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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가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논거로는 대략 다음의 두 가지를 거론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인간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 즉 법의 수립(제정)을 목표로 공개적인/열린 토론을 행하는 장소. 의원은 자신의 양식만을 따라 정신에 있어서도, 실제 활동에 있어서도 독립된 입장에 서 있어야만 한다.(면책특권의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둘째로, 이해조정을 위한 교섭과 타협의 장소. 이 경우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다수파를 형성하는 것으로, '진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의회정치의 현실태는 어쩌면 후자일 것인데, 이해조정의 기술적 문제만이 필요하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반드시 의회제도여야만 한다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용적인 동시에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인민을 대신하여 인민이 신뢰하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면, 신뢰받는 사람이 단 한 명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인민의 이름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의회정치에서 '진리'의 탐구 따위의 말이 허구적인 표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정치의 장에서는 구체적, 현실적인 결정의 집적/축적이 있을 뿐이며, 우리들의 머리꼭대기에 있고 우리가 따라야만 하는 기준 따위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대신하여, 그 기준은 진리가 아니라 개별 사람들의 요구라고 말한다면 듣기에는 기분도 나름 좋아지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그저 감정적인 대용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사람의 요구가 하나의 다발로 묶이게 되면 거스르기 힘든 강렬한 힘이 된다. 선악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소리 높여 강력하기 외치기 때문에 이것은 정치적 운용의 기준이 된다. 칼 슈미트는 대중민주주의가 내포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현실을 냉정하게 응시하면서 다음의 논의를 전개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정치적 운영을 행하는 자, 즉 통치자와 통치를 받는 자(피통치자)가 완전히 일체가 된 직접 민주주의의 정치 모델이 언급된다. 여기에서 목가적인 이상사회를 찾아내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많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주지하다시피 <일반의지>라는 골치아픈 문제가 놓여 있다. '소수자의 의견'은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루소의 대답은 간단하다.
"어떤 법이 인민의 집회에 제출될 때, 인민에게 물어지게 것은 바로 그들이 제안을 가결할 것인가 부결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인민의 의지, 즉 일반의지에 일치하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각자는 투표에 의해, 그것에 관해서만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 때문에 투표의 수를 계산하면 일반의지가 표명되는 셈이다. 따라서 나의 의견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은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 내가 일반의지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사회계약론>)
즉, 소수 의견은 그것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에 일반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완전한 동일성을 전제로 한 정치모델이며, 따라서 이질적인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루소의 일반의지론이 파시즘을 낳았다는 논의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는 셈이다. 로베스피에르나 폴 포트가 루소의 심취자였기 때문에 대숙청, 대학살이 생겨났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직접적으로 표현된, 누구든 저항하기 힘든 "인민의 의지"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슈미트는 이러한 루소 사상의 위험한 역설을 토대로 이렇게 적는다.
"민주주의/민주제에서는, 평등한 자들의 평등성과 평등한 자들에 속한 사람들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것 이외의 모든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표현된 인민의 의지로, 그 고유한 가치와 원리를 대치시킬 수 없는, 아무런 본질도 갖고 있지 않는 사회적, 기술적 보조수단으로 바뀌어 버린다."
"기술적인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또 본질적 의미에서도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앞에는, 자유주의적 사상의 맥락에서 발생한 의회는, 인공적인 기계로서 나타나는 반면에, 독재적 및 케사르주의적인 방법은, 인민의 갈채에 의해 지지를 받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실질 및 힘의 직접적 표현일 수 있다."

'인민의 의지'는 직접적, 본능적인 것이며, 의회에서의 토론 등과 같은 절차는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파시즘도 볼셰비즘도 언론의 자유나 가치관의 다원적 공존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반자유주의이지만, 자신을 '인민의 대변인'으로 자부한다는 점에서는 꼭 반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슈미트는 러시아 혁명을 건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 원인은 "폭력 행사의 새로운, 비합리주의적인 동기가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 즉 극단적인 것으로부터 반대의 것으로 바뀌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합리주의가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 일반에 대한 새로운 가치, 토론에 대한 모든 신념을 배제하는 동시에 또한 교육독재에 의해 인간을 토론에 익숙하게 하려는 것도 부정하는, 본능과 직감에 대한 새로운 신념이 함께 작동한다고 하는 것에 있다."
나아가 조르주 소렐이나 바쿠닌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열광, 위대한 도덕적 결단 및 위대한 신화는 추리나 합목적적 고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생의 본능의 심층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열광한 대중은 직접적인 직감에 의해 신화적 이미지를 창조한다. 이 이미지야말로 그들의 활력을 추동시키며, 순교에의 힘 및 폭력 행사에의 용기를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만, 민족 또는 하나의 계급이 세계사의 동력이 된다. 이것이 결여될 경우에는,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권력이라 하더라도 유지될 수 없으며, 또한 어떠한 기계적인 장치도, 역사적 삶의 새로운 조류가 해방될 때에는 그 방파제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오늘날 어디에서 신화에 대한 이 능력과 이 생명력이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가를 직시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러한 능력은 근대의 부르주아지, 즉 금전과 소유에 대한 불안 때문에 타락하고, 회의주의, 상대주의, 의회주의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사회층에 있어서는, 물론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계를 예견한 슈미트의 논의는 나치즘을 정당화했다며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그가 반동적 사상가라는 점, 그러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점,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점은 슈미트에 대한 독서의 피상적 방어에 불과할 것이다. 의회제도이든 민주주의이든 표면으로서의 표피적 논리만으로는 자기완결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실제적 국면에서는 또 다른 요인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할 때, 그러한 사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슈미트를 독해해야 할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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