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현실 사회주의가 사라진 이래, 공공성 개념은 좌파의 피난처가 된 적이 있다. 공공이라는 공간은, 과거의 공산주의가 목표로 삼았던 계급투쟁이 끝난 사회를, 의미를 바꿔도 이념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봤듯이, 공화국에서의 분쟁의 부재는, 분쟁을 국내적(domestic)으로는 승인하지 않는, 즉 부근으로 분쟁의 장소를 옮긴다는 함의였다. 그렇게 하자 분명히, 공화국이 세계 자체를 외연으로 하게 되면, 겉보기에는 세계공산주의의 이상과 비슷하다(사회주의 공화국에서조차 외부의 적은 존재했다). 물론 현실공산주의가 모습을 감춘 후에는 국가가 남았다. 그래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공공공간은 국가지양할 수 있는 장인 것처럼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공론장의 구조변동[하버마스의 1962년 저작]으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쓴 신판서문이나 사실성과 타당성에서는, 공공성이 위치되는 장소가 크게 변화한다. 그것은 비국가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비시장적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Zivilgesellschaft)’이다. 이런 의미의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한 비국가적비경제적인 결합이다.(齋藤純一 公共性)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윤대석, 류수연 옮김, 이음, 2009.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한승완 옮김, 나남출판, 2004.

 

하버마스나 사이토 준이치(齋藤純一)가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없지만,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한 결합이 개인을 단위로 하는 결합이며, 포괄적인, 즉 국가나 시장과 마찬가지의 전체성을 지닌 사회라면, 그것은 이미 일종의 공산주의 사회가 아닐까? 그와 같은 결합이 국가에서도 시장에서도 없는 곳, 즉 자본주의 사회의 상부구조에서도 하부구조에서도 없는 곳에서 발견된다. 정확하게는 가탁(仮託)되고 있다. 맑스주의에 있어서는, 상부도 하부도 아닌 심급은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터인데, 갱신된renewal 좌파 이론의 개념 배치도에서는 공공공간이 공산주의 사회를 대체하는 것이다. 19세기 이래의 협동조합사상(어소시에이셔니즘)이나 특수한 당 조직론을 가진 20세기의 맑스주의에서는 이것과 비슷한, 비국가적비시장적인 장소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모형이 될 수 있는 인간의 결합관계를 지금 여기서 정위하고자, 발견하고자 하는 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소멸 후, 공공공간이 그 행렬에, 처음부터 무한정한 넓이를 가지고 가세한 것이다. 공공공간은 더 이상 부분사회가 아닌 자유의 공간이며, 국가를 지양한 공화국이다.

하버마스를 표지판으로 삼아 좌파사상사를 돌이켜보면, 그가 오늘날의 좌파 전반에 있어서 선구적인 까닭과, 90년대 이후 신구 좌파가 공공성 개념에 우르르 몰려드는 기미를 잘 알 수 있다. 1962년의 시점에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의 공공공간은 유럽의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모범으로 삼은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영역이며, ‘친밀권’(부르주아 시민의 사생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독서를 하고 카페에서 얘기를 나누고, 가정에서 현악사중주를 즐기는 듯한 자립된 시민층의 생활 속에서부터 국민적인(national), 나아가 유럽 규모의 문예공화국이 생겨나고, 그것이 공권력의 조작적 공개성에 대항하는 비판적 공개성의 잠재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두 가지 점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우선 하버마스는 다른 사회민주주의자보다 앞서서, 국가를 통한 자본주의의 개량(베른슈타인식 수정주의)과는 다른 사회민주의 노선(민주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노선)을 이론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이다. 공공공간은 국가도 시장도 아니지만 미래 사회의 모태인 장소로서 사회민주주의 속에 도입됐다. 공공성 개념에 의해 사회민주주의가 진화했다고 말해도 좋다. 이때 루카치 이후의 서구맑스주의는 시민사회파 맑스주의가 됐다. 일본에서의 그 도입자들은, 파리나 제네바, 로마를 방문하고 유럽시민사회의 성숙을 체득하라고 권장한다. “유럽의 지성이 자각적으로 형성한 것이 우리에게도 가치기준이 될 것이다. 동구사회의 지적 세계는, 이제, 서구 시민사회 형성기의 사상을, 사회주의의 보다 높은 차원으로 비약을 요구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平田清明). 그와 같은 형태로 선진자본주의야말로 사회주의에 가장 가깝다는 정통파 맑스주의의 원점을, 사회민주주의가 러시아 맑스주의로부터 되찾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둘째, 새롭게 발견된 미래 사회의 모태는 이미 문화의 장소였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도 호되게 비판받고 있듯이, 이 공공공간은 부르주아적이다. 페미니즘은 때문에 거기서는 남성중심주의를 키우는 장소라고 지적하고, 3세계주의는 공공공간 속에서 유럽인과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사이에 의사소통적 행위의 합리성이 작동하는가라고 물었다(일본을 방문한 하버마스는 이 질문에 대해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처럼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비판적 공개성의 영역이라며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자본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문화(교양시민적)이라는 것이었다. ‘시민의 의미를 본질 환원주의(경제주의)적으로가 아니라, 또한 법-정치체제에 의해서도 아니라, 하물며 생물학적으로가 아니라 정의했기 때문에, 공공공간은 이미 1962년의 시점에서, 공화주의 국가로부터 넓은 의미의 문화적인 장소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판서문(1990)에서 “60년대 말 이후에 형성되고 정착된 대항문화와 새로운 사회운동’(부의 분배가 아니라 생활양식의 문법을 쟁점으로 하는 페미니즘, 에콜로지, 반핵반원전 등의 운동)에 대한 평가”(齋藤純一 앞의 책)를 하버마스가 자기 비판적으로 행하는 것은, 용이한 것 이상으로 자기 옹호적인 수정이었다. 68-69년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우두머리[領袖] 아도르노가 학생운동을 새로운 전체주의”, “좌익 파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aftermath)새로운 사회운동을 흡수, 회수하는 이론적 장치를 시민사회내지 공공성 개념은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별을 고발하거나 다양성이나 차이에의 권리를 요구하는 90년대의 문화좌익, ‘문화를 지렛대로 삼아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혁명을 생각하는 일부 구신좌익을 빼고, 공공성의 사회민주주의에 미리 이론적으로는 패배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버마스에게 90년의 신판서문이 아무리 수정됐다고 해도, 그는 각종 문화좌익보다 선구적으로 맑스주의의 문화적 전회”(프레드릭 제임슨)를 성취했던 것이다. 68년의 후예로서의 새로운 사회운동의 역군들은 우익이 역사가 끝났다고 승리를 선언한 후에 문화의 배로 옮겨 탄 것일 뿐이다. 교양시민적 문화 개념을 인류학적, 사회학적인 그것으로 비판적으로 확장 내지 수정하려고 해도, 그것이 미리 비국가적비시장적인 문화의 장소가 아니라면, 그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이토 준이치(齋藤純一)는 이 신판 서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공공성에 있어서의 과제는, 국가나 유력한 조직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 감시로부터, 토의를 통한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형성, 정치적 아젠다의 설정으로 옮아간다. 자유주의로부터 공화주의(비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정치적 자치의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로의 중심 이동이 보인다.” 조금이라도 사상사에 통달해 있으면, 어느새 공화주의는 비국가적인 차원의 사상이 되어버렸네?라고 묻는 게 당연한 서술이다. 공화주의가 문화의 영역에 침입해들어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시키는 서술이기도 하다. 게다가 문화좌익도 공공성 논자도 모두 공화주의자이다, 라고 오늘날에는 말해도 좋은 하나의 근거가 되는 서술이다. 아무리 토의갈등conflict’, 마치 계급투쟁의 후계인 양 공공공간 속에 들여왔다고 해도(문화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거기에는 공화주의의 틀이 이미 [사람들을] 걸려들게 하고 있다. 교양시민의 문화도 민속적인(ethnic) 문화도 문화인 것처럼, ‘토의갈등은 현대의 아고라(사이토는 공공공간을 담론공간이라고 정의한다 담론 discourse이란 우선 연설이다) 속에 둘러싸인다. ‘현실의 사회주의를 잃어버린 좌익은 공공공간 속으로 계급투쟁의 잔재를 거느리고 도망쳐 들어갈 수 있더라도, 그것은 공화주의자가 되는 것과 맞바꾼다는 것이다. 권력문제와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민주주의자(데모스파, 멀티튜드파)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과 맞바꾸는 것이다. 도대체 공공성 공화주의에, ‘갈등의 이름으로 계급투쟁공화국속에 들여오려고 노력하는 민중의 대변자’(혹은 복면을 쓴 맑스주의)라는 규정을, 우로부터 비판하기 위해서든 좌로부터 옹호하기 위해서든, 줄 수 있을까? 역사상의 공화주의가 계급투쟁의 억제, 억누름을 본질적인 사명으로 했듯이, 현대의 공화주의는 자립적인 담론공간으로만 갈등을 한정하려고 한다. 이런 사상에 의해, 시위가 거칠어진다는 것은 정치로부터의 일탈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문제인 것이다.

하버마스 자신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규정하기는 했으나, 공화주의를 표방한 적은 없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목적(‘이나 완성’)시민적 덕 civic virtue’으로 변환함으로써 성립하는 공화주의(의 내용이 공화국의 지속공화국 확장에 대한 헌신 이다), ‘합의를 목표로 하는 토의의 절차에 기초를 두는 자신의 민주주의를 뚜렷하게 구별한다. 게다가 이 양자로부터, 시장에서의 계약이나 법적 권리의 기초인 자유주의도 또한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그의 민주주의에 통합시킨다.

 

자유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민주적 과정은 오로지 이해관계의 타협이라는 형식으로 실시된다. 반면 공화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민주적 의사형성은 윤리적-정치적 자기 이해의 형식으로 실시된다. 토의 이론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두 진영의 요소를 거둬들여, 이것들을 심의와 의결을 위한 이상적 절차라는 개념에 통합하는 것이다(사실성과 타당성, 1992).

위르겐 하버마스, 사실성과 타당성』, 박영도, 한상진 옮김, 나남출판, 2007.

 

어떻게 하버마스 이론적으로 통합되는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며, 또한, 토의의 장소에 주어지는 포괄적 명칭이 시민사회’ = ‘공론장’(본고의 용어법으로는 공공공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3종의 정치이념을 민주주의가 통합하고 있다. 토의 이론은, 자유주의와 손을 잡고 나아가는 이해조정의 과정에도, 공화주의의 관할인 정치적 의사형성의 과정에도, 바로 토의의 절차들(토의의 How), 토의라는 절차(What으로서의 토의)를 과정의 이상으로서 개입시키려고 한다. 그 실천은 오늘날, 행정기관의 의사결정을 보완하는 주민 참여의 토의 민주주의로서, 일본에서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다. 토의에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합의 형성이 목적으로서 부과되기 때문에, 목적으로서의 합의가 이해 조정 과정에서도 정치적 의사형성 과정에서도 통제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3종의 정치 이념의 통합은 효과로서 기대한다. How이자 What인 토의의 목적=합의가 공공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버마스의 민주주의이다. “모든 있을 수 있어야 할 관여자가 합리적 토의에 대한 참가자로서 합의할 수 있는 행위 규범이야말로 타당하다.”민주주의 원리는 정당한 법제정 절차를 규정해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법 매체 그 자체의 산출까지도 제어해야 한다.” 토의의 How(대의제, 직접민주주의, 미디어 등)는 현실적으로는 관여자를 다양하게 한정하며, 다양한 배제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기에, What으로서의 토의에는 그런 한정은 포함되지 않으며, 이 불균형 때문에, 목적으로서의 모든 있을 법한 관여자의 합의는 합의의 확대 균형을 요청할 터이다. 배제된 자는, 배제됐다는 관여를 이미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보편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각각의 특수한 합의를 타당한 것으로 한다.

아무튼 공공공간에는 미리 배제된 관여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공공공간은 배제를 배제하는 확대에 의해 지속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에서 프롤레타리아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국민에서 외국인으로, 심지어 기존의 에서 기존의 , 사람 또는 그 지위의 시민권을 끊임없이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 공공공간은 부패한다. ‘보편적 규범의 내용은 미리 주어지는 (칸트의 도덕처럼) 것이 아닌 대신에, ‘관여자의 영구 확대의 가능성으로 변환됨으로써, 그때그때의 타협이나 의사형성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 “누구도 합리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준을 누구에게 한정을 가하지 않고 규범으로 하는 의지만이, 공공공간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 토의에 의한 공공공간의 제어시민사회확장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문제’(빈부격차, 국적, 젠더 등) 둘 다 이어야 한다. ‘합의의 타당성은 사실상 그 내용이 아니라 아직 합의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있을 수 있다”, “아직 해결이 합의되지 않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라는 개방성에 있다.

더 말할 것도 없다. 공공공간은 영토의 침략을 채무의 확대가 아니라 관여자로서의 시민의 확장으로 대체한 공화국이다. 이 확장력, 자기 팽창력에 의해 공공성 개념은 문화좌익을 흡수하고, 보수 사상으로서의 공화주의(국가에의 헌신을 공민公民의 덕으로 삼는)와도 공존시킬 수 있었다. ‘문화좌익의 등장에 수반된 문화 개념이 의미의 인플레이션에 휩쓸린 것처럼, 공공성 개념은 공공성의 확장=지속=통제라는 본성을 따라서 세계공화국을 다운사이즈시켜야만 할 때 개념적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다. 이 확장력에 시민을 합의에 이르게 하는 잠재력을 기대하고 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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