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 데리다의 책 등의 원본 및 국역본을 대조하지 않았다. 일역본의 번역이다. 

이것은 사상적인 귀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문제라면,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데리다 자신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반시대적이고 신분규정이 없는 유대이며, 제목도 이름도 없는 유대이며, 설령 비합법은 아니라고 해도 힘겹게 공적인 유대이며, 계약도 없이, «out of joint»이며, 공동투쟁 조직도, 당파도, 조국도, 국민적 공동체도 (그것은 어떤 국민적 한정에도 선행하고, 그것을 통해서, 또한 넘어선 인터내셔널이다), 공통의 시민권도, 어떤 계급에 대한 공통의 소속도 없는 유대이다. 여기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자처하는 것은, 제도 없는 동맹의 우정으로 다시 불러들이는[소환하는] 무엇인가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는, 조직도 규약도 프로그램(‘강령이라고 번역해야 할까)도 없이, ‘우정의 유대만 있다. 거기에 어떤 정치성이 있단 말인가라며 어이가 없어하고, 혹은 이 나이브함에 감동하여 책을 덮는 것은 쉽지만, 철학자 자신의 의도나 의식을 넘어선 곳으로, 여기에는 하나의 명확한 정치의식이 있다. , ‘간주권적’(인터내셔널 혹은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해야 할까) 지평에는, 정치가 아니라 윤리가 있다. 그곳은 탈구축 불가능한정의의 관념의 장소이며, 맑스주의의 정신을 결코 포기할 작정이 없는데리다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또한 해방을 목표로 하는 메시아적 긍정으로 임해야 할 장소인 것이다. 주권과 불가분한 한에서 자기면역적 과정으로 탈구축 가능했던 민주주의도, 주권과 주권 사이로 나오자 갑자기 도래할것으로 바뀌어 버리고, 탈구축을 옆으로 치워버린다. ‘우정의 윤리가 아니라 친구-’(칼 슈미트)리얼 폴리틱스이며, 윤리도 또한 정치일 것이라고 하는 이의는 이 깊은 구별 앞에서는 이의제기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친구-의 구별은 무엇을 정의라고 하는가의 논의의 틀 안에 수납 가능하며, 윤리나 정치의 관념은, 여기서는 탈구축 가능한가 여부의 구분에 적극적으로 환원 가능한 것이 정치, 불가능한 것이 윤리 된다. 윤리도 정치도, 이 환원에 종속한다. 우리가 정치가 아니라 윤리가 있다고 말할 때에도, 이 근본적인 구분을 존중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덧붙이자. 탈구축 가능한가 여부를 구별하는 것이 탈구축의 정치이며, 그 구별은 주권과 주권 사이,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의 구별과 겹친다. 이것은 국제정치에 관해서는 강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 구분일 것이다. 그곳은, 혹은 그곳 도래할 민주주의의 장소로서 메시아[그 장소를] 내주는[비워주는] 것이다. “모든 교양체계나 모든 형이상학적-종교적 규정으로부터, 게다가 모든 메시아주의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는 것이 시도되는 한에서의(강조는 원문) “메시아적인 긍정이다. ‘메시아타자로 바꿔 말하면, “타자를 그 타자성에 있어서 상호 존중하는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랑시에르의 다음 지적이 합당하다. “탈구축은 궁극적으로 신의 병사에 의한 군사 작전을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타율의 법을 주장하거나, <타자>의 모든 -취적인 규정(identification)을 말소한다는 무한한 임무를 강조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사상적으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양자택일에, 국제정치를 옴짝달싹 못하게 못 박아 둔다. 대항 국제정치는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지하듯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에 맞설 수 있도록 제창됐다. 이념으로서는 이제 자유민주주의만 있으면 되며, 나머지는 경험적으로 처리 가능하다고 하는 후쿠야마에 의한 진단과는 달리, “의회제 형식을 갖춘 자유민주주의가 전례 없이 전 세계에서 소수파이고 고립되어 있다고 하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인식을, 데리다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현시점의 일반성을 그러한 위기로서 규정한 후, 그는 마모의 너머의 마모의 묘사를 더욱 거무칙칙하게 하고”, 10개의 신세계 질서의 상처를 꺼낸다. 이것들을 인류 공통의 과제로서 담당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제창됐다. 이런 10개의 상처야말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필요한, 메시아적이지 않은 세속적인 근거이다. 열거해보자.

실업.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형의 실업은 아니다. ‘새로운 시장이나 규제 완화가 초래하는 새로운 실업이며, “그 경험과 그 계산의 형태 그 자체에 있어서, 너무나 실업을 닮지 않았다.” 일본의 경험에 비춰보면, 비정규고용의 증대라고 바꿔 말하면 이해하기 쉽다. 간헐성의 고용 형태까지 거기에 집어넣어 세어야 할 실업이다.

노숙인. 거기에는 엄청난 숫자의 망명자, 무국적자, 이민도 또한 포함되며, 대체로 국경이나 국민적 혹은 시민적 정체성[동일성]의 새로운 경험을 고하고 있다.”

국가 간의 경제전쟁.’ 이 전쟁은 다른 전쟁을 필두로 하는 모두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자유시장모순을 제어할 수 없는 무능력.” “여러 가지 사회적 기득권을 지키라고 칭하면서, 세계시장에서의 자신의 이익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임금수준과 사회보장을 둘러싼 기득권과, 대외시장에서의 자국제품의 경쟁력을, 어떻게 조정하느냐라는 문제일 것이다.

대외채무. 본서에 있어서는 일부러 여기에서 많은 말을 요구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데리다는 특히, 채무 문제가 인류의 상당 부분을 배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기산업과 무기무역, 게다가 마약거래.

핵 확산.

공동체, 국민국가, 주권, 국경, 땅과 피에 관한 고답적인archaïque 개념과 환상.” 이것들에 의해 인도되는 에스닉 사이의 항쟁.” 전지구화 현상에 수반되는 장소 해체의 과정에 대한 반동이다. 그러나 이 과정 자체는, ‘차연’, ‘-정위치화 déplacement’의 하나이며, 오히려 안정화의 적극적인 조건이라고 여겨진다.

거의 유령국가로 변하고 있는 마피아와 마약 카르텔. 이것들은 사회적-경제적 조직, 자본의 일반적 유통에 침입할 뿐 아니라, 국가적 제도들 및 국가간 제도들에도 침입하고 있다.”

국제법 및 그것에 관련된 국제제도의 한계. “보편성을 자칭하는 이 법은, 실행에 옮겨지는 경우, 특정한 몇 가지 국민국가에 의해 계속 지배되고 있다.”

이것들이 역사는 끝나지 않는 증거이며, ‘신세계 질서의 상처이다. 민주주의의 마모 너머의 마모를 나타내는 문제들이며, 현실의 사회주의가 끝나도 여전히, 맑스주의의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요청되는 근거이다.

이 중에서 무기에 대해서는, 2006년에, 117개국의 공동제안에 의해, ‘무기거래조약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유엔총회에 제출되고(미국은 반대), 유엔에서의 논의가 시작되며, 20134월에, 조약안은 정식으로 채택됐다(미국도 찬성). ‘마약’()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에, “마약 및 향정신선 의약품의 부정거래 방지에 관한 국제연합조약이 발효되었다. 핵확산에 대해서는 1970년 이후, “핵확산금지조약이 발효되었으며, 조약 회원국과 유엔 산하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협력 체제가, 이 지적하는 한계에 직면하면서도, 유일한 실효성 있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국민적 또는 시민적 정체성[동일성]의 문제라고 총괄되는 에 대해서는,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UNHCR)의 역할을 확대 강화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대처한다는 합의가 상당 정도로 완성됐다고 한다. UNHCR인간의 안전보장생활정체성의 안전이라고 덧붙이면 좋을 것이다 구상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 도 무엇보다 인터폴을 필두로 하는 국제기관이 관할-대처해야 할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인 , , , EU, IMF, 세계은행, G20 등등의 경제를 둘러싼 국제기관(EU를 거기에 포함시켜 세어도 나쁜 이유는 없다), 이것도 이 지적하는 한계에 직면하면서 실제로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이며, 또한 그것들에 대한 간주권적인대처법은, 현실적으로는 그런 국제기관을 경유하지 않으면 실효성을 갖지 않는다. 일본에 관련해서는, TPP가 이 국제체제에 추가되려고 한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근거라면, 새롭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는 별개로, ‘인터내셔널은 충분히 실재하지 않았는가? 국제기관들의 전체는, 세부적인 신분규정계약얼마나 서로 정합성이 있는가와는 별개로 갖춘, 실재하는 공동투쟁조직이 아닐까?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런 기존의 인터내셔널을 대신하기는커녕, 근거의 부터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장기적인 전망에 섰을 때, 국제법, 국제법의 개념들, 국제법의 적용의 장소가 경험할 수 있는 깊은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고 간주된다. ‘지시의 대상은 우선, 실제로 인터내셔널활약일 것이다. ~이 세계정치의 문제라면, ‘맑스주의의 정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전부터, 이후에는 훨씬, 대항노선은커녕 세계정치의 주류파 노선이 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데리다의 기준에 비춰보면, 우리는 모두, 상당히 이전부터, 사회주의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범죄를 둘러싼 국제협력()맑스주의의 정신은 필요할까? 아니면 여기서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이 참고되어야 할까?

게다가 원래, “자유민주주의가 전례 없이 전 세계에서 소수파이고 고립되어 있다라는 사실 인식은, 낮게 추산해도, “다수파이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정도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특히 아랍의 봄이후의 현재는. 1993년의 시점에서도, “소수파이며 고립됐다고 한다면, 후쿠야마설이 그 정도의 반향을 부를 수는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데리다의 사실인식은, 거꾸로 선 역사의 종언설처럼 보인다. “마모 너머의 마모검붉게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유토피아를 반전시키려고 하는데, 묘사되는 세계는, 후쿠야마라면, 역시 역사는 끝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후의 역사가 다시금 그것을 증명했다, 이제 경험적으로만 맞으면 된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정도에 희망의 거처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특히 흥미로운 것은 , , , 라는 경제문제이다. 데리다에게서는 이것도 정의의 문제이겠지만, 이미 봤듯이, 공화주의는 그것을 단순히 문제로서 지목하는 단계를 넘어서, ‘해결법을 제시했다. 공화주의의 자기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해결법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실업경제전쟁사회적 기득권과 대외시장에서의 자국 이익의 조정, 그리고 채무, ‘확장=성장에 의해서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다, 할 수 없으면 부담의 배분을 공공화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공화주의는 경제학을 동원해서 주장했다. 탈구축의 정치가 그것들을 정의의 영역에 위치시키고, 언제든 정치적으로 탈구축되어 정당성 문제(‘주권’)로부터 구별하려고 하는 반면에, 공화주의는 정의와 정당성 둘 다를, ‘확장=성장부담의 연속선(그 이름이 이다)이 경계를 이루는 공공공간에 포섭하려고 한다. 악과 관련된 범죄뿐 아니라, ‘정체성에 관련된 까지도, 이른바 ‘2급시민의 자격문제로서 그 속에 흡수하려고 한다. 는 단적으로, 공화국의 바깥, 야만인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문제일 것이다. 공화국은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 , 공화주의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공공공간의 구성-유지-확대 문제이며, 데리다가 인터내셔널의 본질적 임무로 삼은 국제문제는, 탈구축 불가능한 절대적 원리인 정의메시아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공화주의의 경험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이 세속주의를 참을 수 없는 것일까? 10개의 상처의 열거는, 국제문제를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정의의 영역으로 이관시키라, ‘경제문제를 더 이상 경제문제로 보지 말라는 호소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res publica, 즉 공공공간과 여론의 토폴로지적 구조를 격변시켜온 기술적, 과학적, 경제적인 수많은 변화를 되짚어보자. 이것들의 변화는, 단순히 이 토폴로지적 구조에 작용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토포그래픽한 것이 존재한다는 추정 그 자체, 그리고 발언, 공적인 사태 혹은 대의에 대해 하나의 장소가 있으며, 즉 규정(identification)할 수 있고 안정화할 수 있는 하나의 신체가 있다는 추정을 문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자유주의적인, 의회제의,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를, 흔히 말해지듯이, 위기에 빠뜨리고, 그 후 무수한 형태로 동맹하고 서로 싸우고 조합된 세 가지 전체주의로의 길을 연 것이다.

 

한나 아렌트를 방불케 하는, 공공공간의 흔들림, 변질, 소멸이 파시즘을 도래시켰다고 하는 인식이다. 하버마스도 완전히 동의할 것인, 공공공간의 불안정화=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도식이다. 이런 독일과 프랑스의 철학자의 하나 됨을 토대로, ‘간주권적영역만을 정의에 배정하는 것, 그 영역을 경험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은 가능할까? 허용될까? 정의와 경험이 위기라는 토대를 공유할 때, 정의는 왜 자기면역성을 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데리다에게 있어서도 위기에 있어서 연결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는 공동문서에 서명하게 됐다) 구제의 방식은 각각 다르다고 주장하는 걸까? 무엇의 위기이든, ‘위기에는 어디까지나 메시아적인 긍정에 의해 임하고, 신의 약속의 실행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랑시에르의 진단 신의 병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신의 대리인인 새로운 타자를 무한하게 찾아 나설 것인가 이 옳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데리다는 정의경험, ‘도래할 민주주의의 자리를 어디선가 공화주의에 넘겨주고 있는 셈이다. 둘 중 무엇이 됐든, 혹은 둘 중 어떤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단적으로 편의주의[기회주의]일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실천은, 세계공화국 엘리트들의 기관들을 응원하는 것, 공화국 시민의 자격을 위태롭게 한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들에게 닿게 하는 것이었는가? 오늘날의 공화국 새 시민들에게는, ‘부담을 나눈다고 하는 정의’-‘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우정의 유대가 되려고 욕구하고, 기나긴 공화주의의 경험을 일부러 유령으로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2011년의 하버마스를 필두로 한 현대의 낭만파는, 오늘날 이미, 그럴 필요는 없었다고 깨달았을 터이다. 현존하는 인터내셔널을 어떻게든 강화하면 되는 걸까? ‘상처의 치료에는 대학 속에 새로운 강좌를 만들 듯이, 유엔 산하의 특별조직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NPO로서, 그것에 협력하면 좋을 것이다. 유령은 속제로 회귀함으로써 유령이지만, 완전히 소생했을 때에는 새로운 신체corps를 손에 넣는다. 이것도 유령의 숙명일 것이다. ‘공공공간의 신체가 의문에 부쳐지더라도, 국제기관은 틀림없이 단체corps이다.

2011년의 그리스 위기가 폭로한 것은 이런 부담의 분담, ‘채무의 상환 문제가 되자, ‘간주권적이든 주권 내적이든 민주주의적 토의의 의제에 올려질 수 없다는 사태였다. 토의 과정에 올려지게 되면 위기의 폭발에 때늦지 않기 때문에, 공화주의의 차례가 됐다. 사태는 고전적이다. 전쟁의 결단을 민주주의에 맡길 수 있을까? “메시아적인 긍정은 결코 토론 과정에 올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국민투표의 회피는 정의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것이 아니었을까? 현대에서는 이렇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경합을 피하면서 서로 공존하고 있다. ‘채무에 의해, 그렇게 분절되어 있다. 데리다는 채무인류의 상당 부분을 배제하는정의 문제, ‘노숙인현상과 똑같은 시민의 자격 문제로 번역함으로써, 이 분절의 견본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서는 매우 의미가 크다고 생각되지만, 그는 이미 1980년대 말, 우정의 정치에서 정의을 구별 없이 논했다. 그래서 그 역자는, 책을 도래할 민주주의에서의 덕의 물음”(강조는 인용자)이라고 요약할 수 있었다. 세속의 동년배사이에 작용해야 할 과 메시아이든 이데아이든, 천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이 [받들어] 모셔야 정의,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처음부터 번역되었던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읽기




Ghostly Demarcations: A Symposium on Jacques Derrida's Specters of Marx (Radical Thinkers)

1.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진태원씨의 번역으로 EJ북스에서 새롭게 출판된지도 벌써 1년이나 넘게 흘렀다. 1993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내가 실제로 이 책의 일부를 접했던 것은 ≪뉴레프트리뷰≫에 수록된 영어 발췌본(1994년)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1996년에는 당시 아직 학교를 뛰쳐나오지 못했던 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던 잡지 ≪자유정신≫의 창간준비호에 이 영어본을 대본으로 번역해서 수록했던 적이 있다. 물론 번역을 마무리하여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인 1996년에 양운덕 선생의 번역으로 한뜻출판사에서 출판되어 버려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양운덕 선생은 아마 그때 고려대에서 방학이면 프랑스철학 특강을 했던 적이 있어서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특히 그때 부르디외와 카스토리아디스에 대해 처음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나중에 한번 꼭 이들을 탐독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어쨌든, 일단 원고를 넘긴 후에 선생의 책을 사서 보았는데, 번역에 유감을 품었었다. 물론 내 번역이 좋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내가 해결하지 못한 몇 가지 의문들이 속시원히 해명되지 못했던 것 등등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건 이렇게 번역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프랑스어 대본을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뉴레프트리뷰≫에 수록된 관련 글들을 같은 잡지에 번역하면서 나름대로 이 책에 대한 이해는 있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나중에 벤야민을 비롯하여 텍스트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은 거대한 착각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침묵이 더 길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론 그 후에 프랑스 출장을 가서 이 책을 사왔고 미국 출장을 가서는 영어본을 사오기도 했지만, 이 책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주어버렸고 실제로 읽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진태원씨의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이 책의 불어판 서문을 어떤 분과 잠시 읽기도 했었고, 새 번역본이 나온 후에는 두 명이 이 책을 사주었다. 하지만, 역시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며칠 전 한권이 마땅한 주인에게 돌아갔다. 좋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지금으로 따지면 이 책은 거의 15년이 지난 후에나 제대로 번역된 것이나 다름없다. 역자가 말하듯이 데리다의 가장 중요한 책은 아닐지언정 데리다의 책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었던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논란은 모두 외국의 논란이지 한국에서의 논란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오늘날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논란들을 모두 섭렵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바로 지금의 이 공간과 이 시점에서 읽는 것이어야 할 터이다. 주지하듯이, 이 책은 맑스를 논하는 책이라기보다는 데리다의 정치적 몸짓이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전면화된 책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정세적 국면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세적 국면을 감안해야 할 터이다. 물론 원래 강연 기록물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데리다의 정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 책 다음에 출판된 ≪마르크스의 아들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3. 이 책에는 데리다의 몇 가지 기본 개념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우선 ‘유산상속’ 개념을 다뤄보자. 데리다가 말하는 ‘유산상속’은 주어진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산을 ‘여과하고 선별하며 차이화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이며, 데리다의 개념인 ‘탈구축/해체’ 그 자체이다. 데리다는 유산상속이란 형태를 바꾸는 작용을 하는 필터라고 쓰고 있기도 하며, ‘비판적 상속’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여과하고 선별하는 조작은 현재가 과거를 다시 만든다는, 프로이트가 1890년대부터 생각해 왔고 라캉이 전개했던 ‘사후성’ 개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은 1990년대에 붕괴 직전의 소련을 방문한 데리다의 소련 기행문 ≪자크 데리다의 모스크바≫(1996)에서도 논해지고 있다. 거기에서는 ‘합리적인 이야기’라는 개념이 제시되는데, ‘여과하고 필터로 걸러내다’(cribler, filtrer)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이 모스크바 기행문에서도 1990년대의 데리다의 사유방법이 명백히 출현한다. 즉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자크 데리다의 모스크바 기행≫에는 공통의 방법이 있다. ‘사후성’이란 어떤 것을 ‘사후에, 나중에’ 구성하는 조작이다. 프랑스어로 사후성은 apres-coup이다. “가정이 사실을 만든다”는 사고방식, 이것이 일종의 사후성이다. 사후성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철학자 퍼스의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친 김에 하는 말이지만 퍼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가설연역법’(abduction)이라는 퍼스의 중심 개념도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것 같다.)

존재로서의 유산상속. 유산은 그대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탈구축되며 변형된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우리의 존재가 첫 번째의 상속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의 상속에는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한다는 것인데, 그 상속은 이미 말했듯이 ‘여과한다는 것’, ‘필터로 걸러내는 것’을 필요로 하는 ‘비판적 상속’이다. 데리다의 기본적 인식에서는 우리가 마르크스의 유산을 각인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성스럽다와 성스럽지 않다를, 알든지 알지 못하든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오늘날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상속인이라고 데리다는 단언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데리다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는 인상적인 말이다. 그리고 그 유산 중의 하나는 ‘세계를 변혁하다’는 사상이다. ‘도래해야 할 미래’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존재와 유산상속은 등치되고 있다. 2007년에 미국에서 간행된 데리다 논집 Mitchel, Davidson ed., The late Derrida, The Univeristy of Chicago Press, 2007(이하 LD)에 수록된 논문에서 로돌프 가셰(Rodolph Gache)는 “데리다는 존재가 유산상속의 의미라고 지적했다”(LD. 73)고 쓴다. 여기에 있는 “To be is to inherit.”(‘있다’는 것은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다)라는 사고의 중요성을 가셰는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재는 상속인데, 그것은 반드시 비판적 상속이어야만 하며, 이로부터 ‘책임’이 생겨난다.

언어수행론의 개입.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주목하고 싶은 또 다른 것은, 데리다가 오스틴의 언어이론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오스틴(1911~1960)의 언어수행론(발화행위이론, speech act theory)은 언어의 기능을 ‘기술적, 사실확인적’(constative)인 것과 ‘언어수행적’(performative)인 것으로 분류한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담론/언설이 언어수행적이라고 하며, 그 전형적인 것이 바로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유명한 한 구절이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이 테제야말로 확실히 ‘언어수행적’이라고 간주하는 데리다는 ‘해석하는 바로 그 대상을 변화시키는 해석’이야말로 진정한 해석이라고 한다. 그것을 논한 데리다의 언어가 바로 ‘논하고 있는 바로 그 대상을 변혁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4. 앞으로 데리다의 유령론이 마르크스에 대한 여러 가지 상(像)과 어떤 관계에 있고, 데리다의 유령론은 그 중에서 어떤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이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 책이 종교 비판과 기술 물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데리다가 맑스에게서 발견한 유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전지구화, 그리고 현대세계를 포괄하고 있는 ‘종교적인 것의 회귀’라는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필요불가결하게 작용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매개하는 미디어-테크놀로지의 전개는 시선을 구조화하는 비가시적인 것의 유령적 작용에 입각해서 분석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책에 관한 쟁점 중의 하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다. 정의의 약속으로서 혁명적 사건을 지시하는 “메시아적인 것”에 호소하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이 지점에 대해 조금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다.
(계속)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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