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른 여느 글보다 한자에 유의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반복'의 한자어가 다르다는 점에 주의하자. 즉, '反復 répétition'이 아니라 '反覆 itérabilité'이다. 자세한 것은 각주3을 참조. 한편, 용어상의 문제가 있기도 한데, 그 대표적인 것이 hantologie이다. 한국에서는 '유령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일본에서는 유령론 외에도 유재론(幽在論)이나 빙재론 등으로 옮겨진다. 




되풀이()가능성의 법

데리다의 유한책임회사와 행위수행성의 문제

反覆可能性: デリダ有限責任会社行為遂行性問題

The Law of Iterability : Jacques Derrida's Limited Inc. on the Performative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원문은 여기

발행일 : 2001131

 

자크 데리다의 방대한 저작군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1971-88년 사이에 계속 쓰여진 유한책임회사(J.L. 오스틴의 언어행위론의 독해를 포함한 서명, 사건, 맥락(1971), 이 논문에 대해 존 R. 설에 의해 이뤄진 비판에 재응답하는 유한책임회사 abc...(1977), 또한 이 일련의 <데리다-설 논쟁>에 대해 붙여진 질문장에 대한 공개서한으로서 발표된 후기 : 토의 윤리를 향하여(1988)의 세편의 텍스트)[각주:1]를 출발점으로 고른 것은, 이들 텍스트가 논쟁이나 공개서한, 그다지 자율적이지 않은 외견 , ‘주저가 될 수는 없는 듯한 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서 보면 의문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런 외견 때문에 (이 외견에 내포된 기생성의 논리야말로 이하에서 보듯이 거기서의 주요한 물음을 만드는 것인데) 유한책임회사는 아마 다음의 점에서 데리다를 읽기 시작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도입적 가치를 부여한다. (1) 접근법의 측면. 데리다의 이른바 철학사적 입장은 보통 현상학 및 존재론에서 시작되는 해석학적 혹은 텍스트론적 전개의 하나로 간주된다(초기의 아카데믹한 후설 연구, 탈구축(déconstruction)과 하이데거의 해체’(Destmktion) 사이의 긴장관계, 존재론(ontologie)유재론(幽在論, hantologie) 등등). 그러나 탈구축의 본령이 여러 언어들, 장르들(철학, 문학, 예술, 정치, 정신분석)의 횡단이라는 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데리다의 언어행위론에 대한 개입은, (‘대륙철학영미철학이라는) “두 개의 현저한 철학적 전통의 대결[각주:2]이라는 외형을 환기함으로써, “프랑스현대사상에 관심이 없는 철학연구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독자에게도 독해의 장을 열어왔다. 확실히 언어행위론은 (일상언어를 분석대상으로 하는 등) 성질상, 오히려 현상학 등보다도 고유하게 철학적인 전문어를 조직적으로 구사하는 등이 비교적 적은 만큼 접근이 쉽다고 생각되며, 또한 그만큼 데리다 자신의 입장도 첨예해진다는 이점이 있다. 실제로 세 개의 텍스트의 분명한 문체적 차이(학회보고, 논쟁의 응답, 공개서한)는 그 입장(의 차이)을 부각시키는 역사적 혹은 전략적 맥락들을 각각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2) 탈구축의 맥락에 내적인 측면. 데리다 본인이 이런 배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선 결과적으로 자신의 언어론, 텍스트론을 특징짓는 데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된 되풀이[反覆] 가능성’(되풀이反覆 itération은 이하에서 보듯이 반복 répétition과는 엄밀하게 구별된다[각주:3])이라는 개념(정확하게는 -개념에 머문다)서명, 사건, 맥락에서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전경화된다.[각주:4] 원래 데리다의 언어행이론 독해는 비판’, ‘반박’, ‘대결같은 부정적이고 대항적인 기획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 아니라, “대답을 시도하는”(86/101) 가운데 프로그램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한정하는 것”,[각주:5] 실제로 그것을 전개하고 인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확실히 이것을 받아서 70년대 후기 이후(영어권 진출 이후)의 데리다는, 최근까지도, 자신의 키워드의 일부로서 언어행위론의 용어(퍼포머티브/콩스타티브, 발언내적 혹은 발언매개적인 힘, 사용/언급, 약속/협박 등등)를 적극적으로 원용한다. 이때 이런 말들이 특히 법의 힘(1989-90) 이후 현저한 것처럼, 이른바 윤리--정치적주제계와 밀접하게 결부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외적인 측면. 이런 언어행위론의 변형이나 재단련은 데리다나 탈구축의 독해의 문맥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행위론 자체의 전개는, 철학 내부의 문맥(분석철학, 해석학, 용어론 등)뿐 아니라, 법철학(특히 H. A. 하트),[각주:6] 언어학, 문학이론, 정신분석 같은 영역들에도 폭넓게 파급되고 있으며, 탈구축에 있어서의 개입의 내실에 따라서, 이것들의 전개가 입는 효과들을 측정하고. 그 귀결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기대된다(원래 언어행위론의 순수한계승은 여기서의 기획이 아니다. 이하에서도 묻고 있듯이, 이것이 구조적인 배제에 의해 스스로의 정통성을 참칭하는 사유화/고유화를 내포하는 한, 미리 제한된 몸짓이라는 것(순수와 불순의 공모관계)는 그 자체 탈구축의 물음 중 하나이다(85ff.[100]).

이상의 가설적 측면의 모든 것을 여기서 일일이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본 논고에서는 지면의 제약 때문에도 당장은 (2)의 측면에 논의를 집중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다른 두 측면의 가치를 유효하게 평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그 이전에 데리다의 언어행위론 독해가 그 정도로 내재적인 이론적 개입이라는 전제가 설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개입일까? 그렇다면 이 개입은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그런가? 혹은 오히려 어떤 방향에서 파악되어야 할까?

 

1.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프로토콜

문제의 핵심에 간단하게 접근하기 위해, 오스틴, 설에 대한 데리다의 응답을 추적해가지는 않고(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어로 쓰인 몇 개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각주:7] 우선 유한책임회사에서 재차 환기되는 되풀이[反覆] 가능성(itërabilité)’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 최소한 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자. 사실상 이것은 직접적으로 언어행위론의 텍스트로부터 인용된 것이 아니며, 서명, 사건, 맥락에서도 전반부(오스틴 독해는 후반부)에서 데리다가 자신의 언어론의 틀을 요약적으로 제출하려고 할 때 도입된다. 이러한 되풀이[反覆] 가능성을 주제화하는 한에서는, 언어행위론과의 관련은 외재적인 것에 머물 우려가 있으며(실제로 이 연관은 반드시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분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각주:8]), 만일 그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에 응하여 언어행위론이 초래하는 적극적인 효과들은 상실될 것이다(나중의 데리다의 언어행위론의 적극적 원용은 단순한 전략적 몸짓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관계를 묻기 위해서, 우선은 언어행위론의 문제계와 혼동하지 않고 그로부터 독립적으로 이 말을 검토하자.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화행speech act, 혹은 오히려 행위수행성 사이의 내재적 연관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 후의 과제이다.

원래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다뤄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것이 언어의 아주 기본적인 물음 언어란 무엇인가, 무엇이 언어를 언어답게 하는가, 무엇을 갖고 언어는 존재하며, 언어는 언어로 간주되는가 등등 에 답하는 언어 일반의 성립 조건으로서 첫째로 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 되풀이[反覆] 가능성에 있어서 증시[証示, 증명하여 보임]되는 것은, 언어에는, 어떤 구조적인 불법이 필연적인 가능성으로서 내속해 있다는 것이다. 부재란 해당 언어를 규정할 터인 초월적 심급의 최종적 부재, 즉 발신자, 수신자, 의미, 의도, 규칙, 관습, 코드, 발화의 맥락 등등의 근저적 부재이다. 무슨 말일까?

데리다는 그런 부재에 있어서도 여전히 언어가 존재하는 것의 한계적 사례를, 다음과 같은 에크리튀르(마크, 문자)의 예를 상정함으로써 환기한다. , “그 에크리튀르의 코드는 비밀의 암호로서의 두 사람의 주관만으로 창출되고 알려진 것에 불과할 정도로 특유한 어법이라고 한, 그런 에크리튀르”(27[20])를 상정하고,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래서 더 이상 그 올바른해독 코드를 확인할 수 없다) 여전히 에크리튀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다음의 한에서 그것은 아직도 에크리튀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마크는 어떤 코드 설령 그 코드가 미지이고 아직 언어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경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이러저러한 주관의 부재에 있어서,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주관의 부재에 있어서, 그 마크의 <마크로서의 동일성>에 있어서 스스로의 되풀이[反覆] 가능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한에서인 것이다”(28[20]). 여기에는 기원에 있어서의 주관의 (지향의) 부재, 주관이 규정한 바의 코드의 부재에 있어서 여전히, 언어가 언어로서 되풀이[反覆]될 수 있는 한 존재한다는 가능성이 암시되고 있다(해독 코드를 잃어버린 암호, 미지의 다른 언어, 고대인(또는 우주인’, ‘광인)의 문자 흔적 등등).

되풀이[反覆]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마크로서의 동일성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선행하는 주관도 코드도 전제하지 않는 동일성이란 기묘한 것이다. 사실상 이 기호적 동일성(의미의 단위unit)은 독자가 스스로의 해독 코드(독해규칙)동시에 정립함으로써 창출된 것이다. 이 동일성은 단순히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그것을 따르는 코드에 입각해, 즉 반복하여 적용 가능한 것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해당 코드 자체를 찾아냄으로써 가능해지고 있다. 그런 것으로서의 이 마크는 여전히 전달 가능하고, 독해 가능하고, 해석 가능하다(때문에 언어는 존재한다). 따라서 이 경우, 올바른해독 코드를 아프리오리하게 전제할 수 없는 한에서, 오히려 코드는 잃어버린 것도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조적으로 비밀스러운 코드는 존재하지 않는다”(ibid.)고 간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번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런 한에서, 항상 이 동일성은 구성된 것인 동시에 한계지어진, 안정되지 않은 채 훼손되어 버린다. 요컨대 되풀이[反覆] 가능성이란 그 어떤 동일성으로부터도 독립하여 부재 자체에 있어서 반복한다는 최소한의 재인 가능성이며, 이것은 언어의 동일성을 반복 가능케 하는 코드 자체를 그때마다 동시에 자기 정립하면서 해당 동일성을 구성한다(, 또한 재파괴하고 탈구성한다)는 조건, 즉 동일성의 가능성의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다.

물론 이런 한계 사례에서의 언어의 성립이, 이른바 통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상황(수신자와 발신자가 이념상 현전해 있으며, 서로의 의도, 의미, 메시지를 이미 규약적으로 공유된 언어적 수단이나 매개에 의해 전달한다 등등의 상정)에 대한 반증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앞서 말한 부재를 한계 사례에 고유한 사태로 간주하는 한, 보통의 (이념화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사상되어야 할 우발사로서 둘러싸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한계 사례를 한계적이라고 규정한 채 보통의경우로부터 구별한다는 상정은 유지할 수 있을까? 에크리튀르의 이런 구조가 일단 인정된다면, 이 부재를 단순한 우발적인 경험적 부재로서가 아니라, 쓰여진 말이든 얘기된 말이든, 언어 일반을 기능시키기 위한 적극적 조건을 이루는 구조적 부재로서 검토할 여지가 남아 있다.

확실히 보통의 사례의 경우, 개개의 언어적 요소(음조, 목소리, 잉크 등등)가 경험적으로는 다양한 현상형태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관통하는 하나의 형식적 동일성(다양한 토큰을 통일하는 유형)이 규정[同定, identification]됨으로써 언어는 반복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의 반복은 오히려 언어를 규약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코드들, 그것들을 규정[同定]할 수 있는 언어 운용자의 발화 능력(competence), 혹은 그것들을 부활[賦活: 활력을 주어 활성화시킴]하는 주관의식의 지향성, 또한 그런 심급들이 상관적으로 이루고 있는 맥락 등등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한에서는 부재 그 자체에 있어서 반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이런 초월론적 심급이 항상 언어의 반복 가능성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래서는 한계 사례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단순히 보통의 경우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결코 그런 심급을 그것 자체로서 비판 검토하거나 배척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여기가 데리다 이해의 매우 오해가 많은 곳이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이렇게 묻고 있따. “발신자 또는 수신자의 현전이라는 (외관상의) 사실은 부재가 마크의 기능 속에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기입하는 한에서, 어떤 부재의 가능성에 의해 복잡화되고, 분할되고, 오염되고, 기생되는 것이 아닐까?”(97[108]). 이때 고려되는 것은 규약성 또는 지향성 등의 심급들의 고전적인 요청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필연적으로 매개한다는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 즉 오히려, 아무리 불가피하더라도 그것들이 항상 부재의 가능성에 있어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 미리 부재의 가능성에 의해 한계지어지는 것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설명하자. 반복하지만,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그런 심급들의 경험적 부재가 아니다(부재의 가능성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주의). 더 일반적인 차원을 환기한다면, 실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할 때, 이를 위한 최소한의 규약은, 일개의 완결된 체계적 전체에 있어서 완전히 현전시킬 수 있을 필요는 없고, 또한 경험적으로도 확정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원래 최소한의 규약을 어디서 찾으면 되는가, 예를 들어 사전과 문법서에 의해 커뮤니케이션이 생긴다고 볼 수 있을까, 또한 하나의 사전은 완결될 수 있을까 등등), 설령 유한한 규약의 리스트를 인공적으로 작성하더라도 원리적으로 그 작성을 위한 규약, 적용을 위한 규약 같은 메타규칙이 항상 요청될 수밖에 없으며(크립키가 끄집어낸 비트겐슈타인에게서의 규칙 순종의 패러독스를 상기할 수 있다),[각주:9]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나 언어 체계의 확실한 기초로서는, 그 어떤 해석에도 환원되지 않는 규칙의 파악,[각주:10]권위의 신비적 기초”(몽테뉴-파스칼)[각주:11]가 하나의 아포리아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초월론적 심급으로서 확정 가능한 규약의 근원적 부재(-근거)를 가능성으로서 포함하고 있지 않고서는 그 어떤 규약이든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앞서 말했듯이 반복 가능성은 바로 그런 기능의 조건이다).[각주:12] 또한 규약을 부활[賦活]하고 규정[規整: : 규범 등을 세워서 사물을 정리함]하는 의도=지향(및 그것에 의해 중심화된 맥락적 전체성)을 상정했다고 해도 사태는 바뀌지 않는다. 데리다 자신, 의도=지향의 개념을 오히려 본질적이라고 간주한 위에서, 의도=지향이 그 표현에 있어서의 충실성을 불가피하게 목표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전히 필연적으로 달성할 수 없고 또한 달성해서도 안 되는 으로서, 의도=지향의 텔로스에 대한 구조적 설명을 주고 있다. , “충실성은 의도=지향의 텔로스입니다만, 그 텔로스의 구조는 의도=지향이 이 텔로스를 달성하면 그것들은 함께 소실되고, 서로 마비하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233). 텔로스의 달성이란 단적으로 죽음이며, 오히려 그 달성 불가능성, (end)의 부재에 있어서야말로 의도=지향의 운동은 구동되며 살아있다. 결국 이런 끝이 없음은 의도=지향의 목적론적 본질의 외재적 잔재인 것이 아니라, 가장 내밀하고 가장 환원 불가능한 타자로서, 타자 그 자체로서, 그 본질에, 그 본질에 있어서 귀속하는 것입니다”(234).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재가 가능성으로서 기능하는 그 구조이다. “보통의 사례의 보통성(, 의도나 규약과 같은 초월론적 심금의 기능)은 이런 부재의 기능에 매개됨으로써 주장되고 있다. 그런 부재를 가능성으로서 드러내는 한에서, 오히려 한계 사례는 단순한 보충, 추가, 예외에 밀어붙여야 할 우발사이기는커녕, 역설적이게도 보통의 사례를 범례화하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사실상 데리다의 탈구축적 몸짓을 일관되게 동기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런 목적론적으로 본질화된 가치(의도의 충실, 규칙 순종의 일치, 맥락의 포화 등등), 그것에 의해 배제된 종속적 가치를 자신의 내재적 구성요소로서 늘 필요로 하며, 그런 한에서 이 본질’(현전, 동일성, 내부 )이 미리 -본질’(부재, 차이, 외부 )의 가능성에 의해 꿰뚫어지고, 분할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기능한다는 과정을 계속 논증하는 것이다.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을 고려한 이런 에코노미의 분석은, 규약이든 의도=지향이든 맥락이든, 이것들의 가치를 규범화하고 계층화함으로써 체계화되는 전통적 언어 이론의 구축이 항상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구조화되어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부재에 있어서의 되풀이[反覆]라고 말함으로써 주장되는 것은, 언어의 이데아적 동일성을 규정[規整]하는 심급들을 그것 자체로서 파괴하거나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런 기능들을 고전적 요청의 필연성에 있어서 일단 받아들인 뒤에, 동일성의 생성과 해체의 이중화 과정을 통해, 이런 심급들이 안고 있는 목적론적인 구조적 한계, 게다가 이 구조를 조건짓고 있는 윤리-이론적인 결정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론적 담론은, 주의하면 피할 수 있는 듯한 우발적인 논리적 부정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엄밀하게 이론적이기 때문에, 어떤 윤리적 명령(일정한 형이상학적 가치를 서열화하고 계층화함으로써 해당 이론을 이론으로서 조직하는 명령)을 내재화하고 있다. 이리하여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구조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선의 단순성, 항들 사이의 계기 혹은 의존의 순서=명령을 어지럽히고, 배제의 절차를 금지한다(그것을 방해하고, 부당한 것으로 한다). 그것이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법이다”(171[161]).

그러나 이런 점에서 보면,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어디에나 양의적인 성격이 귀결될 것이다. “(동일화하는) 되풀이[反覆] 가능성 없이는 이데아화는 없고, 그러나 똑같은 이유 때문에 (이타화하는) 되풀이[反覆] 가능성 때문에 순수한 채로 모든 모염을 면한 이데아화라는 것도 없다”(217).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동일성의 가능성의 조건인 동시에 그 불가능성의 조건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인데,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가 조건인 바의 근원성을 실효시킬 수밖에 없다. “근원은 근원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자기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스스로를 반복하고 이타화=변질시키지 않을 수 없다”(되풀이[反覆] 가능성의 역설).[각주:13] 사실 동일물의 반복이 아닌 되풀이[反覆]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부재 그 자체에 있어서 반복한다는 최소한의 재인 가능성이나 동일성을 반복 가능케 하는 코드 그 자체를 그때마다 동시에 자기 정립하면서 해당 동일성을 구성한다는 말투는, 되풀이[反覆]를 그 자체로서 해명하고 있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이데아적 반복과의 관련에서, 그 역설적인 한계에 있어서의 환원 불가능한 잔여로서 소급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즉 사태 그 자체로서는 미리 재마크화된(re-marqué) 마크가 항상 이미 지적되고 있을(remarqué) , 결국은 무엇이 되풀이[反覆]되는지, 왜 되풀이[反覆]되는지 등의 근본적인 물음에는 결코 답하지 않는 것이다(만일 데리다의 시차적(示差的)인 마크의 비-현전적 잔여-저항残遺”(32[24])라는 말을 그 대답으로 간주한다면, 이 기묘한 조어(残遺 restance [잔여=저항, -존립])가 요청된 곤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되풀이[反覆]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명명하고 규정[同定]하고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하나의 대상인 것처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그것 자신이 의문에 부치고 있는 방식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각주:14] 이리하여 되풀이[反覆] 가능성은 그 자체로서는 아포리아이며, 의미 내용을 갖지 않은 준-개념에 머문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바로 오해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유한책임회사 abc…」에서의 오류miss’ 유형의 가설(81[97])을 상기하자). 그러므로 데리다는 직접 비판되지 않고, 서명, 사건, 맥락이 그 효과에 있어서 오히려 명중하고(toucher) 이해됐다고 말할 수 있다(85[100]). 그 감촉이 없으면, “유한책임회사 abc” 같은 일그러질 정도로까지 부풀어 오른 텍스트 입맛을 다실 뿐만 아니라, 상대를 문자 그대로 통째로 집어삼켜 체내화하는 것에 쾌락을 느끼고, 그것에 의해서 토실토실 살찌는 일종의 괴물[각주:15] 가 환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행위수행성에서 수행 가능성으로

언어의 초월론적 심급에 있어서의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은, 그것을 설명하는 듯 보이는 개념(되풀이[反覆] 가능성)의 자기 복제화도 해소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요청하는 것은 결코 몽매주의’(216, 257n)로의 철수 따위가 아니라, 그 어떤 입장에서부터든, 이런 아포리아를 일정한 윤리-목적론적 계기들로서 내재화시킴으로써 바로 그 이론적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다. 언어행위론이, 탈구축이 그렇게 지명되기 이전에 있어서 열어 젖혔던 분석의 공간은, 바야흐로 이런 인식을 가능케 하는 차원으로서 제시되게 될 것이다. 언어행위론과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논의와의 내재적 연관을 명확히 하고, 이 연관에 있어서 오스틴이나 언어행위론의 텍스트의 전면적 재독해를 준비하기 위해, 여기서는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다음의 방향을 소묘할 수 있다.

(1) 전면적 화행(speech act). 오스틴이 스스로 철학사에 있어서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유익한 혁명”(HW, 3[8])[각주:16]이라고 부르는 것도 불사하는 언어행위론의 요점은, 우선 문장 일반의 기능의 조건을 규정하는 데 있으며, 사실확인적(constative)/행위수행적(performative)이라고 불리는 구별을 도입한 것에 있다. , 문장의 역할이, 진위의 어느 하나에 있어서 사실을 기술하는 진술문(사실확인적 언명)의 역할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통적 상정을 “«기술주의(記述主義적 오류”(HW, 3[7])로서 배척하고, 거기에는 환원 불가능한 차원, 문장을 내뱉는 것이 바로 그 행위를 실제로 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HW, 6[11]) 차원, 언급 내용이 언급행위 자체에 의해 구성되는 행위수행적인 차원을 분리하는 것이다(“나는 약속한다등등).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실확인적/행위수행적이라는 구별의 비대칭성이다.[각주:17] 원래 이 대립은 문장의 집합 전체를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언명군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통사 형태로부터는 식별 불가능하다(“«들판에 소가 있다»라는 발언은, 경고일지도 모르며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HW, 33[56]). 이 구별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발언이 행해지는 전면적 상황”(HW, 52[91])(제반 관습=규약이나 맥락의 전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오스틴은 말하지만, 물론 그런 전체성은 그 자체가 분석을 요하는 개별 문장의 집적으로부터 출발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상, 부분-전체의 순환에 있어서 문제는 뒤로 미뤄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것은, 진술이 그 자체 외에도 수많은 행위의 하나이며, 그러므로 진술의 진위가, 말의 의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수행하느냐에도 의존하기”(HW, 145[242]) 때문에, 우선 기술적(記述的) 또는 사실확인적 차원을 그 자체 발언행위로서 구성하는 퍼포머티브의 구조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런 상황의 전체성이 전면적 화행”(HW, 52[91])으로서 재파악되어야 한다는 것, 결국 그런 사실확인적(constative)-행위수행적(performative)의 연쇄 그 자체를 비규약적인 방식으로 근원적으로 정립[措定]하는 순수한 원초적인 퍼포머티브”(HW, 69[121])로 소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 발화내적 힘들. 모든 발언 중에 그 기능의 조건으로서 편재하는 행위수행성의 차원의 발견에 대응해서, 오스틴은 하나의 발언행위에 대해 더 나아가 두 개의 기능, 즉 해당 발언 행위 속에 수행되는 또 다른 언어행위인 발언내 행위”(약속, 명령, 선언 등등), 그 수행에 의해 수신자에게 일정한 효과를 미치고자 하는 발언매개행위”(수신자의 감정 등을 실제로 야기한다)와의 두 개의 상을 구별하는 것을 제안하며, 더 일반적인 언어행위론의 구축을 향해 “«발언내적 힘들(illocutionary forces)»의 학설”(HW, 100[173])을 발견했다. 데리다는 바로 이 의 환기 속에, 고전적 진리 개념(アデクワチオ[합치] 및 알레테이아[탈은폐, 비은폐])에서 면해짐으로써 하나의 상황을 산출 혹은 변형하는”(37[28]). 퍼포머티브의 구조를 인정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기서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행위 수행성의 평행성을 해명하기 위한 실마리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에 내속하는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이란, 실제로 발언 내적인 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퍼포머티브한 언명의 자기 반사적이고 자기 언급적인 성격, 스스로가 그때마다 구성하는 특이한 현실을 지시한다는 성격에서부터 이해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지적하듯이, 원래 퍼포머티브의 수행적 본질은, 그것이 고유한 일회성에 있어서 내뱉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수행적 언표는, 예를 들어 오스틴이 분류한 특정한 수행 동사의 형태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채 한 번이자 한 번에 한해서, 정해진 어떤 때와 장소라는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은 묘사의 가치도, 규정의 가치도 아니고 실행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각주:18] 거듭 말하지만, 퍼포머티브의 성립은 문장의 통사 형태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개의 행위일 수 있는 것은, 그것 자체가 창출되는 바의 유일한 상황에 있어서의 사건을 스스로 창출함으로써,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유일성, 일회성이 아니라면, 어떤 언명도 공허한 형식에 머물며, 그것이 특정한 상황에서 실제로 무슨 일인가를 이룬다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회적인 사건이 사건으로서 규정[同定]되기 위해서는, 이 일회성이 그 자체로 항상 이미 반복 가능한 형식에 있어서 매개되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형식을 맥락상의 제반 규약으로서 상대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터인 전면적 상황, 그 자체로, 우리가 묻고 있는 바로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 발언내적 힘은, ‘전면적 상황인 퍼포머티브-컨스타티브의 연쇄 그 자체를 반복 가능한 형식으로서 창출하는 원초적인 퍼포머티브의 힘이다. 사후적으로만 발견될 뿐인 이 형식을 미리 정립[措定]하면서, 그것에 비추어 스스로의 특이한 사건을 성립시키는 자기 정립적인 기능이야말로, 퍼포머티브에 고유한 자기 지식 = 참조적(sui-référentie)”[각주:19]인 성격이다. 이 자기 지시성, 더 일반적으로는 자기 반사성은, 그렇지만 하나의 자기 촉발적인 기체(基體), 완결된 자율성으로서 적극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 아니라,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부재의 가능성에 의해 구조화된 기능이다. 왜냐하면 발언 내적 행위는 그 자체로서는 동어반복적인 자기 언급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거기에 부재의 가능성을 포함함으로써만, 여러 상황들에 있어서 반박 가능한 가치를 지니는 (즉 지시적인 힘을 지니는) 언어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措定]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가 부재의 가능성(순수한 현전의 불가능성)에 매개된 지시 작용은, 그 자신이 언표하는 지시와 스스로의 조건에 대한 지시로 내적으로 분열된 채 결코 맞물리지 않는다(아마 우리는 여기서 원초적인 퍼포머티브에 고유한 근원적인 수행론적 모순더 이상 모순이라는 말이 적절한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을 찾아낸다).[각주:20] 이른바 일개의 발언이 의미하고 있는 것 이전에 그것이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21]라는 이런 이중성(언명존재와 언명내용, 발언의 factumdictum)의 거리 속에 발언 내적인 힘이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이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구조에도 유비적이다).[각주:22]

(3) 근저적 정치화. 그러나 이렇게 퍼포머티브의 양의적 성격을 통합하는 발언 내적인 힘의 작용을 그 자체로서 일원적으로 찾아내는 한, 이상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픽션에 머물 것이다. 힘은 어디까지나 부재의 가능성으로서만 사고되어야만 한다. 데리다도 후기에서 권력이나 힘이라고 지목되는 바로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권력의 차이 및 힘의 차이가, 양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질적인 바의 다양한 차이만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275)을 강조하듯이, 퍼포머티브의 힘은, 소여의 맥락에 있어서 시차적(示差的)으로 규정된 다양한 지시적 결정으로부터 소급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단순히 신비적인 실체 X일 뿐이다).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개념이 불가피한 자기 복잡화를 거쳐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수행성 개념은 어떤 화행이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성립한다는 한에서 (경험의 근저적인 환원 불가능성), 그 효과에 있어서 기존의 사실확인적 언명으로부터 사후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불순한 그대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거꾸로 그 불순성 때문에, 행위 수행성은 소여’, ‘기득/텃세既得’, ‘자명하다고 간주된 맥락이나 관습성, 사회성에 필연적으로 관여할 수 있으며, 거기에 개입하고 그들을 동요시키고 변형하는 계기를 자신의 발언 내적인 힘들로서 계속 주고 있는 것이다.[각주:23]

어떤 퍼포머티브의 성패도 일정한 사실확인적 언표로서 서술[述定]될 수밖에 없으며, 이 컨스타티브 그 자체도 또한 항상 이미 행위수행성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재차 변형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공한 퍼포머티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복하면, 더 엄밀히 말해서, 퍼포머티브는 그 자체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qu’elle n’existe peut-être pas)”(36[27])이라고, 데리다는 서명, 사건, 맥락에서 에크리튀르를 그 되풀이[反覆] 가능성 때문에 존재론적 담론의 양자택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적었다(156[151]).[각주:24] 일개의 퍼포머티브도 또한 존재/비존재의 대립은 물론, 성공/비성공, 적절/부적절, /불행 등과 같은 대립 속에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그런 것으로서 아마 존재할 것이다, 혹은 오히려 무엇인가를 할것이다. “아마(peut-être)”라고 아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존재로서의 이 양상을 자기 언급적인 언표로 강조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행위수행성의 역설 때문이다, 즉 퍼포머티브의 존재가 그 비존재의 가능성에 의해 매개되고, 성공한 퍼포머티브가 그 실패의 가능성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성공한 수행은 항상 그 수행의 실패의 수행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다른 곳에서 적었던 말을 빌리면, 퍼포머티브는 도착 수행적(perverformative)이다.[각주:25] 퍼포머티브/컨스태티브가 子状[각주:26]으로 서로 규정하는 에코노미의 무제한은, “아마의 양상에 있어서, 완수되지 않은 화행의 결정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의 과정이 이 양상을 조건으로서 규정[規整]되는 유한성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리고 있다. 퍼포머티브의 달성을 중지하면서 아마라고 말함으로써 이 양상이 지시하는 것은 퍼포머티브가 사건으로서 개입하는 위상, 즉 퍼포머티브가 자기 반사적으로 규정하고 규정되는 원환을 절단하는 에코노미를 재결정하는 계기인 것이다. 물론 아마라고 말해지는 이상, 이 원환 외부에 서는 것은 그것 자체 불가능하며(원환의 외부란 정의상 항상 원환에 내화되는 <내부의 외부>이다), 바로 그 사건이나 재결정의 내실을 미리 계산하거나 예견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각주:27] 사실상 여기서 요청되는 것은 철두철미, 사실확인적 언표에 있어서 이 에코노미의 체제를 가능한 한 엄밀하고 긴밀하게 계속 재추적하는 것이며, 거기서 쟁점이 되는 관건을 바로 그 체제가 마비되기에 이르는 곳까지 그 내부로부터 과장법을 따라 경쟁적으로 서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아마도 도착 수행적으로.

가능성으로서의 행위 수행성(수행 가능성 performability)이 위와 같이 소묘되더라도, 거기에 포함된 문제들에 대해, 오스틴의 텍스트 그 자체는 아직 검토되어야 할 여백을 남기고 있다. 한편으로 오스틴은 퍼포머티브의 순수성”(HW, 150[251])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을 정당하게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발언 내적 힘들그 자체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오스틴이 목표로 하는 바는 명시적인 수행동사의 분류를 거쳐 발언 내적 힘들의 목록”(Ibid.)을 일일이 열거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분석 대상을 찾아내는 언어 행위론 그 자체의 퍼포머티브의 신분을 묻지 않는다면, 항상 바로 그 이론적담론은 그것이 분석한다고 주장하는 대상 그 자체 안에 포함되고, 거기서 <부분결정?되거나 하는 거승로서 나타난다”(136[136])(유한책임회사 abc…」에서의 세트유형의 가설. 데리다는 집합론의 역설을 언급하고 있다(231)). 따라서 그런 한에서는, 언어행위론은 그 방법론적 전제 속에, 스스로가 물어야 할 분석대상의 행위 수행성을 밀수입하는 것이며, “소여의 윤리에 의해 주어진 윤리적 조건들을 재생산하게 된다”(221). 이런 의미에서 오스틴이, 분석의 개시에 있어서, 발언의 불성실하고” “변칙적인” “은유적용법을 성실하고” “정상적이며 문자 그대로의용법에 기생하고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스스로의 연구대상으로부터 배제했다는 것(이른바 성실함의 까닭을 성실하게 묻지 않는 것의 불성실함, 즉 언어행위론 자신의 행위(도착) 수행성), 그리고 그것을 데리다가, 이미 말했던 몸짓(텍스트의 에코노미 분석)을 통해 문제화했다는 것 말할 것도 없이 이로부터 썰과의 논쟁이 시작됐는데 이런 것을 통해 유한책임회사에 있어서 거듭 되풀이되서 사실확인적 언표로서 제시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폭력이, 정치적인 것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여러 가지 학술적 논의나 지적 논의 일반 속에 작동하고 있는가”(203)라는 각명[刻明]한 기록, “학술적인 논의의 코드 아래서 숨겨진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 공리계를 읽을 수 있게끔 한다”(205)고 하는 그것 자체가 집요할 정도의 시도인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가 형이상학의 그런 윤리-목적론적 문턱을 한계 획정하려고 기획하는 것이라 해도, 행위수행성의 구조적 불순성 때문에 그 텍스트 자신도 또한 결코 중립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 기입된 또 다른 윤리성, 다른 행위 수행성이 독파되어야만 한다. 확실히 유한책임회사에 있어서 각각 선택되는 기생적문체는, 그 때문에 특이한 퍼포머티브에 있어서 재독해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데리다 자신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의도했으며, 그 문체를 이중의 에크리튀르’(206)라고 부른다). 그러나 거듭 강조해 둔다면, 탈구축의 관심은 어떤 윤리에 들이대어진 대항윤리, 어떤 폭력에 들이대어진 대항폭력 등등을 그것으로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그런 이항대립의 양극이 변증법적으로 서로 강화하는 에코노미의 분석을 향한다. 데리다든, 오스틴이든, 언어행위론이든, 탈구축이든, 그런 이름 아래 놓인 텍스트를 이런 윤리성의 에코노미의 바깥에서 읽을 수는 없다. 이 에코노미는 항상 분석을 필요로 하지만, 적어도 행위 수행성, 되풀이[反覆] 가능성은 그것이 이런 에코노미를 중단하고 변형하고 재개시하는 구조적 계기를 위한 조건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내재적인 외부를 고지하고 있는 이런 조건 속에 근저적 정치화라고 불러야 할 계기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윤리학도 정치학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철학의 정치, 이론의 정치, 사고의 정치 등과 같은 것을 노정시키기 위한 불가결한 초석이다. 그것 때문에 이후, 당분간 속행되어야 할 것은 이 계기와의 주제적이고 이론적인 관련에 있어서, 우선 유한책임회사[각주:28], 다른 언어행위론의 텍스트(오스틴, , 그라이스 )뿐 아니라, 또한 유한책임회이후, 이제 거의 언어행위론을 언급하지않고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특히 윤리--정치적주제를 더 명시적으로 논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최근의 데리다의 텍스트(법의 힘, 맑스의 유령들, 우정의 정치, 신앙과 지식등등. 내 생각으로는 이런 변화는 폴 드 만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생각된다[각주:29]), 혹은 그런 텍스트에 관련된 모든 텍스트를, 그것들을 조직하는 에코노미를 자연스럽게 변형하고 복잡화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존중하고 독해하는 작업이라는 게 될 것이다.

 

 

本稿駒場哲学協会〇〇〇年度春期フォーラム(於東京大学駒場キャンパス〇〇〇年四月八日) において発表された原稿をもとに大幅加筆変更して再構成されたことを付記する

 

  1. Jacques Derrida, Limited Inc., Galilée, 1990. 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본서의 쪽수를 가리킨다. 「후기」를 제외한 번역은 『現代思想』 1988년 5월 임시증간호(16-6)를 참조하고, [ ]에 쪽수를 부기한다. 또한 인용에서의 강조는 원문을 따른다. 참고로 이 세 텍스트의 초출시의 언어는 각각 불어, 영어-불어동시, 영어이며, 「후기」의 초출이 된 영어판 단행본(Limited Inc,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88)은, 불어판보다 2년 선행한다. 이런 것은 이 텍스트의 맥락이 지닌 중층성을 고려하는 데 명기되어 좋다. [본문으로]
  2. John R. Searle, “Reiterating the Differences : A Replay to Derrida,” Glyph (1977), p.198. 邦訳, 前掲 『現代思想』 七ニ頁. 또한, 데리다의 「유한 책임 회사 abc」에 대한 재비판으로서 최종적으로 위치지어져야 하는가 여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썰은 이 논쟁에 관련하여 나중에 두 개의 글을 발표한다. “The Word Turned Upside Down[A review of Jonathan Culler’s On Descostruction],” New York Review of Books, 27 〇ct 1983, pp.74-79, reprinted in Working through Derrida, ed Gary B. Madis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3, pp.170-183; “Literary Theory and Its Discontents,” New Literary History 25.3(1994), pp.637-667, reprinted in Beyond Poststructuralism : The Speculations oj Theory and the Experience of Reading, ed Wendell V. Harris,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6, pp.101-136. 전자에 대해서는 「후기」에서 데리다가 질문의 제기에 대응해 상세하게 반박을 가하고 있다(특히 Limited Inc., pp.222ff., pp.257n). 그것을 받고 후자는, 썰의 데리다에 대한 재응답을 포함하고 있는데, 거기서의 썰은, 여전히 데리다를 “모종의 전통적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언어관”(p.639)에 관여하는 자로 간주함(전자의 기사에서는 ‘논리실증주의’라고 불렀다)으로써 계속 비난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아직 표준 번역어가 존재하지 않는 itération에 대해, 반복反復 répétition과 구별하기 위해 ‘되풀이[反覆]’라는 단어를 배정할 것을 명시적으로 제안하고 싶다(참고로 「유한책임회사 abc」의 다카하시(高橋)・마스다(増田) 번역에서는 répétition=반복, itération=<되풀이反覆>처럼 괄호를 붙임으로써 편의적으로 구별하는 데 그친다. 앞의 『現代思想』, 183頁 참조). ‘되풀이反覆’는 différence과 différance처럼 동음이의어에 의한 에크리튀르의 물음을 환기할 뿐 아니라, 한자-일본어 사전漢和辞典에 따르면, ‘반복’을 포함하는 다의적인 단어라는 점에서도 시사적이다. “① 원래 상태로 되돌리다. 되돌리다. 또한 원래 상태로 돌아가다. 돌아가다. ② 되풀이하다. 반복. ③ 등지다. 배반하다. 또한 의지와 언행이 [안정되게] 정해지지 않다. ④ 뒤집다. 뒤엎다. 또한 뒤집히다. ⑤ 뒤집어엎다. ⑥ 왕복하다. ⑦ 오르내리다. 높낮이”, 『大漢語林』, 大修館書店, 1992년, 209頁(강조는 인용자). 『유한책임회사』에 따르면, itération은 산스크리트어로 ‘타(他)’를 의미하는 itara에서 유래하며, “반복을 타자성에 연결시키는 논리”(27[20])에 관련되어 있다. ‘되풀이反覆’의 다의성을 이용한다면, 가령 다음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itérabilité은 “같은 것의 동일성이 이타화에 있어서, 이타화를 통해서, 이타화를 목표로 삼아”(105[113]) 스스로의 이데아적 동일성을 뒤집으면서 반복되는 구조를 가리키며, 따라서 “아프리오리하게 그것 자신의 동일성을 분할하고” 배반하는 것이다 등등. [본문으로]
  4. 그래서 초출이라는 것은 아니다. itération이라는 단어 자체는 가령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이미 사용되고 있다. Cf.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p.298. [본문으로]
  5. 「서명, 사건, 맥락」의 강연 후에 이뤄진 리쾨르 등과의 토의에서의 데리다의 발언. 前掲, 『現代思想』, 61頁. [본문으로]
  6. 최근 출판된 다음의 책은 금세기의 법철학에 있어서의 켈젠과 하트에서 시작되는 흐름을 “법의 자립성”과 “언어론적 전회”라는 주제로부터 일관되게 정리함으로써 데리다의 『법의 힘』도 시야에 넣으면서 명쾌한 조감도를 주고 있다. 中山龍一, 『二十世紀の法思想』, 岩波書店, 2000년. [본문으로]
  7.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高橋哲哉, 「言語•行為•意識───デリダのオースチン批判についてのノート」, 『アカデミア•人文社会科学編』, 43호, 南山大学, 1986년, 192-218頁. 野家啓一, 「「言語論的現象学」の可能性と限界───オースティンとデリダ-ザール論争」, 『言語行為の現象学』, 勁草書房, 1993년, 273-298頁. 또한 양자 사이에는 주목해야 할 대립이 존재한다. 논의의 선점을 포함하고 있으나, 간단하게 살펴보자. 野家가 이 논문의 결론부에서 “‘관습’이 지닌 역사성, 즉 역사적으로 생성하고, 전승된 것으로서의 ‘관습’은, ‘반복’의 내실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앞의 책, 295頁)고 하며,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관습’ 개념을 ‘포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반면, 다카하시는 다른 논문의 각주에서 “전자가 ‘코드’나 ‘맥락’ 개념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한, 양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역광의 로고스逆光のロゴス』, 未來社, 1992년, 298頁)하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이런 논문들을 보는 한, 여기서 말해지는 “근본적 비판”(『유한책임회사』에서의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특히 코드와 관습=규약 개념에 대한 관계)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새로운 명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관습에 대해 野家가 말하는 ‘역사성’, ‘역사적인 생성’, ‘역사적 침전의 소산’이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가는 별도로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하에서,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처음부터 이런 역사성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끄집어내졌다는 것, 이것은 “‘관습’이 ‘반복’의 내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그렇기에 ‘반복’이 아니라 ‘되풀이[反覆]’이 물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런 것은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관습 개념을 ‘포갤’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보여주는 것은 관습=규약의 근본적 부재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볼 것이다. 사실, 『유한책임회사』의 언어행위론 비판은, 주로 의도=지향(과 그것을 발언 원점으로 하는 맥락)의 범주를 둘러싸고 주제화되고 있으며, 발언 내적 행위의 구성요건을 ‘의도’가 아니라 ‘관습’에서 찾아내는 규약주의적 입장(野家 논문의 주장의 역점은 오히려 이 입장에 있다)에 대한 관계가 보이기 어렵게 되고 있다. 되풀이[反覆] 가능성 개념을 가능한 한 일반화하고, 거기에 함의되는 규약주의에 대한 비판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이하에서는 ‘부재’라는 단어를, 의도=지향의 구조에 있어서의 의미 충실성으로서의 현전에 대립시킬 뿐 아니라, 언어의 기능을 규정[規整: : 규범 등을 세워서 사물을 정리함]하는 모든 초월론적 심급(엄밀하게는 초월론적 시니피에)의 결여라는 의미로까지 확장해서 사용하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이것은 어떤 ‘부재’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재’의 기능이 공유하고 있는 구조적 가치를 문제 삼고 있다). 그 때문에 『유한책임회사』에서도 서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이밖에도 예를 들어 pp.40[30]ff에서는 ‘기호의 자의성’이 환기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더 명시적인 의미에서, 데리다 자신이 ‘관습=규약’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문제화할지를 이해하려면, 『법의 힘』의 기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특히 거기서는 관습성이 법=권리 droit 쪽에 속하는 것으로서 법 loi 개념으로부터 구별된다. 이하에서 시사하듯이, 이것은 이른바 ‘근원적 규약주의’의 입장에 근접할 것이다). [본문으로]
  8. 언뜻 보면 「서명, 사건, 맥락」에서는, 행위수행성 개념은 “어떤 일반적인 인용 가능성”(44[33])으로서의 되풀이[反覆] 가능성에 포섭되어 위치지어져야만 하며, 또는 더 일반적으로 치환되어야 할 하나의 계기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언어행위론이 말하는 act[행위=현재태(>active-actual-activitity)]의 가치는 현전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일관되게 유보되고 있다(114[120]). 확실히 「서명, 사건, 맥락」에서 데리다가 에크리튀르와의 관련에서 오스틴으로부터 직접 탈구축적 계기로서 다뤄지고 있는 것은 ‘서명’의 심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ct이라기보다) performative를 둘러싸고 『유한 책임 회사』의 맥락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우리의 독해에 있어서 위와 같은 문제화는 불가결하다. [본문으로]
  9. 비트겐슈타인-크립키의 규칙론이 어떤 정초적 함의 ― 예를 들어 회의적으로 끄집어내진 언어게임의 규칙을 다시 생활형식과 공동체적 관습 등의 간주관적 실천양식으로서 찾아내는 논의 ― 도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에 대해서는, 최근 나온 다음의 논문이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다. 井上彰, 「言語ゲーム論のネガティヴィズム」, 『相関社会科学』 9호(1999), 東京大学総合文化研究科国際社会科学専攻, 2000년 3월, 48-65頁. [본문으로]
  10. Cf.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engen, sec. 201 et passim; Saul A. Kripke,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Harvard University Press,1の82, pp. 17ff. [본문으로]
  11. Cf.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Galilée, 1995, pp. 29ff. 邦訳『法の力』堅田研一訳、法政大学出版局、一九九九年、ニ六頁以下. [본문으로]
  12. 데리다에게는 크립키는 물론,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실질적인 참조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 구조는 『법의 힘』에서 “비트겐슈타인적”이라고 불리는 이하의 논의에 나타난다.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p. 34ff. 및 pp. 50ff. 邦訳, 『法の力』, 33頁 이하, 54頁 이하. 아무튼, 우리 논의의 정교화 및 치밀화를 위해서는, 크립키 이후의 비트겐슈타인 독해, 다메트에 의해 발견된 근원적 규약주의, 데이비슨의 해석이론 등의 맥락 속에서, 데리다의 규칙론-언어게임론을 확정해보는 작업에 유익할 것이다. 우선 Samuel C. Wheeler, Deconstruction as Analytic Philosoph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데리다와 데이비슨을 다룬 일본어 논문으로 森本浩ー, 「隠喩とコミュニケーション—デリダとデイビットソンの場合」, 『現代思想』, 1987년 5월호, 90-104頁이 있다. [본문으로]
  13. Force de loi, p.104. [본문으로]
  14. Samuel Weber, “It,” Glyph 4(1978), p.8. 또한 사무엘 웨버는 이런 이유도 포함해, 지시대명사 it(물론 이것은 프랑스어의 ça를 번역한 것으로 “소쉬르에게서의 시니피앙의, 헤겔에게서의 절대지의, 프로이트에게서의 기호 및 여성형 소유사”(158n[182])를 환기한다)을 itérabilité의 약칭으로 하는 것을 제안했다. [본문으로]
  15. 豊崎光一, 「怪物の肖像、あるいは論争術の極点について」, 『クロニック』, 水声社, 1989년, 259頁. [본문으로]
  16. J.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邦訳, 『言語と行爲』, 大修館書店, 1978년. 이하 HW로 약칭. [본문으로]
  17. cf. Shoshana Felman, Le Scandale du corps parlant : Don Juan avec Austin ou la séduction en deux langues, Seuil, 1980, p.108. 邦訳, ショシャナ.フェルマン, 『語る身体のスキャンダル───ドン•ジュアンとオ—スティン, あるいは二言語による誘惑』, 立川健二 訳, 勁草書房, 1991년, 95頁. [본문으로]
  18. Emile Benveniste, “La philosophile analytique et le langage,” in Problème de linguistiques générale, t.1, Gallimard, 1976, pp.273. 邦訳, É・バンヴェニスト, 「分析哲学とことば」, 岸本通夫監 訳, 『一般言語学の諸問題』, みすず書房, 1983년, 260頁. [본문으로]
  19. Ibid., p.274. 邦訳, 同頁. [본문으로]
  20. 프랑수아 레카나티에 따르면, 수행론적 모순은, 그 독자적인 형식에 의해 다른 모순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가짜인 보통의 종합명제와 논리적 모순의 중간에, 수행론적 모순이 있다. 가짜 종합 명제는 사실에 의해 모순되는 것이며, 논리적 모순은 그 자신과 자기 모순되어 있는 것이다. 수행론적 모순이라고 말하면, 사실에 의해 모순되어 있는 동시에 자기 모순도 하고 있는 것이다. … 수행론적 모순이란, 그것 자신의 언표행위의 사실에 모순되는 명제이다.” François Récanati, La transparence et l’énonciation : pour introduire à la pragmatique, Seuil, 1979, p.197. 邦訳, 『ことばの運命───現代記号論序説』 菅野盾樹 訳, 新曜社, 1982년, 248頁, 번역 수정. 우리는 이런 수행론적 모순 특유의 종차성을 인정하면서도, 이 ‘모순’을 훨씬 강한 의미에서 ― 모든 퍼포머티브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하는 모순으로서 찾아내고 있다. [본문으로]
  21. Rodolphe Gasché, “‘Setzung’ and ‘Übersetzung’” in The Wild Card of Reading,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p.17. [본문으로]
  22. Cf. Jaakko Hintikka, “Cogito Ergo Sum : Inference or Performance?”(1962) in Knowledge and the Known, Reidel Publishing Company, 1974, pp.98-125. 邦訳, ヤーッコ•ヒンティッカ, 「コギト・エルゴ・スムは推論か行為遂行か」小沢明也訳, デカルト研究会編 『現代デカルト論集 II•英米編』, 勁草書房, 1996년, 11-53頁. 및 レカナティ, 前掲書, pp.l98ff. 邦訳, 250頁 이하. 언어행위론이 퍼포머티브의 자기 반사적 구조를 찾아냄으로써, 그런 문제들은, 논리적 동형성에 있어서는, 헤겔의 사변적 반성을 정점으로 하는 대륙철학의 주관성 이론의 계보에로, 즉 언어행위론이 일단은 끊어진 전통적 문제계로 다시 편입된다. 금세기의 해석학과 언어행위론에도 미치는 반성철학의 이런 문제계에 대해서는, 루돌프 가셰가 논리적으로도 철학사적으로도 일관된 매우 명쾌한 설명을 주고 있다. Cf. Rodolphe Gasché, The Tain of the mirror, Harvard University Press, Part I : Toward the Limits of Reflection. [본문으로]
  23. 그 때문에 예를 들어 “행위수행성을, 명확한 기원과 목적이 없는 채로, 그때마다 쇄신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이해함으로써, 발화는 최종적으로, 특정한 발화자나 그것을 산출한 최초의 맥락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발화는, 사회적 맥락에 의해 정의될 뿐만 아니라, 맥락을 자르는 능력에 의해서도 기록되었다. 따라서 행위수행성에는, 그것이 끊어내는 맥락에 의해 바로 행위수행성이 아직 가능하게 되는, 고유한 사회적 시간성이라는 것이 있다.” Judith Butler, Excitable Speech : A Politics of the Performative, Routledge, 1997, p.40. 邦訳, ジュディス・パトラー, 「触発する言葉 : パフォーマティヴィティの政治性」, 竹村和子訳, 『思想』 1998년 10월호, 41頁. [본문으로]
  24. 게다가 이것은 그 자체가, 데카르트 『형이상학적 성찰』 5장 제목인 「물질적 사건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다시 신에 대해. 그것은 실존하는 것」을 ‘활용’이나 ‘사용’이냐는 중지한 채로 인용한 것이다(또한 데카르트 자신의 제목도 자기 인용 또는 자기 사용되어 적혀 있는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Limited Inc., pp.154[149]ff. [본문으로]
  25. Cf. La Carte postale, Aubier-Flammarion, 1980, p.148. 데리다는 베르너 하마허의 독해에 재촉되어 최근의 텍스트에서도 이 말을 원용하고 있다. “Marx & Sons,” in Ghostly Demarcations : A Symposium on Jacques Derrida’s Specters of Marx, ed. Michael Sprinker, Verso, 1999, pp.224ff. [본문으로]
  26. [옮긴이] 入れ子状(이레코죠우)에서 이레코(入れ子)는 “크기의 차례대로 포개어 안에 넣을 수 있게 만든 그릇이나 상자”라는 의미이고, 죠우(状)는 상태나 모양을 뜻한다. 영어로는 emboitement state라고 한다. [본문으로]
  27. 『유한책임회사』에서는 매우 암시적으로만 사용되었던 “아마”의 양상을 여기서 강조해둘 필요가 이는 것은, 사실상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가 『유한책임회사』 이후, 특히 90년대의 텍스트에서, 사건의 양상(발생, 도래, 봉착, 역사, 시간성 등등)을 환기하려고 이 말을 적극적으로 원용하고, 반복해서 가다듬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아마”의 양상에 있어서 사건이, 대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지평에 있어서 어떤 예상도 넘어서면서 갑자기 기습하는 것(단순한 미래futur로부터 구별된 장래avenir)로서 강조되고 있다. cf. 예를 들어 Force de loi, pp.60ff. 前掲邦訳, 70頁 이하 및 Spectres de Marx, Galilée, 1993, pp. 62ff.,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pp. 46ff. 등등. [본문으로]
  28. 본고에서는 거의 다룰 수 없었으나, 특히 정신분석과 (더 구체적인) 정치와의 연접관계가 다시 독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무의식, 억압, 향락, 체내화, 애도의 작업 …, 다른 한편으로 경찰, 법원, 아카데미, 저널리즘 …, 이런 모티프의 긴밀한 결합[織り合わせ]이, 다른 곳에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274n ; cf. “Mes chances : au rendez-vous de quelques stéréophonies épicuriennes,” in Psyché, Inventions de l’autre, Nouvelle édition augmentée, tome I, Galilée, 1998)이라고 부르는 것의 물음을 만들 것이다. [본문으로]
  29. 드 만이 데리다보다 선구적으로 어떻게 퍼포머티브 개념의 변형과 재단련을 행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논한 적이 있다. cf. 「約束のアレゴリ-- 〈政治としての脱構築〉試論」東京大学総合文化研究科一九九八年度修士論文, 특히 2장 「デイコンストラクテイヴ、パフォーマティヴ」。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사상 201412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사상의 말

타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

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2]  [3]  [4]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코이지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崎裕助)

 

1

3. 미국독립선언

자크 데리다

   * 생략 : 자크 데리다, <법의 힘>(진태원 옮김, 민음사)에 수록되어 있음. 


4. 국가창설의 퍼포머티브와 서명의 정치 : 자크 데리다의 미국독립선언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5. 입헌 민주주의의 위기와 예외상태 : 데리다, 아감벤, 벤야민, 슈미트와 유령의 회귀

사토 요시유키(佐藤嘉幸)


6. 세계의 종언 후에 : 말년의 자크 데리다의 묵시록적 어조에 관해

니시야마 유지(酉山雄二)


7. 목적론에서의 종말론의 균열

카메이 다이스케(亀井大輔)

* * *


8. 신조어, 새로운 ~주의, 포스트~주의, 기생 및 그 밖의 작은 지진현상에 관한 몇 개의 성명과 자명의 이치

자크 데리다

 

 

2

9. 베리테에서 바리테 : 라캉-데리다 논쟁을 재고하다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10 언어·표상·: 인지과학 대 탈구축

케어리 울프


11. 시간의 원물질성 : 탈구축, 진화, 사변적 유물론

Martin Hägglund


12. 그라마톨로지와 가소성可塑性

카트린 말라부

 

 

3

13. 테크놀로지와 도래할 텍스트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14. 더욱 잉여의 사랑 : 자크 데리다에 의한 에코포이에시스와 표박의 나르시시즘

リピット水田尭


15. <인터뷰> 자크 데리다 영화와 그 유령들

앙투안 드 베크, 티에리 주스

 

 

* * *

16. 철학의 재묘再描 : 데리다/낭시, 사라지는 선()을 묘사하며

카키나미 류스케(柿並良佑)


17. <토의> 자크 데리다, 필립 라쿠 라바르트, 장 뤽 낭시의 대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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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 일본의 사상2014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들어가며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하 미야자키’) : 올해는 자크 데리다(1930~2004)의 사후 10년이 됩니다. 돌아가신 때를 떠올려 보면, 바로 프랑스 현대사상의 마지막 거성이 졌구나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미셸 푸코(1926~84), 질 들뢰즈(1925~95),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95),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98) 같은 사람들이 죽었고, 마침내 데리다마저? 라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데리다는 죽기 직전까지도 맹렬한 속도와 밀도로 집필 활동과 발언을 계속 했습니다. 거기서 제시된 주제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본질적 물음을 데리다와 공유하고 있다는 긴장감과 기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데리다의 사망은 사유의 주춧돌을 잃어버렸다고도 느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데리다의 죽음은 현대사상 자체의 종언을 고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데리다가 사망한 후의 10년을 돌이켜보면, 세계사적 격동이 있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형태로 세계금융위기가 생긴 결과, 미국에서는 부시 시대의 단독패권주의를 대신해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일련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3년 전[2011]에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고, 그 여파로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영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격동의 배경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비롯한 미디어 상황의 대변화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사상의 장면(scene)을 보면, 프랑스현대사상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영미권의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 커졌으며, 원래 사상이라는 것이 지닌 소구력이 확산되는 듯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유 없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만큼 데리다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이를] 학분 분야를 넘어서 전개할 것인가는, 자크 데리다라는 거대한 존재를 아는 사람에게 질문되고 있는 과제입니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 서서, 오늘은 고쿠분 고이치로 씨, 니시야마 유우지 씨, 그리고 우카이 사토시 씨와 함께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1. 사후 10년을 돌이켜보기

데리다의 텍스트에 관한 상황

미야자키 : 맨 처음으로, 최근 10년의 데리다에 관한 텍스트의 상황을 개괄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본어로 데리다 수용에 관해 말하면, 정직하게 말해서 유산상속은 그다지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푸코와 들뢰즈는 번역이 거의 정비됐으나, 이에 비해 데리다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주요 저서가 있으며, 젊은 세대의 연구자도 결코 많지 않습니다. 데리다의 작업이 지닌 놀라운 범위와 다양함에 걸맞은 응답=책임을 맡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이번의 특집이 조금이라도 그 보충이 되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뤄진 작업에 한정해 데리다의 주요 저작을 꼽아보면, 드 만에 관한 장대한 논의를 포함한 파피에 머신(Papier machine)(Galilée, 2001), 노동론이 되기도 하는 응축된 대학론인 조건 없는 대학(L’université sans condition)(Galilée, 2001), 정신분석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와의 대담 도래한 세계를 위해(De quoi demain ... Dialogue)(Fayard Galiléé, 2001), 911 동시다발 테러의 여파 속에서 편찬된 위르겐 하버마스와 지오반나 보라도리와의 공저 테러 시대의 철학의 사명 [각주:1], 추도문집인 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언(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Galilée, 2003), 가장 완성된 민주주의론인 불량배들(Voyous)(Galilée, 2003) 등이 있습니다. 데리다의 최후의 발언 중 하나인 인터뷰 사는 것을 배우다, 마침내에는 나는 나 자신과 전쟁상태에 있다는 인상적인 문장이 있는데요, 마지막 4, 5년은 정말 치열하게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했던 즉흥적 대담과 인터뷰, 영화출연 등의 작업도 받아들이고, 정말로 분골쇄신으로 활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숨진 뒤에도 마치 데리다의 유령이 계속 쓰고 있는 것 마냥 저작들이 줄줄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세미나의 간행입니다. 말년의 2001년부터 03년에 행한 강의 짐승과 주권자가 총 2권으로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각주:2] 1999년부터 2001년의 사형론 강의[각주:3] 그리고 단숨에 초기로 돌아가 1964년부터 65년에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 : ENS)에서 행한 하이데거에 관한 강의 [각주:4]가 현재까지 간행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죽음의 직전까지, 40년 이상에 미치는 강의록의 출판이 계획되고 있고, 실현되면 엄청난 양이 될 것입니다.


  


   


  


 

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이하 니시야마’) : 전체 43, 총계 104천 장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미야자키 : 터무니없이 많은 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전에 출판된 저작이 얇은 것까지 포함해 7, 80권은 있으니까, 게다가 대량의 강의록까지 보태면, 도대체 누가 다 읽을 수 있겠나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웃음).

 

니시야마 : 사후 출판된 책 중에서도 세미나는 매우 중요해요. 포인트는 세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 이것은 편집자 서문에서도 말해진 바가 있습니다만 세미나에서는 데리다가 생전에 출판한 막대한 텍스트가 형태를 이뤄가는 과정, 교육을 통해 사유가 세련되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데리다에 의한 교육의 실천인 동시에, 사유의 작업 현장 자체입니다. 사후 출판이기 때문에, 편집자가 최저한도로 체크했을 뿐 저자 자신의 퇴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며, 실수도 모두 그대로 되어 있는 만큼, 더욱 그런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둘째 [말투, 어조]”을 들고 싶습니다. 강의록은 여름방학에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분명히 청중을 앞에 둔 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읽다[낭독하다]”, “논평하다”, “판서”, “번역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시도 기입되어 있고, 출판된 저작과는 다른 독특한 톤이 있습니다. 데리다는 톤이라는 것을 중요한 사상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세미나의 출판에 의해 초기, 중기, 후기 등의 단계론에 대해 재독해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1960년대까지의 초기에는 철학이나 문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있고, 70년대부터 중기에는 실험적 시도가 전개되며,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시작되는 후기에는 정치학적, 종교학적, 윤리학적인 전회가 일어났다고 말해집니다. 그러나 강의록을 보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연구자들이 나눈] 기존의 시기 구분과 관계없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단계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연속적인 산종에 의한 사상 형성의 확대가 보이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총 43권이 출판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에, 이런 전모가 분명해지려면 50년 이상이 걸릴 겁니다(웃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 이하 고쿠분’) : [그때가 되면] 오늘의 멤버는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겠죠(웃음).

 

미야자키 : 사후 출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동물론입니다. L’animal que donc je suis(Galilée, 2006)이 그것으로, “나는 동물이다로도, “내가 동물을 쫓고 있다고도 번역되는 다의적 제목입니다. [각주:5] 동시대적으로 보면, 푸코에서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에 이르는 생명정치론이나, 영미권을 중심으로 한 동물의 권리론, 동물윤리학 등과 길항하는 형태로, 데리다의 동물론이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10년을 생각할 때, 동물론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불가결한 토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데리다를 둘러싼 움직임에 눈을 돌리면, 브누와 피터스가 쓴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빼어난 평전 [각주:6]이 간행되며, 영어권을 중심으로 잡지의 특집이나 논집이 여럿 출판되는 등 다양한 반응과 반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금년[2014] 5월 말에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학회 오늘의 데리다(Derrida Today)4회 대회가 뉴욕에서 개최됩니다만, 전환점이 되는 해인지라 대규모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우카이 씨, 니시야마 씨, 그리고 제가 중개인이 되어 지난해 탈구축연구회를 발족시키고, 금년에도 심포지엄 등의 기획을 생각 중입니다(또 이런 학회나 심포지엄의 기록에 관해서는 탈구축연구회의 홈페이지[각주:7]를 참조해 주세요).

 

니시야마 : 평전에 대해서는 또 한 권, 에드워드 베어링의 청년 데리다와 프랑스 철학[각주:8]도 보태고 싶습니다. 데리다의 문서고가 일반에 공개된 것을 받아들여 쓰인 노작으로, 루이 르 그랑 학교에서의 학생시절부터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교원시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청년 데리다가 어떻게 자기[] 형성했는가를 텍스트의 변천과 지식사회의 분석으로부터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평전 등에서는 알제리 시대의 데리다의 경험과 추억으로부터, 알제리의 유대인인 자키[각주:9]가 어떻게 철학자 데리다가 됐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말년의 데리다는 무스타파 셀리프와 알제리에 관한 대화를 했습니다, [각주:10] 사후인 2006년에는 알제리국립도서관에서 심포지엄도 열렸습니다[각주:11] 지중해 남북 양안 주변이나 연안은 탈구축적인 물음 자체입니다 이 데리다의 중요한 사상적 광경임을 재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데리다를 대상으로 한 사전(事典)이 두 권 나왔으며[각주:12] 작년은 키워드북도 나왔습니다[각주:13]

   「오늘의 데리다를 말씀하셨는데, 프랑스에서도 200510월에 고등사범학교에서 데리다, 철학의 전통(Derrida, la tradition de la philosophie)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철학자가 데리다를 독해한 것으로, 데리다의 철학을 탈구축’, ‘차연’, ‘에크리튀르[기록]를 축으로 하여 철학의 전통과 대치시키는 시도였습니다. 다른 한편, 오늘의 데리다는 프랑스인이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교에서 개최됐습니다만, 어떤 프랑스인을 보고 뭘 연구하십니까?”라고 물어봤더니 나보코프” [각주:14]라고 말해서 아주 놀랐습니다. 이렇게 보면, 데리다의 사유가 계승되는 흐름이나 인맥이 영미계와 프랑스계로 나눠지는 조짐이 느껴집니다.

Derrida, la tradition de la philosophie

 

미야자키 : 적어도 사람[연구자]의 흐름에 관해서는 분단되어 있네요.

 

세대의 문제

니시야마 : 오늘은 사후 10년을 계기로 한 좌담회입니다만, 데리다 본인이 누군가의 죽음에 임해서 뭔가를 특권적으로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죠. 미야자키 씨가 말씀하신 추도문집[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언[각주:15]에도 분명히 있지만, 이것은 미국에서, 게다가 데리다 자신이 아니라 두 명의 편집자의 책임 아래서 나온 것입니다. 데리다 속에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죽어간다고 하는 목소리와 현상(원저 1967)의 테제에 의한 협박이 항상 있었습니다. 항상 이미 내가 죽어가고 있는 듯한 상태의 존재론(ontologie), 유령적인 유재론(幽在論, hantologie) [각주:16]입니다. 이것을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나의 죽음’, 레비나스의 타자의 죽음’, 그리고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라는 세 종류의 근본적 경험으로부터 불가능한 것이라는 형태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데리다만의 물음입니다만, “사후라는 표현과 계기는 이미 이런 사상적 과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고쿠분 : 오늘의 멤버 중에서는 [제가] 데리다에 관해 가장 초보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입장에서 말씀 드리면, 저는 옛날의 데리다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은 것을 조금 어렵게 말하고 말장난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재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EHSS)에서 했던 데리다의 강의에 참석해보니, 제가 생각했던 사람과는 전혀 달랐어요. 하이데거라든가 칼 슈미트 등에 점점 파고들어가면서, 아주 호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청중을 웃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제가 처음에 갖고 있던 데리다의 이미지는 단순히 일부의 데리다 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잔하고 신비적이며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깨질 것 같은 이미지더군요. 생각하면, 데리다뿐 아니라 프랑스 현대사상은, 특히 1960년대에는 신비적인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인상에 남은 것은 현대사상의 특집 미번역 북가이드 : 현대사상 22(19864월호)입니다.

 

미야자키 : 그랬군요.

 

고쿠분 : 마치 외래품의 이미지입니다. 아직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훌륭한 보물이 이역만리 땅에 있다는 이미지 말입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거꾸로 사상에 끌려들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때에 데리다 본인을 만났던 것은 매우 행운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놀란 것은 데리다가 논의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장난을 하면서 까다로운 말을 하잖아요. 매우 어려워서 간단하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든 알기 쉽게 하려고 고심하면서 자세하게 논의를 해부하여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말장난으로 보이는 것은, 거기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란 말인가!”라고 감격했으며, 데리다의 강의를 들은 것은 제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말하기 방식이나 쓰기 방식을 다시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고바야시 야스오(小林康夫) 선생에게 이런 발표에서 자네는 데리다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게 없군이라고 말씀하시며 혼내셨던 것도 있고(웃음), 제 자신은 데리다를 기준으로 하여 단련되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제가 데리다의 강의를 청강했던 것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즉 그의 마지막 4년 동안입니다. 사형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했듯이, 아주 자극적이었습니다만, 한 가지 깨닫게 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데리다 속에서 언어라는 문제가 뒤로 물려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데리다라는 것은 뭐니 해도 언어의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역사가 데리다의 사상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크리튀르라는 것은 물론 언어와 관련된 것이지만, 원래 역사의 담지자이기도 하잖아요. 데리다는 에크리튀르라는 토픽을 통해 언어를, 따라서 역사를 계속 물었습니다.

   최근에야 [일본어] 번역이 나온 철학의 여백(원저 1972)이라는 중기의 작업 등을 읽으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현 상태를 다시 보면, 데리다 자신의 강의에서 언어의 문제가 후퇴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인문 지식이 어딘가 언어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1960년대부터 70년대는 누구나 소쉬르를 읽었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한 과거의 열광적인 관심도 그것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1990년대 중반에 학생시절을 보냈는데, 그 무렵에도 아직 언어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저하게 후퇴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면, 최근 10년 동안에, 적어도 일본에서는 그다지 데리다의 이름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어역사에 대한 관심의 저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오늘날, 일본에서 함부로 역사, 역사 라고 말합니다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 ‘언어역사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절대적인 조건이 지금 제대로 따져 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한 것의 의의를 알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바로 그렇기에 저는 데리다에게서 언어의 문제, 따라서 역사의 문제를 다시금 강조하고 싶네요.

 

우카이 사토시(鵜飼哲, 이하 우카이’) : 고쿠분 씨가 말씀하신 것에 저도 찬성으로, 데리다는 처음부터 역사의 물음에 천착했습니다. 후설에 관해서도 생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앞서 소개된 1964~65년의 강의도 하이데거 : 존재의 물음과 역사라는 제목입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제는 냉전의 종언 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영향도 있어서, 당시 이미 한창 논의되었습니다. 데리다에게서는 다른 역사의 사고를 어떻게 열 것이냐가 첫 번째에 놓인 물음으로, 그라마톨로지에 관해(원저는 1969)도 그 문제의식 속에서 가다듬어졌다고 말할 수 있죠.

  

 

미야자키 : 확실히 생명정치나 영미계의 문제의식에서 보면, 언어의 문제를 중심으로 파악한 데리다는 텍스트주의적 혹은 문헌[]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최근 카바이예스를 중심으로 프랑스 인식론(epistemologie)의 빼어난 연구를 하고 있는 곤도 가즈노리(近藤和敬) 씨가 데리다를 필두로 하는 프랑스 현대사상에는 명작을 감상하는 듯한 태도가 근본에 있다고 쓰고 있고(문제-인식론과 물음-존재론 : 들뢰즈에서 메이야수, 데란다로),[각주:17] 자신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텍스트를 읽는다라는 것이 그렇게 비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것의 다층성이 간과되고, 국어시간에 독서 감상문을 쓸 때와 같은 어휘로 회피되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보는 방식이 완전히 변해버렸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니시야마 : 고쿠분 씨가 말씀하신 세대 경험은 매우 중요하고, 키워드는 신비성언어의 놀이[게임]’가 아닐까요. 신비성에 관해서는, 들뢰즈의 철학 등의 긍정성과의 대비도 있고, 부정신학이라는 문제가 유포되어 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부정신학이라고 하면, 사유의 몽매주의적이지 않은 어색함을 이끄는 것으로, 그것을 회피하고 긍정적이고 내재적인 사유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다만, 데리다 자신, 부정신학에는 아주 주의 깊게, 부정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근원성과 복수성을 고찰했던 것도 있습니다(이름을 구하다 : 부정신학에 관한 복수의 목소리).[각주:18] 언어의 놀이에 관해서는 말의 다의성이나 조어가 많이 사용되는 데리다의 텍스트가 일본어에 다양한 부하를 거는 형태로 번역되고 있으며, 그 복잡함에 대한 피로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물의 데리다를 보고 몽매함이 깨졌다는 고쿠분 씨의 증언은 사실 납득이 가는 것으로, 제 자신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습니다. 데리다의 세미나는 독특하고, 결코 언어의 놀이에 의한 텍스트주의라고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간행된 세미나의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교육자 데리다 특유의 명쾌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들려줄 작정입니다. 우리는 살아생전의 데리다에게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서, 살아생전의 데리다를 모르고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만 출발하는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합니다. 이 때문에라도 이 신비성언어의 놀이라는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해결하는 작업을 연구교육번역의 면에서 전개하고 싶습니다.

 

데리다와의 기억

우카이 : 저는 데리다와 개인적으로 꽤 오랫동안 교류가 있어서, 우선 말년의 일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1980년대의 일본에서 온 유학생 가운데 데리다와 직접 관련을 맺은 그룹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으로, 데리다의 집에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망하기 두 달 전, 20048월에도 그의 집에서 만났으며, 이후에도 두 차례 전화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데리다가 사망한 것은 109일이었습니다만, 설마 그렇게 일찍이 [사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항암제 치료제로 식욕은 떨어져 있었지만, 검사 수치는 변함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8월 말부터 9월 초에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콜로퀴를 위해 마지막 강연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만류했지만, 그는 이 콜로퀴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취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는데요, 데리다는 취소를 하지 않는 사람이죠. 그것은 병을 얻고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 전에도 종교에 대한 심포지엄 때문에 질 아니자르(Gil Anidjar),[각주:19] 하셈 포다(Hashem Foda)와 함께 미국의 서해안으로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않은 것은 원래 블랙팬더로, 경찰 살해 혐의로 미국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현재에는 종신형으로 감형됐습니다만 흑인 저널리스트 무미아 아부-자말(Mumia Abu-Jamal)을 방문하는 계획입니다. 데리다가 국제적인 사형폐지 운동에 거의 활동가라고 말해도 좋을 자세로 관여했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한 마디 해두고 싶습니다.

   여기서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에 데리다를 선택한다는 것이, 어디서부터 어떤 동기로 생겨났는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오직 들뢰즈만 유행한다고들 하지만, 제 감각으로 말하면 항상 들뢰즈가 주류였습니다. 특히 제가 있는 교토대학교에서는 학년 위에도 아래에도 우수하고 개성적인 들뢰지안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다. “왜 너는 데리다인 거야라는 얘기를 듣는 환경에 처음부터 몸담고 있었기에, 데리다가 인기가 없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상한 것도 없고, 그의 작업은 항상 일종의 떠맡게 된 주변부성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데리다의 텍스트는 [궁합이 맞는] 사람을 고른다는 게 있기에, 제 자신은 이른바 유행과는 무관한 곳에서 부합한다고 느낍니다.

   1930년대 생인 데리다는 사르트르 이후의 사상가 가운데서는 이른바 막내입니다. 한편, 1940년대 생의 후속 인물들과는 전쟁 경험도 포함해 큰 세대적 단절이 있습니다. 데리다에게는 모종의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으며, 형인 르네 데리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대립했으며, 르네는 유대계의 잡지에 친이스라엘적인 투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피터스의 평전에는 어린 시절부터 형이 정치적으로 우파의 입장에 서 있어서 동생과 사사건건 부딪쳤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떤 영화작품에서 형은, “우리 집에는 별로 책도 없었는데 동생의 정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각주:20] 가정환경이나 상징자본이라는 면에서 보면, 데리다라는 존재는 돌연변이라는 거죠. 미야자키 씨가 프랑스 현대사상 최후의 거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확실히 데리다는 동생적 존재로, 가장 나중에 외래자로서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까 고쿠분 씨가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의 구조주의를 중심으로 한 전개입니다. 저는 포스트구조주의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베어링의 평전에서는 데리다의 초기 발상이 오히려 포스트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합니다. 즉흥적인 말씀처럼 느껴지는 바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자료를 본 뒤에 선택된 이 말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고쿠분 씨나 미야자키 씨가 거론하신 데리다에게 있어서의 키에르케고르적인 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제와도 관여하고 있습니다[각주:21] 푸코론인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에크리튀르와 차이, 원저 1967년에 수록)에도 제사[銘句]로서 키에르케고르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언어의 문제는 당연히 번역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게 그 커다란 계기는 1983년에 데리다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강연 중 하나가 바벨의 탑(타자의 언어 : 데리다의 일본 강연[각주:22]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우리 세대에게는 이 논문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언어론 일반에서 번역론으로의 이동(shift)은 언어의 복수성을 처음부터 그 안에 담고 있는 사유를 요청합니다. 그것은 단일하다고 간주되는 언어의 내적복수성의 물음에도 열려 있습니다.

   나중에 데리다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작업을 하게 됐는데, 번역의 사상가의 텍스트를 번역하고 있다는 긴장감은 [지금도] 항상 [갖고] 있습니다. 제 자신의 작업으로서 데리다를 참조하면서 번역론을 축으로 벤야민을 수용했던 것도 같은 무렵입니다. 하나의 텍스트는 복수의 언어로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데리다가 드 만에 대한 추도문 속에 부여한 탈구축의 정의가 하나 이상의 말(plus d’une langue)”라는 것이었다는 것으로도 연결됩니다[각주:23] 현대의 문화상황에서는 한 언어로 써져 있는 것을 한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투명성에 대한 지향이 회귀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데리다만이 아니라 크레올(Créole, 크리올) 문학처럼, 원래 복수의 언어로 써 있는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다는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안고 있는 작업이 경원시되고 있습니다. 그런 경향이 데리다를 읽기 어렵게 느끼게 하며, 번역론이라는 회전(curve)을 거친 후의 언어론을 성가시게 느껴지게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계속)

  1. [옮긴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손월성, 김은주, 김준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본문으로]
  2. Séminaire : La bête e le souverain, 2. vol. édition établie par Michel Lisse, Marie-Louise Mallet et Cinette Michard, Galilée, 2008-10. [본문으로]
  3. Séminaire : La peine de mort, édition établie par Geoffrey Bennington, Marc Crépon et Thomas Dutoit, tome I (1999-2000), Galilée, 2012. [본문으로]
  4. Heidegger : la question de l’Êtat et l’Histoire. Cours de l’ENS-Un (1964-1965), édition établie par Thomas Dutoit avec la collaboration de Marguerite Derrida, Galilée, 2013. [본문으로]
  5. [옮긴이] 자크 데리다,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계속)」, 『문화과학』, 76호, 299-378쪽. 뒤의 ‘동물론’ 관련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판본에 차이가 있다. [본문으로]
  6. Benoît Peeters, Derrida, Flammarion, 2010. [본문으로]
  7. http://www.comp.tmu.ac.jp/decon [본문으로]
  8. Edward Baring, The Young Derrida and French Philosophy, 1945-15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본문으로]
  9. [옮긴이] 자크가 아니라 자키로 불렸다. [본문으로]
  10. Jacques Derrida et Mustapha Chérif, Islam et l’Occcident : Rencontre avec Jacques Derrida, Odile Jacob, 2006. [본문으로]
  11. Derrida à Alger : un regard sur le monde, sous la direction de Mustapha Chérif, Actes Sud, 2008. [본문으로]
  12. Niall Lucy, A Derrida Dictionary, Blackwell, 2004 ; Simon Morgan Wortham, The Derrida Dictionary, Continuum, 2010. [본문으로]
  13. Maria-Daniella Dick and Julian Wolfreys, The Derrida Wordbook,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3. [본문으로]
  14. [옮긴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 소설가. [본문으로]
  15. Jacques Derrida,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Textes présentés par Pascale-Anne Brault et Michael Nass, Galilée, 2003. [본문으로]
  16. [옮긴이] 일본에서는 빙재론 유재론 등으로 불리고 '유령론'으로 불린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처럼 유령론이라고 하게 되면 '존재'와 관련된 어감이 사라지는 문제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유령론'이라고 쓰고 원어를 병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본문으로]
  17. 近藤和敬, 「問題i認識論と問い存在論──ドゥルーズからメイヤスー、デランダヘ)」, 『現代思想』, 2014년 1월호. [본문으로]
  18. Jacques Derrida, Sauf le nom, Galilée, 1993. [본문으로]
  19. [옮긴이] 질 아니자르는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Routledge, 2002의 영어판 편집자이자 서문을 썼다. [본문으로]
  20. Derrida. directed by Kriby Dick and Amy Ziering Kofman, Zeitgeist Films, 2004. [본문으로]
  21. 특집 「キルケゴール」, 『現代思想』, 2014년 2월호. [본문으로]
  22. 「バベルの塔」, 『他者の言語──デリダの日本講演』, 高橋允紹 編訳, 法政大学出版局, 1989년 수록. [본문으로]
  23. Jacques Derrida, Mémoires : pour de Paul de Man, Galilée, 1988.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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