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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르나르 스티글러'에 관한 몇 개의 글이 소개되었다.
중대신문에 실린 <베르나르 스티글러, 상징계에 맞서는 기술철학자> http://www.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92 를 비롯하여, 한겨레신문에 약간 선정적인(?) 제목으로 수록된 글, <은행강도 출신 철학자의 소비욕망 탈출전략>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6563.html 등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김재희 등이 옮긴 <에코그라피>(자크 데리다 외, 민음사, 2002)는 데리다와 스티글레르(스티글러)가 나눈 대담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그의 기술철학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기술철학의 흐름에 대해 전반적인 소개가 미진한 편이다. 이하에서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조금 더 자세하고 길게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기술철학의 흐름을 개괄해 볼 작정이다. 다른 글과 달리 이것은 인터넷 상에서 직접 쓰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과 교정을 계속 할 것이고, 따라서 완성되려면 며칠은 족히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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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라는 1990년대부터 활약하고 있는 프랑스의 기술철학자의 논의를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프랑스에는 20세기로만 한정하더라도, 과학인식론에 속하는 캉길렘(깡길렘)을 비롯하여, 스티글레르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질베르 시몽동, 나아가 현대 미디어 기술을 리얼타임이라는 그 특징으로부터 비판적으로 파악하는 폴 비릴리오 등, 기술에 관해 독창적 논의를 전개하는 몇 사람의 철학자, 사상가가 존재했고, 존재한다. 우리들은 물론 그들의 기술에 관한 사고를 경시할 작정은 아니지만, 이하의 세 가지 점에서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을 이 글에서 독자적으로 다룰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그가 현대의 디지털 기술까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초기 데리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다른 철학자에게는 없는 독자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재로는, 한국에서는 아직 그의 작업이 깊이 있게 소개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이 철학자에 관해 앞에서 언급한 두 개의 글에서 간략하게 소개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글의 목적에 맞게 간단하게 재정리해 보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1952년에 태어나 국립시청각연구소(INA)의 소장을 거쳐, 음향음악연구소(IRCAM)의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퐁피두센터 문화개발부 디렉터로 재직중이다. 나아가 '미디올로지Mediology> 운동의 이론적 지주의 한 명으로도 활약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고 있다. 한겨레의 선정적 제목의 근거가 되었듯이, 그는 1978년부터 83년까지 감옥에 수감된 경험도 있다.
그런데 그는 90년대에 들어서 데리다, 사라 코프만, 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가 시작한 총서 La philosophie en effect에서 <기술과 시간>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저작물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기술과 시간>은 총 4권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3권으로 끝났다. 그의 논의의 대부분은 초기 데리다의 논의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으면서,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현상학, 선서학자인 앙드레 루르아-그랑의 학설들,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론과 기술론 등의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목적과 수단에 속박되어 왔던 기술관을 비판하며 새로운 기술관을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현대기술과 과거의 기술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묻고 있다.
이 글에서는 다음 순서로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제1절과 2절에서는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의 이론적, 원리적 측면을 다룬다. 구체적으로는, 제1절에서 고고학자 르루와-구랑(Andre Leroi-Gourhan)의 학설이 지닌 역설(패러독스)를 살피고, 이어서 제2절에서는 스티글레르가 그 역설의 해결을 위해 데리다의 '차연'을 어떻게 확장시켰는가를 살핌으로써, 그의기본적 발상이 어떤 것인가를 부각시키려고 할 것이다. 또한 제2절의 마지막에서는 스티글레르의 이러한 확장이 데리다의 사고, 철학에 대해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가, 또는 반대로 어떤 약점을 지니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필 것이다. 이어서 제3절은 제1절과 2절의 이론적 측면의 적용, 응용편에 속한다. 거기에서는 스티글레르가 구체적인 기술적 대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검토한다. 특히 미디어 기술의 변화(문자에서 아날로그, 디지털로의 변화)에 관한 그의 생각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4절에서는 그의 논의의 철학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전망도 살펴볼 생각이다. (하지만 이건 생각일 뿐이다. 잘 될지는 모른다.)

1. 이론적 측면(1)
-- 르루와-구랑의 역설과 아포리아

스티글레르의 최대의 표적은 로고스 또는 에피스테메/테크네라는 서양철학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대립이다. 철학사적으로는 플라톤에서 철학자의 로고스를 도구화하는 소피스트가 비판적으로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 "철학적 에피스테메/소피스트적 테크네"(주4)라는 구분 및 앞의 항의 우위라는 이항대립이 성립하는데, 이 착상은 다양하게 변화하면서도 20세기의 철학, 학문들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를 쓴 리오타르(료타르)조차도, 사고, 에크리튀르에 대해 텔레그라피를 대립시킨다는 형태로 남아 있으며(주5), 나아가 90년대 전반까지의 인지과학의 기본적 아이디어에서조차도, 종이 등의 기록매체를 무시한다는 형태로 잔존해 있다고 한다.(주6)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20세기의 대표적 고고학자이자 스티글레르가 <기술과 시간>의 제1권인 <에피메테우스의 과오>에서 상당한 쪽수를 할애하여 검토하고 있는 앙드레 르루와-구랑의 인류발생의 학설을 다뤄보도록 하자. 르루와-구랑도 인간과 기술 사이의 강한 결합/연결을 긍정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립을 여전히 남기고 있다. 그리고 스티글레르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에피스테메/테크네의 대립이 사실은 역설의 불충분한 해결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역설을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연'이라는 데리다가 만들어낸 개념이 기술의 영역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의 논의 과정을 따라 나아가 보자.
앙드레 르루와-구랑은 1964년과 65년에 <몸짓과 말>(Le Geste et la Parole, Paris: Albin Michel, 1964)이라는 두 권으로 된 책을 출판했다.(주7) 여기에서 탐구되는 테마는 척추동물의 진화, 원인(原人)/구인(舊人)/신인(新人)이라는 인류의 진화, 나아가 인간사회의 변천과 도래할 인간의 운명까지 다방면에 걸쳐져 있는데,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그가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나 진쟌트로푸스(*주8)로부터 원인(原人), 그리고 구인(舊人)으로의 진화를 말한 부분, 즉 인류의 발생에 관해 논한 부분이다. 우선 르루와-구랑은 이 책의 1장에서 지금까지 서술된 다양한 인간상을 언급하는 가운데,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등장한 "자연인"이라는 허구를 비판한다.(*주9) 즉, 기술을 사용하여 타락한 인간 이전에, 자연상태에 놓인 인간이 존재했다는 허구를 비판하며, 바꿔 말하면 이것은 루소에게 존재하는 퓌시스/테크네의 대립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스티글레르도 이러한 루소의 허구를 검토하는데,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루소의 이러한 발상은 퓌시스/테크네에 관한 아포리아로 이끌게 한다. 우선 이 아포리아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왜냐하면 르루아-구랑도 나중에 같은 아포리아로 이끌리게 되기 떄문이다.
루소는 "자연인"을 어디까지나 필요한 '허구'로 여기지만, "자연인"을 규정할 때 두 발로 보행하는 것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인간의 기원에 존재하는 자연인이라는 그의 규정과는 양립하기 힘든 의미를 갖게된다. 말하자면 기원부터 인간이 두 발로 보행을 하고 손을 동물의 발 역할로부터 해방한다는 것은 또한, 인간이 손으로 '조작'한다는 것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이 조작하는 것은 도구, 용구이다. 루소는 기술을 사용하게 된 인간의 상태를 타락이라고 한탄하며, 기술로부터 해방된 자연인을 인간의 기원으로 상정하지만, 이 상정으로부터 도구나 용구라는 기술을 완전히 내쫓을 수는 없다. 이것이 루소의 아포리아이다.(*주 10)
그리고 퓌시스와 테크네를 대립시킨 루소에 반하여, 르루와-구랑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직립상태의 골격, 기술, 언어, 사회 사이의 본질적인 연결"이다. 그는 기술을 인간의 피하기 힘든 특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스티글레르는 르루와-구랑의 기본적인 착상에는 어떤 역설이 있으며, 그것을 무리하게 없애려고 함으로써 그 역시 결국은 루소와 동일한 아포리아로 귀착된다고 비판한다. 그 역설은 "외화"의 역설이라고 말해지며, 대략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르루와-구랑은 석기의 등장을 인간의 등장의 징표로 간주한다. 그 때문에 "도구, 테크네가 인간을 발명한 것이지 인간이 기술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주1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인간은 도구를 발명함으로써 테크놀로지적으로 자기를 <외화>함으로써 자기를 발명한다"고 생각한다. 즉, 여기에서 인간은 "내부", 어떤 내면을 갖춘 것으로 간주되며, 그것이 외화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도구에 의해 발명된 인간의 "내부"가 자기를 "외화"하여 도구를 발명한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도구가 인간을 발명하는가, 인간이 도구를 발명하는가는 결코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르루와-구랑은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피하려고 하는가? 르루와-구랑이 이를 위해 제출한 생각은 바로, "[석기를 최초로 발명한] 진쟌트로푸스의 기술은 반(半)-동물학적이다."(*주12)라는 것이다. 즉, 진쟌트로푸스의 기술은 아주 단순한 의식에 의한 선취(완성되게 될 돌의 형태의 선취)의 산물이자만, 대다수는 고릴라나 침팬지 등과는 다른 새로운 대뇌피질의 조직의 외화에 대한, 즉 그 새로운 대뇌피질의 외부세계에 대한 대응물에 불과하다고 그는 상정한다. 실제로, 그가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나 진쟌트로푸스, 원인, 구인이라는 진화 과정에서 추구하고자 한 것은, "[대뇌피질의] 새로운 조직화와 그 이론적 귀결"로서의 "기술성과 그것이 포함하는 사회의 형성"(*주13)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주 단순한 미래의 어떤 상태로의 선취가 있지만, 이제 대뇌피질의 새로운 조직화의 "외화"로서 상정되는 단계의 의식을 그는 "기술적 의식"이라 부르며, 보통 우리들이 말하는 의식이나 "창조적 의식"과 구별한다. 나아가 이 선취는 보다 고도화되고 보다 복잡한 석기를 만들게 된 인간으로서 원인(原人)이 언급되는데, 아직 원인의 단계에서도 그 석기는 새로운 대뇌피질의 대응물로 간주된다. 그리고 대뇌피질의 조직화가 완성된 단계, 즉 우리들에게까지 이르는 그 조직에 크 변화가 발견되지 않는 인간이 구인이다. 구인에게서 비로소 우리들과 동등한 의식이 산출된다. 그 이후, 기술의 조작과 새로운 대뇌피질의 조직화가 대응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구인은 "창조적 의식"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서 어떤 친숙한 대립을 보게 되지 않는가? 여기에서는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나 진쟌트로푸스, 나아가 원인이 지니는,단순한 선취밖에는 할 수 없고 대부분은 대뇌피질의 조직에 의해 규정된 "기술적 의식"과, 구인이 지닌 반성과 상징을 수반한 "비기술적 의식"이 대립한다. 즉, 결국에는 "진쟌트로푸스의 기술은 반-동물학적이다"라는 형태에서의 앞의 역설의 해결은, 그를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라는 대립으로, 즉 테크니/에피스테메라는 친숙한 대립 도식으로 끌고가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는 앞의 루소와 완전히 똑같이, 기원에 얽힌 아포리아가 생겨난다. 루소의 착상이 퓌시스로부터의 테크네의 발생에 얽힌 "최초의 기원"의 아포리아로 이끌리게 된다면, 르루와-구랑은 테크네로부터의 에피스테메의 발생에 얽힌 "제2의 기원"의 아포리아로 이끌린다.

"루소가 육체적인 것에 덧붙여져 왔다고 보았던 것[즉 기술]은 이미 실제로 최초의 기원보다 이전에 존재했다. ... 그런데 '제2의 기원'에 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의 기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자면 기술적 차이화는 오스트랄란트로스부터 이미, 완전하고 전체적인, 또한 조작적으로 다이나믹한 그러한 선취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반성을 수반한 지성은 기술적 지성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기술적 지성의 배경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주14)

르루와-구랑이 이러한 아포리아에 이끌리게 되었던 것은 최초의 "외화의 역설"을 매끄럽게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역설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2. 이론적 측면 (2)
-데리다의 차연은 어떻게 확장되는가
스티글레르의 독창성, 그것은 이 역설을 해결하는 설명원리로서 '차연'을 도입하는 것에 있다. 우선 간단히 '차연'에 관해 설명해 두자. '차연'은 초기 데리다의 핵심어 중 하나이며, 다양한 이항대립(파롤/에크리튀르, 주관/객관 등)이나, 소쉬르의 기호론에서의 시니피에(기의), 시니피앙(기표)의 차이 등을 산출하는 운동으로 간주되며, 나아가 또한 시니피에(개념)의 차이적 성격을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개념의 화자/독자에게 완전한 자기현전을 무한하게 지연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차이'와 '지연'을 모두 산출하는 운동을 가리키기 위해 데리다가 만들어낸 조어가 바로 '차연'la differance이다.(*주15) 간략하게 말하면, 차연이란, 모든 차이들(기호체계 내의 차이, 다양한 이항대립 등)을산출하며, 그 결과 개념의 자기에의 현전을 무한하게 지연시키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운동이 능동/수동 또는 주체/객체 등의 대립도 산출하기 때문에, 인간 주체가 능동적으로 어떤 객체






* 주8 : 보통은 이 명칭보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라는 명칭에 친숙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진쟌트로푸스 등은 오스트랄로피테키네('남방원숭이과'의 뜻)는 이름 아래에 분류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함의를 지닌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남쪽에서 발견된 인간'이라는 의미)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르루아-구랑은 더 좋아한다.(르루아-구랑, Le Geste et la Parole, Paris: Albin Michel,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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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드레 르루아-구랑에 관해서는 국내에 소개된 바가 거의 없다. (기술철학적인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그나마 대략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다음 글이다. http://artspacec.com/sub02/past_04.php 한편, 르루아-구랑에 관해서는 짤막하게 언급하나 클라스트르와 관련해서 정리가 잘 된 글로는 다음을 보라. http://blog.aladdin.co.kr/780426173/2555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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