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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1세기의 사유들 / 대학신문  snupress@snu.ac.kr (20070901-20071013)

편집자 주: 사상과 현실이 유리되고 있는 시대에 그 관계를 다시 활발히 밀착시키고자 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대학신문은 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시대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지 연재기획을 통해 알아본다.

 

  

① 슬라보예 지젝 (2007-09-01)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 / 이현우 강사 (인문대ㆍ노어노문학과)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ㆍ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목표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다. 그 자신의 겸손한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재고의 대상이 된 건 이데올로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지식계에 ‘정식’ 데뷔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상징적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주장하며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그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더이상 “그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식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는 역설로 규정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가령, 우리는 지폐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지만’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급진적’ 지식인들은 이민자의 온전한 권리와 국경 개방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계속 보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무지’의 폭로는 더이상 아무런 파괴력도 갖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행위와 일상에 구조화돼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믿는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전자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 후자의 종언을 보여준 ‘실재적’ 사건은 바로 2001년의 9ㆍ11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로 회귀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사실 이념이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몰락 이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관용적이며 쾌락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자유롭다고 ‘느낄’ 따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절제의 쾌락주의다.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혁명(유혈) 없는 혁명에 대한 기대와 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부재는 아예 금지를 일반화한다. 가령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관용적인 아버지의 경우를 대비해보자. 권위적인 아버지는 “너는 그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반면에 관용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해라, 하지만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는, 하지만 “너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해라!”라는 보다 더 강한 요구를 숨기고 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이며 자유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패러독스이며, 우리는 유토피아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에서는,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activity)이 아닌 행위(act)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난 인간이 아닙니다. 난 괴물입니다.”라고도 지젝은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② 주디스 버틀러 (2007-09-08)

섹스ㆍ젠더ㆍ섹슈얼리티, 제도담론의 권력 효과일 뿐  / 조현준 연구원 (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수사학과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레즈비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페미니스트이자 소위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버틀러의 철학사적 공헌은 페미니즘 담론의 고정관념으로 여겨졌던 ‘억압자 남성’, ‘피억압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양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버틀러의 퀴어 이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퀴어 이론’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
 

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며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십만 권 이상 팔렸고(*) 인터넷 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fanzine)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격분하기 쉬운 말』, 『권력의 심리 양태』, 『젠더 허물기』, 『자신을 말하기』 등의 저작을 통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뿐 아니라 정치 철학과 윤리학까지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사람들을 『젠더 트러블』에 열광하게 만든 것일까? 이는 크게 두 가지 논의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 제기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정치 주체가 없는 정치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예컨대,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이따금씩 화장과 여장을 즐기는 씨름신동 동구(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나 언제나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성전환 수술비를 저금하는 여장남자 두눈박이(영화 「다세포소녀」)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혹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성전환 수술 후 소송을 통해 2002년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받은 하리수는 어떤가? 페미니즘이라는 성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 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두 번째는 욕망과 법 간에 발생하는 인과론의 전도다. 즉 근원적 욕망은 애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억압해야 할 어떤 대상을 가정하고 있던 규율권력과 지배담론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욕망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이 욕망을 만들었다는 ‘인과론의 전도’는 당연하다고 생각돼 온 기존 담론이 어떤 권력의 역학 관계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됐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계보학’의 관점을 부각시켰다. 결국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본질적인 내적 특성을 갖는 것이 아닌, 다양하고 산포된 관점을 가진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가 된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젠더는 모방을 통해 원본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패러디’, 행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발현하는 ‘수행성’, 재의미화의 가능성을 안고 반복되는 규범에의 ‘복종’, 자신 안에 타자를 품고 있는 ‘우울증’의 양식으로 발현된다. 이제 진정한 남성이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기존 규범 속에서 원본의 권위를 허물면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 언제나 재의미화된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해서 자신의 일부로 합체한 우울증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요점은, 근본적으로 결정된 ‘본질적인’ 여성은 없다는 것이다. 젠더의 표현물이라는 가면 뒤에 본질적인 젠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정체성은 외관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집합이나 범주 없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이고 자신 안에 타자의 가능성을 노정하는 ‘퀴어 이론’의 출발점이다. 타인과 나의 구분과 경계에서 모든 차이가 나오고, 그 차이가 차별을 낳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정치주체를 심문하는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이 현실의 문화정치학과 접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성애와 동성애가 분명한 자기 정의를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언제나 규범 안의 패러디로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상 나와 타인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것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남성성이 여성성을, 이성애가 동성애를 억압하거나 천시할 근거가 없다. 그것이 인류의 절반인 여성뿐 아니라 인구의 십 퍼센트에도 못 미친다고 평가절하되는 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이다.

(*) 독자주: 이 책의 불어판은 2005년에 처음 번역되었고, 2001년 이전에는 그녀의 어떠한 책도 불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③ 조르지오 아감벤 (2007-09-15)
우리는 호모 사케르, 그러나 저항의 가능성은 도처에 있다
  / 양창렬씨(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정치철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주저 『호모 사케르』(1995)는 칼 슈미트, 벤야민, 아렌트, 푸코 등을 거쳐 주권권력과 삶/생명의 관계, 법과 폭력의 문제, 인권 개념 비판 등을 다루고 있으며, 9ㆍ11 이후 시행된 각종 예외조치들의 정치 패러다임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된다.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은 주권권력을 언제나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며 예외적으로 작동하는, 다시 말해 그 벌거벗은 생명을 배제하면서 포함하는 생명정치적 주권권력이라고 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신성한 인간=벌거벗은 생명)란 무엇인가? 로마법에서 정의된 신성한 인간이란, 희생양(제물)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미 신의 소유이므로 희생양(제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고, 인간 공동체의 법/권리의 보호 바깥에 위치하기에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영역에서도 배제된다. 혹은 이렇게 배제되는 조건 하에서만 공동체 안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9ㆍ11 이후 애국자법이 시행되면서 미국정부는 테러리스트 활동을 했다고 추정되는 비-시민들을 무한정하게 구금하고, 그들을 군사재판을 포함한 특별한 법절차에 종속시켰다. 더구나 이렇게 구금된 이들이 추방되거나 기소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지위 자체를 상실한 채 수용소에 유폐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땅히 ‘신성한 인간’의 예라 하겠다. 

아감벤의 주장이 급진적인 까닭은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 예외가 오늘날 정상적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는 데 있다. 이제 모든 시민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되고, 수용소는 전 시민을 대상으로, 전 영토로 확장된다. 수용소를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정치 공간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면서, 도처가 정상적으로 되어버린 예외 상태이고, 도처에 신성한 인간들이 있다면 어떻게 저항을 사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모두 수용소 안에 살고 있는가? 주권권력은 항상 ‘희생’을 통해 신성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아감벤은 이 희생을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 ‘장치’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주권권력은 항상 ‘장치’를 통해 주체를 생산함으로써만 작동한다. 장치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유도, 결정, 차단, 생산, 통제,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가리킨다. 비단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뿐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언어도 장치다. 이 장치들을 통해 한 개체 내에서도 핸드폰 사용자, 인터넷 사용자, 시나리오 작가, 탱고 애호가 등의 무수한 주체화 과정이 공존한다. 질문은 반복된다. 과연 위 장치들로부터 벗어날 수나 있단 말인가? 

푸코가 도처에 권력이 있다고 말할 때 반드시 도처에 저항이 있음을 덧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감벤이 보기에 도처에 각종 장치들을 통해 주체가 자신의 잠재성을 포획당하는 주체화 과정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도처에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시민과 테러리스트를 구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권권력은 사실상 어느 곳에서 돌출할지 모르는 이 테러리스트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아감벤은 저항 혹은 대항-장치를 ‘세속화(profanare)’라고 부른다. 그것은 희생(sacrare)에 의해 신적인 영역으로 빠져나갔던 제물에 손을 대어 더럽힘으로써 인간들이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복원하는 것이다. 희생된 사물이 달리 사용될 수 있는 잠재성을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속화는 희생이라는 장치를 비활성화시키고 헛돌게 만듦으로써 이 박탈당한 잠재성을 복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치가 없으면 생명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각종 장치들을 버리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거나 장치를 좋은 목적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장치를 단순히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주체화하되, 더 이상 장치에 배정되어 있는 목적-수단 관계를 따르지 않고 목적 없는 수단이라는 새로운 사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 열쇠다. 목적 없는 수단으로 아감벤이 드는 예는 법전을 더 이상 준수할 대상이 아니라 가지고 놀고 실험하는 것, 보는 자의 어떤 정서적 변용도 이끌어내지 않는, 관객에게 완전히 무감한 표정을 짓는 포르노 스타 등이다. 그도 인정하듯 이 대항-장치는 항상 일시적이다.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되는 순간은 뒤샹의 시도에서일 뿐, 그 뒤 그것의 잠재성은 박물관에 포획된다. 그가 드는 예는 여전히 묵시록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하지만,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이리저리 굴리며 새로운 사용법을 발명할 수 있는 방식들을 발명하는 일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된다. 

 

 

④ 알랭 바디우 (2007-09-22)

해체주의 시대에 보편적 ‘진리’ 가능성 제시해  / 홍기숙 강사(숭실대ㆍ철학과)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1937년 모로코 태생으로, 파리 8대학과 파리사범고등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진리’와 ‘체계’의 붕괴로, 혹은 니체의 영향 이후 반(反)플라톤주의적 경향의 지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유는 그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 혹은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1988)에서 수학의 집합론에 근거를 둔 ‘순수다수(le multiple pur)’로서의 ‘존재(l'etre)’를 말한다. 사실상 ‘수학’을 통해 ‘존재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수학의 역사’를 ‘존재 물음의 역사’와 동일시하면서 존재론을 펼치고 있는 바디우의 사유는 철학 내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디우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연장되거나 구별되는 지점으로서 ‘진리’의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가 프랑스 68년 혁명을 경험한 세대이며, 특히 마오주의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재와 사건』 후반부에서 바디우는 ‘순수다수’인 ‘자연적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성을 특징으로 갖는 ‘일자를 넘어서는 것(l'ultra-Un)’으로서의 ‘사건적 진리’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는 ‘진리’를 주장하기를 꺼려하는 이 시대에 비록 지엽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서 ‘진리’를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진리’, 즉 유한함에 대립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성으로서의 ‘진리’가 이제는 바디우에 의해 국지적이며 복수적인 이름으로서의 ‘진리’로 다르게 그려진다. 이러한 바디우의 ‘진리’에 대한 일종의 당위적 책임감은, 이어서 ‘윤리’의 문제나 ‘주체’의 문제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었지만 비로소 개념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진리’나 ‘윤리’에 맞서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사건적 진리’,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e)’으로서의 ‘윤리’, ‘주체’란 무엇인가? 옳음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지엽적이고 한시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가? 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자신의 철학적 물음의 기본 출발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maintenant)’과 ‘여기(ici)’를 중시하는 실천적 철학자 바디우에게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든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과 ‘차이’만이 강조되는 현 상황에서, 바디우는 ‘진리’와 진리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서의 ‘사건적 주체’를 주장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있음(존재일반)의 이름인 다름(차이)’이 아니라, 무엇인가 특별한 사건적 진리에 충실해 우리의 삶을 예기치 못하는 특별함으로 바뀌게 하는 ‘같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음’은 다름과 구별되며, 유일하게 ‘다름’에 무관심하며, 무엇인가에 충실하게 하는 ‘주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게 하는 ‘진리의 이름’인 것이다. 우리에게 ‘다름’이나 ‘차이’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의 모습이지, ‘같음’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추구해야 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사건적 진리’에 대한 사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가 팽배해 있는 현 시대에, 다시 말하자면 ‘진리’나 ‘주체’를 더 이상 주장하려하지 않는 현시대에, 그럼에도 소위 변화된 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출하며 개입하고 있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서 ‘진리’와의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서의 ‘주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연’의 이름 하에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사건’에 충실할 때, 그 우연적 사건은 주체를 진리과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의 ‘주체(sujet)’란 ‘주체화의 과정(subjectivation)’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진리를 수반하는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가 복수인 것처럼 주체 또한 ‘복수’의 형태로 생성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진리’나 ‘윤리’, ‘주체’도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의 완전한 출현으로 나타난다. 

그간 강한 정치적 저항의식을 가져왔던 우리의 역사적인 특수함을 고려해 볼 때, 또 그 반대급부로서 항시적인 안정추구를 위해 여러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작용돼 왔던 지난 시절 지배질서의 담론과 그 역학관계를 확인해볼 때,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는 우리사회의 도덕담론이나 지배담론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해체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의 대안이 아닌 변화와 미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있음’의 이름이 ‘차이’와 ‘다양’이라는 그의 사유는 서양 고전적 철학의 맥을 잇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등’에 대한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동시에, 비록 한시적이고 지엽적일지라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동의 힘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⑤ 가라타니 고진 (2007-10-06)

‘이동’으로서의 비평  / 조영일(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평가로서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또는 사상가)로서의 얼굴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를 비평가로 여기는 사람은 소수인 것 같다. 물론 얼마 전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제출해 한국문단을 한동안 긴장시킨 바 있지만, 그런 주장은 도리어 그가 문학을 완전히 떠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와 같은 판단에는 『트랜스크리틱』이나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사상서들이 그의 주저로 간주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사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에서의 문학비평을 거의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철학이나 사회사상 쪽으로 관심대상을 넓혀왔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정작 가라타니 자신은 비평가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철학자이기보다 비평가이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개념을 좇기보다 문제를 좇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철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는 완전히 이질적인 두 상황이 각각 존재했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전자의 시대였기에 후자의 시대가 가능했다는 의미다. 지난 세기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그런데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사가 개념창조의 역사라고 한다면, 철학이란 서로 다른 개념들 간에 이뤄지는 힘겨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개념들은 어떻게 생성되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 바로 개념들의 배치에 의해서다. 즉 ‘이항대립’을 통해 구축되기 마련인 개념들은 어느 쪽을 더 우위에 놓느냐에 따라 이전 개념군이 파괴되고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개념군이 자리잡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르는 철학에는 무의미한 형식적인 전복운동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철학과 달리 개념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어진 문제들에 집착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개념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회피한다. 그러므로 비평의 관심은 항상 개념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를 향한다. 다른 말로 비평을 한다는 것은 개념을 낳는 문제(조건)들과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오로지 이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라타니가 비평을 ‘대립’이 아니라 ‘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비평은 이를 통해 ‘개념의 노동’(헤겔)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소개돼 왔다. 그러나 동시대 사상가 중에 가라타니만큼 널리 읽힌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의 책을 그토록 탐독해온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라타니의 책은 여느 철학서보다 쉽기 때문이다. 단순히 비슷한 한자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에게는 중심개념이라고 할 만한, 다시 말해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할 개념(핵심용어)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대신에 기존 개념들의 의미를 조금씩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논의를 펼쳐가기에, 딱히 철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약간의 수고만 들인다면 그 흐름을 쫓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이들이 철학의 대중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혹 대중적으로 성공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지적 임팩트가 제거된 요약본을 내놓는 데 그쳤다. 그러므로 가라타니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대중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서들이 마냥 쉽게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아니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소화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의 전환이나, 생산자 투쟁에서 소비자 투쟁으로의 이행,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리로 이야기하는 ‘제비뽑기’, 점진적으로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룩해가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세계공화국’과 같은 것들은 개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같이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이동’시킨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가라타니 철학’이라는 실체와 접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가라타니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라타니를 읽은 후 이제 더 이상 이전 같이 사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비평의 철학이란 바로 이처럼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세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사상가는 가라타니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까닭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한국 비평과 한국 철학의 빈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⑥ 페터 슬로터다이크 (2007-10-13)

‘새로운 인간’ 향해 계몽을 계몽하자  / 김석수 교수(경북대ㆍ철학과)  
 
현대 인문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산 생명을 복제하는 유전공학이 출현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새롭게 구축되는 이 제국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다. 이런 현실의 도래는 이미 전통적 인문학이 표방해온 휴머니즘에 위기를 안겨다 줬으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찾도록 다그치고 있다.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의 중심부에, 기존의 휴머니즘의 종언을 고하고, 견유주의(犬儒主義)와 유전공학의 결합으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창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1999년 7월 16일 바이에른 엘마우 성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해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럽 지성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그 동안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해 온 기존의 휴머니즘적 인간관이 인간의 야생성을 길들이면서 은폐하고 있음을, 게다가 자기행복에 매몰되거나 냉소주의에 몰입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의 공범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과 문자에 기초해 인간성을 동물성과 구분해왔던 기존의 시도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공산주의, 민족주의, 아메리카니즘도 모두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유하는 동물’이 ‘사유하는 인간’으로 전환됨으로써 인간 그 스스로가 문화라는 우리에 갇혀 가축화되고, 그래서 식물처럼 생각하지만 육식동물처럼 살고, 착한 목자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나쁜 가축 떼처럼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화에 저항하지 못하는 ‘낡은 인간’에 얽매여 ‘작은 사육자’로 살아가는 차원을 넘어, 이것을 깨뜨리고 위대한 정치, 위대한 예술, 위대한 사상을 감행해 ‘새로운 인간(위버멘쉬)’을 향해 나아가는 ‘큰 사육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의 이 ‘큰 사육자’의 길은, 하버마스를 비롯한 독일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듯이, 단순히 인간개종을 위해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감행하는 신종 나치스트의 길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근접성을 주장한 저 고대의 견유주의와 오늘날 유전공학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서로 보호되는 길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가 이와 같은 길을 택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인간을, 자연이라는 실험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거쳐 온 진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기존의 휴머니즘적 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된 휴머니스트들처럼 유전공학의 도래로 새롭게 시작된 삶의 놀이를 냉소적으로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해방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인가라는 대원칙 아래서, 그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괴물이 되고 잡종의 형태가 될 위험은 유전공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아적인 사유방식에 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의 이 주장은 당시에 싹튼 것이 아니라, 그의 핵심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냉소적 이성 비판』(1983)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냉소주의 역시 계몽에 지친 무력한 인간의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현대의 기술문명이 우리의 환경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이 문명에 계속 동참하고 있듯이, 계몽 속에서 더불어 자라난 냉소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더 많은 압박과 고통에 더 잘 순응하도록 이끈다. 계몽은 이 허위의식을 제거하기보다는 이를 대중적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며, 마침내 스스로를 배반하고 비합리성으로 추락한다. 그는 이런 추락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주관이성과 객관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이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공존하는 ‘혼성적 실재’를 추구하며, 인간-동물-식물-기계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성’을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한다.  

그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유럽의 도가주의』(1989)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입장은 여러 다양한 글들에서,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시대의 거대한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있다. 그는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몸의 지혜’로 거대한 지배체제와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역사시대’를 종식하고, ‘지역’들이 존중받으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진정한 다원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마지막 인간’을 넘어, 역사 이후의 ‘새로운 인간(post-human)’을 유전공학과 견유주의의 연대를 통해 재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연대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지식인들도 이제 그가 제시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전망을 고뇌하지 않고 더 이상 미래의 인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석수 교수(경북대ㆍ철학과))

 

 

⑦ 안토니오 네그리 /‘제국’에 대항하는 대중,‘제국’을 넘어서는 대중 

윤수종 교수 (전북대 사회학과)  2007년 11월 03일 (토) 20:08:59 대학신문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는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autonomia)1)운동 및 이론의 흐름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탈리아의 특수성 속에서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다음 세기를 향한 진전방향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푸코 등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타리와는 공저를 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프랑스로 망명해 가타리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파리 8대학 정치학 교수로 활동했고, 『전미래(Futur Anterieur)』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확산시켰다. 1997년 중반에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투옥됐다. 최근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글도 쓰고 있다. 2000년과 2004년에는 각각 마이클 하트와 『제국(Empire)』과 『대중(Multitude)』2)이란 책을 써서 사회과학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먼저 『제국』은 미시논리에 함몰되고 파편화돼 있는 사유들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사유의 거시적 종합화를 시도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로부터 『구성권력』으로 이어지는 네그리의 사유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 세계가 휩쓸려 가고 있는 대변동(세계화)에 대해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 그리고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에 근거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현대사의 주요한 이행을 해방의 도래로서, 그리고 혼성적이고 노마드적인 정치의 기회로 파악한다. 20세기의 이른바 고전적인 제국주의들과 구별해 이 새로운 초민족적ㆍ세계적ㆍ총체적 배치를 ‘제국’이라고 부른다. 제국은 미국적인 것이 아니고 유럽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며 전지구적인 것이다. 네그리는 국민국가에 기반한 근대적 주권이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인 주권으로 변형돼 간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이행에서 탈근대화의 생산적인 내용으로서의 생산의 정보화에 주목한다. 더욱이 네그리는 생산을 객관적인 경제적 영역의 생산으로 좁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네그리의 사고의 밑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이 대중의 저항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푸코,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받아들여 생체 정치적인 생산으로의 이행을, 차이를 용인하면서 통합을 해나가려는 제국적인 권력의 새로운 (네트워크) 양상을, 그리고 기존의 훈육사회에서 통제(관리)사회로의 이행(*)을 강조한다.

『제국』이 지배에 대해 분석했다면 『대중』은 그 부제 ‘제국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중에도 대중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 방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그의 대중 개념은 군중, 인민, 일반적인 ‘대중’, 국민 개념과 대비되며, 상이한 문화, 인종, 인종성, 젠더, 성적 지향, 노동형태,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등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뤄져 있어 통일적인 혹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이 배제적인 개념인 데 반해 그의 대중 개념은 포괄적인 개념으로, 즉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특히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주민층인 빈민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대중은 서구에서는 68혁명 이후에, 한국에서는 1987년 노동자ㆍ농민 대투쟁 이후 다양한 욕망을 담지한 채 나타났다. 노동자계급의 내적인 분화와 다양화 속에서 대중의 노동형상은 다양화되고 더욱 더 비물질적 노동의 특성을 띠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체로서의 대중의 등장과 함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 방향이 변하고 있다고 네그리는 설명한다. 1960년대에 나타난 게릴라 투쟁모델은 집중적 투쟁모델의 단말마를 보여주며 네트워크 투쟁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자율운동에서 나타난 네트워크 투쟁은 그 이후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널리 확산되며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절정에 달한다. 또한 네트워크 투쟁으로의 변화과정 속에서 대중의 욕망투쟁과 주체성 생산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이해투쟁과 대비되는 욕망투쟁의 전개 속에서 대중은 자본이 부과한 자본주의적 주체성 생산에 대항해 각종 시설들 속에서 다양한 일상적 파업을 통해 자본의 훈육을 거부하면서 색다른 주체성 생산(특이화)을 시도한다고 한다.

네그리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쟁점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존의 좌파 운동에 대해 비판점을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의 이러한 입장은 당 형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네트워크 형식의 운동을 강조하고 대안세계화운동, 다양한 소수자운동, 대안운동을 비롯한 자율운동의 활성화에 희망을 걸고 있다.

편집자 주
1) 자율주의. 이탈리아 비의회 좌파운동의 커다란 흐름이자 동시에 기존 좌파(공산당)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노동자운동에서 나타난 ‘노동거부’를 통해 공산주의적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사회주의 사회와 대립한다.
2) 흔히 ‘다중’으로 옮기나 필자는 ‘대중’으로 옮겼으므로 이를 따른다.

필자 윤수종 교수 / 전남대ㆍ사회학과 /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농업생산에서의 노동조직의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자유의 공간을 찾아서』, 역서로 『제국』 등이 있다.

(* 독자주) Cf. 푸코의 <감시와처벌>의 사회에서 [<...des vivant>(79-80), <...de soi et ...>(1982-84)] 으로의 이행. 

 


⑧ 비토리오 회슬레 / 포스트모던에 맞서 이성적 사유의 복권을 꾀하다  
나종석 강사 (연세대ㆍ철학과) 2007년 11월 10일 (토) 22:47:54 대학신문

 
비토리오 회슬레(Vittorio Hosle)는 1960년에 태어난 젊은 철학자이지만,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리는 플라톤 및 헤겔 철학의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대표적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헤겔의 체계』, 『도덕과 정치』,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 그리고 『철학적 대화』 등을 비롯해 형이상학, 실천철학, 자연철학 그리고 철학사 등에 관련한 무수히 많은 저서와 논문들을 통해 현대 인류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의 근원을 성찰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성을 통해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회슬레는 이성의 억압성과 폭력성에 주목하는 포스트모던적 사상의 흐름과는 근본적으로 관점을 달리한다. 그는 니체, 하이데거 등 독일 철학자들이나 이들에게 큰 영향을 받은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 등과 같은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들이 내세우는 이성에 대한 총체적 비판의 토대가 튼튼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는 몇 가지 예외적 흐름을 제외한다면 현대의 다양한 철학적 사조들은 ‘이성과 도덕적인 가치 및 의무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고 파괴하는 경향 확산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흐름들이 지속되면 인간의 비판적 정신이 완전히 마비되고, 시대가 제기하는 도전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파괴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따라서 그는 총체적 이성 비판에 대해 강력히 반론을 펼치면서, 이성과 객관적 진리의 추구라는 전통적 서구 철학의 담론을 이어받고 있다.

회슬레의 철학은 민주주의, 환경위기, 시장 경제, 종교 등 21세기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과제들에 대해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가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의 민주적 합의보다 객관적 진리를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이 다양한 견해들을 억압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철학과 민주주의의 독자성을 오해하는 데서 생긴 것이다. 회슬레가 보기에 철학과 민주주의는 서로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 비판적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 철학은 민주주의적 결정의 정당성을 되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건전한 민주주의와 더불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다수가 어떤 규칙에 동의했다고 해서 그것을 정의롭다고 보는 여론 독재로 흐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이들 사이의 토론을 통해 더욱 건전하고 옳은 결정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견지하는 민주주의를 철학적 사유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슬레는 21세기가 생태적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환경위기를 초래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여타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심층생태주의적인 사고도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는 인간만이 내적 가치를 갖고 있고 다른 생명체는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한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이와는 달리 심층생태주의는 인간뿐 아니라 여러 생명체들 또한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이 관점은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적절하게 해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자연적 존재들이 동등하게 가치가 있다면,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층생태주의는 자연과 생명의 위대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왜 지구에 인류가 존재해야 하며, 왜 우리는 미래 세대뿐 아니라 여타 생명체를 존중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회슬레는 세계화가 가져오는 여러 부작용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보편주의자인 그는 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세계화가 초래하는 부와 빈곤의 양극화 및 환경파괴의 심화 현상을 크게 염려한다. 따라서 시장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완결적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국가의 개입을 금하는 것은 허구적이라는 점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가치관을 전제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시장경제를 정의의 관점에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회슬레는 이성의 과잉이 아니라 정의와 도덕의 보편적 원칙에 대한 사유를 추구하는 이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현대 사회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면서, 현대의 위기를 극복할 이성적 사유의 복권을 역설한다. 이성의 본질을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만 보고 이와 전면적 결별을 선언하는 포스트모던적 사유는 급진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도구적 합리성과 동일시하는 이성에 대한 편견의 표현이 아닌가? 또한 편협한 시야에서 이성에 접근하고 그것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우리들에게서 건전한 비판적 사유의 싹 자체를 앗아가 우리를 현존 질서에 순응케 할 독버섯은 아닌가?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토론하고 논증하고 반박하는 이성적 사유와의 작별이 우리가 취해야 할 사유의 길인가? 회슬레의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나종석 강사 (연세대ㆍ철학과)/ 독일 에센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차이와 연대』, 역서로 『비토리오 회슬레, 21세기의 객관적 관념론』이 있다.

(* 독자주) Cf. Habermas, (1962, 학위논문) [부르조아계급의 소위 '여론' 형성의 주도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점을 살리기위해, 불어로는 상징적이게도 <공적공간, L'espace public>이라는 제목으로 78년에 번역되었다]. 


 
⑨ 장­뤽 낭시 / 무위(無爲)의 공동체 
박준상 / 2007년 11월 17일 (토) 21:47:10 대학신문
 
 
장-뤽 낭시(Jean-Luc Nancy, 1940~)는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80년대 말 과도한 심장 이상 수축으로 심장 이식수술을 받게 되면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거쳤으나 지금까지도 계속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낭시는 개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동료 필립 라쿠-라바르트(라쿠-라바르트 역시 반드시 주목해봐야 할 사상가인데, 안타깝게도 최근 타계했다)와 함께 초기 독일낭만주의(슐레겔 형제, 노발리스)의 기관지 『아테네움』에 실렸던 중요한 논문들을 편역한 책 『문학적 절대』를 내놓음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 독일낭만주의와 더불어 하이데거, 셸링, 칸트, 니체와 같은 사상가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사유의 출발점을 마련했으며, 근대 정치 철학과 여러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을 검토함으로써 매우 독창적이고 특이한 정치 철학을 구축해냈다. 우리는 현재 아쉽게도 다만 그 정치 철학의 단면을 모리스 블랑쇼와의 논쟁 결과물인 『마주한 공동체』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2005). 그러나 정확히 하자면 블랑쇼가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보여준 공동체에 대한 사유의 원류에는 낭시가 있다.

낭시는 동구권의 몰락과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패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알랭 바디우가 그에게 ‘최후의 공산주의자’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낭시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공동 존재와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취소될 수 없다고 본다. 낭시의 정치 철학의 독창성은 공동체가 어떠한 종류의 사회(국가를 비롯해서 크든 작든 모든 동일성의 집단)와도 일치될 수 없다는 주장 가운데에서 발견된다.

플라톤에서부터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주 이상적(理想的) 공동체는 구축해야 할 사회로서 추구됐다. 낭시가 반대하는 것은 ‘공동체’를 ‘사회’와 일치시키려는 이상주의적ㆍ전체주의적 시도이고, 그가 우리의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 내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 또는 사회 내에서 고착되지 않는 ‘관계’ 자체다. 그 ‘관계’는 단순히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진정한 조건이자 근거인 우리의 ‘자연적인’ 평등의 장소이며 소통의 장소다. 낭시는 그 장소를 ‘무위(無爲, desœuvrement)’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는 그 무위의 장소가 결코 어떤 구도, 목적, 기획, 프로그램에 따라 규정되거나 고정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는 정치적 투쟁이나 제도에 대한 개혁의 시도나 기존 사회 구조에 대한 변혁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윤리적, 총체적, 사회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개념적, 관념적 구도에도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시의 메시지는 사회가 동일성의 가치 기준에 따라 스스로 구조화되고 폐쇄적으로 될 때, 즉 사회 바깥에서의 지정될 수 없는 무위와의 관계를 망각할 때, 필연적으로 파탄의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무위의 관계가, 즉 궁극적으로 어떠한 존재 이유도 존재 목적도 어떠한 명확한 동일성의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유토피아적(또는 불가능한) 장소가 모든 사회의 중심에, 즉 현실의 모든 정치적ㆍ경제적ㆍ 이념적 관계의 중심에 보이지 않게(또는 블랑쇼의 표현을 따르면, “밝힐 수 없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낭시는 현재 프랑스에서 알랭 바디우, 앙리 말디네, 자크 랑시에르, 필립 라쿠-라바르트 등과 함께 가장 부각된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낭시의 가까운 동반자였던 자크 데리다는 2000년 『접촉, 장-뤽 낭시』를 출간해 이 점을 확인시켰다(낭시는―라쿠-라바르트도 마찬가지이지만―한국에서 흔히 데리다의 제자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해다. 낭시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소통ㆍ공동ㆍ접촉 등의 정치적 주제들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전개해 나갔다).

중요 저서로는, 바타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의 지배 바깥의 공동체, 조직ㆍ기관ㆍ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 『무위의 공동체』, 실존이 어떻게 타인과 함께 하는  공(共)실존인가를 밝힌 『복수적 단수의 존재』, 개념ㆍ명제 너머의 의미, 개념ㆍ명제의 성립조건으로서의 의미, ‘의미의 의미’에 대한 정식화인 『세계의 의미』, 현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한 『사유의 무게』 등이 있다. 그의 저서들이 널리 번역되면서 그의 사상도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최근 것들까지 포함해서 그의 저서들은 거의 영역되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저들 가운데 하나인 『무위의 공동체』(박준상 옮김)가 출간됐고 이안 제임스가 쓴 연구서 『장-뤽 낭시 철학 입문』(민승기 옮김)이 번역 중에 있으니 다행이다.

박준상 강사 / 전남대ㆍ철학과 / 프랑스 파리 8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바깥에서』, 역서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가 있다.

 

 

⑩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  
진태원 / 2007년 11월 24일 (토) 22:44:46 대학신문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불화』(199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같은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뿐 아니라,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선생』(1987)에서부터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을 비롯해 문학, 영화 및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 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지만, 그의 저술 전체는 단일한 주제, 곧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문구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평등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간에, 철학자 또는 사상가치고 평등에 관해 한두 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랑시에르가 옹호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 심지어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그것은 원리로서, 공리(axiom)로서의 평등이다. 곧 평등은 달성해야 할 (또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나 과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평등 원리의 옹호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또한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실제로 평등할까? 가령 지적 능력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천재와 바보, 수재와 둔재, 세계적인 석학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 괴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놀랍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차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알지 못하는 선생』은 19세기 네덜란드로 이주한 장 조제프 자코토(Jean-Joseph Jacotot)라는 프랑스 교사의 경험을 들려준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어 선생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불어-네덜란드어 대역본 책 한 권을 교사의 가르침 없이 그들 스스로 읽으면서 불어로 말하고 글을 써나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교훈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교육이란 지식을 소유한 스승이 무지한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육은 학생들(또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일반)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연마해가는 과정이지, 지적으로 우월한 누군가가 지적으로 열등한 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는 곧 지식의 위계, 지적 능력의 격차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행위 자체는 항상 이미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평등의 원리는 정치에 관해,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랑시에르는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증의 역사라고 간주한다. 왜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정치일까? 또는 적어도 최악의 정치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통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피통치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공리가 깔려 있다. 통치에 특별한 자격을 가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첨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제도이며 선거는 본질상 귀족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된다. 과연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더욱이 현대 사회의 대중은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평등한 소비 주체들일 뿐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등만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랑시에르의 주장은 황당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이 통치하거나 사회적인 몫의 분배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빈민들의 반란이나 파리 코뮌, 68 운동 등은 그에 대한 증거들이다. 따라서 이는 적어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사건의 분출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번득임이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좀 더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늘 예외적인 사건, 봉기로만 존재하는가? 지속적인 제도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평등의 원리를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구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대중이 스스로 행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진태원 강사 서울대ㆍ철학과 /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서양근대철학』, 역서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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