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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04 피터 홀워드, <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2/2)


들뢰즈 이후의 정치 내재성과 초월 재고 (2/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2.

제가 고찰하고 싶은 마지막 두 번째 점은 첫 번째 점에서 곧바로 나옵니다. 들뢰즈의 비주의주의에 정치적인 억양을 붙이기 위한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비주의주의에 의해 촉진되는 리얼리티와 직접 융합되거나 리얼리티로의 침례가 그 자체로 뭔가 전복적이고 해방적이며 혁명적이기도 하다고 논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침례는 정의상 매개의 형태들을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런 심리적·사회적·제도적·기술적인 매개는 활동가가 리얼리티로부터 일정한 전략적 거리를 두도록 허락하며, 수단과 목적을 (융합시키지 않고) 숙고하여 통합하려고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상황의 양상들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합니다만, [아무튼] 그러한 매개를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해방적이기도 한 이 전복의 자격은 말하자면, 그것이 설득적인 것은, 들뢰즈가 활동가를 기각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뿐이며, 또 의지적 행위를 촉진하는 조건들 그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인정하고, 리얼리티가 어떤 의미에서 본래적으로 창조적이고 생기 있다고 하는 들뢰즈의 기본 주장을 인정할 때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자세하게 다룬 논점이므로, 나머지 시간에는 들뢰즈가 형이상학을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에 투입함으로써 무엇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지를 간단하게 소묘할 작정입니다.

내재성은 내부에 머물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창조자-신에 대한 일체의 초월적인 구상을 배제하고 존재의 내재적인 구상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와 스피노자를 그대로 좇고 있습니다. 그때 신은 존재를 넘어 서서 외부로부터 존재에 개입하는 활동이 아니라, 고스란히 존재에 내재적이며, 자연 전체와는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내재적 존재론은, 신 없는 자연의 무신론적 주장이라고 독해되거나, 반대로 (그리고 이쪽이 스피노자 자신의 지복으로의 경도에 적합합니다만) 범신론의 한 형태라고, 전체적으로 신격화되고 영화霊化[정신화]”된 자연의 긍정이라고 독해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를 철학이 화신(化身)한 인간으로서 포용하는 들뢰즈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피노자주의란 유보없이 내재성과 범신론의 위험’”을 포용하는 것입니다(EP, 333; cf. 67). 여기서의 출발점은 자기-원인과 자기-필연화로서의 신의 절대적인 자기-충족입니다. 스피노자는 씁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는 신의 지고한 힘, 혹은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사물이 무한하게 많은 양태로, 모든 사물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며, 게다가 삼각형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개의 직각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과 동일한 필연성으로, 모든 사물이 항상 나오는 것이다.[각주:1]

 

들뢰즈가 주석하듯이,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이런 자기-원인의 위력(force)을 결여하고 있으며, “자기의 힘에 의해 실재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힘에 의해 유지[보존]되지 못하고, 그 실재와 유지를, 자기를 유지하고 자기에 의해 실재할 수 있는 존재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리하여 유한한 존재자가 그것에 의해 실재하고 유지되고 활동하는 바의 힘은, 신 그 자체의 힘이다”(EP, 89-90). 이리하여 실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하고 활동하는 유일한 무제한적 힘을 표출하는 다각형의 면切子面, 크건 작건 활동적이고 크건 작건 힘을 가진 다각형의 면切子面이다.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자를 결정하는 원인으로서의 힘은 그 결과가 그 힘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이다. 이때, 물론 그 힘의 안이란, 다른 별개의 것의 안이기도 하지만, 역시 [후자도] 그 힘 안에 존재하고 머문다.” 그것은 신의 양태 또는 피조물이 신의 내부에 머무는 방법에 의해서이다(EP, 172). 그런 내재성은, 자기에만 내재적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전부이자 하나인 것을 흡수하고, 그것이 내재할 수 있는 그 무엇도 남겨두지 않는다”(WP, 45). 그때, 임의의 주어진 양태를 이해하는 것은, 그 양태가, 존재자 전반의 무한한 전체성또는 무제한의 하나-전부를 만들어내는 원인의 위력의 기구의 일부인 그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WP, 35, 38; cf. DR, 37). 위와 같은 내재적인 방향성으로부터, 들뢰즈 자신의 존재론의 시차적(示差的)인 특징의 대부분이 일의성, 직접성, 표상[재현]의 거부, 주관-대상 관계의 거부 등이 곧바로 나옵니다.

잠시 들뢰즈는 옆에다 두고, 위와 같은 입장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일정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별개의 이론적 맥락에서의 전개를 상기해봅시다. , 아도르노에게서 비롯됐다고 간주되고, 맑스 경제학의 독해를 통해 모이셰 포스턴에 의해 더욱 전개된 비판이론입니다. 아도르노가 내재적 비판의 방법을 옹호했을 때, 그의 염두에 있던 것은, 그 대상의 내부에 머무는비판이었습니다. 동일화 사고의 억압적 귀결에 대한 비판은, 동일성과 그 개념화의 자원을 그 자체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정적으로라고 해도 다른 삶의 방식을 암시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손상된 삶이 견뎌내고 있는 고뇌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아도르노의 논의에 의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 자체의 구조를 떠맡지 않고, 그 위력을 그 자체로 향하게 하지 않고, 그 바깥쪽으로부터 전반적으로 거부해버린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그 대상에 대해 아무런 힘도 갖지 않습니다.[각주:2]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내재적 비판은, 맨 처음에 그 대상의 자기-충족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모든 것과 인간 경험의 모든 것의 양상을 상품화의 그립으로 에워쌉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후에,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흔들림(play)을 추적하는 것을 시도해 보고, 내적 모순이 언젠가 뭔가 다른 것으로 통하는 문을 열지도 모른다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 어떻게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은, 아도르노의 관심사의 목록의 상위에는 놓이지 않습니다. 그런 물음들은,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포스턴의 획기적인 연구에도 표면화되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턴의 연구는, 내재적 비판의 범례로서 크게 칭찬 받았습니다만,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추상적 가능성을 다소간 고집하는 방향에서, 아도르노의 비관적인 사회 분석을 수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포스턴에 따른다면, 맑스의 자본 분석에 힘이 부여되는 것은, “그 관점이 고찰되는 구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발생시키는 내재적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각주:3] 포스턴은 가치형태가 발생시키는 강제와 가치형태가 명령하는 추상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회의 가능성을 되풀이하여 언급합니다만, 그의 책은, 이 가능성을 리얼리티로 바꾸는 활동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이 활동가는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의 대상이자 부속물이며”, 그런 한에서, “이 계급역사의 <주체>”나 자본에 대한 자기-해방적인 적대자가 아니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역사적 과제는, 그 강화나 자기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폐기입니다.[각주:4] 아무런 변명도 이뤄지지 않은 채, 그 성과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역사적 역동으로서, “사회적 활동가의 배후에서,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작동하는 위력이 구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분석이라는 것입니다.[각주:5]

어느 정도 맑스 자신은 비주의주의적인 선을 따라 읽을 만한가라는 복잡한 문제는 옆에 두었는데요,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반성적 고찰은, “비판적이라는 것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비주의주의적으로 읽어도 마땅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만, 안티 오이디푸스의 진단으로는, 자본주의 과정이란 상품화의 항상적-가속적인 기구에 의해, 사회적 실재의 모든 다각형의 면탈코드화되고, 전의 복잡한 사회관계가, “탈코드화된 흐름의 결합을 통해 구성된 단일한 내재성의 장으로, “모든 초월성의 부정으로 평탄화되는 과정입니다. 점차 그 탈코드화가 다른 노예에게 명령하는 노예만”(AO, 254)을 남기는 비할 데 없는 노예제를 제도화한다고 하더라도, 이 지옥의 복종의 논리를 유지하는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가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키조프레닉[분열증자]”이라고 부르는 바의 범례적인 비-활동가입니다. 드뢰즈와 가타리의 스키조자본주의의 극한을 탐구하거나 구현합니다. “스키조는 자본주의의 내적인 경향성의 실현이며,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물, 자본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자본주의의 살육의 천사이다”(AO, 35; cf. 255). 자본주의와 분열증2권에서 마찬가지의 기능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귀속됩니다만, 그것은 소수자-되기로의 도관(導管)으로서, 혹은 서양사회에서의 노마드의 후계자”(TP, 558 n.61), 철저하게 탈영토화된 후계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도움이 되는 한에서일 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채워지는 제도에서도, 탈영토화와 분자화의 선이 새로운 성격과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잠재력을 얻을여지가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언하는 것은 다분히 정당합니다.[각주:6] 그렇지만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해방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그런 탈영토화의 운동뿐이며, 특히 자본주의 자체가 구동하는 형태의 절대적인 탈영토화입니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숙고를 갖고서 단절하고 자본주의의 부불 노동의 명령에 승리하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하는 활동가에게 요구되는 형태의 힘이나 역량을 고찰하기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도주라는 의심스러운 대가를 우리에게 남기는 것입니다. 이 도주선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임의의 역사적·정치적 과정과 더불어 작용한다기보다는, 절대적이고 매개 없는 자기-원인적인 필연성(causa-sui)과 공통되는 시공간을 따라 작용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특정한 정치적 역량을 대신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노마드적인 전쟁기계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유혹합니다. 전쟁기계는 절대적인 속도로 작용할 것이며, 그것은 속도와 동의어로 간주됨으로써, “순수하고 계량 불가능한 다양성 , 찰나의 침입, 변신의 힘의 침입”(TP, 386, 352)으로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본주의의 역동의 극한[한계]”에 관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조립하는 것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모든 현실적인 역량의 탈조직화나 용해를 넘어서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활동가는, 오로지 잠재적이고 초-역사적인 활동가이며, 노마드적 또는 분열증적 주체, 현실성 자체의 종언에 상응하는 주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분열증은 역사의 종언입니다(AO, 130). “탈영토화의 가장 먼 한계에 손을 대려고 노력함으로써, 들뢰즈와 가타리의 아직 보지 못한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바로 한계를 찾아낸다.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성의 실현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분열증자는 리얼리티의 생성변화그 자체를 구현[受肉]한다(AO, 35)는 셈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우리는 멀리 있습니다. 자유와 정치에 대해서 더욱 명백한 관심을 품은 철학자들, 예를 들어 사르트르, 파농,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안한 내재성과 초월성을 정면에서 대조시키는 설정으로부터는 멀리 있습니다. 이들 사상가들에게 인간의 자유의 실천적인 기초는, 주어진 상황을 초월하는 상대적인 역량과, 자기의 선택에서 유래하는 적극적인 목적으로 자기를 기투하는 상대적인 역량에 존재합니다.[각주:7] 그런 초월성을 빼앗기는 것, 보봐르의 표현으로는 자기의 내재성 안에 응고되는 것, 자기 자신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자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때, 전제(專制)사람을 그 사실성의 내재성으로 가둬버리는힘으로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사람은 이제 사물들의 한복판의 하나의 사물 이상의 것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물의 집합으로부터 공제[뺄셈]된다고 하더라도, 그 부재의 어떤 흔적도 지상에 남기지 않고 공제[뺄셈]될 수 있다.”[각주:8]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성 일반의 우주적인 공식이라고 한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되기에 대해 좋은 근사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사르트르와 파농과 똑같이, 또한 이 점에서는 라르드로(Lardreau)와 똑같이, 어떤 자유의 옹호이든, 복종으로부터 해방으로 이끌어갈 어떤 집단적 동원이든, 적어도 최소한의 초월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초월성은 사르트르의 표현으로는, “우리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활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입니다.[각주:9] 보봐르가 논하듯이,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자기를 찢어내고”, “구체적인 목적과 특정한 기획의 실현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는 자유라고 주장할수 없습니다. 물질적 원인과 내재적 필연성의 흐름을 중단하는 역량이 없으면, 지각과 재-활동[-] 사이에 아무런 거리감이 없다면, 생리의 수준에서도 사회의 수준에서도 활동을 자극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리하여 숙고적인 의지 작용이 자동적 또는 기계적인 반사보다 우세하도록 촉구하는 거리가 없다면,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그런 간극을 기초로서 자기를 구성할 수 있는 활동가만이,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들뢰즈 철학에는 그런 활동가의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1. Spinoza, Ethics IP 15, IP 17 S1. [본문으로]
  2. Adorno, Negative Dialectics(Routledge), 97. [본문으로]
  3.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55. [본문으로]
  4. Postone, Time, 276n 41. “요컨대 맑스에 의한 자본의 궤도 분석은,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 실현할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도 가리키지 않는다”(357). [본문으로]
  5. Postone, Time, 215n 109, 295, 390. 그리고 들뢰즈 : “운동은 항상 사고하는 자의 배후에서 일어나거나, 사고하는 자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 일어난다.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Dialogues II, 1). [본문으로]
  6. WP, 93; cf. TP, 345; DI, 270. [본문으로]
  7.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Simone de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Citadel Press, 1948), 25-27; cf. Hallward, “Fanon and Political Will”, Cosmos and History 7:1 (2011), 104-127. [본문으로]
  8.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102, 100. [본문으로]
  9. Sartre, Situations vol. 9, 101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 cf. ;cf.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52. 반대방향으로 지나가는 리스크도 있으며, 로트레아몽과 플라톤을 따르는 바디우처럼, 사고할 수 있는 활동가에 관해 사고의 절대적 초월성을 고집하는 리스크도 있다. 바디우에게서 수학이 “참인” 사고의 범례적 사례인 것은, 수학이 가장 명백하게 주체로부터의 “권외(圈外)”의 거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떤 “진리의 초-인간적인 도래”도 그것을 떠받치는 주체를 “유도”하고 “구성”해야 한다. “수학적 영원성”의 “얼음같이 차가운 반인간주의”는 수학에 의해 부과되는 “개조”의 연성과 “지성의 소원화”에 복종하는 규율훈련된 사유자에게만 이해 가능하다(Badiou, “Mathematics and philosophy”, Theoretical Writings, 10-14; cf. Badiou, Logics of Worlds, 173-174). 이렇게 전담함으로써 바디우는, 들뢰즈나 알튀세르나 푸코의 손에서 배제된 주체의 범주를 회복할 수 있지만, 한쪽에서의, 바디우에 있어서의 진리의 유발 효과로서의 주체의 이론과, 다른 쪽에서의, 활동가와 그 역량에 대한 주의주의적 구상 사이에는, 여전히 큰 거리가 있다(cf. Hallward, “Sujet, décision et volonté dans la philosophie d’Alain Badiou”, in Autour d’Alain Badiou [Paris: Germina, 2011], 303-331).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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