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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춤(문화인류학 3) 상세보기


다른 문화에 대한 수년간의 경험은 복합적 사회가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북유럽에서처럼 일을 각각 분리된 항목으로 나누어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도록 스케줄을 짜는 방식과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지중해식 모델에 따른 방식이다. 이 두 체계는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완전히 구별되며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다. 또한 모두 약점과 강점을 각각 지니고 있다. 나는 한 번에 많은 일을 하는 것을 폴리크로닉 타임(다원적 시간, Polychronic Time)으로,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는 북유럽의 체계를 모노크로닉 타임(단일 시간, Monochronic Time)으로 명명했다.
폴리크로닉 타임은 미리 정해진 스케줄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상호관계와 상호교류, 완성된 업무처리를 중시한다. 약속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깨지는 경우가 많다. 폴리크로닉 타임은 모노크로닉 타임에 비해 실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폴리크로닉한 민족에게는 시간이 ‘소비(낭비)’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시간은 직선적인 끈이나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점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점은 흔히 신성한 점이 된다. …<중략>…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라틴 아메리카나 중동에 가면 종종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지중해나 아랍 나라들의 시장, 상점, 수크(아라비아의 시장)에서 폴리크로닉한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한꺼번에 모든 손님을 상대하고자 하는 단 한 명의 점원의 주의를 끌고자 앞다투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거기에는 다음 차례가 누군지 하는 질서도, 마지막 차례는 누가 될지 하는 줄이나 순번도 찾아볼 수 없다. 북유럽인이나 미국인에게 그 장면은 혼란과 소동으로 비친다.
다른 맥락에서 지중해 국가들의 정부관료체제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부 고관 집무실의 전형적인 배치는 사적(私的)인 방의 바깥쪽에 넓은 리셉션 공간(손님 맞이용 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서는 몇 그룹의 사람들이 기다리면서 장관이나 그 보좌관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관리들은 이 반쯤은 공적인 장소에서 이 그룹에서 저 그룹으로 옮겨다니며 차례로 상담하면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한다. 반쯤은 사적인 이런 일처리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며 사람들은 상담을 원하는 장관이나 그 밖의 중요한 인물들을 직접 만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일단 이러한 패턴에 익숙해진 사람은 밀실(내실)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적인 회담이 갖는 결점을 보완하는 이점이 많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중략>…
그와는 대조적으로 서구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노크로닉 타임의 철통 같은 수중에서 거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생활한다. 시간은 실존 그 자체와 함께 너무나 철저하게 짜여 있어서 우리는 시간이 숱한 미묘한 방식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틀짓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일을 어느 정도로 결정하고 조정하는지 거의 의식조차도 못한다. 사실 사회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성생활조차 대개 스케줄에 의해 지배된다. 스케줄을 짜는 것에 의해 우리는 단편화된다. 이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지만 또한 맥락의 파악능력을 감소시키기도 한다.[사태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스케줄을 짠다는 성질 그 자체가 지각될 수 있는 것과 업는 것, 계획에 집어넣을 것과 빼버릴 것을 선택하는 일이고 일정 기간 내에 한정된 수의 일만을 허용하는 것이다. 스케줄에 넣는 것 자체가 사람과 일의 기능 모두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체계를 구성한다. 중요한 일은 우선적으로 취해져서 가장 많은 시간이 할당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끝까지 남겨지거나 시간이 모자라면 생략된다.[중요하지 않은 것은 마지막으로 돌려지고, 시간이 없을 때에는 무시된다.]
모노크로닉 타임은 또한 실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 대하여 절약한다, 쓴다, 허비[낭비]한다, 잃다, 애써 낸다, 기어간다, 깬다, 죽인다, 얼마 남지 않았다 등으로 말한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신중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모노크로닉 타임에 의한 스케줄은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류체계로서 이용된다. 그 규칙들은 탄생과 죽음을 제외한 모든 일에 적용된다. 스케줄 또는 모노크로닉 타임 체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산업문명이 오늘날처럼 발달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는 점도 말해두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결과들도 있다. 모노크로닉 타임은 한두 사람을 집단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다른 한 사람, 많아 봐야 두세 사람과의 관계를 강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모노크로닉 타임은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문이 달린 방과 같다. 유일한 문제는 스케줄에 따라 할당된 15분, 한 시간, 하루, 일주일 등등이 지나면 그 ‘방’을 비우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 사람의 시간을 침범하여 비켜주지 않는 것은 극도의 자기중심주의나 나르시시즘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무례한 것이기도 하다.
모노크로닉 타임은 독단적이고 강제적이며, 말하자면 습득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철저하게 습득되어 우리 문화 속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을 구성하는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유일한 방식인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리듬이나 창조적인 욕구에 내재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사회조직을 생각할 때 이론적으로 폴리크로닉 타임은 훨씬 강한 통제의 집중화가 요구되지만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얕고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지도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항상 파악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랍의 농부는 자기 수장(首長)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사람과 수장, 사람과 신 사이에 어떠한 매개자도 없다. 정보의 흐름과 끊임없이 정보를 얻고 싶다는 사람들의 요구는 상호보완적이다. 폴리크로닉한 민족은 서로의 일에 깊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접촉을 유지하는 데 강박관념을 가진다.[항상 접촉을 유지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낀다.] 따라서 맥락 없는 단편적인 이야기라도 모아서 기억한다. 상대방에 관한 지식은 정말 놀라울 정도이다. 사람들간의 개입이야말로 그들 존재의 핵심이 된다.
이 점은 관료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관료 기구의 대표 임명이나 여러 관료적 수준의 교섭에는 많은 양의 서류가 필요 없다. 폴리크로닉한 유형의 관료기구가 지닌 주요한 결점은 기능이 증가함에 따라 소규모의 관료기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외부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 아니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나 지중해 나라들을 여행하거나 거기에 상주하는 외부인들은 관료체제가 일반적으로 번거롭고 마이동풍[답답할 정도로 굼뜨다]임을 겪었을 것이다. 폴리크로닉한 나라들에서 일을 진행시키려면 내부인이든지 아니면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든 관료체제가 그렇지만 특히 폴리크로닉한 유형의 관료체제는 내향적, 다시 말해서 배타적인 경향이 특히 강하다.
또한 행정이나 관리의 시행에 관해서도 이 두 시간체계에서는 흥미로운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중동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폴리크로닉한 민족들의 행정과 관리는 일종의 업무분석이다. 즉 행정이란 각 부하의 업무를 파악하고 그것을 실행시키는 작업활동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나서 그 업무에 명칭을 부여하고 행정 책임자가 각 기능의 시행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자세히 만든 차트를 수시로 점검한다. 그런 방식으로 각 개인에 대한 완전한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 활동이 실제로 어떻게 그리고 언제 시행되는지에 관한 스케줄은 담당자에게 맡겨진다. 상관이 부하의 일에 관한 스케줄에 간여하는 것은 부하의 개성에 대한 전제적(專制的)인 침해, 즉 자아의 침해로 간주될 수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모노크로닉 타임의 사람들은 작업활동을 스케줄로 정하고 업무의 각 부분에 대한 분석은 개인에게 맡겨진다. 폴리크로닉 유형의 분석은, 설사 기술적 성격의 일이더라도 부하에게 자신이 맡은 업무가 하나의 시스템일 뿐만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부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에 대해 모노크로닉 유형의 사람들은 단편화된 사고 때문에 자신의 작업활동을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조직’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다만 업무 그 자체나 조직의 목표를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일이 드물다는 뜻이다.
                                                                                                               ― 에드워드 T. 홀, <생명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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