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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의 추이라는 기반에 너무나 매몰되어 살아 왔다. 그것은 어쩌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판단 기준, 변화를 보이지 않는 내재물, 매일 매일과 계절의 우주적인 순환, 개별적인 싸움과 자연재해, 탄생에 뒤이은 성장에서 노쇠, 죽음, 부패로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의 정향성 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기반이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떠들썩하게 나오고 있는 착종 상태 속에서 유대․기독교 문화는 역사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이분법의 양극단을 오가면서 균형을 취함으로써 시간을 이해하려고 분투해 왔다. 그러한 전통 문화 중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에만 주목해 왔다. 각각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논리 및 심리에 있어서 피하기 힘든 테마를 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테마란 시간의 매순간을 선으로 긋기 위한 독자성과 명료함을 초래하는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합법성을 동시에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분법의 한 끝에서, 내가 ‘시간의 화살’이라고 부르는 측에서는 역사란 반복되지 않는 사태의 일방향성의 연쇄이다. 각각의 매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순간을 올바른 순서로 연결하면 관련된 사건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 하나의 이야기가 말해진다.
이분법의 다른 끝에서 내가 ‘시간의 순환’라고 부르는 측에서는 사태란 우발적인 역사에 인과적인 충격을 미치는 개별적인 사건으로서는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근본적인 상태는 시간에 내재 하며, 항상 존재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다. 외관상의 운동은 반복되는 순환의 일부이며, 다양한 과거가 미래에 다시 현실의 것으로서 반복된다. 그곳에서는 시간은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시간의 화살이란 성서에서 말해지는 역사에 관한 최상의 은유이다. 신은 단 한 번에 지구를 창조하고, 단 한 척의 배에 올라 단 한 번의 홍수를 극복하라고 노아에 명하며, 지금밖에는 없는 순간에 모세에게 십계명을 전했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고, 3일 후에 부활시키기 위해서 그 분을 한정된 시대의 특정 장소에 보냈다. 많은 학자들은 시간의 화살이 유대교 사상이 가져온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특유한 것이라고 단정해 왔다. 왜냐하면 시대의 선후와 무관하게, 유대교 사상 외의 사상 체계의 대부분은 직선적인 역사의 연쇄보다도 시간의 순환의 내재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에도 시간의 순환이라는 저류(低流)가 있다. 일례로 이것은 <전도서>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자연계의 상태에 내재하는 것과, 부와 힘의 허무함을 예시하기 위한 은유로서 태양과 물의 순환이 인용되어 있다. 부유한 자는 그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너무도 허무한 것이라고 전도자는 말한다.
유대 기독교 문화의 일대 기록문서인 성서에서는 두 견해가 공존하고 있음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 오늘날의 교양 있는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시간의 화살이라는 견해에 친숙하기도 하며, 이것이 ‘표준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은유가 성서 그 자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후 지배력을 증대해 왔을 뿐이다. 17세기 이후의 과학 혁명과 기술 혁명에 뒤따랐던 진보관이 그 은유를 특히 지지했기 때문이다. 리처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대인들은 시간의 특질이 순환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여 계속 나아가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을 한다. … 시간이 직선적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서양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쳐 왔다. 이 개념이 없었다면 진보라는 관념을 생각해 내거나 우주나 생물의 진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의 화살이란 우리가 보통에 품고 있는 견해이라고 말하는 경우, 비가역적인 연쇄 속의 개별적인 순간은 명료함 자체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문화와 시간 모두에 속박되어 있는, 사물의 본질에 관한 사고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에 주의를 해 주었으면 한다. 근대에 있어서의 화살과 순환을 둘러싼 최대의 저작 <영원 회귀의 신화>에서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년 3월 9일 부카레스트 ~ 1986년 4월 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가 논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시간이 순환한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기에 시간은 날아가 버리는 화살이라는 견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거나 가장 거대한 공포를 초래하는 원흉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문화는 역사가 항구적인 안정을 구현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나, (전쟁이라는 행위로 치닫는) 인간이나 (큰 화재나 기아가 초래한 결과로서의) 자연현상이 시간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이며, 축제나 의례에서 쫓아버리거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이상(異常)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고방식에 대해 공포를 느껴왔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문화가 낳은 특이한 산물인데도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적어도 숫자적․즉물적인 의미에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역사에서의 ‘비가역적’인 것과 ‘신기(新奇)’인 것에 대한 관심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최근의 발견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고대인들은 … 역사가 부과한, 모든 종류의 신기함과 비가역성으로부터 힘껏 자신의 몸을 지켰다.”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문화에 속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뒤얽힌 다양한 태도를 정리해 넣어두기 위한 잡동사니 창고로서 단순화되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특히 엘리아데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분법의 양 극은 본질적으로 틀림없이 관련되어 있지만, 중대한 차이를 포함한 적어도 두 가지 관념이 합체되어 있다. 시간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변화하지 않는 진정한 영속성이나 내적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면, 분리 가능한 사상(事象)이 빈틈없이 반복되는 주기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창조와 종말이라는 고정된 두 가지 시점들을 연결하는 단 한 번의 사건의 연쇄가 시간의 화살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대 헤브루인의 견해인데, 이것은 내적인 방향성이라는 아득한 후세의 개념과도 아주 다른 것이다. 독자성과 방향성이라는 개념도 시간의 화살을 둘러싼 우리 현대인의 관념에 겹쳐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된 것은 각각 상이한 시대의, 더욱이 본질적으로 상이한 맥락에서였다.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은 바람직하고 ‘훌륭한’ 이분법이 된다. 왜냐하면 두 극을 차지하는 어떤 개념도 그 본질에서 말하면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고 바라는 서양인이라면 어떤 족이든 마음속에서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지적인 (그리고 실제적인)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테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화살이란 비가역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며, 시간의 순환이란 시간을 초월한 순서와 법칙처럼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개념 모두가 필요하다. 
                                                                                     - 스티븐 제이 굴드,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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