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보다 약 8년 전에, 하버마스는 유럽을 둘러싼 또 다른 인상 깊은 정치문서를 발표했다. 인상 깊음의 절반은 그가 초고를 쓴 그 우리의 전후 부흥 : 유럽의 재생(20035)에서, 그와 오랜 논적이었던 자크 데리다가 공저자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 있지만(데리다가 초안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주로 건강문제에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눈에서 볼 때, 이 문서는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와의 거리에 있어서야말로 인상 깊다. 정치 문서의 안목으로서의 상황적 주장을 비교했을 때, 정반대의 것을 호소하고 있다. 2011년의 문서에 관해서는 이미 봤던 대로이다. 국민투표가 타국의 정치가의 압력에 의해 중지됐고, 그리스인은 주권을 행사할 기회를 빼앗겼다. , EU의 상황은 주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다.

이에 대해 2003년의 문서는 주권이 EU를 재생이 필요할 정도로 빈사瀕死의 상태에 사로잡혔다는 진단을 기조로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스페인의 총리가 독주하여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와 가담을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내심 전쟁에 흥미를 가지고 기웃거리던정부들의 등을 떠밀고, ‘불량배불량배의 전쟁에 EU 전체를 끌어들인 데에 있다. 그 표명은 유럽의 공동 외교를 좌절에 몰아넣고, 매파 미국과 비둘기기파 유럽, 신적인 칼과 인도주의의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일련의 분업체제를 완성시켰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했을 거라던) 주권, 미국의 (전쟁 개시 결단을 내린) 주권, 스페인의 (누구에게 정의가 있는가, 누구를 퇴장시켜야 하는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표명하는) 주권을 앞두고, “차이들을 승인하는 것, 타자를 그 타자성에 있어서 서로 승인하는 것정체성/동일성이라고 해야 하며, “유럽적 공공성은 패배했다. “국가폭력의 행사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지구적 수준에서도, 주권의 행동 범위를 상호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EU의 간주권적 통치원리는 일국의 총리의 배반 이것도 주권의 행사일 것이다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그래서 전후에 기대를 걸었던 재생의 호소이다.

데리다가 좀 더 살았더라면(2004년 사망), 이 대조contrast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가 서명한 2003년의 공동문서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거의 무게를 갖지 않았으나, 차이나 타자성을 승인하는 것, 그리고 간주권적 통치를 이 문서의 민주주의개념으로 간주한다고 본다면(그렇게 봐도 나쁜 이유가 데리다에게 있을까), 그 대답은 생전의 저작에서 충분하게 추측하여 헤아릴 수 있다. 2002년의 불량배들이다. 거기서는 민주주의가 깊은 자기면역성의 병을 앓고 있다고 간주됐다(앞의 책, 3. 민주제의 타자, 대신하다 : 대체와 교체). 이를 테면,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 자살적이다 등등. 예를 들어,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의 승리를 눈앞에 둔 선거과정을 군부가 정지시킨 알제리. 정지시키지 않으면, 알제리의 민주주의는 확실하게 하나의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정지는 실제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선거과정의 정지는 민주주의의 정지이다. 게다가 이라크. 불량국가를 쫓아내지 않으면 중동에 민주주의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무력 공격을 받지도 않은 국가들이 하나의 주권국가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주권국가 간의 민주주의에 반한다.

EU를 둘러싼 두 개의 정치문서를 염두에 두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패러프레이즈해보자. 주권자를 실정적으로 성립시키는 것은, 그 주권자가 누구든 민주주의이며, 데모스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는 지고적인 지배권으로서의 주권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하나의 통치 이념일 수 있다. , 주권이란 민주주의의 자기일 것이다. 그 주권이 민주주의의 타자가 되어 버린 사태를 두 개의 문서가 보여주는 대조contrast는 부각시키고 있다. 맨 먼저, 주권과의 일체성으로부터 우리를 주권적 공공성으로 조금 떼어낸 민주주의는 주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2003). 그 다음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그 민주주의가, 바로 간주권적 공공성의 이름으로, 주권의 공격에 착수하는 것이다(2011). 하버마스적 어휘인 간주권적 통치나 그것에 일치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공공성불량배들의 데리다는 이렇게 표현한다. “보편적인, 심지어 국민국가적 구조로부터 독립한 민주주의의 이런 세계정치적(=코스모폴리탄적인) 차원”(강조는 인용자). 두 사람의 어휘가 이렇게 상통한다고 상정해야만 2003년 문서에 데리다가 서명한 것을 납득할 수 있다(이 상통으로부터 무엇을 독해할 수 있는가는 나중에 보자). 아무튼 주권과 민주주의의 분리는 아무리 민주주의 개념을 주권 개념에 구속되지 않는 차이나 타자의 승인으로 확장하더라도 이는 자기자기의 분리에 다름 아니며, 그 확장 자체에 의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높여버릴 것이다. ‘민주주의의 타자란 우선 민주주의의 자기라는 것을 주권으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해방은 깨닫게 해줄 것이다. 시민사회의 수세기 동안의 역사적 성숙과, 홀로코스트를 정점으로 하는 그 비참한 이면(裏面)이 가능케 하고 또 요구하기도 한 민주주의 개념의 확장, 주권을 넘어선 지평으로의 그 이동이, 민주주의에, 스스로 뿌리치고 달아났을 터인 과거의 제약, 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했을 터인 뿌리를 썩게 하고, 스스로를 공동화(空洞化)시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2011년의 문서는 비통한 외침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 에 의해 증언하고 있다. 불량배들의 논리는 이런 진단을 이 문서에 내린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도마에 올린 베니 레비(목자의 살해)나 장-클로드 밀네르(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적 경향), 혹은 앞 절에서 우리가 거론한 레지스 드브레 등의 논자들의 프랑스적 공화주의(주권주의적 공화주의)는 이런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에 대한 바로 면역 반응일 수도 있다. ‘자기면역성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그 자체를 타자화해버리는 것이다. ‘공화국의 타자로 말이다. 그들은 전체주의자나 신권정치의 옹호자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민주주의자로서, 공공정신을 시들게 하고 사적 개인의 사회생활의 양식으로 전락한 민주주의의 현재를 증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민주주의에 공화주의의 이름을 준다는 공통성에 의해 하나의 사상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토크빌 이후의 민주주의 비판을 프랑스 혁명의 옹호 요체는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의 옹호 와 공존시키는 특수한 프랑스적 이데올로기이다.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결함 본성적 역설paradox 에 불과하지만, ‘불량배이라크를 처벌하고 쫓아내려고 하는 미국도 불량배라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한에서, 역설은 자기파괴 경향뿐 아니라 재생의 계기도 포함했다. 두 사람의 불량배는 모두 민주주의의 자기라고 하는, 견딜 수 없는 현황 인식의 그 견딜 수 없음은 자기의 내부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전쟁은 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분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도 또한 자기면역적 반응이며(타인의 전쟁이라면 방치해두면 된다, 어처구니없다고 한탄할 뿐이어도 된다), 바로 그것이 정의의 계기이라고 데리다는 자기를 완전히 타자화하여 문제를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하는 공화주의자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가 이용했던 공화주의 개념의 특성을 세 가지 차이를 통해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 이데올로기로서의 공화주의는 국가주권과 민주주의의 괴리에 대한 거부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는데, 우리의 공화주의 개념에는 원래 공화국의 주권이 필요 없다. 그것은 이미 봤듯이, 군주에게도 귀족에게도 민중에게도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체제의 개념이며, 주권이 아닌 현실권력 (real power) 사이의 차이, 경합, 모순을 집합체의 권력의 확장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이 점에서, 헌법에 주권 규정을 포함하지 않고서도, 원리적으로 얼마든지 State(=국가)를 연방에 환영하며 맞아들일 수 있는 미국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국의 한 가지 모델일 것이다. United States를 하나의 주권국가로 만드는 것은 국제관계’(하버마스의 간주권적지평)일 뿐이다. 공화국의 내적 구성에 주권은 필요 없으며, “자유의 구성 Constitutio Libertatis”으로서의 공화국 헌법은 사회계약이 아닌 개인 간 동맹이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국가 간 조약과 마찬가지로 간주권적인 맹약이며, 맹약에 의해 성립된 사회에 개인이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특히 주권은 넘겨주지 않는 특수한 사회계약 경제인(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의 사회설립계약 같은 이다. 아무튼 주권과는 다른 지평에 서서, 혹은 그 지평으로 나가려고 하는 정치적 의지에 있어서,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데리다-하버마스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이 공통성을 좀 더 뒤쫓아보자. 데리다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란, 정체로서의 민주주의(의회제)를 특징짓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정체의 밑바탕에 있으며, 특정한 현재의 정체(군주정, 귀족적, 민주정), 그것에 대한 면역 반응으로서/에 의해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게다가 정체의 창설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적 과정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어떤 새로운 정체도, 민주주의의 자기인 주권자(국가 그 자체여도 신이어도 상관없다)의 이름에 의해, 현재의 정체에 의한 이 자기에 대한 공격에 맞선 방어=대항공격으로서 수립된다. 쿠데타조차도 근본적으로 정확하게는 근본에 있어서만 민주주의적이다. 이런 자기면역성이란, 우리의 용어법으로는, 세 정체 모두가 품고 있는 부패로의 경향이며, 또한 그 부패에 맞서는 이며, 정체의 순환을 출현시키는 정체 일반의, 혹은 정치라는 것의 본성적 위기에 다름없다. 자기면역성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정체의 특성이기도 하다[주].

[주] 우정의 정치(1988-89년도의 데리다 세미나 기록을 정리한 저작.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 訳, みすず書房, 2003)에는 민주주의와 정체들의 관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초한 약간 뉘앙스가 다른 서술이 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은 각각 부친적 관계, 남자와 아내의 관계, 형제 사이의 관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는, 세 개의 관계 사이에는, 파생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정치적’(이것은 많은 경우 민주제적이라고 번역된다)은 형제 사이의 관계이며, “정치적인 것 그 자체, 형제애, 민주주의, 이것들 사이에 있는 상호적 포함 관계, -속적 관계는, 거의 동어반복적=동일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2, 九頁)라고 말한다. , ‘정치적인 것 그 자체는 민주주의적이며, 세 정체의 구별은 (근원적?) 민주주의에 선행한다고도 읽을 수 있다. 데리다에게서, 이윽고 형제 간의 관계에, ‘자기면역성이 발견될 수 있을까? 형제들의 유산상속을 둘러싼 혈육 간의 싸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일까

그러나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결코 그 자체의 정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적 과정차연의 운동의 하나로 여겨지며,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신체 corps’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항상 도래할것에 머무는 민주주의()바닥 그 자체이며, 정치에 있어서의 시간(‘시대’)과 공간(각 정체)의 차이를 산출하면서, 그 차이 속에 ()장소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본질주의는, 근대에 있어서는 특히 마키아벨리가 정치 노선화한 현실의 공화주의를 무시하지 않을까? 또한 삼권분립의 사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마키아벨리는 데리다 식으로 바꿔 말한다면, 세 정체 각각의 부패경향을 상호적으로 공격시키는 자기면역시스템으로 공화국을 구상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에서조차 자기파괴했듯이, ‘자기면역성의 병인 부패로부터 쾌유할 수는 없으나,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 재생의 계기를 간직하고 있었듯이, ‘부패에 맞서는 도 또한 갖추고 있으며(‘부패 부패에 다름 아니다), 그 혼합정체는 부패의 상호공격을 의 생산시스템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공화국의 확장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민주주의의 자기 면역 과정에 끝이 없듯이, 공화국은 지속한다.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현실화되지 않듯이, 공화국의 확장에는 목적goal이 없으며, 확장의 지속 속에서만 부패를 능가한다. 목표goal가 없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 우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확장 과정을 어디선가 자기파괴 과정으로 반전시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키아벨리적 공화국은, 언젠가는 끝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집어보면 도래할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기파괴’-‘부패재생’-‘의 균형 시스템이다. 근대의 삼권분립은 그 후계였을 것이다.

즉 우리의 공화주의는 데리다의 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자기면역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둘 다 와 달리, 정체로서 실재한다. 뭐랄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시스템을 공화주의의 이름에 의해 규정(identification)했다. 이것이 두 번째 차이이다. 이 공화주의는 그러므로, 그 점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데리다와 프랑스적 공화주의 둘 다에 대해 거리를 취하려고 하는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노선과도 다르다. “아무나=누구든 좋은 누군가 le n’importe qui”가 정치를 담당하는, 이 플라톤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와도 다르다. 세 번째 차이이다. 플라톤은 그런 체제가 실현되면 자유와 존엄을 깨달은 말[]이나 당나귀가 길을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닥치게 된다고 하는 이유로 그것을 배척했다. 즉 플라톤에게 제비뽑기민주주의는 단적으로 정치 질서 랑시에르는 그것을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부르는데 의 부재이며, 랑시에르는 이 아나르시アナルシ=무질서를 하나의 긍정성으로 뒤집어버리고,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와 비슷한,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체제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어디까지나, 역사상 거의 어디에서도 있으며 그리고 언제든 있는 n’importe où et n’importe quand 체제의 호칭이다.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민주주의는 주권의 거처를 둘러싼 고찰 끝에 주권을 삭제하지도 않고 특정한 어딘가에 존속시키지도 않는, 더 정확하게는 주권의 존재와 부재를 균형 혹은 일치시키는 체제이며, 그 있을 수 없는 도래 가능성에 의해 도래할 민주주의의 일종이며, 또한 그 부정적 보편성, 보편적 부정성에 의해, 민주주의와 주권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프랑스적 공화주의의 일종 또는 극한(limit)를 형성한다. 프랑스적 공화주의가 일치의 순수한 긍정성=실정성을 추구하는 반면, 랑시에르의 공화주의는 똑같은 일치를, 데리다의 자기면역성과 마찬가지로, 바닥 없는 바닥에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들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 이른바 그 평범함, 흔해빠진 착상에 있어서 강력한 사상이며, 주권 개념이 데리다-랑시에르-프랑스적 공화주의를 하나의 에피스테메로 결합시키고 있다고 한다면, 있는지 없는지를 포함해, 주권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온 또 다른 에피스테메를 이룬다. 그것은 주권을 아무래도 좋은것으로 한다는 문제 관심에 의해서 정체의 제도를 실제로 설계해온 에피스테메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정치적으로 봐서, 어디에 효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주권을 자기로 하는 민주주의의 추구와, 주권의 보류에 의해 성립하는 공화주의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노선은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명하지 않다. 그런 공화주의에 대해서,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에 더 저항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콕이 꼼꼼하게 계보를 추적하고, 네그리가 그것을 전제로 그의 구성적 권력의 개념사를 그려낸, 근대의 공화주의는 마키아벨리적 계기로서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게다가 미국으로 계승되며, 지정학적으로는 오늘날 세계정치에 있어서 앵글로색슨 동맹의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에 사상적 주형[거푸집]을 계속 제공하고 있으며, 전지구적 자본주의노선에 대해,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우고, EU에 기대를 걸면서 저항하는 자세는 현대의 양식을 거의 대표하고 있다는 감이 있다. 그것은, 얼마간의 효과를 낳는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객관적인 대항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진행 중인 투쟁의 귀추를 전망하기에는 너무 빠른 감도 있다. 예를 들어 아랍의 봄에는 민주주의파의 승리라고 정리해버릴 수 없는 요인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 그것은 반란의 전지구화라고도 불러야 할 과정 속에 있으며, 과정을 가속시키고, ‘주권원리의 세계적 후퇴를 우리에게 고한 것이다. 그래도 이라크 전쟁과 그리스 위기 후에도 아직, 하버마스를 필두로 하여 EU간주권적 통치를 체념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를 단적인 특징으로 하는, 공화국의 군사적 확장노선의 분명한 후퇴 경향에 동반된 이 대립축은 점점 더 많은 기대를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물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민주주의공화주의에 대한 유효한 맞수(counter)가 될까? 대립축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효과들은 당사자가 기대하는 그대로일까? 우리가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라는 정치 문서에서 간파한 것은, 채무 문제가 양자의 차이를 실질적으로 소거하고 있다는, 기대와는 거꾸로 나아가는 경향에 다름 아니다. 본서가 무엇보다도 경제를 문제 삼는 까닭도, 똑같은 질문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경제로 한걸음 더 내딛기 전에, 1993년에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이 어떻게 되어 왔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 선수로 하는 민주주의’ vs 영미가 인솔하는 공화주의라는 도식이 형태를 이루는 데에는 맑스의 유령들이 적잖은 역할을 해 왔을 터이다. “우리는 오늘날 모두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주류 언론이 말할 정도로. ‘도래할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주권국가를 광신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공화주의와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전지구적 자본주의) 양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을 사상적으로 지목했을 것이다. ‘경제라는 바닥을 참조하여 그 파탄을 주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유하게 정치적인 수준에서, 혹은 간주권적이고 세계정치적인 차원에서, 이미 20년의 역사를 지닌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현재가 어떤지는 확인해 두어야 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입헌 민주주의의 위기와 예외상태

: 데리다, 아감벤, 벤야민, 슈미트와 유령의 회귀

사토 요시유키(佐藤嘉幸)

 

* 원문 : http://www.jimbunshoin.co.jp/files/satoyoshiyuki_democrac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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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우리는 바야흐로 벤야민이 말하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각주:1] 속에 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전후 일본의 통치 시스템의 문제점(전원電源3법에 기초한 막대한 보조금과 맞바꿔서 원전을 지방에 떠넘기는 희생의 시스템’,[각주:2] 그리고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열도에 54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해온 핵에너지 정책의 취약성)을 노정시켰는데, 그 약점은 지진 후에 선전된 유대라는 이름의 내셔널리즘과, 중국한국러시아와의 영토문제라는 이름의 국경분쟁, 북한의 핵무장이 야기한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에 의해 덮어 감춰지고, 외부의 적과 전쟁을 할 실재적 가능성으로 변환됐다. 그런 변환을 배경으로 하여, 20147, 2차 아베정권은 헌법해석을 변경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 나아가 집단안전보장의 행사도 가능케 하는 해석개헌을 실현했다. 해석 개헌에 의해, 평화헌법을 기초로 하는 입헌민주주의의 체제는 파괴되고, 대외전쟁을 가능케 하는 2의 구조물을 헌법의 곁에 둔다고 하는 예외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예외상태의 형성은 의회에서의 논의를 거친 입법 행위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는 게 아니라, 내각의 각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수단에 의해, 기존 헌법의 옆에 그것과는 다른 2의 구조물을 두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극히 위험한 행위이다. 그런 행위는 민주주의 자체를 붕괴시키는 위험을 품고 있다.

정치를 전쟁으로부터, 예외상태로부터 정의함으로써, 평화헌법을 기초로 삼은 입헌민주주의의 체제를 정지시키고, 거기에 완전히 다른 체제, 즉 대외전쟁을 가능케 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 입헌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은 관동대지진이나 세계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 후에 식민지주의와 전시체제의 구축으로 치닫고, 15년 전쟁의 수렁에 빠진 전전(戰前)의 일본의 상황을 상기시킨다. ,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의 상황은 마치 관동대지진 이후의 상황의 유령이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현황 인식에서 출발해 본고에서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의 슈미트 및 벤야민 해석을 독해하고, ‘예외상태에 관한 이들의 이론에 입각해 우리가 놓여 있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의 현황을 조사하려 시도한다.

 

1.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로서의 전쟁

데리다는 주권권력을 비판할 때 반드시 슈미트의 주권이론을 참조한다. 예를 들어 2004년 그가 사망한 탓에 마지막 강의가 되어 버린 짐승과 주권자2(2002-2003)에서 데리다는 주권자란 슈미트가 말하듯이 예외에 관해 결정하고 법권리를 중지하는, 예외적 권리를 지닌 예외적 존재이다[각주:3]라고 말한다. 그가 슈미트 이론을 가장 자세하게 분석한 저작은 우정의 정치(1994년 출판. 또 이 책은 1988-1989년 강의에 바탕을 뒀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우정의 정치를 자세하게 독해하고, 데리다의 슈미트 해석에 입각해 정치적인 것과 전쟁의 관계에 관해 고찰하자.

정치신학(1922)의 슈미트에게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각주:4]이다. 이런 예외상태는 이 책보다 10년 뒤에 쓰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각주:5]에서는 친구와 적의 구별”, 전쟁으로서 나타난다. 데리다는 슈미트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 행위나 동기의 기본원인으로 생각되는 특종(特種) 정치적 구별(die spenzifisch politische Unterscheidung)이란 친구이라는 구별(die Unterscheidung von Freund und Feind)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26/15).

만일 차이적 구별 혹은 각인(刻印, Unterscheidung), 정치적인 것의 규정이, ‘정치적 차이자체(die politische Unterscheidung)가 친구와 적 사이의 차별(Unterscheidung)로 귀착된다면, 그런 분리는 하나의 단순한 차이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한정된 대립, 대립 자체이다. 이 규정이 전제하는 것, 그것은 바로 대립이다. 이 대립이, 그것과 더불어 전쟁이 말소되면, ‘정치적이라 불리는 경계는, 그 경계 혹은 종차성을 잃어버린다.[각주:6]

 

친구와 적이라는 구별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정의인데, 이는 달리 말하면, 친구와 적의 대립이다. 그리고 이 대립이 함의하는 것은 다음에서 인용된 슈미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잠재성혹은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 자체이다.

 

그 기대나 교육적 노력에 공명하든 하지 않든, 국민들은 친구-적의 대립을 따라 결속하는 것이며, 이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또한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실재적인 가능성으로서(als reale Möglichkeit)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이치상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적이란 경쟁상대나 상대방 일반이 아니다. 또한 반감을 품고 증오하고 있는 사적인 상대방도 아니다.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 다른 마찬가지의 총체와 대결하고 있다 이다(Feind ist nur eine wenigstens eventuell, d. h. der realen Möglichkeit nach kämpfende Gesamtheit von Menschen. die einer ebensolchen Gesamtheit gegenübersteht)[정치적인 것의 개념, 29/18-19][각주:7]

 

데리다는 슈미트의 이 말을 해석하면서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이다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그것은 가능성에서 우발성(여기서는 최소한의 우발성으로서 종차화되어 있다)으로의, 그리고 우발성에서 현실성(여기서는 실재적 가능성, «reale Möglichkeit»이라고 불린다)으로의 이행이다[각주:8]고 데리다가 말하듯이, 여기서 슈미트는 적과의 항쟁, 즉 전쟁을, 적어도 잠재성, ‘실재적 가능성’, 나아가 현실성으로서 파악한다. , 정치적인 것은 슈미트에게서 잠재적 혹은 현실적 전쟁의 가능성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다.

이때 친구와 적의 대립이란 공적(公的)’이며, 국민을 단위로 하는 것이며, 적이란 사적인 적이 아니다. “적은 공적인 적일 수밖에 없다(nur der öffentliche Feind). 왜냐하면 이런 인간의 총체, 특히 전 국민에 관계하는 것은 모두 공적(公的)이게 되기 때문이다. 적이란 호스티스hostis[공적公敵]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이니미쿠스inimicus[사적私敵]가 아니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29/19).[각주:9] 그런 적과의 대립은 적이 내적(内敵)이라면 내란, 외적(外敵)이라면 전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이런 공적인 대립은, 잠재성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 무력에 의한 전투를 의미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슈미트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현실성의 영역에서의, 어떤 전투의 우발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im Bereich des Realen ligende Eventualität eines Kampfes). 역사적 변화에 의존하는 무기와 전쟁의 기술의 일정하지 않는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이 말을 검토해야 한다. 전쟁은 조직화된 정치적 통일체 사이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 내전이란 하나의 (하지만 이것에 의해 위태롭게 되는) 정치적 통일체의 한복판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3/25).

어떤 경우든 이 전투는 무력에 의한 것이다. 치사(致死)를 목표로 하는 것 말이다. ‘무기는 여기서 그 본질적인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치사로서의, ‘신체적=물리적치사를 목표로 하는 수단(ein Mittel physischer Tötung von Menschen)이다. 인간의 죽음은 이 적의 개념에 의해 이렇게 함의[내포]되며, 즉 대외전쟁이든 내전이든 일체의 전쟁에 함의[내포]된다.[각주:10]

 

, 전쟁은 슈미트가 다음에서 말하듯이, 적의 신체적=물리적 치사를 목표로 한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 “친구, , 전투 같은 개념은, 그 실재적인 의미를(ihren realen Sinn)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auf die reale Möglichkeit der physischen Tötung) 항상적인 관계로부터 끌어낸다. 전쟁은 적대로부터 생겨난다. 왜냐하면 적대는 다른 존재의 존재론적 부정(seinsmäßige Negierung eines anderen Seins)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적대의 극한적 실재화(die äußerste Realisierung der Feindschaft)일 뿐이다. 전쟁은 평범한 일상이나 정상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하나의 이상처럼, 혹은 원할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필요가 없으나, 적의 개념이 그 의미를 보존하는 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현전하기를 계속하지(als reale Möglichkeit vorhanden bleiben) 않으면 안 된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3/25).[각주:11] 따라서 친구와 적의 대립, 즉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전쟁이라는, 적의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관계로부터, 그 실재적 의미를 끌어낸다. 그렇다면 슈미트는 단순한 사고 대상으로서의 전쟁으로부터가 아니라, 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게 된다. 슈미트에 따르면, 전쟁이 그런 구체성을 결여한 경우, 그 개념은 유령적인 추상이 된다.” “정치적 관계들의 본질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이 구체적 대항(konkrete Gegensätzlichkeit)이 환기되는 경우이다. 모든 정치적 개념, 표상 및 말에는 어떤 항쟁적 의미가 있다. 이것들은 어떤 구체적인 항쟁(eine konkrete Gegensätzlichkeit)을 조준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논리가 친구-적의 배치(그것은 전쟁 혹은 혁명이라는 형태 아래서 바깥에서 나타난다)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an eine konkrete Situation gebunden), 이런 상황이 부재하면, 그런 개념들, 표상 및 말들은 공허하고 유령적인 추상이 된다(werde zu leeren und gespenstischen Abstraktion)”(정치적인 것의 개념, 31/22).[각주:12] 그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쟁상태를 예외상태라고 명명할 수 있다. 실제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라는 사태는 긴급사태(Ernstfall)’이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도, 예외적 사태(Ausnahmefall)야말로 특별히 규정적인, 사물의 핵심을 분명히 하는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친구와 적의 정치적 배치의 극한적 귀결이 두드러지는 것은 현실적 전투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극한적 가능성에서 출발해서 인간들의 삶은 특수 정치적인 긴장을 획득한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5/30).[각주:13] 데리다는 슈미트의 이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리라.

 

예외가 규칙이다, 이것이 아마도, 실재적 가능성의 이런 사유가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예외가 일어나는 것의 규칙이다, 사건의 법이다, 그 실재적 가능성의 실재적 가능성이다. 사태 혹은 우발성에 관한 결단을 정초하는 것은 예외이다. 이 사태, 이 상황(diesser Fall)은 예외적인 방식으로만(nur aisnahmsweise) 도래한다. 그것은 그 결단적 성격을 중단시키지도 않고 지양시키지도 않고 무효화하지도 않는다(hebt nicht auf). 이 예외성이 반대로, 사건의 우발성을 정초짓는다(begründet). 어떤 사건이 사건이며,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외적인 경우뿐이다. 그 자체로서의 사건은 예외적이다.[각주:14]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곧 예외상태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치가 전쟁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규정할 때, 우리는 바야흐로 벤야민이 말한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속에 놓이게 된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슈미트를 염두에 두면서, 전쟁이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이다고 말할 것이다. “가장 극한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에, 이 친구와 적의 구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이 구별이 윤리 사이에 실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 한, 혹은 적어도 실재적으로 가능한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6/31).

 

세 가지 기준(실재성, 가능성, 현전)이 여기서는 같은 우발성의 핵심에서 얽히고설킨다. 사건의, 하나이자 동일한 사건성의 핵심에서. 친구/적의 배치는 어떻게 개시되는가? 어떻게 현전하는가? 이런 실재적 가능성은 현전하는가, 아니면 실현하는가, 가능적인 것으로서, 혹은 실재적인 것으로서. 이 실재성은 어떻게, 어떤 경우에는 현전을, 어떤 경우에는 가능성 자체를 강조하는가. 전쟁에 있어서이다. 극한으로서의, 전쟁상태의 극한적 경계로서의, ‘극한적 우발성’(als extreme Eventualität)으로서의 전쟁에 있어서다. 전쟁이 개시적인 것은 이 자격에 있어서다. 그것은 그 위에서 하나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을 구성한다. 정말로 그러하지만, 그 본질은 우선 비통상적인, 비경험적인, 어떤 목적론적인(téléologique)(극한적 경계로서의 텔로스[목적=귀결]) 의미에서 범례적이고 모범적인, 하나의 사실에서 곧바로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개시되는 실재적 가능성의 현전’(Vorhandenheit), 실재적 혹은 가능적인 이 현전은, 사실이나 사례의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텔로스의 현전이다. 정치적 텔로스의, 이러저러한 정치적 목적의, 이러저러한 정책의 현전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 의 현전이다. ‘가장 극한적인(extremste)’ 정치적 수단으로서, 일체의 정치적 표상을 정초짓는전쟁은, 친구/적의 이 차별의 가능성을 현현한다(offenbart). 그리고 이 표상에 의미가 있는 것은, «sinnvoll»인 것은, 이 차별이 실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real vorhanden) 한에서이며, 혹은 적어도 현실[실재]적으로 가능한(oder wenigstens real möglich) 한에서이다.[각주:15]

 

따라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이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목적)이다.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란 친구/적의 구별, 친구-적의 항쟁이며,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도, 정치적인 유대로서의 어떤 사회적 유대도, 전쟁 없이는, 그 실재적 가능성 없이는 의미가 없다.”[각주:16]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에서는 어떤 정치이든, 어떤 정치적 유대이든,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에 의해 정초지어진 것이다. 다음의 슈미트의 말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전쟁은 결코 정치의 목표, 목적, 내용이 아니며, 전쟁은 인간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사고하는 것을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하며,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특수 정치적 행태를 산출하는,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상 현전하고 있는 저 전제(die als reale Möglichkeit immer vorhandene Voraissentzung)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4-35/27).[각주:17] 여기서 슈미트는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전제라고 말하며, ‘목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예외상태에서 전쟁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전제인 동시에 그 목적이며, 귀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 첫째, 친구/적 관계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것은 절대적 적대로서의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둘째, 적이란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인데, 그것은 정치 시스템으로 통합 불가능한 내부의 적이기도 할 것이며(즉 내전), 다른 국민국가라는 외부의 적이기도 할 것이다(즉 대외전쟁).

셋째, 친구/적 관계, 즉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것이 정치의 전제’(슈미트), 정치의 텔로스’(목적)(데리다)가 되는 경우, 우리는 예외상태혹은 더 정확하게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 속에 있게 된다. 우리는 제2차 아베정권의 해석개헌이 제시한 일련의 안전보장(‘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에 관한 논의를 계기로 하여, 바로 이런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 속에 놓여 있다.

 

2.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법률의 힘

이제 다음으로 해석개헌의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점에 관해 데리다와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관한 분석에 입각해 생각해보자.[각주:18]해석개헌이란 피구성적 권력(헌법에 의해 구성된 권력[pouvoir constitué])인 내각이 구성적 권력=헌법제정권력(헌법을 구성하는 권력[pouvoir constituant])임을 선언하지 않고, 즉 입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각의결정[국무회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구성적 권력이란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내는 권력이며, 기존의 헌법 혹은 법체계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무한정한 권력이다. 반대로 피구성적 권력이란 기존의 헌법에 의해 구성된 권력이며, 이것에 의해 구속되는 한정된 권력이다. 이로부터 예외상태란 바로 헌법을 중지하고 그 곁에 헌법과는 다른 2의 구조물을 구축한다는 상태를 가리키게 된다.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란 피구성적 권력과 구성적 권력이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지시한다. 이런 예외상태에 관해 해석하기 위해 데리다의 =법률의 힘(1994)[각주:19]을 참조하자. 우정의 정치에 관한 강의(1988-1989)와 같은 시기인 198910월에 카도조 로스쿨(뉴욕)에서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되고 역시 우정의 정치와 같은 시기인 1994년에 출판된 =법률의 힘(따라서 우정의 정치=법률의 힘은 내용적으로도 극히 긴밀하게 연결되며,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있다)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1921)를 매우 밀도 높게 독해하고 있다. 벤야민이 이 논문에서 법정립적 폭력[Rechtsetzende Gewalt]”(새로운 법체계를 정립하는 폭력=권력[Gewalt])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구성적 권력에 상당하며, “법유지적/법보존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기존의 법체계에 의해 구속되고 그것을 유지하는 폭력=권력[Gewalt])라 부르는 것은 피구성적 권력에 상당한다.[각주:20] 데리다는 =법률의 힘에서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에 의해 반복되고, 때로는 (예외상태에서는) 그것에 의해 대리된다고 말한다.

 

두 개의 폭력, 즉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을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하면서 벤야민은 어떤 때 다음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한 쪽의 폭력은 다른 쪽의 폭력과 그다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른바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의해 때로 대리되고반드시 반복되는 이 말의 강한 의미에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1]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의해 반복되고 대리된다. 실제로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의 결론 부분에서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있어서 대리된다(repräsentiert)’고 명확하게 말한다.[각주:22] 달리 말하면,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에 의해 반복되고 대리된다. 이 단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벤야민이 제시하듯이, 그 폭력[법정립적 폭력]은 확실히 독해 가능하며, 더욱이 이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폭력은 법권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폴레모스와 엘리스가 디케가 취하는 모든 형식이나 의미작용과 무관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폭력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 법권리를 중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법권리를 중단하고 다른 법권리를 창설한다. 법권리를 중지하는 이 순간, 이 에포케, 법권리를 창설하는 이 순간, 혹은 혁명적 순간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있으면서도] 법권리가 아닌 심급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법권리의 전체 역사이기도 하다. 이 순간은 항상 생겨나고 있지만, 어떤 현전이라는 형태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법권리의 창설이, 공허 속에서, 혹은 심연 위에서 중지되어 있는 순간이며, 누구에게도, 그리고 누구 앞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한 수행적 행위(acte performatif)로 중지되어 있는 순간이다.[각주:23]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 법권리를 중단하고 중지하는 것,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법권리=입헌적 시스템을 정립한 후에도,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법유지적 폭력 혹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비현전적인 방식으로 (“이 순간은 항상 생겨나고 있으나 어떤 현전이라는 형태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반복되고 대리된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벤야민의 명시적인 의도를 넘어서 내가 제출하려는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법권리를 창설하는, 혹은 정립하는 폭력(Rechtsetzende Gewalt[법정립적 폭력])은 그것 자체, 법권리를 유지하는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법유지적 폭력])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법정립적 폭력은 자기의 반복(répétition)을 요구하고 유지해야 할 것, 유지할 수 있는 것, 유산이나 전통이 될 것을 약속받고, 분유되는 것을 약속받는 것을 창설한다는 것, 이것은 법정립적 폭력의 구조에 속해 있는 것이다. 창설이란 약속이다. 모든 정립(Setzung)은 용인하고 앞에 둔다. 모든 정립은 놓고, 약속함으로써 정립한다. 그리고 설령 어떤 약속이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더라도, 반복 가능성(itérabilité), 창설의 가장 침입적인 순간에, 보호의 약속을 기입한다. 이처럼 반복 가능성은 원초적인 것의 중심에 반복의 가능성을 기입하는 것이다. 더 잘 말하면, 혹은 더 나쁘게 말하면, 반복 가능성은 이 반복 가능성의 법칙 속에 기입되며, 그 법칙 아래서, 혹은 그 법칙 앞에,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권리를 순수하게 창설하는, 혹은 정립할 정도의 작용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순수한 법정립적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순수한 법유지적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립 작용이란 이미 반복 가능성이며, 자기를 유지하는 반복을 요구한다. 유지 작용도, 그것이 창설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또한 다시 창설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립 작용과 유지 작용 사이에는 엄밀한 대립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둘 사이의 차연적 오염이라고 내가 부르는 것(그리고 벤야민은 그렇게 명명하지 않는다)만이, 이것이 이끌 수 있는 모든 역설을 수반하여 존재한다.[각주:24]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그것이 어떤 법체계를 정립하는 순간에, 따라서 어떤 입헌적 시스템을 창설하는 순간에, 스스로의 반복 가능성을 법권리의 구조 속에 기입한다. , 어떤 입헌적 시스템이 창설된 후에 그것을 유지하는, 법유지적 폭력 혹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이 비현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고 대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상태에서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과 구별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행사한다. 그것은 법률이 아니지만 법률의 힘을 지닌 행정적 수단(예를 들어 정부명령, 행정명령 등)에 의해, 입헌적 수단을 매개하지 않고 법체계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 사이의, 구성적 권력과 피구성적 권력 사이의 이 양의성, 혹은 양자 사이의 차연적 오염, 데리다는 벤야민을 인용하면서 유령적(gespenstisch) 혼합체라고 부르고, “비열하고 천시해야 할 것이며,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한다.[각주:25] 데리다가 구성적 권력과 피구성적 권력의 양의성을 유령적이라고 부른 것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구성적 권력이 반복되고 대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리성이 결코 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성이란 어떤 신체가 그것 자체에 대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결코 현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그 신체는 사라짐으로써 나타나며, 혹은 그것이 대리하고 있음에도 사라짐으로써 나타난다. , 그 신체는 자신과는 다른 것을 위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이처럼 두 개의 폭력 사이에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창설 작용과 유지 작용이 서로 오염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비열한 것이다.”[각주:26] 따라서 피구성적 권력이 구성적 권력을 반복하고 대리하면서도 구성적 권력임을 분명히 선언하지 않고 있는 사태는, 구성적 권력의 비현전성에 있어서 유령적이며, 그 때문에 극히 비열한 사태이다. 이런 사태가 제2차 아베정권이 행한 해석 개헌헌법 개정을 행하는 구성적 권력임을 선언하지 않고 각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조치에 의해 헌법을 실질적으로 개정해버리는 것 에 고스란히 들어맞는다는 것은 더 이상 덧붙일 필요도 없다.

이런 예외상태에 관해 더 나아가 고찰하기 위해 아감벤의 예외상태를 참조하자. 아감벤은 이 책에서 데리다의 =법률의 힘을 언급하면서, 이 텍스트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 =법률의 힘이라는 제목의 의미에 관해 논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정적인 것은 기술적인 의미에서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는 어구는 근대의 학설에서도 고대의 학설에서도 법률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권력이 몇 가지 경우에, 특히 예외상태에서 포고하는 것을 인정해주는 듯한, 바로, 이른바 법률의 힘을 지닌 정부명령(décrets)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 법의 전문 용어로서의 법률의 힘이라는 개념은, 규범의 구속력(vis obligandi) 혹은 적용 가능성을 그 형식적 본질로부터 분리하고, 형식적으로는 법률이 아닌 정부명령이나 조치나 방책이 그대로 여전히 법률의 을 획득한다는 것을 정의하고 있다.[각주:27]

 

아감벤에 따르면, 법학에서 법률의 힘(force de loi)’이라는 개념은 법률 자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예외상태에서 집행권력이 포고하는 정부명령, 행정명령 등의 행정적 수단을 의미한다. , ‘법률의 힘이란, 집행권력이 법률의 힘을 지닌 법률 이외의 수단(행정적 수단)에 의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데리다가 =법률의 힘에서 말했던, 피구성적 권력이 구성적 권력을 대리한다는 것, 혹은 양자의 유령적 혼합체에 상당한다. 이로부터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외상태에 관해 논의하고 연구해 온 가운데, 우리는 집행 권력에 의한 법적 결정들과 입법권력에 의한 법적 결정들 사이의 이런 혼동의 수많은 예와 마주쳤다. 이런 혼동이야말로 이미 봤듯이, 예외상태의 본질적 성격의 하나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예외상태에 고유한 능력은, 지금까지 너무도 강조되었던 권력들의 혼동에 있다기보다는 법률의 힘을 법률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다. 그 고유한 능력은 한편으로 규범이 효력을 지니나 적용되지 못하고(‘을 지니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법률의 가치를 갖지 않는 행위들이 법률의 을 획득하는, ‘법률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상시의 경우에 법률의 힘은 무규정의 요소로서 부유하는 것이며, 그것은 (위임독재로서 처신하는) 국가 당국에 의해서도, (주권독재로서 처신하는) 혁명조직에 의해서도 요구될 수 있는 것이다. 예외상태란 법률 없는 법률의 힘(따라서 이것은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이 관건이 되고 있는 아노미적 공간이다.[각주:28]

 

, ‘예외상태법률의 힘을 법률로부터 분리하고 법률의 가치를 갖지 않는 행위들(행정적 수단)법률의 힘을 획득하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통치권력이 기존의 법체계를 무화하고, 법률 없는 법률의 힘’(아감벤은 이것을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고 고쳐 말한다)이 통치하는 무질서한 통치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고, “법권리의 중지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외상태는 독재의 모델을 따라 권력의 완전함, 법이 충만한 상태[자주 예외상태를 특징짓는 말로서 사용되는 전권[pleins pouvoirs]’이라는 표현을 참조]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법권리가 공허한 상태, 법권리의 공백과 중지로서 정의된다.”[각주:29] 예를 들어 슈미트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와 같은 1921년에 출판된 독재론에서 예외상태를 위임독재주권독재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려 했다. ‘위임독재란 헌법 혹은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 혹은 법질서를 중지하는 것, 즉 피구성적 권력이 법권리를 중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주권독재란 기존의 헌법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헌법을 구성하는 권력, 즉 구성적 권력을 가리킨다.[각주:30] 이런 개념들은 예외상태에서의 통치의 두 가지 양상을 거의 정확하게 기술한다. 그렇지만 예외상태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가령 독재자로 간주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법률적으로는 합법적으로 임명된 총리였음을 간과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예외상태를 슈미트처럼 독재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합법적 헌법의 중지라는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공법학에서는 제1차 대전 후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위기에서 생겨난 전체주의적 국가들을 독재라고 정의하는 것이 관습으로 정착됐다. 이리하여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프랑코도 스탈린도, 모두 한결같이 독재자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무솔리니든 히틀러든 법기술적으로는 그들을 독재자라고 정의할 수 없다. 무솔리니는 국왕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임명된 총리였으며, 마찬가지로 히틀러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당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 라이히의 재상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든, 독일의 나치즘 체제든, 이것들을 특징짓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이것들이 현행의 헌법(각각 알베르토 헌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존속시킨 채로, 날카롭게도 이중국가라고 정의된 하나의 패러다임에 근거하며, 자주 법적으로는 정식화되지 않았으나 예외상태 덕분에 합법적 헌법과 나란히 존재할 수 있었던 두 번째의 구조물을 합법적인 헌법의 곁에 두었다는 것이다. 법학적 관점에서 이런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는 독재라는 용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게다가 오늘날 지배적이 되고 있는 통치 패러다임의 분석에 있어서도,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앙상한 대립도식은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각주:31]

 

현대적인 통치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에 관해 분석할 때, 예외상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버리면 오히려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예외상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도식으로부터 분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 헌법의 중지, 그리고 이것과는 다른 두 번째 구조물을 합법적 헌법의 옆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예외상태에 의해 합법적 헌법을 중지하고 집행권력이 행정적 수단에 의해 입법권력을 대리하는 것은, 삼권분립에 의한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상태를 파괴하고,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붕괴를 귀결시킬 것이다. 예를 들어 전간기[양차대전 사이의] 독일에서의 바이마르 체제를 생각해보자.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적인 헌법이라고 여겨진 바이마르 헌법은 그 48조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한다고도 형용해야 할 예외상태의 규정을 뒀다. 그 조문은 다음과 같다. “독일 제국 안에서 안전과 공공의 질서가 중대한 정도로 교란되거나 위협받은 경우에는, 라이히 대통령은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안전과 공공의 질서의 재건에 필요한 수단을 취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 라이히 대통령은 헌법 114, 115, 117, 123, 124, 153조에서 정해진 기본적 권리들을 전면적 혹은 부분적으로 중지할 수 있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대 내각은 250회 이상에 걸쳐 예외상태를 선언하고 긴급정부명령을 발포했다. 헌법 48는 수천 명의 공산당 활동가를 투옥하고 그들에게 극형을 내리기 위한 특별 법정을 설립하기 위해 이용된 동시에, 또한 많은 경우에는 독일 마르크의 하락에 대처하고 경제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도 이용됐다. 이런 예외상태의 사용은 정치적-군사적 긴급사태와 경제적 위기를 합치시키려 하는 현대의 경향에도 합치한다고 아감벤은 말한다(예를 들어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일본에서, 경제적-군사적 위기를 정치적 예외상태로 변환하는 통치수법 에너지=경제에서의 위기와 군사적 위기해석 개헌으로 변환하는 통치수법 을 참조하라).[각주:32] 더욱이 1930년대 이후, 독일은 항상적으로, 48조를 발동한 대통령 독재의 상태에 있으며, 최종적으로 1933, 나치 체제가 의회에서 전권 위임법을 통과시키자, 바이마르 헌법은 그것이 존재한 채로 완전히 중지된다.[각주:33] 이처럼 바이마르 헌법 48조의 예외상태의 규정은, 바이마르 헌법이라는 당시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붕괴시키고, 전간기 독일의 민주주의 자체를 붕괴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일본으로 시점(視點)을 옮기고, 자민당의 헌법개정초안에 있는 긴급사태조항이 바이마르 헌법 48조와 완전히 같은 성질의 규정이라는 것에 특별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조항을 아래에서 인용한다.

 

98(긴급사태의 선언) : 내각총리대신은 우리나라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 내란 등에 의한 사회질서의 혼란, 지진 등에 의한 대규모의 자연재해, 기타 법률에서 정하는 긴급사태에 있어서,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각의를 통해 긴급사태를 선언할 수 있다.

99(긴급사태의 선언의 효과) :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내각은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정부명령을 제정할 수 있는 것 외에, 내각총리대신은 재정상 필요한 지출, 기타 처분을 행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필요한 지시를 할 수 있다.

3 :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경우에는, 누구라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선언과 관련된 사태에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조치에 관해서 발포되는 지역, 기타 공공기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제14, 18, 19, 21, 기타 기본적 인권에 관한 규정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런 조항들이 긴급사태’(=예외상태)에 있어서 내각이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정부명령을 제정할 수 있다”(‘법률의 힘혹은 법률의 힘에 의한 통치를 가능케 할 수 있는)고 한 다음,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경우에는, 누구라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선언과 관련된 사태에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조치에 관해서 발포되는 지역, 기타 공공기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점에, 우리는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조문에서는, 그 후에 기본적 인권에 관한 규정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이어지지만, 실제로는 자민당 헌법초안을 보충하는 Q&A에는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이라는 커다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이를 위해 필요한 범위에서 보다 작은 인권이 어쩔 수 없이 제한될 수 있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긴급사태에서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이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이라는 커다란 인권을 지키기 위해제한될 가능성이 높다.[각주:34]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예외상태규정을 헌법에 명문화함으로써 헌법을 무화하는 헌법개정(현행 헌법에 대한 긴급사태 조항의 부가도 포함한)을 절대로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만 법률의 힘에 의한 기존 헌법의 중지라는 통치 수법은 이런 긴급사태조항에 의하지 않더라도, 이미 해석 개헌이라는 수법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외상태는 더는 예외적 조치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통치기술로서 항상 등장하게 됐을 뿐 아니라, 법질서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그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다.”[각주:35] 아감벤이 벤야민을 참조하면서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라고 형언하는 것은 예외상태”(법체계를 중단, 정지시키고 그것과는 다른 구축물을 그 곁에 두는 것)시큐리티(security)’(넓은 의미에서의 안전뿐 아니라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안전보장도 의미하는)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일반적인 통치에서의 통치기술로서 받아들여지고 행사되는 것이다. ‘예외상태의 유령은 전전(戰前)과 같은 형태로는 회귀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번째에는 모습을 바꾸며, 시큐리티 확보라는 미명 아래서의 법체계의 중지 혹은 법률의 힘으로서, 일반적인 통치기술로서 회귀한다. ‘해석 개헌[각주:36]이 출현시키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는 기존 헌법의 곁에 그것과는 다른 구축물을 두고, 행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을 공백으로 만듦으로써[헌법에 공백을 창출함으로써] 입헌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붕괴를 귀결시킬 뿐인, 극히 위험한 통치기술인 것이다.

 

 

  1. Walter Benjamin,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Suhrkamp, 1999, S.697. “비억압자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규칙[常態]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Die Tradition der Unterdrückten belehrt uns darüber, daß der »Ausnahmezustand«, im dem wir leben, die Regel ist].” [옮긴이] 일본어로는 예외상태의 ‘상태화’로 표기되었으나 사전적 의미에는 ‘규칙화’가 가장 충실하지만, 일상적인 의미를 담아내려면 이를 ‘일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법과의 관계라는 측면이 지워져버릴 위험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2. 다음을 참조. 高橋哲哉, 『犠牲のシステム──福島・沖縄』, 集英社新書, 2012년.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ume II (2003-2004), Galilée 2010, p.30. [본문으로]
  4.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Duncker & Humblot, 1922, 8. Auflage, 2004, S.13. [본문으로]
  5. Carl Schmitt, Der Begriff des Politischen, Duncker & Humblot, 1932, 3. Auflage, 1963. 본서에서 인용할 때에는, 데리다의 슈미트 해석을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독일어 원서를 참조하면서도 주로 『우정의 정치』에서 데리다가 한 프랑스어 번역본에서 인용했다. 출전은 본문 속에 독일어 원서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6. Jacques Derrida,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p.104. [본문으로]
  7. 다음에서 인용. Ibid., p.105. [본문으로]
  8. Ibid., p.105. [본문으로]
  9. 다음에서 인용. Ibid., p.108. [옮긴이] 공적과 사적의 희랍어는 각각 ‘polemios’과 ‘echthros’이다. [본문으로]
  10. Ibid., pp.142-143. [본문으로]
  11. 다음에서 인용. Ibid., p.147. [본문으로]
  12. 다음에서 인용. Ibid., pp.138-139. [본문으로]
  13. 다음에서 부분적으로 인용. Ibid., p.152. [본문으로]
  14. Ibid., p.156. [본문으로]
  15. Ibid., p.155. [본문으로]
  16. Ibid., p.156. [본문으로]
  17. Ibid., p.149. [본문으로]
  18.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의 ‘예외상태’ 개념에 관해, 상이한 관점에서 논한 적이 있다. 『新自由主義と権力──ブ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人文書院, 2009년, 第三章 「主権権力の強化と例外状態の常態化」[사토 요시유키, 3장. 「주권권력의 강화와 예외상태의 일상화」, 『신자유주의와 권력』,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2014]를 참조. [본문으로]
  19.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Galilée, 1994. 본서의 제목은 『법의 힘』으로 정착되어 있으나, 본고에서는 «force de loi»라는 법학적 개념을 “법률의 힘”으로 번역할 필요 때문에, 본서의 제목을 『법의 힘=법률의 힘』으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20. 우리는 다음의 데리다의 지적에 의거하면서, Gewalt라는 단어를 폭력=권력으로 번역하고, 법정립적 폭력을 구성적 권력과, 법유지적 폭력을 피구성적 권력과 거의 동등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Gewalt란 ‘폭력’이지만, 또한 ‘정당한 힘(force légitime)’, 즉 권위지어진=인가된 폭력(violence autorisée), 합법적 권력(pouvoir légal)이기도 하다. Staatsgewalt, 즉 국가권력이라는 표현할 때가 이것에 해당된다”(Ibid., p.74). [본문으로]
  21. Ibid., pp.69-70. [본문으로]
  22.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Gesammelte Schriften, Bd. II-1, Suhrkamp, 1999, S.129. “법유지적[법보존적] 폭력은 반드시 그 지속의 과정에서, 제반 적대하는 대항폭력을 억압하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있어서 대리되는(repräsentiert) 법정립적 폭력도, 자신으로부터 간접적인 방식으로 약화시켜 버린다.” [본문으로]
  23.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89. [본문으로]
  24. Ibid., pp.93-94. [본문으로]
  25. 데리다가 들고 있는 것은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좇아 근대 경찰의 예이다. “한계의 부재라는 성격을 근대 경찰에 부여하는 것은, 감시와 단속의 테크놀로지 ― 그것은 이미 1921년에는, 섬뜩한 방식으로 공사(公私)의 생활 전체와 서로 포개지고, 그것에 신들리게 됐다(오늘날 이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관해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뿐이 아니다. 이 성격을 근대 경찰에 부여하는 것은 또한 경찰이란 국가라는 것, 경찰이란 국가의 유령이며, 경찰을 강력하게 비난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것(res publica)의 질서에 선전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찰은 오늘날에는 법률을 힘에 의해 적용하는(enforce) 것만으로는, 따라서 법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법률을 발명하고, 행정 명령(ordonnance)을 공표하고 법적 상황이 명백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 개입하고 시큐리티를 보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법적 상황이 확실하지 않을 때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있는 것이다. 경찰은 법률의 힘(force de loi)이며, 법률의 힘을 지닌다. 경찰이 비열한 것은, 그 권위에 있어서,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 사이의 분리가 중지되기(혹은 지양되기[aufgehoben])’ 때문이다. 이 지양(Aufhebung)이라는, 경찰 자체가 의미하는 것에 있어서, 경찰은 법을 발명하고 스스로를 «rechtsetzende»인 것, 즉 입법하는 것으로 만든다. 경찰은 법권리에 미확정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법권리를 부당하게 찬탈한다. 설령 경찰이 법률을 발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현대에서의 입법자의 하나로서 ― 현대의 [유일한] 입법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 행동한다. 경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즉 어디서나, 그리고 바로 여기서도, 이제 두 개의 폭력, 즉 법유지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을 구별지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양의성이 비열하고 천시해야 할 것이며, 언어도단인 것이다”(Ibid., pp.102-103). 다음도 참조.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in Gesammelte Schriften, Bd, II-1, S.189. [본문으로]
  26.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102. [본문으로]
  27.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Seuil, 2003, pp.66-67. [본문으로]
  28. Ibid., pp.67-68. [옮긴이] 원래 ‘법률’에 X표를 해야 하나, 프로그램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기했다. [본문으로]
  29. Ibid., p.82. [본문으로]
  30. Carl Schmitt, Die Diktatur, Duncker & Humblot, 1921, 7, Auflage, 2006, S.133-134. [본문으로]
  31.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82. [본문으로]
  32. 이런 경제적-군사적 ‘위기’의 정치적 ‘예외상태’로의 변환을 배경으로 하여 제2차 아베정권은 경제계로부터의 요망에 부응해, 무기수출의 원칙적 금지를 정했던 “무기 수출의 3원칙”을 폐지하여 “방위 장비 이전 3원칙”(‘방위 장비’라는 익숙하게 들은 말은 ‘무기’를 바꿔 말한 것)을 각의에서 결정하고, 무기수출을 해금했다. 그것은 군사적 ‘위기’를, 군수산업의 수출 확대(그것은 원전의 수출 확대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같은 재벌계 기업이 그 주체이기 때문이다)에 의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극복으로 변환하는 시도이다. ‘해석 개헌’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시도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수산업이 동원되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집단적 자위권 집단적 안전보장이 해금된다는 군사-자본주의적 논리에는 특단의 유의가 필요하다. 또한 이 점에 관해서 히로세 준 씨의 트위터에서의 발언(http://twitter.com/flux_de_merde/status/496847829445259264)에서 시사를 얻었다.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p.30-32. [본문으로]
  34. 현행 헌법과 자민당 헌법초안을 비교하고, 후자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해설한 아래의 사이트의 서술은, 극히 유익하다. 「자민당 헌법초안의 조문 해설」 http://satlaws.web.fc2.com/92html. 또한 「일본국 헌법개정초안 Q&A」는 다음에서 관람 가능. http://www.jimin.jp/policy/pamphlet/pdf/kenpou_qa.pdf.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18. [본문으로]
  36. 마지막으로 ‘해석 개헌’의 헌법 해석(데리다적 의미에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에 관해 데리다의 사상에 의거하면서 부연하고 싶다. 진부해진 탈구축 개념의 설명으로서, 텍스트 해석은 원본의 문맥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따라서 반드시 역사적 문맥에 의해 규정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변종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전혀 데리다적이지 않으며, 그런 극단적인 ‘텍스트주의’가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도 부담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설명은 데리다의 사상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선, 사실적인 헌법해석으로서, 1972년의 정부 견해(「집단적 자위권과 헌법 사이의 관계에 관한 정부 자료」)에 기반을 두고 “안전보장환경의 변화”를 따라 집단적 자위권과 집단적 안전보장의 행사를 인정한다는 제2차 아베정권이 행한 해석은, 1972년의 정부견해가 집단적 자위권의 보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행사는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고 있는 이상, 완전히 파탄 났다. 더욱이 철학적인 문맥에서는, 데리다 자신이 『법=법률의 힘』에서 “탈구축은 정의이다”라고 단언함으로써, 탈구축이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모종의 ‘정의’, 즉 급진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다가서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평화주의, 즉 전쟁의 기피는 바로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이 점에 관해, 히로세 준과의 개인적인 대화로부터 시사를 얻었음을 밝히고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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