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ltitude/Solitude

: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네그리, 포콕, 알튀세르

우지 켄다(王寺賢太, 사회사상사·프랑스문학)

현대사상, 20137월 특집호, 129-143頁(각주는 생략했다)



국가를 세우려면 혼자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

공산주의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알튀세르

 

시대착오적인 사상사가 : 구성적 권력vs 마키아벨리적 모멘트

구성적 권력 : 근대성의 대안들에 관한 논고(Le pouvoir constituant : Essai sur les alternatives de la modernité)(1992)의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뿌리 깊게 시대착오적인 사상가이다. 소련 붕괴의 이듬해, 역사의 종언이 운운되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마키아벨리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정치사상사를 다시 말하고, 그것을 결코 끝나지 않는 혁명 사상의 계보로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네그리는 이 책에서 구성된 권력에 대해 구성하는 권력편에 서서, 근대사에는 구성하는 권력과 그 주체인 다중이 편재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가 혁명을 어쩔 수 없이 수렴収束시키는 인과의 계열에 역공을 가하면서, 되풀이하여 혁명의 사전(事前)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에게 특유한 시대착오가 있다. 종종 과감한 단정이나 무리가 추론에 의해 이뤄지는 이 시대착오를 파악하고, 네그리의 작업이 지닌 결점을 들춰내는 일은 쉽다. 다만 그 때에는 역사가가 사후로부터, 객관적으로 역사를 말하려고 할수록 역사, 혹은 시간의 어떤 차원이 간과된다는 것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그리의 시대착오는 바로 그런 차원, 인간 주체가 그 안에서 존재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시간의 창조적인 차원을 탈환하기 위한 방법이다. 1990년대,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이었던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가, 2000년대에 반-전지구화 운동의 사상가로 일약 시대의 인물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구성적 권력맑스를 넘어선 맑스(1978)와 스피노자론인 야생의 아노말리(1981)를 이어받아 네그리 개인의 작업의 집대성을 이루며, 2000년대에 연달아 간행된 마이클 하트와의 공저 제국3부작의 현대정치경제론을 예고하는 전회점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서 중심에 놓인 구성적 권력이나 다중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에 관한 정치적 독해로부터 도출됐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구성적 권력에서 제국이후의 연결을 나타내는 것은 네그리/하트의 가장 논쟁적인 개념인 제국이며, 다중에서 <제국>의 정치적 재편성의 도식을 제공하는 일자소수자다수자로 구성된 폴리비오스적 혼합정체론이며, 공통체에서 제창되는 소유 없는 공화국공화국개념이다. 왜냐하면 구성적 권력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발단하고, 마키아벨리를 거쳐 근대 초기의 대서양 양안에 계승된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근대혁명사상의 계보로 고쳐 읽은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때 네그리에게 최대의 참조항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1976)J. G. A. 포콕이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미국에서, 공공선의 실현에 헌신하는 시민의 멸사봉공의 군사적·정치적 에토스 에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보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추적하며, 공화국의 통일을 방어하는 시민의 ,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공화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운명사이의 대립도식으로부터 역사주의의 생성을 묘사해낸 정치사상사가이다. 여기서 역사주의는 역사의 운동에 인간의 활동을 관여시키고, 역사 자체를 새로운 가치나 규범을 산출하는 것으로 그려내는 시도를 가리킨다.

실제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에서, 포콕을 좇아, 16세기 피렌체의 마키아벨리로부터 청교도혁명기 잉글랜드의 해링턴을 거쳐, 미국독립혁명의 이데올로그들까지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따라간 후, 그것에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관한 사상사적 분석을 접목하고 있다. 포콕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 재고가 자연법론과 계약론의 계보를 중시하는 서구정치사상사에서 법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이의제기인 한, 이미 스피노자론에서 -법제주의를 선명하게 했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서 큰 자극을 받은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원래 17세기 네덜란드의 공화주의자 스피노자의 정치적 구성 la constitution”의 논리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론에서 헌법제정권력 le pouvoir constituant”을 법학적인 틀로부터 뽑아내어, 정치체를 구성하는 다중의 힘으로서 위치시킨 후에, 네그리는 포콕에 의거하면서, 구성적 권력을 근대혁명사상의 계보에 부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히려 포콕과 네그리의 차이일 것이다. 그 차이는 미국독립선언혁명으로 책을 닫는 마키아벨리적 모멘트대서양적인 전망과 러시아 혁명을 시야에 넣은 구성적 권력대륙적인 전망을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분명해진다. 그 차이는 아렌트의 혁명론이 말하는 정치혁명사회혁명의 계보의 차이이기도 하다. 원래 운명에 대한 의 되풀이되는 패배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역사주의에 근거한 보수주의를 표방하게 되는 포콕과 의 에토스를 본성상 끝나지 않는 혁명의 잠재력에 결부시키는 네그리는 정치적 입장이 전적으로 다르다. 이하에서는 구성적 권력에서 전개되는 마키아벨리론에 초점을 맞추서 네그리가 얼마나 포콕을 뒤따르면서도 포콕과 갈라서는가를 밝히고 싶다. 이 두 사람에게 마키아벨리는 각각의 책 전체의 테마를 단숨에 제시하는 사상가이며, 그곳에서는 모두 시간과의 관계에서 의 정치학이 문제가 되는 이상, 네그리의 근대혁명 사상사의 특이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것보다 더 나은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우리는 또 한 명, 네그리의 시대착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어떤 철학자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1990, 네그리가 책임 편집자 중 한 명이던 잡지 전미래의 창간호에 게재된 마키아벨리의 고독 La solitude de Machiavel의 저자 루이 알튀세르이다. 아이러니한 공화주의의 역사가와, 고독 속에서 죽음의 침대에 있었던 맑스주의 철학자 사이에서, 바닥없이 낙관주의적으로도 비치는 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가 스스로 껴안으려고 한 고독을 분명히 밝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본고의 목표이다.

 

변동의 정치학 : 정치이론가의 탄생

덕과 운명 : 마키아벨리적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의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중심에는 군주론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놓여 있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마키아벨리 해석사에서의 큰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했다. 한편으로, “이탈리아적 전통을 이어받은 자는 마키아벨리즘책으로 유명한 군주론을 특권시하고, 이 책에서 획득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개념이 마키아벨리의 전체 저작을 지배한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적 전통에는 데 산크티스(Francesco de Sanctis)부터 그람시를 거쳐 트론티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그 끄트머리에는 그람시를 토대로 하면서 군주론의 저작을 국민국가시작의 사상가로 위치시킨 알튀세르도 연이어 있다. 다른 한편,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소재로 공화국론을 전개하는 로마사논고를 중시한 영미의 연구자들은 이 책의 공화주의를 마키아멜리의 중심적 사상으로 평가하면서, 군주론을 이론적으로 애매한 상황적 산물로 간주한다. 이런 연구자들 중 최대 거물이 포콕이다. 즉 네그리에게 군주론로마사 논고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알튀세르와 포콕 사이에서 마키아벨리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에 다름없으며, 그 반대도 또한 참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네그리가 갑작스럽게 이 커다란 문제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군주론이전,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 시절까지로 소급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이론적 경력을 하나하나 추적해간다는 점이다. 게다가 네그리는 로마사 논고이후, 피렌체사를 필두로 하는 후기의 저작에 대해서도 논급하기 때문에, 이 마키아벨리론은 마치 피렌체의 정치사상가에 대한 응축된 이론적 전기(biography)의 양상을 띤다. 알튀세르에게서도 포콕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마키아벨리의 에 대한 이런 관심을 통해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처럼 우뚝 일어서고 부서지며, 재차 더욱 강고하게 일어서려고 하는 모습을 그려내려고 하는 것이다.

 

잰 걸음의 태양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표면을 이미 1494번이나 돌았네. / 그 이후, 서로 다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인들에게 문을 열었고, 야만인들에게 짓밟히는 고통을 겪었다네.

 

마키아벨리의 10년사(1504)에서 인용한 이 문장을 네그리는 자신의 마키아벨리론의 첫머리에 둔다. 1494년 프랑스군 침공에 직면해 용병으로 맞선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맥없이 패배했다는 것을 전하는 구절이다. 그것을 계기로 시작된 11차에 걸친 이탈리아 전쟁은 유럽에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한 세력균형의 체계를 산출하고, 이탈리아의 공화국들로부터 알프스 북부에서 할거[거점을 두고 활동]한 군주정 국가로 결정적으로 패권을 이행시켰다. 이 사건이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과 신대륙발견(1492)과 더불어, 근대 유럽의 기점으로 지목된 것도 그 때문이다. 포콕은 이미,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가 일단 붕괴한 1494년부터 근대 공화주의 사상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이 날짜는 단순히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정치상황의 변화의 지표가 아니라 근대의 가장 근원적인 소여가 개시된 날짜이다. 그 주어진 이름이 바로 변동[변전] mutatio’이다. 10년사의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 이후에 변동의 시작을 돌이켜봤듯이, 네그리는 근대의 끝에서부터 근대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거기에서 변동을 찾아내고 있다.

다만, 마키아벨리는 결코 변동을 소여로서 찾아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미 외교관 시절의 제언에서, 그는 무력양식(良識)’의 종합에 정치적 변동을 관장하는 활동적 원리가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관찰의 대상이든 활동의 대상이든, 거기서는 변동이 주체에 대립하는 객체에 머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더 중요한 한 걸음은, 주객의 대립 이전의 차원에서 변동을 파악하고, 주체의 활동을 변동과 일치시키고, ‘변동그 자체를 통째로 주체화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네그리가 자연주의적 지평으로부터 역사적 구조로라고 부르는 이 이행과 더불어, “변동은 인간이 그 내부에서 활동하고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 그렇게 구성된 현실을 돌파해서는 새로운 현실을 다시 구성하는 박동에 의해 획기화된 역동적인 과정이 된다. 피렌체에서, 혹은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 왕국의 궁정에서, 역사적 회고를 감안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고, 그 장래를 점쳤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미 변동그 자체, ‘시간그 자체에 구성하는 권력이 내재한다는 입장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키아벨리가 이 역사의 역동성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긴 과정을 경과해야 했으며, ‘생명의 철학같은 역사주의로 마키아벨리의 정치가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긴장의 누적이며, 폭발의 기대이며, 기성 질서와 균형의 파탄으로 향하는 잠재력을 품고 있는 중층적 결정의 힘이 존재자 하에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런 중층적 결정의 힘 = 위로부터의 결정의 힘 la surdétermination”을 체현하는 군주의 정치기술을, 1502년부터 1504년에 걸쳐 체류한 체사레 보르자의 궁정에서 목격했다. 시간 속에서 비롯되고 변동하는 상황 속에서 호기(好機)를 붙잡고, 시간을 지배하기 위한 그 기술 , ‘운명에 맞서는 의 관찰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또한, 관습에 의한 것도 계약에 의한 것도 아니라 활동 그 자체에 입각하여 자기를 유지하는 새로운 주권의 개념을 품게 된다.

그러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에게 한층 더 중요한 전기(轉機)라고 생각하는 것은 1503년의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이었다. 그의 아버지교황 알렉상드르 6세 사후, 우유부단을 드러내고, 순식간에 상황이 그를 앞질러간 자신의 영웅의 모습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있어서의 의지주체적 기투의 중요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역사적 시간을 내면화하고, 인간적 시간에 통합하고, 공공연하게 드러난 잠재력을 특이한 것으로 하는 것이다.” 이후,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관찰자이기를 그만두고, 이탈리아의 종속상태를 타개하는 길을 물색한다. 정치이론가로서든, 스스로 활동의 주체로서,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본 잠재력을 제 것으로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권력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구성적 주체로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탐구는 1512,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피렌체의 공화적 정부가 붕괴하고 메디치가가 권력에 복귀하는 것과 더불어 훨씬 절박해졌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궁정에서 쫓겨나고, 투옥의 쓰라림과 조우한 이 위기적 상황 속에서 씨름했는데, 우선 공화국의 책』 ― 『로마사 논고』 ― 을 썼고, 이어서 투옥 이후,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쓰게 된 군주론이었다, 이렇게 네그리는 단정한다. 이리하여 군주론객관적인 한계와 주관적인 절망의 특이성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지어진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우리의 시야에 부상하는 것이다.

 

구성적 원리의 고독 : 군주론

군주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네그리는 맨 처음에,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la principauté”가 폴리비오스 식의 정체 분류론에서 말하는 군주정귀족정도 아니고, 따라서 공화국의 책이 다루는 공화국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고찰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역사적 주체”, 혹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원리에 바쳐지고 있다. 네그리에게 군주론구성적 원리의 책이며, 정치체를 정치체로서 구성하는 기초조건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론적책인 것이다.

하기야 이 해석 자체가 반드시 네그리의 독자적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논의를, 활동 그 자체에 의해 정당성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정치적 혁신자에 대한 고찰로 위치시키는 포콕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국민적 국가의 시작을 사고한 책으로 위치시키는 알튀세르도, 그다지 다른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렌트도 서양 근대에서 최초로 국가의 창설을 사고한 인물로 마키아벨리를 위치시켰다. 그러나 이 구성적 원리의 급진성을 평가하면서 네그리가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군주론에 내포된 아포리아이며, 실천적인 불능(不能)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불능을 지적할 때에, 네그리가 참조를 요구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이다.

 

이 원리가 지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존재론적 깊이를 부정하려고 한다든가, 그 고독과 기투의 반전이 얼마나 강력한 삶의 원천을 나타내는가를 잊자는 것이 아니다[주는 여기에 붙는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혁신은 귀결의 공허 위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나 그 때문에 절망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실제,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원리는 여기에서 전복적이며, 전복적인 로 머문다. 그의 사고의 운동은 적대의 운동이지 경향의 운동이 아니며, 위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해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혹은 그 해결을 찾아내려고 해도 미리 그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기투의 반전은, 혹은 (훗날 출판된 마키아벨리와 우리에 입각해 말한다면) 실천적·이론적인 불능역능의 교착은, 그가 자기 스스로는 해결 불가능한 물음을 제기한 점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달성[성취]된 사실로서의 국가의 정당성을 묻는 근대의 모든 정치철학자들과 갈라서며, ‘고독속에서, “성취[달성]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국가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현실적인 조건을 사고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의 시작의 불가능성과 더불어, 시작에 있어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효(実効)적인 힘을 폭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말투는 충분히 알고 있기에, 네그리는 이렇게 매우 알튀세르적인 반전에 그치려고 하지 않는다. ‘역능 = 잠재력 la puissance’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 네그리에게 알튀세르의 불능 l’impuissance’고독 la solitude’은 너무도 관념적으로 비쳤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때, 네그리의 유물론이 시간과의 관계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군주론에는 전복의 운동만 있으며 경향의 운동이 결여되어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위기를 인식하면서 해결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으며,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무엇보다도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알튀세르와 네그리의 관계와 관련된 한, 사태는 조금 복잡하다. ‘역능불능, 혹은 고독다중, 구성적 권력에 있어서도 또한, 서로를 뒷받침하면서, 끊임없이 반전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네그리에게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네그리는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 알튀세르를 호출하고,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성원을 보내게 되는데, 그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제 잠시 동안 네그리의 논의를 추적해야 한다.

일단 군주론의 한계를 시간으로부터의 고립,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견줘본 뒤에, 네그리는 이 책의 존재론적 깊이와 실천적인 불능의 교착을 더욱 파고들어 검토한다. 그때 네그리가 우선 주의하는 것은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이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새로운 군주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은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구성적 원리무장한 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마키아벨리에게서의 군사력 문제에 대해서 아렌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네그리는 그것을 기피해야 할 정치적 폭력의 행사 문제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시민은 스스로 무기를 취해 공화국을 방어하는 전사여야 한다는 주장에 고전적 공화주의의 한 가지 핵심을 인정한 포콕의 고찰이 똬리를 틀고 있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포콕을 따라 말하면, 유럽의 군주정 국가가 국왕 상비군을 정비했던 시대에 시민의 민병조직에서 공화국의 자유의 요체를 본 마키아벨리의 관점으로, 근대주권국가에 의한 정당성 있는 폭력 행사의 독점”(베버)에 근본적인 이의를 들이는 현대적인 사정거리도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에서 마키아벨리의 한계를 간파한다. 정말로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군사력의 문제는 단순한 폭력행사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력은 정치체를 조직화하고, 그 구성원의 을 함양하므로 평상시에도 국가의 구성의 역동성을 체현하기 때문이다.새로운 군주에게 이 절대적인 원리인 이상, 군사력이 절대화된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의 점에 있다. 무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군주를 위한 것인가, 인민을 위한 것인가?”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는 이 가장 긴요한 물음에 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네그리는 민주정의 선택 그 자체의 포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도 지적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무장하고 덕이 높은 군주에게 구성적 원리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그 군주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거기에서는 분명히, 힘이 인식을 낳고, 인식이 힘을 낳는다는 직관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새로운 군주는 단순히 국가의 저자일 뿐 아니라 논리와 언어의, 혹은 윤리와 법률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다만, 체사레 보르자라고 생각되는 정치적 영웅을 모델로, 군주가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을 역설하는 데 머문다. 그리고 이 윤리적 호소는 구성적 원리의 존재론적 차원 파고 들어갈수록 강조되고 공회전하게 되는 것이다.

강렬한 군사주의와 극단적인 주관주의 네그리가 군주론의 한계로 보고 있는 것은 네그리 자신도 포함한 70년대의 좌익운동의 조류들을 생각나게도 하는 그런 전복으로의 과격한 경도이다. 구성적 원리의 운동은, 흡사 체사레 보르자가 순식간에 몰락했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장애에 부딪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장애의 유래를 물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 끊임없이 새롭게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려고 더 한층 군사력과 주관성에 박차를 걸고, “전방으로의 도주를 결행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 하에서 실행되는 작전의 절대성 외에 기초를 갖지 않는 이 [구성적] 원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구성적 권력이란 모든 한계의 돌파이며, 결코 편히 쉬지 않는 의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전방으로의 도주에 불모의 과격주의의 귀결을 보고 그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전방으로의 도주에서 군주론의 중심적인 주제를 간파한다. ‘구성적 원리의 비극이라고도, ‘덕의 비극이라고도, ‘정치적인 것의 비극이라고도 불리는 주제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비극은 필연적이다.”구성적 원리가 자신의 활동에 의해,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하는 이상, 그 활동 자체는 창조되어야 할 가치의 직전에, 진위와 선악의 저편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그 활동은 항상 사후의 관점에서 판가름될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성적 원리는 항상 우연적인 상황에서 사물의 실효적인 원리”(마키아벨리)에 직면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원리의 활동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활동 그 자체를 배반하고, 되풀이되는 활동에 대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네그리더러 말하게 하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다양한 상황을 열거하고, 지칠 줄 모르게 권모술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시도하면서, 항상 뜻대로는 안 되는 결과의 배신에 우롱당할 수밖에 없는, 이런 구성적 원리의 비극을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네그리의 비극에 대한 고찰은, 틀림없이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포콕은 이미, 군주론의 주제가, 부단한 행위의 연속에 의해 자기 정통화를 꾀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 정치적 혁신자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항상 결과의 타율 행위의 결과가 바로 그 행위의 의도를 배반한다는 것 에 의해 아이러니컬하게 배반당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님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 있어서 거기에, ‘운명을 앞에 둔 의 불행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 불행의 인식이야말로 정치질서의 정통화는 단기적인 혁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기적인 지속 속에서 관용에 의해 도모되는 것에 다름없다고 하는, 포콕의 역사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입장의 배경에 똬리를 틀고 있다. 아무래도 위대한 역사가에 어울리는 사후의 사상이다.

포콕과 더불어 구성적 원리의 위기를 눈여겨보면서, 네그리는 이 역사가의 비관주의를 단호하게 물리치려고 한다. 정말이지, 군주론의 말미에서 이나 자유의지에 의한 운명의 지배의 가능성이 역설되고, 도래할 새로운 군주에 이탈리아 재건의 꿈이 맡겨져 있다는 것을 보고, 네그리는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막다른 골목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을 단념하고, ‘구성적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군주론에서는 구성적 원리절대성이 철저하게 추구되지 않고 끝나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군사력이나 주관의 절대화 등에는 전혀 없다. 그와 반대로, 절대화가 불철저했다는 것, 그리고 운명에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야말로 문제이다. 이리하여 군주론에서 로마사 논고로의 행적이, ‘구성적 원리의 심화의 과정으로서 독해된다. 마키아벨리는 고독의 사상가로부터 다중의 사상가로, 그리고 스피노자보다 훨씬 선구적으로 절대적 통치로서의 민주정의 사상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다중의 분리로부터 민주정의 구성으로 : 로마사논고

다만 네그리의 군주론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단순한 직선적 도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에게서 군주론의 사정거리는, 로마사논고와의 상호관계에 놓여서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로마사논고의 사정거리도, 군주론이 가져온 질적인 비약없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콕은 로마사논고에서의 로마를 여러 공화국들 중의 새로운 군주에 빗댔다. 네그리는 그 비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1512년부터 1513년에 쓴 군주론공화국의 책, 군주론이전에 기획되고, 일단 중단된 후에 1515년부터 1517년에 완성한 로마사논고의 생성과정 속에 다시 놓는 것이다.

당장 네그리는 로마사에서 소재를 취하는 로마사논고의 정치적 고찰이 고대를 모델로 하는 온갖 사고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서론에서 얘기되는 고대인의 범례는 인간 본성이나 정념에 대한 보편적인 사정거리를 가진 고찰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며, 마키아벨리는 이 정념론을 매개로, 역사 속에 주체를 우뚝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로마사논고에서는, 경험론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가 처음부터 돌파되는 것이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로마사논고1편에서 제시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체론이, 폴리비오스적인 도식으로부터 이탈한다는 지적이다. 정말이지, 거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분류에 기초하여, 군주정에서 폭적, 폭정에서 귀족정과 과두정, 나아가 민주정과 무정부상태로의 순환이 얘기되고 있다. 또한 그 정체의 부패의 순환에 맞서는 최선의 정체로서, 로마공화국의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혼합정체의 우위조차 역설될 것이다. 그러나 네그리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러나 [혼합정체의 분석에 있어서] 민주정 원리의 도입은 전적으로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바로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 헌정은 혼합적인 한에서, 가장 완성된 공화국을 형성했다. 이 완성에 이른 것은 인민과 원로원의 분열 la désunion에 의해서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열로부터 소요로 가득 찬 공화국이 생기고, 소요로부터 공화국에서의 자유를 방어하는 좋은 질서가 생긴다. 이리하여 로마사논고의 고명한 테제가 민주정의 원리의 도입과 결부되는 것이다. 다만 그때, 일반적으로는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에 기초한 헌정론의 틀을 돌파할 때까지 극화(劇化)시킨다. 그 결과, ‘la constitution’은 이제 헌정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성의 문제로서 논해진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그 돌파를 수행하는 것이, 로마사논고117·18장이었다. “부패한 인민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는, 자유를 계속 시키는 것은 곤란하다고 역설한 뒤, 또한 부패한 도시국가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정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가, 또한 자유로운 정체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에는 그것을 도입할 수 있는가라고 마키아벨리가 묻는 대목이다. 네그리는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 정체의 부패아 자유의 상실을 필연으로 보는 역사가의 비관주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혐오를 읽어낸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군주론에 씨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군주론은 이리하여 폴리비오스적인 비관주의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부패와 자유의 상실을 필연적인 것으로 하는 순환사관을 거부하는 책으로서 재파악된다. 그때 동시에, ‘시간의 절단군주에 의한 위로부터의 결정이라는 군주론의 주제가, 역사 속의 주체의 활동의 계기를 강조하고, 그 주체의 구성 그 자체에 정치적 활동의 중심적 과제를 보는 입장과 결부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군주론구성적 원리는 인민과 원로원 사이에서 발견된 분열을 극화하고,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론의 틀로부터 다수자=다중을 분리하여, ‘인민의 창설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던 구성적 원리가 인민이라는 신체를 획득하고, 민주정을 창조하기 위한 구성적 권력으로서 재정의된다. 그것과 더불어 구성적 권력의 주체는 인민 그 자체, 혹은 인민을 구성하려고 하는 다중그 자체가 된다. ‘군주는 이 구성의 원리=시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사논고1편에 민주정으로의 지향을 확인한 후, 네그리는 2편의 을 둘러싼 고찰에 대해, 거기에서는 다중이야말로 의 집단적 주체로서 위치지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은 더 이상 단순히 운명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끊임없이 대치되는 장애를, ‘운명에 기대면서 극복하는 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덕은 산 노동이며, 생명에 대립하여 견고한 것으로 된 전통이나 권력을 조금씩 파괴할 수 있다.”, 혹은 구성적 권력다중이라는 집단적 주체와 더불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하는 경향의 운동, 혹은 자기 결정을 요구하는 투쟁이 된다. 여기에는 네그리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의 급진화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의 도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혼합정체에 기초한 공화국의 통치체제가, 교환가치로 환원된 죽은 노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사이클에 비유되며, ‘다중이 영위하는 공동의 삶 그 자체가, 삶의 재생산을 자본의 재생산과정으로부터 점차 분리시키는 산 노동고유의 생산 사이클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적 권력, 민주정구성, 로마사논고3편의 과제로서 부상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과제는, “르네상스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유를 가져다준 르네상스에 편승하면서, 특히 = 운명 la foritune’의 축적이 가져다준 나쁜 귀결에 맞서, ‘자유의 원리로 회귀하면서, ‘의 주체의 구성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때, 네그리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군사의 조직화를 통한 다중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구성이다. 이제 무장한 덕은 공화국 내부의 조직화와 의 함양이라는 문제계에 명확하게 결부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네그리는 이미 민주정은 강하게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명제를 거론하면서, 이 민주정에서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을 갖고서 조국의 방어에 종사하는 인민 그 자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때, 인민의 구성 요건, 민주정적인 자유의 구성요건으로 간주되는 것이 평등이다. “다중이 부패하지 않는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것을 기능시키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평등이 지배하는 도시국가에서는 군주국을 만들 수는 없으며, 평등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 네그리에게 있어서는 이 고찰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민주정의 예언자로 위치시키는 것을 허용한 것이었다.

그 선행하는 논의를 계승하면서,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가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로마사논고3편에서의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고대 그리스-로마 이후의 공화주의의 판에 박힌 정형화로부터 분리되고, ‘의 축적의 해악에 맞서 평등을 유지하고, 시민의 을 함양하고, 민주적인 공화국의 구성으로 향하는 정치=경제학의 효시로 위치지어진다.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가난의 정치=경제학이,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고찰을 정치적인 정념론에 접속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난의 옹호는 공화국에서의 군사력 유지의 요구에 뿌리를 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 자유를 요구하는 정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정념론에 정치적 구성에 대한 고찰의 요체를 간파했던 자신의 스피노자론과 평행하여, 정념의 정치에 대한 고찰에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론의 정점을 찾아낸다. 거기서 마키아벨리는 정념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현실의 구축, 새로운 현실의 구축을 향해 해방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해방된 정념은 공화국 속에 소요를 산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념은 욕망사랑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 한,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 정념적 주체인 다중, 그 자체 유동적이고 시간적인 존재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타성[관성]이나 객관성과는 무관하게, 공화국을 위협하는 부패와 자유의 상실에, 부단한 재창설, 부단한 개혁을 갖고 맞설 수도 있다. ‘의 주체를 집단적인 것으로 하고, 그 집단적 주체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념적인 양상에 있어서 파악함으로써, 마키아벨리는 시간의 주체화를, 즉 민주적인 자기 통치의 과정으로서의 역사적 과정의 절대화를 철저하게 추진해나간다. 네그리에 따르면,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로마사논고117~18장에서 환기된 질적 비약의 도달점인 것이다.

위와 같은 분석을, 또 다시 포콕과 맞댈 수 있을 것이다. 포콕도 로마사논고순환을 피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완전히 균형을 이룬 정체를 어떻게 수립하는가라는 폴리비오스적인 문제설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지적한 뒤,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군주를 포함한 일체의 초월적인 차원의 개입 없이, 단지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정치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논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서는, 그런 인식이야말로 군주론이상으로 파괴적인 로마사논고의 핵심에 있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포콕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관심은, 제국적 확대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 자기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유를 상실하게 된 로마공화국의 역사의 변천을, 그 특이한 헌정의 ()균형에 기초한 것으로서 분석하는 데 있으며, 원로원과 인민 사이의 분열도 군사-경제-정념-정치를 잇는 론의 분석도 이 점, 포콕의 분석은 분명히 네그리를 선취하고 있는데 그 헌정론·역사론의 틀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포콕이 집단적인 역사과정에 정치질서를 창조하고, 정통화하는 힘을 인정하더라도, 그 힘은 최종적으로 과거의 역사적 순환의 설명원리를 제공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포콕은 로마사논고에 공화주의적인 현양을 간파하기는커녕 오히려 로마의 길에는 최종적인 쇠퇴에 대한 보증은 없다. 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근미래에 있어서는, 로마의 길은 더 현명하며, 더 영광으로 가득 찬 길이다라는 아이러니한 인식을 간파하게 됐다.

로마사논고론에서도 또한, 네그리가, 최종적으로 운명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의 불행을 내다보는 포콕의 고전적 공화주의론을 전도하고, 그 틀을 돌파하고, ‘구성적 권력에까지 철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그리에게서, 마키아벨리는 결단코 역사철학자가 아니며,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네그리의 포콕에 대한 이런 관계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폴리비오스적인 균형론으로부터의 다중의 분리에 로마사논고의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을 인정한 네그리는, 동시에 그 마키아벨리의 논의가, 그람시가 말하듯이 민주적 결정의 주체형성으로 향하는지, 포콕이 보듯이 간신히 균형론의 틀 안에서의 다수자의 역할의 강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는 애매하다고 일부러 주석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유일한 해결의 길은 이런 애매함을 불식하는 것이 아니라 극화시키는 것이다.” 애매함의 극화는 단순히 공화주의적인 다수자=다중의 역할의 강조를 자의적으로 민주정의 구성으로 고쳐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마, 고전적인 공화주의의 틀로부터 다중분리하고, 그 정치적 주체화를 도모하려고 하는 네그리의 시도에 내재하는 애매함이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가 그 애매함의 이론적·실천적인 사정거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를 겨냥한 고찰이다. 그리고 포콕도 알튀세르도 논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 저작의 독해를 통해서, 네그리는 다시 이 두 명의 선행자와 교착하게 된다.

 

다중과 고독 : 피렌체사

네그리는 이 피렌체사(1525-1527 완성), 군주론로마사논고를 거쳐 완전한 표현을 얻은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책으로 위치시킨다.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근간에는, ‘사물의 질서구성적 권력에 의해 구성된 산물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으며, 그 인식은, 이미 본 듯한 시간의 주체화, 역사의 주체화의 귀결에 다름 아니다. 마키아벨 리가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라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가 실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의해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열고, 인식과 실천의 일치를 체현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이런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역사유물론이라고 바꿔 말한다. 로마나 아테네 이상으로 다수의 분열을 품고 있었던 피렌체의 공화국이, 바로 이 분열 그 자체를 동력으로서 발전을 이룩해왔다는 것을 강조할 때,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에 역사의 동력을 보는, 맑스적인 인식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피렌체사의 해석에 있어서, 네그리는 다시금, 이 책의 구성 그 자체에 들어 있는 균열에 눈길을 머문다. 그 서문도 증언하고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당초 이 역사서를 1434년의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에서의 메디치가 지배의 획기(劃期) 에서부터 얘기했는데, 그 당초의 예정을 변경하고, 1434년까지의 피렌체사 서술에 몰두하게 됐다는 것이다. 피렌체사는 그것이 구성된후의 모습에 거스르며, “구성하는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을 좇아 재독해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네그리는 우선 피렌체사후반부의 독해에 착수한다. 처음에 다뤄지는 것은, 이 후반부의 첫머리, 51장의 첫 구절이다. 마키아벨리는 거기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국가의 끊임없는 요동을,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사물의 끊임없는 동요에 빗대고, 그것을 덕의 성쇠의 순환과도 결부시켰다.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이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적냄새를 맡는 네그리는 이 자연주의비관주의피렌체사의 출발점이 있다고 단정한다. 로마사논고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다중분리구성으로 향했듯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도 또한, 이 회귀하는 비관주의내다보면서 이로부터 몸을 떼어내고 역사유물론의 정교화로 향하는 것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피렌체사후반부의 서두에는 마키아벨리의 자연주의, 의뢰주이기도 한 메디치가에 대한 예찬이 현저하게 간파된다. 서술이 기본적으로 연대기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연주의와 메디치가 예찬은 뒤로 갈수록 사라지고, 정치분석은 보다 생동감을 띠게 된다. 7편의 로렌초 디 메디치의 시대의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균형의 분석에는, 마키아벨리의 중요한 전기(轉機)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8편에서의 파치(Pazzi)의 음모의 분석에서는, 이미 유물론적이고 근대적인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 뚜렷하게 간파된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서술의 대상이 된 것은, 메디치가에 맞선 귀족집단의 반란과 메디치가에 가담한 민중봉기의 대결이었다. 거기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두 개의 구성적 권력이 격돌하는 것이며, 그 격돌을 배경으로서, “엄숙하고도 쾌락적이기도 하며, 두 명의 상반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결합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인간, 로렌초 디 메디치의 정치적 이 분석된다 네그리는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피렌체사후반부의 운동을 소묘하면서, 네그리는 전반부로 되돌아가며, 특히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까지의 15세기의 피렌체 정치사의 분석에 입각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의 주요한 논점을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15세기 중반까지, 확대된 교황권 하에서 이탈리아는 분열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군주들은 나태 속에서 비열한 무기사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침체하는 이 중세적 시간을 끊어내고, 제도의 변동을 초래한 것이,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계급투쟁의 전개였다. 실제로 피렌체사3권의 치옴피의 난(Tumulto dei Ciompi)의 서술에는, 모직물업이 번창한 당시의 피렌체의 계급분석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가 부유민영세민을 두 개의 정치적 주체로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이런 유물론적인 계급분석 이상으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진 마키아벨리의 정치-경제적 진단이다. , “피렌체는 혼합정체를 획득할 수 없다.” 근대적인 시장의 발전은, 계급투쟁의 심화가 혼합정체적인 균형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고, 그저 부유자의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뿐이었다. 떨쳐 일어난 영세민은 무장 해제되어버린 한에서, 더 이상 급진적인 민주정도 실현의 가능성을 단념해버렸다.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양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중간적인 길을 따라 좋은 법률과 좋은 질서를 대신해 유일자의 덕에 호소하고, 메디치가 지배의 현황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수자인 귀족의 패배와, ‘다수자=다중인 인민의 주변화를 통해 메디치가의 발흥이 묘사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로렌체 디 메디치가 체현하는 있을 수 없는 결합이 전망된다. 네그리는 바로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핵심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리하여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중심적 모멘트에 도달했다. 이상이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이 갖춰지고, 덕이 역사가 된 경우라도, 종합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발견에 말이다. 이상이 조금이라도 현실화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결합으로서일 뿐이며, 예외적인 경우로서 시간과 더불어 곧바로 소진한다. 단절은 사실상 종합보다도 훨씬 더 현실적인 것이다. 구성적 권력이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쟁란, 봉기, 군주 등처럼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은 결코 역사적 변증법으로는 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종합과 지양의 모멘트를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단절이야말로 구성적인 것이다.

 

군주론에서 구성적 원리로서의 을 발견하고, 구성적 원리의 위기에 직면한 후, 로마사논고에서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절대적인 구성적 과정을 파악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는 이 구성적 과정의 원동력으로서 계급투쟁을 찾아냈다. 그러나 구성적 권력의 탐구에 바쳐진 이 행로는, 피렌체사에서 결국 실패에 직면한다. 마키아벨리에 있어서는, ‘계급투쟁이 종합되거나 지양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중이 담지하는 구성적 권력 = 구성하는 권력구성된 권력이 된 순간에, ‘구성적 권력으로부터 이반(離反)하기 때문이다. ‘덕의 비극이 회귀한다. 실제로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담론이 근대정치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저 그가 처음으로 의지와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서 잠재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특히, 의지와 결과, 덕과 운명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문제적인 것으로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단절종합보다도 현실적인 한에서, 모든 종합은 모름지기 일시적인 것, 사이비 융화로만 있을 수 있다. 주체화를 요구하는 다중의 운동은, 최종적으로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그리에게서는, 이 미완성이야말로, 단절이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 지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복음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이 끝날 수 없다는 것, 다중의 주체화의 과정이 열려 있는 것, 비판적인 과정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에서 포콕에 대한 네그리의 애매한 가까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포콕처럼 구성적 과정의 중핵에 있는 단절을 헌정론의 틀 속에 가두고, 단절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 공화국의 성쇠를 관조하며, ‘덕의 비극을 비관주의적으로 확인하며 끝나지는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계급투쟁은 어디까지나 다중에 의해 담지되는 주체적인 투쟁이며, ‘계급투쟁이야말로 헌정을 포함한 모든 제도의 근간에 있다. 그렇지만 단절, ‘한 명·소수자·다수자사이의 균형론의 테두리 안에 집어넣은 포콕이, 네그리가 고전적 공화주의를 계급투쟁의 중심에 있어서 재해석할 때의 중요한 참조항이 된다는 것도 의심스럽지 않다. 포콕은 균형의 관념에 의거하기 때문에, 헌정의 중심에 파고든 단절그 자체를 소거하는 것이 아니며, 바로 그렇기에, 공화국의 질서가 항상 허약한 균형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공화국의 유지를 위해서는 시민이 항상 직접적으로 헌정의 유지를 담지하는 이 높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 그렇지만 그 의 활동은, 뜻대로 되지 않는 귀결에 농락당하고, ‘운명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 인식 위에 서서 보수주의를 선택하는 포콕에게, 네그리는 단호하게 등을 돌린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회귀하는 비관주의,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의 탐구의 배후에 항상 들러붙어 있었던 만큼, 포콕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친근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계속해서 말한다. 단절치유하기 어려움, 어이없게도 구성적 권력의 비판적 권능의 끝이 없음을 보려고 하는 낙관주의를, 마키아벨리는 반드시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구성적인 잠재력의 닫혀 있음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중의 힘과 그 기획의 내재적인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잠재력에 대립하는 장애로부터, 즉 지금 여기서 다중이 주체가 되는 것의 무능력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나 패배자였다. 다중의 주체화, 민주정의 구성을 향한 모든 탐구는, 결국 마키아벨리를 자신의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는 객관적 현실에 직면하게 했을 뿐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어디까지나 고독했던 것이다. ,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 고독 속에서도, 결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을 손에서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패배를 웃음과 더불어 받아들이고, 연애의 욕망의 놀이를 통해 개개의 주체에게 숨겨져 있는 힘을 응시하는 희극작품도, 주권을 법적인 정통화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시민의 군사로의 참여에 의해 계속 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 혹은 또한 구성적 권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적합적 주체의 신화적 이미지를 제출하는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La vita di Castruccio Castracani da Lucca), 마키아벨리의 불굴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그 사정은, 1527,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개혁되지 못하고 종언한 것을 지켜본 뒤에도 변함이 없다. 말년의 사신(私信)모든 것은 멸할 것이다라는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가 결코 쾌활함도 부드러움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삶을 그 종국까지 추적하면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금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알튀세르에게 인사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근대의 어떤 작가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여느 때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의 사상가도, 구성을 요구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원리와 민주정의 모든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재, 이 공허로부터, 마키아벨리는 문자 그대로 주체의 욕망을 탈취하고, 그것을 프로그램으로서 구성한다. 마키아벨리에게서 구성적 권력은 그런 것이었다.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는 절대주의의 사상가도, 구성을 향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며, 원리와 민주정의, 달성[성취]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를 실현하는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뛰어난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였던 것이다 단절치유하기 어려움이야말로 구성적 권력을 끝이 없는 운동을 향해 휘몰아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우리로서는 이 논의에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네그리에게서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조건의 부재야말로, 주체의 욕망을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향해 활기를 북돋는다. 여기서 네그리는, 알튀세르에 대해, 포콕에 대해 행했던 것과 완전히 닮은 전도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 『구성적 권력집필 당시의 네그리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사후 간행된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의 독자는, 이것과 똑같은 전도를 알튀세르 자신이 수행했음을 알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일련의 마키아벨리론에서, 마키아벨리의 실천적인 불능과 이론적인 역능의 반전에 멈춰 섰던 알튀세르는, 그의 우연성의 유물론에 대한 논고에서는, “성취[달성]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건설의 조건의 부재를 인식한 마키아벨리야말로 성취[달성]된 사실로서의 기존의 국가의 근간에 있는 조건의 부재혹은 우연성을 폭로하는 것이며, 조건의 부재그 자체 없이 우연성의 필연성의 인식에 의해, 항상 머물러 있는/그치고 있는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조건의 부재로부터 주체의 욕망으로 향하는 네그리와, 그 동일한 조건의 부재를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우연성에서 찾아내는 알튀세르의 차이는 있더라도, 네그리에 의한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전도는, 이 알지 못했던 알튀세르 자신에 의한 알튀세르의 전도에 정확하게 선행하며, 그것을 정확하게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구절에서 네그리의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상 구성의 정치적 존재론도, 구성과정으로서의 역사도 아니다. 그런 다중구성적 권력이 전개되는 장소 바로 앞에서, ‘다중구성적 권력에 대한 사색을 가다듬은 마키아벨리 그 사람의 고독에야말로, 네그리는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하고, 그 기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의 부재에 직면하면서도 여전히, 거기에서 새로운 욕망의 주체를 찾아내려는 주체의 고독이다. 그런 고독 la solitude’한 주체야말로 다중 la multitude’의 주체화를 요구하는 모든 이론적=정치적 활동의 출발점에 있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또한, 네그리 자신의 고독일 것이다. 사실 네그리는 다시금 알튀세르와 함께 이렇게 말한다.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우리는 우리를 잊은 듯 그에게 사로잡힌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뭔가 억압된 것에 대한 친근감, 저 기묘한 친근감이다.” 마키아벨리가 억압된 사상가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은, 바로 그가 정치적인 것의 존재의 근간에, ‘조건의 부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포콕도, 알튀세르도, 그리고 네그리도 또한, 그 억압될 사상가의 인식에 주목한다. “마키아벨리, 모든 억압을 넘어서 정치를 사고하려고 하는 자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존재론의 지평의 이름인 것이며, 바로 그 지평에서, 네그리는 포콕이나 알튀세르와 함께, 정치의 비극과 동시에 그 가능성이, 혹은 정치의 가능성과 더불어 그 비극이 한꺼번에 개시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정치적 양가성을 둘러싼 교착과 반전에 이것 이상으로 계속 구애되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을 것이다. 네그리는 마키아벨리의 뒤를 쫓아, ‘고독에서 다중으로의 길을 쾌활하게 밟고 나선다. 바닥없이 쾌활한 낙관주의 끝에, 끝도 없는 계급투쟁의 장소가 열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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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성의 근원 (5) : 위장과 은폐의 바로크

글쓴이 : 大竹弘二

출처 : AT플러스 15 : 2013년 2월, 96-114쪽.


공개성의 근원 (5) - 위장과 은폐의 바로크20151102.pdf


1. 현인과 대중

근대정치의 출발점에는 종교전쟁이라는 일종의 예외상태가 있었다. 이런 아노미상태를 통치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 자주 통상적인 법이나 도덕을 훌쩍 뛰어넘는 국가이성이다. 규범에 어긋나는 이런 비상수단은 근대초기에는 특히 정치 지배자에 의한 ‘위장’의 문제로서 제기됐다. ‘위장(simulatio)’과 ‘은폐(dissimulatio)’는 바로크시기에 특히 선호된 정치적 주제 중 하나이다. 그것은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지배자가 지녀야 하는 ‘사려(prudence)’1)로 생각됐던 것이다. 정치학자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 1547∼1606)는 저서 『정치학』에서 여우로서의 군주의 소질을 언급하면서 ‘정치적 사려’에는 일정한 속임수가 포함된다고 말한다.


비록 물이 약간 섞였다고 해도 포도주는 포도주이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몇 방울의 기만이 섞였다 해도, 사려는 여전히 사려이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은 좋은 목적을 위한 소극적인 기만이다.2)

(4권 13장)


립시우스는 이 속임수를 동반하는 사려, 즉 ‘불순한 사려(prudentia mixta)’의 사용을 분명히 인정한다. 립시우스를 비롯한 타키투스주의자들에게 위장 기술은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되는 정치수단이며, 나아가 통치를 행하는 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할 정치수단이나 다름없다. 이상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 120?)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이다.3)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미덕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 중에서 본심을 감추는 성향을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다”4)(4권 71절).

정치지배자는 거짓말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중을 향하는 공적인 이야기와 정치의 심오함을 통달한 약간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의례[密儀]의 이야기로 분열된다. ‘정치적 사려’란 소수자를 수신자로 한 비교적(秘教的)인 지식이나 다름없다. 근대초기의 이런 사상에서 간파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이후의 ‘현인’이라는 이상이다. 특히 근대 초기에는 립시우스로 대표되는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 아래서 이런 현인론에 근거한 처세담5)이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근대 초기의 이런 ‘현인’은 단순히 관조적 생활에 몰두하는 비정치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스토아적 현인은 여기서 마키아벨리즘 또는 타키투스주의와 결부돼 있다. 즉, 그는 아르카나(arcana)6)나 국가이성이라는 비밀의 정치적 지식을 조작하는 정치 엘리트이다. 이리하여 근대초기의 정치이론에서는 오로지 소수의 지배자를 위해 쓴 ‘군주감(Fürstenspiegel, Miroirs des princes)’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제왕학 문헌이 일대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대중용과 현인용이라는 이중적 이야기하기의 사상의 고대적 원천은 타케투스만이 아니다. 그것은 주지하듯이, 지배자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종중 유익하다고 역설한 플라톤의 『국가』에서 이미 발견되는 것이며(389B-C), 이것은 일반적으로 ‘고귀한 거짓말’(414B)로서 인구에 회자된다. 플라톤 이후의 이런 비교(秘敎)주의를 정치철학의 전통의 핵심으로 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이다. 그는 현대에서는 망각된 ‘행간에 쓰기’라는 기법을 계몽주의 이전의 근대철학자 속에서 발견하려 한다.7) 그에 따르면, 근세의 철학적 저작에는, 아마도 18세기의 레싱에 이르기까지, 공교(公敎)와 비교(秘敎)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독특한 저술 기법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계몽주의의 지평에 이르는 현대의 우리는 은폐하면서 진리를 개시한다는 기법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말하듯이 16/17세기에서는 책의 비교성이 큰 문제계를 이루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비밀의 지식을 포함한 저작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될 필요가 없으며, 잘못된 자의 손에 넘어가면 그 내용이 파괴되고 만다. 그 때문에 예를 들어 당시의 스페인에서는 타키투스의 저작이 널리 출판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아주 일부 사람을 위한 초고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고, 또 알노르트 크라프마의 아르카나론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 노데가 집필한 『쿠데타에 관한 정치적 성찰』(1639년)은 소수의 정지지배자에게 보낸 저작으로, 초판을 겨우 12부만 인쇄했다. 이런 문맥 속에서 대중과 거리를 취하는 스토아적 현인이 이 시대의 모범이 됐던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당시의 ‘군주론’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이성론과 결합됨으로써 엘리트주의적 비밀정치, 즉 일종의 ‘철인정치’를 정당화하게 된다.

다른 한편, 계몽주의 철학이 추구한 것은 이렇게 스스로를 비교의 영역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18세기에 등장하는 역사철학의 도움을 빌려 수행된다. 계몽의 시대에도 확실히 비밀의 영역은 존재한다. 즉, 시간적인 미래라는 영역이다. 자신의 의도를 은닉하는 지배자와 대중 사이에 존재한 ‘관찰의 비대칭’은 이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시간적인 비대칭’으로 전이된다.8) 근대에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은 미래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진행에 의해 밝혀지게 될 비밀이다. 역사철학적인 진보신앙은 모든 비밀의 폭로를 필연적이게 한다. 비밀이나 거짓말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일정한 시간적 유예 후에 결국에는 반드시 진리가 겉으로 드러난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해명했듯이, 근대 역사철학은 계몽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즉, 아르카나는 ‘역사철학의 비밀(arcana)’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 혁명의 승리와 아르카나의 폐절은 미리 예정된 것이다.9)

반면 철학의 비교성이라는 반근대주의적 입장에 천착하는 스트라우스에게는 철학적 진리와 정치 사이의 가교에 대한 회의가 있다. 그때 그의 관심은 엘리트에 의한 ‘철인정치’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자가 겪는 박해의 문제에 있었다. 철학자가 이중의 저술 기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리를 공개적으로 개시함으로써 다름 아닌 정치적 박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비교적 이야기 속에서 철학자는 자신의 내면적 자유를 보존한다. 박해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 철학적 저작은 비교성을 띤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박해와 저술 기법의 이런 관련은 대중이 철학자를 탄핵한다고 관해 말했던 플라톤에서 시작되며(『국가』 494A), 마이모니데스 등 중세 유대-이슬람 철학을 거쳐 홉스나 스피노자 같은 근세 유럽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트라우스에게 이런 사상의 자유의 확보는 현대의 대중사회 상황에서도 여전히 철지난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관조적 삶의 우위라는 고대 그리스적인 이상으로 은퇴하게 된다.

스트라우스 자신의 이런 입장에 동의하느냐 여부는 차치하고, 박해와 비교주의에 일정한 관계가 있음은 확실하다. 왜 비밀과 은폐의 몸짓이 특히 근대 초기의 정치적·철학적 담론 속에서 이렇게도 많이 발견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저작에 대중용과 현인용의 이중언어가 발견된다는 것은 이미 누차 지적되었는데, 이루미야후 요벨은 스트라우스의 테제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오로지 특수한 유대인적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즉, 종교적 박해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은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베리아의 개종 유대인인 ‘마라노’의 경험이다.10) 그렇지만 이 시대 철학에서의 비교주의는 결코 스피노자나 유대인에게 특유한 것이 아니며, 마라노성으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근대초기의 정치철학에서 위장의 문제는 더 일반적으로 종교전쟁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 아래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종교분열의 시대, 스피노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배자의 압제에 의한 것이든, 대중의 광신에 의한 것이든, 박해의 위험을 앞두고 자신의 신앙과 내면성을 위장하도록 강제당했다. 거기서는 내면과 외면의 분리는 극한까지 확대된다. 위장과 은폐는, 이것이 군주의 국가이성적 술책 때문이든, 피박해자의 내면적 자유의 보호 때문이든, 이 내전의 시대에 특유한 몸짓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신의 참된 의도를 은닉함으로써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크적인 ‘현인’의 처세술이나 다름없다.


2. 내전 시대의 군주감(君主鑑) : 덕에서 사려로

그러나 사실상 위장과 은폐는 근대 초기의 정치적 담론에서는 오로지 지배자를 위한 ‘군주감’이라는 장르 속에서 다뤄진 주제였다. 이런 비밀 정치의 권유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은 군주와 시민 사이의 가교 불가능한 간극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제시된 것이 16세기 전반까지 겨우 존재했던 공화주의적 정신의 소멸이다. 그때까지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번창하던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는 전란 속에서 진전되고 있던 군주로의 집권화 앞에서 쇠퇴한다. 이와 더불어 공화주의적 시민은 정치의 장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이른바 수동적인 단순한 신민으로 탈정치화된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강하게 간직하고 있던 공화주의에 대한 신뢰는 메디치가의 중신(重臣)이 됐던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에게서는 극히 희박해진다. 1527년부터 30년에 걸쳐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의 전제(専制) 지배에 대한 최후의 공화주의적 저항이 행해졌을 때, 귀차르디니는 동시기에 집필한 잠언집 『리코르디』에서 시민의 정치관여에 관해 비관적인 전망을 말했다. “정청(政庁, 팔라초palazzo)와 광장(広場, plazza) 사이에는 매우 짙은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거나 혹은 두꺼운 벽으로 차단되어 있기에, 인간의 눈을 갖고서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11)

이런 변화와 더불어,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시민의 공화주의적 자유가 정치사상의 관심사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군주의 통치술이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된다. 바로크 시기에는 인문주의적 공화주의가 군주의 변명론으로 대체된 것이다. 여기서 다뤄지는 것은 더 이상 공화정 아래서의 시민이 갖춰야 할 덕이 아니라, 군주에게 필요하다고 간주된 덕이다. 현인이어야 할 군주에게 바쳐진 심오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일련의 ‘군주감’은 공화주의의 종언의 표식에 다름 아니다.

확실히 군주감은 이미 세네카 등 고대 로마의 스토아주의자에 의해 선호되고, 중세에서도 계속 존재했던 전통적인 장르이다. 거기서 문제가 됐던 것은 유덕한 군주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의무론이며, 폭군이 되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이것은 고대 스토아파의 군주감이든, 중세의 그리스도적인 군주감이든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폭군과 유덕한 군주, 혹은 전제(専制)와 진정한 왕제(王制)를 구별하는 문제설정은 근대 초기에 종교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서서히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평온과 질서의 회복이 사람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가운데, 이런 규범적 구별을 도입하는 것은 자주 저항권이나 폭군방법을 정당화하고 내전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기피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초기에 등장한 군주감은 전통적인 군주감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한다. 즉, 그것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주의 처세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단순히 유덕하다는 것은 더 이상 군주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음모나 반란의 가능성에 항상 노출된 군주가 그 위험을 피하려면 덕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자주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전통적 군주감이 상정했듯이, 군주는 도덕적 혹은 신학적으로 완벽한 이상적 인격을 갖출 필요가 없다. 만인이 모범으로 삼는 존재일 필요도 없다. 적대성 속에서 살아가는 군주는 위장과 비밀에 의해 사람들을 속이면서 통치를 수행해야 한다. 이 시대의 군주감에서 역설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교활한 사려인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전통적인 군주감의 스타일을 따른 저작이면서도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12) 그가 말하는 역량(virtu)은 그 이전의 군주감이 문제 삼았던 덕(virtus)이 아니다. 그는 영원불변한 군주의 인격 이상에 관해 말하는 덕론(徳論)과는 무관하다. 『군주론』에서는 군주의 바람직한 이상상을 역설하는 군주감이 “꿈에서나 나올 법한 군주에 대한 이야기”라며 버림을 받는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모습을 보려고도 알려고도 않은 채,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으로 논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13) (15절).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무시간적인 도덕 규범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군주의 역량(virtu)은 급진적으로 시간화된 세계 속에서, 시기에 따라 그때마다 자신의 외관을 바꿔가는 능력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주가 어떤 내면성과 인간본성이 아니라, 그 외양이나 평판에 다름없다는 점이다.

『군주론』에서 거듭 강조되는 것은 군주에게 명성이나 평판이 어떻게 결정적으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군주는 실제로 어떠한가보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 의한 위장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군주는 앞서 말한 좋은 기질은 무엇부터 무엇까지 현실에서 갖추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갖추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니 대담하게 이렇게 말해두자. 이렇게 훌륭한 기질을 갖추고 있고, 애지중지 지키는 것은 해롭다. 갖추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유익하다고 말이다.14) (18절)


이것은 단순한 ‘마키아벨리주의’적인 권모술수를 역설하는 게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군주의 힘이란 그가 대중 앞에 현전하는 이미지 속에 있다는 것이다. 힘을 지닌 자란 힘을 갖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군주는 자신의 외양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군주론』에서는 어떻게 민중의 존경을 얻어내야 하는가, 혹은 미움을 받고 경멸당하는 것을 피해야 하는가를 말한다(19절). 외적(外敵)에 대해서든, 국내의 음모·반란에 대해서든, 군주는 자신의 명성과 평판을 가장 유효한 무기로 쓸 수 있다.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름 아닌 위장의 달인이다.

이리하여 16세기 후반 이후의 타키투스주의적인 군주감에서도 위장은 중요 주제가 된다.15) 립시우스의 『정치학』도 군주감의 겉모양[体裁]16)을 취한 저작이지만, 거기서는 ‘덕’과 더불어 정치생활의 두 가지 기둥을 이루는 원리로서, 기만을 포함한 ‘사려’가 말해진다. 올란드[네덜란드] 독립 전쟁 속에서 몇 번이나 개종을 반복하면서 자주 ‘카멜레온’이라고 야유를 받은 립시우스 자신도 종교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위장하는 법을 몸에 익혔다고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가이성·아르카나論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시피오네 암미라토(Scipione Ammirato)의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에 관한 논설(Discorsi sopra Cornelio Tacito ; Discourses upon Cornelius Tacitus)』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장사를 하는 상인과 마찬가지로 비밀 장부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권장하며, 지배자의 위장이나 기만을 옹호한다.17) 아르놀트 클라프마르(Arnold Clapmar)의 『공무의 아르카나에 관해(De arcanis rerum publicarum)』에서도 6권(libri sex)의 전편에 걸쳐 아르카나 실천의 일부로서의 ‘위장’(simulacra)이 논의된다.18) 또한 타키투스주의는 1600년 전후에 엘리자베스 왕조의 잉글랜드에도 전파되고, 특히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에섹스 백작 주변의 동아리에서 관심을 끌었는데,19) 그 중 한 명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도 『수상록』(1597/1625)의 제6편을 ‘위장과 은폐’에 관해 고찰을 할애한다. 그는 “지식은 힘”이라고 논한 자연과학적 연구자에 어울리게 위장의 술책을 비판하고 있으나, 일정한 유보 아래서 역시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가운데, 내전 상황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위장의 기술의 사용을 거부한 미셸 드 몽테뉴 같은 도덕주의자는 예외였다고 하겠다. 위그노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썼던 『에세이』(1580/88)에서는 이렇게 단언한다.


왜냐하면 요사이 크게 대접받고 있는 분장이나 위장 같은 새로운 덕에 관해서는, 나는 이것을 철저하게 미워한다. 또 모든 덕 중에서 나는 이것에 마음의 비겁하고 야비함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20) (2권 17장)


그러나 다른 한편, 몽테뉴의 친구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샤론의 『지혜에 관해』(1601)도 내전 시대의 처세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저작이지만, 그 속에서는 불신이나 불성실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에서는 “개인에게 악덕인 듯한 은폐는 군주에게는 극히 필요 불가결하다”고 말한다21)(3권 2장 7).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위장은 살아남기 위해 불가결한 처세술로 의식됐던 것이다.


3. 문명, 의례, 위선

외양을 가장 중시하는 듯한 삶의 방식은 군주뿐 아니라 상류계급의 궁정인 전반이 익혀야 할 이른바 ‘예의범절[격식]’로서 서서히 정착된다. 따라서 유명한 발타자르 카스틸리오네(Balthazar Castiglione)의 『궁정인(Il Libro del Cortegiano ; The Book of the Courtier)』(1528)이나 조반니 델라 카사(Giovanni della Casa)의 『예의범절(격식, Galateo)』(1558) 같은 궁정 예법을 위한 입문서도 이 시대에 특징적인 저작 장르이다. 궁정인으로서 바람직한 행동거지에 관해 상세하게 해설한 이 저작들에서 설파되는 것은 인격적 도야 등이 아니라 복장, 대화법, 식사 방식 등 사교상의 일정한 양식이다. 거기에는 의례나 예법[격식] 같은 것에 대한 매우 형식주의적인 집착이 있다. 궁정인에게는 상품(上品)으로 보이는 외양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궁정생활은 이른바 ‘가면’의 삶이다. 거기서는 외견상의 행태야말로 유덕함을 증명한다. 궁정인들은 타자 앞에서 연극적으로 자기를 제시함으로써 살아간다. 이런 외견과 현전성이 우위에 선 가운데 절대 왕정기의 ‘대표적 공공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예절 입문서는 근대 초기 민중문화로부터 상층계급의 철수를 보여준다. 이미 역사가 피터 버크(Peter Burke)가 밝힌 대로, 일찍이 중세에서는 상층문화와 하층문화의 구별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귀족이나 지배자도 민중의 축제(카니발)에 참여했고, 길거리의 예능인이나 광대도 왕 앞에서 연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층계급은 대중으로부터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왕후·귀족은 품위 있는 예법과 세련된 행동을 익힘으로써 야만적이고 몽매한 민중문화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하려 한 것이다.22)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더 넓은 관점에서 상층계급의 예법의 이런 유행을 ‘문명화 과정’의 결정적인 첫걸음으로 간주하고 있다.23) 그는 이 시대의 ‘예의(civilité)’ 개념 속에서 ‘문명(civilisation)’ 개념의 근원을 찾아내려 한다. 예의범절 같은 외면적 형식을 통해 정념의 발로를 억누르고 자신의 행동양식을 통제하는 ‘궁정적 합리성’이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일종의 자기 감시 메커니즘이며, 이로부터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근대적 개인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 슈미트도 이 시대의 ‘정치’, ‘내치(polizei)’와 더불어 ‘예의(Politesse)’ 개념의 출현을, 그가 생각한 문명화, 즉 유럽 공법 아래서의 전쟁의 제한과 관련짓는다.

겉보기의 효과에 집착한 바로크 시기의 현인론으로 특히 유명한 것이 스페인의 예수회 계열의 사상가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an)의 『신탁 지침 및 사려의 기술(Oráculo manual y arte de prudencia)』(1647)이다.24) (19세기에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번역에 의해 알려지게 되기 이전에) 이미 동시대의 프랑스에서 『궁정인』이라는 제목으로 보급된 이 저작에서는25) 궁정인에게 전형적인 삶의 방식, 즉 행위의 형식을 갖추는 것에 통한 처세술이 설파되고 있다.


어떻게 잘 해낼 것인지가 모든 사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남에게 주는 인상이 좋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교묘하게 파악한다. 우아한 행동거지는 생활을 화려하게 한다. 품위 있는 행동을 마음에 새긴다면, 어떤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26) (14번)


마키아벨리를 격렬하게 탄핵한 가톨릭 예수회의 회원이지만, 그의 이 저작에서는 틀림없이 마키아벨리즘 또는 타키투스주의의 흔적이 발견된다. 즉, 현명한 삶의 방식이란 위장에 의한 삶인 것이다.


사물은 실제 내용보다 겉보기가 버젓이 통용되는 것이다. … 요점은 겉보기에 좋은 것이 내용의 완벽함을 보여주는 최상의 표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27) (130번)


이 시대의 처세담에서 오로지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라는 행위의 형식이다. 이처럼 가시적인 외면의 형식에 기초한 궁정세계의 정치적 공공공간은 자신의 본질을 결코 밝히지 않는 바로크적인 침묵과 은폐의 몸짓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도덕론자들(moralist)의 저작에는 이처럼 외견상의 행동거지나 격식에 의해 지배된 궁정 세계에 대한 신랄한 눈길을 간파할 수 있다. 라 로슈푸코(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의 『잠언집』(1665) 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세간에서 말해지는 미덕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이해관계’를 폭로하고, 미덕의 허위성을 보여주려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미덕은 대부분의 경우 위장된 악덕에 불과하다.”28) 그렇지만 그는 이른바 도덕가가 아니며, 이러한 세태에 대한 윤리적 비판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덕의 사용은 종종 처세에 유용한 사려로 간주된다.


악덕은 약을 조제하는 데 독이 사용되듯이, 미덕의 조제에 사용될 수 있다. 사려가 이를 혼합하고 완화하여, 인생의 고난에 잘 듣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29) (182번)


그는 그저 미덕과 악덕이 뒤섞인 ‘위선’으로서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비판적 관찰자에 머물고 있다.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이다”(218번).30)

라 브뤼에르(Jean de La Bruyère, 1645~1696)도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풍속을 풍자한 저작 『캐릭터들(Les Charactères)』(1688)에서 이렇게 위선으로 가득 찬 세태를 묘사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거짓말쟁이이다. 진리는 단순하고 자연스럽지만, 인간은 외관과 장식을 욕망한다”(제16장 22).31) 이것은 특히 궁정생활에서 현저하게 간파할 수 있다. 궁정인이야말로 본심을 속이고 처신할 수 있는 위장의 달인이다. “궁정풍을 잘 아는 사람은 몸짓도 안색도 얼굴도 자유자재로 한다. 좀처럼 속마음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흉한 것도 못 본 척하며 적에 대해서도 미소를 지으며 불쾌감도 꾹 누르고, 정념도 가장하며, 심정은 거짓부렁이고, 자신의 본심과는 거꾸로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이들의 위대한 세련도 필경 허위라는 부덕일 뿐이다”(제8장 2).32)

라 로슈푸코나 라 브뤼에르가 이런 책들을 집필했던 17세기 후반은, 위그노 전쟁이 종결된 것은 물론이고 프롱드의 난(1648-53년)33)도 이미 진압되고, 절대왕정이 그 기초를 확고히 다진 루이14세의 시대이다. 그러나 위장에 의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과거의 내전 시대의 불신과 의심의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궁중의 내부로 전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프랑스의 도덕론자들의 저작이 보여주는 것은 절대왕정기의 궁정생활이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야만 하는 내전 속에서의 삶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는 통찰이나 다름없다. 이런 한에서 이들은 저 타키투스주의적인 내전이론가들의 틀림없는 후예인 것이다.


4. 대중에 대한 공포

위장을 하는 정치지배자들의 삶과 대중의 삶 사이의 거리를 넓힌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종교전쟁의 격화(escalate)이다. 종교개혁에 따른 대립과 혼란의 확대는 지배자와 지식인들에게 정동적인 존재로서의 대중에 대한 경멸 혹은 공포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의례나 격식[예법]을 통해 스토아주의적으로 정념을 억누르려 하는 현인에 대해, 비이성적인 대중은 격정의 발로를 억누를 수 없으며 광신으로 흐르게 된다. 대중용으로는 다른 말투를 사용하는 지배자의 이중언어도 이로부터 요청된다. 지배자에게 현인이기를 요구하는 이 시대의 담론이 보여주는 것은 이런 대중 멸시 혹은 대중공포의 의식이다.

대중에 대한 경멸적 감정은 얼핏 보면, 아직 종교전쟁이라는 문제와 무관했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존재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인상과는 반대로, 그는 여전히 민중이라는 존재에 높은 정치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확실히 민중은 지배자를 그 외양만으로 평가하는 것이며, 때문에 군주는 오명이나 악평을 당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수법34)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군주의 지배의 안정성은 바로 민중에게서 나오는 평판에 의존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키아벨리에게서 정치지배는 뭔가의 초월적·신학적 근거에 의해 ‘위로부터’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념과 상상력에 의해 ‘아래로부터’ 한정되는 것이다. 반면, 귀차르디니의 『리코르디』에서는 곳곳에서 민중에 대한 가차 없는 모욕적 발언을 찾아볼 수 있다. “인민을 말한다는 것은 미쳐 날뛰는 짐승을 말한다는 것과 같다. 이 놈들은 셀 수 없는 실수와 바보 같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35) “인민에 관해 말하는 자는 바로 광인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견해가 없고 오류투성이의 도깨비인 것이다”36) 운운.

이런 대중 멸시는 신스토아주의자들의 사려론에서 특히 현저하다. 정념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의 억견은 현인(혹은 현인이어야 할 군주)에게 장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립시우스는 『정치학』에서 민중의 특징을 ‘쉽게 바뀐다’, ‘정념에 사로잡힌다’, ‘판단력을 결여한다’, ‘국가를 무시한다’ 등등으로 일일이 열거하며(4권 5장),37) 그들을 정치적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스토아적 현인론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샤론의 『사려에 관해서』에서도 “지혜에 있어서 두 가지 악 혹은 두 가지 명백한 장애물”인 “민중의 억견이나 악덕” 및 “정념”이 지적되며,38) 이것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2권 1장). 이런 “대중에 대한 공포”는 스피노자에게서도 여전히 보인다. 그의 『신학정치론』(1670)은 ‘철학적 독자’만을 겨냥한 것이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권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포, 희망, 증오, 분노 등의 정동에 휩쓸리고 편견이나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민중은 자유로운 철학을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39)

정념적 존재로서의 대중에 대한 이런 인식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정동을 이용한 정치 전략도 산출하게 된다. 즉, 종교를 통한 대중의 정념의 통제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종교의 이런 정치 이용을 권장한다.


공화국이나 왕국의 주권자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의 토대를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 이렇게 해두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각각의 국가에 종교적 분위기를 침투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 국내의 질서가 갖춰지고, 그 통일도 강고해진다. 설령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종교적인 분위기를 무르익게 할 것 같은 것이라면, 뭐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40) (1권 12장)


귀차르디니도 더 경멸적인 말투를 사용해 대중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종교라든가 혹은 신의 이름과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바보들의 두뇌에서 터무니없이 커다란 힘을 휘두르기 때문이다.”41)

근대정치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중세에서 종교의 정치적 우위를 부정한 것이다. 정치는 이제 종교로부터 자립함으로써 종교를 자신의 도구로 삼을 가능성도 입수하게 된다. 자율적 시스템으로서의 근대 정치 아래서 종교는 자주 정치에 의해 이용된다. 즉, 타키투스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는 대중용 수사학으로 환원되며, 미신이 깊이 박혀 있는 대중의 지배수단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암미라토는 타키투스론에 대한 보론에서 종교적 외경심을 품게 만듦으로써 시민은 쉽게 지배자에게 따른다고 주장한다.42) 클라프마르도 『공무의 아르카나에 관해』에서 “종교에 의해 민중을 사로잡을 것”을 주장하고, 이를 가장 효과적인 아르카나 기술이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하는 “교묘하게 고안된 정략(ton politeion sophismata)”(1297a, 1308a) 등을 언급하면서, 고대 이후 종교에 의한 위장은 대중 지배를 위한 유효한 수단이었다고 강조되고 있다(2권 9장).43)

그렇지만 국가이성·아르카나 논자들도 종교를 노골적으로 단순한 권력수단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종교가 이처럼 정치에 종속되는 것은 단순히 비도덕적인 권력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공 안녕과 질서 유지라는 공공복리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전쟁 상황에서 종교 분열을 극복하고 평화를 확립하는 길을 바로 종교에 대한 정치의 우위 속에 발견하려 했다. 예를 들어 립시우스는 현명한 생각을 갖춘 군주라면 국민에게 종교적 통일성을 강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종교는 통일의 창설자이며, 혼재하는 종교로부터는 항상 혼란이 생긴다”(4권 2장).44) 립시우스는 국가의 종교로부터 일탈하는 자는 엄하게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종교적 불관용 때문에 자주 비판을 받지만, 그의 이런 입장은 국가의 안정에는 종교의 통일이 불가결하다는 신념에서 나온다.45) 『에세』에서 신앙의 이름 아래 정치 반란을 일으켰던 위그노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과거의 종교를 준수해야 한다고 역설한 몽테뉴의 종교적 보수주의도 내전의 억지라는 마찬가지의 관심에서 유래한다. 이런 사상 안에서 신앙에 대해 주권자가 결정함으로써 공공 안녕과 질서가 확보될 수 있는 홉스적인 국가의 싹을, 혹은 베스트팔렌 체제와 더불어 확립된 “영토를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지배한다(cuius egion, eius religio)”라는 원칙의 단서를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종교가 대중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지적하는 것은 타키투스주의의 사려론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평가절차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종교에 의한 위장의 효용을 역설한 것은 단순히 대중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에서 표현되는 대중의 정념과 상상력은 하나의 커다란 정치적 힘이며, 그것은 군주에게는 정치권력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주지하듯이 이런 대중의 상상력을 통한 권력구성은 스피노자에게서도 간파할 수 있다. 설령 ‘상상력’에 의해 지배당한 대중이 종교에 얽매여 있다고 해도, 이런 상상력을 출발점으로 역사적 종교를 안쪽에서부터 변혁함으로써 이성적 인식(‘완전한 인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신학정치론』의 기획의 관건은 이것이다. 이것은 종교라는 상상력의 담론을 (『윤리학』에서의) 현인에 의한 과학적 방법(‘기하학적 방법’)으로 가교하려는 시도이다. 대중의 상상력이나 정념은 이성적 국가를 향한 권력구성이 행해지는 내재성의 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대중 및 그 종교적 상상력에 대한 스피노자의 불균형적 평가 속에는 근대 초기의 위장이라는 문제계가 품고 있는 양의성이 나타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대중용 말투는 뭔가 감춰진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외피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 자체를 무시하기 힘든 현실로서의 힘을 인정해야 하는가? 위장은 어디까지나 거짓에 머무는가, 아니면 그 픽션성 자체에 일정한 리얼리티가 있는 것일까? 가령 그라시안의 『신탁의 지침 및 사려술』에서 보이는 것은 이런 동요나 다름없다. 그는 악덕이 지배하는 시대의 부득이한 처세술로서 가면의 삶을 권유하면서도, 경건한 예수회 회원으로서 신 앞에서의 성실성을 포기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내면적 덕을 갖춘 ‘성인’이기를 추구했다(300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자 앞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태나 행동이 내면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지금 남에게 보이고 있다고, 혹은 머지않아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각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의 인지상정이다. … 설령 혼자 있을 때라도 마치 세상 전체의 눈에 드러나 있다고 생각해서 행동한다.46) (297番)


여기서는 외견상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실제로 ‘되라’고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위장이나 은폐의 권유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은, 그것이 ‘있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 로슈푸코도 위장이 더는 위장이 아니게 된 인간의 이런 존재방식에 관해 오히려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너무도 타인의 눈에 자신을 위장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을 위장하는 데 이르렀다.47) (119)


이런 이른바 자기기만은 타자 앞에서의 자기 현시에 의해 살고 있는 궁정인들에게 특히 전형적이다. 극장적인 자기 제시에 근거한 이 시대의 ‘대표적 공공성’은 위장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되는 자기기만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5. 비밀과 공개의 중간지대

자신의 감춰진 본질과 그것을 감추는 외관이 더 이상 구별될 수 없게 되는 인간의 존재방식.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1963)에서는 프랑스혁명에 선행한 귀족사회의 이런 상황이 마치 20세기 전체주의의 원형(prototype)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혁명 이전의 궁정사회에서 ‘위선(hypocrisy)’이 지배했음을 간파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혁명기의 공포정치는 바로 이런 ‘위선에 대한 투쟁’의 결과로 생겼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테러와 더불어, 엘리아스가 말한 ‘문명화’뿐만 아니라,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화’의 급진적인 심원이 입을 연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음모와 배신이 항상적이게 된 그 이전의 궁정사회의 ‘반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8)

여기서 말해지는 ‘위선’은 단순한 거짓말이나 허위가 아니다. 위선자는 거짓된 외관에 의해 진실한 자신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외관으로서 무장하고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위선자)는 자신이 속일 작정인 상대만큼이나 자신의 허위의 희생자이다. … 위선자의 죄는 자신에 대해 허위의 증언을 하는 데 있다. … 위선자만이 정말로 뼛속부터 썩어 있는 것이다.49)


즉, 위선자는 겉보기[외관]로서의 연기가 자신의 존재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위선의 배후에는 폭로해야 할 그 무엇인가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선의 어원인 그리스어의 ‘히포크리테스’는 원래 배우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것은 연극 때 착용하는 가면으로서의 ‘페르소나’와는 다르다. 즉, 그것을 떼어내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위선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배우 자체이기 때문에, 설령 위선자의 가면을 벗겨내더라도 그 가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50)

아렌트는 정치 공간을 자주 극장모델로 말했다. 즉, 정치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은 가면(페르소나)을 쓴 사람들이 공공의 무대에서 행하는 역할 연기이며, 이런 공개된 곳의 배후에 있는 것은 당장은 정치와 무관하다. 그러므로 정치에서는 ‘존재’와 ‘출현(appearance)’은 동일하며, 둘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 이전의 궁정인들의 행태가 이런 연극적인 정치적 공론장과 아무리 비슷한 듯 보이더라도, 아렌트는 결코 이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궁정사회는 오히려 아렌트적인 ‘출현의 정치’의 퇴폐적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치적 연기자들의 가면(페르소나)의 배후에 있는 숨겨진 사적인 자기가 있을 여지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선자는 자신이 연기에 의해 자연적인 자기를 아주 성실하게 표출하고 있다고 믿어버림으로써 공적인 공연과 사적인 비밀의 구별을 헐어 버리는 것이다.

아렌트가 보는 바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바로 이런 궁정사회의 위선과 거울상을 이루는 것이다. 자코뱅이 목표로 한 것은 위선자의 가면을 벗겨냄으로써 순진무구한 ‘자연인’, 즉 궁정사회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본래의 유덕한 인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한, “위선자에 대한 추궁[追及, 뒤쫓음]은 제한이 없다.”51)즉, 이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추구하는 무한한 폭로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리하여 인간 본래의 원초적인 덕을 밝게 드러내려는 불가능한 시도는 ‘덕의 전제(專制)’로서의 혁명의 테러로 귀착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공의 무대에서 상연하기 위한 가면(페르소나)이라는 정치적인 조건도 파괴하게 된다.


그들은 위선자에 대한 제한 없는 추궁과 사회의 가면을 벗겨내는 열정에 의해, 의식하지는 않았으나 페르소나(persona)의 가면을 찢어버렸던 것이다.52)


위선의 폭로 속에서 노출되는 것은 결국 정치공간을 파괴하는 빈민들의 ‘분노’일 뿐이다.

아렌트는 궁정사회의 위선과 자코뱅의 공포정치 사이의 거울상적 관계 안에서 ‘근대’의 심연을 간파하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의 전체주의에서 그 극점에 이른다. 『혁명론』에서 위선이 단순한 거짓말이나 허위와는 구별될 때, 그것은 더 시사적인 다른 논문 「진리와 정치」(1967)에서 ‘전통적인 거짓말’과 ‘현대의 거짓말’의 구별,53) 혹은 1971년에 공표된 베트남 전쟁에 관한 국방부 비밀 보고서를 다룬 논문 「정치에서의 거짓말」(1971)에서 단순한 ‘기만’과 ‘자기기만’의 구별에 대응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54) ‘현대의 거짓말’이나 ‘자기기만’에서는 사실과 허위의 구별 자체가 폐기된다. 아렌트에게서 이것은 전체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서방의 대중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리얼리티 상실 상황이나 다름없다. 여기에서는 방위를 정하기 위한 판단 기준이 완전히 상실됨으로써 공공의 눈앞에 있고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있을 것이 그 자체로 오히려 현실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궁정사회의 위선이 공론장의 이런 퇴폐의 원래의 근원에 있다. 그래서 아렌트가 묘사하는 혁명기 이전의 위선의 사회는 비밀관방정치[비밀내무정치]이든 궁정의 예절범절이든, 무엇인가 진실을 은폐한 허위가 지배하는 세계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이제 거짓과 진실의 경계선이 말소되었으며 비밀과 출현이 구별 불가능할 정도로 뒤얽혀 있다. 과거의 궁정사회는 이미 아렌트가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현대사회와 마찬가지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현대에서 공개와 비밀의 이런 교차에 대해 권력의 ‘눈에 보이는 얼굴’(‘법ius’)과 ‘감춰진 얼굴’(‘아르카나’)이라는 클라프마르의 구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생명정치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 두 개의 얼굴의 일치하는 지점이며, 아르카나 임페리이가 그것으로서 밝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르카나는 이른바 그 자신의 노출에 있어서 비가시인 채로 있으며, 눈앞에서 공개될수록 감춰진 것이 된다.55)


단순히 공개성으로부터 은퇴[후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런 비밀은 ‘신비’도 ‘아르카나’도 아니며 ‘secretum’으로서의 비밀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56) 그것은 ‘신비’처럼 결코 불가지적인 신적 비밀이 아님은 물론이고, ‘아르카나’처럼 어떤 숨겨진 구체적인 지식[앎]인 것도 아니다. ‘secretum’은 현실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비밀이 아니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눈앞에 폭로되어 있으나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의식되어 있는 비밀이다. 그것은 이른바 과잉으로 현전하는 정보나 이미지의 비현실성에 의해 일찍이 그 효과로서 산출되는 비밀이다. 그것은 항상적으로 현전하면서도 숨어 있는 비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비밀은 또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그 배후에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감춰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숨은 그림(Rätsel)’이라 부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정보나 이미지가 의미를 완전히 빼앗긴 잡동사니·잔해가 되며, 나중에는 그저 (언젠가 ‘독해’되기를 기다리는) ‘문자’(Schrift, écriture)로서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생기는 비밀이다. ‘문자’란 곧 정보나 이미지가 단순히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투명한 매체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일종의 물질적 실재로서, 달리 말하면 “목적 없는 순수한 수단성” 자체로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언론에 고유한 이런 물질성은 투명한 의사소통을 오히려 방해한다.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듯한 ‘물건’이 되며, 더 이상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게 된 이미지나 정보는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비밀스런 것으로서 현전하는 스펙터클의 폐허를 이미 벤야민은 바로크 비극의 알레고리적 광경 속에서 찾아냈다. 그의 시도는 바로크적인 가시성과 이미지의 세계를 ‘문자’를 통한 안티-스펙터클의 실천으로 반전시키는 데 있었다.

이제 이미지와 가시성의 부재가 아니라 그 과잉에 의해, 의사소통의 부족이 아니라 그 과다에 의해 사회공간의 불투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사람들은 도처에서 비밀을 인식한다. 그 때문에 종종, 낡은 아르카나가 정치적 판타지로서의 ‘음모론’이라는 형태로 회귀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무슨 숨은 의도나 권력이 실제로 배후에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며, 비밀은 오히려 복잡하게 기능 분화된 사회공간에 유통되는 정보의 혼탁과 다수성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는 완전한 공개성이 평범한 것으로서 편재하는 비밀과 병존한다. 이때, 공개성은 단지 투명한 의사소통의 공간으로 찬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전면화된 감시 사회의 위험을 낳는 것으로 경계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비밀도 단순히 국가이성적인 관방[내무=내치]정치로서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며, 프라이버시의 피난처로서 불가침한 채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출현하고 있는 것은 권력이 단지 공개적인 장에서 통제되는 것도, 비밀리에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이 두 가지 측면(법과 집행, 이름의 영광과 무명성, 인간의 활동과 동물적 생명 …)이 얽혀서 하나의 권력의 에코노미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다. 아렌트에게 비밀과 출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이런 공간은 정치적인 것의 파괴의 징후일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적인 것의 출발점은 바로 이 중간지대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1) [옮긴이] 필자는 prudence를 일관되게 叡智(예지)로 표현하지만, 이는 ‘뛰어난 지혜’를 뜻하는 말로 원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prudence는 사려와 신중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모두 ‘사려’로 일관되게 옮긴다.


2) Justus Lipsius, Politicorum: sive civilis doctrinae libri sex, Lugduni 1594 (reprinted: Kissinger Publishing 2009), p.230. 인용은 원문에서 필자가 직접 번역.


3) [옮긴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기원전 42년 11월 16일 ~ 37년 3월 16일)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아구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B%B0%EB%B2%A0%EB%A6%AC%EC%9A%B0%EC%8A%A4


4) 타키투스, 『연대기(年代記(上)』, 国原吉之助 訳, 岩波書店, 1981, 311頁. [타키투스, 『타키투스의 연대기』, 박광순 옮김, 종합출판범우, 2005.]


5) [옮긴이] 본문에서 ‘처세훈(処世訓)’으로 표기됐으나 이하 ‘처세담’으로 일관되게 옮긴다.


6) [옮긴이] ‘아르카나’는 라틴어로 아르카눔(arcanum)의 복수형이며, ‘책상서랍’이라는 의미에서 서랍에 숨겨진 ‘감춰진 것’을 가리키게 됐으며, 더 나아가 ‘비밀’, ‘신비’ 등의 의미가 됐다.


7) Leo Strauss, “Persecution and the Art of Writing,” in Persecution and the Art Writing,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p.22-37. [「迫害と著述の技法」, 石崎嘉彦訳, 『現代思想』, 제24권 14호, 1996, 185-197頁.]


8) Niklas Luhmann/Peter Fuchs, »Geheimnis, Zeit und Ewigkeit«, in: des., Reden und Schweigen, Frankfurt a.M. 1989, S.136f.


9) Reinhart Koselleck, Kritik und Krise. Eine Studie zur Pathogenese der bürgerlichen Welt, Suhrkamp, Frankfurt a. M, 1973 ; Critique and Crisis: Enlightenment and the Pathogenesis of Modern Society, Cambridge, Mass.: MIT Press, 1988. [라인하르트 코젤렉, 『비판과 위기(批判と危機)』, 村上隆夫 訳, 未来社, 1989, 149-150頁.]


10) Yirmiyahu Yovel, Spinoza and Other Heretics I : The Marrano of Reas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 Spinoza and Other Heretics II : The Adventures of Imman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이르미야후 요벨, 『스피노자 : 이단의 계보(スピノザ異端の系譜)』, 小岸昭ほか 訳, 人文書院, 1998, 51-52頁, 179-210頁.]


11)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 『피렌체의 명문귀족의 처세술 : 리코르디(フィレンツェ名門貴族の処世術 リコルディ)』, 永井三明 訳, 講談社学術文庫, 1998, 129頁. [프란체스코 귀치아르디니, 『귀치아르디니의 처세의 법칙』, 김희진 옮김, 원앤원북스, 2014.]


12) 『군주론』과 그 이전의 군주감 사이의 절단에 관해서는 Michel Senellart, Les arts de gouverner, Seuil, 1995, pp.211-230.


13)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君主論)』, 池田康 訳, 『마키아벨리 전집 1(マキャヴェッリ全集 I)』, 筑波書房, 1998, 51頁.


14) 같은 책, 59頁.


15) 근대초기의 정치사상에서의 위장의 문제에 관해서는 August Beck, »Die Kunst der Verstellung im Zeitalter des Barock«, in : Festschrift der wissenschaftlichen Gesellschaft der Goethe-Universität, Wiesbaden 1981, S.85-103 ; Herfried Münkler, Im Namen des Staates, Frankfurt a. M. 1987, S.306-313.


16) [옮긴이] 体裁는 외관, 겉모양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일정한 양식이나 형식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대체로 후자의 의미로 보인다.


17) Senellart, Les arts de gouverner, pp.54-55.


18) [옮긴이] Arnoldus Clapmarius라고도 불린다. Arnold Clapmar(1574–1604)가 본명이다. 위의 책 제목은 일본어로 『国事のアルカナにについて』로 옮겨지고 있다.


19) Cf. Richard Tuck, Philosophy and Government 1572-165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p.104-119.


20) 몽테뉴, 『수상록(随想録(エセー)下』, 松浪信三郊 訳, 河出書房新社, 2005, 202頁.


21) Pierre Charron, De la Sagesse, Fayard, 1986, p.557.


22) 피터 버크, 『유럽의 민중문화(ヨーロッパの民衆文化)』. 中村緊二郎・谷参 訳, 人文書院, 1988, 41-48頁, 350-363頁. [Peter Burke, Popular Culture in Early Modern Europe, 1978(Ashgate; 3rd Revised edition edition, 2009)]


23)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의 과정(文明化の過程(上)(下)』, 波田節夫ほか 訳, 法政大学出版局, 1977/78.


24) [옮긴이] 이 책의 영역본은 몇 개가 있다. The Art of Worldly Wisdom, by Joseph Jacobs, 1892 ; The Oracle, a Manual of the Art of Discretion, by L.B. Walton ; Practical Wisdom for Perilous Times, in selections by J. Leonard Kaye ; The Science of Success and the Art of Prudence.


25) 엘리아스, 『문명화의 과정 (하)』, 372頁.


26) 발타자르 그라시안, 『처세의 지혜(処世の智恵)』, 東谷穎人 訳, 白水社, 2011, 18頁.


27) 같은 책, 102頁.


28) 라 로슈푸코, 『라 로슈푸코 잠언집(フ・ロシュフーコー箴言集』 二宮フサ 訳, 岩波文庫, 1989, 11頁.


29) 같은 책, 58頁. 번역 수정. 


30) 같은 책, 69頁.


31) 라 브뤼에르, 『캐릭터들(カラクテール<下>)』, 関根秀雄 訳, 岩波文庫, 1953, 136頁.


32) 라 브뤼에르, 『캐릭터들(カラクテール<中>)』, 関根秀雄 訳, 岩波文庫, 1953, 8頁.


33) [옮긴이] 프롱드의 난(프랑스어: La Fronde)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최후의 반항에 의해 일어났던 내란이다. 프롱드라 함은 당시 파리의 어린이들이 관헌에 반항하여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 사용한 ‘투석기’에서 유래된 말인데 점증하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제1회는 고등법원(高等法院)의 프롱드(Fronde Parlementaire, 1648∼1649), 제2회는 귀족의 프롱드(Fronde des nobles, 1649∼1653)이다. 루이 14세의 즉위(1643) 당시 모후(母后)와 로마 가톨릭교회 추기경이자 재상인 마자랭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파리의 고등법원(법복귀족(法服貴族))이 칙령의 등록을 거부함으로써 왕권에 반항하여 왕실도 한때는 피난하여 파리를 퇴각하였으나, 왕당파의 콩데 공(公)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콩데 공은 마자랭과의 반목으로 체포되었고 지방에서는 반왕당파 귀족이 동맹하여 반항하였으므로 왕실과 마자랭은 다시금 파리를 퇴각하였다. 파리는 에스파냐의 원조를 받고 있는 콩데 군(軍)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 시민의 반감을 사서 드디어는 왕당파에 의한 탄압으로 왕실은 파리로 귀환하였다. 이 프롱드의 반란은 프랑스에 있어서의 귀족세력의 왕권에 대한 최후의 반란으로 부르봉 절대왕정 확립의 길을 터놓은 것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위키피디아 전재]


34) [옮긴이] 일본어로 手管(테크다)는 ‘살살 구슬려내는 솜씨나 수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농간’을 부린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순우리말로는 ‘엄펑소니’라 한다.


35) 귀차르디니, 『피렌체의 명문귀족의 처세술 : 리코르디(アィレンツェ名門貴族の処世術 リコルディ)』, 129頁.


36) 같은 책, 238頁.


37) Lipsius, Politicorum, pp.132-138.


38) Charrron, De la Sagesse, p.377.


39) 바루흐 스피노자, 『신학·정치론(神学・政治論)』, 畠中尚志 訳, 岩波文庫, 1944, 55-56頁.


40) 『마키아벨리 전집2 : 로마사논고(マキァヴェッリ全集2 ディスコルシ)』, 永井三明訳, 筑摩書房, 1999, 49-50頁.


41) 귀차르디니, 『피렌체명문귀족의 처세술 : 리코르디(アィレンツェ名門貴族の処世術 リコルディ)』, 191頁.


42) Vgl. Michel Behnen, »ARCANA - HAEC SUNT RATIO STATUS«, in : Zeitschrift für historische Forschung, 14(1987), S.154.


43) Ebd., S.168f.


44) Lipsius, Politicorum, p.121.


45) Cf. Tuck, Philosophy and Government 1572-1651, pp.58-59.


46) 그라시안, 앞의 책, 227頁.


47) 라 로슈푸코, 앞의 책, 42頁.


48) 한나 아렌트, 『혁명에 관하여(革命について)』, 志水速雄 訳, ちくま学芸文庫, 1995, 155-156頁.


49) 같은 책, 153-154頁. 괄호 안은 저자의 것.


50) 같은 책, 159頁.


51) 같은 책, 145頁. [옮긴이] 여기서 추궁으로 옮긴 것은 책임추궁이라고 할 때의 추궁보다는 뒤쫓는다는 의미에 가까운 듯하다. 원문을 봐야 확정할 수 있다.


52) 같은 책, 161頁.


53) 한나 아렌트, 「진리와 정치(真理と政治)」, 『과거와 미래 사이(過去と未来の間)』, 引田隆也/齋藤純一 訳, みすず書房, 1994, 344頁.


54) 한나 아렌트, 「정치에 있어서의 거짓말(政治における嘘)」, 『폭력에 관하여(暴力について)』, 山田正行 訳, みすず書房, 2000, 33-34頁.


55)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上村忠男/廣石正和 訳, 月曜社, 2001, 211頁. 번역수정.


56) 비밀의 이런 구별에 관해서는 Eva, Der geheime Krieg, Frankfurt a. M. 2007, S.105ff.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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