코와의 관계가 논해졌으며, 혹은 르포르가 말하는 근원적인 분열내지 항쟁, 리오타르에 있어서의 쟁론(le différand)’ 개념과의 가까움에 대해 주목되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리오타르도 또한 과거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멤버였다. 혹은 정신분석과의 관계도 없지 않다. 이 책의 5장은 정신분석가 르네 마조르를 중심으로 한 잡지 Constellations의 연구회에 초청됐을 때 발표된 것이다. 혹은 르포르에 있어서의 상징적인 것이라는 생각의 원류로서, 메를로-퐁티뿐 아니라 라캉을 찾아내며, 르포르가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인 것실재적인 것을 정치사상에 응용했다고 파악하고, 게다가 이로부터 최근의 급진민주주의에 이르는 논리를 보는 해석도 제시되고 있다.[각주:15] 정신분석가이기도 했던 카스토리아디스의 상상적인 것과의 관계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참고로 세포국가를 주제로 하는 Constellations의 같은 호에는 장-뤽 낭시와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적 패닉도 게재되어 있다.[각주:16] 또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에 대해서는 앞서 서술한 논문 민주주의라는 문제, 원래는 이 두 사람이 주최한 81년부터 82년에 걸친 정치적인 것의 후퇴를 주제로 한 연구회에서의 발표가 바탕이 됐다.[각주: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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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retrait du politiqu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nancy the retreat of the political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게다가 나중에 보듯이, 르포르의 정치철학의 근본에는 정치적인 것의 장소를 인민이나 군중같은 얼마간의 주체내지 실체에 의해 차지될 리가 없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장소”, “공허의 장소로서 파악하고, 거기에서의 사회/권력의 분할, 혹은 실재적인 것/상징적인 것의 근원적인 항쟁을 통해서 사회라는 것이 구현된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점에서 현대의 프랑스 사상에 공통되는 포스트정초주의의 흐름에 르포르를 위치시키고, 낭시, 알랭 바디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등과 관련시킬 수도 있을지 모른다.[각주:18] 다만 민주주의의 주체장소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예를 들어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바디우 등의 프랑스의 포스트 맑스주의적 사상가들과는 가까울 뿐만 아니라 거리도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가령 랑시에르는 주저 불화에서 이런 르포르에 있어서의 이런 미규정적인 장소로서의 인민내지 데모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점을 쟁점으로 했던 것이다.[각주:19]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실상형상화작품화’(, 제도화)로 회수되지 않는, ‘무한프락시스를 보고 있는 낭시의 생각은 오히려 르포르와의 가까움을 보여줄 것이다.[각주:20]

르포르에 관한 연구는, 프랑스어권은 물론이고,[각주:21] 영어권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번역 소개나 독해가 진행되고 있다. 1인자로는 르포르 저작의 영어번역에 붙인 해설 등으로 그 사상의 보급에 진력한 딕 하워드가 있다. 또한 버나드 플린의 클로드 르포르의 철학은 프랑스어로 번역될 정도로 빼어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각주:22] 뉴스쿨포소셜리서치는 르포르의 사후 곧바로 추모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공적을 칭송하고 있다.[각주:23] 프랑스에서는 20123월에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20166월에는 과거 르포르가 가르친 칸 근교의 현대출판자료연구소(IMEC)에서 르포르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La démocratie à l’œuvre. Autour de Claude Lefort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Passion du politique. La pensée de Claude Lefort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Cornelius Castoriadis et Claude Lefort: l'expérience démocratiqu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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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발명에 대해

이 책에는 원래 독립적 형태로 각종 매체에서 공표된 11장이 2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초출은 원주를 참조). 그래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초판에 대한 서문말미에서 말하듯이, 전체는 하나의 논의로 관통되고 있다.” 그것은 곧, “전체주의 국가는 민주주의에 비춰서만, 그리고 민주주의의 양의성에 기초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논의이다. 거기에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발명은 동쪽에서 온 온갖 이의제기, 온갖 반항이라고 간주되고,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369). 1부와 제2부의 표제를 각각 따오면, 전자가 전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전체주의 개념의 이론적인 검토가 이뤄지는 이론편이며, 후자는 헝가리나 폴란드에서 반소련적·반전체주의적 봉기를 이런 민주주의의 발명새로운 조짐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각 장의 내용에 대해서는 각각 첫머리에서 옮긴이의 요약을 붙여두었기에 자세한 것은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주 간단하게 전체의 흐름만 확인해두면, 1장과 2장이 가장 이론적인 장으로, 전자에서는 인권개념을 축으로 근대의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고찰이 이뤄지고, 후자에서는 바로 전체주의의 논리가 정면에서 논해지고 있다. 3장은 스탈린이라는 인물과 스탈린주의와의 관계, 4장은 70년대의 프랑스 공산당·사회당의 좌파연합, 5장에서는 르포르 자신이 과거 맑스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빼져나갔는가라는 구체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는데, 각 장의 후반부에서 전체주의의 개념 그 자체의 이론화가 시도되고 있으며, 서로 공명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2부에서는 6장에서 (주로 소비에트에서의) 반체제파의 문제, 7장에서 혁명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가 간결하게 논의된 후, 7장부터 9장에 걸쳐서 1956년의 헝가리 봉기(동란), 10장에서는 같은 해의 폴란드의 이른바 포즈난 폭동이라는, 스탈린 비판 이후의 반소련의 민중봉기가 다뤄진다. 11장은 같은 폴란드에서 80년대부터 연대노조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하에서는 전체주의 국가는 민주주의에 비춰서만, 그리고 민주주의의 양의성에 기초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르포르의 기본 테제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 그 개략을 확인해두자.

르포르는 다양한 표현으로 전체주의를 특징짓고자 하는데, 가장 열쇠가 되는 것은 <하나인 인민(Peuple-Un)>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첫째로, 르포르가 논적으로 삼은 기존의 공산주의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둘째로 르포르의 또 다른 열쇠 개념인 분할의 철폐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우선 곳곳에서 이뤄지는 르포르에 의한 기존 공산주의 비판의 요점은, 공산당부터 트로츠키주의자, 좌익급진주의자 등등에 이르기까지, 사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전체주의라는 현상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분명히 파시즘과 나치즘에는 비판을 향했지만, 싸워야 할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라고 하며, 소련에 대해 전체주의를 보려고 하는 비판은 자본주의에 이로울 뿐이라고 기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포르에 따르면, 그들의 전체주의에 대한 맹목은 사실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국가를 인민의 의지와 권력에 종속하는 하나의 국가로서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 아래에서 국가가 사회와 일체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바로 이 발상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은 국가와 사회라는 상이한 차원의 구별을 철폐했지만, ‘권력의 특이성을 깨닫지 못하고, 관료제에 대해서도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 특질을 분명히 밝힐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르포르에 따르면, 바로 이 점이야말로 전체주의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국가, 시민사회의 분할이 철폐되고, 하나의 신체를 이루듯이, 인민=프롤레타리아트로 융합한다는 생각이다. 5장의 제목이 적절하게 말하듯이, “신체의 일체성이야말로 문제이다(143). 이를 가장 선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2장 및 3장에서 인용되는 스탈린에 대한 트로츠키의 말이다(52, 99). 거기에서는 짐은 국가이다라고 말하는 루이 14세에게 나는 사회이다라고 말한 스탈린이 대치되어 있는데, 루이 14세의 시대는 아무리 절대왕정이었다고 해도, ‘사회의 부분이 그 외부에 남겨져 있었던 반면에, 스탈린의 전체주의에서는 <>을 매개로 하여 국가도 사회도 인민도 모든 것이 하나의 신체혹은 조직을 이루게 해서, <일자>로 환원된다.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반체제파는 이런 사회의 외부에 추방해야 할 <타자>, 신체의 건전한 일체성을 위협하는 기생자라고 지목된다. <하나인 인민>인 전체주의에 있어서는 내부에 분할이나 항쟁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다양한 분할이 철폐된 <하나인 인민>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추상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에서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할의 철폐란, 구체적으로는, 정치권력이 생산, 교육, 과학연구, 사법, 문화 등 본래 독립적이어야 할 시민사회의 각 영역에 침입한다는 사태를 동반하고 있다. 이런 영역들은, 비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각각 독립된 가치를 지니며, 그 나름대로 자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에서는, 정치적 차원, 경제적 차원, 법적 차원, 문화적 차원, 미적 차원, 과학적 차원, 교육적 차원 등의 분할까지도 철폐되고(르포르가 곳곳에서 말하는 <권력>, <>, <지식>이라는 것은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심급을 가리킨다), 법적으로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허용되는가, 학문적으로 무엇이 참인가, 교육기관에서 무엇이 가르쳐져야 하는가, 문화적으로 무엇이 옳다고 판단되는가 등등이 <하나인 인민>의 논리에 기초하여 결정되어 버린다 각각의 영역에 더 이상 독립된 판단을 내리는 심급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르포르는 이런 융합을 실질적으로 전담하는 관료조직의 작동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기업적 논리가 침투하고, 관료 조직이 금융계나 산업계로부터의 압력에 종속한다는 구조도 물론 시야에 넣고 있다는 것도 부언해두자. <권력>, <>, <지식>에는 물론 <자본>도 보태진다.

이처럼 르포르는 전체주의에서의 표상이나 상징의 작용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소비에트적인 지배양식의 현실을 간과하지 않고, 거기로부터 이론적인 개념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상징의 차원과 현실/실재의 차원을 구별한 뒤, 그 양자를 오가는 형태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논하려는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마지막 장에서 얘기되듯이,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현실/실재에 사회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그것을 악마화해 버리는 그 전능함을 천진난만하게 상정하는 것의 단적인 물구나무 세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르포르에게 전체주의에 의한 상징적인이해가 필요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실재에 있어서는 다양한 분열이나 항쟁이 존재하기 때문에, 균열’(221, 319)을 봐야 한다. 그리고 이 균열을 지켜보면서, 거기에서 민주주의의 발명조짐을 읽어내는 작업이, 헝가리나 폴란드의 대중봉기를 논하는 2부의 주제이다.

이런 현실[실재]적인 균열에 기초하여, 르포르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가? 르포르에 있어서, 민주주의 사회는 어느 정도까지는, 지금까지 봤던 전체주의 사회의 물구나무 세우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와 사회, 사회 내의 지배층과 피지배층뿐만 아니라, <권력>, <>, <지식> 등등의 각 차원도 분리해야 하는 사회이다. ,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인민에게 <권력>의 원천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외재적인 <>에 제약되어야 하며, <지식>도 독립된 장소를 갖고 이어야 한다고 간주된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는 인민(peuple)’ 그 자체가 <하나인 인민>에 대항하고 일체화를 거부하고, 내부에 균열이나 항쟁을 들여온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르포르가 이따금 이의제기권리요구를 언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각각의 인민은 스스로의 권리에 기초하여, 혹은 현실/실재로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을 향해, ‘인민그 자체가 쥐고 있다고 하는 <권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 보면, ‘인민은 항상 완전한 일체를 달성하는 것이 없으며, 말하자면, “인민의 동일성은 끊임없이 물음에 부쳐진다”(150). 민주주의 사회가 내부인 이타성의 시련을 겪는다고 얘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129).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사회와 사회 그 자체의 분리로부터 새로운 사회가 끊임없이 산출되는 것이다.

참고로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조짐이 헝가리나 폴란드의 민중봉기에서 찾아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그런 예외적인 사태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르포르가 보통선거의 상징적 의미를 바로 이 지점에서 찾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 보통선거는 인민의 의지의 발현이며 새로운 사회조직의 정초인 동시에, 일체적인 것이라고 상정된 인민이 개별적인 수로 세어질 수 있는 단위로 변환되고”, 사회의 해체가 모방되는 계기라는 것이다(122-123). “수가 일체성을 해체하고, 동일성을 무화한다고도 얘기된다(149). 여기에 있는 것은 보통선거를 통한 이의제기라는 현실주의적 지적이 아니다. 오히려 보통선거를 통해 바로 사회라는 장소가 결코 일체화할 수 없는 항쟁의 장소로서 드러난다는 그 상징적인 작용이 문제인 것이다. 르포르가 사용하지 않는 이미지를 굳이 원용한다면,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속표지에 그려진 괴수 리바이어던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군중이, 개개의 다수의 군중으로서 가시화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각주:24]

헌데, 그렇다고 한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인민에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권력이란 어떤 장소를 갖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그것은 인민이 스스로를 물으면서 새로운 사회를 산출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누구의 것도 아니다”(57). 민주주의에서의 권력은 공허한 장소(lieu vide)”, “정의상 점유할 수 없는 상징적인 장소이다(91). 참고로 르포르는 권력, 인민이 자율 혹은 자주관리를 위해 기피해야 할 것으로도, 똑같은 목적을 위해 탈취해야 할 것으로도 파악하지 않는다. 르포르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곳곳에서 얘기되듯이, 사회 공간을 질서화하고, 그것에 형태를 주고, ‘형상화또는 제도화하는 차원이다. ‘권력이 어떤 방식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형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하나인 인민>에 있어서의 <권력>, <>, <지식>의 융합으로서의 전체주의에 대해, “공허한 장소에 있어서의 다수의 인민의 내적 항쟁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대치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단순한 이항대립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다. , 단순히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항쟁적 민주주의의 실천으로의 유혹이 르포르의 최종 목표인 것은 아니며, 20세기의 정치경험에 대한 사회학적 관찰에 기초한 서술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권력의 장소를 둘러싼, 정치사상사적인 이해가 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지적해둔다.

문제는 1장이 다루고 있듯이, 근대 민주주의의 도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점에 있다. 르포르는 이것을 중세 봉건제로부터의 해방으로서 파악하는 것도, 혹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주체화의 전단계로서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세의 신학정치적인 정치체로부터의 모종의 연장선상에서 근대민주주의의 도래를 파악하고, 그 위에서 양자의 차이를 봄으로써, 더욱이 이로부터의 전체주의로의 변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5장에서 상술되듯이, 이 논의는,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가지 신체론에 근거하고 있다.[각주:25] 근대 이전까지는, 주권자로서의 왕은,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구체저인 신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cum)로 이어지는 초월적 질서를 반영한 정치적인 신체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이 구상화된 외재적·초월적 질서야말로, 하나의 국가의 일체성을 떠받쳤던 것이다. 이에 대해 르포르는 근대 민주주의 혁명의 의의가, 왕의 신체가 파괴된다, 혹은 지금까지 초월적인 질서와 세속적인 질서를 연결했던 머리가 잘려짐으로써, 그때까지 하나의 신체를 이루었던 국가가 탈신체화(désincorporation)’한 점에서 본다(24, 149). 이런 외재적·초월적 질서 간단하게 말하면 <>의 질서 야말로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원천이며, <권력>, <>, <지식> 등 다양한 심급을 묶었지만, 이 연결이 해소되고, 각각의 심급이 독립해가는 과정이 탈착종화(désintrication)”이다(25). 근대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이런 탈신체화·탈착종화야말로, 앞에서 본 권력공허한 장소를 낳게 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권력>의 원천 내지 근거를 지금까지처럼 외재적·초월적인 질서에서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근대 민주주의 사회란 권력, , 지식이 근본적인 미규정성에 노출된 사회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자신 속에 양의성또는 모순을 본질적으로 품고 있다. 권력의 장소는 이제 외재적 원천을 갖지 않고, “누구의 것도 아닌”, “공허한 장소이기 때문에, 새로운 원천은 인민자신 속에서 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공허한 장소에, 현실적인 실체라고 상정된 대문자 <인민>삽입되고, 바로 그것이 권력의 주체라고 간주되자마자, 그 사회는 <하나인 인민>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를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은, 내부인 타자를 대문자의 <타자>화하고, 이것을 외부의 혹은 기생자로서 배제할 것이다). 이 점에서야말로 전체주의는 민주주의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의 이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는 동시에, 그 이행을 방해하기 위한 이의제기, 권리요구 등 내적 항쟁의 실천의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 요구해야 하는 동시에, <하나인 신체>로서 응고되고, 전체주의로 전화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항상 내적 항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다수화시키고, 스스로를 재창출=재발명(réinventer)필요가 있는 것이다(369).

 

위와 같이, 약간은 고풍스러운 대상을 다루고, 복잡한 논리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시도가 어떤 것인지, 그 현실[실재]적 및 상징적 작용을 철저하게 캐묻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것의 윤곽을 밝히려고 하는 기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초판 간행 당시부터 30년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대상도, 전제하고 있는 지적 틀도, 현재에서 보면 오래됐음을 느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겨우 30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망각하기에는 충분히 길지만, 잊힌 것이 되살아나기에는 적당한 세월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눈앞에 있던 것은 과연 민주주의였는가? 만일 민주주의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면, ‘전체주의는 형태를 바꿔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물음을 생각하기 위해 약간 관점을 과거로 물리는 것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도 결코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

 

 

  1. 일본어로 번역된 주된 논문으로는 다음이 있다. 「民主主義という問題」(本郷均 訳, 『現代思想』, 23巻 12号, 1995年)(『政治的なものについての試論(一九世紀―二〇世紀)』 수록), 「人権と政治」(松浦寿夫 訳, 『現代思想』, 17巻 12号, 1989年 ; 18巻 4号, 1990年(이 책에 수록), 「デモクラシーの社会学のために」(竹本研史 訳, 『アナール 一九二九―二〇一〇』, 第3巻, 藤原書店, 2013年). [본문으로]
  2. 그 중 카스토리아디스의 논문을 모은 것은 이미 일본어 번역이 있다. 『社会主義か野蛮か』(江口幹 訳, 法政大学出版局, 1990年). [본문으로]
  3. C. Lefort, « L’échange et la lutte des hommes », Les Temps modernes, nº64, 1951.(『歴史の諸形象』 수록). [본문으로]
  4. 일련의 논쟁은 다음의 일본어 번역에서 읽을 수 있다. サルトル, ルフォール, 『マルクス主義論争』, 白井健三郎 訳, ダヴィッド社, 1955年. [본문으로]
  5. E. de la Boétie, Le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 Paris, Payot, 1976. [본문으로]
  6. E. Morin, « Claude Lefort(1924 -2010). Avec Lefort », Hermès, La revue, no. 59, 2011. [본문으로]
  7. 宇野重規, 『政治哲学へ──現代フランスとの対話』, 東京大学出版会, 2004年, 48頁 이하. [본문으로]
  8. 江口幹, 『疎外から自治へ──評伝カストリアディス』, 筑摩書房, 1988年. [본문으로]
  9. 일본어로 읽을 수 있는 르포르에 대한 문헌은 많지 않으나, 특히 エンツォ・トラヴェルソ의 훌륭한 책인 『全体主義』(平凡社新書, 2010年)의 관련된 부분은 유익하다. 또한 佐々木允臣 씨가 법학(특히 인권론) 분야로부터 일관되게 르포르를 논하는 것은 특필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佐々木允臣, 『自律的社会と人権』, 文理閣, 1998年을 참조. 이 밖에도 松葉祥一, 「民主主義の両義性──クロード・ルフォールと「政治哲学」の可能性」(『現代思想』, 23巻 12号, 1995年) 및 宇野重規, 「メルロ=ポンティ/ルフォール 身体論から政治哲学へ」(『現代思想』, 36巻 16号, 2008年)도 참조. [본문으로]
  10. 「民主主義という問題」, 일역본 앞의 논문, 40頁. [본문으로]
  11. 프랑스의 학술지 『정치와 사회』의 2003년의 “프랑스에서의 정치철학의 회귀”를 주제로 한 특집호에서 편집자들은 르포르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G. Labelle et D. Tanguay(eds), « Le retour de la philosophie politique en France », Politique et société vol. 22, no. 3, 2003. [본문으로]
  12. M. Gauchet, Le Désenchantement du monde. Une histoire politique de la religion, Gallimard, Paris, 1985 ; L’avènement de la démocratie, Gallimard, t. 1 , t. 2, 2007, t. 3, 2010. 이하도 참조. マルセル・ゴーシェ, 『民主主義と宗教』, 伊達聖伸・藤田尚志 訳, トランスビュー, 2010年. [본문으로]
  13. アラン・カイエ, 『功利的理性批判──民主主義・贈与・共同体』(藤岡俊博 訳, 以文社, 2011年)을 참조. [본문으로]
  14. ジャン=ピエール・ルゴフ, 『ポスト全体主義の民主主義』(渡名喜庸哲・中村督 訳, 青灯社, 2011年)을 참조. 또 최근에는 남프랑스의 한 마을로부터의 정점 관측에 의해, 20세기의 프랑스 사회 전체의 변형을 묘사하고 있다. 『プロヴァンスの村の終焉』(伊藤直 訳, 青灯社, 2015年)을 참조. [본문으로]
  15. W. Breckman, Adventures of the symbolic : post-Marxism and radical democrac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 [본문으로]
  16. 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 フィリップ・ラクー=ラバルト, 「政治的パニック」, 柿並良佑 訳, 『思想』, 岩波書店, 1065号, 2013年. [본문으로]
  17. P. Lacoue-Labarthe, J.-L. Nancy(dir.), Le retrait du politique, Galilée, 1983. [본문으로]
  18. O. Marchart, Political Difference in Nancy, Lefort, Badiou and Laclau,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 [본문으로]
  19. ジャック・ランシエール, 『不和あるいは了解なき了解──政治の哲学は可能か』, 松葉祥一 dhl 訳, インスクリプト, 2005年, 167頁. [본문으로]
  20. 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 「民主主義の実相」, 『フクシマの後で』, 渡名喜庸哲 訳, 以文社, 2012年. [본문으로]
  21. 특히 다음이 중요하다. C. Habib et C. Mouchard, La démocratie à l’œuvre. Autour de Claude Lefort, Éditions Esprit, 1993 ; H. Poltier, Passion du politique. La pensée de Claude Lefort, Genève, Labors et Fides, 1998 ; N. Poirier(éd.), Cornelius Castoriadis et Claude Lefort: l’éxpérience démocratique, Le Bord de l’eau, 2015. [본문으로]
  22. B. Flynn, The Philosophy of Claude Lefort,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5. [본문으로]
  23. 그 기록은 우선 정치철학계의 학술지에 게재되고(Constellations, vol. 19, no. 1, 2012), 더 나아가 다음의 증보판으로 출간됐다. M. Plot(ed.), Claude Lefort. Thinker of the Political, Palgrave Macmillan, 2013. [본문으로]
  24.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ジョルジョ・アガンベン, 『スタシス──政治的パラダイムとしての内戦』(高桑和巳 訳, 青土社, 2016年)을 참조. [본문으로]
  25. エルンスト・カントーロヴィチ, 『王の二つの身体』, 小林公 訳, ちくま学芸文庫, 2003年.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년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Derridative)


デリダにおける贈与と交換(Derridative)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대린 테네브(Darin Tenev)

(일역 : 横田祐美子, 松田智裕, 亀井大輔)


20012-511-10 -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 한국어.pdf


20012-511-10 -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pdf




 나는 이 텍스트에서, 데리다의 증여〔gift〕와 주기〔giving〕 개념을, 『시간을 주다』1)를 길잡이 삼아 간결한 방식으로 밝히고 싶다. 빽빽하고 너무 짧은 논고에는 리스크가 있고, 최소한의 리스크는 그 불완전함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악폐는, 본고의 경우에는 심각한 위협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증여의 문제계는 일련의 단어나 개념 ― 그 주위에서 데리다의 사고가 움직이고, 탈구축을 가동시키는 단어나 개념 ― 과 직접 관계하기 때문이다(‘단어’라는 말과 ‘개념’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이 단어들을 사용하기로 한다). 내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쓰여진 말(에크리튀르), 흔적, 산종, 차연, 탈고유화, 잔항残抗,2) 긴박구조, 일반적 에코노미〔=일반경제〕, 비밀 등의 단어나 개념이다. 증여와 주기의 해명은, 동시에 이 개념들이나 단어 모두에 씨름하고, 이것들이 전개된 제반 텍스트들을 마지막까지 추적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쟁점이 되는 토픽과 직접 관련되지 않을 때에는, 본고를 위해 다른 텍스트를 참조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그치기로 한다.


1. 불가능한 증여

 데리다의 출발점이자 그의 고찰이 따르고 있는 기본선이기도 한 것은 증여의 아포리아이다. 증여의 경험은 아포리아적이다. 이것은 이 경험이 직면하는 주된 곤란에서 유래한다. 즉, 증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증여가 답례로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준다는 것을 가리킨다면, 그런 한에서 증여는 존재하지 않는다. 되돌아오는 것, 답례로서의 무엇, 반대 증여가 있다면, 증여는 더 이상 증여가 아니라 교환의 한 요소, 뭔가 다른 것을 위한 것이다. 증여가 증여라면, 그것은 회귀 없는 것이며, 회귀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 증여를 에코노미적 순환과 구별시키는 것은, 순환의 경우에는 모종의 상호성, 답례[상환/갚음], 회복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증여가 있다면, 증여의 여건(우리가 주는 것, 주어진 것, 주어진 물건으로서의, 혹은 증여 행위로서의 증여)는 주기(donnant)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 그것은 순환해서는 안 된다, 교환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교환과정, 출발점으로의 회귀라는 형태에서의 원의 순환운동으로 소진되어서는 안 된다S'il y a don, le donné du don (ce qu'on donne, ce qui est donné, le don comme chose donnée ou comme acte de donation) ne doit pas revenir au donnant …. Il ne doit pas circuler, il ne doit pas s'échanger, il ne doit en tout cas pas être épuisé, en tant que don, par le procès de l'échange, par le mouvement de la circulation du cercle dans la forme du retour au point de départ”(DT, 18-19/GT, 7).

 그러나 주기는 항상 모종의 원을 포함하며, 모종의 에코노미를 이끈다. 증여와 반대증여가 있다면, 반대증여는 증여로서의 증여를 상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환의 개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대증여가 없는 경우에도, 사태는 원칙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대증여가 있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의무, 부채, 책무, 감사도, 즉 ― 어떤 관계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증여를 증여라고 인식하는 것조차도 증여를 무효화하며, 증여를 받아들이는 행위도 증여를 상쇄한다. 왜냐하면 의무, 감사 등은 증여를 복원하고, 따라서 증여를 원 속에 집어넣기 때문이다. 증여를 받는 자는 누구도, “증여를 증여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요하다. “그가 증여를 증여라고 인식한다면, 증여가 그에게서 그것으로서 나타난다면, 선물〔=현재〕이 그에게서 선물로서 제시된다면〔=현재로서 현전한다면〕, 이 단순한 인식은 증여를 무효로 하는 데 충분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 자체의 장소에, 상징적 등가물을 돌려주기[반환하기, 갚기] 때문이다. … 증여의 단순한 규정(identification, 식별)은 증여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S'il le reconnaît comme don, si le don lui apparaît comme tel, si le présent lui est présent comme présent, cette simple reconnaissance suffit pour annuler le don. Pourquoi? parce qu'elle rend, à la place, disons, de la chose même, un équivalent symbolique. … La simple identification du don semble le détruire”(DT, 26/ GT, 13-14).

 타자가, 자신이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이해한 순간부터, 증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조해야 하는데, “비록 자신이 증여라고 지각하거나 인식한 증여를 거부하더라도Il n'y a plus de don dès que l'autre reçoit —- et même s'il refuse le don qu'il a perçu ou reconnu comme don”(DT, 27/ GT, 14) 그럴 것이다. (증여를 증여로서) 식별(identification, 규정)하는 작동[기능] 속에는 복원이 있기 때문이다. 증여가 증여로서의 그 의미를 유지한다면, 증여는 상실된다. 그리고 증여를 무효로 하는 것은 타자의 인식뿐만이 아니다. 증여는 주는 자에게서도 증여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증여라고 한다면, 상징적인 복원의 과정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내친 김에 말한다면, 상징적인 것은, 어떤 다른 이차적 수준에서 교환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것은 “교환과 부채의 질서를, 혹은 그 속에서는 증여가 무화되는 순환의 법이나 질서를 열고 구성하기ouvre et constitue l'ordre de l'échange et de la dette, la loi ou l'ordre de la circulation où s'annule le don”(DT, 26/GT, 13) 때문이다. 예를 들어, 증여로서의 반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반지는 바로, 이러저러한 소재로 만들어진 이 둥근 대상이 아니다. 반지가 하나의 증여로서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그것이 저 특정한 기회에, 이 특정한 인물로부터, 저 특정한 인물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상징적인 것에 말려들어 있는 한에서만, 상징적 가치를 갖는 한에서만, 증여할 수 있다).

 이런 고찰에 의해, 증여의 불가능성이 밝혀지게 된다. 데리다의 말을 사용하면, “증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증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여가 타자에 의해 증여로서 지켜지거나 간주되고 있다면, 그 경우도 또한, 증여는 존재하지 않는다s'il n'y a pas de don, il n'y a pas de don, mais s'il y a don gardé ou regardé comme don par l'autre, il n'y a pas de don non plus”(DT, 27-28/GT, 15). 증여가 그 자체로서 규정(identification)된다면, 증여는 교환의 원 속에서, 일종의 에코노미 속에서 곧바로 소실된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도 증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증여를 받은 자에게서도(자신이 증여를 수취했음을 깨닫지 못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주는 자에게서도 (자신이 증여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증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적으로 증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고찰은 데리다의 증여에 대한 작업에 있어서의 출발점일 뿐이며, 이 출발점은 사고를 작동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고 『시간을 주다』의 에피그래프에 이어진 데리다의 첫 문장이 “불가능한 것에 의해 시작하자Commençons par l'impossible”(DT, 17/ GT, 6; 강조는 인용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증여의 불가능성이 사상가의 앞에 놓은 과제는 이 불가능성이 지닌 에코노미와 원 사이의 연접관계이다.


2. 원에 들어서기

 증여와 에코노미의 관계는 두 개의 원의 관계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두 개의 원의 관계란 아마, 아직도 순환적 관계, 두 개의 에코노미의 관계일 것이다. 그런 관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증여 ‘그 자체’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에코노미와 원 ― 그것은 존재하는 일체의 것이다(이것은 바로 원의 신화적 의미이다) ― 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증여는 있을 수 없는 잔여(reste)나 과잉‘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활동적인 잔여이다(데리다는 본래적인 능동성도 수동성도 아닌 이 특이한 활동성을 나타내기 위해 새로운 단어, 잔항残抗을 이용했다).3) 그리고 과잉은 증여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이다. “증여의 문제는 미리 과잉적이고 아프리오리하게 과도해진 그 본성에 관련되어 있다Le problème du don tient à sa nature d'avance excessive, a priori exagérée”(DT, 56/GT, 38). 그런데도 과잉은 원 그 자체를 구성한다. 과잉은 “원을 야기하고 그것을 끝없이 회전시킨다. 그리고 그 운동을, 즉 원과 환이 결코 포함할 수도 무화할 수도 없는 운동을 그것에 주는 것이다entraîne le cercle, le fait tourner sans fin, lui donne son mouvement, un mouvement que le cercle et l'anneau ne peuvent jamais comprendre ni annuler”(DT, 54/GT, 37).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증여의 과잉적 측면을 다루기로 하고, 나머지나 잔여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증여의 과잉성이란, 어떤 의미에서, 원과, 원이라는 관점에서 생각될 수 없으나, 그러나 원과는 무관하지 않은 것, 즉 증여 ‘그 자체’와의 결부를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 과잉[초과]

 1960년대 이후, 데리다는 과잉[초과]이라는 관념에 관심을 품고, 『에크리튀르와 차이』에 수록된 바타이유에 대한 텍스트에서 이것을 주제적으로 논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과잉이 직접적으로 에코노미의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4) 바타이유와 데리다에게서 과잉이란 순수한 소진(dépense[지출])이며, 그것은 긍정성에 대립하지 않는 부정성이다. 왜냐하면 긍정성에 대립하는 부정성이라고 하게 되면, 부정성은 긍정성에 종속되며, 변증법의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변증법의 지배력 속에서는, 부정성은 의미나 진리, 가치에 결부되며, 자본화될 것이다. 만약 소진[지출]이 절대적이라면, 그것은 그 어떤 형태에 있어서도 전혀 유보되어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을 잃고,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 의미를 잃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절대적인 소진[지출], 전적인(tout) 상실을, 바타이유는 ‘지고성’이라 부른다. 데리다는 “지고성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La souveraineté est l'impossible, elle n'est donc pas, elle est5)고 쓰고, 한편으로 이렇게 이해된 지고성과 다른 한편으로 증여 사이의 유사를 우리에게 언뜻 보여준다. 하지만 만사를 제쳐놓더라도, 우리는 전적인 상실에 접근하고, 그 상실에 접촉된다. 한정경제가 순환과 원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순수한 소진[지출]과 관련될 그때, 우리는 일반경제와 관련된다. 왜냐하면 일반경제란 “의미의 상실과의 관계”이며,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 그것에 접촉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정경제는 “대상의 의미 및 대상을 구성하는 가치 … 에 제한되어” 있다.6) 그 덕분에 우리는 물건[物]의 “상품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한정경제는 물건을, 미리 가치부여된 것, 뭔가를 위한 것, 이러저러한 것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단적으로 말하면 물건의 의미로서 가리킨다.7)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해서, 한정경제는 (다른 무엇이든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선) 의미의 순환 속에 물건을 포함시킬 것이다. 그것은 물건을 지식에 종속시킨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물건은 의미의 순환에 의해 끊임없이 고유화(재고유화)된다. 다른 한편으로, 일반경제는 미지(未知)의 것과 기지(旣知)의 것, 또는 알려질 수 있는 것(통상적인 태도에 있어서 우리는 미지의 것에 의한 기지의 것의 고유화를 쉽게 분간할 수 있다)의 방향지어진 관계를 반전시키고, 이제 “기지의 것이 미지의 것에 관계되고, 의미가 비-의미에 관계되는 것이다Le connu est rapporté à l'inconnu, le sens au non-sens.”8) 이처럼 한정경제는 일반경제 안에 기입된 것으로서 노출될 것이다. 일반경제는, 지식의 지평이나 의미의 형상에 강요함으로써 “그것들을, 기반이 아니라 소진이라는 바닥-없는 것에로, 의미의 텔로스가 아니라 가치의 무한정한 파괴에 관련시키도록 만들어내는 것이다Celle-ci les plie à se rapporter non pas au fondement mais au sans-fond de la dépense, non pas au teks du sens mais à la destruction indéfinie de la valeur.”9) 따라서 한정경제가 재생산에 그치는 한편, 일반경제는 “절대적인 생산 및 파괴La production et la destruction absolues10)를 계산에 넣는다. 하지만 일반경제가, 순수한 소진이 무한한 의미로서 다시 고유화되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즉 최후의 재고유화에 대한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는 한편으로, 무한한 것에 있어서의 재고유화를 인정하는 한에서, 일반경제 그 자체는 아직 의미의 편에 서 있으며, 본질적인 양의성을 갖고 있다. 데리다는 바타이유에 관한 초기 텍스트에서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데, 그 몇 년 후에 해당되는 1970년대 초반에 이것을 발전시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무한한 원이 연출되고, 그것이 인간의 놀이를 이용하면서, 증여를 재-고유화한다. … 무한이 자기 자신을 (사고해야 할 것으로서) 주자마자, 한정경제와 일반경제의 대립은, 즉 순환과 소비적 생산성 사이의 대립은, 사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한의 이행의 기능, 즉 증여와 부채 사이의 무한한 이행의 기능이기도 하다An infinite circle plays [with] itself and uses human play to re-appropriate the gift for itself. … As soon as the infinite gives itself (to be thought), the opposition tends to be effaced between restricted and general economy, circulation and expendiary productivity. That is even, if we can still use such terms, the function of the passage to the infinite: the passage of the infinity between gift and debt.”11)

 이것은 1975년의 『에코노미메시스』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바타이유에 관한 논고에서 그 윤곽이 그려진 일반경제를 넘어선 비판적 발걸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일반경제조차도 고유화할 수 없는 것, 전적으로 에코노미적이지 않은 것을 “노정하는” 시도이다. 따라서 “또한 우리는 에코노미를 순환적 에코노미(한정경제)로 규정하는 것도 아니라면, 일반경제로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설인데, 이 두 가지 사이에 대립이 성립될 수 없다면, 여기에 모든 어려움이 응축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관계는 동일성도 아니라면 모순도 아니고 뭔가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And we are not yet defining economy as an economy of circulation (a restricted economy) or a general economy, for the whole difficulty is narrowed down here as soon as-that is the hypothesis-there is no possible opposition between these two economies. Their relation must be one neither of identity nor of contradiction but must be other12)고 데리다가 썼을 때, 한정경제와 일반경제 사이의 관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또 하나의 요소, 즉 에코노미에 의해 배제되는 요소의 도입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증여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만일 순환의 형상이 에코노미에 본질적인 것이라면, 증여는 비에코노미적인 채로 머물러야 한다Si la figure du cercle est essentielle à l'économique, le don doit rester anéconomique”(DT, 19/GT, 7). 비에코노미적인 것을 일반경제에 기입된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일반경제가 아직도 에코노미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증여가 일반경제로부터 생긴다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것과는 거꾸로, 증여에서 출발해서, 일반경제와 한정경제 얘기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경제란 증여와 한정경제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즉, 증여-일반경제-한정경제라는 도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시간을 주다』에서 결코 명확하게는 이뤄지지 않으나, 증여에 관한 데리다의 다른 텍스트의 맥락에 이 책을 두려고 한다면, 더 단적으로 말하면 충분하게 주의하면서 이 책을 읽으려 한다면, 위의 관계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b) 증여에서 증여-교환으로

 이 관계의 일반정식, 달리 말하면 데리다에게서의 그 연관의 방식은, 이미 1960년대 이후의 텍스트에서, 글로 쓰인 말(에크리튀르)와 목소리, 텍스트와 언어기호, 혹은 흔적과 현전 사이의 연결을 밝힐 때 보인다. 그렇지만 증여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가장 집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1974년의 『조종』에서이다.13) 무엇보다 「한정경제에서 일반경제로」에서는 진정한 적대자인 헤겔과의 대립에 있어서 바타이유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매개자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면, 『조종』에서의 대결은 직접적인 것이다. 증여가 논해지는 것은, 데리다가 “빛”에 대해 주석하고 있는 장면이며,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지’의 전, 마지막에서부터 2번째의 장인 「종교」에서 말해지는 자연종교의 최초의 계기이다.14) 증여와 에코노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데리다의 주요한 논의를 밝히기 위해 헤겔에 대해 조금 말해두자.

 빛은 “정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단일한 관계라는 형태, 달리 말하면 무형태라는 형태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모든 것을 담고 충만한 해돋이의 순수한 빛”이다.15) 그것은 아직 대자(対自)가 아니며, 그래서 빛은 퍼뜨려지고, 빛이 그것 자신을 산종한다. “순수하고 형상-없는[무형태인] 이 빛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다. 빛은, 자기 자신인 모든 것의 모조리-태움(le brûle-tout) 속에서 자기 자신을 모조리 태우며, 그것 자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 어떤 흔적도, 그 어떤 표식[각인]도, 그 어떤 이행의 기호[징후]도 남기지 않는다Pure et sans figure, cette lumière brille tout. Elle se brille dans le brille-tout qu'elle est, ne laisse, d'elle-même ni de rien, aucune trace, aucune marque, aucun signe de passage”(G, 265/Gen, 238). 데리다가 모든 것의 모조리-태움(brûle-tout)16)이라고 부르는 이 빛은 “놀이이자 순수한 차이Jeu et pure différence”(G, 266)이며,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다. 그 때문에 빛은 (불꽃으로서) 나타난 순간부터 모습을 지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희생에 바친다는 사실, 자기 자신조차 모조리 불태운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고,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희생제의, 제공물, 혹은 선물(le cadeau)은 이것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모든 것의 모조리-불태움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들은 모든 것의 모조리-불태움을 대자에 도달시키고, 그것을 불후의 것으로 하는 것이다Le sacrifice, l’offre ou le cadeau ne détruisent pas le brûle-tout: qui s’y détruit, ils le font accéder au pour-soi, le monumentalisent”(G,268/Gen, 240). 희생제의는 “모든 것의 모조리-불태움”의 “논리”에 속해 있다. 그것은 희생제의를 유지한다면 희생제의가 상실되며, 이것을 잃으면 유지된다는 것에 의해서, 그렇다. 즉, 어쨌든, 모든 것의 모조리-불태움은 희생제의에 처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나 변증법의 운동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해서이다. 이것은 순수한 증여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한정하고, 따라서 항상 이미 “교환을 개시하고, 그 유물을 사슬로 연결하고 구성하고, 소비와 수입, 채무자(doit), 계정(doit) … 이라는 두 개의 장부에 대해 계산한다il ouvre l’échange, il enchaîne, il construit ses monuments, calcule, sur deux registres, les dépenses et les recettes, le doit, le débit…”(G, 270-271/ Gen, 243).17) 원은, 자기 자신을 희생에 처하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불후의 것으로 하는 운동에 의해, 대자적인, 원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대자적인 증여(Don pour soi). 선물(cadeau)의 원형[범형, prototype]이란 고리, 반지, 목걸이, 사슬(lʼanneau, la bague ou le collier, la chaîne)이다Don pour soi. Le prototype du cadeau, c'est donc l'anneau, la bague ou le collier, la chaîne”(G, 271/Gen, 243). 이런 선물은, 바로 약속이나 계약으로서의 주는 행위이며, 거기에는 기대된 답례가 있다. 그런 증여들은, 증여를 교환에 한정해버리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증여가 자기 자신을 제한하는 운동, 즉 증여로서는 사라지면서 자기 자신을 주는 것, 이것을 데리다는 긴박(緊縛, striction)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주석하기로 하자. 그 전에, 우리는 다음을 물어야 한다. 증여가 자기 자신을 무화하는 것은 왜인가, 라고. 그 대답은, 증여가 그렇게 해야만 하기(doit) 때문이다. 계속 증여이려면, 그것은 증여이기를 그쳐야만 한다. 이것이 “증여의 숙명fatum du don”이다(G, 270/Gen, 242). “증여는 언제나 ‘~이어야 한다’를 내포하고 있다.” 증여는 자기 자신에게 강요함으로써 “반대증여를, 즉 부채의 공간에 있어서의 교환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교환 없이, 답례 없이, 순수 증여를 네게 주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증여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 유지한다. 그때부터, 네게는 빚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증여가 자기 자신을 지키려면, 네가 빚져야 하는 것이다elle provoque est forcément un contre-don, un échange, dans l'espace de la dette. Je te donne - don pur, sans échange, sans retour - mais que je le veuille ou non, le don se garde et dès lors tu dois. Pour que le don se garde, tu dois”(G, 270/Gen, 243).18) 그래서 적어도 두 개의 부채가 있다. 첫째, 그것은 증여가 자기 자신에 빚지고 있는 부채이다. 그리고 둘째, 증여를 받는 자의 부채이다. 그것이야말로 증여가 증여-교환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19) 그렇게 해서 우리는 원에 들어가고 만다. “고리의 운동은 일반경제(소실의, 고려되고 유지된 계산, 즉 고려되지 않고 유지되지 않는 계산)를 순환하는 경제로 제한한다〔=다시 긴박한다〕Le mouvement annulaire re-streint l’économie générale (compte tenu, c'est-à-dire non tenu de la perte) en économie circulante”(G, 271/Gen, 244).

 그러나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 증여의 흔적이, 한정경제의 ‘전에’ 나타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전에’를 따옴표에 넣은 것은, 곧 밝혀지겠지만, 긴박의 ‘나중에’, 지우는 것의 ‘나중에’만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증여는, 즉 증여를 주는 것[증여의 주기]은, 순수한 선물은, 그것이 변증법을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그 변증법에 의해 생각하는 것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다Le don, la donation du don, le cadeau pur ne se laisse donc pas penser par la dialectique à laquelle pourtant il donne lieu”(G, 271/Gen, 243). 일반경제와 한정경제 사이의 관계를 데리다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곳에서, 교환 ‘이전의’ 증여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거기서는 증여의 또 다른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증여의 발생은 어떤 사건이며, 역사가 이 사건을 사고할 수 없는 것은, 이 사건이 역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을 고려할 수 있다면, 이전에, 모든 것의 이전에((avant toute chose), 즉 모든 규정할 수 있는 존재자(étant) 이전에, 증여라는 불의의 사건이 있으며(il y a), 그것은 일찍이 있었고(il y avait), 앞으로도 있게 될 것이다(il y aura eu)Avant, si l'on pouvait compter ici avec le temps, avant toute chose, avant tout étant déterminable, il y a, il y avait, il y aura eu l'événement irruptif du don”(G, 269/Gen, 242). 데리다의 글 대부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지만, 위의 각각의 단어는 분석할 가치가 있다. 나는 두 가지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는 규정 가능한 존재자(étant déterminable)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물건(chose)에 이어지고 있다. 즉, 그것은 “모든 사물[물건] 이전”의 뒤에 이어지는 표현이며, 앞의 표현〔모든 물건〕의 규정이나 명확화로서 읽을 수 있다. 그때, 규정 가능한 존재자는 물건(chose)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과잉에 대한 글에서 나는 다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한정경제라는 틀에서, 물건은, 항상 이미 의미를 갖고 정의되고 규정된 것이라는 점이다. 증여라는 사건은, 이 규정의 외부의 무엇인가가 아니다. 물건에 그 의미를, 가치를, 동일성을 줌으로써, 물건을 규정 가능한 존재자로 바꾸는 것은 바로 이 사건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모든 사물 이전”이라고도 적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나는 물건 자체가 증여라는 사건에 의해 고찰될 것임을 암시했다. 나중에 나는, 데리다가 물건에 던져 넣은 특수한 빛이, 그의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주해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두 번째는, 언뜻 보기에 장황한 표현에 불과한 듯 보이는 것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있다, 있었다, 있을 것이다(il y a, il y avait, il y aura eu)”의 관용구 “있다(il y a)”에 포함된 동사 avoir의 상이한 문법적 시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현재시제, 반과거(imparfait), 전미래(future antérieur).20) 그 계열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반과거란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시제이다. 즉, “그러므로 반과거는 어떤 다른 현재, 현재였던-것[과거의 현재]이 아니라, 현재와는 전적으로 다르고, 그러므로 본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L’imparfait donc n’est pas un autre présent, un avoir-été-présent, il est tout autre que le présent et n’a donc pas d’essence.”21) 다른 한편, 전미래는 “모든 종말론을 배제한다exclut toute eschatologie.” 왜냐하면 그것은 “무수한 반과거의, 즉 결코 현재인 적이 없을 불확정적인(indéfini) 과거의 전미래le futur antérieur d’un imparfait innombrable, d’un passé indéfini qui n’aura jamais été présent22)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저작의 거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듯한 여기서의 전미래는, 사건의 규정할 수 없는 시간이다. 따라서 사건과 현실적인 것, 즉 현재와의 외관상의 포개짐을 문제로 삼는 것은, 두 개의 단계를 경유한다. (1) 현재와 그것 자신과의 연결이 명백하지 않는 한, 규정되지 않은 채로 계속되는 과거와의 관계. (2) 이 과거를 떠나서 미래를 가리킴으로써, 미래는 이중적 의미에서 미규정적일 것이다. 증여에 관해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자리매김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1983년의 일본에서의 증여에 관한 강연 후의 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언제나, 제가 주는 것과는 다른 것을 주는 것입니다.”23) 그래서 결코 이 (그 어떠한) 사건을(도)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사후적으로만, 사건을 “이렇게 해서 있었던 것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사건이 전제로 하는 것은, 우리는 <존재>로부터 증여를 사고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는 것이 <존재>를 넘어선 과잉이며(데리다는 종종 하이데거와 존재가 있다=그것이 존재를 준다〔esgibt Sein〕를 언급하고 있다),24) 그것이 <존재>에 침입하고, 이것을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의 것”을 전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되는 것이 아직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기원일 때, 여기서 논리를 반전시키는 것이 적절하다고 한다면On ne peut donc plus penser la donation à partir de l'être, mais «le contraire», pourrait-on dire si cette inversion logique était ici pertinente au moment où il ne s'agit pas encore de logique mais de l'origine de la logique”(G, 269/Gen, 242). 인용한 이 구절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기원. 이것은 증여로부터, 증여라는 사건으로부터도 논리를 사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증여는, 사건을 동반한 다양한 물건들(les choses)을 경유해서, 존재자(lʼétant)의 규정 가능성을 변경한다. 그리고 이것은 윤리적인 질서를 재고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얘기를 더 이상 할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데리다도 아직 분명하게 그렇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철학적-논리적 행위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증여라는 사건은 그 긴박에 예외 없이 결부되어 있다. 긴박이란, 증여 그 자체가 그로부터 배제되는 질서를 가져오는 것, 증여가 그것에 대해 과잉인 것이다. 질서는 그것이 경험적 질서이든 초월론적 질서이든, 그 긴박 때문에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긴박이 존재론적인 것이나 초월론적인 것을 생각될 수 있게 한다는 것임을 의미하며, 그래서 그것은 데리다가 “초월론적 초-범주”라고 부르는 것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긴박은 “비-초월론적인 것, 초월론적 장의 외부, 배제된 것을 구조화하는 지위에 위치하도록 담론을 구속한다chaque fois qu'on tient un discours contre le transcendantal, une matrice - la striction même .- contraint le discours à mettre le non-transcendantal, le dehors du champ transcendantal, l'exclu, en position structurante”(G, 272/Gen, 244). 긴박의 모체는 “초월론적인 것에서 초월론적인 것의 배제를[초월론적인 것의 초월론적인 것으로서는 배제된 것을] 구성한다. … 이런 것이 (변증법적인) 긴박의 (비-변증법적인) 법일 것이다La matrice en question constitue l'exclu en transcendantal du transcendantal, … Telle serait la loi (non dialectique) de la stricture (dialectique)”(ibid.).25)


c) 시간의 간격

 지금까지 본 『조종』에서의 여러 대목에서는 전개되지 않은 것, 그것은 시간의 물음이었다.

 “증여와 단순한 교환이라는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조작 사이의 차이는, 증여가 시간을 준다는 것에 있다La différence entre un don et toute autre opération d'échange pur et simple, c'est que le don donne le temps”(DT, 59-60/GT 41)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 구절은 일반경제와 한정경제의 관계성에 대해 이미 언급된 것과 관련시켜 읽어야 할 것이다. 증여는 시간을 준다, 그래서 증여는 시간에 속해 있지 않다. 이것은, 시간이 있다 = 그것이 시간을 준다〔es gibt Zeit〕에 대한 하이데거의 독해에 있어서의 증여의 존재론적 차원(이 단어가 아직도 타당하다면)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사고의 운동을 보존한다(더욱이, 증여란 “본래적인 것”의 영역을 생성시키기 때문에, 무엇이 증여에 본래적인 것인가를 하이데거가 알려고 할 때, 데리다는 그의 사고의 운동이 어떻게 그 한계에 직면하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본래적인 것에 대한 희구가 있는데, 그것이 증여를 사고하는 지평을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다).26) 시간화는 증여와 준다고 하는 활동에서 생긴다. 이것이 전제하는 것은, “시간의 에코노미”로부터 흘러넘치는 심급이며, 시간 없는 시간이다. 그것을 데리다는 “절대적 망각”이라는 말에 할당하고 있다(DT, 30/GT, 17-18). 그것은 데리다가 말하는 자기를 말소하는 흔적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여태까지 본 증여도 또한 그렇듯이, 스스로를 망각하는 망각이다. 증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망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증여가 있기 때문에 망각을 사고할 수 있다.

 시간의 에코노미에 속하지 않는 심급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심급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간의 순환 운동을 동반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우리는 긴박이 작동하는 그 방식에 다시 눈을 돌릴 수 있다.

 산종을 빼고서는, 증여를 생각할 수 없다(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돌아가자). 증여가 자신과는 다른 것이 되는 그때마다, 증여는 자신으로부터 차이화하고, 자신을 다른 것으로 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자신이 주는 것과는 다른 것을 항상 주는 것이다. 차이는 현재를 분열시킨다. 그래서 증여라는 심급은 현재로서, 간단히 말하면, ‘지금’으로서 생각해서는 안 되며(그 어떤 방식으로도, 단순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27) “동시에”〔at the same time〕 혹은 동시성〔simultaneity〕(“en même temps”, DT, 51-52/GT, 34-35)으로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 동시성은, 적어도 두 개의 상이한 시간의 “동시에”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두 개의 상이한 시간은, 시간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으며, 서로 이웃할 수 없으나, 그것들은 서로 잇달아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고, 한 쪽이 계기(繼起)한 뒤에 다른 쪽이 생기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이 두 개의 시간은 바로 ‘동시에’ 있다. 이 동시성의 광기는 무조건적인 증여의 “적극적 조건”이다. 증여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광기의 경험인 것이다.

 증여는 시간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것이 “직접적이고 당장(immédiatement et à l’nstant)”(DT, 60/GT, 41) 반송되며, 반환되어야 하지 않는 한에서, “시간을 요구”하기도 한다. 시간은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데리다도 인용하는 모스가 지적했듯이, 반송에는 ‘마감’ 혹은 ‘기일’(terme)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28) 〔더욱이〕 연기〔deferral〕나 지연〔delay〕도 있는 것인데, 증여를 교환으로부터 구별하는 듯 보이는 것이 이 지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일(期日)은 증여에 한계를 설정하고, 증여를 교환에 관계시키기도 한다. 증여가 증여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계를 갖고, 기일을 갖는다는 한에서만, 즉 증여가 어디에서 끝날지 알 수 없는 한에서만이다. 물론 증여를 말소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그 과잉성을 실어 나르는 것도 또한 같은 것이다.

 이 두 개의 ‘시간’, 즉 한편으로는 지연이나 연기로서의 시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성〔simultaneity〕이나 시간화하는 것이 있는 건데, 이 두 가지는 무관한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시간 사이에는 이행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데리다가 시간적 차연(différance temporelle)이라고 부른 것에 의해 명확해진다. 시간적 차연은 시간의 외부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화〔temporalisation〕를 시간적 지연〔temporisation〕과 연기로 바꾸는 동시성이다. 혹은 데리다의 말로 하면, 그것은 “시간화의 시간적 지연으로의 변형La transformation de la temporalisation en temporisation”(DT, 59/GT, 40)을 낳게 한다. 차연이란 공-시간성〔co-temporality〕이며, 시간화 속에서 “그 어떤 ‘동시에’를 탈구시키는 기일의 지연 혹은 지연의 기일le délai du terme ou le terme du délai qui disloque tout «en même temps»”(DT, 58/GT, 39-40)을 주고, 그것을 낳게 한다. 차연은 차이와 연기로의, “에코노미적인 것과 비에코노미적인 것”의, 그리고 “같은 것이라는 경위(境位)”에 있어서의 에코노미적 우회와 “유보없는 소진”의, 동시적인 연접인 것이다.29) 시간화로부터 시간적 지연(지연, 대기, 시간 벌기)으로의 이행은, 데리다가 이미 1968년의 유명한 텍스트 「차연」에서 제시했듯이,30) 일반경제에서 한정경계로의 이행과 일치한다. 이 연접의 동시성, 이 “동-〔syn-〕”은, 스스로의 ‘단서’의 흔적을 말소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한계, 긴박, 제한〔=재긴박〕을 활성화시킨다. 증여와 차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연은 증여 그 자체, 자신의 모순을 껴안고 있는 증여 그 자체입니다.”31)

 여태까지 말한 것과의 관계로부터, 다음의 것이 밝혀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즉, 증여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반납이나 반환의) 지연 또는 시간적 지연뿐 아니라, 시간의 시간화를 통해 다름 아닌 이 지연을 가능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증여의 두 가지 주요 구조deux grandes structures de don”를 구별하는 이유이다. “한편에는 특정한 것[특정하게 정해진 물건]을 주는 증여Il y aurait d'une part le don qui donne quelque chose de déterminé”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뭔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선물 일반의 조건을 주는 증여d'autre part le don qui donne non pas un donné mais la condition d'un donné présent en général”(DT, 76/ GT, 54)가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선물, 친절함의 몸짓, 상징, 포틀래치, 통가 등을 갖게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이 ‘물건들’이 주어지고, 그리고 교환될 때, 증여는 시간을, 그리고 빛이나 삶을 주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증여의 이런 두 개의 주요 구조를, 언어적 숙어를 추적하면서 구별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로 말하면, 우리는 “삶을 주다donner la vie”나 “시간을 주다donner la mort” 같은 표현을 다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두 개의 주요 구조의 구별은 다분히 오해를 주기 쉽다. 이 구조의 한쪽은 각각 다른 쪽으로 통하며, 시간은 증여 그 자체 속에, 즉 물건 속에 존재하고 있다(DT, 62). 그래서 “기일과 시간적 지연의 요구는 사물의 구조 자체였던 게 된다cette demande de terme et de temporisation, serait la structure même de la chose”(DT, 59/ GT, 40). 마르셀 모스의 견해도 그런 것이었다. 데리다에게 그것은 모스의 『증여론』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관념이며, 중요한 길잡이l’idée la plus intéressante, le grand fil conducteur”였다. 즉, “증여와 답례의 경험에 참여하는 사람들pour ceux qui participent à l’expérience du don et du contre-don”에게 기일까지 반환하라는 요구, 늦어지고 있으나 필요한 기일의 요구는, “주어지고, 교환되는 물건 그 자체 속에(dans la chose même) 기입되어 있다est inscrite, … dans la chose même qu'on donne ou qu’on échange”(DT,58/GT, 40). “증여[사물] 그 자체는 증여와 반환을 요구하고, 이 때문에 ‘시간’이나 ‘기일’, ‘지연’이나 시간적 지연이라는 ‘간격’을 필요로 한다la chose même demande le don et la restitution, elle exige donc le «temps», le «terme», le «délai», «intervalle» de la temporisation”(DT, 58-59/GT, 40). 『증여론』의 서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물건(la chose)에 관한 모스의 견해를 경시하고, 감축해버린다.


d) 물건

 레비-스트로스의 잘못은 그가 “물건의 논리” 대신에 “관계와 교환의 논리를 이용한une logique de la relation et de l'échange” 데 있다(DT, 98-99/GT, 74). 그리하여 그는 증여를 사고하는 어려움을 내쫓았다. 그가 물건의 영(霊)인 하우〔hau〕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32) 모스에 따르면, “수취된 물건은 비활성적이지 않다the thing received is not inactive.”33) 지금까지 봤듯이, 이것은 시간화와 시간적 지연에 관련된 모든 어려움, 그리고 지연의 물음으로 이끈다. 레비-스트로스가 시간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는 것은, 그가 주는 것을 교환에, 물건을 어떤 관계 ― 그 법칙은 물건의 본성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 안에서의 임의의 변수로 감축해버렸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사고는 “직접 주어지는 것의 총체”에 의해 특징지어지지만, 그것이 밝히는 것은 “원래 물건에 갖춰진 상관적인 성격[애초의 관계적 측면]the initial relational aspect34)이다. 상징적인 것은 그것이 구성될 때부터 완전한 것이며, 그것을 빠져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언어의 탄생은 단숨에[별안간] 일어날 수 있을 뿐이다language can only have arisen all at once”).35)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물건의 물음을 제거하기 위해 교환과 관계의 논리를 특권시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Lévi-Strauss n'a aucun mal à privilégier la logique de l'échange et de la relation pour éliminer la question de la chose”(DT, 100-101/GT, 76). 하지만 상징적인 것의 전체성에 대해 말하면, 증여는 외부를 남기고 있다. “증여는,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체의 저편(au-delà de tout)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것의 전에, 모든 것의 후에(Avant tout ou après tout)Le don, s'il y en a, devrait passer au-delà de tout. Avant tout ou après tout”(DT, 103/GT, 77). 이것은 증여의 과잉이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초기 텍스트 「인간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1966년)에서 이미 데리다는, 전체나 모든 것의 저편으로 향하는 이런 운동을 소묘하고 있다. 그리고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의 「마르셀 모스의 작업 입문」이라는 텍스트에서의 이 운동을 대체보충성〔supplementar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전체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 항상 존재하며, 이 부족분은 전체 그 자체의 계기들 중의 하나에 의해 보완된다.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계기는 전체의 체계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는 전체를 넘어선 과잉이 된다. 대체보충(이 점에서 대체보충은 보완과 구별된다) 속에서는, 부족분과 과잉은 대응한다.36) 『시간을 주다』에서 대체보충성의 운동은, “증여의 교환으로의 치환[증여를 교환으로 대체하는 것]la substitution de l'échange au don”(DT,103/GT, 77)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운동은 증여의 특이성을 불명확한 것으로 해버린다.

 레비-스트로스의 환원주의는, 증여를 교환에 의해, 따라서 에코노미적 순환에 의해 재규정하기 때문에 가장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차가운 에코노미의 이성[합리성]froide rationalité économique”(DT, 61/ GT, 42)에 대한 모스 쪽의 저항을 깔아뭉갰다. 레비-스트로스가 『마르셀 모스의 작업에 대한 서론』에서 빠져든 것은, 바로 차가운 에코노미의 이성의 덫이며, 교환의 논리에 대한 과잉적 신뢰이다. 모스라면, 이 논리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스는 “고리(高利)적 대체보충으로, 요컨대 신용대출의 논리로, 가치들의 어떤 객관적인 교환décrire scientifiquement l'échange objectif des valeurs avec supplément usuraire, bref une logique du crédit”을 과학적으로 기술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한 것은, “증여의 과정에 근원적인 특수성을 간직하면서, 그것을 차가운 경제적 이성[합리성]과의 관련에서부터, 즉 자본주의나 중상주의와의 관련에서부터 추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경제교환의 원을 발동하는 것을 증여 속에서 이해하는 것réussir à garder une spécificité originaire au procès du don par rapport à la froide rationalité économique, au capitalisme et au mercantilisme —- et par là à reconnaître dans le don ce qui met en marche le cercle de l'échange économique”(ibid.)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스의 사고는, 자본주의자의 근대적 시선 ― 이 시선이라면 어떤 곳에서도 경제교환의 요약적 계획을 찾았을 것이다 ― 에 반항하고 있다. 모스는 “물건 그 자체의 이익, 즉 물건과는 다른 뭔가로부터는 생길 수 없는 이익, 주어진 물건의, 그리고 증여라고 불리는 물건의 이익un intérêt de la chose même, donc un intérêt indérivable d'autre chose que de la chose, un intérêt de la chose donnée, de la chose appelant le don”(DT, 62/GT, 42)을 가까스로 제시했다. 이것이 비활동적이지 않는 물건이라는 생각이다.

 데리다의 저작이 보여주듯이, 모스의 이런 천착[씨름]에도 불구하고, 그는 증여에 도달하지 못하고, 교환에 계속 얽매인다. 데리다의 말로 하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는 기념비적 저작은 증여에 대해 얘기하지 못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On pourrait aller jusqu'à dire qu'un livre aussi monumental que l'Essai sur le don, de Marcel Mauss, parle de tout sauf du don”(DT, 39/GT, 24). 왜 모스는 물건을 끝까지 사고하지는 못했을까? 데리다의 응답은 다음과 같다. “마감과 이런 지연 사이의 간격은, 모스로 하여금 증여와 교환 사이에 있는 이 모순 ― 나는 그것에 대해 많은 것을 주장했다 ― 을 놓치고 말았다L'intervalle de ce retard à l'échéance permet à Mauss de ne pas sentir entre le don et l'échange cette contradiction sur laquelle j'insiste tant”(DT, 58/GT, 39). 그래서 시간의 간격은 민속학자의 눈에서 증여의 긴박과 증여의 불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물건이 이런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시간적인 차연은 시간의 긴박에 의해 비롯된다. 거기서 산출적인 시간화는 시간적 지연으로 바뀌며, 그리하여, 증여를 한정경제와 그 순환 속에 편입시키는 것을 가능케 한다. 흔적은 자기 자신을 말소시켰다. 시간화 그 자체는 불가피하게 증여의 상실로 이끌게 될 것이다. “시간의 시간화(기억, 현재, 예견, 즉 보유rétention, [현재에서의]미래지향protention, 미래의 임박, 탈자extases 등등)은 항상 증여의 해체 과정을 움직이기 시작한다La temporalisation du temps (mémoire, présent, anticipation; rétention, protention, imminence du futur; extases, etc.) engage toujours le processus d'une destruction du don”(DT, 27/GT, 14). 시간적 지연으로 바뀜으로써, 시간화는 교환의 순환에 이르며, 그것과 동시에 증여를 교환이라는 다른 형식으로부터 구별하는 명백한 비대칭성을 고려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관용과 평가 등등의 ‘배후에’ 교환의 순환을 찾아내는 모스의 분석들은, 이것들이 “경제의 교묘함la ruse d'une économie”(DT, 29/GT, 16), 계산성 등을 폭로한다는 한에서, 정확하고 불가결한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증여의 법, 그 “~해야만 한다”(il faut), 달리 말하면, 필연적이로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증여는, 이런 경제와 그 교묘함을 구성함으로써, 스스로를 경제적인 사항의 바깥에 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건(la chose)의 물음을 검토했지만, 지금까지 참조했던 모스와 데리다의 논의에 관해서 말하면, 이 물음은 더욱 불명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물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금까지 물건을 명확화했는데, 그것은 그 특징의 일부이다. 우선 물건은 비활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차연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과 동시에, 위에서 서술했듯이, 물건은 물건의 사건에 의해 이미 관철되고 있으며, 이것이 물건을, 일상생활 속에서 그런 것으로서 만나게 되는 듯한, 규정 가능한 존재로 바꾼다. 하지만 그렇다면, 물건은 순환이나 한정경제로부터 출발해서 생각되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건은 스스로의 시간적 한계를 요구하고, 이 요구 없이는 물건은 물건일 수 없다(DT, 59/GT, 40). 이리하여 물건은 스스로를, 그 자신의 윤곽을, 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물건은 이런 한계의 규정 ‘이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미 명확하게 했듯이 여기서 ‘이전’이란 어떤 시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화에 ‘선행하는’ 것이다).

 물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물건에 대한 질문은, 『시간을 주다』에서 우연히 제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모스의 독해에 관련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데리다가 민속학자의 문자와 정신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이 저작의 토대가 된 증여에 대한 강의(1977-1978, DT, 9/ GT, ix)보다 앞선 3년 동안, 데리다는 자신의 강의를 바로 사물에 대한 질문에 바치고 있다.37) 이 시기에 간행된 텍스트의 몇 가지는, 물건이 가진 역할과의 관계에 대한 주의를 쏟고 있다. 물건은 어떤 “~해야 한다”(il faut)를 명하는 법과 항상 관계하고 있다. 물건은 이 법인데, 법 그 자체는 스스로의 침해로 이끈다. 즉, “물건, 법〔la chose, la loi〕, 그리고 그 자신의 침범[위반]에 있어서만 정립[제기]될 뿐인 법la chose, la loi, et une loi qui ne se pose que dans sa propre transgression38)이다. 여기서 논의되는 침범[위반]은 긴박이라는 관념과 증여의 핵심에 있는 차연을 일관되게 내비치고 있다. 그래서 사실, 법의 “~해야 한다”는 법의 부재를, 즉 “유일하게 가능한 증여로서의 법의 부재(l’absence de loi comme le seul don possible)”39)를, 전제로 하고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동시에 법과 법의 부재로서의 증여는, 그 아포리아적인 운동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을 데리다는 «un pas de don»으로 바뀐 표현을 하고 있다(이것은 “증여의 한 걸음〔a step of the gift〕”이나 “증여가 아니다〔not a gift〕”라고도 번역된다).40) “물건은 어떤 타자(un autre)를 남기고, 그 법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La chose reste un autre dont la loi demande l'impossible.”41) 법 이전의 법, 증여, 물건 ― 이 모든 계열은 타자로 향하고 있다. 타자는 우리와 관계를 갖는 것 없이 그 “~해야 한다”로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이며, 똑같은 순환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물건이란 타자이며, 법을 구술하며, 그것을 받아쓰는 것은 전적인 타자이다D'abord la chose est l'autre, le tout autre qui dicte ou qui éecrit la loi ….”42) 그곳에서 타자의 힘이 우리에게 미치지만, 그것은 힘 없는 힘이며, 왜냐하면 타자는 ‘고유한’ 것으로, 타자라는 뭔가의 ‘고유성’으로 자본화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시 우리를 순환으로 이끌 것이다). 그래서 물건은 “이타적인異他的〔heteric〕”(이 단어는 데리다의 말이 아니지만 타율성他律性〔heteronomous〕이나 이질성=혼재성混交性〔heterogeneous〕 등등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과의 관련을 갖기 때문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원리 속에서 존재한다. “법은 훨씬 더 명령적이고 무제한적이며, 희생제의에 대해 탐욕적이다. 그런 가운데 법은 전적인 다른 것(물건)으로부터 생긴다. 전적인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관계를 갖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교환되지 않는다. 그것 ― 요컨대 죽음(la mort en somme) ― 은 주체가 아니다(그것이 의인화된 것이든 유사-신격화된 것이든, 또한 의식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 그것은 담론이 아니고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문자의 형식도 아니다). 모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아무것도(rien)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물건은 채무자(내 물건(ma chose)이라고 제대로 말하고 싶은 사람)을 절대적인 타율과 무한에 불평등한 관계 속에 둔다La loi est d'autant plus impérieuse, illimitée, exigeant insatia blement le sacrifice, qu'elle procède d'un tout autre (la chose) qui ne demande rien, qui n'a même pas rapport à soi, qui n'échange rien ni avec soi ni avec personne, qui, la mort en somme, n 'est pas sujet (anthropomorphique ou théomorphique, conscient ou inconscient, ni un discours, ni même d'abord une écritu re au sens courant de ce mot). Demandant tout et rien la chose place le débiteur (celui qui voudrait dire proprement ma chose) en situation d'hétéronomie absolue et d'alliance infiniment inégale.”43)

 그래서 물건의 도래 혹은 출현은 변양되며, 그것으로서 인정될 수 없기도 한다. 왜냐하면 “물건은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기[<물건>은 장소를 갖지 않고 장소를 갖기]La Chose a lieu sans avoir lieu44) 때문이다. 이것은 데리다가 사건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특수한 문법형식 ― 전미래 ― 을 설명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이다. 즉, 순환에 참여하기 이전의, ‘존재자’(un étant)가 되기 이전의 물건 “그것 자체”는 대상이 아니라, 수동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법을 우리에게 제출하고, 이 법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물건은 동일성이라는 항 속에서 사고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물건과의 관계 속에서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것은 증여에도 해당된다. 그것은 “물건의 법, 이것이 특이성이자 차이이기la loi de la chose, c'est aussi la singularité et la différence45) 때문이다. 물건은 어떤 때에도 우리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은 결코 여기에 존재하거나 현전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차이를 ‘여기’와 현재의 한복판에 가져오며, 불가능한 것에 조준을 맞춤으로써, 물건들을 바꾼다. 증여와 마찬가지로 (물건은 증여이기 때문에, ‘증여로서’라고 말해도 좋다), 물건은 “교환을 넘어서 잔존하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으로서 잔존한다is remains beyond exchange and priceless / elle reste hors d'éechange et sans prix.”46)

 물건의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증여의 더욱 중요한 양상 중 하나에 도달한다. 즉, 그것은 증여의 ‘사건성〔eventality〕’이다.


3. 증여와 사건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됐듯이, 증여는 증여인 물건(la chose du don)은,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그 시간과의 관계 때문에, 또한 그 아포리아적 구조( 및 긴박구조) 때문에 증여는 결코 현전하지 않는다(시간적인 의미에서도 공간적인 의미에서도). 단적으로 “증여를 증여로서,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것은 인식이 감사(感謝)가 되기 전부터, 증여로서의 증여를 무효화한다. 증여의 단적인 규정(identification)은 증여를 파괴하는 듯 보인다pour que cette simple reconnaissance du don comme don, comme tel, avant même de devenir reconnaissance comme gratitude, annule le don comme don. La simple identification du don semble le détruire”(DT, 26/GT, 14; 번역수정). 이 절은 본고의 처음에 부분적으로 인용됐는데, 이제 나는 증여의 “그것 자체”에 있어서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 상이한 관점에서 이 구절로 돌아가고 싶다. 증여는 현상학적인 “으로서-구조”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여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순간부터 소실하고, 심지어 더 나쁘게도, 파괴되고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증여를 사고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증여가 에코노미적 원호나 속에 제한〔재-긴박〕되기 전에 증여를 파악하고 이해할 (문제는 이런 재고유화이다) 수 있을까?


a) 산종

 데리다는 “모스는 순환하고 여행을 하고, 그가 증여라는 단어로 이해한 것, 그가 선물(gift)이라고 부른 것을, 상이한 문화 사이에서 규정(identification)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번역 덕분인데, 그런 번역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Comment légitimer les traductions grâce auxquelles Mauss circule et voyage, identifiant d'une culture à l'autre ce qu'il entend par don, ce qu'il appelle don?”라고 묻고, 이 질문을 다음의 문제와 관련시킨다. “그는 상이한 문화들에 속하고, 이질적인 언어로 표시되는 다양한 종류의 극히 수많은 현상들을, 증여라는 유일한, 규정(identification)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범주 아래서, ‘증여’라는 기호 아래서 끌어 모으고 비교하지만, 그런 것을 가능케 하는 예상의 의미론적 지평이란 무엇인가?Quel est l'horizon d'anticipation sémantique qui l'autorise à rassembler ou à rapprocher tant de phénomènes d'ordre divers, appartenant à des cultures différentes, se manifestant dans des langues hétérogènes, sous la catégorie unique et prétendument identifiable de don, sous le signe «don»?”(DT, 41/GT, 26) 그 대답의 일부는, 모스의 실패의 이유를 이루는 것의 해명과 함께 이미 주어졌다. 즉, 증여가 자신이 작동시키는 엄격한 긴박을 통해 원에 들어갈 때의, 증여의 흔적의 말소이다. 하지만 대답의 또 다른 부분이 전제로 하는 것은, 우리가 흔적을 고려하며(“흔적과 텍스트의 수미일관된 문제계에서 출발할 때에만 증여의 문제계가 존재한다il n'y a de problématique du don qu'à partir d'une problématique conséquente de la trace et du texte” DT, 130/GT, 100), 번역의 비정당성과, 증여와 주기를 의미론적인 핵심 혹은 중심(foyer)으로 환원하는 의미론적 지평의 비정당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조직된 에코노미 혹은 다의성〔polysemia〕이 그 주위에 모일 수 있는 이런 의미론적 중심(foyer)은 사실상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Ce foyer sémantique autour duquel se rassemblerait une économie ou une polysémie organisée semble bien faire défaut”(DT, 68/GT, 48). 증여의 광기는 “‘증여’의 단어 혹은 의미를 모조리 불태우고, 그 용어나 싹과 함께 그 재를 회귀 없이 산종하기 시작한다Il y a toujours un moment où cette folie se met à brûler le mot ou le sens « don » lui-même et à en disséminer sans retour les cendres autant que les termes ou les germes”(DT, 68/GT, 47).

 주는 것, 준다는 것의 통일적 의미의 결손을 묘사하기 위해, 데리다는 산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모든 증여 및 증여와 주기를 나타내는 모든 표현의 결집을 가능케 하는, 그런 의미의 결손을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즉, 산종은 “증여의 회귀 없이le sans-retour du don”(DT, 69/ GT, 48)를 사고하는 것을 허용하는 가능한 개념들 속의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증여는 유일한 원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 “아버지”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종은 아버지로 회귀하지 않는 것이다, 즉 주는 것처럼 보이는 자는 결코 회귀하지 않는 것이다.”47)


b) 증여의 언어, 언어의 증여

 증여의 산종의 말소된 흔적을 다시 추적하기 위해, 데리다는 네 가지 방향을 열거하고 있다(DT, 71-77). 이 방향들 각각은 이 산종과 손을 끊는 전략으로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동사 ‘주다’를 동반한 표현을 사용하는 저 언어행위의 물음. 즉, 예를 들어 ‘누군가의 말을 주다’(‘약속하다’를 의미한다), ‘명령을 주다’(지도라는 의미) 등. 이 물음은 ‘기부의식(conscience donatrice)’이라는, 더 일반적인 현상학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둘째, 번역, 은유화 등을 가능케 하는 일반적 등가물의 존재에 대한 물음. 이런 등가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초월론적이며, 증여를 산종으로부터 방어할 것이다.

셋째, ‘증여’(명사)를 사용하는 고유언어로부터, ‘주다’(동사)의 구문을 사용하는 고유언어를 구별하는 선.

 마지막으로, 이미 언급된, 증여의 두 가지 주요 구조 사이의 차이. 한편으로는 특정한 것을 주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주는 것의 조건을 주는 것이 있다.

 데리다는 증여와 언어 사이의 독특한 관계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고유언어를 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물음을 제기한다, “고유언어적 차이를 초월하는 증여의 본질의 개념을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n'est-il pas impossible de dégager un concept de l'essence du don qui transcende la différence idiomatique?”(DT, 76/GT, 54) 증여와 주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증여의 ‘근원적’ 산종, 증여의 ‘그 자체’의 본질적인 결손을 증언한다.

 증여를 인식 가능케 하는 증여의 어떤 일반적 등가물이 있다고 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주는 과정 속에서 주어진 것이, 주는 행위 그 자체를 변용시키고 변경시키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주는[주다는]’ 행위의 직접적 ‘대상’은, 주기[주다]의 여건은, 그 행위의 의미를 매회 근본적으로 변경시키게 되지 않을까Autrement dit, est-ce que le complément d« objet » de l'acte de « donner », est-ce que le donné du donner ne vient pas chaque fois altérer radicalement le sens de l'acte?”(DT, 70/ GT, 48) 이 질문은 틀림없이, 물건(la chose)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고, 물건이 지닌 차이는 주는 행위의 의미에 활발하게 영향을 가져온다. 이하에서는 데리다에 의해 제시된〔주어진 물건이 주는(give, donner) 행위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예 중에서, 몇 안 되는 예이다. 명령하다〔give an order〕, 가르치다〔give a lesson〕, 값을 하다〔give a price〕, 인상을 주다(donner une impression), 누군가를 경찰에 넘기다(donner quelqu’un à la police), 신호하다〔give a sign〕, 정보를 알리다〔give information〕. 데리다의 목록은 이것보다 훨씬 더 길지만, 모든 예를 열거하지 않아도 된다 ― 심지어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런 예들 중 몇 가지는, 예를 들어 교육하다(donner un enseignement), 옳다고 인정하다(donnerraison) 등처럼 프랑스어 특유의 것이며, 반드시 다른 언어에 등가물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는 물건은 주는 행위 그 자체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바로, 주어진 것은 단순히 주어진 대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말로 하면, “시혜[적선aumône]든 아니든, 주어진 것은 그 내용, 즉 누군가가 제공하는, 혹은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현실’의 물건일까? 그것은 오히려 타자로 향하는 행위, 예를 들어 텍스트적인, 혹은 시적인 행위수행으로서의 작품이 아닐까?ce qui est donné, aumône ou non, est-ce le contenu, à savoir la chose « réelle » qu'on offre ou dont on parle? N'est-ce pas plutôt l'acte de l'adresse à l'intention de l'autre, par exemple l'oeuvre comme performance textuelle ou poétique?”(DT, 79/ GT, 57) 우리는 주어진 물건과 함께, 혹은 주어진 물건 없이 ― 주는 행위 그 자체도 주고 있다. 이로부터 증여에 있어서 불가피한 그 행위수행적인 특성이 생긴다. 행위수행적 행위를 주는 것으로서의 주기는, 타자에 혜택을 입고 있다. 비록 그 타자가 증여를 거부하고 따라서 그 발화내적인 힘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하더라도. 그러나 행위수행적인 것으로서의 증여는, 바로 원에 들어가는 또 다른 수단일 것이다. 물건(la chose)은 행위의 특징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그것은 주어지는 자에게 혜택을 입은 주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주기란, 주어진 대상과 결코 단순하게는 일치하지 않는 증여-물에서 그 힘을 거둬들인다. 증여란, 물건이란, 규정〔=동일화〕되지 않고 혜택을 입는[빚지는] 타자의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말소한 흔적의 표시로서, 여기서는 “증여의 행위 ― 문서고와 행위수행적인 양쪽 의미에서의 행위〔act〕 ― 그 자체에 결부된se lie à l'acte même du don, l'acte à la fois au sens de l'archive et de la mise en oeuvre performative”(DT, 63/ GT, 44) 물건이 있다. 그러나 타자는, 증여는, 자기 자신을 말소하고,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이 주는 것의 ‘동작주’ 때문에, 증여 ‘그 자체’가 아니라, 주는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48) 이 관점에서 보면, 증여의 사건은 그 비밀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증여의 사건은 구조를 변용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며, 구조 그 자체의 입장에서는 사고 불가능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즉 불안정한 상황 ― 사건은 그 외관상의 안정성을 만들어내는 ― 속에서 사건의 흔적을 말소하기 위해, 그 전면적인 무력함이라는 절대적 비밀 속에서, 사건은 항상 타자에게 열리고,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빚지며, 그 어떤 행위수행적인 힘이나 다른 힘도 넘어서는 것이다.


Darin Tenev,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Reprinted by permission of Darin Tenev.

訳=横田祐美子(立命館大学博士課程), 

松田智裕(立命館大学博士課程), 亀井大輔(立命館大学准教授)


1) Jacques Derrida, Donner le temps. 1. La fausse monnaie, Paris : Galilée, 1991.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Given Time: 1. Counterfeit Money, trans. Peggy Kamuf,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이하 프랑스어판과 영어판 쪽수를 각각 DT와 GT의 약호로 표시하고 쪽수를 적어둔다.)

2) [옮긴이] 데리다의 조어인 ‘restance’가 ‘남다’와 ‘저항’이라는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잔항’으로 옮기고 있다.

3) 데리다가 자신의 텍스트에 처음으로 이 새로운 단어를 등장시킨 것은 거의 틀림없이 1970년대 초반이다. Jacques Derrida, “Signature événement contexte” (1971) (Marges de la philosophie, Paris: Minuit, 1972, p. 378)〔ジャック・デリダ「署名 出来事 コンテクスト」, 『哲学の余白』下巻所収, 藤本一勇訳, 法政大学出版局, 2008年, 247頁〕 Eperons. Les Styles de Nietzsche (1972/ 1973), (Eperons/ Spurs, bilingual edition, trans. Barbara Harlow, Chicago& London: Chicago University Press, 1979, p.130, 132)〔ジャック・デリダ「尖鋭筆鋒の問題」, 『ニーチェは, 今日?』所収, 森本和夫ほか訳, 筑摩書房, 2002年, 307-308頁〕. 그러나 잔여, 나머지, 잔항 등의 테마가 중심에 놓여지고, 이것들에 대한 생각을 데리다가 충분히 발전시킨 것은 『조종』(Jacques Derrida, Glas, Paris: Galilée, 1974)에 있어서일 뿐이다.

4) Jacques Derrida, «De lʼéconomie restrainte à lʼéconomie générale. Un hegelianisme sans réserve»(1967),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 Seuil, coll. «Points», 1979, p.369-407.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Form Restricted to General Economy: A Hegelianism without Reserve”, Writing and Difference, trans. Alan Bas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5, pp. 317-350〔ジャック・デリダ「限定経済から一般経済へ 留保なきヘーゲル主義」,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所収, 合田正人・谷口博史訳, 法政大学出版局, 2013年, 505-564頁〕.

5) Derrida, «De lʼéconomie restrainte à lʼéconomie générale»., p.397; p.342 for the English translation 〔同前, 548頁〕.

6) Ibid., p.399; English translation, p.343〔同前, 551頁〕.

7) 이것은 맑스에 대해 암시된 〔데리다의〕 견해이기도 한 것 같다. 즉, 물건[物]이 이러저러한 목적을 위해 이용되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으로서 정의되며, 인식된 그 순간부터, 그것은 순환 속에 기입된다. 달리 말하면, 사용가치는 이미 교환가치의 ‘유령’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8) Derrida, «De lʼéconomie restrainte à lʼéconomie générale»., p.398; p.343 for the English translation〔同前, 550頁〕.

9) Loc.cit〔同前〕.

10) Derrida, «De lʼéconomie restrainte à lʼéconomie générale»., p.399; p.344 for the English translation〔同前, 551頁〕.

11) Jacques Derrida, “Economimesis”, In: Sylviane Agacinski et al, Mimesis. Des articulations, Paris : Aubier-Flammarion, coll. «La philosophie en effet», 1975, pp.71-72.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Economimesis, trans. R. Klein, Diacritics, Vol. 11, No.2, Summer 1981, p.11〔ジャック・デリダ『エコノミメーシス』, 湯浅博雄・小森謙一郎訳, 未來社, 2006年, 40-42頁〕.

12) Ibid, р.58; English translation, p.4〔同前, 7頁〕.

13) Glas, op.cit., pp.265-272. 이것은 이후 G라고 약칭하고 쪽수를 표시한다.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Glas, trans. John P. Leavey, Jr., Richard Ran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6. 영역판은 Gen로 약칭한다. 또한 인용은 왼쪽의 헤겔에 대한 대목에만 하기로 한다.

14) G. W. 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Gutenberg-Project-DE, 2000, VII.A.a. Das Lichtwesen 〔G. W. F. ヘーゲル『精神現象学』下巻, 樫山欽四郎訳, 平凡社, 1997年, 284-287頁〕.

15) Loc.cit〔同前, 285頁〕.

16) 이 표현은 빛에 관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절의 말미를 프랑스어로 본뜬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는 제물 혹은 희생(Opfer)이 홀로코스트(holocauste)라고 번역되어 있다. “순수한 빛은 자신의 단일성(simplicité)을 분리된 형식들의 무한성으로서 산종하고(wirft auseinander), 자신을 대자 존재의 희생에〔en holocauste〕 제공한다. 그래서 개별자는 그 실체에 있어서 존립하게 되는 것이다La lumière pure dissémine (witft auseinander) sa simplicité comme une infinité de formes séparées, et se donne en holocauste au pour-soi, en sorte que le singulier prenne à sa substance sa subsistance”(Cited in Glas, op.cit., p.268. 강조는 인용자)〔『精神現象学』下巻, 287頁参照〕.

17) [옮긴이] 프랑스어 원문과 대조한 결과, doit가 두 번 쓰인 것이 아니라 doit와 débit가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두 단어는 회계 용어로는 모두 ‘차변’이라고 한다. doit는 이외에도 부채나 채무라는 의미가 있고, ‘대변’을 뜻할 때는 avoir와 짝을 이룬다. 한편 débit가 ‘차변’을 나타낼 때에는 crédit(대변)과 짝을 이룬다. 이 단어는 채무 계정, 매상 전표의 작성 등을 뜻한다.

18) 증여는 채무/의무(devoir)뿐만 아니라 비인칭의 “~해야 한다”(il faut)에도 이어지고 있다. Cf. the law of the “il faut” in DT, 85-86/GT, 62-63. “주어야 한다”(one must give), 그렇지만 동시에 “증여와 관대함의 과잉[초과]을 제한해야만 한다(il faut), 에코노미에 의해, 수익성, 노동, 교환에 의해 그것들을 제한해야 한다il faut limiter l'excès du don et de la générosité, les limiter par l'économie, la rentabilité, le travail, l'échange.” “~해야 한다”의 차원은 증여의 행위수행적인 측면을 그때마다 개시한다. 비록 증여에 대한 기술이 이론적이라고 해도, 거기에 순수하게 사실 확인적인 것은 없다.

    채무/의무(devoir)에 관해 말하면, 그것이 증여가 요구하는 절대적인 의무가 되는 바로 그때, 증여의 아포리아와 유사한 아포리아를 낳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의무/채무는, 그것이 증여와 상관관계를 갖도록 (이때 원을 이끄는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correlation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 과잉적인 것, 의무를 넘어선 것이 될 것이다. 불가능한 증여는, 그것과 ‘상관적인’ 것으로서, 본래의 의무/채무, 어떤 차용 이전의 채무, 의무 없는 의무를 갖고 있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타자에의 통로를 열고, 타자의 형상을 주는 것이며, 여기서의 타자는 ‘내’가 있기 이전에 내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는 이 의무/채무를 다음과 같이 언표하고 있다.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 의무, 그것이 의무이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빚져서는 안 되는 의무, 상환할 채무를 갖지 않는 의무, 채무 없는 의무이기 때문에 의무 없는 의무 … 의무란 이처럼 의무를 넘어서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의무 없이, 규칙이나 규범 없이 행위하기를 요구한다. … 의무를,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 의무라고 부르는 것은, 더 좋게 말하면(더 나쁘게 말하면) 아무것도 빚져서는 안 되는 의무라고 굳이 부르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a duty that owes nothing, that must owe nothing in order to be a duty, a duty that has no debt to pay back, a duty without debt and therefore without duty. … Duty must be such an over-duty, which demands acting without duty, without rule or norm…. Who will dare call duty a duty that owes nothing, or, better (or, worse), that must owe nothing?”(Jacques Derrida, Aporias, trans. Thomas Dutoit, Stanford :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p.16-17〔ジャック・デリダ, 『アポリア』, 港道隆訳, 人文書院, 2000年, 40-41頁〕). 1980년대 말부터, 데리다는 끊임없이 이 의무의 아포리아로 되돌아가고, 그것을 책임이나 윤리, 결정의 질문에 결부시킨다. 이 아포리아는 우리가 타자의 타자성을 “승인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함축하며, 그것은 “차이들, 고유언어, 소수자들, 특이성들을 중시하라고 명하는 것이다dictates respecting differences, idioms, minorities, singularities”(Jacques Derrida, The Other Heading, trans. Pascale-Anne Brault, Michael B. Naa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 pp.76-78〔ジャック・デリダ, 『他の岬』, 高橋哲哉・鵜飼哲訳, みすず書房, 1993年, 60-61頁〕).

    증여는 의무/부채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과잉적 의무, 의무를 넘어선 것도 또한 증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19) “증여가 타자를 빚지게 하고[채무 속에 집어넣고]le don endette l'autre”, 한정경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것은 “유독한 것(mauvais)”이 된다(DT, 25/GT, 12). 데리다는 원을 산출하고, 자기 자신에 반하는 (관대함 등을 대신해 계산하는) 이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영어의 gift와 독일어의 Gift(poison)라는 한 쌍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마르셀 모스가 그것을 주제화했듯이(Cf. Marcel Mauss, The Gift, trans. W.D.Hall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2, p.186n122〔マルセル・モース『贈与論』, 森山工訳, 岩波書店, 2014年, 387-389頁〕), 데리다는 선물을 의미하는 이 단어의 양의적인 어원에 대해, 이미 1972년의 『산종』에 수록된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에서 언급하고 있다(“La pharmacie de Platon”, Dissémination, coll. «Points», 1993 (1972), p.163n4〔ジャック・デリダ「プラトンのパルマケイアー」, 『散種』所収, 藤本一勇・立花史・郷原佳以訳, 法政大学出版局, 2013年, 209頁〕).

20) 영어의 시제의 규칙은 프랑스어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프랑스어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한다.

21) Jacques Derrida, La Dissémination, Paris: Seuil, coll. «Points», 1993 (1972), p.374〔同前, 495頁〕. 訳出は筆者。

22) Ibid, р.375〔同前, 497頁〕.

23) ジャック・デリダ, 『他者の言語』, 高橋允昭編訳, 法政大学出版局, 1989年, 142頁。

24) G, 269; DT, 22, 32-37.

25) 긴박과 긴박구조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Jacques Derrida, La vérité en peinture, Paris: Flammarion, 1978, рр.366, 383, 385, 388-392, 403-406〔ジャック・デリダ『絵画における真理』下巻, 阿部宏慈訳, 法政大学出版局, 1998年, 233, 258, 266-273, 287-293頁〕 Jacques Derrida, La carte postale: De Socrate à Freud et au-delà, Paris: Flammarion, 1980, рр.365, 370-375, 415-421, 423-432.

26) 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으로는 다음을 보라. DT, 32-36/GT, 18-22.

27) 그것은 바로 위에서 자세히 서술한 논리 때문이다. Jacques Derrida, «Ousia et Gramme», Marges..., p.31-78〔ジャック・デリダ「ウーシアとグランメー」, 『哲学の余白』上巻所収, 高橋允昭・藤本一勇訳, 法政大学出版局, 2007年, 77-136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대해 서술된 대목을 보라(61-66〔同前, 111-118頁〕).

28) Marcel Mauss, op.cit., p. 45〔『贈与論』前掲, 210頁〕. 그래서 그는 “어떤 기간을 둔 다음에 해야 할 의무”에 대해 언급하며, 데리다도 『시간을 주다』에서 이것을 인용한다(DT, 57/GT, 38-39).

29) Jacques Derrida, «Différance», Marges..., op.cit., p. 20.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Margins of Philosophy, trans. Alan Bass, Chicago University Press, 1982, p.19〔ジャック・デリダ「差延」, 『哲学の余白』上巻, 前掲, 62頁〕.

30) Ibid., pp.1-29〔同前, 31-75頁〕.

31) 『他者の言語』, 114頁。

32) Marcel Mauss, op. cit., pp.13-15〔『贈与論』前掲, 91頁〕, DT, 99/GT, 74.

33) Marcel Mauss, op.cit., p.14〔同前, 94頁〕.

34) Claude Lévy-Strauss, Introduction to the Work of Marcel Mauss, trans. Felicity Baker,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7, pp.58-59〔クロード・レヴィ=ストロース「マルセル・モース論文への序文」, M・モース『社会学と人類学』所収, 有地亨・伊藤昌司・山口俊夫訳, 弘文堂, 1973年, 38頁〕.

35) Ibid., p.59〔同前, 39頁〕.

36) Jacques Derrida, «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dans le discour des sciences humaines»,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op.cit., pp.423-425〔ジャック・デリダ「人間科学における構造, 記号, 戯れ」,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 前掲, 585-587頁〕. 이 초기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접근법을 언급하기 전에, 다양한 방식이기는 하나, 시간이나 역사 같은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주석이 있다는 것도 기록해두자. 〔데리다에 따르면〕 레비-스트로스는 역사를 공시적인 상징적 질서로 환원하고, 그 때문에 시간화나 시간적 지연 등등의 문제를 등한시하고 있다. op.cit., pp.426-427〔同前, 587-588頁〕.

37) “폴 드 만의 초빙을 받아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나는 예일에서 ‘물건’에 관한 강의를 했다. 각각의 해에, 나는 두 개의 평행하는 수업을 하고, 하나는 하이데거를 따라서, 다른 하나는 퐁주(1975년), 블랑쇼(1976년), 그리고 프로이트(1977년)을 따라서 ‘물건’을 다뤘다”(Jacques Derrida, «Psyche. Invention de lʼautre», Psyche. Invention de l’autre, t.I, Paris, Galilée, 1998 (1987), p. 19-20/ “Psyche: Invention of the Other”, Psyche. Inventions of the Other, trans. Catherine Porter, Stanford :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7, p.412〔ジャック・デリダ『プシュケー, 他なるものの発明I』, 藤本一勇訳, 岩波書店, 2014年, 16頁〕). 또 Jacques Derrida, «La Chose», unpublished seminar (1975-1978), UC Irvine, Critical Theory Archive, Jacques Derrida Papers, Coll. Number MS-C001, Box 13: Folders 1-2, 11-17; Box 14: Folder: 8도 참조.

38) Jacques Derrida, «Survivre» (1979), Parages, Paris : Galilée, 2003 (1986), p.151/163〔ジャック・デリダ「生き延びる」, 『境域』所収, 若森栄樹訳, 書肆心水, 2010年, 236頁〕. 번역은 필자.

39) Jacques Derrida, «Pas» (1976), Parages, op.cit., p.62/67〔ジャック・デリダ「パ」, 前掲書所収, 89頁〕.

40) Ibid〔同前, 89頁〕.

41) Jacques Derrida, Signéponge/ Signsponge (1975), bilingual edition, trans. Richard Ran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4, p.14/15〔ジャック・デリダ『シニェポンジュ』, 梶田裕訳, 法政大学出版局, 2008年, 19頁〕.

42) Ibid, р.12/13〔同前, 17頁〕(일역자 : 번역수정). “물건”에 대한 강의의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이미 물건과 이타성[他性]의 연관에 대해 절박하다. “왜냐하면 물건의 본질적인 특성은 그 바꿀 수 없는 이타성(inalterable altérité)이기 때문이며, 물건이란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타자, 그 이타성이 환원되고 고유화되고 가족화될 수 없는 타자이기 때문이다”(Jacques Derrida, «La Chose», Box 13: Folder 1, “La Chose (1)”, p.6. 인용 대목의 번역은 필자).

    부채성과 책무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건은 어떤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는 다른 것인데, 그것은 뭔가 어떤 것이라는 형식 아래서 생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이 물건을 권리 있는 것으로 삼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할 의무(le devoir)에 의해, 모든 때에 이 물건에 속박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부채를 주고 부채를 지게 하는 물건이다”(Jacques Derrida, «La Chose», Box 13: Folder 1, “La Chose (2)”, p.4).

43) Jacques Derrida, Signéponge/ Signsponge, op.cit., р.48/49〔『シニェポンジュ』前掲, 57頁〕.

44) Jacques Derrida, «Survivre», op.cit., р.181〔「生き延びる」前掲, 262頁〕.

45) Jacques Derrida, Signéponge, op.cit., р.14/15〔『シニェポンジュ』前掲, 19頁〕. 강의에서는 물건이 어찌해서 단독적[특이한]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데리다는 마침내 대문자 T로 Thing 이라고 부른다(프랑스어로는 Chose)고 명확하게 적고 있다. 그것은 사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며, 동시에, 물건이라는 개념이나 물건의 물성(物性) 등등과도 다른 것이다. “물건이란 단독성이며, 그 단독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 하지만 물건은 존재한다”(Jacques Derrida, «La Chose», Box 13: Folder 1, “La Chose (2)”, p.4). “물건을 물건-이다로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하는 물건의 물-성(物-性)은, 물건의 단독성이며, 단독성으로서의 물건이다”(Jacques Derrida, «La Chose», Box 13: Folder 1, “La Chose (3)”, p.4).

46) Jacques Derrida, Signéponge, op.cit., р.16/17〔『シニェポンジュ』前掲, 20頁〕.

47) 『他者の言語』, 118頁。

48) Derrida, Signéponge, op.cit., p.17〔『シニェポンジュ』, 前掲, 20頁〕.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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