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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나는 대로 아감벤의 Remnants of Auschwitz : The Witness and the Archive, trans., Haniel Heller-Roazen, Zone Books를 옮긴다. 일단 영역본으로 옮긴 후에, 불역본과 대조하여 차이가 있는 경우에만 한하여 불역본으로 수정을 할 것이다. 인용의 편의를 위해 영역본의 쪽수를 병기한다. (2009. 07. 18 작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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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쪽.
2-24. 미셸 푸코는 우리 시대에서 죽음의 영락(零落, degradation)에 관해 정치적 용어를 사용해 하나의 설명을 제시한다. 이 설명은 죽음의 영락을 근대 시대에서의 권력의 변형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영토적 주권이라는 전통적 형태에서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생살여탈의 권리(the right over life and death)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무엇보다도 죽음 쪽에서 행사된다는 의미에서, 즉 죽일 권리의 보류로서 삶과 간접적으로만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정의상 비대칭적이다. 이 때문에 푸코는 죽게 만들면서 살게 내버려둔다to make die and to let live는 정식에 의해 주권을 특징짓는다. 17세기와 경찰학[치안통치의 학]의 탄생과 더불어, 신민들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배려[돌봄]가 국가들의 메커니즘과 계산에서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자, 주권적 권력은 푸코가 '생권력'bio-pouvoir이라고 부른 것으로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죽게 만들면서 살게 내버려둔다to kill and to let live는 고대의 권리는, 근대의 생정치biopolitique를 정의하는 것이자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둔다to make and to let live는 정식에 의해 [83쪽] 표현될 수 있는 정반대의 모델을 낳는다[정반대의 모델에 그 자리를 물려준다]. "주권의 법권리droit에 있어서 죽음은 주권자[군주]의 절대권력이 가장 빛을 발하던 지점이었던 반면에, 이제는 그와 반대로 죽음은 개인이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고, 이른바 자신이 가장 사적인 부분에 갇히는 순간이 됩니다."(Foucaut 1997: 221/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 난장, 근간 ; 박정자 옮김, 동문선, "과거에 죽음이 군주의 절대권을 떠들썩하게 과시하는 계기였다면, 이제 죽음은 한 개인이 모든 권력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떨어져 가장 사적인 존재로 웅크리고 있는 순간이 되었다."] 이리하여 죽음은 점차 격하disqualification되어 간다. 죽음은 개인과 가족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적인 제식rite의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죽음은 이제 감추어진 어떤 것, 일종의 사적인 부끄러움으로 변형된다.
두 개의 권력 모델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바로 [스페인의 총독] 프랑코의 죽음이다. 여기에서 우리 시대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고대의 생살여탈의 주권적 권리를 체현했던 자[프랑코]는 새로운 의료적, 생정치적 권력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생정치적 권력은 "인간을 살게 만드는데" 잘 성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들을 살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푸코에게 이 두 권력들은, 독재자의 신체에서는 일시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이질적인 채로 남아 있다. 이 둘의 구별[차이]은 근대의 여명기에서, 하나의 체제에서 다른 체제로의 이행을 정의하는 일련의 개념적 대립들(개별 신체/인구[주민], 규율/조절메커니즘, 인간-신체man-body/인간-종들)을 산출한다. 당연히 푸코는 이 두 권력들과 테크닉들이 어떤 경우들에서는 서로의 내부로 통합될 수 있음을 완벽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개념적으로는 여전히 구별된 채로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러한 이질성은 우리 시대의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들, 특히 나치 국가에 대한 분석과 대결하는 것이 문제로 되자마자, 문제적problematic이게 된다. 히틀러의 독일에서는, 살게 만드는 생권력의 전례 없는 절대화가 죽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일반화[전면화]와 교차하며, 따라서 생정치는 죽음정치와 즉각[직접적으로, 무매개적으로] 일치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일치는 진정한 역설을 재현하는데, [84쪽] 이 역설은 모든 역설들이 그러하듯이, 설명을 요구한다. 본질적으로는 살게 만드는 것을 그 목표로 하는 권력이 어떻게 무조건적 죽음의 권력을 실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푸코가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이 물음에 대해 제시한 답변은, 인종주의란 바로 생권력이 인간-종(human species)이라는 생물학적 연속체에 단절(caesura)을 표시하게끔 해주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살게 만드는' 체제 속에 전쟁의 원리를 재도입한다는 것이다. "인간-종이라는 생물학적 연속체에서 인종의 등장과 구별, 위계질서의 설정, 즉 어떤 인종은 우등하다고 간주되고 어떤 인종은 반대로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것은, 권력이 그것에 대한 배려에 착수했던 생물학적 영역을 단편화하는 방식입니다. 이것들은 인구의 내부에서 상이한 집단들을 서로 갈라놓는[구별하는] 방식입니다. 요컨대 바로 생물학적 영역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어떤 영역 내부에서 생물학적인 유형의 단절을 수행하는 것입니다."(p. 227; 박정자 옮김 : "인간이라는 종류의 생물학적 연속체 안에 여러 인종들이 나타나고, 인종들을 구별하며, 등급을 매기고, 좋은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이 모든 것은 권력이 떠맡은 생물학적 영역을 조각내는 방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인구 안의 여러 집단들을 서로 어긋나게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물학적 영역 내붕 역시 생물학적인 휴지(休止)를 도입하는 것이다.")
푸코의 분석을 더 발전시켜 보자. 생정치의 영역을 분할하는 근본적 단절은 인민popolo과 인구popolazione 사이의 단절이다. 이 단절은 인민의 한 가운데에서 인구[주민]을 밝게 드러내는 것[출현시키는 것]에, 즉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신체를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신체로 변형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런 생물학적 신체의 충산과 사망, 건강과 질병이 규제되어야만 한다. 생권력의 탄생과 더불어 모든 인민은 인구[주민]에 의해 이중화된다[인구라는 분신을 낳는다]. 즉, 모든 민주주의적인democratic 인민은 동시에 인구통계학적인demographic 인민인 것이다. 나치의 제국에서, [독일 민족의 유전적 건강의 보호]에 관한 1933년의 법률은 바로 이러한 단절을 완벽하게 표시한다. 곧바로 뒤따라나온 단절은 모든 시민이라는 집합 속에서, "아리아 혈통"의 시민들을 "비-아리아 혈통"의 시민과 구별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어진 단절은 "비-아리아 혈통"의 시민들의 집합 속에서 순혈의 유대인(Volljuden)을 혼혈(Mischlinge : 조부모 중에서 한 명만 유대인인 자, 또는 조부모 모두 유대인이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 아니고 1935년 9월 15일 현재 유대인 배우자가 없는 자)로부터 분리하면서 "비-아리아 혈통"의 시민 집합을 관통한다. 생정치적 단절은 본질적으로 이동적mobile이며, 생물학적 연속체 속에서  [85쪽] 개별 사례마다 더 나아간 지대를 분리한다. 이러한 지대는 점증하는 품위[존엄성]박탈(Entwürdignung)과 영락의 과정에 대응한다. 이렇게 하여 비-아리아인은 유대인으로 이행하며, 유대인은 강제이주자(umgesiedelt, ausgesiedelt)로 이행하며, 강제이주자는 수감자(Häftling)로 이행하며, 생정치적 단절은 마침내 수용소에서 그 최후의 한계에 이른다. 이 한계가 무젤만이다. 수감자가 무젤만으로 되는 지점에, 인종주의적 생정치는 이른바 인종을 초월하며, 더 이상 단절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어떤 문턱으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인민과 인구 사이의 동요하는 연결은 마침내 깨지며, 우리는 어떤 특수한 담지자나 주체에 할당될 수 없는, 혹은 또 다른 단절에 의해 분할될 수 없는 절대적인 생정치적 실체와 같은 어떤 것이 출현함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나치의 생정치 체제에서 수용소의 결정적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수용소는 죽음과 절멸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무젤만을 생산하는 자리, 즉 생물학적 연속체 속에 분리될 수 있는 궁극의 생정치적 실체를 생산하는 자리이다. 무젤만을 넘어서면 오로지 가스실만이 있다[무젤만의 맞은 편에 있는 것은 오직 가스실뿐이다].
1937년 비밀회의 동안에, 히틀러는 극단적인 생정치적 개념을 처음으로 정식화한다. 이것은 잘 고찰할 값어치가 있다. 히틀러는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 대해 언급하면서 volkloser Raum, 민족 없는 공간(a spcae empty of people)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특이한/기묘한singular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황무지와 같은 것, 거주자가 없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가 언급했던 지역은 여러 인민들peoples이나 국민들nationalities로 가득 차populate 있다.) 히틀러의 "민족 없는 공간peopleless space"은 오히려 근본적인 생정치적 강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강렬도는 모든 공간 속에 존속될 수 있으며, 이 강렬도를 통해 인민들은 주민들로 이행하고 주민들은 무젤만들로 이행한다. 달리 말하면 volkloser Raum은 수용소의 내연동력driving force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어떤 결정적인/명확한determinate [86쪽] 지리적 공간으로 일단 파악되면, 그 지리적 공간을 절대적인 생정치적 공간으로, 즉 인간의 삶이 모든 배정가능한 생정치적 정체성[동일성]을 초월하게 되는 삶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Lebensraum und Todesraum으로 변형시켜 버리는 생정치적 기계로 이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죽음은 단순한 부수현상일 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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