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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several voyages of comparison made (between 1948 and l958) to the United States and the U.S.S.R. gave me the impression that if the Americans give the appearance of rich Sino-Soviets, it is because the Russians and the Chinese are only Americans who are still poor but are rapidly proceeding to get richer. I was led to conclude from this that the “American way of life” was the type of life specific to the post-historical period, the actual presence of the United States in the World prefiguring the “eternal present” future of all of humanity. Thus, Man's return to animality appeared no longer as a possibility that was yet to come, but as a certainty that was already present.

그런데 나는 (1948년에서 1958년 사이에) 미국과 소련을 여러 번 여행하고 비교해 본 결과, 미국인에게서 부유한 중국-소련의 모습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소련인이나 중국인이 아직은 가난하지만 급속도로 풍요로움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나는 이런 결론을 끌어냈다. 즉, ‘미국식 생활양식’은 포스트역사 시대의 고유한 생활양식이라는 것, 미국이 현실로서 세계에 현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류전체의 ‘영원히 현존하는’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는 결론. 따라서 인간이 동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전하는 확실성으로서 나타났다.

It was following a recent voyage to Japan (1959) that I had a radical change of opinion on this point. There I was able to observe a Society that is one of a kind, because it alone has for almost three centuries experienced life at the “end of History” ― that is, in the absence of all civil or external war (following the liquidation of feudalism by the roturier Hideyoshi and the artificial isolation of the country conceived and realized by his noble successor Yiyeasu). Now, the existence of the Japanese nobles, who ceased to risk their lives (even in duel) and yet did not for that begin to work, was anything but animal.

내가 이에 대한 견해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최근(1959년) 일본을 여행한 후이다. 나는 거기서 유일무이한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왜 유일무이한가 하면, 일본이 (농민/평민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봉건제’가 청산되고, 그의 후계자이자 원래 무사/귀족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쇄국이 구상되어 실현된 후) 거의 3세기 동안 ‘역사의 종말’에서 삶을 경험했던 ― 즉 어떤 내전도 대외전쟁도 없는 생활을 경험한 유일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무사/귀족은 자신의 목숨을 (심지어 결투에서조차) 위험에 빠뜨리길 멈췄지만 그렇다고 노동을 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들의 실존은 완전히 동물적이었다.

“Post-historical” Japanese civilization undertook way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American way.” No doubt, there were no longer in Japan any Religion, Morals, or Politics in the "European" or "historical" sense of these words. But snobbery in its pure form created disciplines negating the “natural” or “animal” given which in effectiveness far surpassed those that arose, in Japan or elsewhere, from “historical” Action ― that is, from warlike and revolutionary Fights or from forced Work. To be sure, the peaks (equalled nowhere else) of specifically Japanese snobbery ― the Noh Theater, the ceremony of tea, and the art of bouquets of flowers ― were and still remain the exclusive prerogative of the nobles and the rich. But in spite of persistent economic and political inequalities, all Japanese without exception are currently in a position to live according to totally formalized values ― that is, values completely empty of all “human” content in the “historical” sense. Thus, in the extreme, every Japanese is in principle capable of committing, from pure snobbery, a perfectly “gratuitous” suicide (the classical épée of the samurai can be replaced by an airplane or a torpedo),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the risk of life in a Fight waged for the sake of “historical” values that have social or political content. This seems to allow one to believe that the recently begun interaction between Japan and the Western World will finally lead not to a rebarbarization of the Japanese but to a “Japanization” of the Westerners (including the Russians).

‘포스트역사의’ 일본문명은 ‘미국식 생활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일본에는 더 이상 ‘유럽적’ 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수 형태에서의 속물들(스노비즘)은 ‘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 소여(주어진 바)를 부정하는 규율을 창출했다. 이것은 효과라는 면에 있어서 일본이나 다른 곳에서 ‘역사적’ 행동을 통해 생겨났던 것, 즉 전쟁과 혁명적 투쟁 또는 강제노동에서 생겨났던 것을 훨씬 능가했다. 확실히 노가쿠(能樂)나 다도(茶道)나 꽃꽂이(華道) 등과 같은 일본 특유의 스노비즘의 정점(이에 필적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은 귀족과 부유층의 배타적 전유물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지속적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본인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모두 상실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극단적(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일본인은 순수한 스노비즘에 의해 원리적으로는 완전히 ‘아무 대가도 없는’ 자살을 행할 수 있다(사무라이의 고전적 칼épéee은 비행기나 어뢰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자살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을 가진 ‘역사적’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무릅쓰게 되는 생명의 위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일본과 서구 세계 사이에서 최근 시작된 상호교류는 결국 일본인의 재야만인화(일본인을 야만인으로 다시 간주하는 것)가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포함하여) 서구인들의 ‘일본인화’로 귀착될 것으로 보인다.

Now, since no animal can be a snob, every “Japanized” post-historical period would be specifically human. Hence there would be no “definitive annihilation of Man properly so-called,” as long as there were animals of the species Homo sapiens that could serve as the “natural” support for what is human in men. But, as I said in the above Note, an “animal that is in harmony with Nature or given Being” is a living being that is in no way human, To remain human, Man must remain a “Subject opposed to the Object” even if “Action negating the given and Error” disappears. This means that, while henceforth speaking in an adequate fashion of everything that is given to him, post-historical Man must continue to detach “form” from “content,” doing so no longer in order actively to transform the latter, but so that he may oppose himself as a pure “form” to himself and to others taken as “content” of any sort.

오늘날 그 어떤 동물도 스놉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본인화된’ 포스트-역사적 시대는 분명히 인간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것의 ‘자연스런’ 뒷받침 역할을 했던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라는 동물들이 있는 한, “고유하게 그렇게 불리는 인간의 경정적인 무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위의 주석에서 말했듯이, “자연이나 주어진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물”은 살아 있는 존재이되 결코 인간적이지는 않다. 인간적인 채로 머물러 있으려면, 인간은 설령 “소여(주어진 것)를 부정하는 행동과 오류”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대상과 대립된 주체”로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다음을 뜻한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적합한 방식으로 말을 동안에도 포스트-역사적 인간은 ‘내용’으로부터 ‘형식’을 계속해서 떼어내야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내용’을 적극적으로 변형하는 게 아니라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대립시킬 것이며, 모든 종류의 ‘내용’으로서 받아들여진 타인에게 대립시켜야만 한다.

(영어판, 160~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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